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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다소 줄었지만 작년까지 도쿄(東京) 시내에서 가끔 혐한 시위 현장을 만날 수 있었다. 2차대전 당시 입었을 법한 군복을 입은 이들이 “조선인은 돌아가라”고 외칠 때마다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하면서 웃어 넘겼다. 하지만 그렇게 속 편하게 생각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나중에 알게 됐다. 재일교포들이다. 일본에 터를 잡고 차별과 멸시 속에서 살아온 이들에게 혐한 시위대는 아픈 기억을 되살리는 존재다. 그리고 일본이 과거로 돌아갈 가능성을 시사한다는 점에서 두려움의 대상이기도 하다. 재일교포 소년의 성장담을 다룬 소설 ‘두더지와 김치’(사진)는 도쿄의 한류타운 신오쿠보(新大久保)에서 벌어진 혐한 시위 현장에서 시작한다. 50대 중반인 주인공 이호일은 시위를 보면서 40여 년 전 자신을 떠올린다. 배경은 1973년. 그는 아버지의 빚 때문에 오사카(大阪)에서 홋카이도(北海道)에 떠밀리듯 전학 온 처지다. 같은 초등학교 6학년이라고는 하지만 오사카의 조선학교와 시골 일본학교는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어머니는 그에게 “조선인이라는 것이 알려지면 따돌림을 당하게 될 것”이라며 정체를 숨기라고 얘기한다. 이후 좌충우돌 학교생활이 펼쳐진다. 호일은 대도시에서 온 것을 자랑하다가 사인볼을 보여 달라는 요청에 어쩔 수 없이 친구들을 집으로 초대한다. 조선인이라는 사실을 감추기 위해 재빨리 집을 치우고 친구들을 들여놓지만 예상 밖의 상황이 펼쳐진다. 일찍 온 할머니는 그를 한국식 이름으로 부르고 호일은 “오사카 사투리라 그렇다”며 필사적으로 해명한다. 김치를 오사카 음식이라고 속여 넘기고, 벽에 걸린 김일성 초상화는 조상을 그린 것이라고 둘러대는 모습을 보면 서글픈 웃음이 나온다. 하지만 계속 속일 수는 없는 법. 어느 날 학교 칠판에 ‘구니모토 고이치(주인공의 일본식 이름)는 조선인. 빨리 조선으로 돌아가는 게 좋다. 돌아가지 않으면 쫓아낼 것’이라는 글이 써 있다. 설상가상으로 담임교사는 “중대 발표를 하겠다. 구니모토 군은 조선인이다. 지금까지 숨겨서 미안하다”며 학생들에게 사과를 한다. 앞으로 불려나온 호일에게는 위로인지 뭔지 모를 말을 해서 눈물을 쏟게 한다. 호일의 유일한 희망은 “구니모토 군이 조선인이라는 얘기를 듣고 기뻤어. 세계의 다양한 사람들과 친구가 되는 게 꿈이니까”라고 다정한 말을 건네는 마에다라는 여학생이다. 이 여학생의 아버지는 마을 선거에 나서는데 상대는 조선인을 싫어하고 주인공을 괴롭히는 남학생의 아버지다. 호일은 선거에서 마에다의 아버지가 승리하도록 기상천외한 계획을 생각해 낸다. 이 소설은 1967년 홋카이도에서 태어난 재일교포 작가 박번이 본명으로 처음 쓴 소설이다. 그 전에는 통명(일본식 이름)인 시노시타 시게루(木下繁)라는 이름으로 아동 소설을 쓰던 작가다. 제목에 포함된 두더지는 작품의 주요 소재이면서 재일교포를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 책의 장점은 살면서 직접 보고 들은 재일교포 차별의 실태를 유머러스하게 그렸다는 것이다. 지상낙원이라고 선전하던 북한으로 돌아간 재일교포들이 편지에 몰래 실상을 전하는 모습, 계절마다 김치를 담그고 이사 갈 때는 김칫독을 꼭 챙기는 재일교포 가정의 생활 풍습 등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앞뒤에 다소 늘어지는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은 옥에 티다.도쿄=장원재 특파원 peacechaos@donga.com}
올해는 다소 줄었지만 작년까지 도쿄(東京) 시내에서 가끔 혐한 시위 현장을 만날 수 있었다. 2차대전 당시 입었을 법한 군복을 입은 이들이 “조선인은 돌아가라”고 외칠 때마다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하면서 웃어 넘겼다. 하지만 그렇게 속 편하게 생각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나중에 알게 됐다. 재일교포들이다. 일본에 터를 잡고 차별과 멸시 속에서 살아온 이들에게 혐한 시위대는 아픈 기억을 되살리는 존재다. 그리고 일본이 과거로 돌아갈 가능성을 시사한다는 점에서 두려움의 대상이기도 하다. 재일교포 소년의 성장담을 다룬 소설 ‘두더지와 김치’는 도쿄의 한류타운 신오쿠보(新大久保)에서 벌어진 혐한 시위 현장에서 시작한다. 50대 중반인 주인공 이호일은 시위를 보면서 40여 년 전 자신을 떠 올린다. 배경은 1973년. 그는 아버지의 빚 때문에 오사카(大阪)에서 홋카이도(北海道)에 떠밀리듯 전학 온 처지다. 같은 초등학교 6학년이라고는 하지만 오사카의 조선학교와 시골 일본학교는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어머니는 그에게 “조선인이라는 것이 알려지면 따돌림을 당하게 될 것”이라며 정체를 숨기라고 얘기한다. 이후 좌충우돌 학교생활이 펼쳐진다. 호일은 대도시에서 온 것을 자랑하다가 사인볼을 보여 달라는 요청에 어쩔 수 없이 친구들을 집으로 초대한다. 조선인이라는 사실을 감추기 위해 재빨리 집을 치우고 친구들을 들여놓지만 예상 밖의 상황이 펼쳐진다. 일찍 온 할머니는 그를 한국식 이름으로 부르고 호일은 “오사카 사투리라 그렇다”며 필사적으로 해명한다. 김치를 오사카 음식이라고 속여 넘기고, 벽에 걸린 김일성 초상화는 조상을 그린 것이라고 둘러대는 모습을 보면 서글픈 웃음이 나온다. 하지만 계속 속일 수는 없는 법. 어느 날 학교 칠판에 ‘구니모토 고이치(주인공의 일본식 이름)는 조선인. 빨리 조선으로 돌아가는 게 좋다. 돌아가지 않으면 쫓아낼 것’이라는 글이 씌여진다. 설상가상으로 담임교사는 “중대 발표를 하겠다. 구니모토 군은 조선인이다. 지금까지 숨겨서 미안하다”며 학생들에게 사과를 한다. 앞으로 불려나온 호일에게는 위로인지 뭔지 모를 말을 해서 눈물을 쏟게 한다. 호일의 유일한 희망은 “구니모토 군이 조선인이라는 얘기를 듣고 기뻤어. 세계의 다양한 사람들과 친구가 되는 게 꿈이니까”라는 다정한 말을 건네는 마에다라는 여학생이다. 이 여학생의 아버지는 마을 선거에 나서는데 상대는 조선인을 싫어하고 주인공을 괴롭히는 남학생의 아버지다. 호일은 선거에서 마에다의 아버지가 승리하도록 기상천외한 계획을 생각해 낸다. 이 소설은 1967년 홋카이도에서 태어난 재일교포 작가 박번이 본명으로 처음 쓴 소설이다. 그 전에는 통명(일본식 이름)인 시노시타 시게루(木下繁)라는 이름으로 아동 소설을 쓰던 작가다. 제목에 포함된 두더지는 작품의 주요 소재이면서 재일교포를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 책의 장점은 살면서 직접 보고 들은 재일교포 차별의 실태를 유머러스하게 그렸다는 것이다. 지상낙원이라고 선전하던 북한으로 돌아간 재일교포들이 편지에 몰래 실상을 전하는 모습, 계절마다 김치를 담그고 이사 갈 때는 김치 독을 꼭 챙기는 재일교포 가정의 생활 풍습 등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앞뒤에 다소 늘어지는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은 옥의 티다.도쿄=장원재 특파원 peacechaos@donga.com}

《 염재호 고려대 총장(60)과 강상중 도쿄대 명예교수(65)가 일본 도쿄(東京)에서 만났다. 일본에서 산업정책을 연구한 염 총장과 재일교포로 사상 첫 도쿄대 교수와 4년제 종합대(세이가쿠인대) 총장을 지낸 강 교수 모두 한일을 잘 아는 대표적인 지성으로 꼽힌다. 대담은 6월 20일 있었으며 수차례 이메일과 전화 인터뷰를 통해 내용을 보탰다. 》 두 사람이 수인사를 나눈 뒤 강 교수(이하 강)가 먼저 “제 아내는 일본인인데 얼마 전 호주와 유럽에 갔을 때 입국 심사 직원이 ‘사이 나쁜 한국과 일본인이 어째서 부부인가’라고 물어 깜짝 놀랐다. 한일 관계가 나쁜 것은 세계가 다 아는 것 같다”고 말해 좌중에 큰 웃음이 번졌다. ―전후 70년이 지났는데 한일 관계가 악화되고 있는 것은 유감입니다. 왜 이럴까요. ▽염 총장(이하 염)=어찌 보면 당연합니다. 밑바탕에 깔려있는 인식 자체가 서로 다르니까요. 일본은 1945년 이전 역사는 먼 옛일이라고 생각해 잊어버리고 싶어 합니다. 21세기가 시작된 지 벌써 15년이나 지났는데 100년도 더 지난 일을 갖고 아직도 시끄럽게 하느냐는 것이 잠재의식인 것 같습니다. 이에 비해 한국은 식민 지배를 당한 기억이 단순히 약탈과 강점이라는 문제를 넘어서 우리가 문화를 전해준 나라가 우리를 침략해서 지배했다는 국가적 자존감이 깔려 있어서 쉽게 일제강점기를 잊지 못합니다. 한마디로 20세기 역사는 일본으로서는 모든 것을 훌훌 털어버리고 새롭게 출발하고 싶은 ‘과거’이고 한국으로서는 상처가 아직도 남아 있는 ‘현재’이기 때문에 인식의 간격이 클 수밖에 없습니다. 특히 일본은 세계에서 중심 국가가 되고 싶은 욕망이 매우 강하기 때문에 과거를 외면하고 싶은 경향이 갈수록 커진다고 봅니다. ▽강=확실히 일본인들 다수는 자신들이 전쟁의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였다고 생각합니다. 전쟁이 싫은 것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원폭 투하라는) 비참한 일을 당했기 때문이라는 마음입니다. 반면 총장께서 말씀하신 대로 한국인들의 자존감은 근대사에서 너무도 상처받았습니다. 그게 아직 치유되지 않았습니다. 근대화가 시작된 이후 최근까지 일본은 세계에 어깨를 나란히 하는 열강으로서 또 선진국으로서 아시아에서 압도적으로 우월한 지위를 향유해 왔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국력이 떨어지고 있습니다. 한국과 중국이 세계 경제에서도 큰 위치를 차지해 일본의 비교 우위는 계속 허물어지고 있습니다. 그 위기감이 특히 원전사고를 동반한 동일본 대지진 이후 ‘국가적 자존감’ 회복을 요구하면서 과거사를 부정하는 역사 수정주의나 군사력 강화의 동력이 되고 있다고 봅니다. ―일본인들의 반한 감정이 일본 자체 내 문제가 반영된 측면이 있다는 뜻인가요. ▽강=한국의 경제력은 상승해왔는데 일본은 오랜 침체를 거치며 위축이 많이 되었지요. 이명박 정권 때에는 일본 미디어들이 집중적으로 한국의 여러 기술 능력이 일본을 추월하지 않았나 하는 ‘한국 위협론’을 보도했습니다. 당시 일본은 장기 디플레이션, 동일본 대지진 등으로 자신감을 잃어 의기소침해 있던 시기였고요. 지금 일본인들은 한국이 경제적으로 강해졌다는 의식이 저류에 깔려 있습니다. 서울 교보문고만 가도 반일(反日) 책 코너는 없지만 일본 서점에 가면 혐한(嫌韓) 코너가 있습니다. 객관적으로 보면 한국이 훨씬 냉정히 보고 있을지도 모르지요. ―한일 두 나라에 광복 70년, 전후 70년이 갖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염=한국에 광복 70년은 21세기 선진국을 향해 새로운 출발을 하는 획기적 전환이 가능한 상징적인 해입니다. 20세기는 근대화에 늦은 구한말의 한국을 일본이 식민지화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우리에게 20세기 전반이 치욕과 고난의 역사였다면 후반은 이를 극복하기 위한 권토중래의 시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난 70년 동안 우리는 선진국으로 도약하기 위한 준비 작업을 마친 셈입니다. 기초체력을 갖췄으니 본경기에 임하는 새로운 출발 앞에 선 거지요. 요즘 우리 사회에는 한국은 결코 선진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극단적 비관론과 지금까지 잘 해왔으니 잘되겠지 하는 막연한 낙관론이 만연한데 모두 경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직도 일부 혼란스러운 부분은 있지만 21세기 새로운 게임의 법칙을 숙지하고 최선을 다해 본선에 진출하는 다짐이 필요한 상징적인 해가 바로 올해라고 봅니다. ▽강=일본에 올해는 다른 사람의 눈으로 자신들의 역사를 되돌아보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식민지 지배와 침략 전쟁의 최대 피해자였던 한반도와 중국 등에서 자신들의 역사를 돌아볼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향후 바람직한 한일관계 발전을 위해 무엇이 필요하다고 보십니까. ▽염=역지사지의 정신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객관적으로 볼 때 한일 두 나라가 대립보다는 협력이 바람직하다는 것을 부인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갈등을 증폭시켜 정치적으로나 이념적으로 이용하여 이익을 얻으려고 하는 집단이 있다면 경계해야 합니다. 오히려 한국과 일본은 미래 인류의 공영과 보편적 가치를 위해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도 국가 동원이 있었느냐 하는 공방이 핵심이 아니라 여성을 도구화한 잘못을 반성하고 인권에 대한 가치를 공고히 한다는 철학과 정책을 양국이 협력하여 제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봅니다. 유럽연합이 각국의 이익을 넘어 새로운 국가연합을 구축하기 위해 노력하는 힘겨운 일련의 과정은 한중일 삼국의 미래에 좋은 교훈이 될 것 같습니다. ▽강=동아시아는 전후 특히 냉전기 환태평양을 노린 미국을 허브에 두고 일본이나 한국, 대만이 북한과 대치하는 국제 관계가 계속 이어져 왔습니다. 냉전 붕괴 후 중요한 일은 양자주의의 동맹이 아니라 보다 다양한 다자 관계를 쌓아 나감으로써 평화와 번영을 지속적으로 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하는 일입니다. 그런 면으로 본다면 동북아시아 지역은 다자 관계의 대화와 신뢰 구축의 틀이 부재합니다. 그것이 지역을 불안정하게 하고 위기 상황으로 몰아넣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북한의 비핵화를 추진해 나가는 6자회담과 같은 다자의 틀을 발전시키고 그것을 상설적인 다자간 포럼까지 끌어올려 역사 문제와 안보 경제 협력의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염=과거사를 직시하지 못하는 일본도 문제이지만 일본을 솔직하게 인정하는 데 거부감을 느끼는 한국도 달라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인과 일본인은 닮은 듯하면서도 다릅니다. 일본인들이 디테일에 강하다면 한국인들은 도전 정신이 강합니다. 서로의 약점을 보완하고 장점을 살리면 협력할 여지가 많습니다. ▽강=말씀대로 한국은 ‘저팬 게이트’를 넘지 못하면 세계의 한국이 될 수 없고 일본은 ‘코리아 게이트’를 넘지 못하면 아시아의 일본이 될 수 없습니다. 서로에 대한 감정의 벽을 넘어서 협력해야 미래가 있습니다. 저는 특히 통일에 주목하고 싶습니다. 통일 독일의 인구가 8000만 명입니다. 한국도 남북을 합치면 7000만 명이 넘습니다. 통일 한국을 유럽에 갖다 놓으면 독일과 맞먹는 큰 나라입니다. 삼팔선으로 끊어진 한국이 통일돼 자신감이 강해지면 일본을 있는 그대로 인정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요. ▽염=현대일본학회 회장도 하고 한일미래포럼 일도 했는데 그때 항상 강조한 것은 역사, 정치, 경제 문제와는 별도로 앞으로 20년 동안 한국과 일본, 중국이 하나의 생활공동체가 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고려대 인근 지하철역에도 영어, 중국어, 일본어로 역 이름이 써 있습니다. 삿포로에도 전부 한글이 써 있습니다. 언어가 이렇게 교류하니 세 나라가 동북아시아에서 생활 커뮤니티가 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요즘엔 한일 간의 차이보다 부모 자식 간의 차이가 더 크지 않나 생각합니다(웃음). 지금도 가장 친한 일본 친구가 수산청, 외무성을 거쳐 히타치 임원으로 일하고 있는 사람인데, 그 친구도 나도 같이 비틀스를 들었던 세대여서 그런지 다른 나라 사람이라는 의식이 별로 없습니다. 젊은 세대들도 서로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는데다 교류도 활발하니 역사 정치 문제가 해결되면 앞으로 10년, 20년 한일 관계는 매우 깊어질 수 있다고 봅니다. 저는 미래를 낙관합니다. :: 약력 ::강상중재일 한국인 2세로 태어나 독일 에를랑겐대에서 정치학과 정치사상사를 전공하고 한국 국적으로는 처음 1998년 도쿄대 정교수가 됐고 2010년에는 도쿄대 현대한국연구센터 초대 센터장을 맡았다. 국내에 많은 독자를 갖고 있는 베스트셀러 저자이기도 하다.염재호고려대 행정학과 학·석사. 미국 스탠퍼드대 정치학 박사. 고려대 행정학과 교수. 기획실장·기획예산처장을 거쳐 올 3월 19대 총장에 취임했다. 외교통상부 산하 민간단체인 (사)한일미래포럼 대표를 지냈으며 한국정책학회 회장, 현대일본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진행=배극인 특파원 bae2150@donga.com정리=장원재 도쿄 특파원 peacechaos@donga.com}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의 부인 아키에(昭惠) 여사가 18일 태평양전쟁 A급 전범들이 합사된 야스쿠니(靖國) 신사를 참배한 사실을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공개했다. 아키에 여사는 “지란(知覽)(에 다녀온) 후의 야스쿠니는 느낌이 다르다…”는 글과 함께 궁사(宮司·신사의 우두머리 신관)와 함께 찍은 사진도 올렸다. 지란은 가고시마(鹿兒島) 현 미나미큐슈(南九州) 시의 ‘지란특공평화회관’을 의미하는데 아키에 여사는 앞서 패전 70년 기념일인 15일 이곳을 방문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자살특공대인 가미카제 특공대가 출격했던 비행장이 있던 곳으로 현재는 이들의 유서와 편지 등 1만4000여 점이 전시돼 있다. 미나미큐슈 시는 전쟁을 미화하는 이들 전시물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아키에 여사는 올 5월에도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했다고 스스로 밝힌 바 있다. 그러나 아키에 여사는 이와 비슷한 시기 일본의 한 패션잡지에 실린 재일 한국인 정치학자 강상중 교수와의 대담에선 “내게도 대륙의 피가 흐를지 모른다”고 발언해 한국인의 호감을 사기도 했다. 역사 인식과 관련해 모순되는 행보를 보이고 있는 셈이다. 이를 두고 아키에 여사가 아베 총리를 내조하면서 그때그때 상황 논리에 따라 움직이고 있다는 비판이 나온다. 이달 15일 주변국의 반발을 의식해 야스쿠니 참배를 자제한 남편을 대신해 아키에 여사가 나섬으로써 일본 내 보수 세력의 기대에 부응하려 했다는 것이다.도쿄=장원재 특파원 peacechaos@donga.com}
“섬을 점령하기 위해 상륙한 적 부대가 내륙으로 침투하고 있습니다. F-2전투기가 공격을 위해 출동했습니다.” F-2가 발사한 레이저 유도 폭탄은 굉음과 함께 적 군사시설로 설정된 후지산 중턱에 명중했다. 지켜보던 참관인 2만 여 명은 일제히 “오~”하며 탄성을 질렀다. 이어 30mm 기관포를 장착한 아파치공격헬기(AH-64D)가 ‘타타타’ 소리를 내며 나타났다. 18일 일본 시즈오카(靜岡) 현 고텐바(御殿場) 시 외곽의 ‘히가시후지 군사연습장’. 도쿄(東京) 도심에서 서쪽으로 100km 가량 떨어진 이곳에서 육해공 자위대가 모두 출동하는 자위대 최대 규모의 실탄사격 훈련 ‘후지종합화력연습’이 열렸다. 이날 연습은 자위대의 주요 장비를 소개한 뒤 일본의 한 낙도가 공격받는다는 시나리오에 대응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중국과 영유권 분쟁을 벌이는 센카쿠(尖閣) 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釣魚島)에서 벌어질 수 있는 비상 상황을 염두에 둔 것이다. 훈련을 위해 자위대원 약 2300명. 전차와 장갑차 80여 대, 화포 60여 문, 전투기 20여 대가 동원됐다. 해상초계기 P-3C가 자위대 본부에 ‘적 출현’을 보고하면서 훈련이 시작됐다. 항공자위대의 전투기가 해상자위대의 이지스함, 육상자위대의 지대공미사일과 함께 적의 공군 전력을 무력화시켰다. 육상자위대는 무인정찰기가 전송한 영상정보를 보고 적 함대에 지대함유도탄(SSM)을 발사했다. 상륙한 적을 격퇴하기 위해 CH-47 헬기를 통해 오토바이 부대를 투입시켰다. 적은 고지대에 진지를 구축하고 저항했지만 최신형 전차와 박격포가 불을 뿜자 결국 무릎을 꿇었다. 자위대는 국민들의 인식 개선을 위해 1966년부터 훈련을 일반에 공개하고 있다. 주말인 23일 훈련은 추첨으로 참관인을 정하는데 경쟁률이 30대 1에 육박했다. 훈련을 마치고 나가는 참관인들은 엄지손가락을 치켜 올렸다. 야마나시(山梨) 현에서 왔다는 노나카 쿠니히로(野中邑浩·74) 씨는 “최첨단 전자 통신장비에서 일본의 힘을 실감했다”고 밝혔다. 사이타마((埼玉)에서 왔다는 남자 중학생은 “아파치 헬기를 보고 감동했다”면서도 최근 안보법제 논란에 대해서는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가 국민들에게 제대로 설명하지 않고 멋대로 강행하고 있다”고 말했다.고텐바=장원재 특파원 peacechaos@donga.com}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이 한국과 일본롯데의 지주회사 격인 일본 롯데홀딩스 주주총회에서 완승했다. 이로써 롯데가(家)의 경영권 분쟁이 일단락되고 신 회장이 한일 롯데의 단일 총수(One Leader)의 지위를 더욱 굳히게 됐다. 일본 롯데홀딩스는 17일 일본 도쿄(東京) 데이코쿠(帝國)호텔에서 임시 주주총회를 열고 신동빈 회장 측이 제시한 ‘사외이사 선임’ ‘법과 원칙에 의거하는 경영에 관한 방침의 확인’ 안건을 모두 통과시켰다. 롯데그룹은 “주총이 개시 15분 만에 끝났으며 두 안건 모두 60% 이상의 지지를 얻었다”고 밝혔다. 이날 임시 주총은 지난달 15일 열린 이사회에서 신동빈 회장이 롯데홀딩스 대표이사에 취임한 건에 대해 지분 경쟁을 통해 확인하는 자리였다. 또 지난달 28일 신격호 롯데그룹 총괄회장을 롯데홀딩스 대표이사 회장 자리에서 해임시킨 건에 대해서도 이번 주총에서 정식으로 추인을 받은 셈이다. 이날 주총에 참석한 신동주 전 부회장은 별도의 안건을 제안하지 않은 채 자리를 지키다 떠났다. 그는 “제가 믿는 것을 관철시키면서 앞으로도 동료 사원, 거래처 여러분과 함께 걸어가고 싶다”고 말했다. 신격호 총괄회장은 국내에 머물며 주총에 참석하지 않았다.김범석 기자 bsism@donga.com / 도쿄=장원재 특파원}
일본 언론들은 박근혜 대통령의 15일 광복절 70주년 경축사에 대해 한일관계 개선 의지를 나타낸 것이라며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또 한일 정상회담의 실현 가능성이 커졌다는 분석을 내놓았다. 요미우리신문은 15일자 석간에서 “박 대통령이 공식 석상에서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의 역사 인식을 제한적이나마 긍정적으로 평가한 것은 극히 드문 일”이라고 했다. 다음 날 신문에선 박 대통령이 한중일 정상회담을 포함해 한일 정상회담의 실현을 모색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해석하기도 했다. 교도통신도 15일 “박 대통령이 일한관계의 시금석으로 여겨온 아베 담화에 일정한 평가를 보임에 따라 일본과의 관계 개선을 진행할 전망이 강해졌다”며 “아베 정권도 박 대통령의 발언에서 ‘느낌’을 받았다. 일본에서는 정상회담 실현에 대한 기대가 제기되고 있다”고 했다. 아사히신문은 16일 “(박 대통령이) 위안부 문제의 조기 해결을 포함한 일본의 ‘성의 있는 행동’을 요구하면서 비판을 억제하고 관계개선의 기운을 유지하는 길을 선택했다”고 평했다. 이 신문은 또 한국 정부가 아베 담화에 대해 ‘만족할 만한 수준은 아니지만 관계를 악화시킬 정도의 것도 아니다’라는 판단을 내렸다고 전했다. 한편 일본 언론들은 14일 나온 아베 담화에 대해선 우익적 역사관에 대한 피력을 자제하고 ‘사죄’ 등 핵심 표현을 언급한 것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평가했지만 비판의 목소리도 만만치 않았다. 아사히신문은 사설에서 “침략과 식민지 지배의 주어가 애매했고, 반성과 사죄는 역대 내각이 밝힌 것을 간접적으로 거론했다”며 “전후 70년의 역사 총괄로는 매우 부족한 내용”이라고 혹평했다. 이어 “대체 무엇을 위한, 누구를 위한 담화인가”라며 “이런 담화는 낼 필요가 없었다. 아니, 내지 말았어야 했다”고 지적했다. 반면 보수 성향의 요미우리신문은 “아베 총리가 독자 색을 자제하고 국민의 폭넓은 의견을 넣는 데 부심했다”며 “대전(大戰)에 대한 반성에 근거해 새로운 일본의 진로를 명확하게 제시했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교도통신 여론조사에 따르면 아베 담화를 ‘긍정적으로 평가한다’는 답변이 44.2%로 ‘그렇지 않다’는 답변(37%)보다 많았다. 아베 내각 지지율은 43.2%로 40%대를 회복했다.도쿄=장원재 특파원 peacechaos@donga.com}
과거사와 관련된 일본 지도자들의 담화는 ‘고노 담화’가 제일 앞선다. 1993년 8월 고노 요헤이(河野洋平) 당시 관방장관이 일본군 위안부의 모집과 관리 등에 대해 일본군의 강제성을 인정했다. 고노 장관은 위안소는 당시 군의 요청에 의해 설치됐고, 위안소의 설치·관리 및 위안부의 이송에 일본군이 관여했다고 발표했다. 아울러 일본군 위안부들에게 사과와 반성의 마음을 올린다고 말했다. 일본 정부는 총리, 관방장관, 외상 등이 역사적 사건이나 현안에 대한 일본 정부의 입장을 표명하기 위해 담화를 발표한다. 이번 아베 신조 총리의 담화는 전후(前後) 70년 담화라는 점에서 전후 몇 년이 되는 시점을 기준으로 하지 않은 고노 담화와는 다르다. 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富市) 총리는 전후 50년이던 1995년 ‘무라야마 담화’를 냈고 60년이던 2005년엔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총리가 ‘고이즈미 담화’를 냈다. 이번에 10년 만에 다시 과거 전쟁의 의미와 이에 대한 반성, 그리고 이를 어떻게 계승 발전시킬 것인지를 공식적으로 천명한 것이다. ‘무라야마 담화’는 ‘식민지 지배’와 ‘침략’을 ‘반성’하고 ‘사죄’했다는 점에서 과거사 반성의 전형으로 꼽힌다. 호소카와 모리히로(細川護熙) 전 총리가 1993년 비슷한 언급을 했지만 당시에는 국회 연설이어서 정부 공식 입장으로 보기는 어려웠다. 전후 담화는 아니지만 간 나오토(菅直人) 전 일본 총리는 한일 강제병합 100년을 맞아 ‘간 담화’를 발표하면서 핵심 표현을 되풀이했고 조선왕실의궤 반환 의사를 밝혔다.도쿄=장원재 특파원 peacechaos@donga.com}
14일 나온 아베 담화의 내용과 형식은 몇 번이나 뒤집히며 발표 직전까지 예측하기 어려웠다. 연립여당 내부의 대립, 국내외의 압력과 요구가 복합적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아베 총리는 당초 이번 담화를 각의(국무회의) 결정 없이 총리 개인 견해로 발표하는 방안을 검토했다. 기존 담화들이 패전일 당일에 발표된 것과 달리 일정을 하루 당긴 것도 주목도를 낮추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안보법제 강행의 여파로 지지율이 30%대로 추락한 데다 연립여당인 공명당에서 각의 결정을 요구하자 이달 초 과거 담화의 일부를 계승하면서 각의 결정을 하기로 선회했다. 각의 결정은 전체 각료가 서명하는 일본 정부 최고 의사 표명 방식으로 공명당 소속인 오타 아키히로(太田昭宏) 국토교통상도 동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무라야마, 고이즈미 담화는 모두 각의 결정을 거쳤다. 담화의 초안이 일부 핵심 요인들에게 공개된 것은 7일 밤. ‘사죄’가 빠지고 ‘식민 지배’와 ‘침략’도 명확하게 들어가 있지 않은 것을 본 야마구치 나쓰오(山口那津男) 공명당 대표는 “이대로는 안 된다”며 핵심 표현을 넣을 것을 주문했다. ‘원조 보수’로 꼽히는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 전 총리를 비롯해 친(親)아베로 분류되는 보수 진영도 막판에 ‘사죄의 표현을 넣으라’며 경고 신호를 보냈다. 상황이 불리하게 돌아가자 아베 총리는 4대 핵심 키워드(침략, 식민 지배, 반성, 사죄)를 모두 넣되 주체를 모호하게 흐리는 타협안을 검토하기 시작했다는 후문이다. 아베 총리가 문안을 최종적으로 확정한 시기는 지역구인 야마구치(山口) 현에 있을 때였던 것으로 보인다. 총리는 12일 자신의 정치적 고향인 야마구치에 내려가 2박 3일 동안 후원회 참석 등의 일정을 소화하면서 생각을 정리했다. 그는 예전에도 야스쿠니(靖國)신사 참배, 소비세 인상 등 중요한 결정을 내리기 전후에 야마구치를 찾아 심경을 정리하거나 각오를 다지곤 했다. 14일 오전엔 부인인 아키에(昭惠) 여사와 함께 야마구치 현 나가토(長門) 시에 있는 아버지 아베 신타로(安倍晋太郞) 전 일본 외상의 묘소를 참배했다. 이후 도쿄로 상경했고 오후 5시에 임시각의에 참석해 담화 내용을 최종 확정했다. 담화는 각의 개최 직전까지 철통 보안이 유지됐으며 기자회견에 참석한 기자들도 불과 몇 분 전 원고를 건네받았다. 이날 담화는 영어와 일본어로 발표됐으며 추후 한국어와 중국어로도 배포될 예정이다. 오해를 최소화하고 정확한 의도를 전달하기 위한 것이라는 설명이다.도쿄=장원재 특파원 peacechaos@donga.com}

14일 일본 도쿄(東京) 총리관저. 기자회견장을 가득 메운 내외신 기자 100여 명은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가 굳은 표정으로 담화를 읽어 내려가자 밑줄을 쳐 가며 온 신경을 곤두세웠다. 2012년 12월 취임 이후 왜곡된 역사 인식을 보여 온 아베 총리의 이날 담화는 과거사 문제에 대한 일본의 공식 입장을 확인하는 동시에 긴장이 고조되고 있는 동아시아의 미래 질서 구축에 일본이 어떤 태도로 임할지를 가늠하는 시금석이었다. 담화는 A4용지 5쪽에 4000자 분량으로 1200자 안팎이었던 역대 전후 담화보다 3배 이상으로 많았다. 내용은 기대에 못 미쳤다. 일부 대목에선 국내외에서 쏟아진 요구들을 이것저것 반영해 균형을 잡으려는 노력을 했지만 총리 자신의 신념은 바꾸지 않고 요구들을 나열해 ‘물타기’를 시도했다는 게 중평이다. 먼저 식민지 지배와 침략과 관련해 ‘과거형’으로 대신한 것에 대해 아베 총리는 담화 발표 후 가진 기자들과의 일문일답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행위가 침략에 해당하는지에 대해서는 역사가의 논의에 맡겨야 한다”고 말했다. “침략의 정의는 정해져 있지 않다”는 2013년 국회 답변의 연장선이다. 진창수 세종연구소장은 “식민 지배는 이야기하면서도 침탈을 명확하게 하지 않았는데 당시 제국주의 시대의 분위기로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는 인식 때문으로 보인다”면서 “사죄와 반성을 말하면서도 1인칭이 아닌 3인칭으로 자신의 마음을 담지도 않고 동북아의 주변국들에 ‘문제는 일으키지 않겠다’는 정도의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고 했다. 아베 총리는 실제로 담화 앞부분에서 “식민 지배의 파도는 19세기 아시아에도 밀려들었다”며 시대 상황을 장황하게 나열하면서 “(일본은) 나아가야 할 진로를 잘못 선택해 전쟁의 길로 걸어가게 됐다”고 말해 식민 지배와 침략을 일본의 가해 행위가 아니라 역사적 차원의 비극이라는 식으로 비켜 갔다. 일본이 전후 아시아 국가들의 경제 발전과 근대화에 기여했다는 점도 내세웠는데 이는 무라야마 담화나 고이즈미 담화에서는 없었던 표현이다. 아베 총리는 특히 “일본에서는 전후 태어난 세대가 지금은 인구의 8할을 넘는다”며 “전후 세대에게 사죄를 계속할 숙명을 지워선 안 된다”고 주장했다. 일본이 전후 국제사회에 복귀한 것과 관련해서도 “관용의 마음”을 거론하며 “화해를 위해 힘을 쏟아 준 모든 나라, 모든 분에게 마음에서부터 감사를 표하고 싶다”고 했다. 동아시아에서 역사 인식을 둘러싼 갈등이 고조되는 것은 한국과 중국의 책임이 작지 않다는 뉘앙스다. 하지만 “전장의 그늘에는 깊이 명예와 존엄을 손상당한 여성들이 있었던 것도 잊어서는 안 된다. … 아무런 죄도 없는 사람들에게 측량할 수 없는 손해와 고통을 우리나라가 안긴 사실”이라고도 명시한 점은 특기할 만하다. 한일 관계 전문가들은 이와 관련해 불만스러운 점이 있지만 평소 아베 총리의 역사 인식에서는 진일보한 내용이라는 평가를 내렸다. 진 소장은 “기대했던 것보다는 주변국을 의식한 발언을 담아 발표했다. 반성은 들어가도 사죄는 들어가지 않을 것이라는 예상이 많았는데 식민 지배에 대해서도 얘기를 한 점은 기대 이상”이라고 했다. 이후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박철희 서울대 교수는 “한국이 우려했던 우파의 논리에 완전히 끌려간 내용은 아니다”며 “모자라는 부분도 있지만 위안부 문제를 언급했으니 그 부분을 받아들이는 방향으로 한일 관계 개선의 실마리를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원덕 국민대 국제학부 교수(일본학연구소장)는 “이번 아베 담화에 실망해 한일 관계를 훼손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며 “일본 국민 중 상당수는 아베와 다르다는 데 희망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 “북한 문제까지도 염두에 둔다면 한일 관계를 잘 다뤄 한중일 정상회담이 이뤄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실리적”이라며 “이렇게 해서 성과를 낸다면 현 동북아 정치 지형 속에서도 주도권을 갖고 우리만의 공간을 마련할 수 있다”고 말했다. 신각수 국립외교원 국제법센터 소장 겸 전 주일대사는 “만족할 만한 수준은 아니지만 반발할 수준도 아니다”며 “담화의 내용이 기대에 못 미치더라도 유연하게 대응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어 “양국 간 가장 시급한 현안인 위안부 문제를 빨리 해결해야 한다”고 덧붙였다.도쿄=배극인 bae2150@donga.com·장원재 특파원 /허진석 기자 jameshuh@donga.com}

전쟁과 침략에 대해 ‘사죄’라는 표현은 있었지만 자신의 목소리가 아닌 과거 담화를 인용하는 식이었다. 식민지 지배에 대해서도 일본은 어쩔 수 없었다는 식의 자기 합리화로 일관했다. 아베 신조(安倍晋三·사진) 일본 총리가 14일 발표한 전후(前後) 70년 담화는 강도 높은 역사왜곡 발언을 자제하고 국내외 압박을 의식해 사과와 반성의 마음을 담으려 한 흔적은 보였으나 진정성은 보이지 않았다. ‘한국’이란 단어는 단 한 차례만 언급된 반면 ‘중국’은 4차례 언급됐다. 아베 총리는 이날 내외신 기자 100여 명이 참석한 기자회견에서 일본의 침략에 대해 “국내외에서 숨진 모든 사람의 목숨 앞에 깊이 머리를 숙이고, 통석(痛惜)의 염(念)을 나타내는 것과 함께 영겁의 애통의 마음을 진심으로 올린다”면서도 “지난 전쟁에서의 행동에 대해 (일본은) 반복적으로 통절한 반성과 진심 어린 사죄의 마음을 표해 왔다”고 말해 ‘과거형 사과’로 대신했다. 1995년 무라야마 담화, 2005년 고이즈미 담화의 표현처럼 직접적인 사과가 아니라 ‘역대 담화와 같은 입장’이란 식으로 넘어간 것이다. 그러면서도 “이 같은 역대 내각의 입장은 앞으로도 흔들림이 없는 것”이라며 이전 담화의 입장을 계승한다는 모양새는 취했다. 일본이 과거 침략 행위를 자행했다는 것도 구체적으로 인정하지 않고 “사변, 침략, 전쟁, 어떠한 무력의 위협이나 행사도 국제 분쟁을 해결하는 수단으로서는 다시는 사용돼서는 안 된다”는 일반론으로 대신했다. 식민지 지배에 관해서도 “모든 민족의 자결권이 존중받는 세계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식으로 말해 침략과 식민지 지배의 주체가 누구였는지 명확히 하지도 않고 일본만의 잘못도 아니었다는 뉘앙스를 풍겼다. 일본이 자행한 침략 행위와 식민지 지배의 피해국으로 “전쟁의 고통을 맛본 중국인 여러분이나, 일본군에 의해 견디기 어려운 고통을 당했던 (미국 영국 네덜란드 호주 등 연합국) 포로 여러분”만을 언급해 한국은 거론조차 하지 않았다. 전쟁 피해자들에 대한 언급도 “일본 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원폭 투하, 도쿄를 비롯한 각 도시의 폭격 등으로 많은 일본 국민이 희생됐다”며 자국민 피해를 먼저 언급한 뒤 “중국과 동남아시아, 태평양 도서 국가들이 전투와 식량 부족으로 인해 고통을 받았다”며 중국 외에는 나라 이름을 명시하지 않았다. 전후 총리 담화로는 처음으로 “전장의 그늘에는 깊이 명예와 존엄을 손상당한 여성들이 있었던 것도 잊어서는 안 된다”는 표현을 쓰긴 했지만 이 여성들이 강제 동원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를 지칭하는 것인지에 대해선 명확히 하지 않았다. 도쿄=배극인 bae2150@donga.com·장원재 특파원}

지난해 여름 기자는 36일 동안 자전거를 타고 국도를 달려 일본 열도를 종주했다. 제일 걱정됐던 것은 지나가는 승용차들에 방해가 되지는 않을지, 수시로 경적을 울려대지는 않을지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여행기간 내내 경적 소리를 들은 것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같이 출발했던 한국인 동행자는 “한국에선 하루에 열 번도 넘게 경적 소리를 들었다”고 했다. 터널에서는 대형 트럭이 아예 속도까지 낮추고 우리 뒤를 천천히 따라왔다. 일본은 ‘자전거 대국’이라는 명성과는 다르게 자전거 전용도로가 부족하다. 자전거는 보통 보행도로나 차도로 다녀야 한다. 오히려 일본인들은 한국의 4대강 자전거 길을 얘기하면 부러워한다. 그러나 자전거 문화만큼은 확실히 일본이 앞선다고 여겨진다. 라이더들은 전조등과 반사판을 갖추고 교통신호를 준수하고 보행도로에서는 보행자 우선 원칙을 철저히 지킨다. 덕분에 도쿄(東京) 같은 대도시에서도 안전하고 편하게 자전거를 탈 수 있다. 바람직한 자전거 문화 정착을 위한 계도에도 열심이다. 일본 경시청은 6월부터 △신호 무시 △도로 역주행 △음주 라이딩 등 14개 유형을 ‘위험 행위’로 규정하고 2회 이상 단속되면 안전 교육을 받게 했다. 라이더들에 대한 처벌도 엄격하다. 보행자를 치었을 경우 책임을 엄하게 묻는다. 2년 전 남자 초등학생이 자전거를 타고 가다 보행자를 치어 의식불명으로 만들었던 사건에서 법원은 초등학생 보호자에게 9500만 엔(약 9억 원)을 배상할 것을 명령했다. 일본의 자전거 사고는 2010년 15만5000건에서 2014년 11만2000건으로 줄었다. 미국에서 출간된 책 ‘도시 사이클링’에 따르면 도쿄의 자전거 이용률은 뉴욕, 런던, 파리 등과 비교해 10배 정도 높지만 사고율은 4분의 1∼15분의 1 수준이다. 안전한 자전거 문화는 라이더와 보행자, 차량 운전자들의 서로를 향한 배려에서 만들어진다. 그리고 이런 배려의 시민정신이야말로 국격을 높이는 제일 큰 자산이 아닐까.도쿄=장원재 특파원 peacechaos@donga.com}
일본에서 불상을 훔친 한국인 승려에게 실형이 선고됐다. 교도통신은 일본 나가사키(長崎) 지법이 지난해 나가사키 현 쓰시마(對馬) 시 소재의 한 절에서 불상을 훔친 한국인 승려 김모 씨(70)에게 징역 6년의 실형을 선고했다고 보도했다. 김 씨는 다른 한국인 4명과 함께 지난해 11월 24일 쓰시마의 바이린(梅林)사에서 불상 1점과 대반야경(大般若經) 360권을 훔쳤으며 절도 당일 항구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됐다. 이들이 훔친 불상은 구리로 만들어진 높이 약 11cm의 ‘탄생불’로 9세기 신라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쓰시마 시는 이 불상을 유형문화재로 지정해 관리해 왔다. 쓰시마에서는 2012년 10월 한국인이 불상 2점을 훔쳐 한국으로 들여왔다가 문제가 됐으며, 그중 1점은 지난달 일본에 반환됐다. 도쿄=장원재 특파원 peacechaos@donga.com}

하토야마 유키오(鳩山由紀夫·68) 전 일본 총리가 12일 서울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을 찾아 35년간의 일본 식민통치에 대해 “진심으로 사죄한다”고 말했다. 전현직 일본 총리가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을 찾은 건 2001년 10월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당시 총리 이후 14년 만이다. 이날 오후 2시부터 약 50분간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을 찾은 하토야마 전 총리는 방문 내내 “와비루(わびる)”를 반복했다. ‘사죄한다’는 뜻이다. 그는 이날 형무소 곳곳을 돌며 11차례 고개를 조아렸다. 특히 순국선열 추모비 앞에서는 무릎을 꿇고 큰절로 참배했다. 그는 유관순 열사(1902∼1920)가 투옥됐던 여(女)옥사 8호 감방을 비롯한 전시관, 중앙옥사 등 주요 건물에 들어설 때마다 고개를 숙이고 눈을 감았다. 약 5분간 유관순 열사 감방에 머물 때는 눈물을 살짝 훔친 것으로 전해졌다. 이날 동행한 이혜훈 전 국회의원은 “유 열사 등 7명의 죄수가 순국 전까지 ‘만세’를 불렀다는 이야기를 끝까지 읽는 등 내내 진지한 모습이었다”고 말했다. 하토야마 전 총리는 방명록에 ‘만세운동에 힘을 다한 모든 영혼에게 편안함이 있길 바란다. 독립 평화 인권 우애를 위해서’라는 글귀를 남겼다. 이어 사형수 등이 머물던 중앙옥사 내부와 복도를 샅샅이 둘러본 뒤 옥사 뒤편 추모비로 향했다. 단상에 화환을 놓은 하토야마 전 총리는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었다. 약 10초간 묵념한 그는 무릎을 꿇은 채 허리를 굽혀 큰절까지 했다. 이어진 기자회견에서 하토야마 전 총리는 “일본 식민지 시기 독립운동, 만세운동에 힘쓴 유관순을 비롯해 많은 분들이 (이곳에) 수용돼 고문을 받고 목숨을 잃었다”며 “진심으로 죄송하고 사죄한다”고 말했다. 또 15일 발표될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의 ‘전후 70주년’ 기념 담화에 대해 “한국을 식민통치하고 중국 등 다른 나라를 침략했다는 역사적 사실이 담겨야 한다”며 “반드시 반성과 사죄의 마음이 담겨야 한다”고 강조했다. 2009년 8월 54년 만에 자민당에서 민주당으로 정권 교체를 이끌어 낸 하토야마 전 총리는 광복 70주년을 맞아 13, 14일 열리는 ‘2015 동아시아평화국제회의’ 참석차 한국을 찾았다. 전문가들은 이날 하토야마 전 총리의 행보가 한일관계의 ‘기념비적인 모습’이라고 평가했다. 현진덕 강원대 일본학과 교수는 “서독의 빌리 브란트 총리(1913∼1992)가 폴란드 유대인 학살 추모비 앞에서 처음 무릎 꿇은 것만큼 상징적인 사건”이라며 “경색된 한일관계 개선과 동북아 정세 안정에도 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한편 하토야마 전 총리를 포함한 일본의 전직 총리 5명은 아베 총리를 향해 집단적 자위권 행사를 골자로 한 안보법제 추진에 반대한다는 뜻을 밝혔다. 1995년 무라야마 담화를 발표한 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富市) 전 총리는 “대다수의 헌법 학자들이 안보법제가 위헌이라고 하는데 총리가 멋대로 헌법 해석을 바꿔 국회에 제출했다”며 “이는 의회 민주주의를 무시하는 횡포”라고 비판했다.이철호 기자 irontiger@donga.com / 도쿄=장원재 특파원김새난슬 인턴기자 연세대 신문방송학과 4학년}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이 지난달 28일 아버지 신격호 롯데그룹 총괄회장을 일본 롯데홀딩스 대표에서 해임한 후 사흘 뒤인 31일 일본 롯데 5개 계열사와 한일 롯데를 지배하는 L투자회사 대표이사직에서도 모두 해임한 것으로 확인됐다. 동아일보가 12일 일본 법무성 등기서비스 홈페이지에서 확인한 일본 롯데그룹 등기부등본에 따르면 아버지 신 총괄회장이 대표로 있던 ㈜롯데, 롯데상사, 롯데물산, 롯데아이스, 롯데부동산 등 계열사 5곳에 ‘시게미쓰 다케오(重光武雄·신 총괄회장의 일본 이름) 7월 31일 해임’이라고 적혀 있었다. ㈜롯데의 경우 쓰쿠다 다카유키(佃孝之) 롯데홀딩스 사장이 단독 대표로 표기돼 있는 등 나머지 계열사들도 신동빈 회장의 측근인 일본인들이 단독 대표로 올라 있었다. 이로써 창업주인 신 총괄회장은 일본 롯데 계열사 15곳 중 14곳에서 대표를 맡지 않게 됐다. 신 총괄회장이 대표로 남아 있는 계열사는 야구단인 지바 롯데 마린스뿐이다. 한편 L투자회사 9곳(1∼3, 7∼12) 등기부등본에도 ‘시게미쓰 다케오 7월 31일 해임’이라고 적혀 있었으며 신동빈 회장이 단독 대표이사로 표기돼 있었다. 신 회장은 이미 L투자회사 3곳의 대표를 맡고 있어 새로 취임한 9곳을 합치면 12곳 모두의 단독대표가 됐다. L투자회사는 한국 롯데의 지주회사 격인 호텔롯데의 지분 72.65%를 보유하고 있어 사실상 한국 롯데그룹을 지배하고 있는 회사들이다. 이 같은 롯데 계열사와 투자사들의 대표이사 등기 변경 신청 날짜는 8월 10일로 표기되어 있었다. 신동빈 회장은 다음 날인 11일 두 번째 대국민 사과 및 지배구조 개선 기자회견을 했다. 이에 따라 신 회장은 서류상으로 양국 롯데의 공식 대표가 된 뒤 기자회견을 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장남인 신동주 전 롯데홀딩스 부회장이 7일 밤 급히 일본에 갔다가 11일 귀국한 것도 이 같은 사태에 대책을 마련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이제 신 총괄회장이 대표이사로 있는 일본 롯데 관련 회사는 지바 롯데 마린스와 광윤사(光潤社)다. 광윤사는 롯데홀딩스의 주식 3분의 1을 보유하고 있어 신동빈 체제가 통과해야 할 마지막 관문이 될 것이란 관측이 나오고 있다.도쿄=장원재 특파원 peacechaos@donga.com}
롯데가(家) 경영권 분쟁의 최대 분수령으로 여겨졌던 일본 롯데홀딩스 임시 주주총회가 17일 열린다. 그러나 ‘신격호 총괄회장을 명예회장으로 추대’(신동빈 회장 측 예상 안건)나 ‘신동빈 회장을 대표이사에서 해임’(신동주 전 일본롯데 부회장 측) 등은 안건에 오르지 않았다. 신동빈 대 신동주 간 정면 승부가 펼쳐지지 않을 수 있다는 뜻이다. 롯데그룹은 11일 “일본 롯데홀딩스 주주총회는 17일로 예정돼 있다”며 “안건은 사외이사 선임과 기업지배구조 개선 등에 관한 것”이라고 밝혔다. 일본 롯데홀딩스도 “명예회장직 신설은 정관 변경이 필요 없는 것으로 확인돼 이번 주총 안건에 포함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회사 측은 특히 “어떤 주주도 주총 개최를 청구하지는 않았다”고 했다. 신동주 전 부회장이 주총 소집을 요구한 게 아니라 신동빈 회장이 장악한 롯데홀딩스 이사회의 결정에 따라 기습적으로 이뤄졌음을 짐작하게 한다. 신동주 전 부회장으로서는 주총이 역전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는 카드다. 동생 신동빈 회장이 6월 말 한일 롯데 모두를 지배하는 양대 지주회사(롯데홀딩스, 롯데스트라티직인베스트먼트) 및 일본 L1∼12투자회사를 장악했지만 롯데홀딩스 지분만큼은 박빙이다. 재계에서는 신동주 전 부회장이 차제에 본인 주도로 주총 소집을 다시 요구함과 동시에 결정적 일격을 준비하고 있을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신동주 전 부회장은 최근 아버지가 대표이사로 있는 L투자회사 9곳(4, 5, 6 제외)에 대해 일본 법무성에 ‘등기 변경 신청’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은 신격호 총괄회장이 단독 대표이사로 있다가 6월 30일자로 신동빈 회장이 공동 대표이사에 올랐고 7월 말∼8월 초에 등기가 완료됐다. 7일 일본으로 떠난 신동주 전 부회장이 동생이 사과문을 발표한 11일 다시 입국한 것도 반격을 위한 행보와 관련이 있을 것이란 추측이 나온다. 소송전도 여전히 그룹 후계 구도 확정에 영향을 줄 변수로 남아 있다. 신동주 전 부회장은 신동빈 회장의 롯데홀딩스와 L투자회사 등의 대표이사에 오른 것이 적법한 절차를 거치지 않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김창덕 기자 drake007@donga.com / 도쿄=장원재 특파원}
후쿠시마 사고 여파로 ‘원전제로’가 됐던 일본에서 11일부터 다시 원전이 가동된다. 일본 규슈전력은 10일 일본 최남단 가고시마(鹿兒島) 현의 사쓰마센다이(薩摩川內) 시에 있는 센다이 원전 1호기를 11일 오전 10시 반부터 재가동한다고 공식 발표했다. 2011년 3월 동일본 대지진 이후 후쿠시마 사고가 발생하자 당시 민주당 정권은 원전을 중단하기로 결정했다. 그러고 순차적으로 가동을 멈춰 2013년 9월 후쿠이(福井) 현의 오이 원전 4호기를 마지막으로 정지시켰고 이후 지금까지 약 23개월 동안 ‘원전제로’ 상태가 유지됐다. 하지만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는 원전을 국가의 중요 에너지원으로 규정했고 안전성이 확인된 원자로를 재가동하기로 했다. 이번에 다시 가동되는 센다이 원전 1호기는 14일부터 전력을 생산 공급할 예정이다. 현재 일본의 원전은 모두 43기. 이 중 센다이 원전 2호기, 후쿠이 현의 다카하마 원전 3, 4호기 등이 이미 안전기준 심사를 통과해 당분간 원전 재가동이 이어질 것으로 전망된다. 하지만 반대 의견이 많아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 센다이 원전 인근에서는 9일 전국에서 2000명이 모여 원전 재가동 반대 집회를 열었다. 10일에는 후쿠시마 사고 때 총리였던 간 나오토(菅直人) 전 총리가 참가한 가운데 항의 시위가 열렸다. 도쿄=장원재 특파원 peacechaos@donga.com}
미국 정부가 9월 3일 중국 베이징(北京)에서 열리는 항일승전 70주년 기념행사에 박근혜 대통령이 참석하지 말 것을 한국 외교 경로를 통해 요구했다고 일본 교도통신이 미국 정부 당국자와 외교사절을 인용해 9일 보도했다. 보도에 따르면 미국은 “박 대통령이 행사와 열병식에 참석할 경우 중국이 한미 동맹을 균열시켰다는 잘못된 메시지가 된다”는 우려를 한국 측에 전달했다. 또 박 대통령의 행사 참석은 한미일 협력을 축으로 하는 버락 오바마 미 행정부의 아시아 중시 전략에도 영향을 준다는 견해도 전달했다는 것이다. 교도통신은 “박 대통령이 중국 승전 기념행사에 참석할 경우 한국과 중국이 역사문제에서 일본에 함께 맞서는 듯한 모양새가 되는 것을 미국이 우려하고 있다”고 전했다. 중국은 일본이 항복문서에 서명한 다음 날인 9월 3일을 전승절로 기념하고 있으며 특히 올해는 항일 전쟁과 반파시스트 전쟁 승리 7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한국과 북한 등 50여 개 국가 정상에게 초청장을 보냈다. 중국은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에게도 초청장을 보낸 것으로 알려졌으나 아베 총리는 ‘패전국 정상이 사죄하는 모양새가 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에 참석을 부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이날 교도통신 보도에 대해 한국 외교부 당국자는 “사실무근”이라고 밝혔다. 이 당국자는 “행사 참석과 관련된 결정은 한국이 알아서 판단할 문제이지, 누구의 압력을 받고 말고 할 문제가 아니다”라며 “실제 압력에 해당하는 어떤 행동도 있지 않았으며 미국에서도 같은 설명이 있을 것으로 안다”고 했다. 한편 정부는 참석할 경우와 불참할 경우의 득실을 저울질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도쿄=장원재 특파원 peacechaos@donga.com / 조숭호 기자}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이 일본롯데의 투자회사는 물론이고 현지 계열사들도 장악한 것으로 확인됐다. 신 회장 본인이 한국롯데를 지배하는 일본 L투자회사들의 대표이사에 올랐던 6월 말 일본롯데 계열사들의 대표이사에 ‘친(親)신동빈’ 인사들을 대거 취임시킨 것이다. 이로써 창업주인 신격호 롯데그룹 총괄회장이 단독으로 대표이사를 맡은 일본롯데 계열사(그룹 홈페이지 기준 15곳)는 한 곳도 없게 됐다. 7일 일본 법인등기부등본에 따르면 고초 에이이치(牛장榮一) 롯데상사 영업본부장이 6월 30일자로 롯데물산 대표이사에 취임했다. 가와이 가쓰미(河合克美) 롯데홀딩스 상무이사도 같은 날 롯데부동산 대표이사가 됐다. 두 사람은 지난달 28일 롯데홀딩스 이사회에서 신격호 총괄회장의 대표이사 해임 안건에 찬성표를 던진 인물이다. 신격호 총괄회장은 6월까지 일본롯데 계열사 15곳 중 롯데홀딩스 등 7곳의 대표이사였고 이 중 롯데물산, 롯데부동산에서는 단독 대표였다. 그러나 이 두 회사에 차남 신동빈 회장 측 인사가 공동대표에 오름에 따라 단독 대표를 한 곳도 유지하지 못하게 됐다. 현재 신동빈 회장은 일본롯데 계열사 중 지주회사인 롯데홀딩스와 지바롯데마린스 등 2곳의 대표이사만 맡고 있지만 측근인 쓰쿠다 다카유키(佃孝之) 롯데홀딩스 사장이 5곳의 대표를 맡는 등 주변 인사들이 대거 전진 배치됐다. 반면 신동주 전 일본롯데 부회장은 지난해 말과 올해 초에 걸쳐 9곳의 계열사에서 해임됐으며 측근들도 대부분 그때를 전후해 계열사를 떠났다. 신동빈 회장이 6월 30일 일본 L3 및 L6투자회사 대표이사로 취임한 것도 이날 추가로 확인됐다. 이로써 신 회장은 일본 내 양대 지주회사 2곳(롯데홀딩스, 롯데스트러티직인베스트먼트)과 그 아래 L1∼L12투자회사 전체를 이끌게 됐다. 본인은 지배구조를 장악하고 일본 내 계열사 경영은 측근에게 맡기는 구도다. L투자회사들의 정관은 ‘회사의 주식을 양도에 의해 취득할 경우 주주 또는 취득자는 이사(중역)의 과반수 결정에 의한 승인을 얻지 않으면 안 된다’고 명시하고 있다. 신격호 총괄회장 측이 가진 L투자회사들의 지분을 장남인 신동주 전 부회장에게 양도할 가능성이 원천적으로 봉쇄된 것이다. 모든 L투자회사들의 이사회는 신동빈파가 과반인 것으로 파악된다. 한편 신동주 전 부회장은 이날 저녁 김포공항을 통해 일본으로 출국했다. 지난달 29일 귀국한 지 9일 만이다. 당초 동생 신동빈 회장이 귀국한 3일 일본행이 예상됐지만 나흘 더 아버지인 신격호 총괄회장 곁을 지켰다. 그는 이날 출국 전 SBS와의 인터뷰에서 “아버지(신 총괄회장)가 ‘동생(신동빈 회장)이 멋대로 L투자회사 사장에 취임한 것이냐’며 화를 냈다”며 “일본에서 법적 대응을 준비할 것”이라고 밝혔다.도쿄=장원재 특파원 peacechaos@donga.com /김범석 기자}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이 6월 말 이미 한국 롯데그룹을 지배하는 일본 L1∼L12투자회사 중 10개 회사의 대표이사에 오른 것으로 확인됐다. 또 L투자회사 일부를 지배하는 롯데스트러티직인베스트먼트의 대표이사에도 등재됐다. 지난달 15일 일본 롯데홀딩스 대표이사가 되면서 일본 내 양대 지주회사를 장악한 것이다. 6일 일본 법인등기부등본에 따르면 신 회장은 6월 30일 L1∼L12 투자회사 중 L3, L6을 제외한 10곳의 대표이사로 취임했다. L3, L6은 등기 작업을 진행 중이지만 신 회장이 대표이사에 올랐을 가능성이 높다. 신격호 총괄회장은 신동빈 회장이 대표이사가 된 투자회사 10곳 중 8곳(L4, L5 제외)에서 대표이사직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신동빈 회장은 10곳 모두 이사진 중 과반수를 고바야시 마사모토(小林正元) 한국 롯데캐피탈 사장 등 ‘신동빈파’로 채웠다. 신동주 전 일본롯데 부회장은 롯데홀딩스 이사회에서 해임된 1월 L투자회사 8곳의 대표이사 및 이사직에서도 물러났다. 12개 L투자회사는 한국 롯데그룹의 지주회사 격인 호텔롯데 지분 72.65%를 갖고 있다. 이 때문에 L투자회사만 접수하면 한국롯데 지배가 가능하다. 일본에서는 롯데스트러티직인베스트먼트와 롯데홀딩스가 L투자회사들을 나눠 지배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신동빈 회장이 한국과 일본의 지배구조 핵심에 있는 회사들을 차례로 접수한 것이다. 한편 정부와 새누리당은 이날 국회에서 ‘롯데 등 대기업 소유구조 관련 당정협의’를 열고 대기업이 해외 계열사 현황을 공시하도록 공정거래법을 개정하기로 합의했다. 당정은 다만 경제 전반에 미칠 영향을 우려해 순환출자 제한을 확대하진 않기로 했다.도쿄=장원재 특파원 peacechaos@donga.com / 김재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