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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풍 하이옌(海燕)이 휩쓸고 지나간 지 6일째인 13일 필리핀 타클로반은 폭동이 일어날 것 같은 분위기였다. 물과 음식을 제공받지 못한 이재민들은 먹을 것이 있다고 판단되면 무조건 몰려들었고, 여의치 않으면 떼강도로 돌변한 듯 약탈에 나섰다. 필리핀 당국의 구호와 구조는 대부분의 지역에서 보이지 않을 정도로 턱없이 모자랐고, 해외에서 온 봉사단체들은 이제 겨우 타클로반에 도착하기 시작했을 뿐이다. 식량과 옷가지의 제공이 하루 이틀만 더 늦어진다면 곧바로 폭동으로 이어질 우려가 크다는 게 현지 주민들의 얘기다. 이를 우려했는지 알프레드 로무알데스 타클로반 시장은 “친척이 있다면 아무데라도 피난을 가라”며 주민들의 엑소더스를 촉구했다.○ 한국 민간 구호단체 현지 도착 12일 가장 피해가 심각한 타클로반에 도착한 한국 민간구호단체 기아대책의 선발대 5명은 13일 집중적으로 구호 대상지 물색 작업을 벌였다. 하지만 교통수단을 확보하기 어려워 이 작업은 더디기만 했다. 기아대책은 인근 세부 섬에서 임차한 화물차를 5시간에 걸쳐 배편을 이용해 레이테 섬으로 옮긴 뒤 다시 육로로 4시간 이동해 타클로반에 도착했다. 성봉환 선교사는 “14일 화물차가 도착하면 남레이테 주까지 가서 구호활동 본대가 왔을 때 필요한 물품을 직접 실어 나를 계획”이라고 말했다. 피해 지역을 둘러본 119국제구조대 김용상 대원은 주민들이 ‘KOREA’라고 쓰인 글씨만 보고도 “도와주려고 와 줘서 고맙다며 눈물을 글썽였다”고 전했다. 기아대책은 14일 인근 아니봉 마을에 쌀과 설탕, 라면이 담긴 구호물품 상자 100여 개를 제공하는 구호활동을 펼칠 예정이다. 한국 정부가 지원하는 담요, 텐트, 위생키트, 비상식량 등을 실은 공군 C-130 수송기 두 대는 14일 오전 6시 경기 성남시 서울공항을 출발해 오후 3시경 타클로반에 도착할 예정이다. 물자는 필리핀 사회개발부에 전달돼 이재민에게 배포된다. 또 의료진과 119구조대 등으로 구성된 긴급구호대는 15일 공군 수송기편으로 타클로반에 도착할 예정이다. 긴급구호대는 의료진 20명, 119구조단 14명, KOICA 4명, 외교부 2명 등 40명으로 구성됐다. 13일 오전 세계식량계획(WFP)이 지원한 3000여 명분의 식량이 일차로 타클로반에 도착했다. 식량 분배가 시작됐다는 소식에 생존자들이 몰려들어 수백 m의 긴 줄이 순식간에 만들어지기도 했다. 또 아시아개발은행(ADB)은 2300만 달러(약 246억7000만 원)의 긴급 구호자금을 제공하고 5억 달러를 차관 형태로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이재민들, ‘시신과의 동거’ 현지에서 시신을 수습하는 군인이나 경찰 관계자의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DOH(Department of Health·보건부)’라는 글씨가 쓰인 필리핀 정부의 공식 시신 처리 가방에 담긴 시신이 길가에 보이지만 대부분은 방치된 상태였다. 12일 비가 내렸다가 이날 햇빛이 강해지자 시신이 불룩해지는 등 부패가 빨라지는 모습이다. 대표적인 피해 지역인 공항 부근에서도 시신을 수습하는 공무원 인력을 찾기는 어려웠다. 시민들도 퉁퉁 부은 시신에서 불과 5∼10m 떨어진 곳에서 밥을 지어 먹거나 돼지고기 구운 것을 판매하는 등 ‘시신과 동거하는 생활’을 계속하고 있다. 정류장 의자에도 포대에 싸인 시신이 쌓여 있는 등 쓰레기 더미에서 포대만 보여도 시신인가 싶어 놀랄 정도다. ○ 이재민 굶주림 6일째, 당국은 ‘약탈과의 전쟁’ 이날도 자동차는 물론이고 오토바이나 자전거를 이용하거나 걸어서 타클로반에서 인근 사마르 섬으로 빠져나가는 긴 행렬이 만들어졌다. 솥단지와 간단한 보따리만 싸서 걷는 사람이 많았다. 이들이 탈출하던 오전 10시경(한국 시간 오전 11시경) 레이테 섬과 사마르 섬을 잇는 다리 부근에서 무장 괴한들과 정부군 간의 총격전이 벌어져 시민 한 명이 사망한 것으로 전해졌다. 외교부 신속대응팀도 현장을 지나다 긴급히 피신했다. 12일엔 굶주린 이재민 수천 명이 타클로반 아랑가랑 지구의 정부 식량창고를 습격해 약 10만 가마의 비축미를 약탈하는 사태도 벌어졌다. 이 과정에서 창고 건물 벽이 무너지면서 이재민 8명이 압사했다. 타클로반 ANC TV는 13일 가장 큰 피해를 본 아부카이 마을에서 약탈에 나선 무장세력과 이를 저지하려던 정부군 사이에 총격전이 발생했다고 보도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오무알데즈 타클로반 시장은 “사람이 적을수록 먹여 살릴 부담이 준다”며 주민들의 이웃지역으로의 탈출을 독려했다.○ 생존확인된 한국인은 32명 태풍 피해 당시 타클로반과 인근에 있던 한인은 총 55명으로 이날 새로 집계됐다. 언론 보도를 통해 외교부 신속대응팀이 현지에 파견된 소식을 접한 한국 거주 가족들이 타클로반 거주자들의 생존을 확인해 달라며 외교부에 신고하면서 수가 늘었다. 이 중 생존이 확인된 사람은 32명이고 여전히 연락이 두절된 사람이 23명인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 중 상당수 한인이 이미 육로나 항공편으로 타클로반을 빠져나갔다. 외교부 신속대응팀은 여전히 연락이 닿지 않는 23명의 주소지를 찾아가거나 지인을 통해 연락하는 방법으로 계속 생사를 확인하고 있다. 한국 공군 수송기가 타클로반에 도착하면 남아 있는 교민들을 태워 인근 세부 지역 등으로 보낼 계획이다.○ 당국, 사망 2344명-부상자 3804명 공식발표 시신 수습 작업이 본격화되면서 태풍으로 인한 사망자 집계도 구체적으로 이뤄지고 있다. 베니그노 아키노 대통령은 13일 CNN과의 인터뷰에서 태풍에 따른 인명 피해가 당초에 알려진 1만 명보다 훨씬 적은 최대 2500명 선에 그칠 것이라고 말했다. 필리핀 정부는 13일 현재 태풍 하이옌으로 사망자 2344명, 실종자 79명, 부상자 3804명이 공식 집계됐다고 밝혔다. 이는 확인된 시신만 집계한 숫자여서 향후 더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세계보건기구(WHO)는 태풍 하이옌에 따른 피해 규모를 최고 수준인 ‘3급 재해’로 분류했다. 이는 22만 명이 희생된 2004년 인도양 지진해일(쓰나미), 약 23만 명이 숨진 2010년 아이티 대지진과 같은 등급이다. 타클로반=허진석 jameshuh@donga.com / 주성하 기자}

태풍 ‘하이옌(海燕)’이 할퀴고 지나가 폐허로 변한 대재앙의 현장에 구호단체 관계자들이 속속 도착하면서 본격적인 구호작업이 시작됐다. 하지만 재난 발생 4일째에 접어든 피해 지역은 방치된 시신이 부패하면서 악취가 진동하고 배고픔에 견디다 못한 이재민들이 곳곳에서 약탈에 나서 치안마저 불안해져 ‘살아남은 자’에게도 ‘죽은 자’ 못지않게 생지옥이 돼 가고 있다.○ 참혹한 재난의 현장 태풍이 지나간 지 사흘째인 11일 타클로반에는 상흔이 고스란히 드러났다고 AP통신 등 외신이 전했다. 언덕 위 야자나무는 모조리 드러누웠고 도시의 95%가 파괴된 시내의 도로 곳곳은 쓰레기에 막혔다. 납작하게 무너져내린 집 잔해 속에서 수습된 셀 수 없이 많은 시신은 천에 덮인 채 길가에 방치돼 있었다. 섭씨 30도를 넘는 기온과 높은 습도 때문에 시신이 빠르게 부패되면서 역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차량 몇 대가 시내를 돌면서 시신을 수습하고 있지만 그보다 더 많은 시신이 새로 발굴되고 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정확한 사망자 집계를 내기도 어려운 실정이고 생존자들은 가족의 시신을 어디서 찾아야 할지도 몰라 발을 동동 구르고 있다. 당장 마실 물도, 먹을 것도 없는 사람들은 쓰레기더미를 뒤졌다. 11일 타클로반 공항이 열려 2, 3편의 수송기가 운항됐지만 22만여 명의 주민이 살았던 이곳의 상황에 비하면 구호품 공급은 턱없이 부족하다. 그나마 쓰레기가 길을 막아 물자 공급도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다. 은행이나 슈퍼마켓을 약탈하는 행위가 계속되는 등 치안 상황도 최악이다. 타클로반으로 들어오던 구호품 수송 트럭이 약탈당하는 일도 벌어졌다. 주민들이 총기를 들고 직접 자신들이 살았던 마을의 폐허를 지키는 곳도 있다고 미국 CNN방송은 전했다. 타클로반의 병원 대부분은 전기가 끊기고 의료물자도 없어 간단한 응급조치밖에 하지 못하고 있다. 부상자 중 어린이가 많아 안타까움을 더하고 있다. 현지 구호단체 관계자들은 사망자의 40% 정도가 어린이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필리핀 정부는 태풍이 오기 전 타클로반 주민 등 80여만 명에게 대피령을 내렸지만 학교 등 대피소도 피난처 역할을 해주지 못할 만큼 태풍이 강력해 피해가 늘었다고 외신은 전했다. 또 태풍 예고 후에도 집과 재산을 지키기 위해 집에 남았던 한 명씩의 가족 대부분이 숨진 것으로 알려졌다. 타클로반에서 구호작업이 진행되고 있는 반면 태풍이 처음 닥친 것으로 알려진 이웃 섬 사마르 주의 인구 4만 명 도시 기우안은 피해 상황조차 제대로 파악되지 않고 있다. 기우안 시내 모습은 타클로반 못지않게 폐허로 변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따라 사망자는 앞으로도 계속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필리핀 정부는 11일 레이테 주 등 41개 주, 7251개 지역에서 필리핀 전체 인구 1억 명의 약 10%인 965만여 명이 태풍 피해를 본 것으로 잠정 집계됐다고 밝혔다. 또 태풍으로 1만3400여 채의 가옥이 무너지고 9700여 채의 가옥이 부분 파손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국제사회 구조와 구호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10일 성명을 통해 “태풍으로 막대한 피해를 본 필리핀 국민에게 위로의 뜻을 전한다”며 “그렇지만 필리핀 국민의 놀라운 회복력을 잘 알고 있다”고 밝혔다. 오바마 대통령은 “‘바야니한(공동체 의식을 뜻하는 타갈로그어)’ 정신으로 이 비극을 극복하리라 믿는다”고 밝혔다.. 미군 태평양군사령부는 이날 척 헤이글 국방장관의 지시에 따라 필리핀 중남부에 해병대원과 해군 장병을 파견해 실종자 수색 및 구조작업에 본격 돌입했다고 밝혔다. 90명으로 구성된 제2해병원정여단 선발대가 KC-130J 허큘리스 수송기편으로 일본 오키나와 기지를 떠나 필리핀으로 향했으며 해군 P-3 오라이언 초계기도 필리핀 상공에 급파됐다. 일본 정부는 의사, 간호사, 약사 등 의료요원 25명을 11일 필리핀에 파견했다. 캐나다 정부는 필리핀에 500만 달러의 긴급 구호기금을 제공하고 국내 민간 구호단체가 조성하는 성금에 매칭펀드 방식으로 별도의 정부 기금을 보태기로 했다. 베트남은 피해 지역에 10만 달러의 긴급 구호기금을 제공하기로 했다. 리셴룽(李顯龍) 싱가포르 총리는 4만 달러 상당을 지원하고 타클로반 등 주요 피해 지역에 병력을 파견해 유엔 구호활동을 돕겠다고 밝혔다. 유럽에서는 영국 600만 파운드(960만 달러), 독일 50만 유로(66만 달러), 노르웨이 2000만 크로네(325만 달러) 등의 구호자금 지원이 잇따르고 있다.세부=허진석 jameshuh@donga.com / 주성하 기자워싱턴=정미경 특파원}
북한 해군에서 함정 침몰 사고가 잇따르고 있는 가운데 올 4월에 북한군 주력 전투함인 410t급 대형 초계정이 가라앉아 71명의 해병이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자유아시아방송은 4일 함경북도 어대진의 해군기지에서 4월 28일 새벽 함선이 침몰해 승조원 75명 중 71명이 사망했다고 보도했다. 이에 대해 또 다른 북한 소식통은 “사고가 난 정확한 날짜는 4월 12일 새벽”이라고 말했다. 낡은 북한 초계정이 파도를 견디지 못한 것이 침몰 원인으로 알려졌다. 소식통은 “태양절을 며칠 앞두고 사고가 발생해 충격이 컸다”며 “당시는 남북 긴장 상태가 최고조에 이르렀던 시점이라 북한군에서 연일 강도 높은 군사훈련이 벌어졌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해 북한 해군 출신의 한 탈북자는 “대다수 북한 군함은 30∼40년 전에 생산돼 이미 폐기해야 할 정도로 노후돼 있으며 함포 사격을 하면 갑판 용접 부분이 벌어져 사격훈련도 못할 지경이다”고 말했다. 북한은 1990년대부터 경제난으로 신형 군함을 거의 건조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네덜란드의 한 아동인권단체가 만든 10세 필리핀 소녀 아바타가 10주 만에 전 세계 각국에서 인터넷을 통해 아동 성매매를 시도한 1000여 명을 적발했다. ‘스위티’라는 이름을 단 이 캐릭터가 한 인터넷 화상 채팅방에 나타나자 10주 동안 전 세계 71개국에서 2만 명의 남성이 해당 채팅방에 접속해 채팅을 했고 이 가운데 1000여 명은 온라인섹스 등을 요구했다. 어떤 남성은 알몸인 상태로 말을 거는가 하면 돈을 줄 테니 옷을 벗어보라는 주문도 잇따랐다. 어린이 성매매 실태를 조사하기 위해 스위티를 만든 아동인권단체는 소녀 아바타에게 속아 온라인섹스를 시도한 1000여 명의 신상정보를 파악해 국제경찰기구에 넘겼다. 국적별로는 미국인 254명, 영국인 110명, 인도인 103명으로 파악됐고 한국인과 일본인도 포함돼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단체는 “전 세계 온라인상에서 활동하는 아동 성매수자는 75만 명 규모로 추산되며 이들은 웹캠을 통해 개발도상국 아이들에게 음란행위를 요구한다”며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고 주장했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지금까지 3차례 맞아야 하는 것으로 알려졌던 자궁경부암 백신인 ‘서바릭스’(글락소스미스클라인·GSK)를 한 번만 맞아도 충분하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고 AFP통신이 5일 보도했다. 미국 국립암연구소(NCI)의 암역학·유전학연구실의 마보베 사파에이안 박사팀은 서바릭스를 한 번 맞은 여성과 2, 3회 맞은 여성의 항체를 비교한 결과 별 차이가 없었다고 밝혔다. 연구팀은 코스타리카에서 서바릭스를 한 번 맞은 78명과 2번 맞은 192명, 3번 맞은 120명의 혈액을 4년 후 채취해 항체를 측정했다. 측정 결과 백신 접종 횟수에 관계없이 자궁경부암을 일으키는 인유두종 바이러스(HPV)의 두 가지 변종(HPV-16, HPV-18)에 대한 항체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백신을 한 번 맞은 그룹은 약간 적었지만 면역 효과는 큰 차이가 없었다고 사파에이안 박사는 밝혔다. 자궁경부암은 여성암 중 유일하게 백신이 개발되어 있으며 한국 등 주요 선진국은 백신 접종을 적극 권장하고 있다. 지금까지 자궁경부암 백신은 3회 접종이 권장 사항이다. 서바릭스의 경우 국내 산부인과에서 회당 15만∼20만 원이다. 처음 접종 후 1개월과 6개월 뒤 2, 3차 접종을 받아야 한다. 2, 3차 접종을 기일 내에 맞지 못하면 1차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또 다른 자궁경부암 백신인 가다실(머크)은 한 번만 맞았을 때의 면역 효과가 아직 연구되지 않았다.주성하 zsh75@donga.com·이진한 기자, 의사}

북한의 실질적 2인자 장성택 노동당 행정부장이 며칠 전 북한 최초의 경제특구인 북부 나선경제무역지대(나선)를 비공개 시찰한 뒤 이런 지시를 했다. “나선은 완전히 썩어빠진 자본주의의 온상이 돼 버렸다. 봉쇄를 더욱 철저히 하라.” 그가 나타난 시점은 북한이 경제개혁을 위한 각종 정책을 연이어 내놓은 직후였다. 지난달 23일 노동신문은 전국에 14개 중앙급 경제개발구(특구)와 13개의 지방급 경제개발구를 지정했다고 보도했다. 같은 달 16일 북한은 국가경제개발총국을 국가경제개발위원회로 승격시켰다. 이 위원회는 노동당 행정부의 지시를 받는다. 10월 초에는 김정은이 참석하고 장성택이 주도하는 전국적인 경제 간부회의가 열렸다고 한다. 이에 앞서 9월 말에는 새로운 시장경제 구상을 전국 경제 간부들에게 학습시키는 강연회가 평양에서 열렸다. 한국 언론들의 북한 보도도 온통 경제개혁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그 경제개혁의 사령탑을 장성택이 틀어쥐고 있다. 요즘 북한에서 장성택의 말은 김정은 지시 못지않게 힘이 있다. 한국 언론은 김정은 현지시찰 수행 횟수를 집계해 장성택이 신임에서 멀어졌다느니 가까워졌다느니 따지고, 공식서열을 매기기 좋아하지만 왕조사회인 북한의 권력서열에서 로열패밀리는 예외다. 김정은 고모인 김경희가 현지시찰에 한 번도 따라가지 않았다고 서열이 변하는 것은 아니다. 서열 2위였던 이영호 북한군 총참모장은 지난해 하루아침에 숙청됐다. 장성택은 김 씨는 아니지만 김정은의 고모부로 로열패밀리의 일원이다. 특구 중심의 경제개혁을 하겠다고 선포한 직후 경제사령탑인 그가 나선에 나타난 것은 놀랄 만한 일은 아니다. 북한소식통에 따르면 장성택은 동해안을 따라 새로 지정된 경제개발구역들을 둘러보며 청진을 거쳐 왔다고 한다. 하지만 그가 내린 지시가 “문을 더 열라”가 아닌 “문을 더 닫으라”는 것은 의외였다. 앞에선 경제특구 확대를 말하고, 돌아서선 봉쇄를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오늘날 북한이 처한 가장 풀기 어려운 딜레마이기도 하다. 액셀러레이터와 브레이크를 적절하게 밟아야 하는 일을 맡을 믿을 만한 인물도 노회한 장성택을 빼고는 사실상 찾기 어렵다. 이미 나선에서는 몇 달 전부터 중앙의 지시로 철저한 봉쇄를 위한 준비가 착착 진행됐다. 나선을 에워싸고 있는 철조망은 새롭게 보강되고 출입통제도 더 엄격해졌다. 1991년 나선이 최초의 경제특구로 지정될 때 설치된 철조망은 동독에서 수입해 온 것이었다. 동서독 분단의 잔재가 북한에서 자국민 봉쇄용이란 새 용도를 찾은 것이다. 하지만 중국과의 교류가 비교적 활발한 나선으로 몰래 들어가 물품을 싸게 구입하려는 주민들의 20년 넘게 이어진 시도는 철조망 곳곳에 구멍을 만들었다. 북한은 경제개혁에 착수한 뒤 첫 실질적 조치로 바로 이 구멍 뚫린 ‘보이지 않는 철조망’부터 새롭게 보강하고 있는 것이다. 장성택이 둘러본 나선의 현실은 어떨까. 비록 허울 좋은 경제특구이긴 하지만 그 덕분에 그렇지 않은 다른 지역보다는 생활수준이 확연하게 높다. 평양을 능가하거나 최소한 비슷하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다. 최근 들어 중국의 적극적인 투자로 나선의 도로와 철도 등 주요 인프라는 크게 개선됐고 전기 사정도 평양보다 낫다. 4, 5년 전엔 중국 투자자가 집을 지어 현지에서 제일 부자인 북한 세관원들에게 1만∼2만 달러에 분양하기도 했다. 거리를 오가는 승용차의 80% 이상은 중국 번호판을 단 승용차들이다. 식당에선 북한 요리는 구경할 수 없고 전부 중국 요리만 판다. 예외로 단 한 곳의 러시아 식당이 있다. 나선 장마당 입구에서 두부 한 모를 중국돈 1위안에 파는 장사꾼 할머니는 오늘날 나선을 상징하는 대표적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이곳에선 일부 값싼 채소를 살 때를 제외하곤 북한 화폐가 사용되지 않는다. 거의 모든 거래가 위안화로 이뤄진다. 중국 경제권에 가장 깊이 빨려 들어간 것이 오늘날 나선이 잘사는 비결이기도 하다. 장성택 방문 며칠 전 나선에선 북한에서 드문 청부살인이 일어났다. 한 보안원이 2000달러를 주고 교화소 출신 전과자를 통해 내연녀의 남편을 살해한 것이다. 살해된 남편은 아내의 불륜을 눈치 채고 폭력을 휘둘렀다고 한다. 체포된 보안원은 혼내주라고 한 것이지 죽이라고 말한 것은 아니라고 버티고 있지만 이미 이 사건은 공화국 최초의 청부살인으로 소문이 빠르게 퍼지고 있다. 북한 화폐가 실종되고 위안화가 통용되는 곳, 돈으로 청부살인도 하는 곳이 ‘특구 1번지’ 나선이다. 장성택이 이런 현실에 화가 많이 난 것은 분명하다. 그렇다고 해답을 ‘더욱 철저한 봉쇄’에서 찾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다. 나선은 전국에서 비밀경찰망이 가장 조밀한 곳이다. 인구가 20만 명에 불과하지만 나선의 보위부는 도(道)급 보위부 편제를 갖추고 있다. 외국인이 방문하면 개인별로 감시원이 따라붙을 수도 있다. 그러나 나선의 변화는 비밀경찰도 막을 수 없었다. 그것이 바로 시장경제의 힘이다. 장성택이 아무리 노회하다 한들 시장경제는 그에게도 생소한 것이다. 지금쯤 평양으로 돌아온 장성택은 기자의 이 칼럼을 보고 어떻게 며칠 전 자신이 시찰하고 지시한 내용이 한국 언론에 벌써 나느냐며 “나선은 정말 썩었다”고 화를 낼 수도 있다. 그러나 특구 1번지 나선의 현실은 앞으로 북한이 외자 유치를 통해 만들려는 27개 경제특구의 먼저 온 미래라는 점을 알아야 한다. 앞에선 당에 충성을 다하겠다고 맹세하고 뒤에선 회사의 월급봉투와 보너스에 정신을 쏟는 구조는 결코 오래갈 수 없다. 설령 주민 대다수가 보위원이라 할지라도 이 거대한 흐름을 절대 막을 수 없다. 보위원도, 당 간부도 자신들의 두뇌와 이기심까지 노동당에 맡기고 살지는 않기 때문이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미국 사법당국이 미국 최대 투자은행인 JP모건체이스의 중국 고위층 가족 특별채용 의혹과 관련된 조사 범위를 한국 등 아시아 다른 국가로 확대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뉴욕타임스 등 미국 언론은 3일 미 법무부와 증권거래위원회(SEC)가 JP모건이 아시아 각국에서 권력층 자녀들을 특채한 뒤 이들의 연줄을 활용해 해당 국가에서 거래를 성사시켰는지에 대한 조사를 중국에서 한국과 싱가포르, 인도로 확대하고 있다고 전했다. JP모건은 2006년부터 ‘아들과 딸’로 명명한 비밀 프로그램을 가동시켜 중국 고위층 자제들은 면접도 거치지 않고 합격시킨 것으로 알려졌다. 대표적으로 대형 국영기업 광다(光大)그룹 탕솽닝(唐雙寧) 회장의 아들 탕샤오닝(唐小寧)을 2010년에 특채한 뒤 이듬해 광다그룹 산하 광다은행의 상장 자문사가 되는 등 중요 계약을 줄줄이 따냈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동진(東進)과 팽창을 거듭했지만 유대감은 약해졌다.’ 유럽연합(EU) 출범의 출발점이 된 ‘마스트리히트 조약’이 1일로 발효 20주년을 맞는다. 조약은 1991년 12월 유럽공동체(EC) 12개국 정상들이 네덜란드 마스트리히트에서 합의해 각국 정부의 비준을 거친 뒤 1993년 11월 1일 발효됐다. EU는 경제 및 화폐 통합, 공동 외교안보 정책, 내정과 사법 분야 협력이라는 3가지 목표를 내세웠다. 조약 체결 이후 20년간 EU는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지만 풀어야 할 과제도 만만치 않다. 》○ 경제통합 공고화와 EU의 위상 강화 EU 출범 후 가장 큰 성과는 단일 화폐인 유로화 도입이다. 조약에 따라 EU는 1999년 유럽경제통화동맹(EMU)을 출범시켰다. 2002년 1월 1일부터 12개국이 유로화를 도입했다. ‘유로존’ 국가는 초기 12개국에서 현재 17개국으로 늘었다. 유로화 도입으로 개별 회원국들에 대한 EU의 금융 임금 사회보장 제도 등에 대한 통제권은 점점 강화되고 있다. 사법 분야의 공조도 긴밀해져 유럽공동경찰기구인 ‘유로폴’이 국경을 넘어 범죄와의 전쟁을 벌이고 있다. 통합 특허법원이 출범돼 특허 출원과 특허 분쟁도 곧 단일화될 것으로 전망된다. 하지만 외교와 국방 통합은 더디게 이뤄지고 있다. 외교는 회원국 간 이해관계가 복잡해 주요 국제문제에 대한 의견 일치를 보기가 어렵다. 최근 시리아 반군에 대한 무기금수 조치 해제 과정에서 의견일치를 이루지 못한 것이 대표적이다. 방위산업 분야에서도 전체 투자의 80% 이상이 회원국별로 이뤄지고 있다. 그럼에도 EU는 지속적인 동진정책으로 몸집을 부풀리고 있다. 조약 체결 당시 12개국이던 EU 회원국은 올해 크로아티아의 가입으로 28개국으로 늘었다. 마케도니아 등 동유럽과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등 옛 소련 회원국도 EU에 가입하기 위해 줄 서 있다.○ 하락하는 신뢰도와 회원국들의 반목 EU의 미래가 밝지만은 않다. 2008년부터 시작된 유럽의 경제위기는 회원국들의 결속력과 충성도를 크게 떨어뜨렸다. EU라는 한 지붕 아래 이익을 보는 나라와 손해를 본다고 생각하는 나라들 사이의 감정의 골은 점점 커지고 있다. 여론조사 전문기관 퓨리서치가 최근 유럽 주요 8개국 시민 7600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EU를 긍정적으로 생각한다는 응답은 45%에 불과했다. 지난해보다 15%포인트나 떨어졌다. 국가별 경제력 격차도 점점 더 벌어지고 있다. 독일 오스트리아처럼 실업률이 각각 5.3%와 4.8%에 불과한 국가가 있는가 하면 실업률이 26%를 넘는 그리스와 스페인과 같은 국가도 있다. 특히 올 상반기 그리스의 청년 실업률은 62.9%, 스페인은 56.1%까지 치솟았다. 경제난 극복을 위해 독일 등 돈줄을 쥔 국가들이 그리스와 스페인 등 구제금융 국가에 혹독한 긴축을 요구하면서 반EU 정서는 더욱 커지고 있다. 경제적 위기에 처한 국가들에서 유로는 부자 국가의 착취수단이라는 주장도 공감을 얻고 있다. 이로 인해 내년 5월 유럽의회 선거에서 ‘EU 반대’와 유로존 폐지를 주장하는 극우 정당들이 크게 선전할 가능성도 있다. 앞으로 EU의 미래는 회원국 간의 정서적 화합과 금융위기를 막기 위한 은행연합 완성 등 조약에서 예상하지 못한 도전들을 어떻게 풀어 나가는가에 달려 있다는 게 지배적인 관측이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북한이 또 핵실험을 준비하는 정황이 포착됐다고 미국 존스홉킨스대 국제관계대학원(SAIS) 산하 한미연구소가 운영하는 북한 전문 웹사이트 ‘38노스(North)’가 23일 밝혔다. 38노스는 “최근 촬영된 상업용 위성사진을 분석한 결과 함경북도 길주군 풍계리 핵실험장 서쪽 및 남쪽에서 두 개의 새로운 갱도 입구와 파낸 흙더미가 관찰됐다”고 전했다. 하지만 아직 갱도 굴착의 목적이나 의도는 불분명하다고 이 사이트는 설명했다. 향후 핵실험에 필요한 새 갱도를 뚫는 것일 수도 있지만 2009년 및 올해 초 핵실험을 한 것으로 추정되는 기존 갱도 내부의 통행과 통풍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추가로 출입구를 건설하는 작업일 수도 있다는 것. 그러나 어떤 목적이든 이는 북한이 향후 지하핵폭발 실험을 추가로 실시하기 위한 사전 준비에 포함된다고 38노스는 분석했다. 다만 이 사이트는 이른 시일 안에 4차 핵실험이 이뤄질 것이라는 징후는 없다고 평가했다. 북한은 2월 3차 핵실험을 강행했으나 최근 미국 등에 조건 없는 비핵화 협상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또 북한이 핵실험을 위한 별도의 새 갱도를 만드는 것이라면 1, 2년은 소요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38노스의 주장에 대해 한국군은 “북한이 새 갱도를 뚫은 것은 없다”고 부인했다. 군 관계자는 “군 위성으로 확인한 결과 새로운 갱도를 굴착하고 있다는 모습은 확인되지 않았다”며 “잘못된 정보인 것 같다”고 밝혔다. 군은 풍계리에서 북한군의 특별한 징후는 보이지 않는다면서도 “북한군의 동태를 예의주시하고 있다”고 덧붙였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이란 법무부가 최근 교수형에 처해진 뒤에 살아난 죄수에 대해 사형을 다시 집행하지 않기로 결론을 내렸다고 반(半)관영 이스타 통신이 22일 보도했다. ‘알리레자’라는 성만 알려진 이 사형수는 이란에서 사형에 해당하는 마약 밀수죄로 9일 교수형이 집행됐으나 다음 날 살아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그가 사형수이므로 다시 형을 집행하라는 주장과 사형하지 말라는 여론 및 국제사면위원회의 반대가 맞서면서 국제적 논란이 됐다.}

《 올해 6월 방문자 5000만 명을 돌파한 동아닷컴의 파워 블로거 주성하 기자의 칼럼 ‘북한이야기’를 이번 주부터 격주 화요일 오피니언면에 연재합니다. 서울에서 평양은 불과 200km, 차로 3시간 거리이지만 주 기자가 평양에서 서울까지 오는 데에는 무려 8년이 걸렸습니다. 주 기자는 아직도 “마음만은 하루에도 몇 번씩 바람 세찬 서울과 안개 자욱한 평양 사이를 넘나든다”고 합니다. 그가 쓰는 ‘북한이야기’는 세상에서 가장 먼 여행길에서 그가 보고 듣고 느낀 것들을 함께 나누는 공간이 될 것입니다. 》 ‘혁명의 수도 평양.’ 평양역 앞 아파트 옥상에 크게 붙어있는 구호이다. 기차를 타고 평양에 들어오는 사람들은 차창 밖으로 맨 먼저 이 구호부터 보게 된다. ‘혁명의 수도’는 세뇌의 키워드다. 북한 사람 누구에게나 “평양은?” 하고 물어본다면 수십 년 익숙하게 된 접선암호 맞히듯이 “혁명의 수도”라는 대답이 즉시 돌아올 것이다. 심지어 잠꼬대 속에서라도.평양아파트 가격 최고 16만달러 하지만 반세기 전쯤 평양에서 끓었던 사회주의 혁명의 열망은 세습과 고난의 행군을 거치며 개인의 욕망으로 변해버렸다. 이제 평양은 더는 혁명의 수도가 아니다. 부자가 되려는 꿈이 지배하는 ‘욕망의 수도’일 뿐이다. 이제 그곳에선 혁명도, 통제도, 순응도 부자가 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평양의 욕망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는 아파트다. 내 집 마련에 대한 한민족의 집착, 집을 통한 부의 과시욕은 평양이나 서울이나 다르지 않다. 다른 점은 평양의 집값은 아직 꺾인 적이 없다는 것이다. 집값 그래프는 계단식으로 상승해왔다. 1990년대 중반 고난의 행군 시절 굶주린 사람들은 국가에서 배정받았던 아파트를 달러와 바꾸기 시작했다. 평양 모란봉구역 북새거리의 30평형대 아파트가 5000달러에 팔렸다. 그렇게 평양의 부동산 거래는 본격화됐다. 혁명의 수도에서 아파트 가격은 항상 그들이 증오하는 ‘미제국주의자’들의 달러로 거래된다. 10여 년 전 최고가 5000달러에서 시작된 평양의 아파트 가격은 2013년 16만 달러를 넘어섰다. 올 4월 보통강구역 유경동에 완공된 30층짜리 아파트는 8만 달러 언저리에서 맴돌던 아파트 최고가를 단숨에 두 배나 올렸다. 평양 아파트 최초로 180m²(약 54.5평) 이상의 크기에 수입산 대리석과 같은 최고급 자재를 썼다. 중국 아파트의 설계를 그대로 가져다 지었고, 지하철 황금벌역까지 100m 정도 떨어져 교통 입지도 매우 좋다. 다만 주변 아파트보다는 훨씬 낫긴 하지만 정전과 단수는 피해가지 못했다.권력기관들 절반 챙기고 절반 팔고 이 아파트는 국가가 지은 것이 아니다. 달러를 주무르는 대외경제총국(일명 99호총국)이 자체 부동산 개발로 지은 것이다. 아파트의 절반은 99호총국 간부들의 몫이고, 나머지는 공사비를 뽑기 위해 팔고 있다. 하지만 99호총국 간부들이 서로 차지하겠다고 내전이 벌어져 이 글을 쓰는 시점까지 6개월째 배정이 끝나지 않았다. 평양의 고급 아파트들은 이런 식으로 힘 있는 기관이 건설한 것이다. 국방위원회가 대동강구역 동안동에 최근 신축한 160m²짜리 아파트는 7만∼8만 달러에 거래된다. 중구역 평양의학대 앞에 신축돼 완공을 앞둔 160m²짜리 아파트 역시 연말부터 7만∼8만 달러에 거래될 예정이다. 시내 중심 중구역은 100m² 정도의 낡은 아파트도 3만∼4만 달러에 팔린다. 중구 보통강 모란봉 대성구역과 같은 평양 중심구역에는 지금 새 아파트들이 발 디딜 틈 없이 올라가고 있다. 억눌렸던 욕망이 분출되듯이. 특히 각 기관들은 아파트를 지어 절반은 자기들이 갖고 나머지는 공사비를 뽑기 위해 팔며 권력을 남용한다. 시내 중심에 건설되는 아파트는 예외 없이 북한 관련법을 위반한 것이다. 북한 당국이 합법적으로 건설허가를 내주는 지역은 통일거리 등 평양시 외곽뿐이다. 하지만 중앙 기관들은 권세로 내리눌러 건설허가를 따낸다. 평양시 인민위원회는 권세에 눌린 척 도장을 눌러주면서도 아파트 몇 채는 받아 챙긴다. 평양의 건설부문 간부에 따르면 평양에 각 기관들이 자체적으로 지은 아파트는 최근 10년 사이 7만∼8만 채나 된다고 한다. 반면 북한이 국가적으로 건설한 집은 1995년 이후 2만 채가 채 되지 않는다. 북한은 2008년 평양시 10만 채 건설을 발기하고 강성대국의 원년인 2012년까지 완공하겠다고 큰소리쳤다. 그러나 현실은 만수대거리와 창전거리, 시내 외곽의 아파트 단지를 통틀어 2만 채도 채 완공하지 못했다. 그것도 아파트 동별로 외무성, 인민무력부 등 각 기관에 할당해주고 자체 완공하라고 강압적으로 시켰기 때문에 가능했다. 총력을 쏟아 부어 5년 동안 아파트 2만 채도 완공하지 못한 북한은 한국의 중견 건설사보다 못한 국력을 입증하고 말았다.선분양-후분양 한국 개발방식 모방 하지만 점점 놀라울 정도로 한국의 개발방식을 닮아가고 있는 욕망의 사적 부동산 시장은 외부의 상상을 넘어서고 있다. 심지어 선분양가와 후분양가까지 존재한다. 그럼에도 사회주의 잔재인 국가 배정 시스템도 여전히 남아 있다. 최근 북한 은하수악단이나 공훈합창단, 국립교향악단 성원들은 몇만 달러짜리 아파트를 선물로 받았다. 부동산 시장에서 나타난 시장경제와 사회주의의 혼재, 시장화의 급속한 확산, 이것이 북한 전체를 아우르는 오늘날의 실상이다. 북한 이야기는 늘 궁금증이 남는다. 부동산만 해도 주택 매매가 어떻게 가능한지, 구매자는 어떻게 돈을 벌었는지 등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끝도 없이 이어진다. 그런 궁금증을 글 하나에 다 담을 순 없다. 주성하의 북한 이야기는 이제 시작일 뿐이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캄보디아에서 1975∼1979년 크메르루주 정권 당시 민간인 200만 명을 학살했던 ‘킬링필드’의 핵심 인물 2명에게 법정 최고형인 종신형이 구형됐다. 크메르루주 전범재판소의 체아 레앙 검사는 21일 누온 체아 전 공산당 부서기장(87)과 키우 삼판 전 국가주석(82)에게 종신형을 구형했다. 2006년 유엔과 캄보디아 정부가 공동 설립한 크메르루주 전범재판소에서는 종신형이 최고형이다. 선고는 내년 상반기에 내려질 예정이다. 전범재판소는 국민 3분의 1에 해당하는 200만 명을 학살하거나 굶겨 죽인 킬링필드 사건의 핵심 전범 4명에 대한 재판을 2011년부터 시작했다. 이 재판 심리는 전범 2명에 대한 종신형 구형을 끝으로 이달 31일 일단락될 예정이다. 크메르루주 정권의 1인자 폴 포트는 1998년 사망했으며 기소된 전범 4명 중 한 명인 이엥 사리 전 외교부 장관은 올해 초 지병으로 사망했다. 그의 부인 티리트(81)는 치매로 재판을 받기에 부적합하다는 판결을 받아 지난해 풀려났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지구상에 현대판 노예로 살고 있는 사람이 3000만 명에 이른다고 호주의 인권단체 ‘워크프리재단(WFF)’이 16일 밝혔다. WFF는 ‘세계 노예 지수’를 도입해 세계 162개국의 현대판 노예 실태를 보고서로 발표했다. 이 단체의 ‘현대판 노예’의 기준은 이동의 자유 박탈, 강제 노동, 사채에 의한 강압 행위, 강제 성매매 및 결혼, 아동 노동력 착취 등이다. 인도는 인신매매, 강제 결혼과 아동 납치 등으로 1390만 명이 노예 상태로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세계 현대판 노예의 거의 절반이 인도에 몰려있는 셈이다. 중국과 파키스탄이 각각 300만 명과 210만 명으로 그 뒤를 이었다. 3000만 명의 현대판 노예 중 76%가 10개국에 몰려있다. 인구 비율로 봤을 때 가장 심각한 국가는 아프리카 사하라 서쪽의 모리타니였다. 이 나라는 인구당 노예 비율과 아동 결혼·인신매매 실태를 평가해 합산한 노예 지수가 100점 만점에 97.9점에 달해 세계 1위로 선정됐다. 모리타니에선 국민 380만 명의 4.1%인 15만1000명이 노예 상태로 신분까지 세습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중남미 최빈국 아이티도 아동 종살이 제도 때문에 노예 지수 52.26점을 받아 세계 2위에 올랐다. 현대판 노예가 가장 적은 국가는 아이슬란드 아일랜드 영국 순이다. 한국은 5000만 명 중 1만451명이 노예 상태로 조사돼 노예 지수 2.32점으로 162개국 중 137위였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15일 필리핀 제2의 도시이자 유명 관광지인 세부 인근의 보홀 섬에서 리히터 규모 7.2의 강진이 발생해 최소 93명이 숨졌다고 AP통신과 현지 언론이 보도했다. 지진으로 많은 건물이 붕괴되고 전기·통신이 끊어져 구조 작업이 지연되면서 사상자는 더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지진은 이날 오전 8시 12분(현지 시간) 보홀 섬의 작은 도시 카르멘 인근 지하 약 33km에서 발생했다. 첫 번째 지진 이후 규모 5.0 이상의 여진도 네 차례 이상 계속됐다. 데니스 아구스틴 보홀 경찰서장은 “카르멘에서 77명이 사망했고 세부 섬과 시키호르 섬에서도 각각 15명과 1명이 숨졌다”고 밝혔다. 이날은 이슬람 최대 명절인 ‘이드 알아드하(희생제)’여서 이슬람 교도들이 기도를 하던 중 건물이 무너져 내려 사망자가 속출했다. 이번 지진으로 스페인 식민지 시절인 1565년 세워져 필리핀에서 역사가 가장 오랜 세부의 ‘바실리카 미노레 델 산토 니뇨’ 성당 건물에 균열이 생기고 종탑이 무너졌다. 정부 관계자들은 “10개 이상의 유서 깊은 성당이 손상을 입었다”고 밝혔다. 당국은 세부 지역을 재난구역으로 선포했다. 세부 등 필리핀 중남부는 환태평양대의 ‘불의 고리’에 위치해 지진이 자주 발생하는 지역이다. 세부에서는 지난해 2월에도 리히터 규모 6.9의 지진으로 80여 명이 사망하거나 실종됐다. 한편 최근호 세부 한인회장은 15일 동아일보 종합편성 방송 채널A와의 통화에서 “세부에는 1만1000여 명의 교민과 1만5000여 명의 유학생, 9000여 명의 관광객 등 모두 3만5000여 명의 한인이 있지만 교민 피해는 아직 없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고 말했다.박희창·주성하 기자 ramblas@donga.com}

유럽의회가 10일 파키스탄 여학생 말랄라 유사프자이(16·사진)를 최고 인권상인 ‘사하로프상’ 수상자로 선정했다. 상금은 5만 유로(약 7240만 원)다. 유사프자이는 어린 나이에 여성의 교육받을 권리를 주창해 오다 지난해 탈레반의 총에 머리를 맞고 혼수상태에 빠졌으나 국제 사회의 도움으로 살아났다. 미국 정부의 민간인 도청 사실을 폭로한 미 전 정보기관 직원 에드워드 스노든과 권위주의 국가 벨라루스에 수감 중인 반체제 인사들도 후보에 올랐지만 유사프자이에게 밀렸다. 유사프자이는 11일 발표되는 노벨 평화상 유력 후보로도 거론되고 있다. 기존의 사하로프상 수상자 중에는 아웅산 수지 여사와 넬슨 만델라 등 노벨 평화상 수상자도 포함돼 있다. 파키스탄 탈레반은 외국에 있는 유사프자이가 귀국하면 다시 보복 공격하겠다고 선언했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리비아의 알리 자이단 총리가 10일 새벽 수도 트리폴리에서 한 무장 단체에 끌려갔다가 다른 무장 단체에 의해 풀려나는 사건이 벌어졌다. 자이단 총리의 납치는 국방부 지휘를 받는 단체에 의해 이뤄져 리비아 정국의 혼돈과 치안 부재의 현실을 극적으로 드러냈다. CNN방송 등 외신들에 따르면 자이단 총리는 이날 오전 4시경 숙소로 쓰고 있는 트리폴리 콜린티아 호텔에서 무장한 몇몇 남성에게 이끌려나와 대기하고 있던 차에 태워졌다. 그 사이 총리 경호원들과 호텔 보안 인원들의 제지는 없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리비아 과도정부는 처음엔 총리의 납치사실을 부인했다. 하지만 언론보도가 쏟아지자 총리를 납치한 단체로부터 협박을 받았기 때문에 납치 사실을 부인했다는 궁색한 변명을 했다. 총리 납치 몇 시간 뒤 ‘리비아혁명 작전실’이라는 반군 단체가 자신들의 소행이라고 주장했다. 이 단체는 “납치가 아니라 검찰 지시에 따른 체포”라고 강조했다. 리비아혁명작전실은 2011년 리비아 내전 당시 만들어진 이슬람 반군단체로 현재는 리비아 국방부와 내무부의 지휘를 받고 있다. 군과 경찰 체제가 아직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리비아는 현재 옛 반(反)카다피 반군 단체들을 모아 치안에 활용하고 있다. 리비아혁명작전실은 페이스북을 통해 5일 미군 특수부대가 트리폴리에서 알카에다의 고위 인사인 아부 아나스 알리비 씨를 체포한 사건 때문에 총리를 체포했다고 밝혔다. 알리비 씨의 체포로 이슬람 반군 속에서 불만이 고조되자 리비아 정부는 7일 “미군의 작전은 리비아 정부의 허락 없이 벌어진 국민 납치 행위”라며 미국 정부에 해명을 요구했다. 그러자 존 케리 미 국무장관은 “체포는 합법적 절차에 따라 적절하게 이뤄졌다”고 반박했다. 이에 옛 반군 세력 가운데에서 리비아 정부가 미군의 작전을 몰래 승인해준 것 아니냐는 의혹을 강하게 제기했다. 이날 총리의 납치는 이런 가운데 벌어졌다. 총리 납치극이 알려진 뒤 한나절이 지나지 않아 자이단 총리가 풀려났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총리를 구출한 것은 정부가 아닌 또 다른 반군이었다. 트리폴리 외곽 스쿠 주마 지역에서 급히 달려온 자칭 ‘혁명가’ 연합단체가 “총리를 억류하고 있던 반군을 설득해 그를 구출했다”고 발표했다. 이날 오후 내각 회의에 모습을 드러낸 자이단 총리는 자신을 구출하는 데 도움을 준 사람들에게 감사를 표한다고 말했지만 더이상 구체적인 언급은 하지 않았다. 그는 “이번 일은 갈등을 피해 지혜롭고 합리적으로 풀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자이단 총리와 반카다피 반군 단체들은 내전 때 함께 싸운 ‘동지’ 사이다. 1970년대 리비아 외교관으로 일했던 자이단 총리는 1980년대에 스위스로 망명해 인권변호사로 활동하며 반체제 활동가로 지냈다. 리비아에서 내전이 일어난 뒤 자이단 총리는 반군 연합의 유럽 특사로 활동했다. 특히 니콜라 사르코지 전 프랑스 대통령을 설득해 프랑스가 반군들에게 무기를 지원하도록 만든 결정적 주역이다. 이 때문에 반군들도 총리를 연행하는 과정에서 과격하게 행동하지 않고 정중한 태도로 끌고 갔다는 것이 목격자들의 증언이다. 카다피 정권 붕괴 이후 국회의원이 된 자이단 총리는 지난해 11월 14일 무소속으로 출마해 이슬람 측 후보를 제치고 총리로 당선됐으며 지금까지 자리를 지켰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중국에서 살인 장수말벌에 대한 공포가 확산되면서 유럽에도 비상이 걸렸다. 원래 장수말벌은 유럽엔 없었지만 2004년 수출용 도자기를 보호하는 목재 등에 붙어 프랑스에 처음 유입됐다. 이후 9년 동안 장수말벌은 프랑스 행정지역 100곳 중 39곳에서 관찰되는 등 유럽 전역으로 번식해 나가고 있다. 강이나 바다 연안을 따라 빠르게 퍼져나가고 있어 영국에 도착하는 것도 시간문제라고 영국 데일리메일이 8일 보도했다. 최근 몇 달간 산시(陝西) 성 북부에선 장수말벌의 공격으로 42명이 사망하고, 1600여 명이 크게 다쳐 치료를 받고 있다. 당국은 장수말벌과의 전쟁을 선포하고 수천 명의 경찰을 투입해 서식지를 찾아 불태우고 있지만 역부족이다. 장수말벌 때문에 해당 지역 사람들은 공포에 빠졌다. 문제는 장수말벌의 위험성이 부각될수록 공포에 빠지는 것은 중국뿐만이 아니라는 것. 프랑스와 영국도 큰 걱정에 사로잡혔다. 장수말벌은 몸길이가 5cm, 벌침의 길이도 6mm나 된다. 신문은 “이 벌에 쏘이면 극심한 통증과 함께 피부에 마치 총알 자국만 한 큰 구멍이 생긴다”고 전했다. 장수말벌 떼는 꿀벌을 공격해 2시간 정도면 3만 마리를 몰살시켜 해당 지역 꿀 생산을 크게 떨어뜨리기도 한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북한의 신경제체계 구상은 1961년 이래의 사회주의 계획경제 노선을 완전히 부정하는 것일 수도 있어 북한 사회 전반에 엄청난 변화를 몰고 올 것으로 예상된다. 우선 개인의 기업 설립이 가능해질 것으로 보인다. 각 기업에서 불필요한 인력이 대폭 방출되면 전국적으로 수많은 무직업자(실업자)가 쏟아져 나온다. 이들을 방치하면 체제의 안정에도 크게 위험이 된다. 이 때문에 실업자를 고용하는 경쟁력 있는 기업이 절실히 필요할 수밖에 없다. 북한이 당장 개인의 기업 설립까지 허용할지는 아직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최근 국가 기업의 외피를 쓴 사실상의 개인기업이 전국에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고 있다. 개인 기업의 설립은 이미 피할 수 없는 대세가 될 것으로 전망된다. 기존 기업에 대한 국가의 간부 임명권이 크게 위축되고 민주주의 욕구도 크게 높아질 것으로 전망된다. 근로자들은 열심히 일해도 타 공장과 비교해 수익에 차이가 있으면 무능한 간부에게 책임을 물을 수도 있다. 이럴 경우 자신들 손으로 유능한 사업가를 뽑겠다고 나설 수도 있다. 이 과정에서 북한 체제를 지탱해 온 출신 성분에 기초한 중앙집권적 간부선발 원칙이 무너지는 수순을 밟을 수도 있다. 크게는 노동당의 기능과 역할도 대폭 축소될 수 있다. 기존 공장과 기업소에서는 ‘간부사업권’(핵심 간부 평가 및 말단 간부 임면권)을 갖고 있는 공장과 기업소의 당 비서가 절대적인 권한을 갖고 있다. 하지만 신경제체계가 본격 시행되면 현장에서 성과를 책임져야 하는 행정일꾼의 권한이 훨씬 강화된다. 이 때문에 벌써부터 공장과 기업소에서 행정일꾼과 노동자들이 신경제체계를 지지하고 환영하는 분위기라고 북한 소식통은 전했다. 신경제체계 도입은 북한의 개방도 촉진시킬 것으로 전망된다. 지난해 6·28 경제관리개선조치 선포 이후 북한은 300여 개의 시범기업을 지정했다. 여기서 우수한 성과를 거둔 기업은 대개 외국에서 주문을 받아 생산한 피복 공장이나 광물자원을 해외에 수출한 기업들이었다. 즉 해외의 자본과 북한의 값싼 노동력의 결합 또는 지하자원의 수출이 현재 북한 기업이 살아남을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모델임이 확인됐다. 앞으로 이런 추이가 가속화되면 외국과의 협력에 사활을 거는 기업이 크게 늘어 북한 사회를 지탱해 온 폐쇄의 장벽도 점차 낮아질 것으로 전망된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북한이 전국적인 도입을 결정한 신경제체계는 북한 경제체제의 사회주의적 성격을 완전히 바꿀 수 있는 혁명적 발상이다. 김정일 정권 시절인 2002년 북한이 실시한 7·1조치는 북한 반(反)개혁세력의 저항으로 3년도 안 돼 좌초했다. 이번 신경제체계의 미래도 쉽게 장담하긴 어렵다. 하지만 이번 조치가 성공적으로 추진된다면 시장경제화는 거스를 수 없는 대세로 자리매김할 것으로 예상된다. 신경제체계는 7·1조치에 비해 내용에서 훨씬 파격적이기 때문에 파장도 클 것으로 보인다. 》 ○ 신경제체계의 내용과 의미 신경제체계는 기업경영에서 국가의 계획과 통제를 최대한 배격하고 획기적인 자율성을 인정한 것이 핵심이다. 생산자재 및 수단을 자율적으로 시장에서 해결하라고 요구한 것은 기업들에 대해 알아서 생존하라고 주문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기존의 7·1조치는 국가가 개설한 ‘사회주의 물자공급시장’에서 공장 기업소가 거래하도록 했다. 하지만 1990년대 고난의 행군을 거치면서 대부분의 기업이 가동을 중단했기 때문에 원자재를 요구하는 기업도 없었다. 또 기업 운영으로 창출되는 이윤이 종업원들에게 돌아가지 않아 생산 재개에 적극적인 사람도 없었다. 오히려 기업이 멈춰서야 여유 시간을 활용해 장사에 뛰어들 수 있어 종업원들은 가동 중단을 원하는 게 현실이었다. 신경제체계는 생산과 가격 책정 권한까지 기업과 시장에 일임함으로써 종업원들이 소속 공장의 가동에 이해관계를 갖고 적극적으로 나설 수 있는 여지를 만들었다. 하지만 기업이 창출하는 수익이 장사 수익보다 많아야 근로자들이 적극적일 것으로 보인다. 앞으로 북한의 기업들은 경영으로 창출한 이익의 일부분만 국가에 세금 형태로 낼 것으로 보인다. 각 공장 기업소가 생산제품을 시장의 상황에 따라 자율적으로 결정하도록 하고 필요할 경우 업종 전환까지 허용한 조치는 신경제체계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상품시장의 사실상 90% 이상을 중국 제품이 점령하고 있는 현실을 감안한 조치로 보인다. 북한 공장 기업소가 살아남으려면 중국산과 경쟁을 해야 하지만 기계 화학 섬유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생산경쟁력이나 원가가 중국산에 뒤지는 게 현실이다. 북한은 기업 자율성 부여로 소비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상품 생산을 통해 현실을 극복하려 하고 있다. 이 조치는 기업 경영에 시장의 경쟁체제를 허용함으로써 ‘계획경제를 시장경제로 바꾸는 첫걸음’으로 해석할 수 있다. 각 기업에 불필요한 근로자에 대한 구조조정 권한을 준 것도 북한 사상 최초의 일이다. 북한은 국가의 의무고용 보장을 사회주의 체제의 우월성으로 선전해왔다. 하지만 대다수 공장 기업소가 생산을 중단하면서 의무고용의 폐해가 심각한 사회문제로 떠올랐다. 고용자는 몇만 명인데 사실상 가동이 중단된 기업이 수없이 많기 때문이다. 가동 중단 기업의 노동자들은 생활총화 같은 조직생활만 직장에서 하고, 도로 건설 등 비생산적 활동에 동원됐다. 임금 자율화는 7·1조치에서 근로자의 인센티브를 보장해 준 것보다 한발 더 나아간 것으로 볼 수 있다. 또 외화계좌의 허용으로 특권층 극소수가 각종 이권을 독점해온 해외 무역 권한을 각 기업에 나눠주려는 움직임도 눈길을 끄는 대목이다.○ 신경제체계의 미래와 과제는 신경제체계가 안착하기 위해선 넘어야 할 산이 많다. 시장경제 이해 및 경험 부족으로 비슷한 상품을 생산하는 기업이 난무할 가능성도 크다. 또 바닥에 떨어진 대외신용도, 통제에 따른 시장 위축, 원자재 공급처 확보, 내수 구매력 제고 등 하나하나가 신경제체계의 성패와 직결되는 난제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2002년 7·1조치가 나오던 때보다 신경제체계가 많은 점에서 긍정적이다. 우선 김정은 노동당 제1비서가 파탄에 빠진 경제를 살리지 못하면 체제에 미래가 없다는 점을 확실히 인식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는 지난해 4월 “우리 인민이 다시는 허리띠를 조이지 않게 하겠다”고 공식 선포했다. 김정은은 노동당 행정부에 경제발전전략을 연구하는 ‘전략문제연구소’를 신설하고 직접 챙겼다. 지난해 6월 28일 새로운 경제관리 개선 조치를 발표하고 산업과 농업의 개혁을 기정사실화했다. 이후 전국에 300여 개의 신경제체계 시범단위가 만들어져 1년간 가동됐다. 신경제체계의 실행 사령탑이 대표적 경제개혁파인 박봉주 총리라는 점도 눈길을 끈다. 박 총리는 2002년 7·1조치의 주도자로 알려졌지만 수구세력의 반발로 좌천됐다가 올 4월 총리로 재기용됐다. 그는 누구보다도 경제개혁 현장의 실정과 어려움을 잘 알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7·1조치를 좌초시켰던 군부 등 북한의 수구세력이 김정은 시대에서 대폭 물갈이되면서 크게 위축된 것도 안정적 개혁 조치를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살아남은 수구세력도 김정은의 말 한마디에 언제 좌천될지 몰라 적극적인 의견 개진을 피하고 있다. 국내외 여론이 경제개혁의 필요성에 적극 공감하는 것도 10년 전과 달라진 환경이다. 또 사실상의 가족영농제 도입으로 평가되는 농업개혁이 본궤도에 오르면서 당분간 북한에선 개혁이 시대의 화두로 자리 잡을 것으로 보인다. 조동호 이화여대 북한학과 교수는 “6·25전쟁 이후 가장 획기적인 조치로 볼 수 있지만 물자 부족과 원자재 조달시장의 미비로 성공 가능성에 대해선 회의적”이라고 말했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북한이 공장과 기업소의 자율성을 전면적으로 보장하는 대대적인 개혁을 추진하고 있다. 내년부터 실시될 이번 개혁은 생산과 판매, 경영과 고용은 물론이고 해외 수출까지도 모두 기업소 및 공장의 책임자가 결정할 수 있도록 자율권을 주는 것이어서 북한이 사실상 ‘계획경제’에서 ‘시장경제’로 방향을 트는 ‘북한 정권 출범 후 가장 획기적인 경제개혁’이 될 것으로 보인다. 전문가들은 북한의 이번 조치는 1978년 중국의 개혁개방에 버금가는 이정표가 될 것으로 보고 있다. 30일 북한 소식통에 따르면 북한은 최근 평양에서 공장과 기업소 책임일꾼 및 재정일꾼을 상대로 새로운 ‘경제관리개선체계’(이하 신경제체계)에 대해 집중 교육을 시키고 있다. 교육은 중앙에서 시작해 앞으로 도, 시, 군 단위로 내려가면서 진행될 예정이다. 이번 조치는 내년 1월부터 전면 도입될 것으로 알려졌다. 신경제체계의 핵심은 국가 기간 및 군수 산업을 제외한 북한 전역의 공장과 기업소에 경영 자율성을 100%에 가깝게 부여하는 것이다. 먼저 원료 및 자재의 구입과 생산 제품의 판매 가격을 국가의 승인 없이 공장과 기업소가 자율적으로 결정할 수 있다. 또 생산 품목에 대한 결정권을 생산단위에 부여해 기업의 업종 전환이 가능하도록 했다. 생산 공정을 신설하는 것도 허용된다. ‘노력(인력) 관리’의 자율화도 이번 개혁의 핵심 내용이다. 공장과 기업소가 자체적으로 불필요한 인원을 줄이거나 새로 인력을 충원할 수 있도록 했다. 사회주의 국가에서 가장 중요한 고용과 해고를 기업이 결정할 수 있게 한 것이다. 현재는 노동국(노동부)의 승인을 반드시 받아야 한다. 노동자 임금도 기업소가 직접 결정할 수 있어 인센티브는 물론이고 생산 독려를 위한 임금 차등화가 전면 가능하게 됐다. 또 모든 공장과 기업소에 ‘내화 계좌’와 함께 ‘외화 계좌’ 개설도 허용했다. 기업이 독자적으로 수출입을 결정하고 해외 투자를 유치할 수도 있는 것이다. 조봉현 기업은행 경제연구소 북한경제팀장은 “이번 조치는 북한 역사상 가장 획기적인 경제개혁”이라며 “북한이 계획경제를 폐기하고 시장경제를 변형한 ‘우리(북한)식 시장경제’로 가기 위한 첫걸음에 들어선 것으로 볼 수 있다”고 분석했다. 북한은 지난해 6월 28일 경제관리개선조치를 내놓은 이후 지난해 8월부터 전국 우수 공장 300여 곳에 완전독립채산제를 도입해 1년간 시범 운영했다. 신경제체계는 시범 운영을 통해 이런 조치가 성공적이라고 자평한 결과이며, 보다 확대된 개혁 조치를 북한 전역에서 시행하기로 최종 결정한 데 따른 것으로 알려졌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