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운

김상운 기자

동아일보 국제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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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와 학술 분야를 취재하고 있습니다. 단행본 ‘국보를 캐는 사람들’(글항아리)을 냈고, 고고학 유튜브 채널 ‘발굴왕’을 제작했습니다. 동아시아 역사에 관심이 많습니다.

sukim@donga.com

취재분야

2026-01-09~2026-0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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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제에 빼앗긴 유물 되찾으려면…문화재 전방위 조사 필요

    일제강점기 출토된 서봉총 유물 9점이 사라졌다는 4일자 동아일보 1면 기사가 한 포털 사이트에 소개되자 이날 오전부터 수백 개의 댓글이 달렸다. ‘양대(梁帶·머리에 쓸 수 있도록 테두리 안쪽에 십자로 붙여 놓은 금띠)’를 지닌 유일한 신라금관인 서봉총 금관이 일제강점기 때 인위적으로 훼손된 데 이어 구슬 팔찌 등 주요 유물들이 자취를 감췄다는 데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는 반응이었다. 이 중에는 모로가 히데오 등 일본 도굴꾼들이 불법 반출한 문화재에 대해 정부가 적극적인 환수 노력을 기울여야한다는 목소리도 있었다. 일제강점기 총독부가 파헤친 신라고분은 왕릉급을 비롯해 소형 고분까지 줄잡아 1000여 기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실제 서봉총을 발굴한 고이즈미 아키오는 1927년 발표한 약식보고서에서 6개월 만에 50기가 넘는 고분을 발굴했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 서봉총 한곳만 해도 최소 1년의 발굴기간이 필요하다는 국립중앙박물관 측 설명을 감안한다면 ‘발굴’보다 ‘약탈’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리는 행태다. 이 때문에 서봉총 뿐 아니라 다른 신라 고분들도 유물 훼손이나 불법 반출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분석이 제기된다. 문화재계에서는 중앙박물관의 신라고분 재발굴 사업을 계기로 일제의 문화재 관리에 대한 전방위 실태조사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최응천 동국대 미술사학과 교수는 “중앙박물관 수장고에 있는 유물이 수십만 점에 달하지만 인력이 부족해 아직 완전히 파악되지 않았다”며 “일제강점기 자료들에 대해 철저히 조사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문화재 환수를 위해서라도 이런 실태파악이 선행돼야 한다. 명확한 기초 자료를 증거로 내놓으면 해당 국가도 문화재 반환 요구를 무작정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모로가가 빼돌린 금관총 유물이 포함된 ‘오구라 컬렉션’에 대해서도 상황에 따라 재협상이 가능할 수도 있다. 이 컬렉션은 1964년 한일 국교 정상화 교섭 당시 개인 재산이라는 이유로 논의에서 빠졌다. 그러나 오구라의 아들이 1981년 도쿄박물관에 기증하면서 국가 소유가 됐다. 빼앗긴 문화재를 되찾고 우리 문화재의 소중한 원형을 지키려면 지난 과거라도 끝까지 추적하고 규명해야 한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15-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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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단독]“서봉총 발굴, 1600명이 54일 만에 끝내… 유물 훼손 가능성 알면서도 강행”

    “우리가 추정한 기준선에 문제가 있을 때에는 생각 없이 흙을 퍼내는 인부들 때문에 목곽(木槨) 안의 유물이 파괴되거나 교란될 우려가 있었다.”(1927년 ‘사학잡지’ 발표 보고서) 일제강점기 서봉총 발굴을 현장에서 지휘한 고이즈미 아키오(小泉顯夫)가 서봉총 발굴 직후 학회지에 낸 약식 보고서 중 일부다. 발굴 당시 목관과 유물이 들어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부위 주변에 기준선을 대강 잡고 그 위에 쌓인 봉분의 흙을 한꺼번에 들어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자칫하면 인부들의 삽질에 유물이 훼손될 가능성이 있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고이즈미는 위험한 발굴을 감행했다. 박진일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는 “고분 구조를 제대로 파악하려면 봉분도 양파껍질을 벗기듯 퇴적층을 파악하면서 조금씩 파내려가는 게 원칙”이라고 말했다. 고이즈미가 쓴 약식 보고서와 1986년 그의 회고록에 따르면 서봉총 발굴은 1600여 명을 동원해 불과 54일 만에 마무리됐다. 서봉총뿐만이 아니다. 고이즈미 발굴팀은 1926년 5월 중순부터 11월까지 6개월간 무려 50여 기의 신라고분을 발굴했다. 수십 년 걸릴 발굴을 군사작전을 벌이듯 전광석화처럼 진행한 것이다. 왜 그랬을까. 실마리는 그가 손잡은 모로가 히데오(諸鹿央雄·사진)에게 있다. 고이즈미는 보고서에서 “모로가가 진력으로 사이토 총독을 움직여 공식 발굴 허가를 얻게 되면서 우리가 다년간 이루고자 했던 목적을 이룰 수 있었다”고 썼다. 도굴꾼이었던 모로가는 유구에 대한 정밀 탐색에는 관심이 없었다. 오로지 고분 속 유물을 꺼내는 데에만 집중했다. 실제 국외소재문화재재단에 따르면 국보나 보물로 지정된 해외 환수 문화재 28건 중 6건이 그가 빼돌린 것들이다. 모로가가 발굴 비용을 대기 위해 건설업자를 끌어들인 것도 부실 발굴의 화근이 됐다. 당시 경주역에 열차 관리시설을 짓는 공사에 많은 흙이 필요했는데 모로가는 서봉총 발굴을 지원받는 대신 건설업자가 봉분의 흙을 퍼 가도록 했다. 빠른 공사를 원하는 업자들은 발굴을 재촉했다. 실제로 고이즈미는 보고서에서 “영리업자와 공동 작업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관계로 원칙적인 학술 발굴 방법을 따르는 것은 불가능했다”고 적었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15-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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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단독]일제때 발굴 ‘서봉총 유물’ 9점 사라졌다

    신라 왕릉인 서봉총(瑞鳳塚)에서 출토된 금관이 훼손된 사실이 최근 드러난 데 이어 금반지와 구슬 팔찌 등 일부 유물이 행방불명된 것으로 확인됐다. 서봉총 출토 유물 가운데 일부가 사라진 사실이 확인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국립중앙박물관이 최근 작성한 ‘경주 서봉총Ⅰ(유물편)’ 보고서와 조사 관계자들에 따르면 일제강점기인 1931년 유리건판 사진에 찍힌 △‘X자’형 무늬 금반지 2점 △민무늬 금반지 1점 △구슬 팔찌 1점이 현재 박물관 수장고에 없는 것으로 조사됐다. 중앙박물관은 보고서에서 “X자 문양을 표현한 반지가 (1931년) 사진에서는 존재하지만 현재 남아 있지 않다”며 “사진을 보면 무문(민무늬)의 금반지는 총 12점인데 현재는 11점만 남아 있다”고 밝혔다. 사진에 등장하는 금팔찌 3점과 은팔찌 4점, 유리 팔찌 2점을 제외한 구슬 팔찌 한 점도 자취를 감췄다. 특히 두 개만 있었던 X자형 무늬 금반지가 모두 사라짐에 따라 화려한 장식을 실물로 확인할 길이 없어졌다. 또 경성제국대 교수와 경성박물관장을 지낸 후지타 료사쿠(藤田亮策)의 논문에 따르면 ‘가는 고리 귀고리(細環耳飾·세환이식)’ 세 쌍(6점)이 서봉총에서 출토됐다고 적혀 있지만, 현재 박물관 수장고에는 1점만 남아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사진으로 실물이 확인된 구슬 팔찌 등 유물 4점과 논문에 언급된 금귀고리 5점을 합쳐 최대 9점의 행방이 묘연한 셈이다. 중앙박물관 측은 “언제, 어떤 경로로 유물이 사라졌는지 현재로서는 확인할 방법이 없지만 여러 정황상 일제강점기 때 외부로 반출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해 일제강점기 경주박물관장으로 1926년 서봉총 발굴 과정을 주도한 모로가 히데오(諸鹿央雄·?∼1954)가 빼돌렸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모로가는 경주박물관장으로 재직하면서 각종 유물을 빼돌린 혐의로 1933년 일본 검찰에 체포되기도 했다. 특히 그는 금관총에서 출토된 유물 8점을 일본인 사업가 오구라 다케노스케(小倉武之助·1870∼1964)에게 팔아넘겼다. 이 유물은 ‘오구라 컬렉션’으로 묶여 있다가 오구라의 아들이 1981년 기증해 현재 일본 도쿄박물관에 있다.▼ “서봉총 발굴, 1600명이 54일 만에 끝내… 유물 훼손 가능성 알면서도 강행” ▼“우리가 추정한 기준선에 문제가 있을 때에는 생각 없이 흙을 퍼내는 인부들 때문에 목곽(木槨) 안의 유물이 파괴되거나 교란될 우려가 있었다.”(1927년 ‘사학잡지’ 발표 보고서) 일제강점기 서봉총 발굴을 현장에서 지휘한 고이즈미 아키오(小泉顯夫)가 서봉총 발굴 직후 학회지에 낸 약식 보고서 중 일부다. 발굴 당시 목관과 유물이 들어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부위 주변에 기준선을 대강 잡고 그 위에 쌓인 봉분의 흙을 한꺼번에 들어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자칫하면 인부들의 삽질에 유물이 훼손될 가능성이 있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고이즈미는 위험한 발굴을 감행했다. 박진일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는 “고분 구조를 제대로 파악하려면 봉분도 양파껍질을 벗기듯 퇴적층을 파악하면서 조금씩 파내려가는 게 원칙”이라고 말했다. 고이즈미가 쓴 약식 보고서와 1986년 그의 회고록에 따르면 서봉총 발굴은 1600여 명을 동원해 불과 54일 만에 마무리됐다. 서봉총뿐만이 아니다. 고이즈미 발굴팀은 1926년 5월 중순부터 11월까지 6개월간 무려 50여 기의 신라고분을 발굴했다. 수십 년 걸릴 발굴을 군사작전을 벌이듯 전광석화처럼 진행한 것이다. 왜 그랬을까. 실마리는 그가 손잡은 모로가 히데오(諸鹿央雄·사진)에게 있다. 고이즈미는 보고서에서 “모로가가 진력으로 사이토 총독을 움직여 공식 발굴 허가를 얻게 되면서 우리가 다년간 이루고자 했던 목적을 이룰 수 있었다”고 썼다. 도굴꾼이었던 모로가는 유구에 대한 정밀 탐색에는 관심이 없었다. 오로지 고분 속 유물을 꺼내는 데에만 집중했다. 실제 국외소재문화재재단에 따르면 국보나 보물로 지정된 해외 환수 문화재 28건 중 6건이 그가 빼돌린 것들이다. 모로가가 발굴 비용을 대기 위해 건설업자를 끌어들인 것도 부실 발굴의 화근이 됐다. 당시 경주역에 열차 관리시설을 짓는 공사에 많은 흙이 필요했는데 모로가는 서봉총 발굴을 지원받는 대신 건설업자가 봉분의 흙을 퍼 가도록 했다. 빠른 공사를 원하는 업자들은 발굴을 재촉했다. 실제로 고이즈미는 보고서에서 “영리업자와 공동 작업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관계로 원칙적인 학술 발굴 방법을 따르는 것은 불가능했다”고 적었다.:: 서봉총(瑞鳳塚) ::1926년 경북 경주시에서 발견된 신라고분이다. 조선총독부 초청으로 발굴 현장을 찾은 스웨덴 황태자가 봉황이 달린 금관 발굴 작업에 참여한 것을 계기로 스웨덴을 뜻하는 ‘서전(瑞典)’의 ‘서(瑞)’자와 봉황의 ‘봉(鳳)’자를 따서 명명됐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15-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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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토요판 커버스토리/단독]고종의 ‘항일 스파이’… 러와 손잡고 싸웠다

    ‘한국의 황제(고종)가 졸업생들이 어디에 있는지, 잘 있는지 궁금해한다.’ ‘한기수와 강한택은 나와 함께 있으며 오운석은 부령, 윤일병은 북청, 현홍근은 노보키옙스크, 구덕선은 종성에 각각 잠입해 있다.’(1904년 9월 러시아 ‘상하이 정보국’ 암호 전문) 1902년 12월 서울 경운궁. 고종은 인사차 찾아온 카를 베베르 전 주한 러시아공사에게 “관립노어학교 졸업생 10명을 러시아 군사학교에 입학시키고 싶다”고 부탁했다. 베베르는 황제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이로부터 2년 뒤 고종이 러시아의 상하이 정보국을 통해 특별히 안부를 물었다는 졸업생은 바로 이들이다. 이때 그들 중 9명은 이미 러시아의 정보요원이 돼 있었다. 일제강점기 한국인 유학생들이 고종의 밀명을 받고 일본에 대항해 러시아 정보요원으로 활약한 사실이 밝혀졌다. 이는 최덕규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이 러시아 국립역사문서보관소를 통해 당시 작성된 러시아 정부의 비밀 문건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최근 드러났다. 일본의 침략에 대응해 한국과 러시아가 공동 항쟁에 나섰음을 보여 주는 역사적 사료로 평가된다. 최 연구위원의 ‘고종 황제의 독립운동과 러시아 상하이 정보국’ 논문에 따르면 고종이 세운 관립노어학교 졸업생 9명은 러시아 정보기관인 ‘상하이 정보국’에 소속돼 러일전쟁이 발발한 1904년부터 정보요원으로 활동했다. 이들은 함경도와 만주, 노보키옙스크 등에 파견돼 한-중-러 접경지대에서 일본군의 동향을 파악해 보고하는 임무를 맡았다.  ▼ 고종, 시종무관 통해 러 상하이정보국과 비밀 교류 ▼고종의 ‘항일 스파이들’대한제국 노어학교 출신 9명 등… 만주 등 잠입해 일본군 동향 파악“고종황제, 그들의 안위 궁금해 해”… 러 정부 비밀문서 연구서 드러나이에 앞서 러시아 외교부는 러일전쟁을 앞둔 1904년 4월 알렉산드르 파블로프 주한 러시아공사의 주도로 중국 상하이 러청은행 건물에 상하이 정보국을 세웠다. 일본 측의 정보전에 대응해 군사정보를 수집하고 방첩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상하이 정보국 한국분과에 관립노어학교 출신 유학생 9명이 배치됐다. 이들은 △니즈니노브고로드 군사학교의 오운석 구덕선 △추구옙스키 기병학교의 현홍근 윤일병 윤세년 △쿠르스크 군사아카데미의 김낙운 강한택 한기수 등이었다. 이 밖에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대 한국어과 강사였던 김병옥과 카잔신학교 한국인 유학생 5명도 중국 펑톈(奉天)의 러시아 만주군사령부 통역으로 차출됐다. 고종의 시종무관이었던 김인수는 함경도로 파견돼 첩보 활동을 벌였다. 러시아 군사학교 유학생 9명은 러일전쟁 발발 직후인 1904년 5월경 러시아 연해주의 노보키옙스크로 모인 뒤 곧바로 팀을 이뤄 임무 지역으로 잠입했다. 최 연구위원은 “사전에 고종과 러시아 측의 협의가 있었기 때문에 유학생들을 각지로 신속하게 보낼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고종은 시종무관인 현상건을 통해 상하이 정보국과 지속적으로 비밀리에 접촉했다. 현상건은 러시아 추구옙스키 기병학교 출신으로 고종과 상하이 정보국을 잇는 막후 채널 역할을 맡았다. 그는 1904년 국내에서 의병을 조직하는 등 독립운동에 투신한 인물. 고종은 1904년 4월 14일 발생한 경운궁 화재가 자신에 대한 살해 시도로 보고 상하이 정보국을 통해 블라디보스토크 망명을 추진하기도 했다. 한-러 정보 협력에 맞선 일본 측의 비밀공작도 치열하게 전개됐다. 주러 일본대사관 무관이던 아카시 모토지로 대령은 제정 러시아 내 반정부 세력과 러시아로부터 독립을 추진하던 핀란드, 폴란드, 조지아 측에 자금과 무기를 지원했다. 러일전쟁 패전으로 상하이 정보국은 1905년 11월경 일시 해체됐다. 그러나 일본의 간도 침략으로 위협을 느낀 러시아가 새로운 인물인 레프 고이예르 상무관을 내세워 1908년 상하이 정보국을 재건했다. 당시 비밀 문건 중에는 고이예르가 2차 러일전쟁이 일어나면 즉각 한국 의병들에게 무기와 병력을 지원하는 계획을 세운 내용이 들어 있다. 이 무렵 고종의 심복인 이상설이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가 한-러 정보 협력의 대가로 수만 명의 의병으로 구성된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하는 방안을 러시아 측과 협의했다. 그러나 이상설의 계획이 러시아의 비협조로 실패하면서 항일의 방식을 놓고 양측의 시각차가 드러난다. 러일전쟁 패배 이후 일본과 화해 국면에 들어간 러시아가 한국의 적극적인 무장 투쟁에 부담을 느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한시준 단국대 교수는 “6·25전쟁과 냉전을 거치면서 사회주의권이던 러시아, 중국과의 항일 공동 투쟁사가 그동안 한국사의 사각지대에 있었다”며 “올해 광복 70주년을 맞아 이에 대한 의미를 새롭게 조명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15-0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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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민주주의는 과연 태생부터 위대했을까

    “우리가 믿는 건 민주주의가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영화 ‘미션’(1986년)에서 가브리엘 신부는 멘도사의 처절한 고행을 만류하는 동료 신부들의 집단적인 요구에 이렇게 응수한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라는 성경 구절을 죽음으로 지켜낸 가브리엘 신부에게 최고의 가치는 오직 신이었을 뿐 민주주의가 결코 아니었다. 사역지에 살고 있던 과라니족 원주민들을 고향에서 내쫓으라는 스페인 본국과 바티칸의 지시에 맞서 멘도사가 원주민들과 함께 총칼을 잡을 때에도 그는 무력 항쟁을 거부하며 성경의 가르침을 끝까지 고수했다. 민중의 뜻을 섬기는 것이 최대 미덕인 민주주의 관점에서 볼 때 가브리엘 신부의 행보는 반동(反動)에 가까울 수도 있다. 하지만 영화를 보는 관객 누구도 가브리엘 신부의 소신과 희생에 돌을 던질 수 없으리라. 민주주의의 기원과 역사적인 흐름을 심층 고찰한 이 책은 어쩌면 멘도사가 아닌 가브리엘 신부 쪽에 가까운 듯하다. 민주주의가 최고의 가치요 지상과제로 여겨지는 21세기의 관점에서 저자는 ‘과연 민주주의가 태생부터 위대했을까’라는 의문을 스스로 던진다. 결론적으로 말해 현대 민주주의의 원류인 아테네 민주주의는 현재의 관념이나 가치관, 기대와는 현격한 차이를 보였다. 저자에 따르면 아테네에 민주주의를 도입한 클레이스테네스는 민주주의에 대한 도덕적, 지적 확신이 없었다. 그에게 민주주의는 단지 경쟁관계에 있던 귀족세력과 라이벌 국가 스파르타를 견제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 1960년대 케임브리지 학파를 이끈 정치사상사 분야의 석학인 저자는 민주주의가 역사적으로 오랜 기간 기피의 대상이었다가 프랑스 혁명 이후 어떻게 부활했는지를 생생히 보여준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15-0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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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당나라 때 만든 다라니경주 목판 인쇄본 공개

    중국 당나라 때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다라니경주(陀羅尼經呪) 목판 인쇄본이 공개된다. 다라니경주는 범어로 쓴 불교의 여러 주문(다라니)을 종이 한 장에 모아서 찍어낸 것이다. 강원 원주시 명주사 고판화박물관(관장 한선학)은 “다라니경주 목판본을 비롯해 아시아 각국의 부적 판화 40여 점과 서책 등 100여 점을 볼 수 있는 전시회를 5월 10일까지 연다”고 밝혔다. 다라니경주 목판 인쇄본은 연도가 명기돼 있지 않지만, 서지학 전문가들은 당나라 때 제작된 것으로 추정한다. 한자가 거의 섞이지 않고 범어 위주로만 주문을 써놓은 것은 당나라 초기 양식에 해당한다는 것. 가로 23cm, 세로 25cm 크기의 종이에 각종 주문이 빼곡히 적힌 다라니경주 중심에는 ‘제자 고○○가 도솔천궁에 태어나 미륵보살 뵙기를 원합니다(弟子高○○願生兜率天宮得慈尊)’라는 글자가 적혀 있다. 한 관장은 “이번 다라니경주는 중국 칭하이(靑海)에서 불상과 함께 발견된 팔찌 속에 들어 있었다”며 “당나라 때 스님이나 불자가 왕생극락을 기원하는 다라니를 팔찌 안에 넣어 시신과 함께 매장하는 풍습이 있었다”고 설명했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15-0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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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금관총 주인은…?

    경북 경주시 금관총(金冠塚)의 미스터리가 94년 만에 풀릴 것인가. 고고학계는 다음 달 2일부터 국립중앙박물관이 광복 70주년을 맞아 재발굴하는 금관총을 주목하고 있다. 국내 고대 왕릉 중 유일하게 주인이 밝혀진 백제 무령왕릉처럼 금관총에 누가 묻혔는지를 알아낼 수 있느냐가 화두다. 1921년 금관총 발굴은 초기에 고고학자 대신 일반인이 유물 수습에 나서 유물 배치도마저 작성되지 않는 등 부실하게 이뤄졌다. 학계는 재발굴을 통해 아직 규명되지 않은 의문점이 어느 정도 해소될 것으로 기대한다. 금관총을 둘러싼 미스터리를 짚어본다.○ 무덤 주인 남자일까 여자일까? 그동안 학계에서는 금관총에서 주로 여성이 착용하는 ‘굵은 고리 귀걸이(太環耳飾·태환이식)’가 나온 데다 남성이 착장하는 ‘둥근 고리 큰칼(環頭大刀·환두대도)’이 허리 부위가 아닌 목관 위쪽에 따로 부장된 점을 들어 무덤의 주인이 여성일 가능성이 큰 것으로 봤다. 그러나 2013년 7월 중앙박물관이 우연히 금관총 환두대도에서 ‘이사지왕(尒斯智王)’이라는 글자를 발견한 것을 계기로 무덤의 주인이 남자라는 의견이 제기되고 있다. 삼국유사, 삼국사기, 신라 금석문 등을 뒤져봐도 금관총이 만들어진 마립간 시대(내물왕∼지증왕)에 여자에게 왕 칭호를 붙인 사례가 없기 때문이다. 또 태환이식이 여성용이라는 것도 학자들 간에 이견이 있다. 노중국 계명대 명예교수는 “신라 남성들도 귀고리를 착용한 흔적이 있다”며 “시신을 여자로 보면 이사지왕의 칼이 고분 안에 왜 들어갔는지 설명하기가 어렵다”고 말했다.○ 금관총=이사지왕릉? 경주평야에서 숱한 신라 고분이 발견됐지만 피장자를 밝혀주는 명문은 한 번도 발견되지 않았다. 이 때문에 금관총 등 일부 신라 고분은 왕의 무덤이 맞는지 의견이 분분하다. 환두대도에서 발견된 이사지왕이 금관총의 주인이 맞다면 금관총이란 이름은 이사지왕릉으로 바꿔야 한다. 지난해 7월 열린 ‘금관총과 이사지왕’ 학술 심포지엄에서 김재홍 국민대 교수는 “이사지왕이라는 글자가 적힌 환두대도가 피장자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 부장된 점과 이사지왕이 남성 왕의 호칭인 점을 감안할 때 환두대도는 이사지왕의 것이지만 금관총 피장자의 것은 아닐 것”이라고 분석했다. 김 교수는 이사지왕이 자비왕이나 소지왕에 해당될 가능성이 있다고 추정했다. 반면 윤선태 동국대 교수는 이사지왕이 금관총의 주인일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있다. 윤 교수는 “황남대총 북분에서 출토된 은관 장식에 적힌 ‘夫’ ‘十’자와 같이 금관총의 이사지왕 명문과 함께 발견된 ‘尒’ ‘十’ ‘八’자도 왕의 존칭을 축약해서 쓴 것일 수도 있다”고 말했다. 피장자가 이사지왕이라 해도 실제 신라의 왕(마립간)이었는지는 불분명하다. ‘이사지’라는 이름의 신라 왕은 사료에서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금관총의 크기는 마립간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황남대총 등에 비해 왜소하다. 윤 교수는 “신라 때 왕이라는 명칭은 마립간뿐만 아니라 유력한 왕족도 사용할 수 있었다”며 “법흥왕의 동생으로 왕위계승 서열 2위였던 사부지왕이 갈문왕으로 불린 기록이 있다”고 말했다.○ 금관총에서도 순장 있었나 삼국사기를 보면 신라시대에 순장 풍습이 있었으며 지증왕(437∼514)이 금지시켰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 때문에 지증왕 재위 이전에 건립된 것으로 보이는 금관총에도 순장이 행해졌을 가능성이 있다. 실제로 목관 서쪽 끝에서 순장자의 유품으로 보이는 여러 개의 팔찌와 옥, 귀걸이 등이 발견됐다. 윤선태 교수는 “신라 적석목곽분의 구조상 재발굴 시 쌓인 돌(적석) 사이에서 다른 유골이 수습된다면 순장이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봉황대 주인과 가족관계? 학계에서는 항공사진에서 드러나는 고분들의 분포를 볼 때 금관총이 봉황대의 ‘딸린무덤(陪塚·배총)’일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배총은 부부나 형제, 군신 관계의 시신을 근처에 묻는 것을 말한다. 봉황대와 가까운 금관총의 크기가 상대적으로 작은 것도 근거가 된다. 김재홍 교수는 “만약 이번 재발굴에서 금관총과 봉황대를 잇는 묘도(墓道·묘 사이를 잇는 길)가 나오면 무덤의 주인이 봉황대 피장자의 아내일 수 있다는 추측도 가능하다”고 말했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15-0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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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차 떼이고 포 떼인 지방관들 탄식소리 가득

    “권한이 삭감돼 단지 ‘군수’라는 명목만 있는 것이 동병상련이라 한 번 탄식할 만합니다.”(1906년 9월 19일) 대한제국 시절 강진군수를 지낸 조중관이 진도군수였던 권중면에게 보낸 편지 중 일부다. 군수의 권한이 예전만 못하다면서 신세 한탄을 하고 있다. 송나라 때 중국 고사를 빗대 “북산(北山)의 허물어진 집에서 물을 마시며 독서하는 것이 나의 본분인 것을 비로소 깨달았습니다”라는 자조 섞인 말까지 곁들였다. 일제강점기를 코앞에 둔 당시 지방관들에게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힌트는 이 편지 중간쯤에 나온다. 조중관은 “세정(稅政)이 남의 손에 넘어가 깊은 밤부터 새벽까지 수없이 이리저리 굴리던 길고 짧은 계산이 물처럼 흘러가고 구름처럼 사라졌으니 다시 또한 무슨 수가 있겠습니까”라고 썼다. 지방관의 가장 강력한 권한 중 하나였던 징세권이 다른 기관에 넘어간 것이다. 삼권분립 개념이 없던 조선시대에 지방관의 권한은 막강했다. 지방 행정은 물론이고 세수와 사법, 치안, 국방까지 광범한 국가 기능을 지방관 한 명이 모두 수행했다. 그러나 고종이 대한제국을 세우고 행정개혁을 단행하면서 지방관의 권한이 축소된다. 같은 해 장흥군수였던 이장용이 권중면에게 보낸 편지에는 “이곳은 근자에 경찰서를 설치하기 때문에 매우 어지러워 진실로 작은 걱정이 아닙니다”라는 내용이 들어있다.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에 놓인 어지러운 세상에서 권한이 줄어 고민에 빠진 사대부들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일제강점기를 전후로 사대부들이 주고받은 편지첩이 ‘구한말 사대부들의 편지’(책미래·작은 사진)라는 제목으로 최근 출간됐다. 총 104통의 한문 편지를 하영휘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 부교수가 한글로 번역했다. 이 편지들의 소장자는 권율의 후손으로 진도군수 등을 지내다 한일 강제병합 직후 관직을 떠나 계룡산에서 평생 은거한 권중면(1856∼1936)이다. 권중면의 편지에는 당시 사회의 다양한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대목이 많다. 예를 들어 한 일본인 상인이 1907년 2월 권중면에게 보낸 편지도 의미심장하다. “목포에 있을 때 특별히 돕고 보호해 주신 데 힘입어 한 해 업무를 마친 것과 다름없다”는 표현에서 구한말 지방관들과 교류하며 광범위하게 활동하던 일본 상인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하 교수는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는 한국사에서 역사적 전환기임에도 오히려 19세기보다 남아있는 자료가 적은데 권중면의 편지는 당시 시대상을 보여주는 좋은 사료”라고 말했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15-0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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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촌 선생 60주기 추모식… 16일 남양주서 각계 인사 200여명 참석

    동아일보와 고려대, 중앙중고교를 세우고 제2대 부통령을 지낸 인촌 김성수(仁村 金性洙) 선생의 60주기 추모식이 16일 오전 경기 남양주시 화도읍 금남리 고인의 유택 앞에서 거행됐다. 추모식에는 김재호 동아일보·채널A 사장 겸 고려중앙학원 이사장을 비롯한 유족과 이명박 전 대통령, 이용훈 인촌기념회 이사장, 김학준 동북아역사재단 이사장, 김병철 고려대 총장 등 각계 인사 200여 명이 참석했다. 전두환 전 대통령과 양승태 대법원장은 추모 화환을 보내왔다. 인촌의 기일은 18일이지만 당일이 공휴일이어서 앞당겨 열렸다. 이날 행사는 추모 묵념에 이어 고인 약력 보고, 추모사, 소강연, 고인의 육성 청취, 광복 70주년 심포지엄 ‘선진사회로 가는 대한민국의 과제’ 자료집 봉헌, 헌화와 분향의 순서로 빗속에서도 경건하게 치러졌다. 앞서 인촌기념회와 동아일보, 채널A, 고려대는 올 1, 2월 공공성 등 4개 분야에 걸쳐 광복 70주년 심포지엄을 열었다. 이 자료집은 고인의 증손인 김재호 이사장이 봉헌했다. 이 전 대통령은 방명록에 ‘크게 기립니다’라고 적은 뒤 “인촌은 시대를 이끌었던 대단한 분이셨다”고 추모했다. 어윤대 전 고려대 총장은 “한국이 선진국이 됐다고 하지만 인촌 선생과 같은 큰 인물, 존경받는 큰 어른이 없다”며 “선생이 돌아가신 지 60년이 지났지만 선생의 존재가 더욱 무겁게 다가온다”고 말했다. 이용훈 이사장은 추모사에서 “인촌 선생은 일제의 학정과 해방 후 혼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조국의 광복과 건국을 위해 온갖 고난과 역경을 겪으면서도 힘든 역할을 해냈다”며 “인촌 선생의 좌우명이었던 공선사후(公先私後)와 신의일관(信義一貫)의 정신은 돌아가신 지 60년이 된 지금도 우리의 사표가 되고 있다”고 강조했다. 인촌 서거 당시 갓 스무 살로 고려대에 입학한 홍일식 전 고려대 총장은 “인촌 선생은 얼마든지 세속적 안락을 누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험난한 구국의 길을 택했다”고 추모했다. 언론사 연구 권위자인 정진석 한국외국어대 명예교수는 소강연을 통해 인촌 선생이 언론과 교육, 기업 등 다방면의 왕성한 활동을 통해 독립국이라면 정부가 수행했어야 할 공적 역할을 대신 감당한 점을 높이 평가했다. 정 명예교수는 “민족기업 경성방직주식회사를 육성해 식민지 치하 조선의 경제발전에도 힘을 쏟았다”고 설명했다. 일제강점기 해외 항일투쟁에 비해 소홀한 평가를 받고 있는 국내 교육·문화운동에 대한 재평가가 필요하다는 지적도 있었다. 정 교수는 “동아일보와 보성전문은 민족진영 인사들의 활동무대이자 은신할 수 있는 둥지였다”고 덧붙였다.남양주=김상운 sukim@donga.com·조종엽 기자}

    • 2015-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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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윷점 보고, 팽이 치고… 어, 박물관에서 영화감상?

    전국 주요 박물관과 고궁들이 다양한 설맞이 행사를 준비했다. 민속놀이를 비롯한 각종 세시풍속을 체험할 수 있는 이벤트가 눈길을 끈다. 국립민속박물관(관장 천진기)은 18∼22일 양과 관련된 민속체험과 특별공연, 특별전시회 등 총 32가지의 다채로운 체험 프로그램을 준비했다. 우선 양의 모양을 본뜬 ‘한지 사각반 만들기’와 ‘양 인형 만들기’ 행사가 펼쳐진다. 이어 양띠 관람객들에게 복주머니 선물을 선착순 제공하고 ‘행복을 부르는 양(羊)’ 특별전을 선보인다. 흥겨운 설 세시풍속 체험행사도 눈길을 끈다. 토정비결과 윷점 보기, 설빔입기 체험, 전통가옥 오촌댁에서 세배 등이 진행된다. 윷놀이와 제기차기, 팽이치기, 투호 던지기, 쌍륙, 고누 놀이와 같은 전통놀이는 자유체험과 가족대항 경연대회로 각각 참여할 수 있다. 풍성한 설 먹거리도 빠질 수 없다. 떡국에 들어가는 가래떡, 강정 등 한과, 음료 등을 맛볼 수 있는 이벤트를 마련했다. 온 가족들이 함께 즐길 수 있는 문화공연도 준비돼 있다. 19일 뿌리패 예술단의 ‘신명나는 춤과 타악의 만남’과 ‘단심줄 놀이와 함께하는 전통연희 한마당’ 공연이 진행된다. 이어 20일 오산오미걸립농악의 ‘풍류 한마당’과 ‘새해를 여는 사자춤’이, 21일 한푸리 국악관현악단의 ‘희희락락’과 광개토사물놀이의 ‘무브먼트 코리아’ 공연이 펼쳐진다. 국립중앙박물관(관장 김영나)은 19∼20일 이틀 동안 북청사자놀음 공연을 펼친다. 중요무형문화재 제15호인 북청사자놀음은 1500년이 넘는 긴 역사를 자랑한다. 함경남도 북청지방의 전통 민속놀이로 잡귀를 물리치고 집안과 마을의 평안을 기원하는 뜻이 담겨있다. 40년 넘게 북청사자놀음을 전승한 북청사자놀음보존회가 공연에 나선다. 지방 국립박물관들도 다채로운 설맞이 프로그램을 마련했다. 국립경주박물관은 연휴 첫날인 18일과 마지막 날인 22일 영화 ‘마루 밑 아리에티’와 ‘언터처블: 1%의 우정’을 각각 상영한다. 이어 19일에는 줄을 이용한 목각인형 공연(마리오네트)을, 21일에 어린이를 위한 국악 뮤지컬 ‘베짱이와 바이올린’을 각각 진행한다. 이와 함께 20일 가족과 함께하는 ‘떡메 치기’ ‘다식과 떡국 만들어 먹기’ ‘전통차 마시기’ ‘추억의 옥수수 뻥튀기’ 등 민속음식 체험행사를 연다. 풍물패 사물놀이와 더불어 전통놀이 경연을 펼쳐 우승자에게 기념품을 제공한다. 또 연휴 기간 내내 박물관 마당에서 투호놀이, 긴 줄넘기, 윷놀이, 제기차기, 비석치기 등 전통놀이를 자유롭게 즐길 수 있다. 국립부여박물관은 18∼22일 야외마당에서 사물놀이 체험, 팽이치기, 투호, 사방치기 등의 민속놀이와 재미로 보는 윷점 행사를 진행한다. 19일에는 어린이박물관 내 세미나실에서 활 만들기와 20일 연 만들기, 21일 솟대 만들기 체험행사를 연다. 전시실 로비에서는 19∼20일 이틀간 ‘가훈·명언 써주기’를, 21일 야외마당에서 가족과 함께 즐기는 ‘추억의 엿치기’를 체험할 수 있다. 이 밖에 △광주박물관 ‘부적 찍기’ △전주박물관 ‘전통 공예품 만들기’ △진주박물관 ‘십이지신 탁본 체험’ △청주박물관 ‘가족영화 상영’ △춘천박물관 ‘청소년 연극(토끼와 포수) 공연’ △제주박물관 ‘복조리 증정’ 등이 마련돼 있다. 국립박물관의 모든 설 행사는 무료다. 설 당일에는 경복궁 등 주요 궁궐(창덕궁 후원 제외)과 종묘, 조선왕릉이 무료 개방된다. 또 평소 예약제로 운영되는 종묘는 설 연휴 기간인 18∼22일 자유롭게 관람할 수 있다. 고궁에서 문화행사도 즐길 수 있다. 경복궁 함화당과 집경당에서는 18∼20일 온돌을 체험하며 어른에게 세배를 드리는 행사가 열린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15-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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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뉴스룸/김상운]월성 발굴 속도전 안된다

    13일 경북 경주시를 다녀왔다. 지금 천년고도(千年古都) 경주에서는 신라인의 삶과 죽음을 각각 상징하는 월성과 금관총에서 대대적인 발굴이 진행되고 있다. 신라왕들의 생활터전이자 당대 권력의 중추가 월성이라면 이들이 죽어서 땅에 묻힌 무덤은 금관총이다. 김재홍 국민대 교수는 “신라인들의 삶과 죽음을 포괄하는 월성과 금관총을 동시에 발굴하는 건 의미가 적지 않다”고 말했다. 정부와 경주시는 월성 복원을 비롯한 신라왕경 복원사업에 2025년까지 9450억 원을 투입한다. 이날 월성 발굴 현장에서는 문화재청 산하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학예사와 인부 100여 명이 곳곳에서 땅을 파고 흙을 퍼 나르며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펜스만 쳐 있던 두 달 전 풍경과는 확연히 달랐다. 석빙고 앞을 중심으로 40cm 깊이의 구덩이들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죽 늘어서 있었다. 시굴에 들어간 지 두 달밖에 안 됐는데 벌써부터 옛 건물 터와 기와, 그릇 등이 상당수 발견됐다고 한다. 그런데 발굴 현장 주변에서 흥미로운 얘기가 들렸다. 고고학을 전공하는 일본 교토대 교수가 최근 월성 현장을 둘러본 뒤 ‘혀를 찼다’는 것이다. 마치 군사작전을 치르듯 많은 인원을 투입해 발굴을 빠르게 진행한다는 얘기였다. 이마저도 느리다며 민간 기관까지 총 동원해 발굴 인원을 10배 이상으로 늘려야 한다는 주장이 일각에서 나오고 있다. 그러나 현지 고고학자들은 유사 이래 처음 삽을 뜬 월성 발굴이 후세에 부끄럽지 않은 성과를 내려면 ‘속도전’의 유혹에 빠지면 안 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50년 넘게 발굴이 차근차근 이뤄지고 있는 일본 나라의 헤이조쿄(平城京) 발굴을 대표적인 사례로 꼽는다. 일본의 첫 수도로 8세기 왕궁 터가 있는 헤이조쿄는 1994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19세기 메이지시대 때부터 조사가 시작됐는데 1961년 본격적으로 시작된 발굴작업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수십 년 앞을 내다보는 장기적인 시각과 추진력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이에 힘입어 일본 학자들은 이곳에서 1차 사료의 꽃인 목간(木簡·일정한 모양으로 깎은 나무 조각에 쓴 문서나 편지)을 무더기로 출토할 수 있었다. 반면 일제강점기 때 이뤄진 서봉총 발굴은 토사를 채취하려는 목적으로 봉분을 한꺼번에 들어내는 바람에 고분 축조 방식을 연구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날려버리는 결과를 초래했다. 빨리 가시적인 성과를 내고 싶은 지자체와 지역여론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다. 문화재 보호를 위한 개발 규제로 경주시민들이 수십 년간 겪은 불편은 매우 컸다. 하지만 월성 발굴이 속도전으로 진행돼 되돌릴 수 없는 손실을 입는다면 경주뿐만 아니라 국가 전체의 피해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 더구나 발굴과 동시에 왕궁 터를 복원해 관광 자원화하려는 계획을 감안한다면 복원의 기초 자료가 될 발굴을 더 완벽하게 진행해야만 한다. 속도와 효율성이 적어도 문화 영역에서만은 최고의 원칙이 될 수 없다.김상운 문화부 기자 sukim@donga.com}

    • 2015-0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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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북아역사재단, 중국사 외국전 8년만에 완역 출간

    동북아역사재단이 중국 정사(正史)에서 주변 이민족에 대한 기록만 따로 정리한 외국전(外國傳)을 8년 만에 완역해 최근 발간했다. 중국 정사 외국전을 번역해 역주 작업까지 마친 것은 세계적으로 이번이 처음이라고 재단 측은 밝혔다. 정사란 중국 역대 왕조가 편찬한 역사서를 말한다. 이번 외국전 번역은 한나라 사마천이 쓴 사기(史記)부터 청나라 때 펴낸 명사(明史)에 이르기까지 총 22종의 중국 역사서를 아우른다. 외국전에서 다루는 나라는 우리나라를 비롯해 일본, 류큐왕국(오키나와), 대만, 필리핀, 투르키스탄, 티베트, 이란, 몽골까지 다양하다. 우리 정사를 다른 나라에서 오랜 기간 번역한다면 어떤 생각이 들까. 우리 역사에 대한 큰 관심을 보여주는 만큼 고맙기도 하겠지만 그보다는 ‘왜 그랬을까’라는 의구심부터 드는 게 당연할 것이다. 더구나 20명이 넘는 학자를 대거 투입해 사업을 추진한 곳이 교육부 산하 공공기관인 동북아역사재단이라는 점에서 더 눈길을 끈다. 동북아역사재단은 중국의 동북공정과 일본의 역사 왜곡에 대항해 우리 정부가 2006년에 설립한 학술기관이다. 다시 말해 양측의 역사 왜곡에 맞서 우리 측의 학문적 논리를 체계적으로 세우는 곳이라는 얘기다. 이번 중국 정사 외국전 발간은 이런 흐름과 맥을 같이한다. 정사의 특성상 역대 중국 왕조 특히 한족의 주변 민족에 대한 시각 내지 편견이 고스란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예컨대 당대 중국이 통제하지 못한 지역에 대해서도 마치 영토로 취급하거나, 타국의 상인이 오면 으레 조공 외교로 취급하는 태도가 중국 정사에서 보인다는 것이다. 재단 관계자는 “이번 정사 외국전 사업을 통해 동북공정에 대한 깊이 있는 대응이 가능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번 번역 작업에 참여한 하원수 성균관대 교수는 “외국전은 역대 중국 왕조가 주변국을 어떻게 인식해 왔는지를 살펴볼 좋은 기회”라고 밝혔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15-0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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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북아역사재단, 중국 정사를 8년 투자해 완역한 이유는?

    동북아역사재단이 중국 정사(正史)에서 주변 이민족에 대한 기록만 따로 정리한 외국전(外國傳)을 8년 만에 완역해 최근 발간했다. 중국 정사 외국전을 번역해 역주 작업까지 마친 것은 세계적으로 이번이 처음이라고 재단 측은 밝혔다. 정사란 중국 역대 왕조가 편찬한 역사서를 말한다. 이번 외국전 번역은 한나라 사마천이 쓴 사기(史記)부터 청나라 때 펴낸 명사(明史)에 이르기까지 총 22종의 중국 역사서를 아우른다. 외국전에서 다루는 나라는 우리나라를 비롯해 일본, 오키나와, 대만, 필리핀, 투르키스탄, 티베트, 이란, 몽골까지 다양하다. 우리 정사를 다른 나라에서 오랜 기간 번역한다면 어떤 생각이 들까. 우리 역사에 대한 큰 관심을 보여주는 만큼 고맙기도 하겠지만 그보다는 ‘왜 그랬을까’라는 의구심부터 드는 게 당연할 것이다. 더구나 20명이 넘는 학자를 대거 투입해 사업을 추진한 곳이 교육부 산하 공공기관인 동북아역사재단이라는 점에서 더 눈길을 끈다. 동북아역사재단은 중국의 동북공정과 일본의 역사왜곡에 대항해 우리 정부가 2006년에 설립한 학술기관이다. 다시 말해 양측의 역사왜곡에 맞서 우리 측의 학문적 논리를 체계적으로 세우는 곳이라는 얘기다. 이번 중국 정사 외국전 발간은 이런 흐름과 맥을 같이한다. 정사의 특성상 역대 중국 왕조 특히 한족의 주변 민족에 대한 시각 내지 편견이 고스란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예컨대 당대 중국이 통제하지 못한 지역에 대해서도 마치 영토로 취급하거나, 타국의 상인이 오면 으레 조공외교로 취급하는 태도가 중국 정사에서 보인다는 것이다. 재단 관계자는 “이번 정사 외국전 사업을 통해 동북공정에 대한 깊이 있는 대응이 가능할 것”이라고 말했다. 외국전에서 우리나라를 다룬 조선전(朝鮮傳)은 앞서 국사편찬위원회가 1986~1990년 ‘중국 정사 조선전 역주’(5권)로 발간한 바 있어 이번 사업에서는 빠졌다. 그러나 재단 측은 내용을 더 보강한 조선전 역주서를 낼 계획을 세우고 있다. 이번 번역 작업에 참여한 하원수 성균관대 교수는 “외국전은 역대 중국 왕조가 주변국을 어떻게 인식해왔는지를 살펴볼 수 있는 좋은 기회”라며 “조선전과 이번 외국전 자료를 통해 여러 이민족에 대한 중국의 인식을 비교해 볼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15-0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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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고려충신 정몽주를 떠받든 타협정치

    “그들(조광조 일파)의 뜻은 김굉필을 (문묘에) 종사하고 그것을 빙자해 당을 세우자는 데 있었고 애초 정몽주(1337∼1392)를 위해 계책을 세운 것은 아니었다.”(중종실록 1517년 8월 7일) 중종 반정(反正)을 이끈 권신들이 세상을 떠나자 중종은 조광조 등 젊고 참신한 인재들을 대안세력으로 키운다. 중종의 신임을 얻은 조광조 일파는 세조에 의해 목숨을 잃은 성삼문, 박팽년에 이어 자신들의 학문적 스승이자 세조의 정권 찬탈을 비판하다 희생당한 김종직, 김굉필을 문묘에 배향할 것을 주장했다. 시대영합적인 반정 세력과 달리 자신들은 대의를 좇는다는 정치적 차별화를 시도한 것. 당시 성리학적 세계관에서 문묘에 배향된다는 것은 그 학자의 세계관과 학문 계보가 국가의 공인을 얻는다는 걸 뜻했다. 그러나 세조의 직계였던 중종의 심기가 편치만은 않았던 건 당연할 터. 이들은 중종의 불만을 누그러뜨리고 충군(忠君)이라는 유교 가치관을 내세우기 위해 엉뚱하게도 고려시대 사람인 정몽주를 끌어들인다. 결국 중종은 조광조의 바람과 달리 오직 정몽주만 문묘에 배향하라고 결정한다. 이로써 조선 개국공신으로 나라의 기틀을 세운 정도전은 반역자의 오명을 뒤집어쓴 반면, 이성계를 제거하고 고려를 지키려 한 정몽주는 조선왕조의 문묘에 배향되는 역사의 아이러니가 벌어진 것이다. 이 책은 정통 역사학자가 아닌 정치학자가 쓴 글답게 조선건국과 문묘 배향의 과정을 권력정치의 시각에서 새롭게 조명하고 있다. 문묘가 단순히 유교적 대의명분과 학문적 영향력에 따라 구성된 게 아니라 끊임없는 정치적 타협의 산물이었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재밌는 것은 영원한 충의의 상징인 정몽주도 사실은 처세와 현실정치에 능했던 인물이었다는 저자의 색다른 해석이다. 흔히 정몽주를 말할 때 우리는 선죽교의 피와 단심가(丹心歌)를 떠올리며 권력에 초연한 의사의 모습을 연상한다. 그러나 저자에 따르면 정몽주는 이성계를 도와 우왕을 폐위시키고 공양왕을 옹립하는 데 가담하는 등 충의의 관점으로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취했다. 정몽주가 명나라 사신으로 갔다가 배가 좌초돼 13일 동안 가죽을 뜯어먹으며 연명한 일화도 그가 생사에 초탈한 도인이 아닌 생존에 대한 강한 의지를 가졌던 보통사람이었음을 보여준다. 이와 관련해 당대 조선 지식인들도 정몽주의 정치적 행보에 의심을 품었다. 예컨대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학자였던 조식(1501∼1572)은 “신돈이 국정을 어지럽히고 최영이 중국을 침범하던 때에 정몽주가 벼슬을 버리지 않은 것은 선비로서 책임을 다하지 않은 것”이라며 비판했다. 조식의 제자였던 정구도 “우왕과 창왕 부자를 섬겼으면서도 그들을 추방하는 모의에 정몽주가 참여했고 그 공로로 공신 책봉까지 받았다”며 “정몽주의 죽음은 가소로울 뿐”이라고 했다. 정몽주의 상반된 행적을 놓고 적지 않은 논란이 있었기 때문에 그의 문묘 종사는 쉽지 않았다. 이 때문에 조선 개국공신 권근(1352∼1409)이 정몽주의 정치적 복권을 건의한 지 116년 만에야 문묘 배향이 이뤄질 수 있었다. 중종 5년(1510년) 때 영의정 등 삼공(三公)들조차 “정몽주는 고려의 인물로 조선이 개국한 지 이미 오래됐음에도 그를 문묘에 종사하자는 논의가 없었는데 지금에 와서 경솔하게 결정할 순 없다”며 조심스러운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왕권을 견제하고 건전한 공론으로 정치를 이끌어야 한다는 사림들의 가치관이 모든 난관을 극복하게 했다. 저자는 “정몽주를 문묘에 종사시킴으로써 부당한 권력에 맞서다 희생된 지식인의 절의를 치세의 상징이자 시대정신으로 부활시킨 것”이라며 “조광조는 군주의 폭정에 항거하는 지식인들의 권력비판을 보장받으려고 한 것”이라고 말했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15-0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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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도전이 아닌 정몽주가 조선왕조 문묘에…역사의 아이러니

    “그들(조광조 일파)의 뜻은 김굉필을 (문묘에) 종사하고 그것을 빙자해 당을 세우자는 데 있었고 애초 정몽주를 위해 계책을 세운 것은 아니었다.” (중종실록 1517년 8월 7일) 중종 반정(反正)을 이끈 권신들이 세상을 떠나자 중종은 조광조 등 젊고 참신한 인재들을 대안세력으로 키운다. 중종의 신임을 얻은 조광조 일파는 세조에 의해 목숨을 잃은 성삼문, 박팽년에 이어 자신들의 학문적 스승이자 세조의 정권 찬탈을 비판하다 희생당한 김종직, 김굉필을 문묘에 배향할 것을 주장했다. 시대영합적인 반정 세력과 달리 자신들은 대의를 ¤는다는 정치적 차별화를 시도한 것. 당시 성리학적 세계관에서 문묘에 배향된다는 것은 그 학자의 세계관과 학문 계보가 국가의 공인을 얻는다는 걸 뜻했다. 그러나 세조의 직계였던 중종의 심기가 편치만은 않았던 건 당연할 터. 이들은 중종의 불만을 누그러뜨리고 충군(忠君)이라는 유교 가치관을 내세우기 위해 엉뚱하게도 고려시대 사람인 정몽주를 끌어들인다. 결국 중종은 조광조의 바람과 달리 오직 정몽주만 문묘에 배향하라고 결정한다. 이로써 조선 개국공신으로 나라의 기틀을 세운 정도전은 반역자의 오명을 뒤집어 쓴 반면, 이성계를 제거하고 고려를 지키려한 정몽주는 조선왕조의 문묘에 배향되는 역사의 아이러니가 벌어진 것이다. 이 책은 정통 역사학자가 아닌 정치학자가 쓴 글답게 조선건국과 문묘 배향의 과정을 권력정치의 시각에서 새롭게 조명하고 있다. 문묘가 단순히 유교적 대의명분과 학문적 영향력에 따라 구성된 게 아니라 끊임없는 정치적 타협의 산물이었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재밌는 것은 영원한 충의의 상징인 정몽주도 사실은 처세와 현실정치에 능했던 인물이었다는 저자의 색다른 해석이다. 흔히 정몽주를 말할 때 우리는 선죽교의 피와 단심가(丹心歌)를 떠올리며 권력에 초연한 의사의 모습을 떠올린다. 그러나 저자에 따르면 정몽주는 이성계를 도와 우왕을 폐위시키고 공양왕을 옹립하는 데 가담하는 등 충의의 관점으로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취했다. 정몽주가 명나라 사신으로 갔다가 배가 좌초돼 13일 동안 가죽을 뜯어먹으며 연명한 일화도 그가 생사에 초탈한 도인이 아닌 생존에 대한 강한 의지를 가졌던 보통사람이었음을 보여준다. 이와 관련, 당대 조선 지식인들도 정몽주의 정치적 행보에 대해 의심을 품었다. 예컨대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학자였던 조식(1501~1572)은 “신돈이 국정을 어지럽히고 최영이 중국을 침범하던 때에 정몽주가 벼슬을 버리지 않은 것은 선비로서 책임을 다하지 않은 것”이라며 비판했다. 조식의 제자였던 정구도 “우왕과 창왕 부자를 섬겼으면서도 그들을 추방하는 모의에 정몽주가 참여했고 그 공로로 공신 책봉까지 받았다”며 “정몽주의 죽음은 가소로울 뿐”이라고 했다. 정몽주의 상반된 행적을 놓고 적지 않은 논란이 있었기 때문에 그의 문묘 종사는 쉽지 않았다. 이 때문에 조선 개국공신 권근(1352~1409)이 정몽주의 정치적 복권을 건의한 지 116년 만에야 문묘 배향이 이뤄질 수 있었다. 중종 5년(1510년) 때 영의정 등 삼공(三公)들조차 “정몽주는 고려의 인물로 조선이 개국한지 이미 오래됐음에도 그를 문묘에 종사하자는 논의가 없었는데 지금에 와서 경솔하게 결정할 순 없다”며 조심스런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왕권을 견제하고 건전한 공론으로 정치를 이끌어야 한다는 사림들의 가치관이 모든 난관을 극복케 했다. 저자는 “정몽주를 문묘에 종사시킴으로서 부당한 권력에 맞서다 희생된 지식인의 절의를 치세의 상징이자 시대정신으로 부활시킨 것”이라며 “조광조는 군주의 폭정에 항거하는 지식인들의 권력비판을 보장받으려고 한 것”이라고 말했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15-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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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시대 금실 제조기술 200년만에 복원

    11일 충남 부여군 한국전통문화대 작업실. 길이 6m, 높이 4m에 이르는 대형 베틀이 눈에 들어왔다. 정확한 명칭은 전통 수공 ‘문직기(紋織機·옷감 위에 문양을 짜는 베틀)’. 2인 1조로 구성돼 금실(金絲·금사)과 명주실을 씨줄과 날줄로 엮어 무늬를 만드는 기구다. 시연에 나선 여학생이 줄이 꼬이지 않도록 얇은 금실을 나무 막대기에 걸어 두 겹의 명주실 사이로 집어넣었다. 그러고는 바디를 힘차게 당겨 문양을 짜서 넣었다. 옆에서 보니 남색 명주 천에 앙증맞은 원앙새가 화려한 금빛을 뽐내고 있었다. 조선시대에 단절된 금실 제조기술이 200여 년 만에 복원됐다. 문화재청 산하 한국전통문화대는 4년의 연구 끝에 전통기법으로 금실을 만들어 옷감에 문양을 새기는 데 성공했다. 지금까지는 전통 제조기법을 잃어버린 채 공장에서 투명필름에 금가루를 입히는 방식으로 금실을 생산했다. 금실은 전통 한지 위에 얇은 금박을 두 겹으로 붙인 뒤 끝이 둥근 전통 칼로 썰어내 만든다. 두께가 2μm(마이크로미터·1μm는 100만분의 1m)에 불과한 금박이 찢어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잘라내야 하기 때문에 한지와 금박을 아교 성분의 접착제로 바른 뒤 한두 달 동안 서서히 말린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우리나라에서 금실이 사용된 기록은 삼국시대인 신라 진덕여왕 7년(서기 653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현재 금실이 쓰인 유물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온양민속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1302년 아미타불상 불복장(佛腹藏·불상 안에 사리 등을 집어넣는 것) 직물이다.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계승된 금실 전통 제조기법이 우리나라에서 단절된 시기는 영조 9년(1733년). 값비싼 금실을 만드느라 자원이 낭비되고 사치가 만연한다는 이유로 영조가 문직기 자체를 없애라고 지시했다. 영조 이후에도 간간이 각종 직물에 금실이 쓰였지만 제조방식은 서서히 잊혀 갔다. 이 때문에 연구팀은 전통기술 복원의 실마리를 얻기 위해 한중일 3국의 고문헌 111권을 참고하고, 금실을 쓴 국내외 유물 68점을 정밀 조사했다. 연구팀은 지난해 개발한 전통 문직기를 사용해 고려시대 서산 문수사 금동아미타불상(1346년)의 불복장 직물인 ‘남색원앙문직금릉(藍色鴛鴦紋織金綾·보물 제1572호)’을 복원해 냈다. 모든 공정이 수동이다 보니 과정은 지난했다. 불과 3cm의 무늬를 짜는 데 세 시간이 걸렸다. 1m짜리 남색원앙문직금릉을 복원하는 데 밤샘 작업 끝에 꼬박 한 달 반이 소요됐다. 연구팀을 이끈 심연옥 한국전통문화대 교수는 “이번 복원 기술은 수백 점에 달하는 우리나라 금실 직물 문화재를 전통방식으로 복원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는 데 의의가 있다”고 밝혔다.부여=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15-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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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시대 전통금실 제조기술 복원…문양 짜는 현장 보니

    11일 충남 부여군 한국전통문화대 작업실. 길이 6m, 높이 4m에 이르는 대형 베틀이 눈에 들어왔다. 정확한 명칭은 전통 수공 ‘문직기(紋織機·옷감 위에 문양을 짜는 베틀)’. 2인 1조로 구성돼 금실(金絲·금사)과 명주실을 씨줄과 날줄로 엮어 무늬를 만드는 기구다. 시연에 나선 여학생이 줄이 꼬이지 않도록 얇은 금실을 나무막대기에 걸어 두 겹의 명주실 사이로 집어넣었다. 그러고는 바디를 힘차게 당겨 문양을 짜서 넣었다. 옆에서 보니 남색 명주 천에 앙증맞은 원앙새가 화려한 금빛을 뽐내고 있었다. 조선시대에 단절된 금실 제조기술이 200여년 만에 복원됐다. 문화재청 산하 한국전통문화대는 4년의 연구 끝에 전통기법으로 금실을 만들어 옷감에 문양을 새기는 데 성공했다. 지금까지는 전통 제조기법을 잃어버린 채 공장에서 투명필름에 금가루를 입히는 방식으로 금실을 생산했다. 금실은 전통한지 위에 얇은 금박을 두 겹으로 붙인 뒤 끝이 둥근 전통 칼로 썰어내 만든다. 두께가 2㎛에 불과한 금박이 찢어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잘라내야 하기 때문에 한지와 금박을 아교 성분의 접착제로 바른 뒤 1~2달 동안 서서히 말린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우리나라에서 금실이 사용된 기록은 삼국시대인 신라 진덕왕 7년(서기 653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현재 금실이 쓰인 유물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온양민속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1302년 아미타불상 불복장(佛腹藏·불상 안에 사리 등을 집어넣는 것) 직물이다.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계승된 금실 전통 제조기법이 우리나라에서 단절된 시기는 영조 9년(1733년). 값비싼 금실을 만드느라 자원이 낭비되고 사치가 만연한다는 이유로 영조가 문직기 자체를 없애라고 지시했다. 영조 이후에도 간간히 각종 직물에 금실이 쓰였지만 제조방식은 서서히 잊혀져갔다. 이 때문에 연구팀은 전통기술 복원의 실마리를 얻기 위해 한, 중, 일 3국의 고문헌 111권을 참고하고, 금실을 쓴 국내외 유물 68점을 정밀 조사했다. 연구팀은 지난해 개발한 전통 문직기를 사용해 고려시대 서산 문수사 금동아미타불상(1346년)의 불복장 직물인 ‘남색원앙문직금능(藍色鴛鴦紋織金綾·보물 제1572호)’을 복원해냈다. 모든 공정이 수동이다보니 과정은 지난했다. 불과 3㎝의 무늬를 짜는데 세 시간이 걸렸다. 1m짜리 남색원앙문직금능을 복원하는데 밤샘 작업 끝에 꼬박 한달 반이 소요됐다. 연구팀을 이끈 심연옥 한국전통문화대 교수는 “이번 복원 기술은 수 백점에 달하는 우리나라 금실 직물 문화재를 전통방식으로 복원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는 데 의의가 있다”고 밝혔다.부여=김상운 기자sukim@donga.com}

    • 2015-0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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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해외 대학에 한국학부 첫 개설…베트남 호치민대 재학생 500명

    해외 대학에 한국학부가 처음 생겼다. 한국학중앙연구원(한중연)은 베트남 호치민 인문사회과학대에 설치된 한국학과가 한국학부로 승격됐다고 11일 밝혔다. 해외에서 한국학부가 개설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 학부에는 한중연의 해외 한국학 지원예산이 투입됐다. 호치민대는 1994년 한국어과를 신설해 꾸준히 학과 규모를 키워왔다. 한국학부에는 한국어교육과를 비롯해 한국문화·사회과, 한국경제·정치·외교과를 두고 종합적인 지역학 연구를 수행할 계획이다. 한국학부는 교수진 24명(강사 포함)과 500여 명의 재학생이 있다. 한중연은 3년 전부터 ‘해외한국학 씨앗형 사업’을 통해 호치민대 한국학과를 지원했다. 이 사업은 교육부 위탁을 받아 38개국에 걸쳐 해외 한국학 연구자를 돕고 있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15-0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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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단독]14세기 고려불화 伊서 모셔온다

    이탈리아에 있는 14세기 고려불화를 국내로 환수하는 방안이 추진된다. 정부가 나서서 고려불화를 해외에서 환수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문화재청 산하 국외소재문화재재단과 국립중앙박물관은 이탈리아 국립동양예술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14세기 전반의 고려불화 ‘아미타내영도(阿彌陀來迎圖)’를 구입 혹은 영구대여 형식으로 환수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고 9일 밝혔다. 이에 따라 두 기관의 관계자들이 지난주 로마를 찾아 환수 의사를 타진한 것으로 확인됐다. 아미타불이 오른손을 내밀어 죽은 사람을 맞이하는 모습을 그린 아미타내영도는 비슷한 형식의 작품이 일본 지온(知恩)원과 젠린(禪林)사, 프랑스 기메박물관 등 세계에 5점만 전할 정도로 희귀하다. 국내에선 개인 수집가가 한 점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중앙박물관이 2년 전 이탈리아에서 처음 존재를 확인한 아미타내영도는 보존 상태가 양호해 최소 보물급 이상의 가치를 갖고 있는 것으로 평가받는다. 정우택 동국대 교수(동국대박물관장)는 “이탈리아의 아미타내영도는 독존상(獨尊像)으로 수월관음도보다 수가 훨씬 적어 문화재로서 희소성이 크다”고 말했다. 문화재계에 따르면 아미타내영도는 경매 시장에 나올 경우 최소 10억 원 이상의 가치가 있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탈리아 로마에 있는 국립동양예술박물관은 1957년 개관했으며 2010년 한국실을 열고 불상과 그림, 도자기 등 40여 점을 전시하고 있다. 현재 이탈리아는 경제위기로 박물관의 재정 상태가 열악해 각종 지원을 통한 문화재 환수 가능성이 다른 나라에 비해 높은 상황이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15-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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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빛으로 빚은 유리잔

    크리스털처럼 빛나는 유리잔에 삼라만상이 아로새겨져 있었다. 9일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의 ‘빛의 예술, 보헤미아 유리’ 특별전 기자간담회에서 본 작품들은 화려한 유리 세공 기술의 진수를 보여 줬다. 이 가운데 특히 18세기 초반에 만들어진 ‘프라하 전경이 있는 잔’은 제목 그대로 높이 20cm짜리 유리잔에 풍경화 한 폭이 숨어 있다. 유리잔 가운데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프라하 성과 카를 다리, 성당 등 프라하 시가지가 빼곡히 늘어서 있다. 자칫 깨지기 쉬운 유리를 이처럼 자유자재로 조각한 기술이 지금 봐도 놀랍다. 이번 전시회는 우리나라와 체코의 국교 수립 25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마련됐다. 체코 국립박물관과 프라하 장식미술관의 유리 공예품 343점이 들어왔다. 보헤미아 지역은 유럽의 유리공예 중심지로 꼽히는데 금실과 루비 등을 넣은 화려한 장식 유리가 유명하다. 전시 작품 중 1836년에 만든 ‘요세프 융만에게 헌정한 잔’은 왕관 모양으로 새겨진 뚜껑과 바닥이 안팎으로 깎인 유리 단면을 타고 빛이 여러 방향으로 반사를 일으키는 장관을 연출한다. 융만(1773∼1847)은 체코어 사전을 발간해 합스부르크 가문 치하의 체코에 민족 부흥운동을 일으킨 학자다. 성당에 들어가는 휘황찬란한 스테인드글라스도 선보인다. 성모 마리아와 세례 요한을 새긴 스테인드글라스는 15세기 전반에 제작된 것으로 체코에서 가장 오래된 스테인드글라스다. 전시회는 4월 26일까지 열리며 관람료는 없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15-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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