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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갖 유리와 강철과 대리석과 지폐와 잉크가 부글부글 끓고 수선을 떨고 하는 것 같은 찰나”(이상의 ‘날개’에서)같은 더위가 지속되는 요즘이다. 맹위를 떨치는 북태평양 고기압의 열기를 피해 동네 서점에서 책의 향기를 맡아보는 건 어떨까. 특색 있는 ‘테마형’ 동네 서점들이 잇따라 문을 여는 가운데 ‘식물이 있는 서점’이 최근 화제다. 동네마다 하나씩 있던 꽃집과 서점을 결합해 색다른 공간을 만들었다. 16일 서울 양천구 양화초교 앞 생태·문학 전문 서점 ‘꽃피는 책방’은 말 그대로 ‘풀 반 책 반’이었다. 서점 앞 수국은 꽃받침이 연한 녹색으로 변해 한여름임을 알렸다. 찜통더위를 피해 들어간 책방 안에는 나무와 풀 냄새, 책 냄새가 섞여 있었다. 마침 신발 벗고 올라가 앉을 수 있는 작은 공간에 자리가 비었다. 발 뻗은 채 얼음 동동 뜬 겨우살이차를 마시고 ‘나무의 노래’(에이도스)를 펼치자 마치 산림욕을 하는 기분. 거꾸로 매달린 수염 틸란드시아(파인애플과의 식물)와 거베리(석송과의 식물), 말린 안개꽃, 작은 화분 수십 개가 서가와 함께 진열돼 멋들어진 풍경을 자아냈다. 올해 3월 서점을 연 김혜정 씨(37)는 KBS2 ‘영상앨범 산’을 집필한 방송작가 출신의 숲 해설가다. 김 씨는 “길가에 핀 작은 꽃이나 나무열매 하나, 바람결에서 얻을 수 있는 위안과 같은 공간을 만들고 싶었다”며 “지하철 9호선 역 인근이라 직장에서 퇴근한 동네사람들이 들러 열기를 식히다 간다”고 말했다. ‘동네 서점’ 애플리케이션을 만든 퍼니플랜에 따르면 꽃집과 서점의 퓨전은 동네 서점의 진화에서 가장 최근 버전. ‘오버그린파크’(서울 영등포구 당산로)가 1년 반쯤 됐을 뿐 ‘순정책방’(서울 강동구 동남로), ‘그리너리’(경남 창원시 마산합포구) ‘월곶동책한송이’(경기 시흥시 월곶해안로) 등이 모두 근래 문을 열었다. 여름이면 유독 더 찾게 되는 ‘맥주’와 서점의 결합도 빼놓을 수 없겠다. ‘책맥(책과 맥주) 서점’ 역시 독특한 개성을 갖춘 곳이 늘고 있다. “은하수는 기차와 나란히 격렬하게 달려온 듯 때때로 반짝반짝 빛나며 흐르고 있었습니다.” 지난달 문을 연 서울 종로구 과학책방 ‘같다’는 추억의 일본 애니메이션 ‘은하철도999’에 결정적 영감을 줬다는 단편소설 ‘은하철도의 밤’과 일본맥주 ‘긴가코겐(은하고원)’을 세트로 판매한다. 맥주를 한 모금 들이켜자 소설 속 열차에 오른 듯했다. 이 서점에서는 8월 4, 11, 18일 저녁 은하, 달, 별에 대한 천문학자의 강연을 맥주와 함께 즐길 수 있다. 카페 창비(서울 마포구 월드컵로)의 ‘디킨스 ipa’처럼 문인을 기념한 맥주를 발견하는 건 또 다른 재미다. 퍼니플랜 조사에 따르면 전국 동네서점은 ‘술이 있는 서점’ 20여 곳을 비롯해 300여 곳. 나만의 시원한 아지트는 의외로 멀지 않은 곳에 숨어있을 수 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카세트테이프, MP3 기기로 어학이나 자기계발 콘텐츠를 듣는 데 머물렀던 ‘오디오 북’이 최근 인공지능(AI) 스피커의 확산 등 기술 발전에 따라 정체된 출판 산업의 돌파구로 주목받고 있다. 세계 오디오 북 시장은 발상지인 미국을 중심으로 급성장하고 있다. 한국출판문화진흥재단에 따르면 2016년 미국의 오디오 북 시장은 전년 대비 18.2% 성장해 21억 달러(약 2조3600억 원)를 넘어섰다. 전체 출판시장의 약 10% 규모로 2014년 이후 하락세인 전자책 시장을 추월할 기세다. 거대 출판그룹 펭귄랜덤하우스가 모든 신간의 오디오 북 제작 출시를 추진하는 등 출판사들은 오디오 북 확산에 힘을 쏟고 있다. 더구나 미국에서는 새로운 소비 행태도 발견된다. 원래 오디오 북은 이동이나 청소 등 다른 일과 병행하며 들을 수 있다는 장점에 선택하는 소비자가 많았다. 그러나 지난해 미국오디오북출판협회(APA)의 이용자 조사에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오디오 북에만 집중한다”는 답변이 절반을 넘었다. 소비자들이 오디오 북을 듣는 행위 그 자체를 즐기는 문화가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성장 가능성이 여전히 크다고 평가받는 이유다. 국내에도 주목할 만한 오디오 북 출시 사례가 있다. 지난해 9월 커뮤니케이션북스가 USB에 담아 출시한 오디오 북 ‘100인의 배우, 우리 문학을 읽다’가 완판을 기록했다. 그러나 국내는 여전히 도서관용 콘텐츠를 제작해 납품하는 등 기업간 거래(B2B) 시장이 중심이다. 원천 콘텐츠를 갖고 있는 출판사들이 오디오 북 시장에 본격 진입해야 소비 시장이 활성화 될 것으로 출판계는 전망하고 있다. 문제는 책 한 권(300쪽 기준)에 약 700만∼800만 원가량 드는 제작비다. 규모가 크지 않은 출판사들이 감당하기에는 부담이 적지 않다. 이에 따라 제작비 절감 방안도 모색되고 있다. 그중 하나가 출판사와 낭독자, 녹음스튜디오를 연결하는 오픈 마켓이다. 아마존의 오디오 북 서비스 ‘아마존 오더블’이 운영하는 이 모델은 일종의 개방 오디션 방식. 작가나 출판사가 원천 콘텐츠인 책을 플랫폼에 등록하면 낭독자가 오디오 북 샘플을 만들어 올린다. 출판사는 그중 좋은 낭독자를 골라 계약한다. 지난해 6월 기준 8만7000종의 콘텐츠가 이 마켓을 통해 제작돼 유통되고 있다. 제작비는 기존 대비 30∼50% 수준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환희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미래산업팀장은 “아마추어 낭독자를 육성하기 위해 올 하반기부터 교육 프로그램과 녹음스튜디오를 운영하는 걸 추진하고 있다”고 말했다. 오디오북은 구글 플레이스토어나 네이버 오디오클립, 오디언 등의 애플리케이션을 통해 구입해 들을 수 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이제는 엄마와 눈도 마주치려 하지 않아요….” 10세 아들을 둔 A 씨는 올 4월 서울 강남구의 한 상담센터를 찾아 울먹였다. 2년 전 맞벌이 부부인 A 씨는 아들에게 휴대전화를 선물했다. “유튜브 없으면 왕따”라는 아들 말에 설치를 한 게 화근이었다. 아들은 하루 8시간씩 한 인기 유튜버의 비디오 게임 방송을 시청했다. 휴대전화를 압수하자 아들의 기행동이 시작됐다. 숙제를 시키면 10분도 집중하지 못해 거실로 뛰쳐나왔다. 밥을 먹을 때도 아들은 가족들과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방문을 닫고 혼자 울기도 했다. 상담사는 “친구들에게 뒤처진다는 불안감과 부모에 대한 실망으로 우울증을 겪고 있었다”며 “유튜브 시청으로 불화를 겪는 아이가 적지 않다”고 했다. 2017년 스마트폰 과의존 실태조사에서 과의존 비율은 성인(17.4%)보다 유아·아동(19.1%) 청소년(30.3%)에게서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영화·TV·동영상(17.2%)이 게임(43.1%)과 메신저(32.7%)에 이어 부작용이 우려되는 콘텐츠로 조사됐다. 한국정보화진흥원 자료에 따르면 2017년 초등학교 저학년생(1∼3학년)의 31.7%, 고학년생(4∼6학년)의 68.2%, 중학생의 93.0%가 스마트폰을 사용했다. 유아·아동이 강력한 시청각적 자극에 반복적으로 장기간 노출되면 뇌가 균형 있게 발달하지 못할 수 있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동영상 시청이나 게임 등을 지나치게 오래하면 ‘팝콘브레인 현상’이 나타날 수 있다고 한다. 뇌가 튀긴 팝콘처럼 곧바로 튀어 오르는 것에 반응할 뿐 느리게 변하는 진짜 현실에 대해서는 무감각해지는 것을 말한다. 부모들이 보채는 유아를 달래기 위해 스마트폰을 쥐여주는 것도 좋지 않다. 6세 이하 아동이 있는 부모를 표본 조사한 최근 한 연구에서 부모의 양육 스트레스가 높을수록 아동의 미디어 사용 시간이 길어지는 경향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김재성 한국정보화진흥원 선임연구원은 “스마트폰 동영상 채널을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고 공유할 수 있는 창구로 활용하도록 유도해야 한다”고 했다. 부모와 자녀가 스마트폰의 사용 이유와 목적을 명확하게 정하는 게 과의존을 막는 데 도움이 된다고 한다. 조종엽 jjj@donga.com·신규진 기자}

“다들 잘 살아있지?” 13일 오전 10시 서울 노원구의 한 초등학교의 수학 시간. 윤주(11·가명)양은 필통 속에 휴대전화를 숨긴 채 실시간 방송을 켜고 조용히 말했다. 수업시간이었지만 친구들 9명이 접속했다. ‘배고파ㅠ 2시간 만 참자’ ‘ㅋㅋ너무 졸려’ ‘샤프를 바꿨더니 글씨가 예뻐졌다’ 등 대화가 오고갔다. “파공(파우치 속 화장품 공개) 할 사람~” 쉬는 시간이 되자마자 옆 친구가 소리쳤다. 아이들 3명이 화장품을 가지고 모여 들었다. 친구들은 보름 동안 모은 용돈으로 산 틴트와 파운데이션을 얼굴에 바르면서 저마다 동영상을 찍느라 분주한 모습이었다. 교실에는 “지금 방송 켰으니까 빨리 들어와” “좋아요랑 구독 눌러” 등의 소리로 가득 찼다. 액체괴물을 주무르면서 방송을 하는 친구도 있었다. 반 친구 35명 중 절반 이상이 유튜브를 한다. 이날 오후 6시 영어 학원을 마치고 집에 온 윤주는 또 방송을 켰다. 그는 휴대전화를 바라보며 “오늘 너무 더워서 화장이 다 지워졌다”고 읊조렸다. 하루 만에 윤주가 유튜브 계정에 올린 동영상은 5개. 논술 학원을 가기 전 저녁을 먹어야 한다던 그는 “어제 친구들과 김치찌개를 먹는 ‘먹방’을 찍기로 했다”며 식당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 연예인보다 친근한 유튜버 따라하기 윤주는 입학 전부터 유튜브 동영상을 보고 자랐다. 영어 만화부터 아이돌 뮤직비디오까지 기존 TV의 역할을 유튜브가 완전히 대체한 것이다. 태어날 때부터 스마트폰을 익숙하게 사용해 온 이른바 ‘디지털 네이티브’ 세대에게 일상은 유튜브 그 자체였다. 걸그룹 춤을 따라하던 아이들은 이제 유튜버를 모방한다. 연예인보다 더 친근하고 ‘생활 밀착형’ 콘텐츠 위주라 따라하기도 쉽다. 한 유튜버의 ‘엄마 몰래 라면 끓여먹기’ ‘친구 놀래 키기 몰카’ 등 동영상을 보고 아이들은 유사한 내용의 동영상을 본인 계정에 찍어 올린다. 조회수가 높지 않아도 친한 친구들끼리 댓글로 ‘그들만의’ 소통이 이어진다. 성인들의 ‘단체 카톡방’과 유사하다. 하모 씨(44·여)는 “먹방을 꼭 틀어야지 아이가 밥을 먹는다”며 “먹방을 보고 탕수육을 시켜 먹자고 할 때도 있다”고 했다. ‘집중하는 법’ 등 공부법(?)부터 성장기 아이의 고민들도 유튜브가 해결해준다. ‘브래지어 하는 법’ ‘초등학교 생리 대처법’ ‘5학년 몸무게’ 등 관련 동영상 댓글에 다른 고민글을 올리고 답을 얻는다. 김민지 양(12)은 “부모님이나 선생님에게 물어보기 부끄러운 것들을 찾아본다”며 “친구들끼리 영상을 서로 공유하기도 한다”고 했다. 개인 계정을 이용해 아이들이 실시간 방송을 하려면 부모의 동의가 필요하다. 만 14세 이상부터 구글 계정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영유아 대상 ‘유튜브 키즈’ 애플리케이션(앱)이 있지만 대부분 초등생들은 부모의 동의 하에 성인들이 이용하는 유튜브 앱을 이용한다. 부모 휴대전화를 이용해 몰래 계정을 만드는 아이들도 있다. 11세 아들을 둔 유모 씨(38·여)는 “요새 아이들의 주요 대화 주제는 유명 유튜버”라면서 “유행에 아이가 뒤쳐지지 않으려면 어쩔 수 없다”고 했다. ● 아이 유튜버 만들기 광풍 아이들 대상 유튜브 콘텐츠는 ‘핫’하다. 한 초등생이 올린 ‘연예인 메이크업 따라잡기’ 동영상은 103만 회 조회수를 기록했다. 이러다보니 부모들 사이에서 자녀를 유튜버로 키우려는 열풍마저 분다. 온라인을 맘카페에는 “4살짜리 아들을 유튜버로 만들고 싶어요” “갓난아이로 유튜브 하시는 분 계신가요” 등의 글이 올라와 있다. ‘유튜버로 돈 버는 법’ ‘아이 유튜버 만들기’ 등 인터넷 유료 강의도 인기다. “검색어 중복을 피하라” “첫 화면을 잘 꾸며라” 등 조회수를 늘려 광고 수익을 얻을 수 있는 팁이 대부분이다. 정모 씨(42·여)는 6살짜리 딸아이를 유튜버로 키우기 위해 동영상 제작 프로그램 ‘프리미어 프로’ 강의를 듣고 있다. 정 씨는 “부업으로 수익도 얻고 아이가 나중에 자기소개서 등에 ‘유튜버’라는 경험을 쓸 수 있을 것 같아 시작했다”고 했다. 57만 명 구독자를 끌어 모은 ‘마이린TV’ 최린 군(12)의 아버지 최영민 씨(47)는 “유튜브를 시작한 3년 전보다 부모들의 인식이 긍정적으로 변했다. 성공 비법을 공유해달라는 부모들도 많다”며 “유행을 타 무작정 뛰어들기보다 광고 수익, 인기 콘텐츠 분석 등 유튜브라는 플랫폼을 먼저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신규진 기자 newjin@donga.com▼ 아들의 스마트폰 압수하자 기행동을…▼ “이제는 엄마와 눈도 마주치려하지 않아요….” 10세 아들을 둔 A 씨는 올 4월 서울 강남구의 한 상담센터를 찾아 울먹였다. 2년 전 맞벌이 부부인 A 씨는 아들에게 휴대전화를 선물했다. “유튜브 없으면 왕따”라는 아들 말에 설치를 한 게 화근이었다. 아들은 하루 8시간 씩 한 인기 유튜버의 비디오 게임 방송을 시청했다. 10분짜리 동영상을 클릭 할 때마다 나오는 수십 개의 관련 동영상을 아들은 연이어 시청했다. 그 중엔 여성 유튜버의 신체가 노출된 동영상도 있었다. 휴대전화를 압수하자 아들의 기행동이 시작됐다. 숙제를 시키면 10분도 집중하지 못해 거실로 뛰쳐나왔다. 밥을 먹을 때도 아들은 가족들과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방문을 닫고 혼자 울기도 했다. 상담사는 “친구들에게 뒤쳐진다는 불안감과 부모에 대한 실망으로 우울증을 겪고 있었다”며 “유튜브 시청으로 불화를 겪는 아이들이 적지 않다”고 했다. 2017년 스마트폰 과의존 실태조사에서 과의존 비율은 성인(17.4%)보다 유아·아동(19.1%)과 청소년(30.3%)에서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영화·TV·동영상(17.2%)이 게임(43.1%)과 메신저(32.7%)에 이어 부작용이 우려되는 콘텐츠로 조사됐다. 한국정보화진흥원 자료에 따르면 2017년 초등학생 저학년(1~3학년)의 31.7%, 고학년(4~6학년)의 68.2%, 중학생의 93.0%가 스마트폰을 사용했다. 유아·아동이 강력한 시청각적 자극에 반복적으로 장기간 노출되면 뇌가 균형 있게 발달하지 못할 수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동영상 시청이나 게임 등을 지나치게 오래하면 ‘팝콘브레인 현상’이 나타날 수 있다고 한다. 뇌가 튀긴 팝콘처럼 곧바로 튀어 오르는 것에 반응할 뿐 느리게 변하는 진짜 현실에 대해서는 무감각해지는 것을 말한다. 부모들이 보채는 유아를 달래기 위해 스마트폰을 쥐어주는 것도 좋지 않다. 6세 이하 아동이 있는 부모를 표본 조사한 최근 한 연구에서 부모의 양육 스트레스가 높을수록 아동의 미디어 사용 시간이 길어지는 경향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김재성 한국정보화진흥원 선임연구원은 “스마트폰 동영상 채널을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고 공유할 수 있는 창구로 활용하도록 유도해야 한다”고 했다. 부모와 자녀가 스마트폰의 사용 이유와 목적을 명확하게 정하는 게 과의존을 막는데 도움이 된다고 한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신규진 기자 newjin@donga.com}
“동해여, 오늘 밤은 이렇게 무더워 나는 맥고모자(밀집모자)를 쓰고 삐루(맥주)를 마시고 거리를 거닙네. …달이 밝은 밤에 해정한(고요한) 모래장변에서 달바라기를 하고 싶읍네. 궂은 비 부슬거리는 저녁엔 물 위를 떠서 애원성(哀怨聲)이나 부르고, 그리고 햇살이 간지럽게 따뜻한 아침엔 이남박(함지박) 같은 물 바닥을 오르락내리락하고 놀고 싶읍네.” 시인 백석(1912∼1996)이 1938년 6월 7일 동아일보에 쓴 기행문 동해(東海)에서 발췌했습니다. 근대 문인들이 피서지에서 쓴 글을 모은 신간 ‘성찰의 시간’(홍재)에 실렸네요. 여름 휴가철이 다가오고, 주 52시간 근로제도 시행된 탓인지 ‘한숨 돌리자’는 느낌의 신간들이 눈에 띕니다. 돈과 노동의 굴레에서 ‘탈출하라’(카시오페아)는 사뭇 과격한 책도, 행복의 커트라인을 낮춰 ‘소확행’(글로세움)을 누리자는 책도 있네요. ‘잠깐 쉬다가 계속 쉬게 되는 것 아닐까’ 하는 두려움은 잠시만 제쳐두자고요. ‘사실 바쁘게 산다고 해결되진 않아’(책들의 정원)라잖아요.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지방 소외’ 담론은 한국사회의 오래된 주요 의제지만 막상 당사자의 목소리를 조명한 책은 얼마나 될까. 이 책은 계명대 사회학과 교수인 저자가 ‘대구 경북 지역에서 평판이 2, 3위권인 대학’의 재학생과 졸업생, 그 부모 등 29명을 인터뷰한 연구를 담았다. 저자가 보기에 ‘무한 경쟁을 내면화하고 성공을 목표로 끝없이 자기계발에 몰두하는 개인주의적 청년들’이라는 이미지는 서울 수도권 중심의 스테레오타입에 불과하다. 지방대생은 다르다. 이른바 ‘수단 목적 합리성’에 따라, 목적을 이루기 위해 합리적으로 행동하지 않는다. “어차피 해도 안 된다”고 알기 때문이다. 대다수가 공부를 해도 잘 되지 않았던 쓰라린 경험을 갖고 있다. 그러다 보니 몰두하기 어렵다. 그리고 그런 자신이 ‘겸연쩍다’. 저자는 이를 ‘성찰적 겸연쩍음’이라고 표현한다. “청년들이 속물로 전락했다고 질타하는 담론이 무슨 도움이 될까 싶었다”는 게 연구 동기였다고 한다. 지방대생은 속물로 전락한 게 아니라 경쟁사회의 바깥에 스스로를 위치시킨다는 것이다. 이 밖에도 ‘적당주의’ ‘알지 않으려는 의지’ ‘가족만이 최고 가치’ 등이 지방대생의 내면에 담겨 있다고 봤다. 간간이 저자의 해석이 다소 무리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예를 들어, 저자는 이 같은 특징이 ‘신자유주의 통치성의 실패’가 드러난 것이라고 본다. 하지만 배제는 포섭과 마찬가지로 신자유주의가 작동하는 근본 방식이다. 서울 수도권 대학 학생에게 경쟁의 규율을 내면화시키는 건 지방대생을 노동시장의 주변부로 몰아내기에 가능한 일이다. 결국 저자가 발견한 특징은 신자유주의 통치성이 지닌 성공의 일면이라고도 할 수 있다. ‘지방 청년들의 우짖는 소리’(책의 부제)에서 배제된 이들의 무기력함을 발견하는 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학자의 노고와 선의를 폄하할 생각은 없지만, 자칫하면 이 같은 접근은 지방대 비하 논란에 휘말릴 수도 있다. 역시 지방대생을 다룬 웹툰 ‘복학왕’이 그런 논란에 별로 시달리지 않았던 건 작가(기안84) 자신이 허우적댔던 이야기로 다가갔기 때문일 것이다. 혹시 ‘성급한 일반화’는 아닐까? 책은 연구 결과가 사례를 분석한 예시일 뿐이라고 말하면서도 “지방에서는 고향이 상실되지도 않았고, 가족 또한 굳건하다”고 말한다. ‘가족이 버팀목이 되지 못해 가족주의에서 튕겨져 나간 지방대생’도 상당수 있을 법하지만 책은 그에 주목하지 않는다. 평범한 독자에게 생소할 수 있는 서구 사회과학 개념의 잦은 돌출 탓에 읽기 편치 않은 면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 말마따나 “이야기를 하려고 해도 들어주는 사람이 없는 소수자”의 목소리가 빼곡하다는 점에서 가치가 적지 않은 책이다. 읽다 보면 화자가 지방대생일 뿐, 대다수 보통 서민들의 이야기로 다가오기도 하는 점도 흥미롭다. 지방대생의 자아 찾기가 좌절된 역사, 배제를 내면화하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도 궁금해진다. 짤막한 에필로그에 저자가 생각하는 대안이 담겼다. 국가는 공적 의무와 책임을 다해야 한다. 지방대생이 가족 밖으로 나와 살아갈 수 있도록 경제적 독립, 주거 독립을 지원해야 하고, 기업은 경제 일변도의 사고를 버려야 한다. 청년이 함께 모일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 단체와 소모임을 활성화해야 한다. 청년은 가치론적 질문을 던져야 한다. 대학은 학생들이 인간으로 스스로를 드러내는 역량을 키우는 교육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당대에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채 사라졌다고 해서 아무런 의미가 없는 건 아니다. 뛰어난 사상은 기억하고 연구하는 후학이 있는 한 바스러져 먼지로 흩어지는 운명을 딛고 또 다른 미래의 가능성으로 살아난다. 조선 후기 평생 밭을 갈고 면화를 기르면서 오로지 독서와 사색을 통해 독창적인 역학(易學)의 경지를 개척한 철학자가 있다. 경북 약목(현 칠곡군) 출신의 학자 일수 이원구(一수 李元龜·1758∼1828)다. ‘이원구 역학―18세기 조선, 철학으로 답하다’를 최근 낸 이선경 조선대 철학과 객원교수(51)는 서울 종로구 동아미디어센터에서 10일 “주자학의 계승자임을 자처하면서도 조선 후기 실학의 경세론에 탄탄한 이론적 토대를 제공한 인물”이라고 소개했다. “세간에 혹 인륜(人倫)은 높이면서 산업(産業)을 속되다고 하는 자도 있고, 산업은 취(取)하면서 인륜을 가벼이 여기는 자도 있으니 되겠는가?…인륜과 산업은 하나인데, 둘로 하여서 서로 싸우니 애석하구나!”(이원구의 ‘심성록·心性錄’에서) 이 교수에 따르면 이원구는 중국 역학의 수용과 이해를 넘어 자신만의 새로운 사상을 펼쳤다. 핵심은 ‘건곤론(乾坤論)’이다. 하늘을 상징하는 건(乾)괘 위주였던 조선 성리학자들의 역학과는 달리 이원구는 땅을 상징하는 곤(坤)괘에도 주목했다. 이 교수는 “18세기 후반 조선의 모순이 인륜(건)과 산업(곤)의 대립과 분열에 있다고 본 그는 ‘곤’의 현장을 바탕으로 건곤을 통합해 산업 속에서 인륜이 실현돼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말했다. 현대로 치면 경제는 사적 이윤 추구의 장에 그쳐서는 안 되며, 도덕과 정의가 실현되는 장이어야 한다는 주장과 비슷하다. 이원구는 산업 전체에 ‘권(眷·아끼고 돌보아 잊지 않음)’이 관류해야 한다면서 ‘사람을 살리는 마음’이 없으면 산업은 생명력을 잃는다고 봤다. 그의 사상은 ‘갑질’이나 양극화 문제가 심각한 오늘날에 적지 않은 울림을 갖는다. 이원구의 ‘산업’은 물질 생산을 기초로 교육과 법제를 포괄하는 개념이다. 이 교수는 “정덕(正德)과 이용후생(利用厚生)이 조화를 이뤄야 한다는 건 북학파들의 공통적인 생각이었지만 경세론을 뒷받침하는 이론적 탐구는 빈약했다”며 이원구 역학의 가치를 설명했다. 이원구에게는 학맥(學脈)이랄 게 딱히 없다. 홀로 솟아났고, 조용히 스러졌다. 당대 영호남 유림에 그의 이름이 점차 알려졌지만, 제자들이 학단(學團)을 형성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그런 이원구를 재발견한 이는 1950, 60년대 한국 철학계의 대표적 학자인 박종홍(1903∼1976)이었다. 그는 논문에서 이원구가 “300년 뒤 나를 알아줄 이가 있을 것”이라고 했다고 전했다. 이원구의 사상은 한국의 ‘오래된 미래’가 될 수 있을까.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유럽이 시민혁명과 산업혁명을 거쳐 근대화한 데 비해 아시아 나라들은 대개 그렇지 않았던 ‘분기’의 원인에 대해 수많은 연구와 해석이 있다. 독일 튀빙겐대 한국학과 교수 등을 지낸 역사학자인 저자는 영국의 신사(젠트리)와 조선의 선비 계층의 비교를 중심으로 그 양상과 원인을 살폈다. 저자에 따르면 신사도는 기사도에서 연원을 찾아야 한다. 서양 중세 초기 영주의 아들이지만 영지를 상속받지 못한 이들이 곳곳에서 약탈과 폭력을 일삼았다. 여기서 기사 계급이 생겨났다. 혼란을 보다 못한 교황청은 ‘여성을 못살게 굴지 말라’ ‘상인의 재물을 약탈하지 말라’ ‘싸움은 기사들끼리만 하라’ 등의 지침을 내렸다. 기사도의 탄생이다. 기사계층은 16세기 들어 신형 화기가 발달하고 군사적 효용성이 사라지면서 몰락했다. 그러나 기사도는 신사도로 이어졌다. 영국의 향촌 지주층이면서 대부분 작위를 보유하지 못한 젠트리 계층에는 원래 기사들도 일부 포함됐다. 저자는 미국의 경제학자 그레고리 클라크가 2007년 펼친 도발적인 가설을 소개한다. 영국에서 젠트리를 비롯한 중산층이 하층보다 자녀를 훨씬 많이 낳았고, 이것이 영국 사회를 역동적으로 바꿔 산업혁명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젠트리의 자녀들은 신분이 격하돼도 인내심과 근면성, 독창성 등 부모의 가치관과 행동양식을 유지했다. 허점도 적지 않은 주장이지만 설득력이 있다. 젠트리는 인클로저 운동(농경지를 양을 방목하는 목장으로 바꿈) 등을 거치며 자본가로 성장했고, 이들의 가치관인 신사도는 공교육에 스며들면서 근대적인 시민의식과 교양으로 계승됐다는 게 저자의 설명이다. 조선의 선비들은 젠트리에 비해 경제 활동이 적었다. 조선 후기에 들면 선비들의 상당수가 농민이었지만 이들은 유럽의 부르주아와 지향점이 근본적으로 달랐다. 부르주아는 사업을 통해 큰 부자가 되길 꿈꿨지만 선비는 농사와 약간의 부업을 통해 자립하는 것까지만 바랐다. 성리학은 재물의 양이 한정돼 있다고 보고, 개인이 큰 이익을 추구하는 행위를 원천적으로 막으려 했다. 선비들은 근본적으로 인간이 선한 본성을 회복하기만 하면 사회의 여러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고 봤다. 조선 후기에 이르며 선비들도 새로운 시각을 내놓았다. 실학자인 혜강 최한기(1803∼1877)는 ‘운화(運化)의 기(氣)’를 밝혀야 한다고 강조했다. 현대적 용어로는 자연과학이나 사회과학적 관찰과 분석을 강조한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저자는 “그러나 안타깝게도 너무 늦은 자각이었다”고 탄식한다. 조선이 망한 뒤 유학자 김택영(1850∼1927)은 서얼 차별 등 성리학적 폐단을 원인으로 지목했다. 저자 역시 ‘성리학 근본주의’가 당쟁과 금서를 통한 사상의 탄압, 쇄국정책 등의 폐단을 낳았다고 본다. 하지만 선비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조선의 선비들은 물질적 욕망을 절제하는 청아한 인품을 가졌고, 자연의 고마움을 알았고, 개발이라는 미명 아래 함부로 착취하지도 않았다. 선비들에게 인간의 삶은 천지자연의 일부였다.”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을 거치면서 전통은 거의 단절됐지만 과거 의병운동처럼 지식인과 시민들이 연대해 민주화를 쟁취한 데서 선비정신의 계승을 엿볼 수 있다. 저자는 선비의 미덕을 계승해 미래로 가는 실마리를 얻어야 한다는 쪽이다. “유교 자본주의는 동아시아의 현주소가 아니라 앞으로 지향해야 할 미래의 꿈”이라는 것이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말을 타거나 가마에 오른 그림 속 조선 사신들. 표정이 하나같이 의기양양하다. 인조 2년(1624년) 일본에 파견된 조선통신사 행렬을 그린 이 그림(인조2년통신사행렬도)은 가로 길이가 10m에 가깝다. 지난해 10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된 조선통신사 관련 원본 고문헌을 볼 수 있는 흥미로운 전시가 열린다. 서울 서초구 국립중앙도서관이 개최하는 전시 ‘400년 전, 9.84m의 통신사행렬도를 만나다’는 기록유산 등재 기록물 64건(124점) 가운데 중앙도서관이 소장한 24건(36점) 전부를 선보인다. 전시물은 ‘동사록(東사錄)’ ‘부상록(扶桑錄)’ 등 통신사들이 사행을 기록한 서적이 대부분이다. 사신단이 일본 관리나 문사로부터 받은 시문을 모아 두루마리로 제작한 ‘동사창수집(東사唱酬集)’도 볼 수 있다. 등재유산은 아니지만 함께 전시하는 ‘영남호남연해형편도’는 1700년대 경상도와 전라도 해안 방어 상황을 담은 가로 8.14m 군사지도다. 도서관 측은 “선린 외교와 일본의 무력 침략 가능성에 대비한 국방 강화가 동시에 이루어졌음을 보여 준다”고 설명했다. 13일에는 한태문 부산대 교수의 강좌 ‘조선통신사,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이 되다’도 열린다. 4일부터 선착순 100명까지 중앙도서관 홈페이지에서 접수한다. 전시는 9월 30일까지.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김 중위님과 연락이 끊어져 죽었는지 살았는지 확인하려고 화물열차를 타고 왔어요.” 지난달 23일, 92세로 별세한 김종필 전 총리와 아내 고(故) 박영옥 여사가 결혼 전이던 1951년 1월. 1·4후퇴 즈음 대구에 있어야 할 박 여사가 서울 육군본부 청사 앞에 찾아와 이렇게 말했다. 김 전 총리는 가슴이 뭉클했고 결혼을 결심했다고 한다. 김 전 총리의 유작 ‘남아 있는 그대들에게’(스노우폭스북스·1만6800원·사진)가 3일 발간됐다. 앞서 나온 ‘김종필 증언록’과 같은 회고록 성격은 아니다. 김 전 총리가 우리 사회나 위인들의 삶에 대한 생각, 후배 정치인 등에게 하고 싶은 말이 주가 됐다. 2016, 2017년 김 전 총리가 구술한 내용을 이덕주 전 총리 공보수석비서관이 정리했다. 정치판에서 ‘2인자’ 자리를 오르내린 김 전 총리는 세상인심에 대해 “인정이란 언제나 서민들의 것인가 보다”라고 했다.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1인자 자리를 노리는 것 아니냐는 의심을 받자 김 전 총리는 1968년 5월 30일 정계 은퇴를 선언하고 공직에서 물러났다. 대통령 집무실에서 독대한 김 전 총리는 “각하, 제가 (1인자를 제치고 집권한 이집트의) 나세르입니까”라며 항의했다. 정계에서 물러나자 찾아오는 손님들이 바뀌었다고 한다. 권력깨나 있는 사람들의 발길은 끊어졌고, 평범한 서민들이 집을 찾아오기 시작했다. 김 전 총리는 “그들에게는 아전인수나 아부도 없고, 음모나 중상도 없으며, 분에 넘치는 욕망도 없었다”며 “평범한 시민들과 격의 없는 담소를 즐겼던 그때가 가끔 그립다”고 썼다. 김 전 총리의 내면과 개인적 면모가 드러나는 글이 많이 담겼다. 가족에 대한 애틋함도 그중 하나다. 정치인 아버지를 둔 탓에 평범하게 살지 못했던 딸 예리 씨에 대한 미안함도 드러냈다. “예리가 대학생이던 시절 제가 총리를 했기에 경호원들이 멀찍이에서 항상 따라다니니 친구나 남학생들 누가 좋아했겠습니까….” 독서의 중요성도 강조했다. 김 전 총리는 1980년 ‘서울의 봄’ 당시 보안사 서빙고 분실에서 46일간 갇혀 있을 때 책을 읽으며 마음을 달랬다고 한다. 아흔 살이 넘어서도 오전 3시쯤 깨면 한바탕 책을 읽고 다시 잠들었다며 “책을 읽지 않은 날은 아무것도 하지 않은 날”이라고 했다. 2016년 한 언론 보도로 논란이 일었던 육영수 여사에 대한 언급에 관해서는 책에 담지 않았다. 김 전 총리가 미국에 유학한 동안 아내가 첫아이를 낳고 먹을 게 없어서 굶었는데, 숙모인 육 여사가 자기 식구들에게만 밥을 먹였다고 말했다고 당시 보도됐다. 책에는 “아내 곁에 육영수 여사가 있어서 임신 9개월의 아내를 두고 미국 유학을 떠날 수 있었다”고만 나온다. 김 전 총리는 “나는 정치적으로 대개 보수의 입장에 서 왔지만 거기에 그치지 않고 새로운 것을 추구해 왔다”며 “보수가 늘 보수 그대로 있으면 연못이 썩는다”고 조언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회전 스캐너가 1000년 이상 축적된 행정 의료 선박의 입출항 기록, 지도, 계약서 등 이탈리아 베네치아 국가기록보관소의 온갖 고문서를 자동으로 스캔한다. 문자 인식 알고리즘이 이를 디지털화해 거의 잊혀졌던 과거의 ‘사건’ 약 100억 건을 살려낸다. 스위스와 이탈리아 연구진의 ‘베네치아 타임머신’ 프로젝트다. 이를 통해 과거 베네치아의 시대별 사회적 네트워크가 재구성됐다. 과거가 살아난 것이다. 또한 2010년 공개된 ‘구글 엔그램 뷰어’는 500년간 발간된 800만 권의 책을 순식간에 검색해 특정 단어가 사용된 빈도의 추이를 그래프로 그려준다. 빅데이터 처리 기술이 발전하면서 인문학 연구의 새로운 도구가 되고 있다. 국내에도 ‘빅데이터 인문학’이 점차 활기를 띠고 있는 중이다. 디지털 원문이 구축된 근현대 신문과 잡지를 통해 단어에 담긴 개념의 변화를 추적하는 연구가 성과를 내고 있다. 잡지 데이터를 분석해 근대 한국인의 ‘제국(帝國)’에 대한 인식을 살핀 허수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의 연구도 그중 하나다. 그의 논문 ‘어휘 연결망을 통해 본 제국의 의미’는 19세기 말부터 1942년까지 발간한 잡지 가운데 전산화된 19종의 기사 1100만 어절에서 ‘제국’을 키워드로 3098건의 용례를 추출해 분석했다. 그 결과 1896∼1910년에 ‘제국’은 대체로 국제 질서를 주도하는 강대국을 가리켰던 데 비해, 1920∼1933년에는 문화주의를 바탕으로 비판적인 맥락에서 사용한 경우가 급증한 것으로 나타났다. 대한제국을 가리키던 ‘아(我) 제국’, ‘우리 제국’이 1934∼1942년에는 일본 제국을 가리키는 용어로 변한 것도 특징이다. 허 교수는 동아일보 기사를 분석해 1970, 80년대 한국의 ‘민중’ 개념에 관한 연구를 내놓기도 했다. 국문학계에도 방대한 데이터를 분석한 연구가 꾸준히 나온다. 이재연 울산과학기술원(UNIST) 기초과정부 교수의 논문 ‘생활과 태도’의 부제는 “기계가 읽은 ‘개벽’과 ‘조선문단’의 작품 비평어와 비평가”다. 두 잡지에 실린 작품 평에 자주 나오는 단어, 특정 비평가와 함께 등장하는 비평 용어를 알고리즘으로 분석했다. 그 결과 염상섭(1897∼1963)이 ‘태도’라는 비평 용어를 다채롭게 활용해 창작 방식 전반을 평가했다는 것이 드러났다. 이는 기존에는 주목하지 않았던 지점이다. 근대 작가들의 잡지 투고 네트워크를 분석한 결과 ‘근대 문학의 거목’ 춘원 이광수(1892∼1950)가 통념에 비해 영향력이 적은 것으로 나왔다. 빅데이터 인문학의 발전을 위해서는 말 그대로 ‘빅데이터의 구축’이 필수적이다. 미국 영국이 디지털 인문학을 선도하는 가운데 동아시아에서는 대만이 앞서가고 있다. 대만은 1830∼1930년 신문·잡지·단행본·교과서·문집을 망라하는 1억2000만 자가량의 데이터베이스를 2008년 구축해 활용하고 있다. 국내에서는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이 ‘물결 21’ 작업을 하고 있다. 고려대팀은 2000∼2013년 발간된 국내 4개 신문의 기사 5억9200만 어절을 분석하는 시스템을 구축했다. 이 시스템에서는 특정 단어의 출현 빈도와 공기어(共起語·함께 등장하는 단어) 분석이 가능하다. 이를 통해 신문 빅데이터에 드러난 북한의 모습, 한글에 대한 사회적 관심의 변화를 추적한 논문이 나왔다. 1946년 이후 동아일보 기사에 대한 시스템 구축도 최근 마무리됐다. 한림대 한림과학원은 1900∼1930년대 잡지의 원문을 분석해 민족, 계급 등에 대한 개념의 형성과 의미 변천을 연구하고 있다. 근대 잡지 25종의 디지털화와 어학적 분석, 웹페이지 공개를 준비하고 있다. 송인재 한림과학원 교수는 “대만 일본 등의 연구진과 협력해 동아시아 국가별 개념의 역사를 상호 비교할 수 있도록 할 것”이라고 말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재선에 실패한 민주주의국가 정치인과 민중의 손으로 끌어내려진 독재자 표정의 차이는 뭘까. 독재자는 집권 시 자신의 몰락을 고려하지 않는다. 실권은 불의의 습격을 당한 것이기에 그들의 표정은 어리둥절하다. 그러나 민주주의국가의 정치인은 언론과 여론에 의해 평소 비판을 받기에 재선 실패에도 대체로 뚱한 표정일 뿐이다. 정치사상, 국가론, 대표제론을 연구하는 영국 케임브리지대학 교수인 저자는 이 같은 대비는 체제에 적용해 봐도 마찬가지라고 말한다. 민주국가에서는 항상 사회 문제가 심각하고, 체제가 위기에 처했다며 경고하는 언론이 있다. ‘미친’ 지도자가 나라를 벼랑으로 이끌어 가면 투표로 그를 해임할 수도 있다. 그래서 길게 보면 안정된 민주국가에서는 실수가 발생해도 재앙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문제는 이런 민주주의 체제가 오래 정착되면, 체제에 대한 ‘자만’이 생겨난다는 점이다. “실수가 고착되지 않는다고 해서 실수를 더 이상 저지르지 않는 것은 아니다.…위안은 특유의 현실 안주를 낳을 수 있다.” 그래서 민주주의의 위기가 되풀이된다. 민주국가는 ‘최악의 사태가 설마 일어나겠어?’라는 안이함에 무모해질 때가 있다. ‘민주주의가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때까지 기다려보는 게 어때?’라는 생각에 나태해지기도 한다. ‘자만의…’는 이를 바탕으로 제1차 세계대전부터 최근까지 민주국가가 겪은 전쟁과 경제 공황 등 위기와 대처를 살핀 책이다. 1933년은 암울했던 해다. 세계적으로 민주주의가 후퇴하고 있었다. 독일에서는 히틀러가 집권했고, 1차대전 뒤 민주국가로 출발한 나라 대부분이 권위주의 체제로 돌아간 상태였다. 문제는 1929년 발생한 경제대공황의 수렁이었다. 볼셰비즘과 파시즘은 단호하게 대응했다. 소련의 스탈린 같은 독재자들은 유권자들과 타협하느라 발목이 잡히지 않았다. 소련의 국민경제발전 5개년 계획은 성과를 내고 있었다. 반면 민주국가의 대응은 지리멸렬했다. 일단 너무 느렸고, 정권 교체에 따라 변덕스러웠다. 그러나 1933년 당선된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은 적극적인 불황 대책 법안을 통과시켰다. 달러의 금 태환을 중단하고 달러를 평가절하해 미국 경제를 부양했다. 그는 독재자보다 훨씬 적은 권한을 가졌음에도 국민을 ‘유도하고 구슬리며 매혹하면서’ 위기를 극복했다. 저자는 민주주의 체제가 언제나 번영과 평화를 가져오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항상 속으로 곪아가는 것도 아니라고 본다. 민주주의는 대체로 위기를 피하는 데는 미숙하고, 회복하는 데는 능숙한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당선은 민주주의 체제에 대한 미국인들의 자만이 드러난 것이라고 저자는 봤다. “어쨌든 자신들이 선택한 결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다는 믿음이 남아 있지 않은 한, 누가 그런 인물(트럼프)에게 권력을 위임했겠는가?” 국가권력을 사유화한 대통령을 뽑는 것도, 그 대통령을 민주주의 제도를 활용해 끌어내리는 것도 국민들이다. 민주주의는 원래 그렇게 ‘실패하면서 성공하는’ 역설 속에서 작동하는 체제라는 것이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진상조사위가 27일 전현직 공무원 등 130명에 대해 무더기 수사의뢰·징계 권고를 의결해 논란이 일고 있다. 진상조사위는 이날 퇴직자를 포함해 문화체육관광부 공무원과 산하 공공기관 임직원 등 26명을 수사의뢰 권고, 104명을 징계 권고했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의 2014년도 스토리공모대전 심사위원 배제사건 등은 감사를 권고했다. 진상조사위는 △청와대 등과 공모해 산하 공공기관 임직원에게 블랙리스트 실행을 지시하는 등 가담 정도가 중한 공직자 △위법한 지시가 이행되는 걸 묵인하거나 적극적으로 동조, 실행한 정황이 상당한 산하 공공기관장 및 임원을 수사의뢰 권고 대상으로 정했다고 밝혔다. 공무원 징계 대상자에는 가담 정도가 비교적 경미한 이들도 포함됐다. ‘수동적으로 지시에 따른 자’도 징계 권고 대상에 올랐고, 직급으로는 사무관급이나 실무자급도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진상조사위는 “고위직과 하위직 모두 포함됐으며, 대상자를 가릴 때 직급을 기준으로 삼지 않았다”고 했다. 블랙리스트 사태 이후 장차관부터 실무자까지 특검, 감사원, 진상조사위 등의 조사를 받은 데 이어 무더기 처벌 권고가 나오자 문체부 내에서는 상당한 반발 기류가 일고 있다. 한 문체부 간부는 “당시로서는 국민의 선택을 받은 정치권력의 지시를 공무원들이 거부하는 데는 한계가 있는 게 현실인데도, 그런 상황이 완전히 무시됐다”며 반발했다. 또 다른 간부는 “공무원에게는 소속 상관의 명령에 대한 ‘복종의 의무’도 있다. 위법한 지시인지 그때는 불분명했을 수도 있는데 문체부를 자꾸 ‘부역자’처럼 매도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문체부 고위 간부들은 27일 진상조사위 전원위원회에서 징계 권고 규모가 지나치게 크다며 이견을 낸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이원재 진상조사위 대변인은 “공무원이 ‘지시에 따랐을 뿐’이라는 게 현실적으로는 이해되는 점도 없지 않지만 법적으로 부당한 지시는 거부해야 하고 공직에 걸맞은 책임을 져야 한다”며 “사건의 규모와 지속된 기간을 볼 때 결코 큰 규모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문체부에 따르면 진상조사위 권고가 그대로 수사의뢰나 징계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문체부 관계자는 “사실관계를 명확히 파악하고 충분한 법리적인 검토를 거쳐 이행 방안을 마련하겠다”고 밝혔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문화콘텐츠 분야는 정말 특수한 업종이 많다.일부 업종은 근로자들이 집중적으로 일해야 하는 기간이 있고, 거의 안 하고 쉬는 기간도 있다. 이런 곳은 특례업종으로 (재)지정해야 한다.” 도종환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15일 기자 간담회에서 방송 영화 등 문화콘텐츠 분야를 특례 업종으로 지정하는 문제에 대해 “고용노동부와 협의할 것”이라고 밝혔다. 주 52시간 근로제 시행이 코앞에 닥쳤는데도 적절한 법령 해석과 가이드라인이 마련되지 않아 콘텐츠 제작업계에 대혼란이 벌어지고 있다. 방송·영화계 초미의 관심사는 제작 현장 인원의 90% 이상을 차지하는 조명, 음향 등 스태프가 주 52시간 근로제의 적용을 받는지 여부다. 제작 현장에서 방송사·제작사에 직접 고용된 인력은 연출자를 비롯해 최대 5명 정도다. 나머지는 조명, 음향, 차량팀 등 도급이나 업무 위탁계약을 맺고 일하는 스태프가 절대 다수다. 형식적으로는 개인 사업자인 이들이 실질적으로 방송사의 통제 아래 있는지 등 근로자성 인정 여부가 쟁점이다. 드라마 제작사 관계자는 “제작비가 얼마나 큰 폭으로 증가하느냐가 여기에 달려 있는데 정부 어느 부처도 답을 주지 못하고 있다”며 “누구에게 물어야 하는지도 불투명한 상황”이라고 꼬집었다. 근로기준법상 재량근로 대상인 ‘방송 프로그램·영화 등의 제작사업에서 프로듀서나 감독의 업무’ 범위도 모호하다는 반응이다. 재량근로는 근로시간 배분과 업무수행 방법을 근로자의 재량에 위임하고 사용자와 서면 합의한 시간을 근로시간으로 정하는 제도다. 그러나 촬영 현장에는 메인 연출자·감독 외에도 조연출, 라인프로듀서(비용 인력 등 제작관리 실무), 조명감독, 미술감독 등 프로듀서와 감독의 직함을 갖는 이가 허다하다. 문체부는 7월 중 1차로 관련 가이드라인을 낼 계획이지만 “사례별로 판단할 수밖에 없다”며 자세한 유권 해석은 담기 어렵다는 입장이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진상조사위가 27일 전현직 공무원 등 130명에 대해 무더기 수사의뢰·징계 권고를 의결해 논란이 일고 있다. 진상조사위는 이날 전원위원회에서 퇴직자를 포함해 문화체육관광부 공무원과 산하 공공기관 임직원 등 26명을 수사의뢰 권고, 104명을 징계 권고했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의 2014년도 스토리공모대전 심사위원 배제사건 등은 감사를 권고했다. 진상조사위는 △청와대 등과 공모해 산하 공공기관 임직원에게 블랙리스트 실행을 지시하는 등 가담 정도가 중한 공직자 △위법한 지시가 이행되는 걸 묵인하거나 적극적으로 동조, 실행한 정황이 상당한 산하 공공기관장 및 임원을 수사의뢰 권고 대상으로 정했다고 밝혔다. 공무원 징계 대상자에는 가담 정도가 비교적 경미한 이들도 포함됐다. ‘수동적으로 지시에 따른 자’도 징계 권고 대상에 올랐고, 직급으로는 사무관 급이나 실무자 급도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진상조사위는 “고위직과 하위직 모두 포함됐으며, 대상자를 가릴 때 직급을 기준으로 삼지 않았다”고 했다. 블랙리스트 사태 이후 장차관부터 실무자까지 특검, 감사원, 진상조사위 등의 조사를 받은데 이어 무더기 처벌 권고가 나오자 문체부 내에서는 상당한 반발 기류가 일고 있다. 한 문체부 간부는 “당시로서는 국민의 선택을 받은 정치권력의 지시를 공무원들이 거부하는 데는 한계가 있는 게 현실인데도, 그런 상황이 완전히 무시됐다”며 반발했다. 또 다른 간부는 “공무원에게는 소속 상관의 명령에 대한 ‘복종의 의무’도 있다. 위법한 지시인지 그 때는 불분명했을 수도 있는데 문체부를 자꾸 ‘부역자’처럼 매도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문체부 고위 간부들은 27일 진상조사위 전원위원회에서 징계 권고 규모가 지나치게 크다며 이견을 낸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이원재 진상조사위 대변인은 “공무원이 ‘지시에 따랐을 뿐’이라는 게 현실적으로는 이해되는 점도 없지 않지만 법적으로 부당한 지시는 거부해야 하고 공직에 걸맞은 책임을 져야 한다”며 “사건의 규모와 지속된 기간을 볼 때 결코 큰 규모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문체부에 따르면 진상조사위 권고가 그대로 수사의뢰나 징계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문체부 관계자는 “사실관계를 명확히 파악하고 충분한 법리적인 검토를 거쳐 이행 방안을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조종엽기자 jjj@donga.com}

“대법원 인명용 한자 가운데 옛날 같으면 이름에 쓰지 않았을 기상천외한 한자가 가득하다. 지금까지 내 눈을 거쳐 간 조선시대 사람 이름이 수만 개가 넘을 텐데, 한 번도 본 적 없는 글자가 한둘이 아니다.” 장유승 단국대 동양학연구원 책임연구원은 최근 전통 작명(作名)에 관한 연구 컬로퀴엄 발표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에 따르면 한자를 상용하는 일본의 인명용 한자는 2999자, 중국은 따로 제한이 없으나 대개 ‘통용규범한자표’에 수록된 8105자를 벗어나지 않는다. 우리가 8142자로 오히려 더 많다. 원인은 여전히 성행하는 ‘작명법’ 탓이다. 이름에 쓰일 한자의 획수와 오행(五行)으로 운명의 길흉을 따지는데 당사자의 사주(四柱)까지 더하면 그 복잡함 탓에 막상 쓸 수 있는 글자가 몇 자 안 된다. 여러 작명법을 다 적용하면 아예 쓸 수 있는 글자가 없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에 대해 장 연구원은 “20세기 이전 우리나라에서는 획수를 따져 이름을 짓는 일이 없었고, 이름이 사람의 운명을 결정한다는 관념도 희박했다”며 “사주와 오행도 전통 작명 방식이 아니다”라고 단언했다. 조선시대 국왕의 작명 과정은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에 기록돼 있다. 왕자가 태어나면 신하들이 이름 후보 세 가지를 담아 정명단자(定名單子)라는 것을 올리고 왕이 낙점했다. 중국 황제나 선대 임금의 이름과 겹치지 않는지, 역사 속 악인과 겹치지 않는지, 음과 뜻이 좋은지 등을 고려했다. 일례로 헌종의 정명단자에는 후보로 환(s), 희(熙), 광(炚) 등 3글자가 올라왔는데, 음과 더불어 ‘밝게 비추다’(明照) 등의 뜻만 쓰여 있다. 장 연구원은 “사대부 가문 역시 의미 있는 이름을 선호했다”며 “이름을 돌아보며 그 의미를 생각하는 고명사의(顧名思義)야말로 전통 작명의 핵심”이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오늘날에도 ‘전통 작명’이라며 철학관과 작명소가 성행한다. 자녀 수가 적은 요즘, 부모들은 작명을 ‘전문가’로 불리는 이에게 맡겨야 할 것 같은 압박감을 느끼기도 한다. 작명법을 소개한 책들은 이런 심리를 이용해 특정 이름을 두고 “양(陽)으로 치우쳐 균형을 잃었고, 오행에서 물과 불이 싸우고 있다. 일하다가 뇌출혈로 사망한 사람의 이름”이라는 식으로 마치 이름을 잘못 지으면 비명횡사할 것처럼 겁을 준다. 현대에 많이 사용하는 작명법은 일제강점기 창씨개명 시기 작명 수요가 늘어나면서 일본에서 유행하던 구마사키 겐오(熊崎健翁·1881∼1961)의 작명법이 도입된 데서 비롯됐다는 분석이 일반적이다. 그 영향은 작명법에 그대로 남아있다. 작명법에서는 “성의 획수에 태극수 1을 더해 삼재(三才) 중 천재(天才)가 구해진다”고 설명하는 경우가 많다. 여기서 ‘1을 더하는 것’이 바로 일본식 작명법의 잔재다. 구마사키는 보통 한자로 4글자인 일본식 이름 가운데 잇단 두 자의 획수를 더하거나 네 글자 모두의 획수를 더한 수를 5격(格)이라며 따지는 방법을 창안했다. 일본의 성 두 글자의 획수를 더한 게 ‘천격(天格)’이다. 이 작명법은 창씨개명으로 일본식 4글자 이름을 짓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광복 후 한국식으로 3글자의 이름을 짓게 되자 천격을 구하는 데 성이 한 글자 모자랐다. 그러자 작명가들이 성의 획수에 1을 더하는 방식을 도입한 것이다. 장 연구원은 “획수를 계산하는 작명은 모두 구마사키 이론의 아류에 불과하다”며 “이름은 뜻이 좋고 부르기 쉬우면 충분하다”고 말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1993년 12월 창간한 종합인문교양 계간지 ‘황해문화’가 통권 100호(2018년 가을호) 발간을 맞아 국제 심포지엄을 연다. 황해문화는 인천의 시민문화재단인 새얼문화재단이 발행한다. 인문교양지로 100호를 내는 일도 드물고, 지역에서 창간해 전국적으로 유통되는 것 역시 의미 있는 일로 평가된다. 황해문화는 연속 기획 ‘대안을 찾는 사람들’(통권 20∼48호), ‘통일을 준비한다’(통권 29∼60호)로 주목받았고, 계간지로는 처음으로 창작 만화를 싣는 참신한 시도를 했다. 지난해 겨울호는 최영미 시인의 시 ‘괴물’을 실어 ‘미투’ 운동 확산에도 일조했다. 황해문화는 “지역 문제를 전국적, 세계적 시각에서 조명하고 보편성과 특수성을 모두 의식하는 가운데 우리 사회의 나아갈 방향과 대안을 모색하는 잡지가 되기 위해 노력해왔다”고 자평했다. 29, 30일에는 100호 발간 기념 국제 심포지엄 ‘통일과 평화 사이, 황해에서 말한다’가 인하대(인천 남구 인하로)에서 열린다. 마크 셀던 미국 코넬대 교수, 개번 매코맥 호주국립대 태평양아시아사학과 교수, 왕후이 중국 칭화대 교수, 이시하라 괴 일본 메이지가쿠인대 교수 등 해외 저명 학자가 참석한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대법원 인명용 한자 가운데 옛날 같으면 이름에 쓰지 않았을 기상천외한 한자가 가득하다. 지금까지 내 눈을 거쳐 간 조선시대 사람 이름이 수만 개가 넘을 텐데, 한 번도 본 적 없는 글자가 한둘이 아니다.” 장유승 단국대 동양학연구원 책임연구원은 최근 전통 작명(作名)에 관한 연구 콜로키움 발표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에 따르면 한자를 상용하는 일본의 인명용 한자는 2999자, 중국은 따로 제한이 없으나 대개 ‘통용규범한자표’에 수록된 8105자를 벗어나지 않는다. 우리가 8142자로 오히려 더 많다. 원인은 여전히 성행하는 ‘작명법’ 탓이다. 이름에 쓰일 한자의 획수와 오행(五行)으로 운명의 길흉을 따지는데 당사자의 사주(四柱)까지 더하면 그 복잡함 탓에 막상 좋은 이름이라고 쓸 수 있는 글자가 몇 자 안된다. 아예 쓸 수 있는 글자가 없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에 대해 장 연구원은 “20세기 이전 우리나라에서는 획수를 따져 이름을 짓는 일이 없었고, 이름이 사람의 운명을 결정한다는 관념도 희박했다”며 “사주와 오행도 전통 작명 방식이 아니다”라고 단언했다. 조선 국왕의 작명 과정은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에 기록돼 있다. 왕자가 태어나면 신하들이 이름 후보 세 가지를 담아 정명단자(定名單子)라는 것을 올리고 왕이 낙점했다. 중국 황제나 선대 임금의 이름과 겹치지 않는지, 역사 속 악인과 겹치지 않는지, 음과 뜻이 좋은지 등을 고려했다. 일례로 헌종의 정명단자에는 후보로 환(?), 희(熙), 광(炚) 3글자가 올라왔는데, 음과 더불어 ‘밝게 비추다’(明照) 등의 뜻만 쓰여 있다. 장 연구원은 “사대부 가문 역시 의미 있는 이름을 선호했다”며 “이름을 돌아보며 그 의미를 생각하는 고명사의(顧名思義)야말로 전통 작명의 핵심”이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오늘날도 ‘전통 작명’이라며 철학관과 작명소가 성행한다. 자녀수가 적은 요즘, 부모들은 작명을 ‘전문가’로 불리는 이에게 맡겨야 할 것 같은 압박감을 느끼기도 한다. 작명서들은 이런 심리를 이용해 특정 이름을 두고 “양(陽)으로 치우쳐 균형을 잃었고, 오행에서 물과 불이 싸우고 있다. 일하다 뇌출혈로 사망한 사람의 이름”이라는 식으로 마치 이름을 잘못 지으면 비명횡사할 것처럼 겁을 준다. 현대에 많이 사용하는 작명법은 일제강점기 창씨개명 시기 작명 수요가 늘어나면서 일본에서 유행하던 구마사키 겐오(熊崎健翁·1881~1961)의 작명법이 도입된 데서 비롯됐다는 분석이 일반적이다. 그 영향은 작명법에 그대로 남아있다. 작명법에서는 “성의 획수에 태극수 1을 더해 삼재(三才) 중 천재(天才)가 구해진다”고 설명하는 경우가 많다. 여기서 ‘1을 더하는 것’이 바로 일본식 작명법의 잔재다. 구마사키는 보통 한자로 4글자인 일본식 이름 가운데 잇단 두 자의 획수를 더하거나 네 글자 모두의 획수를 더한 수를 5격(格)이라며 따지는 방법을 창안했다. 일본의 성 두 글자의 획수를 더한 게 ‘천격(天格)’이다. 이 작명법은 창씨개명으로 일본식 4글자 이름을 짓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광복 후 한국식으로 3글자의 이름을 짓게 되자 천격을 구하는데 성이 한 글자 모자랐다. 그러자 작명가들이 성의 획수에 1을 더하는 방식을 도입한 것이다. 장 연구원은 “획수를 계산하는 작명은 모두 구마사키 이론의 아류에 불과하다”며 “이름은 뜻이 좋고 부르기 쉬우면 충분하다”고 말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보통 사람이 건물 도면을 본다면 먼저 ‘정문이 어디인가’가 궁금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도둑은 다른 방식으로 건물에 들어가는 방법을 찾는 데 힘을 쏟는다. 튼튼한 나뭇가지가 닿아 있는 다락 창문, 다른 집 지하실과 연결된 지하 태풍 대피소, 잘 빠질 듯한 방충망 같은 것을 찾는다. 도둑들의 눈에 보이는 건물은 어떤 모습일까? 미국의 건축 전문 블로거가 범죄와 건축의 관계를 분석했다. 이 분야 ‘선구자’는 1870년대 미국에서 수없이 은행을 턴 도둑 조지 레오니다스 레슬리(1878년 사망)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수법은 마치 여러 명이 작전을 짜 절도 행각을 벌이는 ‘떼도둑 영화’의 전범과 같다. 건축학도였던 레슬리는 잘나가는 건축가 행세를 하며 파티에서 만난 월가 기업가와 금융업자를 속여 은행의 설계도를 확인했다. 이어 실물 크기의 건물 모형을 만들고 초 단위로 동선을 짜 일당들과 절도 리허설을 한 뒤 도주로를 확보하고 범행을 저질렀다. 저자는 오늘날도 어떤 도둑들은 화재 대피로의 위치와 개수만 보고 건물의 내부 구조를 거의 맞히거나, 구글 스트리트 뷰를 보고 침입 동선을 짠다고 말한다. 저자의 시야는 개별 건물에서 도시로 확장된다. 미국 로스앤젤레스가 1990년대 ‘은행 강도의 천국’이라는 오명을 얻은 원인 중 하나는 수많은 고속도로였다. 범죄자들은 고속도로 출입구 근방의 은행을 털고 경찰 헬기가 나타나기 전 순식간에 사라졌다. 1976년 프랑스 니스에서는 도둑들이 땅굴을 파고 배수관을 거쳐 은행을 털기도 했다. 저자의 말처럼 도둑들은 “2차원적 평면 및 사물 속에 존재하는 3차원적 배우”였던 셈이다. 재치 있지만 과장됐다 싶은 표현도 많다. “도둑은 건축물의 새로운 사용 방법을 찾아내는 ‘공간 설계의 적극적인 참여자’이고, 그들이 침입하려는 건물과 건축을 구성하는 한 부분”이라는 문장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범죄를 미화하거나 그 수법을 가르치는 건 아니다. 논픽션 버전으로 영화 ‘도둑들’이나 ‘오션스’ 시리즈를 보듯이 읽으면 적당하겠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평창에서 출발한 설국열차가 평화열차가 되어 달려가고 있으며, 한반도에는 평화의 봄이 오고 있습니다. 우리가 누리는 평화와 번영은 결코 거저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목숨을 걸고 참혹했던 전쟁에 뛰어든 참전용사들의 희생을 결코 잊어선 안 됩니다.” 소강석 새에덴교회 담임목사는 경기 용인시 수지구 새에덴교회에서 17일 열린 ‘한국전 68주년 상기 참전용사 초청 보은·평화 기원예배’에서 이렇게 말했다. 새에덴교회와 한민족평화나눔재단은 2007년부터 12년째 6·25전쟁에 참전했던 용사들을 초청해 보은행사를 열고 있다. 특히 올해에는 흥남철수작전과 장진호전투에 참전했던 용사들, 가족·유가족 등 45명이 초청됐다. 흥남철수작전의 책임 지휘관이었던 고(故) 에드워드 알몬드 장군(당시 미군 10군단장)과 에드워드 포니 대령(상륙작전 참모장)의 유족, 193척의 함정과 수송선을 지휘했던 제임스 도일 제독(상륙기동부대 사령관)의 유족, 끈질긴 설득으로 10만 명의 피란민 구출을 성공시켰던 미군 제10군단 민사부 고문·통역관 현봉학 박사의 유족 등이 초청됐다. 흥남철수작전에 미국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1등 항해사로 참전했던 로버트 러니 예비역 해군 제독(91) 부부도 한국을 찾았다. 러니 제독은 “그때 흥남부두는 중공군들로 완전히 포위됐지만 선장님의 결단과 많은 이들의 희생 속에서 메러디스 빅토리호가 무사히 1만4000여 명을 거제도까지 피란시킬 수 있었다”며 “이 자리에 온 것이 영광스럽다”고 말했다. 러니 제독은 흥남 피란민의 아들인 문재인 대통령이 미국을 방문했을 때 흥남철수작전 사진을 선물하기도 했다. 17일 예배에는 흥남철수 당시 메러디스 빅토리호에 몸을 실었던 14세 소녀(김영숙)가 ‘할머니 수녀’가 된 모습으로 깜짝 방문하기도 했다. 그는 러니 제독의 손을 꼭 잡고 감사의 인사를 전한 뒤 찬송가를 부르며 춤을 췄다. 이번 행사에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축하 서한을 보내 와 눈길을 끌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편지에서 “새에덴교회가 미국 정부의 신성한 의무를 대신 해줌으로써 미국 전쟁 영웅들의 사기를 높여줬다”며 “미국 국민을 대표해 새에덴교회와 소강석 목사님께 감사를 표한다”고 말했다. 문 대통령도 축전을 보내 “이 땅의 자유와 평화를 지키기 위해 값진 생명과 젊음을 바치신 참전용사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대한민국이 가능했다”며 “대한민국을 대표해 참전용사와 가족 여러분께 깊은 감사와 존경의 인사를 드린다”고 했다. 16일 입국한 참전용사들과 가족들은 현충원 참배를 시작으로 평택 미8군기지, 판문점과 도라산전망대, 전쟁기념관 등을 둘러본 뒤 21일 출국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