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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한미군이 서울 용산 미군기지 내 미군과 관련된 기념물을 평택기지로 반출하겠다고 요청하자 문화재청이 56점을 승인한 것으로 10일 확인됐다. 국회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 위원장인 유성엽 국민의당 의원이 문화재청에서 제출받은 ‘용산 미군기지 내 기념물·기념비 평가결과 목록’ 자료에 따르면 문화재청은 지난해 12월과 올 1월 국방부 주한미군기지 이전사업단 요청에 따라 용산기지 내 기념물 68건을 평가했다. 이 중 조선시대 문인석상 등 12건을 제외한 나머지에 대해 ‘이전 가능’이라고 승인했다. 이전 허가가 난 기념물에는 주한미군군사고문단 기념비, 6·25전쟁에서 전사한 미7사단 코이너 소위의 이름을 딴 ‘캠프 코이너’ 안내 동판, 1978년 한미연합군사령부 창설 기념 박정희 전 대통령 휘호 비석 등이 포함됐다. 낙동강전투 등을 지휘한 워커 장군 동상을 비롯한 12점은 평택기지로 6월까지 이전이 완료됐다. 그러나 일본군이 만주사변 사망 장병을 기린다며 1935년 용산기지 자리에 세운 충혼비를 미군이 교체해 건립한 ‘한국전쟁 미군 기념비(미8군 본부 기념비)’ 등 용산의 역사와도 관련이 있는 유물에 대해 이전 결정을 한 것은 성급했다는 지적도 나왔다. 신주백 연세대 국학연구원 교수는 “미군 장군 동상 같은 것은 평택으로 옮기는 것이 당연하다”면서도 “한국과 미국 양측 모두 이전 뒤 그 장소를 어떻게 기념할 것인가, 한미동맹에서 용산기지의 의미를 어떻게 역사로 만들 것인가에 대한 고려가 부족했다”고 말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그자들은 우리를 한 명씩 끌어냈다. 할아버지 한 명이 총을 맞았고, 그 딸이 울부짖자 딸도 총을 맞았다. 그리고는 내 형 무함마드를 불러내서 우리 앞에서 총을 쐈다. 어머니가 소리를 지르면서―아직 젖먹이였던 여동생 후드라를 안은 채로―쓰러진 형을 끌어안자 그자들은 어머니한테도 총을 쏘았다.” 1990년대 발칸반도에서 벌어진 ‘인종청소’의 한 장면이 아니다. 1948년 4월 9일 유대 군대가 예루살렘 서쪽 언덕 위에 자리한 데이르야신 마을을 점령하면서 벌인 일이다. 유대 군대는 집집마다 기관총을 난사했고, 마을 사람들을 한곳에 모아놓고 학살했다. 1948년 5월 이스라엘이 건국을 선언하기 두 달 전 ‘플랜D’라는 암호명이 붙은 군사명령이 유대 군대에 하달된다. ‘대규모 위협을 가할 것, 마을과 인구 중심지를 포위하고 포격할 것, 주택 재산 물건에 불을 지를 것, 사람들을 추방할 것, 남김없이 파괴할 것, 주민들이 돌아오지 못하도록 잔해에 지뢰를 설치할 것….’ 팔레스타인 원주민에게 ‘죽거나 혹은 떠나거나’를 선택하라는 이 작전은 아주 ‘훌륭하게’ 수행됐다. 그해 가을까지 6개월 동안 학살과 파괴가 지속됐다. 원주민의 절반인 80만 명 가까이가 강제로 추방됐고, 마을 531곳이 파괴됐다. 책은 이스라엘 건국을 지칭하는 아랍어 ‘나크바’(재앙)는 모호한 용어이고, 당시 벌어진 일을 ‘종족청소’로 봐야 한다고 했다. 저자는 나치를 피해 독일에서 이스라엘로 건너온 유대인 부모 슬하에서 자랐다. 이 비극의 진실을 파헤친다는 이유로 살해 협박을 받았고 1984년부터 교수로 일하던 이스라엘 하이파대에서 2007년 파면됐다. 이후 영국으로 이주해 엑서터대 교수로 일하고 있다. ‘발칸의 도살자’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전 유고연방 대통령은 마침내 전범재판을 받았지만 팔레스타인에서 벌어진 ‘종족청소’는 부정되고 잊히기 일쑤다. 이스라엘 교과서는 ‘유대 쪽은 팔레스타인인들에게 그냥 남으라고 설득했다’는 거짓 역사를 서술했고 학살과 추방은 역사에서 지워졌다. 유대인들이 홀로코스트에서 벗어난 지 3년도 안 돼 이 같은 일을 자행했다는 점은 참으로 아이러니하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2·28 대구 학생시위가 4·19혁명으로 이어지는 교량 역할을 했던 3·8민주의거의 57주년 기념 학술대회가 열린다. 3·8민주의거는 자유당 정권의 독재와 부정에 항거하며 대전의 고교생들이 1960년 3월 8∼10일 벌였던 시위다. 3·8민주의거기념사업회(공동의장 김용재 김종인)는 ‘3·8민주의거―그 과제와 실천방안’을 8일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연다. 기조강연을 맡은 정구종 동서대 석좌교수는 미리 공개한 강연문에서 “2·28 시위가 ‘학원민주화’를 요구한 데 이어 3·8 시위가 ‘자유당 독재 타도’로 한걸음 더 나아갔고, 이는 4·19혁명의 ‘이승만 정권 퇴진’ 요구로 이어진다”며 “학생들의 순수한 힘과 의지는 현실 정치를 바로잡고 새로운 정치질서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선도적인 역할을 해왔다”고 밝혔다. 정 교수는 또 3·8의거를 비롯한 민주화운동 참여자들의 육성을 녹음해 디지털화하고 관련 자료와 함께 아카이브로 보존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날 학술대회에서는 민찬 대전대 교수, 이영조 배재대 교수, 이용 미디어스토리 대표가 주제 발표를 한다. 토론은 김웅락 대전대 명예교수, 고만수 세계환경문학협회 한국부총재, 고현덕 대전시 자치행정과장, 이회경 유원대 객원교수 등이 참여한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6월 민주항쟁 직후인 1987년 9월 창간된 ‘역사비평’이 최근 2017년 가을호(계간 120호)를 내며 30주년을 맞았다. 역사문제연구소와 역사비평사가 내는 역사비평은 6월 민주항쟁 뒤 진보를 표방하며 가장 먼저 창간한 학술지이면서, 당시부터 지금까지도 발간되는 몇 개 안 되는 학술지 중 하나다. 이번 호에는 왕조 교체기인 ‘여말선초’를 연속성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특집이 실렸다. 송웅섭 서울대 규장각 책임연구원은 이 시기 새로운 정치 세력이 지방 향리층에서 등장했다는 통설과 이에 대한 반론을 검토한 뒤 정치사와 사회사의 분리 필요성을 제기한다. 또 다른 특집 ‘21세기 민주주의의 위기’는 세계화된 자본주의에서 대의제 민주주의의 한계가 드러나고 있음을 조명했다. 역사비평은 창간 당시부터 전문 학술지와 대중서의 경계에서 학계의 연구 성과를 알리는 데 초점을 맞췄다. 특히 현대사를 연구와 서술의 대상으로 삼은 사실상 첫 학술지로 평가된다. 역사비평은 현대사에 관해 주류적 역사인식을 비판하는 여러 특집을 게재했고, 근현대사를 재해석한 ‘우리 역사 바로 알자’라는 시리즈가 대중적 호응을 얻었다. 주요 논쟁을 이끌기도 했다. 1992년 겨울호의 대토론 ‘한국 민족은 언제 형성되었나’도 한 예다. 노태돈 서울대 교수, 박호성 서강대 교수의 발제와 여러 학자의 토론을 통해 한민족을 역사적, 실증적으로 접근했다. 25년 전의 글이지만 ‘민족은 근대의 산물’이라는 인식과 ‘단군 이래 단일민족’이라는 사고가 여전히 대립하는 오늘날에도 큰 의미가 있다. 역사문제연구소장인 김성보 연세대 사학과 교수는 “역사비평은 역사학과 시민사회의 가교 역할을 하는 한편으로 정치, 경제, 사회, 국문학 등 다양한 학자들이 참여하는 소통의 장이 돼 왔다”고 평가했다. 역사비평은 초기 ‘학술운동’ 성격이 강했지만 2000년대 들어서는 한국 사회가 나아갈 방향을 성찰하는 기획도 실었다. 개항 이후 지식인, 정치인들이 동아시아와 민족의 향방을 어떻게 탐색했는지 다룬 ‘한국인의 동아시아 인식―역사와 현재’(2006년 가을호), ‘순응과 갈등의 한미관계 60년, 미래 지향의 대안을 찾아’(2009년 봄호) 등이 대표적이다. 2010년대 들어서는 박물관 기념관 역사교과서 등 ‘역사 정책’을 탐구하는 한편으로 ‘민중의 일상사’에 주목하기도 했다. 지난해에도 ‘한국 고대사와 사이비 역사학 비판’ 시리즈를 통해 첨예한 논쟁을 촉발했다. 역사비평 편집주간인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최근 호 머리말에서 “역사학의 위기는 실증적으로만 만족시키면 된다는 매너리즘에서 온다”며 “역사비평은 새로운 논쟁을 만들고 주도할 것”이라고 밝혔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재단법인 인촌기념회와 동아일보사는 5일 인촌상 수상자를 발표했다. 31회를 맞은 올해 인촌상은 교육, 언론·문화, 인문·사회, 과학·기술 4개 부문에서 탁월한 업적을 이룬 4명이 수상자로 선정됐다. 심사는 부문별로 권위 있는 외부 전문가가 4명씩 참여해 7월 초부터 8월 말까지 진행됐다. 수상자들의 소감과 공적을 소개한다. 》 ▼강의 약속 지키려 靑 오찬요청 거절… “조용히 나의 길 걸었을 뿐”▼[교육]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97)가 잠시 공연, 도서 윤리위원을 맡았던 때의 일이다. 당시엔 전두환 대통령과 신군부가 집권해 나는 새도 떨어뜨릴 위세였다. ‘대통령과 윤리위원들 오찬이 있으니 일주일 뒤 청와대로 들어오라’는 연락이 왔다. 마침 그 시간에 다른 대학에 강의 일정이 있던 김 교수는 “학생들과 한 약속을 어길 수 없어 못 간다”고 했다. 오찬 거절 뒤 윤리위원에서 해임됐다는 전화가 왔다. “잘됐다”는 게 그의 답이었다. 평생을 교육자로 헌신한 김 교수의 성품을 보여주는 일화다. 그는 중앙중고교에서 연세대로 옮기면서 ‘다른 데 눈 돌리지 말고, 교수다운 교수로 평생을 살자’고 다짐했다. 연세대에서 보직을 맡아 달라는 총장의 요청에도 다른 교수를 그 자리에 추천하면서 자신은 사양했다. “중앙학교 설립자인 인촌 김성수 선생을 5, 6년 동안 가까이 뵈면서 여러 가지를 배웠습니다. 그중 중요한 게 전체를 위해 자신보다 유능한 사람을 밀어주는 것과 편 가르기를 경계하는 것이었어요. 그게 아무나 잘 안 되는데 왜 인촌 선생은 됐느냐, 애국심입니다. 도산 안창호 선생도 그렇고요.” 김 교수가 중앙중고교와 대학에서 길러낸 후학들은 한국뿐 아니라 미국 등 해외 유수 대학에서 학자로 성장했다. 중앙중 시절 제자들은 여든이 넘은 이들이 적지 않다. 제자들의 귀가 먼저 어두워지기도 하지만 사제간의 정이 지금도 돈독하다. 책에 ‘○○군에게’라고 써서 제자에게 선물하면 여전히 어린애처럼 좋아한다는 게 노교수의 말이다. 대학에서 정년퇴직하면서 김 교수는 “대학을 졸업하는 학생의 마음으로 사회에서 일하겠다”고 마음먹었고 강연과 저술을 통해 오늘날까지 ‘사회 교육’을 지속하고 있다. 근간 ‘백년을 살아보니’가 베스트셀러 목록에 올랐을 뿐 아니라 올해, 내년, 그리고 한국 나이로 백 살이 되는 후년에도 각각 한 권씩 신간을 출간할 예정이다. “제자들이 70대 중반쯤 되니 스스로 늙었다고 생각하기도 하더군요. 저는 그 나이 때가 삶에서 제일 좋은 성숙기였습니다. 다들 그렇게 생각해줬으면 좋겠어요.” 수상 소감을 묻자 김 교수는 “조용히 나의 길을 걸었을 뿐 별다른 업적이 없는데, 왜 나에게 상이 돌아왔는지…”라고 말했다. 이내 그는 “6·25전쟁, 4·19, 민주화… 내가 살아온 100년이 우리 민족에게도 참 어려운 시간이었는데, 그동안 사회에 여러 책임을 지고 사느라 고생 많았다고 인촌 선생이 위로해주시는 것 아닌가 싶다”며 눈시울을 살짝 붉혔다.● 공적 1947∼1954년 서울 중앙중고교에서 교사와 교감으로 재직했고, 이후 1985년까지 연세대 철학과 교수로 철학을 통해 한국 교육과 문화 발전에 헌신했다. ‘헤겔과 그의 철학’ ‘종교의 철학적 이해’ 등 저술 90여 권을 냈다. 타계한 안병욱 김태길 교수와 함께 ‘3대 철학자이자 수필가’로 불렸고 6·25전쟁으로 상처받은 국민과 젊은이들의 실존적 상처를 어루만지고 위로했다는 평가다. 중앙중고교 시절 설립자인 인촌 선생의 애민정신에 감명 받아 인촌의 교육 헌신을 현장에서 실천했다. 대학에서도 직책을 사양하고 후학 양성과 연구에 전념했다. ‘사람이 많이 모인 곳에서 앉아 있으면 학생이 되고, 서 있으면 선생님이 된다’는 신념으로 대학 강단을 떠난 뒤에도 사회의 강단에서 왕성한 강연 활동을 펼치고 있다. ▼‘한국대표’ 대관령음악제 산파… “내년엔 ‘인천뮤직’ 판 키울것”▼[언론·문화]강효 美 줄리아드음악원-예일대 음대 교수“최고 수준의 예술축제가 있는 나라는 매력과 힘이 있습니다. 시민들이 참여하고 세계 각국의 사람들이 모여듭니다.” 강효 미국 줄리아드음악원 및 예일대 음대 교수(73)의 오랜 꿈은 2004년 강원도 평창 대관령국제음악제에서 열매를 맺었다. 2일(현지 시간) 미국 뉴욕에서 만난 그는 “1970년대 중반부터 약 30년간 애스펀음악제에 교수로 참여하며 폐광촌 애스펀(미국 콜로라도주)이 세계적 음악도시로 성장하는 모습을 보고 큰 자극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가 예술총감독을 맡아 7년간 활동한 대관령국제음악제는 애스펀처럼 세계 수준의 음악가 공연을 소개하고 젊은 유망주들에게 레슨 기회를 주는 ‘국가대표 음악제’로 성장했다. 음악가의 꿈과 교육자로서의 소명이 마침내 앙상블을 이룬 것이다. 강 교수는 인촌상을 수상하게 된 소감에 대해 “문화와 인재 양성을 통해 국가 발전에 기여한 인촌 선생의 이름을 딴 큰 상을 받게 돼 무척 영광”이라며 “음악 활동을 하면서 같이 일하고 도와주신 분들에게 감사드린다”고 주위 사람들에게 공을 돌렸다. 서울대 음대와 줄리아드음악대학원을 나온 강 교수는 1994년 한국을 비롯한 세계 정상급 젊은 연주자로 구성된 현악 실내악단인 세종솔로이스츠를 창단해 국내에 실내악 붐을 일으켰다. 세종솔로이스츠는 창단 이후 23년간 세계 120개 도시에서 500차례 이상 공연을 했다. 평창 겨울올림픽 초대 홍보대사로도 활동했다. 제자들의 성장 단계에 맞는 ‘맞춤형 교육’을 강조하는 그는 음악 영재를 세계적 음악가로 키워내 ‘천재들의 스승’으로 불린다. 지금도 일주일에 사흘씩 뉴욕 줄리아드음악원과 코네티컷주 뉴헤이븐의 예일대를 오가며 학생들을 가르친다. 그는 청년들을 위해 탄탄한 기초와 상상력을 키우는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강 교수는 “마음가짐, 연주실력, 지식 등이 얼마나 준비됐느냐에 따라 사람마다 성장 시기가 다르다”며 “학생들을 가르치기 전에 ‘해야 할 말과 하지 말아야 할 말’을 생각한다”고 말했다. “사람들은 보고 듣고 배우고 느낀 것만큼 상상할 수 있습니다. 상상력이 풍부해지면 하는 일이 재밌어집니다. 결과도 좋아지죠. 더 행복감을 느낄 수 있고요.” 강 교수는 올해 처음 열린 ‘인천 뮤직 힉 엣 눙크(hic et nunc·‘여기 그리고 지금’이라는 뜻의 라틴어)!’의 예술고문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는 “새로운 음악계의 흐름을 소개하는 이 행사를 내년에 더 키워볼 계획”이라고 음악에 대한 열정을 보였다.● 공적40여 년간 바이올린 연주자, 교육자, 예술감독의 길을 걸었다. 길 샤함, 김지연, 장영주 등 음악영재를 세계적 음악가로 키워내 ‘바이올린계의 스승’으로 불린다. 1985년 동양인 최초로 세계적 음악 명문대인 줄리아드음악원 정교수가 됐고 2008년 예일대 음악대 정교수로 임용돼 1000여 명의 음악인을 길러냈다. 7년간 대관령국제음악제 예술총감독으로 활동하며 한국의 대표 음악제로 키웠다. 1994년 현악 실내악단 세종솔로이스츠를 창단해 한국 클래식 음악계의 저변을 넓혔다. 미국 CNN은 세종솔로이스츠를 ‘세계 최고의 앙상블’ 중 하나로 평가했다. 힐러리 클린턴 전 미 국무장관은 세종솔로이스츠 공연을 보고 감탄해 세 차례 감사의 편지를 보냈다. 2003년 대한민국 보관문화훈장을 받았다. ▼영미문학비평-사전학 큰 족적… “우리말에 깊은 관심 갖길”▼[인문·사회]이상섭 연세대 영어영문학과 명예교수“수상 소식을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제가 받을 수 있는 상이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고 아버지, 형제들과 우리말에 대해 이야기하던 시간이 떠올랐습니다.” 1일 서울 서대문구 자택에서 만난 이상섭 연세대 영어영문학과 명예교수(80)는 우리말 사전 편찬에 큰 획을 긋게 만든 동력을 이렇게 설명했다. 이 교수의 아버지는 평양요한학교 교장, 연세대 신학과 교수를 지낸 이환신 목사(1902∼1984)로 자녀들에게 우리말을 정확히 사용해야 한다고 가르치며 수시로 우리말을 주제로 대화를 나눴다. 덕분에 이 교수는 어려서부터 주변 사람의 말을 듣거나 가게 간판, 현수막, 글 등을 볼 때 유심히 살피는 게 버릇처럼 굳어졌다고 한다. 이 교수는 수상 소감으로 “인촌 선생은 먹고살기도 힘겨웠던 이 땅에 문화의 꽃을 피우기 위해 수많은 씨앗을 뿌렸던 선각자였다”며 “말할 수 없이 기쁘면서도 이처럼 큰 상을 과연 내가 받을 자격이 있는지 몇 번이나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영미문학비평과 사전학, 언어학에서 독보적인 업적을 남겼다. 활발한 비평 활동을 하며 문학비평용어를 우리말 의미를 잘 살려 엮은 ‘문학비평용어사전’을 편찬했다. 우리말을 어떻게 사용하는지 실제 사례를 소개한 첫 사전인 ‘연세한국어사전’을 발간해 우리말 활용의 정확도를 높이는 데 기여했다. “학창 시절 영한사전 대신 영영사전을 보며 공부했어요. 옥스퍼드 사전과 달리 우리말 사전은 단어의 용례가 없어 너무나 안타까웠습니다. 나중에 제대로 된 우리말 사전을 꼭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했죠.” 그는 연세한국어사전을 만들기 위해 15년간 영국 학자, 출판인, 서점 관계자 등과 꾸준히 교류하며 조언을 구했다. 퇴직 후에는 10년간 매달린 끝에 셰익스피어 전집 번역을 완성했다. 기존 문어체 번역과 달리 네 글자씩 우리말 운율을 맞추는 4·4조를 창의적으로 자연스럽게 살려 옮긴 것. 출판계에서는 한국어판 셰익스피어 전집이 일본어판의 영향에서 벗어나 영어 문화의 정수를 맛보게 한 이정표를 세웠다고 평가한다. “셰익스피어는 연극이나 낭송을 위해 작품을 썼어요. 내용 못지않게 리듬이 중요하죠. 문어체가 아니라 운율이 있는 글로 번역해야 원서의 맛을 제대로 음미할 수 있습니다.” 평생 연구와 글쓰기에 매진하며 학자로서 외길을 꼿꼿하게 걸어온 이 교수는 “우리말을 충실하게 잘 구사하다 보면 외국어를 익히는 데도 도움이 된다”며 “우리말에 대해 보다 깊은 관심을 갖는 분위기가 만들어졌으면 좋겠다”고 했다.● 공적연세대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에머리대에서 영문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연세대 영어영문학과 교수를 지내며 자기만의 색깔이 또렷한 비평을 많이 남겼다. ‘언어와 상상’, ‘역사에 대한 불만과 문학’ 등 저서를 통해 언어 활용에 대해 고찰했다. 외국어 문학비평 용어를 우리말 특성에 맞게 정리한 결과를 엮어 ‘문학비평 용어사전’으로 편찬했다. 영문학자이면서도 우리말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우리말 사용의 실제 사례를 처음 넣은 ‘연세한국어사전’을 편찬했다. 국내 최초로 말뭉치 수집과 데이터베이스 구축 작업을 시작해 사전학과 언어학 발전에 기여했다. 정년퇴임 후 셰익스피어 전집을 우리말 운율에 맞춰 옮긴 것은 독창적이면서도 탁월한 성과로 평가받는다. 보관문화훈장, 대한민국문학상, 외솔상 등을 받았다. ▼암세포 표적치료 획기적 성과… “항암제 부작용 크게 줄어들것”▼[과학·기술]김종승 고려대 화학과 교수“개인적으로 크나큰 영광이다. 연구팀 모두가 지난 10여 년간 한 분야만 연구한 결과를 인정해 주신 거라고 생각한다. 암과 싸우며 고통당하는 환자들에게 공헌할 방법을 찾기 위해 더욱더 노력하겠다.” 인촌상 과학·기술 부문 수상자인 김종승 고려대 화학과 교수(54)는 암 세포에만 약물을 정확히 전달하면서도 그 과정을 직접 모니터링할 수 있는 ‘약물 전달 복합체’ 연구로 세계 화학계에서 주목하는 연구자다. 그의 오랜 연구가 집약된 결과는 세계적 화학저널인 미국화학회지(JACS) 8월호에 표지논문으로 게재됐다. 암 세포를 치료할 물질을 담을 수 있는 약물 전달 복합체를 유기화학합성을 이용해 인위적으로 만든 것이다. 김 교수는 “암 세포에만 항암제를 실어 나를 배를 만든 것으로, 모든 항암제에 적용 가능한 기술”이라고 설명했다. 암에 걸린 사람에게 항암제 치료는 필수다. 그러나 정상 세포까지 공격하기 때문에 머리카락이 빠지고 구역질이 나는 등의 부작용이 적지 않다. 부작용이 현격히 적은 표적치료제도 있지만 효과를 볼 수 있는 암 종류는 적다. 김 교수의 연구는 박사 과정 시절인 3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처음에는 각종 가스나 병원균 등을 화학적으로 찾아내는 ‘화학센서’를 연구했다. 그러다가 10여 년 전 이런 탐색 기술을 의학에도 적용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아예 암 세포를 추적해 약물을 전달하는 시스템을 만들어 보자는 아이디어를 냈다”고 말했다. 암 진단과 치료를 동시에 할 수 있는 ‘테라그노시스(Theragnosis)’ 개념을 적용한 연구를 국내에서 처음 시작한 것이다. 테라그노시스는 ‘치료(Therapy)’와 ‘진단(Diagnosis)’의 합성어다. 암 세포를 추적하고 약물을 전달하는 표적치료 물질에 대한 연구는 2012년부터 조금씩 성과를 내기 시작했다. 미국화학회지에 표지논문과 주목할 논문으로 관련 기술들을 잇달아 발표했다. 2012년 당시에는 암 세포를 추적해 약물을 전달할 수 있는 물질의 가능성에 대해 발표했지만 5년이 지난 올해에는 그 약물 전달 물질을 유기화학합성을 이용해 인위적으로 만들어내는 데도 성공한 것이다. 연구는 곧 실용화 단계에 들어갈 예정이다. 김 교수는 “5년 안에 임상시험을 종료하고, 10년 후에는 상용화까지 끝마쳐 병원에서 환자 치료에 쓸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목표”라고 말했다.● 공적공주대 화학교육과를 졸업하고 충남대에서 화학석사 학위를, 미국 텍사스 테크대에서 화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건양대와 단국대 교수를 거쳐 2007년부터 고려대 교수로 재임 중이다. 2009년부터 정부의 연구개발사업단인 ‘발광센서 재료연구단’을 이끌고 있다. 과학기술논문인용색인(SCI) 저널에 논문 300여 편을 게재하고, 국내외 특허 40여 개를 출원하며 관련 연구 분야에서 세계적으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미래창조과학부(현 과학기술정보통신부)의 ‘이달의 과학기술자상’과 ‘지식창조 대상’을 2013년 3월과 11월에 잇달아 받았다. 2015년엔 김 교수의 연구 성과가 미래부 선정 ‘우수연구 100선’의 최우수 성과에 뽑혔다.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정회원이자 대한화학회 부회장이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뉴욕=박용 특파원 parky@donga.com·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전승민 동아사이언스 기자 enhanced@donga.com ※ 제31회 인촌상 심사위원(가나다순)▽교육 △위원장 정진곤 전 민족사관고등학교장 △위원 나승일 서울대 교수, 신현석 고려대 교수, 조영달 서울대 교수▽언론·문화 △위원장 윤영철 연세대 교수 △위원 김영나 서울대 명예교수, 우찬제 서강대 교수, 최맹호 전 동아일보 부사장▽인문·사회 △위원장 박찬욱 서울대 부총장 △위원 이재열 서울대 교수, 정재서 이화여대 교수, 주경철 서울대 교수▽과학·기술 △위원장 국양 서울대 교수 △위원 김기문 포스텍 교수, 유명희 KIST 책임연구원, 유진녕 LG화학 기술연구원 사장}

6일 개봉하는 영화 ‘살인자의 기억법’(감독 원신연)의 주인공 병수는 알츠하이머병에 걸린 연쇄살인범이다. 김영하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이 영화에서 병수는 기억을 잃어가면서도 또 다른 연쇄살인범으로부터 딸 은희(김설현)를 지켜야 한다. 병수를 연기한 배우 설경구(49)를 지난달 30일 서울 종로구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스크린 속 설경구는 잔혹함과 부정(父情), 범죄자의 지능적인 모습과 환자의 흐릿함을 비롯해 모순적인 여러 얼굴을 오간다.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는 불과 50분 동안 설경구는 ‘캐릭터’라는 단어를 29번, ‘얼굴’이라는 단어를 30번 사용했다. ―중량감 있는 배우들도 영화마다 연기가 다 엇비슷하다는 불만이 관객들에게서 나온다. 본인 평가는…. “나도 꽤 오래 그러고 살았다. 그러다가 반성을 하다 만난 게 ‘살인자의 기억법’하고 ‘불한당’이다. 이 영화부터 ‘이 캐릭터는 어떤 얼굴을 갖고, 어떤 외형으로 인생을 살았을까’를 고민하게 됐다.” ―특수분장은 거의 없이 노인 역을 했다. “자칫 부자연스러울 것 같아 배제했다. 그러다보니 선택할 게 얼굴에 기름기를 빼고 실제로 늙는 방법밖에 없더라. 매일 줄넘기를 1만 개씩 했다. 병수가 ‘살인의 습관’이 있는 것처럼 나는 ‘줄넘기의 습관’이 있다.” ―촬영 중 힘들었던 건…. “목을 조르고 졸리는 연기가 공포였고, 무서웠다. 한 번은 목을 졸리다 다리 힘이 빠지면서 쓰러져 기절 직전까지 가기도 했고, 조를 때는 상대 배우가 다칠까 봐 무서웠다. 살인자인데 안 조를 수도 없고….” ―시나리오를 읽지 않고 출연을 결정했다고…. “작품 설명은 먼저 들었고, 출연하겠다고 한 뒤 원작소설을 읽었다. 무서운 속도로 읽었다. 마치 내가 주인공의 망상을 함께 겪은 것 같았다. 영화는 주인공 병수에게 정당성을 부여하는 등 캐릭터를 입체적으로 바꿨다.” ―완성된 영화 시사를 본 소감은 어떤가. “내 연기만 봐서, 전체적인 흐름은 못 봤다. 내 연기의 사소한 것들이 거슬려서 두 시간 동안 괴로웠다. 소설은 한번에 굉장히 스피디하게 읽은 거 같은데, 영화는 내 생각보다는 천천히 갔다.” ―배우로서 자연인으로서 우여곡절이 있었는데, 이제 한국 나이로 쉰 살, 지천명(知天命)이다. “롤러코스터를 탄 것 맞다. 그래도 20여 년 배우라는 한 직업을 하고 있으니 나는 복 받았다. ‘천명’까지는 아니고… 계속 새로운 캐릭터를 찾는 게 답인 것 같다. 고민 안 하고 만든 캐릭터는 정말 고민 없어 보인다. 새로운 얼굴을 찾고 표현하고자 하는 욕망이 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서울 잠실 올림픽 주경기장의 하늘은 살짝 흐려서 가위로 자른 종이처럼 납작했고, 오렌지 빛이 딱 한 줌 남아서 기괴한 느낌을 줬어. 그래, 준비가 된 거야. 2일 오후 7시 20분 ‘대장’(서태지를 부르는 팬들의 애칭) 데뷔 25주년 기념 콘서트장. 제목 ‘타임 트래블러’처럼 대형 스크린 속 별들이 광속으로 지나가며 시간 여행이 시작됐어. 대장이 데뷔했던 1992년, 내가 중학교 2학년 시절로 돌아간 건 아냐. 먼저 9년 전부터 갔어. 2008년 8월 15일 오후, 잠실 주경기장 바로 옆 야구장에서 대장은 ‘ETP FEST 2008’을 열었지. UFO를 형상화한 무대에 대장은 우주선을 타고 내려왔어. 관객들은 마녀들의 축제에 온 것처럼 원을 그리며 돌았지. 대장이 물었어. “16년이 주마등처럼 스쳐가죠?” 관객들이 울음을 터뜨렸어. 9년 전과 달리 관객들은 이번에는 울지는 않았어. 이제 그럴 나이는 지났거든. 그래도 대장은 엄청나더라. ‘난 알아요’의 ‘회오리춤’을 다시 출 줄은 몰랐어. ‘필승’을 라이브로 부르며 ‘원래 음높이로 못 부른다’는 소문을 종결시켰지. 옛 사운드를 그대로 재현한 건 최고였어. ‘하여가’의 태평소 소리가 관객을 그 시절로 이끌었지. 사실 9년 전에는 바로 옆 주경기장에서 ‘SMTOWN LIVE 08’도 열렸지. 대장이 의도한 건 아니겠지만 그건 마치 아이돌과 대결하는 모양새였어. ‘아이들아, 왕이 여기 있단다!’ 하고. 이번에는 아이돌이 대장과 한 무대에 섰어. ‘방탄소년단’이래. 대장이 데뷔할 때 태어나지도 않았던 친구들이 대부분이야. ‘서태지와 아들들’이라는 우스갯소리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올라오기도 했지만 현명한 선택이었어. 이주노와 양현석의 역할을 대신했는데, 옛날의 ‘아이들’도 이 정도로 힘이 넘쳤던 것 같지는 않아. 처음에는 방탄소년단의 팬들과 서태지 팬들의 환호가 따로따로인 듯했지만 이내 구별할 수 없게 됐어. 무대 연출도 섬세하게 공들인 티가 나더라. 옥에 티라면 중간에 대여섯 곡에서 좌우 스크린이 가운데로 합쳐지면서 무대를 중계하지 않아 뒤쪽 2, 3층 관객들이 보기 불편했대. 열 살 아래인 후배 기자가 함께 공연을 보고 말했어. “시대를 대변하는 곡들을 듣고 나니 왜 서태지가 지난날 최고의 가수였는지 이해가 간다”고. ‘교실 이데아’를 부르며 꽉 막힌 교실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우리 세대가 이제 곧 그 교실로 아이들을 밀어 넣을 나이가 돼. 우리에게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한 ‘아주머니’가 짧은 교복 치마를 입은 채 공연장에 들어섰어. 네댓 살 돼 보이는 딸아이의 손을 붙잡고 있었다는 것 말고 옛날의 그 여학생과 달라진 건 없어 보였어. 2일 오후 1시부터 대장의 25주년 기념 LP 음반이 2500장 한정으로 판매됐지. 전날 정오부터 24시간 넘게 줄을 섰다는 조해연 씨(40)는 말했어. “중3 때부터 팬이었는데 벌써 25년…. 뿌듯할 뿐이에요.”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자. ‘25주년 기념’ 콘서트가 흔한가. ‘우리들만의 추억’이면 된 것 아니겠어. 조종엽 jjj@donga.com·김민 기자}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22만여 명의 이름이 담긴 ‘일정 시 피징용자 명부’는 1953년 만들어졌지만 주일 한국대사관 서고에서 먼지에 덮여 있다가 2013년에야 다시 발견된다. 책은 이 명부를 화자로 강제동원의 역사적 배경과 피해자, 피해의 회복을 다룬다. 징용을 다섯 번 갔다 온 할아버지, 억지로 끌려간 ‘학도지원병’, 사할린 징용자의 딸 이야기 등이 펼쳐진다. 저자는 2005∼2015년 강제동원피해조사위원회에서 조사과장으로 일하는 등 20년 동안 이 분야를 연구한 전문가다. 아이들의 눈높이에서 과거사의 진실을 전할 ‘교과서’라고 할 만하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사회민주주의 전통이 깊고 사회적 안전망이 두터운 유럽의 복지국가들과 한국은 그 출발점이 다르다. 그 나라들의 경제, 노동 정책이 웬만큼 오른쪽으로 움직여도 한국보다는 왼쪽이라는 얘기다. 유럽 중도좌파들의 ‘우향우’를 논하려면 잊어서는 안 되는 지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동 개혁을 통해 독일이 오늘날 ‘유럽 경제의 슈퍼스타’로 떠오르는 바탕을 마련한 게르하르트 슈뢰더(73)의 자서전에는 눈길에 갈 수밖에 없다. 슈뢰더가 1998년 ‘적녹연정’(사민당-녹색당 연정·1998∼2005년)을 통해 집권할 때 독일은 ‘유럽의 병자’로 불렸다. 저출산 고령화로 경제의 활력이 줄고 있었다. 사람들이 전보다 연금을 오래 받는 데 반해 가입자 수는 감소했다. 통일의 후유증으로 지출 계산서는 쌓여만 갔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라인강의 기적’이 계속되리라는 막연한 희망에 머물렀다. “개혁이 추상적인 단계에 있는 동안에는 ‘이 나라는 개혁돼야 한다’고 답한다. 그러나 그 개혁이 영향을 미치면 개혁 거부로 돌변한다.” 저자의 말이다. 해고를 쉽게 하고, 실업급여 지급 기간을 줄이면서 지급도 까다롭게 하고, 노동 시간을 늘리고, 연금보험료를 안 내던 저소득층도 내게 하는 정책을 폈으니 반발이 없을 수 없다. 야당은 ‘연금 사기’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제동을 걸었다. 경영자총협회는 개혁안이 충분하지 않다고 했고, 독일노조총연맹은 사민당과 결별하겠다고 했다. 저자는 사민당 총리로서 2004년 노동절에 독일노조총연맹의 집회에 초대받지 못하는 굴욕을 당한다. 마침내 집권 2기 슈뢰더는 선거에서 잇달아 패하고 지지율은 땅에 떨어진다. 2005년 5월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 선거에서 참패하자 승부수를 던진다. 의회를 해산하고 선거를 다시 치르기로 한 것이다. 결과는 사민당 없이 정부를 구성하기 어려울 정도까지 득표하는 ‘절반의 성공’으로 끝났다. 저자의 정책은 앙겔라 메르켈 총리에게로 계승됐다. 책에서 슈뢰더는 깊은 철학을 바탕으로 이상을 실현하려는 거인이라기보다는 그저 필요한 일을 여우처럼 해내는 모습이 두드러진다. 감성을 자극하는 것보다 이런 실용적인 성향이 그의 개혁을 성공시켰는지 모른다. 저자가 ‘늙은 유럽’이라는 비난을 감수하면서 미국의 이라크전쟁에 동참하지 않은 일도 주목할 만하다. 슈뢰더 정책의 각론보다 중요한 건 국가와 지지층의 이익이 충돌했을 때 국가를 우선시하는 자세다. “외교와 안보에서 독립적인 나라가 되려면 탄탄한 경제가 뒷받침돼야 한다”는 말도 가볍지 않다. 러시아에 접근하는 정책을 폈던 저자는 최근 러시아 국영 석유회사의 고위직을 맡겠다고 해 선거를 앞둔 사민당에 ‘표가 떨어지는’ 행동을 하고 있다. 그러나 통일 뒤 경제 격차로 인한 후유증을 겪고 있던 독일이 오늘날과 같은 위상을 갖게 된 데는 저자의 공이 크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도 이 책을 읽을 필요가 있다. 슈뢰더는 나치 독일에 착취당한 노동자에게 배상하기 위해 경제계를 설득해 ‘기억 책임 그리고 미래’ 재단을 설립했다. 일본이 책의 부제처럼 ‘문명 국가로 귀환’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는 슈뢰더의 글 속에 답이 있다. “어떤 민족이 진정으로 자유로워지려면 역사의 가장 어두운 부분까지 정면으로 응시하고, 역사에 대한 책임의식을 가지고 행동해야 한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새 정부 출범 100일이 넘도록 문화예술 공공기관장 자리가 비어 있어 업무 공백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다. 특히 최순실 국정 농단 사태와 문화계 블랙리스트로 직격탄을 맞은 일부 기관들은 직원들의 사기 저하까지 겹쳐 사실상 ‘개점휴업’ 상태다. ○ 단체장 장기간 공석 왜? 31일 문화체육관광부에 따르면 문화예술위원회와 영화진흥위원회는 블랙리스트 집행기관이었다는 이유로 박명진 전 위원장과 김세훈 전 위원장이 5월 사퇴했다. 송성각 전 콘텐츠진흥원장은 최순실 국정 농단에 연루된 사실이 밝혀져 임기를 1년가량 남긴 지난해 10월 물러났다. 콘진원의 경우 10개월 넘게 원장 자리가 비어 있다. 임명이 지연되고 있는 것은 우선 국회 인사청문회를 거쳐야 하는 각 부 장관들의 취임이 늦어지면서 기관장 인선이 후순위로 밀렸기 때문이다. 정부 당국자는 “청와대 인사추천위원회가 지난달부터 기관장 후보자들에 대한 인사 검증에 착수했지만 검증 능력에 한계가 있다”고 말했다. 현행 ‘공공기관 운영에 관한 법률’에 따르면 각 기관은 임원추천위원회를 구성해 공모를 거친 후보들을 대상으로 심사(서류 및 면접)를 벌여야 한다. 임원추천위가 3명가량의 기관장 후보를 선정하면 이 중 한 명을 소관 부처 장관이 임명 혹은 임명 제청하는 절차를 밟게 된다.○ 기관장 후보 누가 거론되나 문화예술계에 매년 약 2000억 원을 지원하는 문예위는 지난달 7일 위원장 후보 5명에 대한 최종면접까지 마쳤지만 아직 청와대 인사 검증이 진행 중이다. 문예위 안팎에선 빨라야 이달 중순에나 위원장 선임이 이뤄질 것으로 보고 있다. 유력한 후보로는 황현산 고려대 명예교수와 심재찬 전 대구문화재단 대표, 임정희 문화연대 공동대표 등이 거론된다. 이들은 모두 최종면접에 참여한 것으로 확인됐다. 황 명예교수는 불문학을 전공한 문학평론가로 문화계 블랙리스트에 이름을 올렸다. 심 전 대표는 문예위 초대 사무처장 출신으로 문화행정 분야에 경험이 많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콘진원과 영진위는 아직 임원추천위조차 구성되지 않았다. 콘진원 원장 후보로 김영준 전 다음기획 대표와 여명숙 게임물관리위원장이 물망에 오른다. 김 전 대표는 가수 윤도현, 개그맨 김제동의 소속사 대표로 문화예술 분야 현장에서 오랫동안 활동했다. 여 위원장은 국정 농단 사태로 구속된 차은택 씨 후임으로 문화창조융합본부장에 취임했다가 사직을 강요받고 물러난 전력이 있다. 영진위 위원장 후보로는 김인수 전 시네마서비스 대표와 오석근 영화감독(전 부산영상위원회 운영위원장), 유인택 동양예술극장 대표의 이름이 오르내린다. 김호섭 이사장이 31일 퇴임한 동북아역사재단의 새로운 수장으로는 노태돈 서울대 명예교수, 이장희 한국외국어대 명예교수, 안병우 한신대 명예교수 등이 물망에 오르고 있다. 김용직 관장이 7월 사임한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의 신임 관장 공모도 최근 시작됐다. 이기동 원장이 사의를 밝힌 한국학중앙연구원 원장으로는 안병욱 가톨릭대 명예교수 등이 거론된다. 안 교수는 더불어민주당 윤리심판원장, 민주통합당 공천심사위원장 등을 지냈다. 윤경로 전 한성대 총장 이름도 본인 의사와 관계없이 들리고 있다.○ 수장 없는 단체 업무 차질 블랙리스트와 국정 농단 사태로 조직이 크게 흔들린 일부 단체들은 사령탑의 부재까지 겹쳐 무기력한 형국이다. 문예위 관계자는 “내년 초 창작지원 사업 공모에 앞서 할 일이 산더미지만 직원들의 사기가 많이 떨어져 있어 걱정스럽다”고 털어놓았다. 국립박물관문화재단은 김형태 전 사장이 여직원 성추행 의혹으로 물러난 데 이어 배기동 이사장마저 국립중앙박물관장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사장과 이사장이 모두 공석인 초유의 사태를 맞았다. 박물관계 관계자는 “이사회 핵심 멤버인 사장과 이사장이 공석이다 보니 재단이 중요한 의사결정을 쉽사리 내리지 못하는 상황”이라고 전했다. 김상운 sukim@donga.com·임희윤·조종엽 기자}

서울의 5·16광장(여의도공원)과 평양의 김일성광장, 세종문화회관과 만수대 예술극장, 남산타워와 주체사상탑…. 서울과 평양은 서로 다른 체제에서 성장한 도시지만 닮은 구석이 적지 않다. 장세훈 동아대 교수는 신간 ‘냉전, 분단 그리고 도시화’(알트)에서 “한반도의 도시화는 서구의 여러 이론보다도 ‘냉전과 분단이라는 변수’의 틀로 분석해야 한다”고 밝혔다. 장 교수가 약 20년간 연구하며 쓴 글이 책에 담겼다. 책은 그린벨트 역시 남북의 군사적 대치가 각인돼 있다고 봤다. 그린벨트는 수도권 방위 군사시설을 서울의 확산에서 보호하기 위해 마련된 ‘국방벨트’ 성격이 강하다는 것이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배우 조재현 씨와 서경덕 성신여대 교수가 중국 저장(浙江)성 자싱(嘉興)시에 있는 백범 김구 선생(1876∼1949)의 피난처 건물 정문에 한글 간판(사진)을 걸었다. 서 교수는 “피난처에 마련된 ‘김구 전시관’에 한글 간판이 없는 걸 보고 석 달 전 전시관 관계자와 의논해 ‘김구피난처’라는 간판을 달게 됐다”며 “김구 선생 탄생일인 8월 29일을 맞아 간판을 걸게 돼 더욱 뿌듯하다”고 29일 말했다. 간판은 한자도 병기됐으며 가로 40cm, 세로 140cm 크기다. 피난처는 1932년 윤봉길 의사의 훙커우 의거 뒤 김구 선생이 일제의 수배를 피해 은신했던 곳이다. 자싱시가 2001년 건물 옆에 ‘김구 전시관’을 신축하고, 독립기념관의 도움을 받아 관련 사진과 문헌을 전시했다. 간판 제작 경비는 서 교수와 조 씨 두 사람이 댔다. 두 사람이 중국의 독립운동 유적지에 한글 간판을 기증한 건 항저우 임시정부 청사, 상하이 윤봉길 기념관 등에 이어 이번이 네 번째다. 두 사람은 “한글 간판이 없거나 작은 글씨로만 쓰여 있어 찾기 불편한 해외 독립운동 유적지가 많다”며 “중국뿐 아니라 아시아, 미주, 유럽 등의 유적지에도 한글 간판을 달 계획”이라고 밝혔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조선 형률(刑律)의 바탕은 중국 대명률(大明律)이었다. 죄인의 유배지도 대명률에 따라 2000리, 2500리, 3000리의 세 등급으로 정했는데 문제가 있었다. 한양에서 조선의 머리 꼭대기에 있는 함경도 경원부까지도 1700리가 안 됐기 때문이다. 한국국학진흥원이 만드는 웹진 ‘담(談)’에 따르면 세종 시기에 각각 600∼900리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유배지의 거리를 가깝게 조정했다. 하지만 정조 때 횡령죄를 저지른 김약행에게는 3000리를 채워 집행해야 한다는 여론의 화살이 쏟아진다. 그래서 그의 유배 코스는 한양→기장(경상도)→평해(강원도)→단천(함경도)으로 한반도를 오르내렸다. 이른바 ‘곡행(曲行)’이다. 정조가 법이 정한 거리에 항상 엄격했던 건 아니다. 조선 왕릉은 임금이 하루 안에 다녀올 수 있도록 도성에서 80리 안에 만드는 것이 원칙이었다. 하지만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융릉(현 경기 화성시)을 88리 떨어진 당시 수원에 만들었다. 그만큼 명당이었기 때문이다. 대신들의 반대에 대한 정조의 말은 이랬다. “도성부터 수원까지 거리를 80리로 정하라.”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모든 이데올로기는 해방을 약속한다. 심지어 파시즘마저 그렇다. 파시즘은 대중이 겪는 고통의 원인으로 희생양을 지목하고 복수를 약속한다. 자아는 이 집단에 ‘자아를 담금으로써’ 자기실현을 할 수 있다고 선전된다. 책은 제1차 세계대전부터 소비에트의 붕괴까지 에릭 홉스봄이 ‘짧은 20세기’라고 부른 1914년부터 1991년까지의 이데올로기가 세계사 속에서 어떻게 전개됐고, 역사를 만들어 나갔는지 담았다. 자유주의, 보수주의, 공산주의, 파시즘 등 네 가지 이데올로기가 주제다. 사실 이데올로기 내부에도 좌익과 우익이 있고, ‘왼쪽의 오른쪽과 오른쪽의 왼쪽’ 같은 것은 서로 비슷하고 때로 섞이기 마련이다. 1, 2차 세계대전 사이 영국 보수주의 내부의 지배층은 우익 자유주의자들과 거의 구분되지 않았고, 노동당의 영국 사회민주주의자도 좌익 자유주의자와 구분되지 않았다. 저자는 “그럼에도 각 이데올로기의 추종자들을 구분하는 특징들이 있다”고 했다. 책 내용은 유럽과 아메리카의 비중이 높지만 동아시아에 대한 서술도 있다. 북한에 대해서는 ‘스탈린 숭배가 오히려 정상으로 보일 정도로’ 터무니없는 숭배를 했다고, 중국은 관료주의적 독재국가로 남아있지만 자본주의 기반 확장에 따라 자유주의 이데올로기로 이동할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저자는 스코틀랜드 출신 역사학자로 글래스고 캘리도니언대에서 현대사 교수로 일했다. 에릭 홉스봄, E P 톰슨 등의 명맥을 잇고 싶다는 저자는 “오늘날 신자유주의의 틀 안에서 강렬한 이데올로기적 경쟁과 혼돈이 일고 있다”고 봤다. 이데올로기라는 추상화와 역사라는 구상화 양자 모두가 꼼꼼히 그려진 책이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이 아이를 보세요, 영특하기 짝이 없답니다. 글씨도 곧잘 쓰지요. 너는 글자 몇 개를 써서 국구(國舅·임금의 장인)에게 드리거라.” 영조는 1735년 마흔두 살에 둘째 아들 사도세자를 얻었다. 7년 전 첫째 아들 효장세자가 열 살로 세상을 뜨고 얻은 늦둥이다. 어릴 적 영조의 기대를 한 몸에 받은 사도세자가 3세 때 쓴 글씨가 발견됐다. 어환 성균관대 의대 교수(의무부총장)는 가문에 대대로 전해지던 서첩을 최근 동아일보에 공개했다. 글씨가 쓰인 사연을 담은 후기(後記)에는 다가올 비극 ‘임오화변’(1762년 영조가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 죽인 일)을 전혀 알지 못한 채 품 안의 자식 자랑에 바쁜 평범한 아버지 영조의 모습이 드러난다. 사도세자가 3세 때인 1738년의 어느 날 경종의 장인 어유구(魚有龜·1675∼1740)가 입궐했다. 영조는 사도세자를 안고 있었다. 두 해 전 생후 13개월 만에 전례 없이 세자로 책봉하면서 영조는 이렇게 썼다. “너(사도세자)는 내가 늦게 얻었지만 하늘이 특이한 자질을 부여했다. …똑똑하고 침착하기가 남달라서 자라서 총명하고 어질며 효성스러울 것임을 확신할 수 있다.”(‘사도세자 이선’·수원화성박물관 엮음) 영조실록 등에 따르면 사도세자는 불과 돌 무렵에 병풍의 ‘왕(王)’자를 보고 영조를, ‘세자(世子)’라는 글씨를 보고 자신을 가리켰다. 세자에게 ‘팔괘(八卦) 떡’을 주자 “팔괘를 어떻게 먹느냐”며 먹지 않았다. 어유구 앞에서 세자가 붓을 잡는다. ‘석(石)’ ‘하(下)’ ‘춘(春)’ ‘왕(王)’…. ‘왕’과 ‘춘’은 세자가 한 해 전에도 썼던 글자다. 세자는 2세 때 큰 붓을 잡더니 ‘온 세상이 임금의 은택을 입은 봄이라는 뜻’의 ‘천지왕춘(天地王春)’이라고 썼다. 신하들이 앞다퉈 글씨를 하사해 달라고 청했다. 나머지 한 자는 ‘사(士)’를 쓰고 실수로 한 획을 더했거나 ‘길(吉)’자를 쓰다 미처 마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무슨 자를 쓰려 했든지 간에 영조는 세자의 운명이 길(吉)하기만을 바랐을 것이다. 영조는 사도세자가 이렇게 쓴 글씨를 어유구에게 줬다. 어유구의 아들 어석정(魚錫定·1731∼1793)이 글씨를 표구하고, 후기와 함께 서첩으로 만들어 집안 대대로 간직하도록 했다. 사도세자가 7세 때 쓴 서첩 ‘동국보묵’ 등이 전해지지만 이렇게 어릴 적 글씨는 이 서첩이 유일하다. 어유구의 8대 후손인 어환 교수는 한국고전번역원장을 지낸 이명학 성균관대 한문학과 교수 등의 도움을 받아 최근 서첩의 내용과 사연을 알게 됐다. 본보는 사도세자의 글씨라는 것을 알리지 않고 서예가인 김병기 전북대 교수에게 글씨를 보였다. “이게 세 살짜리 글씨라고요? 붓을 들고 단숨에 글자를 완성했습니다. 붓을 누르는 힘(필압·筆壓) 조절이나 획이 꺾이는 부분 등을 자세히 보면 모양만 따라 그린 게 아니라 서예 교육을 아주 제대로 받은 글씨입니다. 글 쓴 아이의 성격은 진중하다기보다 활달할 것 같습니다.”(김 교수)사도세자의 글씨가 담긴 이 서첩의 사연에 관해서는 27일 오전 11시 방영되는 KBS1TV ‘TV쇼! 진품명품’에서도 볼 수 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대한민국은 ‘대한민국은 몇 살인가’에도 아직 합의하지 못했다. 1919년 건국설과 1948년 건국설 모두 각자 근거가 있다. 개천절이나 대한제국-대한민국의 연속성에 방점을 찍는 의견까지 더하면 문제는 더 복잡해진다. 문재인 대통령의 “2019년 건국 100주년을 맞는다”(15일 광복절 경축사)는 말 한마디로 정리될 문제는 아니다. 동아일보는 한시준 단국대 사학과 교수(63)와 김명섭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54)의 대담을 마련했다. 한 교수는 임시정부 연구에서 업적을 낸 독립운동사 연구자로 최근에도 ‘역사농단’(역사공간) 등을 출간하며 ‘1919년 건국론’을 꾸준히 주장해왔다. 김 교수는 2018년 한국정치외교사학회장 취임 예정인 역사정치학 연구자다. 김 교수는 1980년대 386세대의 역사 인식에 적지 않은 영향을 준 ‘해방전후사의 인식’(공저)의 필자로 지난해에는 국정 역사교과서의 현대사 분야 필진으로 참여했다. 》 지난해 말 관련 학술대회에서도 격렬히 대립했던 두 학자에게 “합의의 폭을 넓혀 달라”고 주문했다. 두 학자는 “1919년이든 1948년이든 ‘건국’이라고 표현하는 건 무리가 있다”는 데 의견을 함께했다.―대통령의 광복절 경축사 발언을 평가해 달라. ▽한시준=이명박 정부 당시 건국 시점 문제가 표면화할 때 역사학계는 1948년 건국이 사실이 아님과 부당성을 제기했다. 이번 발언은 1919년 대한민국 건국을 공식 천명했다는 의미가 크다. ▽김명섭=특히 대한민국의 주요 기원인 임시정부 기념관 건립을 대통령이 직접 강조해 기대된다. 그러나 ‘1919년 건국’이라고 못 박으면 여러 문제가 생긴다. 광복 뒤 여운형 조만식 선생 등이 건국준비위원회(건준)를 만든 것도 당시 건국이 안 됐다고 본 거다. 임정이 국민주권을 천명했지만 권력을 위임받는 합법적 선거가 이뤄진 건 1948년이다. 대한민국은 1919년에 시작돼 1948년 수립된 것이다. ―‘건국 시점이 뭐가 중요하냐’는 의견도 있다. ▽한=국가의 정체성을 명확하게 밝히는 일이다. 민족사로서도 중요하다. 대한민국은 두 번에 걸쳐 수립됐다. 1948년 제헌 국회의장이 된 이승만 박사는 자주독립정부 수립에 대해 누구보다 생각이 깊었다. 건국이라고 하면 미국이 나라를 세워주는 꼴이 되니, 그렇게 안 하고 1919년 세운 대한민국을 계승하고 재건한다고 했다. 당시 국회의원들을 설득하고 관철한 게 이 박사다. 1948년 건국 주장은 일제강점기를 우리 민족의 역사와 관계없는 것으로 만들고, 민족사를 단절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김=만약 그에 동의한다고 해도 1910∼1919년의 공백이 생기지 않나. 한일 강제병합조약의 효력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대한제국이 망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일례로 만국우편연합은 ‘대한국(대한제국)’이 가입한 1900년을 오늘날 대한민국의 가입연도로 본다. 대한국을 1919년에 국민주권적으로 계승한 게 임정이고, 1948년 선거를 통해 국제적 승인을 받은 것이다. 1948년 당시 대한민국 ‘재건’이라고 주장한 주요 인물은 이승만 박사밖에 없다. ‘민국 30년’(1948년)이라는 연호도 컨센서스를 도출하지 못해 1949년부터 단기로 썼다. 임정이 독립운동의 구심이었다는 데는 이의가 없다. 그러나 문창범(1870∼1938) 같은 분은 러시아 연해주가 독립운동 기지로 적합하다고 보고 임정에서 이탈해 활동했다. 1919년에 건국됐다고 마침표를 찍으면 이런 활동은 마치 ‘반국가단체’처럼 돼 버린다. ▽한=좌파인 김원봉을 비롯해 다양한 세력이 1944년이 되면 다 임정으로 들어온다. 이처럼 독립운동세력이 통합을 이루고 광복을 맞은 것은 세계적으로도 한민족이 유일하다. ▽김=광복 직후 아직 나라가 세워지지 않은 상황에서 임시정부를 봉대하는 대신 건준-인민공화국을 지지했던 이들을 무조건 비난할 수 없다. 그런데 1919년 이미 건국이 됐다고 보면 이들은 ‘반역자’가 된다. ▽한=처음부터 완벽한 형태로 건국하는 예는 드물다. 쑨원(孫文)이 1911년 청나라를 무너뜨리고 중화민국을 세우지만 나중에 다시 나라를 어떻게 만들 것인가 하는 ‘건국대강’을 발표한다. 아름드리나무도 처음에는 새싹이지만 나이는 새싹부터 센다. 임정을 세운 분들도 건국이라는 말에는 대체로 부정적이었다. 1919년에 건국했다고 하면 열강들이 반만년 역사의 우리 민족이 마치 처음으로 나라를 세운 것으로 잘못 알지 않겠느냐는 우려 탓이었다. 그래서 단군이 나라를 세운 개천절을 건국기원절로 지정하고 기념행사를 했다. ‘건국절 제정’ 주장으로 논란이 시작된 탓에 이를 비판하는 측에서도 ‘건국’이라고 표현한 면이 있다. 대한민국 ‘건립’이라고 써야 합당하겠다. ▽김=좋은 말씀이다. 국제사회에서 대등한 국가로 공인받은 1897년의 대한국 선포도 적지 않은 의미가 있다. 1919년이나 1948년만 강조하면 그런 기억이 사라진다. ―2019년은 어떻게 기념해야 하는가. ▽한=논란을 종식시키고 대한민국 역사는 1919년부터 시작된다는 사실을 정립해야 한다. ▽김=당대인들이 사용한 용어를 존중해 ‘3·1운동 100주년’ ‘대한민국 임정 수립 100주년’으로 기념해야 한다. 정부 수립이든 대한민국 수립이든, 내년에 맞는 70주년의 의미도 크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맹인은 사농공상에 끼지 못해 생계를 꾸릴 방법이 없으나, 주역을 배워 점을 치고 겸해서 경문을 외워 살아간다. … 저잣거리를 다니며 노래하듯 ‘문수(問數·운수 물어보오)’라 외친다.”(이규경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서) 별다른 직업이 없던 ‘심청전’ 속 심학규와 달리, 조선시대 맹인은 전문직에 종사했다. 조정은 맹인에게 악공과 점술가를 장려했다. 청각·촉각이 뛰어난 맹인은 관현맹(管絃盲)이 되었다. 관현맹은 나라에 소속된 전문 악공이다. 유명한 관현맹으로 세종 때 이반, 성종 때 정범, 김복산 등이 있다. 점술에 뛰어난 맹인은 관상감(觀象監·천문 지리를 담당한 기관) 소속 관원인 명과맹(命課盲)으로 선발했다. 선발되지 못한 맹인은 ‘판수’로 생업을 삼았다. 판수는 민가에서 활동한 독경(讀經)과 점술 전문가였다. 판수는 초하루와 보름이면 명통시(明通寺·맹인 교육 및 집회소)에 모였다. 명통시에서 독경 기술을 전수했고, 정기적으로 나라의 안녕을 비는 제사를 지냈다. 나라에서 거행하는 전례를 정리한 ‘태상제안’에 판수를 동원한 의례가 나온다. 판수는 기우제나 임금이 거처를 옮길 때 동원됐다. 동원된 판수는 ‘옥추경’이라는 도교 경전을 외웠다. 이로써 비를 불렀고 임금이 거처할 곳에 있을지 모를 사악한 기운을 물리쳤다. 중국에서 도교 도사가 하던 일을 조선에서 판수가 담당했던 셈이다. 판수는 무당처럼 현란한 몸짓을 선보이지는 못했다. 그 대신 듣는 이가 혀를 내두를 만큼 빠른 속도로 경전을 한 글자도 틀리지 않고 정확히 외웠다.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해야 하는 일이었다. 19세기 중반까지 살았던 시인 조수삼은 ‘추재기이’에 판수 유운태의 삶을 정리했다. 유운태는 100번 점을 쳐 단 한 번도 실수가 없던 당대 최고 판수였다. 점 풀이로 하는 말도 범상한 판수와는 달랐다. 운수를 묻는 이에게 효의, 공손, 충성, 신의를 말해 사람 된 도리를 일깨웠다. 조선후기 문신 성대중은 유운태를 만나 운수를 물었던 일을 ‘청성잡기’에 쓰면서 “죽을죄를 저지른 죄인이라도 처벌할라치면 유운태의 말이 떠올랐다”고 했다. 조선시대에도 맹인의 삶은 지금처럼 고단했지만 비장애인이 맹인을 보는 시선은 달랐다. 조선 사람은 비장애인이 보지 못하는 것, 느끼지 못하는 것을 맹인이 보고 느낀다고 여겼다. 이러한 믿음 아래 관현맹의 연주에 감탄했고, 판수의 목소리를 신뢰했다.홍현성 한국학중앙연구원 전임연구원}

1947년 8월 20일 오전 1시. 황해도 해주의 바닷가에 무성하게 자란 갈대가 27세의 김형석과 아내, 돌도 안 된 아들의 몸을 숨겨주었다. 월남을 막는 감시원들이 100m 간격을 두고 갈대밭을 왔다 갔다 했다. 감시원의 시야에서 벗어난 틈을 타 김형석이 아내와 함께 조각배를 향해 살금살금 다가갔다. “이런 얘기를 나도 별로 안 하는데…. 솔직히 일제강점기 같으면 내가 북한의 고향에 남아 있을 수도 있습니다. 사회활동을 안 하면 됩니다. 그러나 공산주의 치하에서는 살지를 못해요. ‘대학까지 나온 저놈이 산속에서 조용히 사는데 수상하다’, 그러면 다 잡아다 (사상) 교육을 시키든지 해요. (공산주의를) 겪지 않은 사람은 모릅니다.” 최근 서울 서대문구의 한 교회에서 만난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97)는 1시간 반 동안 70년 전의 기억을 어제 일처럼 또렷하게 말했다. 시간이 흐르며 일제강점기와 광복, 혼란스러운 해방정국을 몸으로 겪은 이들이 점점 줄어드는 요즘이다. 동아일보는 20, 30대 청년으로 당대를 겪은 그로부터 ‘시대의 증언’을 들었다. ‘평안남도 대동군 인민위원회 위원’. 광복 뒤 북한에서 그가 잠시 맡았던 직함이다. “내가 대학 나왔으니 나가보라고 해서 면 위원이 됐다가 군 위원으로 뽑힌 게지요.” 그는 ‘공산당 정책을 반대하고 쫓겨나느냐, 먼저 그만두느냐’를 두고 고민하다가 사직하고 고향 송산리에 중학교를 설립해 농촌 교육에 나섰다. 사업가로 부친의 친구인 김모 장로가 재정을 뒷받침하고 이사장을 맡았다.○ “북한, 반공 성향 교회장로 제거” “한 1년 반 정도 운영을 했지요. 그런데 내가 기독교(개신교) 신자이고 반공 성향이라 자꾸 감시가 들어와요. 공산당이 교회를 무너뜨리는 방법이 중심인물을 빼버리는 겁니다. 반공 장로를 어디로 납치해서 없애버려요. 이사장인 장로님이 하루는 저를 찾아와 ‘조만식 선생도 오래전 연금됐고, 나도 얼마 안 남은 것 같아. 나도 떠날 것이니, 김 선생님도 학교를 포기하고 38선을 넘어. 늦으면 안 돼’라고 하더군요.” ‘민청’ 조직에서 일하던 김 교수의 제자도 ‘선생님을 오래 그냥 두지 않을 것 같습니다’라고 귀띔했다. “김 장로님이 마지막으로 고향의 팔순 넘은 어머니에게 큰절을 드리고 나오다가 잠복하던 보안서(경찰서)원들에게 잡혔지요. 그 집에서 쭉 올라오면 산에 우리 집이 있었거든요. 내려다보니 장로님을 태운 트럭이 우물쭈물해요. 막냇동생이 헐떡거리며 뛰어오더니 ‘형님, 도망가세요’ 했어요. 얼마 뒤 저는 38선을 넘었습니다.” 월남하는 길, 사리원을 거쳐 해주로 가는 기차에서는 맞은편 승객이 기차가 멎기만 하면 자리를 비웠다가 돌아와 ‘두 놈 잡았어’ ‘한 놈은 끌어내렸어’ 같은 말을 주고받았다. 월남하는 이들을 잡는 사복 형사였다. 급기야 김 교수는 해주에서 붙잡혔다. 파출소는 38선을 넘다가 붙잡힌 사람들로 가득 찼다. “계장이 전화를 받는데 ‘잡힌 사람 많죠? 평양서 지시가 왔는데, 지금부터 잡히는 사람들은 전부 평양으로 돌려보내라고 합니다’ 하는 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들렸어요. 우리는 친척집에 가는 길이라고 둘러댔더니, 다행히 형사가 버스 타는 데까지만 따라오고 보내주더군요. 그 전화가 조금만 일렀으면 아마 조사받고 평양으로 끌려갔을 겁니다.”○ “빨간 스포츠카를 탄 김일성” 그는 북한에서 김일성 계열의 공산주의자가 세를 확대하는 걸 지켜봤다. “조만식 선생이 조선민주당을 만들었잖아요. 정당사회단체 연합회 차원에서 회의를 열고 결정을 하는데, 정당은 노동당과 조선민주당 둘이고, 사회단체는 공산당이 만들어 놓은 조직이 10개가 넘어요. 이쪽은 정직하게 가니 고작 두셋이고, 저쪽은 많으니 조만식 선생이 발언권도 못 가지고 몰리기 시작했습니다. 스티코프 장군이 남쪽에서 올라간 남로당원, 연안에서 온 김두봉 계열까지 다 견제하더군요. 김일성을 위한 거지요. 김두봉 계열인 제 대학 친구가 노동당 평양선전부장까지 올랐지만 나중에 끝내 아오지 탄광으로 끌려가 자살했습니다.” 우스운 일도 있었다. “소련군이 자꾸 소를 먹겠다고 내놓으라고 그래요. 소가 없으면 농사를 못 짓잖아요. 못 준다고 그랬더니, 강제로 빼앗아가겠다고 합니다. 조만식 선생 쪽을 통해 소하고 아기를 위한 가루우유는 못 준다고 했더니 소 한 마리당 닭 몇 마리씩 계산해 이번에는 닭을 내라고 하더군요. 그런데 찾아온 소련군 대위가 소가 몇 마리면 닭을 모두 몇 마리 받아가야 하는지 곱하기를 못 해요.” 사실 김 교수의 고향인 대동군 고평면은 김일성의 고향이기도 하다. 광복 뒤 한두 달쯤 지났을까. 김 교수의 초등학교 선배인 김성주(김일성의 본명)가 운전수가 모는 빨간 스포츠카를 타고 나타났다. “교회 장로님들이 ‘만경대 성주가 오랜만에 왔다고 환영 잔치를 하니 가자’고 했어요. 원래 김일성 집안이 독실한 크리스천이지요.” 얼마 뒤 김성주는 평양 공설운동장에서 열린 ‘김일성 장군 환영대회’의 주인공으로 다시 얼굴을 드러냈다. “당시 ‘앞으로 우리나라를 맡아서 이끌 사람’ 등의 문구가 있는 벽보가 많이 붙었습니다. 서재필 이승만 김구 안재홍 김일성 같은 이름이 나왔지만 대부분 서울로 돌아올 분들이었죠. 평양으로 올 사람은 김일성밖에 없기에 모두 그를 기다렸죠. 나이는 쉰쯤 됐을 것이고, 일본 육군사관학교 출신이라는 소문이 돌았어요. 그런데 김성주더군요.”○ “인촌, 하지 미군정청장에게 쓴소리” 김 교수는 월남해 1947년 8월 22일 서울에 도착한 뒤 10월부터 중앙중학교 교사로 일했다. 그리고 그가 도산 안창호 선생과 함께 스승으로 꼽는 인촌 김성수 선생을 만났다. 김 교수는 “독립은 저력이 있어야 할 수 있는 것”이라며 “만약 국내에 인촌 선생 같은 분이 없었으면 우리 민족의 독립이 어려웠을 것”이라고 했다. 김 교수는 어느 날 인촌으로부터 존 하지 미 군정청장을 찾아가 직언했던 얘기를 들었다. 인촌은 하지에게 “내 얘기가 거슬리더라도 고깝게 듣지 말라”며 말을 꺼냈다고 한다. “우리 둘은 친분은 없었지만 한국의 장래를 위해 한두 가지 얘기하고 살자. 당신을 만나고 온 이들이 말이 달라 혼란과 분쟁이 생긴다. 말을 달리하는 실수는 없었으면 좋겠다.”(인촌) 설산 장덕수가 통역을 했다. 하지 장군은 얼굴이 새빨개지면서 그런 일이 없다고 했다. 인촌이 다시 추궁했다. “며칠 전에도 모 씨에게는 이렇게 약속하고 또 다른 이에게는 달리 말하지 않았나. 이렇다면 당신의 인격과 지도력을 어떻게 인정할 수 있겠는가.” 그제야 하지 장군은 알겠다며 고치겠다고 했다고 한다. 김 교수는 “당시 정치인들이 하지 장군의 비위를 건드리고 싶지 않아 걱정을 하면서도 침묵하던 차였다”며 “아마 인촌 말고 이처럼 조용하면서도 지혜롭게 행동할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 교수가 이 같은 후일담을 들을 정도로 인촌을 가까이 접한 건 6·25전쟁이 계기가 됐다. 중앙중 교사로 일하던 김 교수는 1950년 6월 25일 직감했다. ‘이건 전쟁이다.’ 그는 학교장을 찾아갔다. “전쟁입니다. 교사들 봉급을 석 달 치만 선불해 주시지요.” 교장이 인촌 선생을 찾아가 바로 허락을 받았다. 김 교수는 피란지에서 교사 대표로 인촌을 찾아갔다. “어려운 교사들 사정을 말씀드리니 옆 사람에게 ‘은행에 돈이 얼마나 있느냐, 얼마만 남겨놓고 다 찾아오라’고 하시더군요. 돈을 신문지에 둘둘 말아서 주시며 ‘김 선생님이 맡아서 교사들과 나누라’고 해요. 영수증을 써 드리겠다고 하니 ‘됐다’고만 하셨습니다.” 조만식 선생의 부인이 월남 뒤 인촌을 만났던 얘기도 김 교수는 전했다. “사모님이 제게 그러셔요. ‘인촌을 만났더니, 38선 넘어 오면 제일 힘든 게 머물 곳인데 만약 거처를 장만 못했으면 도와드리겠다고 했다’고요. 헌데 조만식 선생이 폐 끼치지 말라고 했던 게 기억나서 그냥 나오셨답니다.”○ 독립만세로 맞은 광복의 기쁨 김 교수는 일제강점기 기독교 계열인 평양 숭실중학교를 다녔다. “교장이 원래 미국 선교사인데, 신사참배를 거부하니 총독부가 학교 문을 닫게 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500명이나 되는 학생을 차마 황국신민 교육하는 학교에 보낼 수 없으니, 정모 선생님이 대신 나섰습니다. 신사참배가 90도 경례하는 겁니다. 제가 키가 작아서 앞줄에 섰거든요. 교장이 되신 정 선생님이 경례를 하고 돌아서는데, 그 주름잡힌 얼굴에 눈물이 죽 흘러요. 그걸 보고 저도 눈물이 났지요.” 80여 년 전 일을 떠올리는 김 교수의 눈가가 붉어졌다. “저 어른이 우리를 위해서 신사참배를 하시는구나. 그 모습을 보고 가슴에서 민족의식이 커졌습니다. 만약 그런 행동을 두고 친일이라고 비난한다면 친일파 아닌 이가 누가 있겠습니까? 오늘날 정치가 사람의 명예를 함부로 취급하는 건 그 시대를 산 사람은 상상하지 못하는 일입니다.” 김 교수는 태평양전쟁 말기 간신히 학병 징집을 피하고 시골인 고향에서 광복을 맞았다. “평양 거리에 있는데 가게 라디오에서 일왕의 항복 선언이 나옵니다. 아주 짤막해요. 꿈만 같았지요. 동네로 돌아가니 어데 숨겨놨던 태극기도 나오고, 대한독립 만세도 나오고…. 가까운 사람들이 제일 많이 하는 말이 ‘이제 나라를 찾았으니, 죽어도 한이 없다’였습니다.” :: 김형석 명예교수는 ::△1920년 평안남도 대동군 출생△1943년 일본 조치(上智)대 철학과 졸업△1947년 중앙중 교사△연세대 철학과 교수(1954∼1985년)△김태길(2009년 별세) 안병욱(2013년 별세)과 함께 3대 철학자로 꼽힘△주요 저서 ‘고독이라는 병’ ‘현대인의 철학’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백년을 살아보니’ ‘우리는 무엇으로 행복해지나’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이집트 스핑크스의 수염 부분은 왜 대영박물관에 있을까? 이탈리아 산 조르조 마조레 성당의 그림 ‘가나의 혼인 잔치’는 왜 프랑스 루브르박물관에 있을까? 약탈당한 세계 유명 문화재 10점에 얽힌 사연을 이야기 형식으로 풀어냈다. 그리스 여배우 멜리나 메르쿠리는 1962년 영국에서 영화를 찍다가 그리스 파르테논 신전에 있어야 할 조각품을 대영박물관에서 발견하고 이 조각품들을 돌려받는 일에 일생을 바쳤다. 로제타석, 둔황석굴의 고문서, 트로이 왕국의 유물에 대한 이야기뿐 아니라 일본인이 약탈한 둔황의 문화재가 우리나라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돼 있는 사연도 소개됐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이제부터 영원토록 평화와 우정이 함께할 것이다.” 기원전 13세기 이집트와 히타이트가 오늘날 시리아와 터키 국경 인근 카데시에서 오리엔트의 패권을 놓고 격돌한 뒤 맺은 평화조약이다. 제3의 적으로부터 공격을 받으면 서로 돕기로 하는 쌍무적 방위 동맹 원칙까지 명시됐다. 자료로 남아 있는 세계 최초의 평화조약인 이 조약의 효과는 어땠을까. 히타이트가 멸망하기까지 오리엔트 지역은 비교적 오랜 평화를 누렸다. 인간의 역사는 전쟁과 폭력의 역사이면서, 보복의 연쇄에서 벗어나 생존의 지속성과 안정성을 얻기 위해 적과 타협해 온 역사이기도 하다. 책은 세계사를 뒤흔든 주요 조약 68건의 이야기를 담았다. 강제력 없는 조약은 평화의 가장 큰 적이다. 제1차 세계대전의 참화에 충격을 받은 50여 개 국가가 맺은 ‘켈로그-브리앙 조약’이 그 예다. “모든 전쟁을 끝내자”는 취지로 맺었지만 막상 전쟁을 막는 수단은 전혀 갖추지 않았고, 체결 10년도 안 돼 2차 대전이 벌어졌다. 책에는 남북한 경제협력 합의서, 한중어업협정,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 등 우리나라가 맺은 주요 조약뿐 아니라 북-중 간의 조중변계조약, 핵확산금지조약 등 한반도의 운명과 관련된 조약 이야기도 여럿 담겼다. 2년 만에 깨진 1939년 독소불가침조약처럼 조약은 힘의 논리에 따라 손바닥 뒤집듯 파기되는 것이라는 인식도 있다. 서울교대 윤리교육과 교수인 저자는 “조약은 힘과 이익의 논리를 초월하지 못할지라도 이미 많은 것을 이뤄냈다”며 “세계적 과제를 해결하려는 수단으로서 국제 협상과 조약은 필수불가결하다”고 말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