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하기

“사람 손만큼 확실한 게 없거든요.” 공연예술을 아날로그 최후의 보루라고 한다. 영상, 발광다이오드(LED) 패널, 가상현실(VR) 등이 도입되고는 있지만 무대 뒤에서 스태프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은 없다. 일감을 덜고 사고를 줄이려 도입한 자동화 장치도 사람 손이 대체해 쓸모가 없어지기도 한다. 공연마다 변화무쌍한 무대의 호흡과 감을 기계는 따라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뮤지컬 ‘빅 피쉬’를 공연하는 서울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을 찾아 스태프의 하루를 재구성했다. 이들은 공연 7시간 전부터 무대를 닦고, 쓸고, 장비와 의상을 손본다. 공연예술이 아날로그라면 무대 뒤는 ‘리얼 아날로그’다. “세트 이상 없습니다”라는 외침에 “다시 한번 가볼게요”라는 외침이 겹친다. 매주 진행하는 무대 메인터넌스(보수 점검)를 위해 스태프 20여 명이 모인다. 이들은 가로 36m, 세로 30m, 높이 9.5m의 무대를 사방으로 오가며 혹시 모를 문제점을 찾는다. 무대 끝에 아슬아슬하게 걸터앉아 틈에 걸려 있는 소품, 먼지까지 찾아낸다. 사용되는 모든 세트, 소품을 점검하며 ‘빨리감기’하듯 모든 장면을 시연한다. ‘쇼 크루’로 불리는 무대 전환수들은 공연 중 세트를 순간 이동시키는 ‘보이지 않는 손’이 된다. ‘빅 피쉬’의 백미인 1막 ‘수선화 프러포즈’ 장면. 스태프 4명이 무대 양 옆쪽에서 무대 바닥을 끌어당기면 가운데 벌어진 틈 사이로 노란 수선화 꽃밭이 펼쳐진다. 직전 공연에서 뿌린 꽃잎을 다음 날 공연에 사용하기 위해 스태프가 이를 주워 담는다. 빗자루, 걸레, 봉투는 물론이고 바닥 작은 틈새에 낀 꽃가루도 일일이 없애기 위해 청소기를 쓴다. 방염 처리된 약 1만 장의 진짜 꽃잎을 뿌리기에 훼손된 꽃잎은 수시로 교체한다. 배우를 따라다니는 핀 조명 등 400여 개의 조명을 모두 가동한다. “오케이” 신호가 떨어질 때까지 조도를 계속 바꾼다. 배우 머리 위까지 내려오는 조명 세트도 많아 추락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평소 제일 먼저 공연장을 찾는 의상팀의 시간이다. 땀에 전 의상을 깨끗하게 되돌려 놓는 긴급 세탁·수선의 달인이다. 겉옷은 평균 주 1회, 티셔츠와 속옷은 매일 세탁한다. 리허설을 포함해 100회가 넘게 공연하면 의상 수선은 필수다. 분장팀이 바빠진다. 극의 환상적인 분위기를 살리려면 짙고 동화 같은 분장이 필수다. 배우 22명의 얼굴에 각양각색 화장을 입힌다. 배우가 의상 안에 착용한 마이크의 작동 여부도 이때 살핀다. 뮤지컬의 핵심은 누가 뭐래도 음향이다. 음향팀은 마이크, 오케스트라 악기 송출, 악기 튜닝까지 매일 체크한다. 공연 중 안개 특수효과를 담당한 스태프는 드라이아이스를 으깨 ‘포그(안개)머신’ 안에 넣어둔다. 일명 ‘하우스 오픈’. 관객이 입장한다. 쇼 크루가 1t 무게 첫 장면 무대 세트를 무대 중앙으로 옮기면 준비는 끝난다. 모든 스태프가 파이팅 구호를 외친다. “이야기의 힘으로 가자 저 하늘 끝까지! 빅 피쉬!” 막이 오르면 160분이 흘러간다. 관객이 모두 퇴장하면 휑한 무대 위로 몇몇 스태프가 다시 모여 “오늘 합이 괜찮았다. 전환 템포가 좀 빨랐다”라며 평가한다. 이종훈 제작감독은 “공연은 톱니들이 하나하나 맞물린 명품 시계다. 스태프는 돋보이는 누군가를 위해 일하는 게 아니라 자신이 맡은 일을 할 뿐”이라고 말했다.김기윤 기자 pep@donga.com}

“작품 속 주인공이 상처로 가득 찬 마음속 검은 비닐봉지를 비워내듯, 이 작품을 만나는 모든 분들도 자신 안에 있는 검은 봉지를 비우는 용기를 냈으면 합니다.”(장지혜 ‘날아가 버린 새’ 작가) “능력 있는 후배 연극인들 덕에 이 자리에 설 수 있어 영광스럽습니다. 유망한 연출가들을 지원하는 창작플랫폼과 그곳에서 나온 신작도 함께 인정받아 더 큰 영광입니다.”(김광보 서울시극단 예술감독)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에서 20일 열린 ‘KT와 함께하는 제56회 동아연극상’ 시상식에 참석한 두 작품상 수상작의 작가, 예술감독이 이렇게 말했다. 작품상을 받은 서울시극단의 ‘와이프’와 극단 돌파구의 ‘날아가 버린 새’는 각각 성 소수자와 비행청소년을 소재로 디테일한 연출을 선보인 수작으로 평가받았다. 이들은 창작, 제작, 공연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는 연극계를 아껴달라고 당부했다. 윤광진 동아연극상 심사위원장(용인대 연극학과 교수)은 “2019년 연극계는 사회 속 다양한 주제에 귀를 열고, 새 목소리를 공연했다. 양적으로 성장한 동시에 질적으로는 과도기에 놓여 대상, 희곡상 등을 선정하진 못했지만 젊은 창작진의 괄목할 만한 작품이 돋보였다”고 밝혔다. ‘녹천에는 똥이 많다’와 ‘와이프’로 연출상을 수상한 신유청 연출가는 ‘3관왕’의 영예를 안았다. 연극계에서 ‘2019년은 신유청의 해’라는 우스갯소리까지 나왔다. 신 연출가는 “학창시절 무대 연기가 너무 떨려 도망치듯 선택한 게 연출이다. 20년 후 동아연극상 연출상을 받을 줄 꿈에도 몰랐는데, 오늘만큼은 앞으로 펼쳐질 원대한 축제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기쁘게 보내겠다”고 밝혔다. 연기상을 받은 성노진 배우는 “늘 꽃길만 걸을 순 없겠지만 힘들고 지칠 때 동아연극상이 딛고 일어설 디딤돌이 되어줄 것으로 믿는다”고 했다. 함께 연기상을 받은 강지은 배우는 “줄곧 연극만 하느라 애쓴다고 상을 주신 것 같다. 우리 모두에게도 꽃 피는 따뜻한 봄날이 다가오기를 바란다”고 했다. 무대예술상은 국립극단의 ‘스카팽’을 맡은 김요찬 음악감독, 유인촌신인연기상은 ‘여름은 덥고, 겨울은 길다’의 김은우, 황은후 배우가 각각 수상했다. 신인연출상은 ‘인정투쟁; 예술가편’의 이연주 연출가가 받았다. 특별상은 순수예술 분야 젊은 연출가들을 비롯한 예술가들을 아낌없이 지원한 공로를 인정해 두산연강재단 두산아트센터에 돌아갔다. 이날 시상식에는 심재찬 연출가, 남명렬 서울연극제 예술감독, 김춘경 동덕여대 방송연예과 교수, 심사위원인 박근형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교수와 최용훈 청운대 뮤지컬학과 교수, 이경미 연극평론가가 참석했다. 동아연극상 협찬사인 KT의 이인원 상무, 박제균 동아일보 논설주간 등 200여 명이 자리를 빛냈다.김기윤 기자 pep@donga.com}

한국 뮤지컬계의 대표 축제 ‘제4회 한국뮤지컬어워즈’가 20일 오후 7시 서울 용산구 블루스퀘어 인터파크홀에서 열린다. 2018년 12월부터 지난해 11월까지 국내 개막한 작품을 대상으로 전문가 마니아 투표단이 특별상을 제외한 18개 부문 선정작(자)을 결정한다. 이날 예심, 본심을 거쳐 선정된 부문별 5개 후보 중 최종 선정작(자)을 현장에서 발표한다. 한국뮤지컬협회는 이날 시상식 사전행사로 오후 1시 ‘K뮤지컬 글로벌 네트워크 콘퍼런스’를 개최한다. 첫 번째 섹션에서는 브로드웨이와 웨스트엔드 등 세계 각지에서 활약한 한국 뮤지컬배우들을 초청해 ‘글로벌 뮤지컬 인재 양성을 위한 토크콘서트’를 연다. 두 번째 섹션에서는 ‘뮤지컬 창작·제작·유통의 글로벌 협업 전략방안’을 주제로 한국 뮤지컬의 해외 시장진출을 돌아본다.김기윤 기자 pep@donga.com}

오르한 파무크, 파트리크 모디아노, 다리오 포, 오에 겐자부로, 귄터 그라스, 헤르타 뮐러,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가오싱젠…. 문학 애호가라면 듣기만 해도 떨리고, 숨 막히는 이름들이다. 만약 이들과 만날 기회가 주어진다면? 사는 집은 어떻고, 가족과는 뭘 하며 지낼까? 무슨 요리를 즐겨 먹고, 노벨상 이후의 삶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사석에서는 무슨 얘기를 좋아할까? 이 궁금증들을 해소할 책이 나타났다. 이 시대 가장 뛰어난 문학작품을 쓴 거장들의 삶을 추적하기 위해 저자는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23인과 만나는 세계일주를 택했다. 스페인에서 약 20년간 문학전문기자로 활약한 저자의 궁금증 역시 팬들이 던질 법한 질문과 크게 다르지 않다. 유쾌하게 우리의 호기심을 해소해주며 작가들의 통찰도 생생히 전한다. 작가들과의 만남만으로도 부러운 여정임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결코 쉽지 않은 여정이기도 하다. 저자가 10년에 걸쳐 힘들게 수확한 작가들의 언행과 감각적 사진들은 하나하나 과실처럼 소중하다. 그는 신간이 나오면 의례적으로 치러지는 ‘호텔 인터뷰’를 지양하고, 삶 속으로 직접 파고들기로 했다. 가능하다면 가족도 함께 만나 집, 주방, 작업실을 돌아보고, 작품의 배경이 된 곳에 작가와 같이 간다는 원칙을 세웠다. 저자는 “작가 대부분이 문화 너머의 일들과 담을 쌓는 역할에 머물지 않고, 소외된 것들과 뜻을 함께한다”는 공통분모를 끄집어냈다. 또 권력, 돈, 명예보다 자신의 일을 늘 우선시한다고 서술했다. 인터뷰 성사 과정도 흥미롭다. 대사관 지인, 가족까지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했다. 10년 넘게 외부와 접촉을 끊은 ‘백 년의 고독’ 작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007 영화처럼 만남 장소만 일러둔 채 무작정 자신의 연락을 기다리도록 했다. 자국, 해외 언론을 피해 몰래 만난 자리에서 작가는 공식적으로 절필 의사를 밝히며 “명성은 권력과 같아서 현실감각을 흐트러뜨려 내 삶은 엉망이 되어버렸다”고 했다. 오르한 파무크는 민족주의자들의 암살 위협에도 불구하고 경호원을 남겨둔 채 저자와 산책에 나섰다. 저자는 “이 상황에 오르한 파무크는 분노하는 것 같지는 않다. 유머적 관점에서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인다”는 분석도 덧붙인다. 2016년 별세한 이탈리아 극작가 다리오 포와는 며칠 동안 함께 걷고, 먹고, 마셨으며 밤샘 토론도 했다. 1994년 극단주의자에게 습격을 당한 이집트 작가 나기브 마푸즈는 건강상, 신변상 이유로 짧게 만나야 했다. 도쿄에서 만난 오에 겐자부로는 사케를 대접하며, 심리적 장애가 있는 아들의 이야기도 꺼내놓는다.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로 유명한 파트리크 모디아노는 그의 서재를 거리낌 없이 공개했다. 198cm의 장신인 그는 “휴대한 지팡이는 걷는 데 필요한 게 아니라 책장 맨 윗줄의 책을 꺼내는 용도”라며 웃었다. 다소 호들갑스럽다는 묘사를 보면, 한 수다쟁이 프랑스 할아버지가 곁에 있는 듯하다. 수록된 사진들도 보는 맛을 더한다. 작가들의 인간적인 매력을 한껏 보여준다. 작가들과의 만남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값진 기록물이다.김기윤 기자 pep@donga.com}

소수자, 이머시브, 스테디셀러. 2020년 공연계 트렌드를 가늠할 세 가지 키워드가 꼽혔다. 젠더를 넘어 세대, 장애, 계층 등으로 주제가 확장하며 어느 때보다 관객에게 다채로운 선택지가 주어진다. 무대와 객석의 경계를 허무는 ‘이머시브(관객참여형)’ 공연과 공연장 문턱을 낮추려는 시도도 눈에 띈다. 국내외 검증을 마친 작품의 강세가 예상되는 가운데, 새로운 10년을 위한 창작 작품 개발이 본격화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평론가, 전문가 20명에게 올해 공연계 향방을 들어봤다.○ 소수자 돌아보고 관객과 가까이 기대작으로 꼽힌 뮤지컬 ‘제이미’는 열여섯 살 고등학생이 편견을 극복하고 드래그퀸(여장 남자)이 되는 이야기다. 아시아 초연으로 웨스트엔드를 휩쓴 창작진이 내한해 레플리카 형태로 무대에 올린다. 뮤지컬 ‘펀 홈’은 동성애자인 아버지와 레즈비언인 작가 자신의 계보를 추적하는 작품이다. 2015년 토니상 5관왕에 올랐다. 전자 악기 중심으로 넘버를 꾸민 ‘아메리칸 사이코’는 1980년대 뉴욕을 배경으로, 멀쩡한 겉모습과 달리 정신병을 숨기며 살아가는 주인공을 그렸다. 두산아트센터는 연극 ‘문 밖에서’를 통해 미군 기지촌 여성 노인들의 이야기를 무대로 끌어왔다. 음식을 주제로 한 기획 공연 3편도 선보인다. ‘젠더 프리’ 캐스팅도 여전하다. 국립극단의 ‘파우스트’에는 김성녀 전 국립창극단 예술감독이 파우스트 박사 역으로 출연해 기대감을 높이고 있다. 이경미 평론가는 “여성, 신진 연출가 중심으로 소외계층을 조명하는 다양한 형태의 작품이 쏟아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무대와 객석의 경계도 희미해진다. 지난해 연극 ‘로마 비극’에 이어 이머시브 공연이 톡톡 튀는 자극을 선사한다. 배우를 따라 관객이 계속 이동하는 ‘이머시브 개츠비’는 마니아층을 양산 중이다.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를 모티브로 만든 ‘더 그레이트 코멧’도 기대작이다. 무대에 설치된 일부 객석에서는 배우와 관객이 뒤섞인다. 국립극장도 해외 초청작으로 쥘리앵 고슬랭의 ‘플레이어스’ ‘마오Ⅱ’ ‘이름들’을 550분간 연속으로 공연한다. 관객의 입·퇴장이 자유로운 ‘열린 공연’이다. 박병성 더뮤지컬 편집장은 “비주류 소재, 형태의 작품이 급부상했다. 마니아층을 사로잡기 위한 제작사들의 선택”이라고 분석했다. 예주열 CJ ENM 공연사업본부장은 “기존 흥행 공식과 차별화한 주제의 작품들이 무대에 오르는 올해가 국내 공연계의 다양성 수용 정도를 가늠해볼 기점”이라고 했다. 관객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 소통하고 잠재 관객을 끌어오려는 시도도 이와 맥을 같이한다. 세종문화회관은 지난해 말 공공 공연장 최초로 주류 반입을 허용했으며, ‘스마트폰 프리’ 공연도 논의 중이다. 검증된 인기작도 관객과 만난다. 영국 국립극단의 ‘워호스’가 단연 1등으로 꼽힌다. 창작 13년 만에 처음 내한하는 작품으로, 제1차 세계대전 당시 기마대 말과 소년의 우정, 전쟁의 아픔을 그린 수작이다. 단순한 도구로 무대를 역동적으로 변화시키는 상상력, 인형의 활용모두 빼어나다. 인기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 ‘웃는 남자’ ‘드라큘라’ ‘킹키부츠’도 돌아온다. 국내 창작 뮤지컬 ‘베르테르’ ‘서편제’도 공연한다. 신춘수 오디컴퍼니 대표는 “안정적 대형 뮤지컬을 기반으로 다양한 창작공연을 개발하는 과도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무용 천재들의 내한 잇따라 매슈 본, 아크람 칸, 크리스털 파이트, 로이드 뉴슨, 마린스키 발레단…. 세계 정상급 안무가와 무용단의 공연이 무대를 수놓는다. 매슈 본은 신작 ‘레드 슈즈’를 선보이며, 무용에 연극적 요소를 채운 크리스털 파이트의 인기작 ‘검찰관’도 무대에 오른다. 무용수 은퇴를 선언한 영국 안무가 아크람 칸의 마지막 장편 솔로 ‘제노스’도 국내 팬들의 궁금증을 낳고 있다. 마린스키 발레단의 ‘젊은이와 죽음’도 공연한다. 마린스키 발레단 수석무용수 김기민도 고국을 찾는다. 국립발레단은 ‘해적’ ‘로미오와 줄리엣’ ‘호두까기 인형’을 선보이고 유니버설발레단(UBC)은 ‘잠자는 숲 속의 미녀’ 전막을 올린 뒤 ‘돈키호테’ ‘오네긴’을 공연한다. 국립극장은 창설 70주년 기념공연으로 신작 무용 ‘산조’, 발레 ‘베스트 컬렉션’, 창극 ‘춘향’을 선보인다. 역시 70주년을 맞는 국립극단은 연극 ‘만선’ 등을 무대에 올린다. 설문 응답자(20명·가나다순)원종원 이경미 장광열 허순자 황승경(이상 공연 평론가), 김요안 두산아트센터 수석PD, 김선희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교수, 김신아 예술경영지원센터 전문위원, 박병성 더뮤지컬 편집장, 백새미 인터파크 공연사업부장, 서미정 우란문화재단 PD, 손인영 국립무용단 예술감독, 신춘수 오디컴퍼니 대표, 엄홍현 EMK뮤지컬컴퍼니 대표, 예주열 CJ ENM 공연사업본부장, 우연 남산예술센터 극장운영실장, 이동현 국립극장 공연기획팀장, 이양희 세종문화회관 공연예술본부장, 이유리 한국뮤지컬협회 이사장, 조남규 한국무용협회 이사장 김기윤 기자 pep@donga.com}

“가자. 그래, 일단 한번 가보자!” 입을 떼는 순간 ‘나 때는 말이야…’로 시작해 일장연설을 늘어놓을 것만 같은 100세 꼰대 할아버지. 정작 그의 입에서는 “가자”는 말이 제일 많이 튀어나온다. 그냥 동네 마실 가자는 수준이 아니다. 명확한 목적지도 없다. 젊은이들이 ‘이래도 되나’ 싶을 때면 그가 먼저 “일단 고!”를 외친다. 고향 스웨덴을 떠나 세계를 누비며 폭탄이 터지든, 사람이 죽든 “살아보니 뭐 그럴 수 있다”며 위로를 건네는 이 노인. ‘연기 장인(匠人)’ 배해선(46)이 연극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에서 초월적 여유와 위트로 무장한 100세 알란 역을 맡았다. 서울 종로구 대학로에서 9일 만난 배해선은 “‘어디 네가 해봐라’ 대신 ‘가자’를 외치는 주인공의 말에 이상하게 꽂혀버렸다”며 “무심한 듯 진심이 담긴 대사에 저도 위로받는다”고 했다. 1995년 연극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로 데뷔한 그는 연극 ‘오이디푸스’ ‘그을린 사랑’을 비롯해 뮤지컬 ‘맘마미아’ ‘에비타’ ‘브로드웨이 42번가’ 등에 출연한 믿고 보는 배우다. 최근에는 TV와 스크린에서도 존재감을 뽐냈다. 첫 영화 ‘암수살인’을 시작으로 ‘엑시트’ ‘로망’ 등에 출연했고 지난해 tvN 드라마 ‘호텔 델루나’에서는 객실장 최서희 역을 맡았다. 그는 “무대와 마찬가지로 촬영지에서도 ‘그냥 그 캐릭터 자체가 되자’는 마음을 가졌다. 대중에게 저를 알리는 과정은 흥미로웠다”면서도 “역시 무대가 진짜 내 집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웃었다. 그래서인지 그의 차기작은 스웨덴 작가 요나스 요나손의 동명 소설을 무대로 옮긴 연극 ‘창문 넘어…’다. 100세 생일을 앞두고 양로원 창문을 넘으며 시작된 알란의 여정과 그가 태어난 1905년 이후 행적을 교차해 보여준다. 스페인 내전, 미국 핵개발 등 근현대사의 장면에 등장하고 처칠, 드골, 마오쩌둥, 김일성과도 만난다. 소설 속 막대한 시공간과 인물을 무대에 담기 위해 배우 5명이 캐릭터 60여 개를 연기하는 ‘캐릭터 저글링’(여러 캐릭터를 동시에 소화하는 연기)을 한다. 한 명당 배역이 평균 12개. 이 설정이 호기심을 자극하면서도 ‘100세 할아버지를 연기할 수 있을까’라는 걱정이 앞섰다. “작품이 실험적이었어요. 저보다 경험이 풍부한 선배가 알란을 연기해야 설득력이 있을 것 같았죠. ‘진짜 연기’로 안 보일까 봐 두려웠거든요.” 장고 끝에 “늘 새로운 것에 끌린다”는 도전정신이 걱정을 눌렀다. 배우 오용과 더블캐스팅으로 무대에 서며 100세 할아버지와 나이, 성별 등 모든 게 다르지만 인물의 진짜 이야기에 집중하면 된다는 걸 깨달았다. 작품에 임하자 새 고민거리도 생겼다. 체력이다. 무대에서 쉼 없이 이름표, 의상을 교체하고 춤도 추는 탓에 체력 소모가 꽤 크다. 그는 “서커스를 방불케 할 만큼 배우 간 합(合)이 중요하다. 이전에 겪지 못한 한계에 도전 중”이라고 했다. 다음 달 2일까지 서울 종로구 대학로 아트원씨어터 2관. 4만∼5만5000원. 12세 이상 관람가. 김기윤 기자 pep@donga.com}

1894년 갑오년에 한반도가 세계의 집중 조명을 받은 일이 있었으니, 한국은 이를 ‘청일전쟁’, 중국은 ‘갑오전쟁’으로 표기한다. 전쟁 발발 전부터 긴장감이 고조된 한반도와 동아시아에 서양 언론사들은 경쟁적으로 기자를 보냈다. 1850년부터 1900년까지 이들이 동아시아와 관련해 보도한 기사, 사진, 삽화를 엮었다. 서양의 옛 신문과 간행물을 수집하는 모임인 중국의 만국보관(萬國報館)이 편저했다. 영국의 ‘일러스트레이티드 런던 뉴스’ ‘그래픽’, 프랑스 ‘릴뤼스트라시옹’, 미국 ‘하퍼스 위클리’ 등의 삽화가 빼곡하게 수록돼 눈길을 끈다. 당대 서양 언론은 동아시아 정세에 관심이 컸다. 중국 양무운동, 일본 메이지유신부터 청일전쟁 당시 양국의 군사력 비교, 전쟁 경과, 전후 시모노세키(下關) 조약 등에 대한 설명도 자세하다. 김기윤 기자 pep@donga.com}

무대에서 구현한 환상문학이 은은하게 부성(父性)을 노래한다. 연극적 판타지와 현실적 동화가 만나 원작의 컴퓨터그래픽(CG) 못지않은 황홀함을 준다. 극을 온전히 바라보기 위해 어느 때보다 관객의 ‘동화적 눈’이 필요한 작품이다. 뮤지컬 ‘빅 피쉬’는 한 가족의 삶에 녹아든 이야기와 사랑을 통해 ‘당신은 어떤 이야기로 남을 것인지’ 되묻는 작품이다. 1막에서는 주인공 에드워드의 환상적 모험담과 운명적 사랑이 펼쳐지고, 2막에서는 그의 아들 윌이 모험담에 숨겨진 진실과 마주하며 아버지의 정신적 유산을 확인한다. 1998년 출간한 대니얼 월리스의 동명 소설과 2003년 팀 버턴 감독의 동명 영화를 각색해 2013년 미국 브로드웨이에서 초연했다. 최근 공연하는 국내 대형 뮤지컬 중 몇 안 되는 초연작이다. 유명 원작을 각색한 작품은 장르를 달리해도 원작이 줄곧 큰 벽이 되곤 한다. 뮤지컬 ‘빅 피쉬’ 역시 ‘팀 버턴표’ 환상영화와는 또 다른 판타지를 어떻게 관객에게 심어줄지가 가장 큰 관건이었을 터. 결론부터 말하자면, 작품은 무대만이 가질 수 있는 매력을 영리하게 구현했다. 배우들의 탄탄한 연기와 무대연출이 관객의 눈을 사로잡고, 달달한 넘버는 귀를 달랜다. 무대를 때리듯 귀에 꽂히는 넘버는 없다. 하지만 잔잔하면서 흥겨운 재즈, 컨트리 송, 팝 넘버가 더 큰 울림을 준다. 주인공 남경주, 박호산, 손준호를 비롯해 구원영, 김지우, 이창용, 김성철 등의 내공은 연극적 긴장감을 꾸준히 끌어올린다. 1막, 2막의 마지막 장면은 원작 영화 속 CG 못지않은 황홀함을 준다. 무대 바닥을 빼곡하게 뒤덮는 수선화 밭 프러포즈 장면과 마지막에 주인공이 죽으며 강으로 회귀하는 장면에서는 곳곳에서 “와∼” 하는 탄성도 터져 나온다. 물론 여전히 손댈 곳도, 아쉬운 점도 많다. 극 중 거인, 마녀, 대포알을 타고 날아가는 주인공을 표현하기 위해 제작진은 특수의상과 인형을 택했다. 이 설정이 다소 유치하거나 어설퍼 극의 몰입을 깰 여지가 있다. 어느 작품보다 관객의 ‘동화적 눈’이 필요하다. 1막, 2막의 마지막 장면 연출에 공력을 ‘올인’한 느낌이 들 정도로 다른 장면은 상대적으로 단출한 느낌을 준다. 대사가 많이 오가는 병원 장면 등 곳곳에서 늘어지는 점도 아쉽다. 어찌 됐든 작품은 관객을 환상적 동화로 끌어들여 눈물샘까지 공략하는 데 성공했다. 미국 앨라배마주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먼 타국의 이야기도 한국 관객에게 어필할 수 있음을 증명했다. 웰메이드 사부곡(思父曲)의 재연도 기다려진다. 2월 9일까지 서울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 6만∼13만 원. 8세 이상 관람가. ★★★☆(★ 5개 만점)김기윤 기자 pep@donga.com}

공연은 무조건 ‘직관’만 한다? 극장, 집, 폰 ‘1열’에 앉아서 본다! 영화관, 브라운관, 온라인 플랫폼에서 공연을 상영하며, 공연장의 물리적 한계를 극복하는 콘텐츠가 늘고 있다. 공연계는 기존에도 마케팅 차원에서 연극, 뮤지컬 등을 공연장 밖에서 꾸준히 선보여 왔다. 하지만 최근 공연 생중계, 녹화, 상영 콘텐츠 자체만으로 인기를 끌고 있는 데다, 다양한 영상 플랫폼의 증가로 공연의 ‘무대 밖 나들이’가 본격화되고 있다. EMK뮤지컬컴퍼니는 ‘웃는 남자’의 9일 개막을 앞두고 1일 카카오TV를 통해 ‘시츠 프로브(Sitz Probe)’ 무대를 생중계했다. 시츠 프로브는 배우와 오케스트라가 호흡을 맞춰 보는 리허설로 시청자에게 생생한 공연 넘버를 전했다. 생중계를 본 시청자는 20만 명, 동시 접속자 수는 최대 1만5000명에 달했다. 관객들은 “접근이 어려운 리허설 영상을 내 방 1열에서 앉아 볼 수 있으니 짜릿하다”며 호응했다. 예술의전당은 최근 LG유플러스와 협약을 맺고 ‘싹 온 스크린(SAC on Screen)’ 콘텐츠로 가정 내 TV 공략에 나섰다. ‘싹 온 스크린’은 2013년 시작한 예술의전당 영상화 사업의 일환으로, 촬영한 공연을 생동감 있게 편집해 상영한다. 현재까지 약 3000회를 상영해 45만 명의 관객이 관람했다. 이번 협약을 통해 클래식, 발레, 뮤지컬 등 4개 공연이 무료 VOD 서비스에 추가됐다. 방송 플랫폼과 통신 기술을 결합해 공연 실황 중계, VOD 서비스, VR 콘텐츠 제작까지 영역을 확장할 방침이다. 창작공연의 영상화 진출도 활발하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는 지난해 12월 CJ CGV와 업무협약을 맺고 본격적 영상화 사업 추진 계획을 발표했다. ‘영상화를 통한 대중화’를 목표로 연극, 뮤지컬, 무용, 전통예술, 오페라 등 5개 장르의 창작 공연 25편 중 4개 작품을 선정해 CGV 극장에서 상영할 계획이다. 서울 대학로에서 공연을 마치는 3월 말부터 지역 주요 거점인 영남권(부산)·호남권(광주)·충청권(청주) 3개 권역 상영관에서 진행된다. 창작산실과 아르코예술기록원이 각각 추진한 네이버 공연전시판 생중계도 그간 고무적 성과를 낳았다. 2016년부터 시범적으로 공연 생중계를 시작한 창작산실은 올해 18개 창작공연을 네이버를 통해 생중계할 계획이다. 최정호 아르코예술기록원 과장은 “장르에 따라 편차는 있지만, 2만∼3만 명이 생중계를 시청하면서 공연장 접근성이 떨어지는 지방 거주지에게 톡톡한 효과를 내고 있다”고 했다. 2014년 시작한 국립극장의 ‘NT Live’도 2월 세 작품을 국립극장에서 선보인다. ‘NT Live’는 영국 국립극장이 영미권 공연계 화제작을 촬영해 전 세계 공연장, 극장에서 상영하는 콘텐츠다. 탄탄한 마니아 층을 형성해 상영 때마다 큰 호응을 받고 있다. 한국 공연계의 영상화 사업은 아직 걸음마 단계다. 확장 가능성이 무궁무진하나, 단순 기록을 넘어 차별화를 꾀해야 한다는 분석이 나온다. 원종원 순천향대 공연영상학과 교수는 “영국에서 지역민들을 위해 기획된 ‘NT Live’가 세계적으로 부가가치를 창출하듯이, 공연계의 영상화 사업은 필수적이고 고무적 현상”이라면서도 “단순 기록을 넘어 콘텐츠 자체로 재미를 줄 수 있는 영상 사업화가 돼야 지속성이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김기윤 기자 pep@donga.com}

《“20년 전 만화를 시작할 때 생각했어요. 만화 종주국 일본에서 내 작품을 연재하면 어떤 기분일까? 마치 K팝 가수가 빌보드에 진입한 기분이랑 비슷하지 않을까?” 다음웹툰 ‘랑데부’가 지난해 11월 한국과 일본에서 동시 연재를 시작했다. 국내 웹툰 시장에서 인기가 검증된 극소수 완결 작품을 수출하는 경우는 많다. 하지만 기획 단계부터 양국 동시 연재를 목표로 작품을 구상하고, 동시 연재로 이어진 사례는 처음이다. 이를 성사시킨 주인공은 ‘은밀하게 위대하게’ ‘나빌레라’로 유명한 HUN(본명 최종훈) 작가다.》 최근 경기 부천시의 작업실에서 만난 그는 “똑같은 작품이라도 세밀한 표현을 다르게 다듬느라 일이 1.5배로 늘었다”는 행복한(?) 고민을 털어놨다. 이어 “늘 동경하던 일본 만화계가 작품 준비 과정에서 제게 웹툰 노하우를 묻는 경험이 무척 신선했다. 한국의 작가와 만화계에 대한 좋은 인상을 남기고 싶다”고 했다. ‘랑데부’는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주인공 이연이 외계인의 침공으로 무너진 세상을 발견하고, 자신을 괴롭혔던 ‘일진’ 학생들에게 복수하는 내용이다. 장르를 구분하자면 공상과학(SF) 학원물. HUN 작가가 연출 및 스토리 작가로 참여했고, ‘나빌레라’에서 호흡을 맞춘 지민 작가가 작화를 맡았다. 국내에서는 다음웹툰과 카카오페이지에서, 일본에서는 만화 플랫폼 픽코마(piccoma)에서 연재 중이다. HUN 작가에 따르면, 양국 동시 연재를 진행하는 데 있어 그가 던진 ‘떡밥’이 가장 주효했다고 한다. “일본 만화계에서 토론회를 열 때 종종 저를 협조토론자로 초청했어요. 발언 기회를 얻으면 ‘한일 양국이 새 작품을 같이 협업하고 동시 연재를 해도 좋겠다’는 의견을 은근히, 그리고 자주 흘렸죠. 일본 연재에 대한 ‘로망’은 있어도, 제 이름값으로 우길 수는 없잖아요. 하하하.” 일본 측이 반응한 건 시기적 변화, 운도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만화 강국인 일본도 웹에서 페이지를 넘겨 보는 방식에서 스크롤을 이용해 내려 보는 형태로 시장이 재편되고 있었다. 그는 “20년 가까이 스크롤 연출 노하우가 축적된 한국과 달리 일본은 만화 스크롤화에 대한 노하우가 적은 편”이라고 했다. 우여곡절 끝에 동시 연재는 닻을 올렸다. 그런데 “신경 쓸 게 너무 많다. 일이 생각보다 커져버렸다”는 토로가 이어졌다. 특히 단어의 뉘앙스, 편집 방향이 난관이었다. 그는 “대사가 과하게 의역이 되는 것도 막아야 한다. 만화를 읽는 방향도 한국(왼쪽 위부터)과 일본(오른쪽 위부터)이 다르기 때문에 연출의 흐름, 말풍선 위치, 효과음 적는 곳, 컷의 간격 배치도 일일이 따져야 한다”고 했다. 필요에 따라 그림을 다르게 그리는 일도 있다. 간판 이름이나 차선 위치도 달라진다. “떡볶이를 먹는 장면이 있어요. 일본판에서 다코야키, 오코노미야키로 바꿔야 하나 고민한 적도 있죠. 하지만 모든 걸 현지에 맞추거나, 일본 만화인 척할 필요는 없다는 게 제 결론입니다.” 앞선 히트작에서 “소재는 달라도 결국 사람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는 그는 “이번만큼은 가장 ‘만화적 만화’를 만들고 싶다”고 했다. ‘권선징악’ 주제의 학원물이 주는 재미는 물론이고 좋은 액션, 컷을 잘 쌓아서 ‘꽤 괜찮은 만화’라는 타이틀을 얻고 싶다는 것. 작가생활 20년 만에 그는 일본 무대에서 다시 신인의 마음으로 돌아갔다. “저라는 작가는 일본에서는 완전히 새로운 사람이잖아요. 속된 말로 양국에서 ‘깔 수 없는 작품’을 만들어야죠.”부천=김기윤 기자 pep@donga.com}

“20년 전 만화를 시작할 때 이런 생각을 했어요. 만화 종주국 일본에서 내 작품을 연재하면 어떤 기분일까? 마치 K팝 가수가 빌보드에 진입한 기분이랑 비슷하지 않을까?” 다음웹툰 ‘랑데부’가 국내와 일본에서 동시 연재를 시작했다. 국내 웹툰 시장에서 인기가 검증된 극소수 완결 작품을 해외로 수출하는 경우는 많다. 하지만 기획 단계부터 양국 동시연재를 목표로 작품을 구상하고, 동시연재로 이어진 사례는 처음이다. 이를 성사시킨 주인공은 ‘은밀하게 위대하게’ ‘나빌레라’ 등 인기작을 만든 HUN(본명 최종훈·42) 작가다. 최근 경기 부천의 작업실에서 만난 그는 “똑같은 작품이라도 세밀한 표현을 다르게 다듬느라 일이 1.5배로 늘어났다”는 행복한(?) 고민을 털어놨다. 이어 “늘 동경하던 일본 만화계가 작품 준비 과정에서 제게 웹툰 노하우를 묻는 경험이 무척 신선했다. 이번을 계기로 한국 작가, 만화계의 좋은 인상을 남기고 싶다”고 했다. 웹툰 ‘랑데부’는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주인공 ‘이연’이 외계인의 침공으로 무너진 세상을 발견하고, 자신을 괴롭혔던 ‘일진’ 학생들에 복수하는 내용을 그렸다. 장르를 구분하자면 SF 학원물. HUN작가가 연출 및 스토리 작가로 참여했고, 앞서 ‘나빌레라’에서 함께 호흡을 맞춘 지민 작가가 작화를 맡았다. 국내에서는 다음웹툰과 카카오페이지에서, 일본에서는 만화 플랫폼 픽코마(piccoma)에서 연재 중이다. HUN 작가에 따르면, 양국 동시연재를 진행하는 데 있어 그가 던진 ‘떡밥’이 가장 주효했다고 한다. “일본 만화계에서 종종 토론회를 열며 저를 협조토론자로 초청했어요. 제가 발언기회를 얻으면 ‘한일 양국이 새 작품을 같이 협업하고 동시연재를 해도 좋겠다’는 의견을 은근히 그리고 자주 흘렸죠. 일본 연재에 대한 ‘로망’은 있어도, 제 이름값으로 우길 수는 없잖아요. 하하하.” 그의 떡밥에 일본 측이 반응한 건 시기적 변화, 운도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전통적으로 출판만화 시장이 강세인 일본도 점차 ‘페이지’에서 ‘스크롤’로 시장 재편 움직임이 일고 있었다. 그는 “20년 가까이 스크롤 연출의 노하우가 축적된 한국과 달리 일본은 만화 스크롤화의 필요성을 느껴도 이에 대한 노하우가 적은 편”이라고 했다. 우여곡절 끝에 동시연재는 닻을 올렸다. 그런데 “신경 쓸 게 너무 많다. 일이 생각보다 커져버렸다”는 토로가 이어졌다. 특히 단어의 뉘앙스, 편집방향 등이 난관이었다. 그는 “대사가 과하게 의역이 되는 것도 막아야 한다. 만화를 읽는 방향도 한국(왼쪽 위부터)과 일본(오른쪽 위부터)이 다르기 때문에 연출의 흐름, 말풍선 위치, 효과음 적는 곳, 컷의 간격배치도 일일이 따져야 한다”고 했다. 필요에 따라 그림을 다르게 그리는 일도 있다. 간판 이름이나 차선 위치도 달라진다. “캐릭터가 떡볶이를 먹는 장면이 있어요. 일본판에서 타코야끼, 오꼬노미야끼로 바꿔야하나 잠시 고민한 적도 있죠. 모든 걸 현지에 맞추거나, 일본만화인 척 할 필요는 없다는 게 제 결론입니다.” 앞선 히트작에서 “소재는 달라도 결국 사람, 인간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는 그는 “이번만큼은 가장 ‘만화적 만화’를 만들고 싶다”고 했다. ‘권선징악’ 주제의 학원물이 주는 재미는 물론 좋은 액션, 컷을 잘 쌓아서 ‘꽤 괜찮은 만화’라는 타이틀을 얻고 싶다는 취지다. 작가생활 20년 만에 일본 무대에서 그는 다시 신인의 마음으로 돌아갔다. “저라는 작가는 일본에서는 완전히 새로운 사람이잖아요. 속된 말로 이름값 다 빼고 양국에서 ‘깔 수 없는 작품’을 만들어야죠.” 김기윤 기자 pep@donga.com}

휴대전화, 기저귀, 콘돔, 란제리 세트, 금붕어, 주삿바늘, 귀금속, 생리대, 오토바이 부품…. 각양각색의 이 물건들을 한 번에 볼 수 있는 곳은? 정답은 하수도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 잡동사니들은 모두 변기나 맨홀을 거쳐 매일 하수도로 집결한다. 믿기 어렵지만 영국에서는 1년에만 약 85만 개의 휴대전화가 변기 안으로 휩쓸려 들어간다고 한다. 이 때문에 하수도에서 값진 물건을 건져내는 사냥꾼을 일컫는 ‘토셔(tosher)’라는 말이 생겨났을 정도다. 미국 시사주간지 ‘더 네이션’ 기자 출신의 저자는 문명사회에서 철저히 베일에 싸여 있던 하수도와 화장실의 뒷이야기를 흥미진진하게 그리고 진지하게 파헤쳤다. 책은 화장실의 인문학적 변천을 짚은 역사서인 동시에 분변학과 위생학을 논하는 보건서이기도 하다. 세계보건기구(WHO)가 필독서로 선정했고, 저자가 이 주제로 펼친 TED 강연은 큰 인기를 끌었다. 선진국의 경우,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고 물을 내린 뒤의 세계는 예상보다 훨씬 체계적으로 구축돼 있다. 저자가 직접 찾은 영국, 미국 하수도에서는 고약한 냄새를 느끼지 못할 정도로 청결한 곳도 있다. 지하에서 일하는 하수도 노동자들의 삶은 숭고했으며, 이들의 자부심도 대단하다. 물론 예상치 못한 사고가 언제든 발생할 수 있기에 지하세계는 생각보다 위험하다. 바로 폭발 가능한 수류탄이 하수도에서 발견되는 경우다. 하지만 화장실의 국가별 격차를 생각한다면, 하수도 체계의 존재만으로도 엄청난 특권임을 알 수 있다. 저자가 맞닥뜨린 코트디부아르의 한 화장실에는 바닥에 흰 타일만 깔려 있을 뿐 변기도, 어떠한 구멍도 없다. 각자 알아서 해결, 처리해야 한다. 우리에게 당연한 화장실 칸막이도 지구 한 편에선 찾아보기 힘들다. 영국, 미국, 인도, 중국, 남아프리카공화국, 탄자니아의 각양각색의 배변시설을 접하면 “10명 중 4명은 재래식 화장실, 변기, 양동이, 심지어 상자 같은 것조차 거의 이용하지 못한다. 화장실은 분명 특권”이라는 주장에 고개가 절로 끄덕여진다. 저자가 ‘분변 도착증환자’라는 오해를 들으면서도 똥, 화장실, 하수도에 천착하는 건 화장실이 인간 생명과도 직결된 문제이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수인성 질병은 분변에 오염된 음식을 섭취할 수밖에 없는 열악한 위생체계에서 비롯된다. 몇몇 국가에서 소녀들은 뱀과 강간범의 위협을 피해 오전 3∼4시마다 풀숲으로 숨어들어 위험천만한 배변활동을 한다. 궁극적으로 저자는 “가장 자연스러운 기능을 지칭하는 단어(배변, 똥)가 현대사회에서 섹스보다도 터부시됐다”며 “똥을 솔직하게 얘기하지 않으면 위생, 보건을 논할 수 없다”고 지적한다. ‘화장실에서 살기’ vs ‘화장실이 없는 곳에서 살기’. 저자가 서두에 던지는 이 질문에 ‘어떻게 똥, 오줌 냄새 나는 화장실에 사느냐’던 사람이라도, 책을 읽고 나면 오늘 아침 다녀온 화장실이 더없이 사랑스럽게 느껴질지 모른다. 그래도 화장실은 도저히 안 되겠다고? 당신이 좋든 싫든 인간은 평생 3년은 화장실에서 보낸다.김기윤 기자 pep@donga.com}

‘장소: 모르는 사람의 집. 준비물: 마음속 스트레스를 꺼내 놓을 열린 마음.’ 28일 오후 서울 성동구의 한 아파트. 직장인 5명이 정해진 시간에 맞춰 ‘남의 집 프로젝트’를 위해 모였다. ‘호스트(집주인)’는 자신의 집에서 간단한 먹을거리를 준비한 뒤 참석자들을 기다렸다. 먼저 도착한 이들은 다른 참석자가 도착할 때마다 반갑게 맞았다. 여느 연말 송년회, 친교모임과 다를 것 없어 보이는 이 모임의 가장 큰 특징은 모두 이날 처음 본 사이라는 점. 준비물은 대화할 ‘열린 마음’이면 충분했다. ‘소통 불능의 시대’라는 요즘, 의외로 처음 보는 사람이나 전혀 모르는 사람과 소통하는 일회성 모임이 늘고 있다. 상대가 누구든 공감할 의지와 말할 거리만 있다면 얼마든지 소통이 가능하다는 게 모임의 취지다. 이들은 친구나 지인, 가족처럼 끈끈한 관계와 달리 관계에 강제성이 없는 ‘느슨한 관계’가 오히려 소통에 장점이 된다고 본다.○ ‘느슨한 관계’의 매력 ‘남의 집 프로젝트’는 이런 시류를 반영하는 대표적인 사례다. 이날 참석자가 다 도착하자 호스트는 “이제 다 오신 것 같으니 시작할까요?”라며 포문을 열었다. 모임의 주제는 ‘직장인 번아웃(일에 몰두하다 극도의 신체·정신적 피로로 무기력해지는 현상) 증후군’. 호스트는 ‘번아웃 증후군 자가 테스트’ 종이를 건넸고, 참석자들은 ‘일이 재미가 없다’ ‘점점 냉소적으로 변한다’ 등 17개 문항의 체크리스트에 점수를 매겼다. 일정 점수를 넘겨 심각한 수치를 보인 참석자도 나왔다. 자연스레 직장에서 힘들었던 각자의 경험을 꺼내놓기 시작했다. “야근이 너무 잦아 일과 생활이 구분이 안 됐다” “퇴사를 자주 하고 싶다” “상사와의 관계가 너무 힘들다” “상사보다 더 어려운 건 후배다” 등 성토가 이어졌다. “주변 친구, 가족에게 이유 없이 짜증을 내는 일이 늘었다”는 대목에서는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증권회사 애널리스트, 게임회사 디자이너, 식품무역업 종사자 등으로 구성된 참석자 조합은 얼핏 보기엔 어색했다. 하지만 “타인의 삶을 이해하기 힘들고, 내 고민 역시 위로받기 힘들 줄 알았다. 그런데 오히려 처음 보는 이에게 속내를 터놓고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며 놀라워했다. 모임은 정해진 세 시간을 조금 넘기고 끝났다. 참석자들은 기회만 있다면 앞으로도 모르는 사람과의 소통에 나서겠다며 긍정적인 반응. 작별 인사와 새해 덕담을 나눴고, 각자의 일상으로 돌아갔다. 이런 모임은 직업군, 나이와 상관없이 다양하게 이뤄지지만 대체로 연속적 모임으로 이어지진 않는다. 강제성이 전혀 없어 부담감이 적은 게 장점. 독서, 공예 등 특정 취미를 테마로 한 모임과는 달리 ‘대화’ 자체가 목적이다. 김성용 ‘남의 집 프로젝트’ 대표는 “현대인들은 모르는 이들과도 시시콜콜한 주제건 깊이 있는 테마건 얘기를 나누고 싶은 욕구가 있다. 이 수요는 더욱 커질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런 모임에 자주 참석한다는 30대 직장인 정모 씨는 “끈끈한 관계에서는 어떤 얘기로 시작하든 결국엔 깔때기처럼 직장, 집, 결혼, 육아 얘기로만 귀결된다. 반면 느슨한 관계에서는 다양한 주제를 다룰 수 있는 편안한 매력이 있다”고 했다.○ 자존감 회복에는 모르는 관계가 더 낫다? 온라인에서 인기인 대화형 커뮤니티 ‘라이프쉐어’도 비슷한 분위기다. 모르는 이와 소통하며 자신을 더 잘 이해하고 인생관, 자존감을 발견하도록 만들자는 목표. 여기서는 주변 사람에게 터놓기 어려운 다소 오글거리는(?) 질문도 모르는 사람과 주고받아야 한다. “당신에게 가장 행복했던 하루는?” “우리의 사랑은 어떻게 다를까?” 등 질문에 쭈뼛거리던 참가자들도 몇 분 뒤 거리낌 없이 인생 가치관을 말하기 시작한다고 한다. 애플리케이션 ‘트로스트’도 모르는 사람과의 소통 욕구를 겨냥했다. 상담사 자격증을 가진 이들에게 간단한 자기소개와 고민 글을 보내면, 상담사들이 조언을 건넨다. 지인, 친구 수준이 해줄 수 있는 위로나 대안 제시를 넘어 전문적 해결 방법을 제시한다는 점이 특징. 트로스트 측은 “정신과를 방문하기 어렵거나, 친구들에게 꺼내놓기 힘든 고민도 비대면 방식으로 숱하게 접수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모르는 사람과의 소통이 자존감 회복에 더 도움이 된다는 의견도 적지 않다. 퇴사 뒤 작가로 변신한 곽모 씨는 “주변에선 새로운 도전을 회의적으로 바라보는 이들이 많았다. 반면 처음 만난 이들은 도전 자체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응원해줘 힘을 얻었다”고 했다. 30대 사업가 이주호 씨는 “나이, 직장에 따른 사회적 편견 없이 누군가 있는 그대로 저를 바라볼 때 더 큰 위로와 자극을 받는다. 뼈 있는 조언이나 생각지 못한 혜안을 들을 때도 많다”고 했다.김기윤 pep@donga.com·조종엽 기자}

장소 : 모르는 사람의 집. 준비물 : 마음 속 스트레스를 꺼내 놓을 열린 마음. 28일 오후 서울 성동구의 한 아파트. 5명의 직장인이 정해진 시간에 맞춰 ‘남의집 프로젝트’의 한 장소에 모였다. ‘호스트(집주인)’는 자신의 집에서 간단한 먹거리를 준비한 뒤 참석자들을 기다렸다. 먼저 도착한 이들은 다른 참석자가 도착할 때마다 반갑게 맞았다. 여느 연말 송년회, 친교모임과 다를 것 없어 보이는 이 모임의 가장 큰 특징은 이날 모두 처음 본 사이라는 것. 준비물은 대화할 열린 마음이면 충분했다. 참석자가 다 도착하자 호스트는 “이제 다 오신 것 같으니 시작할까요?”라며 대화의 포문을 열었다. 이날 모임의 주제는 ‘직장인 번아웃(일에 몰두하던 사람이 극도의 신체적, 정신적 피로감으로 무기력해지는 현상)’. 호스트는 ‘번아웃 증후군 자가테스트’ 종이를 건넸고, 참석자들은 ‘일이 재미가 없다’ ‘점점 냉소적으로 변하고 있다’ 등 17개 문항으로 구성된 체크리스트에 점수를 매겼다. 일정 점수를 넘겨 ‘번아웃 증후군’으로 판정된 참석자도 나왔다. 자연스레 직장에서 힘들었던 각자의 경험을 꺼내놓아야 했다. “야근이 너무 잦아 일과 내 생활이 구분이 안됐다” “퇴사가 자주 마렵다” “일도 일이지만 상사와의 관계가 너무 힘들다” “상사보다 더 어려운 건 후배다” 등 성토가 줄을 이었다. “번아웃을 겪고 주변 친구, 가족에게 이유 없이 짜증을 내는 일이 많아졌다”는 대목에서는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기자, 증권회사 애널리스트, 게임회사 디자이너, 식품무역업 종사자, 마케터, 전업 작가로 변신한 이 등 참석자의 조합은 언뜻 봐도 어색하다. 하지만 “타인의 삶을 이해하기 힘들 것이라 생각했고, 내 아픔이나 고민 역시 위로받기 힘들 줄 알았다. 그런데 오히려 처음 보는 이들에게 속내를 터놓고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어 놀랍다”며 모두 입을 모았다. 참석자들은 기회만 있다면 앞으로도 모르는 사람과의 소통을 주저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정해진 세 시간을 조금 넘겨 모임은 끝났다. 작별 인사와 새해 덕담을 나눴고, 모두 아무 일이 없었다는 듯 각자의 일상으로 돌아갔다.○‘느슨한 관계’의 매력 ‘소통 불능의 시대’ 처음 보는 사람, 전혀 모르는 사람과 소통하는 일회성 모임이 늘고 있다. 상대가 누구든 서로의 말에 공감할 의지와 말할 거리만 있다면 얼마든지 소통이 가능하다는 게 모임의 취지다. 친구, 지인, 가족과의 끈끈한 관계와 달리 관계에 강제성이 없는 ‘느슨한 관계’는 오히려 소통에서 장점이 된다. 직업군, 나이와 상관없이 다양한 이들이 모이며 한 번 모였다고 해서 연속적 모임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친교 활동에 대한 강제성이 전혀 없기 때문에 부담감이 적은 것도 장점으로 꼽힌다. 또한 독서, 공예, 서핑 등 특정 취미를 테마로 목적이 분명한 모임과는 달리 모여서 대화하는 것 자체가 목적이 되는 점이 특징이다. 20대부터 40대까지 가장 활발히 참여한다. 김성용 ‘남의집 프로젝트’ 대표는 “1인가구가 늘며 현대인들에게는 모르는 이들과도 시시콜콜한 주제부터 인생얘기까지 나누고 싶은 욕구가 분명히 있다. 이 수요는 더 커질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같은 모임에 자주 참석한다는 30대 직장인 정모 씨는 “끈끈한 관계에서는 어떤 얘기로 시작하든 나중에 깔때기처럼 직장, 집, 결혼, 육아 얘기로만 귀결된다. 반면 느슨한 관계에서는 다양한 주제를 말할 수 있는 편안한 매력이 있다”고 했다. ○자존감 회복에는 모르는 관계가 더 낫다? 모르는 사람의 소통이 자존감 회복에 더 도움이 된다는 의견도 많다. 퇴사 후 작가로 변신한 곽모 씨는 “주변 사람들은 제 새로운 도전을 걱정하거나 회의적으로 바라볼 때가 많았다. 반면 처음 만난 분들이 제 도전 자체를 있는 그대로 보고 진심으로 응원해 힘을 받았다”고 했다. 대화형 커뮤니티 ‘라이프쉐어’도 인기다. 모르는 이와 소통하며 자신을 더 잘 이해하고, 인생관, 자존감을 발견하도록 만드는 취지다. 이곳에서는 주변 사람에게 터놓기 어려운 다소 오글거리는(?) 질문을 모르는 사람과 주고받아야 한다. “당신에게 가장 행복했던 하루는?” “우리의 사랑은 어떻게 다를까?” 등 질문에 쭈뼛거리던 참가자들도 몇 분 뒤 거리낌 없이 인생 가치관을 말하기 시작한다. 30대 사업가 이주호 씨는 “나이, 직장에 따른 사회적 편견 없이 누군가 있는 그대로 저를 바라볼 때 더 큰 위로와 자극을 받는다. 제게 뼈있는 조언을 하거나 생각지 못한 혜안을 들을 때도 많다”고 했다. 애플리케이션 ‘트로스트’도 모르는 사람과의 소통 욕구를 겨냥했다. 상담사 자격증을 가진 이들에게 간단한 자기소개와 고민 글을 보내면, 상담사들이 조언을 건넨다. 지인, 친구 수준이 해줄 수 있는 위로, 대안 제시를 넘어 전문적 해결방법을 제시한다는 점이 특징이다. 트로스트 측은 “정신과를 방문하기 어렵거나, 친구들에게 꺼내놓기 힘든 고민도 비대면 방식으로 숱하게 접수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김기윤 기자 pep@donga.com조종엽 기자 jjj@donga.com}

2표씩 받은 책이 무려 9권이었다. 대기과학자 조천호의 ‘파란하늘 빨간지구’(동아시아)는 “기후가 인간 역사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실증적으로 보여준다. 그레타 툰베리가 구호를 외쳤다면 조천호는 이론을 제공했다”(이정모 서울시립과학관장)는 평가를 받았다. 유정연 흐름출판 대표는 ‘다시, 책으로’(어크로스)를 택하면서 “순간 접속의 시대에 깊이 읽을수록 뇌를 잃어버릴 수 있다는 지적에 공감한다”고 했다. ‘맹자, 마음의 정치학’(사계절)에 대해 정은숙 마음산책 대표는 “‘한글세대’ 독자들을 위한 적확하고 맥락 있는 고전 읽기의 안내서”라고 추천했다. 재러드 다이아몬드의 ‘대변동’(김영사)은 “한일 관계 등 외교관계에 의미 있는 시사점을 준다”(이상욱 한양대 철학과 교수), “저자의 가장 미래지향적인 책”(박영규 교보문고 대표)이라는 지지를 받았다. 역사서도 두 권 있다. ‘제국대학의 조센징’(휴머니스트)은 “한국의 지배 엘리트들이 지닌 근대의 개념이 왜 ‘일본’과 등가를 이루는지 그 기원을 보여주는 책”(김형보 어크로스 대표)으로 평가받았다. ‘병자호란, 홍타이지의 전쟁’(까치)은 “역사 밖에서 본 한국사를 어떻게 조명해야 할지 일깨운 점”(박혜숙 푸른역사 대표)이 높은 점수를 받았다. 델리아 오언스의 장편소설 ‘가재가 노래하는 곳’(살림)에 대해 백선희 번역가는 “감동스러운 성장 이야기이자 순정한 사랑 이야기. 반전이 거듭되는 법정 스릴러이자 생태학자가 그리는 풍경화”라고 했다. 산문집으로는 ‘여행의 이유’(문학동네)와 ‘참 괜찮은 눈이 온다’(교유서가)가 꼽혔다. 각각 “하나의 브랜드가 된 김영하 작가가 인생에서 여행이 갖는 의미를 인문학적 성찰로 들려준다”(서영택 밀리의서재 대표), “한지혜는 소설가이기 전에 진심을 전하는 산문가다. 자신의 지나온 ‘한때’를 떠올리게 한다”(윤희영 현대문학 월간지팀 팀장)는 평을 들었다.이설 snow@donga.com·김민·김기윤 기자}

“한국 무용수들은 잘 훈련돼 있고, 눈빛에서 강한 열정을 느낄 수 있어요. 지금 잘하고 못하고는 중요치 않습니다. 갖고 있는 재능과 가능성을 보러 왔어요.”(크리스토퍼 파우니 영국 로열발레학교 교장) 18일 오후 서울 중구 예원학교에서 열린 발레 오디션 현장. 90명의 어린 무용수들(만 11∼17세)이 연령별로 조를 나눠 입장했다. 이들 앞에 앉은 심사위원들은 파우니 교장과 사미라 사이디 교수(로열발레학교 인텐시브 프로그램 대표)였다. 파우니 교장은 “누군가를 관찰할 때 얼굴 표정이 원래 굳는 편이다. 학생들은 절대 겁먹지 말고 자연스럽게 춤을 춰 달라”고 주문했다. 하지만 그의 당부에도 불구하고 떨지 않을 무용수가 과연 얼마나 될까. “심장이 너무 떨린다” “아, 어떡해…”라며 긴장감을 숨기지 못하던 무용수들은 발레 클래스 형태의 오디션에서 시범안무가의 동작을 따라 하기 시작했다. 작은 실수들이 이어졌고 일부는 자책하듯 바닥을 내려다보기도 했다. 하지만 긴장도 잠시. 피아노 반주가 시작되자 이들의 눈빛과 동작은 차츰 안정을 되찾았다. “실수해도 괜찮으니 동작을 이어가라. 모두 잘하고 있다”는 응원에 힘입어 어린 무용수들은 ‘하나라도 더 보여 주겠다’는 열정으로 제 실력을 찾아갔다. 심사위원들의 표정도 밝아졌다. 로열발레학교가 오디션을 하기 위해 한국을 찾은 것은 올해가 처음이다. 로열발레학교는 영화 ‘빌리 엘리어트’의 주인공 ‘빌리’가 그토록 염원하다가 백조가 돼 날갯짓한 곳. 최근 한국 무용수들이 세계 곳곳에서 두각을 나타내자 그간 홍콩 싱가포르 일본에서만 진행하던 오디션을 한국에서도 하게 됐다. 파우니 교장은 “한국 출신 김기민, 박세은, 강효정, 최영규 등 현역 무용수들과 현재 본교 재학 중인 박하나, 졸업 후 로열발레단에 입단한 전준혁 등 재능이 출중한 무용수들이 적지 않다”며 “오디션을 위해 직접 영국으로 와야 했던 학생들의 수고를 덜고, 유망주를 직접 보고 판단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번 오디션은 사전에 정해진 선발 인원이 없다. 사이디 교수는 “발레는 고통스러운 스포츠이다. 고된 훈련을 버틸 정신적 자세가 돼 있고, 신체적 가능성, 잠재력만 있다면 몇 명이든 기회를 줄 것”이라고 했다. 내년 1월 중순 합격한 학생이 발표된다. 이들은 3월 런던에서 23개국 학생들과 겨루는 최종 오디션에 참가한다. 여기서 최종 선발되면 로열발레학교의 일원이 된다. 사이디 교수는 “입학한 뒤에도 부상을 당해 발레를 그만두거나 발레가 싫어져 학업을 택하는 학생도 많다”며 “춤도 물론 중요하지만 그보다 교육기관으로서 의무를 다하고 학생들의 다양한 미래를 위해 지원한다”고 했다. 16∼18일 치러진 3일간의 발레 강습과 오디션을 마친 파우니 교장과 사이디 교수는 “실력이 뛰어난 한국 무용수들을 보기 위해서 매년 서울에 오고 싶다”고 입을 모았다.김기윤 기자 pep@donga.com}

역사학자 에드워드 사이드는 넓은 의미에서 ‘오리엔탈리즘’을 “서양이 동양에 관계하는 방식”으로 정의했다. 언뜻 보기에 꽤나 가치중립적인 듯한 이 개념은 주체가 ‘서양’, 객체가 ‘동양’이라는 점에 방점이 있다. 인종, 국가, 문명권이라는 모호한 기준에 따라 주체와 객체가 구분되면서 서양과 동양의 관계 맺기는 일방적 폭력이 됐고, 식민주의 정당화 논리로 이어졌다. “동양을 지배하고 재구조화하고 동양에 대한 권위를 갖기 위한 서양의 스타일”이 모두 그가 비판한 오리엔탈리즘이다. 사이드가 던진 문제의식은 21세기에도 많은 학자, 사상가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그중 한 명이 이 책의 저자 클라이브 폰팅이다. 영국 마거릿 대처 행정부에서 고위 공무원으로 근무했으며, 스완지대에서 정치학을 가르쳤던 그는 크림 전쟁, 윈스턴 처칠에 관한 저서와 수정주의적 역사관에 기초한 ‘진보와 야만’ ‘녹색 세계사’ 등 역사서로 이름을 날렸다. 오늘날 ‘빅 히스토리’(지구, 우주적 관점의 역사관)의 개척자로 불린다. 선사시대부터 현대까지 다룬 두 권의 책에서 그는 집필 방향에 대해 “유럽 중심적인 관점은 거부하고, 세계의 그 어느 지역에도 편중되지 않는 훨씬 폭넓은 세계사의 관점”이라고 반복해 강조한다. 그래서인지 그리스의 폴리스 국가, 알렉산더 대왕의 마케도니아에서 시작해 중세 유럽의 기독교 왕조를 거쳐 르네상스로 이어지는 뻔한 세계사 서술은 보이지 않는다. 이들 사이에는 지구 곳곳에서 흔적을 남기며 삶을 영위하던 다양한 국가, 문명의 이름이 빼곡하다. 중동지역 이슬람 왕국, 중국, 몽골, 인도, 일본, 한반도, 동남아시아, 신대륙(북·남아메리카)의 문명도 세계사의 한 자리를 당당히 차지한다. 한반도에서 발생한 한글 창제와 조선 왕조의 인쇄술 발달은 세계사에서도 주목할 만한 사건으로 꼽았다.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중국에 대한 방대한 서술이다. 그는 11세기를 ‘중국의 세기’로 봤다. 송나라는 프랑스 면적의 일곱 배에 달하는 지역을 하나로 묶어 통일했고, 통치했다. 나아가 이 시기에 중국이 유럽보다 앞서 산업혁명, 상업혁명을 달성할 뻔했다고 주장한다. 송나라가 누렸던 부, 철의 생산량이 그의 판단 기준이 됐다. 1076년 송나라의 철 생산량은 12만5000t에 이르렀던 반면, 1788년 산업혁명 태동기 잉글랜드에서의 생산량은 7만6000t에 그쳤다. 또 유럽의 언어가 그리스어, 라틴어, 독일어, 영어 등으로 갈라져 언어로 인한 ‘상실’을 겪은 데 반해, 중국은 한자를 유지하며 방대한 양의 지식과 전통을 지킬 수 있던 점도 중국이 누린 풍요의 토대가 됐다. 근세로 넘어오며 그는 “세계사의 주역이 뒤바뀌었다”고 봤다. 세계사의 주변부에 머물던 유럽은 이때부터 세계사의 중심부로 도약한다. 하지만 그에 따르면 이마저도 오래가진 못했다. 1940년 이후로 유럽의 영향력은 쇠약해졌고, 현재 아시아, 특히 중국이 잃었던 지위를 되찾고 있다고 봤다. 그는 “세계는 좀 더 정상적인 균형 상태로 돌아오는 듯 보였다”고 설명했다. 앞서 책이 처음 출간된 2000년 영국에서 저자의 견해는 획기적 발상으로 받아들여졌다. 약 20년이 지난 오늘날 책의 내용이 더는 충격적이거나 신선한 견해는 아닐지라도, 화려한 수사나 문장이 많지 않더라도 읽을 만한 가치가 있다. 오늘날 학계에서 그의 주장이 어느 정도 설득력을 얻은 건, 어쩌면 우직하고 묵묵히 세계사를 서술한 그의 패기 덕분인지도 모른다. 김기윤 기자 pep@donga.com}

팝을 좋아하는 오빠들을 따라 어릴 때부터 노랫말을 흥얼거리던 소녀. “뮤지컬 배우가 되겠다”는 일념으로 1999년 첫 무대에 올랐다. 올해로 무대에 선 지 딱 20년이 됐다. ‘뮤지컬 여왕’이 된 소녀는 평생 꿈꾸던 ‘팝의 여왕’ 휘트니 휴스턴으로 변신했다. 김선영(45)이 뮤지컬 ‘보디가드’에서 팝스타 ‘레이첼 마론’ 역을 맡았다. 마론은 동명의 원작 영화(1992년)에서 휘트니 휴스턴이 가창력을 유감없이 선보인 역할. 서울 강남구의 한 카페에서 16일 만난 그는 “휘트니 휴스턴의 노래를 이렇게 원 없이 불러볼 기회가 또 있을까. 몇 차례 공연을 했는데 모든 순간이 감격스럽고, 개인적으로도 큰 추억이 될 것”이라고 했다. 작품은 스토커의 위협을 받는 최고의 팝스타와 보디가드의 사랑을 그렸다. 원작 영화를 각색해 치밀한 서사보다는 휘트니 휴스턴의 명곡에 무게를 둔 주크박스 뮤지컬이다. 특히 마론 역은 넘버의 80%가량을 소화한다. 2012년 영국 런던 웨스트엔드에서 초연한 뒤 2016년 한국에 상륙했고 3년 만에 다시 관객을 찾았다. 김선영은 ‘도전’이란 말을 자주 했다. 그중 하나는 태닝. 배역과 외향적으로 더 닮기 위해, 그리고 무대에서 휘트니 휴스턴의 모든 걸 흡수하고픈 열망에 공연 전부터 태닝숍을 수시로 찾았다. 그는 “데뷔작 ‘페임(Fame)’에서도 태닝을 했는데, 꼭 20년 만에 다시 피부를 태웠다”며 갈색으로 그을린 손목을 들어 보였다. 의상도 새로운 도전이다. 남들이 보기엔 어떨지 몰라도 그의 눈에는 노출이 심하단다. “무대에서 이런 옷을 입을 줄은 정말 몰랐어요. 처음에는 버거웠지만 그냥 저를 놔버리고 즐기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그를 힘들게 하는 건 체력 소모. 장면 전환 때마다 의상을 빨리 갈아입어야 하고 노래와 함께 역동적 안무를 해야 해 쉴 틈이 없다. 그는 “춤, 안무 욕심이 없던 제가 40대에 이런 배역을 하는 건 확실히 쉽지 않다. 나이를 더 먹으면 이런 역할을 언제 해 보겠냐”며 웃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다른 배우들도 함께 체력적 고통을 호소한다. 그 덕분에 전우애로 뭉친 출연진은 연습실과 백 스테이지에서도 어느 때보다 분위기가 좋다. 김선영은 “‘보디가드’에서 유달리 모두 끈끈하게 뭉쳐 있다. 무대에서도 ‘찰떡 케미’가 잘 발휘되고 있다”고 했다. 2008년 즈음 팬들이 지어준 ‘퀸선영’이라는 별명은 지금도 여전하다. “‘팬들도 몇 년 이러다 말겠지’라고 생각했는데 출산 후 무대에 돌아온 뒤에도 여전히 사랑해 주셔서 감사해요. ‘왕관의 무게’가 늘 새로운 도전의 동력이 된답니다.” 그가 이번 작품에서 가장 좋아하는 넘버는 ‘One Moment in Time’. 극 중 의지하던 이들이 떠난 후의 애절함과 화려함 뒤에 숨겨진 외로움이 담겼다. 그는 “인물의 서사와 감정이 쌓이다 보니 이 넘버를 부를 때 가장 감정이 벅차다”고 했다. 그는 같은 디바로서, 배우로서 휘트니 휴스턴에게서 자신을 발견했다. ‘자신을 노래한다’는 느낌 때문에 이번 작품에 대한 애정은 각별하다. “배우는 외로운 직업입니다. 가장 유명하지만 가장 쓸쓸한 일이거든요. 김선영 버전의 휘트니 휴스턴을 연기하며 한번 더 성장하고 싶어요.” 내년 2월 23일까지 서울 LG아트센터. 6만∼14만 원. 8세 이상 관람가.김기윤 기자 pep@donga.com}

일본인 조 하루카 씨(46·사진)는 한국 여행을 떠날 때면 늘 세 가지를 예약한다. 첫 번째는 비행기 탑승권, 두 번째는 호텔, 세 번째는 뮤지컬 티켓이다. 제일 많은 비용을 지출하는 건 바로 뮤지컬 티켓. 그도 그럴 것이 최근 2년 동안 한국에서 본 뮤지컬 공연이 100회가 넘는다. 최근 e메일로 만난 조 씨는 “검색만 잘해도 일본 신칸센 열차보다 싼 한국행 비행기 티켓은 많다”며 “한국 뮤지컬 때문에 예금 잔액이 많이 줄었지만, 또 서울에서 훌륭한 퍼포먼스를 즐기고 싶다”고 했다. 그가 바다 건너 공연장까지 찾으며, 한국 ‘뮤덕(뮤지컬 덕후)’이 된 이유는 뭘까. 그가 처음 한국을 찾은 건 지난해 1월. 신시컴퍼니의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를 보기 위해서였다. 일본에서 먼저 접한 ‘빌리 엘리어트’에 크게 감동한 그는 서울에서도 같은 작품의 공연이 열린다는 소식을 들었다. 주저 없이 한국행 티켓을 끊었다. 그가 공연장에서 처음 마주한 한국 배우들은 상상 이상이었다. “뮤지컬에 음악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한국 배우들의 가창력은 정말 대단해요. 주연뿐만 아니라 다른 배우들도 매력적입니다.” 이날을 기점으로 그의 ‘덕질’이 시작됐다. 뮤지컬 ‘시카고’ ‘마틸다’와 내한 공연인 ‘스쿨 오브 락’까지 한국 공연장에서 펼쳐지는 다양한 작품들을 사랑하게 됐다. 본격 회전문 관객이 되면서 그가 본 공연 횟수는 100회를 벌써 넘었다. 그는 “공연을 보고 일본에 돌아가도 다시 한국에 오기 전까지 또 여러 편의 공연을 예약한다”며 “주변 가족, 친구도 제 한국 뮤지컬 사랑을 더는 말리지 못한다”고 웃었다. 조 씨는 “한국의 뮤지컬 컴퍼니도 매력적”이라고 치켜세웠다. 그는 “일본에는 회전문 관객을 위한 마케팅이 많지 않은데 한국에는 스탬프 카드에 도장을 찍어주고 할인티켓, 굿즈, 팬 미팅 등 혜택을 준다”고 했다. 또 “급한 일이 있으면 빠르게 티켓을 취소할 수 있는 온라인 티케팅 시스템과 모든 세대를 아우르는 공연문화도 부럽다”고 했다. 한국말을 거의 알아듣지 못하는 그는 공연 속 넘버와 연기를 그저 마음으로 느낄 수밖에 없다. 다만 일본에서 같은 공연이 있다면, 작품을 외우다시피 숙지한 뒤 한국을 찾는다. 공연이 없어도 영화, 책, 인터넷에서 관련 자료를 찾아 미리 공부한다. 여전히 한국어는 서툴지만 “심현서, 정우진, 최정원, 김영주 등 배우의 광팬”이라며 출연진 이름만큼은 또박또박 한글로 적었다.김기윤 기자 pep@donga.com}

코미디나 예능 프로그램에서 맹활약하는 ‘웃음 사냥꾼’들이 잇따라 TV 밖 무대로 향하고 있다. 코미디 연극, 소극장 개그 쇼부터 마이크 하나만 덩그러니 놓은 채 작은 펍에서 펼치는 스탠드업 코미디까지 방식도 각양각색이다. 대중에게 개그를 선보일 프로그램이 점차 줄고, 영화나 넷플릭스 등에서 스탠드업 코미디가 각광받으며 개그맨들은 무대라면 어디든 가리지 않고 있다. 이들은 ‘정통 코미디’에 대한 갈증을 무대 러시의 가장 큰 이유로 꼽았다. 14일 서울 대학로의 한 소극장. 코미디 연극 ‘잇츠 홈쇼핑 주식회사’ 무대에는 낯익은 얼굴이 많다. 조혜련, 장동민, 김영희, 김승혜 등 유명 개그맨이 대거 배우로 출연한다. 홈쇼핑 방송 현장에서 벌어지는 에피소드를 다룬 극 안에서 이들은 100분 동안 서사에 맞게 대사를 소화한다. 이따금씩 거친 욕설과 애드리브로 웃음을 뽑아내기도 했다. 대표 예능인 이수근도 ‘윤형빈의 개그 쇼 프로젝트’ 가운데 하나인 ‘이수근의 웃음팔이 소년’을 현재 공연 중이다. 텅 빈 무대에 기타 하나만 들고 올라 동료 개그맨들과 선보이는 음악 콩트는 관객으로부터 “개그콘서트에서 보여주던 정통 콩트를 떠올리게 한다”며 반응이 뜨겁다. 이 밖에 김대희, 김준호, 윤형빈, 김대범 등도 아예 직접 소극장을 차려 오랜 기간 동료 선후배들에게 무대를 제공해왔다. 자체 정기공연은 물론 새로운 개그 쇼도 기획한다. 이들이 무대로 눈을 돌리게 된 건, 일단 개그 프로그램이 과거보다 크게 줄었기 때문이다. 현재 KBS ‘개그콘서트’와 tvN ‘코미디빅리그’, comedy TV ‘스마일킹’만이 개그를 선보일 방송 플랫폼으로 살아남았다. 대부분은 시청률이 떨어지고 화제성도 부족하단 이유로 사라져갔다. 이런 상황은 개그맨들에게 직접 아이디어를 내고 온전히 자기 것으로 소화하는 ‘정통 코미디’에 대한 갈증을 더욱 커지게 만드는 계기가 됐다고 한다. 윤형빈은 “레트로 개그에 대한 그리움이 있다. 잘 짜인 악극 같은 쇼를 선보이고 싶다”고 밝혔다. 몇 안 남은 개그 프로그램에 출연해도 아쉬움은 여전하다. 수년째 서울 홍익대 인근에서 소극장을 운영하는 정태호는 “일주일 동안 머리를 싸매고 회의해도 방송에 나가는 건 고작 2∼3분이 전부다. 무궁무진한 아이디어를 가진 개그맨들에게는 무대가 오롯이 자신을 표현할 해방구”라고 했다. 마침 영화나 유튜브 등에서 먼저 주목을 받은 스탠드업 코미디의 약진은 이들의 무대 러시를 부채질했다. 스탠드업 코미디 쇼 ‘코미디 헤이븐’을 운영하는 정재형은 “스탠드업 코미디는 한 명이 5분 넘는 시간을 사용하며, 관객과 즉각적으로 소통하는 매력이 있다. 관객의 웃음을 걸고 개그맨으로서 도전해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말했다. 신랄한 사회 풍자, 수위가 높은 성적 농담 등 표현 수위에서 비교적 자유롭다는 것도 개그 무대만의 장점이다. 넷플릭스와 스탠드업 코미디를 선보인 박나래는 “방송에서 할 수 없던 성(性) 얘기를 쿨하게 풀어놓을 자리가 없었다. ‘59금, 69금’이라는 리뷰도 있었는데 개인적으로 조금 더 가도 될 것 같다”고 말했다. 연극 무대와 스탠드업 코미디를 병행하고 있는 김영희는 “언더 개그 무대나 스탠드업 코미디 공연장에서는 표현 제약이 적고, 애드리브도 훨씬 자유롭다”고 밝혔다. 이런 분위기는 언제까지 이어질까. 이수근은 “공연만이 주는 긴장감도 있고, 다양한 연령층이 쉽게 웃을 수 있는 무대를 만들고 싶다. 단순히 쇼만 보여드리는 게 아니라 관객과 많이 소통하고 싶다”는 바람을 드러냈다. 조혜련은 “코미디 연극은 27년 전 신인 개그맨이 됐을 때처럼 얼굴을 맞대고 소통하는 짜릿함이 있다”고 했다. 아직은 불씨 수준이지만, 어쩌면 그들의 목마름은 들불처럼 번질지도 모른다.김기윤 기자 pep@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