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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란 속에 ‘출판 불가’ 결정이 났던 동북아역사재단의 동북아역사지도가 2020년까지 새로 발간될 것으로 전망된다. 김도형 동북아역사재단 이사장(65)은 22일 기자간담회에서 “기존에 제작했던 역사지도를 바탕으로 임기(2020년 11월까지) 내 동북아역사지도를 다시 만들어 모두 간행하는 것이 목표”라고 말했다. 동북아역사지도는 8년간 47억 원을 들여 제작했으나 비주류 사학계와 정치권에서 ‘동북공정 추종’ 논란을 일으켰고, 재단은 ‘지도학적 부실’을 들어 2016년 지도를 출판할 수 없다고 결정했다. 김 이사장은 “한 군현 위치처럼 이견이 합의되지 않는 부분은 지도에 글로 설명을 다는 방법, 근대처럼 논란이 없는 시기의 지도부터 순차적으로 발간하는 방법을 고려하고 있다”고 밝혔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정유재란의 역사를 복원하고 돌이켜 보면서 한중일 3국이 평화롭게 공존하는 데 보탬이 되고자 했습니다.” 정유재란의 진면목을 살핀 책 ‘정유재란―잊혀진 전쟁’(안영배 지음·박영철 사진)의 출판기념회가 22일 서울 용산구 블루스퀘어에서 열렸다. 저자인 안영배 동아일보 기자는 “정유재란은 역사에서는 살아있되 ‘잊혀진 전쟁’이나 다름없다”며 “이순신 장군의 마지막 수군 주둔지였던 전남 순천의 장도 섬을 비롯해 주요 전적지가 방치되고 훼손됐다”고 말했다. 책은 정유재란이 일어난 지 420년(7주갑)이 되는 2017년을 맞아 본보가 6개월에 걸쳐 연재한 시리즈를 다듬어 묶었다. 기사는 연재 당시 인터넷 포털 사이트의 ‘꼼꼼히 읽은 뉴스’ 1위에 오르기도 했다. 임진정유역사재단추진위원회(위원장 김병연)와 재경순천향우회(회장 최대규)가 주최한 이날 행사에는 김세옥 전 대통령경호실장, 박경서 대한적십자사 회장, 송석구 전 동국대 총장, 신중식 전 국회의원, 이영일 전 국회의원, 정숭열 전 한국도로공사 사장, 홍석현 중앙홀딩스 회장(가나다순) 등 250여 명이 참석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황현산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위원장(73·사진)이 건강상의 이유로 21일 문화체육관광부에 사직서를 냈다. 황 위원장은 이날 “예전에 암 때문에 항암치료를 받았는데, 최근 새로운 암이 발견돼 사직서를 냈다”고 말했다. 문예위는 “정상적인 직무 수행이 곤란하다고 판단해 사의를 표명한 것으로 안다”고 밝혔다. 문학평론가인 황 위원장은 지난해 11월 문예위원장에 취임했다. 임기는 2020년 11월까지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1400만 명이 넘게 본 영화 ‘신과 함께―죄와 벌’에는 “신파에 불과” “신파지만 괜찮네”라는 평가가 나왔다. 이처럼 영화 자체의 호불호와 관계없이 ‘신파’는 부정적으로 인식된다. 신파는 단순히 나쁘기만 한 것일까.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은 학술회의 ‘근대의 시간관과 학술사회’를 21, 22일 서울 종로구 성균관대에서 연다. 이승희 성균관대 초빙교수는 발표문 ‘신파와 막장의 시간성’에서 ‘한국적 신파’의 역사를 살폈다. 발표문에 따르면 1910년대까지 신파극은 그저 ‘새로운 연극’을 두루 지칭했다. 그러나 1919년 3·1운동 이후 “객관세계에 대한 주체의 절대적인 무력감 속에서도 이를 완전히 수락하지 않는 주체의 이율배반적인 태도”라는 ‘신파성’이 형성된다. 신파극의 주인공들은 관습, 가족, 제도, 식민주의, 자본주의를 비롯한 거대한 힘과 대결하면서 투지를 드러낸다. 이승희 교수는 “반면 최근의 ‘한국적 신파’는 공통적인 역사적 기억 속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인정과 가족뿐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한편 타인에 대한 관심으로 확장될 가능성은 작다”고 지적했다. 학술회의에서는 이 밖에도 다양한 발표가 진행된다. 한기형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 교수는 ‘구소설의 서사가 근대의 시간과 만날 때’라는 발표를 통해 일제강점기 ‘춘향전’과 같은 구소설이 널리 읽혔던 사실에 관해 분석한다. 그는 이른바 ‘구소설’은 식민지 하위 대중의 심상을 드러냈고, 근대적 문학 질서에 파열음을 냈지만 주류 문학사에서 배제됐다고 봤다. 이기훈 연세대 국학연구원 교수는 ‘시대구분론의 파장: 역사단계론의 지식 지형’에서 1960년대 말 역사학계에서 벌어진 시대구분 논쟁을 회고했다. 이기훈 교수는 이 논쟁이 민족사 체계의 확립, 근대화에 대한 강렬한 사회적 요구에 대한 부응이라는 차원에서 진행됐지만 구체적으로 전개될 만한 이론적 공동 기반이 없었다고 봤다. 윤해동 한양대 교수는 ‘세계 시간과 국민국가: 한국의 사례를 중심으로’에서 정치권력이 기년법과 역법을 통해 시간을 지배하는 과정을 탐구한다. 김백영 광운대 교수는 ‘식민지 근대 시공간의 오감도(烏瞰圖)로서 이상 시 읽기’에서 근대적 시공간으로 떠오르는 식민지 도시의 초상화를 이상의 시로 해석한다. 이 밖에 ‘문학에서의 역사와 반(反)역사: 이기영의 고향을 중심으로’(황종연 동국대 교수) ‘두 평양시간: 북한 특유의 시간인식’(구갑우 북한대학원대 교수) 등이 발표될 예정이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조선과 청나라의 국경을 정한 백두산정계비의 토문강(土門江)이 두만강이 아니라 송화강 지류이며, 두만강 너머 북간도는 원래 조선의 영토라는 주장은 오늘날까지 영향력을 갖고 있다. 이런 ‘간도 문제’의 뿌리에 19세기 말 조선 지방당국의 ‘식민지 경영’이 있었다는 연구가 나왔다. 김형종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는 청일전쟁 이전 간도 관련 양국의 대응에 대한 자료와 연구를 망라한 ‘1880년대 조선-청 공동감계와 국경회담의 연구’를 최근 발간했다. 책에 따르면 간도 개척은 가난한 백성 소수가 생존을 위해 목숨을 걸고 강을 건넌 것이라기보다 지방당국의 비호 아래 대규모로 이뤄졌다. 김 교수는 1909년 용정촌에 광성서숙을 세운 윤상철의 아들 윤정희가 19세기 후반∼1930년대 초반 간도의 교육·종교·독립운동을 정리한 ‘간도개척사’에 주목했다. 이 책에 따르면 1880년 회령부사로 부임한 홍남주는 ‘국토를 넓히는(廓拓·확척)’ 공을 세우고자 “기근으로 인한 민생의 고통을 구제하기 위해 월변(越便·두만강 북쪽 지역)의 토지를 개간하고 이주를 허가할 것이므로 백성들로 하여금 원서(願書)를 올리게 하라”고 지시했다. 함경북도 안무사 조병직도 이를 묵인했다. 이른바 ‘경진(庚辰)개척’이다. 1880년과 이듬해 수천 명이 두만강을 건너 회령 맞은편 평야 100여 정보를 순식간에 개발했다. 이전에도 수십∼수백 명이 개별적으로 강을 건넌 적은 있었지만 이처럼 대규모로 정착한 건 처음이었다. 1881년 9월 청나라 관리 이금용은 두만강 북안 약 200리 이내 지역을 조사해 대규모 월간민(越墾民)을 발견하고 결과를 보고하면서 “조선의 함경도자사는 그들에게 경작을 허가하는 증명서를 발급해 주었다”고 했다. 조선의 함경북도 당국이 월간민에게 호적을 편성하고 각종 세금과 소작료를 거두는 등 실질적으로 장악했던 것이다. 1885년 무렵 조선월간민의 수는 2만 명이 넘었고, 지역 경제는 두만강 북안 간도에 심각하게 의존하게 된다. 김 교수는 “조선 지방당국은 일단 백성을 대규모로 월간, 이주시켜 두만강 북쪽에 실질적 통제력을 행사하고 이후의 분쟁에서 그것을 발판으로 삼아 대응하려는 자세를 보였다”며 “일종의 식민지 경영을 시도했던 것”이라고 말했다. 책은 이후 조선과 청이 국경회담과 두 차례에 걸친 공동 조사(勘界·감계)를 벌이는 과정을 치밀하게 추적한다. 조선은 여기서 백두산정계비에 따라 원래 간도가 조선 땅이라고 주장하고 나섰지만 조선의 토문감계사 이중하(1846∼1917)는 고종에게 사뭇 다른 내용으로 비밀 보고를 올렸다. 애당초 정계비를 세울 때 물길을 착각한 것이며, 토문강과 두만강은 같은 강이고, 조선과 청의 경계는 두만강이 맞다는 취지였다. 양국은 국경 문제에서 최종 합의에 이르지 못했고, 월간민은 청나라 당국이 통제하게 됐다. 김 교수는 전화 통화에서 “민족사의 무대가 됐던 간도가 우리 땅이라는 주장은 감성적으로는 호응하기 쉽지만 사실 곤란한 발상”이라며 “천지 남쪽 5km 지점에 있는 백두산정계비를 근거로 들면 백두산이 오히려 중국 땅이 되는 문제가 생긴다”고 말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환갑 때는 새 출발을 한다고 생각했소. 아흔 살을 넘기니 (사랑하는 사람을 먼저 떠나보내고) 오래 산다는 것도 참 힘든 일이라고 느꼈지요. 노인의 장수 역시 우리 사회가 다 같이 고민하고, 올바른 길을 찾아가려는 노력을 함께 했으면 좋겠습니다.” ‘인간은 무엇을 위하여,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물음과 대면한 노(老)철학자의 진솔하고 담담한 문장이 수필 문학의 진경을 보여준다. 올해 한국 나이로 백수(白壽·아흔아홉 살)를 맞은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98)의 산문집 ‘남아있는 시간을 위하여’(김영사·사진) 얘기다. 김 교수는 18일 동아일보와의 통화에서 “50여 년간 쓴 수필 중에서 독자들에게 의미를 줄 수 있는 글만 엄선해 담았다”며 “독자들이 인생의 가치관을 정립하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번 책에는 김 교수의 산문 25편이 담겼다. 표제작은 새로 썼고, 나머지는 에세이스트로 널리 사랑받아온 저자가 ‘영원과 사랑의 대화’(1961년) 뒤에 쓴 글 가운데 골라 모았다. 많은 후학을 길러내고 1960년대부터 ‘고독이라는 병’을 비롯해 기록적인 베스트셀러를 내며 삶의 지침을 전파했던 김 교수는 어느덧 스스로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음을 깨닫는다. 어느 날 오후 그는 산책길에 서산 너머로 장엄하게 저무는 해를 바라봤다. ‘해가 지는 데 몇 분이 걸릴까. 내 나이도 저 태양과 같은 순간에 이르고 있는데 몇 해나 남아 있을까. 몇 해라기보다는 어느 정도의 시간이 주어져 있을까. 그 시간 동안에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김 교수는 이에 대해 “지금도 언제나 어떻게 인간관계를 선하고 아름답게 이끌어 갈 수 있을까를 생각한다”며 “그것이 도덕과 윤리의 기본이다. 모두가 무엇을 위해 살지 고민하고, 그것을 찾아가려는 노력을 함께 가져주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김 교수는 ‘또 하나의 나’와 대화를 나눈다고 했다(‘고독에 관하여’). ‘나’는 친구가 죽었을 때, 전쟁이 일어났을 때, 사랑하던 사람이 운명했을 때 자신의 행동을 살피고 무언가를 묻고 싶어 하던 표정을 그대로 가지고 나타났다. 저자는 영원, 죽음, 무한, 허무, 운명 같은 주제를 두고 스스로와 대화한다. 절망의 밑바닥에서 그는 ‘신의 사랑의 음성’을 듣고자 귀를 기울였다. 장수하는 건 사랑하는 이들을 먼저 떠나보내는 일이기도 했다. 김 교수는 노모를 모시는 동시에 뇌출혈로 쓰러져 투병하는 아내의 병 수발을 하며 10여 년을 살았다. 그동안 ‘어깨에 쌀가마니 두 포대를 지고 가는 것같이 힘들었다’. 그러나 7년 사이 모친과 아내가 세상을 떠나자 외로움과 서글픔이 온몸을 덮쳐왔다. ‘사랑을 주고받을 삶의 앞길이 없어진 것이다. 두 분의 사랑을 영원히 받지 못하게 된 것이다. … 그러나 내 마음 밑바닥에서부터 생각이 한 가닥 피어올랐다. 이제부터 두 분에게서 받은 사랑을 더 많은 사랑해야 할 사람들에게 나눠 주어야겠다.’ 김 교수는 고고한 현자의 높이에서 내려다보지 않는다. 그 자신도 ‘백수를 맞이하는 오늘까지 삶의 의미와 가치를 찾아온 셈’이라고 고백한다. 그 열정은 인생의 마지막에 가까워질수록 더욱 간절해진다. 김 교수도 “나이가 들었기에 민족과 국가, 사회를 걱정하는 마음은 더욱 커져간다”고 말했다. 노화와 죽음이 주요한 화두로 부각된 오늘날 서가에 꽂아두고 곱씹으며 벗으로 삼을 만한 책이다. 표제작의 마지막 부분은 이렇다. “그래도 나를 위한 시간들이 아직은 남아 있다. 누군가 사랑하는 사람이 옆에 와 ‘힘드시지요?’라고 물으면 나는 ‘예, 그래도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어 행복합니다’라고 대답할 것 같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사이버 외교사절단 반크와 ‘3·1운동 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는 3·1운동 유적지를 소개하는 지도 1만 부를 제작해 14일부터 전 세계에 배포한다고 밝혔다. 이 지도에는 3·1운동 당시 1만 명 이상이 모였던 장소 총 40곳이 표시돼 있다. 지도는 3·1운동을 “1919년 3월 1일 일제에 항거해 들불처럼 일어났던 한반도 곳곳의 독립운동”이라며 “당시 한국 인구의 10%인 200만 명 이상이 참여하고, 시위 건수가 2000회를 넘는 등 사실상 모든 국민이 참여한 독립운동”이라고 소개했다. 지도 왼쪽에는 전국의 3·1운동 유적지 33곳을 설명했다. 일례로 서울의 ‘서대문형무소’는 “3·1운동 당시 1600여 명의 시위 관련자가 수감됐던 곳으로 수많은 독립운동가가 투옥돼 고초를 당한 장소이다. 이 형무소는 잔혹한 일제 탄압의 역사를 보여주는 동시에 끊임없이 저항한 한국 독립운동 역사를 보여준다”고 소개했다. 이 밖에 ‘아우내장터 만세시위지’를 비롯해 서울의 ‘용산인쇄소 직공 파업시위지’ ‘보신각 앞 3·1운동 만세시위지’ 등이 33곳에 포함됐다. 반크는 지도를 글로벌 독도홍보대사와 세계 곳곳의 한글학교 교사 등에게 배포할 계획이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평창 겨울올림픽에서 가장 먼저 스타가 된 건 운동선수가 아니라 개회식 공연 ‘평화의 땅’ 장면에서 등장한 ‘인면조(人面鳥)’였다. 새의 몸에 사람의 얼굴을 한 상상 속의 이 새는 당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뜨겁게 달궜다. 인면조는 외신도 주목했다. 일본 아사히신문은 “TV에선 극히 단시간 비친 것뿐이지만 일본 SNS에서는 ‘솔직히 무섭다’ ‘아이가 보면 울어버릴 수준’이라는 반응이 나왔다”고 보도했다. 일본 유명 애니메이션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서도 주인공 하울이 사람의 얼굴을 한 새로 변신하는 장면이 나오기도 한다. 개회식에 등장한 인면조는 고구려 무용총의 벽화를 모티브로 만들어졌다. 언론에 사전 배포된 자료에는 “하늘과 땅을 잇는 인면조가 등장한다”고 설명돼 있다. 틀린 건 아니지만 고대 문화사를 연구한 전호태 울산대 역사문화학과 교수의 말은 조금 다르다. “도교 신앙에서 왕자교(王子喬)라는 이가 살아서 신선이 돼 하늘로 날아가는데 머리는 사람, 몸은 새의 모습입니다. 이처럼 인면조는 장수와 불사를 상징하는 경우가 보통이지요.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인면조는 천추지상(千秋之象) 만세지상(萬歲之象)이라고 해서 천년, 만년이 형상화된 것입니다. 죽은 자와 산 자의 천추와 만세를 보장하는 존재인 것이지요.” 등장 직후 인면조에 대한 반응이 부정적이었다가 긍정적으로 변한 건 ‘그로테스크’의 속성에서 기인한다는 분석이 나온다. 그로테스크는 ‘괴기한 것, 극도로 부자연한 것’을 지칭하는데 처음에는 거부감을 줄 수 있지만 숭고함과 축제성을 함께 품게 마련이다. 개회식 공연에서 강원도의 다섯 아이를 과거로 이끄는 것은 고구려 벽화 ‘사신도(四神圖)’에 나오는 백호다. 이어 청룡, 백호, 주작, 현무 등 사신이 자연, 동물과 함께 춤을 춘다. 고구려 벽화의 사신은 사계절, 하늘의 28별자리와 관련이 있다. 전 교수는 “중국 남북조·수·당 왕조의 고분벽화에서 사신은 자신을 부리는 선인(仙人)의 보조자로 그려지는데 고구려 벽화에서는 각 벽면의 유일한 제재로 한 방향의 방위신이자 무덤 주인의 수호신”이라며 “중국의 사신 관념과 달랐음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TV 시청자들만 볼 수 있었지만 ‘천상열차분야지도’가 하늘을 덮는 개회식 장면도 인상적이었다는 평가다. 천상열차분야지도는 우리나라에서 볼 수 있는 별을 밝은 것은 크게, 어두운 것은 작게 표현한 과학적인 천문도다. 태조 이성계가 개성에서 한양으로 천도한 뒤 1395년 제작됐다. 고구려 시대 제작한 천문도가 평양에 전해 내려왔는데 그 탁본을 바쳐 와 다시 만들었다고 기록돼 있다. 학계에서는 조선 건국의 정당성을 뒷받침하기 위해 제작한 것으로 해석한다. 개회식에서 모험을 떠나는 아이가 다섯 명이라는 것도 전통의 오방색 등과 맥이 닿아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천진기 국립민속박물관장은 “물론 오방색과 올림픽 오륜기의 색은 일치하지 않는다”면서도 “전통의 음양오행 사상을 바탕으로 아이들이 오대양 육대주의 미래로 나아간다는 걸 상징하는 장면으로 보였다”고 말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문화체육관광부는 오페라 지휘자 윤호근 씨(51·사진)를 국립오페라단 예술감독에 9일 임명했다. 윤 신임 예술감독은 독일 만하임 국립음대를 졸업하고, 1999년부터 독일 기센 시립극장 부지휘자, 베를린 슈타츠오퍼(국립오페라단) 음악코치와 부지휘자 등으로 활동했다. 임기는 3년.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여러분 반갑습니다. 평창 겨울올림픽을 민족의 경사로 축하하기 위해 강릉을 찾았습니다.” 북한 삼지연관현악단이 평창 겨울올림픽 개막을 하루 앞둔 8일 오후 8시부터 강릉아트센터 사임당홀에서 800여 명의 관객이 지켜보는 가운데 특별 공연을 펼쳤다. 북한 예술단의 방한(방남) 공연은 2002년 8월 서울에서 열린 8·15민족통일대회 이후 16년 만이다. 이날 무대는 전자음악 연주단체인 모란봉악단이 중앙에 배치됐고, 한복을 입은 관현악단이 좌우로 나눠 앉았다. 하프 바이올린 등 서양식 악기와 함께 장구와 꽹과리 등 민족 전통악기가 같이 편성됐다. 첫 곡 ‘반갑습니다’에 이어 겨울 풍경을 묘사한 ‘흰눈아 내려라’, 평화를 소재로 한 ‘비둘기야 높이 날아라’, 전자악기의 반주로 ‘내 나라 제일로 좋아’ 등 북한 노래가 무대에 올랐다. 5명의 여성이 ‘달려가자 미래로’라는 빠른 템포의 노래와 걸그룹을 연상시키는 율동을 펼치자 공연장은 더욱 달아올랐다. 이선희의 ‘J에게’를 시작으로 한국 노래가 공연되기 시작하자 관객들의 호응도 더욱 커졌다. 이날 북한 공연단은 왁스의 ‘여정’, 심수봉의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 등 한국 노래 11곡을 공연했다. 관객들은 한국 노래를 함께 흥얼거리며 따라 불렀다. 진옥섭 한국문화재재단 이사장은 “남쪽 유행가를 불렀지만 마치 음대생이 교수님 몰래 부르는 느낌이었다”며 “우리 시각에서는 소박해 보였다”고 말했다. 공연 관계자와 정부 관계자에 따르면 남북 양측은 노래 2곡을 공연하느냐를 두고 막판까지 협의를 계속했다. 문제가 된 곡은 ‘모란봉’과 ‘백두와 한나(한라)는 내 조국’이었다. 실제 공연에서 ‘모란봉’은 안 불렀고, ‘백두와 한나…’는 무대에 올려졌지만 3절의 “태양조선 하나 되는 통일이여라”라는 가사는 부르지 않았다고 관객은 전했다. 이날 공연을 관람한 공연 전문가들은 “북한 공연단이 한국 노래를 많이 부르고, 북한 노래는 거부감이 없을 만한 것으로 고르는 한편 문제가 될 만한 가사는 빼고 불렀다”며 “남쪽 관객들이 친근하게 느끼도록 하기 위해 신경 쓴 모양이 역력했다”고 말했다. 전영선 건국대 통일인문학연구단 교수는 “북한 음악을 공연하면서도 빛 배경이나 화면 등에 자연 풍경을 넣어 북한 색깔을 배제한 노력이 많이 엿보였다”고 말했다. 클래식과 오페라 음악을 비롯한 서양음악 레퍼토리도 이어졌다. ‘오솔레미오’, ‘올드블랙 조’, ‘백조의 호수’, ‘라데츠키 행진곡’ ‘카르멘 서곡’ ‘윌리엄텔 서곡’ ‘오페라의 유령’ 등이었다. ‘아리랑’을 제외하고 국악 곡은 없었지만 공연에는 민족적 색채가 배어 있었다. 공연을 본 천현식 국립국악원 학예연구사는 “서양 관현악단에 전자악기를 추가 배치한 팝스 오케스트라 편성이었지만 북한식 태평소인 세납, 그중에서도 장세납을 사용하고 꽹과리 소리도 들렸다”고 말했다. 북한 예술단의 연주 실력은 상당한 수준이었다는 평가가 나왔다. 이날 공연을 본 심규만 강릉아트센터 공연기획팀장은 “거칠면서 약간 절도 있는, 딱딱 떨어지는 사회주의 음악의 특징을 보였지만 실력은 상당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까만 핫팬츠, 빨간 민소매에 까만 리본깃 등의 의상은 다소 세련되지 못해 보였다는 평가도 있었다. 140명 규모의 삼지연관현악단은 삼지연악단, 모란봉악단, 청봉악단을 비롯한 6, 7개의 북한 예술단에서 이번 공연을 위해 정예 연주자와 가수, 무용수를 뽑아 구성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경자 강원대 무용과 교수는 “공연이 끝나고 커튼콜 공연 때 북한 공연단 표정과 몸짓에서 굉장히 아쉬워하는 게 느껴졌다”고 말했다. 김연갑 한겨레아리랑연합회 상임이사는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부르면서 ‘우리끼리 통일’이라는 가사를 넣은 것이 신기했다”고 말했다. 이날 공연에 앞서 공연장 300m 밖에서는 보수단체 회원 200여 명이 공연 반대 시위를 벌였다. 강릉아트센터 주변에는 한반도기를 든 시민 10여 명이 몰렸다. 이들은 북한 예술단이 오갈 때 “우리는 하나다”라고 외쳤다. 북한 삼지연관현악단은 공연 뒤 서울로 이동해 11일 오후 7시 국립중앙극장 해오름극장에서 두 번째 공연을 하게 된다.강릉=공동취재단·조종엽 jjj@donga.com / 김정은·박선희 기자}

‘달이 차오른다, 가자’(장기하와 얼굴들). 한국인에게는 밤을 사랑하는 유전자(DNA)가 있는 것일까. 밤늦게까지 놀거나 일을 하는 이들을 일컫는 ‘호모 나이트쿠스(Homo Nightcus)’라는 말이 회자되고, 외국인은 한국의 밤 문화를 신기하게 본다. 전깃불이 없던 옛 시절의 밤은 어땠을까?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의 김유진 씨가 ‘서울민속학’에 게재 예정인 논문 등을 통해 ‘조선의 밤’을 살펴봤다.○ 궁중, 문묘의 숨 가쁜 밤 적막하기만 했을 듯한 조선의 밤은 사실 은근히 분주했다. 한밤중에 과거 시험이 열리기도 했다. 바로 알성시(謁聖試)다. 알성시는 임금이 성균관 문묘의 공자 신위에 참배하는 ‘알성례’ 뒤에 치러졌는데 알성례를 대개 밤에 했기에 시험 문제도 인시(寅時·오전 3∼5시)는 돼야 출제됐다. 과장(科場)에는 횃불을 밝혔고, 초에 눈금을 그어 놓고 촛불이 그 금까지 타면 시험을 종료하는 각촉(刻燭)시의 방식으로 치러지기도 했다. 활쏘기 실력 등을 보는 무과는 어둠 속에서 과녁을 구별하기가 어려우므로 시험 시간을 바꿔야 한다는 상소가 올라오기도 했다. 궁에서는 밤에 왕이 신하와 공부하고 정치를 토론하는 한편 간단히 술잔을 기울이기도 하는 야대(夜對)를 했다. ‘심야 토론’을 즐긴 조선 최고의 ‘올빼미 왕’은 성종이다. 김 씨가 조선왕조실록의 야대 기록을 분석한 결과 성종이 470번으로 가장 많았고, 영조(113번)가 뒤를 이었다. 승정원일기에는 오전 1∼5시에 야대한 기록도 있다.○ 조선의 3대 철야일 한양 도성 안은 대체로 초경 3점∼5경 3점(대략 오후 8시∼오전 4시) 야간통행이 금지(야금·夜禁)됐다. 하지만 달맞이를 하는 정월대보름 등의 명절에는 야금을 해제해 백성들이 즐길 수 있도록 했다. 아예 밤을 새우는 것이 목적인 ‘철야일’도 공식적으로 존재했다. 섣달그믐 밤인 제야일(除夜日)에는 집집마다 불을 켜두고 가족이 함께 둘러앉아 송구영신(送舊迎新)의 의미로 밤을 새웠다. 윤기(1741∼1826)의 ‘무명자집’에는 이날 ‘거리에 곱게 단장한 여인들과 화려한 복장의 사내들이 넘쳐나며, 밤새도록 놀며 담소 나누는 소리가 시끄럽다’고 했다. 궁과 관아에서는 불놀이를 하거나 잡귀를 몰아내는 의식인 나례(儺禮)를 행했다. 포를 3번 쏘아(연종방포·年終放砲) 나쁜 기운을 쫓아내기도 했다. 동지섣달의 경신일(庚申日)에도 궁에서는 경신연(庚申宴), 양반들은 경신회(庚申會)를 열어 술과 음식을 즐기며 밤을 새웠다. 이날 잠을 자면 몸에서 삼시충(三尸蟲)이 빠져나가서 하늘의 신에게 자신의 잘못을 고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음력 12월 24일에도 교년일(交年日)이라고 해 왕이 신하들과 밤을 새웠다.○ 주등(酒燈) 걸고 호객하는 주막 ‘거리에 행인 줄고 점포도 닫았는데(人稀街路市垂簾)/안개는 짙게 끼어 여염에 자욱하네(煙霧深籠撲地閻)/멀리서도 술집만은 분별할 수 있으니(惟有酒家遙可辨)…’ 18세기 후반 도성의 저녁 풍경을 소재로 한 윤기의 시다. 주막은 등이나 깃발을 내걸고 어둠 속에서 손님을 모았다. 조선 후기에는 몰락한 양반 여성이 주인이고 술과 음식은 하인이 나르는 ‘내외(內外) 술집’이 생겨났다. 근대에 들어서면 선술집과 야시장이 등장했다. 대한제국 시기 고종은 밤에 야회연(夜會宴)과 야진연(夜進宴)을 열었다. 김 씨는 “전통시대에도 야금이 해제되면 백성들은 다양한 밤 풍속을 향유했다”며 “일상적으로 밤 시간을 누릴 수 없었기에 그 의미가 더욱 각별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목민관은 상관의 패악한 행정을 상부로 보고해 바로잡아야 한다. 명나라에는 그렇게 하도록 법으로 정해져 있는데, 우리나라는 오로지 체통만 따지느라 상관이 비록 불법을 저질러도 목민관은 감히 한마디도 말하지 못해 백성들의 초췌함이 날로 더해진다.” 박석무 다산연구소 이사장(76)이 2월 5일 자신의 칼럼 ‘풀어쓰는 다산 이야기’ 998회에서 인용한 다산 정약용(1762∼1836)의 글이다. 박 이사장은 칼럼에서 “200년 전 다산은 내부자 고발의 정당함이 인정돼야 공직자들의 패악한 행정이 바로잡힌다는 탁월한 견해를 냈다”고 강조했다. 박 이사장이 2004년부터 14년째 써서 이메일로 독자들에게 보내 온 이 칼럼이 1000회를 앞두고 있다. 그동안 쓴 글을 합치면 200자 원고지로 7000장에 육박한다. 최근 서울 중구 다산연구소 사무실에서 만난 박 이사장은 “한 명이라도 읽어준다면 계속 쓴다는 마음으로 썼다”고 말했다. 칼럼을 쓰는 동안 대통령이 세 번 바뀌었다. 박 이사장은 다산의 사상을 바탕으로 정치인들의 잘못을 꾸짖는 칼럼이 가장 많았다고 했다. 박 이사장 역시 13, 14대 국회의원으로 일하며 친한 정치인도 있지만 비판은 친소를 가리지 않았다. 그가 칼럼에서 시의적절하게 인용하는 다산의 주장은 송곳 같고, 비수 같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세월호 참사 뒤 적당한 후임자를 찾지 못했다며 사퇴한 국무총리를 다시 일하도록 했을 때는 “온 나라에서 훌륭한 인재를 발탁해도 부족할까 두려운데 하물며 8, 9할을 버린단 말입니까”라는 ‘통색의(通塞議)’의 글을 인용해 인사의 지역 편중을 지적했다. 최근 국정 농단 정국에서는 상사의 잘못된 명령에는 굽히지 말라는 다산의 주장을 들며 정부 여당을 ‘환관과 내시의 정권’이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이런 칼럼들은 적지 않은 반향을 일으켰다. 매주 이메일을 받는 이들이 38만 명가량이고, 발송 당일 열어보는 이들만 1만 명이 넘는다. 전재된 글을 읽는 독자는 어림하기도 어렵다. “‘내로남불’요? 목민심서에는 자기 잘못을 하급 관료에게 미루거나, 모르면서도 아는 척하는 목민관에 대한 비판이 적지 않습니다. 또 목민관이 부임하면 고을의 대표들을 모아 놓고 고충을 들은 뒤 악습과 적폐 먼저 다 뜯어고치라고 강조합니다. 오늘날도 새겨들어야 할 말입니다.” 다산이 유배에서 풀려나고 목민심서를 완성한 지 올해 200주년을 맞는다. 박 이사장은 “다산은 문과에 급제하고 지은 시에서 앞으로 ‘공(公)’과 ‘염(廉)’, 곧 공정 공평 청렴으로 벼슬살이를 하겠다고 다짐한다”며 “‘공렴’ 두 글자가 우리 사회의 작동 원리가 되기만 하면 선진국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지난해 성인 10명 중 4명은 1년 동안 종이책을 한 권도 읽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종이책 독서율은 1994년 조사를 시작한 이후 최저로 떨어진 반면 전자책 독서율은 2년 전 조사보다 증가했다. 문화체육관광부는 2017년 국민독서실태조사 결과 연간 독서율이 성인은 59.9%, 학생은 91.7%로 나타났다고 5일 밝혔다. 2015년과 비교하면 성인은 5.4%포인트, 학생은 3.2%포인트 줄었다. 국민독서실태는 2년마다 조사한다. 독서율은 지난 1년간 교과서, 학습참고서, 수험서, 잡지, 만화를 제외한 일반 종이책을 1권 이상 읽은 사람의 비율로 1994년 조사에서는 성인 86.8%, 학생 97.6%였다. 문체부에 따르면 2017년 평균 독서량 역시 성인 8.3권으로, 2015년보다 0.8권 감소했다. 성인의 공공도서관 이용률도 22.2%로 나타나 6%포인트 하락했다. 이에 비해 웹소설 확산 등의 영향으로 2017년 전자책 독서율은 성인 14.1%, 학생 29.8%로 2015년보다 각각 3.9%포인트, 1.7%포인트 늘었다. 평소 책 읽기가 어려운 이유로는 ‘일(학교·학원) 때문에 시간이 없어서’라는 응답이 성인(32.2%)과 학생(29.1%) 모두 가장 많았다. 이어 성인은 ‘휴대전화 이용, 인터넷 게임을 하느라’(19.6%), ‘다른 여가 활동으로 시간이 없어서’(15.7%)라고 답했다. 학생이 독서를 하지 않는 이유는 ‘책 읽기가 싫고 습관이 들지 않아서’(21.1%), ‘휴대전화, 인터넷, 게임 하느라 시간이 없어서’(18.5%) 등이었다. 평균 독서율과 독서량은 줄었지만 종이책을 읽는 이들은 전보다 더 오래 독서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성인 종이책 독서자의 책 읽는 시간은 2015년에 비해 평일은 32.9분에서 38.5분으로, 주말은 34.4분에서 42.7분으로 증가했다. 이번 조사는 전국 17개 시도 성인 6000명, 초중고교생 3329명을 대상으로 실시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팸플릿에 가까운 두께와 임금 노동의 종말을 다룬다는 점에서 카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공산당 선언’(1848년)을 연상시키는 책이다. ‘공산당 선언’이 만국의 노동자가 단결해 폭력으로 임금 노동제를 끝내자고 선동했다면, ‘고용은…’은 가까운 미래에 자동화로 임금제 고용이 자연스레 사라질 것이므로 사회적 협상을 통해 노동을 새로 자리매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프랑스 기술철학자로 퐁피두센터 혁신연구소장인 베르나르 스티글레르와 저널리스트인 아리엘 키루의 2014년 봄 대담을 담은 책이다. 스티글레르는 “(경제시스템의 주변부를 제외하고) 향후 20년 안에 고용에 기초한 사회가 완전히 소멸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책에 따르면 2013년 프랑스 정부가 육성하겠다고 발표한 로봇 산업은 산업직의 고용을 없앨 것이다. 그러나 기술은 ‘파르마콘(Pharmakon)’, 즉 약도 독도 될 수 있다. 저자는 ‘고용(emploi)’과 ‘일(travail)’을 구분한다. ‘고용’은 임금을 받고 하는 일로 표준화되고 기계적인 반복이다. 반면 일은 자신을 풍요롭게 만드는 활동이다. 기술 발전은 고용에서 일로 전환하는, 이른바 ‘기여 경제’로 이행할 기회를 제공한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고용이 소멸한다는 저자의 논지는 다소 극단적으로 다가온다. 자동화 기계가 노동의 상당 부분을 대체한다는 데 동의한다 해도, 그 기계는 누가 만들까 하는 의문은 남는다. 자동화된 기계를 만드는 자동화 기계를 만드는 자동화된 기계? 책에서 제안하는 기여 경제의 모습을 보자. 소득은 임금이 아니라 ‘기여 소득’으로 분배된다. 그건 “품위 있게 살고, 자신을 계발하고, 사회가 가치를 부여할 필요가 있는 앎의 형태들을 발전시키는 기반 위에서 모든 사람에게 지급되는 소득”이다. 교환과 시장은 “이익에 혈안이 된 소비자가 아니라 집단으로 이어진 아마추어 사이에서의 교환” “교환가치로 환원되지 않는 상품 시장” 등으로 표현한다. 좋은 얘기다. 그런데 눈치챘겠지만, 이건 이미 자본주의 체제를 넘어선 것이다. 스티글레르 역시 “이것은 사실 혁명입니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책은 ‘어떻게(How)?’를 거의 공백으로 남겨둔다. 스티글레르는 프랑스 ‘예술인 실업급여제도(Intermittents du Spectacle)’를 기여경제의 단초가 되는 모델로 제시한다. 자세한 설명이 없어 아쉽지만, 시장에서 충분한 소득을 얻지 못하는 예술인의 활동을 공적 재원으로 보상하는 제도로 보인다. 이런 제도가 소수 집단에는 실현될 수 있겠지만 사회 전체에 적용하려면 어디선가는 엄청난 부담을 져야 한다. 저자는 임금 노동이 사라질 것이라 보고 있으니, 결국 자본 소득의 상당 부분이 이전돼야 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사회적 파트너들과 결판이 날 때까지 협상을 벌여야 한다”는 저자의 말은 다소 공허하게 다가온다. 아마 마르크스가 살아 있다면 ‘공상적 사회주의’라고 비판하지 않을까. 저자의 예측이 옳다면 오히려 파국을 우려하는 게 먼저 아닐는지. 자동화 기계의 투자 경쟁이 심화하고 실업자는 넘쳐나고 노동은 양극화되는 한편 노동 소득이 급락하면서 맞이할 ‘공황’ 말이다. 겨울은 끝나지 않고, 모두가 아무리 버텨도 ‘구조대’가 오지 않는 그런 시기가 온다면 저자의 논의는 새로운 세계의 청사진이 되지 않을까.조종엽 기자 jjj@donga.com}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달 31일 별세한 가야금 명인 고 황병기 선생 유가족에게 1일 조전을 보내 위로했다. 문 대통령은 “우리의 소리, 한 자락이 사라진 듯 마음이 아프다”며 “선생님의 명복을 빌며 유가족분들께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고 밝혔다. 문 대통령은 또 “고인께서는 부산 피란길에서 처음 가야금 소리를 어린 가슴에 품고, 평생 우리 국악을 지키고 키워내셨다”며 “고인이 있어 가야금 연주는 진정 모두의 것이 되었다”고 추모했다. 이어 “고인의 모습을 무대에서 만날 수 없다는 것이 너무나 슬프고 아쉽다”며 “그러나 고인의 업적은 후대를 통해 길이 이어질 것이고 우리는 고인의 연주를 오래도록 만날 것”이라고 말했다. 서울아산병원에 마련된 빈소에는 연극배우 박정자 씨, 안숙선 명창, 한국무용 안무가 배정혜 씨를 비롯해 예술가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중요무형문화재인 정재국 명인(피리), 양승희 명인(가야금), 문재숙 이화여대 교수(가야금)가 빈소를 다녀갔다.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 박수길 전 국립오페라단장, 황현산 한국문화예술위원장, 도종환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김철호 서울시국악관현악단장, 안호상 홍익대 공연예술대학원장도 빈소를 찾아 고인을 추모했다.한상준 alwaysj@donga.com·조종엽 기자}

문화재청이 뒤늦게 광화문 현판을 원래 색인 ‘검은 바탕에 금색 글자’로 되돌려놓겠다고 30일 밝혔다. 이에 따라 문화재청이 그동안 여러 문화재 연구자와 시민단체의 의견을 묵살하고 잘못된 결정을 고집했던 과정을 돌이켜봐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문화재청은 이날 서울 중구 한국의집에서 간담회를 열고 “실험용 현판을 만들어 옛 사진처럼 유리건판으로 촬영하는 과학적 분석과 실험을 1년간 했다”며 “광화문 현판이 ‘검은색 바탕에 금박 글자’임이 밝혀졌다”고 말했다. 문화재청은 지난 10여 년간 언론과 시민단체 등에서 되풀이해 제기한 부실 고증 의혹을 사실상 무시해 왔다. 현판 색에 대한 문제 제기는 13년 전인 200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유홍준 당시 문화재청장은 조선 말기 훈련대장 임태영의 현판 글씨를 복원했다며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한 1916년 광화문 사진을 공개했다. 이 사진은 지금 걸려 있는 현판처럼 바탕색이 밝게 보인다. 그러나 책 ‘제자리를 떠난 문화재에 관한 조사보고서’ 등을 쓴 문화재 연구자 이순우 씨는 “‘조선고적도보’ 등의 자료보다 훨씬 멀리에서 촬영한 사진임에도 글씨의 흔적과 색깔이 뚜렷해 납득하기 어렵다”고 의혹을 제기했다. 이에 대해 문화재청은 “유리원판 사진을 디지털 원색분해를 통해 확인한 것으로 현판과 글씨의 색깔은 현재로서는 확인할 수 없는 사항”이라고 답변했다. 디지털로 수정된 사진이어서 원래 색은 모른다는 걸 인정한 것. 그럼에도 문화재청은 제대로 된 고증 없이 2010년 8월 광화문 현판을 현재처럼 ‘흰 바탕에 검은 글씨’로 복원했다. 그해 7월 열린 현판복원소위원회는 그 근거도 밝히지 않았다. 이에 “경복궁 등 궁궐의 전각이나 성곽 성문의 현판은 대부분 검은색 바탕”이라며 복원이 잘못됐다”는 전문가들의 지적이 이어졌다. 본보도 2011년 11월 기사에서 “‘철저한 고증과 고민 없이 현판 색상을 정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 전문가들은 대체로 ‘검은색 바탕에 흰색 또는 금색 글씨’여야 한다는 의견을 내놓았다”고 보도했다. 문화재청은 2012년 두 차례에 걸쳐 현판 색상검토 자문회의를 열었지만 기존 결정을 고집했다. 그해 2월 1차 자문회의부터 “(글씨가) 당초 금박이었으나 풍화작용에 의해 검게 나타난 것”이라는 소수의견이 나왔지만 묵살됐다. 같은 해 10월 2차 자문회의에서는 “왕의 생활공간 바깥이므로 금칠을 하지 않는다”며 근거가 부족한 이유를 들었다. 언론과 시민단체의 지적이 계속되자 문화재청은 2014년 6월 3차 자문회의를 열었다. 당시 사진 분야 전문가가 “바탕이 흰색이라고 판단할 수가 없다”는 의견을 냈지만 문화재청은 이때에도 사진으로 현판 색을 검증하는 실험에 나서지 않았다. 문화재청이 현판 색상을 원점부터 재검토하기로 한 것은 문화재제자리찾기 혜문(본명 김영준) 대표가 미국 스미스소니언 박물관의 ‘국가 인류학 자료보관소’에서 1893년경 촬영된 광화문 사진을 찾아내 2016년 2월 공개하면서부터다. 사진 속 현판은 어두운 바탕에 밝은 글씨가 뚜렷했다. 문화재청은 뒤늦게 검증 실험에 나선 까닭을 묻자 “스미스소니언 사진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고증자료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나 현판 색이 어둡고, 글씨가 밝았음을 시사하는 자료는 그 이전에도 적지 않았다. 문화재청은 현대 안료와 전통 안료로 실험용 현판을 칠해 장단점을 비교한 뒤 내년 상반기 검은 바탕에 금박 글씨로 실제 현판을 단청해 설치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잘못할 수도 있지요. 그럼 서둘러 바로잡고 반성하고 사과하면 되잖아요. 문제를 자꾸 덮으려 하니까 일이 점점 커지는 겁니다.” 문화재청이 현판 색을 검은 바탕에 금박 글자로 되돌리겠다고 발표한 30일 서울 종로구 문화재제자리찾기 사무실에서 만난 혜문 대표는 썩 밝지 않은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혜문 대표는 2012년부터 복원된 현판 색에 의문을 가졌고 문화재청에 문제를 제기했다. 2016년에는 어두운 바탕에 밝은 글씨로 쓰인 미국 스미스소니언 박물관 소장 광화문 사진을 찾아내 공개하면서 현판이 제 모습을 찾는 데 결정적인 증거를 제공했다. “2014년 열린 문화재청의 현판 색상 자문회의에는 저도 나갔습니다. 당시 문화재청 분위기는 ‘우리가 어련히 알아서 복원했을까,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떠든다’는 식이었어요. 결국 ‘헛소리의 향연’으로 드러났지만요.” 혜문 대표는 현판이 제 색상을 찾지 못하고 되풀이된 문제 제기에도 이제야 바로잡기로 결정된 건 잘못 끼운 첫 단추가 ‘도그마(교리)’가 돼 버렸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처음 국립중앙박물관 광화문 현판 사진에서 글씨체를 따올 때, 글씨 부분은 진하게 살려내고 나머지 검은색은 제거했을 겁니다. 이를 2005년 유홍준 문화재청장이 그대로 공개합니다. 이때 현판은 바탕과 글씨의 밝기가 원래와 달리 반대로 뒤집어지도록 운명이 결정됐던 게 아닐까요?” 혜문 대표는 “문화재청은 이후 현판 색상이 잘못됐다는 다른 증거를 사실상 묵살하며 처음 결정만을 고집해 왔다”며 “자정 능력을 상실한 것”이라고 꼬집었다. 미국 코넬대 소장 사진, 조선고적도보 사진, 백악춘효도를 비롯해 현판의 바탕색이 어둡다는 걸 드러내는 자료가 다수 있음에도 이는 문화재청의 결정에 전혀 반영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날 문화재청은 보도자료와 기자간담회 현장에서 시민단체의 노력은 전혀 언급하지 않은 채 ‘문화재청의 과학적 실험’만 강조했다. 혜문 대표는 “누군가의 노력에 의해서 잘못이 바로잡혀도 문화재청이 인정은커녕 마치 전혀 그런 도움을 받지 않았다는 듯 자신의 성과로 포장하는 데 지쳤다”고 말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문화재청이 뒤늦게 광화문 현판을 원래 색인 ‘검은 바탕에 금색 글자’로 되돌려놓겠다고 30일 밝혔다. 이에 따라 문화재청이 그동안 여러 문화재 연구자와 시민단체의 의견을 묵살하고 잘못된 결정을 고집했던 과정을 돌이켜봐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문화재청은 이날 서울 중구 한국의집에서 간담회를 열고 “실험용 현판을 만들어 옛 사진처럼 유리건판으로 촬영하는 과학적 분석과 실험을 1년간 했다”며 “광화문 현판이 ‘검은색 바탕에 금박 글자’임이 밝혀졌다”고 말했다. 문화재청은 지난 10여 년 간 언론과 시민단체 등에서 되풀이해 제기한 부실 고증 의혹을 사실상 무시해 왔다. 현판 색에 대한 문제제기는 13년 전인 200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유홍준 당시 문화재청장은 조선 말기 훈련대장 임태영의 현판 글씨를 복원했다며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한 1916년 광화문 사진을 공개했다. 이 사진은 지금 걸려있는 현판처럼 바탕색이 밝게 보인다. 그러나 책 ‘제자리를 떠난 문화재에 관한 조사보고서’ 등을 쓴 문화재연구자 이순우 씨는 “‘조선고적도보’ 등의 자료보다 훨씬 멀리에서 촬영한 사진임에도 글씨의 흔적과 색깔이 뚜렷해 납득하기 어렵다”고 의혹을 제기했다. 이에 대해 문화재청은 “유리원판 사진을 디지털 원색분해를 통해 확인한 것으로 현판과 글씨의 색깔은 현재로서는 확인할 수 없는 사항”이라고 답변했다. 디지털로 수정된 사진이어서 원래 색은 모른다는 걸 인정한 것. 그럼에도 문화재청은 제대로 된 고증 없이 2010년 8월 광화문 현판을 현재처럼 ‘흰 바탕에 검은 글씨’로 복원했다. 그해 7월 열린 현판 복원 소위원회는 그 근거도 밝히지 않았다. 이에 “경복궁 등 궁궐의 전각이나 성곽 성문의 현판은 대부분 검은색 바탕”이라며 복원이 잘못됐다“는 전문가들의 지적이 이어졌다. 본보도 2011년 11월 기사에서 ”‘철저한 고증과 고민 없이 현판 색상을 정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 전문가들은 대체로 ‘검은색 바탕에 흰색 또는 금색 글씨’여야 한다는 의견을 내놓았다“고 보도했다. 문화재청은 2012년 두 차례에 걸쳐 현판 색상검토 자문회의를 열었지만 기존 결정을 고집했다. 그해 2월 1차 자문회의부터 ”(글씨가) 당초 금박이었으나 풍화작용에 의해 검게 나타난 것“이라는 소수의견이 나왔지만 묵살됐다. 같은 해 10월 2차 자문회의에서는 ”왕의 생활공간 바깥이므로 금칠을 하지 않는다“며 근거가 부족한 이유를 들었다. 언론과 시민단체의 지적이 계속되자 문화재청은 2014년 6월 3차 자문회의를 열었다. 당시 사진 분야 전문가가 ”바탕이 흰색이라고 판단할 수가 없다“는 의견을 냈지만 문화재청은 이때에도 사진으로 현판 색을 검증하는 실험에 나서지 않았다. 문화재청이 현판 색상을 원점부터 재검토하기로 한 것은 문화재제자리찾기 혜문(본명 김영준) 대표가 미국 스미스소니언 박물관의 ‘국가 인류학 자료보관소’에서 1893년경 촬영된 광화문 사진을 찾아내 2016년 2월 공개하면서부터다. 사진 속 현판은 어두운 바탕에 밝은 글씨가 뚜렷했다. 문화재청은 뒤늦게 검증 실험에 나선 까닭을 묻자 ”스미스소니언 사진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고증자료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나 현판 색이 어둡고, 글씨가 밝았음을 시사하는 자료는 그 이전에도 적지 않았다. 문화재청은 현대 안료와 전통 안료로 실험용 현판을 칠해 장단점을 비교한 뒤 내년 상반기 중 검은 바탕에 금박 글씨로 실제 현판을 단청해 설치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조종엽기자 jjj@donga.com}

국내 최초의 양봉 교재로 알려진 책 ‘양봉요지(養蜂要誌)’ 유일본이 출간된 지 100년 만에 독일에서 한국으로 돌아왔다. 양봉요지는 독일인 카니시우스 퀴겔겐(한국명 구걸근·1884∼1964) 신부가 서양의 양봉기술을 조선에 보급하기 위해 1918년 서울 종로구 혜화동 성 베네딕도 수도원에서 국문으로 편찬한 책이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은 독일 뮌스터슈바르자흐 수도원에서 27일(현지 시간) ‘양봉요지’ 반환식이 열렸다고 29일 밝혔다. 책은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경북 칠곡군)이 영구대여 형식으로 받아 28일 국내 반입됐다. 양봉요지는 처음에 등사본 150권이 발간됐다. 그 직후 몇 권이 독일의 수도원들로 간 것으로 추정되지만 뮌스터슈바르자흐 수도원에 있던 것 말고는 소장처를 알지 못한다. 왜관수도원에는 복제본만 남아 있었다. 왜관수도원에 선교사로 파견된 바르톨로메오 헨네켄(한국명 현익현) 신부가 2014년 독일에서 발견했다. 퀴겔겐 신부는 1911년 성 베네딕도 수도원의 선교사로 한국에 파견돼 1910년대에 근대적인 꿀벌 사육을 조선에 처음으로 도입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1950년 독일로 귀환했다. 반환식에서 뮌스터슈바르자흐 수도원의 미하엘 레펜 원장은 “책이 100년 만에 한국에 가게 됐다. 하느님의 창조물인 벌들과 자연에 대한 사랑이 왜관에서도 꽃피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양봉요지 번역본은 2015년 발간됐다. 이번에 돌아온 양봉요지는 왜관수도원이 관리하며 칠곡군이 3월 개관하는 꿀벌나라테마공원에 전시된다. 앞서 2005년에는 독일 장크트오틸리엔 수도원이 소장한 ‘겸재정신화첩’이 베네딕도회의 한국 선교 100주년을 기념해 영구대여 방식으로 왜관수도원으로 반환됐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국내 최초의 양봉 교재로 알려진 책 ‘양봉요지’(養蜂要誌) 유일본이 출간된 지 100년 만에 독일에서 한국으로 돌아왔다. 양봉요지는 독일인 카니시우스 퀴겔겐(한국명 구걸근·1884~1964) 신부가 서양의 양봉기술을 조선에 보급하기 위해 1918년 서울 종로구 혜화동 베네딕도 수도원에서 국문으로 편찬한 책이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은 독일 뮌스터슈바르자흐(Abtei M¤nsterschwarzach) 수도원에서 27일(현지시간) ‘양봉요지’ 반환식이 열렸다고 29일 밝혔다. 책은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경북 칠곡군)이 영구 대여 형식으로 받아 28일 국내 반입됐다. 양봉요지는 처음에 등사본 150권이 발간됐다. 그 직후 몇 권이 독일의 수도원들로 간 것으로 추정되지만 뮌스터슈바르자흐 수도원에 있던 것 말고는 소장처를 알지 못한다. 왜관 수도원에는 복제본만 남아 있었다. 왜관수도원에 선교사로 파견된 바르톨로메오 헨네켄(한국명 현익현) 신부가 2014년 독일에서 발견했다. 퀴겔겐 신부는 1911년 성 베네딕도 수도원의 선교사로 한국에 파견돼 1910년대에 근대적인 꿀벌 사육을 조선에 처음으로 도입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1950년 독일로 귀환했다. 반환식에서 뮌스터슈바르자흐 수도원의 미카엘 리펜 아빠스 원장은 “책이 100년 만에 한국에 가게 됐다. 하느님의 창조물인 벌들과 자연에 대한 사랑이 왜관에서도 꽃피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양봉요지 번역본은 2015년 발간됐다. 이번에 돌아온 양봉요지는 왜관수도원이 관리하며 칠곡군이 3월 개관하는 꿀벌나라테마공원에 전시된다. 앞서 2005년에는 독일 상트오틸리엔 수도원이 소장한 ‘겸재정신화첩’이 베네딕도회의 한국 선교 100주년을 기념해 영구대여 방식으로 왜관수도원으로 반환됐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