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홍

이기홍 대기자

대기자

구독 195

추천

안녕하세요. 이기홍 대기자입니다.

sechepa@donga.com

취재분야

2025-07-06~2025-08-05
칼럼100%
  • [오늘과 내일/이기홍]네이버가 증식시킨 익명의 ‘찌질이’들

    ‘9억ㅋㅋ 나이 똥구멍으로 처먹었네ㅋㅋ 노인들이 인생의 지혜가 있어? ㅋㅋ 당해도싸다~!’ ‘바~보’ ‘박근혜 추종하는 노인들 수준보소 ㄷㄷㄷㄷ 그노인 자식도 참 서글프겠네…저런 노인 수발할려면,’ ‘늙으면 똥인지 된장인지 구분도 못하는데 투표권 회수해야지 이런 틀딱들 때문에 태극기 부대가 나라 말아먹는다’ ‘누굴 욕하냐ㅋ 그냥 죽어야지’ 지난달 18일 낮 네이버의 한 기사를 우연히 읽었다. 연합뉴스가 송고한 ‘보이스피싱 한통에…70대 노인, 예금 깬 돈 9억원 날려’라는 기사였다. 한 노인이 보이스피싱범에 속아 9억 원을 사취당했다는 안타까운 내용이었다. 이어 무심코 댓글을 보다가 눈을 의심했다. 피해자인 노인을 향해 조롱을 퍼붓는 댓글들이 줄줄이 달려 있었다. 필자가 기사를 읽은건 게재된지 2시간 정도 지난뒤였다. 이미 38건의 댓글이 있었는데 그중 16건이 조롱과 비아냥이었다. 그후 38일이 지난 25일 현재 이 기사에는 총 81건의 댓글이 달려있다. 그중 19건은 삭제됐 고, 62건이 남아있는데 그중 27건이 비아냥과 놀림, 인신공격성 내용이다. 보이스피싱 범죄의 심각성과 엄벌을 촉구하는 내용이 32건, 피해자를 위로하는 댓글은 3건이다. ‘드루킹’ 사건은 네이버 등 포털이 십 수년간 장려해온 댓글 공간에서 독버섯처럼 자라온 댓글 조작의 실태와 폐해를 빙산의 일각처럼 드러내주고 있다. 그런데 사실 익명 댓글은 이미 오랫동안 우리 사회의 치명적 병폐 중 하나였다. 악성 댓글이 흉기가 되어 숱한 연예인, 청소년들이 고통을 겪고 심지어 자살했다. 일반 국민을 상대로 한 조사에선 항상 댓글 실명화 찬성여론이 반대 보다 두세 배 가량 높게 나온다. 하지만 학자들 중엔 표현의 자유를 들며 펄쩍 뛰는 이들이 많다. 특히 인터넷 실명제는 이미 위헌판결을 받았으니 댓글 실명화는 검토할 필요조차 없다는 논리를 많이 편다. 과연 그럴까. 2012년 헌재가 위헌판결을 내린 것은 2006년 12월 국회를 통과한 정보통신망법 제 44조 5항, 즉 하루 이용자 10만 명 이상의 사이트 운영자는 게시판 이용자의 본인 확인 절차를 거치도록 한 조항이었다. 당시 헌재가 위헌판결의 근거로 든 것은 표현의 자유 위축과 더불어, 인터넷 사업자가 이용자의 주민번호 등을 수집해 장기간 보관함으로써 개인정보 유출 위험이 커지며, 법 시행 이후에도 악성 게시물이 그다지 줄지 않았음을 지적했다. 그 법은 사실 문제가 있었다. 적용 대상이 명확치 않아 뉴스댓글과 무관한 대다수의 인터넷 사이트들에도 제약을 가했다. 또 게시판 이용 전에만 본인 확인을 할 뿐 실제 댓글 활동은 아이디나 가명을 쓰니 악성 댓글을 줄이는 효과도 미비한 과잉 규제였다. ‘댓글 실명제’라기 보다 ‘게시판 이용 전 본인 확인제’였던 것이다. 헌재 판결 당시는 네이트와 싸이월드 회원 3500만 명의 개인정보 유출 사건 여파로 사이트 가입시 개인정보를 기입하는데 대한 반발과 우려가 높았던 시기였다. 그러나 이제는 온라인 이용 환경이 많이 바뀌었다. 즉 6년 전 헌재판결이 댓글 문화 개선을 위한 실명화 논의의 길을 막아버린건 아니다. 이제 인터넷 활동 전체에 실명을 요구하는 획일적 실명제와 구분해 뉴스 댓글에 한해 실명화 원칙을 확산시킬 때가 됐다. 법으로 강제하기 보다는 댓글 여론조작의 난장(亂場)이 된 네이버 등 포털은 댓글을 폐지하고, 각 언론사들은 자사 사이트의 뉴스댓글을 실명으로 운용하는 방향으로 뜻을 모아야 한다. 물론 익명의 표현공간은 반드시 필요하며 보장되어야 한다. 익명이 아니면 하기힘든 고발, 폭로 등을 위해서다. 사이트내에 그런 익명의 발언대 공간을 별도로 만들면 된다. 댓글 실명화에 반대하는 이들은 폭언이나 명예훼손성 댓글은 지금도 처벌이 가능하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이는 무거운 처벌이 내려질 가능성도 별로 없는 짧은 인신공격성 댓글들을 모아 경찰에 들고 가기까지 피해자가 받을 정신적 고통과 절차의 부담감은 외면한 피상적 주장이다. 거림낌없이 타인에게 인신공격을 해댈 수 있도록 조장하는 환경을 바꾸지 않은 채, 나중에 찾아내서 처벌할 길이 있으니 괜찮다고 하는 것은 무책임하다. 댓글을 실명으로 달도록 하면 사이버 공론장이 위축될 것이라는 우려도 있다. 그러나 누구나 자유롭게 의견을 개진하고 토론할 수 있는 공론의 광장에 복면을 한 무리들이 들어와 발언대 주변을 점령한 채 욕설과 삿대질을 해대면, 오히려 일반인들의 발언 의지가 오그라들 것이다. 열린 공론의 광장을 위축시키는 것은 참여자들에게 요구하는 최소한의 책임감과 예의가 아니라, ‘찌질이’들이 광장 아무 데나 멋대로 배설을 해댈 수 있도록 조장하는 익명이라는 복면이다. 이기홍 논설위원 sechepa@donga.com}

    • 2018-04-26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오늘과 내일/이기홍]朴의 변명은 文의 반면교사다

    1심 판결에 박근혜 전 대통령은 왜 억울해할까? 재판기록 등을 토대로 그 심리를 유추해보자. 우선 블랙리스트 유죄에 어떤 생각일까? “나에게 표를 준 51.6% 국민의 바람은 기울어진 이념 운동장을 바로잡아 달라는 것이었다. 특히 문화예술계는 좌편향이 심하다. 우리 역사와 사회구조를 착취와 억압, 미국의 식민지처럼 묘사하는 이른바 민중예술인들에게까지 국민 세금을 지원하는 게 옳은 일일까. 자기들이 그런 창작을 하고 싶으면 하라고 해라. 하지만 왜 국고 지원까지 해줘야 하나. 나는 그런 생각으로 이념 편향적 영화 등에 대한 지원은 문제라고 말한 것이다. 그런데 그게 몇 단계 내려가면서 분류표가 만들어지고 1만 명 규모로 커졌다. 공무원들이 편의적 발상으로 획일적 리스트를 만든 거다.” 뇌물죄? “나는 혈혈단신이고 재산도 80억 원이나 있다. 실제로 내가 한 푼이라도 챙긴 게 있나? 수년전 한류·스포츠·문화 진흥이 얼마나 중차대한 국가적 과제로 여겨졌나. 지속적으로 진흥하기 위해 재단을 만들었는데, 청와대가 움직이지 않으면 기업들이 기금을 내겠는가.” 최순실? “최에게 연설문을 보내고 국정을 상의한 것은 잘못이지만, 만약 최순실을 비서관이나 특보로 임명했다면 별문제 안됐을 사안 아닌가. 그런데 만약 내가 취임하면서 최순실을 관직에 임명했다면 언론, 야당이 가만있었을까. ‘최태민의 딸’임을 강조하면서 황색 루머까지 동원하며 정권을 흔들지 않았을까.” 감방 속 박 전대통령은 이런 생각의 울타리를 넘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핵심은 나에겐 범의(犯意), 악의(惡意)가 없었다는 확신일 것이다. 최순실의 숱한 악행은 몰랐으니 도의적 책임만 있다 여길 것이다. 그래서 평생 억울해하며 실제 허물보다 수백배 과중하게 처벌받는 정치적 제물이 됐다고 여길 것이다. 그게 대의민주주의를 위해 고민하거나 싸워본 적도, 훈련도 제대로 받지 못한 옛 시대 정치인의 한계다. 백번 양보해 설령 범죄 의도가 없었다 해도, 권력은 마음대로 사용할 수 없으며 법적 절차에 근거해 결정·집행하고, 남용되지 않게 점검해야 하는게 민주주의, 법치주의 공화국의 원칙인데, 그걸 체화하지 못한 채 권좌에 올랐다. 조직에서 일하면서 권한과 책임이 단계적으로 커지고, 팀원들을 이끌며 부대끼고 상호비판도 해가며 뭔가를 만들어낸 경험도 없었던 외톨이의 비극이다. 그러니 최순실의 사익(私益)인 승마, 광고회사 지원 등을 위해 기업을 비트는 명백한 위법행위를 저지르면서도 ‘승마 유망주 지원’ ‘창조경제에 모범이 될 중소업체 지원’을 위해 대통령이 이 정도 힘도 못 써주나라고 생각했을 테고, 법적으로 문제가 될 소지는 없는지 자문을 구할 생각도 못했을 것이다. 일정한 권한을 갖게 된 자가 모든 걸 원하는 대로 이루려고 밀어붙이면, 필연적으로 어딘가에서 탈이 난다. 문재인 정권도 역사 경제 교육 사회 복지 등 모든 걸 반드시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이뤄야한다는 강박증을 보인다. 대통령이 선의로 설정한 목표가 일선 공무원들에겐 생사가 걸린 지상명령이 되고, 이 기회에 한 상(床) 차려 올리려는 공무원들까지 극성을 부리게 마련이다. 검찰은 혐의가 아니라 사람을 겨냥해 탈탈 털어 어떻게하든 잡아넣는 무한충성을 하고, 경제부처들은 연신 나라금고를 열어 정권이 국민들에게 베풀 선물꾸러미를 채워 넣는다. 그 과정에서 여러 명이 직권남용의 금을 밟고 있을지 모른다. 과거처럼 시위대 학살 명령을 내리고, 뇌물을 해외로 빼돌리는 것 같은 사악함과 탐욕이 없었다해도, 설령 나름 선의의 목표를 이루기 위한 것이라 해도 권력 행사 과정에서 헌법과 민주주의 원칙을 조금이라도 훼손하면 준엄한 법의 심판을 받는 시대가 됐다. 대통령이 쥔 칼은 그렇게 예리한 양날의, 손잡이 없는 칼이다. 자신이 굴리는 조막만한 눈 뭉치가 어딘가에서 눈사태를 일으킬 수 있음을 박근혜는 물론 문재인 청와대도 자꾸 잊는 것 같다.이기홍 논설위원 sechepa@donga.com}

    • 2018-04-12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오늘과 내일/이기홍]私가 끼면 평양의 배반을 부추긴다

    강경매파 백악관 안보보좌관 내정, 김정은 방중(訪中)…. 남북, 북미정상회담을 향한 쾌속 항로에 돌발변수가 잇따르고 있다. 본질은 명료하다. 제재로 궁지에 몰려 미국과의 담판을 원한 김정은은 패를 높이려 안간힘이고, 트럼프는 전임자들의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겠다며 ‘확실한 인물’을 부른 것이다. 트럼프-김정은 담판으로 ‘원샷 해결’이 가능할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원샷은 없다. 어떤 근사한 합의가 이뤄진다 해도 비핵화까지는 길고 지난한 이행과정이 필요하다. 그 과정에서 가장 경계해야할 우리 내부적 위험요인은 무엇일까. 전문가들의 대답은 비슷했다. 바로 사(私)가 개입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비핵화라는 본질 이외의 어떤 욕심이라도 끼어들면 프로세스가 망가진다는 것이다. 홍보욕구, 지지율, 업적 남기기 유혹 등이 그것이다. 2차 북핵 위기의 시발점인 2002년 미 정보 당국은 북한이 고농축우라늄(HEU) 프로그램 장비를 유럽 등에서 구입한 영수증 등을 입수했다. 한국 정부도 휴민트(탈북자의 증언 등)를 통해 북한의 HEU 개발 가능성 첩보를 입수해 미국에 전달했다. 미국은 그해 여름 북한이 HEU를 추진하고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요즘 뉴스의 인물인 존 볼튼 안보보좌관 내정자가 이때 등장한다. 당시 국무부 군축·국제안보 담당 차관이었던 볼튼은 2002년 8월 극비리에 한국에 와 HEU 관련 정보를 전달했다. 이어 9월에 열린 한미 외교장관회담에서 콜린 파월 국무장관이, 10월 제임스 켈리 국무부 차관보가 한국 정부에 재차 이를 얘기했다. 이어 켈리 차관보 일행이 10월 평양에 갔을때 강석주 외무성 1부상은 HEU 프로그램을 사실상 시인하는 발언을 했다. 방북단은 서울에 들러 한국정부에 강 부상의 발언내용을 설명했다. 그리고 북한의 제네바 합의 위반을 이유로 12월 중유공급을 중단했다. 하지만 한국정부 핵심 관계자들은 HEU 프로그램 존재를 반신반의하며 지속적으로 의문을 제기했다. 미 정부 핵심관계자는 현직에서 물러난뒤 “당시 김대중 정부는 HEU 문제의 심각성에 대해 전혀 감을 못 잡았다”며 “정책의 희망과 굳어져버린(정책의) 우선순위가 이성적 판단을 가로막은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북한은 나중에 강 부상 발언 자체를 부인하면서 미국이 먼저 중유공급 중단 등 제네바합의를 깨서 핵개발을 재개했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지금도 한국내 일부 좌파세력이 북핵 위기 미국 책임론을 주장할 때 비슷한 논리를 편다. 그러나 파키스탄 핵개발의 아버지로 불리는 압둘 아디르 칸 박사가 북한이 1990년대 후반부터 파키스탄의 은밀한 도움을 받아 핵개발을 진행해온 사실을 2000년대 중반 증언함으로써 책임론 논쟁은 종지부를 찍었다. 노무현 정부 때인 2007년 10월 남북정상은 종전선언을 위한 3자 정상회담에 합의했다. 그러나 미국과는 사전 합의가 안 된 것이었다. 미국은 평화협정은 관계정상화와 비핵화가 완료되는 시점의 일로 봤다. 상징적 이벤트로 종전선언이 필요하다면 정전협정이 평화협정으로 대체되는 시점에 자연스럽게 이뤄져야한다는 입장이었다. 임기 내에 한반도 평화구축의 업적을 남겨보려는 의욕에서 성급히 추진한 결과 성과는 제로였다. 이번에도 청와대와 여권에선 3자 종전선언 추진론이 나오고 있다. 단계적 보상론도 나온다. 하지만 트럼프는 볼튼을 내정하는 등 보상에 대해 완강한 자세다. 필자는 2007년 볼튼을 인터뷰했다. 볼튼은 기존 북한과의 합의들이 실패한 것은 비핵화 약속만으로 제재를 해제해줬기 때문이라며 보상과 제재 해제는 완전한 비핵화 단계에서 이뤄져야한다고 여러번 강조했다. 일각에서는 볼튼은 엄포용 카드에 불과하다고 관측하지만, 볼튼은 모양내기 자리에 불과하다면 바로 뛰쳐나올 사람이다. 거의 매주 자신의 주장을 담은 e메일을 지인그룹에 보내며 지지클릭을 요청하는 집요한 인물이다. 지난번 미 대선 때 후보로 나서려 했을만큼 야심도 있다. 트럼프는 겉보기에 이 정도면 성공이라는 수준의 성과를 안고 회담장을 나설 수 있을 것이다. 얽힌 실타래를 한번에 잘라버리는 고르디우스 매듭식 해결처럼 보일지 몰라도 비핵화 이행의 길고 긴 행로가 남아있다. 그나마 지금 북미회담 단계까지 올라선 것은 압박의 효과다. 유일한 무기인 대북 압박은 끝까지 버리면 안 된다. 북핵은 북핵으로만 다뤄야한다.이기홍 논설위원 sechepa@donga.com}

    • 2018-03-29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오늘과 내일/이기홍]6년 전 비핵화를 약속했던 김정은

    “미국과 북한은 다음과 같이 합의했다. ①북한은 비핵화 의지를 보이기 위해 장거리 미사일 발사, 핵실험 및 우라늄 농축을 포함한 영변에서의 핵 활동에 대한 모라토리엄 이행에 동의한다. ②북한은 영변의 우라늄 농축 활동에 대한 모라토리엄의 검증·감시와 5MW 원자로 불능화를 확인하기 위한 IAEA 사찰단의 복귀에 동의한다…” 신문에 이런 뉴스가 나오면 얼마나 놀랍고 반가울까. “문재인 대통령이 북한 김영철에게 비핵화의 필요성을 처음으로 언급했다”는 소식에 기대에 부푸는 게 우리의 현실이니…. 그런데 앞에 소개한 문장들은 6년전 아침 실제로 벌어진 일이다. 2012년 2월 29일 미국과 북한은 ‘2·29 합의’를 동시 발표했다. 당시의 북한 최고지도자 역시 김정은이었다. 미-북간 중매자를 자임하는 문 대통령의 노력이 6년 전 같은 합의를 재현할 수 있을까? 요즘 국내에서는 김영철이 비핵화 언급을 ‘경청’하고 북미대화를 할 용의가 있다고 한데 대해 기대를 거는 분위기다. 그러나 미국의 기류는 다르다. 미 행정부 기류에 정통한 전문가들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아직은 진정한 협상 타이밍이 아니라고 본다”고 전했다. 트럼프 같은 ‘장사꾼’은 딜을 할때 벼랑 끝 막바지까지 몰고가서 ‘올 오어 나싱’(All or Nothing)의 선택을 요구한다. 기업간 인수합병 협상을 다룬 영화에서 많이 봐온 장면들이다. 모든 걸 잃는 위험을 불사해야 협상이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트럼프가 북한과 진짜 협상을 할 적기라고 생각하는 시점은 북이 압박에 밀리고 밀려 벼랑 끝에 서고 선제타격의 분위기가 최고조에 달한 상황이라는 것이다. 핵포기냐 붕괴냐는 기로에 서야만 김정은이 문제해결 의지를 갖고 협상에 임할거라는게 트럼프의 판단이라고 한다. 물론 그 타이밍이 될 때까지 트럼프가 북한과의 대화를 아예 거부할 것이라는 설명은 아니다.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대화의사도 밝히고 다음날은 다시 얼굴을 붉히고, 또 다음날은 한번 만나보라고 지시할 수 있지만, “벼랑 끝까지 압박해야만 진짜 협상이 시작된다”는 큰 흐름은 전혀 변함이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김정은은 진정 태도변화가 있는걸까? 전문가들은 이 역시 고개를 흔든다. 지금까지의 제재와 압박이 효과를 거두지 못해서가 아니라, 북한의 특수성을 잘 알기 때문이다. 북한정권은 주민 200만 명이 굶어죽어도 마이웨이를 고집한 체제다. 국제제재로 궁지에 몰려있지만 김정은은 비핵화는 추호도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궁색할대로 궁색해진 상황에서 한국을 약한 고리로 끌어내는게 나쁘지 않다고 판단해 남쪽을 향해 비둘기를 날렸다는 해석이다. 그러면서 남북정상회담 카드도 내밀었다. 김정은은 정상회담이 진보 보수를 막론하고 남한 대통령들이 뿌리치기 힘든 유혹이란 걸 안다. 정상회담을 위해서는 미-북관계의 진전이 있어야 하므로 남한은 계속 중매에 나설테고, 그 결과 한미균열이 생기거나 미국과 협상할 기회가 생기거나 둘중의 하나라 계산했을 것이다. 대화는 필요한데 미국과 북한의 본심이 이래선 전망은 밝지 못하다. 6년 전엔 어떻게 협상타결이 가능했을까. 당시 한국과 미국은 1년 넘게 작업해 공동 스크립트(원고)까지 만든뒤 2011년 7월 김정일의 북한을 상대로 협상에 돌입했다. 1차로 남북이, 2차로 미-북이, 3차로 남북이, 4차로 미-북이 마주 앉았다. 한국과 미국이 태그매치를 벌이듯이 번갈아 북한을 상대하는데 조금의 균열도 없이 한 목소리를 냈다. 12월 김정일 사망으로 잠시 멈춘 협상은 2012년 2월 미-북간의 세 번째 회담에서 타결됐다. 김정은은 불과 영양지원 24만 t과 비핵화의 길로 접어들겠다는 약속을 맞바꿨다. 그러나 막 권좌에 올라 결재도장을 찍은 6년 전의 김정은과 지금은 다르다. 김정은은 불과 한달여 뒤 로켓을 발사해 합의를 깨더니 4차례의 핵실험과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개발에 몰두했고 그 결과 상당히 센 패를 쥐고 있다. 협상 난도는 6년 전과 비교도 안된다. 김정은을 그로기상태까지 압박하지 않는 한 어떤 협상도 성과를 내기 어렵다고 보는 트럼프의 판단이 불행히도 현실을 더 정확히 읽은 것일 수 있다. 난도는 높아졌는데, 가장 큰 무기인 한미공조는 어떤가. 스크립트까지 공유했던 6년 전에 비해 지금은 한국 대통령이 “미국은 문턱을 낮추라”고 공개적으로 요구하고, 미국 대통령은 북한과 협상에 나섰던 전직 대통령들을 열거하며 “그들은 25년 동안 대화를 해왔다. 그리고 무슨 일이 생겼는지 아느냐”고 성토하는 상황이다. 한미간에 공동 스크립트는 커녕 로드맵이라도 공유하는게 있는지 걱정스럽다.이기홍 논설위원 sechepa@donga.com}

    • 2018-03-01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오늘과 내일/이기홍]미국이 무섭고 돈도 떨어진 김정은

    미국은 정말 북한을 때릴까? 그럼 북한은 어떻게 반응할까? 이런 궁금증을 조금이라도 풀어보려면 미국과 북한 정권의 속성부터 살펴봐야한다,△평양의 속성=“북한도 나라인데, 어떻게 그런 결정을 할 수 있을까요?” 2010년 천안함 폭침 사건 수개월후 정통한 북한전문가들에게 비보도를 전제로 물었다. 북한 잠수정의 어뢰 공격으로 침몰했다는 조사결과를 못 믿어서가 아니라, 전시도 아닌 상황에서 남의 해역에 잠수정을 보내 해군선박에 어뢰를 쏘고 도망간다는, 소설 속에서도 상상하기 힘든 그런 비합리적이고 무모한 결정이 도대체 어떻게 한 나라의 정부 시스템내에서 이뤄질 수 있는 것인지 납득이 안간다고. 아무리 허접해도 북한도 국가는 국가 아닌가. 답은 이랬다. “모 재벌 회장이 가죽장갑을 끼고 술집에 찾아가서 종업원들을 팼습니다. 정상적인 의사결정 시스템이라면 참모들이 말렸겠지요. 하지만 보스가 격앙상태에서 결정하면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하는 조직문화가 우리 주변에도 많지 않습니까.” 그렇다. 보스가 결정하면, 아무리 비합리적이어도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그런 조직들이 있다. 대표적인게 조폭인데, 평양정권의 속성이 바로 그것을 닮았다는 설명이었다. 물론 북한에도 형식상의 논의 시스템은 있지만 최고지도자가 결정하면 그대로 시행이다. 행정부가 있지만 집행기관일 뿐, 김정일때는 군(軍), 현재는 당이 중심이다. 아웅산 테러, KAL기 폭탄 테러 등 정상적인 국가 시스템에선 도저히 이뤄지기 힘든 결정들의 비밀은 봉건적 전제군주제 분위기 속에서 이뤄지는 조폭식 의사결정 구조에 있는 것이다.△워싱턴의 속성=“CSAR은 어떻게 됐지?” 9·11테러 수주후인 2001년 9월말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매일 국가안보회의를 주재하며 CSAR 진전 상황을 챙겼다. CSAR는 ‘수색 및 구조 작전(combat search & rescue)’를 뜻한다. “미군 전투기가 적진에 추락할 경우 구조대를 보낼 수 있는 전진기지가 구축되기 전에는 작전을 개시할 수 없다. 그게 기본원칙(bedrock doctrine)이다”는 합참의장의 말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프가니스탄 탈레반 정권 공격을 위한 항공모함 이동 배치 등 군사적 준비는 이미 수주전 완료됐지만 부시 대통령은 조종사 구출 대책이 완비되기 전에는 공격 개시 명령을 내릴 수 없었다. 미 행정부는 자국민의 생명보호를 최우선에 둔다. 군인, 소방관 등 제복을 입은 사람들의 희생은 불가피한 것으로 여기며 전쟁결정을 여러번 내렸지만, 일반 시민이 위험에 빠질 수 있는 상황을 조장하거나 방치하는 것은 대통령직의 종말을 뜻한다. 그래서 많은 미국내 전문가들은 북한에 대한 선제타격 가능성을 사실상 제로(0)로 봤었다. 북한 보복공격 사정권내(한국)에 주한미군을 포함해 미국시민권자 20여 만명이 있는데 이들의 안전에 대한 확실한 대책없이 군사작전을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먼저 소개(疏開)작전을 해야하는데 이는 비밀리에 이뤄질 수 없다. 예고된 공습은 북한의 대응력을 높여줘 작전성공 난이도가 너무 높아지고 확전 가능성이 커진다. 그런데 트럼프 행정부 들어 ‘코피 터뜨리기 작전’이 등장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코피작전은 1990년대 중반 빌 클린턴 행정부가 검토했던 영변 핵시설 폭격이나 최근 수년간 거론된 ‘외과적 정밀타격론’과는 성격이 다르다. 이는 북한의 등골을 오싹하게 하되, 김정은이 체제 붕괴를 각오하고 무력으로 대응할 정도는 아닌 그런 제한적 기습작전이다. 북한이 나포해 50년째 대동강에 전시하고 있는 미국 선박 푸에블로호 폭파, 회령 등지의 김일성 동상 폭격 등이 예시로 거론된다. 아이들 싸움에선 한쪽이 코피가 나면 싸움이 끝난다. 그러나 북한이 별다른 보복공격에 나서지 않을 만큼의 기습타격이 어느 수준인지를 놓고 미국 내에서도 논란이다. 빅터 차 주한대사 내정자 낙마도 이런 논란 속에서 빚어졌다. 장성택 처형, 김정남 암살 등에서 보듯 평양 정권의 조폭적 의사결정 속성은 변하지 않았다. 그런데 조폭은 힘 앞에선 비겁하다. 힘이 센 상대를 향해 도발의 목소리를 높이다가, 어느 단계에 이르면 멈춘다. 조직원이 잡혀가도 검찰청이나 경찰청을 직접 공격하지는 않는다. 잘못 건드렸다가는 보스 자신이 끝장난다는걸 알기 때문이다. 김정은은 어느 수준의 도발이 트럼프 행정부가 군사작전을 감행할 명분과 방아쇠가 될 것이라는 것을 알고 그 앞에서 발만 세게 구르고 있다. 게다가 지금 김정은은 돈 떨어진 보스 처지다. 조폭 보스는 돈과 술, 룸살롱으로 조직원들을 다스린다. 평양 정권은 달러와 광산채굴권 등의 특혜로 당과 인민군을 다스려왔으나 국제제재로 달러와 에너지 조달이 거의 막혔다. 그래서 김정은은 대남 유화 공세에 나설 수 밖에 없었다. 한국이 주선해준다면 못이기는체 미국과 테이블에 앉아서 핵은 유지하고 ICBM은 동결하는 식으로 협상을 해볼 심산일 것이다. 조폭을 통제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힘이다. 그 이외의 가치로는 설득이나 통제가 안된다. 조금만 더 압박의 강도를 높여서 인내심을 갖고 지속적으로 제재한다면, 김정은은 더 변하고, 무력충돌 위험지수는 계속 내려갈 것이다.이기홍 논설위원 sechepa@donga.com}

    • 2018-02-15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오늘과 내일/이기홍]백구가 평창에 못 간 이유

    “마스코트는 개로 하시죠.” 2016년 초 평창동계올림픽조직위원회에 작은 비상이 걸렸다. 올림픽 마스코트를 무엇으로 정할지 청와대의 의견을 구했더니, 개로 했으면 좋겠다는 답이 왔다. 박근혜 대통령이 직접 낸 의견인지, 참모가 건의한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 취임식날 진돗개 백구 강아지를 안고 청와대에 입성했던 박 대통령이 우리 민족의 자랑스럽고 영리한 순종 견종인 진돗개나 풍산개 백구가 평창의 하얀 눈과 어울리는 이미지라고 생각했을 듯 싶다. 그러나 그해 4월 김종덕 당시 문화체육부장관과 조양호 조직위원장이 스위스 로잔으로 가 토마스 바흐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장에게 그 의견을 전달했더니 펄쩍 뛰었다. “아니, 지금 그러지 않아도 한국의 개 식용 문제 때문에 세계 곳곳에서 올림픽 보이콧 주장이 나오는데, 어떻게 개를 마스코트로 합니까.”올림픽 마스코트는 기념품 판매 등 올림픽 수익에 큰 영향을 미친다. IOC는 개를 무자비하게 잡아먹는 나라라는 오명을 쓰고 있는 한국에서 열리는 올림픽에 마스코트가 개가 되면, 마스코트 자체가 엄청난 논란에 휩싸일 것으로 우려한 것이다. 결국 IOC의 반대로 다시 논의한 결과 평창 마스코트는 백호(수호랑)과 반달곰(반다비·패럴림픽)으로 결정됐다.  바흐 위원장의 우려대로 한국의 개식용에 반대하는 해외의 목소리가 다시 커지고 있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본부를 두고 있는 청원 전문 사이트인 ‘change.org’에는 문재인 대통령에게 잔혹한 개 도살을 중지시켜달라고 요청하는 ‘평창올림픽 보이콧’이란 제목의 청원캠페인이 진행되고 있는데 31일 현재 서명자가 46만 명을 넘었다. 이밖에도 이 사이트에만도 한국의 개도살과 올림픽을 연관시킨 청원이 200건 가까이 진행되고 있다. 휴메인소사이어티인터내셔널, 코리안독스 등 여러 단체들도 올림픽 스폰서인 글로벌 기업들에게 압박을 가하고 있다. 올림픽, 월드컵 등 한국에서 열리는 국제행사를 앞두고 해외 동물애호단체들이 개고기 반대 운동을 펼치는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1988서울올림픽 때부터 보신탕은 사철탕, 영양탕 등으로 이름을 바꿔달아야 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강원도는 평창과 강릉 일대의 개고기 식당들에 대해 일시적으로라도 간판의 표현을 톤다운하면 수백만원, 업종을 변경하면 최대 2000만원씩을 지원해 준다. 평창에선 9곳 정도가 간판을 바꿨지만 강릉의 식당들은 별로 응하지 않고 있다. 눈가리고 아웅이지만, 고육지책이었을 것이다. 외국의 눈을 너무 개의할 필요는 없다. 우리에게 정말 소중한 문화라면 해외에서 뭐라해도 지켜나가야 한다. 그런데 갤럽 조사에 따르면 2015년 기준으로 지난 1년간 한번이라도 개고기를 먹어본 한국 사람은 27%에 불과했다. 2030 세대는 17%다. 우리사회에서 개식용 문화는 점점 사라지고 있다. 그런데 소수의 ‘미식가’를 겨냥한 식용견 비즈니스로 인해 우리 사회가 지불하는 정신적 고통, 국가 이미지 손상은 너무도 크다.  현재 평창을 포함해 전국에는 3000여 곳의 개농장이 있으며, 매년 150~200만 마리가 도살되고 있다. 소·돼지처럼 인가된 도축장에서 법이 규정한 고통을 최소화하는 방법으로 도살하는게 아니라, 전기봉으로 지지고 몽둥이로 때려죽이는 등의 잔혹한 도살방법이 버젓이 자행되기도 한다. 1㎡ 남짓한 철망에 여러마리가 헝겊인형처럼 구겨진채 트럭에 실려 온 개들이 철망에서 안나오려하자 쇠꼬챙이로 찍어서 꺼내는 장면도 목격됐다. 식용견과 반려견의 구분 자체가 무의미한 것이지만, 재래시장이나 대도시 인근의 개도살장에 가보면 반려견으로 흔히 키우는 푸들 래브라도 진돗개 등도 수두룩하다. 일부 개농장의 열악한 환경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다. 사람이라면 고통스러워서 10분도 앉아 있지 못할 바닥까지 창살로 되어있는 우리에서 음식물쓰레기를 먹으며 자라다 도축장으로 끌려간다. 우리사회의 애견 인구는 천만명을 넘어섰다. 문재인 대통령도 풍산개 마루와 유기견 토리를 끔찍이 아낀다. 그런데 같은 하늘 아래서 매년 백만마리가 넘는 개들은 최악의 조건에서 사육되다 끔찍한 고통을 받으며 도살돼 고기로 팔려간다. 이런 식의 사육과 도살은 동물보호법 등 현행법 위반이지만, 정부의 대응은 소극적이기만 하다. 개고기를 즐기는건 개인의 취향이니 왈가왈부할 필요 없다해도, 잔혹하고 비위생적인 사육과 불법적 도살은 법을 엄격히 적용해 종식시켜야한다. ‘소, 돼지, 닭은 먹으면서 왜 개고기는 문제삼느냐’는 식의 단선적 주장으로 상황을 도돌이표처럼 머물게 하면 안된다. 생명은 모두 소중하지만 지능과 감성, 교감능력의 스펙트럼에서 고등동물로 갈수록 그 생명을 빼앗을 때의 명분과 인간에게 주는 유용성이 비례해서 커야만 한다. 개는 그 스펙트럼에서 가장 고등동물 쪽에 있으며 인간에 대한 충성심과 친밀도가 특히 깊은 동물이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가족처럼 여긴다. 개고기 애호가라할지라도 현재와 같은 비위생적이고 잔혹한 사육·도살을 찬성하는건 아닐 것이다. 1988서울올림픽은 우리사회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1987년 봄 민주화 요구를 강경 진압할 태세였던 전두환 정권이 탱크를 동원하지 못한 주요 이유 중 하나가 올림픽이었다는 것을 나중에 알고나서 올림픽의 힘을 새삼 느꼈다. 평창올림픽도 우리사회 업그레이드에 큰 동력이 될 것이다. 그중의 작지만 의미있는 성취 중 하나로 평창올림픽이 잔혹한 개도살과 개농장이 사라지는 큰 전환점이 되었다는 기록이 남길 바란다.    이기홍 논설위원 sechepa@donga.com}

    • 2018-02-01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사설]“北에 양보하는 실수 더는 없다”… ‘평창 이후’ 벼르는 트럼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어제 연두 국정연설에서 “북한의 무모한 핵무기 추구가 우리의 본토를 곧 위협할 수 있다”며 그런 일이 없도록 최대의 압박을 가하고 있다고 말했다. 특히 “현실 안주와 양보는 침략과 도발을 불러들일 뿐”이라며 “우리를 위험한 상황으로 몰아넣었던 과거 행정부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북핵 위협의 본질을 잔혹한 북한 정권에서 찾으며 북한에 억류됐다가 송환 엿새 만에 사망한 미국 대학생 오토 웜비어 씨와 목발에 의지해 북한을 탈출한 꽃제비 출신 탈북자 지성호 씨를 사례로 들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연설에서 북한의 인권 탄압 실상에 상당한 시간을 할애했다. 향후 추진할 대북정책을 구체적으로 밝히진 않았지만, 압박 기조를 최고로 끌어올려 초강경 대응을 하겠다는 대북 메시지로 읽힌다. 특히 빌 클린턴 행정부 이래 미국의 대북정책이 미국을 더욱 위험하게 만든 ‘실수’라고 단언하며 적당한 타협은 결코 없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최대 압박으로 북한의 숨통을 바짝 죄어 비핵화 테이블에 나올 수밖에 없도록 만들 것이며, 무모한 도발을 차단하기 위해선 군사적 옵션도 선택하겠다는 뜻을 내비친 것이다. 최근 평창 올림픽을 계기로 한 남북 해빙 무드에도 트럼프 대통령의 대북 자세는 더욱 강경해졌다. 주한 미국대사로 내정됐던 빅터 차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한국석좌가 낙마한 것은 트럼프 대통령의 대북 군사옵션에 이견을 나타낸 때문이라고 미국 언론은 보도했다. 차 석좌는 ‘매파적 관여정책’ 같은 강력한 대북 압박을 주창해온 인물이다. 그런 강경파마저 북한에 제한적 타격을 가하는 ‘코피 터뜨리기(bloody nose)’ 작전에 이견을 보였다고 해서 배제됐다면 트럼프 대통령의 심중엔 과연 어떤 대북 조치가 담겨 있을지 궁금하다. 트럼프 대통령의 강경 자세는 최근 북한의 태도와도 무관치 않을 것이다. 특히 북한이 대남 평화 공세를 펴면서도 남측에 ‘비핵화’는 입도 벙긋 못하게 하고, 평창 올림픽 개막 전날엔 장거리 미사일 수십 기를 앞세워 열병식을 벌일 것이라는 소식은 그의 대북 혐오감을 더욱 키웠을 것이 분명하다. 평창 올림픽 이후에도 북한의 태도에 변화가 없다면 한반도 정세는 또다시 일촉즉발의 전쟁위기설에 휩싸일 공산이 갈수록 커지고 있는 것이다. 어제 남북 공동 훈련을 위해 우리 스키 선수들을 태운 전세기의 방북 비행 일정은 이륙 2시간 전에야 확정됐다. ‘북한을 다녀온 항공기는 180일간 미국에 들어올 수 없다’는 미국 대북제재의 예외 인정 문제를 두고 한미 간 이견 조율이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막판에야 미국이 예외를 인정하기로 했지만 제멋대로 합의도 취소해 버리는 북한과 달리 어떻게든 남북 이벤트를 성사시키려는 우리 정부의 모습이 안쓰럽기까지 하다. 평창 이후 북-미가 대결로 치달을 경우 우리나라가 설 자리가 어디일지 새삼 의문을 갖게 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 2018-02-01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횡설수설/이기홍]촌철살인 3만 걸음

    ‘釋迦大士 四十九年 橫說竪說(석가모니께서 49년간 횡설수설하셨다)’ 횡설수설은 이랬다저랬다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게 떠드는 말이다. 그런데 원뜻은 반대였다. 가로(橫) 세로(竪)로 거침없이 오가면서 알기 쉽게 조리에 맞게 설명해주는 걸 뜻했다. 석가모니가 불교를 전파할 때 말과 단어를 적절하게 바꿔 가면서 이해하기 쉽게 설명했는데 이를 횡설수설이라고 했다고 한다. ▷동아일보 100호째인 1920년 7월 25일자 1면에 ‘횡설수설’ 칼럼이 탄생신고를 한다. 첫마디는 “천언만어(千言萬語)가 횡설수설에 불과할 것”이라고 했으나 웬걸…, 바로 다음 문장부터 인광이 번득이고 죽비로 내려친다. “걸핏하면 몇 조 위반을 걸어서 인쇄기에서 떨어지는 신문지를 산더미같이 실어서 경찰서로 잡아가는, 언론자유라는 도금광고판이 잔해도 없이 참혹하게 유린되는 판”이라고 시대를 비판한다. 3·1운동 7주년 축전 게재로 무기정간을 겪고 난 뒤엔 “언론기관은 정지가 아니면 금지”라고 비판해 집필기자가 징역 8개월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1940년 8월 일제의 동아일보 강제폐간 조치로 횡설수설의 입도 닫힌다. ‘어디 두고 보자’는 외마디를 남긴 채. ▷1955년 1월 1일 되살아난 횡설수설은 이승만, 유신, 5공 정부에 걸쳐 권력에 대한 풍자와 비판을 이어간다. 4·19혁명 때인 1960년 4월 21일자는 “어제 장정들이 총탄에 맞아 나무토막처럼 쓰러지는 무시무시한 광경… 그저울음만이복바쳐오른다. 하도기가차니 붓대도안돌아간다”고 했다. 1987년 서울대생 박종철 군이 숨진 지 사흘 뒤인 1월 17일자에서 “박 군의 죽음은 돌이킬 수가 없구나”라며 애통해한 것을 시작으로 근 한 달간 거의 매일 통렬한 비판을 내뿜는다. ▷횡설수설은 올해로 만 98세를 맞는 국내 최장수 칼럼이다. 그러나 언론의 가장 중요한 평가 기준은 역사의 길이가 아니라 정신이다. 정확 신속 공정을 기하는 책임감이다. 32년 전 동아일보 지령 2만 호 때 횡설수설은 이렇게 썼다.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그 정신을 날로 회춘해가는 신문이야말로 장수를 누린다.” 횡설수설의 혀는 4만 호, 10만 호의 그날까지도 매일매일 젊어질 것이다. 이기홍 논설위원 sechepa@donga.com}

    • 2018-01-26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횡설수설/이기홍]사람이 빨간등이다

    차도와 인도가 나란히 있는 좁은 길. 사람이 차도로 한 발 내려선다. 순간 주변을 오가던 차들은 스르르 멈춘다. 미국이나 유럽의 도시에서 흔한 장면이다. 그렇다고 그곳 운전자들이 뭐 대단히 준법정신이 투철한 건 아니다. 보행자가 없을 때는 신호등을 무시하고 그냥 가는 차들도 숱하다. 다만 ‘사람이 빨간불이다’라는 인식이 깊이 박혀 있을 뿐이다. ▷정부가 23일 ‘교통안전 종합대책’을 확정했다. 보행자와 교통약자(어린이, 고령자)를 교통정책의 핵심 축에 두고, 연간 교통사고 사망자를 2022년까지 현재의 절반인 2000명대로 줄인다는 청사진이 제시됐다. 지금은 신호등이 없는 횡단보도에서 사람이 건너고 있을 때만 정지하면 됐지만, 앞으로는 사람이 횡단보도 끝에 서 있기만 해도 멈춰야 한다. 교차로에서 우회전 직후 나타나는 횡단보도가 보행신호(녹색등)일 경우 지금은 건너는 사람이 없으면 차가 그대로 지나간다. 그러나 앞으로는 우회전 시 횡단보도 앞에서 반드시 멈춘 뒤 보행자가 없는 걸 확인한 뒤에 천천히 통과해야 한다. 도심 차량 제한속도는 시속 60km에서 50km로 줄어든다. ▷1960년 1402명이던 교통사고 사망자 수는 1975년 포니 양산과 함께 마이카 시대가 시작되면서 급속한 상승곡선을 그리다 1991년 1만3429명으로 정점을 찍었다. 이후 완만한 하향곡선을 그리다 2014년 37년 만에 다시 5000명 밑으로 줄어들었다. 여기엔 동아일보가 2013년 1월부터 펼친 ‘시동 꺼! 반칙운전’ 캠페인이 큰 영향을 미쳤다는 게 교통전문가들의 평가다. 동아일보는 현재의 ‘교통사고 사망자 2000명 줄이자’까지 6년째 경찰청과 함께 교통안전 캠페인 중이다. 그럼에도 2016년 4292명이 아까운 목숨을 잃었다. ▷야심 찬 안전대책이 나와도 시간이 지나면 실행 의지가 흐물흐물해지는 경우가 많다. 이번 교통·산업 안전대책은 예외여야 한다. 국회도 신속한 입법으로 지원해야 한다. 전 좌석 안전띠 의무화, 통학버스 운전사 자격제, 음주운전 단속 기준 강화는 국회에서 1년 넘게 상임위 통과도 못 하고 있다. 이기홍 논설위원 sechepa@donga.com}

    • 2018-01-24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오늘과 내일/이기홍]한 상(床) 차려 올리려는 사람들

    박승춘 전 국가보훈처장이 12일 검찰에 소환됐다. 박 씨는 문재인 정부 출범 이튿날 쫓겨난 청산 1순위 인물이었다. 검찰 소환까지 8개월이나 걸렸으니 샅샅이 털었을 듯싶은데 주된 혐의는 의외다. 예비역 장성이 주축이 된 국가발전미래교육협의회 회장 때 국가정보원 지원을 받아 정치적으로 편향된 안보교육을 하고, 보훈처장 시절 국정원이 만든 안보교육용 DVD 세트 1000개를 배포했다는 것이다. 필자는 박 씨를 옹호할 마음이 없다. 박 씨가 ‘임을 위한 행진곡’을 퇴출시키려 했을 때(2013년 5월) 그런 낡은 발상을 퇴출시키라고 대통령에게 촉구하는 기명칼럼을 쓰기도 했다. 하지만 해당자의 이념적 편향성과 별개로, ‘얼마나 감옥에 보내고 싶었으면 이렇게라도 잡아넣으려는 걸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검찰은 ‘공영방송 적폐청산’에는 MBC 전 사장에게 국정원법을, 청와대 전 홍보수석에겐 방송법을 사상 처음 적용했다. 감사원 고용노동부 등도 열심히 뛰었다. 최근 최저임금 논란이 벌어지자 노동부는 위반 사업주 명단을 공개하겠다며 또 한번 의욕을 과시했다. 정권이 바뀌면 멋들어지게 한 상(床) 차려서 위에 올리려는 충성경쟁이 벌어진다. 정권의 코드와 핵심 지지층 정서를 읽은 뒤 경주마처럼 앞만 보고 달린다. 그런 경쟁 속에서 중립성과 형평성을 충언하는 공직자는 찾기 어렵다. 공영방송의 경우 사장 인선 중립성을 강화한 여야 합의 방송법 개정안이 있으니 새 법에 따라 경영진을 교체하면 방송 장악이라는 ‘진짜 적폐’를 끊을 수 있었을 텐데, ‘돌진 경쟁’만이 벌어졌다. 앞만 보고 달려가는 사냥개는 결국 주인에게 큰 화를 미친다. 이명박 정부 인사들은 원세훈을 국정원장에 앉힌 게 MB의 최대 실책이었다고 입을 모은다. 박근혜 정부의 김기춘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뭐든지 시키면 100%가 아니라 수백 % 더 물어오는, 일 잘하는 이로 소문났지만 결국 오버에 오버를 거듭했다. 대선을 1주일 앞둔 1992년 12월 11일 초원복국에서 김기춘 전 법무장관이 “(접대 등 선거운동을) 검찰에서도 양해할 거야. 경찰청장도 양해”라고 하자 박일룡 부산경찰청장은 “양해라뇨. 제가 더 떠듭니다”라고 한발 더 나갔다. 박 청장은 그 후 경찰청장 안기부 차장으로 승진했지만 학생 시위에 대한 총기 사용 엄포, 불법 감청 사건 등으로 정권에 큰 부담을 줬다. 과유불급이라 했듯이, 오버하는 이들은 언젠간 자신이 속한 그룹에 피해를 주게 마련이다. 오버한 걸로는 추미애 여당 대표의 16일 신년회견도 거론치 않을 수 없다. 추 대표는 최저임금 논란에 대해 “재벌과 보수 언론은 광복 이후 누려온 막대한 불로소득의 구조가 드러날까 봐, 불평등과 양극화의 나라가 대대손손 보장해주었던 후손들의 미래가 잘못될까 봐 두려운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개헌에 대한 야당의 태도를 놓고 전두환 시절을 언급하면서 “30년 전, 호헌세력과 개헌세력 간의 대결이 재연되는 것 같다”고 했다. 1980년대 영구집권을 획책하는 군부정권에 맞서 젊은이들이 목숨을 걸고 벌였던 직선제 개헌 투쟁을 현재의 개헌 상황에 대입하는 발언을 듣고, 추 대표가 80년대를 잘 몰라 오버했나 싶어 검색해 봤다. 추 대표는 1958년생으로 82년 사법시험 합격 후 95년까지 판사로 재직했다. 5공과 연관돼 지난해 11월 국회에서 임종석 비서실장이 자유한국당 전희경 의원에게 한 말도 떠올랐다. “군인들이 (1980년) 광주를 짓밟고 민주주의를 유린할 때 전 의원님이 어떻게 살았는지 제가 살펴보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인물정보를 찾아보니 전희경 의원은 1975년생이다.이기홍 논설위원 sechepa@donga.com}

    • 2018-01-18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오늘과 내일/이기홍]촛불정신 誤讀 말라

    ‘촛불정신’은 새해에도 문재인 정부의 핵심 신조(信條)가 될 전망이다. 이 정부 출범 후 적폐청산 등 개혁 드라이브의 속도와 방향의 적절성 등에 이견이 제기될 때마다 여권 인사들이 “계속 진행”을 외치며 내놓은 정당성의 근거는 촛불정신이었다. ‘진보 역량 확산 vs 탈이념’ ‘과거 단죄 vs 미래·통합’ ‘성장 vs 분배’ 등 상충되는 가치 사이에서 치열한 토론과 시뮬레이션을 거쳐 최선의 조합을 찾아내야 할 정치인과 관리들은 ‘촛불정신’이라는 한마디만 나오면 눈가리개를 한 경주마처럼 내달렸다. 새해 장관들과 여권 인사들의 신년사에서도 “촛불정신의 초심을 잃지 말고 정책으로 구현하자”는 말이 쏟아졌다. 과연 촛불정신은 무엇일까. ‘나라다운 나라’를 강조해 온 문 대통령은 3일에도 “공정하고 정의로운 대한민국을 만들라는 국민 뜻”을 강조했다. 광화문을 메웠던 시민들이 원한 나라다운 나라는 어떤 것이었을까. 촛불정신을 객관적으로 해석하기 위해 6월항쟁의 예를 생각해 보자. 6월정신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해선 우리 사회 다수가 공통된 의견일 것이다. 즉 유신과 5·17쿠데타로 빼앗긴 대통령 선출권 회복, 고문 강제연행 노동3권 탄압을 일삼는 군부독재의 종식, 인권과 언론의 자유가 보장되는 사회가 당시의 염원이었다. 직격탄과 강제연행을 무릅쓰고 거리를 메운 학생들, 시위대를 향해 티슈 뭉치를 던져주고 물병을 갖다 준 직장인들, 경적을 울려대던 택시 기사들 모두가 염원한 것은 자유민주주의였다. 그러나 당시 시위를 주도했던 학생운동 지도부는 자유민주주의 신봉자는 아니었다. 당시 주요 대학 운동권은 민족해방(NL) 계열, 그중에서도 주사파가 헤게모니를 쥐고 있었다. 1985년까지만 해도 주도권을 쥐고 있던 민중민주주의(PD) 그룹이 남한을 국가독점자본주의 사회로 규정하고 노동자 계급 주도의 사회주의 혁명을 주장한 데 비해 NL은 남한을 식민지·반봉건 사회로 규정했다. 따라서 당장은 봉건적 요소, 즉 독재를 타파하기 위한 민주주의 쟁취가 필요하다는 대중노선을 폈다. 그 결과 양 김 씨 등 기성 정치권과 연대가 가능해졌다. 양키고홈 등 과격했던 구호는 ‘직선제 쟁취’ ‘독재 타도’로 온건 심플해졌고, 박종철 고문치사, 이한열 직격탄 피격 등을 계기로 대중의 폭발적 동참이 이뤄져 세계사에 빛날 민주항쟁으로 이어졌다. 그럼 6월정신은 시위를 조직하고 주도한 NL 그룹과 진보단체들이 목표했던 그런 세상의 구현이었을까. 지금 우리 사회의 누구도, 후세의 역사가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역사적 사건의 핵심 정신은 조직화 세력이 아니라, 희생을 감수하며 참여한 수많은 대중의 공통된 염원에서 찾아야 한다. 촛불집회 주최자는 박근혜정권퇴진비상국민행동이었고 그 핵심은 한국진보연대 등이었다. 당시 광화문의 시민들에게 물어보면 수십만 개의 이유, 다층적이고 다양한 촛불정신이 있겠지만, 그 공통분모는 좌파단체들의 목표와는 달랐다. 6월정신이 NL이 목표로 한 반미자주화, 민족해방이 아니었던 것과 같은 이치다. 좌파 운동권은 과거 “6월항쟁 직후 변혁 역량 확대를 위한 결정적 공간이 열렸는데도 이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다”고 반성했었다. 현 정권의 개혁 정책 드라이브 곳곳에서 엿보이는, 이번 기회에 모든 영역을 진보색채로 바꿔야 한다는 강박관념은 아마도 그런 데서 연유할 것이다. 그러나 시민들이 술 취하고 무능한 선장을 쫓아내고 새 선장을 찾을 때 염원했던 것이 ‘항해 좀 제대로 하라’는 것이었는지, 아예 항로를 완전히 바꾸라는 것이었는지, 그 해답은 이렇다 할 강력한 경쟁 후보 없이 치러진 대선에서 문 후보가 거둔 득표율(41.1%)에서 참고할 수 있을 것이다.이기홍 논설위원 sechepa@donga.com}

    • 2018-01-04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HOT100] 비행기 설계 제작하고, 비행 체험 까지…부산대 ‘항공우주공학과’

    부산 경남은 항공우주산업과 산업적 연계성이 높은 기계부품 제조산업의 집산지이자 국내에서 기계부품 제조산업이 가장 발달한 지역이다. 항공산업 성장의 토대가 형성되어 있는 것이다. 특히 동남권은 전국 항공우주산업 생산의 약 80%를 차지하고 있다. 국내 유일의 항공기 완제기 업체인 한국항공우주산업 본사와 공장이 경남 사천 산업단지내에 자리하고 있어 생산뿐만 아니라 산업체 수에서도 국내 최고의 생산 집적지다. 그러므로 현장 적합성과 창의성을 갖춘 고급 기술 인력에 대한 수요가 지속적으로 창출되고 있다. 또한 부산의 대한항공 Tech Center는 민항기, 군용전투기·수송기, 헬기, 여객기, 화물기 등 다양한 정비능력을 기반으로 국제 통용정비조직을 갖추고 MRO(Maintenance Repair Overhaul)사업을 중점적으로 육성하고 있다. 대학생들의 현장실습 및 인턴쉽을 적극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것이다. 항공우주 관련 부품 기업의 시제품 개발, 양산 및 공정개발을 지원하는 기관은 경남테크노파크 산하 항공우주센터가 유일하다. 항공우주 전문 연구기관은 동남권 지역에 존재하지 않는다. 부산대 항공우주공학과야말로 첨단 항공부품 산업 육성 분야의 특성화를 통해 현장 적합성과 창의성을 갖춘 기술 인력을 체계적으로 양성·공급함으로써 지역 전략산업의 기술 혁신을 유도할 수 있는 학과인 것이다. 항공우주 및 기계 시스템의 고속화, 지능화 추세에 따라 전통적인 항공/기계분야와 IT분야의 융복합 기술에 대한 수요가 급증하고 있다. 보잉사 자료에 의하면 항공기에서 항공IT 및 임베디드 소프트웨어가 차지하는 비중은 전체 가격의 약 45%, 기능의 약 80%에 달하며 세계 항공IT융합시장은 급성장할 전망이다. 이에 비해 우리나라 항공IT산업의 기술력은 선진국의 60%수준에 불과하고, 기술력 국산화율은 20%에 머물고 있는 실정이다. 기존 경상남도의 주력산업과 국가산업단지의 경쟁력 강화를 위해 SW융합을 통한 항공우주산업의 고부가가치화가 강조되고 있다. 항공우주공학과는 이같은 시대적, 지역적 요구에 부응해 항공, 기계, IT분야의 융복합 능력을 갖춘 미래지향적 인재를 양성하고자 특성화된 교육을 추진하고 있다. 1학년때는 수학, 물리학, 화학 및 컴퓨터프로그래밍 등 기초과학 이론 및 전산기술을 배우고 2학년에는 열역학, 유체역학, 운동체역학, 전기전자 등 기계공학의 기본원리를 습득한다. 이러한 전공기초 지식을 기반으로 3~4학년 때에 항공우주공학의 특성화된 교육을 받게 된다. 항공우주공학과 교육과정의 가장 큰 특징은 설계 특성화 교육이다. 저학년에는 설계에 대한 기본적인 개념과 전반적인 수행 절차에 대한 교육과 더불어 창의력을 기르기 위한 기초설계 교과목을 배우고 고학년에는 저학년에서 배운 지식과 기술을 기초로 하고 개별적인 설계 교과목으로부터의 설계 경험을 아우르는 종합설계 교과목을 배운다. 부산대 항공우주공학과는 전국 단일학과에서는 유일하게 2인승 경량항공기, 비행시뮬레이터 및 활주로와 격납고 시설을 갖춘 무인기비행시험센터를 구축하여 운영하고 있다. 2인승 경량항공기 및 비행시뮬레이터는 학부과정의 학생들에게 조종사 관점의 비행 체험 수업을 통해 기본적인 비행원리를 체감할 수 있도록 활용되고 있다. 양산캠퍼스에 있는 무인기비행시험센터는 4차 산업혁명시대 항공우주산업의 항공+ICT 융합영역으로 분류되는 드론으로 대표되는 무인항공기산업의 전문 기술개발을 위한 연구 인프라로 활용되고 있다. 항공우주공학과는 공과대학의 특성화공학부로 1989년에 학사과정을 설립하고 이후 석사, 박사과정을 개설했다. 현재 9명의 교수가 재직중이다. 2017년 현재 학사과정 230명, 석/박사과정 38명의 학생들이 재학 중이다. 이중 남학생이 80%(215명), 여학생은 20%(53명)다. 학과에서 지급하는 장학금은 크게 교내장학금과 교외장학금으로 구분된다. 교외장학금은 국가재원으로 지급되는 국가장학금과 국가우수장학금, 국가근로장학금이 있으며 학과동문이 항공우주공학과의 발전을 위해 출연한 발전기금을 재원으로하는 김태흥 장학금이 있다. 특히, 2014년부터는 지방대학특성화사업에 선정되어 CK장학금을 매학기 지급하고 있다. 2016년을 기준으로 항공우주공학과 학생들이 수혜한 장학금은 등록금대비 평균 59~68%에 이른다. 졸업생의 25~30%는 대학원에 진학하여 전공 심화 과정을 이수하고 있고, 최근 3년간(2014년~2016년) 학부졸업 취업현황을 살펴보면 평균취업율이 81.8% 이고, 이중 진학률이 27.3% 이다. 취업자 중 77%가 대기업에 진출했다. 학부 졸업 후 주로 취업하는 곳은 한국항공우주산업(KAI), 대한항공 등 대기업 항공사와 현대/기아자동차, 삼성중공업 등 기계/자동차관련 대기업과 삼성전자, LG전자 등 IT관련 대기업, 국방과학연구소, 한국항공우주연구원과 같은 연구소, 한국수력원자력과 같은 공기업에 진출하고 있으며 주로 기술연구직으로 입사를 하게 된다. 항공우주공학과 학사, 석사를 졸업하고 한국항공우주산업(KAI)에서 전문연구요원으로 한국형 전투기를 개발하고 있는 이창용 씨는 “모형항공기 동아리에 들어서 수많은 비행기를 직접 설계 제작하고, 비행까지 했던 것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말했다.이기홍기자 sechepa@donga.com이종승전문기자 urisesang@donga.com}

    • 2017-07-18
    • 좋아요
    • 코멘트
  • [오늘과 내일/이기홍]시대를 착각하는 사람들

    며칠 전 미국 워싱턴을 다녀왔다. 그런데 미 수도의 관문인 덜레스 국제공항의 입국 심사 부스는 단 2곳만 열려 있었다. 미국시민권자용 1곳, 방문객용 1곳이 전부였다. 부스 앞에는 긴 줄이 늘어섰다. 예산 때문에 입국심사 직원 수를 줄였다는 불평이 들렸다. 귀국길 인천공항의 모습은 180도 달랐다. 여러 부스에서 입국심사가 진행됐다. 한국국적자는 입국 수속에 30초도 걸리지 않았다. 친절도, 공항시설, 서비스 등에서 워싱턴과는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났다. 20여 년 전 선진국 공항을 이용할 때 우리 공항과의 퀄리티 차이에 한숨을 쉬었던 걸 생각하면 격세지감이다. 공항뿐만 아니다. 워싱턴 인근 대형 가전제품 매장에서 한국 제품들은 최고급, 최고가로 대우받고 있었다. 한국이 여러 부문에서 선진국을 앞설 정도로 세상이 바뀌었음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서울로 들어오는 공항버스에서 TV 뉴스를 보니 시계가 1980년대에 멈춰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뉴스 속 일부 종교인과 단체는 군부정권에나 퍼부어 마땅할 비장한 말들을 쏟아냈다. 지금 우리 사회를 독재정권과 억눌린 민중·민주화 세력이 대립하는, 언론 자유가 막히고, 선거 등 절차적 민주주의조차 확보 안 된 80년대처럼 간주하는 이들이 잔존해 있음을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그런 언행을 놓고 여야, 보수 진보진영이 찬반으로 들끓는 것도 옛 화면 그대로다. 실정을 모르는 외국 언론이 ‘한국 정부와 가톨릭이 험악한 관계’라고 보도했다는 대목에 이르면 정말로 복고의 완결판, ‘응답하라 1980년대’다. 하지만 실제로 우리 사회는 몇 단계 업그레이드됐다. ‘시대착각형’ 인사들의 머릿속만 변하지 않았을 뿐이다. 과거 성직자 지식인들은 일반인은 감내하기 힘들 불이익을 무릅쓰고 직업적 양심과 소명감으로 행동했으며 그 내용은 국민의 마음속에 있는 양심의 불꽃을 지펴 주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요즘 일부 인사의 발언은 장삼이사라도 술집이나 거리에서 내뱉을 수 있는 수준이다. 용기가 필요하거나 통찰력이 담긴 것도 아니다. 단지 그들은 성직자 교수 원로 등의 지위를 ‘확성기’ 삼아 자신의 이념·주관적 의견을 확산시키려 할 뿐이다. 워싱턴의 지한파 인사는 한국의 이념갈등을 우려하면서 ‘Put yourself in his shoes’라는 표현을 상기시켰다. 직역하면 ‘상대방의 신발을 신어보라’, 즉 입장을 바꿔 생각해 보라는 것이다. 역지사지(易地思之)와 비슷한 표현이다. 사회부 에디터로 이념, 지역적으로 민감한 사안을 대할 때 필자는 ‘시대 바꿔보기’를 해보곤 한다. ‘이 사건이 다른 정권에서 발생했으면 나는 어떻게 대했을까’라고 생각해보는 것이다. 지금 독재정권 퇴진 운운하는 이들에게도 ‘상상 속 시대 이동’을 권하고 싶다. 예를 들어 지금이 노무현 정부 출범 초인 2003년이라고 상상해보라는 것이다. 전임 김대중 정부 국가정보원 직원들이 북한의 사이버 선동전에 맞선다며 올린 글 가운데 김대중 정권의 치적을 홍보하고 이회창 후보를 비방하는 내용이 다수 포함돼 있었다. 그러자 패배한 이회창 후보와 한나라당(현 새누리당)은 3·15보다 더한 부정선거라며 대선 무효와 노무현 대통령 퇴진을 요구하고 나섰다. 과연 진보진영은 이를 어떻게 바라봤을까. 김대중, 노무현 정부 초기 극우성향 성직자와 교수들이 좌익정권, 종북정권이라고 매도하는 시국미사를 한다면 국민은 어떻게 바라봤을까. ‘상상 속 시대 이동’은 현 청와대와 여권에도 반드시 필요하다. 2003년 한나라당은 “몇몇 직원의 개인적 댓글”이라며 대수롭지 않게 치부하고 말았을까. 박근혜 의원은 “나는 국정원에 빚진 게 없다”는 노무현 대통령의 말에 공감하며 대통령과는 무관한 일이라고 선을 그어줬을까.이기홍 사회부장 sechepa@donga.com}

    • 2013-12-06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오늘과 내일/이기홍]원세훈이 박근혜에 도움 된 게 있다면…

    박근혜 대통령 입장에선 복장이 터질 노릇일 거다. “빚진 게 없다”는 그의 말처럼 지난 대선에서 국가정보원 직원들이 올린 댓글과 트윗들이 실제 박 대통령 당선에 기여했다고 보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원세훈 전 국정원장은 어떤 입장일까. 만약 대북심리전단의 댓글이 그의 지시에 의한 것이라면 도대체 그는 왜 도움을 자처했을까. 필자는 몇몇 국정원 직원에게 원세훈 시절 4년에 대해 물어봤다. 공통된 평가는 자의적 인사가 횡행했다는 점이다. 공식 인사라인이나 해당 부서장의 의견보다는 중간간부급에 심어놓은 사람과 핵심 측근들에게 의존해 인사를 했다는 평가다. 부임 초기 모 차장(차관급)이 의견을 개진하자 “인사는 원장 고유 권한이다. 누구도 말하지 말라”고 면박을 줬다고 한다. 순응하지 않는 직원은 정기인사와 무관하게 수시인사로 불이익을 줬다. 비공개 자리에서 불만을 토로한 한 간부는 직급이 강등돼 지방으로 갔다고 한다. 원장의 사적인 처신을 둘러싼 비판도 많이 들린다. 원장이 바뀌면 국정원은 원장 공관의 가구를 새것으로 교체해 놓는다. 그런데 2009년 부임한 원 원장 가족은 새 가구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다시 구입하라고 했다고 한다. 그 과정에서 담당 직원은 지방으로 발령이 났다. 강남에 있는 국정원 산하 연구소 건물에는 원장 원외 사무실처럼 사용하는 공간이 있는데 원 원장 부임 후 거액을 들여 주거용처럼 꾸민 것으로 알려졌다. 부이사관급 총무팀장이 지방으로 전배되는 등 총무팀 직원들이 대거 교체된 적도 있는데, 당시 원장 가족이 다니던 직원 시설에서 ‘소홀히’ 대한 게 원인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이런 증언들이 사실인지는 남재준 원장 부임 후 징계위를 구성해 조사하고 있으므로 곧 판명이 날 것이다. 만약 실제로 그렇게 강압적 분위기였다면 직원들이 부당한 지시를 거부하는 게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원 전 원장이 박근혜 후보를 도와야겠다고 결심할 이유가 있었을까. MB 핵심 측근인 데다 친화력이 뛰어난 성격도 아닌 그는 박근혜 캠프의 신뢰를 별로 얻지 못했다. 특히 2009년 세종시 수정안을 놓고 MB-박근혜가 충돌할 때 원 전 원장이 박근혜 개인에 대한 험담을 했고 이게 박근혜 진영에 전해졌다고 한다. 게다가 1월 인수위의 국정원 업무 보고 당일 원 전 원장이 집무실에서 대기하지 않고 개인 스폰서와 골프를 쳤다는 소문이 나면서 인수위는 매우 불쾌해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관계에서 원 전 원장이 박근혜 정권에 어떤 기대를 했을 리는 만무하다. 보험 차원에서 생색내기를 하려고 댓글을 지시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순 없지만 적극 지원할 상황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야당 정치인까지 종북의 카테고리에 넣은 그의 발언이 검찰 주장대로 선거 개입 지시용이었는지, ‘강경우파의 색안경이 빚은 편견의 산물’인지는 앞으로 법원이 가릴 것이다. 댓글이 원장의 지시에 의한 것이든, 개인적 차원이든 국정원 요원들이 중립의무를 저버리는 짓을 저질렀다는 사실은 내부 기강과 사명감이 얼마나 훼손됐는지를 보여준다. 그 책임은 정보기관 업무의 특수성과 엄중함에 걸맞지 않은 인물을 측근이라는 이유만으로 국정원장에 기용한 MB의 잘못이다. 지난해 9월 민주당의 한 의원은 국회 정보위에서 심리전단 확대 개편을 지적하면서 오해받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경고했다. 만약 국정원이 정상적인 리더십에 의해 운영됐다면 그런 경고를 흘려듣지 않았을 테고, 우리 사회는 지금과 같은 홍역을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원세훈 국정원의 실패는 국정원사에 백서로 남겨 반면교사로 삼을 만하다. 원세훈이 국정원 개혁이라는 과제를 짊어진 박근혜 정부에 기여한 게 있다면 바로 그런 점 아닐까.이기홍 사회부장 sechepa@donga.com}

    • 2013-10-30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효성 차명계좌 200여개… 稅포탈 혐의 적용 검토

    효성그룹 탈세 의혹을 수사 중인 검찰이 조석래 회장의 명의로 의심되는 차명계좌 200여 개를 발견하고 자금 추적 작업을 벌이고 있는 것으로 18일 알려졌다. 검찰은 계좌들이 조 회장의 차명계좌로 확인될 경우 양도소득세 포탈 혐의를 적용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서울중앙지검 특수2부(부장 윤대진)는 효성그룹 임직원 100여 명의 명의로 개설된 차명 증권 계좌를 발견하고 주식 거래 상황을 추적하고 있다. 검찰은 조 회장이 차명계좌를 통해 주식을 거래한 정황을 파악했으며 비자금 조성 여부도 함께 수사 중이다. 검찰은 이미 차명계좌 운용 현황 등에 대한 조사를 마친 것으로 전해졌다. 검찰은 차명 계좌의 실소유주가 조 회장인 것으로 확인될 경우 특정경제가중처벌법상 조세 포탈 혐의를 적용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대주주가 주식 거래를 한 뒤 이익을 얻었다면 양도소득세를 내야 하지만 차명계좌를 통해 양도세를 내지 않고 거래했다면 세금을 포탈한 혐의가 있는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효성 측도 차명계좌의 존재 사실을 시인했다. 다만 효성 관계자는 “차명 재산이 있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내용”이라며 “그룹의 경영권을 방어하기 위해 차명계좌를 운용했을 뿐 비자금을 조성하거나 사적으로 사용한 사실은 전혀 없다”고 주장했다.유성열 기자 ryu@donga.com}

    • 2013-10-19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오늘과 내일/이기홍]채동욱의 허물, 권력의 편견

    검찰총장 혼외아들 파문이 터지자 흥미로운 현상이 벌어졌다. 야당과 좌파 논객들은 도덕성 논란에 휩싸인 검찰총장에게 힘을 실어주고, 보수진영에서는 ‘야당의 앞잡이’라는 비난이 나왔다. ‘적의 적’은 내편이라는 진영 논리인데, 실은 양측 모두 큰 착각을 한 것이다. 야권은 채동욱 전 총장이 국가정보원 댓글 사건에 공직선거법을 적용하자는 수사팀의 의견을 받아들인 것을 외압을 물리친 정치적 결단으로 치켜세운다. 하지만 그의 결정은 정치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는 취임하면서부터 일선 수사상황을 보고조차 받지 않겠다고 공언했다. 일선의 의견을 100% 존중하겠다는 철학과 원칙에 따라 수사팀의 손을 들어준 것뿐이다. 사실 댓글 수사에서 드러난 혐의는 선거법을 적용할 수도, 안 할 수도 있는 수준이었다. 필자 개인의견으로는 적용할 수 있었다고 본다. 선거법은 거창한 죄에만 해당되는 게 아니다. 설렁탕 한 그릇만 잘못 대접해도 선거법에 걸린다. 만약 수사팀이 선거법을 적용 안 했다면 야당에서 재정신청이 제기됐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선거법 위반 행위가 선거 결과를 부정할 그런 범죄는 아니다. 예컨대 2004년 탄핵 파동을 불러온 노무현 대통령의 발언이 선거법 위반인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노 대통령이 총선에 조직적으로 개입했던 것은 아니었다. 이번에 국정원 직원 70명이 6개월간 올린 국내 정치 관련 댓글은 73개였다. 물론 그런 댓글은 한 건이라도 있어서는 안 될, 반드시 처벌해야 할 일이지만 법 위반의 경중은 따져볼 필요가 있다. 그런데 총장이 전적으로 신뢰해준 수사팀에도 문제가 있었다. 수사팀의 발표내용은 조직적 대선 개입과 은폐공작이 이뤄졌다고 강조하기 위해서인지 일부 내용이 짜깁기됐다. 경찰 검찰 감사원 언론 등 뭔가 남의 잘못을 찾아내 성과를 올려야 하는 직업인은 찾아낸 허물을 더 선명하고 거창한 얘기가 되게 만들고 싶은 유혹에 시달리게 되는데, 수사팀이 그 함정에 빠졌던 것으로 보인다. 채 총장은 퇴임식에서 검찰권 독립을 지켜냈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검찰이든 법원이든 언론이든 독립성과 중립성이 중요한 조직의 수장이라면 외부 권력으로부터의 독립뿐만 아니라 내부 구성원의 이념적 치우침, 의욕 과잉, 주관성을 통제하고 균형을 잡아야 하는데 그 점에서 소홀했다. 하지만 그런 허물이 있다고 해도, 그것은 총장으로서 6개월간 이룬 성과와 검찰수장으로서의 덕목에 비하면 경미한 것이었다. 그런데도 여권 내에선 총장을 바꿔야 한다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청와대는 8월 이전부터 혼외아들 의혹을 입수해 내사를 벌였다. 그 과정에서 불법적인 방법이 동원됐다면 반드시 밝혀내고 처벌해야 한다. 그리고 이를 언론에 흘려 총장 낙마의 도구로 이용했다는 의혹이 사실이라면 이는 정권 내에 매우 위험한 사고방식을 가진 세력이 존재함을 시사한다. 통제하기 힘든 검찰총장에 대한 여권 실세 인사들의 거부감은 제3자의 시각으로 보면 참으로 어리석어 보인다. 채 총장은 박근혜 대통령을 해롭게 할 선무당 칼잡이가 아니었다. 야당에 끈을 대는 정치지향적인 인물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순치된 총장을 갈구하는 이들은 참지를 못했다. 그 과정에서 황교안 법무부 장관의 업무처리 방식은 납득하기 힘든 대목이 많았다. 그런 게 모두 만약 황 장관의 단독 판단이었다면 그의 정무감각, 리더십은 실망스럽기 그지없다. 만약 보이지 않는 손의 입김에 의한 것이었다면, 21세기 한국사회의 수준과는 걸맞지 않은 구시대적 패러다임에 젖은 인물들이 여권 핵심부에 남아 있다는 방증이어서 우려스럽다.이기홍 사회부장 sechepa@donga.com}

    • 2013-10-04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오늘과 내일/이기홍]미군의 분당 폭격

    영화 ‘감기’를 봤다. 영화는 독감 바이러스의 공포를 섬뜩하게 그리며 관객을 빨아들였다. 그런데 영화는 중반부터 강한 정치성을 띠기 시작했다. 분당신도시에서 치사율 100%의 독감 바이러스가 발병하자 정부는 분당을 봉쇄한다. 미국과 미국의 하수인 같은 한국 국무총리는 통제선을 벗어나려 하는 분당시민들을 향해 발포명령을 내린다. 바이러스가 확산되면 전 세계에 재앙을 몰고 온다는 이유에서다. 정의로운 한국 대통령이 발포에 반대하지만 “작전권이 미군에 있다”는 한마디에 대통령은 속수무책이다. 군중을 향해 무차별 사격이 가해지고, 미국 관리는 한국 대통령 면전에서 미 공군 전폭기를 대거 출동시켜 분당시민 폭격을 명령한다. “작전권을 뺏기니 저런 일이 벌어질 수 있구나.” 극장을 나서면서 젊은이들이 나누는 대화가 들린다. 양문석 방송통신위원회 상임위원(차관급)은 페이스북에 “전시작전권을 둘러싸고 논란 중인 이때 전시작전권이 한국 국민들의 생명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아주 현실감 있게 보여준 영화”라고 썼다. 일부 언론도 “전작권 논란에 강렬한 메시지를 던진다”고 논평했다. 영화가 반미든 친미든 필자는 개의치 않는다. 완성도 높고 재미만 있으면 좋다는 게 개인적 영화관이다. 하지만 영화처럼 대중을 상대로 한 예술장르가 터무니없이 왜곡된 사실관계를 바탕에 깔고 이뤄져서는 곤란하다는 생각이다. 전쟁 발발 시 미군 장성인 한미연합사령관에게 작전권이 주어지는 건 사실이지만 그 작전권은 미국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는 게 아니다. 연합사령관은 그 어떤 경우에도 양국 합참의장으로 구성된 군사위원회(MC), 그리고 그 위로 양국 대통령이 대표하는 ‘국가통수 및 군사지휘기구(NCMA)’의 지휘를 받게 된다. 이 두 단계의 상위 지휘단계에서 어느 한쪽의 반대가 있으면 연합사령관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MC와 NCMA는 양국 간 합의제로 운영된다. 작전 전개도 양국이 미리 합의해 작성해 놓은 작전계획에 따라야 하며 항상 양국 대통령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 전시가 된다고 해서 모든 한국군의 작전권이 무조건 넘어가는 것도 아니다. 한미 간에는 데프콘(DEFCON·방어준비태세)의 각 단계에 따라 연합사로 배속되는 부대를 규정한 ‘포스 리스트(Force List)’가 있다. 이 리스트엔 ‘자동배속(automatic)’과 ‘요구에 따라(requested)’의 두 항목으로 각각의 부대들이 구분돼 있다. ‘요구에 따라’로 규정된 부대는 연합사령관의 배속 요청을 한국 측이 수용해야 배속된다. 데프콘 격상은 한미 양국의 합의로 정하므로 한국이 원치 않으면 작전권은 연합사령관에게 넘어갈 수 없다. 전작권 전환 논란이 한창일 당시 상당수 해외 군사전문가들은 “주권국가가 전작권을 단독 행사하는 게 이상적이지만, 거대한 군사력을 지닌 적에 맞서 연합전력 구성이 불가피하다면 전시에는 단일 지휘체계가 효율적”이라고 충고했었다. 서유럽 국가들이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에 참여해 나토 사령관에게 지휘권을 맡기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나토는 각 회원국이 작전권을 넘길지를 결정하는 단계를 거치는 시스템이다. 양문석 상임위원은 “왜 한국의 일부 정치세력과 언론은 미국의 이익을 위해 자국의 국민을 배반하는 데 혈안인지 영화가 끝난 후 생각의 여운을 길게 끌어준다”고 썼다. 전작권 전환 시기를 2015년 말에서 더 연기하는 방안을 놓고 논쟁이 이는 것을 언급한 것 같다. 그런 논쟁에 개입하고 싶지는 않지만 이런 정도의 코멘트는 해주고 싶다. 전작권에 대해 ‘한국의 누군가’가 ‘감기’ 제작자나 양 위원과 다른 의견을 말하고 있다면, 그들이 그렇게 하는 것은 ‘미국의 이익을 위해 자국 국민을 배반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렇게 하는 게 자국의 국민과 자국의 이익을 위한 길이라고 판단해서일 수도 있음을 명심하라고.이기홍 사회부장 sechepa@donga.com}

    • 2013-08-29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오늘과 내일/이기홍]경찰을 체포한 민변

    "현행범으로 체포한다." 7월 25일 오후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보기 드문 상황이 벌어졌다. 시위참가자들이 경찰관을 향해 체포하겠다고 외친뒤 팔을 꺾고 목덜미를 붙잡은채 20m 가량 끌고간 것이다. 체포된 사람은 남대문경찰서 경비과장이고, 그를 체포한 이들은 민변(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변호사 4명과 노조원 1명 등 5명이었다. 변호사가 경찰을 체포하는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드문 일이 벌어진 것이다. 시민에게 정복을 입고 근무중인 경찰을 체포할 권한이 있을까? 민변 변호사들은 경비과장이 집회를 방해했기 때문에 현행범으로 체포할 수 있다는 논리를 편다. 형사소송법 212조와 214조에는 '(벌금 50만원 이상에 해당하는 죄를 저지른) 현행범인은 누구든지 영장없이 체포할 수 있다'고 규정돼 있다. 또 집시법에 따르면 '폭행, 협박, 그 밖의 방법으로 평화적인 집회 또는 시위를 방해'할 경우 3년 이하의 징역(경찰관은 5년 이하)이나 3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할 수 있다. 즉 법조항만으로만 보면 '①민간인도 중한 범죄의 범인을 체포할 수 있는데 ②집회방해는 그런 범죄에 해당하므로 ③집회를 방해한 경찰을 체포할 수 있다'는 논리전개가 가능해진다. 물론 이런 논법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경비과장이 집회를 진짜 방해했는지를 먼저 규명해야한다. 민변은 당시 경찰이 폴리스라인을 허가받은 집회구역 경계선의 안쪽으로 걸쳐서 설치하는 등 집회를 방해했다고 주장한다. 경비과장이 현행범에 해당하는지도 논란거리다. 형사소송법상 현행범은 △범인으로 불리며 추적되고 있거나 △범죄 도구를 지니고 있거나 △신체나 옷에 현저한 증거가 있거나 △누군지 묻자 도망하려할 때 등의 4가지 요건 가운데 하나 이상에 해당해야한다. 필자는 민변의 주장이 모두 맞다고 가정하고, 법조계 인사들의 반응을 들어봤다. 한결같은 반응은 "안타깝다"는 것이었다. 경찰 체포의 합법 불법 여부를 떠나, "민변이 어쩌다 그렇게까지 됐는지…그렇게까지 하는게 민변에게 바람직한 것인지 모르겠다"는 반응이 많았다. 소총 싸움에서는 이길지 몰라도 전쟁에서는 지는 일을 하고 있다는 지적이었다. 민변은 현대차 희망버스 사건 직후인 7월 22일 발표한 '현대차와 보수 언론은 희망버스 시민들과 노동자들에 대한 공격을 즉각 중단하라'는 제목의 성명서에서 폭력사태가 빚어진 경위를 이렇게 설명했다. "참가자들은 불법파견 문제 해결의 열쇠를 쥐고 있는 현대차 정몽구 회장을 면담하기를 요청했다. 그런데 면담 요청에 대한 답변으로, 현대차는 용역들과 직원들을 동원하여 희망버스 참가자들에게 소화기와 소화전을 마치 최루탄마냥 퍼부어대고, 곤봉과 쇠파이프를 휘두르고…" 당시 폭력사태의 시발점은 시위대가 철제 담장을 밧줄로 끌어내리며 공장 진입을 시도한 것이었다. 민변은 이를 '면담요청'이라는 점잖은 표현으로 뭉뚱그린 것이다. 앞서 4월 민변은 탈북자 간첩사건과 관련해 기자회견을 열고 국정원이 가혹행위를 통해 사건을 조작했다고 주장했다. 이에대해 국정원 수사관 3명이 명예훼손이라며 민변 변호사 3명을 상대로 민사소송을 내자 민변은 "국정원이 변호인들의 변호권을 짓누르고 협박한다"며 유엔에 진정을 냈다. 하지만 헌법이 보장한 변호권은 피고인이 변호인의 도움을 받을 권리를 뜻하는 것이지 변호사가 법정 밖에서 아무 주장이나 발설할 수 있는 권리를 뜻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상대방의 명예는 마구 공격하면서 자신들이 법적으로 반격당하면 "경제적 심리적 고통(distress)을 당했다"(민변 발표 영문 논평 문구)고 국제사회에 진정하는 모습에서 사람들은 어떤 이미지를 떠올릴까. 민변 같은 개혁적 성향의 법률가 단체는 우리사회에 반드시 필요하다. 제도와 법은 본질적으로 보수적이므로 그 틈새에서 숱한 모순과 피해자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민변의 뿌리에는 좌우파를 가릴 것없이 깊은 존경을 받는 고 조영래 변호사가 있다. 조 변호사가 인권변호사로 활동하던 1970, 80년대야야말로 공권력의 폭력과 악법에 맞서기 위한 저항수단으로서의 정당한 폭력과 법위반 행위가 일정부분 불가피했던 시대였다. 그런 시절이었던 1971년 조 변호사는 '서울대생 내란음모사건'으로 중앙정보부에 끌려갔다. 당시 중앙정보부장이었던 이종찬 씨는 동아일보에 이렇게 회상했다. "어느 날 수사관들이 날 보고 '거물이 하나 들어왔다'고 하더군. 누구냐니까 조영래라는 거야. '그 사람이 왜 거물이냐' 하니까 '이놈은 때릴 필요가 없다' 이거야. 잡혀온 주제에 수사관들한테 조서를 그렇게 작성하지 말고 이렇게 작성하라고 지도를 한다는 거야. 다른 사람한테 죄를 뒤집어씌우지 않고 자기가 했다고 하면서 말이지. 수사관들이 감복을 한 거지. 인격적으로 조영래가 이겼다면서 말이야." 민변이 자신의 허물에는 관대한채, 상대방에 대해서는 온갖 논리를 이리저리 연결시켜 공격하는데 골몰한다면, 공허한 논리싸움에서는 이길지 몰라도 시민의 지지와 격려를 얻고 개혁의 토대를 두텁게 만드는 더 큰 전투에는 오히려 악영향만 끼칠 것이다. 자기가 내뱉은 고성(高聲)이 자신이 딛고 있는 발판을 갉아먹는다는걸 왜 모를까.이기홍 사회부장 sechepa@donga.com}

    • 2013-08-01
    • 좋아요
    • 코멘트
  • [오늘과 내일/이기홍]‘국정원 촛불’이 시들한 이유

    요즘 광화문 청계광장 주변에선 국정원 댓글 사건 규탄집회가 연일 열린다. 좌파 진영 일각에선 2008년 광우병 괴담 파동때 벌어졌던 촛불집회가 재현될 것이라는 기대를 하고 있다. 2007년 대선패배후 침잠했던 좌파진영이 광우병 공포를 무기삼아 전열을 가다듬었듯이, 이번에는 국정원 규탄이라는 깃발아래 재결집하려는 기세다. 근 반년넘게 속으로만 삭혔을 대선패배의 울분, 보수정권에 대한 반감을 폭발시킬 창구를 찾은 것이다. 비교해보면 2008년 촛불집회에 비해 이번에는 더 명분이 있다. 2008년 촛불의 심지가 광우병 괴담이라는 모래사장에 꽂혀 있었던데 비해 이번에는 국정원의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라는 실체가 있다. 그런데 2008년 주부, 청소년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던 것과 달리 요즘 시민들은 대부분 무심한 표정이다. 호응이 약한데는 여러 요인이 있을 것이다. 아마도 좌파진영은 국정원 사건에는 '입으로 들어가는 광우병 공포'처럼 감정을 자극할만한 격발고리가 없기 때문이라는 자체 분석을 하며 대책을 강구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 분석도 일리가 있는 대목이 있지만 보다 근본적 이유는 다른데 있다고 본다. 2008년과 달리 이번엔 국민들이 사안의 실체를 파악하고 있다. 2008년 촛불집회 초기엔 난무하는 광우병 괴담과 좌파언론의 선동으로 국민들이 진실을 파악하는데 시간이 걸렸지만 이번엔 검찰 수사를 통해 사건의 실체를 봤다. 국민들은 문제가 심각한 정도, 위법행위의 경중을 나름대로 판단했을 것이다. "국정원장이 말씀자료를 통해 종북세력이 다시 집권하면 안된다고 강조했고, 이를 선거개입 지시로 받아들인 대북 심리전단 직원들이 야권 대선 후보들을 비방하는 댓글을 올렸으며, 그런 댓글이 73개 확인됐다"는게 검찰 수사결과 요지다. 여기서 좌파 운동권과 중도성향 국민들의 반응 방식이 갈린다. 좌파는 '①국정원이 선거에 개입했다 ②따라서 대선은 부정선거였다 ③따라서 박근혜 정권은 정통성이 없다'는 논법을 주장한다. 그런 논리에 따라 '박근혜 퇴진' '당선무효' '국정원이 만든 대통령'등의 구호를 내세운다. 하지만 중도성향의 국민들은 ①국정원의 선거법 위반은 민주주의에서 용납해서는 안되는 범죄다 ②하지만 위반 내용은 선거에 영향을 미칠 정도가 아니었다 ③따라서 부정선거 운운하거나 대정부 투쟁으로 몰아갈 사안은 아니다'는 반응을 보이는 것으로 관측된다. 즉 '국정원 선거개입'이라는 자극적 '카피'에만 휩쓸리지 않고, 내용을 입체적으로 같이 보는 것이다. 촛불집회장 인근을 지나던 대학생은 "국정원이 조직적으로 마음먹고 선거에 개입하려했다면 수개월동안 70명이 올린 야당 후보 비방 댓글이 수십개에 불과했겠느냐"고 말했다. 사실 73개의 댓글은 혼자서 1시간이면 올릴 수 있는 수준이다. 물론 검찰이 찾아내지 못한 것도 있겠지만, 그렇다해도 수십만, 수백만 건의 댓글이 숨어 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검찰이 밝혀낸게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고 야권이 진심으로 의심한다면 국정조사가 아니라 특검을 요구했어야 한다. 은폐의심을 받는건 검찰로선 억울한 일일 것이다. 필자는 검찰 특별수사팀이 '정치적 고려'를 많이 했다고 본다. 여기서 얘기하는 정치적 고려는 과거 횡행했던 권력 눈치보기와는 다른 개념이다. 즉 △검란 등으로 땅에 떨어진 검찰에 대한 신뢰를 회복해야한다는 절박함 △국정원의 정치개입은 반드시 근절시켜야한다는 소명감 등이 수사팀의 수사태도와 법리 판단에 영향을 미친 정황이 있다. 축소수사는 커녕 의욕 과잉, 시대정신 과잉이라고 지적해도 무방할 만큼 적극적인 의지가 수사과정과 법리판단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물론 댓글 숫자가 적다고 해서 국정원의 잘못이 가벼운 것은 결코 아니다. 국정원 직원들이 정치적 댓글을 달았다는 것은 엄벌에 처해야할 사안이다. 정치적 중립 의무와 본분을 망각한 행위다. 권력하수인이라는 부끄러운 과거를 갖고 있는 국정원이 이런 행동을 한 것은 대오각성했다던 상습 성폭행 전과자가 성추행을 저지른 것과 마찬가지다. 비록 추행의 내용이 손 한 번 만진 것이라해도 용서받을 수 없는 짓이다. 하지만 그렇다고해도 국민들은 국정원의 위법행위로 우리 민주주의의 토대가 흔들렸다고, 대선이 부정선거였다고 판단하지는 않는다. 경중을 따지고 사안을 다층적이고 입체적으로 판단하는 국민의 수준과 단선적 비약논법에 매몰돼 있는 좌파 운동권의 수준 차이가 여기서 빚어지는 것이다. 필자는 국정원 사건을 보면서 대도(大盜) 조세형을 떠올렸다. 지난 4월 서초동 빌라에 침입한 그는 한밤중에 온동네 다 들리게 유리창을 깨는 바람에 붙잡혔다. 정치개입이라는 고질병을 치유하지 못한채, 허접한 수준의 댓글을 달다 망신당한 아마추어 정보기관의 모습에서 "그게 프로가 할짓이냐"며 자신을 꾸짖던 대도의 자탄이 들려온다. 사안의 경중과 전후맥락을 무시한채 '3·15 버금가는 부정선거'라고 외치는 좌파 운동권에게서도 고질병의 집요함을 본다.이기홍 사회부장 sechepa@donga.com}

    • 2013-07-05
    • 좋아요
    • 코멘트
  • [오늘과 내일/이기홍]CJ 회장 옆집 장충동 경비원

    “CJ가 저렇게 당하는 건 보호막이 되어줄 우군이 없어서다.” CJ그룹에 대한 검찰 수사가 본격화된 뒤, 세상 돌아가는 속사정을 좀 안다고 하는 사람들이 자주 하는 말이다. 그들의 해설을 요약하면 대충 이렇다. “CJ는 메이저 언론과 불편한 관계다. 케이블 TV 업계의 공룡인 CJ는 종합편성 채널을 갖고 있는 메이저 신문은 물론이고 지상파 방송사들과도 이해관계가 대립한다. 검찰로선 새 정부 첫 대규모 사정(司正)의 사냥감으로 CJ만큼 적당한 상대가 없었을 것이다.” 동아일보 사회부원들로서는 수긍키 어려운 해석이다. 필자를 포함해 부원 누구도 CJ와 그 어떤 이해관계나 호오의 감정이 있을 게 없다. 동아일보 종편채널인 채널A와 CJ 간에 어떤 이해관계가 있는지 필자에게 귀띔조차 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동아일보 법조팀이 CJ 비리 의혹을 취재해 온 것은 종편 출범 훨씬 이전부터였다. 검찰이 이런저런 여건을 감안해 CJ를 타깃으로 정했다는 해석도 사실과 다르다. CJ 수사는 새 정부 들어 기획으로 준비했다기보다는, 칼집의 봉인이 이제야 풀렸다고 보는 게 맞다. CJ 수사는 2007년 5월 CJ 전 재무팀장의 청부폭력 사건으로 거슬러 간다. 경찰이 수사 과정에서 USB를 확보했고, 검찰이 2008년 복원한 USB 파일 속에는 이재현 회장의 차명 재산과 재산 도피 의혹을 뒷받침하는 편지 등이 들어 있었다. 그러나 본격 수사가 시작되기까지는 근 5년이 걸렸다. 지난해에도 대검 중수부가 수사를 준비했지만 흐지부지됐다. 법대 출신인 이 회장의 동문 검찰 고위 간부가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소문까지 돌았었다. 현재 검찰이 풀어내는 보따리 속 내용물의 상당수가 이미 과거 내사 때 확보된 것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검찰은 준비돼 있는 상태였다. 이번 CJ 사건은 한국 재벌비리사의 낡은 페이지를 마감하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 총수가 사적 이익을 위해 회사에 피해를 입히거나, 파렴치한 경제범죄를 저질러 유죄 확정 판결을 받을 경우 대주주로서의 의결권을 제한하는 등의 제도적 입법이 마련되어야 한다. 잠시 감옥에 갔다 나오면 다시 ‘나라님’(임금·CJ 전 재무팀장이 이 회장을 호칭한 표현)처럼 거대 그룹을 호령하는 관행은 끝내야 한다. 과거에 기업에 대해 사정의 칼날이 몰아치면 재계와 정치권 등에서 기업 활동 위축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오곤 했지만 이번엔 그런 역풍이 거의 불지 않는다. CJ가 힘센 집단에 우군이 없어서일까? 채널A 기자의 가슴 찡한 특종기에서 해답을 찾아볼 수 있을 듯싶다. 사회부 최석호 기자는 검찰 압수수색 직후 장충동 이 회장의 집을 찾아갔다. 이 회장 집 옆 빌라의 70대 초반 경비원 A 씨에게 아침 상황 CCTV를 보여 달라고 부탁했다. A 씨는 거절했지만 세 번이나 찾아와서 공손하게 부탁하는 최 기자에게 결국 CCTV 화면을 보여줬다. 화면 속에는 압수수색 수시간 전에 CJ경영연구소 직원들이 증거 인멸을 위해 자료를 빼내는 모습이 담겨 있었다. 최 기자는 이 장면을 휴대전화에 담았고 채널A 뉴스에 특종 보도됐다. 며칠 후 A 씨가 사직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최 기자는 가슴이 찢기는 듯한 아픔을 느끼며 A 씨를 찾아갔다. 미안해 어쩔 줄 모르는 최 기자에게 A 씨는 “동네 빵집까지 다 뺏어간 사람들이라는 생각에 화면을 보여줬다. 내가 도의상 사직한 거다”라고 말했다. 그러고는 최 기자를 껴안아주며 “나는 괜찮다. 너는 돈 먹지 말고 기자생활해라”며 등을 두드려줬다. 필자는 그 경비원이 우리 사회의 평범한 시민인 동시에 ‘작은 거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말은 아무리 장사에 능한 기업이라도 세상의 인심을 잃으면 장기적인 번성과 발전은 기약하기 힘듦을 경종처럼 알려준다. CJ가 저렇게 난타당하는 건 언론이나 검찰에 우군이 없어서가 아니라, 골목민심이라는 천심을 잃어서가 아닐까.이기홍 사회부장 sechepa@donga.com}

    • 2013-06-06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