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규인

황규인 기자

동아일보 스포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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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 투 더 동아/12월 6일]Prince는 정말 왕자일까

    퀴즈. 아래는 위 사진을 설명하는 내용이다. 각 ○ 안에 알맞은 글자를 넣으시오.“2011년 결혼식을 마친 윌리엄 영국 ○○○(오른쪽)과 캐서린 ○○○○(왼쪽)이 런던 버킹엄궁 발코니에서 입을 맞추고 있다.”한국 언론에서는 보통 맨 처음 나오는 동그라미 세 개를 ‘왕세손’이라고 채운다. 케임브리지 공작 윌리엄이라고도 부르는 그는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의 장손. 영어로는 보통 ‘Prince William’이라고 쓰지만 동양에서 왕의 장손을 왕세손이라고 부르던 걸 준용해 윌리엄도 왕세손이 된다. ‘Prince’가 꼭 ‘왕자’는 아닌 것이다.그러면 캐서린 뒤에는 왕세손의 아내를 부르는 호칭이 들어갈 터. 인터넷 포털 사이트 구글 검색 결과를 보면 ‘왕세손빈’이 1410개로 ‘왕세손비’(840개)보다 많다. 왕세손비나 왕세손빈 모두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서 찾을 수 없는 낱말이지만 역시 동양 왕실 전통에 따라 쓰면 왕세손빈(嬪)이 정답에 가깝다. 비(妃)는 보통 왕의 정실 아내를 뜻하는 표현이기 때문이다.그래서 윌리엄의 어머니를 흔히 ‘다이애나 비’라고 부르는 것도 100% 정확한 표현은 아니다. 웨일스 공작부인 다이애나의 전 남편인 찰스 왕세자가 왕위에 오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왕세자의 아내를 뜻하는 낱말은 왕세자빈 또는 세자빈이다. 따라서 다이애나 비가 아니라 다이애나 빈이 맞다. 다이애나 빈은 영어로 흔히 ‘Princess Diana’니까 Princess도 꼭 공주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추억 속 그 게임 ‘프린세스 메이커(Princess Maker)’가 꼭 ‘공주 만들기’가 아닐 수도 있는 이유다.별로 쓸 일도 없는 왕실 호칭을 원고지 넉 장 넘게 소개한 건 1989년 오늘(12월 6일)자에 실린 ‘英(영) 윌리엄 王子(왕자) 「失禮(실례)」 사진 말썽’ 기사 때문. 일단 여태 확인한 것처럼 제목부터 틀렸다. 이 기사 첫 줄은 “영국 런던의 대중 주간지 「더 피플」은 지난 11월 19일 찰스 황태자의 장남 윌리엄 왕자(7)와 차남 해리 왕자(5)가 학교 운동장에서 노는 장면을 숨어서 찍어 게재했다가 편집장이 해고되어 화제가 되고 있다”이다.황태자는 황제의 자리를 이을 아들을 뜻하는 낱말. 엘리자베스 2세는 황제가 아니기 때문에 웨일스 공 찰스는 황태자로 불릴 수가 없다. 영국은 황제국을 칭한 적이 없지만 영국 왕은 1876년부터 1947년까지 인도 제국 황제를 겸했다. 1947년 파키스탄이 독립하면서 인도 제국이 무너졌고,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1952년 즉위했기 때문에 황제였던 적이 없다. 단, 19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한국 언론에서 이 웨일스 공을 황태자로 부르는 게 일반적이었기에 이 기사만 틀렸다고 할 수는 없다.찰스 왕세자로서는 애석하다면 애석(?)한 건 저 기사가 나오고 28년이 지나도록 두 아들을 왕자로 만들지 못했다는 점이다. 현재 69세인 찰스 왕세자가 영국 왕위에 오르면 1830년 65세로 왕이 된 윌리엄 4세를 넘어 영국 역사상 가장 많이 나이에 즉위한 왕이 된다. 그러니까 찰스는 이미 영국 역사상 최고령 왕세자다.그러면 1일(현지 시간) 결혼하겠다고 발표한 해리는 뭐라고 부르는 게 옳을까. 어쩐지 해리는 왕자라는 표현이 더 잘 어울리는 이름이지만 여왕 손자니까 그냥 왕손(王孫)이 가장 적합한 표현이다.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 2017-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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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 투 더 동아/12월 4일] 1945년 해방 후 첫 임시정부 국무회의

    서울 종로구 평동 강북삼성병원 안에는 경교장(京橋莊·사진)이라는 건물이 들어서 있다. 한때 강북삼성병원 본관으로 쓰기도 했던 이 건물이 유명한 건 해방 후 귀국한 백범 김구 선생(1876~1949)이 사저(舍邸)로 사용했기 때문이다. 백범 선생이 안두희(1917~96)에게 피살당한 곳도 경교장이었다.한때 ‘동교동’이 DJ(김대중), ‘상도동’이 YS(김영삼)를 뜻했던 것처럼 경교장은 곧 백범 선생과 임시정부를 가리키는 표현이었다. 실제로 경교장은 임시정부 청사 역할을 하기도 했다. 1945년 오늘(12월 4일)자 동아일보는 경교장에서 처음 열린 임시정부 국무회의 소식을 전했다.동아일보는 이날 1면 머리기사에 ‘동경(憧憬)턴 고국서 역사적 국무회의’라고 제목을 붙였다. 동경턴은 ‘동경하던’ 그러니까 ‘간절히 그리워하던’이라는 뜻이다.당시 동아일보는 이 기사에서 “조선의 장래를 축복하는 듯이 설후(雪後)에 쾌청(快晴)된”이라고 이 회의가 열린 그해 12월 3일 날씨를 전했다. 눈이 온 뒤 날이 개었다는 뜻이다. 이 기사는 “오전 11시가 지나서 역사적인 국무회의가 개최되었는데 기자들은 벽에 걸린 시계만 쳐다보며 초조하게 대기하고 있다”로 이어진다. 이날 회의는 오후 2시가 넘어서야 끝이 났다.오랫동안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벌인 임시정부 요인에게 제일 큰 문제는 국내 정치 기반이 빈약하다는 점이었다. 당시 임시정부 대변인을 맡고 있던 조소앙 선생(1887~1958)은 국무회의 후 기자들과 만나 “오전에 국무회의가 개최되었으나 김구 주석 이하 선착한 일행이 지난 10일간 국내 정세와 지나온 40년간 국내의 역사를 읽었는데 작일(昨日·어제) 들어온 우리 일행은 아직 국내 역사를 읽지 못하고 방금 첫 페이지를 열어 놓았을 뿐”이라며 “함으로(이런 이유로) 기자 제씨(諸氏·여러분)가 궁금히 알고 듣고자 하는 정치적 문제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못하겠다. 이 점에 있어서는 우리가 전부 독파(讀破)한 후 들어주기를 바란다”고 했다. 실제로는 국내 정치 문제보다 해외 발 폭풍이 더 컸다. 미국, 옛 소련, 영국 외무장관이 모스크바에서 모여 한국을 신탁통치 하기로 결정한 것. 임시정부는 신탁통치 반대(반탁) 운동을 벌이면서 국권을 되찾으려 애썼지만, 이런 활동이 미군정의 반발을 사면서 신탁통치 기간 3년 동안 형식적인 존재로 머물 수밖에 없었다. 결국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들어서면서 임시정부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 2017-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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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 투 더 동아/12월 1일]못말리는 1998년의 신세대 알뜰파

    냉정히 말해 김생민 씨(44·사진)는 전형적으로 ‘가늘고 길게’ 방송 경력을 이어가던 캐릭터었다. 올해로 데뷔 25년차 방송인이 됐지만 ‘약방의 감초’ 같은 존재였을 뿐 ‘그뤠잇(great)’한 존재는 아니었다. 그랬던 그가 올해 ‘김생민의 영수증’ 하나로 스타덤에 올랐다. 원래 팟캐스트 한 꼭지로 시작했던 ‘…영수증’은 “스튜핏(stupid)”, “돈은 원래 안 쓰는 것”이라는 유행어와 함께 성장하더니 어느덧 70분짜리 지상파 정규 방송이 됐다.사실 김 씨 같은 근검절약 캐릭터는 모순적인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누구나 조금이라도 더 돈을 아끼고 싶다는 생각을 마음 한 구석에 품고 있는 게 사실. 그러면서도 돈을 아껴보겠다는 다른 이를 향해서는 ‘짠돌이’, ‘자린고비’ 같은 평가를 서슴없이 내리기도 한다. 한 연예인은 지상파 TV 프로그램에 나와 “쿠폰, 할인카드, 적립카드를 내밀 때 끌렸던 이성이 확 싫어진다”고 이야기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여파가 가시지 않았던 1998년에는 오히려 근검절약이 진짜 미덕일 수 있었을까. 그해 오늘(12월 1일)자 동아일보는 할인쿠폰이 있는 식당만 이용하고, 인터넷 경품 행사에 매일 응모하며, 무료 시사회에서 영화를 보고, ‘패밀리 통화’ 요금제를 활용 가족간에 공짜로 전화를 주고 받는 ‘신세대 알뜰파’를 소개했다.이 기사는 ‘최저가 보상제도’를 실시하던 할인점 관계자가 “주변 점포보다 비쌀 경우 차액을 2배로 보상하고 있는데 100~200원 차이라도 영수증을 들고 와 보상금을 챙겨가는 모습에서 소비의식의 변화를 느낀다”고 말했다고 전했다.이 발언을 보고 ‘굳이 저렇게까지 해야 했나’ 싶은 생각이 드는 걸 보니 ‘…영수증’에 기자가 쓴 영수증을 보내면 분명 ‘스튜핏’ 소리를 들을 게 틀림없다.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 2017-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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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 투 더 동아/11월 27일]‘1000억 원보다 큰 사랑’으로 세운 절, 길상사

    해마다 7월 1일이면 음식을 일절 입에 대지 않는 여인이 있었다. 이 여인이 이날마다 곡기를 끊었던 건 연인 백석(白石·사진)의 생일이었기 때문이다. 이 여인과 이 시인이 마지막으로 헤어진 건 1939년. 그 후 1996년 백석이 숨질 때까지 두 사람은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 여인도 1999년 세상을 떠났다. 백석은 1937년 함남 함흥 시에서 처음 만난 이 여인과 한 눈에 사랑에 빠져 “오늘부터 당신은 나의 영원한 마누라야. 죽기 전엔 우리 사이에 이별은 없어요”라고 고백했다. 그러면서 백석은 시선(詩仙) 이백이 지은 시 ‘자야오가(子夜吳歌)’에서 따와 이 여인에게 ‘자야(子夜)’라는 호를 지어줬다. 운명을 예감했던 걸까. 자야오가는 서역으로 오랑캐를 정벌하러 떠난 남편을 기다리는 여인 자야의 애끊는 심정을 고백한 시였다.“장안에 달 한 조각/집집마다 다음이질 소리/가을 바람 불어 그치지 않으니/모두가 옥문관(玉門關) 향하는 그리움이라/어느 날에나 오랑캐 물리치고/낭군은 돌아올 수 있을까.” - 자야오가 중 추(秋). (옥문관은 만리장성 서쪽 끝에 있는 관문)자야라는 호를 얻기 이전에 사람들은 이 여인을 진향(眞香)이라고 불렀다. 기명(妓名)이었다. 맞다. 서울에서 김영한이라는 이름으로 태어난 이 여인은 가세가 기울면서 열 여섯 살에 기생이 됐다. 진향은 잡지 ‘삼천리문학’에 수필을 발표할 만큼 문학적 재능을 갖춘 기생이었다. 만난 지 얼마 안 된 두 사람은 곧 서울에서 함께 살기 시작했지만 백석의 부모는 아들이 기생과 함께 사는 걸 마뜩치 않게 생각했다. 백석은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라는 시로 스스로를 달랬다. “가난한 내가/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나타샤와 나는/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를 타고/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부모가 강제로 다른 여성과 결혼을 주선하자 백석은 자야에게 ‘함께 만주로 떠나자’고 제안했지만 자야는 자기가 연인의 인생을 가로막게 될 것을 염려해 거절했다. 결국 백석은 1939년 홀로 만주 창춘(長春)으로 떠났다. 그렇게 3년에 걸친 두 사람의 만남은 영영 막을 내리게 된다.서울에 남아 홀로 사랑을 이어가던 자야는 1951년 서울 성북동에 있던 청암장을 사들인다. 그리고 이곳을 요정(料亭)으로 탈바꿈시킨다. 삼청각, 선운각과 함께 한국 3대 요정으로 손꼽히던 대원각은 그렇게 문을 연다. 군사 독재 시절 ‘요정 정치’라는 낱말이 탄생한 곳이 바로 대원각이었다.평생 백석을 그리워하며 산 자야에게 애독하던 저자가 한 명 더 있었으니 바로 법정 스님이었다. 1996년 9월 26일자 동아일보 보도에 따르면 자야는 1987년 미국 로스엔젤레스(LA)에서 법정 스님을 처음 만나 “아무 조건 없이 대원각을 시주할 테니 절로 만들어 스님이 운영해 달라”고 부탁했지만 법정 스님은 “나는 일평생 주지 같은 일을 맡아본 적이 없을 뿐더러 아무 것에도 매이지 않고 살아온 사람”이라며 사양한다. 이후에도 자야는 시주 의사를 굽히지 않았고 1995년 법정 스님도 결국 주변의 권고에 못 이겨 시주를 받아들이게 된다. 그렇게 세운 절이 바로 나중에 법정 스님이 입적하게 되는 ‘길상사(吉祥寺)’다. 당시 동아일보는 “대지와 임야를 합쳐 7000여 평에 달하는 대원각이 시가 1000억 원 대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고 전했다. 하지만 자야는 “없는 것을 만들어 드려야 큰일을 한 것이 되는데 있는 것을 드리니 아무에게도 내세울 일이 아니다”고 말했다. 자야가 이 건물을 시주한 대가로 받은 건 염주 하나와 ‘길상화(吉祥華)’라는 법명이었다.이듬해 1월 19일 동아일보 충정로 사옥 17층에서 ‘길상사 창건위원회’ 첫 공식 모임이 열렸고, 그해 12월 14일 개원식이 열렸다. 개원식에서 축사를 맡은 사람은 김수환 추기경이었다. 개원식을 2주 정도 앞두고 있던 1997년 오늘(11월 28일)자 동아일보는 자야가 남은 재산도 모두 사회에 환원하기로 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자야는 나중에 “1000억 원이라는 돈이 그 사람(백석) 시 한 줄만도 못하다”고 말했다.길상사는 법정 스님이 불교에 귀의하려던(원래 그는 불교 신자가 아니었다) 자야에게 지어준 법명 길상화에서 유래한 것이다. 하지만 운명의 장난이었을까. 백석이 일본 아오야마(靑山)학원 시절 살았던 하숙집 주소가 ‘도쿄(東京) 기지초지(吉祥寺·길상사) 1895번지’였다.}

    • 2017-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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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데이터 비키니] 상대 블로킹 가장 ‘잘 벗기는’ 세터는?

    “스파이크 앞의 벽을 연다. 그러려고 세터가 있는 거야.” (만화 ‘하이큐!!’ 중)배구에서 세터가 해야 할 일을 이보다 잘 설명한 문장을 찾기는 쉽지 않을 겁니다. 배구 팬 중에는 세터를 ‘가위바위보 하는 사람’이라고 표현하는 분들도 적지 않습니다. 양 날개와 가운데 중에서 어느 코스로 세트(토스)할 것인지 판단해 스파이크 앞의 벽 그러니까 블로킹 벽을 열어 공격 성공률을 끌어올리는 게 세터에게 제일 중요한 일이니까요.실제 결과도 그렇습니다. 27일 현재 기준으로 프로배구 2017~2018 도드람 V리그 남자부 경기에서 상대 블로커가 없거나 한 명일 때 공격 성공률은 55.9%로 2명 또는 3명일 때 47.4%보다 8.5% 포인트 높습니다. 확실히 ‘블로킹을 벗겨내면’ 공격 성공률이 올라갑니다. 그러면 이렇게 블로킹을 가장 잘 벗겨낸 선수는 누구일까요?현대캐피탈 팬 여러분 기뻐하세요. 여러분의 노홍렬 아니 노재욱(25·사진)이 주인공입니다. 노재욱이 현재까지 세트를 시도한 건 총 554번. 한국배구연맹(KOVO)에서는 이 중 540번에 대해 상대 블로커 숫자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540번 중에서 상대 블로커가 한 명도 없던 건 42번(7.8%), 1명일 때는 205번(38.0%)이었습니다. 그러면 블로커가 0명 또는 1명인 경우(0+1)는 총 45.7%가 됩니다. KB손해보험에서 주전 세터 황택의(21) 뒤를 받치는 양준식(26)이 41.3%로 2위에 이름을 올렸고, 3위는 40.2%를 차지한 대한항공 한선수(32)가 차지했습니다. 세트를 100개 이상 기록한 세터 중에서 이 ‘0+1’ 비율이 40%를 넘긴 건 이 세 명뿐입니다.노재욱에 이어 이승원(24)이 4위에 오른 데서 눈치챌 수 있듯이 팀 순위에서도 현대캐피탈이 41.2%로 0+1 순위 1위였습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삼성화재가 승점 25점으로 2위 현대캐피탈(18점)에도 7점 앞선 채 1위를 달리고 있는 게 신기해 보이기도 합니다. 2위 현대캐피탈과 최하위(7위) OK저축은행(12점) 사이 승점 차이(6점)가 1, 2위간 승점 차이보다 오히려 적습니다.제일 큰 이유는 역시 외국인 선수 타이스(26). 리그 전체로 보면 상대 블로커가 3명일 때 공격 성공률은 41.2%밖에 되지 않지만 타이스는 블로커 3명을 앞에 두고도 공격 성공률 50.4%로 흔들리지 않는 면모를 자랑하고 있습니다. 타이스가 괜히 ‘2단 공격’에서 강점을 보였던 게 아닙니다. 원문보기: 그러니까 지금까지는 블로킹 벽에 아랑곳하지 않는 삼성화재가 블로킹 벽을 열려는 다른 팀을 압도하고 있습니다. 과연 삼성화재가 계속 상대 팀 블로킹 벽을 뚫을 수 있을까요? 아니면 블로킹 벽을 여는 데 성공한 다른 팀이 결국 순위를 뒤집는데 성공할 수 있을까요? 상대 공격수를 잡아내고야 말겠다는 블로커처럼 매 경기 승점을 따내고야 말겠다는 각 팀도 힘껏 또 힘껏 점프하고 있습니다.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 2017-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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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 투 더 동아/11월 25일] ‘무선통신의 아버지’ 마르코니, 식민지 조선 방문

    1933년 오늘(11월 25일)자 동아일보 조간 2면은 ‘말코니 후작 일행 다섯 명이 부산항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전하고 있다. (당시 동아일보는 조·석간 동시 발행 체제였다.) 현행 외래어 표기법은 이 후작 이름을 ‘(구리엘모) 마르코니(1874~1937)’라고 쓰도록 규정하고 있다.그렇다. 1909년 무선통신을 발전시킨 공로로 노벨 물리학상을 탄 그 마르코니 후작이 식민지 조선에 도착했던 것이다. 당시 동아일보는 마르코니 후작을 ‘무전왕(無電王)’이라고 소개했다. 이날 기사 제목도 ‘무선왕 부부 근역에 제1보’였다.동아일보는 마르코니 후작 입국을 앞두고 1933년 11월 21일 조간 6면에 ‘24일에 경성에 오는 마르코니는 어떤 사람’이라는 기사 하(下)편을 내보내면서 “만일 마르코니가 없었던들 오늘날과 같은 무선 전신과 라디오를 가졌을까 생각할 때 말코니를 무선 전신왕이라 부르지 않을 수 없으며 따라(서) 그의 남모를 수고와 노력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고 썼다.마르코니가 가장 감사 인사를 많이 받은 건 1912년 타이태닉호 침몰 때였다. 전체 탑승자(2239명) 가운데 31.8%(317명)가 살아남을 수 있던 건 무선 전신을 통해 SOS 신호를 보낼 수 있기 때문이었다. 당시 외신에서는 “마르코니가 타이타닉 생존자의 목숨을 구했음을 기억해야 한다”고 평했다. 지금 우리가 쓰고 있는 롱텀에볼루션(LTE)이나 와이파이(Wi-Fi) 역시 마르코니 후작이 없었다면 발전 속도가 더뎠을지 모른다. 이 글을 읽고 계신 독자 중에는 니콜라 테슬라(1856~1943)를 무선 통신의 아버지로 알고 계신 분도 적지 않을 것이다. 1943년 미국 대법원에서 결론을 내린 것처럼 테슬라가 마르코니보다 7년 앞서 1897년 무선통신에 대한 특허를 취득한 건 맞다. 하지만 실용화라는 측면에서는 마르코니 후작이 더 빨랐다. 마르코니 후작은 1901년에는 대서양을 사이에 둔 미국과 영국 사이에 무선통신을 성공시켰다. 1933년 동아일보에 실린 마르코니 후작 소개 기사 마지막 문장은 “우리에게도 장래에 조선의 마르코니가 생기기를 바라서 마지않습니다”라는 것이었다. 물론 이 내용과 100% 일치하는 건 아니지만 ‘메이드 인 코리아(Made In Korea)’ 스마트폰이 전 세계 곳곳에서 울리는 현재 이 바람이 어느 정도 이뤄졌다고 평가해도 무리가 아니지 않을까.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 2017-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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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 투 더 동아/11월 24일]일제강점기 국제공용어 ‘에스페란토’ 열풍, 왜?

    1924년 오늘(11월 24일자) 동아일보 5면에는 알파벳으로 쓴 기사가 나갔다(위 사진). 글씨가 너무 작아 보기가 힘드실 테니 일부를 좀 확대해 보면 아래와 같다.‘외국어에는 자신 있다’고 생각하시는 분 가운데서도 ‘이 글을 어떤 언어로 썼는지도 모르겠다’고 느끼는 분이 적지 않으실 터다. 이 글은 ‘에스페란토’라는 언어로 쓴 ‘조선 에스페란티스토 연맹 선언’이다. 에스페란토는 루도비코 자라로 지멘호프 박사가 1887년 ‘만국 공통어’를 목표로 만든 인공 언어이고, 에스페란티스토는 그 말을 쓰는 사람들은 가리킨다.도서출판 갈무리는 독일 출신 울리히 린스 박사가 쓴 ‘위험한 언어’를 2013년 펴내면서 이 부분을 다음과 같이 번역했다. “이미 오래 전부터 인류에게 종족에 대한 저주받은 편견과 장벽을 제저하고, 진정한 사랑과 형제애로 하나가 되는 시기가 다가오고 있다. 자애로운 인류 구성원들은 이미 자신들의 고유한 언어를 강압적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강요하는 것은 얼마나 불합리하고 황당한가를 고뇌하면서 지켜보았다. 모든 민족의 고유 언어는 각각의 민족을 위해 존재하고, 모든 인류를 위해서는 오직 에스페란토만이 존재해야 한다.”당시 동아일보에서 이 글을 실었던 건 소설 ‘임꺽정’을 쓴 벽초 홍명희 선생(1888~1968)이 주필 겸 편집국장을 맡고 있었던 영향이 크다고 할 수 있다. 벽초(碧初)라는 호는 “푸름을 처음 배운 사람”이라는 뜻. 여기서 푸르다(碧)는 건 에스페란토를 상징하는 녹색을 가리킨다.그 뒤로 홍 선생은 매주 월요일자 지면에 ‘에스페란토 란(欄)’을 만들어 내보낸다. 당시 이 꼭지를 담당한 기자는 바로 춘원 이광수(1892~1950)였다. 이듬해(1925년) ‘조선 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 그러니까 학창 시절 국어 시간에 ‘카프(KAPF)’라고 배우는 단체가 문을 열었는데, KAPF는 ‘Korea Artista Proleta Federatio’라는 에스페란토 약자다. 동아일보는 1930년 총 100회에 걸쳐 에스페란토 강좌를 싣기도 했다.당시 식민지 조선에서 이렇게 에스페란토 붐이 일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위험한 언어’는 “조선어를 사용하는 것이 큰 범죄 중 하나였던 시기에, 지식인들이 에스페란토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며 “조선의 초기 에스페란토 운동은 모든 지식인들에게 이념적 운동이었을 뿐만 아니라 가장 진보적인 구국운동으로 여겨졌다”고 전하고 있다.이런 이유로 조선총독부에서는 조선이 에스페란토를 배우는 걸 ‘중단시키기 불가능한 ’위험한 사상‘에 빠져드는 첫 걸음으로 판단하는 경향이 있었다.“ ”에스페란토를 보급하는 것은 일본에 대한 배신의 의미“했기 때문이었다. ”(1942년 조선어학회 지도자를 체포하는 등) 조선어에 대한 억압이 시작되자 조선에서의 에스페란토 운동 역시 조용해질 수밖에 없었던 사실을 우리는 단지 우연의 일치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이상 ’위험한 언어‘) 그럼 긴 글 읽어주셔서 Dankon(단콘·에스페란토로 ‘감사합니다’)! 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 2017-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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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후일담]이국종 교수, 동아일보 기자 지망생에게 편지 쓴 까닭은?

    2011년 5월 27일자 동아일보 1면에는 이국종 아주대 교수(아주대병원 경기남부 권역외상센터장)가 당시 동아일보 기자를 꿈꾸던 이들에게 보낸 편지가 실렸다. 최근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을 통해 귀순한 북한군 오모 씨 주치의를 맡으며 다시 언론 중심에 선 이 교수는 당시에도 ‘아덴만 여명 작전’을 통해 구출한 석해균 선장을 살려내며 국민적 영웅으로 추앙받던 상태였다. 이 교수는 당시 동아일보 수습기자 공채 사고(社告)로 나간 이 편지에 “빈약한 한국 현대사에서 자기 목에 칼이 들어오는 상황에서도 ‘뭔가 옳은 일’에 대한 무조건적인 추구와 ‘이건 아니지 않은가’라는 정신에 입각한 ‘아닌 건 아닙니다’라고 기사를 내는 연론사에 여러분은 인생을 거는 것”이라며 “여러분은 다른 언론사 기자와 달리 단순한 현상만을 표현하기보다 배경까지 꿰뚫어 보는 시각을 가져야 하며 타인의 어려움이나 아픔을 마음속 깊이 느껴야 할 것”이라고 썼다. 그는 “그렇게 살겠다고 다짐하는 분들만이 100년 역사에 빛나는 민족정론지라고 자타가 인정하는 동아일보의 기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강조하기도 했다.이 교수가 이렇게 “아닌 건 아니라고 말하는 신문‘이라고 동아일보를 평가한 데는 이유가 있다. 당시 석 선장 몸에서는 총알 네 발이 나왔는데 해경에서 수거한 건 세 발뿐이었다. 한 발이 행방이 묘한 상황이었던 것. 이 때문에 수많은 기자가 이 총알 행방을 쫓은 게 당연한 일. 이제는 잘 알려진 것처럼 이 총알은 이 교수가 석 선장을 구하러 날아갔던 오만에서 잃어버린 상태였다. 이 교수는 답답한 마음에 당시 취재현장을 지키던 동아일보 박민우 기자를 응급중환자실로 은밀히 불러 이 사실을 ’개인적으로‘ 털어놓았다. 하지만 이 총알 분실 사건이 개인적 실수가 아니라 관리 시스템에 구멍이 있어 생긴 일이었다고 판단한 박 기자는 이튿날(2011년 2월 2일) ’石(석) 선장 몸속서 뺀 총알 1개 오만서 잃어버렸다‘고 기사를 썼다.현재 동아일보 카이로 특파원으로 일하고 있는 박 기자는 ”(기사가 나간 뒤) 돈독했던 나와 이 교수의 관계는 급랭했다. 기사가 나온 뒤 그와 첫 대면한 순간은 잊을 수가 없다. 이 교수가 (근처에 있던) 소화기를 복도에 내동댕이쳤다. 나는 동아일보 기자로서 들을 수 있는 온갖 ’욕‘을 소화하며 이 교수를 진정시켰다“고 회고했다.기자와 취재원은 이렇게 불편한 경험을 해도 사건이 끝나기 전까지는 계속 만날 수밖에 없다. 박 기자는 그 뒤로도 수술실에서 나오는 이 교수를 하염없이 기다리고 또 쫓아 다녀야 했다. 박 기자는 ”며칠이 더 흐르자 이 교수가 미안했던지 평소 성격처럼 ’쿨하게‘ 사과를 건넸다“고 전했다. 이 에피소드를 통해 두 사람은 더욱 가까워졌다고 한다. 이 인연으로 박 기자가 이 교수에게 ’후배들이 들어오는데 편지 좀 써달라‘고 부탁했고, 환자 치료로 바쁜 와중에도 이 교수는 원고지 10장 분량으로 편지를 써 새벽 2시에 박 기자 e메일로 보냈다. 박 기자는 ”’간단하게 써주면 된다‘고 부탁했는데 ’진짜 제대로 된 편지‘를 보내서 놀랐다. 편지를 읽으면서 이 교수가 내게 ’기자는 말 한 마디로 사람도 죽일 수 있고, 살릴 수 있는 직업‘이라며 타이르듯 했던 얘기가 하나씩 떠올랐다“고 말했다.이 교수는 22일 브리핑 때 자신을 향한 근거 없는 비방에 대한 답답함을 토로했다. 그는 이 자리서 ”동아일보 박민우라는 기자가 있다. 석 선장 치료 때 단편적인 기사, 지엽적인 것에 집중하는 것을 보고 백그라운드를 봐야 한다고 혼낸 적이 있다. 지금은 잘 성장해서 특파원으로 가 있다. 그런 기자가 많이 나오길 바란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그만큼 두 사람이 허물없는 사이가 됐다는 방증이다.동아일보 기자 중 이 교수에게 가르침을 받은 건 박 기자 혼자만이 아니다. 이 교수는 그해 8월 11일 자기 편지를 받고 동아일보에 지원해 합격한 수습기자와 직접 만나 삶의 철학을 들려주기도 했다.당시 강의를 들었던 조건희 기자(사진 왼쪽)는 현재 동아일보 보건복지 담당으로 이번 JSA 귀순병 사건 때 이 교수 ’마크맨‘으로 활동하며 연일 의미있는 단독 기사를 쏟아내고 있다. 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 2017-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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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 투 더 동아/11월 22일] 한국 역사상 첫 ‘선거 광고’는 언제부터?

    한국에서 처음 ‘지방자치제도’를 시작한 건 언제일까. 언론에서는 주로 1952년 제1회 전국 시·읍·면의회의원 선거를 시초로 꼽는다. 물론 틀린 이야기는 아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에도 부군면협의회(府郡面協議會)라는 기초 의회 선거를 실시했다. 이 부군면협의회는 해방 이후인 1945년 2월까지 존속했다. 단, 5원 이상 국세를 낸 사람만 투표에 참가할 수 있었다. 이 때문에 보통선거 원칙을 어겨 민주적인 투표라고 보기는 어렵다. 1923년 기준 5원은 금 3.6g 정도를 살 수 있던 금액. 이를 21일 현재 서울 지역 금 소매가 기준으로 바꾸면 약 19만5000 원 정도다. 현재 근로소득세를 이만큼 내려면 월급이 290만 원 정도는 되어야 한다.‘선거’가 있으면 ‘광고’도 있다. 1923년 오늘(11월 22일)자 동아일보에는 이틀 전 실시한 제2회 부 및 지정면협의회원 총선거에서 경성부협의원으로 뽑힌 이규현 민용호 오긍선 방규환 한익교 이진호 유전 신승균 당선자의 당선사례가 실렸다. ‘국사편찬위원회’에 따르면 이 합동 당선사례가 한국 신문에 등장한 첫 번째 선거 광고다. 이들은 모두 똑같이 “금반(今般) 경성부협의원 선거에 제(際)하여 유권자 제씨(諸氏)의 심후(深厚)하신 동정(同情)에 인하와 행(幸)히 당선의 영광을 몽(蒙)하였삽기 자(玆)에 지상으로 근(謹)히 사의(謝意)를 표하나니다”는 광고 문구를 쓰고 자기 이름을 적었다.당시 선거는 납세액 규정 때문에 지역 유지들 위주로 참여하는 ‘그들만의 리그’ 성격이 강했다. 이런 이유로 지역 유지들이 특정 후보를 추천하는 광고를 신문에 내보내기도 했다.맨 오른쪽 후보자는 마츠모토 고이치로(松本 耕一朗)라는 일본식 이름을 쓰고 있다. 일본식 이름을 쓴다고 반드시 일본인라 보긴 어렵다. 다만 조선총독부에서 창씨개명을 강요할 수 있도록 ‘조선민사령(朝鮮民事令)’을 개정한 게 1939년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마츠모토 후보는 일본인이었을 가능성이 이 있다. 당시 조선 거주 일본인도 선거권이 있었다.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 2017-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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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발리볼 비키니]배구서 3단 플레이를 왜 ‘2단 공격’이라고 부를까?

    배구는 위 사진처럼 받고 띄우고 때리는 종목입니다. 배구에 관심있는 분이라면 누구나 아는 것처럼 이렇게 공격 기회 한 번에 공을 터치할 기회가 총 세 번 있습니다. 이 세 번을 각각 1단, 2단, 3단이라고 부르죠. 그래서 이상합니다. TV 중계 때 아나운서가 해설위원이 ‘2단 공격’이라고 부르는 플레이가 실제로는 대부분 3단에 나오거든요. 세터 등이 진짜 2단에 공격할 때는 2단 공격이라는 말보다 ‘2단 패스 페인트(feint)’ 같은 표현을 더 많이 쓰고요. 도대체 이 3단 플레이를 2단 공격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뭘까요?여기서 말하는 ‘2단 공격’은 상대 공격을 (가까스로) 받아낸 다음이거나 서브 리시브가 흔들려 미리 약속한 플레이를 하기 힘든 상황에서 일단 공을 높게 띄운 다음 공격하는 걸 뜻합니다. KBSN에서 프로배구 2017~2018 도드람 V리그 중계 때부터 2단 공격을 설명할 때 ‘하이 볼’이라는 용어를 쓰는 건 아마 ‘공을 높게 띄운다’에 방점을 찍었기 때문일 겁니다. 물론 2단 공격이 직관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우니까 용어를 바꿀 생각을 했을 거고요.2단 공격이 실제로는 3단 공격이기 때문에 이단이 한자로 두 이(二)를 쓰는 ‘二段’이 아니라 다를 이(異)를 쓰는 ‘異段’이라고 생각하는 분들도 적지 않습니다. 그런데 배구 관련 일본 사이트를 찾아보면 일본 사람들도 ‘니단(二段)’이라고 쓰는 걸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한글로 쓸 때는 2단이든 이단이든 모두 상관없지만 확실히 숫자로 2단인 겁니다. 그러면 왜 이 3단 공격을 2단 공격이라고 부르게 된 걸까요? 정답은 배구 규칙이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현재 국제배구연맹(FIVB) 규칙에 따르면 블로킹은 터치 횟수에서 빠집니다. 그러니까 유효 블로킹 그러니까 상대 팀 스파이크가 우리 팀 블로커 손에 맞은 상태에서 공을 건져내면 그 순간이 1단입니다. 남은 터치 횟수가 아직 두 번 더 있기 때문에 선수 한 명이 공을 띄우고(2단) 공격수가 스파이크를 때리는 과정(3단)까지 진행할 수 있습니다.하지만 1976년 현재 내용으로 규칙을 바꾸기 전까지는 이런 경우에 블로킹이 첫 번째 터치였습니다. 그러면 이제 터치 기회가 두 번밖에 남아 있지 않습니다. 여기서 공을 한번 띄우고(1단) 스파이크를 때리면 2단 공격이 됐습니다. 블로킹은 수비 행위라고 봤기 때문에 공격 시도만 따져서 2단 공격입니다. 이제 규칙은 바뀐 지 오래지만 그 의미는 여전히 살아남아서 실제로는 3단 공격을 2단 공격이라고 부르고 있는 겁니다. 2단 공격은 그 특성상 성공률이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19일까지 올 시즌 프로배구 남자부 경기 전체 공격 성공률은 딱 50%. 2단 공격 성공률은 이보다 8%포인트 낮은 42%입니다. 삼성화재가 현재 1위를 달리고 있는 이유 역시 2단 공격을 통해 찾을 수 있습니다. 삼성화재는 현재까지 팀 2단 공격 성공률 47.7%로 남자부 7개 팀 중 1위를 달리고 있습니다. 개인 2단 공격 성공률(2단 공격 시도 50개 이상 기준)을 살펴봐도 삼성화재 외국인 선수 타이스가 51.6%로 1위, 같은 팀 주장 박철우가 51.0%로 2위입니다. 삼성화재만 잘 나간다고 라이벌 팀 현대캐피탈 팬 여러분 너무 배 아파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공격 범실까지 계산에 넣는 ‘공격 효율’을 따져 보면 2단 상황에서 제일 좋은 성적을 거둔 건 0.400을 기록한 현대캐피탈 외국인 선수 안드레아스였습니다. 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 2017-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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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 투 더 동아/11월 20일]일본 사무라이는 백제 싸울아비가 뿌리?

    인터넷에서는 일본 봉건 시대 무사를 뜻하는 ‘사무라이’가 사실 한국어 ‘싸울아비’에서 유래했다고 주장하는 글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2002년 개봉한 영화 ‘싸울아비’ 역시 이런 주장에 근거해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이런 주장은 얼마나 믿을 수 있는 걸까.정답부터 말하자면 실제로 싸울아비가 변해 사무라이가 됐을 확률은 제로(0)에 가깝다. 싸울아비는 서울 배화여고 등에서 국어 선생님으로 일하면서 라디오 드라마 극본도 썼던 김영곤 작가(1926~1988)가 1960년대 만들어낸 표현이기 때문이다. 1962년 오늘(11월 20일)자 동아일보는 서울중앙방송(KA·현 KBS)에 사극 ‘강강수월래’를 연재하던 김 작가 인터뷰 기사를 내보냈다. 이 기사는 “옛날 武士(무사)를 ‘싸울아비’라는 현대어로 바꾸어 놓은 것만도 선생 아닌 작가로서의 자부심을 느낀다고 자랑 아닌 겸손을 앞세우고 있다”는 문장으로 끝난다.이 인터뷰를 통해 신라 시대를 배경으로 삼은 이 라디오 연속극에서 싸울아비라는 낱말을 처음 썼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후에도 TV·라디오 연속극이나 소설, 영화 같은 픽션에서 싸울아비라는 낱말을 쓰면서 이 낱말이 원래 있던 것처럼 생각하는 이들 숫자도 늘어나게 됐다. 반면 일본에서 사무라이라는 낱말은 최소 16세기에 등장했다. 따라서 만약 두 낱말이 연관이 있다면 오히려 일본어 사무라이를 보고 싸울아비라는 낱말을 만들어 냈을 확률이 높다. 물론 실제 가능성은 희박한 이야기다.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일본어 사전 ‘고지엔(鑛辭苑)’에 따르면 사무라이는 ‘사부라푸(サブラフ)’의 연용형(連用形≒명사형) ‘사부라이(さぶらい)’가 변한 말이다. 같은 사전은 사부라이를 ‘주군을 가까이에서 모시는 것 또는 그 사람’이라고 풀이한다. 사부라이를 한자로 적을 때는 모실 시(侍)를 쓰는 이유도. 사무라이 역시 마찬가지로 한자로 쓰면 ‘侍’다. 같은 사전은 사부라이가 원래 ‘헤이안(平安)시대(794~1185 또는 1192) 때 신노우(親王·태자를 제외한 일본 남자 왕족), 셋칸(攝關·일왕의 정치자문역인 섭정과 관백), 쿠교케(公卿家·권문세가)에서 집안일을 집행하는 자’를 뜻했다고 풀이하고 있다. 그러니까 어원을 따지자면 사무라이라는 낱말에 오히려 ‘싸운다’는 뜻이 없던 것이다. 헤이안 시대 중기가 되어서야 사부라이는 ‘무기를 들고 귀족의 경호를 담당하는 자’라는 뜻을 얻게 된다. 이후 쇼군(將軍)이 사실상 실권을 장악한 바쿠후(幕府·막부) 시대를 거치며 일본에서는 부시도(武士道·무사도) 문화가 꽃을 피우게 된다. 이 과정에서 발음이 [사무라이]로 바뀐 이 낱말은 “일반 서민(凡下·본게)과 구별되는 신분 호칭으로 기마(騎馬) 복장(服裝) 형벌(刑罰) 등에서 특권적인 대우를 받는 신분”을 뜻하는 단어로 변하게 된다. 그래서 이때도 반드시 ‘사무라이 = 무사’였던 건 아니다. 문관이 사무라이를 자처하며 칼(刀)을 차고 다녔다.결국 싸울아비가 변해 사무라이가 됐다는 건 멀리가도 너무 멀리 간 주장이다. 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 2017-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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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후일담]1992년 ‘대입 시험지 도난, 시험 연기’ 특종은 음주 덕분?

    올해 대학수학능력시험이 연기 됐다는 소식이 들린 뒤로 1992년 1월 21일자 동아일보 지면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돌아다니는 걸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이날 동아일보 1면 머리기사는 원래 다음날 진행 예정이던 당시 후기대 입시 날짜를 2월 10일로 연기한다는 내용을 단독 보도했다. (당시에는 대입 시험을 전·후기로 나눠 치렀다.)이 기사는 곧잘 동아일보 사내에서 ‘단군 이래 최대 특종’라고 불리곤 한다. 생각해 보시라. 온 수험생, 학부모가 목을 매는 게 대입 시험이다. 그 시험 전날 누군가 시험지를 훔쳐갔다. 만약 15일 아침 한 신문에만 ‘수능 시험지 도난, 시험 연기’라는 기사가 실렸다면 어땠을까? 그런데 그런 일이 실제로 벌어졌으니 이 기사에는 저런 평가가 따라다닐 만도 하다.그렇다면 어떻게 동아일보만 이 기사를 특종 보도할 수 있던 걸까. 정답은 ‘술’이었다. 당시 동아일보 국무총리실 출입 K 기자는 전날 과음으로 기자실에서 골아떨어진 바람에 이날 오전에 있던 기자 간담회에 참석하지 못했다. 당시 데스크가 간담회 내용을 보고 받으려고 전화를 할 때까지도 술이 덜 깬 상태. K 기자는 어떻게든 간담회 내용을 취재하려고 허둥지둥 기자실 문을 열고 뛰어 나갔다. 그때 자기보다 더 허둥지둥 총리실로 뛰어가던 모 국장이 눈에 띄었다. 여기서 K 기자의 센스가 빛을 발한다. 그는 이 국장에게 “그래서 어떻게 한대?”하고 물었다. 사실 K 기자는 아무 것도 모르고 던진 말이었지만 국장은 “뭘 어떡해. 시험 연기 해야지”라고 이실직고했다. 이 한마디에 힌트를 얻어 취재한 끝에 이 소식이 당시 석간이던 동아일보에 나올 수 있었다. 이 정도면 전화위복이 아니라 ‘전주위복(轉酒爲福)’이라고 해야 할까. 술 좋아하는 걸로는 당시 동아일보 사회부장도 뒤지지 않았다. 사회부장이 등장하는 건 교육과 경찰 모두 사회부 담당이기 때문. 점심시간 전에 한번 기사를 마감하고 점심 식사와 함께 반주를 즐기던 사회부장은 이 소식을 긴급 타전한 TV 자막에 놀라 ‘물 먹었다(낙종했다)’는 생각에 헐레벌떡 회사로 돌아왔다. 그런데 알고 보니 이 기사가 바로 같은 회사 정치부(국무총리실 출입 기자는 정치부 소속이다) 특종이었던 것.고백하자면 필자가 교육과학기술부(현 교육부)를 출입하던 기자 초년병 시절 K 기자가 담당 부장이었다. 어느 해인가 수능일 즈음 이 사건 취재 뒷이야기를 묻자 그는 농담 삼아 이렇게 답했다. “규인아, 단독 기사는 남의 ‘나와바리(출입처)’에서 쓰는 게 제일이다. 그러면 사람들은 기사를 다 네가 쓴 줄로 아는데 실제로 뒤치다꺼리는 원래 담당 부서에서 다 해주거든.”2015년 동아일보를 떠난 K 기자는 동해안 모처에 사는 목수로 변신해 배(船)를 지으면서 언젠가 자기 배를 타고 세계를 일주할 날을 꿈꾸며 살고 있다. 한때 ‘저수지 몇 개(분량)는 마셨을 것’이라던 그였지만 이제는 강원도까지 손님이 찾아오면 좋은 술을 한 두 잔 즐기는 정도(라고 알려져 있)다. “K 선배, 지난 번 뵈려다 못 뵈었을 때 같이 마시려고 준비했던 와인이 아직도 제 차 트렁크에서 익어가고(?) 있습니다. 곧 찾아뵙겠습니다.” 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 2017-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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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데이터 비키니]“시험날은 꼭 추워”…‘수능 한파’, 진실 혹은 거짓?

    해마다 대학수학능력시험 날짜가 다가오면 ‘입시 추위(한파)’라는 낱말도 따라옵니다. 아예 “입시 추위가 어김없이 찾아온다”는 표현을 쓴 언론 기사도 쉽게 찾아볼 수 있죠. 날씨가 유독 따뜻할 것이라는 기상청 발표가 있을 때만 ‘올해는 예외’라는 식으로 기사 내용을 바꿀 뿐입니다.그러면 수능날은 정말 추웠을까요?이를 알아보려고 1993년 11월 16일 진행한 1994학년도 제2차 수능부터 지난해 11월 17일 치른 2017학년도 수능까지 총 24번의 수능일 서울 지역 기온 데이터를 수집해 정리했습니다. 그 결과는….수능일 날씨가 당일 평년 기온보다 추웠던 건 1999학년도 그리고 2015학년도뿐이었습니다. 아침 기온이 영하로 떨어진 것도 24번 중 5번(20.8%)이 전부였습니다. 그러니까 수능날은 사실 ‘별로 춥지 않았던’ 겁니다.오히려 1993년 11월 16일(19.2도), 2015년 11월 12일(21도)은 아예 이 날짜 역대 최고 기온 기록을 새로 쓰기도 했죠. 이러면 ‘입시 추위라는 게 전날보다 추워진다는 뜻이지 옛날 그 날짜하고 비교하는 게 아니다’라고 생각하는 분도 있을 듯 한데요. 그래서 수능 당일 평균 기온을 전날하고 비교해 봤습니다. 그랬더니….24번 중 3분의 2에 해당하는 16번은 전날보다 오히려 기온이 올랐습니다. 겨울에는 날짜가 지날수록 평균 기온이 떨어진다는 점을 감안하면 재미있는 결과죠. 전체적으로 24년 동안 수능일에는 전날보다 0.8도 평균 기온이 올랐습니다.기온계는 이렇게 가리킨다고 해도 마음이 추우면 몸도 추운 법. 게다가 기상청은 올해 수능일인 내일(16일) 아침 최저 기온이 영하 3도까지 내려갈 것으로 예상했습니다. 오늘 아침 최저 기온(1.2도)보다 1.8도 낮은 기온입니다.그럼 수험생 여러분, 모두 따뜻하게 입으세요. 그리고 여러분 생각과 출제자 생각이 일치하고, 인생 최고 기억력을 발휘하는 하루 보내시기를 기원합니다. 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 2017-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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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 투 더 동아/11월 16일] 벌거벗은 남녀, 한 밤 추위 속에 파출소에 왜?

    1929년 오늘(11월 16일)자 동아일보 3면에는 사랑을 이루지 못해 남녀가 동반자살을 시도하다 실패한 이야기가 실렸다. “지난 11일 밤 11시경 동래군 사상면 파출소에 벌거벗은 알몸둥이의 남녀 두 명이 들어온 것을 동 파출소에서 취조한 바에 의하면 여자는 부산부 미도리마치(綠町) 2초메(丁目) 23반치(番地) 후쿠오카야(福岡屋)에 있는 창기(娼妓) 마츠카와 하츠(松川ハツ·24)로 동행한 남자와 오래전부터 부부의 약속을 하였으나 황금이 원수로 뜻과 같이 되지 아니함을 비관해 그날 밤 8시경 가게를 떠나 낙동강 깊은 물에 정사(情死)코자 하였으나 첫겨울 찬바람에 추위를 견디지 못해 하려던 정사를 그만두고 그와 같이 파출소로 달려온 것이라더라.”위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여기서 정사는 남녀가 사랑을 나누는 ‘情事’가 아니라 ‘서로 사랑하는 남녀가 그 뜻을 이루지 못하여 함께 자살하는 일(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을 뜻하는 ‘情死’다. 이 여인이 함께 목숨을 끊으려 했던 남성이 누구였는지 이 기사만 보면 알 수 없지만 당시 부산 지역에 일본 이름을 쓰는 창기가 있었다.미도리마치는 현재 부산시 서구 충무동 2, 3가에 해당하는 지역. 충무동 2, 3가라면 어디인지 감이 오지 않아도 개명 전 이름인 ‘완월동’이라고 하면 들어본 분이 적지 않을 터. 부산일보에 따르면 완월동은 1980년대까지 ‘동양에서 가장 큰 사창가’라고 불리던 지역이었다.부산에 일본식 유가쿠(遊廓·유곽)가 들어서기 시작한 건 강화도조약에 따라 부산항을 개항한 1876년 이후였다. 개항 후 7년이 지난 1883년 부산에는 유가쿠 9곳에 창기와 유녀(遊女) 94명이 있었다. 이후 계속 곳곳에 유가쿠가 들어서자 1907년 ‘성병과 풍기문란 예방’이라는 명목으로 이들 업소를 한 곳으로 모아 이주시켰다. 그곳이 바로 미도리마치였다. 1927년 부산 지역 신문에 미도리마치에서 일하는 창기를 소개하는 특집 기사가 나올 정도로 당시 유가쿠는 성황을 이뤘다. 여기서 일하던 창기는 대부분 일본 시골에서 부산으로 팔려온 이들이었다. 추정컨대 이렇게 낯선 땅으로 팔려온 여인 중 한 명이 가게를 드나들던 손님과 사랑에 빠진다. 둘은 미래를 약속했지만 “황금이 원수로”라는 구절에서 짐작할 수 있듯 가게 주인은 남성에게 ‘여인을 데려가려면 돈을 내 놓으라’고 요구했을 것이다. 그래서 둘은 ‘차라리 같이 죽자’며 강물로 뛰어들었지만 초겨울 강물은 차디차기만 했다.그래서 결국 두 사람은 어떻게 됐을까? 결국 원수였던 황금을 물리치고 사랑을 이뤘을까? 아니면 우리 사랑은 찬 강물도 이기지 못한다며 서로 다른 사랑을 찾아 떠났을까? 이 두 사람만 특이했던 건 아니다. 동아일보에는 1935년까지 미도리마치에서 청춘 남녀가 정사에 성공하거나 미수에 그친 사례가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이들은 함께 목숨을 끊으려고 남의 권총을 빼앗기도, 독약을 마시기도, 달리는 기차에 뛰어들기도 했다. ‘스시녀와 김치남’이라는 웹툰을 그리는 고마츠 사야카(小松淸香) 씨는 “성을 쉽게 사고파는 사회일수록 허무한 매춘보다 순수한 사랑의 가치는 더욱 빛을 발한다”고 했다. 그 시절 미도리마치에서 목숨을 걸고 사랑하던 이들이라면 누구보다 이 말에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까. 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 2017-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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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황규인의 잡학사전]A-10, F-14…비행기 이름 어떻게 정할까

    “미국 대통령 전용기를 미 공군에서는 VC-25라고 부른다는 잡학사전 기사를 읽었습니다. 이런 비행기 이름은 어떻게 짓는 건가요? 또 비행기가 아니더라도 K1, M16 등 무기 이름에 붙는 숫자는 어떤 의미인가요?” - 경기 파주시에 사는 S 씨좋은 질문 보내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씀부터 드리겠습니다. (다른 분들도 이렇게 몰라도 사는 데 아무 지장이 없지만 그래도 알고 궁금하신 게 있으시다면 언제든 kini@donga.com으로 e메일 보내주시면 성심껏 취재해 알려드리겠습니다.)●미 군용기 이름은 어떻게 붙일까?그럼 먼저 비행기부터 가볼까요? 정확히는 미군기에만 저런 스타일로 이름이 붙습니다. VC-25라는 이름 자체가 ‘미국 항공 및 우주 장비 명명법’에 따른 ‘제식명칭’이거든요. 여기서 제식(制式)은 군대에서 ‘제식훈련’할 때 그 제식입니다.미국에서 이 명명법을 도입한 건 1962년이었습니다. 그 전에 만든 비행기는 ‘F-86 세이버’처럼 지금 규칙하고 맞지 않는 게 많습니다. 이 명병법을 도입하기 전까지는 같은 기종도 육·해·공군에서 서로 부르는 이름이 다른 일이 많았습니다. 가장 예로 많이 드는 게 이제는 ‘F-4 팬텀 II’라고 부르는 기체였습니다. 미 해군에서는 이 비행기를 F4H라고 부르고 미 공군에서는 F-100이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같은 비행기를 서로 다른 이름으로 부르면 효율이 떨어지는 게 당연한 일. 그래서 1961년 미국 국방장관이 된 로버트 맥나마라가 군용기 명명 규칙을 통일하라고 지시했죠. 그래서 도입한 게 바로 트라이서비스(Tri-Service) 혹은 MDS(Mission-Design-Series) 명명법이라고 부르는 시스템입니다.MDS를 하나씩 뜯어보면 임무(Mission) - 디자인(Design) - 시리즈(Series) 순서로 돼 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그냥 끝나도 복잡할 텐데 실제로는 좀 더 복잡한 방식으로 표기합니다. 아래처럼 말이죠.차근차근 뜯어보면 맨 앞에 나온 G는 현상, 그러니까 현재 상태를 가리킵니다. G는 영구 지상 설치, 그러니까 다시는 하늘을 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 다음은 이 비행기가 정찰(Reconnaissance)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전투기(Fighter)라는 뜻. 여기까지가 임무(Mission)에 해당합니다.MDS는 개발(디자인) 순서 앞에 하이픈(-)을 넣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 비행기는 원칙적으로 F-4니까 전투기 중 네 번째로 디자인을 시작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이어서 시리즈가 나옵니다. C는 이 F-4 중에 세 번(A, B, C)째 버전이라는 뜻이고, 15는 세 번째(5, 10, 15) 생산 블록에서 만들었다는 뜻입니다. 종합하면 세 번째 버전을 세 번째로 양산할 때 이 비행기를 만들었다는 뜻입니다.MC는 이 비행기 제조회사가 맥도널 더글라스라는 의미. 경우에 따라서는 ‘맥도널 더글라스 F-4 팬텀 II’처럼 제조 이름이 앞으로 나가기도 합니다. ‘팬텀 II’는 위에 나온 설명 그대로 사람들이 이 비행기를 부를 때 흔히 쓰는 별명(애칭)입니다. 그냥 팬텀이 아니라 팬텀 II인 건 미 해군에 원래 ‘FH 팬텀’이라고 부르던 비행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이렇게 각 부호를 표시할 때 쓰는 알파벳에는 아래 표와 같은 뜻이 들어 있습니다.그러면 ‘AH-64E 롱보우 아파치’는 어떤 비행기일까요? 정답은 일련번호 64번인 공격용(A) 헬리콥터(H)로 이 비행기 중에서 다섯 번째 버전입니다. 원래 AH-64는 그냥 ‘아파치 헬기’였는데 성능을 업그레이드하면서 애칭에 ‘롱보우(Longbow)’라는 표현을 더했습니다. 이렇게 현실에서는 쓸 수 있는 모든 부호를 다 쓰는 대신 ‘이 비행기를 특정하는 데 꼭 필요한 부호 + 별명’ 형태로 쓰는 일이 더 많습니다. 일련번호는 원칙적으로는 개발(디자인) 허가 순서를 따르지만 꼭 그런 건 아닙니다. 예를 들어 ‘T-50 골든이글’에서 50은 쉰 번째로 만들었다는 뜻이 아니라 한국 공군 50주년 기념이라 50입니다. 임무가 바뀔 때 일련번호가 그대로 따라가는 일도 많습니다. T-50을 기반으로 개발 중인 공격기는 A-50입니다. T-50은 개발 초기에는 KTX-2라고 불렀습니다. 여기서 K는 한국(Korea)에서 만들었다는 뜻. 한국은 미국 영향을 받아 무기 이름에 이름을 붙일 때 이렇게 미국 스타일을 따르면서 K를 덧붙이고는 합니다. 단, K는 위치가 고정은 아닙니다. KF-16은 앞에 K를 쓰는데 F-15K는 뒤에 K가 붙습니다. (설마 TX-2가 무슨 뜻인지 모르시지 않겠죠? 여기서 X는 아직 실험·Experimenta 중인 기체라는 뜻입니다.)이렇게 임무에 따라 비행기를 구분하기 때문에 원형이 같은 비행기가 제식명칭은 다를 때가 있습니다. 보잉 747이 그렇습니다. 에어포스원은 위에서 보신 것처럼 VC-25이고, 핵전쟁 등이 일어났을 때 ‘공중지휘소’로 활용할 기종에는 E-4라는 제식명칭이 붙어 있습니다. 또 YAL-1이라고 부르던 탄도 미사일 요격기도 있었습니다. 미국 국방부에서 2014년 이 비행기 개발 계획을 취소하면서 YAL-1은 끝내 시제기를 뜻하는 Y를 떼지 못한 채 역사 속으로 사라졌습니다.이 일련번호는 다른 기종과 구분하는 게 제일 큰 목적이기 때문에 특정 기종이 너무 유명하면 그 번호를 건너뛰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B-52가 폭격기 대명사라 미군에서 X-52라는 이름을 공식적으로 사용한 적은 없습니다. 서양에서는 13을 불길한 숫자로 생각하기 때문에 13도 기피 번호입니다. ●다른 무기에 붙는 숫자는?이 정도 되면 다른 무기에 붙는 숫자도 무슨 뜻인지 아시겠죠? K1 전차는 한국(Korea)에서 처음 만든 전차라는 뜻입니다. 이 탱크 다음 모델은 K1A1이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A는 ‘Alteration(개조, 변조)’라는 뜻입니다. 당연히 K1보다 K1A1이 성능이 더 뛰어나겠죠? 한국군이 1968년 이후 미군에서 지원받아 현역 군인이 썼고, 지금도 예비군 훈련을 가면 쓰는 소총 역시 M16A1이 제식명칭이었습니다. 현재는 M16A4까지 나온 상태죠. 이럴 때 M은 그냥 모델(Model)이라는 뜻입니다. M16 이전에 예비군의 동반자였던 칼빈(Carbine) 소총은 (다들 잘 아시는 것처럼) ‘에무완(M1)’입니다. 이런 보병 장비에도 우리가 이미 살펴본 영어 약자를 활용하기도 합니다. K1 기관단총에 이어 만들어서 이런 이름이 붙은 K2 소총은 XB1부터 XB7까지 거치고 나서야 K2가 됐죠. 이때 B는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에서 만든 B형 소총을 바탕으로 했다는 뜻입니다.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 2017-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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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 투 더 동아/11월 14일]‘사랑 손님과 어머니’는 동아일보와 무슨 관계?

    “나는 금년 6살 난 처녀애입니다. 내 이름은 박옥희이구요. 우리 집 식구라고는 세상에서 제일 예쁜 우리 어머니와 단 두 식구뿐이랍니다. 아차 큰일났군, 외삼촌을 빼놓을 뻔했으니…”학창 시절 국어 선생님이 ‘1인칭 관찰자 시점’을 설명할 때 가장 많이 예로 드는 작품이 바로 ‘사랑 손님과 어머니’다. (나중에 이를 영화로 만든 작품 제목이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다.) 이 작품은 서울 사투리를 가장 잘 묘사한 작품으로도 손꼽히지만 정작 이 작품을 쓴 주요섭 선생은 평양에서 자랐다. 주 선생은 평양에서 숭실중학을 다니다 일본 도쿄(東京) 야오야마학원(靑山學院)에 편입한다. 3·1 운동 이후 귀국한 주 선생은 동아일보 평양 지국 기자로 잠시 일하다 중국 상하이(上海) 후장대로 건너가 공부를 계속했다.후장대 생활을 마치고 미국 스탠퍼드대로 건너 간 주 선생은 1930년 2월 6일부터 동아일보에 ‘미국 문명의 측면관(側面觀)’이라는 글을 8회에 걸쳐 실었다. 스탠퍼드대에서 교육학을 전공한 그는 이후에도 ‘시험 철폐와 그 대책’ 시리즈를 20회, ‘의무교육을 목표’라는 시리즈를 12회 동아일보에 연재했다. 석사 학위를 따고 1931년 10월 귀국한 그는 아예 동아일보에 입사해 ‘신동아’ 편집 책임자가 된다. 주 선생이 동아일보에 입사하고 나서 6개월 뒤에는 김자혜 기자가 신동아에서 일하게 되는데 두 사람은 나중에 부부가 된다. 당시 주 선생은 이혼을 한번 경험한 뒤였다.당시 신동아 기자였던 고형곤 전 전북대 총장은 1991년 신동아에 “송진우 (당시 동아일보) 사장이 사내에서의 남녀관계에 대해서는 무척이나 엄격했다. 결국 두 사람의 결혼은 두 사람 모두가 퇴사를 한 후에야 이루어졌다”고 회상했다. 주 선생은 1934년 8월 회사를 떠나 중국 베이징(北京)에 있던 푸런(輔仁)대 교수가 된다.동아일보는 1934년 9월 28일자 석간 2면에 주 선생의 푸런대 부임 소식을 전했고, 주 선생도 1935년 2월 17일부터 156회에 걸쳐 장편 소설 ‘구름을 잡으려고’를 연재하는 등 이후에도 계속 동아일보에 글을 썼다. 동아일보와 주 선생의 인연이 끝난 건 그가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난 1972년 오늘(11월 14일)이었다. 이 신안 주씨 가문에서 주 선생만 동아일보와 인연을 맺은 건 아니다. 그의 친형인 주요한 선생도 동아일보 기자로 일했다. 1913년 노벨 문학상은 탄 인도의 시성(詩聖) 라빈드라타느 타고르가 1929년 동아일보를 통해 당시 식민지 조선인들에게 보낸 시 ‘동방의 등불’을 번역한 이가 바로 주요한 선생이었다.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 2017-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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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 투 더 동아/11월 10일] 깍두기를 처음 먹은 사람이 조선 정조?

    ‘무를 작고 네모나게 썰어서 소금에 절인 후 고춧가루 따위의 양념과 함께 버무려 만든 김치(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는 어떻게 ‘깍두기’라는 이름을 얻게 됐을까.80년 전 오늘(1937년 11월 10일)자 동아일보는 김장철을 맞아 ‘지상 김장 강습’을 진행하면서 깍두기의 유래에 대해 소개하고 있다. 3년 뒤 ‘조선 요리학’이라는 책을 펴내 홍선표 선생은 이 글에 “조선 정조(1752~1800)의 사위인 영명위(永明尉) 홍현주의 부인이 임금님에게 여러가지 음식을 새로이 만들어 드릴 때 처음으로 무를 썰어 깍두기를 만들어 드렸더니 대단히 칭찬하시고 잡수신 일로 여염가까지 전파하였다”며 “그때 이름을 각독기(刻毒氣)라 하였고 … 공주(충남 공주시)에 낙향해 깍두기를 만들어 먹은 까닭으로 공주에서부터 민간으로 시작된 관계로 오늘날까지 공주 깍두기가 유명한 것”이라고 썼다. 재미있는 건 깍두기를 처음 담근 사람이 “정조의 사위의 부인”이었다고 썼다는 것. 사위의 부인은 자기 딸이다. 홍현주가 다른 아내를 두었다는 기록도 없다. 따라서 이 글에 등장하는 ‘정조의 사위의 부인’은 홍현주와 혼인한 숙선옹주(1793~1836)였다고 추론할 수 있다. 그러면 숙선옹주가 정말 깍두기를 처음 만들었을까. 이에 대해 음식문화평론가 윤덕노 씨는 2011년 11월 25일자 동아일보에 쓴 ‘[윤덕노의 음식이야기]<106> 깍두기’에서 “(홍 선생이) 별다른 근거를 대지 않고 숙선옹주가 깍두기를 처음 만들었다고 써놓았다”며 “조선에서는 시집간 공주나 사대부 부인들이 궁중에 모여 음식을 만들어 왕실 어른들을 대접했다. 숙선옹주가 이때 음식솜씨를 자랑했을 수도 있다”고 했다.윤 평론가는 이렇게 ‘이때 음식솜씨를 자랑했을 수도 있다’고 만에 하나 있을지 모를 여지를 남겨 놓았지만 실제로 이런 일이 있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먼저 숙선옹주가 홍선주와 가례를 치른 건 정조가 세상을 뜬 지 4년이 지난 1804년이다. 따라서 ‘시집 간 공주’가 다른 왕실 어른들을 대접할 수 있었는지는 몰라도 정조 임금에게 깍두기를 대접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미혼 때였다면 어땠을까. 시집가기 전 임금의 딸이 직접 요리를 할 수 있었는지 아닌지는 차치하더라도 정조가 세상을 떠날 때 숙선옹주는 한국 나이로 여덟 살밖에 되지 않았다. 따라서 이 말이 맞으면 숙선옹주가 여덟 살 전에 깍두기를 생각해 낸 ‘요리 신동’이었어야 하지만 역시나 관계 자료가 남아 있지 않다. 이 때문에 만약 숙선옹주가 정말 깍두기를 처음 만들었다 해도 이 무 김치 요리를 처음 먹은 임금은 아버지인 정조가 아니라 오빠인 순조(1790~1834)였을 것이라는 의견도 나온다.물론 윤 평론가가 쓴 것처럼 깍두기가 ‘서민들 허드레 김치’에서 발전했다는 견해를 지지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그래서 여쭤본다. 여러분은 국밥을 드실 때 깍두기 국물을 넣으십니까. 아니 넣으십니까. 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 2017-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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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데이터 비키니] 가을에는 정말 말이 살찔까? 왜 하필 말일까?

    어느덧 올해 ‘천고마비(天高馬肥)’의 계절도 저물어 가고 있습니다. ‘하늘은 높고 말은 살찐다’는 뜻인 천고마비는 가을을 대표하는 수식어. 하늘이 높은 건 누구나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있지만, 직접 말을 키우는 사람은 드물기 때문에 정말 말이 가을에 살이 찌는지는 알기가 쉽지 않습니다. 정말 그럴까요?일단 정답은 ‘네, 그렇습니다’입니다. 적어도 ‘렌츠런파크 서울’에서 경마에 참가하는 말(서울 경주마)은 확실히 가을에 몸무게가 늘어납니다. 경주마는 경주에 출전할 때마다 체중 검사를 받고, 한국마사회는 이 체중 검사 결과를 인터넷 홈페이지에 올려두고 있습니다. 컴퓨터 프로그래밍 언어 ‘파이선’을 가지고 마사회 홈페이지에 올라와 있는 서울 경주마 1757마리 가운데 미검마(未檢馬) 245마리를 제외한 1512마리의 몸무게 데이터를 수집했습니다. 경주마는 보통 한 달에 한 번 정도 경주에 출전하고, 이 1512마리는 총 1만9988번(평균 13.2번) 체중 검사를 받았습니다. 이 정도 데이터면 표본 숫자가 부족하다고는 할 수 없겠죠?실제 결과를 보면 8월에 472.5㎏이던 평균 몸무게는 가을이 시작되는 9월에는 473.7㎏로 1.2㎏ 늘어나고, 10월에는 다시 474.3㎏까지 올라갑니다. 11월이 되면 473.1㎏으로 내려오기는 하지만 그래도 여름보다는 살이 찐 상태입니다.위에 있는 그래프를 보면 가늠할 수 있는 것처럼 계절별 몸무게 역시 가을이 제일 높습니다. 아예 3월부터 석 달씩 봄, 여름, 가을, 겨울로 구분해 보면 가을 평균 몸무게가 473.7㎏으로 가장 많이 나갑니다.이전 계절보다 몸무게가 늘어난 비율을 살펴봐도 마찬가지. 전체 서울 경주마 가운데 63.1%가 여름 석 달보다 가을 석 달 평균 몸무게가 더 많이 나갔습니다. 요컨대 가을은 가장 많은 말이 가장 많이 살찌는 계절입니다. 사실 가을에는 말만 살이 찌는 건 아닙니다. 가을에는 식욕이 늘어나기 때문입니다. 식욕은 포만감을 느끼는 ‘포만중추’와 배고픔을 느끼는 ‘섭식중추’에서 조절합니다. 포만중추를 자극하는 요인 중 하나가 기온입니다. 체온이 일정 수준이 도달하면 포만중추가 우리 몸에 ‘그만 먹어도 된다’고 사인을 보내는 겁니다. 가을에는 갑자기 기온이 내려가기 때문에 더 많이 먹어야 포만중추가 자극을 받게 됩니다. 이건 다른 동물도 마찬가지인데 왜 하필 많고 많은 동물 중에 말이 살찐다고 하게 된 걸까요? 이 말을 처음 쓴 건 당나라 때 시인 두심언(?~708)이었습니다. 이 두심언의 손자가 바로 시성(詩聖) 두보(712~770)입니다. 유목민족이라 겨울이면 먹거리가 떨어지던 흉노는 가을걷이를 끝낸 중국 남쪽 지방을 침략해 물자를 빼앗아가기 일쑤였습니다. 두심언은 흉노의 침략을 막으러 북방으로 떠나던 친구 소미도에게 시를 지어 선물했습니다. 아래는 그 시 가운에 일부를 옮긴 것.여기서 두 번째 행 ‘추고새마비(秋高塞馬肥)’가 바뀐 말이 천고마비입니다. 구름이 걷히고 요사스런 별이 떨어졌다는 것 흉노를 물리쳤다는 뜻. 그렇게 흉노를 몰아내고 나면 전쟁에 지친 말도 다시 살이 오를 겁니다. 두시언은 이렇게 승리하고 돌아오라는 바람을 담아 친구에게 시를 선물했습니다. 이 시는 ‘수레를 타고 도읍으로 돌아오니, 같이 놀던 벗들 모두 나와 반기네(輿駕還京邑 朋遊滿帝畿·여가환경읍 붕유만제기), 개선하기로 한 약속 지키니, 봄 아침 햇살이 함께 노래하고 춤추네(方期來獻凱 歌舞共春輝(방기래헌개 가무공춘휘)’로 끝이 납니다.천고마비와 함께 가을을 상징하는 사자성어를 하나 더 꼽으라면 등화가친(燈火可親)일 터. 이 말을 21세기 식으로 번역하면 스마트폰 등불을 가까이하기 좋은 계절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껏 1900자 가까이 읽으셨으니, (이 글을 읽고 계신 분 중 8% 정도는 PC 모니터로 읽고 계시겠지만) 스마트폰에서 눈 떼시고 가을 공기 한번 힘껏 들이켜 보세요. 그러면 가을 기운으로 우리 마음도 살이 찌지 않을까요?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 2017-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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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황규인의 잡학사전]에어포스원은 쌍둥이 비행기 두 대다

    25시간 동안 한국에 머물던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에어 포스 원(AF)’을 타고 중국으로 떠났습니다. 많이들 아시는 것처럼 미국 대통령 전용기 AF1은 그저 ‘(미국) 공군 1호기’라는 뜻입니다. 예비역 남성 분들은 군대에서 부대 최고 사령관이 타는 차를 ‘1호차’라고 불렀던 걸 기억하실 터. 그것과 100% 똑같은 명명법인데 그냥 영어로 AF1이 된 것뿐입니다. 그러면 AF1이 세상에 처음 등장한 건 언제였을까요?●관제사 착각 때문에 얻은 이름미 공군에서 대통령 전용기를 운영하기 시작한 건 1943년부터지만 처음부터 이 비행기를 AF1이라고 불렀던 건 아닙니다. 미 공군 수송기를 개조해 만든 첫 번째 미국 대통령 전용기에는 ‘게스 웨어 2(the Guess Where II)’라는 이름이 붙어 있었습니다. 이후 기체를 바꿀 때마다 대통령 전용기 이름도 △세이크리드 카우(Sacred Cow) △인디펜던스(independence) △컬럼바인(columbine)으로 바뀌었습니다. 사건이 생긴 건 1953년 어느 날.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은 컬럼바인을 타고 플로리다주로 날아가고 있었습니다. 이 비행기에는 미 공군(Air Force) 8610편이라는 편명이 붙어 있었는데 하필 근처에 미국 이스턴항공 8160편도 날고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관제사가 두 비행기를 착각하는 일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당시 컬럼바인 조종사였던 윌리엄 드레이퍼 당시 미 공군 대령이 “앞으로 대통령 전용기를 다른 비행기와 착각하는 일이 없도록 ‘에어 포스 원’이라고 부르자”고 제안하게 됩니다. 미 대통령 전용기를 공식적으로 AF1이라고 부르게 된 건 1959년부터입니다.AF1은 항공기 호출 부호(call sign)이기 때문에 미국 대통령이 어떤 미국 공군기를 타더라도 그 비행기가 곧 AF1이 됩니다. 사정상 공군기를 타지 못할 때는 육군 소속 비행기에 타면 ‘아미 원(Army One)’, 미 해군 비행기에 타면 ‘네이비 원(Navy 원)’입니다. 대통령이 육해공군을 막론하고 최고 통수권자이기에 이런 이름이 붙는 것.만약 군용기가 아니라 민항기에 탔을 때는 ‘이그제큐티브 원(Executive One)’이라고 부릅니다. 트럼프 대통령이 취임하기 전 AF1 대신 흔히 ‘T버드’라고 부르는 원래 자기 전용기(위 사진)를 타고 다닐 것이라는 전망도 있었습니다. 만약 정말 그랬다면 이 비행기는 AF1이 아니라 이그제큐티브 원이 됐을 겁니다. 따라서 이론적으로 AF1이라고 부를 수 있는 비행기 숫자는 미군 공군에 있는 모든 비행기 숫자와 똑같습니다. 다만 맨 처음 사진으로 보신 것처럼 우리가 일반적으로 AF1이라고 부르는 비행기는 사실 따로 있습니다.●에어 포스 원은 쌍둥이다.미군에서는 ‘미국 항공 및 우주 장비 명명법’에 따라 비행기에 제식 명칭을 붙입니다. 비행기를 A-10, B-25, F-16처럼 부르는 거 보신 적 있죠? 보잉 747-200B를 개조해 만든 현재 AF1에는 VC-25라는 명칭이 붙어 있습니다. V는 VIP에서 따왔고, C는 수송기(Cargo)라는 뜻입니다.보잉에서 제작하고 미 공군에서 보유하고 있는 이 VC-25는 딱 두 대뿐입니다. 네, 한 대가 아니라 두 대입니다. 그러니까 미국 대통령 전용기는 한 대가 아니라 두 대인 겁니다. 2003년 하와이에 있는 미 공군 히캄 기지에서 찍은 아래 사진에서는 아직 착륙하지 않은 비행기가 AF1입니다. 그 비행기에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이 타고 있었거든요. 착륙해 있는 비행기에는 미국 대통령이 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이때 호출 부호는 ‘SAM 28000’입니다. SAM은 ‘Special Air Mission(특별 항공 임무)’을 줄인 말입니다. 하늘에 떠 있는 비행기에 미국 대통령이 타고 있지 않을 때는 ‘SAM 29000’이 됩니다.대통령 전용기가 두 대가 된 것도 아이젠하워 대통령 시절부터입니다. 관제사가 착각했을 때 드레이퍼 대령이 몰고 있던 비행기는 ‘컬럼바인 2호(II)’였습니다. 쌍둥이 비행기는 ‘컬럼바인 3호(III)’였고요.미국 대통령이 워싱턴 앤드루스 공군 기지에서 출발할 때는 전용기 두 대가 동시에 이륙하는 게 일반적입니다. 보안상 어떤 비행기에 대통령이 타고 있는지 외부에서 모르도록 하려는 목적입니다. 언제 어떤 비행기를 타는지도 랜덤이고, 때로는 목적지를 숨기려고 두 대가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날아가기도 합니다.●에어 포스 원은 ‘끝판왕’이다.AF1은 절대 그 누구도 격추할 수 없고, 격추해서도 안 되는 비행기입니다. 이 비행기가 전투기 호위를 받는 것도 모자라 미사일 방어 시스템 등 자체 방어 기능을 갖추고 있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미국 정부는 대통령이 AF1에 탑승할 때는 핵가방(Nuclear Football)을 비행기에 싣는 장면을 반드시 공개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아래 사진처럼 말입니다.이 가방은 핵무기 컨트롤러를 담고 있어 이런 이름이 붙어 있습니다. 이 컨트롤러는 미국이 보유한 모든 핵미사일을 통제할 수 있는데요, 이 컨트롤러가 파괴 당하면 미국이 보유한 핵미사일은 미리 입력해둔 목표를 향해 자동으로 날아가게 됩니다. 뉴욕타임스(NYT)에 따르면 미군이 보유하고 있는 핵탄두는 4000개 수준입니다.그러니까 AF1을 격추시킨다는 건 전 세계를 멸망시키겠다는 것과 사실상 똑같은 뜻입니다. NYT는 “핵무기 4000두가 있으면 러시아, 리비아, 북한, 시리아, 이라크, 이란, 중국을 멸망으로 몰아넣고도 2897두가 남는다”고 설명했습니다. AF1은 그래서 ‘끝판왕’입니다.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 2017-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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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 투 더 동아/11월 7일]1921년 김장 물가, 현재와 비교하면?

    ‘김장’은 월동 준비 필수 코스 가운데 하나였다. 2013년 유네스코(UNESCO)는 사람들이 함께 모여 김치를 담그고, 그렇게 담은 김치를 나눠 먹는 김장 문화를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지정하기도 했다.하지만 김장 규모는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김치 제조업체 J에서 주부 1175명을 설문 조사해 내놓은 자료에 따르면 올해 김장 계획이 있는 주부는 45%에 불과했다. 55%는 김장을 하지 않기로 마음먹고 있는 것이다. 이 업체 관계자는 “최근 8년 동안 김장철마다 설문조사를 진행했는데 김포족(김장포기족) 비율이 50%를 넘어선 건 이번이 처음”이라고 말했다. 또 김장을 하기로 한 주부 중에서도 60%는 배추 20포기 이하로 김장 계획을 세우는 것으로 나타났다.96년 전에는 ‘스케일’ 자체가 달랐다. 1921년 11월 8일자 동아일보는 당시 경성(서울) 지역 ‘김장 물가’를 전했는데 배추 가격은 “100통에 5원”이라고 밝혔다. 이에 대해 정현미 국립민속박물관 유물과학과 학예연구관은 “배추 100통 정도를 김장량의 기본 단위로 봤던 것”이라고 설명했다.“경향(京鄕)을 막론하고 겨울 량식(양식)으로 중대한 진장(김장)도 립동(입동) 전후에는 하여야 되는 것이니 이제 경성 시내의 진장 시세를 대개 소개하면 백차(배추) 100통 보통 5원, 무 한 섬 보통 1원 50전이라 하여 고초(고추)는 한 말에 대개 70전 가량이오 기타 양염(양념)도 평년보다 별로히 고하(高下)가 업다(없다)하더라.”당시 5원은 금 3.65g을 살 수 있던 돈이었다. 이를 토대로 현재 물가로 환산하면 약 16만6900원 정도다. ‘서울시 물가정보’에 따르면 7일 현재 배추 한 포기는 2380원. 100포기면 23만8000원으로 올해가 14.3% 정도 더 비싸다. 단, 현재 우리가 먹는 배추는 ‘씨 없는 수박’으로 유명한 우장춘 박사가 1954년 개량에 성공한 품종이기에 당시 가격과 일대일로 비교하기는 무리다.김장 포기 숫자만 달라진 게 아니다. 1977년 11월 29일자 동아일보에는 ‘아파아트의 김장 ─ 뜰 있는 집은 얼마나 좋을까…’라는 독자 칼럼이 실렸다. 아파트 실내가 비좁아 김장하기가 어렵고 김칫독 묻을 곳을 찾기도 마땅찮다는 내용이었다.이 칼럼을 보내온 신현수 씨는 “남들은 다 아파트가 편리하다면서 옮겨가고 아파트로 돈을 많이 벌었다고 해도 시종 뜰이 있는 집을 지켜 오신 부모님께 새삼 고마움을 느끼는 별난 마음이 되는 것도 아파트와 김장이 빚는 부조화 탓인가”라고 적었다. 이제는 전체 가구 중 48.1%(2015년 기준)가 아파트에 살지만 이런 부조화를 고민하는 이는 찾기 어렵다. 1993년 김치냉장고가 세상에 나온 효과가 컸다.1993년 1월 31일자 동아일보는 “김치냉장고는 김치를 오래 저장하고 싶다거나 김치는 즐겨 먹지만 김치 냄새가 냉장고에 배는 것을 싫어하는 소비자의 공통된 요구로 만들어진 것”이라며 “아파트, 연립주택 등으로 주거 형태가 바뀌면서 냉장고가 사계절 상품으로 자리를 굳혀감에 따라 냉장고 판촉전은 한겨울에도 뜨겁기만 하다”고 소개하고 있다. 물론 김치냉장고의 역기능(?)도 있다. 김치냉장고 보급이 ‘김포족’ 숫자도 늘린 것. 배추 재배 기술과 냉장 보관 기술이 더 발전하면 언젠가는 아예 김장하는 풍속 자체가 사라지지 않을지 걱정스러울 정도다.정 연구관은 “이 질문 대한 대답은 ‘아니다’라고 확신한다”면서 “갈수록 소외 계층을 위한 ‘사랑의 김장 나눔’ 행사가 많아지고 있다. 김장 풍속에 담긴 따스한 ‘정’을 나누는 문화가 가족에서 사회 전체로 퍼지고 있는 것이다. 한국인은 그런 사람들”이라고 강조했다.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 2017-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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