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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를 ‘계약 매춘부’로 규정한 논문을 써 국제사회에 논란을 일으킨 마크 램지어 하버드대 교수를 일본 우익세력이 옹호하고 나섰다. 7일 트위터 등 소셜미디어에 따르면 이들은 로런스 배카우 하버드대 총장에게 감사 엽서 보내기 운동에 나섰다. 또 램지어 교수를 비판한 학자들에겐 보복성 공격을 가하고 있다. 온라인에서 활동하는 ‘넷우익’은 배카우 총장이 램지어 교수의 문제의 논문을 두고 ‘학문의 자유에 해당한다’는 취지의 입장을 보인 데 대해 감사 의미에서 엽서를 보내고 있다. 다른 한 단체는 에릭 매스킨 하버드대 경제학과 교수에게 위안부를 매춘부로 보는 근거라고 주장하면서 자료를 정리해 보냈는데 이 중엔 이영훈 전 서울대 교수 등이 쓴 책 ‘반일 종족주의’도 포함됐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매스킨 교수는 램지어 교수 논문에 반대하는 성명에 이름을 올렸다. ‘넷우익’은 램지어 교수 비판 학자들을 향한 집단 보복에도 나섰다. 이들은 문제의 논문 철회를 요구한 에이미 스탠리 노스웨스턴대 교수를 징계해 달라는 e메일을 이 대학 측에 보내고 있다. 일부 우익은 생명을 위협하거나 성적 모욕까지 했다. 위안부를 비롯한 일본의 역사 왜곡을 지적해 온 알렉시스 더든 코네티컷대 교수는 수년간 우익의 협박을 받았다고 털어놨다. 필라델피아 시의회는 5일(현지 시간) 램지어 교수의 논문을 규탄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6일(현지 시간) 미국 하버드대 앞에서는 ‘램지어 논문 철회 및 규탄 대회’가 열렸다. 매사추세츠한인회 주최로 열린 집회에는 한인과 지역 주민 100여 명이 참가해 램지어 교수의 논문 철회와 대학 측 조치를 요구했다.김민 기자 kimmin@donga.com}

미얀마 군부가 시위 현장에서 군경의 총에 맞아 사망한 19세 태권소녀 찰 신의 무덤을 파헤쳤다는 현지 언론의 보도가 나왔다. 머리에 총상을 입고 숨진 찰 신의 사인을 조작하려는 시도라는 의혹이 제기됐다. 찰 신은 3일 제2대 도시 만달레이 시위에 참여했다 사망했는데 당시 ‘다 잘될 거야(Everything will be OK)’란 문구가 적힌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현지 매체 이라와디 등에 따르면 군부는 5일 찰 신의 무덤을 파헤치고 시신을 검안했다. 의료진을 대동한 채 공동묘지에 도착한 군인들은 묘지 직원을 총구로 위협하며 입구를 봉쇄했다. 보호구를 쓴 의료진이 시신을 꺼낸 후 검안한 것으로 전해졌다. 군부는 6일 국영 MRTV를 통해 찰 신의 머리 뒤쪽에서 관통된 상처를, 뇌에서는 납 조각을 발견했다고 밝혔다. 이어 “머리 뒤에 생긴 상처는 찰 신의 얼굴을 마주 보고 있던 경찰이 낼 수 없다. 납 조각 역시 경찰이 사용한 것과는 다른 종류”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사망 직전 포착된 사진 속 찰 신은 경찰을 등진 채 뒤를 바라보고 있다. 이에 시위대는 군경이 찰 신의 사망 원인을 조작하려고 시신을 훼손했다며 분노했다. 찰 신의 무덤에는 새 시멘트가 발려 있었고 주변에는 고무장화, 장갑, 수술용 가운 등이 널브러져 있었다고 로이터통신이 전했다. 아웅산 수지 국가고문이 이끄는 민주주의민족동맹(NLD)을 향한 군부 지지자들의 백색테러도 발생했다. 5일 중부 마궤에서는 군부 지지자 25명이 NLD 마궤 지부장과 그의 17세 조카를 흉기로 살해했다. 당시 현장에서는 “모두 죽여야 우리 뜻대로 할 수 있다”는 구호가 나왔다고 한다. 이는 2017년 로힝야 학살 당시 미얀마군이 사용했던 구호다. 또 군부는 6일 국경지대인 인도 미조람주로 도망친 경찰 8명에 대한 소환을 인도에 요구했다. 쿠데타에 반대하며 업무를 거부하고 있는 공무원들을 향해서도 “8일까지 복귀하지 않으면 해고하겠다”고 경고했다.조유라 jyr0101@donga.com·김민 기자}

영국 왕실과 왕실을 떠난 해리 왕손(37) 부부 간 갈등이 이전투구 양상으로 치닫고 있다. 영국 일간 텔레그래프는 해리 왕손 부부가 운영했던 자선단체 ‘서식스 로열’에 대한 정부당국의 조사가 시작됐다고 5일 보도했다. 해리 왕손 부부가 미국으로 이주하면서 ‘서식스 로열’은 지난해 7월 이미 운영이 중단됐는데도 자금 지출 등 운영상의 문제가 없었는지를 확인하겠다는 것으로 보인다. 앞서 왕실은 3일 성명을 내고 해리 왕손의 부인 메건 마클 왕손빈(40)이 왕실에서 지낼 때 직원들을 괴롭혔다는 주장이 제기돼 사실 여부 확인을 위한 조사에 나설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지난해 1월 왕실에서 독립하겠다고 선언한 해리 왕손 부부는 왕손빈의 고향인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에 거주 중이다. 이런 가운데 마클 왕손빈은 미 동부 시간 7일 오후 8시(한국 시간 8일 오전 10시)에 방송되는 미 CBS방송 간판 프로그램 ‘60분’을 통해 왕실 내 인종차별 등에 대해 폭로할 것으로 알려졌다. 마클 왕손빈은 미리 공개된 예고편에서 “진정으로 해방됐다. 이제 스스로 말할 수 있다”고 했다. 6일 더타임스 등에 따르면 왕실 관계자는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해리와 마클의 ‘서커스’를 보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CBS가 2시간가량의 이번 인터뷰를 위해 유명 방송인 오프라 윈프리가 운영하는 제작사 하포프로덕션에 최대 900만 달러(약 104억 원)를 지불했다고 보도했다. 인터뷰를 위해 ABC, NBC 등 여러 방송사가 경쟁했지만 평소 윈프리와 친분이 있는 CBS가 인터뷰를 따냈다고 한다. 왕손 부부의 변호인은 “두 사람은 인터뷰 대가로 출연료를 받지는 않는다”고 밝혔다. 여론조사 회사 유고브가 4일 공개한 조사 결과에 따르면 왕실과 해리 왕손 부부 간의 갈등과 관련해 영국 성인 4628명 중 38%는 “여왕 쪽에 동정적”인 것으로 나타나 “왕손 부부를 동정한다”는 응답(18%)보다 많았다. 파리=김윤종 특파원 zozo@donga.com / 김민 기자}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를 ‘계약 매춘부’로 왜곡한 마크 램지어 하버드대 교수를 일본 우익세력이 옹호하고 나섰다. 7일 트위터 등 소셜미디어에 따르면 이들은 로런스 배카우 하버드대 총장에게 감사 엽서 보내기 운동에 나서는가 하면, 램지어 교수를 비판한 학자에겐 보복성 공격을 가하고 있다. 온라인에서 활동하는 ‘넷우익’은 배카우 총장이 “램지어 주장은 학문의 자유”라는 입장을 보인데 대해 감사 의미에서 엽서를 보내고 있다. 또 존 매닝 로스쿨 학장의 e메일 주소도 공유하며 감사 메시지를 독려 중이다. 한 단체는 에릭 매스킨 하버드 경제학과 교수에게 위안부가 매춘부라고 주장하는 근거 4가지를 정리해서 보낸 것으로 알려졌다. 자료에는 이영훈 전 서울대 교수 등이 쓴 ‘반일 종족주의’도 포함됐다. 매스킨 교수는 램지어 논문 반대 연판장에 노벨상 수상자로 처음 이름을 올린 ‘게임 이론’ 권위자다. ‘넷우익’은 램지어 비판 학자를 향한 집단 보복에도 나섰다. 이들은 램지어 논문 철회를 요구한 에이미 스탠리 노스웨스턴대 교수를 징계해달라는 e메일을 학교 측에 보내고 있다. 일부 우익은 생명을 위협하거나 성적 모욕까지 했다. 위안부를 비롯한 일본의 역사왜곡을 지적해 온 알렉시스 더든 코네티컷대 교수는 수 년간 우익의 협박을 받았다고 털어 놨다. 더든 교수는 2017년 아베 신조 당시 총리를 비판한 칼럼을 신문에 기고한 후 “죽여버리겠다”는 메시지를 받고, 성착취물에 자신을 합성해 보내는 공격까지 받아 경찰 수사를 진행 중이다. 협박이 심할 때는 경찰이 자택을 순찰한 적도 있다고 그는 말했다. 필라델피아 시의회는 5일(현지시간) 램지어 교수의 ‘위안부 논문’을 규탄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한국계인 데이비드 오 공화당 시의원이 발의한 이 결의안은 “램지어의 논문은 무례한 역사 왜곡”이라고 규탄했다. 6일(현지시간) 하버드대 존스턴 게이트 앞에서는 ‘램지어 논문 철회 및 규탄 대회’가 열렸다. 매사추세츠한인회 주최로 열린 집회에는 한인과 지역 주민 100여 명이 참가해 램지어의 논문 철회와 대학 측의 조치를 요구했다. 김민 기자 kimmin@donga.com}

쿠데타를 일으킨 군부가 정권을 장악한 미얀마에서 3일 14세 소년을 포함한 반정부 시위대 최소 15명이 군경이 쏜 총에 맞아 숨졌다. 이른바 ‘피의 일요일’로 불린 지난달 28일 이후 3일 만에 다시 다수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지난달 28일엔 최소 18명, 많게는 29명까지 사망했다고 현지 언론과 외신들이 전한 바 있다. 쿠데타가 발생한 지난달 1일 이후 최소 45명의 시위대와 시민이 사망했다. AFP통신과 현지 의료진, 소셜미디어 등에 따르면 3일 중부도시 사가잉에서 5명, 2대 도시 만달레이에서 3명, 양곤주에서 6명, 만달레이 인근 밍잔에서 1명 등 모두 15명이 숨졌다. 이 중에는 14세 소년과 19세 여성도 포함됐는데 둘 모두 머리에 총을 맞은 것으로 알려졌다. 시민들은 이날 군경이 경고 사격 없이 갑자기 시위대를 향해 실탄을 쐈다고 주장하고 있다. 찰스 마웅 보 추기경은 트위터에 “미얀마 주요 도시가 1989년 당국의 유혈 진압으로 대규모 사상자가 발생했던 중국 톈안먼 광장 같다”고 썼다. 뉴욕타임스(NYT)는 지난달 28일 시위 상황을 찍은 영상을 분석한 결과 당시 군경이 소총 등 무기를 동원했다고 보도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시위대는 굴하지 않겠다는 뜻을 보이고 있다. 한 참가자는 로이터통신에 “누구도 독재를 원하지 않음을 군부에 보여주겠다”고 했다. 현지 소셜미디어에는 ‘국제사회는 무엇을 하고 있느냐’ 등의 글이 계속 올라오고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 역시 “미얀마 국민의 염원이 폭력으로 꺾일 수 없다”며 시위대를 지지했다. 군부가 임명한 운나 마웅 르윈 외교장관은 2일 동남아시아국가연합(아세안) 외교장관들과의 화상회의에서 “지난해 11월 총선 당시 선거 부정이 있었다”는 기존 주장을 재차 강조했다. 부정 선거로 군부가 정권을 잡을 수밖에 없었고 아세안 또한 군의 집권 정당성을 인정했다는 인상을 심어주려는 의도로 보인다. 이 회의 후 아세안 외교장관들이 미얀마 제재 등 구체적인 조치 없이 “대화와 화해로 사태를 해결하라”는 원론적 성명을 발표하는 데 그친 것도 유혈 진압을 이어가는 군부에 힘을 실어줬다는 분석이 제기된다. ‘유엔 주재 미얀마대사’ 자리를 둘러싼 대립도 상당하다. 지난해 아웅산 수지 국가고문 측이 임명한 초 모 툰 대사는 최근 유엔에 서한을 보내 “내가 여전히 미얀마를 대표하는 유엔 대사임을 분명히 하고 싶다. 불법 쿠데타를 자행한 자들은 대통령의 합법적 인가를 철회할 어떤 권한도 갖고 있지 않다”고 밝혔다. 툰 대사는 지난달 26일 미국 뉴욕 유엔본부에서 저항의 상징인 ‘세 손가락’ 경례로 군부 쿠데타를 비판해 화제를 모았다. 군부는 즉각 그를 해임하고 이틀 뒤 새 대사를 임명했다고 유엔에 알렸지만 툰 대사는 “군부가 날 해임할 권한이 없다”고 맞서고 있다. 이 같은 전례 없는 상황에 유엔의 고민도 깊어졌다. 스테판 뒤자리크 대변인은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독특한 상황”이라고 난감함을 표시했다. 유엔은 조만간 자격심사위원회의 표결로 미얀마대사를 결정하기로 했다. 네드 프라이스 미 국무부 대변인은 2일 “군부의 해임 시도에도 주유엔 미얀마대사는 툰 대사라는 것이 미국의 해석”이라고 밝혔다. 수지 고문 측은 2일 각료를 자체적으로 임명하며 반격에 나섰다. 수지를 지지하는 의원 모임 미얀마 연방의회 대표위원회(CRPH)는 이날 성명에서 “쿠데타 때문에 민주정부의 활동이 중지된 만큼 장관 대행 4명을 임명했다”고 밝혔다.김민 kimmin@donga.com·이은택 기자}

지난해 세계 3대 문학상 중 하나인 인터내셔널 부커상(구 맨부커 인터내셔널상)을 역대 최연소로 수상한 네덜란드 유명 작가 마리커 루카스 라이너벨트(30)가 미국 시인 어맨다 고먼(23)의 시 번역을 맡았다가, “흑인 작가가 번역을 맡지 않았다”며 반발이 일어 번역을 포기했다고 2일(현지 시간) CNN이 보도했다. 고먼은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취임식에서 축시를 낭독해 큰 화제를 모았던 흑인 여성 시인이다. 백인인 라이너벨트는 최근 입장문을 내고 “지난달 23일 출판사 멀른호프로부터 고먼의 시집 ‘우리가 오를 언덕’ 번역 제안을 받았으나, 3일 뒤 거절했다”고 밝혔다. 그는 “(내가) 번역을 맡게 된다는 소식 이후 일어난 논란에 놀랐고, 출판사의 결정에 상처 입은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한다”고 했다. 번역에 관한 논란은 네덜란드 기자의 언론 기고를 통해 시작됐다. 재니스 들은 지난달 25일 출판사의 선택을 비판하는 칼럼을 네덜란드 일간지 볼크스크란트에 기고했다. 이 글에서 들은 “라이너벨트의 역량을 폄하하는 것은 아니지만, 출판사는 어째서 고먼같은 젊은 여성, 특히 ‘흑인’을 선택하지 않았나”라며 “이 결정은 최소한 흑인 여성 작가에게 갈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한 것”이라고 비판했다.라이너벨트는 “고먼의 시를 번역하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했다. 어맨다의 팀은 여전히 출판사의 결정을 존중한다고 말했으며, 나를 선택해준 고먼에게도 감사하다”며 “그녀의 힘과 톤, 스타일을 전달하게 된 것을 기쁜 일이라 생각했지만, 이런 지위조차 많은 사람들이 누릴 수 없는 것임을 알았다. 여전히 고먼의 아이디어가 널리 퍼지길 바란다”고 말했다. 트위터에서는 이런 논란을 이해할 수 없다는 의견도 제기됐다. 한 이용자는 “인종차별에 대해 민감하게 받아들여야 하지만, 적어도 이 사안은 차별이라고 볼 수 없다”고 말했다. 또 “고먼이 직접 고른 번역가인데 무엇이 문제가 되느냐”는 이야기도 나왔다. 당초 고먼은 라이너벨트가 번역가로 정해졌다는 출판사의 소식을 리트윗했다. 라이너벨트가 포기한다는 소식에 출판사는 “전적으로 번역가의 결정”이라는 입장을 내놨지만, 고먼 측은 아직 입장을 밝히지 않았다.김민 기자 kimmin@donga.com}

새로 자른 머리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미국의 중학생이 모자를 쓴 채 교실에 등장했다. 이 학교에서 실내 모자 착용은 금지되어 있었다. 학과 주임 선생님이 30분 간 대화했지만 모자 벗기를 거부한 학생은 교장 선생님까지 만났다. 그런데 그 교장 선생님이 학생을 벌주는 대신 머리를 직접 다듬어줘 화제가 됐다. 지난달 26일(현지 시간) CNN은 미국 인디애나주 인디애나폴리스의 스토니브룩 중학교 교장 제이슨 스미스와 학생 앤서니 무어의 이야기를 소개했다. 교장 선생님은 먼저 학생을 타이르려 했다. 그가 “모자를 벗는 것은 아주 간단한 일인데 왜 그렇게 저항하느냐”고 묻자 학생은 “부모님이 데려간 미용실에서 머리를 잘랐는데 마음이 들지 않는다”고 답했다. 교장은 “나와 주임 선생님 눈에는 괜찮아 보인다”고 했다가 “물론 네가 13살, 14살 정도이니 그 나이 때는 친구들의 시선이 더 중요하다는 것도 이해한다”고 했다. 그러고는 마음을 바꿔 학생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는 “나는 네 나이 때부터 내 머리를 직접 잘랐다”며 자신의 대학 시절 사진과, 그가 머리를 다듬어준 아들의 사진을 보여주었다. 그리고는 “내가 만약 집에 가서 내 미용 도구를 가져와 머리를 다듬어주면 교실로 돌아갈래?”라고 물었다. 학생은 잠시 머뭇거린 뒤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교장 선생님은 즉시 차를 타고 집에 가 미용 도구를 가져왔다. 그리고 학생의 부모님에게 전화로 동의를 구하고 머리를 직접 다듬어줬다. 그제야 마음이 풀린 학생은 모자를 벗고 교장실을 나섰다. 학생의 엄마인 타완다 존슨 씨는 “교장 선생님이 벌을 주는 대신 자상하게 대해주어 깜짝 놀라고 기뻤다”고 말했다. 교장 스미스 씨는 흑인인 학생의 마음을 자신도 흑인이기에 이해했다고 털어놓았다. 그는 “나 자신도 흑인 남성으로 자랐고 머리에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는 문화를 잘 알고 있다”며 “우리의 눈엔 전혀 이상하지 않았지만 앤서니는 비웃음을 당할 것이라는 걱정에 사로잡혀 있었다”고 말했다. 스미스 씨는 “학생들이 괴로워할 때 잘잘못을 따지기보다는 학생의 관점에서 일어난 일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며 “아이들의 마음과 요구를 들어주는 것에 도시 교육의 미래가 달렸다”고 덧붙였다.김민기자 kimmin@donga.com}

배우 앤젤리나 졸리(46)가 전남편 브래드 피트(58)로부터 선물 받아 10년간 소장한 윈스턴 처칠 전 영국 총리(1874∼1965)의 풍경화가 처칠이 남긴 그림 중 최고가에 낙찰됐다. 이 그림은 처칠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직접 그려 프랭클린 루스벨트 당시 미국 대통령에게 선물했다. 1일(현지 시간) 크리스티 런던 경매에 나온 이 작품은 1150만 달러(약 130억 원·수수료 포함)에 팔렸다. ‘쿠투비아 모스크의 탑’(Tower of Koutoubia Mosque·1939∼1945년·사진)이라는 제목의 이 작품은 모로코 마라케시의 뜨거운 태양이 내리쬐는 풍경을 담고 있다. 강렬한 햇볕으로 만들어진 따뜻한 색채와 길게 드리워진 그림자가 인상적이다. 크리스티 런던 관계자는 “1935년 모로코를 처음 방문한 처칠은 태양빛의 매력에 흠뻑 빠졌다”며 “스스로도 모로코를 그린 작품을 가장 자신 있어 했다”고 설명했다. 이 그림은 처칠이 제2차 세계대전 시기에 그린 유일한 작품이다. 1943년 1월 모로코 카사블랑카 회담 직후 처칠은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마라케시 근처에서 노을을 보자고 제안한다. 잠시나마 함께한 기억을 기념해 처칠은 다음 날 바로 이 그림을 그려 선물했다. CNN에 따르면 졸리는 이 작품을 전남편 피트로부터 2011년 선물 받았다. 40대부터 그림 그리기를 시작한 처칠은 500여 점의 작품을 남겼다. 김민 기자 kimmin@donga.com}

해리 왕자가 영국 왕실을 떠나는 과정이 “믿을 수 없을 만큼 힘들었다”며 어머니인 고(故) 다이애나 왕세자빈을 언급해 화제다. 해리 왕자는 아내 메건 마클과 함께 CBS 인터뷰에 출연해 최근 왕실을 떠난 심경을 밝혔다. 유명 쇼 호스트인 오프라 윈프리가 진행한 인터뷰는 7일 공개될 예정이다. 2일(현지 시간) 공개된 인터뷰 티저 영상에는 해리 왕자가 다이애나 왕세자빈에 대해 말하는 장면이 담겼다. 해리는 자신처럼 이혼으로 왕실을 떠난 다이애나가 “얼마나 고통스러웠을지 상상도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내 곁에는 이 과정을 함께해 줄 아내가 있어 정말 다행스럽다고 생각한다”며 “오래 전 어머니(다이애나)가 어떻게 이 과정을 혼자서 견뎠을지 가늠할 수 없다”고 했다. 또 다른 영상에서 해리는 왕실과 결별 후 다이애나의 비극적 삶을 암시하면서, “가장 우려했던 것은 과거의 역사가 되풀이 되는 것”이라고도 말했다. 다이애나는 찰스 왕자와 이혼하면서 왕실로부터 엄청난 비난을 받았다. 해리 왕자는 이전에도 다이애나를 향한 과도한 미디어의 관심이 그녀를 1997년 교통사고로 사망에 이르게 했다고 지목한 바 있다. 이 인터뷰에서 마클이 다이애나가 남긴 다이아몬드로 만든 팔찌를 착용하고 나온 것도 눈길을 끌었다. 이 팔찌는 두 사람의 약혼 때 처음 공개된 것으로, 해리가 “어머니(다이애나)가 우리와 늘 함께하고 있음을 알리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마클은 “세상을 떠나 함께할 수 없는 다이애나가 이렇게라도 함께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덧붙였다.김민기자 kimmin@donga.com}

배우 안젤리나 졸리(46)가 전 남편 브래드 피트(58)로부터 선물 받아 10년간 소장한 윈스턴 처칠 전 영국 총리의 풍경화가 처칠이 남긴 그림 중 최고가에 낙찰됐다. 이 그림은 처칠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직접 그려 프랭클린 루즈벨트 당시 미국 대통령에게 선물했다. 1일(현지 시간) 런던 크리스티 경매에 나온 이 작품은 1150만 달러(약 123억 원·수수료 포함)에 팔렸다. ‘쿠투비아 모스크의 탑’(Tower of Koutoubia Mosque·1939~1945)이라는 제목의 작품은, 모로코 마라케시의 뜨거운 태양이 내리쬐는 풍경을 담고 있다. 강렬한 햇볕으로 만들어진 따뜻한 색채와 길게 드리워진 그림자가 인상적이다. 크리스티 런던 관계자는 “1935년 모로코를 처음 방문한 처칠은 태양빛의 매력에 흠뻑 빠졌다”며 “스스로도 모로코를 그린 작품을 가장 자신 있어 했다”고 설명했다. 이 그림은 처칠이 제2차 세계대전 시기에 그린 유일한 작품이다. 1943년 1월 모로코 카사블랑카 회담 직후 처칠은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마라케시 근처에서 노을을 보자고 제안한다. 잠시나마 함께한 기억을 기념해 처칠은 다음날 바로 이 그림을 그려 선물했다. CNN에 따르면 졸리는 이 작품을 전 남편 피트로부터 2011년 선물 받았다. 40대부터 그림 그리기를 시작한 처칠은 500여 점의 작품을 남겼다. 최근 들어 이 작품 중 일부가 경매에 나오며 높은 가격에 낙찰되고 있다. 2014년 소더비 런던 경매에 나온 처칠의 또 다른 회화 작품은 170만 달러(약 19억 원)에 낙찰됐다.김민기자 kimmin@donga.com}

28일 미얀마에서 계속된 군부 쿠데타 반대 시위에서 최소 18명의 시위 참가자가 사망했다고 로이터가 보도했다. 미얀마 군경은 시위대에 대한 진압 수위를 연일 높이고 있다. 군경은 주요 집회 장소를 선점하고 시위대를 향해 최루탄, 섬광 수류탄, 고무탄에 이어 실탄 경고사격까지 가하고 있다. 로이터에 따르면 유엔인권사무소는 이날 자료를 내고 미얀마 최대 도시 양곤을 비롯해 제2의 도시 만달레이, 남부 다웨이, 바고, 메르기, 포코쿠 등 6개 도시에서 최소 18명이 사망했다고 밝혔다. 이날 미얀마 남부 다웨이에서만 경찰의 총격으로 최소 4명이 숨지고 수십 명이 부상당했다. 미얀마 최대 도시 양곤에서도 가슴에 총상을 입은 남성이 병원으로 이송 후 숨지는 등 이날 최소 4명의 사망자가 나왔다. 쿠데타가 발생한 지난달 1일 이후 양곤에서 시위 참가 민간인이 사망한 것은 처음이다. 양곤에서는 시위에 참가했던 한 여성이 경찰의 진압 작전 이후 심장마비로 사망했다는 소식도 전해졌다. 쿠데타 반대 시위 규모가 가장 큰 만달레이에서도 2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쿠데타가 발발한 지 한 달이 지나면서 국제사회의 비판이 확산되고 있지만 군부의 물리적인 진압으로 인명 피해가 커지고 있다. 시간이 흐를수록 사망자 수가 늘어나는 가운데 미얀마 시민들이 올린 소셜미디어에는 28일 미얀마 곳곳에서 열린 시위에서 군경의 유혈 진압으로 최소 20명가량의 사망자가 나왔다는 이야기도 돌고 있다. 미얀마 시민들은 트위터에 “도대체 몇 명이 죽어야 유엔이 행동에 나설 것이냐”며 국제사회의 도움을 호소했다. 군경의 유혈 진압은 이날 시위대가 2차 총파업을 벌이기로 한 것과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지난달 22일 총파업 당시 미얀마 전역에서 수백만 명이 참여하는 반쿠데타 시위가 열렸다. 태국, 홍콩, 대만의 반독재 세력 간 연대인 ‘밀크티 동맹(Milk tea Alliance)’이 미얀마 시위대에 동조해 태국과 홍콩에서 거리 행진을 벌이기로 한 것도 유혈 진압에 영향을 줬다는 분석이 나온다. 군경은 28일 시위 현장에서 시위대 수백 명을 체포했고 이 중에는 ‘미얀마 나우’ 등 현지 매체와 AP통신 사진기자도 포함됐다. 미얀마외신기자클럽(FCCM)은 이날 성명을 내고 “양곤에서 체포된 AP 사진기자를 즉각 석방하라”고 밝혔다. 미얀마 국영 MRTV, AP통신 등에 따르면 초 모 툰 주유엔 미얀마대사는 지난달 26일 미국 뉴욕의 유엔총회에서 “국제사회는 미얀마 군부에 더욱 강력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며 “쿠데타를 즉각 멈추고, 무고한 시민을 지키며, 권력을 시민에게 돌려줘 민주주의를 회복해야 한다”고 연설했다. 대사는 연설을 마친 뒤 쿠데타 저항의 상징인 ‘세 손가락 경례’를 했고 총회장에는 박수가 쏟아졌다. 대사는 연설 이후 군부에 의해 해임됐다. 국가를 배신하고, 국가를 대표하지 않는 비공식 기관을 대변해 발언함으로써 대사로서 권력과 책임을 남용했다는 이유다. 쿠데타 발생 전 시민 정부가 임명한 초 모 툰 대사는 쿠데타 당시 해외에 머물고 있었다. 유엔총회장에서 그는 “아웅산 수지 고문이 이끄는 시민 정부를 대신해 발언한다”고 밝혔다. 해임당한 뒤 그는 로이터통신과의 인터뷰에서 “끝까지 군부와 싸울 것”이라고 말했다. 현지 매체 미얀마 나우는 지난달 1일 자택에 구금됐던 아웅산 수지 국가고문이 최근 모처로 옮겨졌다고 보도했다. 수지 고문이 이끄는 민주주의민족동맹(NLD) 소식통은 이 매체에 수지 고문의 거처가 수도 네피도 자택에서 옮겨졌으며 지금은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한다고 밝혔다.김민 kimmin@donga.com·조유라 기자}

28일 미얀마에서 계속된 군부 쿠데타 반대 시위에서 최소 18명의 시위 참가자가 사망했다고 로이터가 보도했다. 미얀마 군경은 시위대에 대한 진압 수위를 연일 높이고 있다. 군경은 주요 집회 장소를 선점하고 시위대를 향해 최루탄, 섬광 수류탄, 고무탄에 이어 실탄 경고사격까지 가하고 있다. 로이터에 따르면 미얀마 주재 유엔인권사무소는 이날 자료를 내고 미얀마 최대 도시 양곤을 비롯해 제2의 도시 만달레이, 남부 다웨이, 바고, 메르기, 포코쿠 등 6개 도시에서 최소 18명이 사망했다고 밝혔다. 이날 미얀마 남부 다웨이에서만 경찰의 총격으로 최소 4명이 숨지고 수십 명이 부상당했다. 미얀마 최대 도시 양곤에서도 가슴에 총상을 입은 남성이 병원으로 이송 후 숨지는 등 이날 최소 4명의 사망자가 나왔다. 쿠데타가 발생한 지난달 1일 이후 양곤에서 시위 참가 민간인이 사망한 것은 처음이다. 양곤에서는 시위에 참가했던 한 여성이 경찰의 진압 작전 이후 심장마비로 사망했다는 소식도 전해졌다. 쿠데타 반대 시위 규모가 가장 큰 만달레이에서도 2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쿠데타가 발발한 지 한 달이 지나면서 국제사회의 비판이 확산되고 있지만 군부의 물리적인 진압으로 인명 피해가 커지고 있다. 시간이 흐를수록 사망자 수가 늘어나는 가운데 미얀마 시민들이 올린 소셜미디어에는 28일 미얀마 곳곳에서 열린 시위에서 군경의 유혈 진압으로 최소 20명가량의 사망자가 나왔다는 이야기도 돌고 있다. 미얀마 시민들은 트위터에 “도대체 몇 명이 죽어야 유엔이 행동에 나설 것이냐”며 국제사회의 도움을 호소했다. 군경의 유혈 진압은 이날 시위대가 2차 총파업을 벌이기로 한 것과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지난달 22일 총파업 당시 미얀마 전역에서 수백만 명이 참여하는 반쿠데타 시위가 열렸다. 태국, 홍콩, 대만의 반독재 세력 간 연대인 ‘밀크티 동맹(Milk tea Alliance)’이 미얀마 시위대에 동조해 태국과 홍콩에서 거리 행진을 벌이기로 한 것도 유혈 진압에 영향을 줬다는 분석이 나온다. 군경은 28일 시위 현장에서 시위대 수백 명을 체포했고 이 중에는 ‘미얀마 나우’ 등 현지 매체와 AP통신 사진기자도 포함됐다. 미얀마외신기자클럽(FCCM)은 이날 성명을 내고 “양곤에서 체포된 AP 사진기자를 즉각 석방하라”고 밝혔다. 미얀마 국영 MRTV, AP통신 등에 따르면 초 모 툰 주유엔 미얀마 대사는 지난달 26일 미국 뉴욕의 유엔총회에서 “국제사회는 미얀마 군부에 더욱 강력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며 “쿠데타를 즉각 멈추고, 무고한 시민을 지키며, 권력을 시민에게 돌려줘 민주주의를 회복해야 한다”고 연설했다. 대사는 연설을 마친 뒤 쿠데타 저항의 상징인 ‘세 손가락 경례’를 했고 총회장에는 박수가 쏟아졌다. 대사는 연설 이후 군부에 의해 해임됐다. 국가를 배신하고, 국가를 대표하지 않는 비공식 기관을 대변해 발언함으로써 대사로서 권력과 책임을 남용했다는 이유다. 쿠데타 발생 전 시민 정부가 임명한 초 모 툰 대사는 쿠데타 당시 해외에 머물고 있었다. 유엔총회장에서 그는 “아웅산 수지 고문이 이끄는 시민 정부를 대신해 발언한다”고 밝혔다. 해임 당한 뒤 그는 로이터통신과의 인터뷰에서 “끝까지 군부와 싸울 것”이라고 말했다. 현지 매체 미얀마 나우는 지난달 1일 자택에 구금됐던 아웅산 수지 국가고문이 최근 모처로 옮겨졌다고 보도했다. 수지 여사가 이끄는 민주주의민족동맹(NLD) 소식통은 이 매체에 수지 고문의 거처가 수도 네피도 자택에서 옮겨졌으며 지금은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한다고 밝혔다.김민기자 kimmin@donga.com조유라기자 jyr0101@donga.com}

28일 미얀마에서 군부 쿠데타에 반대하는 시위가 이어지면서 남부 다웨이 3명, 양곤 2명, 만달레이 2명 등 최소 7명이 사망했다고 로이터가 보도했다. 미얀마 군부는 연일 시위대를 향한 진압 수위를 높이고 있다. 군경은 주요 집회 장소를 선점하고 시위대를 향해 최루탄, 섬광 수류탄, 고무탄에 이어 경고사격을 가했다. 로이터에 따르면 이날 미얀마 남부 다웨이에서만 경찰의 총격으로 3명이 숨지고 수십 명이 부상당했다. 미얀마 최대도시 양곤에서도 가슴에 총상을 입은 남성이 병원으로 이송됐지만 결국 숨졌다고 현지 의사가 로이터에 밝혔다. 양곤에서는 시위에 참가했던 한 여성이 경찰의 진압 작전 이후 심장마비로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만달레이에서도 시위 진압 과정에서 두 명이 사망했다는 현지 매체의 보도가 나왔다. 쿠데타 한 달을 맞으면서 국내외의 압박이 커지고 있지만 군부가 물리적인 진압을 강행하면서 인명피해가 커지고 있다. 군경은 28일 시위 현장에서 시위대 수백 명을 체포했고 이 중에는 ‘미얀마 나우’ 등 현지 매체와 AP통신 사진기자도 포함됐다. 미얀마외신기자클럽(FCCM)은 이날 성명을 내고 “양곤에서 체포된 AP사진기자를 즉각 석방하라”고 밝혔다. 미얀마 국영 MRTV, AP통신 등에 따르면 초 모 툰 유엔 미얀마 대사는 지난달 26일 미국 뉴욕에서 열린 유엔총회에서 “국제사회는 미얀마 군부에 더욱 강력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며 “쿠데타를 즉각 멈추고, 무고한 시민을 지키며, 권력을 시민에게 돌려줘 민주주의를 회복해야 한다”고 연설했다. 대사는 연설을 마친 뒤 쿠데타 저항의 상징인 ‘세 손가락 경례’를 했고 총회장에는 박수가 쏟아졌다. 대사는 연설 이후 군부에 의해 해임됐다. 국가를 배신하고, 국가를 대표하지 않는 비공식 기관을 대변해 발언함으로써 대사로서 권력과 책임을 남용했다는 이유다. 군부 이전 정권에서 임명된 초 모 툰 대사는 쿠데타 당시 해외에 머물고 있었다. 유엔총회장에서 그는 “아웅산 수지 고문이 이끄는 시민 정부를 대신해 발언한다”고 밝혔다. 해임 당한 뒤 그는 로이터통신과의 인터뷰에서 “끝까지 군부와 싸울 것”이라고 말했다. 현지 매체 미얀마 나우는 지난달 1일 자택에 구금됐던 아웅산 수지 국가고문이 최근 모처로 옮겨졌다고 보도했다. 민주주의민족동맹(NLD) 소식통은 이 매체에 수지 고문의 거처가 수도 네피도 자택에서 옮겨졌으며 현재 어디에 있는지는 알지 못한다고 밝혔다.김민기자 kimmin@donga.com}

1일 군부 쿠데타 발발과 이에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로 미얀마의 혼란이 극심한 가운데 시위대 유혈 진압을 주도하고 있는 ‘33경보병사단’이 2017년 8월 무슬림 소수민족 로힝야족 집단학살을 자행한 부대와 동일 조직인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이들은 로힝야족 민간인 수천 명을 살해하고 집단 성폭행했다. 방화도 저질렀고 400여 개 마을을 초토화했다. 이로 인해 최소 74만 명의 로힝야족이 이웃 방글라데시로 도피해 아직까지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11일에도 보트로 인도양을 떠돌던 로힝야 난민 8명이 탈수증으로 숨졌다.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은 과거 로힝야족을 “전 세계에서 가장 박해받는 민족”이라고 언급했다. 인권과 민주주의 가치를 수호해 노벨 평화상을 받았던 아웅산 수지 미얀마 국가고문(76)이 집권 후 서구 일각으로부터 ‘변절자’라는 비판을 받은 것도 당국의 로힝야족 탄압을 방관하고 묵인한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로힝야족은 누구이고 왜 이런 처지에 놓였을까.○ 갈등 근원은 英 식민지배 로힝야족은 미얀마 주류 민족인 버마족과 인종 종교 언어가 모두 다르다. 몽골계 불교도인 버마족과 인도유럽계 무슬림인 로힝야족은 외형에서부터 차이가 난다. 다민족 다종교 다언어 국가인 미얀마에는 인구의 약 70%를 차지하는 버마족 외에도 샨, 카렌, 라카인, 몬, 카친 등 130개가 넘는 소수민족이 있다. 1948년 영국의 식민지배에서 독립한 후 여러 소수민족과의 유혈 분쟁이 끊이지 않았던 것이 미얀마 사회에서 군부가 득세하는 계기가 됐다. 미얀마 정부는 로힝야족을 소수민족에도 포함시키지 않은 채 ‘불법이민자’로 규정하고 있다. 로힝야족은 방글라데시 남동부 치타공과 국경을 접한 미얀마 남서부 라카인주(州)에 주로 거주한다. 라카인의 옛 지명이 아라칸이어서 아라칸 무슬림으로도 불린다. 인구는 미얀마 전체 5400만 명의 약 3.7%인 최대 200만 명 정도로 추산된다. 방글라데시 파키스탄 사우디아라비아 등에도 일부가 거주한다. 로힝야어는 치타공 지역에서 쓰이는 치타공어와 흡사하다. 음성언어로는 큰 차이가 없어 소통이 가능하다. 다만 두 언어 모두 방글라데시 최대 언어인 벵골어와는 많이 다르다. 제국주의 열강의 지배를 거친 후 아직까지 민족 종교 갈등에 신음하는 많은 나라처럼 로힝야족을 둘러싼 미얀마 내부 갈등의 근본 원인 역시 1824∼1948년 식민통치를 벌인 영국에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당시 영국은 버마족을 관리하기 위해 인도계 무슬림 등의 대규모 이주를 장려했다. 이들 무슬림에게 세금, 토지 등 각종 혜택을 부여했고 무슬림 역시 버마족 탄압에 앞장서 미얀마인의 원성을 샀다. 식민지배 시절 미얀마 상권을 장악한 인도계 무슬림에 대한 반발과 증오가 같은 이슬람교도인 로힝야족으로도 번져 지금까지 갈등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2년 일본이 미얀마를 침공했을 때 로힝야족은 영국 편에, 버마족은 일본 편에 섰던 것도 양측 갈등을 키웠다. 영국은 자신들을 돕는 대가로 세계대전이 끝나면 로힝야족에게 자치지역을 주겠다고 약속했지만 지키지 않았다. 로힝야족은 스스로를 7세기경 미얀마 일대에 도착한 아랍 상인의 후손이라고 주장한다. 당국의 주장처럼 ‘뜨내기 이민자’가 아니며 1300년 넘게 이곳에서 거주한 ‘토착민’이란 의미다. 반면 군부는 식민지 시절 영국 앞잡이 노릇을 하며 미얀마인을 탄압했고 미얀마에 온 지도 오래되지 않았으니 원래 살던 곳으로 돌아가라고 주장한다.○ 군부가 대대적 탄압…대부분 문맹 1948년 독립 직후만 해도 로힝야족은 미얀마 구성원으로 인정받았다. 로힝야족 출신으로 의회에 입성해 국회의원으로 활동했던 인물들도 있다. 1961∼1964년 라카인주 북부에서 짧게나마 자치권도 보장받았다. 1962년부터 군부 독재가 시작되면서 대대적인 탄압이 시작됐다. 당시 쿠데타로 집권해 1988년까지 철권통치를 한 독재자 네 윈(1911∼2002)은 집권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불교 사회주의’를 통치 이념으로 내세우고 로힝야족을 제국주의 잔재로 규정했다. 불교 사회주의는 현실 세계에서의 욕망 자제, 산업 국유화, 배타적 민족주의 등을 기반으로 한다. 네 윈은 대외교역을 대폭 줄이고 외국인을 추방하는 등 쇄국주의 노선을 걸었다. 특히 네 윈 정권은 1982년 미얀마 국민을 ‘영국 통치 이전부터 거주한 민족’으로 규정하는 법안을 만들어 로힝야족을 제외시켰다. 라카인주를 벗어나는 이동 또한 엄격히 제한했다. 로힝야 인구를 줄인다며 로힝야족끼리의 결혼을 제한하고 자녀도 두 명까지만 둘 수 있게 했다. 이에 따라 로힝야족은 사실상 기본 인권을 보장받지 못한 채 비참한 생활을 이어오고 있다. 기초교육도 받지 못해 대부분이 문맹이다. 2013년 아라칸 로힝야 구원군(Arakan Rohingya Salvation Army·ARSA)이란 로힝야 무장단체가 등장하면서 로힝야 민간인의 고난이 더 심해졌다. 이슬람국가(IS) 등 수니파 무장단체와 연계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는 이 단체는 종종 정부군 공격 등을 감행해 왔다. 이번 쿠데타를 주도한 민 아웅 흘라잉 최고사령관(65)은 ARSA 제거를 이유로 2017년 로힝야 민간인에 대한 전쟁범죄를 주도해 국제사회의 거센 비판을 받았다. 당시 유엔은 “인종청소 의도로 대량 학살과 집단 성폭행이 자행됐다”며 흘라잉을 포함한 관련자 처벌을 촉구했다. 미국 또한 2019년 흘라잉과 군 수뇌부의 미국 입국을 금지하고 재무부 제재 명단에 올렸다. 흘라잉은 로힝야족을 방글라데시에서 왔다는 뜻의 비하적인 표현 ‘벵갈리’로 부른다. 그는 2018년 9월 로힝야족 민간인에 대한 전쟁범죄 혐의를 부인하며 “벵갈리가 있어야 할 곳은 방글라데시다. 그들이 미얀마에 있는 한 미얀마 법에 따라 조사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 수지의 외면 민주주의민족동맹(NLD)을 이끌며 2015년 11월 총선에서 네 윈 집권 후 53년 만의 문민정부 출범을 이끈 수지 국가고문 역시 로힝야 문제에서는 자유롭지 못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수지 고문도 로힝야 대신 ‘무슬림’이란 표현을 쓴다. 그는 집권 직후 ‘로힝야’ 용어를 사용하지 않겠다고 밝혔고 자신을 접견한 미 외교관에게도 ‘로힝야’란 말을 사용하지 말아 달라고 했다. 2018년 영국 BBC 인터뷰에서는 “인종청소가 진행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지금 일어나는 일에 사용하기에는 너무 강한 표현”이라며 집단학살을 간접 부인했다. 2019년 12월 네덜란드 헤이그 국제사법재판소(ICJ)에도 증인으로 출석해 군을 두둔했다. 인권과 민주주의의 아이콘이었지만 자국 내 민족 갈등에 대해서는 지배자의 전형적 태도를 고수한 수지 고문에게 서구 사회는 크게 실망했다. 뉴욕타임스(NYT) 등 언론은 “로힝야에 대한 그의 입장은 비겁하다”고 직격탄을 날렸다. 주요 인권단체 역시 그가 받은 노벨 평화상을 박탈하라고 촉구했다. 문민정부 출범 후에도 군이 미얀마 사회를 좌지우지하는 현실은 모르는 바 아니나 노벨상 수상자로서의 명예와 권위에 스스로 흠집을 냈다는 비판이 거셌다. 로힝야 사태에 대한 애매한 태도로 수지 고문에 대한 국제사회의 지지가 줄어든 것이 군부에 이번 쿠데타의 빌미를 제공했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軍, 2020년 총선 무효화…정국 혼란 가속 미얀마 현지 매체 미얀마나우에 따르면 군부는 26일(현지 시간) 수지 고문이 이끄는 NLD가 압승했던 2020년 11월 총선을 무효화했다. 그간 “부정선거가 자행됐다”며 당시 총선 결과를 인정하지 않았고 쿠데타로 집권한 후 총선 자체를 아예 없던 일로 만들어 버린 셈이다. 군의 계속된 유혈 진압으로 쿠데타 발발 후 이날까지 사망자는 6명으로 늘었다. 정국 혼란 격화로 로힝야 문제가 더 깊은 수렁에 빠질 수 있다는 분석도 있다. 과거 군부와 미얀마 시민사회 모두 로힝야족을 거부하고 탄압했지만 쿠데타 후 로힝야족과 반정부 시위대가 규합하는 모습이 나타나고 있다. 다급해진 흘라잉 역시 로힝야족에게 유화 제스처를 보내고 있다. 다만 군부와 시민사회 모두 자신들의 집권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로힝야족을 도구로 삼을 뿐 정작 이들의 처우 개선에는 별 관심이 없다는 의견이 많다. 쿠데타 정국이 마무리되면 지금과 마찬가지로 양쪽 모두에게 배척당할 가능성이 크다는 의미다. 방글라데시 난민 캠프의 로힝야족 지도자 딜 모하메드는 쿠데타 직후 로이터통신에 “우리는 민주주의를 무너뜨리려는 악랄한 시도를 강력히 규탄한다. 국제사회 역시 어떤 비용이 들더라도 민주주의 회복을 위해 나서 달라”며 반정부 시위대를 지지할 뜻을 밝혔다. 현지 소셜미디어에는 젊은 시위대를 중심으로 “로힝야족의 반정부 시위 지지를 환영한다”는 글이 올라오고 있다.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 역시 “로힝야족은 미얀마 국민과의 연대를 통해 자신들에 대한 차별을 끝내고 정의를 위한 투쟁을 함께하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라고 있다”고 분석했다. 다급해진 흘라잉은 8일 연설에서 과거와 사뭇 다른 태도를 보였다. 그는 이날 방글라데시 난민 캠프에 있는 로힝야족의 미얀마 송환을 진행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여전히 ‘로힝야’란 표현을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자신이 주도한 집단학살 후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는 로힝야족을 불러들이겠다는 의지를 처음으로 내비쳤다. 수십 년간 군부가 로힝야족에 대한 일반 불교도의 반감을 자신들의 권력 유지에 이용해 왔다는 점을 감안할 때 이 화해 제스처가 진심이 아닐 것이라는 지적도 많다. 최영준 경희대 무역학과 교수(미얀마 지역연구센터장)는 “군부 입장에서 로힝야족은 소수민족에도 포함되지 않는, 변방에서 사고 치는 집단 정도이지만 수지 고문을 공격하기 위해 로힝야족을 정치적 도구로 계속 이용할 것”이라고 했다. 수지 고문에 대한 부정적 여론을 형성하고 국제사회로부터 집권 정당성을 인정받기 위해 수지 고문과는 달리 자신은 로힝야족을 포용하는 듯한 태도를 취한다는 의미다. ‘군사정권’이란 공동의 적 때문에 그간 터부시하던 로힝야족을 포용하는 듯한 일반 국민의 태도 역시 오래가지 못할 것이란 회의론이 제기된다. 장준영 한국외국어대 동남아연구소장은 “대부분의 미얀마인은 로힝야족 문제를 국가안보 위협으로 여긴다”며 불교도와 이슬람교도의 대립이 뿌리 깊다고 진단했다. 미얀마 전문가인 이언 홀리데이 홍콩대 교수 역시 타임에 “이미 미얀마 국민과 로힝야족 간의 분열은 너무나 깊다”며 로힝야족을 향한 미얀마인의 차별적 인식이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분석했다.조유라 jyr0101@donga.com·신아형·김민 기자}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국회의사당 폭동에 “실질적·도덕적 책임이 있다”고 비난했던 미치 매코널 공화당 상원 원내대표가 갑자기 트럼프 전 대통령을 “전적으로 지지하겠다”고 밝혔다. 매코널 대표는 25일(현지 시간) 폭스뉴스 인터뷰에서 “트럼프가 2024년 대통령 선거 공화당 후보로 나온다면 절대적으로(absolutely) 지지할 것”이라고 말했다. 불과 2주 전만해도 매코널 대표는 1월 6일 트럼프 지지자들의 국회의사당 난입에 대해 트럼프 전 대통령을 비난했다. 매코널은 13일 본회의장 발언대에서 “트럼프가 폭동에 책임이 있는 것은 틀림없다”며 “국회의사당에 몰려든 사람들은 자신들이 트럼프 대통령의 지시에 따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트럼프의 행동에 대해 “추한 직무유기”라고 날을 세웠다. 이에 트럼프 전 대통령은 16일 성명을 내고 “매코널은 음침한 고집불통의 정치꾼”이라며 “그 같은 지도자가 주도하는 한 공화당은 다시 강해질 수 없다”며 반박했다. 그런데 매코널 대표가 25일 트럼프 전 대통령이 2024년 대선에 나오면 지지하겠냐는 폭스뉴스 기자의 질문에 “절대적으로 지지하겠다”고 말한 것이다. 매코널은 그러면서 “2024년까지는 많은 일이 일어날 수 있다. 내가 알기로 대선을 준비하는 사람만 4명이다. 경선은 많은 가능성을 열어 두어야 할 것”이라고 단서를 달았다. 또 국회의사당 폭동에 관해 트럼프를 비판하지 않았냐는 질문을 받자 그는 “과거의 일은 이제 중요하지 않다.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새롭게 행정부가 들어섰고, 그 정부는 매우 좌파적”이라고 답했다.김민 기자 kimmin@donga.com}

24일(현지 시간) 가수 레이디 가가의 반려견 세 마리를 산책 시키던 남성이 총에 맞았다고 AP통신 등이 보도했다. 이 남성을 쏜 무장 강도들은 가가의 프렌치 불독 세 마리 중 두 마리를 납치해갔다. 가가 측은 반려견을 돌려준다면, 아무런 조건 없이 50만 달러(약 5억 원)을 주겠다고 현상금을 내걸었다.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 경찰은 가가의 반려견을 산책시키던 남성이 총 한 발을 맞았고, 병원으로 이송돼 회복 중이라고 밝혔다. 이 남성은 24일 오후 9시 40분 경 선셋대로 근처의 노스 시에라 보니타 대로에서 걷다가 습격을 당했다. 흰색 닛산 자동차가 이 남성에게 접근했으며, 이 차에서 남성 2명이 내려 반려견을 훔쳐갔다. 경찰은 “피의자 두 명이 차에서 내려 피해자에게 총을 겨누고 개들을 내놓으라고 했으나, 피해자가 저항하자 총을 쏘고 3마리 중 2마리를 가져갔다”고 설명했다. 이들이 레이디 가가의 반려견임을 알고 접근했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프렌치 불독은 미국에서 인기가 많은 품종으로 수천 달러에 거래된다고 경찰은 덧붙였다. 1월에도 샌프란시스코에서 3명의 남성이 산책 시키던 여성을 폭행하고 프렌치 불독 1마리를 훔쳐가기도 했다. 가가 측은 두 마리의 강아지 ‘코지’와 ‘구스타브’를 찾기 위해 제보 이메일 계정을 만들고, 현상금을 내걸었다. 가가는 현재 영화 촬영을 위해 이탈리아 로마에 머물고 있다. 가가의 측근은 미국 연예매체 ET에 “가가는 이성을 잃은 상태다. 라이언은 단순한 도그 워커(반려견을 산책시켜주는 사람)가 아닌 가가의 친구이기 때문에, 가가가 굉장히 불안해하고 있다”고 전했다.김민 기자 kimmin@donga.com}

네덜란드 화가 빈센트 반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 ‘해바라기’ 같은 작품은 프랑스 남부 아를에서 그려진 것들이다. 아를에서 자신만의 시각 언어를 폭발시키기 전, 고흐는 2년 간 파리에 머물렀다. 이곳에서 고흐는 모네, 피사로는 물론 앙리 툴루즈 로트렉 같은 후기 인상주의 작가와 교류했다. 이 시기 고흐가 그렸지만 100년 동안 한 번도 전시된 적이 없던 그림이 경매에 나왔다. 24일(현지 시간) 가디언 등은 고흐의 ‘몽마르트 거리 풍경’(1887년)이 소더비 3월 경매에 나온다고 보도했다. 작품은 파리 몽마르트 언덕의 유명한 풍차인 ‘물랭 드 라 갈레트’ 주변 거리 풍경을 담고 있다. 소더비는 “고흐는 목가적인 풍차와 지극히 도시적인 카바레가 섞인 몽마르트의 독특한 모습에 매력을 느꼈다”고 설명했다. 그림의 주인은 프랑스의 소장가로 1920년 이 작품을 구매했다. 이 때 이후 100년 동안 가족들이 작품을 소장하며, 단 한 번도 외부에 보인 적이 없다고 한다. 7개의 카탈로그(작품 목록)에 이 작품이 올라있지만 전시된 적은 없는 이유다. 소더비는 3월 경매를 앞두고 런던, 암스테르담, 파리에서 작품을 전시할 예정이다. 예상 가격은 500만~800만 유로(약 67~100억 원)다. 소더비 관계자는 “반 고흐의 몽마르트 시기 그림 대부분은 전 세계 유서 깊은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다”며 “개인 소장 작품이 나온 것은 매우 드문 일”이라고 설명했다. 고흐는 1886~1888년 2년 동안 파리에서 생활했다. 이 때 파리는 인상파 화가들이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었다. 빛에 집중하는 인상파의 영향으로 고흐의 그림도 파리에서 조금씩 밝은 색채를 띠기 시작했다. 소더비는 “고흐의 독자적인 스타일은 몽마르트에서부터 형성되기 시작한 것”이라고 설명했다.김민 기자 kimmin@donga.com}

경쟁 관계인 마약조직 간 세력 다툼으로 중남미 에콰도르의 교도소 3곳에서 최소 62명이 숨지는 대규모 폭력 사태가 발생했다. AP통신 등에 따르면 23일 에콰도르 남부 쿠엥카, 태평양 연안 해안도시 과야킬, 중부 라타쿵가 교도소에서 모두 폭동이 일어나 대규모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 여파로 쿠엥카 교도소에서만 33명이 숨졌고 과야킬(21명), 라타쿵가(8명)에서도 사망자가 발생했다. 중상자가 많아 사망자가 더 늘어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소셜미디어에는 피바다가 된 3개 교도소 및 훼손된 시신의 사진이 등장했다. 두 조직은 교도소 내 수감자 대표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싸움을 벌인 것으로 알려졌다. 폭동 하루 전인 22일 경찰이 교도소 내 무기를 수색한 후 두 조직의 싸움이 격화됐다는 분석도 제기된다. 사태가 악화되자 레닌 모레노 대통령은 교정시설의 무기, 탄약, 폭발물 등을 엄격히 통제하라고 지시했다. 최근 몇 년간 에콰도르 교도소 내 폭력 사태는 빈번하게 발생했다. 전국의 교정 시설이 총 2만7000명을 수용할 수 있지만 현재 수감된 재소자가 3만8000명에 달할 정도로 과밀 상태인 것이 주 원인으로 꼽힌다. 지난해 12월에도 범죄조직 간 다툼으로 재소자 5명이 숨졌다. 김민기자 kimmin@donga.com}

미국 애리조나주 피닉스 시 인근의 외딴 마을. 이곳 경찰은 10일 부상당한 남성이 발견됐다는 신고를 받고 출동했다. 현장에 가보니 젊은 남성이 팔이 묶이고 입은 틀어 막힌 채 쓰러져 있었다. 남성은 자신이 납치를 당했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조사를 해보니 납치는 자작극이었다. 이유는? ‘출근하기 싫어서.’ 23일(현지 시간) 미국 애리조나주 경찰은 일을 하기 싫어서 자신의 입에 천을 우겨 넣고, 손을 묶어서 납치를 가장한 브랜든 소울스 씨(19)를 허위 신고 혐의로 기소했다고 밝혔다. 소울스 씨는 자신의 혐의를 인정했으며, 550달러(약 60만 원) 벌금을 낼 예정이다. 이 지역의 타이어 가게에서 일하는 소울스 씨는 납치극을 꾸민 당시 “오전 일을 마치고 집에 왔는데 괴한이 들이닥쳐 머리를 때려 정신을 잃고 보니 이곳에 있었다”고 경찰에 말했다. 병원으로 이송돼 진단을 받은 그는, 납치 이유를 묻는 경찰의 질문에 “아버지가 사막에 큰 돈을 숨겨서 그런 것 같다”고 답했다. 그런데 조사가 진행될수록 그의 거짓말이 드러났다. 병원 진단 결과 그의 머리에서는 어떠한 부상의 흔적도 나타나지 않았다. 또 소울스 씨의 핸드폰이나 자택 인근 폐쇄회로(CC)TV 조사에서도 납치의 정황을 전혀 발견할 수 없었다. 자신의 말을 입증하라는 경찰의 추궁 끝에 소울스 씨는 출근하기 싫어 납치극을 꾸며냈다고 실토했다. 소울스 씨가 일했던 ‘타이어 팩토리’의 관계자는 뉴욕타임스(NYT)의 취재에 응하지 않았다. 소울스 씨의 페이스북 계정에 따르면 그는 타이어 팩토리에 더 이상 일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졌다.김민기자 kimmin@donga.com}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군국주의, 물질주의, 성적 억압에 반대하는 ‘비트 세대’의 문화를 태동시킨 서점 ‘시티 라이츠’(City Lights)를 세운 시인 로런스 펄렝게티가 22일(현지시간) 자택에서 폐 질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102세. 뉴욕타임스(NYT)가 ‘비트세대의 정신적 대부’라고 표현한 펄렝게티는 1956년 앨런 긴즈버그의 시집 ‘울부짖음’(Howl)을 출간하며 세계 문화사의 중요한 사건을 기록했다. 같은 해 갤러리에서 긴즈버그가 ‘울부짖음’을 낭독하는 모습을 본 펄렝게티는 다음날 바로 긴즈버그에게 전보를 보낸다. “훌륭한 커리어의 첫 발을 내딛은 것을 축하드립니다. 시의 원고를 언제쯤 받을 수 있을까요?” ‘시티 라이츠’ 서점에서 출판사도 운영했던 펄렝게티는 결국 긴즈버그의 시집을 출간했다. 그러나 이듬해 외설 출판 혐의로 긴즈버그와 함께 체포돼 법정에 선다. 당시 심경에 대해 펄렝게티는 가디언에 “당시 나는 어렸기 때문에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며 “평생 가둬두진 않을 테니 감옥에서 책을 실컷 읽으면 된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법정에서 ‘표현의 자유’가 이슈가 되자 증언대에 수많은 서부의 문학인들이, 길에서는 독자들의 시위가 이어졌다. 결국 법원은 “사회적 중요성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그 책을 선정적이라 볼 수 없다”며 무죄를 선고한다. 이는 수정헌법 1조에 관한 역사적 판결 중 하나로 꼽히며, 이 재판 후 D.H.로렌스의 ‘채털리 부인의 사랑’ 같은 작품도 출간될 수 있었다. ‘울부짖음’은 20세기 가장 유명한 시가 됐고, 시티 라이츠 서점은 ‘예술의 자유’를 상징하는 곳이 됐다. 시티 라이츠는 문학계에서 천대를 받았던 페이퍼백을 주로 판매한 서점이기도 하다. 또 긴즈버그는 물론 소설가 잭 케루악 등 기성 서점에서 잘 볼 수 없었던 비트세대 문학가들의 작품을 출간했다. 당시 서점으로서는 드물게 주말과 심야에도 영업해, 급진적인 문화 인사들이 교류하는 산실이 됐다. 1919년 뉴욕에서 태어난 펄렝게티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군에 복무하고, 프랑스 파리 소르본에서 비교문학을 공부했다. 1958년에 출간한 시집 ‘마음 속 코니 아일랜드’는 전세계 100만 권 이상 판매될 정도로 사랑 받았다. 2000년대 초반까지도 서점에 머물며, 자신을 찾아온 전 세계 문학 마니아들의 대화 상대가 되어주었다. 2019년 샌프란시스코시는 그의 100번째 생일을 맞아 3월 24일을 ‘로렌스 펠렝게티의 날’로 선정하고 한 달 내내 축제를 열었다. 가디언에 따르면 당시 스스로의 삶에 대해 자랑스럽냐고 묻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답했다. “잘 모르겠네요. ‘자랑스럽다’는 말은 너무 이기적인 것 같아요. ‘행복했다’가 더 적절한 단어겠어요. 물론 ‘행복’이라는 단어의 의미가 무슨 뜻인지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한다면 정말 골치 아파지겠죠.”김민 기자 kimmi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