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하기

문재인 대통령이 1일 청와대 수석·보좌관회의에서 가야사(史) 연구와 복원을 지시한 것에 대해 학계에서는 연구가 활성화될 것이라는 기대와 유적 복원 속도전이 돼서는 안 된다는 우려가 교차하고 있다. 학계의 가야사 연구 현황과 이후 방향을 알아본다.○ 호남 동부도 가야 영역으로 밝혀져 197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가야사는 연구의 변방이었다. 고대 한반도의 가라(加羅·가야)국을 일본이 정복했다는 일본서기(日本書紀) 내용 등을 근거로 일본이 고대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을 아직 극복하지 못했던 시절이다. 1977년 경북 고령군 지산동 44호, 45호 고분의 발굴은 가야사 연구의 전환점이 됐다. 이 고분들은 우리나라 최초로 발굴된 순장묘로 뼈와 함께 토기, 철기가 대규모로 쏟아졌고, 이를 계기로 ‘가야 고고학’이 성립됐다. 비슷한 시기 일본서기를 우리 입장에서 해석한 천관우(1925∼1991)의 연구도 나왔다. 1990년대 중반에는 대왕(大王)이나 하부사리리(下部思利利)라고 새겨진 대가야계 토기가 발견돼 가야의 정치 체제에 대한 재조명이 이뤄지기도 했다. 호남 동부의 대부분이 한때 가야의 영역이었다는 것이 드러난 건 1990년대 이후다. 일제강점기에는 한 일본인 학자가 ‘상다리, 하다리, 사타, 모루’ 등 이른바 ‘임나4현’의 위치를 섬진강 유역으로 봤지만 이후에는 주목받지 못했다. 그러나 김태식 홍익대 역사교육과 교수는 이 지역이 전남 여수, 순천, 광양 일대일 것이라고 봤고, 2006년 순천에서 가야 고분군이 발굴되면서 설득력을 얻었다. 근래에는 전북 남원 장수 진안 임실 고분군이 가야의 것으로 드러났다. 김 교수는 “삼국사기에 우륵이 지은 가야금 곡 12개의 이름 중 10개는 사실 지명(地名)인데 그중 4개는 호남 지방”이라고 말했다.○ 섣부른 복원보다 발굴과 연구가 먼저 주보돈 경북대 사학과 교수는 “가야사는 고고학에 대한 의존도가 굉장히 높아 문헌사와 고고학을 결합하는 학제적인 연구가 중요하다”며 “새로운 고고학적 자료의 증가에 따라 가야인의 삶과 죽음을 밝혀내는 연구가 필요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문화재청에 따르면 산하 가야문화재연구소가 현재 가야사 관련 발굴조사 중인 곳은 경남 김해 봉황동 유적과 창녕 교동·송현동 고분군이다. 금관가야의 왕궁 추정지로 여겨지는 봉황동 유적은 2015년 9월부터 발굴하고 있다. 비화가야 최고지배층이 묻힌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은 2014년 3월부터 발굴조사가 진행 중이다. 연구소는 비화가야와 아라가야 등 권역별 고분문화의 특징을 규명하는 한편 출토 유물을 분류해 신라, 백제 등 다른 문화권과 비교할 수 있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봉황동 유적 발굴조사 성과를 바탕으로 금관가야 시대 당시 고도(古都)를 재현하는 복원 연구도 계획하고 있다. 김세기 대구한의대 교수(고고학)는 “남원, 진안, 장수, 순천 등 호남지역에도 규모 있는 가야유적들이 산재한 만큼 가야사 연구, 복원을 폭넓게 진행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학계는 가야사 복원은 발굴조사와 같은 기초연구가 제대로 이뤄지는 게 우선이라고 보고 있다. 섣부른 복원은 유적의 의미를 훼손하는 부작용을 낳을 수 있다는 지적이다. 익명을 요구한 한 고고학자는 “기초연구에 비해 복원에 더 중점을 두면 속도전 논란을 빚은 경주 월성의 전철을 밟을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한국고대사학회장인 하일식 연세대 사학과 교수는 “역사 연구가 현실문제 해결의 도구가 돼서는 안 된다”며 신중한 접근을 강조했다. 조종엽 jjj@donga.com·김상운·김배중 기자}

‘6월 항쟁의 본질이 6·29선언?’ 국립 근현대사 박물관인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이 6월이 거의 다 지나간 26일에야 6월 항쟁 30주년 기념 특별 전시를 시작하는 것으로 드러나 논란이 일고 있다. 이 전시는 6월 항쟁 전시임에도 이달 중 닷새밖에 열리지 않는 데다, 6월 항쟁의 시작을 알린 ‘6·10국민대회’가 아니라 군사정부의 정치적 양보인 ‘6·29선언’ 30주년을 사흘 앞두고 시작하기 때문이다. 6월 항쟁 본전시가 아니라 관련 학술대회가 9일 개최된다. 4일 낮까지도 대한민국역사박물관 홈페이지 등에는 6월 항쟁 전시를 연다는 공지가 없었다. 역사박물관 관계자는 전화 통화에서 “26일부터 9월 3일까지 ‘민(民)이 주인 되다’라는 제목의 6월 항쟁 기념전을 열 계획”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현대사를 전공한 한 교수는 “1987년 6월 항쟁은 10일부터 29일까지 벌어졌지만 학계나 정부 모두 국민적 항쟁의 시작일인 10일을 기념해 왔는데 다른 해도 아니고 30주년에 때맞춰 전시를 열지 않는다는 게 이해가 안 간다”며 “박물관 측이 항쟁의 결과로 집권자가 양보한 6·29선언을 6월 항쟁의 본질로 보고 있다면 시각에 문제가 있다”고 말했다. 역사박물관 측은 이런 비판에 대해 국방부와 공동으로 11일까지 여는 ‘유해발굴감식단 전시’를 들며 국방부 탓을 했다. 박물관 관계자는 “원래 6월 항쟁 전시를 이달 초부터 시작하려 했는데 국방부가 ‘6월 초까지는 유해발굴감식단 전시를 해야 한다’고 요청했다”며 “사실 거부를 많이 했는데 국방부가 강하게 요구해서 뒤로 밀렸다”고 말했다. 11일 ‘유해발굴…’ 전시가 끝난 뒤 전시물을 해체하고 새로 설치해야 하기 때문에 6월 항쟁 전시는 이달 말에야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국방부 측의 해명은 다르다. 한 관계자는 “국방부는 유해발굴 사업을 널리 알리기 위해 접근성이 좋은 역사박물관 전시를 추진했다”며 “박물관 측과 양해각서(MOU)를 맺고 합의해 전시를 기획한 것이고, 국방부가 강요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6월 항쟁 전시에 국방부 탓을 하는 건 이해할 수 없다”고 밝혔다. 역사박물관의 관람객 수가 2015년을 기점으로 이전보다 20∼30%가량 급감한 것으로 드러나 박물관 측의 기획에도 문제가 있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박물관은 2012년 12월 개관했으며 관람객 수는 2013년과 2014년 각각 약 105만, 115만 명이었지만 2015년과 2016년에는 81만여 명씩으로 줄었다. 박물관 측은 “2015년에는 메르스(MERS·중동호흡기증후군)의 여파로 관람객이 줄었던 것”이라고 말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여드름, 부푸는 가슴, 생리…. 사춘기를 맞는 소녀들이 어떤 몸의 변화를 겪게 되는지, 변화가 일어나는 이유는 무엇이고 어떻게 대처할 수 있는지 궁금해할 만한 것을 일러스트와 함께 담았다. 이 책은 소녀들이 자신의 변화와 성장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도록 이끈다. 장 제목은 ‘나를 먼저 사랑하기’ ‘변화를 즐기기’ ‘현명하기’ ‘지금 행복하기’다. 저자 본인도 사춘기 딸의 엄마로 디자인을 전공한 교수다. 300컷이 넘는 스텐실 기법 일러스트, 감성적인 그림과 비유가 인상적이다. 정확성을 기하기 위해 전문의와 청소년성문화센터 등의 감수를 받았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줄리언 반스는 맨부커상을 받은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로 국내에도 적지 않은 팬이 있는 영국 소설가다. ‘시대의 소음’은 ‘예감은…’ 이후 5년 만인 2016년 내놓은 장편소설이다. 20세기의 대표적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인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1906∼1975)의 생애를 재구성했다. 소설은 쇼스타코비치가 여행 가방을 종아리에 기대 둔 채 초조하게 승강기 옆에 서 있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스탈린 정권의 눈 밖에 난 그는 한밤중에 들이닥치는 비밀경찰에 가족 앞에서 잠옷 바람으로 끌려가고 싶지 않아 그렇게 서 있는 참이다. 소설의 1, 2, 3장은 각각 “그가 아는 것은 그때가 최악의 시기였다는 것뿐이다” “…지금이 최악의 시기라는 것뿐이었다” “…지금이 그 어느 때보다도 나쁜 최악의 시기라는 것뿐이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쇼스타코비치는 평생 소비에트 국가로부터 환대와 비난을 동시에 받았다. 소설에서 쇼스타코비치는 열아홉 살에 쓴 첫 교향곡으로 세계적인 인정을 받고 성공을 거듭하다가 스탈린 앞에서 연주 실수를 한 탓에 음악을 금지당하고 목숨마저 위태로운 상황에 빠진다. 소비에트 대표단의 일원으로 미국에 건너가 융숭한 대접을 받지만 자신이 쓰지도 않은 연설문에서 자신의 우상인 러시아 출신의 미국 작곡가를 비판하게 된다. 이후 스탈린의 부름으로 명예를 회복하지만 원치 않았음에도 공산당 가입을 강요당한다. 노년이 된 쇼스타코비치는 “늙어서 젊은 시절에는 가장 경멸했을 모습이 되는 것이 우리의 운명이다”라고 독백한다. 그러나 저자는 쇼스타코비치를 일신의 안전을 위해 체제와 타협한 기회주의자가 아니라, 치열한 내적 갈등 속에서 자신의 예술을 끝까지 추구한 인물로 그린다. “예술은 모두의 것이면서 누구의 것도 아니다. 예술은 모든 시대의 것이고 어느 시대의 것도 아니다. 예술은 그것을 창조하고 향유하는 이들의 것이다. 예술은 귀족과 후원자의 것이 아니듯이, 이제는 인민과 당의 것도 아니다. 예술은 시간의 소음 위로 들려오는 역사의 속삭임이다.”(본문 중에서)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안중근 의사(1879∼1910)가 1910년 3월 중국 뤼순(旅順) 감옥에서 순국하기 직전 기요타(淸田) 간수과장에게 써 준 ‘일통청화공(日通淸話公)’이라는 글씨가 한국학중앙연구원(한중연)에 기탁됐다. 한중연은 이인정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민화협) 공동의장이 올 4월 K옥션 경매에서 2억9000만 원에 낙찰받은 안 의사 유묵을 한중연 장서각에 기탁했다고 1일 밝혔다. ‘일통청화공’은 ‘항상 맑은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이란 뜻으로 비록 감옥에 있었지만 간수과장이 날마다 맑은 이야기를 나누었던 상대임을 표현한 것이라고 한중연은 설명했다. 유묵 왼쪽에는 약지가 잘린 안 의사의 왼손 손도장이 찍혀 있다. 한중연 관계자는 “안 의사는 교도소에서 교도소장, 담당 간수, 통역관 등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는데, 인연을 맺은 이들 중 간수과장과의 에피소드는 지금까지 전해지는 내용이 많지 않았다”며 “이번 유묵은 추가 연구의 단서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안 의사의 유묵은 50여 점이 남아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중 26점이 보물로 지정돼 있는데, 이번에 기탁된 유묵은 아직 문화재로 지정되지는 않았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책을 고르는 것도 삶과 같아요. 부모들이야 빨리 정답을 알려주고 싶겠지만 정답 같은 건 없습니다. 중요한 건 아이가 책을 고르고 아끼며 자신의 취향을 만들어가는 과정입니다.” 어린이 청소년 문학 작품 100여 권을 번역한 아동문학 평론가 최윤정 씨(59)가 2000년 냈던 평론서 ‘슬픈 거인’의 개정판을 최근 출간했다. 개정판에는 ‘어린이 문학 속의 페미니즘’을 비롯해 새로 쓰인 글이 담겼다. 어린이·청소년 문학 출판사 ‘바람의 아이들’의 대표이기도 한 최 씨를 최근 만났다. “서점에서 좋은 책만 골라 한 번에 많이 사고 싶은 건 부모의 편의고, 부모의 욕심일 뿐입니다. 서점 매대에 잘 보이게 전시돼 있는 책이 좋은 책이라는 보장도 없습니다.” 최 씨는 “서점보다 도서관에 가서 아이와 함께 책을 고르라”며 “사서의 도움을 받아도 좋고, 아이가 좋아하는 책의 저자와 출판사를 적어두었다가 같은 저자, 출판사의 책으로 넓혀가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말했다. 그는 우리 아동문학이 과거 계몽이나 순수한 동심을 강조하는 데만 머물렀다가 리얼리즘에 치우치기도 했지만 지금은 상당히 다양하고 풍부해졌다고 했다. 그러나 “상업주의라는 ‘어린이 문학의 적’은 모양만 달라졌을 뿐 여전하다”고 그는 지적했다. “과거 ‘편집부 엮음’이라고 편자 명이 달린, 품질에 대해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아동문학 전집 출판이 성행한 적이 있어요. 요즘은 그 정도는 아니지만 일부 전집이 기획 상품처럼 만들어지고 유통되는 문제는 여전합니다.” 최 씨는 “그런 책은 출판사 입장에서 빨리 일정 수량의 세트를 팔아치워야 하는 물건”이라며 “그러나 독자에게 책은 빨리 사둬야 할 필요가 전혀 없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요즘에는 유아용품 준비하는 것처럼 임신 몇 개월이면 수십만 원짜리 아기용 그림책 전집을 들여놓아요.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또 새 전집으로 교체하는 일을 반복하지요. 그런데 부모는 ‘사 줬다’는 데만 만족할 뿐 정작 아이가 어떤 책을 어떻게 읽고 좋아하는지에는 관심이 없는 경우가 많아요.” 최 씨는 “아이가 겉으로 과학 책을 좋아하는 것처럼 보여도 사실은 시를 좋아하는 성향일 수 있다”며 “아이가 책을 천천히 소화하고 다른 책에 관심을 갖는 과정을 반복하면서 자기 취향을 찾도록 도와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아동출판이 지나치게 상업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 학교 도서관 활성화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학교 도서관 수가 적지는 않아요. 그런데 도서관 직원분들 얘기를 들어보면 예산이 컴퓨터 설치 등에 많이 쓰이면서 도서 구입은 축소되고, 독서 교육도 침체된 것을 체감한다고 합니다. 학교 도서관 활성화는 출판이 상업주의에 쏠리는 것을 견제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입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지난 정권의 ‘문화계 블랙리스트’는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는 불행한 일입니다. 문화예술이 낙후돼 있으면 군사·경제적으로 강국이라도 만년 후진국을 면치 못합니다.” 소설가 이외수 씨(71·사진)가 2005년 ‘장외인간’ 이후 장편소설로는 12년 만에 신작 ‘보복대행전문주식회사’(해냄)를 냈다. 30일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그는 “이번 소설이 원칙과 도덕성, 상식이 회복되는 나라가 되는 데 기여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소설은 식물과 대화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수목원을 운영하는 서른 살 청년이 주인공이다. 그는 식물들의 제보와 도움을 받아 동물학대와 뇌물수수, 공금횡령 등의 사회악을 밝혀내고 응징하기 시작한다. 이 씨는 ‘식물과의 교감’이라는 설정에 대해 “독자들에게 새로운 세계를 열어 주리라고 생각했다”고 설명하면서 “내가 사실 달에 사는 지성을 가진 존재들과 ‘채널링(외계인과의 텔레파시)’을 10여 년 동안 하면서 대화를 나눴다”고 믿기지 않는 말을 하기도 했다. 소설은 지난해 9월부터 카카오페이지에서 먼저 모바일과 웹으로 연재됐다. 이 씨는 “사람들이 종이책을 너무 읽지 않는 시대가 돼 다른 방식으로도 독자를 확보하고자 연재를 결심했다”고 말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추송 장덕준 형은 본사의 특파원으로 작년 10월경에 간도 방면의 험악한 형세를 조사키 위하여 출장하였다가 행방이 불명하여 탐지할 도(道)가 두절되다.” 일제강점기 동아일보는 일본 왕실의 ‘3종 신기’를 비판해 정간당했다가 복간되자마자 이튿날(1921년 2월 22일자) 1면 머리기사로 ‘추송 장덕준 형을 사(思)하노라’라는 논설을 실었다. 동아일보 논설기자였던 장덕준 선생(1892∼1920·건국훈장 독립장)은 1920년 10월 ‘간도참변(경신참변)’이 시작되자 이를 취재하기 위해 현지로 떠났다 일본군에 피살됐다. 간도참변은 봉오동 전투 등에서 독립군에 대패한 일본군이 간도의 독립군 근거지를 파괴하면서 조선인 3700여 명을 무차별 학살한 사건이다. 장 선생은 간도에서 “나의 동포를 해하는 자가 누구이냐고 쫓아와보니 우리가 상상하던 바와 조금도 틀리지 않는다”고 첫 소식을 보내왔다.(동아일보 1925년 8월 29일자) 독립기념관과 국가보훈처는 ‘6월의 독립운동가’로 장덕준 선생을 선정하고 6월 1∼30일 독립기념관 야외 특별기획전시장에서 관련 사진 등 추모전시를 연다. “…밤중이 되어 일본군이 와서 말하기를 상관이 부르니 같이 가자고 하기에 장덕준은 의심이 들어 밤중이니 가지 않겠다고 하였으나 일본군은 말(馬)까지 가지고 다시 와서 가자고 강요하여 하는 수 없이 따라간 것인데 그 후로는 종적을 알 수 없게 되었다. 일본군은 장덕준을 미워하고 기피하여 그날 밤 밖으로 유인하여 암살한 것이 틀림없다.” 상하이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의 1921년 10월 28일자 기사다. 장 선생의 최후에 대해서는 함경북도 나남의 헌병대장인 스즈키 다케오미(鈴木武臣)가 조선헌병대사령관 마에다 노보루(前田昇)에게 보고한 일본군 측 기록도 있다. “(1920년 11월) 8일 밤 국자가(局子街) 우시장 여인숙 관동여관에 투숙하고 다음 날 아침 일찍 장덕준으로 사료되는 조선인이 1명 나갔다는데….” 동아일보는 1930년 4월 1일 창간 10주년을 기념하면서 장 선생의 죽음을 인정하고 순직자로 추도식을 거행했다. 장 선생은 황해도 재령군의 빈농 집안에서 태어나 인촌 김성수 선생과 함께 ‘육영회’(인재 양성을 위해 조선 학생을 외국에 유학시키는 모임) 설립을 추진했고, 동아일보 창간 발기인으로 참여하는 한편 황해도로 주금(株金) 모집에 나서기도 했다. 창간 뒤에는 논설반원과 통신부장, 조사부장을 겸직했다. 장 선생은 1920년 4월 2∼13일 ‘조선소요에 대한 일본여론을 비평함’이라는 논설로 3·1운동을 왜곡하는 일본 여론을 비판했고, 1920년 6월 5차례에 걸쳐 황해도 평안도 일대의 조선인 차별 현장을 다룬 르포 기사의 필자 ‘삼민생(三民生)’도 장 선생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장 선생의 동생인 설산 장덕수(1894∼1947)는 동아일보 초대 주간을 지냈다. 6월의 독립운동가 공훈 내용을 작성한 정진석 한국외국어대 명예교수는 “당시 동아일보가 정간 중이었으므로 취재를 해도 보도할 지면조차 없는 상태였지만 장 선생은 위험을 무릅쓰고 취재를 나섰다가 참변을 당했다”며 “한국 언론사상 최초의 순직 기자임에도 ‘국자가 관동여관’의 현 위치를 비롯해 마지막 행적이 채 드러나지 않아 아쉽다”고 말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공룡 시대부터 현대까지 꿀벌과 관련된 이모저모를 담았다. 꿀벌은 옛날부터 인류와 가까운 관계였다. 기원전 7000년 그려진 스페인의 아라냐 동굴 벽화에는 벌집에서 꿀을 따는 사람과 꿀벌의 모습이 있다. 고대 그리스 신화에서 제우스신은 꿀을 먹고 자랐다. 나폴레옹은 프랑스 황제에 오른 뒤 왕국을 상징하는 문장으로 꿀벌을 선택했다. 꿀벌의 생김새와 생태, 꽃가루를 어떻게 옮기는지, 벌통의 구조, 꿀벌의 적, 벌침, 꿀벌과 관련된 기네스 기록, 꿀로 만든 요리 등 어린이들이 흥미로워할 만한 내용이 다채롭다. 커다란 판형에 시원하게 담긴 감각적인 삽화가 인상적이다. 폴란드에서 ‘가장 아름다운 책’ 상을 받았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김영하가 돌아왔다. 현대적 감수성으로 삶의 단면을 예리하게 포착해 온 작가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무도’ 이후 7년 만에 낸 소설집이다. ‘아이를 찾습니다’(제9회 김유정 문학상 수상작) ‘옥수수와 나’(제36회 이상문학상 수상작) ‘슈트’ ‘최은지와 박인수’ 등을 비롯해 중단편 7편이 실렸다. 그의 소설은 시니컬하지만 절묘한 농담이 매력이었는데, 이번 소설집은 ‘김영하가 이렇게 분위기가 어두운 작가였나’ 하는 생각이 들 작품이 반이다. 작품들은 ‘상실’이나 ‘탈출 불가능함’을 직간접적인 테마로 하고 있다. 표제작의 주인공 현주는 아빠와의 관계에 갇히고, 아빠의 죽음은 그를 “희귀 언어의 마지막 사용자”로 만들어버린다. 책 마지막에 실린 ‘신의 장난’은 한 편의 부조리극이다. 작가는 우리의 삶이 주인이 떠난 방에 갇혀 굶어 죽어가는 고양이들의 그것과 뭐가 다른가 묻는다. 인간의 삶은 순식간에 질 나쁜 농담이 돼 버린다. “그해 4월엔 우리 모두가 기억하는 참혹한 비극이 있었다. … 깊은 상실감 속에서도 애써 밝은 표정으로 살아가고 있는 이들이 세상에 많을 것이다. … 그냥 그들을 느낀다. 그들이 내 안에 있고 나도 그들 안에 있다.” 저자는 ‘작가의 말’에서 2014년 겨울 발표한 ‘아이를 찾습니다’를 기점으로 그 전후 자신의 삶과 소설이 모두 달라졌다고 말했다. 세월호 참사가 작가를 변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작가는 “이전에 쓴 세 편의 주인공들은 상실을 인정하지 않고 자기 자신을 위안하기 위한 연기를 하고 있지만 ‘아이를 찾습니다’ 이후의 주인공들은 자위와 연기는 포기한 채 필사적으로 ‘그 이후’를 살아가고 있다”고 말했다. ‘인생의 원점’ ‘신의 장난’ ‘오직 두 사람’이 그 뒤에 발표한 것들이다. “이제 우리도 알게 되었습니다. 완벽한 회복이 불가능한 일이 인생에는 엄존한다는 것, 그런 일을 겪은 이들에게는 남은 옵션이 없다는 것, 오직 ‘그 이후’를 견뎌내는 일만이 가능하다는 것을.”(작가의 2015년 ‘김유정 문학상’ 수상 소감에서)조종엽 기자 jjj@donga.com}

“2005년 한국에 왔을 때 ‘위안부’ 할머니들의 수요 집회에 갔었지요. 할머니들은 조용히, 꼿꼿하게 정면으로 일본대사관을 바라보고 계시더군요. 할머니들의 침묵은 어떤 목소리보다 크게 느껴졌습니다.” 1997년 미국에서 소설 ‘종군위안부’(Comfort Woman)를 내 1998년 전미도서상을 받은 한국계 소설가 노라 옥자 켈러 씨(52)가 대산문화재단이 주최하는 서울국제문학포럼 참석차 최근 방한했다. 25일 만난 그는 “할머니들은 ‘역사는 덮으려고 해도 덮을 수 없다. 내가 바로 여기 있다’고 외치는 것 같았다”고 말했다. 켈러 씨는 이날 본보 취재진과 함께 서울 주한 일본대사관 앞 평화의 소녀상을 찾았다. 그는 소녀상을 처음 봤다고 했다. “할머니들처럼 움츠리지 않고, 당당하게 일본대사관을 응시하고 있네요.” 하와이에서 자란 그는 1993년 하와이대 인권 심포지엄에서 황금주 할머니(2013년 별세)의 강연을 듣고 위안부 문제를 알게 된 뒤 소설을 쓰게 됐다고 했다. “한국사에 대해서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증언을 듣고 숨이 멎는 듯한 충격을 받았어요. 그 뒤 할머니들의 증언 번역본을 읽으면서 오랜 침묵의 무게를 느꼈고, 그 트라우마가 다음 세대에 이어진다는 것도 알게 됐습니다.” 켈러 씨는 2015년 12·28 한일 위안부 합의에 대해 “실망스러웠다. 특히 ‘불가역적 해결’이라는 표현은 할머니들에게 다시 침묵하라는,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말했다. 그는 1960, 70년대 한국의 미군 기지촌을 배경으로 사생아, 혼혈인이 성매매로 유입되는 과정을 그린 소설 ‘여우소녀’(Fox Girl)를 2002년 냈다. “위안부나 기지촌 여성들 모두 오래 잊혔다는 점에서 유사합니다. 세대가 바뀌었는데도 같은 문제가 벌어지는 걸 다루고 싶었습니다.” 그는 “전쟁이 일어났을 때 군인이 얼마나 죽었는지, 지정학적으로 어떤 변화가 생겼는지는 가감 없이 알려지지만 여성과 어린이, 약자들이 얼마나 힘들게 살았는지는 잘 다뤄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하와이에서 고교 교사로 작문을 가르치고 있는 그는 일을 하고 자녀를 돌보느라 글을 쓸 시간을 내기 힘들었다고 했다. 곧 둘째 딸이 고교를 졸업해 다시 소설을 쓸 계획이라고 한다. 1980년대 하와이의 해변 휴양지 와이키키에서 벌어진 성매매, 인신매매 문제를 다룬 작품을 구상하고 있다. ‘종군위안부’와 ‘여우소녀’에 이어 다시 약 20년 뒤를 배경으로 하는 셈이다. 그는 “이 역시 당시에는 쉬쉬하면서 넘어갔던 문제”라며 “소설을 통해 여성이 입은 피해뿐 아니라 여성이 자신의 주체성을 어떻게 찾아가는지 묘사하고 싶다”고 말했다. “(비극을 막기 위해서는) 진실을 부정하지 않는 것이 기본입니다. 전쟁 속에서 여성을 희생시키는 일은 크건 작건 여러 곳에서 자행됐습니다. 어느 누구도 위안부 할머니들에게 침묵을 강요할 수는 없습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쿠바의 전설적인 혁명가 체 게바라의 아들인 시인 오마르 페레스(53·사진)가 대산문화재단이 주최하는 ‘2017 서울국제문학포럼’ 참석차 방한했다. 그는 23일 ‘우리와 타자’라는 세션에서 ‘우리, 그리고 그들 인식하기’라는 발표를 한 뒤 “많은 경우 자기가 생각하는 것을 제대로 말하지 못할 때 오해가 생긴다”며 “생각을 그대로 표현하는 능력을 키워야 한다”고 말했다. 타악기 연주자로도 활동하고 있는 그는 이날 서울 종로구 세종대로 KT빌딩에서 열린 ‘세계문학 교류의 밤’ 행사에서 한국 재즈밴드와 즉흥 협연을 하기도 했다. 오마르 페레스는 니콜라스 기옌 문학상, 쿠바비평가상 등의 문학상을 받았고, 시집 ‘신성한 어떤 것’(1996년) ‘칸시온과 레타니아’(2002년) ‘링구아 프랑카’(2009년) 등을 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꼭 제 어머니여서가 아니라, 한국 작가의 동상이 러시아에 세워진다니 감개가 무량합니다. 이번 일을 계기로 한국과 러시아에 문화교류가 많아지기를 기대합니다.”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대에 소설가 박경리 선생(1926∼2008)의 동상(사진)이 건립된다. 김영주 토지문화재단 이사장은 23일 기자간담회에서 “러시아에 한국 작가가 잘 알려지지 않았는데, 박경리 선생이 소개되면 많은 사랑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번 동상 건립은 2013년부터 한러대화 문화예술분과포럼의 양국 관계자들이 한러 우호 증진 차원에서 추진해 온 것이다. 이 단체는 한국과 러시아 수교 20주년이었던 2010년 양국의 민간 협력을 강화하기 위해 조직된 민관산학협의체다. 한러대화는 러시아 작가동맹의 요청에 따라 러시아 국민시인인 푸시킨의 동상을 2013년 11월 서울 중구 롯데호텔 앞에 건립했다. 사무국은 “러시아에 한국인 동상이 건립되는 건 이번이 처음”이라고 밝혔다. 박경리 선생 동상 건립이 합의된 뒤 한러대화는 박 선생의 문학세계를 러시아에 알리는 작업을 해왔다. 대하소설 ‘토지’ 번역에 착수해 지난해 10월 1권이 러시아에서 출판됐고, 생애와 작품을 조명한 책 ‘박경리, 넓고 깊은 바다처럼’을 올 2월 한국어와 러시아어 합본으로 제작해 상트페테르부르크대에 전달했다. 이 대학은 지난해 12월부터 박 선생에 관한 온라인 전시를 열고 있으며, 올해 1학기부터 동양학부에 관련 강좌를 열고 특강을 진행 중이다. 동상은 토지문화재단에서 제작을 맡았고 서울대 권대훈 교수가 만들어 2014년 말 이미 완성됐다. 기단과 좌대는 러시아 현지에서 만들기로 했다. 동상은 상트페테르부르크대 본관 뒤 정원에 들어설 예정이다. 동상은 6월 러시아로 옮겨지지만 바로 설치되는 것은 아니다. N M 크로파체프 한러대화 러시아측 조정위원장(상트페테르부르크대 총장)은 이날 간담회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러시아를 방문하는 시점에 동상 제막식을 열 것”이라며 “올해 말까지 동상이 제자리에 설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2013년 푸시킨 동상이 서울에 건립될 당시에는 정상회담 참석차 방한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제막식에 참석했다. 문 대통령의 방러 계획은 아직 알려진 것이 없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길은 한강을 따라 간다. 우리가 향하는/산에서 발원해 서쪽으로 흐르는 강./오늘 아침 그 길은 강빛을 닮아 회청색,/황금색 줄무늬에 바람결. 팔월,/비 온 후 구름 자욱한 아침. 하늘은/옅은 회색. 햇살 반짝이는 길가 웅덩이/너무나 환해 세상을 떠받들고 있는 것 같아/열심인 젊은 수도승 꼿꼿한 자세처럼.”(로버트 하스, ‘백담사행 버스’ 전문) 서울국제문학포럼 참석차 최근 방한한 로버트 하스 미국 버클리 캘리포니아대 석좌교수(76)가 한국을 소재로 삼아 쓴 시 3편이 22일 번역 소개됐다. 하스 교수는 ‘인간의 소망(Human Wishes·1989년)’을 비롯한 시집을 냈으며 미국에서 계관시인으로 두 차례 추대됐고 퓰리처상을 비롯한 다수의 문학상을 받았다. 그가 쓴 한국에 관한 시는 ‘백담사행 버스’를 비롯해 석굴암 가는 길을 배경으로 쓴 ‘검은 머리 댄서를 위한 옷’, 6·25전쟁을 소재로 삼은 ‘판문점, DMZ를 다녀와서’ 3편이다. 번역은 정은귀 한국외국어대 교수가 맡았다. 하스 교수는 ‘판문점…’에서 ‘적어도 공동의 부끄러움을 느껴야 하는 인간들이 이러한 사실들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아무런 증거가 없어’라면서 전쟁으로 죽어간 사람들의 비극을 짚는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문화대혁명(문혁) 때도, 최근 30년간의 개혁개방 시기에도 중국은 정상적이지 않았지요. 앞으로도 그럴 겁니다.” ‘허삼관 매혈기’를 비롯한 작품으로 국내에도 팬 층이 두꺼운 소설가 위화(57)가 대산문화재단이 주최하는 서울국제문학포럼 참석차 방한했다. 22일 서울 종로구의 한 카페에서 만난 그는 “(중국의 정상 사회는) 과거에도 없었고, 미래에도, 적어도 내가 살아 있는 동안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중국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위화는 2006년 문혁이라는 암흑기와 돈이 지배하는 현대 중국의 초상을 비판적으로 그린 장편 ‘형제’를 펴냈다. 소설은 당국의 검열을 통과한 게 신기할 정도로 신랄하다. 당시 그는 인터뷰에서 “지금 중국 사회는 모든 것이 미쳐 있고 공허하며, 사람들은 돈을 번 뒤 무엇을 할지 모른다”고 했다. 11년이 지난 오늘날은 어떠냐고 물었다. “(돈을 벌고) 무엇을 할지가 명확해졌지요. 주식투자를 하고, 자식을 좋은 대학에 보내려 애씁니다. 집값이 오르니 사람들이 집에 투자하는데, 그러니 집값이 더 올랐습니다. 비정상을 정상이라고 받아들이면서 사는 듯합니다.” 위화는 22일 재출간된 ‘형제’(푸른숲)의 개정판 서문에서 “세상이 취했는데 홀로 깨어 있을 수는 없다”고 했다. “(세상이 아니라) 내가 비정상이라서 뭘 봐도 비정상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시대가 비정상적이면 작가로서는 쓸 소재가 많아지지요. (웃음)” 그는 풍자적인 자신의 소설처럼 뼈 있는 농담도 여럿 날렸다. “중국 인민은 지도자들과 함께 오염된 공기를 마신다는 데서 평등을 느끼고 있다” “북한이 미사일을 쏜다면 미국으로는 멀어서 못 쏠 것이고 그 목표는 첫째가 일본, 둘째가 중국이 될 것이기에 서울이 베이징보다 안전할 수 있다” 등이었다. “평범한 중국인들도 대부분 북한이 정상 국가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북한은 중-소 관계가 멀어질 때 소련의 편에 섰고, 1990년대 이후 중국에 의지하고 있지만 진정한 친구 관계는 아니라고 보지요.” 그의 산문집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는 당국의 검열로 중국에서 출간되지 못했다. 그는 날로 강화되는 중국의 검열에 대해 “전에는 (적어도) 내 소설은 중국에서 출간되는 데 문제가 전혀 없으리라고 생각했는데 최근에는 정상적으로 출판될지 자신하기 어렵다”고 했다. 그러나 그는 오늘날 중국 내부가 경제와 사상적으로 ‘어지럽기(亂)’ 때문에 당국의 통제는 어느 정도 필요하다고 했다. “개방 30년이 지나면서 혼란이 지속되고 있고, 갈등이 많이 쌓여 통제가 없으면 오히려 더 큰 혼란이 올 수 있습니다. 지금은 관리가 필요한 시기라고 생각합니다.” “내 작품이 만약 당장은 검열로 출간되지 못한다 해도 시간이 지나면 낼 수 있을 것이고 영영 못 내는 건 아니다”는 그의 말이 당국을 향한 ‘알리바이’인지 진심인지는 짧은 인터뷰로는 알기 어려웠다. 위화는 100년 전 중국과 현대 중국을 배경으로 한 소설 3편을 동시에 집필 중이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14일 오전 11시 45분경 박 군(고·故 박종철 씨)을 처음 보았을 때는 … 호흡곤란으로 사망한 것으로 판단됐으며 물을 많이 먹었다는 말을 조사관들로부터 들었다.”(동아일보 1987년 1월 17일자 보도에서) 서울대생 박종철 씨가 경찰의 물고문으로 숨졌음을 입증한 의사 오연상 씨의 증언이다. 6월 민주화운동의 도화선이 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진상을 밝혀내려는 언론의 노력을 조명한 책이 나왔다. 1987년 당시 5년차 기자로 동아일보 법조팀장이었던 황호택 동아일보 고문(전 논설주간)은 ‘박종철 탐사보도와 6월 항쟁’(블루엘리펀트)을 최근 출간했다. 고문치사 사건의 진상을 밝히는 데는 양심적인 관계자들의 증언과 폭로가 결정적이었지만 언론의 역할도 적지 않았다. 저자는 당시 취재기자, 수사 관련자와 제보자들을 다시 만나고 자료를 수집해 그 과정을 치밀하게 재구성했다. 동아일보는 당국의 보도지침을 무시하고 1987년 1월 15일자에 “대학생 경찰조사 받다 사망”이라는 기사를 5단으로 키워 박 씨의 얼굴사진과 함께 보도했다. 이어 16일자에는 부검 결과 ‘폐에서 출혈반이 발견됐다’ ‘피멍이 많이 발견됐다’는 것을 전하며 진상은 ‘고문치사’임을 알렸다. 19일자에는 1면 머리기사부터 6개면에 걸친 보도로 당국의 보도지침을 부쉈다. 언론 보도는 사건 관계자가 용기를 내도록 돕기도 했다. 부검의 황적준 국립과학수사연구소 박사는 일기에 “(16일자 동아일보를 보고) 사실이 밝혀지고 있다고 판단했고, 어떤 일이 있어도 감정서만은 사실대로 기술해야겠다고 결심”이라고 썼다. 동아일보가 그해 5월 22일자에 치안감을 비롯한 상급자들이 고문치사범 축소 조작을 모의했다는 것을 폭로한 보도는 결정타가 됐다. 이날 남시욱 당시 동아일보 편집국장에게 청와대 정무수석이 전화를 했다. “남 형 축하해. 귀지(貴紙)가 이겼어. 진상을 밝히기로 결정했어.” 책은 당시 언론이 미진했던 부분에 대한 반성도 담겼다. 고문 경찰 2명이 구속된 뒤 기자들은 그 가족들이나 검찰 수뇌부를 통해 범인이 축소됐는지 알아보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고, 약 3개월 동안 은폐조작의 진상이 감춰졌다. 저자는 사건과 관련된 새로운 사실도 일부 밝혀냈다. 경찰은 박 씨가 숨진 날 저녁 최환 서울지검 공안부장을 찾아와 “가족과 합의했다. 오늘 밤에라도 화장을 해서 유골 가루를 달라고 한다”고 거짓말을 했지만 당시 박 씨 가족에게는 죽음을 알리지도 않았다. 또 6월 항쟁 당시 민병돈 특전사령관이 “군이 시위를 진압해서는 안 된다”는 의견을 보안사령관을 통해 전두환 대통령에게 전했다는 사실도 인터뷰를 통해 처음으로 드러났다. 당시 보도는 오늘날 언론에도 가볍지 않은 메시지를 던진다. 황열헌 동아일보 기자는 다른 기자들이 ‘기사도 안 나갈 텐데, 뭐 하러 가느냐’고 하는 와중에도 박 씨의 시신을 화장하는 벽제 화장터를 취재해 ‘창(窓)―철아 잘 가그래이. 이 아비는 할 말이 없다이’(1월 17일자)라는 기사를 썼다. 이 기사는 수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고, 시위대의 플래카드에도 쓰였다. 남시욱 편집국장은 “만약 내가 어떻게 되더라도 박 군 사건은 끝까지 파헤쳐야 한다”고 부국장에게 당부했다. 동아일보 편집국 간부와 기자들도 보안사나 남산 국가안전기획부 지하실에서 고문과 구타를 당하던 서슬 퍼런 시절이었다. 저자 황호택 고문은 “사건 30년 만에 쓰는 후속 보도”라며 “민주화를 이룬 수많은 사람들의 피와 땀을 기록하려는 사명감으로 썼다”고 말했다. 심재철 고려대 미디어학부 교수는 책에 기고를 싣고 “동아일보가 당시 어떻게 한국 언론의 향도(嚮導) 역할을 했는지 파악할 수 있는 저서”라며 “언론인 고문 등 명백한 위협 앞에서 동아일보는 사인(死因)과 은폐조작의 전모를 밝히는 대특종을 했다”고 말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부장인 해리가 사망자를 알려주면…내일 판 교정지를 보며 마지막 수정을 해요. ‘완곡어법’을 써가면서. 알코올중독자는 ‘풍류를 즐길 줄 알았다’, 게이는 ‘개인 생활에 충실했다’, 튀는 게이한테는 ‘사생활을 만끽했다’….” 지난달 재개봉한 영화 ‘클로저’에서 신문사에서 부고 기사를 쓰는 주인공 댄(주드 로)이 앨리스(내털리 포트먼)에게 자기를 소개하는 부분이다. 국내 언론도 부고 기사에서는 고인이나 유족이 불편하게 느낄 수 있는 대목은 완곡하게 쓰는 게 보통이다. 고인을 죽음에 이르게 한 질병 명칭을 쓰지 않고 ‘노환(老患)’ ‘숙환(宿患)’이라고 쓰는 것도 그 예다. 최근 출간된 ‘부고의 사회학’(이완수 지음·시간의 물레)은 일간지 부고 기사에 담긴 사회적 가치관과 권력관계를 분석했다. 짧으면 몇 줄, 길어 봐야 200자 원고지 몇 장에 한 사람의 인생을 어떻게 모두 담을까. 고인이 저승에서 편지를 쓸 수 있다면 기자들의 메일함은 이런 내용으로 가득할 것 같다. “내 인생에서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니까!”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전쟁으로 미쳐버린) 아들은 내 주방용 손도끼로 사람을 죽였어요… 아침에 도끼를 가져다 다시 찬장에 넣어놓았더군요. 마치 스푼이나 포크를 다시 제자리에 갖다놓은 것처럼… 나는, 아들이 두 다리 없이 돌아온 그 엄마가 부러워요… 술에 취해 엄마에게 행패를 부려도요. 온 세상을 미워하고…” 소설 등 다른 글에 이렇게 말줄임표가 많았다면 다소 촌스럽고, 조금은 덜 다듬어졌다고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2015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저자(69)의 이 글에서 말줄임표는 저자가 집어넣은 것이 아니다. 1979년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며 벌어진 전쟁에 아들을 보냈던 어머니의 호흡이다. 인터뷰 중 말을 잇지 못하는 어머니의 고통과 흐느낌이 그대로 전해진다. 벨라루스 출신의 저널리스트이자 작가인 저자는 5∼10년간 수백 명을 인터뷰하는 방식으로 논픽션을 써 왔다. 이 책은 대표작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에 이어 여성과 소년병의 눈으로 전쟁의 잔혹함을 담았다. 아프가니스탄에 파병된 소련 병사 중 상당수가 아직 학생이었다. “사람들은 영화에서와는 전혀 다르게 죽어요. … 실제로는 머리에 총탄이 박히면 뇌가 터져 공중으로 날아가고, 머리가 터진 사람은 그걸 잡겠다고 달려가죠. 한 500m는 족히 달려요. 사람이 죽음이 구원이라도 되는 양 죽여 달라고 간청하는 걸 듣고 또 지켜보고 있느니…” 저자는 책을 내고 3년 뒤인 1992년 아프간 참전 군인과 자신이 인터뷰했던 유가족 어머니로부터 명예훼손으로 고발당했고 일부 유죄 판결을 받았다. 이듬해 열린 재판에서 저자는 말했다. “오늘 이곳 법정에 나와 계시기도 한, 그 어머니가 이런 이야길 했습니다. 아연(으로 만든) 관(棺)과 아들이 쓰던 칫솔…을 돌려받았다고요. 그게 아들이 전쟁터에서 가져 온 전부였던 겁니다. … 어떻게 하면 피가 정당화될 수 있을지 방법을 찾고들 계시나요?” 23∼25일 열리는 서울국제문학포럼 참석차 방한한 저자는 19일 서울 광화문 교보빌딩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소련은 아프가니스탄 전쟁이 정당하다고 속였다. 아프가니스탄 주민 100만 명 정도를 사살했지만 미디어는 입을 닫은 채 병사들을 영웅이라고만 치켜세웠다”고 말했다. 그는 “러시아 문학에 종사하는 사람으로서 힘이 있다면 당연히 아프가니스탄에 가서 진실을 보고 써야 한다고 생각했다”며 책을 쓴 동기를 밝혔다. 저자의 책에는 영웅은 안 나온다. 작고 평범한 이들의 고통만이 그득하다. 저자는 “국가는 ‘스몰 피플(작은 사람들)’을 이용하고 죽였고 또 이들이 죽이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이들의 역사는 간과되고 있다. 이들의 역사를 사라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 내 일”이라고 말했다. 그는 전쟁에서 아름다운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강조했다. “아직도 소비에트 선전선동의 잔재가 남아 있어 ‘무기를 든 사람이 멋있다’는 관념이 있습니다. 전쟁은 그 자체가 살인입니다.” 저자는 23일 오전 10시 반 광화문 교보빌딩 컨벤션홀에서 체르노빌 핵발전소 사고 피해자들을 담은 책 ‘체르노빌의 목소리’에 관한 글(‘미래에 관한 회상’)을 발표한다. “(취재할 때 만난) 나이든 여자분이 잊히지 않아요. ‘햇살도 쨍쨍하고, 꽃도 피었고, 쥐들도 멀쩡한데 내가 왜 이곳을 떠나야 하나요’라고 묻더라고요. 이건 우리가 알던 혼란스러운 전쟁이 아니고, 새로운 형태의 전쟁이라는 걸 깨달았습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이 소설을 쓰는 일을 거의 포기하려 했던 어느 날, (1980년) 5월 27일 새벽 군인들이 돌아와 모두를 죽일 걸 알면서 광주의 도청에 남았던 한 시민군, 섬세한 성격의 야학 교사였던 스물여섯 살 청년의 마지막 일기를 읽었다. … ‘하느님, 왜 저에게는 양심이 있어 이토록 저를 찌르고 아프게 하는 것입니까? 저는 살고 싶습니다.’ 그 순간 내가 쓰려는 소설이 어디로 가야 하는지 깨닫게 되었다. 어떻게든 폭력에서 존엄으로, 그 절벽들 사이로 난 허공의 길을 기어서 나아가는 일만이 남아 있다는 것을….” 소설가 한강 씨(47)가 5·18민주화운동 소재의 장편 ‘소년이 온다’(창비)를 쓰던 당시를 회고한 것이다. 출판사 창비는 5·18민주화운동 기념일인 18일을 앞두고 한 씨가 올 2월 노르웨이 오슬로의 ‘노르웨이 문학의 집’에서 했던 강연 전문을 소개했다. 한 씨는 이 강연에서 “인간의 잔혹함을 증명하는 자료들과, 다른 한편에서 인간의 존엄을 증명하는 자료들을 읽으면서 나는 분열을 겪고 내면의 투쟁을 치렀다”며 “언젠가부터 나에게 광주는 인간의 폭력과 존엄이 극단적으로 공존한 시간을 가리키는 보통 명사가 되어 있었다”고 말했다. 1970년 광주에서 태어난 한 씨는 1980년 1월 가족과 서울로 이사했지만 한 씨의 가족들은 5·18민주화운동의 의미를 당시에도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고 했다. 한 씨는 “어른들은 우리 남매에게 ‘밖에 나가서 광주에 대해 아무것도 말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며 “‘곧 무더운 여름이 끝나고 우리는 가을 속으로 들어가는데, 이 여름으로조차 끝내 넘어오지 못했던 사람들이 있다’고 생각했던 걸 기억한다”고 말했다. 한 씨는 어린 시절 스웨덴 동화 ‘사자왕 형제의 모험’을 읽었던 얘기를 꺼내며 강연을 시작했다.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이 쓴 이 책은 죽음을 맞은 형제가 ‘낭기열라’라는 세계에서 다시 눈을 뜨고 그 세계의 독재자에 맞서 싸우는 이야기가 담겼다. 한 씨는 “‘어떻게 그들은 그토록 서로를 믿고 사랑하는가, 그들의 사랑을 둘러싼 세상은 왜 그토록 아름다우며 동시에 잔인한가’를 생각하며 오래 울었다”고 말했다. 한 씨는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가 절망하는 거라고, 존엄을 믿고 있기 때문에 고통을 느끼는 것이라고, 우리의 고통이야말로 열쇠이며 단단한 씨앗이라고, 열두 살의 나에게 이제야 말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다음은 강연 전문이다.◇여름의 소년들에게2017년 5월한강1. 오랫동안 사실과 다르게 기억하고 있던 것들을 뒤늦게 깨닫고 놀라는 때가 아마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나에게는 린드그렌의 책 『사자왕 형제의 모험』을 읽은 시기가 그런 이상한 혼돈을 주었다. 이 책을 1980년에 읽었다고 최근까지 굳게 믿어 왔는데, 이 강연 원고를 쓰기 위해 개정판을 사면서 알게 되었다. 이 책이 한국에서 처음 번역되어 출간된 것이 1983년이었다는 것을. 나의 기억이 틀렸다는 게 믿기지 않아 번역자의 서문까지 읽고 나서야 내 착각을 인정하게 되었다. 서문에 따르면 번역자 김경희는 1982년 유학생 신분으로 스톡홀름에 머물던 중 당시 일흔네 살이던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의 아파트를 찾아갔다. 좋아하던 작가를 처음 만나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쩔쩔매는 번역자를 린드그렌은 밝고 따뜻하게 맞아 주었다. 김경희는 이렇게 그 순간을 묘사한다. <나를 린드그렌 할머니는 마치 친손녀처럼 안아 주었습니다. 겁에 질려 뛰어든 칼을 푸근히 감싸 안던 마티아스 할아버지처럼. 그리고 린드그렌 할머니는 맑고 다정한 눈으로 내 얼굴을 들여다보며 말했습니다. “꽤나 멀고도 낯선 나라에서 온 이 유학생에게 웬일인지 아주 가깝고도 낯익은 느낌이 드네요. 그 나라에도 내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는 어린이들이 있거든 나 대신 얼마든지 들려줘요.”> 두 사람이 긴 대화를 나눈 뒤 김경희가 시내 공원 모퉁이의 그 아파트를 나온 것은 저녁 7시였다. 그들의 이 만남은 1982년 1월에 이루어졌고 이듬해 7월 20일 이 책이 한국에서 출간되었다. 그러니까 내가 이 책을 읽었던 것은 바로 그 여름이었다. 1980년이 아니라 1983년의 여름. 아홉 살이 아니라 열두 살의 여름. 비록 연도에는 혼동이 있었지만, 그 계절의 감각만은 또렷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무더운 오후에 이 책을 처음으로 손에 쥐었다. 수유리 언덕배기 집의 조그만 내 방에서, 서늘한 방바닥에 배를 대고 누워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자세가 불편하게 느껴지면 일어나 앉았다가, 땀이 흐를 만큼 더워지면 다시 차가운 바닥에 엎드려 가며, 마지막 장에 다다를 때까지 멈추지 못하고 읽어 갔다. 그러니 나에게 남은 의문은 이것들이었다. 왜 나는 그해가 1980년이었다고 철석같이 믿어 왔을까? 1980년과 1983년의 여름들 사이에 어떤 공통점이 있는가? 그것이 『사자왕 형제의 모험』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을까? 왜 그토록 고통스러운 열정으로 나는 이 책에 빠져들었을까? 나는 1970년 11월에 광주에서 태어났다. 내가 아홉 살이던 1980년 1월에 가족과 함께 서울로 올라왔는데, 문학 교사이자 젊은 소설가였던 아버지가 수도에서 글만 쓰면서 새로운 삶을 살겠다고 결심하며 직장을 그만둔 것이 계기였다. 나무와 흙으로 지어 검푸른 기와를 올리고 문과 창문에는 유리 대신 하얀 종이가 발라진 정든 한옥을 떠나, 서울 외곽의 수유리 언덕에 있는 양옥집으로 옮겨 갔다. 가족 모두가 새로운 삶에 차츰 적응해 가던 5월 17일에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그 전해인 1979년 10월, 18년 동안의 군부 독재를 이끌었던 대통령 박정희가 암살되고, 민주주의를 열망하던 시민들이 거리로 뛰쳐나온 지 7개월 만의 일이었다. ‘서울의 봄’이라고 불린 그 시기를 틈타 또 한 번의 쿠데타를 일으킨 이른바 ‘신군부’ 세력이 마침내 권력의 전면에 등장한 것이다. 불과 4개월 전, 사소하고 다소 즉흥적인 이유로 나의 가족이 떠나온 도시, 내가 태어나 유년을 보낸 바로 그곳, 그때까지 그저 작고 평범한 교육 도시였을 뿐인 그곳에서 계엄에 불복종하는 항쟁이 일어난 것은 그다음 날인 5월 18일이었다. 그로부터 다시 이틀 뒤 오후 1시, 수많은 시위 군중들이 모인 도청 앞 광장에서 군대는 집단 발포를 했고, 이후 생존을 위해 시민들이 무장하며 ‘광주 공동체’가 태어났다. 짧고 평화로웠던 시민 자치가 이루어지던 도청으로, 탱크와 기관총으로 무장한 군인들이 되돌아온 것은 5월 27일 새벽이었다. 신군부가 언론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광주를 제외한 다른 지역의 사람들은 대부분 그 일을 폭동이자 내란으로 이해했다. 그러나 나의 가족은 광주에 친지와 친척, 친구 들을 두고 왔기 때문에 그 일의 의미를 처음부터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학살이자 항쟁이었던 그 열흘의 시간. 평범한 사람들이 총상자들을 살리기 위해 끝없이 줄을 서서 헌혈을 하고, 시장에서 음식을 나누고, 무고하게 살해된 자들을 위한 장례를 날마다 함께 치르며 버텼던 절대 공동체. 어른들은 우리 남매들에게 말했다. ‘밖에 나가서 절대로 그런 말을 하면 안 된다. 광주에 대해 아무것도 말해서는 안 돼.’ 그렇게 그 일은 나에게 영영 숨겨야 할지도 모를 무거운 비밀이 되었다. 그러나 그 생각이 자꾸 떠오르는 것을 떨칠 수는 없었다. 그해 여름이 지나갈 무렵 내가 문득 생각했던 것을 기억한다. 이제 곧 이 무더운 여름이 끝나고 우리는 가을 속으로 들어가는데, 이 여름으로조차 끝내 넘어오지 못했던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그것은 어떤 정치적 각성이라기보다, 죽음이라는 것에 대해 처음으로 진지하게 생각하게 된 순간이기도 했다. 그 후 이 년이 흐른 1982년, 아버지가 광주에서 사진첩 한 권을 가져왔다. 증언을 위해 유족들과 생존자들이 비밀리에 만들어 유통시켰던 책이었다. 이때의 기억을 나는 『소년이 온다』의 에필로그에 이렇게 썼다. <그 사진집을 아버지가 집으로 가져온 것은 이년 뒤 여름이었다. 누군가를 조문하러 그 도시에 내려갔다가 터미널에서 구했다고 했다. (…) 어른들끼리 사진집을 돌려본 뒤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아버지는 그 책을 아이들이 보지 못하도록 안방의 책장 안쪽에, 책등이 안 보이게 뒤집어 꽂아놓았다. 내가 몰래 그 책을 펼친 것은, 어른들이 언제나처럼 부엌에 모여앉아 아홉시 뉴스를 보고 있던 밤이었다. 마지막 장까지 책장을 넘겨, 총검으로 깊게 내리그어 으깨어진 여자애의 얼굴을 마주한 순간을 기억한다. 거기 있는지도 미처 모르고 있었던 내 안의 연한 부분이 소리 없이 깨어졌다. (198~99면)> 그리고 다시 일 년이 지난 서울의 여름, 이상한 열정으로 『사자왕 형제의 모험』을 읽고 있는 열두 살의 내가 있다. 그건 평범한 동화책이 아니다. 아이들을 위한 책으로서는 놀랍게도 처음부터 죽음에 대해 이야기한다. 부엌의 침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아픈 소년 칼에게, 그를 사랑하는 형 요나탄이 말한다. 네가 죽으면 하얀 새가 되어 나에게 돌아올 거야. 나는 너를 금방 알아볼 수 있을 거야. 그러나 얼마 뒤 집에 불이 나고, 칼을 업고 뛰어내린 요나탄이 먼저 세상을 떠난다. 과연 하얀 새가 되어 창가로 날아온 요나탄이 들려준 말대로, 뒤이어 병으로 숨을 거둔 칼은 낭기열라라는 아름다운 세계에서 건강한 몸으로 다시 눈을 뜬다. 그러나 그곳은 아름답기만 한 세계가 아니다. 들장미 골짜기의 텡일이라는 무자비한 독재자가 괴물 카틀라의 힘을 등에 업은 채 사람들을 지배하고 핍박한다. 이웃한 벚나무 골짜기에서 뜻있는 사람들이 모여 그에게 맞서는데, 요나탄은 ‘사자왕’이라는 그곳에서의 별명대로 용감하고 순정하게 자신의 몫을 다해 싸우는 중이다. 이 책에서 가장 먼저 나를 사로잡은 것은, 그 싸움의 과정에서 연약하고 겁 많은 칼이 서서히 이 작품의 진정한 주인공, ‘사자왕 칼’이 되어 가는 모습이었다. 일인칭 화자인 칼이 너무나 솔직하게 자신의 마음을 털어놓았으므로, 처음부터 나는 거의 무방비 상태로 그를 이해했다. 형에 대한 그의 절대적인 사랑과 믿음, 자연의 아름다움에 대한 감탄, 그리고 두려움과 떨림까지. 거기에 더해, 칼이 관찰하는 독재자 텡일의 모습, 그가 조종하는 살인의 화신 카틀라, 그에 맞서 연약한 사람들이 연대하는 과정이 어째서인지 낯설게 느껴지지 않았다. 우여곡절 끝에 이들이 결국 승리하기는 하지만, 그 싸움의 과정에서 무고한 사람들이 희생되고 만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모두 눈물을 흘리며 슬퍼한다. 그러나 오직 한 사람, 반군의 지도자 오르바르만은 울지 않는다. 그 대목을 읽으며 내가 느꼈던 불길한 예감을 기억한다. 그 어두운 예감과 폭력의 기억으로 그늘진―그러나 동시에 믿을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세계, 낭기열라에서 소년들이 다시 죽음의 형식으로 함께 떠나가는 마지막 장면을 읽다가, 어느새 해가 져서 캄캄해진 내 방의 서늘한 벽에 기대앉아 오래 울었던 것을 기억한다. 알 수 없었다. 어떻게 그들은 그토록 서로를 믿고 사랑하는가? 그들의 사랑을 둘러싼 세상은 왜 그토록 아름다우며 동시에 잔인한가? 그 후 삼십여 년이 흘러, 오슬로로의 여행을 앞두고 이 책을 다시 완독한 지금에야 비로소 내가 왜 연도를 착각해 왔는지 깨달았다. 나의 내면에서 이 책이 80년 광주와 연결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1980년 아홉 살의 내가 문득 생각했던, 그 여름을 이미 건너지 못했으므로 그 가을로도 영영 함께 들어갈 수 없게 된 그 도시의 소년들의 넋이, 그로부터 삼 년 뒤 읽은 이 책에서 두 번의 죽음과 재생을 겪는 소년들에게로 연결되어 내 몸속 어딘가에 새겨졌다는 것을. 마치 운명의 실에 묶인 듯, 현실과 허구, 시간과 공간의 불투명한 벽을 단번에 관통해서. 2. 2012년 겨울부터 『소년이 온다』를 쓰기 위한 자료를 읽으면서 나는 내면의 투쟁을 치르고 있었다. 인간의 잔혹함을 증거하는 자료들과, 다른 한편에서 인간의 존엄을 증거하는 자료들 사이에서 나는 분열을 겪고 있었다. 언젠가부터 나에게 광주는 더 이상 하나의 도시를 가리키는 고유 명사가 아니라, 인간의 폭력과 존엄이 극단적으로 공존한 시간을 가리키는 보통 명사가 되어 있었다. 신대륙의 학살, 아우슈비츠, 보스니아, 관동과 난징의 학살을 가로지르는 인간의 잔혹함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사적으로 그 폭력 앞에서 무엇인가를 하려고 했던 연약한 몸짓들에 대해 내가 대체 무슨 말을 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이 소설을 쓰는 일을 거의 포기하려 했던 어느 날, 5월 27일 새벽 군인들이 돌아와 모두를 죽일 것임을 알면서 광주의 도청에 남았던 한 시민군, 섬세한 성격의 야학 교사였던 스물여섯 살 청년의 마지막 일기를 읽었다. 기도의 형식을 하고 있는 그 일기의 앞부분은 이렇게 시작하고 있었다. “하느님, 왜 저에게는 양심이 있어 이토록 저를 찌르고 아프게 하는 것입니까? 저는 살고 싶습니다.” 그 순간 내가 쓰려는 소설이 어디로 가야 하는지 깨닫게 되었다. 어떻게든 폭력에서 존엄으로, 그 절벽들 사이로 난 허공의 길을 기어서 나아가는 일만이 남아 있다는 것을. 그러기 위해 먼저 이 소설의 맨 앞과 맨 뒤에 촛불을 밝히기로 했다. 할 수 있는 최선의 애도를 하고 싶었다. 촛불의 불꽃의 중심을 통과하여, 삼십여 년을 건너 우리에게 오는 넋들의 걸음걸이를 생각했다. 그 불가능한 재생을 단 한 순간이라도 가능케 하고 싶었다. 열다섯 살에 그곳에서 죽어 여름으로 건너오지 못한 소년 동호가, 어둠 속에서 희미한 빛으로 떠오르게 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다만 애도하고 온 힘을 다해 존엄에까지 가자고 결심은 했지만, 『소년이 온다』를 써 가는 동안 나는 여전히 인간의 참혹과 존엄 사이에서 스스로 흔들리곤 했다. 4장 ‘쇠와 피’ 같은 경우에는 내가 흔들리며 회의했던 흔적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다고 느껴질 때마다, 달리 방법이 없어서 소년에게 매달렸다. 그가 나를 밝은 쪽으로 이끌고 가기를 바랐고, 실제로 그에게 끌려가듯 가까스로 앞으로 나아가는 경험을 했다. 그러므로 만일 지금 누군가 나에게 인간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어떤 폭력보다 먼저, 인간의 참혹보다 먼저, 6장에서 어린 동호가 엄마의 손을 잡고 밝은 쪽으로 나아가는 순간에 대해서 이야기해야 할 것 같다고 느낀다. 그 마음으로 에필로그에 이 대목을 썼다.<특별히 잔인한 군인들이 있었던 것처럼, 특별히 소극적인 군인들이 있었다. 피 흘리는 사람을 업어다 병원 앞에 내려놓고 황급히 달아난 공수부대원이 있었다. 집단발포 명령이 떨어졌을 때, 사람을 맞히지 않기 위해 총신을 올려 쏜 병사들이 있었다. 도청 앞의 시신들 앞에서 대열을 정비해 군가를 합창할 때, 끝까지 입을 다물고 있어 외신 카메라에 포착된 병사가 있었다. 어딘가 흡사한 태도가 도청에 남은 시민군들에게도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총을 받기만 했을 뿐 쏘지 못했다. 패배할 것을 알면서 왜 남았느냐는 질문에, 살아남은 증언자들은 모두 비슷하게 대답했다. 모르겠습니다. 그냥 그래야 할 것 같았습니다. 그들이 희생자라고 생각했던 것은 내 오해였다. 그들은 희생자가 되기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거기 남았다. 그 도시의 열흘을 생각하면, 죽음에 가까운 린치를 당하던 사람이 힘을 다해 눈을 뜨는 순간이 떠오른다. 입안에 가득 찬 피와 이빨 조각들을 뱉으며, 떠지지 않는 눈꺼풀을 밀어올려 상대를 마주 보는 순간. 자신의 얼굴과 목소리를, 전생의 것 같은 존엄을 기억해내는 순간. 그 순간을 짓부수며 학살이 온다, 고문이 온다, 강제진압이 온다. 밀어붙인다, 짓이긴다, 쓸어버린다. 하지만 지금, 눈을 뜨고 있는 한, 응시하고 있는 한 끝끝내 우리는…… 이제 당신이 나를 이끌고 가기를 바랍니다. 당신이 나를 밝은 쪽으로, 빛이 비치는 쪽으로, 꽃이 핀 쪽으로 끌고 가기를 바랍니다. 목이 길고 옷이 얇은 소년이 무덤 사이 눈 덮인 길을 걷고 있다. 소년이 앞서 나아가는 대로 나는 따라 걷는다. 도심과 달리 이곳엔 아직 눈이 녹지 않았다. 얼어 있던 눈 더미가 하늘색 체육복 바지 밑단을 적시며 소년의 발목에 스민다. 그는 차가워하며 문득 고개를 돌린다. 나를 향해 눈으로 웃는다. (212~13면)>3. 고백하자면, 『사자왕 형제의 모험』과 그 소년들을 거의 잊은 채 오랜 시간을 살아왔다. 어린 시절에 가장 좋아했던 책들 중 한 권이라는 사실 외에는 실상 많은 것이 희미했다. 그러니 당연히, 『소년이 온다』를 쓰는 동안 이 오래된 책을 기억하는 일은 없었다. 그러나 이제 삼십여 년이 흐른 뒤 다시 읽게 된 이 책의 마지막 페이지에서, 불꽃에 손바닥을 덴 것처럼 놀라며 깨달았다. 열두 살의 내가 어두워져 가는 방의 벽에 기대앉아 이 책을 쥐고, 무엇이 내 눈과 목구멍을 뜨겁게 하는지도 명확히 알지 못한 채 스스로에게 던졌던 질문들의 의미를. 그 질문들이 여전히 내 안에서 생생히 살아 어른어른 흔들리고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그들은 그토록 사랑하는가? 그들을 둘러싼 세상은 왜 그토록 아름다우며 동시에 폭력적인가? 그 열두 살의 나에게, 이제야 더듬더듬 나는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바로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가 절망하는 거라고. 존엄을 믿고 있기 때문에 고통을 느끼는 것이라고. 그러니까, 우리의 고통이야말로 열쇠이며 단단한 씨앗이라고. 한국어로 번역된 린드그렌의 평전을 이어 읽다가, 생전의 작가가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전쟁과 테러의 뉴스들에 유난히 민감했으며 진심으로 고통스러워했다는 대목을 발견하고 나는 조용히 짐작했다. 인간에 대한 사랑에서 비롯되었을 그녀의 고통이 이 책 『사자왕 형제의 모험』에 배음으로 깔려 있다는 것을. 열두 살의 내가 비밀로서 품고 있었던 어렴풋한 사랑과 고통이, 먼 시간과 공간을 건너 그녀의 사랑과 고통에 잠시 맞닿았을지도 모른다고. 그렇게 거의 불가능한 방식으로 때로 우리가 만남을 경험하는지도 모른다고. 그 경험이 지워지지 않는 흔적으로 우리들의 심장과 목구멍에, 눈물이 고였던 눈에 뜨겁게 새겨지기도 하는 것이리라고.허락된다면, 린드그렌의 이 아름다운 책의 한 대목을 읽으며 나의 이야기를 마치고 싶다.<우리는 시냇가 푸른 잔디밭에 누워 있었습니다. 텡일이라든가 그 밖의 끔찍한 것들이 있다는 사실을 차마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아침나절이었습니다. 햇살은 맑고 따스했습니다. 어찌나 조용한지 들리는 거라고는 약간씩 거품을 일으키며 다리 아래로 흘러가는 물소리뿐이었습니다. 우리는 푸른 하늘 군데군데 흩어진 흰 구름을 바라보며 행복한 기분으로 콧노래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근심 걱정 없이 즐거운 기분이었는데 요나탄 형이 텡일 이야기를 꺼낸 것입니다. (…) “스코르판, 잠시 동안 너 혼자 기사의 농장에 남아 있어야겠어. 나는 들장미 골짜기에 다녀와야 하니까.” 요나탄 형이 어째서 그런 말을 하는지 모를 일이었습니다. 나 혼자는 단 일 분도 기사의 농장에서 살 수 없다는 걸 형은 정말 모르는 걸까요? 만일 형이 텡일의 소굴로 가면 나도 따라가겠다고 말했습니다. 요나탄 형이 아주 야릇한 눈길로 나를 바라보더니 한참 만에 말문을 열었습니다. “스코르판, 너는 하나밖에 없는 내 동생이야. 나는 모든 불행이나 위험으로부터 너를 안전하게 보호해 주고 싶어. 하지만 이번엔 너를 돌볼 수가 없거든. 다른 일을 위해 있는 힘을 다 쏟아야 하니까. 그런데 어떻게 너를 데려가니? 이건 정말 위험하기 짝이 없는 일이야.” 나는 아무 말도 듣고 싶지 않았습니다. 슬프고 화가 나서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습니다. “그래서 나 혼자 농장에 남아 있으라는 거야? 형은 이제 영영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르면서, 나보고 마냥 기다리기나 하란 말이지?” 나는 미친 듯이 소리 질렀습니다. (…) “바보 같은 소리 그만해. 나는 꼭 돌아올 거야.” 형은 그렇게 말을 맺었습니다. (…) 더는 화가 나지 않았지만 슬퍼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물론 요나탄 형도 내 마음을 훤히 알고 있었습니다. 언제나 친절한 형은 새로 구운 버터 빵에다 꿀을 발라 주었습니다. 또 신기한 옛이야기도 해 주었는데 내 귀에는 제대로 들리지 않았습니다. 텡일이라는 악당만 자꾸 생각났습니다. 모든 괴물과 악당 중에서도 텡일이 가장 끔찍하고 잔인한 것 같았습니다. 나는 무엇 때문에 요나탄 형이 그처럼 위험한 일을 해야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기사의 농장 벽난로 앞에 앉아 편안히 살면 안 될 까닭이 뭐란 말입니까? 그러나 형은 아무리 위험해도 반드시 해내야 하는 일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어째서 그래?” 내가 다그쳤습니다. “사람답게 살고 싶어서지. 그렇지 않으면 쓰레기와 다를 게 없으니까.” (…) 어느덧 밤이 깊었습니다. 벽난로의 불길도 잦아들었습니다. 다음 날 새벽, 나는 문간에 서서 요나탄 형이 말을 타고 안개 속으로 떠나가는 모습을 지켜보았습니다. 벚나무 골짜기는 온통 새벽안개에 휩싸여 있었습니다.형이 점점 멀어져, 안개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조종엽기자 jjj@donga.com}

“권정생은 말로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가 글로 정착되는 시대를 경험한 작가다. 그의 문학은 말과 글이 혼재하는 커다란 저수지와 같다.”(아동문학평론가 엄혜숙) ‘강아지똥’ ‘몽실언니’를 쓴 아동문학가 권정생(1937∼2007·사진)의 10주기인 17일을 맞아 그의 문학세계를 연구한 책이 발간되고 작품이 재출간되는 등 그의 삶과 문학이 재조명되고 있다. 권정생은 1968년부터 경북 안동시 일직면의 흙담집에 살며 동화 동시 소년소설 그림책 산문 등 광범위한 작품을 남겼다. ‘권정생의 문학과 사상’(소명출판)의 저자 엄혜숙 씨는 책에서 “권정생은 전근대와 근대를 아우르며 농경사회가 돈에 의해 변모해 가는 과정을 그려냈다”며 “개인적으로, 사회적으로 생명을 억압하는 모든 것들을 고발하고 드러냈다”고 평가했다. 책은 기독교 실존주의, 기독교 아나키즘, 생태 아나키즘을 키워드로 그의 사상 변화를 분석한다. 권정생어린이문화재단도 8월 중에 서울 강남구 국립어린이청소년도서관에서 그의 삶과 문학을 조명하는 학술대회를 열 예정이다. 똘배어린이문학회 회원들의 추모 글을 엮은 문집 ‘그리운 권정생 선생님’(단비)도 출간됐다. 권정생의 작품들도 잇따라 재출간되고 있다. 이달에만 ‘빼떼기’(창비), ‘하느님의 눈물’(산하), ‘하느님이 우리 옆집에 살고 있네요!’(산하), ‘복사꽃 외딴집’(단비)이 발간되는 등 올해 7권의 작품이 다시 나왔다. 전시회도 열린다. 대전 중구 계룡문고는 8월 26일까지 유품과 작품을 모은 ‘보고 싶은 권정생’ 전시를 연다. 출판사 창비는 김환영 작가가 그린 ‘빼떼기’의 원화를 서울 서교동 창비서교빌딩에서 전시하고 있다. 다음 달 16일에는 권정생 연구자인 이기영 씨가 쓴 ‘작은 사람 권정생’의 북콘서트가 열린다. 권정생은 “내가 쓴 모든 책은 주로 어린이들이 사서 읽는 것이니 여기서 나오는 인세는 어린이에게 돌려주는 것이 마땅하다”고 했다. 그의 유언에 따라 설립된 권정생어린이문화재단은 소외지역 공부방에 책을 지원하고 북한 어린이들에게 급식을 지원하는 사업 등을 벌여왔다. 재단은 17일 오전 11시 경북 안동시 권정생동화나라에서 추모식을 열고 권정생창작기금을 동화 ‘할머니의 마지막 손님’의 작가 임정자 씨에게 수여한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