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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물 안전진단에서 D·E등급을 받아 재난 위험시설로 분류된 아파트는 서울 시내 곳곳에 있다. 지방자치단체가 긴급한 보수·보강공사가 필요하다고 판정한 D등급 아파트 중에는 당장 입주민을 대피시켜야 할 만큼 위태로워 보이는 곳들도 있다. 6일 본보 기자가 찾은 서울 관악구의 B아파트는 4개 동 중 1개 동이 2006년 D등급 판정을 받았다. D등급을 받은 건물 외벽 곳곳은 콘크리트가 떨어져 나가 철근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아파트 화단은 벽에서 떨어진 콘크리트로 수북하게 덮여 있었다. 이 아파트를 함께 둘러본 안형준 한국초고층도시건축학회연구원장은 “외부 충격이 있으면 바로 무너질지도 모르는 사실상 E등급 아파트”라고 진단했다. 건물 벽에 난 큰 균열마다 ‘균열 계측기’가 설치돼 있었지만 전부 고장 난 상태였다. 역시 D등급을 받은 서울 용산구의 J아파트 외벽 곳곳에서도 균열이 발견됐다. 금이 가면서 생긴 틈 사이가 3cm 이상 벌어진 부분도 있었다. 금 간 틈 사이로 물이 들어갔는지 건물 벽은 울퉁불퉁했다. 인테리어 공사 중인 이 아파트의 한 가구를 방문해 보니 뜯긴 벽지 사이로 가로 2m 길이 균열이 보였다. 이 아파트 주민 강모 씨(63·여)는 “천장에서 돌 떨어지는 소리가 난다”고 말했다. 붕괴 위험이 있는 아파트에 살던 주민 중 그나마 사정이 좀 나은 주민들은 하나둘씩 이사를 떠났다. 그 자리에 중국동포나 홀몸노인 등 영세민들이 입주해 목숨을 건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중국동포 B 씨(49) 부부는 지난해 6월 E등급 판정을 받은 영등포구 신길동 아파트에 입주했다. 2005년 한국에 온 뒤 고시원과 월세방을 전전하다가 처음으로 마련한 집이었다. 부부는 부동산중개소에서 건물이 낡았다는 설명은 들었지만 붕괴 위험이 있다는 건 알지 못했다. 외환위기 당시 사업에 실패하고 월세방을 옮겨 다니던 문모 씨(49) 부부도 올 2월 같은 아파트에 전세를 얻었다. 문 씨는 “돈 있으면 이렇게 목숨 내놓고 살겠느냐”며 “여러 사람이 살고 있으니까 설마 죽기야 하겠나 하는 마음으로 살고 있다”고 했다. 사업성이 낮은 지역의 아파트 단지는 재난 위험시설로 지정되더라도 재건축 시공사가 정해지지 않은 채 방치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서울 강남 등 일부 지역 노후 아파트가 즉각 재건축사업이 진행되고 집값이 고공 행진하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876가구 규모인 관악구 신림동의 한 아파트는 1996년 D등급으로 진단받은 뒤 20여 년 동안 재건축 사업이 표류했다. 사업성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시공사만 수차례 바뀌었다. 결국 2017년 서울주택도시공사(SH)가 공동사업 시행자로 참여해 뉴스테이(기업형 임대주택)를 연계한 방식으로 사업성을 확보하면서 재건축이 가시화됐다. 구가 재건축에 실패한 붕괴 위험 아파트를 강제 철거하고 주민들을 이주시킬 수는 있다. 하지만 이 경우 주민들과 이주비 등을 협의하는 과정이 녹록지 않아 구나 시가 쉽게 나설 수 없다는 게 구청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전문가들은 무너질 위험이 크고 재건축이 어려운 아파트에 대해서는 구나 시가 예산을 들여 철거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서울시와 성북구가 2017년 1월 이주민들에게 임대주택과 주거이전비 등을 제공하는 조건으로 ‘E등급’ 판정을 받은 성북구 정릉 스카이아파트 4개 동을 철거한 전례도 있다. 박주경 한국시설물안전진단협회장은 “정부나 지자체가 E등급 건축물에 대해서는 예산을 들여 강제 철거하고 이주를 도와야 한다”며 “장기적으로는 일본처럼 아파트 관리주체가 건물에 대해 보험을 들고 보험금으로 건물 철거비나 공사비를 충당하도록 해야 한다”고 했다.고도예 yea@donga.com·이소연 기자}

서귀포시는 홈페이지 공개자료실에 게시돼 있던 ‘2015년도 외국인주민 지원기관 현황’ 자료를 지난달 23일 삭제했다. 이 자료에는 전국의 폭력 피해 이주여성 보호시설 위치 정보가 담겨 있었다. 전국에 28곳이 있는 이 시설은 남편의 폭력을 견디지 못해 가정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이주여성들을 보호하는 곳으로 길게는 2년까지 머물 수 있다. ‘가정폭력방지 및 피해자보호 등에 관한 법률’에 따르면 정부와 지방자치단체는 피해자의 신변 노출을 방지해야 할 의무가 있다. 이에 따라 가정폭력 피해 이주여성들을 보호하는 시설의 위치 관련 정보를 공개하면 안 된다. 이런 내용을 모르고 있다가 뒤늦게 알게 된 서귀포시 측이 관련 자료를 최근 삭제한 것이다. 서귀포시 측은 “담당 직원이 이주여성 보호시설 위치와 관련된 정보는 공개하면 안 된다는 걸 몰랐다”고 해명했다. 서귀포시가 자료를 삭제하기는 했지만 이주여성 보호시설 관련 정보가 4년 동안 노출돼 피해를 본 여성도 있다. 문제의 자료는 2015년 서귀포시의 한 동사무소 직원이 시 홈페이지에 올렸다. 지난해 8월 경북지역의 한 보호시설에 머물던 베트남 출신 이주여성 A 씨는 현관문 앞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방문을 걸어 잠갔다. 남편의 목소리였기 때문이다. A 씨는 결혼 후 3년 동안 이어진 남편의 폭력을 견디지 못해 지난해 7월 이 보호시설로 왔다. 그런데 남편이 한 달 만에 A 씨가 있는 곳을 찾아낸 것이다. 남편은 인터넷 검색을 통해 A 씨가 있는 곳을 찾아냈다. 인터넷 검색창에 ‘이주여성 쉼터’라고 입력하자 서귀포시가 홈페이지에 올려놓았던 ‘외국인주민 지원기관 현황’ 자료가 뜬 것이다. 남편은 자신이 거주하던 경북지역 내 보호시설을 일일이 찾아다녔다. 남편이 찾아오자 A 씨는 일주일 뒤 다른 보호시설로 거처를 옮겼다. 이주여성 보호시설 관계자들은 “보호시설이 사실상 공개된 시설이나 다름없다”고 토로한다. 보호시설 위치 정보가 공개된 사례는 또 있다. 행정안전부는 2016년 홈페이지 공개자료실에 외국인주민 지원기관 현황 자료를 올렸다. 2016년 3월 보호시설에 입소한 베트남 출신 이주여성 B 씨는 2주 만에 다른 보호시설로 옮겨야 했다. 남편이 찾아왔기 때문이다. 남편의 휴대전화에는 외국인주민 지원기관 현황 자료가 저장돼 있었다. 보호시설 관계자는 “당시 ‘어떻게 알고 찾았냐고 물었더니 휴대전화에 저장된 자료를 보여줬는데 자료에는 행정안전부라는 글자가 찍혀 있었다”고 말했다. 남편은 다른 시설로 옮긴 B 씨를 한 달 만에 또 찾아냈다. 대구의 한 이주여성 보호시설 관계자는 “공공기관이 폭력피해 이주여성 보호시설의 위치 관련 정보를 공개해서는 안 된다는 인식을 철저히 하고 피해자 보호를 위한 안전망을 마련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여성가족부에 따르면 가정폭력을 피해 보호시설에 입소한 이주여성은 2018년 기준 877명이다. 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5명의 희생자를 낸 경남 진주 방화·살인 사건 피의자 안인득(42·구속)의 가족이 사건 발생 약 2주 전부터 안인득을 정신의료기관에 입원시키려 했지만 제도의 벽에 막혀 모두 무산됐던 것으로 드러났다. 안인득이 2011년 1월부터 2017년 7월까지 진주의 한 정신병원에서 68차례에 걸쳐 조현병 치료를 받은 사실도 확인됐다. 안인득은 2010년 행인에게 시비를 걸고 흉기를 휘두른 혐의로 넘겨진 재판에서 ‘편집형 정신분열증(조현병)’ 진단을 받은 이후 5년 6개월간 정신질환 진료를 받은 것이다. 경찰은 안인득이 병원 진료를 중단한 이유에 대해 조사 중이다. 정신질환자를 정신의료기관에 강제로 입원시킬 수 있는 제도로는 보호입원, 행정입원, 응급입원이 있다. 하지만 안인득은 세 가지를 모두 비켜 갔다. 일각에서는 정신질환자의 입원에 수사기관이 강제로 개입할 수 있는 제도 마련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안인득은 지난달 10일 도로에서 행인을 흉기로 위협하고 폭행한 혐의로 진주경찰서에 피의자로 입건됐다. 안인득의 조현병 증세가 심각해졌다고 판단한 가족은 안인득을 강제 입원시키기로 했다. 정신건강복지법상 보호의무자 2명의 동의가 있고,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2명이 입원치료가 필요하다고 진단하면 환자 본인의 동의 없이도 ‘보호입원’이 가능하다. 하지만 안인득의 형이 찾은 정신의료기관에서는 안인득을 받아주지 않았다. 입원치료가 필요하다는 전문의 2명의 진단서가 없었기 때문이다. 전문의 진단을 받으려면 환자가 병원을 직접 방문해 대면 진료를 받아야 하는데 안인득은 ‘병원에 가자’는 형의 말을 따르지 않았다. 19일 본보와 만난 안인득의 남동생은 “형은 ‘엄마가 밥에 독을 탔다. 가족들이 날 해코지하고 감시한다’며 의심했다. 가족들을 향해 흉기를 들기도 했다. 병원에 가서 진단받자고 하는 설득이 통하지 않았다”고 했다. 형은 이달 4일 진주서를 방문해 안인득을 강제 입원시킬 방법을 문의했다. 자신이나 타인에게 해를 가할 위험이 큰 사람에 대해 의사 1명과 경찰관 1명의 동의가 있으면 정신의료기관에 3일간 입원시킬 수 있는 ‘응급입원’ 제도가 있다. 그러나 경찰에서도 “응급입원을 시킬 수 없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안인득이 ‘자신이나 타인을 해칠 위협이 큰 상태’라고 판단하기 어려웠다는 게 이유다. 경찰에 따르면 안인득은 지난해 9월 이후 세 차례 경찰에 입건돼 조사를 받았지만 이때마다 “잘못했습니다. 다시는 안 그러겠습니다”라며 모든 혐의를 인정하는 태도를 보였다고 한다. 진주서 관계자는 “9번의 미미한 범죄를 저지른 사람이 10번째에 살인을 저지를지 경찰이 어떻게 알 수 있겠느냐”며 “인권침해 논란으로 옷을 벗어야 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안인득의 가족은 마지막으로 ‘행정입원’ 권한을 가진 지방자치단체의 힘을 빌려 보려 했지만 이때도 ‘전문의 진단’ 문턱을 넘지 못했다.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나 정신건강전문요원은 타인을 해치거나 자해 위험이 높은 정신질환자가 발견됐을 때 자치단체에 환자에 대한 진단과 보호를 신청할 수 있다. 신청이 접수되면 지자체는 입원이 필요하다는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의 진단을 근거로 지정 정신의료기관에 입원을 의뢰한다. 행정입원을 위해서도 전문의 2명의 진단이 필요한데 안인득이 병원에 가기를 거부했기 때문에 진단을 받을 수 없었다. 일각에서는 수사기관이 강제입원을 위한 이송에 적극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 권한이 마련돼야 한다고 지적한다. 최준호 대한신경정신의학회 법제이사는 “수사기관, 특히 경찰이 강제입원을 위한 이송에 적극적으로 개입해 환자가 전문의 진단을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진주=이소연 always99@donga.com·김재희 기자}

“안 씨라고 해서 설마 했는데 맞나 보네요….” 경남 진주시 아파트 묻지 마 방화살인범 안인득 씨의 조현병 주치의였던 A 씨는 18일 본보와의 통화에서 안타까운 탄식을 내뱉었다. A 씨는 2011년부터 진주의 정신건강의학병원에서 5년 넘게 안 씨의 조현병을 치료했다. 주치의였던 A 씨가 2016년 6월 다른 지역으로 옮겨가자 안 씨는 그 다음 달부터 병원에 발길을 끊었고 증세가 악화돼 방화살인까지 저질렀다. A 씨와 병원 측에 따르면 안 씨는 2011년 1월 병원에 보호입원해 10개월간 입원 치료를 받았다. 당시 안 씨 형제 2명이 안 씨의 입원을 요청했고 의료진이 타인을 해치거나 자해할 우려가 있다고 판단해 보호입원이 이뤄졌다. 안 씨가 2010년 5월 진주 시내에서 20대 남성을 흉기로 위협하고 다치게 한 혐의로 구속 기소됐다가 재판에서 조현병에 따른 심신미약을 인정받아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고 출소한 지 8개월 만이다. 안 씨는 출소 후 가족과 지냈지만 조현병이 계속 심해졌다고 한다. 안 씨 동생은 18일 본보와 만나 “형이 19년 전에 공장에서 일하다 허리를 다친 이후부터 쭉 피해망상 증세를 보였다”며 “출소한 후에는 ‘가족이 나를 죽이려 한다’는 헛소리를 하고 어머니를 물리적으로 위협해 병원에 입원시켰다”고 말했다. 안 씨는 2010년 범행 전 경남 창원의 대기업 공장에서 일했는데 회사에서 자기를 조직적으로 괴롭히고 위협한다는 피해망상을 A 씨에게 자주 호소했다. A 씨는 “안 씨가 회사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았고 2010년 사건도 조작된 거라며 자주 화를 내는 등 공격적 성향을 보였다”고 말했다. 안 씨는 2011년 10월 퇴원한 후에도 계속 통원 치료를 받았다. 당시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공감이나 이해 능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상태였다. 안 씨는 진료 중 “나를 따라붙는 사람이 있는 것 같다” “모여서 괴롭히는 사람들이 있기는 한데 전보다 줄었다”며 피해망상을 호소했다. 2015년 3월에는 굴착기 기사 자격증을 따서 일하고 싶다며 사회 복귀 의지를 보였다. 안 씨는 자격증을 따 현장에서 굴착기 기사 일을 배우기도 했다. A 씨가 2016년 6월 충청권의 다른 병원으로 옮겨가자 안 씨는 그해 7월 28일을 끝으로 병원에 오지 않았다. 마지막 진료 당시 안 씨는 바뀐 담당의에게 “약을 끊고 싶다”고 했다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왜 내 맘대로 약도 못 끊게 하느냐”며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고 한다. A 씨는 “안 씨 상태가 잘 유지됐으면 망상은 있었을지 몰라도 이렇게까지 되진 않았을 텐데…”라며 안타까워했다. 경찰은 안 씨가 범행 두세 달 전부터 흉기를 준비한 점으로 볼 때 치밀한 계획범죄라고 보고 있다. 안 씨는 18일 창원지법 진주지원에서 영장실질심사를 받기 전에 “10년 동안 기업체와 사회에서 여러 불이익을 당하다가 화가 많이 나서 그랬다”며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조사 좀 해 달라”고 외쳤다. 안 씨가 이날 구속되자 경찰은 신상공개위원회를 열고 얼굴과 이름 등 신상공개를 결정했다.진주=박상준 speakup@donga.com·이소연·강정훈 기자}

“자기처럼 몸 불편한 사람들을 돕고 싶어서 사회복지사가 되겠다고 했는데….” 경남 진주시 경상대병원 응급실에서 A 씨(31·여)는 이렇게 말하며 울먹였다. A 씨는 17일 오전 진주시 가좌동의 한 아파트에서 발생한 묻지 마 살인사건으로 목숨을 잃은 최모 양(19)의 사촌언니다. 1급 시각장애와 뇌병변 장애를 갖고 있던 최 양은 한쪽 눈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뇌병변으로 몸의 반쪽은 제대로 움직일 수 없었다. A 씨는 “노래와 그림을 좋아하던 아이였다. 최근에는 자기처럼 아픈 사람을 돕는 사회복지사가 되겠다고 했다. 꿈도 많고 욕심도 많은 아이였는데…”라며 눈물을 흘렸다. 최 양은 몸은 불편했지만 ‘아픈 게 전혀 티가 나지 않는 밝은 친구’였다고 유가족과 지인들은 입을 모았다. 초등학교 6학년 때인 2013년에는 전국장애학생체육대회에 나가 육상 종목에서 금메달을 두 개나 땄을 만큼 활동적이었다. A 씨에 따르면 당시 최 양은 대회가 있기 며칠 전부터 아파트 단지를 돌면서 훈련도 했다고 한다. 최 양은 숙모인 강모 씨(54)와 둘이 이 아파트에서 4세 때부터 함께 살았다. 부모가 이혼하면서 최 양을 보살필 사람이 마땅치 않게 되자 강 씨가 최 양을 거뒀다. 10년 넘게 회사 구내식당에서 일하며 혼자 최 양을 돌봤다. 한글을 쓰는 법부터 신호등을 보고 횡단보도 건너는 방법까지 가르쳤다. 강 씨도 이날 머리와 목, 등허리, 손 등을 흉기에 공격당해 중상을 입었다. 강 씨는 사고 직후 가족들이 부르는 소리에 ‘응’이라는 대답도 겨우 할 정도로 의사소통이 힘들었지만 정신을 차리자마자 최 양부터 찾았다고 한다. 강 씨의 언니(57)는 “눈 뜨자마자 ‘많이 다쳤는데 괜찮아?’라고 조카를 걱정하더라”며 “친자식도 그렇게 키우기는 힘들 것”이라고 말했다. 2명이 숨지고 2명이 부상을 입은 일가족도 있었다. 흉기로 공격당해 중상을 입은 차모 씨(41·여)의 딸 금모 양(12)과 시어머니 김모 씨(65)가 이날 목숨을 잃었다. 차 씨의 조카 염모 양(18)은 연기를 흡입해 경상을 입었다. 차 씨의 언니는 “(동생이)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보다 더 넓은 아파트에 당첨됐다며 좋아했다. 나와 같이 그 집을 보러 갔다 오기도 했는데 이렇게 딸을 보내다니 믿을 수가 없다”며 허망해했다. 차 씨의 오빠는 “조카가 곧 수학여행을 간다며 들떴었다”며 착잡해했다. 아파트 관리사무소에서 올해 3월부터 일한 수습사원 정모 씨(29)는 자신도 흉기에 공격당한 상황에서 주민들의 대피를 먼저 도왔다. 야간 당직이던 정 씨는 화재 직후 관리사무소에 울린 비상벨 소리를 듣고 아파트 단지로 달려갔다가 살인 피의자 안모 씨가 흉기 난동을 부리는 것을 보고 112에 신고했다. 정 씨는 안 씨가 휘두른 흉기에 얼굴을 다쳤지만 더 심한 부상을 입은 주민들을 구급차로 옮기는 것을 도왔다.진주=김재희 jetti@donga.com·이소연·강동웅 기자}
“3, 4년 전 일이라 기억나지 않는다. 홍남기 전 정책조정수석실 기획비서관이 기록했으니 홍 전 비서관에게 확인하라.”(이병기 전 대통령비서실장) “기억이 나지 않는다.”(안종범 전 대통령경제수석비서관) “회의록을 챙겨본 적이 없다.”(조윤선 전 대통령정무수석비서관) 세월호 참사 5주기인 16일 서울동부지법에서 열린 ‘4·16 세월호 특별조사위원회(특조위) 활동 방해 사건’ 재판에서 직권남용 권리행사방해 혐의로 기소된 이 전 비서실장과 안 전 경제수석, 조 전 정무수석 등 주요 피고인들은 증인신문을 통해 모두 혐의를 부인했다. 이날 재판에는 특조위 가동 3개월 뒤인 2015년 11월 홍 전 비서관이 작성한 ‘청와대 비서실장 주재 수석비서관(실수비) 회의 결과 보고서’와 강용석 전 청와대 해양수산비서관실 선임행정관의 업무수첩 등이 증거로 제시됐다. 이들 자료에는 ‘세월호 특조위에서 사고 당일 VIP(박근혜 대통령) 행적을 전원위원회에 조사 안건으로 상정·채택하려고 시도하고 있는데 이에 대해 해수부가 책임지고 대응, 제어할 것’ 등 청와대가 특조위 활동을 방해하려 한 정황이 담겨 있다. 또 ‘세월호 특조위가 청와대 대응 5개 사항(VIP 7시간 행적 포함)을 조사하는 내용의 안건을 전원위원회에 상정하는 것은 명백한 일탈, 월권 행위인 만큼 해수부를 중심으로 강력한 대응 조치를 취할 것(경제수석)’ 등의 표현도 있다. 이 전 실장은 이날 첫 증인으로 나와 “오늘이 4월 16일이다. 유명을 달리하신 분들의 명복을 빌고 유가족에게 위로의 말씀을 전한다”고 했다. 지난해 3월 시작된 이 재판은 35차례 공판을 거치며 1년 넘게 이어져 왔다. 김은지 eunji@donga.com·이소연 기자}
지난달 출산한 김모 씨(38)는 이달 초 서울의 자택에 폐쇄회로(CC)TV를 설치했다. 김 씨는 수유 때문에 새벽에도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 피곤한 날이 많지만 틈틈이 CCTV 영상을 돌려본다. 아이를 봐주는 산후조리사가 혹시 아이에게 해코지를 하지는 않을까 걱정이 돼서다. 충남 홍성군에서 출장 산후조리사로 일하는 임모 씨(58·여)는 3일 산모의 집 안 곳곳에 CCTV가 설치된 사실을 알게 됐다. 이 집에서 일한 지 일주일이 지난 임 씨가 처음 왔을 땐 CCTV가 없었다. CCTV는 부엌과 거실, 방 안에 설치돼 있었다. 임 씨는 자신을 감시하기 위해 CCTV를 설치해 놓은 것 같아 기분이 나빴다. 하지만 고용이 된 입장이라 따지지는 못했다. 14개월 된 남아를 폭행하는 영상이 1일 공개된 정부 아이돌보미 김모 씨(59·여)가 8일 구속됐다. 이른바 ‘금천구 아이돌보미 폭행사건’으로 알려진 이 사건 이후 베이비시터를 믿지 못하겠다는 부모들이 집 안 곳곳에 CCTV를 설치하는 사례가 많아지고 있다. 이로 인해 감시의 대상이 된 베이비시터들은 섭섭함과 불편함을 호소하기도 한다. 인천에 거주하는 이모 씨(31·여)는 금천구 사건 이후 불안한 마음에 일이 손에 잘 잡히지 않는다. 이 씨는 28개월 된 남자 아이의 엄마다. 이 씨는 집 안에 CCTV를 달고 싶어 한다. 하지만 일한 지 1년이 넘은 베이비시터가 기분 나빠 할까 봐 신경이 쓰인다. 이 씨는 “이제 와서 CCTV를 달겠다고 말하려니 미안하고 그렇다고 몰래 설치할 수도 없어 고민”이라며 “일단은 아이 몸에 상처나 이상 징후가 없는지 매일 확인하고 있다”고 말했다. 20개월 된 아이를 둔 이모 씨(32·여)는 금천구 사건이 알려진 이틀 뒤인 3일 집 안에 CCTV를 설치했다. 아이가 태어난 직후부터 돌봐준 베이비시터와는 각별한 사이지만 말 못하는 아이가 혹시라도 해코지를 당하지 않을까 불안해서다. 이 씨는 “(베이비시터) 얼굴을 보고는 말할 용기가 나지 않아 CCTV를 달았다는 말을 못 했다. 마음이 너무 불편하다”고 했다. 감시와 의심의 대상이 된 베이비시터들은 몸도 마음도 모두 불편하다. 서울 강남구의 한 가정에서 입주 베이비시터로 일하는 최모 씨(62·여)는 최근 일을 그만둬야 할지를 고민 중이다. 아이 부모가 집 안 곳곳에 CCTV를 설치하면서 최 씨의 침실에도 카메라를 단 것이다. 최 씨는 “방에서 옷을 갈아입을 때도 수건으로 몸을 가리고 갈아입는다”며 “‘내가 이 나이에 왜 이런 대접을 받아야 하나’라는 생각이 들어 짐 싸들고 나가고 싶은 마음”이라고 말했다. 서울 마포구에서 출장 베이비시터로 일하는 이모 씨(53·여)는 5일 퇴근 후 귀가한 아이 어머니에게서 핀잔을 들었다. 낮잠 자는 아이 옆에서 1시간 동안 눈을 붙였다는 게 이유다. 이 씨는 “1년간 일하면서 이런 적이 없었는데 ‘CCTV를 통해 감시하고 있다’는 걸 나에게 알리려고 그런 것 같다”며 “죄송하다고 사과하기는 했지만 서운해서 눈물이 났다”고 했다.김은지 eunji@donga.com·이소연 기자}

지난달 출산한 김모 씨(38)는 이달 초 서울의 자택에 폐쇄회로(CC)TV를 설치했다. 김 씨는 수유 때문에 새벽에도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 피곤한 날이 많지만 틈틈이 CCTV 영상을 돌려본다. 아이를 봐주는 산후조리사가 혹시 아이에게 해코지를 하지는 않을까 걱정이 돼서다. 충남 홍성군에서 출장 산후조리사로 일하는 임모 씨(58·여)는 3일 산모의 집 안 곳곳에 CCTV가 설치된 사실을 알게 됐다. 이 집에서 일한 지 한 달가량 되는 임 씨가 처음 왔을 땐 CCTV가 없었다. CCTV는 부엌과 거실 방안에 설치돼 있었다. 임 씨는 자신을 감시하기 위해 CCTV를 설치해 놓은 것 같아 기분이 나빴다. 하지만 고용이 된 입장이라 따지지는 못했다. 14개월 된 남아를 폭행하는 영상이 1일 공개된 정부 아이돌보미 김모 씨(59·여)가 8일 구속됐다. 이른바 ‘금천구 아이돌보미 폭행사건’으로 알려진 이 사건 이후 베이비시터를 믿지 못 하겠다는 부모들이 집 안 곳곳에 CCTV를 설치하는 사례가 많아지고 있다. 이로 인해 감시의 대상이 된 베이비시터들은 섭섭함과 불편함을 호소하기도 한다. 인천에 거주하는 이모 씨(31·여)는 금천구 사건 이후 불안한 마음에 일이 손에 잘 잡히지 않는다. 이 씨는 28개월 된 남자 아이의 엄마다. 이 씨는 집 안에 CCTV를 달고 싶어 한다. 하지만 일한 지 1년이 넘은 베이비시터가 기분 나빠할까 봐 신경이 쓰인다. 이 씨는 “이제 와서 CCTV를 달겠다고 말하려니 미안하고 그렇다고 몰래 설치할 수도 없어 고민”이라며 “일단은 아이 몸에 상처나 이상 징후가 없는지 매일 확인하고 있다”고 말했다. 20개월 된 아이를 둔 이모 씨(32·여)는 금천구 사건이 알려진 이틀 뒤인 3일 집 안에 CCTV를 설치했다. 아이가 태어난 직후부터 돌봐준 베이비시터와는 각별한 사이지만 말 못하는 아이가 혹시라도 해코지를 당하지 않을까 불안해서다. 이 씨는 “(베이비시터) 얼굴을 보고는 말할 용기가 나지 않아 CCTV를 달았다는 말을 못 했다. 마음이 너무 불편하다”고 했다. 감시와 의심의 대상이 된 베이비시터들은 몸도 마음도 모두 불편하다. 서울 강남구의 한 가정에서 입주 베이비시터로 일하는 최모 씨(62·여)는 최근 일을 그만둬야 할 지를 고민 중이다. 아이 부모가 집 안 곳곳에 CCTV를 설치하면서 최 씨의 침실에도 카메라를 단 것이다. 최 씨는 “방에서 옷을 갈아입을 때도 수건으로 몸을 가리고 갈아입는다”며 “‘내가 이 나이에 왜 이런 대접을 받아야 하나’라는 생각이 들어 짐 싸들고 나가고 싶은 마음”이라고 말했다. 서울 마포구에서 출장 베이비시터로 일하는 이모 씨(53·여)는 5일 퇴근 후 귀가한 아이 어머니한테서 핀잔을 들었다. 낮잠 자는 아이 옆에서 1시간 동안 눈을 부쳤다는 게 이유다. 이 씨는 “1년간 일하면서 이런 적이 없었는데 ‘CCTV를 통해 감시하고 있다’는 걸 나한테 알리려고 그런 것 같다”며 “죄송하다고 사과하기는 했지만 서운해서 눈물이 났다”고 했다. 김은지 기자 eunji@donga.com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서울 강남 클럽 ‘아레나’ 실소유주로 알려진 강모 씨(46·구속)가 운영했던 또 다른 클럽을 이름만 바꿔 강 씨 측근이 재개장을 앞두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아레나를 포함해 강남 일대에서 유흥업소 16곳을 운영하며 ‘유흥업계 황제’로 불렸던 강 씨는 160억 원대의 세금을 포탈한 혐의로 26일 구속됐다. 지난해 말 문을 닫은 강남구 논현동의 클럽 ‘바운드’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등을 통해 4월 5일 ‘레이블’이라는 이름으로 재개장한다고 알렸다. 레이블의 대표 김모 씨는 아레나에서 4년간 테이블 거래를 총괄하는 조판장을 맡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레이블이 문을 열게 될 논현동 한 빌딩의 지하 1층 건축물 관리대장을 보면 전체 약 630m² 중 436m²는 위락시설로, 194m²는 근린시설로 신고돼 있다. 클럽 내 테이블 배치도를 보면 레이블은 지하 1층 전체에 50여 개의 테이블을 놓고 영업할 것으로 보인다. 지하 1층 전체를 손님들이 술을 마시고 춤을 출 수 있는 위락시설로 사용할 것으로 보이는데 일부 면적은 근린시설로 신고한 것이다. 위락시설로 신고된 면적에는 근린시설에 비해 16배가량 많은 재산세가 중과세된다. 클럽 바운드도 이런 방식으로 내야 할 세금을 줄인 것으로 전해졌다. 바운드는 관할 구청에 290m²만 유흥업소로 사용한다고 신고했다. 영업장 크기를 실제보다 절반 이상 줄여 신고한 것이다. 강남 일대 클럽 관계자들에 따르면 바운드는 영업 당시 지하 1층 전체를 사용했다고 한다. 레이블은 또 테이블 매출액 중 MD(영업직원)에게 떼어주는 돈인 일명 ‘와리’의 비율을 카드 계산 때는 14%, 현금 계산 때는 17∼18%로 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MD가 자신들에게 떨어지는 와리 액수를 높이기 위해 손님들한테 현금 결제를 유도하게 하는 방식이다. 아레나도 이런 식으로 영업을 했다. 레이블은 클럽의 매출이 많은 날에는 MD들에게 현금으로 수당을 지급하는 일명 ‘파티 셰어(Party Share)’도 할 것으로 보인다. MD들에게 현금으로 지급하는 수당을 부풀려 신고해 매출 규모를 줄이면 과세 대상액을 줄일 수 있는데 강남 일대 클럽들이 이런 방법을 많이 쓴다고 한다. 강남 클럽 ‘버닝썬’ 사건이 불거진 이후인 이달 7일 영업 중단 사실을 알렸던 아레나는 클럽 이름을 ‘심포니’로 바꾸고 다시 문을 열 예정이다. 심포니 역시 아레나에서 일했던 강 씨 측근이 대표를 맡는 것으로 전해졌다. 윤다빈 empty@donga.com·이소연 기자}

서울 송파구에 거주하는 안모 씨(43·여)는 지난달 외동딸(6)이 다니던 사립유치원으로부터 문자메시지를 한 통 받았다. 유치원이 곧 문을 닫는다는 내용이었다. 3월 5일 폐원한 이 유치원은 놀이학원으로 바뀌었다. 그러면서 유치원일 때 월 40만 원이던 원비를 약 60만 원으로 올렸다. 교육과정과 교사당 학생 수는 달라진 게 없는데 원비만 오른 것이어서 안 씨는 아이를 놀이학원에 보내지 않기로 했다. 안 씨는 아이를 인근 사립유치원에 보내려 했지만 지원자가 몰려 대기번호를 받아놓고 기다리는 중이다. 당분간은 아이를 직접 돌봐야 하는 상황이다. 한국유치원총연합회(한유총)는 이른바 ‘유치원 3법’을 반대하는 과정에서 “폐원은 없다”고 밝혔다. 26일 선출된 김동렬 한유총 신임 이사장은 “아이들을 볼모로 한 휴·폐원은 절대 하지 않겠다”고 했다. 하지만 유치원 일선 현장의 상황은 다르다. 서울 동작구의 한 사립유치원은 지난해 12월 학부모들에게 폐원하지 않겠다고 통보했지만 한 달 뒤 기습적으로 폐원을 결정했다. 본보가 서울지역 11개 교육지원청 관내 유치원 폐업 현황을 확인한 결과 올해 들어 문을 닫은 사립유치원이 37곳(3월 26일 기준)인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 한 해 동안 서울지역에서 폐원한 사립유치원이 27곳인 것과 비교하면 크게 늘어난 수치다. 폐원을 준비 중인 곳도 있어 문을 닫는 유치원은 더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폐원한 사립유치원 중 일부는 학원이나 영어유치원으로 업종을 바꾼 뒤 원비를 올려 받고 있다. 서울 서초구의 한 유치원은 폐원 인가 결정이 난 이달 4일 이후 일명 ‘영어유치원’으로 불리는 어학원으로 바뀌었는데 원아를 모집하면서 유치원 때 월 30만 원 정도이던 정규반 원비를 100만 원대로 올렸다. 서울 성동구의 하모 씨(44·여)도 둘째 딸아이가 다니던 사립유치원이 이달 5일 폐원하고 업종을 학원으로 바꾼 경우다. 유치원비는 월 50만 원이었는데 학원비는 약 80만 원이다. 하 씨는 “원비는 올랐지만 가르치는 내용은 이전과 큰 차이가 없다. 다른 유치원으로 보내고 싶은데 자리가 없어 어쩔 수 없이 다니고 있는 상황”이라며 “딸 셋을 키우는 전업주부 입장에서는 교육비 부담이 크다”고 말했다. 학부모들 사이에선 ‘내년이 더 걱정’이라는 반응도 나온다. 폐원에 따른 유치원 감소로 입학 경쟁이 더 치열해질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서울 강동 송파지역은 올 들어 사립유치원 6곳이 문을 닫았는데 송파구의 한 유치원의 경우 5세 아동 30∼40명이 대기번호를 받아놓고 입학을 기다리고 있다. 둘째 아이(5)가 어린이집에 다니고 있는 김모 씨(37·여)는 “작년에 사립유치원 자리가 없어 첫째 아이(6)를 월 150만 원을 주고 영어유치원에 보낼 수밖에 없었다”며 “내년에 둘째 아이까지 이렇게 되면 부담이 너무 크다”고 토로했다. 사립유치원 측은 국회와 정부가 추진 중인 유치원 3법 개정과 이달 1일부터 시행에 들어간 ‘유치원 공공성 강화 방안 시행령’이 폐원과 업종 변경을 부추긴다고 주장한다. 국회에 계류 중인 유치원 3법 개정안에는 이사장과 유치원장의 겸직을 금지하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 시행령에 따르면 원아 200인 이상 사립유치원은 교육부에 회계 내용을 신고하는 ‘국가관리회계시스템(에듀파인)’을 사용해야 한다. 사립유치원이 학원으로 업종을 바꾸면 유치원 3법과 에듀파인 적용 대상에서 제외된다.이소연 always99@donga.com·윤다빈 기자}

지난달 3일 서울 강남의 유명 클럽 ‘아레나’를 찾은 이모 씨(22·여)는 한 남성이 건넨 술을 한 잔 마시고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이 씨는 자신이 마신 술에 일명 ‘물뽕’으로 불리는 마약류 감마하이드록시낙산(GHB)이 들어 있었던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이 씨는 클럽 직원을 불러 “나에게 술을 건넨 사람의 정확한 얼굴을 폐쇄회로(CC)TV로 확인하고 싶다”고 했다.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CCTV가 없다”는 것이었다. 이 씨는 “CCTV가 없으니 어차피 못 잡을 것 같아 신고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 클럽에서는 지난해 10월 초 A 씨(28·여)가 ‘내 가슴을 만졌다’며 한 남성을 고소한 일이 있었다. 하지만 이 남성은 증거불충분으로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 CCTV가 없어 A 씨의 성추행 피해를 입증할 영상이 없었고 당시 상황을 목격한 증인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레나 직원 이모 씨(23)는 “CCTV가 없어 일이 터져도 확인하기가 어렵다”고 했다. 경찰이 서울시내 클럽 내에서의 마약 투약과 유통, 성폭행 의혹 등에 대해 수사를 벌이고 있는 가운데 아레나 내부에 CCTV가 한 대도 설치돼 있지 않아 범죄의 사각지대가 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서울지방경찰청이 바른미래당 하태경의원실에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최근 1년간 아레나 관련 112 신고는 모두 219건으로 폭행 66건, 성추행·불법 촬영·성폭력을 비롯한 성범죄 사건 31건, 마약 의심 신고 2건 등이었다. 하지만 이 가운데 현행범 체포로 이어진 건 7건뿐이다. CCTV가 없다 보니 피해자가 직접 목격자를 찾아 나서기도 한다. 이모 씨(26·여)는 2017년 12월 2일 오전 5시경 아레나에서 한 남성에게 유리잔으로 머리를 맞았다. 남성의 일방적인 폭행이었지만 남성은 경찰에게 쌍방폭행이라고 주장했다. 이 씨는 억울한 마음에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글을 올렸고 다행히 당시 상황을 목격한 B 씨(22)가 증언을 해주면서 폭행 혐의를 벗을 수 있었다. 경찰 관계자는 “성추행처럼 직접 증거를 찾기 힘든 범죄는 CCTV 증거가 결정적인데 영상이 없으면 수사가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윤다빈 empty@donga.com·이소연 기자}

2017년에 운전면허를 처음 딴 사람 중 75세 이상은 4481명이었다. 2015년 3123명에서 크게 늘었다. 빠른 속도로 진행되는 고령화에 따라 앞으로도 계속 증가할 것으로 예상되는 고령 운전자들의 운전 능력 여부를 엄격하게 따져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14일 경찰청에 따르면 올해 운전면허 정기 적성검사를 받아야 하는 75세 이상 운전자는 19만4701명이다. 경찰은 75세 이상 정기 적성검사 대상자가 내년에는 20만177명으로 증가하고, 2022년에는 40만 명, 2023년에는 50만 명을 넘어설 것으로 보고 있다. 운전면허 정기 적성검사 결과를 보면 75세 이상 고령 운전자는 20, 30대에 비해 시력은 20% 이상, 청력은 30% 이상 떨어지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하지만 12일 서울 강남구에서 행인 이모 씨(30·여)를 치어 사망사고를 낸 96세 운전자 유모 씨는 지난해 시력과 청력 등 기초적인 신체검사로 구성된 적성검사를 통과했다. 이 씨의 고모부 이모 씨(53)는 14일 발인을 앞두고 “고령 운전자가 많아지는데 적성검사는 느슨한 점이 많다. 검사를 엄격히 실시해야 한다”고 말했다. 고령 운전자에 의한 교통사고를 줄이기 위해 올해부터 75세 이상 운전자는 운전면허증 갱신을 위한 적성검사 주기가 5년에서 3년으로 짧아졌다. 경찰청은 적성검사 주기 단축과 함께 75세 이상 운전자들이 적성검사 때 교통안전 교육도 반드시 받도록 했다. 이 교육에 포함된 1시간의 인지기능검사를 통해 운전이 가능할 정도의 기억력과 변별력, 주의력 등을 유지하고 있는지를 확인한다. 올 1월에 75세 이상 운전자 4653명이 정기 적성검사를 받았는데 이 중 1607명(34.5%)이 재검사 판정을 받았다. 이 중 1585명은 재검사에서 적합 판정을 받았지만 18명은 사실상 불합격인 수시 검사 판정을 받았다. 치매와 유사한 증상을 보여 정상적인 운전이 어렵다고 본 것이다. 수시 검사 판정을 받은 이들은 의료기관 등에서 장애나 질병 관련 내용이 경찰청으로 통보될 때마다 검사를 받아야 한다. 하지만 치매 의심 증상 등을 보여 재검사에서 적합 판정을 받지 못해도 운전면허를 강제로 박탈할 수 없다. 인구 고령화로 75세 이상 운전자에 대한 관리 강화에 나선 일본은 고령 운전자가 간이 치매검사에서 불합격할 경우 의사의 진단 결과가 포함된 서류를 경찰에 제출하도록 했다. 치매가 진단되면 경찰 직권으로 면허를 말소한다. 뉴질랜드는 80세가 넘으면 자동으로 모든 운전자의 면허를 취소하고 재검증을 거친 사람에게만 면허를 다시 발급해 준다. 한국 경찰청도 인지기능검사에서 수시 검사 판정을 받은 고령 운전자의 면허를 정지하거나 취소할 수 있도록 도로교통법 개정 등을 검토 중이지만 고령 운전자들의 반발에 막혀 있다. 각 지방자치단체에는 고령 택시운전사에 대한 불안감을 호소하는 민원이 이어진다. 하지만 고령자의 운수업계 취업을 제한할 근거가 없다. 그나마 65세 이상은 3년, 70세 이상은 매년 자격유지검사를 받도록 한 여객자동차운수사업법 시행규칙이 13일부터 시행돼 이 검사에서 탈락한 운전자는 택시를 몰 수 없도록 했다. 고령 운전자의 면허증 반납을 유도하려는 지자체도 늘고 있다. 서울시의회 더불어민주당 송도호 의원은 지난달 31일 고령 운전자 교통사고 예방을 위한 서울시 지원 조례안을 발의했다. 조례안이 시의회를 통과하면 서울시는 65세 이상 운전자가 면허를 반납할 경우 10만 원 상당의 교통카드를 지급한다. 부산시와 서울 양천구 등이 이런 제도를 두고 있다.서형석 skytree08@donga.com·이소연 기자}

13일 서울 광진구의 한 장례식장에 차려진 이모 씨(30·여)의 빈소. 검은색 상복을 입은 이 씨의 어머니가 딸의 영정을 바라보며 울고 있었다. 이 씨의 두 살 터울 남동생은 입을 꾹 다문 채 어머니의 손을 붙잡고 있었다. 외국계 금융회사에서 일하던 이 씨는 12일 오후 6시 15분쯤 서울 강남구 청담동에서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에 치여 목숨을 잃었다. 퇴근하던 중이었다. 사고 차량 운전자는 96세의 남성이었다.○ ‘고령 운전자’ 사고 해마다 증가 지난해 12월 부산에서는 70대 후반의 운전자가 후진 도중 가속 페달을 브레이크로 착각해 햄버거 가게 유리문을 부수고 매장 내 카운터 앞까지 돌진하는 사고가 있었다. 앞서 작년 11월 경남 진주에서는 승용차 한 대가 병원 입구 유리문을 들이받고 안내 데스크 앞까지 돌진하는 사고가 났다. 운전자는 역시 70대였다. 이 사고가 나기 하루 전 경남 창원에서도 80대가 운전대를 잡은 승용차가 병원 현관 유리문을 들이받고 로비까지 진입하는 일이 있었다. 65세 이상 고령 운전자에 의한 교통사고가 해마다 늘고 있다. 2014년 2만275건이던 고령 운전자 교통사고가 지난해 2만7260건(1∼11월)까지 증가했다. 4년 새 35%가량 늘어난 수치다. 전체 교통사고에서 65세 이상 고령 운전자 사고가 차지하는 비율도 2016년 두 자릿수(11%)로 올라선 뒤 2017년 12.3%를 기록했다. 13일 사망사고를 낸 SUV 운전자 유모 씨는 이날 오후 경기 성남의 집에서 사고 장소인 청담동의 한 호텔까지 직접 차를 몰았다. 이동 거리는 약 20km였다. 유 씨는 호텔 주차장으로 들어서려다가 담벼락을 한 차례 들이받고 이후 후진하면서 주차돼 있던 다른 차량과 이 씨를 차례로 치었다. 경찰에 따르면 유 씨는 이 씨를 친 뒤로도 곧바로 속도를 줄이지 못한 것으로 전해졌다. 경찰 관계자는 “(유 씨가) 후진 기어 상태에서 가속 페달을 밟은 것으로 보인다”며 “운전자가 자신의 실수를 시인했다”고 말했다. 경찰은 유 씨를 교통사고처리특례법 위반(과실치사) 혐의로 불구속 입건했다. ○ “고령 운전사 택시 타면 불안” 지난해 7월 기준으로 65세 이상 고령 택시 운전사는 모두 7만2800명. 이는 전체 택시 운전사의 27.1%에 해당하는 수다. 80세 이상이 770명이고, 그중 90세 이상의 택시 운전사가 237명이나 된다. 대기업 임원 노모 씨(59)는 “가끔 택시를 타면 운전 중에 졸거나 기기 조작을 헷갈려하는 고령의 운전사를 본 적이 있는데 불안해 중간에 내린 적도 있다”고 했다. 고령 운전자에 의한 교통사고가 우리나라만의 문제는 아니다. 초고령사회에 진입한 일본에서는 75세부터 고령 운전자로 분류해 관리하고 있는데 2007년 8.2%였던 전체 사망사고 중 고령 운전자에 의한 사망사고 비율이 2017년엔 12.9%를 기록했다. 영국에서도 최근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부군 필립 공(98)이 운전 중 맞은편 차량을 들이받아 2명을 다치게 하는 사고로 고령 운전에 대한 논란이 일었다. 필립 공은 이번 사고를 계기로 “운전면허를 반납하겠다”고 선언했다. 부산시와 서울 양천구 등이 운전면허를 자진 반납하는 고령자에게 교통비 등을 지원하는 제도로 고령 운전자 감소를 유도하고 있다. 하지만 국가적 차원에서의 지원은 예산 문제 등으로 아직 시행되지 못하고 있다. 올 1월부터는 75세 이상 운전자에 대해 운전면허 적성검사 기간을 5년에서 3년으로 줄이고 교통안전 교육도 받도록 했다. 일본은 1998년부터 운전면허 반납 고령 운전자에게 교통비를 지원하거나 헬스장을 포함한 지역 시설 이용 할인권을 제공하는 등의 지원책을 전국적으로 시행하고 있다. 서형석 skytree08@donga.com·이소연 기자}

7일 경기도의 한 대안학교에서 만난 김인희(가명·18) 양은 본보 기자와 마주 앉은 자리에서 입을 굳게 다문 채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김 양은 어머니가 탈북민이어서 한국 국적을 얻었지만 한국말은 하지 못한다. 중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김 양은 지난해 4월 한국에 왔다. 한국어 수업 시간에는 엎드려 잠만 잔다. 수업이 끝난 뒤에는 중국 소설을 보며 시간을 보낸다. 연락도 중국에 있는 친구들과만 한다. 김 양은 아버지가 중국인이다. 2001년 북한을 탈출한 어머니가 중국에 머물 때 아버지와 결혼했다. 주모 양(18)은 2017년 서울의 한 아파트 9층에서 투신을 했다. 다행히 목숨은 건졌지만 하반신이 마비되는 중상을 입었다. 주 양은 “엄마는 돈을 벌어야 한다며 매일 밤늦게 집에 왔다. 엄마가 한국어를 빨리 배우라고 재촉해 순간 너무 화가 났다”고 말했다. 2015년 7월 한국에 온 주 양 역시 김 양과 같은 ‘제3국 출생 탈북민 자녀’다. 어머니가 탈북민이고 아버지는 중국인이다. 김 양과 주 양의 경우처럼 ‘제3국 출생 탈북민 자녀’ 대부분은 열 살이 지나 한국 땅을 밟는다. 어머니가 먼저 한국에 정착한 뒤에야 자녀를 데려오기 때문이다. 이미 청소년기에 이른 이들은 한국어를 배우는 데 애를 먹는다. 한국문화도 낯설다. 중국인인지 한국인인지 정체성 혼란도 겪는다. 어머니가 한국에서 재혼하는 경우도 적지 않아 새아버지와 불화를 겪는 일도 있다. 북한에서 태어난 탈북민 자녀를 위한 정부 지원도 이들에겐 제공되지 않는다. 입국과 동시에 ‘3등 시민’이 되는 것이다. “한국인인지, 중국인인지 정체성 혼란”… 새아빠 집에선 ‘유령 아이’본보 취재팀이 만난 ‘제3국 출생 탈북민 자녀’ 30여 명은 “한국에 적응하는 게 너무나 힘겹다”며 그간의 험난했던 경험들을 털어놨다. 이들은 15∼21세의 청소년 또는 성인이지만 상당수가 한국말을 못 해 인터뷰는 중국어 통역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국적만 한국인일 뿐 사실상 중국인으로 살고 있는 제3국 출생 탈북민 자녀는 최소 1720명이다. 정부가 지난해 12월 집계한 국내 초중고교와 대안학교 재학생 수다. 2011년 608명에서 7년 새 두 배 이상으로 늘었다. 학교 교육을 받지 않거나 이미 졸업한 경우도 많아 실제로는 이보다 더 많을 것으로 보인다. ○ 다 커서 한국 왔는데 가정에선 방치 17세 때 한국에 온 이진호(가명·20)씨는 2016년 입국 직후부터 모텔에서 생활했다. 탈북민인 어머니가 한국에서 재혼할 때 시댁에 아들의 존재를 숨겼기 때문이다. 이 씨는 모텔에 방치된 채 학교에도 가지 못하고 상당 기간 거의 혼자 지냈다. 이 씨는 분노조절 장애를 갖게 됐고 깨진 유리병으로 자해를 하는 등 이상행동을 했다. 이 씨는 지난해 1월 탈북민 대안학교에 입학했지만 과격한 행동을 보여 3개월 만에 퇴학당했다. 경기도의 한 대안학교에 다니는 채모 군(15)은 수업 도중 갑자기 일어나 교실을 돌아다니는 등 불안증세를 보인다. 채 군은 인신매매를 통해 어머니와 결혼한 중국인 아버지에게서 어릴 적부터 폭행을 당했다. 먼저 한국에 들어왔던 채 군 어머니는 2017년 아들을 돌봐줄 사람을 구할 수 없어 중국인 남편도 함께 입국시켰다. 채 군의 담임교사는 “한국에서도 아버지의 폭력이 이어지고 있다. 아이를 칭찬해주려고 어깨를 만질 때도 몸을 피한다”고 전했다. 채모 양(17)은 2017년 한국에 들어오자마자 영유아인 동생 둘을 떠맡게 됐다. 먼저 한국에 온 어머니가 재혼을 해 두 아이를 낳았지만 새아버지가 가출해버린 것. 어머니마저 또 다른 남자와 동거를 하게 돼 육아는 채 양의 몫이 됐다. 채 양은 43m²(약 13평) 남짓한 임대주택에서 어린 두 동생을 돌보느라 6개월 넘게 집 밖을 나가지 못했다. 뒤늦게 학교에 입학했지만 한국말을 하지 못해 친구를 사귀지 못했다. 채 양은 “중국인 친구들과 하루 종일 모바일 메신저로 연락하며 외로움을 달랜다”고 말했다.○ 대입 특례전형도 없어 일부 제3국 출생 탈북민 자녀들은 한국어를 익힌 뒤 대학에 가기 위해 노력하지만 걸림돌이 많다. 북한에서 태어난 탈북민의 경우 대입 특례전형이 마련돼 있지만 제3국 출생 탈북민 자녀를 위한 별도의 대입 전형은 없다. 한국 학생들과 똑같이 경쟁해야 하는 처지다. 지난해 대입 검정고시를 본 김모 씨(20·여)는 “19세 때까지 중국 역사를 공부하다가 지난해 처음 한국사 책을 보게 돼 모든 게 낯설었다. 국어는 중국에서 배운 조선어와 많이 달라 거의 새로 공부해야 했다”고 했다. 2015년 한국에 온 이모 씨(21)는 대학 입학을 위해 1년 반 만에 대입 검정고시에 합격했고, 정보기술 자격증까지 땄다. 이 씨는 2017년 서울의 한 대학 ‘사회적 배려 대상자 전형’에 응시하려 했으나 이 씨의 검정고시 등급은 다른 한국 학생들에 비해 크게 낮았다. 암 투병 중인 아버지의 치료비 때문에 등록금을 내기도 어려웠다. 이 씨는 결국 대입을 포기하고 직업학교를 택했다. 탈북민은 ‘북한이탈주민 지원법’에 따라 정착금 지원과 정원 외 대학 특례입학, 등록금 면제 등의 혜택을 받지만 이 씨 같은 제3국 출신 탈북민 자녀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 통일부는 이들을 위한 별도의 대입 전형을 마련하라고 각 대학에 권고했지만 이를 대학이 받아들인 사례는 없다.○ “한국말도 못하는데” 입영통지 받고 불안 제3국 출생 탈북민 자녀 중 만 18세 이상 남성은 군 입대 대상이다. 이들 중 상당수가 입영 통지를 받은 뒤 불안감에 시달리고 있다. 2013년 입국한 이모 씨(20)는 지난달 대안학교 교사에게 ‘쌤, 저 죽고 싶어요. 어떻게 해야 이 마음이 없어지나요?’라는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이 씨는 “한국말도 잘 못하고 돌봐야 할 동생도 있는데 군대를 가야 한다니 걱정이 많이 됐다”고 말했다. 지난해 11월 병무청 신체검사를 받은 최모 씨(20)는 “군대에서는 한국말로만 생활해야 하는데, 내가 모르는 단어가 많아 불안하다. 한국 군대는 엄격해서 내가 모르는 걸 쉽게 물어볼 수 없다고 하는데 (고참들에게) 많이 혼날까 봐 무섭다”고 토로했다. 지난해 한국에 온 방모 씨(20) 역시 “무조건 복종해야 하는 한국의 군대 문화가 이해가 안 된다. 군대에서 왕따당하는 것 아닐지 걱정”이라고 말했다. 정체성 혼란도 문제다. 중국에서 고등학교까지 마친 뒤 지난해 2월 입국한 박모 씨(20)는 한국에 온 뒤에도 중국 친구들과만 교류한다. 박 씨는 “지난 1년간 한국 사람과 대화를 나눠본 적이 없다. 한국에 계속 살아야 해 국적은 유지하겠지만 내가 한국인인지는 잘 모르겠다”고 말했다. 현행 병역법상 북한 출생 탈북민이거나 외국 국적자였다가 한국인으로 귀화한 경우 군복무가 면제된다. 중국 등 제3국에서 태어난 탈북민 자녀는 이 요건에 해당하지 않아 한국 국적을 취득하면 병역 의무를 지게 된다. 국내 다문화가정 출신 청년들도 군복무를 하지만 대부분 한국에서 태어나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의사소통이 원활하고 문화적 이질감도 작다. 한국인이라는 정체성도 강한 편이다. 국방부 관계자는 “다문화가정 출신 병사들 가운데 그동안 문제가 됐던 사례는 없다”고 전했다. 천주교 광주대교구 북한이탈주민지원센터 소민윤 회장은 “제3국 출생 탈북민 자녀들이 지금 상태로 입대할 경우 관심병사가 될 가능성이 높다. 대체복무나 별도의 부대 편성 등 보완이 필요하다”고 말했다.윤다빈 empty@donga.com·이소연 기자}

“아세안(ASEAN·동남아시아국가연합) 국가로 가라고요? 현지 사정을 너무 모르시네요. 저는 다른 사람들에게 동남아시아 취업을 추천하고 싶지 않아요.” 동남아시아 국가에 취업했던 김모 씨(28·여)는 김현철 전 대통령경제보좌관의 ‘젊은이들은 헬조선이라고 하지 말고 동남아로 가라’는 발언을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김 씨는 2016년 1월 고용노동부의 청년 해외취업 지원 프로그램 K-Move 스쿨을 통해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의 한 유통업체에 취업했지만 8개월 만에 회사를 그만뒀다. 하루 12시간씩, 1주일에 6일을 근무하는데도 월급은 120만 원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김 씨는 직장을 구하기 위해 인도네시아의 다른 회사 면접을 보는 자리에서 한국인 사장에게 ‘취업 비자를 발급해 달라’고 요구했다가 “돈 많은 남자 만나서 비자를 받으라”는 황당한 말을 들어야 했다. 또 다른 회사 면접 때는 역시 한국인 사장에게서 “집에서 키우는 개도 돌봐줄 수 있냐”는 질문을 받았다. 김 씨는 이후 말레이시아의 정보기술(IT) 업체로 이직했지만 현지의 한국인 법인장이 공금을 횡령해 회사가 문을 닫았다. 김 씨는 결국 2017년 2월 한국으로 돌아왔다. 고용부에 따르면 베트남 인도네시아 필리핀 태국 등 아세안 국가에 취업한 청년(15∼34세)은 2014년 444명에서 2018년 1283명으로 4년 새 크게 늘었다. 베트남의 한 호텔에서 호텔리어로 근무하는 박모 씨(25)는 “연봉으로 2400만 원을 받는데 수당도 없이 주 6일을 일하고 성수기에는 일주일 내내 근무한다”고 말했다. 한국외국어대 동남아연구소 관계자는 “10∼15년 전만 해도 근무 여건이 좋았지만 동남아에서 직장을 구하는 한국인이 많아지면서 모든 조건이 하향 조정됐다”며 “평균 임금은 한국의 70∼80% 수준”이라고 말했다. 동남아에 취업한 청년들은 한국 기업의 현지 법인이나 한국인이 사장으로 있는 업체에 입사해 중간관리자 역할을 맡는 경우가 많다. 인도네시아에서 근무하는 윤재영 씨(29)는 “실무 경험이 없는 (나 같은) 신입사원이 직원이 1만 명이나 되는 공장의 안전까지 책임지는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베트남 하노이의 한 공장에서 일하는 김모 씨(26)는 “중간관리자를 고용한다며 청년을 뽑고, 대우는 신입사원 수준인데 업무량은 과장 수준”이라고 말했다. 2016년 필리핀의 디자인 회사에서 일한 이모 씨(28)는 1개월짜리 관광비자의 만료 기간이 다가오자 회사가 해고를 통보했다. 이 씨는 “사장이 나를 부르더니 ‘일거리가 없으니 나가달라’고 했다”며 “취업비자를 발급받으려면 1년에 150만 원이 드니까 단물만 빼먹고 버린 것이다. 비슷한 시기에 내 또래 친구 6명도 같은 이유로 해고됐다”고 말했다. 취업비자 발급에 드는 비용을 아끼기 위해 관광비자로 입국시킨 청년들을 일단 고용해 일을 시킨 뒤 비자 만료 시기가 다가오면 해고해 버리는 것이다. 정부가 동남아시아 국가 취업을 위해 벌이는 청년지원 사업에 허점이 많다는 지적도 나온다. 정모 씨(32)는 지난해 10월 고용부에서 운영하는 ‘월드잡’ 홈페이지를 통해 4대 보험과 퇴직금을 보장해준다는 베트남의 한 물류업체에 취업했다. 하지만 입사 3일 만에 사장은 “홈페이지에만 그렇게 올렸다. 4대 보험, 퇴직금을 안 주는 건 당연하지 않냐”고 말을 바꿨고, 정 씨는 취업한 지 일주일 만에 회사를 그만뒀다. 이런 이유 때문에 동남아시아 국가에 취업한 청년들 중 절반 가까이가 3년을 넘기지 못하고 한국으로 다시 돌아오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이소연 always99@donga.com·윤다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