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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봄은 참 수선스럽게 옵니다. 해 비치다가 비 오다가 설핏 눈도 내리고 다시 해 비치길 여러 날 했습니다. 날씨가 그러니 마음도 덩달아 어수선합니다. 이럴 때 따뜻한 보리차 한 모금 목으로 넘기면, 그 기운이 온몸으로 퍼지면서 편안해집니다. 오늘 소개할 책이 전하는 기분이 그렇습니다. 어수선한 머리를 따뜻하고 편안하게 합니다. 아빠와 딸의 이야기입니다. 아빠는 사고로 머리를 다쳐 시력을 잃었습니다. 눈으로 세상을 볼 수 없지만, 아빠는 눈을 제외한 모든 감각으로 세상을 만납니다. 학교 급식 냄새를 맡고 딸이 돌아온 줄 알고, 공기가 무거워지는 감각으로 비가 올 걸 알아냅니다. 어쩌면 우리가 눈을 뜨고 있어서 눈에만 의지하기 때문에 이런 감각들 전부를 놓치고 있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딸은 아빠 옆에서 눈을 감아 봅니다. 여러 가지 소리가 들립니다. 비가 내리고 자동차가 지나갑니다. 눈을 더 꾹 감았습니다. 새가 날아가는 소리가 들립니다. 새가 비를 피해 날아가는 게 눈을 감고 있는 아이의 눈에도 보입니다. 아빠가 느끼는 세상을 아이도 자연스레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이 책엔 그리 거창한 이야기는 없습니다. 책을 펼치면 왼쪽에는 글이 있고 오른쪽에는 그림이 있습니다. 그림책인가? 하는 의심이 들 정도입니다. 페이지마다 글자 수도 그리 많지 않습니다. 하지만 여러 번 읽을수록 더 천천히 읽게 됩니다. 설명하지 않는 짧은 문장을 통해 아빠가 느끼는 세계가 조금씩 느껴져서입니다. 책의 뒤표지에 보면, 이 책을 초등 저학년 정도에 권하고 있지만, 그보다 큰 아이들이 천천히 생각하며 읽기를 권하고 싶은 책입니다. 글씨가 적다고 해서 저학년 책은 아닙니다. 빨리 읽는다고 해서 잘 읽는 것은 아닙니다. 이 책은 따뜻한 보리차 한 모금 삼키듯, 천천히 서두르지 말고 읽어야 잘 보이는 책입니다. 다 읽고 나면, 조용히 눈을 감고 눈이 아닌 감각으로 주변을 보는 시간을 가져보길 권합니다. 비 그치고 무지개 뜨는 소리, 들을 수 있을까요?김혜원 어린이도서평론가}

한반도의 상황이 폭발 직전의 활화산 같은 모양새다. 국제 사회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2월 12일 3차 핵실험을 강행했고, 정해진 순서대로 유엔의 대북 제재 결의에 강력히 반발하며 다각도로 군사적 위기를 조장하고 있다.신문과 TV에서는 한계 수위로 치닫는 북한의 도발을 보도하면서도 핵무기를 사용한 전면전 발발 가능성은 높지 않다고 국민을 안심시키지만, 국방과 안보를 공부한 필자가 볼 때 지금 우리가 처한 상황은 아슬아슬하기 짝이 없다. 사실 사이버 테러와 생화학 무기로 대표되는 북한의 비대칭 전력은 재래식 병력을 출동시키지 않고도 얼마든지 우리의 일상 터전과 생명을 파괴할 수 있기 때문이다.이러한 상황에서 ‘경제학으로 보는 전쟁의 역사’라는 부제를 달고 나온 이 책은 매우 각별할 수밖에 없다. 흔히 우리가 ‘무생물적 산술과학’으로 오해하기 쉬운 경제학은 불확실하고 구체적이지 않은 상황에서 내리는 인간의 의사결정에 관한 학문이다. 예를 들면 단위면적당 가격이 저렴한 도시 근교의 전원주택에서 한가한 노년을 보낼까, 아니면 보안과 경비가 잘된 도심의 공동주택을 구입할까 등의 심리적이고 이성적인 결정 말이다.이러한 프레임으로 지난 천 년의 전쟁과 군사 지형을 다시 볼 경우 똑같은 역사적 사실이라도 그것을 해석하고 판단하는 결과는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가령 중세시대에 지어진 성곽들은 현대인의 눈에 턱없이 비효율적인 군사시설로 비치기 쉽다. 그러나 이 책의 분석틀에 따르면 왕의 전 재산을 투입하고도 모자라 약탈에 가까운 세금 징수를 통해 이뤄졌던 성채 건설은 ‘기회비용’ 측면에서 볼 때 탁월한 선택이었다. 총포의 화력도 형편없고 먼 거리를 빠르게 달릴 이동수단도 마땅치 않던 그 시대, 잘 지은 성채 하나는 상비군을 양성하고 들판에서 전투를 치르는 비용보다 훨씬 싸게 먹혔기 때문이다. 게다가 견고한 성채의 위용은 그 자체로 적의 도발 의지를 무력화하는 심리적 요새 역할도 했으니 그 부가 소득은 만만찮았을 것이다.1960년 2월 13일, 프랑스가 알제리 르간에서 60kt의 원자폭탄을 실험한 것을 ‘대체의 법칙’이라는 경제이론으로 분석한 대목도 눈여겨볼 만하다. 냉전의 두 주축인 미국과 소련의 핵 독점을 깨뜨린 이 사건을 두고 미국이 발칵 뒤집힌 것은 프랑스가 개발한 핵폭탄의 위력 때문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서방의 핵우산 역할을 자처하던 미국을 대놓고 불신했다는 것, 그리고 피차 전멸을 의미하는 핵무기의 특수성을 전략적으로 이용해 드골 정부가 정치 경제적 거래를 시도한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이후 상황이 참 복잡하게 얽혀들었지만, 프랑스는 이 작은 핵폭탄을 지렛대 삼아 미국으로부터 적잖은 이익을 챙겼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추락한 국가적 자긍심까지 회복했다. 그러니 현재의 북한처럼 궁지에 몰린 집단이 핵개발에 열을 올리는 것은 어쩌면 당연할 수도 있다.군사적 사건과 경제이론이 수시로 교차하는 이 두툼한 책을 한달음에 읽었지만 그중 섬뜩할 만큼 필자의 관심을 끈 것은 사이버 테러와 생화학 무기로 대표되는 21세기의 비대칭 전력, 그리고 사설 용병업체와 민간 보안업체의 경제적 작동 원리를 설명해 주는 마지막 장이다.인터넷과 생물학, 교통이 발달하면서 현대의 전쟁은 시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 게릴라식 전투로 급속히 옮아가고 있다. 사이버 테러는 9·11테러 이후 강화된 보안검색 속에서 활동반경이 줄어든 국제테러조직이 최소 비용으로 최대의 생산성을 올리기 위해 개발한 돌파구였다. 북한도 이미 오래전부터 사이버 해킹 인력과 생화학 무기를 개발하는 데 공들여 왔다.미국이 사설 용병업체나 보안업체 인력을 전쟁에 활발히 투입하는 것도 경제적 맥락에서 보면 선명하게 이해된다. 모병제로 전환한 이후 국가의 병력 유지 비용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이런 상황에서 비용도 훨씬 저렴하고 자국의 젊은이를 포화 속으로 밀어 넣는다는 도덕적 비난을 감수할 필요도 없는 민간 용병업체는 딱 좋은 대안이다.핵과 미사일뿐 아니라 각종 사이버 테러에 속수무책으로 노출돼 있으면서도 정작 21세기형 전쟁에 대한 정의조차 제대로 내리지 못하는 지금, 한국의 안보 담당자와 독자에게 일독을 권한다. 우리에게 절실한 군사적 통찰과 진실이 이 한 권에 담겨 있으니 말이다.김종하 한남대 국방전략대학원 원장}

일본에서 ‘반미(反美)’는 한국에서보다 더 심한 금기어였다. 일본 외무성에서 36년간 근무한 고위 관리이자 자위대 사관학교인 방위대 교수를 지낸 저자가 쓴 이 책은 그래서 큰 논란을 낳았다. 1945년 패전 후 현대 일본사를 미국에 대한 자주파와 친미파 간의 대립 구도로 조명했기 때문이다. “기대려면 큰 나무에 기대자!”고 주장한 요시다 시게루 총리, “일본 열도를 소련에 강력히 대항할 수 있는 ‘불침항모(不沈航母)’로 만들겠다”고 했던 나카소네 야스히로 총리, 이라크전쟁에 자위대를 파견했던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는 대표적인 대미 추종 그룹으로 재임기간도 길었다. 반면 패전 처리비 삭감(이시바시 단잔 총리), 소련과의 국교 회복(하토야마 이치로 총리), 중일 국교 정상화(다나카 가쿠에이 총리) 주장 같은 대미 자주 노선을 걸어 온 인사들은 공직에서 추방되거나 각종 스캔들로 정계를 은퇴해야 했다는 게 저자의 설명이다. 그는 “미국이 일본 내 자주파를 친미파로 바꾸는 시스템이 일본 사회에 뿌리 깊게 박혀 있다”고 주장한다. 그 대표적인 도구가 검찰과 언론이라는 것이다. 그는 “가령 미국 대통령이 일본 총리를 잘 만나주지 않고 주요 언론이 이를 문제 삼을 경우 그것만으로도 정권 유지는 어렵다”고 말한다. 저자는 동북아시아 영토분쟁의 배경에도 미국이라는 강대국의 ‘분할과 통치(divide and rule)’라는 전략적 계산이 깔려 있다고 분석한다. 점령국이 철수할 때 식민지 국가가 단결하는 것을 막기 위해 분쟁의 여지를 남겨두곤 했는데, 일본이 러시아 중국 한국과 영토분쟁을 겪고 있는 원인도 미국의 의도적 조작이 큰 몫을 차지하고 있다는 가설이다. 전직 외교관이 수많은 외교문서와 자료를 토대로 썼다고 하지만 책은 다분히 음모론적이다. 실제 아사히신문은 ‘전형적인 음모사관’이란 서평을 싣기도 했다. 대미 외교에서 일본의 국익을 주장하면서도 정작 주변국의 국익을 배려하는 시각을 갖추지 못한 것도 아쉽다. 그런데 이 책에는 흥미로운 대목이 있다. 일본이 태평양전쟁 패전 후에도 위안부를 모집했다는 사실이다. 패망 후 3일째 되던 날인 1945년 8월 18일 일본 내무성 하시모토 경비국장은 각 지방 지사에 점령군(미군)을 위한 위안부를 모집하라는 지령을 내렸다. 8월 27일 오모리에서 문을 연 위안부 시설에는 1360명의 위안부가 모였다. 저자는 “역사상 패전국은 많다. 점령군을 위한 위안부가 거리에 출몰한 경우도 많다. 그런데 치안 총책임자인 내무성 경비국장, 혹은 나중에 총리까지 된 국가의 핵심인물이 솔선해서 점령군을 위한 위안시설을 만든 나라가 과연 있을까”라고 묻는다. 일본 정부가 종전 후에도 국가 차원에서 위안소를 만들었는데, 전시에 운영했던 위안부가 ‘민간 매춘업’이었다는 주장이 얼마나 허황된 거짓말인지 다시금 깨닫게 해준다.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공포가 일상화된 사회에서는 웬만한 겁주기로 통하지 않는다. 어린 학생부터 노인까지 장사꾼들의 ‘공포 마케팅’에 시달린다. “수학 올인반, 죽을 때까지 시킵니다. 집에서는 잠만 재우십시오.”(학원 광고) “은퇴 후 최소 20억 원이 필요합니다.”(금융회사 직원) 영국 켄트대 사회학과 교수 프랭크 푸레디가 쓴 ‘공포정치’(이학사)는 현대사회가 어떻게 공포를 정치화하는지를 설명한다. 이제 ‘공포정치’는 더이상 프랑스 대혁명 당시의 단두대 정치를 펼쳤던 로베스피에르나, 히틀러 스탈린과 같은 독재자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좌파나 시민단체도 불안한 미래에 대한 극단적 시나리오를 통해 겁을 주는 방식으로 자신의 메시지를 설파하려 한다. 지구온난화, 원전 공포, 석유 고갈, 먹거리 오염, 테러와의 전쟁, 통일비용, 연금 고갈, 금융시장 붕괴까지…. 21세기의 삶은 곳곳이 지뢰밭이다. 핵실험, 미사일 발사, 개성공단 폐쇄 등 연일 계속되는 북한의 도발도 전 세계를 향한 ‘공포 마케팅’이다. 부시-이명박 정권 이후로 존재감을 철저히 무시당해 온 북한이 제발 나를 ‘장기판의 졸(卒)’로 보지 말라는 몸부림이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전쟁 위협 와중에도 철저히 실리를 챙겼는데, 아들 김정은은 예측 불가능한 인물이라 불안감을 더해준다. 그런데 요즘 한국인들은 조용하다. 주말이면 여느 때처럼 고속도로가 꽃구경 인파로 가득 찬다. 일각에서는 우리 사회의 안보불감증이나 비현실적 낙관주의를 비판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그러나 내 생각엔 안보불감증보다는 ‘공포의 면역화’ 현상이 아닐까 싶다. 북한의 ‘불바다’ 발언도 수없이 반복돼 온 데다 이미 다른 공포에도 충분히 시달려 왔기 때문이다. 글로벌 시대에 어느 나라인들 안전할까. 지구 반대편 작은 국가의 재정위기로 하루아침에 내가 직장에서 잘릴 수 있다는 공포가 상존하는 세상이다. 대지진과 쓰나미를 겪은 일본 후쿠시마 원전 주변 25km 지역에서 가족과 함께 2년간 살아 온 한 남성은 ‘원전의 재앙 속에서 살다’(돌베개)란 책에서 “지구상에 더이상 안전한 곳은 없다”며 대피하지 않은 이유를 설명했다. 우리의 뇌는 상존하는 위험이지만 피할 수 없을 경우에는 ‘의도적 눈감기’를 한다. 늘 공포를 안고 살아갈 수는 없기에 생존을 위해 뇌가 선택하는 착각 본능이다. 전쟁위협 속에 생필품 사재기나, 주식시장 패닉 현상은 북한의 공포 장사꾼이 원하는 바일 것이다. 요즘 한국인들이 침착한 이유는 각종 ‘공포 마케팅’의 허와 실을 꿰뚫어보기 시작한 한층 똑똑해진 대중 지성의 발현이라고 믿고 싶다. 전승훈 문화부 차장 raphy@donga.com}

“서호주 사막에서는 밤이 갑자기 엄습해요. 해가 질 무렵 혼자서 급히 컵라면을 먹고 있었는데, 갑자기 옆구리가 이상했어요. 가만 보니 은하수가 제 곁에 내려와 있는 겁니다. 그 느낌은 정말 충격이었습니다.” 2년 전 여름 호주 사막으로 과학탐사를 떠났던 박문호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 책임연구원은 “황량한 사막 위로 쏟아지는 별빛 아래 섰을 때 비로소 우주 행성 시스템에 속해 있는 우주인임을 절감하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매년 여름 서호주 사막, 몽골 초원, 미국 네바다 주 사막 등지로 학술탐사를 떠난다. 40, 50대 직장인, 주부, 대학생을 포함한 약 25명의 탐사대원이 동행한다. 과학문화운동단체 ‘박문호의 자연과학세상(박자세)’ 회원들이다. 5년 전부터 박 박사가 매주 진행하는 ‘137억 년 우주의 진화’와 ‘뇌과학’ 강의를 들은 이들의 모임으로 회원 수는 약 2000명이다. 강의는 상대성이론, 양자역학, 천문학, 우주팽창이론, 대륙이동설, 진화론, 뇌과학까지 광범위한 과학이론을 망라한다. 탐사를 다녀온 뒤엔 대원들이 공동으로 1년간 작업 끝에 연구 결과를 책으로 펴낸다. 지난해 ‘서호주’(엑셈)에 이어 최근에는 ‘몽골’(엑셈) 편을 엮어 냈다. “탐사를 다녀온 회원들이 스스로 과학 전문가가 되는 기회를 만들어주고 싶었어요. 실크로드, 아프리카, 남미까지 지구 진화와 인류의 이동 경로를 탐사한 학술서적을 20권 정도 출간할 계획입니다.” 박 박사가 이끄는 해외 탐사에는 전문가가 동행하지 않는다. 그 대신 탐사대원 전원이 전문가가 되기 위해 공부한다. “탐사 전엔 국내 지질박물관을 방문해요. 일반 주부라도 암석의 종류를 모두 알 수 있을 정도로 암석학을 외우고 공부합니다. 탐사 기간엔 일절 술을 마시지 못해요. 하루 종일 탐사하고 밤에는 텐트 속에서 파워포인트를 활용해 졸면서 공부를 해요.” 몽골을 탐사할 때 회원들은 700쪽이 넘는 연구 자료를 만들었다. 공항 로비는 물론이고 고비 사막까지 7∼8시간 버스를 타고 가면서도 몽골의 역사, 종교, 지질, 천문학 강의를 진행했다. “아무것도 없는 사막을 찾는 이유는 지구 행성의 초기 모습을 탐구하기 위한 것입니다. 문명으로 오염되기 전 원초적 자연을 만나는 것이죠. 과학적 지식으로 무장하지 않으면 자칫 영적인 차원으로 빠질 수가 있어요. 이를 막기 위해 대학교재로 사용되는 검증된 교과서만 가지고 공부합니다. 일상적인 대화도 금지하고요.” 박 박사는 경북대 전자공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텍사스대에서 전자공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연구공간 수유+너머, 삼성경제연구원, 서울대, KAIST, 불교TV 등에서 우주와 자연, 뇌를 주제로 강의했으며, 베스트셀러인 ‘뇌, 생각의 출현’(휴머니스트)을 썼다. 최근엔 5년간의 뇌과학 강의록과 도판을 정리해 ‘그림으로 읽는 뇌과학의 모든 것’(휴머니스트)을 펴냈다. 그는 “자연과학 강의는 백 마디 철학적, 인문학적 해석보다 수학을 이용하는 것이 지름길”이라고 강조한다. 일반상대성이론 강의에는 미적분 기호가 무수히 등장하는데 그는 모든 수식을 칠판에 써가면서 강의하고 회원들에게는 모두 암기하도록 요구한다. “마라톤 풀코스를 완주해 본 사람이 국내에만 10만 명쯤 될 겁니다. 그런데 과학을 공부하는 인구는 왜 마라톤 인구보다 적을까요. 마라톤 풀코스가 42.195km가 아니고 10km였다면 이렇게 많은 사람이 도전하지 않았을 겁니다. ‘쉽게 쓰는 과학’ ‘실용적인 과학’만으로는 과학이 대중화될 수 없어요. 대중의 과학운동을 노벨상 수준으로 높일 때 과학 공부에 미치는 사람들도 생겨날 겁니다.”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콜롬비아라고 하면 기껏해야 ‘백 년 동안의 고독’, ‘콜레라 시대의 사랑’으로 알려진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와 열광적인 축구가 생각납니다. 그만큼 멀고도 잘 알지 못하는 나라입니다. 콜롬비아는 각종 분쟁과 내전으로 생긴 난민이 현재까지 100만여 명에 이른다고 합니다. 그만큼 온 나라가 불안한 상태이지만 그 속에서도 아이들이 희망으로 자라나고 있습니다. 그 나라의 어린이 책 작가들은 아이들이 자신이 속해 있는 세계의 현실을 똑바로 볼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작가들은 그런 아이들에게 무엇보다 용기를 주고 싶었을 것입니다. 항상 진실을 구하며 자라나기를 희망했을 것입니다. 그런 바람으로 만들어진 그림책 ‘집으로 가는 길’은 2007년에 멕시코의 폰도 데 쿨투라 에코노미카 출판사가 만든 ‘바람 끝에서 상’을 받았습니다. 베네수엘라 방코 델 리브로 제30회 어린이 부문 ‘최고의 책’으로도 선정됐습니다. 표지에서 꽃 한 송이를 사자에게 건네며 한 소녀가 밝게 웃고 있습니다. 한나절 동안 학교에선 학생으로 지냈지만 방과 후 집으로 가야 하는 시간부터 아이의 현실은 그리 환하지 않습니다. 아이는 책임감이라는 무거운 짐을 지어야 합니다. 홀로 집에 가는 길, 엄마 대신 장을 보고 동생을 챙겨야 합니다. 저녁 식사도 준비해야 하고 엄마 마중도 나갑니다. 그래도 오늘은 사자가 함께 있어 든든합니다. 오늘처럼 언제나 함께해 준다면 아이도 힘든 시기를 잘 이겨 나가겠지요. 어느 새 사자는 가고, 아빠가 웃고 있는 사진 액자 앞에는 꽃이 놓여 있습니다. 용기를 내기 위해 꽃으로 손을 내밀어 희망으로 세상과 마주한 소녀가 대견합니다. 소녀와 함께 걷는 사자를 보며 놀라 기절초풍하는 주변 인물들, 말도 표정도 없지만 소녀를 돕는 사자의 재치가 그림을 읽는 잔잔한 재미를 맛보게 해 줍니다. 책을 덮고 나서 1948년과 1985년을 관통하며 콜롬비아가 겪은 일들을 찾아보는 시간을 갖는다면 더 좋겠습니다.김혜진 어린이도서평론가}

“제가 워낙 워커홀릭(일중독) 스타일이라 쉴 때 아무것도 안 하고 있으면 불안해요. 세상에 뒤처져 간다는 느낌? 내가 숨을 쉬고 있다면, 뭔가를 배워야 한다고 생각해요.” 1일 서울 강남구 청담동 SM엔터테인먼트 본사에서 만난 가수 보아(본명 권보아·28)는 화사한 분홍색 재킷을 입고 나타났다. 요즘 SBS ‘K팝 스타’의 심사위원을 맡아 솔직하고 감성적인 조언으로 각광받는 그는 역시 똑 부러지는 말투와 재치 있는 유머로 인터뷰에 응했다. 열네 살에 데뷔한 보아는 ‘케이팝 붐’이라는 배경도 없던 시절 일본에서 춤과 노래 실력으로 당당하게 일곱 차례나 오리콘차트 정상에 올랐다. 그는 연예계 활동 때문에 중학교를 그만둔 뒤 개인적인 노력으로 일본어와 영어를 공부했고, 검정고시를 통해 고교 과정을 마쳤다. 공교육은 제대로 받지 못했지만 꾸준한 독서를 통해 내면을 키워온 그의 책과 독서에 관한 얘기를 들었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제 성장 과정을 모두 지켜보셨잖아요. 학교에 다닐 수 없고 일반적인 삶을 살 수 없는 상황에서 책을 통해서라도 간접경험을 많이 쌓고 싶었어요. 대중가수는 시대의 흐름을 놓치면 안 되거든요. 철학이든, 심리학이든, 패션이든 어떤 분야에서든 늘 열려 있어야 된다고 생각해요.” 보아의 독서 목록에는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인간’,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향수’ 같은 소설은 물론이고 ‘스타벅스, 커피 한잔에 담긴 성공신화’ ‘호텔경영학’ 같은 경제경영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 책까지 다양한 장르의 책들이 들어 있다. 특히 좋아하는 일본 작가 쓰지 히토나리, 아사다 지로의 소설은 한국어판과 일본어판으로 번갈아 가며 읽었다. “책은 대중의 시선을 피해 숨을 수 있는 나만의 ‘은신처’이기도 했어요. 방송사에 가면 기자분들이 많이 오는데, 제가 대기실에서 책을 읽고 있으면 ‘아, 공부하는구나’ 하고 안 들어오더라고요. 호호.” 그는 이날 인터뷰 자리에 평소 즐겨 읽던 책 세 권을 가져왔다. 여러 번 읽었는지 곳곳에 밑줄을 그은 흔적이 눈에 띄었다. 첫 번째 책은 독일의 의사 에카르트 폰 히르슈하우젠이 쓴 ‘행복은 혼자 오지 않는다’(은행나무). ‘행복 닥터’로 유명한 저자가 사람마다 다른 행복에 대한 기준과 일상에서의 행복론을 소개한 책이다. “가수나 연예인은 항상 커다란 것을 성취해야만 인정받는 직업이라고 생각해요. 늘 1위를 해야 하고, 기록을 세워야 하고, 상도 대상을 받아야 하죠. 어찌 보면 허망할 수도 있는, 커다란 성취에만 익숙해져 있는 사람들은 이 책에서처럼 일상의 소소한 행복에 감사하는 법을 배워야지 우울증에 안 걸릴 것 같아요.” ―어릴 적부터 1등에 익숙해져 있지 않았나. “일본에서 처음 활동을 시작할 때 오리콘차트라는 말도 생소했어요. 그런데 1위를 일곱 번 정도 하다 보니까 어느 순간 맨 윗자리가 당연해지더군요. 그러나 세상이 변하는 만큼 사람들의 취향도 바뀌고, 너무 많은 신인들이 등장하는 가요계에서 언제나 정상을 지킨다는 건 굉장히 어려운 일이죠. 그런데 사람들은 그걸 당연하게 여기고, 저도 당연하게 여기고…. 그러다 갑자기, 그런 생각들이 내 목을 조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성공이 아닌, 자신의 행복을 돌아보게 된 계기는…. “데뷔 후 10년이 지난 20대 중반이 되고 보니 그동안 제가 다른 사람들에게 행복을 주기 위해 고통을 안고 왔지만, 정작 제 고통을 감싸 안아줄 사람은 누구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창작의 고통은 엔터테이너에게는 숙명이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들에겐 행복이 되지요. 어쨌든 제 고통도 치유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야 또 다른 창작물이 나오고 좋은 활동을 할 수 있는 거죠. 백 마디 말보다 책 한 권이 상처를 제대로 치유할 때가 있어요.” 보아는 프랑스 작가 기욤 뮈소의 소설 ‘당신, 거기 있어줄래요?’(밝은세상)도 추천했다. 캄보디아에서 의료봉사를 하던 의사가 한 노인이 선물로 준 캡슐을 먹고 잃어버린 사랑을 찾아 과거로 시간여행을 떠난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주인공은 죽은 옛 애인을 살리면 지금의 가족을 잃게 된다는 딜레마에 빠진다. 보아는 “사람들은 누구나 고치고 싶은 과거의 실수가 있지만 그 실수마저도 현재의 나를 있게 한 것이라는 점을 깨닫게 해준 책”이라고 했다. ―고치고 싶은 과거가 있다면…. “글쎄…. SM엔터테인먼트랑 너무 일찍 계약한 것?(웃음) 회사가 너무 어릴 적부터 제게 연습만 시킨 것? 그래서 성장에도 문제가 생긴 것? 하하. 이런 과거를 고칠 수 있다면 아마 지금의 키가 170cm는 될 수도 있었겠죠. 반대로 그렇게 되면 지금의 ‘가수 보아’는 없었을지도 모르지요. 일본어나 영어도 물론 잘할 수 없었겠죠.” 세 번째로 추천한 책 스즈키 히데코 수녀의 ‘힘들 땐 그냥 울어’(중앙북스)는 보아가 우연히 인터넷 서점을 검색하다가 제목만 보고 “여기 바로 내 마음이 있네”라며 구입한 책이다. “드라마 ‘그 겨울, 바람이 분다’에서 송혜교 씨가 ‘내가 정말 힘들 때 한 번도 내게 울고 싶으면 그냥 울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고, 모두 다 힘내!라고 했다’고 말하는 장면이 나와요. 정말 공감이 됐어요. 제가 어렸을 때 죽을 만큼 외롭고 힘들 때, 누가 옆에서 힘내! 하면 솔직히 짜증났어요. 이렇게 힘내고 있는데 어떻게 더 힘을 내라는 건지. 차라리 ‘힘들지. 힘들면 그냥 울어’ 하고 해주는 말이 훨씬 고마운 법이지요.” 보아는 자신도 10대 때는 ‘주변이 원하는 보아’라는 이미지에 얽매였다고 고백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오리콘차트 1위를 못하면 오히려 마음이 가벼워졌다고 했다. “또다시 올라갈 곳이 있기 때문이죠.” ‘K팝 스타 심사위원’으로서 보아는 어떨까. “항상 무대에 서면 주인공이었는데, 역할을 바꿔 제가 주인공을 만들어주는 일을 한다는 게 재밌어요. 전 아직 한 사람의 인생을 좌지우지하기엔 어린 나이예요. 친구들의 ‘최대치’를 끌어내는 역할을 하겠다는 마음으로 가볍게 시작했어요. 전문적인 것은 옆에 계신 두 분(앙현석 박진영)이 알아서 하실 거라고 믿었죠.” 요즘 TV에 비치는 그의 얼굴은 이전보다 훨씬 성숙하고 편안해 보인다. 이렇게 예뻐진 비결이 뭐냐고 묻자 그는 “여성 연예인이 예뻐질 때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카메라의 마법이고, 또 하나는 인기다”라며 웃었다.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종합편성TV 채널A의 예능 프로그램 ‘이제 만나러 갑니다’가 2일 재단법인 서재필기념회(이사장 안병훈)와 한국언론진흥재단(이사장 이성준)이 주는 제3회 서재필언론문화상 수상작으로 선정됐다. 서재필언론문화상 심사위원회(위원장 남시욱)는 “이 프로그램이 탈북 여성들의 생생한 증언을 통해 북한의 실상을 파헤치고 국민들이 북한과 통일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하는 데 크게 기여한 공로를 인정해 수상작으로 선정했다”고 밝혔다. 시상식은 9일 오후 5시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 20층 내셔널프레스클럽에서 열린다. 서재필언론문화상은 한국 최초의 민간 신문인 ‘독립신문’을 창간한 서재필 선생의 언론 정신을 기리기 위해 제정됐다.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출판계가 어렵다고 하지만, 책을 만드는 것만큼 젊은이가 도전할 만한 매력적인 직업이 있을까요? 과거와 미래를 잇는 가장 창조적이고 지성적인 작품을 만들어내는 일이잖아요.” 지난달 29일 오전 10시 서울 마포구 서교동 한국출판인회의 강당에서 열린 제8회 서울북인스티튜트(SBI) 졸업식장에서 만난 현의영 씨(26·여)는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6개월 과정의 출판인 예비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출판사 동녘에 편집자로 취업하게 됐기 때문이다. SBI는 출판인회의가 2005년에 개원한 출판인 예비학교. 수강료가 전액 무료인 데다 졸업 후 취직률 100%를 자랑하는 ‘청년실업 무풍지대’다. 입학 경쟁률이 7 대 1을 넘을 정도로 인기가 높다. SBI 편집자반에서 강의하고 있는 김장환 청어람미디어 주간은 “입학시험에는 명문대 졸업생도 우수수 떨어지는가 하면 재수 삼수를 거쳐서 들어오는 지원자도 많다”고 말했다. 현재 SBI를 졸업한 600여 명이 출판 편집자와 디자이너, 마케팅 전문가로 활동하고 있고 1기 졸업생들은 각사 팀장급으로 일하고 있어 SBI는 ‘출판계의 사관학교’로 불린다. 출판사 휴머니스트의 경우 직원 32명 중 9명이 SBI 출신이다. 이처럼 출판사들이 SBI 졸업생을 선호하는 이유는 철저한 실무중심 교육과정 때문. 학생들은 이론 교육뿐 아니라 출판사에 들어온 초고 원고를 함께 분석하고, 기획안을 짜고, 교정과 편집, 본문과 표지 디자인까지 하며 실제로 책을 만들고 마케팅 계획서까지 짜보기도 한다. SBI 졸업생들에게 가장 큰 자산은 졸업생 네트워크다. 1∼3기 졸업생의 경우 2007∼2011년 매달 한 차례씩 저작권, 디지털 환경론, 번역론 등 소주제를 정해 꾸준히 공부하는 ‘성장하는 편집자들의 모임’을 가져왔다. 1기 졸업생인 박태근 알라딘 인문사회MD(마케팅디렉터)는 “처음부터 출판에 뜻을 둔 졸업생이 많아 이직률이 매우 낮다”며 “개별 출판사를 넘어 소통할 수 있는 젊은 편집자들의 네트워크가 서로 간에 큰 힘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김학원 SBI 원장은 “기존엔 출판사들이 대졸 신입사원을 뽑으면 1, 2년간 실무를 가르쳐야 하는 탓에 경력사원을 뽑으려는 경향이 강했다”며 “SBI가 현장에 바로 투입될 수 있는 졸업생들을 배출하면서부터 출판계가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는 젊은 편집자들로 세대교체가 이뤄지고 있다”고 말했다.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작년 2월 미국에서 한 소년이 총에 맞아 열일곱 짧은 삶이 멎었습니다. 손에는 금방 편의점에서 사온 사탕과 음료수 캔이 들려 있습니다. 비를 맞지 않으려 뒤집어쓴 ‘후드’ 위로 피가 배어나옵니다. 후드티를 입은 모습이 위협적이었다는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총을 쏜 스물여덟의 청년이 연행되었습니다. 사건은 그렇게 끝이 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스물여덟 청년이 체포되지 않고 풀려났습니다. 열일곱 소년이 흑인이라 위협적일 수 있다는 이유였습니다. 자신이 위협적이라고 생각되면 확인하지 않고 무기를 사용해도 된다는 ‘스탠드 유어 그라운드’ 법이 적용되었습니다. 스물여덟 청년은 백인입니다. 흑인 대통령이 연임에 성공한 미국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정의롭지도 않고 정당하지도 않지만, ‘합법적’인 이 상황이 내 앞에 닥쳤다면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라는 질문에서 이 동화가 시작됩니다. 열일곱 마틴의 옆집에 사는 열세 살 제이가 주인공입니다. 제이에게 마틴은 둘도 없이 좋은 형입니다. 제이는 한국인 입양아, 자신이 버려진 아이라는 사실이 늘 목에 가시처럼 걸려 있죠. 마틴은 이런 제이에게 넌 버려진 아이가 아니라 ‘발견된’ 아이라고 힘을 줍니다. 폭력에 대해선 더 큰 폭력이 아닌 마음으로 맞서야 한다는 이야기도 합니다. 그런 형이 죽었는데, 아무도 처벌을 받지 않는 것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어 제이는 용기를 냅니다. 작은 아이의 용기는 비겁했던 여러 사람들을 부끄럽게 했고, 합법적인 방법으로 각자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했습니다. 동화를 읽다 보면, 이것이 실제 일어난 일이란 것이 답답합니다. 제이의 시선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도 인종차별의 대상일 수 있음이 가슴 서늘합니다. 하지만 조금만 시선을 돌려보면, 이 땅에서 우리도 별 죄의식 없이 인종차별을 하고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차별에 대한 인식, 그것이 용기의 시작입니다. 하지만 나 하나 작은 힘이 움직인다고 세상이 많이 달라질까요? 동화는 마지막에 이렇게 답을 줍니다. “그건 모르지. 하지만 세상은 변할 거야. 아주 천천히.”김혜원 어린이도서평론가}

오늘날 정치에서 더이상 좌파와 우파의 구분이 가능한 것일까. 통상적으로 좌파는 사회 변화와 진보를 지향하고, 우파는 전통적인 가치를 유지하는 노선을 취한다고 구분해 왔다. 그러나 영국 켄트대 사회학과 교수인 저자는 “요즘의 우파는 더이상 전통을 지키지 않고, 좌파는 더이상 변화를 신봉하지 못한다”고 지적한다. 실제로 영국 보수당이나 미국 공화당의 온정적 보수주의는 유럽 좌파의 ‘제3의 길’과 비슷하게 수렴하는 반면 좌파 진영은 유전자학이나 정보기술 혁신을 ‘진보적 악(惡)’이라 표현하며 불안감을 부추긴다. 이처럼 과거와 단절된 보수와 변화를 두려워하는 진보는 양측 모두 역사의식을 잃고 방황한다. 대신 현재에만 집중하는 21세기의 좌파와 우파가 공유하는 가치는 ‘공포 보수주의(conservatism of fear)’라고 저자는 지적한다.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에서 “통치자들이 사랑받기보다는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데서 더 큰 안전을 발견할 것”이라고 충고했다. ‘공포정치’는 수세기 동안 절대왕정, 파시즘, 독재국가의 전유물로 여겨져 왔다. 그러나 요즘에 ‘공포’를 주요 정치적 도구로 사용하는 것은 좌파도 우파 못지않다. “공포 보수주의의 가장 일관된 옹호자들은 시애틀, 제노바, 런던의 거리로 뛰쳐나온 반자본주의 시위대가 아닐까. 그들의 급진주의는 변화에 대해 전적으로 반대하는 급진주의다. 이들의 반자본주의는 인간 해방이라는 오랜 꿈이 아니라 미래에 대한 공포이자, 자연이 지배하던 정적인 농촌 공동체에서 피난처를 찾고자 하는 본능이다.” 우파는 지난 300년 동안 예기치 못한 사회적 혼란이 있을 때마다 유대인, 프리메이슨의 음모론을 제기해왔다. 과거의 좌파는 이러한 모든 형태의 미신에 맞서 싸웠다. 그러나 저자는 “오늘날의 자칭 좌파는 새로운 기술과 관련된 위험과 음모에 관한 소문을 퍼뜨리기 위해 인터넷을 이용해 하이테크 미신들을 구체화한다”고 비판한다. ‘공포정치’란 정치인들이 자신의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사람들의 불안을 의식적으로 조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요즘의 정치 엘리트들은 일부러 공포를 조장할 필요가 없다. 테러와의 전쟁, 환경오염, 세균전, 원자력발전, 조류독감, 구제역, 이코노미 클래스 증후군, 불법이민, 먹거리, 연금고갈까지 공포문화는 이미 우리 사회 전반에 내면화돼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정치인부터 시민단체(NGO)까지 맞닥뜨린 문제는 다만 공포를 최소화할 것인가, 아니면 정치화할 것인가 하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저자는 정치의 위기와 공포의 만연을 지적하면서도 낙관적인 전망으로 책을 맺는다. 그는 우선 좌파와 우파라는 구석기시대적 구분법을 집어던질 것을 촉구한다. 대신 지식으로 무장하고 기꺼이 과거로부터 학습하고 미래를 직시하는 보다 확신에 찬 강건한 정치를 촉구한다. 1933년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의 취임연설처럼 “우리가 두려워해야 하는 유일한 것은 공포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 강남구 27일 ‘책 읽는 강남’ 선포식서울 강남구(구청장 신연희)가 27일 오전 10시 강남구민회관에서 ‘책 읽는 강남, 행복한 강남’ 선포식을 열고 하루 30분, 한 달에 3권의 책을 읽는 ‘1313 독서운동’을 시작한다. 강남문화재단과 (사)작은도서관만드는사람들이 주관하는 이 행사에서는 지역 내 도서관이 발급하는 회원카드를 소지한 사람에게 할인과 서비스 혜택을 주는 ‘강남리더스(Readers)’ 가맹 업체를 발표한다. 강남구 애서가들이 추천하는 도서 100권도 전시된다. 28일 오전 11시 논현정보도서관에서는 ‘내 인생에 용기가 되어준 한마디’를 쓴 정호승 시인과의 만남 행사가 열린다. 참가 신청은 홈페이지(library.gangnam.go.kr) 참조.■ ‘대형 세라믹 조형물 제작’ 국제 워크숍단국대 예술조형대학 김혁수 교수팀은 4월 1∼20일 경기 용인시 단국대 죽전캠퍼스 미술관에서 세라믹 소재의 대형 조형물을 제작하는 국제 워크숍을 연다. 김 교수팀은 2010년 지식경제부 후원으로 높이 3.3m, 가로 2m, 세로 2.5m 크기의 전기 가마를 제작한 데 이어 지난해 대형 도자기 제작 기술의 바탕이 되는 흙을 개발한 바 있다.}

재프랑스 사회학자 정수복 박사가 쓴 ‘파리를 생각한다’에는 다양한 종류의 걷기가 등장한다. 그중에서 가장 인상 깊은 게 ‘플라느리(flanerie)’다. 뚜렷한 목적 없이, 그저 도시의 흐름 속에 자신을 맡기고 그때그때의 기분과 호기심에 따라 서서히 발길을 옮기는 걸음걸이다. 플라느리를 즐기는 ‘플라뇌르(flaneur)’가 되어 걸을 때만이 그 도시의 구석구석에 숨은 진면목을 볼 수 있다고 그는 이야기한다. 봄을 맞은 도시에서는 이런 걸음걸이가 제격이다. 3월 초에 초등학교에 입학한 아들을 학교에 데려다 주기 위해 30분 일찍 집을 나서면서 내게도 출근길 걷기의 여유가 주어졌다. 을지로3가역에서 내려 광화문까지 걷다 보면 청계천 공구상가 아침의 분주함, 물오른 나뭇가지 새순의 솜털까지 매일 새롭게 발견해 나가는 풍경에 시선을 뗄 수가 없다. 머리 위로 자동차가 지나가고 발밑으로는 물이 흐르는 청계천은 미묘한 긴장감과 여유가 교차하는 사색의 터널이다. 공구상가에서 불과 2∼3m 아래로 내려왔는데도 일순간 도시의 소음이 사라지고 물소리가 들리는 공간. 처음엔 스마트폰으로 음악을 듣다가 곧 이어폰을 집어 던져버렸다. 졸졸 흐르는 물소리와 버드나무 사이에 숨어 있는 새소리를 들으면서 머릿속이 한결 정리되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물을 보며 걷다 보면 순간적으로 눈의 초점이 흐려지면서 ‘멍 때리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신동원 강북삼성병원 정신의학과 교수는 이런 ‘멍 때림’을 “뇌가 휴식하고 재정비하는 시간”이라고 말한 바 있다. 배불리 먹고 난 뒤에 소화할 시간이 필요한 것처럼, 뇌에게도 정보를 소화하고 배출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반면 스마트폰에 집중하느라 풍경의 변화도 알아채지 못하는 현대인들은 정보의 과부하로 심각한 건망증에 시달린다. ‘피로사회’의 저자인 한병철 독일 베를린예술대 교수는 신작 ‘시간의 향기’를 펴냈다. 그는 스마트혁명이 사람들로 하여금 시간을 초단위로 쪼개서 활용할 수 있게 했지만, 오히려 시간이 사람들을 인질로 삼아 꼼짝 못하게 하며 일을 시키고 있다고 지적했다. 철학자 몽테뉴가 ‘내가 고양이를 데리고 노는 걸까, 고양이가 나를 데리고 노는 걸까’라는 유명한 회의주의 명제가 떠오르는 상황이다. 요즘 사람들의 잠자리는 점점 편치 못해지고 있다. 스마트폰 덕분에 일의 시간이 휴가지까지, 잠자리까지 연장되기 때문이다. 일의 시간엔 향기가 없다. 한 교수는 빛처럼 날아가는 시간에 향기를 되돌려주기 위해 일을 위한 것이 아닌, 다른 시간을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우리의 뇌는 청개구리다. 뭔가 쓸모 있을 것 같은 일, 목적을 위한 시간에는 지루함을 느낀다. 반면 일이 아닌 순수한 즐거움에는 뇌가 스스로 움직인다. 출근길 청계천을 걸으며 눈과 귀를 활짝 열고 계절의 변화를 온몸으로 느끼리라 다짐해본다. 혹시 아는가. 그 안에 멍 때리는 동안 나의 뇌가 자유롭게 움직이며, 날아가는 시간의 무게를 느끼게 될 수 있을지 모르는 일이다.전승훈 문화부 차장 raphy@donga.com}

곤지곤지 잼잼(최숙희 글 그림·푸른숲주니어)=‘짝짜꿍’ ‘곤지곤지’ ‘잼잼(죔죔)’ 같은 전통 놀이들은 아이를 건강하고 똑똑하게 하고 정서적인 안정감과 자존감을 키워준다. 아이들의 놀이에 담긴 과학적 원리를 상상력 가득한 이야기로 되살린다. 1만 원. 빅뱅으로 내가 생겨났다고?(더그 헨센 글·룬네 마크후스 그림·그린북)=잠들기 전에 딸이 아빠에게 “나는 어디서 왔어요”라고 묻는다. 아빠와 딸은 우주 대폭발 ‘빅뱅’ 이후 150억 년간의 지구 진화와 생명체 탄생의 역사를 담은 시간여행을 떠난다. 1만1000원.사과나무(미라 로베 글·안겔리카 카우프만 그림·은나팔)=사과나무는 나뭇잎을 갉아먹는 나비의 애벌레, 시끄럽게 재잘대는 작은부리울새, 옹이구멍에서 잠을 자는 겨울잠쥐가 살아갈 수 있도록 자신의 몸을 내어줍니다. 그래서 추운 겨울에도 외롭지 않습니다. 1만 원.미스 히코리(캐롤린 베일리 글·갈현옥 그림·한림출판사)=사람에게 보살핌 받던 시골 아가씨 인형 히코리가 고난과 시련을 극복하고 자연으로 돌아가 사과꽃으로 다시 피어나는 모험담. 뉴욕타임스는 ‘환상의 서정시’라고 극찬했다. 9500원.}

14일 유럽입자물리연구소(CERN)는 힉스 입자(소립자에 질량을 부여하는 입자)의 발견을 선언했다. 지난해 7월 힉스 입자 실험 결과를 발표한 후 8개월 만에 2.5배 많은 데이터 분석 자료를 바탕으로 힉스 입자 발견을 공식 선언한 것이다. 이로써 40년 넘게 미완의 상태로 남아 있던 입자물리학 표준 모형의 실험적 검증이 완료됐다. 하버드대 물리학과 첫 여성 종신교수인 저자가 거대강입자가속기(LHC)에서 이뤄진 양성자 충돌 실험의 원리, 힉스 메커니즘의 존재, 입자물리학 표준 모형에 대해 간결하고 명확하게 해설한다.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한국의 식당에서는 울고 보채는 아이들을 흔히 볼 수 있다. 그런데도 부모들은 아무런 제지를 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만일 옆자리에서 아이에게 주의를 주면 “왜 남의 아이 기를 죽이느냐”는 부모의 항변이 돌아오기 십상이다. 반면 내가 1년 동안 프랑스 파리에서 연수하던 시절 레스토랑에서 뛰어다니는 아이를 본 적이 없었다. 우리 아이가 식당에서 말썽을 피울 때면 “왜 아이에게 ‘안 돼’라고 주의를 주지 않느냐”고 충고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이 책은 월스트리트저널 경제섹션 기자를 했던 미국인 여성이 파리에 살면서 쓴 육아일기다. 저자에 따르면 프랑스에서 미국식으로 부모가 아이의 뒤꽁무니를 쫓아다니며 자유분방하게 키우다간 ‘앙팡 루아(enfant roi·왕아이)’라는 손가락질을 당한다는 것이다. 그는 미국과 다른 프랑스 아이들을 보면서 여러 차례 의문에 휩싸였다고 한다. 프랑스의 신생아들은 어떻게 생후 2∼3개월 만에 밤새 단 한 번도 잠을 깨지 않고 푹 자는 법을 배우는 것일까? 미국 아이들은 파스타나 흰쌀이 포함된 소위 ‘어린이 메뉴’만 먹는데, 프랑스 아이들은 생선이나 채소가 포함된 코스 요리를 어른과 똑같이 가리지 않고 먹는 것일까? 프랑스의 식당이나 놀이터에는 왜 울며 떼쓰는 아이를 한 명도 찾아볼 수 없을까? 저자는 처음엔 프랑스 아이들이 전근대적 훈육이나 순종적 교육의 희생자가 아닐까 의심한다. 그러나 프랑스 아이들이 누구보다 쾌활하고 자유롭게 커가는 모습을 보면서 프랑스식 육아법을 본격적으로 취재하기 시작했다. 이 책은 지난해 미국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 1위에 오르면서 미국 사회에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이 책에서 한국의 신혼부부들이 읽어볼 만한 대목은 ‘밤새 잘 자는 프랑스 아이들’이다. 비결은 ‘라 포즈(la pause)’, 즉 ‘잠깐 멈추기’다. 프랑스 엄마들은 아기가 운다고 당장 달려가서 안아주지 않는다. 몇 분간 관찰하면서 아이가 그냥 칭얼대는 것인지, 정말로 배가 고픈지, 기저귀를 갈아줘야 하는지를 살핀다. 신생아는 밤에 약 두 시간 정도 지속되는 수면 사이클 사이사이에 잠이 깨도록 돼 있다. 이를 배고픔이나 스트레스의 신호로 해석해 부모가 곧바로 뛰어들어 아이를 달래주거나 젖을 물리면 아이는 2시간마다 어른이 찾아와 달래줘야만 잠이 들도록 ‘길들여지는’ 것이다. 반면 프랑스의 부모들은 밤에 아이가 칭얼대도 잠시 지켜보면서 생후 4개월 안에 아이가 홀로 잠드는 법을 배우게 해준다. 저자는 프랑스의 육아법을 ‘기다림의 미학’으로 설명한다. 프랑스 엄마들은 통화할 때 옆에서 손을 붙잡고 끄는 아이에게 단호한 목소리로 ‘기다려’라고 말한다. 심지어 아이들이 젖 먹는 시간도 오전 8시, 정오, 오후 4시, 오후 8시로 정해놓고 기다리게 한다. 유치원이나 초등학교 아이들도 케이크, 과자, 사탕은 오후 4시 ‘구테(gouter)’ 시간에만 먹을 수 있다. 군것질을 절제한 아이들은 식사시간에 어떤 음식도 맛있게 먹는다. “아이의 취향, 리듬, 개성은 당연히 존중해야 한다. 다만 아이는 아주 어릴 때부터 이 세상은 혼자 살아가는 곳이 아니며 모두를 위한 시간과 공간이 있다는 걸 배워야 한다.”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최근 가난한 이를 위한 사목과 청빈을 내건 프란치스코 교황이 선출된 것을 보고 희망을 느꼈습니다. 새 교황은 가톨릭교회 개혁뿐 아니라 삶에 지친 세계인들에게도 희망을 줄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따르던 사도들의 ‘원체험’(첫 마음)을 가장 잘 이해하는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2007년 발간 이후 100만 부 이상 팔린 ‘무지개원리’의 저자인 차동엽 신부(55·미래사목연구소 소장)가 20일 신작 ‘희망의 귀환’(위즈앤비즈·사진)을 출간했다. 그는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우리 사회에 절망을 부추기고, 절망을 선동해 ‘장사’를 하려는 상업주의가 만연해 있다”고 지적했다. 이 책을 통해 그는 우리 사회에 빠르게 확산되는 ‘절망의 문화’를 걷어내고, 생존을 위한 ‘희망본능’을 일깨울 것을 호소한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좀처럼 앞이 안 보이는 상황 속에서 젊은이들은 ‘위로’와 ‘힐링’에 빠져들고, 중장년층은 ‘피로사회’를 호소한다. “지난 대선에 등장했던 안철수 현상도 절망의 문화에서 나온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 현상 자체가 젊은이들의 절망에 편승한 분위기에서 생겨난 것이기 때문이지요. 젊은이들이 ‘나는 아무런 잘못이 없는데 기성체제가, 사회가 나를 절망으로 빠뜨리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스스로 일어설 생각을 못하는 겁니다.” 서울대 공대를 졸업하고 군복무를 마치고 뒤늦게 사제가 된 그는 1년에 400여 차례 강의를 다니는 인기 작가다. 그는 ‘희망의 귀환’에서 공대 출신이자 철학, 신학을 공부한 경력을 살려 과학적 심리적 인문학적인 접근으로 희망의 원리를 조명한다. 우선 그는 희망을 ‘콘텐츠’가 아닌 ‘에너지’라고 해석한다. 희망이란 ‘바라봄(望)’의 법칙이며, 기운(에너지)을 모으는 ‘결기(結氣)’의 과정이라는 것. 소설 ‘큰 바위 얼굴’에서 나오듯 마음속에서 끊임없이, 생생하게 바라보는 대상을 결국 닮아가려고 에너지를 모아가는 것이 희망이라는 설명이다. “내 앞에 객관적으로 절망스러운 상황이 전개됐다고 칩시다. 이럴 경우 나에겐 3가지 선택이 주어집니다. 관망, 절망, 희망이지요. 관망은 그냥 사태를 무심하게 주시하는 겁니다. 절망을 택하면 내 몸에서 순간적으로 에너지가 다 빠져나가 다리가 풀리고 주저앉게 됩니다. 반대로 희망을 택하면 에너지가 모입니다. 주먹이 불끈 쥐어지고, 없던 기운을 모으고, 주변의 도움을 끌어들이게 되는 거지요.” 차 신부는 절망에 빠진 사람들에게 “아무거나 붙잡고, 그것을 희망이라고 우겨라!”는 말을 해준다. 아무리 근거 없는 희망이라도, 붙잡을 때 흩어진 기를 모을 수 있다는 것이다. 절망에 부닥쳤을 때 뿜어져 나오는 오기, 강기(깡다구), 호기(호연지기)도 희망을 표현하는 다른 이름이라는 설명이다. 희망은 절망에 빠진 사람뿐아니라 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데도 중요하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최근 전국인민대표대회 폐막 연설에서 “중국인의 꿈을 이루자”고 역설했듯 우리 정치권도 ‘국민통합’을 말하기 전에 미래에 대한 희망을 줄 비전을 제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영국의 총칼에 눌려 절망에 빠진 인도인들에게 용기를 준 것은 간디의 한마디 말이었습니다. 간디는 거리에서 엎드려 우는 이를 보고 주머니에서 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아 주면서 ‘모든 이의 눈물을 닦아주고 싶지만 나에게는 손이 모자라는군요’라고 했습니다. 인도인들은 이 말에 힘을 얻어 서로의 눈물을 닦아주기 시작했고 분연히 일어났습니다.” 차 신부는 오히려 젊은 세대들에게 큰 목소리로 되물었다. “펄펄 끓는 심장을 가진 청년은 그 자체가 희망인데, 젊은이들이 기성세대에게 희망이 어디 있냐고 묻는다면 우리 사회는 희망을 어디서 찾아야 합니까. 변화와 더 좋은 시기는 기다려봤자 영영 오지 않을 수 있습니다. 삶의 ‘구원투수’는 누구도 아닌 바로 나 자신입니다.”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영국인들 대부분은 아시아란 곧 인도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이는 아마도 인도가 오랜 기간 영국의 식민지였던 까닭이리라. 그런 만큼 영국의 인도에 대한 관심은 지대하다. 이는 수케투 메타가 뭄바이 하층민들의 생활을 담은 책 ‘맥시멈 시티’로 평단과 대중으로부터 큰 인기를 얻은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이 책은 ‘슬럼독 밀리어네어’의 감독 대니 보일이 영화로 제작하기도 했다. 제2의 ‘맥시멈 시티’를 찾아 헤매던 에이전트들은 인도의 뭄바이에서 자라 영국으로 이민 온 저명한 작가 아미트 차우두리를 주목했다. 영국 이스트앵글리아대 교수인 그는 2005년에 처음으로 그의 에이전트로부터 콜카타(옛 캘커타)에 대한 글을 써보라는 권고를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차우두리 교수는 그 제안을 일언지하에 거절했다고 고백한다. 2005년의 콜카타에서는 ‘맥시멈 시티’에 나오는 내용들을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1991년 자유민주주의에 문을 연 이후 인도는 가파른 성장세를 이어왔고, 그 중심에는 뭄바이와 뉴델리, 그리고 방갈로르가 있었다. 이 엄청난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변화에 따라 ‘맥시멈 시티’와 같은 책이 나오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 도시들에 비해 거대한 콜카타는 큰 변화를 겪지 않았다. 콜카타는 인도의 어떤 도시보다도 사회주의의 영향을 크게 받았기 때문이다. 콜카타 주정부는 지난 28년간 좌파가 집권해 왔고, 선거로 선출된 세계에서 가장 오랜 기간 집권한 좌파 정부라는 기록을 갖고 있었다. 이 때문에 차우두리 교수는 영국의 대중과 평단이 원한 극심한 변화, 그에 따른 혼란의 물결을 콜카타에서는 찾아볼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2009년 오랜 기간 집권했던 좌파 정부가 선거에서 패하면서 콜카타에도 변화가 시작된다. 그제야 차우두리 교수는 콜카타에 대한 책을 쓸 수 있다고 확신한다. 그는 2009년 콜카타로 가서 그로부터 2년간 이 혼란의 도시에서 거주하며 책을 썼다. 2월 출간된 책 ‘캘커타’는 2009년 선거에 이어 다시 한 번 콜카타를 뒤흔든 2011년 총선을 계기로 그 이전과 이후의 콜카타에 대해 다루고 있다. 저자는 이 책에서 신흥도시로 떠오르기 시작한 19세기부터 엄청난 변화를 겪은 21세기에 이르기까지 콜카타의 역사를 훑는다. 책에는 그가 2년간 콜카타에 거주하며 만났던 노숙인들과 노동자들, 떠오르는 신흥 부자들과 하루아침에 재산을 잃은 부자들, 그리고 부동산 개발업자들이 허문 오래된 집들과 새롭게 지어진 고급 호텔들이 나온다. 2011년 선거에서 신데렐라처럼 등장한 여성 정치인 마마타 바네르지에 대한 이야기도 자세히 기술돼 있다. 런던=안주현 통신원 jahn80@gmail.com}

이달 초 딸이 중학교에 입학했다. 배치고사 성적에 따라 수학과 영어는 A, B, C반으로 나눠서 수업을 한다고 했다. 중학교 1학년 때부터 우열반 수업이라니…. 딸이 해준 말은 더 놀라웠다. A반에 편성된 10명의 학생 대부분이 학원에서 고등학교 수학을 배우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선행학습이 횡행하다 보니, 학교 측은 우열반 수업이 불가피하다고 느낀 것일까. 우리네 학교에서는 갈수록 남을 꺾고 이기는 ‘경쟁’의 기술만 강조한다. 그렇다면 ‘협력’은 언제 배울 것인가. 21세기 들어 강조되는 화두는 소통, 융합, 상생, 동반성장과 같은 단어들인데 말이다. 맬컴 글래드웰이 한 분야의 전문가가 되기 위해 ‘1만 시간의 법칙’을 주창했듯이, 저자는 협력도 수많은 연습을 통해 익히고 훈련해야 하는 기술이라고 강조한다. 영국 런던정경대(LSE) 사회학과 교수인 저자는 원래 음악도였다. 뉴욕 줄리아드 음악원을 나온 저자는 왼손에 이상이 생겨 결국 첼로 연주자의 길을 포기했다. 그 탓일까. 그의 사회학적 상상력은 늘 손과 도구, 작업장의 관계에서 출발한다. 사회학뿐 아니라 음악, 건축, 디자인, 문학, 역사, 정치·경제 이론까지 두루 막힘이 없는 그의 글쓰기는 ‘유럽에서 읽히는 미국인’이라는 평을 듣게 했다. 이 책은 저자의 ‘호모 파베르(도구적 인간) 프로젝트’ 3부작 중 두 번째 작품이다. 첫 번째 책 ‘장인(Craftsman)’이 ‘일 자체를 위해 일을 잘 해내려는 욕망’을 가진 장인의 작업 방식을 다룬 것이라면, 두 번째인 ‘투게더’는 그 일을 타인들과 함께하는 사회적 기술을 다뤘다. 그의 다음 책은 ‘도시를 만드는 기술’이다. 저자는 손자가 다니는 영국의 초등학교에서 한 학생이 교내 방송으로 릴리 앨런의 ‘엿 먹어(fuck you!)’라는 노래를 틀었던 사건에서 이 책을 시작한다. 이 노래의 가사는 ‘네가 싫다. 너네 패거리가 전부 싫다’는 내용이었다. 저자는 이 가사가 요즘 미국이나 유럽 사회에 팽배해 있는 집단적인 폐쇄적 유대감에 기반을 둔 ‘부족주의’를 상징한다고 해석한다. 그는 “20세기 전반에는 민족주의라는 형태의 부족주의가 유럽을 파괴했는데, 21세기에도 페미니스트, 자유주의자, 세속적 인문주의자, 결혼한 동성애자, 무슬림 등의 부족주의가 서로 다른 집단을 공격한다”고 지적한다. 철학자 버나드 윌리엄스가 말한 ‘소신에 대한 물신적 숭배(fetish of assertion)’가 사회적 협력을 가로막는 장애물인 셈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중세의 길드 작업장에서부터 파리의 코뮌, 월가의 해고 노동자, 로스앤젤레스 코리아타운에서의 한인과 흑인 간의 갈등과 협력, 페이스북의 ‘친구 맺기’까지 협력의 의례가 진화해온 과정을 추적한다. ‘협력이란 좋은 것’이라는 단순한 이야기를 솜씨 좋게 풀어내는 기술은 역시 대가밖에 할 수 없는 일이다. 어렵다는 첫 느낌을 참고 차분히 읽다보면, 비로소 지적인 책읽기의 맛에 빠져든다. 예를 들어 한스 홀바인의 그림 ‘대사들’은 이 책의 주요한 모티브로 등장한다. 그림 속에는 육분의, 복합태양관측기, 9면체, 수학책, 루터파 성가집, 류트, 해골이 놓여 있다. 홀바인의 탁자 위에 놓인 도구들은 당시에 변화를 겪고 있던 작업장을 대변하는 최첨단 물건들이었다. 저자는 기술혁신과 종교개혁 같은 격동의 시대에 맞춰 변해간 외교와 살롱의 예절 같은 소재들을 엮으면서 ‘대화적 협력’이라는 주제를 끌고 나간다. 빛의 속도로 변화하는 21세기에 맞는 협력의 개념도 제시한다. 타자에 대한 단순한 공감(sympathy)이 아니라, 거리를 둔 지성적인 감정이입(empathy)에 기초하며, 타자들과의 동일성이 아닌 차이의 조절과 이해에 기초하고, 위로부터의 정치투쟁에 집중하는 정치적 좌파보다는 풀뿌리 운동에 기초한 사회적 좌파에 협력의 가능성이 있다고 진단한다. ‘정치적 협력’을 설명한 장은 소통이 안 되는 요즘 우리 정치계와 관련해 시사하는 점이 적지 않다. “정치적 타협을 좌우하는 요인은 정말 면목의 문제, 체면 유지의 문제이다. 체면이란 파트너의 가치를 인정해준다는 뜻이다. 그들을 윽박질러 굴복하게 만들면 역효과가 난다. 온갖 종류의 제휴가 흔히 체면치레용의 소소한 에티켓 문제 때문에 성공하거나 실패하곤 한다. 체면 유지는 협력의 의례이다.”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 런던과 파리, 로마, 바르셀로나…. 유럽의 유서 깊은 도시를 다녀온 여행후기와 사진은 인터넷에 넘쳐난다. 가보지 않아도 왠지 가본 것 같은 느낌. 뭐 새로운 곳이 없을까. 숙제하듯 기념사진 찍으러 다니지 않고, 여유롭게 그들의 일상만 훔쳐보고 오더라도, 다녀오면 남들에게 질투어린 시선을 받을 만한 곳 말이다. 요즘 출판계에서 북유럽이 ‘핫 트렌드’로 뜨고 있다. ‘북유럽처럼’ ‘북유럽 디자인과 만나는 스칸딕 베케이션’ ‘코펜하겐에서 일주일을’ 같은 여행서적뿐 아니라 ‘북유럽에서 날아온 행복한 교육이야기’ ‘살고 싶은 북유럽의 집’ ‘북유럽 핸드메이드’ ‘이케아 그 신화와 진실’ 등 디자인과 교육, 복지, 환경 등 다양한 주제를 망라한다. 》특히 지난 대통령선거에서 후보들이 ‘복지’ ‘국민행복’ ‘저녁이 있는 삶’ 등을 주요 구호로 내세우면서 북유럽 관련 책들이 쏟아져 나왔다. 백원근 한국출판연구소 책임연구원은 “경제성장은 달성했지만 개인의 행복감, 자존감을 억눌러왔던 한국인들이 북유럽 사회를 들여다보고 싶은 욕구가 생겨난 것”이라고 말했다. “아등바등 살지 않아도 기본적 삶을 보장받는 자들의 여유, 거대한 자연에 적응하고 그것을 지켜나가는 사람들의 여유, 복작대는 인간들 속을 헤집고 다닐 필요가 없는 공간의 여유…. 그런 여러 가지 여유로움이 그곳에 있었다. 잠시나마 그 상쾌한 곳에서 지구 반쪽의 파란색 숨을 들이마시며 그들의 여유 만만한 라이프스타일을 구경하고 싶었다.” ‘북유럽처럼’(네시간)의 저자 김나율과 이임경 씨의 말이다. 두 사람은 북유럽의 심플하고 실용적인 디자인이 나오게 된 이유를 오후 4시면 해가 지는 북구의 기나긴 겨울밤에서 찾았다. 하루 종일 집에 틀어박혀 있어도 질리지 않고 편안하도록 자연을 닮은 디자인을 발전시켜 냈다는 것이다. 북유럽이 각광받는 또 다른 이유는 ‘과거’가 아닌 ‘미래’를 만날 수 있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 ‘우리가 만나야 할 미래’(쌤앤파커스)에서 스웨덴 복지모델을 분석한 최연혁 스웨덴 쇠데르테른대 교수는 “그리스 경제위기는 국가의 역할과 개인의 행복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김난도 서울대 교수는 올해 초 발표한 저서 ‘트렌드 코리아 2013년’에서 ‘스칸디맘(스칸디대디)이 온다’고 전망했다. 스칸디맘은 자녀를 엄격히 관리하는 ‘타이거맘’ ‘헬리콥터맘’과 달리 부모와 자녀의 관계가 수평적 관계, 자율성을 특징으로 한다. 부모도 자녀를 위해 무조건적으로 희생하기보다는 개인의 행복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 스칸디맘이다. 실제로 퇴근 뒤 한 손에는 카페라테를 들고 다른 손으로 유모차를 미는 멋쟁이 아빠들을 스웨덴에서는 ‘라테파파’라고 부른다. 핀란드에서는 정부가 유모차를 나눠주고, 유모차를 밀고 다니는 부모는 교통비가 공짜다. ‘…스칸딕 베케이션’의 저자 이홍안 씨는 “아무리 추운 날씨에도 2, 3명의 아이를 한꺼번에 유모차에 태워 산책을 다니는 모습을 보고, 왜 북유럽산 유모차는 바퀴가 크고 튼튼한지를 알게 됐다”고 말했다. 스웨덴 국립교육청 교육국장 출신 황선준 박사는 지난해 스웨덴인 부인과 함께 살면서 체험한 가정교육에 관한 책 ‘금발 여자 경상도 남자’(한언)를 펴냈다. 현재 서울시교육연구정보원장으로 일하는 그는 “북유럽에서는 오후 4, 5시면 집에 들어와 가족들이 저녁시간을 함께 보낸다”며 “한국의 부모와 자녀들은 회식과 학원에 밀려 언제 한번 저녁을 같이 먹어본 적이 있는가”라고 말했다.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