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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이 흐른 지금 와서 보니 제가 아이들을 살린 게 아니라 아이들이 저를 살렸어요. 그때 저는 선생이라고 볼 수 없었어요. 그냥 착실한 월급쟁이였죠. ‘하룻밤만 재워 달라’며 나를 찾아온 아이들의 용기와 의지가 저를 선생으로 만들었습니다.”학교부적응 청소년 707명과 함께 한 삶을 담은 신간 ‘선생 박주정과 707명의 아이들’(김영사)을 펴낸 박주정 광주 진남중 교장(60)이 8일 전화인터뷰에서 아이들과의 첫 만남을 떠올리며 이렇게 말했다. 그날은 1993년 6월 2일 늦은 밤이었다. 2년차 초보교사였던 그의 집 앞에 고등학생 8명이 들이닥쳤다. 초인종도 없는 대문 앞에서 주먹으로 문을 쾅쾅 두드리는 아이들은 이미 술에 만취한 상태였다. 문을 열고 나가보니 그가 담임을 맡고 있는 광주의 한 실업계고의 ‘문제아’들이었다. 밤늦게 찾아온 아이들을 차마 내쫓을 수 없어 받아줬더니, 하루 이틀 그렇게 5개월이 흘렀다. 그 기간 그에게 “우리 아이가 어디 있느냐”고 전화하는 학부모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는 “33㎡ 남짓한 집에서 저와 아내, 딸 세 식구 살기도 빠듯했지만 가족마저 외면한 오갈 데 없는 아이들을 길바닥에 내쫓을 수는 없어서 시작한 일”이라고 했다.어쩔 수 없이 시작한 동거가 아이들을 변화시켰다. 그의 집에서 함께 공부한 아이들이 학기말 고사에서 전교 1등부터 7등까지 차지한 것. 박 교육장은 “새벽 4시에 일어나 주유소 아르바이트를 하고 오후엔 그렇게 번 돈으로 기능사 자격증 학원을 다녔다”며 “‘문제아’인 줄 알았던 아이들이 사실은 생의 의지를 갖고 있었던 것”이라고 했다. 꿈이 생긴 아이들은 그해 10월 박 교장의 집을 떠나며, 오토바이를 절도한 혐의로 경찰 조사를 받고 있었던 또래 무리를 그의 집으로 데려왔다. “우린 이제 사람 됐으니 이젠 이놈들 사람 좀 만들어 달라”면서. “이 아이들을 나까지 포기하면 안 될 것 같아서 4000만 원 대출 받아 학교 근처 광주의 방 다섯 칸짜리 폐가를 전세로 얻었죠. 함께 먹고 살려고요. 그렇게 10년간 함께 지낸 학생 수가 총 707명입니다. 제가 선택해서 집으로 데려온 아이는 단 한 명도 없었어요. 아이들이 스스로 자기와 닮은 아이들을 집으로 데려왔습니다.” 당시를 회상하던 박 교육장은 “지금 생각해보면 늘 아슬아슬한 순간의 연속이었다. 학생들이 나를 향해 욕설을 내뱉고 주먹을 휘두르는 위험천만한 일들이 벌어졌다”고 했다. 진수(가명)는 그를 향해 “꺼져, 이 XX야”란 폭언을 달고 살았던 학생이었다. 또래와 어울리지 못하고 늘 겉돌았다. 어느 날 새벽, 4시간 동안 아무런 말없이 진수 곁에 앉아 모든 폭언과 분노를 들어주던 그에게 진수가 속내를 털어놨다. 부모에게 버림받고 자신을 학대하는 할아버지와 함께 살면서 늘 자살 충동에 사로잡혀 있었다는 얘기였다. 그는 “나는 진수를 붙들고 같이 울어준 것밖에 한 게 없는데, 그날 이후 진수는 마음을 다잡고 학업에 열중해 대학에서 문예창작과를 전공한 뒤 지금은 경기 용인에서 책방을 운영하고 있다”고 했다.“제 목을 조르면서 분노를 쏟아내던 한 아이가 어느 날 제가 와 눈물을 흘리면서 30만 원만 빌려달라더군요. 문제집을 사서 공부해보고 싶다고요. 그 아이는 2년 뒤 해군사관학교에 들어가 지금은 대령이 됐어요. 그때 아이들의 몸부림엔 ‘살려 달라’는 외침이 담겨 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하지만 혼자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학생들의 식비와 교재비를 충당하기 위해 딸아이 돌 반지까지 전당포에 넘겼지만 빚이 계속 불어났다. 그는 “지금까지도 그때 진 빚이 1억4000만원 가까이 남아 있다”며 “이 일을 나 혼자 할 게 아니라 제도로 만들어 사회가 해야 된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고 했다. 그는 2004년부터 광주광역시교육청 장학사로 근무하며 학교부적응 학생을 위한 단기 위탁교육시설 ‘금란교실’을 2004년 국내 최초로 개설했다. 2008년에는 학교부적응 학생과 학업중도탈락 학생을 전담 교육하는 대안학교 ‘용연학교’를 설립했다. 2015년엔 자살 등 위기상황에 놓인 학생들을 위해 24시간 신속 대응하는 ‘부르미’를 창설해 초대 단장을 맡았다. 20년간 교육청의 장학사로 각종 교권침해와 학교폭력, 극단선택 현장을 조사한 그는 “죽도록 노력했지만 아이들은 여전히 자살을 시도하고 학교폭력 수는 줄지 않고 있다”며 “가만 생각해 보니 부모라는 한 축이 무너져 있던 것”이라고 진단했다. 그러면서 “일탈의 기로에 놓인 아이의 손을 부모가 놓아버리면 아이들은 무너져 내린다”며 “아이들에게는 많은 사람이 필요한 게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을 믿어줄 한 사람이 필요하다”고 했다. 후배 교사들에게는 “교권침해 문제로 괴로워하고 있다는 걸 선배로서 누구보다 잘 알지만, 그 어떤 때에도 교사의 책임과 의무는 변하지 않는다”는 말을 남겼다. “아이들은 복도에서 스치듯 던진 선생님의 한마디와 눈빛을 평생 간직합니다. 우리의 한마디가 한 아이에겐 평생의 원망이 될 수도, 희망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최근 책이 출간되고 옛 제자들을 만난 박 교장은 1993년 6월 자신의 집을 찾아온 제자들에게 “그때 왜 하필 나를 찾아왔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그러자 어른이 된 제자가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그때 선생님은 학교 결석 일수가 잦아서 퇴학당할 뻔한 학생들을 어떻게든 졸업시키려고 출석부를 품에 안고 살았잖아요. 혹시라도 다른 교과 선생님들이 결석 처리해 출석 일수가 모자라면 우리가 퇴학당할까 봐. 그런 ‘또라이’ 같은 선생님이라서 믿고 집을 찾아갔죠.“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우리는 조선 사람이다. … 4000년을 통하여 역사적 변천과 정치적 흥체가 반복무상하였다. 그러나 언제든지 조선인의 조선이라는 관념은 없어져 본 일이 없었으며, … 이러한 의미에서 (조선의 멸망은) 역대 왕조 자체의 정치적 흥망에 불과한 것이고 결코 조선민족 자체의 근본적 멸망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1925년 하와이에서 열린 제1차 태평양회의(범태평양 민족회의)에 동아일보 특파원 자격을 겸해 참석한 고하 송진우 선생(1890∼1945)이 귀국 후 동아일보에 연재한 논설 ‘세계대세와 조선의 장래’의 일부다. 그해 8월 28일∼9월 6일 10회에 걸쳐 실은 이 논설에서 고하는 비록 조선은 망했으나 조선인의 정체성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음을 강조했다. 그러면서 “조선 문제는 민족 자체의 단합이 확립하는 그날로부터 해결될 것을 확신한다”고 했다. 이 논설은 신동아가 1966년 기획한 ‘근대 한국 명논설’ 66편 중 하나로 선정돼 1967년 신동아 신년호 별책부록으로도 간행됐다. 고하 선생은 일제강점기 3·1운동을 기획한 48인 중 한 명으로 1년 반 동안 옥고를 치른 독립운동가이자 동아일보 3대, 6대, 8대 사장을 지낸 언론인이었으며, 중앙학교 교장으로 일하면서 민족정신을 고취한 교육자, 광복 후 한국민주당의 초대 수석총무(당수)로 민주국가 건국에 앞장선 정치인이었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됐다. 재단법인 고하송진우선생기념사업회(이사장 김창식)는 1일 고하의 글 49편과 그와 관련된 인물평, 일화 등을 담은 자료 67편을 엮은 ‘거인의 숨결’(이야기의숲)을 펴냈다. 동아일보 창간 70주년과 고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1990년 출간했던 책을 33년 만에 개정증보한 것이다. 개정증보판엔 고하를 평가하는 최근의 새로운 글들이 포함됐다. 박찬욱 서울대 명예교수(정치외교학부)는 올 4월 서울 YMCA 창립 120주년 기념 세미나에서 발표한 글에서 “고하 선생은 인류 보편의 가치가 된 자유, 평등, 민주 사상을 수용한 진보적 자유민주주의자”라고 강조했다. 고하의 민족주의와 함께 그의 사상이 지닌 근대성도 평가돼야 한다는 것이다. 좌우익의 분열 상황에서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한 동시에 사회주의를 포용했던 고하의 중용 정신을 조명한 글도 실렸다. 박명림 연세대 대학원 지역학협동과정 교수는 2011년 고하 탄생 121주년 강연 ‘송진우의 중용적 진보와 근대국민국가 건설’에서 “고하 선생은 동아일보에 다수의 사회주의자들도 기고할 수 있도록 해 이념적 포용의 폭을 보여줬다”고 했다. 광복 후 공산주의에 대해선 분명한 반대 노선을 견지했으나, 사회주의 사상에 대해 자유롭게 토론할 공론장을 열어 뒀다는 평가다. 박 교수는 한민당의 정강정책과 ‘경제적 민주주의’를 주창한 고하의 발언을 토대로 “고하는 복지국가와 사회적 시장경제 모델을 반세기 전 이미 천명한 선구자”라고 봤다. 이어 “중용적·통합적 개혁주의의 길을 갔던 이 뛰어난 선각의 길을 다시 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고 강조했다. 고하의 마지막 논설도 실렸다. 그는 1945년 12월 29일 동아일보에 게재된 담화 ‘최후까지 투쟁하자’에서 “이 강토 위에 있는 동지는 피 한 방울이 남지 않도록 결사적 용투로서 우리가 당당히 가져야 할 민족주권을 찾아야 할 것”이라고 했다. 신탁통치 찬성과 반대의 소용돌이 속에서 신중한 반탁론을 폈던 그는 그해 12월 30일 서울 종로구 자택에서 극우계 청년 한현우 등에게 암살됐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서울의 차이나타운’으로 불리기도 하는 서울 영등포구 대림동은 훠궈 등 중국 현지 음식 가게 등이 유명하지만 안쪽 노후주택가는 대체로 ‘가보고 싶은 동네’에 꼽히는 편은 아니다. 하지만 올해 5월 깎아지른 듯한 바위산을 닮은 건물 한 채가 들어서며 동네 분위기가 달라졌다는 평가가 나온다. 지하 1층, 지상 6층 규모인 이 건물의 이름은 ‘로스트 스톤(Lost Stone)’을 줄인 ‘로스톤’. 너비와 생김새가 다른 콘크리트 소재 바위 기둥 48개가 고인돌처럼 층층이 천장을 받치고 있는 이색적인 모양새다. 1∼3층은 카페로, 4층은 갤러리로 운영 중인 이 건물을 보려고 최근 이 동네를 찾는 20, 30대가 적지 않다. 소셜미디어 등에는 “대림동에 이런 현대적인 건물이 있을 거라곤 생각도 못 했다”는 방문객들의 반응이 이어지고 있다. 7일 오후 이 건물 카페에선 손님들이 굴곡진 콘크리트 바위에 기대앉은 채 창밖 동네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건물을 디자인한 정의엽 에이엔디건축사사무소 대표(47·사진)는 기자와 만나 “이곳을 찾은 이들이 바위로 둘러싸인 산 속에 들어온 것처럼 느꼈으면 좋겠다”고 했다. 정 대표는 경기 파주시의 카페 ‘루버월’로 2016년 한국건축가협회상을, 전남 여수시 상가주택 ‘웨이브월’로 2018년 대한민국 신진건축사대상 우수상을 받았다. 정 대표가 처음 ‘로스톤’의 이미지를 떠올린 건 2020년 10월. 제주 가파도를 여행할 때였다. 그는 “제주 바다의 수평선과 사람이 발 딛고 설 수 있는 땅 사이에 솟아오른 바위를 보며 내가 자연과 동떨어진 존재가 아니라 연결돼 있는 일부임을 깨달았다”며 “자연과 인간 사이의 단절을 극복할 수 있는 매개로 바위를 떠올리게 됐다”고 했다. 그때부터 그의 스케치북엔 바위에 기대거나 누워 쉬는 사람, 층층이 쌓아올린 바위 건축물의 이미지가 쌓였다. 이미지가 실현된 건 지난해 초 대림동 노후주택을 물려받은 40대 건축주를 만나면서다. 건축주는 “할아버지의 오래된 집처럼 오랫동안 이 동네에서 버틸 수 있는 건축물을 짓고 싶다”고 했다. 정 대표의 머릿속엔 바위산의 이미지가 떠올랐다고 한다. 바위를 형상화한 콘크리트 기둥들 사이엔 전면 창을 내 안팎의 시선이 단절되지 않고 통하도록 설계했다. 정 대표는 “이 건축물이 ‘차이나타운’이라는 동네의 경계를 허물고 많은 이들이 드나드는 문화공간이 되길 바랐다”고 했다. 최근엔 일본인 관광객으로부터 “서울을 여행하다가 이 건축물을 보기 위해 대림동을 처음 와 봤다”는 인스타그램 메시지를 받았다고 한다. “로스톤 안에서 여러 언어가 뒤섞이는 모습을 상상해 봤어요. 앞으로도 이 동네를 찾는 이들이 더욱 많아지길 바랍니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코스닥 상장사인 KX이노베이션이 방송 채널 ‘리얼TV’를 인수했다. 리얼TV는 다큐멘터리와 체험·관찰 프로그램 등 사실에 기반한 다양한 장르를 방송하는 채널이다.KX이노베이션은 “최근 리얼TV 인수를 마무리하고 앞으로 한 달여 동안 프로그램 개편을 진행해 다음달 초 ‘Real New! New Real TV!’라는 슬로건으로 시청자들을 찾아간다”고 8일 밝혔다. 개편 뒤엔 먼저 로마 검투사들의 이야기를 담은 다큐멘터리 ‘콜로세움’을 선보일 예정이다. ‘콜로세움’은 제작비 120억 원이 투입된 기대작으로 꼽힌다. 이밖에도 오스트리아 공영방송 ORF의 명품 다큐멘터리 시리즈 등 해외 우수 다큐멘터리를 소개한다. SK브로드밴드와 공동 제작한 여행 리얼리티 프로그램 ‘트립인코리아 시즌2’도 국내에서 처음으로 방송한다.2005년 개국한 리얼TV는 다채로운 다큐멘터리와 리얼리티, 교양프로그램 등을 선보이며 유료방송 시장에서 독자적인 시청자 층을 확보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한찬수 KX이노베이션 대표는 “리얼TV의 로열티 높은 시청자 층을 기반으로 다양한 장르를 선보여 채널 역량을 강화하겠다”고 말했다. KX이노베이션은 드라마 채널 디원, 영화 채널 엠플렉스, 버라이어티 채널 엑스원 등을 보유하고 있다. 2000년 방송 송출 사업을 시작해 현재 80여개 채널을 각 가구에 전달하며 방송 송출 시장에서 1위를 차지하고 있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1950년 1월 30일 한반도의 운명을 바꾼 변심이 있었다. 1949년 12월 말까지만 해도 남한을 침공하려는 김일성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았던 소련이 돌연 평양에 전보를 보낸 것. ‘소련은 수시로 김일성을 만날 준비가 돼 있고, 그를 도우려 한다’는 내용의 이 전보는 김일성이 6·25전쟁을 일으키도록 도운 결정적 신호로 꼽힌다. 소련의 변심에는 극동아시아에서 영향력을 확장하려는 셈법이 깔려 있었다는 게 중국 화둥사범대 냉전사연구센터장인 저자의 분석이다. 스탈린이 전보를 보내기 직전인 1950년 1월 26일 중국은 소련군이 주둔하던 뤼순항과 다롄항의 주권을 2년 내 돌려달라고 소련에 요구했고, 소련은 이를 받아들이며 동맹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으로 소련은 태평양으로 나아갈 전략적 거점 2곳을 잃었다. 이때부터 소련은 한반도 전쟁으로 인한 실보다 득이 더 크다고 봤다. 전쟁에서 이기면 한반도 동북 연안에 영향력을 확고히 해 눈치 보지 않고 태평양으로 나아갈 부동항을 유지할 수 있었다. 패하더라도 손해 볼 게 없었다. 동아시아의 군사적 긴장 상태가 지속되면 중국 역시 소련군의 주둔을 원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저자는 미국과 소련, 중국의 기밀문서와 정부 기록물 등을 바탕으로 6·25전쟁을 둘러싼 주변국의 속내를 분석했다. 표면 위로 드러난 각국의 결정 이면에 숨겨진 의도를 드러내고, 그에 대한 평가를 담았다. 미국의 참전은 소련 때문이었다고 봤다. 전쟁 발발 이튿날 “북한의 남한 침공은 소련이 발동, 지원, 그리고 종용한 것”이라고 말한 딘 애치슨 미국 국무장관의 발언에서도 엿볼 수 있다. 미국은 사회주의 진영의 우두머리인 소련을 저지하기 위해 참전했고, 실질적인 적은 소련이라고 인식했다. 저자는 미국이 소련에 대해선 정확한 판단을 내린 반면 중국에 대해선 오판했다고 지적한다. 당시 미국 정부는 수년간 전쟁을 지속해 온 중국 군대가 전쟁을 할 수 없는 상태였다고 여겼다. 그러나 저자는 중국이 전쟁 발발 초기부터 한반도 출병을 주동적으로 제기했다고 봤다. 1950년 7월 2일 중국 총리 저우언라이는 로신 중국 주재 소련 대사를 만나 “미군이 38선을 넘으면 중국 군대는 인민군으로 위장해 한반도에 들어가 작전할 수 있다”고 했다. 얼마 뒤 마오쩌둥은 중국군 32만 명을 북한에 원조할 수 있다는 입장을 전했다. 이 같은 정황을 토대로 저자는 “마오쩌둥 본인은 시종 반드시 출병해 북한을 원조해야 함을 주장했다”고 봤다. 이는 마오쩌둥이 참전에 대해 신중했지만 스탈린에게 끌려갔다는 통설과는 다른 것이다. 저자는 중국의 출병이 사회주의 진영에서 중국의 위상을 높이려는 의도가 있었다고 본다. 또 중국이 전쟁 초기 소기의 목적을 이뤘음에도 1951년 1월 유엔의 정전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은 건 오판이었다고 말한다. 중국은 정전협정 막바지인 1953년 7월 16일에도 전투를 일으켜 7월 27일 협정 체결 직전까지 국군과 유엔군 7만8000여 명을 죽거나 다치게 했다. 이 결정 역시 중국이 막대한 대가를 치렀을 뿐 아니라 중국에 대한 미국의 불신을 키우는 단초를 제공했다는 것이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달 품은 둥근 달항아리, 대장부 육각 달항아리, 계란 달항아리…. 공군 교육사령부 교육대대장(중령) 이종열 씨(52)는 자신이 수집한 달항아리에 이 같은 이름을 붙였다. 높이와 몸체 지름이 각각 53cm로 같은 달항아리에서 보름달을, 하단부가 살짝 찌그러진 육중한 달항아리에서는 ‘대장부’를 봤기 때문이다. 높이 40cm가 넘는 둥그런 백자인 백자대호(白磁大壺)는 흔히 달항아리로 불린다. 이 씨는 2014년부터 9년 동안 중국과 일본에서 유통되는 조선 백자대호 35점을 사들인 이야기를 담은 에세이 ‘달항아리, 하양꽃으로 피다’(궁편책)를 최근 펴냈다. 경남 진주에 사는 이 씨는 지난달 31일 전화 인터뷰에서 “군인 월급으로는 역부족이었지만 내 뜻에 공감해 마이너스 통장을 내주고 적금까지 깨서 보태준 가족과 친구들이 있었기에 수집이 가능했다”며 웃었다. 이 씨와 달항아리의 인연은 201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매실주를 담을 용기를 찾다가 서울 종로구 인사동에서 현대 작가가 만든 달항아리 1점을 처음 구입한 게 시작이었다. 이 씨는 “가져온 달항아리를 매일 들여다보다 사랑에 빠졌다. 이후 한국 도자 역사를 공부하며 조선백자의 설움을 알게 됐다”고 했다. 임진왜란과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수많은 백자대호가 파괴되거나 반출된 것으로 추정된다. 성하게 남은 백자대호도 6·25전쟁 때 폭격 등으로 파괴됐다. 그나마 북한에 남은 백자대호 역시 중국 단둥 등을 통해 적잖게 팔려나가 해외를 떠도는 실정이다. “타지를 떠도는 조선백자를 고국으로 데려와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그때부터 매달 100만 원씩 모으고 적금을 깨 2014년 단둥에 나온 조선 후기 백자대호 1점을 사들인 게 컬렉션의 시작이었죠.” 이 씨는 진주에 사는 큰누나 자택의 일부 공간을 빌려 수집한 백자들을 보관하고 있다. 이 씨는 달항아리의 매력으로 불완전성을 꼽았다. 그는 “완벽한 구형을 이루는 달항아리는 없다”며 “당대 기술적 한계로 인한 불완전성이 현대에 제작된 달항아리와는 다른 조선 달항아리의 매력”이라고 했다. 내년 전역을 앞둔 그는 “조선 백자대호가 지닌 아름다움을 더 많은 이들과 나누고 싶다”며 “달항아리 박물관을 짓는 것이 목표”라고 했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우리 박물관의 한국실을 새롭게 단장하는 과정에 동행할 한국실 전담 큐레이터를 채용하고 싶습니다.” 지난해 6월 국립중앙박물관에 e메일이 도착했다. 발신자는 조선 회화 등 한국 문화재 1842점을 소장하고 있는 미국 세일럼시의 피보디에식스박물관. 한국실 확장 개편과 한국 문화재 특별전 기획을 주도할 전문가를 채용하는 데 지원을 요청한 것이다. 중앙박물관은 2009년부터 한국실 전담 큐레이터 채용을 원하는 해외 박물관에 3∼5년간 급여 일부 또는 전부를 지원하는 사업을 벌이고 있다. 피보디에식스박물관은 중앙박물관의 지원으로 지난달 한국 미술을 전공한 김지연 씨를 한국실 전담 큐레이터로 뽑았다. 이 박물관이 한국인을 채용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중앙박물관에 따르면 최근 피보디에식스박물관을 비롯해 미국과 캐나다, 독일의 박물관에서 그간 일본·중국 미술 전문가가 맡았던 한국실 큐레이터에 한국계 또는 한국인을 채용하는 사례가 잇따르고 있다. 지난해 10월 한국계 독일인 마리아 소보트카 씨가 독일 베를린 훔볼트포럼 큐레이터로 뽑혔고, 지난해 11월엔 한국계 캐나다인 권성연 씨가 캐나다 토론토 로열온타리오박물관 큐레이터로 채용됐다. 올해 1월엔 미국 덴버박물관 큐레이터로 박지영 씨가 뽑혔다. 한국 문화에 대한 세계인의 관심이 높아지자 해외 박물관들이 한국실 규모를 키우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신소연 중앙박물관 학예연구관은 “그동안 중앙박물관의 한국실 지원 사업은 국내 유물 대여, 교육 프로그램 운영, 보존처리 지원 등이 주를 이뤘는데 최근엔 한국실 전담 큐레이터 채용 지원에 대한 수요가 커졌다”고 말했다. 한인 큐레이터의 부상에 따라 해외 박물관이 선보이는 한국 문화재 전시의 흐름도 바뀌고 있다. 과거에는 주로 중앙박물관을 비롯한 우리 박물관에서 유물을 빌려가 소개하는 전시가 많았지만 최근엔 해당 박물관이 소장한 한국 문화재를 재조명하는 연구와 전시가 늘고 있다. 독일 훔볼트포럼은 올해 10월 특별전 ‘아리아리랑: 베를린 속 한국’을 열 계획이다. 박물관이 소장한 한국 문화재 50점을 통해 한국과 독일의 문화교류사를 조명하는 전시다. 미국 덴버박물관에선 올해 12월 분청사기 특별전 ‘무심한 듯 완벽한, 한국의 분청사기’를 연다. 신 연구관은 “한인 큐레이터의 부상으로 기획력이 돋보이는 특별전이 늘어났을 뿐 아니라 해외 박물관 수장고에 있던 한국 문화재들이 새롭게 조명받을 기회가 열렸다”고 말했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폭염이 기승을 부리는 요즘, 시원한 박물관으로 ‘박캉스(박물관+바캉스)’를 떠나 보면 어떨까. 주요 국립박물관장들로부터 올여름 볼만한 박물관 전시 3개를 추천받았다. 윤성용 국립중앙박물관장은 국립전주박물관에서 10월 29일까지 열리는 특별전 ‘아주 특별한 순간―그림으로 남기다’를 권했다. 윤 관장은 “가족, 연인과 함께 우리의 특별한 순간을 곱씹어볼 수 있는 전시”라고 소개했다. 전시에서 선보이는 조선 후기 문인화가 강세황(1713∼1791)의 ‘피금정도(披襟亭圖)’는 회양부사로 부임하는 아들을 배웅하는 길에 함께한 추억을 그린 작품이다. 휴전선 이북 강원 금성에 있는 피금정 풍경을 그린 이 작품엔 애틋한 부성애가 깃들어 있다. 이 밖에도 조선의 마지막 어진화사 채용신(1850∼1941)의 ‘평생도’ 등 삶의 뜻깊은 순간을 기록한 회화 83점을 볼 수 있다. 김종대 국립민속박물관장은 민속박물관 파주관에서 이달 20일까지 열리는 특별전 ‘하피첩: 아버지 정약용의 마음을 담은 글’을 추천했다. 전남 강진에서 유배 생활을 하던 다산 정약용(1762∼1836)이 1810년 두 아들에게 전한 글을 엮은 ‘하피첩’(보물) 원본을 공개하는 전시다. 부인이 보낸 치마를 잘라 만든 서첩엔 자식을 향한 아버지의 당부가 가득하다. 김 관장은 “가족에게 평소 못 한 말이 있다면 전시를 보며 나누길 바란다”고 했다. 윤태정 국립고궁박물관장 직무대리는 서울 종로구 고궁박물관 내 과학문화 상설전시실에서 국보 ‘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之圖) 각석’을 만나 보길 권했다. 1467개 별과 295개 별자리를 새긴 유물 위에 설치된 원형 모양의 디지털 스크린에 밤하늘 별들이 빼곡히 떠오르게 한 연출이 돋보인다. 윤 관장 직무대리는 “조선의 밤하늘에 떠오른 별자리를 재현한 실감 전시를 보며 무더위를 식힐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세 전시는 모두 무료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원래 있던 강원 원주를 떠나 서울 명동, 일본 오사카, 경복궁, 대전을 떠돌았던 국보 ‘원주 법천사지 지광국사탑’이 5년간의 보존 처리를 마치고 1일 고향인 강원 원주시 법천사지 유적전시관으로 돌아온다. 일제강점기였던 1911년 일본인에게 팔린 뒤 10여 차례 해체와 재조립을 겪으며 직선거리로만 따져도 1975km가량을 떠돌던 이 유물이 112년 만에 귀향하는 것이다. 지광국사탑은 고려시대 승려 지광국사(智光國師) 해린(984∼1070)의 사리와 유골이 봉안됐던 승탑이다. 31일 문화재청에 따르면 해린이 입적한 11세기 말 원주시 부론면 법천사지(사적)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화려한 조각이 장식돼 전 시대를 통틀어 가장 개성 있고 화려한 승탑으로 꼽힌다. 하지만 1911년 일본인에게 팔린 뒤 서울 명동으로 옮겨졌고, 이듬해 오사카로 반출되는 아픈 역사를 지녔다. 조선총독부 명령으로 반환돼 1915년 이전에 경복궁 경내에 자리 잡았으나, 6·25전쟁 때 옥개석(석탑이나 석등의 위를 덮는 돌) 등 유물 상단부가 폭격 피해로 파손됐다. 국립문화재연구원 문화재보존과학센터는 2016년 3월 지광국사탑의 부재(部材·석탑을 구성하는 다양한 석재) 33점을 해체한 뒤 대전 센터로 옮겨와 2020년까지 보존 처리 및 복원 작업을 벌였다. 이태종 국립문화재연구원 연구사는 “없어진 부재는 탑이 조성될 당시와 가장 유사한 석재를 구해 새로 제작했으며, 파손된 부재들을 접착해 잃어버렸던 본래 모습을 최대한 되찾고자 했다”고 설명했다. 국립문화재연구원은 부재 가운데 추가 점검이 필요한 옥개석과 탑신석(석탑의 몸을 이루는 돌) 등 2점을 제외한 31점을 법천사지 유적전시관으로 옮겨 상설 전시하기로 했다. 문화재청은 “해체된 부재들을 원래 모습대로 쌓아 올리는 최종 복원은 원주시와 협의해 결정할 방침”이라고 했다. 원래 자리는 부론면 법천사지 내 승탑원이지만 보존 환경 등을 고려해 법천사지 유적전시관에 복원하는 방안도 검토 중이다. 전시관은 원래 자리와 약 280m 떨어져 있으며, 법천사지 내에 있다. 10일 오후 2시 법천사지 유적전시관에서 탑의 귀향을 기념하는 행사가 열린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우리가 사랑한 한국의 문화재를 한국에 돌려주고 싶습니다.” 한국 문화재를 소장해 온 미국인 게리 민티어(77), 메리 앤 민티어(77) 부부가 근현대 한국의 서화·전적 150점과 1970년대 한국 풍경 사진 1366점 등 총 1516점을 지난해 1월 국외소재문화재재단에 기증하며 한 말이다. 31일 국외소재문화재재단에 따르면 부부는 평화봉사단의 일원으로 1969년부터 6년간 서울과 부산에 머물며 한국 문화재를 수집하고 당대 풍경 사진을 남겼다. 재단은 2019년 이들이 소장한 한국 문화재를 조사하며 처음 인연을 맺었다. 부부는 지난해 재단에 “우리가 세상을 떠난 뒤 컬렉션이 여기저기로 흩어지는 것보다는 우리보다 유물들을 더 사랑해줄 한국에 기증하고 싶다”고 밝혔다. 이에 1970년대 부산 풍경 사진 1366점은 올해 2월 부산박물관에, 서화·전적 유물 150점은 올해 5월 국립중앙도서관에 기증됐다. 대표적인 기증 작품은 조선 후기 화가 송수면(1847∼1916)의 ‘매화도(사진)’와 ‘묵죽도’다. 송수면은 소치 허련(1808∼1893)의 뒤를 이어 호남 문인화의 수준을 높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조선 중기 학자 이유창(1625∼1701)이 유교 경전 ‘춘추(春秋)’에서 일부를 모아 편집한 ‘춘추집주 권2’의 목판도 희소가치를 지닌 것으로 평가된다. 부산박물관은 4일부터 9월 3일까지 열리는 ‘1970년 부산, 평범한 일상 특별한 시선’ 전시에서 민티어 부부가 기증한 사진을 선보일 예정이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동아일보사와 인제군문화재단, 여초서예관이 공동 주최하는 ‘2023 여초서예대전’이 다음 달 18일까지 참가자를 모집한다. 여초서예대전은 한국 서예 대가인 여초(如初) 김응현(1927∼2007)의 서법 정신을 기리고, 서예의 저변을 확대하기 위해 열리는 대회다. 동아일보사와 서예 연구단체 동방연서회가 1961년 ‘전국 남녀 초중고등학교 학생휘호대회’를 개최한 게 시초다. 2000년 40회 대회를 끝으로 막을 내렸다가 2015년 ‘여초선생 추모 전국휘호대회’를 신설한 여초서예관이 2018년부터 전국학생휘호대회를 부활시켜 해마다 열고 있다. 강원 인제군 인제다목적체육관에서 9월 2일 오전 10시 개최되는 올해 대회는 제9회 여초전국휘호대회(성인부, 기로부)와 제46회 전국학생휘호대회(초등부, 중고등부)로 나뉜다. 성인부는 20세 이상, 기로부는 70세 이상(성인부로도 지원 가능)이 참가할 수 있다. 학생부에서 초등부 참가 대상은 8∼13세, 중고등부는 14∼19세다. 올해부터 성인부와 기로부에선 최근 서예계 트렌드를 반영해 ‘순수 캘리’ 부문이 신설된다. 학생부는 자유 주제로 사전 온라인 예선을 거쳐 본선을 진행한다. 성인부 대상 수상자에게는 상금 500만 원과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상을, 기로부 대상 수상자에게는 상금 200만 원을 각각 수여한다. 중고등부 대상 상금은 100만 원, 초등부 대상 상금은 50만 원이다. 참가 신청은 다음 달 18일까지 대회 홈페이지를 통해 할 수 있다. 기로부는 우편 신청도 가능하다. 참가비는 1만 원. 자세한 내용은 이메일(yeocho-donga@naver.com) 또는 전화로 문의하면 된다. 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자학과 부정의 역사관, (역대) 대통령 약점 찾기 위주의 문화를 바꾸는 전환점이 마련됐네요. 화합과 긍정의 문화 구축에 힘을 쏟겠습니다.” 역대 대통령들의 가족 6명이 함께 서울 종로구 청와대 본관에서 열리고 있는 특별전 ‘우리 대통령들의 이야기’를 29일 관람했다. 이들은 타자기, 운동화, 독서대 등 역대 대통령들의 흔적이 담긴 소품을 살펴본 뒤 “(대통령 가족들의) 이런 만남은 우리 정치사에서 처음 있는 일”이라며 “자유와 통합, 연대의 시대정신을 확장하는 데 힘쓰겠다”고 말했다. 문화체육관광부가 마련한 이날 자리에는 이승만 전 대통령의 며느리 조혜자 여사(81)와 윤보선 전 대통령의 아들 윤상구 동서코포레이션 대표(74), 김대중 전 대통령의 아들 김홍업 김대중평화센터 이사장(73), 박정희 전 대통령의 아들이자 박근혜 전 대통령의 동생인 박지만 EG 대표이사 회장(65), 김영삼 전 대통령의 아들 김현철 김영삼대통령기념재단 이사장(64), 노태우 전 대통령의 아들 노재헌 동아시아문화센터 이사장(58)이 참석했다. 역대 대통령의 가족들은 통합에 뜻을 모았다. 조 여사는 “외교 인프라가 부족하던 그 시절 아버님은 직접 외교 문서를 쓰셨고 한미동맹 관련 문서를 작성하셨다. 자유민주주의 체제 구축과 한미동맹이 한국 발전과 국민 통합의 출발점”이라고 했다. 윤 대표는 “여기 전시실에는 여당도, 야당도 없다”며 “나라 발전의 집념, 국민 사랑과 통합의 대한민국만이 살아서 숨 쉬고 있다”고 말했다. 김홍업 이사장은 1998년 김대중 당시 대통령이 최규하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전 대통령 부부를 청와대에 초청한 기념사진을 본 뒤 “아버지는 회고록에서 이 일에 대해 ‘국민들에게 통합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었다’고 했다”고 밝혔다. 박 회장은 “아버지가 가난 극복과 조국 근대화에 나선 건 진정한 국민 통합을 위한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고 했다. 김현철 이사장은 부친의 낡은 조깅화를 바라보며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 유훈처럼 강조하신 말이 통합과 화합이었다. 이는 민주화 이후 우리 정치권에 던지는 주문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노 이사장 역시 “아버지 재임 중 개최된 88 서울 올림픽과 북방외교에 대한 집념은 국민 통합의 지평을 뚜렷이 확장하기 위해서였다”고 했다. 박보균 문체부 장관은 “역대 대통령 가족들이 현대사의 갈등과 대립을 극복하고, 통합과 전진을 위한 대한민국의 미래상을 만들자고 다짐했다는 점에서 이번 만남의 의미가 있다”고 밝혔다. 청와대 개방 1주년을 기념해 지난달 1일 개막한 ‘우리 대통령들의 이야기’ 전시는 다음 달 28일까지 열린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노루였어? 아니면 고라니?” 2013년 어느 날 산길을 운전하던 저자는 도로 위에 뛰어든 한 동물과 맞닥뜨렸다. 그땐 철석같이 사슴이라고 생각했는데, 얼마 뒤 그가 본 동물이 노루인지 고라니인지 묻는 지인의 질문에 답하지 못했다. 이름은 익숙하지만 이 동물들이 서로 어떻게 다른지 전혀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그제야 깨닫게 된 것이다. 사진작가인 저자는 그날 이후 10년간 충남 서천군 국립생태원과 전남 순천시의 전남야생동물구조센터, 비무장지대(DMZ)를 다니며 고라니를 찍었다. 그리고 고라니 200여 마리를 만난 순간을 50여 마리의 사진과 함께 책에 담았다. 저자와 눈을 맞출 때까지 오래 기다려 포착한 고라니의 얼굴들은 ‘고라니’라는 하나의 이름으로 뭉뚱그리기 어려울 정도로 각양각색이다. 긴장을 푼 고라니의 얼굴은 너무나 예쁘다. 저자는 “함께 보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처음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비슷하지만 똑같은 얼굴은 없다”고 했다. 코끝에 땅콩 같은 작은 혹이 붙은 ‘땅콩이’, 눈매가 삼각형을 닮은 ‘세모’, 한쪽 눈 없이 태어난 ‘자주’ 등 이름도 지어줬다. 도로 위에 툭 튀어나와 운전을 방해하고, 작물을 먹어치워 농가에 피해를 주는 동물로 여겨져 온 고라니에게 생명을 불어넣은 책이다. 저자는 고라니의 얼굴을 기록하는 ‘널 사랑하지 않아’ 프로젝트 등으로 올해 제13회 일우사진상(다큐멘터리 부문)을 받았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중국 역사상 가장 단명한 수나라(581∼618년)의 역사를 기록한 ‘수서(隋書)’가 국내 처음으로 완역됐다. 지식을만드는지식(대표 박영률)은 총 85권에 이르는 수서를 전체 5944쪽 분량 13권(사진)으로 완역해 25일 펴냈다. 수서는 ‘사기(史記)’와 함께 중국 정사인 24사(史) 중 하나로 꼽힌다. 제왕에 대해 기록한 ‘제기(帝紀)’ 5권, 음악지·지리지·천문지 등을 다룬 ‘지(志)’ 30권, 황제의 일가친척 등 당대 인물의 행적을 기록한 ‘열전(列傳)’ 50권으로 구성됐다. 당나라 정치가 위징(580∼643)과 사학자 영호덕분(583∼666) 등이 공동 집필했다. 특히 수서에는 598년부터 614년까지 4차에 걸쳐 일어난 고구려-수나라 전쟁과 관련된 생생한 자료가 담겨 있다. 2018년부터 5년간 수서를 완역한 권용호 한동대 객원교수는 “수나라 통치자들의 고구려에 대한 인식뿐 아니라 전쟁 양상, 전쟁 전후 민란 등 사료가 풍부하다”며 “여수(麗隋)전쟁을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원천 자료”라고 설명했다. 위진남북조 시대를 통일한 수나라는 건국 37년 만인 618년 멸망했다. 멸망의 가장 큰 원인으로 2대 황제인 양제(煬帝·569∼618)의 무리한 고구려 원정이 꼽힌다. 612년 2차 여수전쟁 때 113만여 명의 병력을 이끈 양제는 을지문덕이 이끄는 고구려군에 참패했다. 권 교수는 수서에 기록된 여수전쟁 관련 사료를 모아 ‘고구려와 수의 전쟁’(지식을만드는지식)을 25일 함께 펴냈다. 책의 부제는 ‘수서를 통해 보는 동북아 최대의 전쟁 이야기’.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장남이 돼서 어머니 한 번 업어드리지 못한 게 평생의 한이었는데…. 이렇게 그림 속에서나마… 어머니를 업어드립니다.” 그림 속 76년 전 헤어진 어머니의 얼굴을 어루만지는 심구섭 씨(89)의 손 끝이 떨렸다. 눈시울은 붉어졌다. 열세 살 소년은 백발이 됐지만 그림 속 어머니는 주름 하나 없이 고운 얼굴이다. “학교 잘 다녀오라.” 북에 두고 온 심 씨의 남동생을 데려오기 위해 어머니가 다시 월북하던 날 남긴 마지막 말이다. 심 씨는 “그날 아침 일찍 일어나 교복을 다려 입혀주시고는 대문 밖에서 배웅해주시던 어머니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고 했다. 정전협정 체결 70주년을 이틀 앞둔 25일 경기 파주시 한반도생태평화 종합관광센터. ‘그리운 얼굴’ 전시가 17일 개막한 가운데 1세대 이산가족 심 씨는 어머니를 등에 업은 자신의 모습을 그린 작품 ‘침묵의 강’ 앞에 서서 70년 넘게 쌓인 그리움을 곰삭였다. 그의 고향은 함경남도 함흥 근처 신상. 1947년 9월 부모와 함께 월남했지만 어머니는 심 씨가 강릉사범중학교에 첫 등교하던 날 남동생을 데려오기 위해 다시 고향으로 향했다. 이 작품은 이만수 성신여대 동양화과 교수(62)가 2017년 심 씨에게서 사연을 듣고 석 달간 그린 것이다. 이 교수는 “그림 하나로 이산가족의 한을 위로할 순 없지만 그림을 통해 엇갈린 두 모자가 헤어지지 않고 함께 있는 순간을 염원했다”고 말했다. 다음 달 20일까지 무료로 열리는 이 전시는 조각, 회화, 사진 등 여러 분야 예술가들이 심 씨와 같은 1세대 이산가족의 이야기를 작품으로 남기는 ‘그리운 얼굴 프로젝트’의 결과물 60여 점으로 구성됐다. 2017년 시작된 이 프로젝트에 참여한 예술가와 1세대 이산가족은 현재까지 각각 56명. 팬데믹으로 2년 반 넘게 멈췄던 프로젝트는 이달 재개됐다.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사단법인 ‘우리의 소원’의 하종구 상임이사는 “분단국가의 예술가로서 역할을 고민하다가 뜻이 맞는 이들과 힘을 합쳤다”고 말했다. 함경남도 북청군이 고향인 김명철 씨(87)는 이 프로젝트를 통해 고향에 두고 온 어린 시절 추억을 찾았다. 21일 전화로 만난 김 씨는 고향 집을 떠나던 1950년 12월 7일을 생생하게 기억했다. 열네 살이던 그는 사이렌이 울린 뒤 대문 앞에서 어머니와 형에게 “일주일 뒤 돌아오겠다”고 했지만 끝내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쌀 주머니에 가족사진을 넣어뒀는데 설상가상 1950년 12월 흥남철수작전 때 흥남부두에서 주머니를 도둑맞았다. 김 씨는 “도둑맞은 추억에 미련 갖지 않으려 일부러 속이야기를 털어놓지 않았다”며 “차라리 남은 추억이 없다고 생각해야 마음이 편했다”고 했다. 김 씨를 만난 이익태 작가(76)는 고향에서 학교 다닐 때 소고를 배웠다고 말하는 김 씨의 얼굴에서 천진난만한 미소를 포착했다. 그리고 손에 소고를 든 김 씨의 모습을 그렸다(작품 ‘심장의 북소리’). 김 씨는 그림을 보고 “고향의 기억을 모두 잊고 살아왔는데, 이제 이 작품 하나가 내게 남았다”고 했다. 서울 동대문구에 사는 실향민 윤일영 씨(87)도 22일 이 프로젝트에 참여한 김서경 조각가를 만났다. 작품은 1년 뒤 완성될 예정이다. 윤 씨의 고향은 경기 장단군 장도면 오음리(미수복지구). 경기 연천군 경순왕릉 언덕 위 전망대에 서면 휴전선 너머 고향이 보인다. 그는 “고향 뒷산 지척에서 한 발자국도 다가서지 못한다”고 했다. ‘우리의 소원’은 이산가족과 실향민 250여 명의 사연을 작품으로 계속 만들어 전시를 열겠다고 밝혔다.파주=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상처 난 것도 버리지 마라. 참외는 어떤 것은 상처도 나고 어떤 것은 곱게 자란다. 맛은 같다.” 제주 제주시 조천읍 선흘마을에 사는 조수용 할머니(93)가 지난해 6월 참외 그림을 그리며 지은 글이다. 그림 속 참외 표면엔 여기저기 긁힌 상처가 나 있다. 병상에 오래 누워 지냈던 남편을 최근 떠나보낸 조 씨는 요즘 시간이 날 때마다 그림을 그린다. 못생기고 흠집 난 과일도 그에겐 그림이 된다. “저는 할머니들에게 무엇을 그려야 하는지 가르치지 않아요. 그리고 싶은 것들을 이미 마음속에 품고 계시니까요.” 조 씨 등 선흘마을에 사는 여덟 명의 할머니에게 그림을 가르쳐온 전시 기획자 최소연 씨(55)는 최근 전화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최 씨는 그림 수업을 담은 에세이 ‘할머니의 그림 수업’(김영사·사진)을 11일 펴냈다. 그는 “일상 속 사물을 허투루 지나치지 않고 화폭에 담으려는 할머니들이야말로 진정한 예술가”라고 했다. 그림 수업은 2021년 시작돼 올해로 3년째를 맞았다. 최 씨는 낮엔 할머니들과 모여 그림을 그리고, 밤엔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그림 옆에 쓸 글을 짓는 일대일 수업을 연다. 그는 “할머니들은 잠이 오지 않는 밤이면 달력 뒷면에 글자 연습을 한다. 글을 배우지 못해 다른 이들 앞에선 글쓰기를 머뭇거리는 할머니들을 위해 밤 수업을 열게 됐다”고 했다. 수업이 계속되자 할머니들에게 변화가 찾아왔다. 처음에는 “이런 것도 그림이 되느냐”며 그리기를 주저하던 할머니들이 이제는 마당에서 자란 작물은 물론이고 신발과 자신의 속옷까지 꺼내 자유롭게 그리게 된 것. 최 씨가 지난해 6월 늦은 밤 강희선 씨(86) 댁에서 수업을 하던 때였다. 허리춤이 늘어난 낡은 팬티를 그리던 강 씨는 그림 오른편에 이렇게 써내려갔다. “세상 오래 살아보니 이런 것도 해보고 꿈에도 생각 안 했어. 그림 그리는 것.” 한 자 한 자 적어 내려간 마음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마음속 말이 그림으로 나오니 이게 해방이주.”(강 씨) 최 씨는 “저는 늘 미래를 계획하며 살아왔는데, 할머니들을 보며 삶의 태도를 다시 배웠다”고 했다. “할머니들은 내일이 오지 않을 수 있다는 걸 아세요. 그래서 오늘 그리고 싶은 것을 내일로 미루지 않죠.”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나는 이제 백발노인이 됐는데 우리 어머니는 여전히 곱지요. 마지막인 줄도 모르고 ‘학교 다녀오겠다’며 인사했던 1947년 9월 23일 그날과 똑같습니다.” 정전협정 체결 70주년을 이틀 앞둔 25일 경기 파주시 한반도생태평화 종합관광센터. 이곳에서 이달 17일 개막한 ‘그리운 얼굴’ 전시를 둘러보던 ‘1세대 이산가족’ 심구섭 씨(89)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고향인 북에 두고 온 어머니를 등에 업은 자신의 모습을 그린 작품 ‘침묵의 강’ 앞에 선 그가 손을 뻗어 어머니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동양화가인 이만수 성신여대 동양화과 교수(62)가 2017년 심 씨와 대화를 나눈 뒤 3개월간 그린 이 작품 속 심 씨의 어머니는 주름 하나 없이 고운 얼굴이었다. 심 씨는 76년 전 그날의 어린 아들이 된 듯 울먹이며 말했다. “장남이 돼서 어머니 한 번 업어드리지 못한 게 평생의 한이었는데…. 이렇게 그림 속에서나마 어머니를 업어드립니다.” 전시를 주관한 사단법인 ‘우리의 소원’은 심 씨와 같은 1세대 이산가족과 예술가를 일대 일로 연결해 그들의 이야기를 작품으로 남기는 ‘그리운 얼굴 프로젝트’를 2017년부터 이어오고 있다. 조각, 회화, 사진 등 여러 분야 예술가들이 프로젝트에 참여 신청한 1세대 이산가족을 찾아가 이야기를 듣고 작품으로 남긴다. 현재까지 프로젝트에 참여한 예술가와 1세대 이산가족은 각각 56명. 완성작은 ‘그리운 얼굴’이라는 특별전을 통해 무료로 선보이고 있다. 작품 56건으로 구성된 이번 전시는 다음달 20일까지 열린다. 프로젝트를 기획한 하종구 ‘우리의 소원’ 상임이사는 “분단국가의 예술가로서 내가 할 수 있는 역할을 고민하다 뜻이 맞는 예술가들과 함께 분단의 역사를 살아온 1세대 이산가족의 얼굴을 기록해보기로 했다”고 설명했다. ●이산의 한 기록하는 ‘그리운 얼굴 프로젝트’ 심 씨는 ‘그리운 얼굴 프로젝트’의 1호 신청자다. 그의 고향은 함경남도 함흥에서 약 20㎞ 떨어진 신상. 1947년 9월 17일 13세였던 심 씨는 이념대립을 피해 먼저 월남한 아버지를 따라 고향을 떠나 강원도로 향했다. 온 가족이 다같이 떠나면 삼엄한 북측 감시망을 피할 수 없어 고향 집에 열 살 남동생을 두고 왔다. 어머니는 심 씨가 강릉사범중학교에 처음 등교하던 날 네 살 난 여동생을 등에 업고 둘째 아들이 남아 있는 북으로 향했다. 심 씨는 “그날 아침 일찍 일어나 제 교복을 다려 입혀주시고는 대문 밖에서 ‘학교 잘 다녀오라’시던 어머니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고 했다.“저는 그 순간이 마지막인 줄도 몰랐지만 어머니는 이게 마지막이 될 수도 있음을 직감하셨나 봅니다. 고향을 떠나기 2주 전 제 생일날 가족사진 한 장을 찍었어요.” 심 씨의 이야기로 그림을 그린 이 교수는 “그림 하나로 분단으로 이별한 이들의 한을 어떻게 위로할 수 있겠느냐”면서도 “다만 나는 예술가로서 이 그림을 통해 엇갈린 두 모자가 영영 헤어지지 않고 함께 있는 순간을 염원했다”고 했다. 심 씨는 “1947년 마지막으로 찍은 가족사진 속 어머니의 눈매와 그림 속 어머니의 선한 눈매가 똑같다”며 미소 지었다.●“그림 덕에 고향에 두고 온 추억 찾아” 함경남도 북청군이 고향인 김명철 씨(87)는 “이 프로젝트를 통해 어린 시절 고향에 두고 온 추억을 찾았다”고 했다. 21일 전화로 만난 김 씨는 고향 집을 홀로 떠나던 1950년 12월 7일을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기억했다. 열네 살이던 그는 그날 사이렌이 울리자 대문 앞에서 어머니에게 “일주일 뒤 돌아오겠다”고 약속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약속은 집안의 막내였던 그가 노인이 될 때까지 지켜지지 못했다. 설상가상 쌀자루에 한가득 담아온 가족사진마저 흥남철수작전 때 흥남부두 앞에 다다라 도둑맞고 말았다.“사진을 쌀자루에 넣어 왔으니, 쌀이 든 줄 알고 누가 훔쳐가 버린 겁니다. 도둑맞은 추억에 미련 갖지 않으려 일부러 자식들과 아내에게도 속내를 털어놓지 않고 살았습니다. 차라리 내게 남은 추억이 아무것도 없다 생각해야 마음이 편했으니까요.” 그런 김 씨의 이야기를 토대로 작품을 그린 이익태 작가(76)는 고향에서 학교를 다닐 때 소고를 배웠다고 말하는 김 씨의 얼굴에서 천진난만한 아이 같은 미소를 포착했다. 이 작가가 군용 담요 위에 그린 작품 ‘심장의 북소리’ 속 김 씨는 손에 소고를 들고 있다. 희미했던 김 씨의 옛 추억이 그림 속에서 선명하게 되살아난 것. 김 씨는 자신의 얼굴이 새겨진 그림을 본 뒤 “고향의 기억을 모두 잊고 살아왔는데, 이제 이 작품 하나가 내게 남았다”는 말을 남겼다. ●“단 1명이 생존할 때까지 그릴 것” 통일부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 전체 이산가족 상봉 신청자 13만3675명 중 생존자는 4만2624명(31.9%)이다. 생존자 비율은 꾸준히 줄어 2025년 30% 아래로 떨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평균 연령은 83.2세. 2년 뒤 80대 이상 비율은 68%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실제 고 양철영 씨를 비롯해 ‘그리운 얼굴 프로젝트’에 참여한 이산가족 2명이 작품을 보지 못한 채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 기간 세상을 떠났다. 하 이사는 “우리에겐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고 했다. 코로나19 탓에 2년 반 넘게 멈춰 있던 프로젝트가 이달부터 다시 시작된 이유다. 서울 동대문구에 사는 실향민 윤일영 씨(87) 자택에 22일 김서경 조각가가 찾아왔다. 윤 씨의 고향은 경기 연천군 경순왕릉 언덕 위에서 내려다보이는 장단군 장도면 오음리(미수복지구). 그는 휴전선에서 약 3㎞ 떨어진 고향 풍경이 눈앞에 보이는 듯 이렇게 말했다. “고향 뒷산을 이렇게 지척에 두고 나는 한 발자국도 다가서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소원에 따르면 250명이 넘는 이산가족과 실향민과 이산가족들의 사연을 작품으로 만드는 프로젝트가 진행 중이다. 하 이사는 “단 1명의 이산가족이 생존해 있을 때까지 프로젝트는 계속될 것”이라고 했다.파주=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애니메이션 ‘엘리멘탈’(사진)이 500만 관객을 돌파하며 국내에서 개봉한 디즈니·픽사 작품 중 최고 흥행 기록을 세웠다. 24일 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에 따르면 지난달 14일 개봉한 ‘엘리멘탈’은 개봉 40일째인 23일 누적 관객 수 503만1799명을 기록했다. 2015년 ‘인사이드 아웃’이 기록한 디즈니·픽사 애니메이션 최다 관객 수 497만여 명을 넘어선 수치다. 올해 국내 개봉작 중에선 ‘범죄도시3’(1067만여 명), 일본 애니메이션 ‘스즈메의 문단속’(554만여 명)에 이어 세 번째로 많은 관객을 모았다. 종전 올해 국내 흥행작 3위에 오르며 열풍을 일으켰던 ‘더 퍼스트 슬램덩크’(469만 명)를 넘어선 기록이다. ‘엘리멘탈’은 디즈니·픽사의 첫 한국계 감독인 피터 손(46)이 연출을 맡았다. 물, 불, 흙, 나무라는 4원소를 의인화한 캐릭터들이 서로 섞이지 않고 배척하는 ‘엘리멘트 시티’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한국을 떠나 미국 뉴욕에 정착한 이민자 2세대로서 손 감독 자신의 자전적 경험을 녹여냈다. 가족애를 중시하는 내용을 비롯해 한국인이 공감할 만한 메시지를 담은 점 등이 국내 흥행 비결로 꼽힌다. 영화진흥위원회에 따르면 ‘엘리멘탈’의 국내 수익은 약 497억 원으로 북미(약 1765억 원)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많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느껴져요. 이건 확신의 미소예요.” 20일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 1층 전시실. 앞을 전혀 볼 수 없는 시각장애인인 서울 맹학교 교사 이진석 씨(44)가 한 손으로 국보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1962-2호) 모형의 입가를, 다른 손으로 오른발 끝을 만졌다. 손끝으로 불상의 발가락을 하나하나 만지던 이 씨는 입가에 옅은 미소를 보이며 이같이 말했다. “발가락 끝이 하늘을 향해 서 있어요. 옆에 있는 국보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1962-1호)이 발끝에 힘을 빼고 있다면, 이 불상은 힘을 꽉 주고 있어요. 마음속으로 어떤 결단을 내린 듯해요. 두 불상이 같은 미소를 지은 것 같지만, 미소의 의미는 서로 다르네요.” 국립중앙박물관은 올해 9월 개관을 목표로 157.54㎡ 규모의 ‘오감’ 전시실을 만들고 있다. 국보 반가사유상 두 점을 나란히 배치해 2021년 11월 개관 이후 현재까지 약 100만 명이 찾은 ‘사유의 방’을 시각장애인이 체험할 수 있도록 따로 만들고 있는 것. 이 전시실에는 ‘유물에 손대지 말라’는 금기가 없다. 진짜 국보 대신 원래 크기와 재질 그대로 재현한 반가사유상 2점과 미니어처 16점 등 불상 모형 총 30점을 배치해 시각장애인들이 마음껏 손끝으로 만지고 느낄 수 있게 했다. 전시장에는 자연 속에 있는 듯한 효과를 주기 위해 특별 제작한 향이 비치됐다. 국립 박물관이 시각장애인을 위한 상설전시실을 마련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국립중앙박물관은 이 씨 등 시각장애인 30여 명을 자문위원과 사전체험단으로 선정해 공간을 함께 디자인하고 있다. 이날 이 씨도 예리한 평가를 했다. 그는 “큐레이터나 안내자가 일일이 동선을 알려 주며 체험을 돕는 것도 좋지만 사유는 누가 대신해 주는 것이 아니라 결국 내가 스스로 해내야 하는 것”이라며 “시각장애인이 홀로 감상할 수 있는 시스템이 마련되면 좋겠다”고 말했다. 박물관은 이 씨의 의견을 받아들여 시각장애인이 안내자의 도움 없이 체험할 수 있도록 전시실 내 동선과 유물에 대한 설명을 함께 담은 오디오 가이드를 준비하기로 했다. 오감 전시실을 기획한 장은정 국립중앙박물관 교육과장은 “‘시각장애 학생들이 기피하는 현장학습 장소 1위가 박물관’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충격을 받아 전시실을 만들게 됐다”고 했다. 맹학교 학생들 사이에선 박물관이 미술관, 수족관과 함께 3대 기피 공간으로 꼽힌다는 것. ‘사유의 방’ 전시 역시 시각장애인에게는 무의미한 공간이었다는 자성도 이 전시실을 마련하는 동기가 됐다. 이 씨는 장애인을 위한 프로그램을 비(非)장애인과 함께 하고 싶다고 했다. “시각장애인이 손끝으로 느낀 유물과 비장애인이 두 눈으로 본 유물이 어떻게 같고 다른지 이야기해 보고 싶어요. 어쩌면 마음속에 그린 유물의 모습은 생각보다 서로 다르지 않을지도 모르지요(웃음).” 최근 미술관과 고궁도 장애인의 체험을 가로막는 문턱을 낮추고 있다. 경기 용인시 호암미술관은 9월 10일까지 열리는 ‘한 점 하늘 김환기’ 전시에서 ‘색각 이상 보정용 안경’을 무료로 대여하고 있다. 문화재청은 시각장애인 전문 해설사와 함께 경복궁과 창덕궁을 체험하는 프로그램을 사전 신청자를 대상으로 운영 중이다. 궁궐 축소 모형을 손으로 만져 보는 체험도 포함됐다. 지난해 처음 도입한 이 프로그램은 올해는 이달 18일부터 재개됐고, 주말과 공휴일을 제외한 평일에 운영된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430년경 어느 날 이탈리아 라벤나에 있는 한 성당에 장인들이 모여드는 장면으로 책은 시작된다. 로마 황제의 여동생인 갈라 플라키디아(388∼450)의 명령으로 예배당 천장을 장식하기 위해 이곳에 도착한 장인들은 예배당 천장에 불후의 걸작을 남긴다. 청금석 타일로 채운 푸른 바탕에 금빛 유리 조각들을 덧붙인 천장은 반짝이는 별들이 가득한 밤하늘처럼 빛난다. 이 빛은 900년가량 흐른 14세기 초 피렌체의 파벌 싸움으로 라벤나에 망명해온 시인 단테(1265∼1321)에게 닿는다. 책은 라벤나의 한 성당 천장 아래서 ‘신곡’을 써내려가는 단테의 모습으로 끝난다. 이 책이 규정하는 중세의 시작과 끝엔 모두 빛이 있다. 저자인 미국 버지니아공대 중세학과 교수 매슈 게이브리얼과 미네소타대 역사학과 수석 지도교수 데이비드 M 페리는 서구의 중세를 암흑기로 보는 시각에 도전한다. 유럽 대륙뿐 아니라 아프리카와 아시아에 이르는 폭넓은 시공간을 아우르며 문화와 종교, 사상, 그리고 사람들이 부딪히고 격동하는 중세의 복잡성을 조명했다. 그 바탕엔 서구 사학계가 그동안 중세를 획일화된 시선으로 잘못 바라봤다는 자성이 깔려 있다. 고대부터 이어진 철학학교였던 아테네 학당의 지식은 중세에도 이어졌다. 두 저자는 현대 역사가들이 ‘암흑기의 도래’라고 평해 왔던 비잔틴 제국의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483∼565)의 아테네 학당 폐쇄 사건에 대해 다른 해석을 내놓는다. 학당 폐쇄 이후에도 지식은 단절되지 않고 활용돼 왔다는 것.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로마법 체계를 받아들인 ‘로마법 대전’을 완성시켰다. 당대 최고의 과학자이자 발명가 안테미오스와 이시도루스를 발탁해 콘스탄티노플에 성 소피아 성당을 지었다. 그리스어로 ‘지혜’란 뜻을 가진 이 성당의 거대한 돔은 약 1000년 뒤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당이 재건될 때까지 가장 컸다. 기독교를 획일적인 종교로 바라보는 시선에도 의문을 제기한다. 일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는 ‘아리우스주의’는 중세 동로마 제국 전역에 분포한 기독교 종파 중 하나였다. 로마의 교황 그레고리우스 1세는 597년 브리타니아 섬사람들을 개종시키기 위해 파견하는 한 수도원장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신교 신전을 파괴하지 말고 성수로 정화하고, 원래 주민들이 행하던 종교 의식을 없애지 말라고 당부했다. 두 저자는 이를 통해 중세 기독교가 다양성을 배척하는 고립된 종교가 아니었으며, 당대 기독교는 ‘복수형’으로 존재했음을 조명한다. 중세사 서술에서 주변부로 밀려났던 여성의 이야기도 담았다. 독일 중서부 지방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힐데가르트(1098∼1179)가 대표적이다. 1113년 수녀가 된 힐데가르트는 꿈에서 체험한 신의 계시를 글과 그림으로 남겼을 뿐 아니라 당대 황제와 교황, 각계각층의 저명인사와 편지를 주고받으며 정치적 조언도 했다. 두 저자는 “단순한 간언이 아닌 왕국을 다스리는 방법에 대한 강력한 조언이었다”고 평했다. ‘맹신’ 혹은 ‘암흑’이란 단어로 수식돼 온 중세에 대한 편견에 균열을 내는 책이다. 두 저자는 중세를 색다른 시각으로 바라본 이유에 대해 이렇게 적었다. “시각을 바꾸면 다른 이야기들에선 소외되던 사람들에게 집중할 수 있고, 다른 어딘가에서 시작하면 또 다른 세계들을 엿볼 수 있다.” 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