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하기

“일한 국교∼정상화∼50주년 축하행사∼‘미래에의 가교’ 개최를∼진심으로∼축하드립니다.” 19일 오후 일본 도쿄의 한 호텔에서 열린 한일 국교정상화 50주년 기념행사.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의 부인인 아키에(昭惠) 여사가 연단에 올라 느리지만 정확한 한국어로 축사를 시작했다. 일본 총리 부인의 한국어 인사에 객석에서는 박수가 쏟아졌다. 아키에 여사는 아베 총리의 지역구인 시모노세키와 부산이 자매도시라는 점을 언급하며 한일 교류를 양 도시 어머니회 배구 교류에 비유하기도 했다. 그는 “경기를 할 때는 서로 격렬하게 맞붙지만 끝나면 같이 먹고 마시고 가라오케에서 노래하면서 금방 친해진다”고 지적했다. 이어 이날 행사에서 공연한 한일 어린이 합창단을 언급하며 “아이들이 맺은 유대를 우리 어른들이 이어받아 앞으로 일한관계 개선으로 연결되도록 노력하겠다는 마음을 새롭게 했다”고 말했다. 이어 연단에 오른 유흥수 주일대사는 “아키에 여사는 한일교류 축제나 대사관의 김장행사에도 방문해 주시는 등 한국 문화에 대한 깊은 관심과 따뜻한 애정을 보여주셨다”고 화답했다.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외상 등 참석자들은 이후 행운을 기원하는 의미로 술독의 뚜껑을 깨는 ‘가가미비라키(鏡開き)’ 행사를 가졌다. 행사에는 14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히로시마의 양조장에서 온 술독이 이용됐다. 이후에는 참석자 600여 명이 김치와 막걸리, 일식과 사케(일본 술)를 즐겼다. 이날 무대에는 한일 양국 어린이 70여 명으로 구성된 합창단 외에도 한류스타 권상우 씨 등 연예인들이 등장했다.도쿄=장원재 특파원 peacechaos@donga.com}

한국 4인조 절도범이 2012년 일본 쓰시마(對馬) 섬에서 훔쳐온 통일신라시대 불상 동조여래입상(銅造如來立像·사진)이 일본으로 돌려보내진다. 절도 당시 점유자가 요청하면 국내법에 따라 돌려줘야 하기 때문이다. 대검찰청 공판송무부(부장 유상범 검사장)는 동조여래입상이 한반도에서 불법적으로 일본에 유출됐다고 볼 정황이 없는 데다 국내에서 소유권을 주장하는 사람이 없어 형사소송법에 따라 점유자였던 일본 신사에 돌려주기로 했다고 15일 밝혔다. 동아일보가 ‘한국 도둑들이 훔쳐 온 일본 문화재 2점을 되돌려주지 않으면 한국이 과거 일제가 강탈해간 수많은 문화재를 돌려달라고 할 명분이 약해진다’고 지적한 지 하루 만에 이뤄진 조치다. 검찰과 문화재청은 좌대를 포함해 높이 38.2cm, 무게 4.1kg의 이 불상이 한반도에서 만들어진 만큼 일본에 반출된 경위를 전문가 20여 명을 통해 심층 감정했지만 불법 유출 증거를 찾지 못했다. 다만 탄소연대기 측정을 통해 8세기에 제작한 진품이라는 게 확인됐고, 당시 수도인 경주의 왕궁 공방에서 만들었을 거란 추정이 나왔다. 이후 6개월 동안 본래 소유자라고 주장하는 사찰 등이 나타나길 기다렸지만 동조여래입상의 소유권을 주장하는 이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대전 문화재청 산하 국립문화재연구소에 보관 중인 동조여래입상은 16일 일본 신사 측에 넘겨진다. 일본 언론은 이번 반환이 국교정상화 50주년을 맞은 한일 관계를 개선하는 계기가 될지 주목하고 있다. 검찰 관계자는 “만약 한국인이 루브르 박물관에 가서 과거 약탈당했다는 문화재를 도둑질해 와 소유권을 주장하며 안 돌려준다면 세계 어느 나라가 우리를 법치국가로 보겠는가”라며 “우리 손이 깨끗해야 일본에 할 말을 할 수 있게 된다”고 말했다. 반면 4인조 절도범이 함께 훔쳐 온 관세음보살좌상은 부석사와 일본 간논(觀音)사 간 소유권 분쟁이 끝나기 전엔 반환하지 않을 방침이다. 불상 내부에서 고려시대인 1330년에 제작돼 충남 서산 부석사에 봉안됐다는 복장 유물이 발견됐기 때문이다. 부석사 측은 “불상이 과거 약탈당한 물품인 만큼 일본으로 돌려보내지 말라”며 가처분 신청을 냈고, 이를 대전지법이 인용했다. 다만 일본 간논사가 한국을 상대로 민사소송을 제기하면 법원 판단에 따라 행선지가 결정된다.조동주 기자 djc@donga.com / 도쿄=장원재 특파원}

강제징용 관련 시민단체를 만들고 유골반환 운동에 혼신의 힘을 다하다가 사망한 일본 시민운동가의 유고집을 한국과 일본의 지인들이 발간해 화제를 모으고 있다. 유고집의 주인공은 ‘일본의 양심’으로 불렸던 후쿠도메 노리아키(福留範昭·사진) 씨. 그는 2010년 5월 60세의 나이에 급성 심부전으로 세상을 떠나 주위를 안타깝게 했다. 도쿄신문과 아사히신문에 따르면 후쿠도메 씨는 원래 문화인류학 연구자였으나 1980년대 초 계명대에서 일본어를 가르치면서 한국의 매력에 빠졌다. “한국인보다 더 한국을 사랑한다”고 공언했을 정도였다. 1986년 귀국해 히로시마 수도대 교수로 임용됐지만 부락민 출신 직원에 대한 차별에 반대하다 미움을 사 해고됐다. 그는 히로시마를 찾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통역을 맡은 것을 계기로 한일 간 역사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됐다. 2005년에는 ‘강제동원진상규명네트워크’라는 시민단체를 만들어 초대 사무국장을 맡았다. 이후 일본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강제징용 실태 조사 및 유해 발굴을 위해 노력했다. 후쿠도메 씨는 특히 강제징용자들이 광복 후 귀향길에 올랐다가 태풍을 만나 154명이 사망한 ‘아시베 만 조난선 사건’의 진상조사에 열정적으로 매달렸다. 한국과 일본에서 그를 아끼던 사람들은 지난해 진상규명네트워크가 한국에서 상을 탄 것을 기념해 유고집 편찬위원회를 결성했다. 그리고 5주기인 올해 5월 ‘전후 70년-한일 과거문제 해결에 대한 후쿠도메 노리아키 씨의 전 궤적’이라는 유고집을 냈다.도쿄=장원재 특파원 peacechaos@donga.com}

“명함에는 사장이라고 쓰고 있지만 머릿속에서 저는 게임 개발자입니다. 하지만 마음속으로 저는 게이머입니다.” 2005년 미국에서 열린 게임 개발자 콘퍼런스. 기조연설자 이와타 사토루(巖田聰·56·사진) 닌텐도 사장이 연단에 올라와 처음 한 말이다. 객석에 앉은 전 세계 게이머들은 그에게 우레와 같은 박수를 보냈다. ‘슈퍼마리오’ 등으로 유명한 게임회사 닌텐도는 13일 오전 이와타 사장이 11일 담관암으로 세상을 떠났다고 밝혔다 향년 56세. 게임산업의 거인으로 꼽혔던 그가 경영을 맡은 2002년부터 2015년까지 13년 동안 닌텐도는 세계 최고의 기업으로 우뚝 섰다가 쇠퇴 후 다시 재기하는 등 부침을 겪었다.○ 천재 프로그래머, 게임 역사를 바꾸다 이와타 사장은 1959년 홋카이도(北海道) 삿포로(札幌) 시에서 태어났다. 고등학교 때 혼자서 미국 HP 전자계산기로 간단한 게임을 만들 정도로 게임에 심취해 있었다. 그가 게임을 보내자 놀란 HP에서 여러 제품을 그에게 보냈다고 한다. 도쿄공대를 졸업하고 게임 개발 업체인 할(HAL) 연구소에 프로그래머로 입사했다. 이후 닌텐도용 게임을 만들며 사장까지 올랐다가 2000년 야마우치 히로시(山內溥) 당시 사장의 권유로 닌텐도에 합류했다. 2002년 43세의 나이로 사장까지 올랐다. 오너 일가가 아닌 사람이 경영을 맡은 것은 회사 창립 이후 113년 만에 처음이었다. 그가 취임할 당시 닌텐도는 위기를 맞고 있었다. 가정용 게임기 시장에서 소니의 ‘플레이스테이션(PS)’에 밀리고 있었고 마이크로소프트의 ‘엑스박스’에 쫓기는 실정이었다. 게임 시장은 컴퓨터 온라인 게임 위주로 재편되고 있었다. 이와타 사장은 취임 후 “기술 중심이 아닌 고객 중심의 제품으로 승부해야 한다”며 게임을 하지 않는 이들을 위한 게임기 개발에 착수해 2004년 ‘닌텐도 DS’, 2006년 ‘닌텐도 위(Wii)’라는 세계적인 히트상품을 내놓았다. 청소년의 전유물이었던 게임을 가족이 함께 즐길 수 있는 취미로 진화시킨 것이 성공 비결이었다. 2005년 5000억 엔(약 4조6000억 원) 남짓이던 매출이 2008년 1조8000억 엔(약 16조6000억 원)으로 급등했고 2009년 미국 경제 주간지 비즈니스위크는 구글과 애플을 제치고 닌텐도를 세계 최고의 기업으로 꼽았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닌텐도 게임기 같은 것을 우리는 왜 못 만드느냐”고 말해 화제가 된 것도 이때였다. 한국 초등학생들 사이에서는 닌텐도를 하지 않으면 따돌림을 받는다는 ‘닌텐도 왕따(닌따)’라는 말까지 생겼다.○ 라이벌 소니도 애도 표명 게임업계는 2010년 전후 스마트폰 위주로 급속하게 변화했다. 하지만 닌텐도는 스마트폰용 게임을 만들지 않았다. 그것은 이와타 사장의 철학 때문이었다. 그는 지난해 한 대담에서 스마트폰을 “콘텐츠의 가치를 지키려 하지 않는 플랫폼”이라고 비판하며 “콘텐츠의 가치, 게임의 가치를 지키고 싶다”는 속내를 밝혔다. 게이머다운 이상이었지만 시장은 냉정했고 닌텐도는 4년 연속 적자를 냈다. 결국 닌텐도는 최근 스마트폰용 게임 개발 계획을 밝히며 백기를 들었다. 엔화 약세, 원가 절감 노력에 힘입어 2014년에는 영업이익이 흑자로 돌아섰다. 이와타 사장은 “닌텐도다운 실적을 다시 보여주겠다”며 최근까지 헬스 분야, 테마파크 등 신사업 진출을 의욕적으로 추진했다. 하지만 결국 지병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CNN 등 해외 언론은 그의 사망 소식을 비중 있게 다뤘으며, 라이벌인 소니 플레이스테이션은 트위터 계정을 통해 “이와타 씨, 모든 것에 감사합니다”라는 글을 올렸다.도쿄=장원재 특파원 peacechaos@donga.com}
영토와 역사 문제로 갈등의 불씨를 안고 있는 일본과 중국이 ‘세 불리기’ 경쟁을 벌이고 있다. 12일 일본 언론에 따르면 자위대는 이날 미국과 호주의 연합 군사훈련 ‘탤리스먼 세이버’에 처음으로 참여했다. 연합 훈련은 적 부대가 섬을 점거한 상황에서 연합군이 섬을 탈환하는 시나리오로, 호주 북부 포그베이 지역에서 실시됐다. 일본 육상자위대 40여 명은 정찰용 보트를 이용한 상륙 작전에 가담했다. 이 훈련엔 미국과 호주 군인 3만 명 이상이 참가한다. 이번 훈련은 센카쿠(尖閣) 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釣魚島)에서 일본과 중국의 무력 충돌 등을 가정한 것 아니냐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같은 날 중국 언론들은 중국과 러시아가 주도하는 상하이협력기구(SCO)가 10일 러시아 우파에서 폐막한 이사회에서 인도와 파키스탄을 정식 회원국으로 받아들이며 첫 세력 확대에 나섰다고 보도했다. 유라시아판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를 지향하며 2001년 창설된 SCO가 서방을 견제하는 다자 안보기구로서 본격적인 세력 과시에 나섰다는 분석이 나온다.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은 “인도와 파키스탄의 참여가 SCO 발전에 새로운 전기가 될 것”이라며 환영했다. 도쿄=장원재 특파원 peacechaos@donga.com}

2014년 7월 12일.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1년 전 기자는 일본 최북단 홋카이도(北海道)에서 자전거를 타고 있었다. 연수 기간을 이용해 자전거 일본 종단을 막 시작한 터였다. 이날 찾은 곳은 비바이(美唄) 시의 탄광 터로 식민지 때 조선인 수천 명이 끌려와 일했던 현장이다. 강제징용을 40년 가까이 연구한 향토사학자 시라토 히토야스 씨(78)가 동행했다. 현장에는 수직갱 입구 두 개와 관리동 건물이 남아 있었다. 시라토 씨는 “정부에서 가스가 분출해 위험하다며 철거하려 해서 지역 주민들과 함께 막아냈다”고 했다. 주민들이 탄광 터를 남기려 했던 것은 일본의 근대화를 뒷받침한 현장이기 때문이다. 시라토 씨는 “개인적으로 많은 사람이 희생된 만큼 넋을 기리기 위한 기념물로 보존돼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대놓고 얘기할 수는 없었다. 보존에 필요한 돈을 탄광을 운영했던 기업에서 받아야 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결국 보존 처리가 이뤄졌고 정부 지정 근대산업유산까지 됐다. 하지만 현장 안내판에 강제징용에 대한 기술은 없었다. 대신 시라토 씨가 현장을 찾는 한국인, 중국인들에게 강제징용의 실상을 설명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홋카이도에서 1999년 펴낸 강제징용 조사보고서를 주도한 것도 시라토 씨였다. 도 관계자가 “진상조사가 가능하겠느냐”고 물었을 때 “가능할지 불가능할지의 문제가 아니다. 할 생각이 있는지 없는지의 문제”라고 받아쳤다. 그런 그가 “일본에서 처음 야간 조명이 설치된 스키장이 있었던 장소”라며 산 중턱을 가리킬 때는 과거에 대한 자부심도 느껴졌다. 최근 일본 근대산업시설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록 과정을 지켜보면서 시라토 씨 생각이 났다. 이번에 등록된 하시마(端島·군함도)만 해도 한국인들에게는 강제징용의 아픈 역사가 서린 곳이다. 하지만 현지 주민들에게는 일본의 근대화를 일군 장소이기도 하다. 두 가지 집단적 기억 중 하나를 무시하면 한쪽이 반발할 수밖에 없다. 이럴 때 해법은 역사의 빛과 그늘을 균형 있게 바라보는 것이다. 한국과 일본은 이번에 너무 먼 길을 돌아왔다. 양국 모두의 책임이다. 먼저 일본은 ‘등록 욕심’에 20세기 초까지로 기간을 한정하는 편법을 썼다가 ‘역사의 전모를 이해하게 하라’는 유네스코의 권고를 받고서야 한국과의 협의에 나섰다. 한국은 일본의 등록 준비가 무려 14년 전부터 진행됐지만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가끔 ‘등록 불가’ 입장을 밝힌 게 전부였다. 역사적 진실을 조사하고 국내와 세계에 정확한 내용을 알리지 않았다. 우여곡절 끝에 유네스코 등록은 마무리됐지만 이는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이번에 등록된 시설에 강제징용에 대한 기술이 온전히 들어갈 수 있도록 지켜볼 필요가 있다. 비바이 탄광 등 다른 지역에도 비극적 역사의 기억이 시간과 함께 퇴색하지 않도록 지속적 관심을 보여야 한다. 시라토 씨의 말을 빌리자면 “젊은 학자들이 징용 문제를 연구하려 하다가도 우익들의 e메일 공세 등으로 포기하는 경우가 많아 후계자가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도 숙제가 남았다. 이번 일을 과거사에 대한 관심을 제고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우리도 제대로 모르면서 남들에게 왜 모르고 있는지를 따지는 것은 설득력도 없거니와 스스로에게 부끄러운 일이다.장원재 도쿄 특파원 peacechaos@donga.com}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가 한국과 일본의 합의하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메이지(明治) 산업혁명 시설들에서 조선인 강제노동이 있었다는 사실을 부인했다. 아베 총리는 10일 열린 중의원 안보법제 특별위원회에서 “(세계유산위원회) 일본 대표단의 성명에 포함된 ‘forced to work’는 대상자의 의사에 반해 징용된 경우도 있다는 의미”라며 “일본 정부가 강제노동 사실을 인정한 게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5일 일본 대표단은 독일 본에서 열린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 회의에서 발표한 영어 성명을 통해 세계유산 등재가 결정된 산업시설에 의사에 반해 끌려간 한반도 출신자 등이 노동을 강요당했다(forced to work)고 밝힌 바 있다. 아베 총리의 이러한 해석은 일본이 강제노동 사실을 처음으로 인정했다는 한국 정부의 평가와 상반된 것이다. 세계문화유산 등재 직후인 5일 밤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외상이 강제노동 인정을 부인한 데 이어 이번엔 아베 총리가 직접 나서 한국 측 해석이 틀렸다고 지적함에 따라 해석을 둘러싼 한일 갈등은 계속될 것으로 전망된다. 또 아베 총리는 이날 중의원 특위에서 강제노동 인정을 부인한 기시다 외상의 발언에 대해 한국 정부가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 정부는 기시다 외상이 기자회견에서 말한 것이 잘못됐다고 한 번도 말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한국 외교부는 10일 “우리 입장은 이미 공개적으로 여러 차례 밝힌 바 있고 이제 중요한 것은 일본이 발언문에서 국제사회에 약속한 대로 이행하는 것”이라며 정면 대응을 피했다. 외교부는 이 문제가 새로운 한일 갈등 요소로 부각되는 것을 원치 않고 있어 공식적으로 이의 제기는 하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자민당 ‘불법 강제노동 아니다’ 결의안 내기로 집권 자민당도 이날 외무성과 합동 회의를 갖고 ‘불법 강제노동이 아니었다’는 내용의 결의안 채택을 추진하기로 했다. 참석자들은 “일본 정부가 강제노동을 인정했다는 오해가 세계에 퍼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자민당 관계자들은 이날 회의에서 외무성에 강한 불만을 제기했다. 해외 언론 등에서 일본의 성명을 사실상 강제노동으로 인정하고 있다며 소극적 대처를 지적한 것으로 전해졌다. 한국 정부에 대해서도 ‘약속을 어긴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왔다. 외무성은 참석자들에게 “윤병세 장관에게 일본이 처음 강제노역을 인정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렸고 윤 장관이 ‘알았다’고 말했다”고 설명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1999년 국제노동기구(ILO)는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 중 한국과 중국 노동자들을 동원해 일을 시킨 것을 두고 ‘(강제노동을 금지한) 협정을 위반한 것’이라고 규정한 것으로 나타났다.○ 한일의원연맹, ‘정상회담 조기 개최 노력’ 성명 이날 도쿄(東京)에서는 한국과 일본 국회의원들이 만나 양국 간 우호 증진 방안을 논의했다. 한일의원연맹 및 일한의원연맹 소속 의원 140여 명은 이날 ‘제38차 합동총회’를 열고 “한일 정상회담 조기 개최를 위한 환경 조성에 최대한 노력해 나가자”는 공동성명을 채택했다. 한국 의원 대표단은 총회가 끝난 뒤 총리관저에서 아베 총리를 15분 동안 면담했다. 아베 총리는 한국 의원들에게 “(국교정상화) 50년 동안의 양국 우호 협력 발전의 역사를 되돌아보면서 미래 지향적 관계를 구축해 나가고 싶다”며 “저 자신도 양국 발전을 위해 박근혜 대통령과 함께 온 힘을 다할 생각을 갖고 있다”고 밝혔다. 박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갖고 싶다는 의지를 내비친 것으로 풀이된다. 아베 총리는 또 올해 8월 15일 종전기념일을 계기로 발표할 이른바 ‘아베 담화’에 대해서도 한국 의원들에게 설명했다. 한일의원연맹 회장인 새누리당 서청원 의원은 면담 이후 기자들과 만나 “아베 총리가 과거 정권의 담화 내용을 전후 70년 담화에 담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전했다. 서 의원은 또 ‘박근혜 대통령의 친서나 메시지를 전했느냐’는 질문에 “가져온 메시지가 없다”고 말했다.도쿄=장원재 특파원 peacechaos@donga.com / 조숭호 기자}
집권 자민당이 추진 중인 안전보장관련법안에 대해 일본 전국에서 반대 의견이 거세게 일고 있다. 자민당은 집단적자위권 행사를 골자로 한 안보법안을 16일 본회의에서 통과시킬 계획이다. 도쿄신문은 9일 일본 전국 헌법학자 204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184명(90%)이 현재 정부가 추진 중인 안보법안에 대해 ‘위헌’ 의견을 냈다고 보도했다. 위헌으로 판단한 이유에 대해서는 60% 이상이 ‘집단적자위권 행사가 헌법에 어긋난다“고 답했다. 합헌이라는 답한 학자는 7명(3%)에 불과했다. 전쟁 포기, 군대 보유 금지를 규정한 헌법 9조 개정에 대해서도 4명 중 3명이 반대했다. 아사히신문은 이날 전국 331개 지방의회가 가결한 안보법안 관련 의견서를 집계한 결과 찬성 입장은 6곳(1.8%)에 불과했다고 밝혔다. 반대 입장은 144곳(43.5%)이었으며 나머지(54.7%)는 ’국민의 이해를 얻기 위한 충분한 설명이 필요하다‘는 등 신중한 태도를 밝힌 것으로 조사됐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에게 우호적 기사를 싣던 주간지들도 ’반(反) 아베‘로 돌아서고 있다. 국민의 과반수가 반대하는 안보법안을 무리하게 밀어붙이면서 지지율이 낮아지는 현실을 반영한 것이다. 이런 가운데 아베 총리가 자민당 인터넷 방송 프로그램에 출연해 집단 자위권 법안이 필요한 상황을 설명하면서 ’동네 불량배와의 싸움‘에 비유해 논란이 일고 있다. 국가 안위가 걸린 중대한 사안을 설명하는 방식으로는 부적절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아베 총리는 7일 밤 방송에서 ”’아베가 건방지니까 이번에 패주자‘며 불량배들이 와서 갑자기 앞서 걷고 있던 아소 씨(정치적 동지인 아소 다로 부총리 겸 재무상을 지칭)를 때리려고 달려들었다고 하자. 나도 아소 씨를 지킨다. 이것이 이번 (집단 자위권)법제로 가능하다“고 발언했다. 논란이 일자 일본 정부 대변인인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관방장관은 ”이해를 증진시키려는 방법이었다“고 해명했다.도쿄=장원재 특파원 peacechaos@donga.com}

“스물넷에 집을 나와 평생 혼자 살며 고독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타인에게 과도한 기대나 애정, 미움을 갖지 않았다. 자신의 발로 서 있는 사람은 타인에게 과도하게 의존하지 않는 법이니까.” 혼자 사는 이들 중 상당수는 노후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을 안고 산다. 늙으면 외롭지 않을까, 아프면 보살펴줄 사람은 있을까. 최근 서점에 독신 여성을 위한 조언이 넘쳐나는 것도 이런 불안 심리를 반영한 것일 테다. 하지만 이 책 ‘103세가 돼서 알게 된 것-인생은 혼자라도 괜찮아’는 다른 책들과 좀 다르다. 먼저 저자가 103세의 여성이다. 평생 혼자 살아왔지만 지금도 전시회를 열며 왕성하게 미술 활동을 하는 시노다 도코(篠田桃紅) 씨다. 그는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직전인 1913년 태어났다. 학생 시절에는 사랑의 도피와 단신 유학을 감행했던 영어 선생님을 보며 자유로운 삶을 동경했고, 졸업 직후 바로 결혼하는 것이 보통이었던 시절 과감히 독립해 서예 교사가 됐다. 서예가로서 도쿄 긴자에서 개인전을 열기도 했다. 하지만 평가는 그다지 좋지 않았다. 당시 일본에선 헤이안 시대의 글씨를 따라하는 것이 유행이었다. 시노다 씨는 주류를 따르지 않은 탓에 “재기발랄하지만 뿌리가 없다”는 혹평을 받았다. 하지만 그는 “뿌리는 다른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있는 것”이라는 생각으로 버텼다. 전쟁 중에는 결핵으로 죽을 뻔하다 살아났고 이후 먹을 이용한 추상화가로 이름을 얻었다. 대담한 구도와 선이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됐다. 43세에 훌쩍 미국으로 떠나 뉴욕에서 예술 활동을 하기도 했다. 시노다 씨가 책에서 가장 강조하는 것은 ‘자유’다. 그는 책에서 몇 가지 자신의 독특한 철학을 소개했다. 먼저 목표를 세우지 않는 것. 그는 “목표를 세우면 다른 것을 보지 못하고 맹목적으로 매달리게 된다. 목표를 위해 멋진 것들을 그냥 지나치는 것이 싫었다. 목표를 세우고 정진하는 대신 자유를 원하는 마음이 내가 가야 할 길을 만들었다”고 썼다. 계획도 세우지 않는다. “나처럼 무책임한 사람도 없다. 미국에 갈 때도 ‘당신 작품을 미국에 소개합시다’ 하는 사람이 나타나 ‘그렇습니까’ 하고 미국에 갔다.” 그는 평생 단 한 번도 미술가 단체에 소속되지 않은 채 혼자 작품 활동을 해 왔다. 시노다 씨는 “어떤 의무도 책임도 없어 홀가분하다. 자유라는 단어의 뜻 그대로 스스로에게 의지하기 때문에 고독하다는 생각은 없다. 스스로에게 의지하면 인생은 최후까지 내 것이 된다”고 썼다. 죽음이 다가오는 것에 대해서도 그는 담담한 자세를 견지한다. 사람이 태어나고 죽는 건 인간의 영역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100세가 넘으니 매일 늙는 것이 손에 잡힐 것처럼 실감난다. 조금씩 무(無)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면서도 “죽음에 대해 아무리 생각해도 진리에 접근할 수 없기 때문에 일절 생각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고 했다. 책에서 장수의 비결을 찾으려는 이들은 다소 실망할 것 같다. 특별한 비결이 없기 때문이다. 시노다 씨는 반세기 전부터 같은 집에 거주한다. 매일 밥을 세 끼 먹고 소녀 시절부터 입던 옷을 아직도 입는다. 옷 취향이 수십 년 동안 한결같아서 미국에 있을 때도 일본식 신발인 조리를 신었다고 했다. 시노다 씨는 “일종의 유아독존인데, 주위와 달라도 된다고 자신에게 말해 왔다”고 배경을 설명했다. 길지 않고 간결하지만 나이가 느껴지는 내공이 인상적인 책이다. 구석구석 유머러스한 표현도 눈에 띈다. “이 나이가 되니 누구와 대립할 일이 없고, 누구도 나와 대립하려 하지 않는다. 100세는 세상의 ‘치외법권’이다. 모임에 안 가도 뭐라는 사람이 없는 대신 가면 매우 기뻐한다.” 이 책은 4월 발간된 이후 지금까지 대형서점 베스트셀러 순위를 유지하며 35만 부 이상 팔렸다.도쿄=장원재 특파원 peacechaos@donga.com}
“스물넷에 집을 나와 평생 혼자 살며 고독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타인에게 과도한 기대나 애정, 미움을 갖지 않았다. 자신의 발로 서 있는 사람은 타인에 과도하게 의존하지 않는 법이니까.” 혼자 사는 이들 중 상당수는 노후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을 안고 산다. 늙으면 외롭지 않을까, 아프면 보살펴줄 사람은 있을까. 최근 서점에 독신여성을 위한 조언이 넘쳐나는 것도 이런 불안 심리를 반영한 것일 테다. 하지만 이 책 ‘103세가 돼서 알게 된 것-인생은 혼자라도 괜찮아’는 다른 책들과 좀 다르다. 먼저 저자가 103세의 여성이다. 평생 혼자 살아왔지만 지금도 전시회를 열며 왕성하게 미술 활동을 하는 시노다 도코(篠田桃紅) 씨다. 그는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직전인 1913년 태어났다. 학생시절에는 사랑의 도피와 단신 유학을 감행했던 영어선생님을 보며 자유로운 삶을 동경했고, 졸업 직후 바로 결혼하는 것이 보통이었던 시절 과감히 독립해 서예교사가 됐다. 서예가로서 도쿄 긴자에서 개인전을 열기도 했다. 하지만 평가는 그다지 좋지 않았다. 당시 일본에선 헤이안 시대의 글씨를 따라하는 것이 유행이었다. 시노다 씨는 주류를 따르지 않은 탓에 “재기발랄하지만 뿌리가 없다”는 혹평을 받았다. 하지만 그는 “뿌리는 다른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있는 것”이라는 생각으로 버텼다. 전쟁 중에는 결핵으로 죽을 뻔하다 살아났고 이후 먹을 이용한 추상화가로 이름을 얻었다. 대담한 구도와 선이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됐다. 43세에 훌쩍 미국으로 떠나 뉴욕에서 예술 활동을 하기도 했다. 시노다 씨가 책에서 가장 강조하는 것은 ‘자유’다. 그는 책에서 몇 가지 자신의 독특한 철학을 소개했다. 먼저 목표를 세우지 않는 것. 그는 “목표를 세우면 다른 것을 보지 못하고 맹목적으로 매달리게 된다. 목표를 위해 멋진 것들을 그냥 지나치는 것이 싫었다. 목표를 세우고 정진하는 대신 자유를 원하는 마음이 내가 가야 할 길을 만들었다”고 썼다. 계획도 세우지 않는다. “나처럼 무책임한 사람도 없다. 미국에 갈 때도 ‘당신 작품을 미국에 소개합시다’하는 사람이 나타나 ‘그렇습니까’ 하고 미국에 갔다.” 그는 평생 단 한 번도 미술가 단체에 소속되지 않은 채 혼자 작품 활동을 해 왔다. 시노다 씨는 “어떤 의무도 책임도 없어 홀가분하다. 자유라는 단어의 뜻 그대로 스스로에게 의지하기 때문에 고독하다는 생각은 없다. 스스로에게 의지하면 인생은 최후까지 내 것이 된다”고 썼다. 죽음이 다가오는 것에 대해서도 그는 담담한 자세를 견지한다. 사람이 태어나고 죽는 건 인간의 영역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100살이 넘으니 매일 늙는 것이 손에 잡힐 것처럼 실감난다. 조금씩 무(無) 가까워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면서도 “죽음에 대해 아무리 생각해도 진리에 접근할 수 없기 때문에 일절 생각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고 했다. 책에서 장수의 비결을 찾으려는 이들은 다소 실망할 것 같다. 특별한 비결이 없기 때문이다. 시노다 씨는 반세기 전부터 같은 집에 거주한다. 매일 밥을 세 끼 먹고 소녀시절부터 입던 옷을 아직도 입는다. 옷 취향이 수십 년 동안 한결같아서 미국에 있을 때도 일본식 신발인 조리를 신었다고 했다. 시노다 씨는 “일종의 유아독존인데, 주위와 달라도 된다고 자신에게 말해 왔다”고 배경을 설명했다. 길지 않고 간결하지만 나이가 느껴지는 내공이 인상적인 책이다. 구석구석 유머러스한 표현도 눈에 띈다. “이 나이가 되니 누구와 대립할 일이 없고, 누구도 나와 대립하려 하지 않는다. 100세는 세상의 ‘치외법권’이다. 모임에 안 가도 뭐라는 사람이 없는 대신 가면 매우 기뻐한다.” 이 책은 4월 발간된 이후 지금까지 대형서점 베스트셀러 순위를 유지하며 35만 부 이상 팔렸다.도쿄=장원재 특파원 peacechaos@donga.com}
5일 한국과 일본의 합의로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일본의 근대산업시설에서 강제노동이 있었는지를 놓고 양국이 서로 다른 해석을 내놓아 논란이 되고 있다. 한국 정부는 일본이 국제사회 앞에서 강제노동 사실을 처음으로 인정했다고 높이 평가한 반면 일본 정부는 등재 직후 곧바로 이를 부인하고 있다.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일본 외상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 회의에서 등재가 확정된 직후인 5일 밤 도쿄(東京)에서 기자들과 만나 “일본 성명에 나온 ‘forced to work’는 강제노동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사토 구니(佐藤地) 주유네스코 대사는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읽은 성명에서 한국인 등이 본인의 의사에 반하여 동원된 사실을 언급하면서 이 표현을 사용했다. 한국 정부는 이를 ‘강제노역’으로 해석했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일어판 번역문에서 ‘일하게 됐다’의 의미인 ‘하타라카사레타(働かされた)’ 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일본 정부 대변인인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관방장관도 6일 기자회견에서 “성명이 전혀 강제노동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점을 기시다 외상이 명확히 했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주철기 대통령외교안보수석비서관은 이날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 의장이 밝힌 대로 영문 텍스트가 원문”이라며 “일본 내에서 해석한 것을 우리가 왈가왈부할 필요 없다”고 말했다. 외교부도 그동안 나온 뉘른베르크 국제전범재판소(1946년), 국제사법재판소 강제노동 피해 서술(2012년) 등에서도 해당 표현이 강제노동을 의미했다고 강조했다.도쿄=장원재 특파원 peacechaos@donga.com·조숭호 기자 shcho@donga.com}

“한일이 극한 대립을 피하고 대화로 문제를 풀어냈다. 이번을 계기로 한일이 선순환적 관계 발전을 도모해갈 수 있기 바란다.” 5일 밤 일본 근대산업시설의 세계문화유산 등재 결정 직후 윤병세 외교부 장관은 “우리의 전방위적 외교 노력이 이뤄낸 값진 성과”라며 이같이 말했다. 하지만 하루도 안 돼 한일 양국은 결정문 해석을 놓고 첨예하게 대립하는 갈등 양상을 빚고 있다. ‘선순환’은 윤 장관이 최근 즐겨 쓰는 단어다. 한일 양국이 △외교장관회담(3월·서울) △외교장관회담(6월·도쿄) △정상의 수교 50주년 행사 교차 참석(6월) 등 최악의 관계 속에서도 접촉을 이어온 만큼 관계 회복의 동력을 살려가자고 당부하는 표현이기도 했다. 하지만 등재 직후 불거진 양국의 격앙된 반응은 이런 기대에 찬물을 끼얹었다. 한국 누리꾼들은 ‘왜 강제징용 시설의 등재를 방관했나’라는 반발을, 일본 누리꾼들은 ‘한국이 또 일본의 발목을 잡았다’는 평가를 하고 있다. 양국 전문가들은 한일관계 개선 여부가 8월 초중순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가 발표할 전후 70주년 담화(아베 담화)의 내용에 달려 있다고 지적한다. 외교부 관계자는 “식민지 지배, 침략, 반성, 사죄 등 핵심 표현이 들어갈지 주목하고 있지만 지금으로서는 뭐라고 예단하기 힘들다”라고 말했다. 일본은 ‘아베 담화’가 아닌 ‘아베의 담화’로 이름이 바뀌면 총리가 아닌 개인 차원의 발표문이 된다고 설명하고 있다. 일본말 ‘の(의)’ 한 글자를 넣었다고 담화의 격이 바뀐다는 주장이다. 발표 시점도 8월 15일보다 빠를 것으로 예상돼 한국의 기대에 못 미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7월 중순경 발간 예정인 일본 방위백서에 독도 영유권 주장이 되풀이되면 한일관계는 윤 장관의 기대와 달리 선순환보다 악순환으로 흐를 것으로 전망된다.조숭호 기자 shcho@donga.com·도쿄=장원재 특파원 }

일본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 신청한 근대산업시설에서 1940년대 조선인을 포함한 여러 국민에게 강제노동을 시켰다는 사실을 간접 인정했다. 일본 정부대표단은 5일(현지 시간) 독일 본에서 열린 제39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일본 정부는 과거 1940년대 한국인 등이 자기 의사에 반해 동원돼 혹독한 조건에서 강제 노역(forced to work)했던 일이 있었으며 희생자를 기리기 위해 인포메이션 센터 설치 등의 조치를 하겠다”고 밝혔다. 유산위원회는 ‘이 발언문에 주목한다’는 주석을 담은 결정문을 채택하고 일본이 신청한 하시마(端島·일명 군함도) 탄광 등 근대산업시설 23곳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기로 결정했다. 정부 당국자는 이날 “일제강점기 한국인들이 자신의 의사에 반해 노역했다는 점을 일본 정부가 최초로 국제사회에 공식 언급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고 평가했다. 일본은 2017년 12월까지 위원회 산하 기구인 세계유산센터에 자신이 취한 조치에 대한 경과 보고서를 제출해야 한다.▼ “자기 의사 반해 노역… 日 조치 주목” ▼등재 결정문 주석에 반영 ‘간접 시인’한일 양국은 그동안 ‘역사의 전모(full history)를 알게 하라’는 유네스코 민간자문기구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의 5월 권고에 따라 등재 대상 중 7곳에서 있었던 강제징용을 어떻게 기술할지 협의했다. 하지만 등재 논의 예정일(4일)까지도 최종 합의에 이르지 못해 논의 개시가 24시간 연기되는 진통을 겪었다. 일본은 일제강점에서 비롯된 청구권 문제는 한일협정으로 끝났고 과거사에 대한 법적 책임도 없다며 ‘강제노동’에 거부감을 드러내 왔다. 미쓰비시중공업 등 강제징용 손해배상 청구소송 대상 기업들이 세계문화유산 등록 후보지 중 상당수를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당초 일본은 산업시설 등재 시기를 1850∼1910년으로 제한해 신청하는 등 1940년대에 이뤄진 강제징용 자체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태도를 보였다. 하지만 ‘역사의 명암이 모두 알려져야 한다’는 한국 정부의 설명에 국제사회가 동조했다. 특히 위원회 의장국인 독일이 지난달 ‘한일 합의가 이뤄지지 않으면 등재 논의를 연기할 수 있다’는 완고한 태도를 취하면서 분위기가 반전했다. 21개 위원국(한일 포함)으로 이뤄진 위원회도 표결로 가지 말고 한일 간에 해법을 찾으라고 촉구했다. 한일 양국도 표결로 가는 파국과 같은 상황은 피해야 하며 사전 협의를 통해 등재를 결정하자는 공동 인식을 갖고 있었다. 외교 당국자는 “광복 이후 처음으로 한일 문제를 놓고 국제무대에서 표 대결을 하는 것은 양국 모두에 큰 외교적 부담”이라고 말했다.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어느 한쪽이 치명타를 입고 한일 관계는 회복 불능의 긴장 관계로 빠질 가능성이 높다는 이유에서다. 내년부터 유산위원회 위원국 자격을 잃는 일본이 ‘시간이 없다’고 판단한 점도 영향을 미쳤다. 일본의 위원국 자격은 6년 뒤에나 돌아온다. 윤병세 외교부 장관은 이날 기자회견을 갖고 “한일이 극한 대립을 피하고 대화로 문제를 풀어냈다. 이번을 계기로 한일이 선순환적 관계 발전을 도모해갈 수 있길 바란다”며 이번 협상 결과를 “우리의 전방위적 외교 노력이 이뤄낸 값진 성과”라고 평가했다. 이날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일본이 강제노동을 시인한 것은 재판에 직접 영향을 주지는 않는다. 외교 당국자는 “일본은 이번에 강제노동이 있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인정한 것이지 법적 책임까지 받아들인 것은 아니다. 배상 재판과 세계유산 등재는 별개”라고 말했다. 일본의 발언문에는 강제징용이 누구에 의해 저질러졌는지 밝히는 주어도 빠져 있다. 일본 소식통은 “강제노동이 있었다는 사실은 일본이 그동안 비공식적으로 밝혀 온 내용이다. 그 자체로 불법성을 인정한다는 의미는 아니다”라고 말했다. 협상 과정에서 일본은 한때 한국 측에 자신이 준비했던 발표문을 적대적으로 바꾸고 표결도 불사하겠다는 뜻을 나타낼 만큼 완강하게 협상에 임했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가 직접 이 문제를 챙기면서 스기야마 신스케(杉山晋輔) 일본 외무성 외무심의관이 지난달 30일부터 이례적으로 4일이나 서울에 머물며 한국 정부와 비공개 교섭도 했다. 일본이 강제노동에 대해 홍보하는 후속조치 이행 여부는 2018년 열리는 42차 세계유산위원회가 평가한다. 이론적으로 위원회는 세계문화유산의 등재와 해제를 모두 결정할 수 있지만 지금까지 등재가 번복된 것은 1978년 이 제도가 시작된 이래 1건밖에 없었다. 등재 여부에 대한 판단이 ‘세계문화유산으로 가치가 있느냐’는 기술적 측면에 치우쳐 있기 때문에 일본이 약속을 이행 하지 않더라도 세계문화유산 자격을 뺏기는 쉽지 않다는 우려도 있다.조숭호 기자 shcho@donga.com / 도쿄=장원재 특파원}
범죄자가 인권 침해를 이유로 자신의 이름이 나온 기사를 인터넷 검색 결과에서 빼 달라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할까. 최근 일본 법원이 범죄자의 주장을 받아들여 논란이 되고 있다. 2일 일본 언론에 따르면 사이타마지방법원은 지난달 말 원조교제를 한 남성이 체포될 때 보도된 실명 기사를 구글 검색 결과에서 빼라는 가처분 결정을 내렸다. 아사히신문은 “근거가 불확실한 기사를 삭제하라고 한 적은 있어도 체포된 사실 자체를 지우라는 가처분 결정은 이례적”이라고 전했다. 이 남성은 2011년 여고생에게 돈을 주고 원조교제를 한 혐의로 체포됐으며 매춘 및 아동 포르노 금지법 위반으로 50만 엔(약 450만 원)의 벌금을 냈다. 하지만 실명과 대략적인 주소가 포함된 기사가 게시판에 계속 올라오고 몇 년이 지나도 구글로 검색되자 ‘검색 결과에서 빼 달라’는 가처분 신청을 법원에 냈다. 남성 측은 “잘못을 반성하고 새로운 삶을 살려고 하는데 지장을 받고 있다. 인격권을 침해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반면 구글은 “성적 욕구를 위해 아동을 이용한 악질 범죄로 부모들의 관심이 크다”고 맞섰다. 결국 법원은 “죄가 경미해 범죄사실을 계속 공표할 공익성이 없다. 공인이 아니고 일반인이며 벌금을 내고 속죄한 만큼 체포 이력을 공개하지 않아야 사회의 일원으로 복귀할 수 있다”며 신청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구글에 검색 결과에 표시된 링크 49개를 지우라고 지시했다. 이에 대해 구글 측은 “표현의 자유와 이용자의 알 권리를 침해한 결정”이라며 불복하고 이의를 제기하겠다고 밝혔다. 범죄자의 ‘잊혀질 권리’를 인정한 이번 판결을 두고 전문가 사이에서도 찬반이 엇갈리고 있다.도쿄=장원재 특파원 peacechaos@donga.com}
일본의 민영 방송인 후지TV가 한국 여고생의 인터뷰를 사실과 다르게 보도한 것에 대해 29일 홈페이지를 통해 사과했다. 후지TV는 5일 한국의 여고생이 “문화가 매우 많다. 그리고 외국인이 많이 방문하는 것 같다”고 말하는 장면에 “(일본이) 싫어요. 한국을 괴롭히지 않았나요”라는 전혀 다른 자막과 일본어 내레이션을 붙인 프로그램을 방영했다. 특히 이 방송은 한일 국교정상화 50주년을 맞아 방영한 특별 프로그램인데도 진행자인 유명 시사해설가 이케가미 아키라(池上彰) 씨가 두 시간 동안 한국을 깎아내리는 발언을 여러 차례 해 일본 내에서도 ‘혐한 분위기를 조장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후지TV는 자막 왜곡에 대해 “편집 작업에 실수가 있었고, 최종 점검을 제대로 못 해 잘못된 영상을 방영했다”며 “시청자 여러분, 인터뷰에 응해 주신 분들, 관계자 모든 분께 사과드린다. 재발 방지를 위해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해당 여학생은 ‘일본이 싫다’는 말을 실제로 했다”며 의도적인 조작은 아니라고 해명했지만 동영상은 공개하지 않았다. 이 방송사는 한국 남성이 “과거의 역사를 반성하지 않고 그런 부분이나…”라고 말하는 영상에서 “일본인 중에는 좋은 사람도 있지만 나라로서는 싫다”라는 자막과 내레이션이 나간 것에 대해서도 사과했다. 후지TV는 우익 성향의 산케이신문 계열 방송사다.도쿄=장원재 특파원 peacechaos@donga.com}

일본의 민영 방송인 후지TV가 한일 국교정상화 50주년(6월 22일)을 맞아 특집 프로그램을 방영하면서 인터뷰에 응한 한국 여고생이 “일본이 싫다”고 말한 것처럼 사실과 다르게 보도(사진)해 논란이 일고 있다. 후지TV는 우익 성향의 산케이신문 계열 방송사다. 28일 허핑턴포스트 등에 따르면 후지TV는 이달 5일 방영된 ‘이케가미 아키라 긴급 스페셜, 알고 있는 것 같지만 모르는 한국의 수수께끼’라는 프로그램에서 한국 여고생의 발언을 소개했다. 길거리 인터뷰에 응한 이 여고생은 “(일본의) 문화가 매우 많다. 그리고 외국인이 많이 방문하는 것 같다”고 말했지만 화면 위 자막에는 “(일본이) 싫어요. 한국을 괴롭히지 않았나요”라고 전혀 다르게 말한 것으로 표시됐다. 이 프로그램의 진행자도 한국을 깎아내리는 발언을 여러 차례 해 자막 처리가 단순한 실수로 보기 어렵다는 지적도 나온다. 일본의 유명 시사해설가인 이케가미 아키라(池上彰) 씨는 한국의 독립 과정과 관련해 “선반에서 떡이 떨어지듯 (노력 없이 저절로) 국가가 만들어졌다”는 등의 말을 했다. 두 시간가량 진행된 이날 방송에서는 또 △박근혜 대통령이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와 정상회담을 하지 않는 이유 △왜 한국은 일본을 그렇게 싫어하나 등의 주제를 다뤘다. 이 프로그램을 시청한 일본인 중 일부는 ‘엉터리 자막 처리’를 다룬 허핑턴포스트 기사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등을 통해 퍼 나르면서 후지TV를 비판하고 있다. 또 ‘더이상의 날조는 멈추라’는 캠페인을 진행하고 있다.도쿄=장원재 특파원 peacechaos@donga.com}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의 인기는 아베노믹스(Abenomics)가 떠받치고 있다. 이 정책으로 일본은 20년 가까이 이어져온 디플레이션에서 탈출했다. 아베 총리가 취임하던 2012년 12월 26일 닛케이 평균주가는 1만230엔이었는데, 약 2년 6개월이 지난 지금 두 배 이상으로 올랐다. 1분기(1∼3월) 경제성장률은 선진국 중 가장 높았고, 대기업 실적은 사상 최대를 기록했다. 일자리를 찾는 청년들보다 일손을 구하는 기업들이 더 많아 대학 졸업생들은 즐거운 비명을 지르고 있다. 이처럼 눈에 보이는 경제적 성과를 낸 까닭에 아베 총리는 초반 주변국과의 갈등, 최근 안보법제 제정 및 개정 논란에도 상대적으로 견고한 지지율을 유지하고 있다. 놀라운 성과를 낸 아베노믹스는 언제까지 이어질까.“무제한 돈 찍는다” 아베노믹스는 흔히 ‘세 개의 화살’로 비유된다. △대담한 금융정책 △기동적인 재정정책 △새로운 성장전략이다. 하나의 화살은 부러뜨릴 수 있지만 세 개의 화살을 묶으면 부러뜨릴 수 없다는 일본의 옛이야기에서 따온 표현이다. 대담한 금융정책은 돈을 무제한 풀겠다는 것이다. 언제까지 풀 것인가. 목표 인플레이션인 연 2%를 달성할 때까지다. 아베노믹스의 설계자로 불리는 구로다 하루히코(黑田東彦) 일본은행 총재는 취임 직후인 2013년 4월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차원이 다른 금융 완화를 하겠다”며 돈을 찍어내기 시작했다. 넘치는 돈이 주식시장으로 밀려들면서 주가가 폭등했고, 버블 이후 침체되던 부동산 시장에도 온기가 돌았다. 어느 정도 약발이 먹히는 기미가 보이자 구로다 총재는 지난해 11월 연간 자금 공급 규모를 10조 엔(약 90조 원) 이상 더 늘어난 80조 엔(약 720조 원)으로 확대했다. 엔화가 넘치는 만큼 미국 달러화에 대한 엔화 환율이 치솟았다. 취임 때 달러당 85엔 정도였던 환율은 최근에는 123엔 이상이다. 엔화 약세 덕분에 좋은 실적을 올린 수출기업들은 고용을 늘리고 임금을 올릴 여력이 생겼다. 조인직 KDB대우증권 도쿄지점장은 “일반적인 경우 자국 화폐가치 하락은 수입 물가를 높여 국민이 반발할 수 있지만 때맞춰 국제유가가 하락하며 이를 상쇄했다. 운이 좋았다”며 “국제유가 하락은 원자재를 수입하는 일본 기업들의 실적을 호전시키는 역할도 했다”고 설명했다.세 번째 화살도 적중하나 두 번째 화살인 재정정책은 정부가 직접 돈을 풀겠다는 것이다. 아베 총리는 취임 이후 지금까지 20조 엔(약 180조 원) 이상의 천문학적인 규모의 재정을 추가경정예산으로 풀었다. 아베노믹스의 온기가 주로 자산을 가진 부유층과 수도권에 집중된다는 비판을 감안해 사용처는 지역경제 활성화, 중소기업 지원, 소외계층 복지대책 등에 집중됐다. 하지만 첫 번째 화살과 달리 갈수록 약발이 떨어지고 있다. 중앙은행은 돈을 계속 찍을 수 있지만 정부가 재정을 늘리려면 국채를 발행해 돈을 빌려야 한다. 특히 일본은 국가부채 규모가 국내총생산(GDP)의 두 배가 넘는 상황이어서 더 악화될 경우 신용등급 하락 등의 우려가 있다. 세 번째 화살인 새로운 성장전략은 아직까지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고용 유연성 확보, 원격 진료 등 서비스산업 활성화, 과감한 규제개혁 등의 방향은 박근혜 정부의 경제 활성화 방안과 비슷하다. 그런 만큼 한국과 마찬가지로 이해집단의 반발도 만만치 않다. 문제는 구조개혁 없이 돈의 힘만으로 경제를 끌어올릴 수 없다는 것이다. 무제한 돈을 풀었다고는 하지만 인플레이션 2%의 목표 달성은 아직 요원한 상태다. 당초 올해까지로 계획했던 일본은행은 목표 시점을 내년으로 늦추며 여전히 의욕을 보이고 있지만 전문가들의 의견은 다르다. 야마구치 유타카(山口泰) 전 일본은행 부총재는 최근 아사히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친정인 일은에 쓴소리를 했다. 그는 “금융완화로 물가만 올리면 된다는 환상을 버리고 인구 감소에도 성장력을 유지하도록 구조를 바꾸는 정공법으로 대응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또 재정 악화에 대비해 ‘신뢰할 수 있는 재정 재건 계획을 추진할 것’을 제언했다. 아베노믹스의 혜택이 일부에만 몰리며 양극화가 심해지는 것도 부담스러운 현상이다. 실적이 좋아졌다는 기업은 대부분 대기업이고 고용 상황이 좋아졌다고는 하지만 정규직은 일부에 불과하다. 이런 상황에서 중하위층은 미래에 대한 불안 때문에 지갑을 선뜻 열지 못하고 있다. 구마노 히데오(熊野英生) 일본 다이이치세이메이(第一生命)경제연구소 수석이코노미스트는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기업 수익이 사상 최대라고는 해도 연금생활자나 비정규직이 많아 가계 부문까지 그 돈이 흘러가지 못하고 있다”며 “규제완화와 기술혁신을 통해 성장률을 높이는 동시에 재정 부문까지 재건해야 하는 어려운 과제가 놓여 있다”고 말했다.도쿄=장원재 특파원 peacechaos@donga.com}

무인(無人)역을 지키는 고양이 역장(驛長)으로 일본 국민의 사랑을 받던 고양이 ‘다마’(사진)가 세상을 떠나 아쉬움을 사고 있다. 와카야마전철은 일본 중부 와카야마(和歌山) 현 기시(貴志) 역장인 다마가 22일 세상을 떠났다고 24일 밝혔다. 다마는 원래 역 매점에서 키우던 고양이인데 2007년 1월 역장으로 발탁됐다. 일본에서 고양이가 가게에 행운을 가져오는 것으로 여겨지는 것에 착안해 무인역 재정을 개선하려는 시도였다. 다마는 국내외 언론에 소개되며 순식간에 스타가 됐다. 도도해 보이면서도 사진 촬영에 잘 협조하는 등 다른 고양이들에 비해 사교적이어서 관광객들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역은 해외 관광객까지 찾아오는 명소가 됐고 현의 재정에도 큰 도움이 됐다. 회사 측은 다마에게 전용 모자와 역장실을 만들어줬고 직책도 승진을 거듭해 2013년에는 회사의 ‘넘버 투’인 사장대리가 됐다. 다마를 찍은 사진집이 베스트셀러가 됐고 캐릭터 상품도 전국적인 인기를 끌었다. 회사 측이 밝힌 다마의 사인은 급성심부전. 나이는 16년 2개월로 인간의 80세에 해당한다. 회사 측은 사망 전날 고지마 미쓰노부(小嶋光信) 사장이 문병을 오자 일어나 건강한 목소리로 ‘야옹’이라고 인사했다고 전했다. 회사는 다마를 ‘영구 명예역장’에 임명하고 역에 이름을 남기기로 했다. 일본 언론들은 25일자에 ‘다마 역장, 천국행 열차 탑승’, ‘영면, 수고하셨습니다’ 등의 제목으로 일제히 부고 기사를 실었다. 역에 마련된 헌화대에 꽃을 놓고 가는 이들이 줄을 이었고 회사 홈페이지는 추모 글을 남기려는 이들로 하루 종일 마비됐다. 장례는 28일 다마가 생애 대부분을 지낸 기시역에서 회사장으로 치러진다.도쿄=장원재 특파원 peacechaos@donga.com}
무인(無人)역을 지키는 고양이 역장(驛長)으로 일본 국민의 사랑을 받던 고양이 ‘다마’가 세상을 떠나 아쉬움을 사고 있다. 와카야마 전철은 규슈 와카야마(和歌山) 현 기시(貴志) 역장인 다마가 22일 세상을 떠났다고 24일 밝혔다. 다마는 원래 역 매점에서 키우던 고양이인데 2007년 1월 역장으로 발탁됐다. 일본에서 고양이가 가게에 행운을 가져오는 것으로 여겨지는 것에 착안해 무인역 재정을 개선하려는 시도였다. 다마는 국내외 언론에 소개되며 순식간에 스타가 됐다. 도도해 보이면서도 사진 촬영에 잘 협조하는 등 다른 고양이들에 비해 사교적이어서 관광객들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역은 해외 관광객까지 찾아오는 명소가 됐고 현의 재정에도 큰 도움이 됐다. 회사 측은 다마에게 전용 모자와 역장실을 만들어줬고 직책도 승진을 거듭해 2013년에는 회사의 ‘넘버 투’인 사장대리가 됐다 다마를 찍은 사진집이 베스트셀러가 됐고 캐릭터 상품도 전국적인 인기를 끌었다. 회사 측이 밝힌 다마의 사인은 급성심부전. 나이는 16세 2개월로 인간의 80세에 해당한다. 회사 측은 사망 전날 코지마 미츠노부(小嶋光信) 사장이 병문안을 오자 일어나 건강한 목소리로 ‘야옹’이라고 인사했다고 전했다. 회사는 다마를 ‘영구 명예역장’에 임명하고 역에 이름을 남기기로 했다. 일본 언론들은 25일자에 ‘다마 역장, 천국행 열차 탑승’, ‘영면, 수고하셨습니다’ 등의 제목으로 일제히 부고 기사를 실었다. 역에 마련된 헌화대에 꽃을 놓고 가는 이들이 줄을 이었고 회사 홈페이지는 추모글을 남기려는 이들로 하루종일 마비됐다. 현 지사는 “지역 관광의 슈퍼스타로 현의 관광 진흥에 큰 공헌을 했다. 깊은 슬픔을 느끼며 감사의 말을 전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장례는 28일 다마가 생애 대부분을 지낸 기시역에서 회사장으로 치러진다.도쿄=장원재 특파원 peacechaos@donga.com}

대한제국 초대 황제 고종의 고명딸인 덕혜옹주(1912∼1989·사진)가 일본에 머물 때 남긴 복식 7점이 한국에 반환됐다. 덕혜옹주의 복식을 소장해온 일본 문화학원 복식박물관의 오누마 스나오(大沼淳) 이사장은 24일 일본 도쿄(東京) 주일한국문화원에서 나선화 문화재청장과 복식 기증 양해각서를 체결했다. 기증품은 이날 한국으로 옮겨져 국립고궁박물관에 보관됐다. 기증품은 덕혜옹주가 입었던 당의(唐衣·저고리 위에 덧입는 여성용 예복), 홍색 스란치마, 진분홍 저고리 등이다. 나 청장은 기증식 후 동아일보 기자와 만나 “덕혜옹주의 옷이 국내에 한 벌도 남아 있지 않아 역사적으로 중요한 자료”라며 “조만간 특별전 등을 통해 일반에 공개할 것”이라고 밝혔다. 기증은 서울의 초전섬유·퀼트박물관 김순희 관장이 오랜 교분이 있는 오누마 이사장을 설득해 이뤄졌다. 덕혜옹주는 고종이 환갑에 얻은 딸로 황실과 국민의 사랑을 듬뿍 받았지만 나라를 빼앗긴 탓에 13세에 일본으로 강제유학을 떠났다. 이후 신경쇠약에 시달리다 19세에 일본 쓰시마(對馬) 번주 가문의 소 다케유키(宗武志) 백작과 정략결혼을 했다. 딸까지 낳았으나 정신질환이 악화돼 병원에 입원했고, 설상가상으로 딸이 실종된 후 1955년 이혼까지 당했다. 1962년 귀국한 뒤 창덕궁에서 지내다 1989년 외롭게 세상을 떠났다.도쿄=장원재 특파원 peacechao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