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재동

유재동 부장

동아일보 산업1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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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뉴욕 현지에서 보고 듣고 느낀 것을 모두 전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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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분야

2025-11-21~2025-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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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왕 다 줄 거면 기부할 권리도 함께 주자[광화문에서/유재동]

    긴급재난지원금 100만 원(4인 가족)을 받는다면 이걸로 뭘 할까 궁리하는 사람들이 주변에 하나둘씩 생기고 있다. 코로나19로 생활이 어려워진 건 누구나 마찬가지지만 그래도 생계엔 지장이 없는 여유 있는 사람들 얘기다. 여야가 한목소리로 전 국민 지급을 주장하고 있어서 총선만 끝나면 부자들의 이런 ‘고민’은 현실이 될 가능성이 크다. 비슷한 상황을 겪었던 영국의 사례가 우리에게 시사점이 될 듯하다. 겨울이 유난히 추운 영국에선 매년 2만 명이 넘는 노인이 한파에 목숨을 잃는다. 가난한 노인들을 돕기 위해 정부는 연간 최대 300파운드(약 45만 원)의 난방비를 지원하고 있다. 그런데 이 지원금은 아무리 돈이 많은 사람도 65세 이상이면 누구나 받을 수 있다. 별도의 소득기준을 두지 않은 것은 대상자를 가려내는 데 드는 행정비용이 만만치 않은 데다, 아무리 정교한 기준을 세워도 지원 대상에서 억울하게 빠지는 사람들이 생긴다는 지적 때문이다. 부자에게도 혈세를 지원하는 이 제도는 도입 당시 상당한 논란이 됐지만 결국 정부 뜻대로 시행이 됐다. 그러자 민간에서 이를 보완하는 움직임이 자발적으로 생겨났다. 고소득층과 저명인사들 사이에서 “내가 이 돈을 받아선 안 된다. 어려운 사람에게 돌려주자”는 반납 운동이 일어난 것이다. ‘겨울나기(Surviving Winter)’라는 이름의 이 기부 캠페인은 올해 10년째를 맞고 있다. 지금도 영국의 복지단체에는 이들이 반납한 돈이 한 해 수십억 원씩 모여 빈곤 노인들에게 향한다. 현 상황을 보면 한국의 재난지원금도 영국과 같은 이유로 전 국민에게 지급될 공산이 크다. 서민과 고소득층을 100% 공정하게 가를 방법도 없고, 그게 있다 해도 시간과 비용이 너무 많이 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부는 전 국민에게 주되 고소득자는 나중에 환수하는 방안도 검토했지만 이것도 대안이 될 수 없다. 줬다 뺏는 것 자체가 무리인 데다, 환수 대상자 기준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또 다른 혼란이 불가피하다. 지원을 받는 자와 도로 뺏기는 자로 나라 전체가 또 갈라질 것이다. 이럴 때는 차라리 영국처럼 고소득층의 자발적 기부를 유도하는 게 대안이 될 수 있다. 그러려면 일단 시스템부터 바꿔야 한다. 지금은 지원금을 기부하고 싶어도 받은 자리에서 바로 반납할 수 없다. 쿠폰이나 전자화폐 형태로 받아 알아서 소비하고, 그 액수만큼을 복지단체에 따로 기탁해야 한다. 그러나 재난지원금 기부는 이렇게 복잡하면 안 된다. 주민센터에서 사인 한 번에, 또는 스마트폰 앱에서 클릭 한 번에 간단히 할 수 있어야 한다. 그 자리에서 소득공제 혜택도 주고 기부인증서를 발급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올릴 수 있게 하면 더 좋다. 전액 기부가 부담스럽다면 절반만 할 수 있는 옵션을 주는 것도 방법이다. 이 정도의 시스템은 우리 핀테크 기술이라면 바로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외환위기 때 ‘금 모으기 운동’으로 공동체를 지키기 위한 집단의 의지를 확인한 바 있다. 코로나도 같은 방식으로 극복 못 할 이유가 없다. 이런 국가적 위기 상황에는 계층 간 편 가르기로 갈등을 조장하기보다 국민 전체의 선의(善意)를 믿는 것이 훨씬 나은 선택지가 될 수 있다. 유재동 경제부 차장 jarrett@donga.com}

    • 2020-0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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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IMF “세계 경제 대공황 이후 최악 침체” 예측에…韓 경제도 ‘비상’

    세계 경제가 1930년대 대공황 이후 최악의 침체에 빠질 것이라는 전망이 공식화되면서 대외개방도가 높은 한국 경제에 비상이 걸렸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으로 전 세계의 생산과 소비, 고용이 동시에 마비됨에 따라 전 세계가 유례없는 불황에 빠질 것이란 분석이 나온 것이다. 국제통화기금(IMF)은 14일 코로나19의 확산이 올해 말이나 내년 이후까지 계속되면 전 세계의 마이너스 성장의 폭이 더 커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비록 한국은 코로나19가 진정 기미를 보이면서 다른 선진국보다 충격이 비교적 덜할 것으로 전망했지만, 세계 각국의 모든 경제 활동이 멈춰서며 동반 침체에 빠져있는 한 그 영향을 피할 방법이 없을 것으로 보인다.● 코로나 안 잡히면 세계 성장률 ―6%로 하락 IMF의 전망이 현실화된다면 세계 경제는 1970, 80년대 1·2차 오일쇼크나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보다 심각한 불황에 빠지게 된다. IMF는 이날 세계경제전망 보고서에서 세계 경제의 올해 성장률을 ―3.0%로 예측했다. 지금까지 1930년대 대공황 이후 세계 경제 성장률이 마이너스를 기록한 것은 금융위기 직후인 2009년(―0.1%) 밖에 없었다. 이번에는 마이너스 폭이 그 때와 비교조차 되지 않는다. 이번 경제위기가 특히 우려되는 건 코로나19 확산세가 언제까지 지속될지 감을 잡기 어렵기 때문이다. IMF는 일단 코로나19가 올해 하반기에 사라지면서 점진적으로 각국의 방역조치가 해제된다는 전제 하에 이번 전망치를 내놨다. 하지만 팬데믹(대유행)이 내년까지 마무리되지 않고 봉쇄조치가 올해 하반기에도 이어지는 최악의 시나리오에선 올해 세계 성장률이 ―6.0%까지 하락할 것으로 내다봤다. 지금 단계에서는 코로나 위기의 뚜렷한 해법을 찾기 어렵다는 것도 문제다. 오일쇼크는 석유 수급 정상화로, 2008년 금융위기는 각국 중앙은행 공조로 모면할 수 있었지만 이번에는 백신이나 치료제가 개발되기 전까지는 경제를 회복시킬 대안이 없다. 세계 석학들도 경제가 단기간에 반등하는 ‘V자 회복론’에 대한 기대를 거두는 추세다. 처음에는 코로나19로 인해 경제에 갑작스런 마비가 온 것 정도로 봤지만, 이제는 경제 시스템에 장기적 충격을 줄 수도 있다는 비관적인 전망을 내놓고 있는 것이다. 벤 버냉키 전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 의장은 7일 브루킹스연구소 주최 웹 세미나에서 “코로나19로 인한 위기가 다시 시작되지 않을 것이란 확신이 생기기 전까지는 경제가 정상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재닛 옐런 전 의장 역시 경기가 느리게 회복하는 ‘U자형’과 침체가 장기간 지속되는 ‘L자형’ 전망에 무게를 두고 있다.● 수출의존도 높은 한국, 22년 만에 마이너스 성장 이처럼 세계적인 경기 불황이 장기화하면 수출의존형 경제 구조를 가진 한국 역시 타격을 피해가기 어려워 보인다. 한국은 외환위기 당시였던 1998년(―5.1%) 이후 처음으로 올해 마이너스 성장이 유력한 상황이다. IMF(―1.2%) 뿐 아니라 글로벌 신용평가사 피치가 이달 초 한국의 성장률 전망치를 ―0.2%로 제시했고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는 ―0.6%, 모건스탠리는 ―1.0%를 내다보고 있다. 이에 따라 고사 위기에 놓인 항공 등 기간산업과 수출 제조업체들의 영업수지가 악화되고 일반 가계와 자영업자들도 실직과 폐업의 기로에 놓일 수 있다는 우려가 크다. 이 때문에 한국이 글로벌 경제의 ‘위기 쓰나미’를 본격적으로 대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하준경 한양대 경제학부 교수는 “세계 경제 위기가 한국 경제로 전달되는 경로를 차단하는 게 급선무”라며 “경쟁력이 있는 수출기업이 망가지지 않게 지원하고 일자리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했다. 정규철 한국개발연구원(KDI) 경제전망실장은 “유동성 공급이 필요한 기업을 미리 선별해 정책을 신속히 집행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야 한다”고 했다. 세종=송충현 기자 balgun@donga.com유재동 기자 jarrett@donga.com세종=남건우 기자 woo@donga.com}

    • 2020-0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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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위기 때마다 먼저 쓰러지는 우리 사회의 약자들[광화문에서/유재동]

    인천에서 자영업을 하는 A 씨는 “코로나 걸려 죽기 전에 굶어 죽게 생겼다”는 게 무슨 말인지를 최근 절실히 느꼈다고 했다. 매출이 거의 바닥나 마이너스 통장을 뚫어 버티던 그는 더는 안 되겠다 싶어 지역 신용보증재단의 문을 두드렸다. 하지만 전화 연결이 안 되는 것은 물론이고 찾아가도 대기 인원이 너무 많아 보름 넘게 상담조차 받을 수 없었다. 은행에서 소상공인 지원을 한다는 뉴스를 보고 찾아가면 “아직 본점에서 받은 지침이 없다”는 말만 듣고 돌아와야 했다. 초조함은 커져만 갔다. 당장 카드대금 납부일과 각종 결제일이 다가오며 숨통을 죄어 오는데, 기약 없이 전화통만 붙들고 있는 자기 모습이 절망적으로 느껴졌다. 그는 “나라에선 항상 즉시 돕겠다 하고,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하는데 정작 우리끼리는 ‘목숨 끊어지고 돈 나오면 뭐하느냐’는 얘기를 한다”며 “이달은 겨우 고비를 넘겼지만 다음 달엔 또 어찌해야 할지 막막하다”고 했다. 통상 위기가 오면 약자들은 가장 먼저 쓰러지고, 회복은 제일 늦게 한다. 코로나19발 경제위기도 그렇다. 이렇다 할 여유자금 없이 수입이 갑자기 끊긴 자영업자들은 이런 상태가 한두 달만 지속돼도 생계에 위협을 받는다. 하지만 지원은 더디기만 하다. 정부가 아무리 수십조 원을 투입하는 통 큰 대책을 발표해도 이들에겐 체감이 되지 않는 숫자일 뿐이다. 일단은 하루하루 버티는 게 우선이기에 당장 손에 쥘 수 있는 몇 푼이 더 아쉽다. 그보다 더한 타격을 입는 것은 미용사나 가사도우미, 헬스트레이너, 대리운전사 같은 ‘밀접 접촉 서비스업’ 종사자들이다. 이들은 지난 한 달 동안 평소 수입의 절반 이상을 날렸지만 피해를 호소하거나 보상을 청구할 곳도 없다. ‘사회적 거리 두기’ 움직임은 생계가 곤란한 노인들의 재정 일자리마저 빼앗아 버렸다. 경제 피라미드의 하층을 구성하는 이들에게는 울타리가 되어주는 회사도, 이익을 대변해주는 노조도, 나서서 힘을 실어주는 정치인도 없다. 각자가 쓸쓸하게 위기에 맞서며 버거운 희생을 강요받고 있다. 고정 수입을 누리는 정규직들 사이에서도 코로나 차별은 두드러진다. 재택근무나 돌봄휴직을 허락하는 회사와 아닌 회사가 있고, 직원 복지로 마스크를 주는 회사와 안 주는 회사가 있다. 요즘 학부모들은 “이래서 자식을 대기업에 보내야 한다”는 말을 자주 한다고 한다. 개학이 계속 연기되면서 교육 불평등의 민낯도 드러나고 있다. 맞벌이 서민 가정은 아이 맡길 곳도 구하지 못해 매일같이 전쟁을 벌이는데 부잣집은 온라인 학원 교습과 화상 과외로 촘촘한 홈스쿨링 시간표를 짜고 있다. 경제위기는 약자들만 골라 때리는 반면 현금을 쥐고 있는 자들에겐 오히려 기회를 준다. 1997년과 2008년에 그랬고,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열악한 하층민들의 안타까운 사연이 쏟아지는 와중에, 다른 한편에선 ‘삼성전자 주식을 얼마에 사야 하는지’ ‘집값이 언제 바닥을 칠지’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많다. 제대로 된 나라라면 정부와 공동체가 제때 손을 써서 이 사회의 약자들이 무너지고 불평등이 커지는 것을 막아야 한다. 이번 위기는 밑바닥에서 시작된 위기다.  유재동 경제부 차장 jarrett@donga.com}

    • 2020-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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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직도 뭐가 우선인지 갈피 못 잡는 정부[광화문에서/유재동]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 경제부처 고위 공직자였던 A 씨는 최근 정부의 코로나19 대응에 대해 얘기하면서 다음과 같은 위기 대처 이론을 소개했다. 첫째, 위기에 처음 맞닥뜨렸을 때는 가급적 신속하고 강도 높게 대응한다. 둘째, 나중에 상황이 좀 나아졌다고 절대 방심하지 말고 출구전략은 최대한 천천히 가동한다. 요약하면 ‘들어갈 때는 과감하게, 나올 때는 신중하게’ 한다는 원칙이다. 곡선 주로를 운전할 때 진입은 천천히 하고 빠져나올 때는 속도를 높이는 주행 원리와 정반대라 생각하면 편하다. 완전한 회복을 확인하기도 전에 긴장을 풀었다가 화를 입은 사례는 세계 경제사(史)에 자주 등장한다. 미국 중앙은행은 1930년대 중반 대공황 탈출 조짐이 보이자 서둘러 금리를 올렸다가 경제를 다시 침체의 수렁에 빠뜨렸다. 일본도 1990년대 경제 여건이 받쳐주지 못하는 상황에서 무리하게 증세로 전환한 것이 불황을 키웠다. 이런 실패의 역사에서 깨달음을 얻은 미국은 10년 전 금융위기 때는 위기 대응의 교과서 같은 모습을 보여줬다. 초기엔 양적완화와 제로금리라는 미증유의 통화정책을 전격 도입해 위기 확산을 막았지만, 이를 되돌릴 때는 테이퍼링과 금리 인상, 자산 축소 등 스텝을 차분히 밟아나가며 장장 10년 이상 시간을 끌었다. 우리 정부도 코로나 사태 초기엔 이 원칙을 잘 숙지한 듯했다. 적어도 문재인 대통령이 1월 말 “과하다 싶을 정도로 강력한 선제조치”를 강조했을 때까지만 해도 그랬다. 하지만 그 후로는 어찌 된 일인지 ‘과한 선제조치’보다는 2% 부족한 대책이 반 박자씩 늦게 이어졌다. 잘못된 대응의 정점은 지난달 13일 “코로나는 머지않아 종식될 것”이라는 대통령의 발언이었다. 그날 이후 20일 ‘짜파구리 오찬’까지 약 일주일 동안 행정부의 긴장이 풀어진 대가는 지금 국가 전체에 엄청난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다. 그 사이에 사실상 손을 놓고 있다가 요즘 연일 수급 대란을 맞고 있는 마스크 사태는 그중에서도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조직 관리 전문가들은 큰 위기가 닥쳤을 때의 초기 대응을 보면 그 조직의 가치관이 드러난다고 말한다. 정부는 총선에 악영향을 줄 수 있는 코로나 사태를 애써 부정하려는 듯 끌려가며 대응하다가 조금 상황이 호전되는 것 같으니까 바로 방역에서 경제로 깃발을 바꿔 들었다. “이대로 경제가 추락하면 총선이 위험해진다”는 목소리가 여권에서 근거 없는 낙관론을 키운 결과다. 한발 늦은 대응, 섣부른 희망, 정치논리의 개입, 전문가 배제 등 위기 대응 실패를 위한 재료가 총동원됐으니 애초부터 좋은 성과를 기대할 수 없었다. 방역과 경제 두 마리 토끼를 다 잡기는커녕 둘 다 놓쳐도 할 말이 없게 됐다. 지난주 발표된 코로나 민생대책에는 자동차 개별소비세 인하, 신용카드 공제 확대, 국내 휴가비 지원 같은 전통적인 내수 지원책이 모두 담겼다. 하루에도 확진자가 수백 명씩 쏟아지며 감염 공포가 극에 달한 상황에서, 새 차를 사고 밖에 나가 돈을 쓰라고 부추기는 정책은 아무 의미가 없다. 지금은 사람들이 돈이 없어서 안 쓰는 게 아니다. 정부는 아직도 일의 우선순위를 정하지 못한 모양이다.  유재동 경제부 차장 jarrett@donga.com}

    • 2020-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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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 금융을 망치는 그들만의 부당거래[광화문에서/유재동]

    외국계 투자은행에서 근무한 적이 있는 A가 몇 해 전 겪은 일이라며 해준 얘기다. 업무상 알고 지내던 한 국내 은행 임원이 자기에게 부탁을 하나 해왔다고 했다. 본인의 자녀가 미국 대학 입시를 준비 중인데 학교에 제출할 에세이를 대신 써줄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그는 “한참 고민했지만 갑(甲)의 위치에 있는 그 임원의 요청을 끝내 거부할 수 없었다”고 털어놨다. 이상한 일은 또 있었다. 당시 A가 일하던 회사에는 이름만 대면 알 만한 국내 금융계 인사들의 자녀가 유독 많이 채용돼 일했다. A는 “인턴 ○○는 □□은행장 딸, △△는 ××은행 부행장 아들이라는 식의 소문이 파다했다”고 했다. 금융계의 이런 갑질 관행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심지어 얼마 전에는 국제적인 망신거리가 되기도 했다. 지난해 미국 증권거래위원회는 글로벌 금융회사 바클레이스가 국내 국책은행과 공기업 임직원의 친인척을 정직원 또는 인턴으로 뽑은 사실을 밝혀냈다. 자사를 외화채권 발행 주관사에 선정해 주는 대가로 채용 특혜를 준 것이다. 이 사건은 비록 10년 전의 일이지만 지금도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최근 시중은행들의 채용비리는 업무상 우월적 지위를 사적 이익을 도모하는 데 쓰는 반칙 행위가 아직도 금융계에 만연해 있다는 점을 말해주고 있다. VIP 고객이나 유력 정치인의 채용 청탁이 개인 간의 부당거래라면 최근 기업은행장 선임 과정에서 벌어진 일은 권력집단 간의 결탁이라는 점에서 더 진화된 형태다. 당초 노조는 신임 행장의 출근을 저지하며 ‘낙하산 반대’, ‘전문성 부족’이라는 고전적인 명분을 내세웠다. 하지만 사건의 본질은 한 달 뒤에 모습을 드러냈다. 노조가 행장의 출근을 ‘허락’하면서 호봉제 유지, 노조추천이사제 도입 등 자기 잇속을 잔뜩 챙겨가는 내용의 합의에 성공한 것이다. 사실 이런 식의 은밀한 주고받기는 금융당국이 원조다. 금융감독원 출신 인사를 감사 등으로 영입한 금융사는 당국의 제재를 받을 확률이 16% 이상 감소한다는 게 한국개발연구원(KDI)의 분석이다. 우리나라 은행업은 이런 부당거래가 횡행하기에 안성맞춤인 환경이다. 지분이 분산된 주인 없는 회사다 보니 외부에서 이렇다 할 견제를 받지 않고, 대단한 경영 혁신이 없어도 손쉬운 이자장사로 매년 역대 최대 실적을 낸다. 그 결과 시중은행들은 그다지 혁신적인 상품이나 부가가치도 만들지 않으면서 직원은 억대 연봉, 회장과 행장은 수십억 원대 보수를 받는 꿈의 직장이 됐다. 회사 미래보다 자기 안위부터 생각하는 경영진과 노조, 자리 욕심이 가득한 정권이 정교하게 결탁하면 국민들의 대출이자와 공적자금으로 조성된 꿀단지를 사이좋게 나눠먹을 수 있는 구조다. 얼마 전 만난 외국계 금융사 대표는 “글로벌 본사 관점에서 보면 우리는 한국에서 자선사업을 하는 꼴”이라고 했다. 국내 은행들이 사상 최대 이익이네 뭐네 하지만, 투자한 자본 대비 거두는 이익 수준은 외국의 경쟁 회사 대비 바닥이라는 설명도 덧붙였다. 우리끼리야 뭐 대단한 실적이라도 되는 양 서로 자기 몫 챙기려 아옹다옹하지만 남들이 보기에 한국의 은행들은 세상 흐름에 뒤처진 우물 안 개구리일 뿐이다. 꿀단지가 바닥을 드러낼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유재동 경제부 차장 jarrett@donga.com}

    • 2020-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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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누구나 근사한 대책은 있다 시장에 얻어맞기 전까지는[광화문에서/유재동]

    우리나라에서 좀 배웠다는 사람들만 모이면 서로 자기 말이 진리라며 우기는 화제가 몇 개 있다. 대표적인 게 집값, 입시, 교통 대책이다. 얼마 전에도 지인 몇몇이 만나 ‘강남 집값 잡는 법’을 주제로 일합을 겨뤘다. 술잔을 사이에 두고 별의별 이론이 쏟아졌다. “용적률 규제를 풀어서 강남 주택 공급을 획기적으로 늘린다. 50층, 100층짜리 초고층 아파트 숲을 조성하면 집값이 빠진다.” “옛날 강북에서 넘어온 8학군 명문 고교를 다시 원위치시키면 된다. 학교가 있던 자리엔 교도소나 쓰레기소각장을 짓는다.” “고위공직자와 국회의원들이 보유한 강남 아파트를 반액으로 시장에 팔도록 강제한다. 정권이 내로남불 비난을 피할 수 있는 건 덤이다.” “스카이캐슬을 무너뜨린다. 좋은 대학 갈 필요가 없으니 강남 살 이유도 없어진다.” “강남의 모든 지하철역을 없애 교통지옥을 만든다.” 토크는 점점 ‘아무 말 대잔치’로 흘렀다. 어차피 진지한 해법보다는 그럴싸하고 자극적인 얘기를 막 던지고 보는 자리였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우리가 의견 일치를 본 것은 저 중 하나만 제대로 실행해도 강남 집값은 단칼에 잡히리라는 사실이었다. 물론 ‘강남만 때려잡으면 이 나라에 무슨 탈이 나도 괜찮다’는 전제만 받쳐 줬다면 말이다. 그날의 ‘배틀’은 뚜렷한 승자 없이 그렇게 잊혀지는 듯했다. 그런데 이 저급한 대화에 청와대 수석이 뒤늦게 숟가락을 얹고 끼어들 줄은 상상하지 못했다. 그는 부동산 거래 허가제라는 강력한 카드를 내밀었다. 비싼 집은 아예 거래를 통제하겠다는데 그 외에 더 무슨 대책이 필요하랴. 이 아이디어가 진짜 그날 술자리에서 나왔다면 어지러웠던 토론판을 단번에 평정할 수 있었을 것이다. 정부 여당은 황급히 진화에 나섰다. “전혀 검토한 바 없는 개인적 생각”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 정부를 오랫동안 지켜본 많은 사람들은 그런 잠깐의 말실수에도 정권의 깊은 철학과 속내가 담겨 있다고 본다. 바로 강남 집값을 잡는 것은 절대 선(善)이고, 이를 달성할 수만 있다면 어떤 방법을 동원해도 괜찮다는 특유의 사고 체계다. 실제 요즘 권력자들의 발언을 보면 “총선 전에 집값은 무조건 잡아야 한다”는 공감대가 당정청에 퍼져 있는 듯하다. 이 ‘무조건’이라는 수식어가 갖가지 무리한 대책과 설화를 낳고 있다. 정부는 고가 주택만 정교하게 조준하면 큰 부작용 없이 집값을 안정시킬 수 있다고 믿는 것 같다. 그래서 투기꾼의 불로소득을 환수하고 서민들의 화병을 풀어줄 수 있다는 기대도 할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다르다. 시장을 인위적으로 비틀면 당장은 효과를 볼 수 있어도 결국엔 반드시 더 큰 반작용이 따르게 돼 있다. 비틀기의 강도가 셀수록 충격도 커지고 그만큼 회복도 어려워진다. 시장은 스스로 망가지면서 반시장 정책에 복수를 한다. 대중이 듣기 좋은 말들을 ‘사이다 대책’이라며 내세우는 것은 몽상가나 선동꾼이 하는 일이다. 책임 있는 공직자들은 그러면 안 된다. 경제원리를 거스르는 대책에는 반드시 대가가 따른다는 걸 모르는 이들에게 핵주먹 타이슨의 명언을 이렇게 각색해 들려주고 싶다. “누구에게나 그럴싸한 대책은 있다. 시장에 한 대 얻어맞기 전까지는.” 유재동 경제부 차장 jarrett@donga.com}

    • 2020-0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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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 경제의 진짜 敵은 내부에 있다는 경고[광화문에서/유재동]

    최근 만난 한 장관급 인사는 오해를 풀고 싶다면서 이런 말을 했다. 주변 참모들이 눈과 귀를 가려서 대통령의 경제 인식이 너무 한가하다고 공격들을 하는데 이는 사실과 거리가 있다는 것이다. “경제 상황에 대해서는 대통령도 항상 소상히 보고를 받고 있다. 그래도 ‘대한민국호’의 선장인데 국민들에게 최대한 긍정적인 메시지를 줘야 할 것 아니냐. 당연히 속으로는 요즘 경제 현실에 상당한 절박함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그때만 해도 충성스러운 공직자의 평범한 정권 변호쯤으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대통령이 느끼고 있을 것이라는 그 ‘절박함’만큼은 진실에 가까울 것이라는 생각이 점점 굳어지고 있다. 새해는 집권 4년차, 이제는 정말 성과를 보여줘야 하는 정권 후반부다. 중간평가 격인 총선도 불과 석 달 앞으로 다가왔다. 과거를 돌아보면 경제를 망가뜨리고도 선거를 잘 치러낸 정권은 손에 꼽는다. 현재 지표만 놓고 보면 대통령은 절박함을 넘어 매일 스트레스에 밤잠을 설치지 않을까 싶다. 우선 성장률 전망은 올해도 2% 안팎을 맴돌고 있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10년 만에 최악이었던 작년의 흐름이 올해도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금융시장도 캄캄하다. 미국은 증시가 연일 사상 최고치를 경신하고 있는 데 반해 기업 실적에 발목 잡힌 코스피는 주요국 중 상승률이 하위권에 머물고 있다. 경제심리와 함께 물가는 바닥을 뚫고 지하로 내려가면서 디플레이션이 우려되는 상황이다. 답답한 경제 상황에 대한 위기감은 정권 내부 구석구석으로 퍼지고 있다. 그 단면을 보여준 것이 얼마 전 발표된 새해 경제정책 방향이다. 액션플랜이 없어 다소 공허하긴 하지만 8대 핵심 과제 가운데 두어 개를 제외하면 모두 성장과 투자를 끌어올린다는 내용이다. 1년 전만 해도 공정경제나 분배와 관련된 내용이 대부분이었는데 지금은 마치 보수 정당의 선거 공약을 보는 듯하다. 공공 및 민간 분야에선 100조 원의 투자를 약속하며 다른 기관보다 훨씬 야심 찬 성장 목표(2.4%)를 던졌다. “우린 아직도 성장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메시지를 주려는 것 같다. 하지만 이런 위기감이 실제 성과로 이어질지는 미지수다. 우선 그간 내내 우리 경제를 괴롭혔던 미중 무역분쟁이 본격적인 합의에 이르려면 시간이 한참은 더 필요하다. 반도체 회복의 신호도 불분명하고 중남미나 홍콩 등지의 지정학적 리스크도 여전하다. 더 큰 문제는 따로 있다. 얼마 전 경제단체장들은 이런 외부 변수보다는 반(反)시장 정책과 무한 정쟁, 공무원의 보신주의, 이익단체의 발호 등을 더 무서운 악재로 뽑았다. 우리 경제를 가로막는 진짜 적은 내부에 있다는 경고다. 경기가 안 좋아지면 보통 기업이 제일 잘 안다. 돈 버는 게 얼마나 힘들어지는지 바로 체감할 수 있어서다. 반대로 돈을 쓰기만 해봤지 제대로 벌어본 적이 없는 정부는 시장에 공짜 쿠폰을 살포하면 경제가 저절로 살아날 것으로 믿는다. 규제 당국의 이런 잘못된 인식과 함께 시대 변화를 거부하는 기득권 세력, 개혁을 가로막는 정치권은 모두 혁신을 망치는 공범이다. 때로는 상대편보다 내 안의 적이 더 무서울 때가 있는데 요즘 우리 경제가 그렇다.유재동 경제부 차장 jarrett@donga.com}

    • 2020-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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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꾸고, 배우고, 움직여라… 제로이코노미의 생존 수칙[광화문에서/유재동]

    의사들이 치매 예방을 위해 강조하는 원칙이 몇 가지 있다. 기존 생활습관을 바꾸고, 계속 새로운 것을 배우며, 부지런히 몸을 움직이라는 것 등이다. 몸의 노화가 다가오는데도 게으르고 수동적으로 있다 보면 뇌세포의 급격한 손상을 피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경제적 노화’를 막는 방법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다. 동아일보 취재팀은 최근 성장률과 금리, 물가 등 경제지표가 한꺼번에 ‘제로(0)’를 향해 수렴하는 ‘제로이코노미 시대’에 세계 각국의 투자자들이 어떻게 대처하는지를 살펴봤다. 그 결과 이들에게서 공통적으로 관찰되는 불황기의 생존 수칙을 확인할 수 있었다. ‘바꾸고, 배우고, 움직여라.’ 치매 예방의 원칙과 놀랄 만큼 유사하다. 첫째, 바꿔야 한다. 기존의 재테크 상식과 돈에 대한 관념 등을 모두 바꿔야 한다. 이제 돈이 돈을 버는 시대는 끝났다. 우리가 만난 투자자들은 “예금만 하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라고 단언했다. 은행들은 고객에게 이자를 주는 대신 보관료를 받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서 은퇴 후 연금이나 은행 이자로 먹고살겠다는 것만큼 안이한 생각은 없다. 교과서에서 배웠던 ‘복리의 마술’ 따위는 잊어야 한다. 결국 고정적인 수입을 오랫동안 확보하는 게 중요하다. 그게 일자리가 됐든, 수익형 부동산이 됐든 말이다. 연금만 믿고 있다가 자칫 직장에서 일찍 밀려나면 생계의 위협을 받을 수 있다. 요즘은 복지 선진국이라는 유럽에서도 끼니를 굶는 노인들이 생겨난다. 조만간 다시 고성장 시대가 열릴 것이라는 믿음도 바꿔야 한다. 한번 활력이 떨어진 경제는 다시 일어서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릴 수 있다. 둘째, 배워야 한다. 더 높은 수익을 위해 각자도생하는 지금은 누구도 나의 재산을 공짜로 챙겨주지 않는다. 스스로 금융지식을 쌓고 제로이코노미의 폭풍에 맞서야 한다. 이를 위해선 수시로 자신의 투자 포트폴리오를 점검하고 각종 연금의 예상 수령액이나 수익률을 뒤져보는 노력이 필요하다. 물론 다른 사람들이 어떤 투자를 하는지도 가끔 곁눈질해야 한다. 배움의 중요성은 앞으로가 더 중요할 수 있다. 덴마크에서 만난 한 40대 남성은 “저금리 환경에서 더 오래 살아야 하는 아들에게 금융 조기교육을 시키고 있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움직여야 한다. 요즘 같은 산업 대격변의 시대에는 조금만 나태해도 한순간에 잉여인력으로 전락할 수 있다. 자기 일자리를 오랫동안 지키려면 귀찮더라도 몸을 부단히 움직여 스스로를 업그레이드해야 한다. 투자도 마찬가지다. 요즘은 일본뿐 아니라 보수적인 유럽 투자자들도 해외의 고수익 자산에 투자하기 위해 세계 각지로 눈길을 돌리고 있다. 비용을 아끼기 위해 공유 차량, 공유 부동산을 찾는 데 이어 육아용품과 가구, 신발까지도 값싼 중고품으로 쓰겠다는 소비자가 많다. 이득을 보려면 그만큼 발품을 팔아 이리저리 움직여야 한다. 치매는 미리 공부하고 예방만 철저히 한다면 충분히 극복할 수 있는 병이다. 제로이코노미도 마찬가지다. 개인이든, 기업이든, 국가든 시대 변화를 받아들여 잘만 적응한다면 새로운 기회가 열릴 수 있다. 이젠 변해야 살아남는다. 유재동 경제부 차장 jarrett@donga.com}

    • 2019-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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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청년드림]“채용공고문 속 기업 핵심가치 파악하세요”

    “채용공고문은 대충 보면 안 됩니다. 공고문에는 기업 인사팀이 오랫동안 고민한 흔적이 담겨 있어요.” 27일 오후 경기 군포시 군포e비즈니스고교 강당에서는 동아일보 청년드림센터가 주최하는 ‘찾아가는 청년드림 취업특강’이 열렸다. 금융회사나 정보기술(IT) 기업 인사팀 실무자가 특성화고 학생들에게 취업 준비를 돕는 강연을 하고, 해당 고교 출신 회사원이 모교 후배들과 토크콘서트를 여는 행사다. 이날 행사엔 군포e비즈니스고교 학생 200여 명이 참석했다. 이날 강연에 나선 황지환 신한은행 인사부 과장은 “취업할 때는 그 회사의 핵심 가치와 인재상을 먼저 파악해야 한다”며 “그러기 위해서는 관심 있는 회사의 채용공고문을 평소에 눈여겨보고, 그에 따라 자신이 보완할 점을 계속 찾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이어 강연한 최동한 이스트소프트 피플파트너팀 사원은 “그동안 학교에서 여러 활동을 한 내용을 파워포인트 등으로 정리해 놓고 계속 업데이트해야 한다”며 “자신의 포트폴리오 관리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스트소프트는 압축 프로그램 ‘알집’ 등으로 유명한 소프트웨어 회사다. ‘취업성공 선배와 대화’ 시간에서는 이 학교를 졸업한 이승재 예금보험공사 주임(19)과 정수정 KEB하나은행 사당동지점 계장(19)이 무대에 섰다. 이 주임은 “면접에서는 자기소개서에 쓴 내용과 연관된 질문에 대비하는 게 좋다”고 후배들에게 조언했다. 정 계장은 “시중은행들은 디지털이 화두인 만큼 코딩 공부를 해두면 취업에 유리할 것”이라고 말했다.유재동 기자 jarrett@donga.com}

    • 2019-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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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 경제의 허리병… ‘497세대’의 블루스[광화문에서/유재동]

    “니들처럼 제멋대로인 애들은 처음 봤다. 축제 때 록카페나 다니는 놈들이라니.” 90년대 학번이 대학을 다닐 때 한국은 경제 고성장의 끝물이자 대중문화의 전성기였다. 이런 풍요로움은 집단보다 개인을, 국가나 사회보다 나 자신을 더 중시하는 문화를 만들었다. 선배 세대인 586들이 “시대에 대한 관심도 고민도 없는 속물”이라며 혀를 차도 여전히 저 잘난 맛에 대학생활을 했다. 언론이 이들을 X세대나 신인류로 규정했을 때 정작 많은 X세대는 눈을 흘기며 이렇게 말했다. “나는 나일 뿐. 누구에게도 규정되고 싶지 않아.” 풍요로울 때는 풍요를 몰랐다는 사실은 배고픔이 와서야 깨닫게 됐다. 세기말에 덮친 외환위기는 어떤 집단에도 속하길 원치 않던 이들을 한순간에 ‘IMF 세대’로 엮어버렸다. 저주받은 94학번(남자는 91∼92학번)은 기업에서 대거 합격취소 통보를 받고 장기 백수 또는 ‘고시 낭인’의 길로 들어섰다. “아무리 학사경고를 받아도 기업에서 입도선매해 직장을 골라갔다”는 운동권 선배들의 술자리 자랑은 이들에겐 너무 비현실적인 얘기였다. 서류 광탈, 졸업 유예, 스펙 경쟁 등 요즘 대학가를 떠도는 많은 용어가 이즈음 태동했다. 그때만 해도 그저 아주 혹독한 ‘예방 주사’를 맞은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이는 서막에 불과했다. 2003년 카드대란과 2008년 금융위기로 X세대 직장인들은 상시 구조조정 위기에 놓이고 실질소득도 이전 세대보다 쪼그라들었다. 부동산에 대한 기억도 쓰라리다. 취업난과 저금리로 안정되게 종잣돈을 모을 기회가 없었던 이들은 수십억 원대 강남 아파트는 고사하고, 각종 신도시 개발 혜택도 제대로 누리지 못했다. 오히려 남들 따라 뒤늦게 빚 얻어 집 샀다가 가랑이 찢어진 하우스푸어가 더 많다. 다니는 직장에선 586의 장기 집권에 눌려 아직 기를 펴지 못하고 있다. 위에서 시키는 대로 밤마다 주말마다 빡세게 일만 하다가 이제 좀 밑에 시켜볼 만한 지위가 되니까 주52시간제가 찾아왔다. 이 세대의 아픔은 가정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시기에 접어들며 절정으로 치닫고 있다. 지난주 발표된 40대의 고용률은 78.5%로 21개월째 내리막을 걷고 있다. 제조업 침체로 좋은 일자리가 사라지면서 이들 상당수가 노동시장에서 조기 퇴장하고 있다는 신호다. 가계 빚과 자녀교육비 부담에 짓눌리며 빈곤율도 20대를 추월했다. 40대는 직장에서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 연봉이 오르지만, 동시에 한 번 일터에서 밀려나면 다시 비슷한 조건의 일자리를 잡는 게 거의 불가능한 시기다. 이른 시기에 일자리를 잃은 이들의 앞에는 노후 빈곤으로 가는 특급 열차가 대기하고 있다. 경제의 ‘허리’ 역할을 하는 40대의 고용 부진에 대통령부터 장관까지 모두 안타깝다는 말만 되풀이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뚜렷한 해법은 내놓지 못한다. 이들의 일자리는 60대 노인처럼 재정을 풀어서 늘릴 수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도 497의 블루스는 어떻게든 끊어내야 한다. 이 세대의 좌절과 무기력이 밀레니얼세대, Z세대까지 대물림되면 나라 경제가 자칫 회복 불능의 상태에 빠질 수 있다. 40대의 시련은 우리의 현재이자 미래다.유재동 경제부 차장 jarrett@donga.com}

    • 2019-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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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객 위한 윤리 강령쯤은 헌신짝처럼 내던진 은행들[광화문에서/유재동]

    이번 파생결합펀드(DLF) 대량손실 사태에서 피해자들이 가장 많이 분통을 터뜨리며 하는 말은 “은행에서 팔기에 안전한 줄 알았다”, “차마 은행이 이럴 줄은 몰랐다”는 것이다. 실제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은행이라는 곳은 증권사나 저축은행 같은 다른 금융회사에 비해 더 신뢰할 만하다는 뿌리 깊은 관념이 있다. 피해자들은 평소 잘 알고 지내던 은행 직원이 권하기에 별다른 의심 없이 가입 신청서에 서명을 했다고들 말한다. 이들이 금전적인 손실과는 별개로 심리적인 충격과 배신감도 유난히 크게 느끼는 이유다. 우리가 은행을 안전하다고 믿게 된 것은 금융회사의 본질적인 존재 이유와 관련이 깊다. 만약 누군가가 은행을 통하지 않고 직접 돈을 다른 사람에게 빌려준다면 높은 이자를 요구할 수는 있을지언정 돈을 떼일 위험에서는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은행이 이 위험을 대신 떠안아준 덕에 우리는 안전하게 예금 이자를 받으면서 여윳돈을 굴릴 수 있다. 보험사 역시 가입자에게 보험료를 걷는 대가로 삶에서 마주할 수 있는 여러 위험을 대신 보장한다는 점에서 은행과 비슷한 기능을 한다. 결국 금융회사의 본질은 고객의 리스크를 줄이고 자산을 안전하게 보호해주는 ‘선량한 관리자’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번 사태에서 은행들이 ‘선량한 관리자’는커녕 오히려 고객의 위험을 조장하며 돈을 버는 ‘카지노 주인’의 역할을 했음이 여실히 드러났다. 은행이 판매한 DLF란 상품은 예·적금보다는 높은 수익률을 제시하지만 자칫 시장 상황에 따라 원금을 전부 날릴 수도 있는 초고위험 상품이다. 투자자가 이런 위험에 노출된 것과 반대로 이 상품을 설계하고 판매한 금융회사는 고객 돈의 1∼2%가량을 수수료로 꼬박꼬박 떼어 갔다. 고객에게 손실 위험을 전부 다 떠넘기면서 앉은자리에서 기회비용도 따로 없는 무위험 수익을 즐긴 것이다. 저금리로 인해 마진이 계속 줄어드는 은행엔 이만한 효자 상품도 없었을 것이다. 금융당국 조사에 의하면 은행들은 DLF 판매를 마치 군사 작전하듯 밀어붙였다. 본사 위원회 심의 과정에서 상품의 위험성에 대한 우려가 나왔지만 해당 위원을 교체하면서 가볍게 묵살했다. 각 점포도 지점 평가나 인사 고과에서 점수를 얻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했다. “상품에 문제 있으니 판매를 재고하자”는 현장의 목소리쯤은 지점장의 실적 압박 속에 바로 묻혔다. 일부 은행 PB들은 이 상품이 ‘금융위기 같은 쇼크에도 안정적’, ‘손실 확률은 0%’라고 광고해 팔았고, 은행 측은 이런 케이스를 우수 사례로 선정해 다른 지점들에 전파했다. 이런 허위과장 마케팅에 낚였다가 목돈을 잃은 고객들은 “은행이 사기를 쳤다”며 울분을 토하고 있다. 이번 사태에 책임이 있는 은행들의 홈페이지에는 소비자 보호를 위한 강령이 명시돼 있다. 고객의 재산을 안전하게 보호하고 소비자에게 적합한 상품을 권하는 것을 최우선 행동기준으로 삼는다는 내용이다. 은행들은 회장, 행장이 나서서 이에 대한 선포식을 열고 직원들에게 윤리 서약을 받는다는 홍보 자료를 수시로 뿌린다. 그게 한낱 쇼였을 뿐이었다는 사실을 이번에 세상이 다 알게 됐다.유재동 경제부 차장 jarrett@donga.com}

    • 2019-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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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부는 거듭 아니라지만… 점점 커지는 디플레 논쟁[광화문에서/유재동]

    ‘경제는 심리’라는 말을 자주 쓴다. 경기 흐름이 실제 사람들이 마음먹은 대로 가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앞으로 경제 전망이 좋고 자신의 미래도 탄탄하다고 본다면 돈을 쓰는 데도 어느 정도는 너그러워질 것이다. 하지만 경기가 나쁠 것으로 보이면 사람들은 지갑을 더 닫게 되고 이는 소비와 고용에 연쇄적으로 영향을 준다. 그래서 비관론이 더 커지기 전에 서둘러 가계나 기업의 경기 인식을 긍정적으로 돌려놓는 것은 정부의 중요한 책무 중 하나다. 이런 현상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디플레이션이다. 가장 가까운 일본의 사례를 보자. 1999년부터 2004년까지 5년여간 일본은 장기적인 물가 하락을 겪었다. 그때 일반 생필품뿐 아니라 주택 등 자산 가격도 함께 곤두박질쳤다. 보통 물건 값이든 집값이든 떨어지다 보면, 사람들이 ‘이젠 더 안 내리겠지’ 생각할 때쯤 저가 매수세가 들어오는 게 정상이다. 하지만 어디가 바닥인지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워낙 비관 심리가 팽배하다 보니 오랫동안 가격 하락이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극심한 비관과 공포가 더 큰 불황을 낳은 것이다. 최근 우리나라도 디플레이션 논쟁에 제대로 불이 붙었다. 지난달 물가상승률은 1년 전보다 0.4% 떨어졌다. 사실상 마이너스(―0.04%)였던 8월에 이어 두 달 연속 하락세다. 소비자들의 물가 전망을 나타내는 기대인플레이션율도 2002년 통계 작성 이후 처음 2% 아래(1.8%)로 내려갔다. 올 들어 성장률과 수출, 물가 등 주요 경제지표에 예전에 없던 마이너스 부호가 붙으면서 경제 역주행 우려가 커지는 상황이다. 상황이 심상치 않게 되자 정부는 망가진 경제 심리를 되살려 놓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공식 회의와 보고서, 언론 인터뷰 등 가용 채널을 총동원해 “지금의 물가 하락은 여러 요인이 겹쳐진 일시적인 현상에 불과하다”는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 그러면서 “디플레 우려는 과장됐다”, “우리 경제의 펀더멘털은 우수하다”, “위기설은 기우에 불과하다”와 같은 말들도 곁들인다. 심지어 여권 일각에선 경제 사정이 안 좋다고 하는 언론 보도들을 꼽아 가짜뉴스로 규정하는 모습도 보인다. 위기 심리를 진정시키고 나쁜 지표를 숨기는 것은 어느 정부나 해왔던 일이다. 그런데 이 정부에서는 이런 식의 예민한 대응이 오히려 시장의 불안감을 부추기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우리 경제에 문제가 없다”는 정부의 설명이 현실과 동떨어진 지나친 자신감에서 나오는 게 아니냐는 것이다. 우리 경제가 침몰 직전의 상황까진 아니라 해도 여러 가지 구조적인 문제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럼에도 정부는 경제지표가 나쁠 때마다 외부 탓으로 일관해 왔고 기존 정책 노선을 수정하는 데는 인색했다. 지금이 디플레이션이라 주장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다만 앞으로 디플레이션과 비슷한 양상으로 흐를 수 있어 걱정된다는 목소리가 있을 뿐이다. 이런 불안 심리를 잘 다독이기는커녕 ‘가짜뉴스 프레임’을 씌워 공격해대면 정책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고 역효과만 더 커질 것이다. 그렇게 무너진 경제 심리는 나중에 어떤 수단으로도 회복이 어려울 수 있다.유재동 경제부 차장 jarrett@donga.com}

    • 2019-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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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면접때 자기를 너무 꾸미려고 하지 마세요” 본보 찾아가는 청년드림 취업 특강

    “면접 때 너무 자기를 꾸미려고 하지 마세요. 단점이라도 솔직히 얘기하는 게 좋아요.” 2일 오후 서울 성북구 성북동 동구마케팅고등학교 강당에서는 동아일보 청년드림센터가 주최하는 ‘찾아가는 청년드림 취업특강’이 열렸다. 기업 인사담당자가 특성화 고교를 찾아 취업 팁을 알려주는 강연을 하고 해당 학교 출신 직원들이 모교 재학생들과 토크콘서트를 하는 자리다. 이날 행사엔 동구마케팅고 학생 200여 명이 참석했다. NH투자증권 하은정 인사부 과장은 “자기소개서는 너무 자아도취하지 말고 읽는 사람 입장에서 솔직하게 써야 한다”며 “면접 때도 답변을 외웠다는 느낌을 주기보다는 진솔한 태도를 갖는 게 높은 점수를 받는다”고 조언했다. 한화투자증권 강도현 인재관리팀장은 “자신이 얼마나 이 업종에 관심 있는지, 이 회사가 본인에게 얼마나 절실한지 잘 드러내야 한다”며 “자기소개서는 두괄식으로 간결하게 쓰고 오타가 없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 학교를 졸업해 최근 취업한 민지윤 교보생명 사원(20)은 “면접 때 너무 긴장하지 말고 옆 지원자가 말하는 것을 경청하는 모습을 보이면 좋은 인상을 줄 수 있다”고 했다. 김재희 NH투자증권 사원(19)은 “자격증을 많이 따서 여러 분야 업무가 가능한 인재라는 것을 강조한 게 도움이 됐다”고 전했다.유재동 기자 jarrett@donga.com}

    • 2019-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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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저축하면 보관료 내는 세상 그래도 돈 맡기는 사람들[광화문에서/유재동]

    “경제학자들은 수요와 공급 곡선으로 세상 모든 일을 다 설명하려 든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이들이 두 곡선으로 설명하는 수많은 현상 중에는 물론 시장금리의 움직임도 포함돼 있다. 가령 은행 금고에 돈은 많은데 이를 대출해줄 곳이 없다면 금리가 내려갈 수밖에 없고, 반대로 예금은 적은데 돈을 빌리려는 곳이 많으면 금리가 오르게 된다. 동네 시장에서 상품의 수급에 따라 물건값이 오르내리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다. 그런데 화폐의 가격, 즉 금리가 계속 내려가다 못해 영(0) 밑으로 떨어졌다면 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이런 ‘마이너스 금리’는 그동안 인류 역사에서 거의 없었던 현상이라 전문지식이 있는 학자들조차도 직관적으로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가격은 0보다 크다’, ‘돈은 이자를 낳는다’는 기존 패러다임이 송두리째 흔들리는 셈이기 때문이다. 식당 메뉴판의 가격표에 ‘―’가 붙어있다고 상상해 보자. 마치 태양이 지구를 돌고, 시냇물이 아래에서 위로 흐른다는 말과 비슷한 느낌일 것이다. 이처럼 동화 속 ‘거꾸로 세상’에서나 가능할 법한 일이 지금 현실에서 벌어지고 있다. 덴마크 스웨덴 스위스의 정책금리나 예금금리는 마이너스의 영역에 진입한 상태다. 실제 이들 나라의 일부 은행은 마이너스 금리로 일반 소비자에게 대출을 내주기 시작했다. 만일 금리가 ―1%라면 100만 원을 대출받았을 때 만기에 99만 원만 상환하면 된다는 뜻이다. 유럽뿐 아니다. 일본도 금리가 0보다 낮은 국채를 발행하고 있다. 미국에서도 대통령이 “금리가 제로 또는 그 아래로 가야 한다”며 중앙은행을 압박하고 있다. 이제 선진국에서 마이너스 금리가 ‘뉴노멀’이 되는 것은 시간문제일 듯하다. 그러면 마이너스 금리는 나쁘기만 한 걸까? 이자 생활자에겐 죽을 맛이겠지만 당장 돈이 필요한 기업이나 가계에는 좋은 기회일 수도 있다. 대출을 받으면서 이자를 내기는커녕, 오히려 돈을 벌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소비와 투자가 늘어나게 되면 화폐의 수요 곡선이 정상 궤도를 되찾아 경제는 다시 활력을 회복할 수 있다. 유럽 등 주요국이 이처럼 전례 없는 극약 처방을 하는 것도 다 이런 시나리오를 노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막상 현실에서는 그런 기대와 반대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금리가 낮아졌다고 마음 놓고 돈을 갖다 쓰기보다 오히려 현금을 장롱이나 금고에 더 쌓아두고 있는 것이다. 이런 현상의 배경에는 경기에 대한 비관 심리가 자리하고 있다. 향후 경기가 안 좋아 금리가 더 내릴 것으로 본다면 당장 손실 볼 게 뻔한 채권에 투자하거나 보관료를 내가며 은행에 돈을 맡기는 게 어쩌면 더 합리적인 선택일 수 있다. 우리나라는 금리가 아직 플러스 상태지만, 마이너스 금리와 비슷한 효과를 내는 정책은 이미 써본 적이 있다. 기업 투자를 늘리고 가계 소득을 높이겠다며 대기업의 사내유보금에 세금을 부과한 것이다. 결과는 모두가 아는 대로다. 정부가 아무리 돈을 쓰라고 부추기고 심지어 벌금을 매겨도 가계나 기업은 돈을 쓸 여건이 안 된다고 판단하면 섣불리 지갑을 열지 않는다. 돈이 넘쳐나는데도 돈을 못 쓰는 진풍경이 이 시대에 펼쳐지고 있다.유재동 경제부 차장 jarrett@donga.com}

    • 2019-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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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저, 푼저, 냉파, 출첵… 생존을 위한 서민의 분투[광화문에서/유재동]

    ‘강저(강제 저축) 1일차입니다. 소소하게 하루 1000원씩이지만 달려봅니다.’ ‘30분 만에 번개같이 볼일 보고 버스 환승 할인받았습니다. 1250원 아껴서 푼저(푼돈 저금) 성공!’ 요즘 재테크 관련 온라인 카페에는 서민들의 눈물나는 절약 수기가 넘쳐 난다. 하루 1000원씩 6개월 아껴 적금 20만 원을 탔다며 뿌듯해하고, 운동 앱을 이용해 몇 달을 열심히 걸어 커피 한 잔 값을 마련했다는 정도는 예사다. 식비와 전기료, 그리고 음식물 쓰레기봉투 값을 아낀다며 냉파(냉장고 파먹기)로 남은 식재료를 해치우거나, 쇼핑몰 앱에 매일 출첵(출석 체크)해 공짜 포인트를 꾸준히 모으기도 한다. 이런 게시물에 댓글이 이어지며 모르는 이들끼리 서로 조언과 격려를 주고받는 모습도 연출된다. 서점에도 절약과 저축을 다룬 책들이 유독 많이 보인다. 통신사와 카드사 혜택 챙기는 것은 기본이고 영화를 ‘문화가 있는 날’에만 보며 관람료 할인을 받는 법, 각종 경품 이벤트의 당첨 확률을 높이는 법을 가르쳐주는 책도 있다. 지하철을 자주 탄다면 한 달 정기권을 사야 훨씬 유리하다거나, 회사에 도시락을 싸갖고 다니며 점심 값을 아끼라는 조언도 한다. 이런 현상은 15∼20년 전 벤처 버블로 ‘부자 되기’ 열풍이 불었을 때와는 큰 차이가 있다. 당시 일반인들 사이에 ‘자산 10억 만들기’ 붐이 일었고, ‘여러분, 부자 되세요’라는 광고 카피가 인기를 끌었다. 이때 베스트셀러가 된 책은 ‘저축만 하면 가난해지고, 투자를 해야 부자가 된다’고 역설하며 펀드의 대중화를 일으켰다. 하지만 지금은 사람들의 돈에 대한 목표치가 그때보다 훨씬 낮아진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이젠 10억 원은커녕 종잣돈으로 1억 원, 심지어 1000만 원을 마련하는 것도 다들 버거워한다. 어떤 재테크 책은 “1억 원을 예금하면 매달 이자가 15만 원 나온다. 하지만 우린 아무리 노력해도 1억 원을 모을 수 없으니 다달이 15만 원씩 아끼며 1억 원을 번 효과라도 얻자”고 제안한다. 재산 증식의 희망이 점점 줄어들다 보니 사람들은 어쩌다 생기는 작은 기회에도 구름같이 몰린다. 최근 한 인터넷은행에서 내놓은 금리 5% 예금은 순식간에 100만 명이 몰려들며 출시 1초 만에 완판이 됐다. 오프라인 점포에서도 특판 예금 가입을 위해 새벽부터 긴 줄을 서는 풍경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이런 상품에 가입해 얻을 수 있는 추가 금리 혜택은 한 달에 몇천 원, 많아야 1만∼2만 원 선이다. 하지만 이 정도의 이득이라도 얻기 위해 몇 날 며칠 정보를 찾고, 발품을 팔며, 실낱같은 가능성에 기대를 건다. 이처럼 사람들이 부(富)나 성공에 대한 기대를 접고 ‘재테크 소시민’으로 만족하며 사는 것은 더 큰 불황의 징조라는 점에서 매우 위험한 현상이다. 남들처럼 부자가 되긴 이미 글렀으니 작은 돈이라도 성실하게 모아 생활비라도 건지겠다는 세태가 우리 마음을 짠하게 한다. 비록 용이 되진 못했지만, 개천의 가재나 붕어로라도 열심히 살아가겠다는 의지다. 그런데 그런 마음을 어루만지기는커녕 자꾸 후벼 파는 용들이 우리 주변에 많은 것 같아 더욱 안타깝다.유재동 경제부 차장 jarrett@donga.com}

    • 2019-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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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0년전 틀린 노무라의 예언 이번에는 현실이 되나[광화문에서/유재동]

    요즘 금융계에선 ‘노무라의 예언’이 화제가 되고 있다. 4월 노무라증권이 올해 한국의 성장률 전망치를 국내외 기관 중 가장 먼저 1%대(1.8%)로 끌어내린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당시는 일본의 경제 보복이 표면화되기 전이어서 대다수 경제연구기관들이 2%대 중반의 성장률을 예상하고 있던 때였다. 지금 와서 다시 곱씹어보면 이 예언은 두 가지 측면에서 여전히 흥미롭다. 하나는 하필 일본계 금융회사가 한국 경제에 대한 비관론의 선두 주자가 됐다는 점이다. 이를 두고 일각에서 나오는 얘기가 있다. 노무라가 과감하게 성장률을 낮춘 것이 자국 정부의 수출 규제에 대한 정보를 사전에 입수한 결과가 아니냐는 것이다. 물론 아직까지는 근거 없는 추측일 뿐이다. 또 하나의 포인트는 노무라가 이전에도 여러 차례 한국을 부정적으로 보며 우리를 놀라게 했다는 사실이다. 대표적인 게 1998년 10월 노무라증권 서울지점에서 나온 4쪽짜리 리포트다. ‘대우그룹에 비상벨이 울리고 있다’는 제목의 이 보고서가 나온 지 열 달 뒤 실제로 대우는 산산조각이 나며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다음은 금융위기 직후인 2009년 초다. 노무라는 그해 한국의 성장률이 ―6%까지 내려갈 것이라는 충격적인 전망을 냈다. 당시 직접 기사를 쓰면서 내 눈을 의심하고 거듭 확인을 했던 기억이 아직 생생하다. 그러나 10년 전 노무라의 예측은 다행히도 크게 빗나갔다. 금융위기의 충격으로 대부분 국가들의 성장률이 뒷걸음질하던 그해, 한국은 오히려 소폭 플러스 성장(0.8%)을 했다. 우리 경제의 부정적인 면을 애써 부각시켰던 외신들도 언제 그랬냐는 듯 “한국은 위기 극복의 모범 사례”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올해는 어떻게 될까. 안타깝게도 노무라가 이번에는 뭔가 제대로 짚은 분위기다. 이제는 ING그룹(1.4%), 모건스탠리(1.8%) 등 외국계는 물론이고 한국은행과 국내 기관들마저도 (비관적 시나리오를 전제로) 1%대 성장률을 경고하고 있다. 게다가 이 중 상당수는 앞으로 일본의 2차 보복을 계산에 반영해 전망치를 더 떨어뜨릴 태세다. 그 폭이 보수적으로 잡아도 0.2∼0.5%포인트 정도라고 한다. 만약 이 추세대로 1%대 성장률이 확정된다면 이는 한국 경제가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이 된다. 지금까지 우리 성장률이 2% 아래로 떨어진 것은 석유파동이나 외환위기처럼 경제 시스템에 초대형 쇼크가 생겼을 때뿐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렇게 둘러댈 핑곗거리조차 없다. 정부는 일본발 악재나 추경 지연 처리 등을 거론하며 어떻게든 남 탓을 할 가능성이 높지만 성장잠재력 훼손은 이미 그전부터 현실화되고 있었다. 세계 평균과의 성장률 격차도 갈수록 벌어지고 있다. 해외에서 날아드는 비관론은 때때로 우리 경제의 취약점을 살피고 잘못된 정책을 가다듬는 계기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 정부와 정치권이 보여준 행태는 그런 정제된 대응보다는 거친 비난과 변명, 책임 공방에 더 치우쳐 있는 것 같다. 이제라도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노무라의 예언은 언제라도 계속 반복되며 우리의 숨통을 조일 것이다.유재동 경제부 차장 jarrett@donga.com}

    • 2019-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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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살찐 가젤이 초원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광화문에서/유재동]

    ‘당신이 가젤이든 사자든 상관없다. 모두 해가 뜨면 열심히 달려야 한다.’ 경영컨설팅 회사인 맥킨지&컴퍼니는 지난주 발표한 분기 보고서에서 위기 상황을 잘 극복하는 기업들의 특징을 분석했다. 12개 업종에서 연 매출액이 10억 달러 이상인 기업 약 1100곳을 토대로 조사한 결과다. 이들의 공통점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경기가 나빠질 것 같으면 먼저 비용을 줄이고 현금을 확보한다. 그리고 경제가 회복할 조짐을 보이면 경쟁사가 싸게 내놓은 매물을 인수한다. 경기와 무관한 사업에는 지출을 아끼지 않는다.’ 먹구름이 다가올 때는 몸을 낮추고 체력을 길러 놨다가 서광(曙光)이 보이기 시작하면 재빨리 도약해 기회를 잡는다는 것이다. 조금만 게을러져도 천적에게 잡아먹히는 가젤, 또는 먹이를 못 잡아 굶어 죽는 사자 꼴을 면할 수 없는 게 글로벌 경제의 냉혹한 현실이다. 얼마 전 하버드비즈니스리뷰(HBR)가 내린 결론도 맥킨지의 분석과 맥을 같이한다. 위기를 잘 헤쳐 나가는 기업들은 ‘누구보다 일찍 움직이고, 장기적인 전략을 짜며, 항상 성장을 추구한다’는 특징을 공유하고 있었다. 선제적 대비와 발 빠른 대처가 위기관리의 핵심이라는 점은 기업뿐 아니라 국가도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위기 극복에 능한 정부를 ‘맥킨지식 언어’로 표현하면 이쯤 되지 않을까 싶다. ‘경기 위축에 대비해 산업 구조조정을 충실히 하고 시장의 거품을 뺀다. 그러다 경제가 다시 살아날 조짐을 보이면 규제 완화와 세제 지원으로 기업들의 투자 확대를 유도한다.’ 이를 위해 평소 경기 흐름을 제대로 읽고 연구개발과 기술 투자로 기초체력을 다져놓는 것은 기본이다. 한국은 어떨까. 우리는 기축통화가 없는 중진국의 특성상 경제위기를 여러 차례 겪었지만, 그래도 지금까지는 난관을 무리 없이 잘 극복해온 편이다. 하지만 이번 위기는 과거와는 차원이 다르다는 게 전문가들의 일치된 견해다. 수출이 악화되고 성장률 전망도 하루가 다르게 떨어지는 와중에 한 국제 신용평가사는 “한국 기업이 부정적 사이클에 진입했다”는 평가까지 내놨다. 머지않아 우리 기업들의 신용등급을 줄줄이 끌어내리겠다는 것이다. 전 세계에서 울리는 무역전쟁의 포성은 한국이 지금까지의 성장 전략으로는 현 위기를 타개하기 어렵다는 점을 보여준다. 사실 한국 경제에 대한 안팎의 경고는 오래전부터 있었다. 2017년 중반 현 정부 출범과 함께 정점을 찍은 경기는 그 후 계속 하강하는 추세다. 그럼에도 정부는 위기론에 귀를 닫고 최저임금 대폭 인상,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등 오히려 시장 활력을 떨어뜨리는 정책을 펴왔다. 고된 시기가 다가오는데 군살을 빼고 미래를 대비하기는커녕 오히려 몸을 무겁게 만드는 반대의 길을 택한 것이다. 평소 기술 개발을 등한시한 것은 일본의 경제 보복이라는 부메랑으로 돌아왔다. 어느 정부든 “경제를 살리기 위해 앞장서서 뛰겠다”는 다짐을 입버릇처럼 한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이렇게 되묻고 싶다. 우리 정말 뛰는 것 맞나. 그게 맞는다면 과연 올바른 방향으로 뛰고 있나. 가끔은 지금 우리 모습이 사자가 오는 줄도 모르고 한가롭게 풀을 뜯는 살찐 가젤이 아닌가 싶다.유재동 경제부 차장 jarrett@donga.com}

    • 2019-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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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요즘 이익 많이 낸다며?” 정부의 일자리 강탈 사건[광화문에서/유재동]

    얼마 전 일반 기업과 은행에 대한 규제 업무를 모두 해봤다는 관료를 만났다. 화제는 자연스레 두 집단의 차이가 무엇인지로 옮겨갔다. 결론을 내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일반 기업은 회사 이익이나 경영권에 조금이라도 해가 될 것 같으면 일단 끝까지 저항하는 데 반해, 금융회사들은 정부가 무슨 요구를 해도 항상 고분고분하더라는 것이었다. 오너 있는 기업과 주인 없는 은행의 차이가 또 이런 데서 갈리는구나 싶었다. 취업난에 마음이 급한 정부가 이번에도 만만한 은행들을 골라잡았다. 은행이 신규 채용을 얼마나 하는지, 고용 창출 기업에 대출을 얼마나 해주는지 따져보겠다는 것이다. 정상적인 은행이라면 직원 채용은 사람이 필요할 때, 대출은 돈 필요한 기업이 부실 위험이 적을 때 각각 알아서 하는 게 맞다. 이런 자율적인 경영 사안을 마치 초등학생 숙제 검사하듯 일일이 체크하겠다고 하니 은행들이 발칵 뒤집어졌다. 사실상 앞으로 필요하지도 않은 직원을 뽑고, 기업이 일자리만 유지하면 돈 떼먹힐 각오하고 대출을 내주라는 압력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부작용에 대한 우려가 커지자 당국은 구구절절한 해명을 늘어놓고 있다. “일자리 창출 효과를 ‘측정’하는 것일 뿐 ‘평가’가 아니다” “순위를 공개하지 않으니 은행 줄 세우기가 아니다”고 했다. 그러자 금융권에선 “‘평가’와 ‘측정’의 차이가 도대체 무엇이냐” “선생님이 성적은 매기는데 부모님께만 알리지 않겠다는 말이냐”는 냉소가 터져 나왔다. 어떤 말로 취지를 좋게 포장해도 결국 개별 은행들의 일자리 성적표가 당국의 손에 들어가고, 앞으로 더 숫자를 올리라는 압박이 이어질 게 뻔하기 때문이다. 이런 희한한 일이 발생한 배경에는 금융업에 대한 정부의 왜곡된 인식이 자리하고 있다. 금융회사를 4차 산업혁명의 핵심 동력은커녕, 국정과제를 뒷받침하는 공공기관이나 하청업체쯤으로 본다는 것이다. 그것도 좋게 말해서 ‘국정과제 지원’이지, 실제로는 국정 실패를 수습하고 떠안는 용도로 아무렇게나 쓰인다. 얼마 전 카드 수수료율 인하가 대표적이다. 최저임금 인상에 반발하는 자영업자를 달래기 위해 금융당국은 신용카드사의 팔을 비틀었다. 이번에는 무리한 소득주도성장과 이로 인한 고용대란의 책임을 난데없이 은행에 떠넘기려 하고 있다. 문제는 그 뒷감당이다. 은행들이 정부 압박에 필요 없이 많은 행원을 뽑고 부실 대출을 하다가 건전성이 악화되면 누가 책임질 것인가. 일자리는 성장과 투자, 혁신의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생겨난다. 이 정부는 마치 일자리를 기업의 옆구리를 찌르면 받을 수 있는 상납이나 흥정의 대상으로 여기는 모양이지만 그런 식으로 접근해서는 문제를 풀 수 없다. 지금처럼 “이익 좀 냈으니 일자리 창출로 보답하라”는 식으로 압박하면 오히려 기업의 의욕이 떨어지고 결과적으로 일자리도 줄어들 것이다. 일자리는 기업이 필요할 때 늘린다. 정부가 할 일은 막대한 세금을 퍼부어 일회성 일자리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기업 활동에 족쇄가 되는 규제를 풀어주는 것이다. 기업이 직원 채용을 사회공헌 삼아 하는 나라는 이 세상에 우리밖에 없을 것이다. 유재동 경제부 차장 jarrett@donga.com}

    • 2019-0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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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제 성공했다’는 정부에 시장이 건네는 묵직한 경고[광화문에서/유재동]

    정기예금을 가입하러 은행에 갔는데 1년 만기와 10년 만기 상품이 있다. 만약 두 상품의 금리가 같다면 무엇을 택해야 할까. 조금이라도 생각이 있는 고객이라면 당연히 1년 만기를 고를 것이다. 일단 1년을 맡겨보고 다시 어디에 투자할지 판단해야지, 이자율도 같은데 굳이 10년간 돈을 묶어놓을 이유가 없다. 만기가 너무 길면 급한 일이 생겨도 돈을 꺼내 쓰기 어렵고, 좋은 투자 기회도 흘려보내야 한다. 또 그사이 물가가 계속 오르면 은행에 맡긴 내 돈의 가치도 저절로 떨어진다. 금융시장에서 장기 금리가 단기 금리보다 항상 높게 형성되는 건 이런 이유 때문이다. 오랫동안 돈을 맡기는 대신 그만큼 이자를 더 쳐주겠다고 해야 비로소 ‘그래? 그렇다면…’ 하며 고민하는 투자자가 생긴다. 그런데 요즘 금융시장에서는 이런 통념을 뒤엎는 기현상이 관찰되고 있다. 장기 금리가 단기 금리 밑으로 뚝뚝 떨어지고 있는 것이다. 지난주엔 3년, 5년은 물론이고 20년, 30년짜리 초(超)장기 국고채 금리가 한국은행의 기준금리 아래로 추락했다.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이자는 적게 받아도 상관없으니 10년이든 20년이든 내 돈을 안전하게만 지켜 달라’는 투자자가 늘었다는 뜻이다. 이런 ‘장단기 금리 역전’은 경제 전망이 아주 나빠졌다는 신호라는 점에서 심각한 문제다. 왜 그럴까. 우선 역으로 경기 전망이 좋은 경우를 가정해 보자. 그러면 사업이나 투자 기회가 많아지고, 그에 따라 돈에 대한 수요도 늘어난다. 자연히 예금이나 채권 금리도 따라 오를 것으로 기대하게 된다. 반대로 미래를 비관하는 사람이 늘어나면 이미 갖고 있는 돈이라도 잘 지키려는 성향이 강해진다. 경제 성장과 투자가 부진한 만큼, 물가나 금리도 계속 제자리를 맴돌거나 내려갈 가능성이 높다. 이런 상황이 오래 지속될 것으로 본다면 낮은 금리에 돈을 오래 묻어두는 것도 그리 이상한 선택이 아닐 수 있다. 정부와 한은은 이런 비정상적인 상황에도 그리 대수롭지 않다는 듯 반응해 왔다. “시장이 너무 앞서가서 나타난 현상”이라는 것이다. 마치 우리 경제는 멀쩡한데 괜히 시장이 오버하고 있다는 식이다. 하지만 그렇게 넘겨버리기엔 최근 우리 주변에서 보이는 ‘경제 비관(悲觀)’의 양상은 심각한 수준이다. 시중은행에선 달러 예금이 눈에 띄게 늘었고 골드바는 품귀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해외 주식과 부동산에 대한 투자 설명회도 항상 만원이다. 정부의 거듭된 부인에도 화폐개혁설 등 각종 괴담이 유튜브 등에 독버섯처럼 퍼지고 있다. 이런 불길한 현상들이 한꺼번에 쏟아지는 이유를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우리 경제와 정부 정책에 대한 기본적인 신뢰가 깨졌기 때문이다. 물론 요즘 시장의 불안심리가 일부 과장돼 나타난 측면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무작정 이를 과민반응이나 정치 공세로 치부할 일은 아니다. 7년 만의 경상수지 적자 가능성, 반년째 수출 감소, 외국인 주식 매도 등 객관적 지표들이 그 엄연한 근거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얼마 전 대통령은 “경제가 성공으로 가고 있다”고 했지만 시장은 “그 길이 아닐 수 있다”는 경고를 보내고 있다.유재동 경제부 차장 jarrett@donga.com}

    • 2019-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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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화문에서/유재동]잠깐의 경상수지 적자도 한국엔 보통 문제가 아니다

    수입과 지출의 관점에서 봤을 때 한 나라의 경제발전 단계는 사람의 일생과 비슷한 면이 많다. 경제발전의 1단계는 자본과 기술이 모두 부족해 외국에서 돈을 빌려오고 각종 재화도 수입하는 단계다. 사람으로 따지면 의식주와 학비 등 대부분을 부모에게 의존하는 아동청소년기에 해당한다. 그 다음엔 어느 정도 기술이 생겨 수출을 시작하고 외화도 벌지만, 여전히 벌어온 돈으로 힘들게 외채를 갚아야 하는 시기다. 인생에서는 취직을 하며 월급을 받지만 동시에 내 집 마련을 위해 대출을 갚아 나가는 20, 30대와 비슷하다. 1, 2단계를 졸업하면 선진국에 가까워진다. 3단계에선 산업기술의 고도화로 충분한 외화를 벌고 그 돈으로 해외 자산을 취득해 자본 이득도 보기 시작한다. 연봉이 높아지고 어느 정도 자산도 이뤄 경제적으로 가장 풍족한 40, 50대의 얘기다. 마지막은 소비가 크게 늘며 무역적자가 생기기도 하지만 그동안 취득한 해외 자산 덕분에 국민들이 먹고사는 데 지장이 없는 단계다. 정년퇴직으로 노동소득은 줄어도 부동산 임대료나 연금으로 넉넉한 노후를 사는 은퇴 세대가 그렇다. 이 틀에서 보면 한국은 빠른 경제발전을 통해 1, 2단계를 거쳐 지금은 3단계 초입에 들어선 것으로 평가된다. 산업 경쟁력이 비약적으로 발전해 수출로 많은 흑자를 쌓기 시작했지만 해외 투자로 이득을 본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는 뜻이다(2014년 순대외자산국 전환). 미국과 유럽의 많은 선진국들은 이미 마지막 단계에 속해 있다. 1980년대 대표적인 무역흑자 국가(3단계)였던 일본도 지금은 비록 엔화 강세로 무역에서 때때로 손해를 보지만 해외에서 막대한 투자 이익을 누리는 4단계 국가로 발돋움했다. 1단계에서 4단계로 착실히 나가는 게 이상적인 경제발전이라고 본다면 이제 막 3단계에 들어선 한국은 아직 한참은 더 수출에 박차를 가하며 달러 곳간을 채워 나가는 게 좋다. 그런데 요즘 금융시장에선 심상치 않은 소식이 들린다. 내달 초 발표되는 4월 경상수지가 수출 감소의 여파로 7년 만에 적자를 볼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인생으로 치면 미처 노후 대비가 부족한 40대 초반에 직장에서 잘리거나 연봉이 크게 깎이는 꼴이다. 정부는 경상수지 적자 여부는 그때 가봐야 알 수 있고 설령 적자가 나더라도 일시적인 현상일 뿐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런 해명을 듣고 안심하기에는 우리 경제의 구조적 문제가 너무 심각하다. 수출은 5개월째 마이너스인 데다 설비 투자가 21년 만에 최악이고 주력 업종의 노쇠화도 뚜렷하다. 더 큰 문제는 인구 구조의 변화다. 생산활동 대신 소비를 많이 하는 고령층이 늘어나면 경상수지 흑자가 줄거나 적자로 돌아설 가능성이 커진다. 한국의 유례없는 고령화 속도를 봤을 때 이번 뉴스는 우리도 만성적인 적자국을 향해 가고 있다는 예고편이 될 수 있다. 지금까지 우리가 월급 따박따박 받는 유능한 직장인이었을지는 몰라도 노년에도 걱정 없이 살 만큼 넉넉한 자산을 쌓았는지는 의문이다. 한때 연간 1000억 달러를 넘었던 기록적인 흑자가 봄눈 녹듯 사라질 날이 다가오고 있다. 우리는 잠깐의 적자도 가벼이 넘길 처지가 아니다. 유재동 경제부 차장 jarrett@donga.com}

    • 2019-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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