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하기

하와이 사진신부라 불리는 이들이 있다. 20세기 초 미국 하와이에 노동이민을 간 남성과 서로 사진만 교환한 뒤 혼인한 여성을 일컫는다. 1910, 20년대에 600∼1000명이 이렇게 조선을 떠나 하와이로 갔다. 그런 사진신부였던 천연희 여사(1896∼1997)의 자전적 기록이 담긴 ‘하와이 사진신부 천연희의 이야기’(일조각)가 최근 출간됐다. “나는 소설가도 아니요, 작문가도 아니요, 시를 잘 짓는 사람도 아니다. …우리 한국 여자 사진 혼인해 온 이들이 대단히 일찍 깨었고 살기를 원해서 (하지만) 남편들은 나이 많고, 아무 재주 없고, 사역(일)도 잘 못하니 (더구나) 아이들은 많이 있어서 이 여자들이 살길을 찾아서 빨래숍도 내고, 바느질도 하고, 장사는 하려도 밑천이 없어 큰 회사나 청국 사람에게 헌집을 몇 해 세내어….” ‘하와이…’는 천 여사가 1971년부터 1984년까지 남긴 노트 7권을 현대 말투로 옮기고 해제를 달았다. 경남 진주의 비교적 넉넉한 집안에서 태어난 천 여사는 1915년 하와이 마우이섬의 사탕수수농장 노동자 길찬록에게 시집을 왔다. 이민 배경에는 아버지가 부재한 상황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어머니의 허락과 지원이 있었고, 다른 한편으론 일제강점기란 식민지 현실이 있었다. “모든 것이 압박과 압제를 주었다. …제국 정치의 반대자라거나 도모자라고 하고 옥에 가두고 추달하여 병신을 만들어 정신병자 모양으로 아무것도 모르는 등신을 만들어 버렸다. 그와 같이 자유 없는 나라 백성은 참으로 불쌍하였다. 이 모든 것이 내 마음에 상처가 되어 자유 세상을 찾게 되었다.” 천 여사는 노트와 함께 구술 녹음테이프 24개와 사진, 편지 등도 자료로 남겼다. 이런 소중한 기록을 남긴 하와이 사진신부는 그를 포함해 2명뿐이다. 천 여사의 자료는 이덕희 하와이이민연구소장 주선으로 미국 하와이대에 기증됐다가 2014년 한국학중앙연구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역주와 해제를 이끈 문옥표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는 머리말에서 “천연희는 온갖 역경 속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과 아이들을 지켜냈고 인간다움의 존엄을 보여준 여성이었다”며 “기록이 놀라울 정도로 상세하고 사회, 정치, 경제 상황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어 하와이 이민 역사와 여성사 연구의 귀한 자료”라고 말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KBS 이사회가 10일 고대영 KBS 사장 해임 제청안을 이사회 공식 안건으로 확정했다. 고 사장은 이에 “해임 사유는 모두 허위이거나 사실관계조차 파악하지 못한 억지 주장”이라고 반발했다. KBS 이사회는 이날 비공개 임시이사회를 열고 고 사장에게 15일 오후 예정된 임시이사회 개최 전까지 해임 제청안에 대한 의견서를 제출하라고 요구했다. 해임 제청안은 해임 사유로 △지상파 재허가 심사에서 KBS의 조건부 재허가 결정 △공사의 신뢰도와 영향력 추락 △파업 사태 초래 등 직무수행능력 상실 △조직운영·인사관리 실패 △허위·부실 보고로 이사회 심의·의결권 침해 △보도국장 재직 시 금품수수 의혹 등을 담았다. KBS 이사회는 고 사장의 의견서를 살펴본 뒤 다시 이사회를 열고 고 사장에게 구두 의견 진술 기회를 부여할 예정이다. 고 사장 해임 제청안은 KBS 이사회 절반 이상이 찬성하면 통과된 뒤 대통령 재가로 결정된다. 최근 강규형 전 KBS 이사가 해임되고 김상근 목사가 보궐이사로 임명돼 KBS 이사회는 여권 6명, 야권 5명으로 재편된 상황이다. 고 사장은 이날 해임 제청안 상정 직후 발표한 입장문에서 “강규형 전 이사가 해임이 부당하다며 제기한 가처분신청이 결론도 나지 않은 만큼 현재 KBS 이사회가 법적 완결성을 지녔는지 다툼의 여지가 있다”며 “그런 이사회가 사장 해임이라는 중대한 결정을 내리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비난했다. 고 사장은 또 “KBS 이사진 교체과정은 과도한 인신공격과 폭력적 사퇴압박으로 점철돼 절차적 정당성을 획득하지 못했다는 지적이 많다”며 “감사원에서 방송통신위원회로 이어진 해임과정도 해임사유로 불충분한 표적감사라는 지적이 나온다”고 밝혔다. 아울러 자신의 해임 사유에 대해서도 “상황을 과장 또는 왜곡했다”고 반박했다. 고 사장은 “방통위 재허가 심사는 심사위원들이 자의적 평가가 가능한 항목들에서 점수를 대폭 낮춘 주관적 평가였기에 객관성을 인정하기 어렵다”고 주장했다. 해임 사유 중 하나인 ‘직무 수행능력 상실’에 대해서도 “파업이 교섭대표노조인 KBS 노조의 업무복귀로 공식적으로는 중단됐고, 민주노총 소속 KBS 본부노조가 법적근거 없이 직무를 거부하고 있지만 파업 참가율은 20% 정도에 그치고 있다”고 반박했다. 고 사장은 “여권 다수로 재편된 이사회가 정해진 수순대로 해임 결정을 내릴 경우 법적 대응도 불사하겠다”며 강경 대응할 뜻을 내비쳤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중국의 동북공정 5개년 사업은 2007년 ‘형식적으로’ 종료됐다. 하지만 중국의 고구려 역사 연구는 현재까지 오히려 확대되고 심화되고 있다는 분석이 나왔다. 동북아역사재단(이사장 김도형)은 최근 이 같은 내용을 담은 ‘동북공정 이후 중국의 고구려사(史) 연구 동향’(역사공간)을 출간했다. 김현숙 동북아재단 한중관계연구소장은 책에서 “중국 학계의 ‘포스트 동북공정’ 연구는 동북공정식 역사인식을 변함없이 견지하며 보완·심화 단계로 나가고 있다”고 설명했다. 중국의 고구려사 연구는 양부터 엄청나다. 동북공정 프로젝트가 끝난 뒤인 2007년 2월부터 2015년까지 발표된 관련 연구 논저는 모두 512편에 이른다. 단행본만 27권에다 박사논문 14편, 석사논문 44편, 학술지 논문 427편이다. 김 소장은 “동북공정 종료 이후 연구가 오히려 늘어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런 배경에는 중국정부의 연구비 지원 확대가 크게 작용했다. 특히 지린(吉林)성 사회과학원이 기금을 관리하며 고구려 연구를 주도하고, 학술지 ‘동북사지(東北史地)’도 핵심역할을 하고 있다. 이 밖에 통화사범학원과 동북사범대 역사문화학원, 지린대 동북아연구중심, 연변대 등도 활발하다. 김 소장은 “전략적 분업이 이뤄진 것처럼 실력 있는 중견 학자들이 대거 포진해 논리 보완이 필요했던 주제의 연구를 주도하며 후진 양성도 적극적이다”고 말했다. 때문에 갈수록 연구 내용도 무시하지 못할 수준이 되고 있다. 조영광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사는 “중국에서 ‘고구려사 연구의 2.5∼3세대’로 불리는 젊은 학자들은 연구 주제도 다양하고 실증적인 측면에서 강점을 지녔다”며 “국내 학계에선 생소하지만 중국 민족학 인구학 등에서 드러났던 특유의 방법론을 잘 살리고 있다”고 진단했다. 가장 심각한 건 이런 연구들의 전체적 흐름이 이전 동북공정식 인식을 변함없이 유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대다수 고구려 대외관계사 연구는 고구려와 중국 왕조를 아예 하나의 나라, 즉 일국(一國) 관계로 전제했다. 이준성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사는 “조공이나 책봉을 지역질서의 수단으로 보는 것에 동의하는 연구조차도 동아시아 세계의 성립과 발전을 오직 한화(漢化)로만 설명하는 중국 중심사관에 갇혀 있다”고 분석했다. 다만 유명 사학자인 거자오광(葛兆光) 푸단(復旦)대 교수가 “중국이 상상의 정치 공동체인지, 자기 동일성을 지닌 역사적 단위인지”에 의문을 제기하는 등 일부 학자들의 연구 도 주목할 만하다고 평가했다. 문헌사료와 사학사 연구를 분석한 이정빈 충북대 역사교육과 교수는 “동북공정 시기 중국학자들은 ‘삼국사기’ 고구려본기를 외면하는 경우가 많았다”며 “최근에도 중국 문헌과 비교해 고구려본기의 사료적 가치를 낮게 평가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근대 이전 동아시아 외교 관례는 ‘광의의 국제법’(국제관습법)이며, 독도는 일본의 주장처럼 ‘무주지’였던 것이 아니라 국경 조약상 조선 영토였음이 명확하다는 연구가 나왔다. 재일 독도 연구자인 박병섭 ‘竹島=독도문제연구넷’ 대표는 최근 학술지 ‘독도연구’ 23호에 ‘독도 영유권에 대한 근대국제법의 적용 문제’를 게재했다. 17세기 말 조선과 일본은 울릉도의 귀속을 두고 외교 문서를 주고 받으며 교섭해 1699년 울릉도가 조선 영토임을 확인했다. 이른바 ‘울릉도 쟁계’다. 당시 양국은 낙도(落島)의 귀속에 관한 판단 기준으로 ‘어느 정부가 낙도에 영유 의사를 가지고 있는가’, ‘낙도는 어느 나라에 가까운가’ 하는 두 가지를 세웠다. 논문은 “이는 근대 이전 ‘광의의 국제법’이라고 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실제 이후에도 일본은 일본에서 울릉도와 독도의 귀속이 문제가 될 때마다 이들 기준에 따라 조선의 영토로 판단했다. 에도 막부는 독도에 영유 의사를 가진 적이 없었고, 지리적으로 독도는 조선 땅인 울릉도에 가깝기 때문이다. 메이지 시대에 들어서도 모리야마 시게루 등이 1870년 작성한 ‘조선국 교제 시말 내탐서’를 비롯해 이런 판단은 변함이 없었다. 이성환 계명대 교수도 같은 학술지에 실린 논문 ‘조일(朝日)/한일(韓日) 국경조약체제와 독도’에서 “울릉도와 독도는 일본 땅이 아니라는 1877년 일본 태정관(太政官) 지령은 ‘울릉도 쟁계’의 결과 1699년 성립된 한일 국경조약을 일본 국내법령으로 수용한 것”이라며 “이를 ‘조일/한일 국경조약체제’로 규정할 수 있다”고 말했다. 박병섭 대표는 “일본은 1905년 무주지를 선점해 독도를 편입했다고 주장하지만 독도는 광의의 국제법상 한국의 영토였으며 편입은 무효”라고 강조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임진란, 거북선과 함께 역사를 지은 민족적 은인 이 충무공의 위토 60두락지기가 장차 경매에 넘어갈 운명에 있다고 한다.…모두 빈한한 살림이라 갚을 도리가 없어 오늘까지 왔었다.” 일제강점기인 1931년 5월 13일자 동아일보에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 종손의 부채 때문에 위토가 경매에 부쳐질 예정이며 묘소와 사당, 종가가 모두 퇴락하고 있다는 르포기사가 실렸다. 이 기사는 국난 극복의 상징인 충무공 유적지 보존을 위한 거족적 운동을 촉발시켰다. 동아일보는 “우리는 먼저 민족적 이상이 결여하고, 민족적 자부심이 마비된 조선의 사회를 스스로 책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을 서러워한다”며 사설로 전 민족적 해결을 제안했다. 5월 21일에는 전 민중이 읽을 수 있도록 순 한글로 사설을 쓰기도 했다. 연이은 보도를 보고 명성여자실업학원 학생들이 눈물을 흘리며 주머니를 털어 1전, 2전씩 모아 동아일보에 성금을 보냈다. 동아일보는 5월 23일자부터 6월 말까지 1개 면 전체를 털어 성금 기탁자 명단을 실었다. 다음 해까지 1년간 성금을 보내온 사람은 2만여 명, 400여 개 단체. 총 1만6021원30전이 모였다. 직공부터 어린이까지 전 조선에서 10전, 20전씩 정성을 모은 것이다. 이광수 편집국장이 장편소설 ‘이순신’을 1932년 6월부터 178회에 걸쳐 연재했다. 이광수는 소설 마지막 문장에서 “그때 적을 보고 달아난 무리들이 정권을 잡아 삼백년 호화로운 꿈을 꾸는 동안에 조선의 산에는 나무 한 포기 없어지고 강에는 물이 마르고 백성들은 어리석고 가난해졌다”며 피폐한 식민지 조선의 현실을 개탄했다. 1931년 5월 23일 저명인사들로 ‘충무공 유적보존회’가 결성됐고, 실무를 동아일보가 주관했다. 성금으로 부채를 상환하고 현충사를 중건했으며 새로 꾸민 사당에 충무공의 검, 금대, 일기, 칙지(勅旨) 등 유물을 안치했다. 위토를 추가로 매입하기도 했다. 1932년 6월 5일 동아일보 전속 화가인 청전 이상범 화백(1897∼1972)이 그린 충무공 영정을 새 사당에 봉안했다. 봉안식이 열리는 날 현충사 주변에는 3만여 명의 인파가 주변 산야를 뒤덮었고, 천안∼온양 간 임시열차가 운행됐다. 온 겨레가 함께한 잔치였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인사혁신처가 4일 시민단체 근무 경력을 공무원 호봉으로 인정하겠다고 밝히자, 공직사회는 엇갈린 반응을 보이며 촉각을 곤두세웠다. 향후 공무원 보수규정이 어떻게 바뀔지, 시민단체 경력 인정이 공직사회에 어느 정도의 파장을 몰고 올지 등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지는 분위기였다. 시민단체 경력 인정이 공직 개방의 문호를 넓힐 수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도, 특정 단체에 대한 특혜가 없어야 공직사회의 경쟁력을 높일 수 있다는 지적이 많다. 문화체육관광부 관계자는 5일 본보에 “정부와 민간의 교류가 활발해지는 게 대세이니, 시민단체 경력 호봉 반영을 긍정적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고용노동부의 한 간부는 “평생을 시민단체에 있다가 공직에 입문하면 나이는 많은데 호봉이 낮을 수 있다. 직급과 경력에 맞는 대우를 해주는 것이 맞는다고 본다”고 했다. 해양수산부 관계자는 “사회 각 부문과 정부가 활발하게 소통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긍정적으로 본다”고 평가했다. 현재 경력 공무원 채용에서 민간 경력 인정은 이미 시행을 하고 있는 제도다. 5, 7, 9급 공채로 뽑는 공무원 시험의 한계를 극복하고 민간 인재를 수혈하기 위해 호봉을 책정할 때 민간 경력을 환산해 반영한다. 과거에는 변호사 자격증이나 박사학위와 같은 특수경력을 가지고 동일 업무에 종사한 경력에 한해서만 그 기간의 최대 80%를 호봉으로 인정했다. 그러나 2012년 7월 1일부터는 동일 분야의 민간 경력도 최대 100% 인정하기로 공무원 보수규정을 개정했다. 시민단체 경력도 ‘관련이 있는’ 경우에 인정을 해준 것이다. 예를 들어 5급 1호봉으로 채용된 사람이 9년간 유관 시민단체에서 일했다면 5급 10호봉의 대우를 받는 방식이다. 문제는 이번 인사혁신처의 개정안이 해당 업무와 ‘관련이 없는’ 시민단체 경력도 ‘최대 70%까지’ 환산해 인정할 수 있도록 하면서 논란이 되고 있다. 고용부의 한 관계자는 “객관적인 학위나 정부기관 근무 경력도 아닌, 불확실한 경력을 반영해서 호봉을 올려주는 것은 공무원 인사체계 자체를 뒤흔드는 일”이라고 비판했다. 한 퇴직 관료도 “채용비리는 물론이고 정치권 ‘낙하산’들의 인사 청탁과 민원이 늘어나게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농림축산식품부에서는 “시민단체 경력을 분야에 상관없이 호봉으로 쳐준다면 전문성을 담보할 수 없다”는 반응이 나왔다. 일부에서는 “특정 단체를 위한 봉급 잔치가 될 수 있다”는 불만의 목소리도 나온다. 김태영 경희대 행정학과 교수는 “시민단체와 정부의 역할에 공통되는 부분이 있는 만큼 능력 있는 시민단체 인력의 축적된 역량을 인정해 줄 필요가 있다”며 “다만 시민단체 외에도 다양한 전문가들이 공직사회에 진출해 ‘공무원 철밥통’을 깰 수 있도록 공정한 기준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노지현 isityou@donga.com·김윤종·조종엽 기자}

‘호외(號外)요!’ 1923년 3월 15일 동아일보 판매원이 달랑거리는 방울을 허리춤에 차고 일제강점기 서울의 거리를 뛰며 외친다. “총을 맞아 숨이 진한 후에도 육혈포에 건 손가락을 쥐고 펴지 아니하고 숨이 넘어가면서도 손가락으로는 쏘는 시늉을 하였다.” 손에 들린 호외는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한 김상옥 의사의 마지막 모습을 이렇게 전했다. 두 달 전 벌어진 일이지만 일제 당국이 보도를 금지해 알리지 못하다가 해제 즉시 호외를 낸 것. 동아일보가 26일 지령 3만 호를 발행하지만 ‘호외’가 있기 때문에 실제 발행한 신문은 그보다 많다. 호외는 중요한 뉴스를 빨리 전하기 위해 임시로 발행하는 신문으로, 지령을 세는 호(號)에는 포함되지 않는다(外). 호외는 현대사의 중요한 순간을 전한 뉴스 속의 뉴스였다. 일제강점기에는 항일운동 소식을 담은 호외를 압수하는 당국과 동아일보가 힘겨루기를 하기도 했다. 동아일보는 나석주 의사의 폭탄 의거 보도 금지가 해제되자마자 1927년 1월 13일 바로 호외를 냈다. 그러나 일제 경찰은 허락받지 않은 내용이 담겼다며 호외를 압수했다. 동아일보는 다음 날 또 ‘호외의 호외’를 발행하면서 “경무국이 기사 내용을 딕테이트(dictate)한다는 것은 경찰 만능의 조선에서도 초유의 사(事)엿다. 아모리 주책없는 경무당국이라도…”라며 날 선 비판을 가했다. 첫 호외는 창간 보름 만인 1920년 4월 15일 평양에서 벌어진 만세운동 기사로 신문이 발매 금지 처분을 당하자 다시 낸 것인데 남아 있지 않다. 순종 승하를 전한 호외(1926년 4월 27일), 손기정 선수의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금메달 소식을 알린 두 차례의 호외(1936년 8월 10일) 등 민족의 아픔과 기쁨이 호외로 전파됐다. 광복 이후에도 호외가 주요한 속보 매체였다. 6·25전쟁 발발 이틀 뒤인 1950년 6월 27일 오후에도 동아일보는 ‘적, 서울 근교에 접근, 우리 국군 고전 혈투 중’이라는 호외를 찍었다. 피란으로 배포할 사람이 없어 시경에서 빌린 지프차를 타고 기자들이 시청 앞, 광화문, 중앙청, 안국동을 돌며 포탄이 산발적으로 시내에까지 날아드는 가운데 호외를 뿌렸다. 동아일보의 호외는 민주주의의 전진을 이끈 신호탄이었다. 1960년 3·15부정선거가 일어나자 불법·무효를 알리고, 4월 11일 마산에서 시위에 참가했다가 사망한 김주열 군의 시신이 발견된 일을 알린 것도 호외다. 1990년대 이후에는 TV와 인터넷의 발달로 이전에 비해 호외를 내는 일이 확 줄었다. 그러나 △‘김일성 사망’(1994년 7월 9일) △‘성수대교 붕괴’(1994년 10월 21일) △‘대구 지하철 가스 폭발’(1995년 4월 28일) △‘삼풍백화점 붕괴 속보’(1995년 7월 3일) △‘KAL기 괌서 추락’(1997년 8월 6일) 등 굵직한 뉴스가 호외로 다뤄졌다. 21세기에도 호외는 월드컵 승전보나 김정일 사망, 대통령 서거 소식을 전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국립민속박물관(서울 종로구 삼청로)은 2018년 무술년(戊戌年)을 맞아 2월 25일까지 특별전시 ‘공존과 동행, 개’를 연다. 이번 전시에서는 통일신라시대의 ‘십이지신 추(錘)’와 개와 사람이 함께 사냥하는 모습의 토우 장식이 달린 ‘굽다리접시’를 비롯해 여러 전통 유물을 만날 수 있다. 도화서 화원 김두량(1696∼1763)의 그림으로 전해지는 ‘모견도(母犬圖)’도 나온다. 새끼에게 젖을 먹이는 어미 개의 모정이 잘 표현된 그림이다. 사도세자가 그린 것으로 전해지는 개 그림(犬圖)도 볼 수 있다. 승정원일기 등의 자료를 통해 조선의 궁궐에서도 개를 길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개의 상징과 의미를 알 수 있는 유물도 많다. ‘개 부적’은 새해에 액을 쫓고 복을 빌며 대문이나 벽장에 붙였던 세화(歲畫)의 일종이다. 20세기 민화 ‘당삼목구’는 그림 상단에 ‘세 개의 눈을 가진 개가 짖어 삼재를 쫓는다(唐三目狗吠逐三災)’라고 적혀 있다. 개는 전통적으로 호랑이, 해태, 닭과 마찬가지로 벽사(辟邪·귀신을 물리침)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광복 이후 정부에서 처음 발행한 초등학교 국어 교과서 ‘바둑이와 철수’도 볼 수 있다. 또 시각장애인 안내견, 인명 구조견 등 오늘날 사람과 더불어 살아가는 개와 관련된 영상을 비롯해 70여 점의 자료를 전시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인간이 개를 바라보면, 개도 인간을 바라보고 눈을 맞춘다. 이것이 단순히 반려동물과 감정을 나누는 행동이 아니라 오늘날의 인류를 만든 중요한 사건의 하나라는 주장이 최근 제기됐다. ‘개의 해’ 무술년(戊戌年)의 시작을 앞두고 인간과 개의 역사에 대한 이모저모를 살펴봤다. ‘왜 네안데르탈인은 멸종하고 현생 인류는 살아남았는가?’는 인류학의 오랜 질문이다. 최근 발간된 ‘침입종 인간’(팻 시프먼 지음·푸른숲)은 그 답으로 ‘현생 인류와 개의 동맹’을 꼽는다. 책에 따르면 약 5만 년 전 유라시아 대륙에 도착한 현생 인류는 네안데르탈인과 같은 종류의 먹잇감을 사냥하며 경쟁했다. 그러나 인류는 적어도 3만6000년 전에 늑대를 ‘늑대-개’(원시 개)로 길들이면서 더 다양한 동물을 사냥할 수 있게 됐고, 사냥 성공률도 비약적으로 높이면서 경쟁에서 승리했다는 주장이다. 왜 늑대였을까? 인간의 공막(눈의 흰자위)은 영장류 중 유일하게 희다. 멀리서도 시선의 방향을 알 수 있다. 소리 내지 않고 눈으로 의사소통을 하면서 조직적으로 사냥하기에 좋다. 늑대도 그렇다. 갯과 동물 25종을 분석한 결과 대부분의 늑대는 얼굴과 눈 색깔, 홍채와 눈동자가 강하게 대비돼 시선의 방향을 쉽게 알 수 있었다. 개가 늑대보다 인간을 응시하는 시간이 평균 2배 길다는 것도 인간이 그런 개체를 선택해 길들였을 가능성이 높다는 걸 보여준다. ‘침입종 인간’의 저자는 “인간이 개를 가축화한 건 도구의 발명과 맞먹는 도약”이라고 강조했다. 이렇게 길들인 개는 오랜 세월 충직함의 대명사였다. 고대 그리스의 서사시 ‘오디세이’에서 긴 여정을 마치고 돌아온 오디세우스를 아무도 알아보지 못할 때 그를 반긴 유일한 존재가 늙은 개 ‘아르고스’였다. 불길에서 주인을 구한 전북 임실의 ‘오수의 개’ 이야기도 유명하다. 최근 국립민속박물관(관장 천진기)이 연 학술강연회 내용을 바탕으로 우리 문화 속의 개 이야기를 살펴봤다. “십이지의 열한 번째 동물인 개(戌)는 시간으로는 오후 7∼9시, 방향으로는 서북서, 달로는 음력 9월에 해당하는 방위 신(神)이자 시간 신이다. 개는 이 방향과 이 시각에 오는 사기(邪氣)를 막는 동물 신이다.”(천진기 관장) 천 관장에 따르면 개는 이승과 저승을 연결하는 동물로 인식됐다. 이런 생각은 중앙아시아에 광범위하게 분포돼 있다. 알타이 샤먼은 저승에 갈 때에 지옥문에서 개를 만날 수 있다고 믿는다. 우리 무속신화인 세민황제본풀이, 저승 설화에서도 그렇다. 제주도의 차사본풀이에서 염라대왕은 자신을 만나고 돌아가는 강림차사가 이승으로 가는 길을 가르쳐 달라고 하자 흰 강아지 한 마리와 떡 세 덩이를 주면서 ‘떡을 조금씩 떼어 강아지를 달래며 뒤따라가면 알 도리가 있으리라’고 했다. 옛날에는 개의 이상한 행동이 미래의 일을 예견한다고 믿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진평왕 53년 춘2월에 흰 개가 궁중의 담장 위에 올라갔다. 5월에 이손과 아손이 모반한 것을 왕이 알았다”라고 나온다. 흰 개의 행동을 모반을 암시한 것으로 본 것이다. 백제본기에도 백제가 망하기 한 달 전 “들 사슴 모양을 한 개가 서쪽에서 와서 사비성 강둑에 이르러 왕궁을 보고 짖어대다가 갑자기 사라졌다”라고 기록돼 있다. 선조들은 ‘개가 지붕 위에 올라가면 흉사가 있거나 가운(家運)이 망한다’고 생각했다. 오래된 개 그림도 적지 않다. 고구려 덕흥리 고분의 벽화 견우직녀도에는 직녀는 개를 데리고 서 있고 무용총과 각저총에도 충직해 보이는 개 그림이 있다. 신라 토우의 개는 외견이 아주 다채롭다. 조선시대에도 개를 많이 그렸다. 나무 아래 개가 그려진 그림은 ‘집을 잘 지켜 도둑을 막는다’는 것을 뜻한다. ‘개 술(戌)’자는 ‘지킬 수(戍)’자와 모양이 비슷하고 ‘나무 수(樹)’자와도 음이 같기 때문이다. 오동나무, 대나무, 복숭아나무 밑에 그려진 개는 각각 상서로움과 평화로움, 영생과 불변, 장생을 오래 누리기를 기원하는 뜻이다. 개 중 흰둥이는 전염병과 도깨비, 잡귀를 물리치고, 집안에 좋은 일이 있게 하고, 재난을 경고해 준다고 믿었다. 농가에서는 노란색이 풍년과 다산을 상징한다고 생각해 누렁이를 많이 길렀다. 물론 사람의 통제를 벗어난 들개는 위협이 됐다. 천명선 서울대 수의과대 교수의 발표에 따르면 ‘패관잡기’에도 조선 중종 말부터 서울 돈의문 근처 인가에서 키우던 개들이 북쪽 산에 올라가 살며 6, 7년 사이에 40∼50마리로 불었고, 떼를 지어 사람을 공격하기도 했다고 나온다. 천 교수는 “개가 위협하지 않아도 개에 공포를 느끼거나 공황에 빠질 수 있는 ‘개 공포증’이 오늘날 동물 공포증 가운데 35%를 차지한다”고 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3만 호에 이르는 동아일보의 족적에는 취재 현장을 지키다 불의의 사고로 순직한 기자들의 안타까운 죽음들이 있었다. 동아일보 창간 멤버인 장덕준 기자(1892∼1920)는 한국 언론사에서 첫 번째 순직 기자로 기록됐다. 1920년 독립군이 큰 전과를 올리자 일제는 간도의 한인을 무차별 학살하는 경신참변을 일으켰다. 통신부장 겸 조사부장이었던 장 기자는 이를 취재하기 위해 10월 간도 현지로 떠났다. 당시 본보는 무기정간을 당해 보도할 지면조차 없는 상황이었다. 주위에서는 위험하다며 간곡하게 말렸으나 “속간이 되면 반드시 보도해 국내외에 널리 알리겠다”는 장 기자의 결심을 꺾지 못했다. 11월 초순 룽징(龍井)에 도착한 장 기자는 일본 영사관과 군사령부를 찾아가 학살의 진상을 추궁했고, 한 여관에 묵었다가 일본군과 함께 떠난 뒤 실종됐다. 여러 기록은 그가 일본군에 피살됐음을 강력하게 시사하고 있다. 장 기자는 간도에서 “나의 동포를 해하는 자가 누구이냐고 쫓아와보니 우리가 상상하던 바와 조금도 틀리지 않는다”고 첫 소식을 보내왔다.(동아일보 1925년 8월 29일자) 그로부터 77년 뒤인 1997년 7월 5일 본보 출판국 신동아부 이기혁 기자가 장 기자가 실종된 곳과 멀지 않은 중국 훈춘시 남방 두만강변에서 접경지역 취재 중 교통사고로 순직하는 일도 벌어졌다. 당시 34세였다. 생사가 교차하는 베트남전을 종군 취재하다가 유명을 달리하기도 했다. 백광남 기자는 1966년 11월 28일 적군 출몰이 심한 작전지구에서 비극적인 교통사고를 당했다. 디안에 있던 국군비둘기부대를 방문해 취재하고 모터사이클로 혼자 사이공으로 귀환하던 중 베트남 민간인 삼륜차와 충돌했다. 31세의 꽃다운 나이였다. 백 기자는 베트남 전선에서 숨진 유일한 한국인 기자다. 이중현 본보 사진부 기자는 1983년 10월 9일 미얀마 양곤에서 일어난 북한의 아웅산 폭탄 테러로 순직했다. 당시 서석준 부총리와 이범석 외무부 장관 등 대통령 수행단 17명과 미얀마인 7명이 사망하고 50명이 부상했다. 정부 인사가 아닌 민간인으로 순직한 한국인은 이 기자뿐이다. 여러 차례의 보도사진전에 입상했고, 평소에도 취재 의욕이 남달랐던 그였다. 테러 당일에도 가장 앞줄에서 취재에 열중하다 참변을 당했다. 34세의 아까운 나이였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올해 95회를 맞은 ‘동아일보기 전국정구대회’는 단일 종목 스포츠로는 국내에서 가장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한다. 전국여자연식정구대회라는 명칭으로 시작한 이 대회는 남성이 아닌 여성들의 경기로 시작됐다. 1923년 6월 30일 서울 정동에 있던 경성제일고등여학교 코트. 무명치마를 입은 여학생들이 댕기머리를 휘날리면서 힘찬 스매싱을 했다. 서울의 진명 숙명 배화 동덕여고, 공주영명학교, 개성호수돈여고 등 8개교 40여 팀이 참가했다. 여성이 치마를 입은 채 코트를 누빈다는 건 사회 통념상 받아들이지 못하던 시절이었다. ‘해괴한 짓’이라는 비난도 나왔다. 대회 불가(不可) 여론이 워낙 거세자 ‘가족과 대회 임원 외 남성의 입장을 불허한다’는 조건을 걸고 겨우 대회를 열 수 있었다. 하지만 3만 명으로 추산되는 구름 관중이 몰렸다. 당시 경성 인구가 25만 명이었으니 대성황이라는 표현조차 부족할 지경이었다. 몰려든 남성 관중은 학교 담장 위로 촘촘히 머리를 내밀었고, 운동장이 내려다보이는 근처 나무에도 매달려 있었다. 대회 당일 동아일보 사설은 “모성의 권위를 역창(力唱)하야 남자의 반성을 촉구하는 것과 직업의 기회균등을 주장하야 전 세계의 남자와 당당히 맞서는 일반 부인운동의 대세는 물론이라”라며 스포츠를 통한 여성 지위 향상을 강조했다. 2006년부터 남자 선수의 출전을 허용했다. 동아일보는 2년 뒤인 1925년 3월 20일에는 조선 최초로 ‘전조선여자웅변대회’를 개최해 여권 신장의 목소리를 높였다. 서울 천도교 기념회관에서 열린 이 대회는 평양에서 온 김화진 여사가 ‘남녀평등을 부르짖노라’는 제목으로 힘찬 첫 연설을 시작했다. “남녀는 수레의 두 바퀴와도 같습니다. 우리 조선의 여성이 남자의 지위와 대등하게 된 뒤에야 비로소 우리는 살림살이다운 살림살이를 하게 될 것입니다!” 전조선여자웅변대회에는 전국에서 6개 단체와 6개 학교의 대표가 참가했다. 개막 한 시간 전에 초만원을 이뤘고 회관에 들어오지 못한 이들만 3000명이 넘었다. 전례 없이 청중 투표로 결정된 우승자는 평양의 여자엡윗청년회(단체부), 평양의 정미유치사범과 대표(학생부)였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한국고전번역원이 올해 개발에 착수한 고전문헌 자동(인공지능) 번역 시스템의 번역 결과물들이 최근 전문 번역자 평가에서 평균 3점(5점 만점)을 맞았다. 개발 초기라는 점을 고려하면 괜찮은 성과다. 어떤 번역을 틀렸을까? 일례로 승정원일기 영조 5년(1729년) 11월 26일 20번째 기사 “今月二十五日初覆入侍時, 捕廳罪人虎狼, 還發配所事…”는 이렇게 번역했다. “이달 25일 초복(初覆)했을 때, 포도청의 죄인 호린(虎麟)을 도로 배소(配所)로 보내도록….” ‘호랑(虎狼)’을 ‘호랑이와 이리’ 등이 아니라 사람 이름으로 맞게 옮겼다는 점이 흥미롭다. 그러나 원문에는 등장하지도 않는 ‘기린 린(麟)’자를 추가해 가며 ‘호린’으로 틀리게 옮겼다. 이 인공지능은 사람이 잘 번역해 놓은 짧은 문장 35만 개를 원문과 함께 학습했다. 학습의 알고리즘은 사람이 짜지만 학습 결과 만들어진 ‘단어들의 좌표’는 사실 개발한 이들도 정확히 알 수 없다. 이 인공지능에는 호랑이라는 사람이 기린과 비슷하게 느껴졌던 걸까? 인공지능을 의인화하는 건 여러 오해를 불러온다고 하지만 어딘가 이제 막 말을 하기 시작한 아이와 닮은 듯해 웃음이 난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1931년 7월 만주를 침략하려는 일제의 음모로 중국 지린성 창춘현 완바오산에서 한중 농민들이 충돌하는 ‘만보산(萬寶山) 사건’이 일어났다. 진상이 와전되면서 조선에서 평양을 중심으로 중국인 보복 폭행과 학살이 벌어지자 동아일보는 ‘허무한 선전에 속지 말라’는 사설을 내고 “우리가 조선에 와 있는 중국사람 8만 명에게 하는 일은 곧 중국에 있는 100만 명 우리 동포에게 돌아옴을 명심하십시오”라며 폭행 중지를 호소했다. 중국 정부에도 조선인들은 일제의 간계에 휘말린 것뿐임을 알려 탄압을 막아야 했다. 그러나 나라가 없으니 대사관도 외교관도 없는 게 현실이었다. 당시 신언준 동아일보 상하이 특파원은 중국 국민정부의 왕정옌 외교부장을 만나 사태의 진상을 설명하고 양해를 구하는 한편으로 “만주의 한인들을 특별히 보호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이처럼 일제강점기 동아일보의 해외 특파원은 나라 없는 조선인들의 대사이자 영사였다. 같은 해 9월 만주사변이 터지자 동아일보는 서범석 특파원을 만주에 머물게 해 재만 동포들의 참상을 신속히 보도하면서 피란 동포를 위한 위문금품을 모집했다. 전 조선에서 6만여 명이 구호물품 1만7809점, 구호금 3만2714원20전을 보내왔다. 서 특파원과 양원모 영업국장은 만주 각처의 수용소를 찾아가 이를 전달했다. 회고에 따르면 당시 편집국장 춘원 이광수는 서 특파원을 보낼 때부터 “전황(戰況) 보도는 필요 없다”고 했다. 동포를 구호할 방책을 강구하는 게 우선이라는 얘기다. 간토 대지진이 일어나고 조선인 대학살이 번져가던 1923년 9월 일본 도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주일 중국 영사가 경찰서에 나타나 말했다. “여러분 중 중국인은 나오시오.” 수용된 한 조선인은 자신을 ‘주인 없는 개’와 같다고 생각했다는 기록도 있다. 얼마 뒤 당시 편집국장이기도 했던 이상협 동아일보 특파원이 경찰서에 나타나 조선인들을 석방시켜줬다. “무슨 구세주를 만난 듯 반가웠으며, 그때의 우리들이 믿고 의지할 곳은 오직 신문사밖에 없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절실하게 느꼈다.” 책 ‘신문야화―30년대의 기자수첩’(김을한·1971년)에 나오는 얘기다. 이 특파원은 빵과 통조림, 음료수 등 식량 2만2000점을 동포에 전달했다. “속히 물러가라”는 협박 속에서도 교포 구제에 온 힘을 기울이고, 생존자 명단을 작성하는 등 현장의 참상과 문제점을 보도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죽음보다 슬프다.” 중일전쟁을 일으킨 일제가 민족말살정책을 시행하는 한편 언론 탄압도 극에 달했던 1939년 10월. 동아일보는 백제 멸망 뒤 나라를 되찾기 위해 싸웠던 실존 영웅의 이야기 ‘흑치상지’를 소설로 연재하기 시작했다. 소설은 첫 장 제목부터 나라 잃은 백성의 참담함을 “죽음보다 슬프다”고 강조했다. “백제의 백성들이 뭉게뭉게 몰려나왔다. … 다 꼬부라진 늙은 한 할머니도 낑낑하며 … 원한과 분노에 차고 맺힌 돌팔매! 당병의 꼭뒤에 비 오듯 쏟아졌다.”(‘흑치상지’에서) 일제가 가만히 놔둘 리가 없었다. 얼마 못 가 조선총독부 경무국이 연재를 강제로 중단시키지만 소설은 조선인들의 모습을 백제 유민의 현실과 투쟁에 투영하며 저항의식을 고취했다. ‘흑치상지’의 저자는 ‘빈처’ ‘운수 좋은 날’ 등 사실주의 소설의 선구자로 익숙한 빙허 현진건(1900∼1943·사진)이다. 현진건은 시대일보 등을 거쳐 1927년 동아일보에 입사했고, 이듬해부터는 사회부장으로 일했다. 당대 대표적 문인답게, 사회면을 편집하면서 문장력이 뛰어나고 제목을 잘 붙이기로 유명했다. “내가 편집한 지면에서는 교향악의 황홀한 선율이 들리는 듯하다”라고 했다는 회고도 전해진다. 그는 ‘고도 순례·경주’(1929년) ‘단군 성적(聖跡) 순례’(1932년) 등 국토 순례기를 동아일보에 연재하며 유려한 필치로 민족의식을 드높이기도 했다. 1936년 8월 ‘일장기 말소 사건’ 당시 사회부장으로 구속돼 고초를 겪었다. 이후 일제의 강압으로 회사를 떠나야 했지만 동아일보는 무기정간이 해제된 뒤 그를 학예부장으로 복귀시켰다. 회사를 그만둔 뒤에도 석가탑 전설을 소재로 소설 ‘무영탑’(1938년 7월∼1939년 2월)을 본보에 연재하며 민족혼을 고취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동아일보에는 100년 가까이 게재되는 코너가 있다. 1920년 4월 10일자에 처음 등장한 ‘휴지통’과 같은 해 7월 25일자(지령 100호)부터 시작된 ‘횡설수설’이다. 국내 언론사상 최장수 고정란, 칼럼으로 만 97년을 넘어 오늘도 연재되고 있다. 제목에 대해 ‘횡설수설’은 첫 회에서 “천언만어(千言萬語)가 횡설수설에 불과할 것”이라고 운을 뗐다. 휴지통은 마치 ‘휴지통에 버릴 만한 원고’ 같다. 그러나 실제로 두 코너는 당대의 권력에 정면으로 맞선 창(槍)이자 서민들의 애환을 대변하는 창(窓) 역할을 했다. 휴지통은 첫 회부터 1년 전 3·1만세운동 얘기를 꺼내며 조선총독부를 향해 직격탄을 날렸다. “정무총감 미즈노 렌타로(水野鍊太郞) 씨는… 조선말을 배우려면 제일 먼저 ‘만세’가 어떤 말인지 투철히 궁리해야.” 횡설수설도 “인기(印機·인쇄기)에서 떨어지는 신문지를 산더미같이 실어서 경찰서로 잡아간다”며 ‘언론자유’가 유린되는 상황에 대해 총독부를 비판했다. 초기에는 이상협 편집국장이 두 고정란을 직접 썼다. 총독부는 촌철살인과 같은 단평(短評)에 아픈 곳을 계속 찔리자 무척 당황했다. 일본어 혼용을 비판한 1920년 4월 27일자 휴지통 때문에 발매 금지와 삭제 뒤 재발매 처분이 내려지기도 했다. 3·1운동 7주년 축전 게재로 무기정간을 겪고 난 뒤 “언론기관은 정지가 아니면 금지”라고 비판한 횡설수설 집필 기자 최원순이 징역 8개월을 선고받기도 했다. 광복과 6·25전쟁 뒤에도 두 코너는 권력을 비판한 정론, 세태를 응축한 기사로 오래도록 독자의 사랑을 받았다. 독자 조사에서 가장 많이 읽히는 내용 3, 4위에 꼽히기도 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1950, 60년대 가수와 영화배우로 활약하며 전쟁으로 상처받은 국민들을 위로했던 나애심(본명 전봉선·사진) 씨가 20일 별세했다. 향년 87세. 평안남도 진남포에서 태어난 고인은 6·25전쟁 중 오빠 전오승이 작곡한 ‘정든 화랑님’ 등의 노래를 부르며 가수 생활을 시작했다. 대구로 피란해 이북 출신 예술인들로 구성된 ‘꽃초롱’ 단원으로 입단했다. 1953년 데뷔 첫 앨범에서 전오승이 작곡한 ‘밤의 탱고’ 등을 불렀고, 가수 겸 작곡가 한복남이 ‘나애심(羅愛心)’이라는 예명을 지어줬다. 이후 ‘언제까지나’ ‘미사의 종’ ‘황혼은 슬퍼’ ‘맘보는 난 싫어’ ‘해 떨어지기 전에’ ‘아카시아 꽃잎 질 때’ 등 수많은 히트곡을 포함해 300여 곡을 불렀다. 이목구비가 뚜렷한 외모로 영화배우로도 큰 사랑을 받았다. ‘구원의 애정’ ‘물레방아’ ‘백치 아다다’ ‘쌀’ ‘감자’ 등 100여 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1980년대 들어서 연예활동을 중단했다. 고인은 딸 김혜림이 1989년 ‘DDD’라는 노래로 데뷔해 인기를 얻는 등 연예인 집안으로도 화제를 모았다. 빈소는 삼성서울병원, 발인은 22일 오전 9시. 02-3410-3151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저는 미국의 제일인자 슈로더 선수와 병주(병走)하야 육초 팔의 차로 그만 패하엿읍니다. 저는 힘껏, 맘껏, 가슴이 아프도록 뛰엇읍니다. 뻬스트(베스트)를 다하엿읍니다. 조금도 후회가 없읍니다.” ‘오직 뻬스트를 다할 뿐’이라는 제목과 함께 동아일보에 실린 이 기고는 1936년 2월 제4회 독일 가르미슈파르텐키르헨 겨울올림픽 빙속(氷速)에 출전한 김정연 선수가 전날의 5000m 경기 결과를 보내온 것이다. 동아일보는 17회에 걸쳐 김 선수의 ‘빙상 정도기(征途記)’를 연재했다. 빙상은 손기정 선수의 마라톤과 더불어 조선인의 자존심이 걸린 스포츠였다. 일제강점기 우리 민족 최초의 빙상대회는 동아일보 평양지국이 1923년 1월 연 ‘대동강 빙상 운동대회’다. “관람자가 강 좌우와 성벽의 양편과 운동장에 무려 수만 명이나 되어 인산인해의 대성황을 이뤘다.” 본보는 1940년 마지막 대회까지 평양청년회, 관서체육회와 이 대회를 공동주최하거나 후원했다. 실내 경기장이 없었던 시절이라 얼어붙은 강 위에서 경기가 열렸다. 본보 주도로 결성된 조선체육회는 1925년 1월 제1회 전조선빙상경기대회를 한강에서 열었다. 대회 명칭을 ‘전조선빙상경기선수권대회’로 바꾸어 해마다 선수가 100명 넘게 참가했고, 1938년 마지막 대회까지 김정연 선수를 비롯한 당대의 빙상 스타를 여럿 배출했다. 최초의 여자빙상경기를 후원한 것도 동아일보였다. 1934년 열린 제1회 전조선여자빙상경기대회에서는 관객이 링크 주위를 스무 겹으로 에워싸고도 넘쳤다. 동아일보는 사설에서 “여성에게 완전히 문호를 개방해…빙반 상에서 진취적 기백을 함양할 것”이라고 했다. ‘빙속 여제’ 탄생의 뿌리인 셈이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2017년 문화계는 참으로 ‘오락가락’했다. 행복이 지나가면 슬픔이 왔고, 아픔이 아물면 기쁨이 돋아났다. 새로운 한 해 ‘오는 즐거움(樂)’을 맞아들이기 위해 2017년 한 해 문화계의 사연과 화제를 모아봤다. “약간 뜬금없는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집권 23일째를 맞은 문재인 대통령이 올 6월 초 수석·보좌관회의에서 불쑥 꺼낸 ‘뜬금’ 없는 얘기는 올 한 해 문화재·학술계를 뜨겁게 달궜다. 문 대통령은 이날 “지방 공약에 포함된 가야사 연구와 복원을 국정과제에 꼭 포함시켜 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문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문화재청은 내년도 가야유적 발굴에 32억 원, 보수정비에 145억 원을 투입하는 내용의 ‘가야문화권 조사·연구와 정비사업’을 최근 발표했다. 학계는 “신라사 연구에 가려 빛을 보지 못한 가야사 연구가 활성화될 수 있는 길이 열렸다”며 환영 섞인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정치권 개입으로 인한 부작용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나왔다. 앞서 박근혜 전 대통령이 이례적으로 발굴현장을 방문한 이후 경주 월성 발굴조사가 속도전으로 흐른 전례가 있어서다. 가야유적이 있는 영·호남 지방자치단체들이 최근 정부에 요청한 가야사 관련 예산은 무려 3조 원에 달한다. 가야사 복원의 본래 취지와 무관하게 지자체 간 과열 경쟁과 예산 낭비가 우려되는 대목이다. 7년을 끈 이른바 ‘증도가자(證道歌字)’ 논란이 올해 일단락된 것도 특기할 만하다. 문화재위원회는 올 4월 증도가자에 대한 국가문화재 지정을 전격 부결시켰다. 앞서 증도가자 재검증을 실시한 조사단의 ‘지정 보류’ 의견에서 한발 더 나간 예상 밖 결정이었다. 문화재위는 부결 사유에 대해 “증도가자의 출처와 구입 경로가 불확실하다”고 밝혔다. 증도가자 논란은 국가문화재 지정에서 출처 규명이 핵심이라는 교훈을 남겼다. 올해 학술분야에서는 인공지능(AI)과 인문학 연구의 결합이 주목받았다. 한국고전번역원은 세계 최초로 AI를 이용해 한문 고전을 번역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첫 대상은 ‘승정원일기’. 번역기간을 45년에서 18년으로 27년가량 단축할 수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이 일본 교토대 서고에서 추사 김정희의 친필 시첩을 비롯해 조선후기 문화의 정수가 담긴 희귀 고문헌과 서화 등 수천 점을 발견했다. 경주 석굴암의 원모습을 보여주는 논문도 나왔다. 최영성 한국전통문화대 교수는 19세기 말 석굴암 중수 공사를 기록한 상량문을 정밀 분석해 공사 이전에는 지금과 달리 목조전실(木造前室)이 없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현대사와 관련해서는 문 대통령의 “2019년 건국 100주년을 맞는다”는 8·15 경축사가 해묵은 건국 시점 논쟁을 다시금 촉발했다.김상운 sukim@donga.com·조종엽 기자}

‘동아일보(東亞日報)’라는 제호에는 무슨 뜻이 담겨 있을까. 민족이 발전하려면 시야를 넓게 해 조선을 넘어 동아시아 전체, 나아가 세계를 무대로 활동해야 한다는 취지에서 나왔다. 나라를 강제로 빼앗긴 식민지 현실임에도 제호부터 ‘글로벌’한 포부를 담은 것이다. 제호를 제안한 이는 1919년 3·1운동 뒤 한성 임시정부를 조직했던 석농(石농) 유근(1861∼1921)이다. 조선 말기 민중 계몽에 앞장섰던 황성신문의 창간 멤버이자 사장을 지내기도 했던 유근은 동아일보 창간 시 편집감독으로 참여했다. 독립 정신을 고취한 민간 신문의 정신을 동아일보가 이어 받은 것이다. 다른 한편 동아는 곧 조선을 뜻하기도 했다. “동방 해뜨는 곳의 주인은 조선됨(임)이 바꾸지 못할 것이요.” 창간호 5면에 실린 국어학자이자 사학자인 애류(崖溜) 권덕규(1890∼1950)의 기고 ‘동아해(東亞解)’에 담긴 표현이다. 이 글은 옛 우리 민족의 활동 무대를 북아시아에서 동아시아까지로 폭넓게 바라보면서 지난날 부강하고 찬란한 문명을 이뤘음을 강조했다. “‘동아’란 넓게는 조선, 중국, 일본 등 여러 나라를 모두 가리키는 것이지만 좁게는 만몽(滿蒙·만주와 몽골) 대륙과 조선반도의 옛 조선 땅을 가리키는 다른 이름이다.” 민족정신을 고취하고자 하는 목적의 역사관 아래 동아시아가 곧 조선의 옛 땅이라고 강조한 것이다. 글은 또 조선 민족의 사명은 ‘홍익인간’이며 세계를 구제하는 데 있다고 설명했다. 오늘날에 비춰도 장대한 포부를 담았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