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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강남 지역 S여중 전·현직 남자 교사 8명이 학생들을 지속적으로 성추행·성희롱한 혐의로 13일 경찰에 집단 수사 의뢰됐다. 이 학교에서는 오래전부터 남교사들의 부적절한 성 관련 발언 및 행위에 대해 학생과 학부모의 민원이 있었지만, 학교 측이 미온적으로 대응하면서 곪아 왔던 일이 결국 터진 것이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S여중에 이어 서울 강북 지역의 남녀공학 학교인 C중에서도 남교사가 여학생들에게 성희롱 발언을 일삼았다는 의혹이 제기돼 경찰이 수사에 착수했다.○ 남교사 8명 성희롱? 도대체 무슨 일이 6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인 트위터에는 ‘S여중여고 문제공론화’라는 계정이 만들어졌다. 이 계정을 통해 S여중 학생들로 추정되는 익명의 이용자들은 이 학교 남교사들의 성추행·성희롱 사례를 수십 건씩 제보했다. 내용은 충격적이었다. ‘영어선생님이 은근슬쩍 접촉하고 성기를 어깨에 문질렀다’ ‘엉덩이를 성적으로 접촉했다’ ‘국어선생님이 북어랑 여자는 사흘마다 패야 한다며 국어도 똑같이 패야 잘한다고 말했다’…. 특히 올해 8월 성희롱 사건으로 해임된 국어교사 정모 씨는 남녀의 성관계를 치즈 떡볶이에 비유하며 치즈를 남성 정액에, 떡볶이를 생리 중인 여성과의 성관계로 비유했다는 제보가 이어졌다. 서울시교육청은 언론 보도를 보고 사태를 파악했지만 문제 교사들이 누구인지조차 특정하지 못했다. 시교육청은 8일 전교생 708명을 대상으로 남교사들의 성희롱 여부에 대한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그 결과 학생들이 성추행·성희롱을 했다고 지목한 교사는 이미 해임된 정모 씨를 포함해 총 8명에 달했다.○ 중장년 남교사와 학교 측의 성문제 인식 문제가 된 남교사 8명은 40대 이상의 중장년이다. 이 중 4명은 정년퇴직을 눈앞에 둔 59∼61세로 알려졌다. 해임된 정 씨는 S여중에 26년간 근무했다고 한다. “다른 교사들도 이 학교에 20, 30년씩 근무한 분들”이라고 학교 관계자는 밝혔다. 복수의 이 학교 졸업생들은 “해당 선생님들은 십수 년 전에도 그런 식이었다”며 “성희롱 발언에 대한 학생과 학부모들의 문제 제기가 여러 차례 있었지만 그때마다 학교가 대충 덮고 넘어갔다”고 주장했다. 해임된 정 씨는 재작년에 이미 구두경고를 받았고 작년 3개월 정직 처분을 받았음에도 복직 후 또 성희롱 파문에 연루돼 결국 해임됐다고 학교 관계자는 밝혔다. 정 씨는 “아이들이 졸지 않도록 재밌게 하려고 그런 것”이라며 해임처분에 반발해 민사소송을 진행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다른 교사들 역시 “손주뻘인 아이들이 예뻐서 등만 두드린 것” “성희롱 의도는 전혀 없다”고 해명했다고 한다. 학교 관계자는 “다들 교직생활에서 나름의 교육철학을 가지고 열심히 가르쳐왔다고 생각하는 분들인데 말년에 이런 일이 생겨 너무 안타깝다”며 “해당 교사들이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힘들어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어 “중학생 땐 아빠가 안아주는 것조차 싫어하는 시기인데 선생님들이 너무 옛날 방식으로 행동한 것 같다”며 “10명 등을 두드려도 한 명만 기분 나쁘면 성희롱이 되는 건데, 학교가 파악한 수위는 알려진 정도로 심각하진 않다”고 말했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학교 측이 이 같은 교사들의 해명만 듣고 문제를 방치하면서 사태가 악화된 게 아니냐고 지적하고 있다. 13일 오전까지도 해당 교사들은 학생들과 분리되지 않고 학교에서 정상 수업을 진행한 것으로 알려졌다. 시교육청 관계자는 “관련규정상 해당 학교의 교사와 학생을 분리하는데 어려움이 있다”고 해명했다. S여중 관계자는 “교육청 차원의 교사 면담이나 학교 조사는 이뤄지지 않았다”며 “추가 조사와 징계 여부는 법인 이사회에서 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줄 잇는 교사 성추문에 철퇴 내려야 12일에는 서울 C중 도덕교사에 대한 고발 계정이 만들어져 학생들의 제보가 쏟아졌다. 이 학교 학생들로 추정되는 제보자들은 ‘선생님이 여자애들이 돈을 많이 벌려면 몸 파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말했다’ ‘떠들면 강간해버리겠다고 했다’ ‘자신을 교주라고 하며 자신을 신으로 생각하라고 말했다’ 등의 글을 올렸다. 그러나 시교육청은 학교 측이 사건을 인지한 지 일주일이 지난 12일에야 해당 학교에 대한 특별장학을 실시했다. 시교육청 관계자는 “해당 교사가 출근을 하지 않아 조사하지 못했다”며 “경찰에 수사 의뢰를 했다”라고 말했다. 학부모 이모 씨는 “성폭력이 확인되면 해당 교사와 감독자까지 교단에서 몰아내야 안심하고 학교에 보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임우선 imsun@donga.com·노지원 기자}
“박근혜 대통령과 함께 국정 역사 교과서도 탄핵됐다고 생각합니다. 교육부 장관과 ‘맞짱’을 떠서라도 국정 교과서를 폐지시키겠습니다.” 조희연 서울시교육감이 10일 시교육청 주최로 열린 역사교육 대토론회에 참석해 “국정 교과서는 반드시 폐지될 것”이라며 이같이 말했다. 탄핵안 통과 이후 교육부와의 대립각을 더욱 노골화하는 모습이다. 조 교육감은 이날 “지금 황교안 총리가 (대통령) 권한대행을 하고 있는데 국정 교과서는 대행이 결정해서 추진하는 게 불가능한 일”이라며 “교육부 장관도 이 프로세스를 진행하기는 어렵기 때문에 여러분은 안심하셔도 된다”고 말했다. 이어 “교육부가 강행의 변형 내지는 꼼수로 ‘국·검정 혼용’을 할 수가 있는데 이는 자유로운 선택인 것처럼 보이나 실상은 불공정 게임”이라며 “국정 교과서는 2015교육과정에 맞춰 쓴 ‘새 책’이고 검정은 2009교육과정에 의해 쓰인 ‘헌 책’인데 둘 중 학교에 고르라고 하면 학교들은 당연히 새 책을 쓸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 “그렇게 되면 결국 70∼80%는 국정을 쓰고 강한 반대를 가진 일부 학교만 헌 책인 검정 교과서를 쓸 것”이라며 “이는 안 되는 일이기 때문에 국정은 폐기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조 교육감은 “현재 201개 서울지역 고등학교가 1학년에 역사를 편성해 놨는데 중학교와 달리 고등학교는 이를 바꾸는 게 너무 힘든 일”이라고 말했다. 그는 “학교에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내가 싸우는 것”이라며 “박근혜 탄핵이라는 엄청 어려운 일도 해내는 국민인데 우리가 힘을 합치면 국정 교과서 하나 못 없애겠냐”고 덧붙였다. 그는 또 “국정 교과서를 추진하려는 보수의 바탕에는 성장 승리사관이 있는 것이고 배타적이고 편협한, 자긍적인 역사관을 넣으려는 것”이라며 “이는 결국 이민자와 소수자, 탈북자 및 북한 반대 등 굉장히 냉전적인 사고로 나가게 돼 있다”고 주장했다. 조 교육감은 이날 토론회 후 서울 광화문광장으로 이동해 국정 교과서 즉시 철회를 요구하며 1인 시위를 벌였다. 이 같은 교육감 행보에 대해 일각에서는 교육 수장으로서 적절치 않은 언행이라는 지적이 나왔다. 서울 시내 한 고교 교장은 “그래서는 안 되는데 교육감이 이미 정치인이 돼 버렸다”며 “토론회 홍보 공문은 받았지만 이미 정해놓은 프레임에서 무슨 토론을 하겠나 싶어 가고 싶지 않았다”고 말했다. 또 다른 고교 교장은 “설령 국·검정 혼용이 돼도 열에 아홉 학교는 국정을 안 쓸 분위기”라며 “현장을 너무 모르고 ‘오버’한 것 같다”고 지적했다. 한편 교육부는 기존 계획대로 23일까지 국정 교과서에 대한 국민 의견을 수렴한 뒤 추진 방안을 최종 결정할 방침이다.임우선 imsun@donga.com·유덕영 기자}
최순실 씨의 딸 정유라 씨가 이화여대 입학 취소에 이어 고등학교 졸업도 취소 결정을 받았다. 정 씨가 청담고 재학 시절 승마협회 공문을 통해 ‘공결’(출석으로 인정되는 결석) 처리를 받았지만, 공결로 인정된 141일 가운데 최소 105일의 공문서가 허위인 것으로 확인됐기 때문이다. 서울시교육청은 “학교 관련자 12명을 수사 의뢰하고 재발 방지 대책을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5일 시교육청이 발표한 청담고에 대한 특정감사 최종 결과에 따르면 정 씨는 선화예술학교(중학교)와 청담고에 재학하는 동안 출결 및 성적관리에서 비정상적이고 예외적인 특혜를 다수 받았다. 이민종 시교육청 감사관은 “특히 정 씨가 고3 시절 인정받은 공결 날짜는 총 141일인데 이 중 최소한 105일에 해당하는 근거 공문서가 허위임이 새로 드러났다”고 밝혔다. 시교육청이 정 씨가 제출한 공문을 대한승마협회의 해당 날짜 훈련일지와 대조해 진위를 따져보니 △62일간의 국가대표 합동훈련 △43일간의 2014 아시아경기대회 국가대표 훈련이 실제로 이뤄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전창신 시교육청 감사관은 “승마협회 훈련대장을 보면 다른 선수와 달리 정 씨의 훈련일지만 서명이 아닌 도장으로 날인돼 있는 등 훈련일지 전체가 조작됐을 가능성이 있었다”며 “다른 선수와 달리 대회 참가가 아닌 단순 경기력 향상을 위한 훈련을 이유로 공결 요청 공문을 보내는 등 부당한 정황이 확인됐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시교육청은 정 씨가 고3 시절 최소 105일을 무단결석했다는 판단을 내렸다. 시교육청은 “졸업을 하려면 전체 수업일수의 3분의 2 이상 출석해야 하는데 정 씨는 이를 충족하지 못했기 때문에 졸업 취소가 마땅하다”고 말했다. 시교육청은 △정 씨에 대한 출결 및 성적이 기재된 생활기록부를 수정하고 △교과우수상 등 기존에 받은 상도 박탈하겠다고 밝혔다. 임우선 imsun@donga.com·노지원 기자}
최순실 씨의 딸 정유라 씨의 고등학교 졸업이 취소되게 됐다. 정 씨가 청담고 재학 시절 승마협회 공문을 통해 '공결(출석으로 인정되는 결석)' 처리를 받았지만, 확인 결과 공결 처리 된 141일 가운데 최소 105일의 공문서는 허위인 것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서울시교육청은 "이는 무단결석이기 때문에 졸업취소가 마땅하다"고 밝혔다. 시교육청은 관련자 12명을 수사 의뢰하고 재발 방지 대책을 마련할 방침이다. 시교육청은 5일 청담고에 대한 특정감사 결과를 최종 발표했다. 조희연 서울교육감은 "최 씨와 정씨는 대한승마협회의 허위 공문서까지 동원해 학교를 기만하고 공교육을 능멸했다"며 "정씨의 졸업취소 및 성적정정, 수상취소 등 조치를 취하겠다"고 말했다. 시교육청에 따르면 정 씨가 재학한 선화예술학교(중학교)와 청담고에 대한 특정감사 결과 정 씨에 대해 비정상적이고 예외적인 학사 관리와 성적 관리상 특혜가 광범위하게 발견됐다. 이민종 시교육청 감사관은 "특히 정 씨가 고교 3학년 재학 중 인정받은 공결 날짜가 총 141일인데 이 중 최소한 105일에 해당하는 근거 공문서가 허위임이 새롭게 드러났다"고 밝혔다. 시교육청이 '국정농단 의혹사건 국정조사 특위'의 국민의당 간사인 김경진 국회의원으로부터 대한승마협회의 해당 날짜 훈련일지를 직접 대조해본 결과 공결 처리의 근거가 된 대한승마협회의 협조요청 공문 중 △62일 간의 국가대표 합동훈련 및 △43일간의 2014 아시안게임 국가대표 훈련이 실제로 이뤄지지 않은 사실을 확인했다는 것이다. 전창신 시교육청 감사관은 "승마협회 훈련대장을 직접 확인해보니 정 씨의 훈련일지는 다른 학생과 달리 서명이 아닌 도장으로 날인돼 있는 등 훈련일지 전체가 조작됐을 가능성이 있었다"며 "다른 선수와 달리 대회 참가가 아닌 단순 경기력 향상을 위한 훈련을 이유로 공결 요청 공문을 보내는 등 부당한 정황이 확인됐다"고 말했다. 또 "2회에 걸쳐 발송된 국가대표 합동훈련의 경우에도 다른 선수와 달리 훈련장소나 기간 등 구체적 훈련계획이 명시돼 있지 않았다"며 "훈련이 취소된 경우에도 이에 대한 공문을 보내지 않는 등 무단 결석 정황이 여럿 확인됐다"고 덧붙였다. 이에 따라 정씨는 고교 3학년 재학 기간 동안 최소한 105일 무단결석한 것으로 판단된다고 시교육청을 밝혔다. 시교육청은 "이를 고려하면 정 씨의 고3시절 실제 출석일자는 전체 일자의 3분의2를 충족하지 못한다"며 "졸업기준을 맞추지 못했기 때문에 졸업은 취소돼야 마땅하다"고 밝혔다. 정 씨에 대한 졸업취소 처분과 함께 교육청은 △정 씨에 대한 출결 상황 및 성적서 등 생활기록부 기재 사항을 수정하고 △교과 우수상 등 수상 자격도 박탈하겠다고 밝혔다. 시교육청은 정 씨 측 변호사에게 이에 대한 해명을 요구했으나 정 씨 측은 "할말이 없다. 일체의 자료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답변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와 더불어 시교육청은 최 씨와 정 씨를 포함해 청담고 관계자 7명과 선화예술학교 관계자 3명 등 총 12명을 수사의뢰 할 방침이다. 전 감사관은 "감사 기간 내내 관련 교직원들은 이런 일이 생긴 게 '단순 업무미숙' 때문이라고 주장했지만 이는 누구도 수긍하기 어려운 것"이라며 "구체적인 사실관계 파악을 위해 수사의뢰를 요청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시교육청은 이번 정 씨 사건을 통해 드러난 교육현장의 학사 관리 및 성적관리 문제점을 개선하겠다고 밝혔다. 시교육청은 "특히 체육특기자에 대해서는 △출결 및 성적 등 관리는 학업성적관리위원회의 심의로 결정하고 △특기학교 신청 시 학교운영위원회의 심의를 반드시 거치도록 하며 △체육특기자 배정 요청 시 공론화 과정을 거치게 하겠다"고 말했다. 또 △체육특기자의 대회 참가로 인한 공결처리는 각 학년 수업일수의 1/3로 엄격히 제한하고 △협조요청 공문은 교육부나 대한체육회 등 공식적인 기관의 것만 인정하는 방안을 검토할 예정이다.임우선 기자 imsun@donga.com}

#장면1. 서울 영등포구에 사는 주부 김모(35) 씨는 지난달 밤 12시경 잠자리에 누웠다가 급히 오리털 파카를 걸쳤다. 스마트폰으로 지역 인터넷카페를 검색하다가 다음날 오전 9시 접수시작인 한 유치원 앞에 이미 엄마들이 줄을 섰다는 글을 봤기 때문이다. 김 씨는 “원아 선발은 추첨식으로 하지만 당첨된 원아가 등록을 하지 않을 경우 대기자를 접수번호 순으로 채운다는 말이 돌면서 엄마들의 '노숙 소동'이 빚어졌다"며 "집 앞 유치원 하나 보내기가 이렇게 힘들어서야 누가 아이를 낳겠냐"고 반문했다.#장면2. 서울 마포구의 직장맘 하모 씨(34)는 지난달 퇴근길에 Y센터를 지나다가 깜짝 놀랐다. 이 센터의 유아부 과정 신입 원아 접수는 다음 날 오전 8시부터였지만 벌써부터 10여 명이 줄을 서 있었다. 만 3세인 딸을 이 곳에 보내려 했던 하 씨는 집에도 못 가고 줄을 서 다음 날 오전까지 13시간을 ‘노숙’ 대기한 끝에 등록에 성공했다.#장면3. 지난달 30일 추첨이 진행된 서울 서초구 S유치원 강당에는 만4세 유아 40명을 뽑는데 총 200여명이 몰렸다.차례로 공을 뽑을 때마다 곳곳에서는 환호와 탄식이 엇갈렸다. 추첨에서 떨어진 학부모 이모(37) 씨는 “작년에도 추첨에 실패해 직장을 그만두고 집에서 애를 봤는데 또 떨어졌다”며 "이 근처에서 유치원에 떨어지고 갈만한 곳은 한달에 200만~300만원을 내야 하는 놀이학교나 영어유치원 뿐인데 감당이 안돼 계속 가정보육을 해야 할 상황”이라고 한숨을 쉬었다. 정부가 ‘유치원 추첨 대란’을 해결해 보겠다며 올해 처음으로 서울 등에서 온라인 입학관리 시스템 ‘처음학교로’를 시범 운영했다. 그러나 서울지역 전체 유치원(884곳)의 79%(699곳)를 차지하는 사립유치원 대부분이 참가를 거부해 올해도 예년 같은 유치원 추첨 대란이 벌어졌다. 유치원 원서 접수와 추첨이 진행된 11월 중순 이후 만 3∼5세 아이를 둔 학부모 중 상당수는 가족들과 아르바이트생까지 동원해 보통 5, 6곳에 이르는 유치원을 발로 뛰며 입학설명회와 원서 접수 및 추첨에 참여해야 했다. 인터넷 카페에는 4만 원 상당의 ‘알바비’를 내걸고 대신 추첨을 뛰어줄 사람을 구하는 광고도 등장했다. 신자에게 혜택을 부여하는 교회나 성당 부설유치원의 경우 유치원 추첨을 앞두고 신자가 급증하는 현상도 나타났다. 학부모 이모 씨는 “일반전형과 신자전형 간 경쟁률 차가 2, 3배 돼 개종도 불사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이런 경쟁에 유치원들도 난색을 표하고 있다. 추첨 뒤에도 복수 당첨된 학부모들이 끊임없이 움직이는 데다 빈자리가 났는지 확인하는 대기 학부모들의 민원 제기에 업무 수행이 불가능할 정도라는 것. 서울 강남의 한 유치원 원장은 “다른 유치원을 선택할 학부모님은 제발 빨리 연락을 달라”고 호소했다. 유치원 대란이 빚어지는 근본적 원인은 유치원에 가려는 아이들보다 유치원 자리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올해 4월 기준 유치원 입원 대상 어린이(만 3∼5세)는 141만 명. 그러나 전국의 유치원이 수용 가능한 인원은 국공립(4696개)이 17만349명, 사립(4291개)이 53만3789명으로 합쳐 70만 명을 간신히 넘는다. 2명 중 한 명은 유치원에 갈 수 없는 것. 나머지는 어린이집이나 놀이학교, 울며 겨자 먹기로 비싼 ‘영어유치원’에 가야 한다. 특히 인구가 밀집한 수도권은 평균 3명 중 한 명꼴로 유치원에 간다. 서울시교육청에 따르면 올해 서울 공립유치원의 수용률은 6.4%, 사립은 31.4%다. 서울에서 유치원 공급이 가장 부족한 광진구 중곡동은 공·사립유치원 수용률이 13.7%에 불과하다. 강남 지역도 유치원 수용률이 29.9% 수준이다. 시교육청 관계자는 “서울은 땅값이 비싸 신설이 어렵고, 공립유치원을 확대하는 것도 기존 사립유치원들의 반발이 심해 증설이 쉽지 않다”며 “인구절벽의 여파로 2022년이면 서울지역 유아 수가 급감할 걸로 예상돼 무턱대고 늘리기도 조심스럽다”고 말했다. 하지만 어린이집 자리를 포함해 계산하더라도 서울 내 대다수 권역의 만 3∼5세 유아 수용률은 100%에 훨씬 못 미치는 60∼70%대다. 이 때문에 유치원이나 어린이집에 자리를 못 잡은 부모들은 미술학원이나 월 100만∼200만 원을 호가하는 영어학원 같은 유사 교육 기관에 아이를 맡긴다. 이순형 서울대 아동가족학과 교수는 “유아기부터 교육 시스템이 무너지고 학부모들이 사교육 부담에 질려버렸다”며 “초등학교 병설유치원 확대 등 현실적인 대안을 강력하게 추진해야 한다”고 말했다임우선 imsun@donga.com·노지원 기자}

아이들이 유치원에 가는 집에서는 환호 혹은 탄식이 터져 나온다. 바야흐로 유치원 추첨 시즌이다. 만 3세 전후의 아이를 키우는 부모들이라면 안다. 그 고민하고 마음 졸이는 시간을. 유아들에게는 어떤 교육과 환경이 필요할까. 지난달 22일 국내 최고의 유아교육 전문가 이기숙 이화여대 유아교육과 명예교수(66)를 만났다. ―어린이집이냐 놀이학교냐, ‘일유(일반유치원)’냐 ‘영유(영어유치원)’냐, 엄마들 고민이 많습니다. “먼저 놀이 ‘학교’, 영어 ‘유치원’ 같은 말은 쓰면 안 돼요. 그런 기관은 학교도 유치원도 아니죠. 그냥 학원, 교습소일 뿐이에요. 국가 수준의 누리과정을 충실히 구현하는 곳이어야 학교인 것이고, 유치원이라 부를 수 있어요.” ―‘이화유치원’ 원장을 8년간 하셨고 유아교육학회장도 지내셨죠. 어떤 유치원이 좋은 곳인가요. “가장 중요한 건 ‘교사’입니다. 교사가 어떤 학교에서 어떤 교육을 받았고 얼마나 경력을 가졌는지 원장께 물어보세요. 엄마들이 자꾸 물어야 원장들도 돈을 들여 좋은 교사를 씁니다. 요즘은 유치원 인테리어를 많이 보죠? 멋진 갤러리처럼 꾸민 곳보다는 아이들의 눈높이에 아이들이 그린 작품을 붙여놓은 곳이 좋은 곳입니다. 장난감이 영역별로 다양하게 구비돼 있고 아이들 눈높이에 아이들이 꺼내 쓸 수 있게 잘 정리돼 있는지 보세요. 특히 화장실이 깨끗한지 봐야 합니다. 화장실이야말로 기본 생활습관을 제일 많이 기르는 곳이기 때문이죠.” ―최근 ‘적기교육’이란 책을 통해 40년간의 유아교육 경험을 풀어내셨는데 조기교육보다 적기교육이 중요하다고요. “너무 많은 특별활동을 하는 유치원은 추천하지 않아요. 어린 시절은 ‘마음의 근육’을 키우고 행복감을 경험하는 게 가장 중요합니다. 앞으로의 아이들에게는 단순한 지식보다 대인관계 지능, 신체 지능과 같은 다양한 사회적, 창의적 다중 지능이 요구되죠. 이건 집단 속에서 놀이와 관계 맺기를 해야만 배울 수 있어요. 요즘 아이들은 공주, 왕자처럼 키워지죠. 그런데도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이 예전 아이들보다 자신감이 없어요. 그 나이엔 못하는 게 당연한 건데도 잘하는 아이들과 비교하니 ‘나는 못 한다’고 스스로 세뇌시켜요. 나는 그게 너무 무서워요. 사교육을 많이 한 아이들은 산만해요. 자기가 모르는 걸 자꾸 이것저것 집중하라고 하니 어떤 일에도 집중할 수가 없지요. 엄마들이 산만함을 키우는 거죠. 요즘 아이들이 얼마나 불안하면 유아교육과 전공에 ‘유아행복론’이 학과목으로 들어왔겠어요.” ―어떤 교육이 밝고 우수한 아이를 만드나요. “아이에게 ‘몰입’할 기회를 줘야죠. 유아에게 제일 좋은 교육은 몰입을 통해 성취감을 느끼고 ‘내가 다 완성했다. 너무 재밌다. 난 할 수 있어’라는 긍정과 자신감을 느끼게 해주는 것입니다. 이야기를 많이 읽고 대화도 많이 나눠야 해요. 요즘 아이들은 사교육 때문에 엄마를 포함해 친구 등 주변인과 관계를 맺거나 대화 나눌 기회가 너무 적어요. 먼저 출발한 아이가 반드시 먼저 도착하진 않아요. 살아보니 정말 그래요. 늦은 것 같지만 적기에 제대로 출발한 아이가 끝까지 제대로 도착할 수 있습니다.” 임우선 기자 imsun@donga.com}
바야흐로 유치원 추첨 시즌이다. 만 3세 전후의 아이를 키우는 부모들이라면 대부분 안다. 어떤 유치원을 보내야 할지, 과연 추첨에서 되기는 할지, 그 고민하고 맘 졸이는 마음을. 과연 초등학교 입학 전 유아들에게 필요한 교육은 무엇이며 어떤 환경이어야 좋은 교육환경이라 말할 수 있는 것일까. 지난달 22일 국내 최고의 유아교육전문가로 손꼽히는 이기숙 이화여대 유아교육과 명예교수(66)를 만나 물었다.―어린이집이냐 놀이학교냐, 일유(일반유치원)냐 영유(영어유치원)냐. 영유아를 둔 엄마들 고민이 참 많은 요즘입니다. "먼저 놀이 '학교', 영어 '유치원' 같은 말은 써서는 안 됩니다. 그런 기관은 학교도 아니고 유치원도 아니죠. 그냥 학원, 교습소일 뿐이에요. 국가 수준의 누리과정을 충실히 구현하는 곳이어야 학교인 것이고, 유치원이라 부를 수 있습니다."―명문으로 불리는 '이화유치원' 원장을 8년간 역임하셨습니다. 이화어린이연구원장, 유아교육학회장도 지내셨죠. 그렇다면 과연 어떤 유치원이 좋은 유치원인가요. "가장 중요한 것은 '교사'입니다. 제일 중요해요. 어느 학교에서 어떤 교육을 받았고, 얼마만큼의 경력을 가진 선생님들인지 원장님께 물어보세요. 엄마들이 자꾸 물어야 원장님들도 비싸도 좋은 교사를 쓰려고 노력합니다. 요즘 엄마들은 유치원 인테리어를 많이 보지요? 그런데 너무 멋진 인테리어를 한 곳보다는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는 환경을 꾸민 곳인지를 보길 바랍니다. 어른들 눈에 멋져보이게 갤러리처럼 꾸민 곳, 한쪽 벽이 온통 백설공주 벽화인 곳 보다는 아이들의 눈높이에 아이들이 그린 작품을 많이 붙여놓은 곳이 좋은 곳입니다. 놀잇감이 영역별로 다양하게 구비돼 있고 모든 놀잇감이 아이들 눈높이에 아이들이 꺼내 쓸 수 있게 잘 정리돼 있는지 보세요. 아무리 비싼 교구라도 저 높이 올려져 있는 건 의미가 없지요. 교구가 너무 없는 곳도 안돼요. 아이들이 뛰어놀 공간이 유치원 안팎에 충분한지, 안전한지도 보세요. 특히 화장실이 깨끗한지 봐야합니다. 화장실이야말로 기본 생활습관을 제일 많이 길러줄 수 있는 공간이기 때문이지요."―최근 '적기교육'이란 책을 통해 40년간의 유아교육 경험을 풀어내셨습니다. 조기교육보다는 적기교육을 받은 아이가 더 밝고 우수하게 자란다고 강조하셨는데요. "나는 유치원을 선택할 때도 너무 많은 특별활동을 하는 곳은 추천하지 않아요. 어린 시절은 '마음의 근육'을 키우고 행복감을 경험하는 게 가장 중요합니다. 앞으로의 아이들에게는 단순한 지식보다 대인관계 지능, 신체지능과 같은 다양한 사회적, 창의적 다중지능이 요구돼요. 이건 오직 공동집단 속에서 놀이와 관계맺기를 해야만 배울 수 있는 것이죠. 학원과 학습지로는 안 되는 거예요. 요즘 아이들은 다들 공주님, 왕자님처럼 키워지지요. 그런데도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이 예전 아이들보다 자신감이 없다는 거예요. 그 나이엔 못하는 게 당연한 건데도 잘 하는 아이들과 비교하니 '나는 못한다'가 세뇌가 돼요. 나는 그게 너무 무서워요. 사교육을 많이 한 아이들을 보면 산만해요. 자기가 모르는 걸 자꾸 이것저것 집중하라고 하니까 어떤 일에도 집중할 수가 없지요. 엄마들이 산만함을 키우고 있는 거예요. 요즘 아이들이 얼마나 불안하면 유아교육과 전공에 '유아행복론'이 학과목으로 들어왔겠어요."―엄마들은 아이가 잘 됐으면 해서 시키는 것일 텐데요. "그렇다면 아이에게 '몰입'할 기회를 주어야지요. 유아에게 제일 좋은 교육은 몰입을 통해 성취감을 느끼고 '내가 다 완성했다. 너무 재밌다. 난 할 수 있어'라는 긍정과 자신감을 느끼게 해주는 것입니다. 예컨대 한글을 봅시다. 어떤 엄마들은 '우리 애가 두 살인데 벌써 한글을 읽는다'고 자랑해요. 열 일 제치고 한글만 시키면 두 살도 읽을 순 있을 겁니다. 그런데 그걸 왜 그 때 배워야 하며 그걸 어디다 쓰나요. 그 때 해야 할 교육은 그게 아니지요. 엄마들은 한글교육을 '가나다라'만 생각하는데 이번 수능을 보면 알겠지만 읽을 줄 안다고 다 되는 게 아닙니다. 얼마나 글을 이해하고 그 안에서 중요한 걸 찾느냐가 중요하지요. 이것의 기초는 어디에서 시작되나하면 영유아기 때 일어납니다. 대화와 이야기를 많이 접해야 해요. 제대로 된 유아교육기관에서 동화를 듣고 선생님과 친구들과 많이 이야기 해야죠. 가정에서 엄마와 유대감을 느끼면서 많은 책을 읽고 대화해야 해요. 연구에서도 나타나요. 두 살 때부터 사교육을 많이 받은 아이들은 오히려 뒤로 갈수록 사회정서발달이나 창의성이 떨어져요. 외톨이인 아이들도 많았죠. 그런데 정말 집단 속에서 놀아보고, 싸워도 보고, 대인관계 지능을 높인 아이들은 전체적인 능력이 아주 좋고 문장이해력이나 독해력, 어휘력도 월등히 좋았어요."―그런데 어린 자녀를 둔 많은 엄마들은 '아이들이 좋아해서' 사교육을 시킨다고 합니다. 비싸서 안하고 싶어도 애들이 좋아하니까 시킨다고도 하는데요. "유아기 때 아이들이 제일 좋아하는 건 누구일까요. 엄마입니다. 엄마가 내가 어떻게 할 때 좋아하고 엄마가 내가 어떤 행동을 해야 사랑해주는지 아이들은 귀신같이 알고 있어요. 잘 관찰해야 합니다. 아이가 정말 좋아서 하는 것인지, 아니면 자기가 제일 좋아하는 엄마를 만족시키기 위해서 하는 것인지를 말이죠. 아이들이 크다보면 자기가 너무 좋아하는 게 나옵니다. 그 때가 배움의 적기예요. 아무것도 가르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그 마음이 나올 때까지 기다려줘야 한다는 겁니다. 그 땐 그 기회를 놓치면 안돼요."―엄마의 자세가 중요하겠네요. "엄마들이 욕심을 내려놔야 해요. 아이가 가장 좋아하는 사람도, 아이를 가장 잘 아는 사람도 엄마입니다. 무조건 아이 옆에 있는다고 좋은 엄마가 아니고 아이와 양보다 질로, 질적인 상호작용을 해주는 엄마가 유익한 엄마예요. 아이들이 어느 날 갑자기 사춘기가 돼서 문 걸어 잠그고 엄마랑 말 안하는 게 아니에요. 요즘 아이들은 사교육 때문에 엄마를 포함해 친구 등 주변인과 관계 맺기를 하고 대화를 나눌 기회가 너무 적어요. 처음엔 고등학교 아이들만 그랬는데 그게 점점 중학교, 초등학교로 내려오더니 이제는 유아기 아이들마저 인생의 기초를 마련할 기회를 뺏기고 있어요. 너무 개탄스러워요. 먼저 출발한 아이가 반드시 먼저 도착하진 않는다는 말이 있어요. 40년 간 유아교육을 하고 내 아이를 키우며 살아보니 정말 그래요. 늦은 것 같지만 적기에 제대로 출발한 아이가 끝까지 제대로 도착할 수 있어요. 엄마들이 믿음을 갖기 바랍니다."임우선기자 imsun@donga.com}
내년도 서울 지역의 384개 모든 중학교에서 국정 역사 교과서가 쓰이지 않게 됐다. 교과서 사용 대상인 1학년에 아예 역사 과목을 편성하지 않기로 했기 때문이다. 30일 서울시교육청에 따르면 당초 서울에서는 19개 중학교가 내년도 중1 수업에 역사를 편성했다. 역사 과목은 학교장 자율에 따라 1∼3학년 중 한 학년에 자유롭게 편성할 수 있다. 시교육청 관계자는 “해당 19개 학교 교장을 대상으로 간담회를 열어 교육현장 혼란이 예상되는 국정 교과서를 쓰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다”고 말했다. 학교장들은 1시간여의 토론 끝에 1학년에 편성한 역사 수업을 2학년이나 3학년으로 미루기로 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미 국정 교과서를 주문한 학교는 주문을 취소할 예정이다. 광주(90곳)와 제주 지역(45곳) 교육청도 중1 수업에 역사를 넣지 않기로 했다. 전남(중학교 250곳)과 전북(209곳)도 국정 교과서 사용 불가 방침을 밝혔다. 경기(623곳) 지역은 24개교가 국정 교과서를 주문했지만 도교육청은 이들 학교에 예산 집행을 하지 않겠다고 밝혔다.임우선 imsun@donga.com /광주=이형주 기자}

국정 역사 교과서를 둘러싼 논쟁은 화산의 정점에 도달했다. 일부 좌편향된 내용들이 고쳐졌고 디자인이 좋아졌지만 핵심 쟁점인 건국절 부분은 우파적 시각이 그대로 반영됐다는 비판이 나온다. 그렇다면 이를 사용할 교육 현장의 역사 교사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지난달 29일 서울과 지방의 국제고 일반고 역사 교사 4명의 목소리를 소개한다.○ 디자인과 자긍심 강화는 장점 ▽유모 교사(54)=책을 처음 봤을 때 디자인은 확실히 나아졌다고 생각했다. 깔끔하다. ▽박모 교사(51·여)=동감이다. 그림과 사진이 많은 건 좋아 보였다. 다만 사진이 본문 사이에 유기적으로 녹아 있지 않고 한 페이지에 따로 모아놓은 경우가 많아 아쉬웠다. ▽조한주 서울국제고 교사(51·여)=한국사는 학생에게 자국에 대한 인식을 교육하는 것이란 면에서 긍지를 심어줄 수 있는 내용을 강화한 건 장점으로 보였다. 일제강점기를 가르칠 때 아이들이 울분을 토하고 우울해하는데, 우리 역사에 변절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독립을 위해 힘쓴 이가 많다는 걸 보여준 점이 좋았다. 한국에 고통과 종속의 역사만 있는 게 아니라 발전을 위한 노력이 있었단 점을 같이 다룬 건 개선된 대목이다. ▽유=정부가 비판을 최소화하기 위해 좌우의 생각을 같이 넣어 나름대로 균형을 찾으려 애쓴 점은 인정한다. 그런데 경제성장의 긍정적인 면만 너무 부각한 것 같다. 역사는 자부심만 고취시키는 과목이 아니라 잘못된 부분을 명확하게 인식하고 고쳐 나가도록 가르쳐야 한다는 점에서 한계로 보였다. ▽조=미국 영국도 자국 역사책에서 일부러 빼는 부분이 있다. 미국은 사회주의 계통을 생략하고, 영국은 왕실이 아파하는 명예혁명 같은 걸 드러내지 않는다. 왜곡이라기보단 취사선택을 한 것이라고 판단했다.○ 출발부터 잘못된 선택-콘텐츠도 한계 ▽박=그러나 국정 교과서는 한계가 더 많다고 본다. 공개된 필진을 보고 우리 학교 역사 교사들이 다 놀랐다. 현대사 파트에 역사 전공자가 한 명도 없다니, 여론과 전문가의 협조를 얻지 못한 상황에서 너무 빨리 만들려고 한 것 아닌가. ▽유=사회와 역사의 흐름에서 봤을 때 국정이란 건 맞지 않는다. 역사는 팩트의 문제라기보다 팩트를 보는 해석의 문제다. 어렵게 검인정 체제로 왔는데 이를 역행하는 조치였다. ▽조=현대사의 대한민국 수립 부분은 모든 역사 교사가 다 문제로 느낄 것이다. 굉장히 민감한 문제다. 시발점부터 서술이 그렇게 돼버리면 전체를 의심할 수밖에 없다. 교사들도 대한민국 수립이라는 표현이 뉴라이트 학자들의 소수 의견이라고 생각한다. 이 교과서만 가지고 수업을 하긴 힘들 것 같다. ▽박=전체 분량에서 시대별 균형이 깨졌다는 느낌이다. 고대사가 늘어난 반면 조선 후기 설명은 많이 줄었다. 오늘날 영향을 많이 끼친 사건들은 조선 후기 임진왜란 이후부터인데, 임란 이후 사회 경제 발전 과정의 설명이 크게 부족하다. ▽유=서술을 보며 흐름이 뚝뚝 끊긴다는 느낌이 들었다. 예컨대 이승만 정부가 성립됐다고 하고, 바로 헌법에 대한 이야기 나오고, 그 다음 제헌헌법 이야기가 나와 맥락이 이어지지 않는다. 어떻게 해야 학생들이 잘 이해할지 고민을 덜 한 것 같다. ▽안병갑 김해외고 교사(43)=전체적으로 이승만 정부를 띄우고 박정희 정부 이야기를 상당히 길게 다뤘다. 특히 이승만의 정읍 발언에 대한 기술이 상당히 걸렸다. 이승만의 정읍 발언은 남한만의 단독정부 구상을 말한 것으로, 이 때문에 분단을 우려한 좌우합작운동이 전개된 중요한 사안이었다. 그럼에도 마치 북쪽에서 선수를 치니 민족을 위해 행한 발언처럼 호도돼 있다. 분단을 막으려 했던 남북협상을 쓸모없는 행동으로 폄하하고, 제주 4·3사건과 여수·순천사건 역시 단순히 남로당이 일으킨 사건으로 호도한 것처럼 보였다.○ 국정만 가르치긴 곤란 ▽유=역사학계가 좌편향 됐을 거란 생각은 (정부의) 콤플렉스 같다. 지금 학생들은 김일성, 김정일에 관한 글이나 사진을 보여줘도 객관적으로 볼 줄 알기 때문에 아무 문제가 없다. 우리가 중·고등학교 시절엔 김구만 독립운동을 한 줄 알았지만 지금은 사회주의 사상을 받아들인 독립운동가도 많았다는 걸 안다. 그걸 좌편향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런 부분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야말로 역사 왜곡 아닌가. ▽조=역사적 사고력과 판단력, 비판 능력을 키우기 위한 게 역사 교육의 목적이라면 국정 교과서가 더 풍부한 팩트를 담아야 한다고 본다. 지금 내용만으로는 다양한 토론이 어렵다. ▽박=국정 교과서는 만들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그것만 써야 한다’는 생각이다. 역사는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한 것이고 다양한 관점을 열어놓는 게 중요하다. 그런 차원에서 국·검정 혼용이 좋다고 본다. 국정만 고집한다면 논란 부분은 안 가르치든지 교사 차원에서 다른 관점이 있다는 걸 같이 제시해야 할 것 같다.임우선 imsun@donga.com·노지원 기자}
교육부는 이념 편향성 극복, 전문 집필진 확보, 민족정기 고취 등의 이유를 들며 국정 교과서의 우수함을 주장해 왔다. 하지만 공개 이튿날인 29일 진보 진영은 집필진 구성 문제와 우편향 의혹, 박정희 정권 미화가 두드러졌다고 지적했다. 이에 국사편찬위원회는 장문의 해명 자료를 내고 조목조목 반박했다. 진보 진영이 제기한 문제는 크게 △역사 전공자 없는 현대사 집필진 △임시정부 부정하는 ‘대한민국 수립’ 표현 △박정희 정권 미화 △무장 독립 운동 축소 등이다. 우선 위원회는 “집필진의 경우 기존 교과서도 마찬가지로 현대사 집필진은 모두 현대사가 아닌 한국근현대사가 주 전공”이라며 “검정 교과서의 경우 박사급 집필진이 극히 일부에 불과한데 국정 교과서 집필진은 분야별 전문성이나 학문적 성과가 훨씬 뛰어나다”라고 말했다. ‘대한민국 수립’ 표현에 대해서는 “대한민국이 ‘1919년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하였다’는 사실을 분명히 서술했다”라며 “이는 1956년 1차 교육과정부터 2009년 7차 교육과정까지 사용한 용어”라고 밝혔다. 박정희 대통령 미화 논란에 대해선 “공과 과를 분명히 나눠 다뤘다”라고 했다. 위원회는 “분량이 많다는 지적이 있지만 기존 검정에서도 박정희 정부에 대한 서술은 다른 시기보다 많다”라며 “새마을운동 서술은 기존 검정 교과서 수준”이라고 설명했다. 다만 “경제발전 과정에 대한 서술은 장단점을 함께 서술해 기존 교과서보다 다소 늘어났다”라고 밝혔다. 그러나 도면회 대전대 역사문화학과 교수는 “단순히 박정희 찬가라고 보기보다는 개신교 뉴라이트 등 한국 보수계열의 시각을 담아 낸 것”이라며 “앞으로는 교육부가 큰 틀만 제시하고 자유 발행제로 가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4·3항쟁 왜곡 지적에 대해선 “1954년 9월까지 지속된 무력 충돌과 진압 과정에서 많은 무고한 제주도 주민들이 희생됐고 진상 규명 노력의 결과로 특별법이 제정됐음을 밝혔다”라고 강조했다. 한편 국정 교과서 공개 후 교육부의 ‘올바른 역사교과서’ 사이트에는 28일 밤 12시까지 총 342건의 의견이 제출됐다. 박성민 역사교육정상화추진 부단장은 “매일 밤 12시를 기준으로 통계를 집계하는데 어제는 총 4만 명의 방문자가 사이트를 찾았고 국정 교과서는 9만1000번 정도 열람됐다”라며 “접수된 의견은 매일 국사편찬위원회에 전달하고 있으며 마지막까지 최종 집계를 거쳐 현황을 공개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교육부는 현장 검토본은 완성본이 아닌 만큼, 합당한 지적에 대해서는 충분히 수정하겠다는 방침이다. 다만 국정화 자체에 대한 비판이나 대한민국 수립 등 핵심 내용에 대한 이견은 국정 교과서의 근간 자체를 바꾸는 것이어서 반영되기 힘들 것으로 보인다.임우선 기자 imsun@donga.com}

교육부가 교육부 페이스북에 국정교과서 홍보 게시물을 올리면서 잘못된 태극기 그림을 사용해 빈축을 사고 있다. 29일 국민의당 이동섭 의원에 따르면 교육부는 국정교과서가 공개된 28일 교육부 페이스북에 '올바른 역사교과서-잘 만든 역사교과서 이야기 1'이라는 홍보 웹툰을 올리며 태극기 그림을 잘못 그렸다. 웹툰 주인공의 뒷면으로 커다란 태극기를 그리면서 '감'과 '리'의 위치를 뒤바꿔 그린 것. 누리꾼들은 수 백 개의 댓글을 통해 태극기 그림이 잘못됐음을 지적했지만 게시물은 29일 오전 10시가 지난 현재까지도 그대로 방치되고 있다. 이 의원은 "교육부가 태극기 하나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면서 아이들에게 제대로 된 역사를 가르칠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 의문"이라며 "교육부는 역사 교과서를 바꾸면서 태극기까지 바꿨냐"고 반문했다.임우선기자 imsun@donga.com}

교육부는 28일 국정 역사교과서 현장 검토본을 공개하면서 “국민 의견을 청취한 다음 현장 적용 방법을 강구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교육 현장에서는 정부가 국·검정 혼용이나 국정 교과서 채택 1년 연기 등 어느 카드를 고르든 내년도 역사 교육은 제대로 되기 힘들 것이란 지적이 나온다. ○ ‘혼용’ 카드에 출판계 당혹 ‘최순실 국정 농단 사태’로 국정 교과서에 대한 신뢰 기반이 크게 흔들린 상황에서 정부가 꺼낼 가장 유력한 카드로 꼽히는 건 ‘국·검정 교과서 혼용’이다. 그러나 당장 이달 중순까지만 해도 정부가 “오직 국정 교과서만 쓸 것”이란 입장을 분명히 한 터라 검정 역사교과서를 전혀 준비하지 않은 출판계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교과서 제작사인 금성출판사 관계자는 “역사교과서와 관련해 교육부의 어떠한 연락이나 지침도 없었다”며 “올해 쓴 역사교과서를 그대로 다시 써도 된다면야 내년 신학기까지 인쇄는 가능하겠지만, 만약 새 교육과정에 맞춘 역사교과서를 만들라면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할 것”이라고 말했다. 2011년 이후부터 올해까지의 교과서는 ‘2009교육과정’에 따라 제작된 것이지만 내년 중1과 고1부터는 새로운 ‘2015교육과정’에 따른 교과서를 써야 한다. 이에 다른 교과목은 모두 올 한 해 새롭게 제작됐지만 역사교과서만은 국정이 예고돼 있었기에 출판사 차원의 제작이 전혀 이뤄지지 않았다. 출판계 관계자는 “지금은 신학기가 코앞이라 다른 과목 교과서 제작만으로도 정신이 없는 시기”라며 “실무진이 검정 역사교과서 혼용안에 신경을 쓸 여유가 전혀 없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역사 과목에서만 2009버전 교과서를 쓸 수도 없는 상황이다. 교육부 관계자는 “모든 과목이 2015교육과정에 따라 진행되는데 역사만 2009년으로 간다는 건 맞지 않는다”며 “만약 혼용으로 결정 난다면 2015교육과정에 맞는 교과서여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신학기까지 남은 시간을 고려하면 민간 출판사의 새 교과서 제작은 거의 불가능하다. 교육부는 다음 달 23일까지 국정 교과서의 최종 운용방안을 결정한다는 입장인데, 만약 검정 교과서를 혼용하려면 관련 고시를 수정해야 한다. 고시 수정을 위해서는 20일 전에 행정예고를 해야 하고, 관보 게재에도 일주일 정도가 소요된다. 일선 학교의 교과서 검토·선정 및 출판사의 인쇄·배포에 최소 두 달이 걸리는 걸 감안하면 신학기에 맞추기는 무리라는 지적이 있다.○ 국정 교과서 강행, “현 중3 최대 피해자 될 것” 만약 정부가 당초 입장대로 국정 교과서만을 사용하기로 하면 최종본은 내년 2월 인쇄돼 중고교에 배포된다. 그러나 국정 교과서에 대한 반대 여론이 컸던 만큼 학교 현장에서 1년 내내 혼란이 일 것이란 우려가 나온다. 실제 서울시교육청은 올 4월부터 국정 교과서에 대응할 교사용 보조자료 집필을 추진해 최근 1차 원고본을 완성하고 검토에 들어갔다. 이 교사용 자료는 시대별로 논란이 되는 10개 주제를 제시하고, 각각의 주제마다 다양한 역사관과 연구 결과, 그에 따른 사료를 정리해 보여주는 형태로 구성됐다. 개별 주제의 말미에는 교사들이 참고할 수업안과 수업 예시를 첨부해 해당 자료를 활용한 토론식 수업이 가능토록 했다. 시교육청 관계자는 “수정·보완 작업을 거쳐 내년 5월 학교 현장에 배포할 예정”이라며 “‘한 가지 정답’을 요구하는 국정 교과서와 다양한 견해를 제시하는 보조 자료가 공존하게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토론 수업이나 수행평가에서는 다양한 사관을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학생이 좋은 평가를 받겠지만, 정작 내신 필기시험이나 수능시험에서는 교과서의 내용만 정답이 되는 모순이 발생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논쟁이 커지자 역사를 수업 과목으로 편성하지 않는 학교도 크게 늘었다. 시교육청에 따르면 서울시내 384개 중학교 가운데 내년 중1 시간표에 역사를 넣은 학교는 19곳에 불과하다. 시교육청은 “30일 19개 학교장 간담회를 열어 이 학교들도 모두 역사 수업을 미편성하도록 제안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이에 앞서 광주시교육청 관내 중학교들도 대부분 역사 수업 편성을 중2·3학년으로 미뤘다. 교육계 관계자는 “1년만 버티면 대선이고, 정권이 바뀌면 국정 교과서는 곧장 폐기될 것이란 복안이 깔린 것”이라고 해석했다.임우선 imsun@donga.com·최예나 기자}

이화여대가 최순실 씨(60·구속 기소)의 딸 정유라 씨(20)를 입학시킨 뒤 정부 지원 사업과 연구 프로젝트를 무더기로 따낸 과정에 대해 검찰이 본격적인 수사에 착수한 것으로 22일 확인됐다. 검찰은 정 씨의 부정 입학과 학사관리 특혜 비리에 대한 대대적인 수사를 이어가는 한편 정 씨를 둘러싼 다른 갈래의 의혹들도 수사를 시작했다. 검찰 특별수사본부(본부장 이영렬 서울중앙지검장)는 이날 최경희 전 이화여대 총장 자택을 포함해 이화여대 총장실과 기획처, 입학처 등 사무실 20여 곳을 압수수색했다. 남궁곤 전 입학처장과 김경숙 전 신산업융합대학장의 주거지도 압수수색했다. 최 전 총장은 출국 금지돼 있다. 압수수색 결과 검찰은 이화여대의 교육부 지원 사업 관련 자료를 확보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화여대는 박근혜 정부에서 신설된 교육부 재정 지원 사업에 모두 선정된 유일한 사립대다. 관련 사업은 특성화(CK), 프라임(PRIME·산업연계교육 활성화 선도대학), 코어(CORE·대학 인문역량 강화), 평생교육단과대학, 여성공학인재양성, 고교정상화기여대학 지원 사업 등 6개다. 이화여대는 올해 교육부의 주요 재정 지원 사업 9개 중 8개를 따냈다. 전국 대학 중 정부 지원 사업 수가 가장 많다. 올 한 해 지원 금액은 약 178억 원에 이른다. 검찰은 필요하면 교육부 관계자들도 조사할 계획이다. 이화여대 안팎에서는 대학이 정부 고위층과 연을 맺기 위해 이들의 자녀와 졸업생에게 학사 특혜를 제공해 왔다는 뒷말이 끊이지 않았다. 학부모 초청행사 때 부모의 명함을 확보해 만든 연락망을 가동해 유력 집안 자제들에게 특혜를 줬다는 의혹도 일각에서 제기한다. 이화여대 압수수색은 최순실 씨를 강하게 압박하기 위한 비장의 카드라는 분석이 있다. 최 씨의 ‘아킬레스건’인 딸과 관련한 수사를 본격화해 최 씨의 입을 열겠다는 것이다. 최 씨는 조사를 받는 중 딸에 대한 걱정을 자주 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검찰은 조만간 정유라 씨를 귀국시켜 조사받게 할 계획이다. 정 씨가 삼성에서 거액을 지원받아 독일에서 전지훈련을 하게 된 부분과 KEB하나은행에서 수억 원의 특혜 대출을 받은 의혹도 함께 수사할 것으로 전망된다. 정 씨는 고3 시절 총 6개 대학에 수시 지원을 했으며 이화여대와 한국체대에서만 합격 통보를 받은 사실도 확인됐다. 이날 정 씨의 고3 담임 정모 씨는 서울시의회 교육위원회의 청담고 행정감사장에 증인으로 참석해 “정 씨가 이화여대, 고려대, 연세대, 중앙대, 한양대, 한국체대에 지원했는데 이화여대와 한국체대만 합격했다”고 말했다. 앞서 교육부는 이화여대가 정 씨에게 입학 및 학사관리에서 특혜를 준 사실을 감사를 통해 밝혀냈다. 정 씨는 2014년 10월 18일 체육특기자 입학 면접에 금메달을 가져가 면접위원들에게 보이는가 하면, 일부 면접위원은 서류평가에서 정 씨보다 좋은 점수를 받았던 수험생 2명이 낮은 점수를 받도록 유도했다. 입학 후에는 이화여대 교수들이 정 씨의 과제물을 대신 해주고 학교에 나오지 않은 정 씨의 출석을 인정해 주며 조직적으로 부당한 학사관리를 해줬다. 정 씨에게 특혜를 제공하는 데 앞장선 두 명의 교수가 총 9건의 연구 과제를 따낸 것도 논란거리다. 교육부는 감사 결과 발표에서 연구 과제 선정 절차에서 비리를 발견하지 못했다고 했지만 검찰은 이 의혹도 집중해 수사할 방침이다. 한편 검찰은 “김기춘 전 대통령비서실장이 인사 검증을 위해 임명 이전에 송성각 전 한국콘텐츠진흥원장을 만난 걸로 안다”는 진술을 확보했다. 검찰은 차관급 인사 검증을 위해 대통령비서실장이 직접 나선 사실에 주목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최 씨의 부탁을 받은 박근혜 대통령이 김 전 실장에게 각별히 지시했거나, 최 씨가 직접 김 전 실장에게 얘기했을 가능성이 있는 대목이기 때문이다. 검찰은 이날 현명관 한국마사회장(75)을 참고인 신분으로 소환해 조사했다. 마사회는 대한승마협회와 함께 2020년 도쿄 올림픽을 겨냥해 지난해 10월 중장기 로드맵을 작성했다. 회장사인 삼성그룹이 4년 동안 186억 원을 지원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는 이 로드맵은 정유라 씨를 단독으로 지원하기 위해 만들어진 계획이라는 의혹이 있다.김준일 jikim@donga.com·배석준·임우선 기자}
교육부가 28일 역사 국정교과서 현장 검토본 공개 강행을 예고한 가운데 전국 시도교육청과 교육단체들을 중심으로 공개적인 반발이 일고 있다. 조희연 서울시교육감은 22일 성명을 내고 "교육부는 국정교과서 검토본 공개 강행을 중지하라"며 "그렇지 않으면 서울시교육청은 국정화 시행에 협력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조 교육감은 "시대착오적인 역사교과서 국정화 정책을 폐기해야 마땅하지만, 교육부는 국정교과서 현장검토본을 예정대로 28일 공개하겠다고 발표했다"며 "현 정부의 정당성이 송두리째 뒤흔들린 시국도 아랑곳하지 않고 기계처럼 행정업무를 계속 수행하겠다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이에 앞서 이청연 인천교육감과 이재정 경기교육감, 김승환 전북교육감, 민병희 강원교육감, 김지철 충남교육감, 김병우 충북교육감, 최교진 세종교육감, 박종훈 경남교육감도 성명을 내고 국정교과서 중단을 촉구했다. 교사단체인 한국교총도 "친일·독재 미화, 건국절 제정 등에 대해 교육현장 여론과 배치되는 내용을 담은 역사교과서는 수용할 수 없다"는 의견을 내놨다. 교육부가 국정교과서 발표를 추진하자 교육계는 내년 3월 교육현장에서 극심한 혼란이 일 것을 우려하고 있다. 서울시교육청 관계자는 "학교와 교사는 물론 학생과 학부모 누구도 이 교과서의 정당성을 인정하지 않을 것"이라며 "하지만 행정적 한계로 인해 교과서 배포 자체를 거부할 수는 없어 고민"이라고 말했다. 국정교과서 거부로 학생들의 학습권이 침해되거나, 추후 해당 내용이 수능에 나오면 교육청으로서는 상당한 부담이 된다는 설명이다. 국정교과서를 저지할 현실적 카드가 마땅치 않은 상황에서 시교육청은 일단 교육부의 국정교과서 발표 강행을 자체를 최대한 막아보겠다는 생각이다. 교과서가 예정대로 공개되면 △서울시 교사들의 역사교과서 현장검토본 검토 참여를 거부하고 △12월 초 쯤 국정교과서를 사용하게 될 220여개 관내 학교 및 서울지역 교사, 학생, 학부모가 대거 참여하는 국정교과서 반대 심포지움을 개최할 계획이다. 또 역사교과서를 보완할 교사용 연구자료의 개발 및 배포도 준비 중이다. 조 교육감은 "국정교과서를 둘러싸고 교육현장에서 얼마나 큰 혼란이 일지 명약관화하다"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정화를 강행하겠다는 교육부의 태도는 지극히 비교육적"이라고 지적했다.임우선 기자 imsun@donga.com}

예상을 뛰어넘은 대학수학능력시험의 ‘불수능’ 파장이 크다. 지난 주말 주요 대학 논술고사장은 수능 부진을 수시 합격으로 만회해 보려는 수험생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20일 대학가에 따르면 수능 뒤 첫 주말이었던 19일에는 서강대, 성균관대, 세종대, 숙명여대, 한양대, 경희대, 단국대, 서울여대, 숭실대, 한국항공대, 가톨릭대, 울산대 등 총 12개 대학에서 논술고사가 치러졌다. 이날은 수능 뒤 잇달아 예정된 논술고사 일정 중 가장 많은 대학이 몰려 있던 날이었다. 성균관대 논술에 응시한 이모 양은 “수능 점수가 기대만큼 나오지 않아 꼭 논술에서 승부를 봐야 한다는 각오”라며 “정시만 노리던 친구들도 뒤늦게 논술에 다걸기(올인)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날 성균관대 주변은 논술고사를 보러 온 학부모와 학생들로 크게 북적였다. 자녀가 세종대에서 논술고사를 치른 학부모 김모 씨는 “수능 가채점 점수가 등급 컷(수능 최저학력기준)을 맞추기에 아슬아슬한 상황이어서 더욱 긴장이 된다”며 “정시는 재수생이 강세일 듯해 남은 논술을 모두 볼 계획”이라고 말했다. 불수능으로 이번 수능의 변별력이 커지면서 뜻밖의 수능 고득점이 예상되는 상위권 학생들 중에서는 일명 ‘수시납치’를 피하기 위해 논술고사를 보지 않는 경향도 나타났다. 수험생 박모 양은 “안정권인 서울 중상위권 대학을 위주로 수시를 썼는데 수능 점수를 보니 ‘SKY’ 대학이 충분히 가능할 것 같아 수시가 안 되길 바라고 있다”고 말했다. 또 의·치의예과를 비롯한 일부 상위권 학과 논술고사장에는 수능 등급 컷을 맞추지 못할 것을 우려한 결시생이 늘어 빈자리가 속출했다. 주말을 전후해 주요 입시기관들이 내놓은 대학·학과별 정시 합격 예상 점수들 간의 편차가 크게는 10점에 달할 정도로 큰 것도 수험생들과 진학 지도를 하는 교사들에게 어려움을 주고 있다. 한 입시기관 관계자는 “특히 중·하위권 대학·학과의 경우 정확한 합격 컷 예측이 더욱 어렵다”며 “대학별 반영비율과 표준점수 백분위 등을 고려해 수험생 각자의 상황에 맞는 치밀한 전략을 짜야 한다”고 말했다. 내년부터 수능 영어영역에 절대평가가 도입되는 게 재수를 결심하는 데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의견도 나왔다. 임성호 종로학원하늘교육 대표이사는 “수시 선발인원이 전체의 70% 이상이라 요즘은 재수생도 수시에 많이 지원한다”며 “내년에 영어가 쉬워지면 수능 최저학력기준을 맞추기가 쉬워지므로 심리적으로 재수를 만만하게 생각할 수 있다”고 말했다. 임우선 imsun@donga.com·최예나 기자}

#.1반찬가게집 막내,세계 최고 셰프를 꿈꾸다#.2제 이름은 민요한. 대한민국의 스무 살 청년입니다.작년 이맘때만 해도 서울 광양고 교복을 입고 다녔던 제가지금은 세계 3대 요리학교이자 '요리계의 하버드대'로 불리는CIA(The Culinary Institute of America)에 합격해 미국 땅을 밟고 있습니다.그럼 지금부터 제 이야기를 들려드릴게요.#.3유년 시절 우리 가족은 거실이라고 해봐야두 평 정도의 '방 같은 집'에서 살았습니다.부모님은 종일 반찬가게에서 손수 만든 반찬을 팔면서 일을 하셨어요.낮에 집에 있는 식구라곤 누나와 저 둘뿐이어서 제가 밥도 직접 해 먹었습니다.#.4전교생 300명 중 280등 언저리의 '꼴통' 고3이었던 저는다행이도 요리를 매우 좋아해서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꿈은 늘 요리사였죠.흔한 국영수 학원 한 번 안 다닌 저는학교에서 돌아온 뒤 긴 하루를 그렇게 요리 세계에 빠져 지냈어요.#.5부모님은 그런 저를 인정해주시고, 좋아하는 요리를 응원해 주셨습니다.중학교 때는 좁디좁은 집의 방 하나를 '요리방'으로 만들어 주셨어요.조리대를 만들어 주시고 조리도구를 챙겨 주시기도 했었죠.#.6제가 조리사 자격증에 도전한 건 중1 때였어요.음식을 만드는 건 누구보다 자신이 있었지만, 이론 공부는 정말 큰 난관이었죠.무려 7번이나 이론 시험에 떨어졌고, 8번째 도전에서야 실기 응시 자격이 주어졌습니다.중2 때 제 요리방 벽에 걸린 양식 조리사 자격증을 시작으로 총 5개의 자격증을 모두 획득했어요.#.7고3이 가까워질수록 마음속엔 말 못할 꿈이 커져갔어요.바로 세계 최고의 요리 명문 학교인 미국 CIA를 경험하고 싶다는'유학의 꿈'이 바로 그것이었죠.하지만 우리 집은 가난했고, 제 영어 성적은 항상 20점대일 때가 많았죠.#.8유학 결심을 굳힌 고2 때 처음으로 영어책이 책상에 놓였습니다.항상 제 손에는 늘 작은 영어 단어장이 쥐여 있었고,고3 1학기가 끝나갈 무렵 영어 성적표에는 80점대가 찍혀있었어요.내가 다닌 광양고의 영어선생님은"수시로 찾아와 물어봐주니 선생님이 더 좋다. 언제든 물어보고 꼭 원하는 셰프가 되도록 해라"라고 말씀해 주셨어요.#.92015년 여름 그간의 요리 경력과 자기소개서를 써서 CIA로 보냈습니다.정리하다 보니 뜻밖에 경력인 줄도 몰랐던 봉사활동이 취업과 동일한 경력으로 인정됐어요.중3 때부터 3년간 매주 구청 카페에서 지역아동센터 아이들에게제빵과 바리스타 기술을 가르쳐준 게 400시간이나 된 덕분이죠.#.10가을이 지나고 CIA로부터 한 통의 우편물이 왔습니다. 바로 합격통지서였죠.단, 영어실력이 부족하니 연말까지 회화과정을 이수해 학교가 요구하는 수준에이르러야 한다는 조건이었어요.어쨌든 그토록 갈망해온 CIA의 문이 진짜로 눈앞에 열렸던 것이죠.#.11기쁨도 잠시, 그해 겨울 나와 아버지는 인생에서 가장 어렵고 가슴 졸이는 관문을마주했어요. 바로 CIA 유학을 위한 미국 비자(F1) 취득이 그것이었죠.F1 비자를 따는 데 가장 중요한 건 '부모의 경제력'이라고 했어요.하지만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아 온 부모님의 통장은 항상 넉넉한 적이 없었어요.#.12비자 서류를 준비하며 아버지는 "지금처럼 내 인생이 후회된 적이 없다"며 가슴을 치셨어요."요한아. 나 때문에 네가 미국에 못 가면 어떻게 하니.나의 가난으로 너의 꿈이 꺾이고 나의 가난이 너에게 대물림될까 봐 나는 너무 가슴이 아프다."이렇게 말씀하시며 아버지 눈에 눈물이 고였습니다.#.13미국대사관 비자 인터뷰 당일, 순서를 기다리는 내 두 손에는 땀이 고였습니다.드디어 내 차례가 됐을 때 나는 어눌한 영어지만 면접관에게 나의 마음을 전하기 시작했어요."우리 집은 가난해요.하지만 제겐 꿈과 비전이 있어요. 제가 미국에 가서 온 힘을 다해 공부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세요."#.14면접관은 이렇게 말했어요."축하합니다. 세계적인 셰프가 돼서 미국에서 만납시다."대사관에서 나와 곧바로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죠.수화기 너머 아버지는 엉엉 울고 계셨습니다.#.154월 25일. 저는 미국 샌프란시스코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습니다.요즘 가장 행복한 순간은 샌프란시스코의 시장을 돌아볼 때입니다.CIA에 가면 요리사의 꿈을 가진 세계 여러 곳의 친구들을 만나여러 나라를 여행하고 새로운 요리에 계속 도전하고 싶습니다.#.16아버지의 반찬가게와 나의 주방에는오늘도 16시간의 시차를 두고 불이 켜집니다.나는 꿈을 위해, 아버지는 그런 나를 위해 오늘도 함께 불을 켭니다.원본: 임우선 기자 기획제작: 김재형 기자, 김수경 인턴}

서울 광진구 자양동 자양골목전통시장. 입구에 들어서면 구수한 참기름 냄새와 흥정하는 할머니들의 목소리가 시끌벅적한 곳이다. 그 시장 가장 안쪽 깊숙한 곳에 아버지의 조그마한 반찬가게가 있다. 5평 남짓한 그곳에서 아버지와 어머니는 종일 손님들에게 손수 만든 반찬을 판다. 김치, 나물, 조림 등 모두 맛깔스러운 반찬이지만 그중에서도 닭볶음탕과 매콤한 오징어채무침이 가게의 간판 메뉴다. 미국에 온 뒤 가장 생각나는 엄마표 반찬들…. 엄마 아빠 그리고 누나는 잘 지내고 있을까. 샌프란시스코의 바다를 보며 가게 풍경을 떠올릴 때면 이곳에 와 있다는 게 더 꿈처럼 느껴진다. 작년 이맘때만 해도 나는 서울 광양고 교복을 입고 학교와 사글세 집을 오갔다. 전교생 300명 중 280등 언저리의 ‘꼴통’ 고3이었던 내가, 한때 영어 점수가 20점에 불과했던 내가, 세계 3대 요리학교이자 ‘요리계의 하버드대’로 불리는 CIA(The Culinary Institute of America)에 합격해 이렇게 미국 땅을 밟다니. 지금부터 나의 오랜 꿈과 그 꿈이 이끈 삶, 그리고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가 시작된다.방 같은 집에서 키운 요리의 꿈 내 이름은 민요한. 대한민국의 스무 살 청년이다. 기억 속 유년 시절 우리 가족은 아버지가 하시던 식당 옆 작은 가건물에 살았다. 거실이라고 해봐야 두 평 정도 됐을까. 그 ‘방 같은 집’에서 네 식구가 살았다. 초등학생 시절 부모님은 늘 새벽 4시, 5시에 집을 나가 밤 10시, 11시가 돼야 돌아오셨다. 잘은 모르지만 돈을 벌기 위해 두 분이 하루 종일 이런저런 일을 하셨던 것 같다. 어머니는 늘 지쳐 보였다. 어린 눈에도 ‘우리 엄마가 너무 힘들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낮에 집에 있는 식구라곤 누나와 나 둘뿐이어서 5학년쯤부터는 밥도 직접 해 먹었다. 다행인 것은 내가 무엇보다 요리를 좋아했다는 거다. 왠지 모르지만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내 꿈은 늘 요리사였다. 다른 길은 생각조차 한 적이 없다. 라면과 인스턴트를 싫어했던 나는 한 끼를 먹어도 내 손으로 만들어 먹었다. 당시 막 태동하던 인터넷 요리 콘텐츠는 나를 요리의 세계로 이끌었다. 네이버의 유명 요리 블로그와 ‘키친’ 코너를 보면서 이런저런 요리를 따라했다. 머리털 나고 지금껏 그 흔한 국영수 학원 한 번 안 다닌 나는 학교에서 돌아온 뒤 긴 하루를 그렇게 요리 세계에 빠져 지냈다. 국영수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난 아주 어릴 적부터 공부에 흥미도, 소질도 없었다. 나는 내가 학업에 전혀 관심이 없다는 걸 일찍이 파악했다. 부모님도 그런 나를 인정하셨다. 그 대신 내가 잘하고 좋아하는 요리를 응원해 주셨다. 중학교 때는 좁디좁은 집의 방 하나를 ‘요리방’으로 만들어 주셨다. 아버지는 한 달 동안 청계천을 오가며 자재를 사다 직접 조리대를 만들어 주시고 조리도구를 챙겨 주시기도 했다. 내가 조리사 자격증에 도전한 건 중1 때다. 음식을 만드는 건 누구보다 자신 있었지만 이론 공부는 정말 큰 난관이었다. 자격증을 따려면 이론부터 통과해야 하는데, 아무리 책을 봐도 이론을 통과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한 번, 두 번, 세 번, 네 번, 다섯 번, 여섯 번, 일곱 번…. 매번 열심히 공부했는데도 무려 7번이나 이론 시험에 떨어졌다. 실기를 3, 4번 떨어졌다는 사람은 본 적이 있어도 이론 시험을 7번 떨어졌단 사람은 본 일이 없었다. 7cm 두께의 조리사 이론 책이 7000m 산보다 높게 느껴졌다. 실기 응시 자격은 8번째 도전에서야 주어졌다. 중2 때 내 요리방 벽에 걸린 양식 조리사 자격증을 시작으로, 중3에 한식, 고등학교에 들어와 중식, 일식, 바리스타 자격증까지 총 5개의 자격증을 모두 획득했다.여행과 함께 자란 미국 유학의 꿈 밤에 잠자리에 들면 가슴이 쿵쾅거렸다. 당장이라도 내 왼쪽 가슴에 ‘수석 셰프 민요한’이라는 명찰이 붙을 것 같아서였다. 하지만 고3이 가까워질수록 마음속엔 부모님께 말 못할 꿈이 커졌다. 셰프라고 불리기에 앞서 세계 최고의 요리 명문 학교인 미국 CIA를 경험하고 싶다는 ‘유학의 꿈’이 바로 그것이었다. 미국 유학? 누가 들어도 코웃음 칠 얘기였다. 첫째, 부모님 통장 잔액은 생활비 정도 말고 여윳돈이라곤 없었다. 둘째, 다른 과목도 그렇지만 내 영어 성적은 20점대일 때가 많았다. 하지만 나는 꼭 가고 싶었고 가서 잘할 자신이 있었다. 우리 집은 어릴 때부터 어려웠지만 나는 초등학교 4학년 때 캄보디아에 다녀온 적이 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부모님의 영향으로 교회 봉사단을 따라갔던 것이다. 그 후 봉사단을 따라 수차례 해외에 갔다. 중학교 2학년 때는 부모님께 선언했다. “혼자 여행을 가고 싶어요. 도와주세요.” 어머니는 가만히 나를 바라보시더니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래. 요한아. 한 번쯤은 광야로 나가야지.” 그렇게 나는 태국을 시작으로 미국, 중국, 라오스, 필리핀 등 15번 정도를 홀로 여행했다. 어머니는 늘 “지금 당장은 돈이 없지만 네가 떠날 때까지 만들어 보마”라고 말씀하셨고 어떻게든 그 약속을 지키셨다. 유학 결심을 굳힌 고2 때 처음으로 영어책이 책상에 놓였다. 그리고 고2 때부터 고3 때까지, 1교시부터 7교시까지 하루 종일 오직 영어책만 팠다. 첫날 단어 300개를 외우고 그 다음 날 전날 단어를 합쳐 600개, 그 다음 날 다시 900개를 쌓아가는 식으로 어휘를 늘렸다. 쉬는 시간에도 등하굣길에도 내 손에는 늘 작은 영어 단어장이 쥐여 있었다. 내가 다닌 광양고의 영어선생님은 “수시로 찾아와 물어봐주니 선생님이 더 좋다. 언제든 물어보고 꼭 원하는 셰프가 되도록 해라”라고 말씀해 주셨다. 고3 1학기가 끝나갈 무렵 영어 성적표에는 80점대가 찍혔다. 내 인생에서 전에는 볼 수 없었던 점수였다. 영어선생님 권유로 요리대회에 출전해 1등을 하고 TV에 출연하는 행운도 얻었다. 선생님이 대회 광고를 보고 권한 보쌈 요리대회에 출전해 대상을 받은 후 EBS ‘학생 요리왕’ 선발대회를 비롯해 엉겁결에 케이블 요리채널이 주관하는 요리 서바이벌 ‘마스터 셰프’ 프로그램까지 출연했다.부자(父子)의 꿈을 모아 CIA로 세계적인 요리사가 되겠단 꿈은 날로 커졌다. 고3 때 그토록 만나고 싶던 스페인 출신의 미슐랭 3스타 셰프인 조르디 로카의 솔로 디너가 집에서 멀지 많은 쉐라톤워커힐 호텔에서 열린다는 소식을 들었다. 포스터에 적힌 입장료(식사 비용)는 60만 원. 한숨을 내쉬고 있을 때 아버지가 봉투를 내밀었다. “요한아. 세어 봐. 아빠가 은행에 가서 찾아온 거야.” 1만 원권 60장이었다. 아버지는 말씀하셨다. “요한아. 이걸로 가고 싶은 거 예약해. 이 돈이 아빠에게 어떤 돈인 줄 알지?” 그날 밤 나는 그곳에서 아름답고 향기롭고 우아한 세계를 봤다. 같은 광진구인데 우리가 사는 곳과 전혀 다른 세상이 있었다. 그 세상을 만드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2015년 여름 그간의 요리 경력과 자기소개서를 써서 CIA로 보냈다. 정리하다 보니 뜻밖에 경력인 줄도 몰랐던 봉사활동이 취업과 동일한 경력으로 인정됐다. 중3 때부터 3년간 매주 구청 카페에서 지역아동센터 아이들에게 제빵과 바리스타 기술을 가르쳐준 게 400시간이나 된 덕분이었다. 가을이 지나고 찬 바람이 불 무렵, CIA로부터 한 통의 우편물이 왔다. 합격통지서였다. 단, 영어실력이 아직은 부족하니 연말까지 회화과정을 이수해 학교가 요구하는 수준에 이르러야 한다는 조건이었다. 어쨌든 그토록 갈망해온 CIA의 문이 진짜로 눈앞에 열린 것이다.간절함이 열어준 미국 비자의 문 기쁨도 잠시, 그해 겨울 나와 아버지는 인생에서 가장 어렵고 가슴 졸이는 관문을 마주했다. 바로 CIA 유학을 위한 미국 비자(F1) 취득이 그것이었다. 사람들은 입을 모아 “F1 비자를 따는 데 가장 중요한 건 ‘부모의 경제력’”이라고 했다. 통장에 1년 이상 3000만 원이 넘는 잔액이 있어야 하고, 제때 착실히 세금을 내 왔다는 증명도 필요하다고 했다. 하지만 이 중 우리 부자가 가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아 온 아버지 통장에는 단 한 번도 3000만 원이 넘는 돈이 들어있은 적이 없다. 세금도 열에 아홉은 기한에 맞춰 내지 못했다. 장사가 안 되면 학교 급식비조차 제때 내지 못한 나였다. 비자 서류를 준비하며 아버지는 “지금처럼 내 인생이 후회된 적이 없다”며 가슴을 치셨다. “요한아. 나 때문에 네가 미국에 못 가면 어떻게 하니. 나의 가난으로 너의 꿈이 꺾이고 나의 가난이 너에게 대물림될까 봐 나는 너무 가슴이 아프다.” 아버지 눈에 눈물이 고였다. 아버지는 비자 심사를 앞두고 한 달 이상을 하루 종일 단내 나게 구청과 은행, 지인들을 찾아 뛰며 조건을 하나둘 맞춰 나갔다. 미국대사관 비자 인터뷰 당일, 순서를 기다리는 내 두 손에는 땀이 고였다. 앞서 인터뷰 한 12명이 줄줄이 비자 거부 통보를 받고 고개를 숙이며 나왔다. 심장이 요동쳤다. 나는 꼭 가야 하는데, 정말 가야 하는데…. 드디어 내 차례가 됐을 때 나는 어눌한 영어지만 면접관에게 나의 절실한 마음을 전하기 시작했다. “우리 집은 가난해요. 하지만 제겐 꿈과 비전이 있어요. 제가 미국에 가서 온 힘을 다해 공부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세요.” 면접관은 나의 눈을 응시하며 여러 질문을 던진 뒤 이렇게 말했다. “축하합니다. 세계적인 셰프가 돼서 미국에서 만납시다.” 대사관에서 나와 곧바로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빠! 패스했어! 패스했어!” 수화기 너머 아버지는 엉엉 울고 계셨다.세계를 누비는 미래를 그리며 4월 25일. 나는 미국 샌프란시스코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내년 1월 시작하는 CIA 개강 전까지 외국인을 위한 영어교육과정(ESL·English as a Second Language) 수준을 12단계까지 끌어올려야 했다. 미국에 처음 왔을 땐 5단계 수준이었는데 요즘 나는 11단계 수업을 듣는다. 이달 평가 시험을 잘 보면 12월엔 최종 12단계 반 수업을 듣게 되고, 그러면 뉴욕 CIA 신입생이 된다. 요즘 가장 행복한 순간은 학원 수업을 마치고 샌프란시스코의 시장을 돌아볼 때다. 이곳엔 정말 전 세계의 모든 식재료가 다 모여 있다. 태국 요리 재료부터 이슬람 요리, 미국 가정식 재료에 이르기까지 태어나서 한 번도 보지 못한 재료를 맛보고 요리해 보는 건 정말 행복한 일이다. 혼자 살지만 숙소의 공용 주방에서 내가 매일 저녁 만들어내는 요리는 8인분. ESL을 함께 듣는 친구들로부터 매일 한 명당 5달러의 재료비를 받고 반 친구들을 위한 저녁을 만든다. 친구들은 사먹는 것보다 싼값에 맛좋은 요리를 먹을 수 있고, 나는 돈 한 푼 쓰지 않고 이런저런 식재료로 다양한 요리를 만들어 볼 수 있으니 일석이조다. 중국, 일본, 태국 등 세계 각지에서 온 친구들에게 맛 평가를 받을 수 있고, 1달러씩 팁도 챙길 수 있어 재미가 쏠쏠하다. CIA에 가면 요리사의 꿈을 가진 세계 여러 곳의 친구들을 만나 여러 나라를 여행하고 새로운 요리에 계속 도전하고 싶다. 아버지의 반찬가게와 나의 주방에는 오늘도 16시간의 시차를 두고 불이 켜진다. 나는 꿈을 위해, 아버지는 그런 나를 위해 오늘도 함께 불을 켠다.임우선기자 imsun@donga.com}

《 대학수학능력시험을 마친 수험생들은 이제 정확히 가채점을 해보고 이 점수를 고려해 본인에게 가장 유리한 입시 전략을 짜야 한다. 가채점 결과가 예상보다 높게 나와 정시모집으로 수시에서 쓴 대학보다 상위권 대학에 갈 수 있다고 판단되면 남은 수시전형은 진행하지 않는 게 낫다. 반대로 가채점 점수가 기대보다 낮으면 수능 점수가 결정적 영향을 미치는 정시에 도전하기보다 앞서 지원한 수시모집의 남은 전형에 최선을 다하는 게 좋다. 안연근 잠실여고 교사는 “이번 수능의 특징은 9월 모의평가와 비슷하다는 것”이라며 “9월 모의평가보다 아주 잘 봤다는 자신감이 들면 정시 지원을 위해 대학별 고사를 포기할 수 있지만 비슷한 수준이라고 생각되면 대학별 논술·면접고사에 응시하는 게 옳다고 본다”고 말했다. 》 ○ 9월 모의평가보다 ‘대박’이면 정시 도전 한국대학교육협의회에 따르면 2017학년도 정시모집에서는 전체 대입 모집 인원의 29.4%인 10만3145명을 선발한다. 지난해 정시 선발 비중이 전체의 32.5%였던 것과 비교하면 문이 다소 좁아졌다. 정시모집의 87.6%는 수능 위주 전형으로, 학생부 성적을 아예 반영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수능 고득점자에게 유리하다. 올해는 국어, 수학, 영어의 난도가 전체적으로 높았던 만큼 전 영역에서 골고루 득점한 학생이 정시에서 유리할 것으로 전망됐다. 안 교사는 “보통은 가채점 원점수를 기준으로 진학 상담을 하는데, 대입에서는 원점수를 쓰지 않는다”며 “12월 7일 발표될 표준점수 백분위 위주로 지원 전략을 세워야 한다”고 조언했다. 가채점 점수를 활용해 이를 최소 주요 입시기관 3, 4곳의 등급컷 및 백분위 점수와 꼼꼼히 비교해 보고, 이를 다시 대학별 환산점수로 변환해 보면서 지원 가능한 대학을 찾아 목록을 만들어 두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수능 총점이 같더라도 대학에서 반영하는 영역별 가중치나 가산점, 활용 지표 등에 따라 최종 반영 점수가 달라진다. 이만기 유웨이중앙교육 평가연구소장은 “정시는 0.1점 차가 당락을 가르는 치밀한 싸움”이라며 “사실상 전략의 싸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만큼 냉정하게 자신의 점수를 분석하고 대학별 입시 요강을 꼼꼼히 분석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수시모집 합격자는 등록 의사와 관계없이 정시 및 추가 모집에 지원해서는 안 된다. 또 정시모집 지원은 모집군별로 1개 대학에만 지원할 수 있다. ○ 점수 낮다면 논술·면접 준비에 전력 정시보다 수시에 집중하겠다고 판단한 수험생은 수능 후 페이스를 잃지 않고 다음 전형을 준비하는 게 중요하다. 임성호 종로학원하늘교육 대표이사는 “수능을 본 날은 그냥 모의고사를 본 날이라고 생각해야 빨리 마음을 다잡고 논술과 면접을 준비할 수 있다”며 “설령 성적이 기대만큼 나오지 않았다고 해도 지나친 비관이나 음주는 금물”이라고 말했다. 당장 수능 직후인 19일부터 주요 대학의 수시 논술 및 면접전형이 잇달아 치러진다. 수시 논술 전형은 학생부의 실질 반영 비율이 낮고 논술의 영향력이 크기 때문에 학생부 성적이 낮은 재학생이나 재수생이 도전했을 때 유리한 전형이다. 각 대학의 홈페이지에는 △전년도 기출 문제 △2017학년도 논술 가이드북 △올해 실시된 논술 모의고사 문제 동영상 특강 등 각종 자료가 실려 있어 이를 챙겨 보는 것은 기본이다. 일반적으로 각 대학의 논술 가이드북에는 2017학년도 논술고사의 방향과 준비 방법, 2017학년도 논술 모의고사 문제의 출제 의도와 우수 답안 분석 등이 계열별로 정리돼 있어 유용하다. 특히 모의 논술고사 출제진이 실제 논술고사 출제진이 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모의고사 문제는 꼭 풀어봐야 한다. 이와 함께 수험생이 눈여겨볼 자료는 ‘2016학년도 대학별고사 선행학습 영향 평가서’다. 이 자료에는 △전년도 출제 문항에 대한 고교 교육과정 연계성 △출제 의도 및 특징 △문항 및 제시문 출제 근거 △예시 답안 및 답안 분석 등이 실려 있어 반드시 살펴봐야 한다. 김영일교육컨설팅의 조미정 교육연구소장은 “논술에 대비할 때는 논술 문항의 답안을 머릿속에서만 구상하지 말고 실제 시험을 보는 것처럼 대학별 시험 시간과 글자 수에 맞춰 꾸준히 답안 작성 연습을 반복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이영덕 대성학력개발연구소장은 “수시에서도 많은 대학이 수능 성적의 9등급을 최저 학력 기준으로 활용한다”며 “논술과 면접 등 남은 전형이 모두 끝나는 날이 입시의 끝이기 때문에 끝까지 긴장의 끈을 놓지 말고 끊임없이 전략을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임우선 기자 imsun@donga.com}

대학수학능력시험일 아침이다. 올해 수능을 보는 고3은 1998년생 ‘IMF둥이’다.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로 나라가 가장 힘들었던 시기에 태어난, 팔뚝만 했던 아이들이 어느덧 어엿한 18세 청년이 돼 수험장으로 간다. 그해 당시 한국은 나라가 통째로 망할 것 같은 위기감이 팽배했다. 국가 부도의 고비가 지나간 후 기업들의 도산과 대량 실업 사태가 잇따랐고 거리에는 일자리를 잃은 아버지들이 넘쳐났다. 1998년 1월 1일 당시 동아일보 1면에는 ‘시련을 극복하자’란 제목의 연두제언이 실렸다. 새해 첫날 발표된 연중 주제가 ‘다시 일어서자’였다. 어디를 둘러봐도 불안과 절망만이 가득했던 시절, 가족의 눈물과 고통도 그 어느 때보다 크고 많았다.그런 시기 갓 태어난 아이를 바라보는 부모의 마음은 한없이 기쁘면서도 또 무거웠다. 이 아이를 잘 키워낼 수 있을까. 영유아기와 초중고교 12년의 긴 터널을 지나온 아이들과 함께, 이들이 수능을 보기까지 사랑과 희생으로 함께한 부모들 역시 이 시대의 고단한 수험생이었다. 다음은 올해 수험생 강지현(가명) 양의 어머니가 되돌아본 18년의 회상록(回想錄)이다. 1998년 12월 5일, 온정의 손길을 구하는 구세군 냄비의 종소리가 거리에 가득했던 겨울날 지현이가 태어났다. 단풍잎같이 곱고 예쁜 손, 옥수수 알처럼 작고 동그랗고 보드라웠던 발가락…. 지현이는 그렇게 나에게 왔다.○ 언제 잘릴지 모르는 불안감 하지만 시절이 시절인지라 기쁨이 컸던 만큼 한숨도 깊었다. 나라는 곧 무너질 듯했고 집안 사정도 마찬가지였다. 남편은 대학원을 마치고 일자리를 찾지 못해 결혼 후 4년째 비정규직 시간강사로 서울과 지방의 이런저런 학교를 오가며 ‘보따리장수’ 생활을 하고 있었다. 수업이 없어 수입도 없었던 방학 때는 학원 강의를 뛰면서 근근이 살았다. 나는 공공기관에서 일하는 준공무원 신분이었지만 여자여서 늘 불안했다. 한 공기업에서는 직원들에게 ‘회사를 떠나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각자 5명씩 적어 내라’는 비인간적인 지시가 내려오던 시절이었다. 당시 우리에게는 지현이보다 한 해 먼저 태어난 언니가 있었다. 아이를 키우며 회사를 다니는 것도 눈치가 보였던 상황에서 계획에 없던 지현이까지 생기자 눈앞이 캄캄했다. 한때 아이를 지울까 고민까지 했다.○ 가난이 만든 이산가족 그때는 ‘정말 힘들었다’는 말로밖에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참 많이 힘들었다. 나는 경제적으로도 가장 역할을 하며 아이를 키워야 했다. 게다가 칼바람이 부는 공공기관이었던 터라 아침에도 어김없이 제시간에 출근해 일을 해내야 했다. 서울엔 아이들을 부탁할 가족도, 친척도 없었다. 당연히 아이 둘은 내가 키울 수 없었다. 지현이의 언니는 갓난쟁이 때부터 어린이집에 보냈고, 지현이는 지방에 있는 이모에게 부탁했다. 아이들 생각에 매일 아침 울면서 회사로 뛰었다. 당시 어린이집은 지금처럼 시설이 좋지도 않았고, 공짜도 아니었다. 좋지도 않은 동네 어린이집에 한 달에 50만 원씩 주고 지현이 언니를 맡겼지만 아이는 매일 아침 어린이집에 갈 때마다 자지러지게 울었다. 다른 어린이집에 보내봐도 마찬가지였다. 일을 그만둘 수도, 아이를 제대로 키울 수도 없는 전전긍긍의 연속이었다. 지방에 두고 온 지현이를 생각해도 애가 닳았다. 하루에도 수천 번 보고 싶었지만 한 번 내려가려면 돈이 너무 많이 들어 자주 보지도 못했다. 엄마 아빠가 가난해서, 돈을 벌어야 한다는 핑계로 아이들을 떼어놓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미안하고, 또 미안했다. 두 돌이 지나고 한국 나이로 네 살이 돼서야 집에 와 같이 살게 된 지현이는 한동안 엄마인 나를 몰라봤다. 밤만 되면 ‘아줌마, 제발 저 좀 보내주세요’라며 우는 아이를 안고 함께 엉엉 울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퇴근 후 아이들을 찾아와 씻기고 먹이고 나면 난 저녁밥을 차려 먹을 기운조차 없어 그냥 굶기 일쑤였다. 그래도 돌아보면 그때가 인생에서 제일 행복한 시절이 아니었을까. 경제 사정도, 여유 없는 일상도, 모든 게 힘들었지만 지현이까지 작은 집에서 넷이 함께 살게 됐을 때 정말로 행복했다. 지금은 애들이 다 크고 형편이 조금 나아져 각자 방을 쓰지만 그때는 침대도 없는 방 하나에 이불을 깔고 넷이 누워 잠을 잤다. 찬 바람이 기세 좋게 들어오는 창문에 비닐을 붙여 바람을 막고, 외풍을 이겨 보려 네 식구가 끌어안고 자던 시절이었다. 그래도 시간이 지나니 힘들었던 기억은 스러져가고 한 방에서 우르르 자던 그 따뜻함만 기억난다.○ 살 만해지니 아이 짓누르는 사교육 2005년 남편이 드디어 정규직으로 일할 자리를 찾으면서 집안 형편은 조금 나아지는 듯했다. 하지만 가족끼리 단란한 여행 한 번 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애들이 공부로 바빠졌기 때문이다. 당시 우리 집은 넉넉한 형편은 아니었지만 아이들에게 해줄 수 있는 건 최대한 해주려고 했다. 피아노부터 국영수 학원까지 이런저런 학원을 다니다 보니 아이들과 대화를 나눌 시간은 거의 없었다. 시험은 대체 또 왜 그렇게 자주 있는지. 중간고사 봤다 하면 금방 기말고사가 왔고, 기말고사를 봤다 하면 또 다음 학기 중간고사가 돌아왔다. 방학 때는 학원에서 특강을 들어야 했고, 두 아이의 시험과 학원 일정을 고려하다 보면 가족끼리 2박 3일 여행 갈 시간 한 번 빼기가 정말로 어려웠다. 우리 때와 달리 입시 걱정은 이미 중학교 때부터 시작됐다. 고등학교 3학년만 입시생인 게 아니라 중학교 1학년 때부터 6년이 입시였다. 학교, 학원, 독서실에서 1년 내내 시험만 준비하는 이 쳇바퀴는 대체 언제 끝나는지 기약조차 없었다. 두 딸은 모두 이과를 택했다. 내 학창시절 때는 문과생이 훨씬 많았는데 세상이 바뀌었다. 딸들도 성향은 문과가 더 맞았지만 사회적인 추세가 이과였고 공부 좀 한다 하면 이과를 가는 분위기라 반강제로 이과를 갔다. 내가 다니는 직장에는 강남엄마도 있고, 목동엄마도 있었다. 회사에서 얘기를 듣다 보면 학원은 역시 강남이나 목동 쪽으로 보내는 게 맞다 싶었다. 학교 교육만으로는 아무것도 안 됐다. 아이들은 “선생님은 학원에서 배우고 왔겠지 하고 안 가르친다. 실제로 학원 선생님이 더 잘 가르친다. 학교에선 잠을 자면서 체력 보충을 한다. 학원에 다니고 싶다”고 했다. 안 보내고 싶어도 안 보낼 수가 없었다. 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는 지현이와 언니에게 매달 평균 각각 100만 원이 넘는 학원비가 들어갔다. 방학은 더 무서웠다. ‘윈터스쿨’이다 뭐다 특강이 시작되면 수백만 원이 깨지기도 했다. 아이들이 쉴 곳은 없었다. 매일 밤 학원으로, 독서실로 다니는 아이들이 늘 안쓰러웠다.○ 이러나저러나 후회뿐인 입시 준비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돈은 돈대로 썼지만 사실 올해 지현이의 입시 결과는 아직 그다지 만족스럽지 않다. 수시 지원 대학 6곳의 합격자 발표가 전부 난 것은 아니지만 아직 하향 지원한 한 곳에서만 합격 통보가 왔기 때문이다. 부모의 욕심이 끝없는 것이겠지만 그간의 노력에 비해서는 아쉬운 것이 사실이다. 수능 점수 최저 기준이 있는 학교라 수능에 마음을 놓을 수 없고, 논술시험도 아직 남아있어 여전히 갑갑한 느낌이다. 어릴 때부터 경제 사정이 좋았다면 지현이가 속상해하지 않을 결과가 나왔을까. 부잣집 애들이 다니던 영어유치원도 보냈다면 아이의 학교생활이 좀 더 편했을까. 일찍부터 좋은 교육을 시키지 못하고 그저 ‘밥만 주는’ 어린이집만 보냈던 게 미안하다. 사실 경기 광명으로 이사 올 때 목동으로 갈까 하는 생각이 있었다. 하지만 집값이 너무 많이 차이가 나서 포기했다. 요즘은 그때 목동으로 갔으면 결과가 달랐을까 하는 생각이 많이 든다. 그때만 해도 학군, 학군 해도 ‘무슨 학군이냐. 아이만 열심히 하면 되지’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돌아보니 그게 아니었다. 광명의 일반고에서는 줄곧 1등이 아니고서는 명문대에 가기가 힘들었다. 광명에 살면서 목동으로 학원을 다니려니 지현이가 얼마나 힘들었을까. 무리를 해서라도 갈걸. 나는 그렇게 해줄 수가 없었다. 아이가 속상한 결과를 얻은 건 결국 나 때문이 아닐까. 해줄 수 있는 건 다 해줬지만 미안하고 또 미안하다. 지현이는 재수를 하지 않을 것이다. 앞서 언니가 재수를 하며 차 한 대 값에 육박하는 비용을 들이고 온 식구가 고생했지만, 결국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한 걸 봤기 때문이다. 논술이 남아있지만 논술학원도 안 보낼 것이다. 언니가 논술 준비를 할 때 너무 절박한 마음에 일주일에 100만 원짜리 대치동 학원을 다녔지만 큰 효과는 없었다. ‘인(in) 서울’이 이렇게 힘든 건지 정말 몰랐다.○ 입시 뒤에야 찾아온 인생의 여유 엄마가 바짝 붙어 있어 줄 수 없고, 좋은 학군에 살지 못하고, 형편이 넉넉지 않았던 지현이 같은 아이에게 지금의 대입제도는 너무나 힘든 것이다. 내신을 잘 받기 위해 학원을 다니며 너무나 많은 돈을 써야 했고, 선택해야 할 수시의 종류는 너무나 많다. 이제는 거의 다 끝났지만 대한민국의 평범한 학부모로서 나는 한국의 교육제도가 너무나 불만이고 또 속상하다. ‘정말 열심히 아등바등 살았는데 부족했구나. 아이들과 얼마 시간을 보내지도 못했는데 시간이 참 빨리 갔구나’ 하는 생각만 든다. 18년 동안 나를 위해선 뭘 했을까. 딱히 떠오르는 게 없다. 그러고 보니 지난 18년 동안 부부 둘이서만 여행을 간 적이 한 번도 없다. 수능이 끝나면 딸들과 함께 여행을 가고 싶다. 남은 삶 동안 애들하고 같이 많은 여행을 다니는 게 내 작은 소망이다. 아이들이 학교에 가기 전 그랬던 것처럼, 다시 웃고 이야기하고 함께 시간을 보낼 생각을 하니 가슴이 부풀어 오른다. 지현아, 오늘까지만 힘내라. 그동안 정말 고생했다. 어떤 결과가 나오든 엄마에게 넌 최고의 딸이다. 이젠 우리 같이 웃으며 여행 가자. 사랑한다.임우선 기자 imsun@donga.com}
2013년 5월 청담고 예체능부장교사였던 이모 교사는 당시 최순실 씨의 딸 정유라(당시 정유연) 씨를 맡고 있던 송모 체육교사(여)로부터 다급한 전화를 받았다. “부장 선생님, 빨리 좀 와주세요. 상의할 일이 있어요.” 이 교사가 달려가 보니 송 교사는 울고 있었다. 송 교사는 “정유연 학생의 경기 출전이 규정된 횟수를 초과해 문제를 제기했더니 어머니가 삿대질과 함께 폭언을 퍼붓고 갔다”며 “저분 얼굴만 보면 감정이 올라와서 도저히 못 맡겠으니 제발 담당을 바꿔 달라”고 호소했다. 이 교사는 “당시 주변 교사들이 ‘어르신, 이러지 마십시오’라며 몇 번을 말려도 최 씨가 ‘너 같은 건 교육부 장관에게 말해서 바꿔 버리겠다’고 폭언을 쏟았다더라”라며 “송 교사뿐 아니라 교사 전체에 대한 모욕이라고 생각했고 저도 상당히 자존심이 상했다”고 말했다. 14일 열린 서울시교육청 행정사무감사에 증인으로 출석한 이 교사의 증언이다. 이날 서울시의회는 서울시교육청에 대한 행정감사를 진행하며 정 씨의 청담고 재학 시절 특혜 논란과 관련해 교장, 교사 등 5명의 증인을 세웠다. 오경환 의원(더불어민주당)은 “2010년 고3 신분으로 정 씨처럼 아시아경기에 출전했던 다른 승마 선수의 출결 현황을 보니 이 학생의 공결 일수는 36일에 불과했다”며 “정 씨가 고3 시절 140일의 공결 처리를 받은 것은 전무후무한 일”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정 씨의 친구가 진술한 녹취파일을 보면 정 씨가 ‘나는 갈 대학이 다 정해져 있으니까 상관없다. 그러니까 학교에 안 나온다’고 말한 내용이 있다”고 말했다. 같은 당 김경자 의원은 “정 씨가 아시아경기가 끝난 뒤 아시아경기를 이유로 공결 공문을 들고 왔는데도 교장이 이를 받아들였다”며 “마음먹고 특혜를 준 것이며 ‘학사 농단’을 한 것”이라고 꼬집었다. 이에 당시 결재를 한 청담고 전 교장 박모 씨는 “행정착오일 뿐 절대 특혜가 아니다”라고 반박했다. 당시 대한승마협회와 서울시승마협회가 출석인정 공문을 청담고로 직접 보내지 않은 사실도 드러났다. 김 의원은 “청담고 팩스 번호는 앞자리가 ‘3496’으로 시작하는데 승마협회 공문을 수신한 팩스 번호는 ‘512’로 나온다”며 “학부모(최순실 씨)가 따로 받아서 학교로 들고 온 것”이라고 지적했다. 당시 체육부장교사는 “항상 정 씨나 최 씨가 직접 공문을 들고 와 학교에 제출했다”고 증언했다. 본보가 팩스번호 02-512-○○○○을 확인해 본 결과 소재지는 서울 강남 서초 지역이 유력하지만 회사나 법인 등의 번호는 아니어서 개인 사무실이나 가정집인 것으로 추정된다. 임우선 imsun@donga.com·노지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