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운

김상운 기자

동아일보 국제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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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와 학술 분야를 취재하고 있습니다. 단행본 ‘국보를 캐는 사람들’(글항아리)을 냈고, 고고학 유튜브 채널 ‘발굴왕’을 제작했습니다. 동아시아 역사에 관심이 많습니다.

sukim@donga.com

취재분야

2025-11-05~2025-12-05
칼럼48%
문학/출판17%
역사10%
미술7%
국제일반3%
중동3%
미국/북미3%
국제정세3%
문화 일반3%
대통령3%
  • [책의 향기]독일인들은 왜 유대인 학살에 동조했나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동부전선. 1942년 6월 휴가를 나온 독일군 병사 발터 카슬러는 유대인 학살에 대해 매형과 대화하며 “우리가 유대인이 아니라는 사실이 얼마나 다행인가. 나도 처음에는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건 우리가 죽느냐 사느냐가 걸린 문제”라고 말했다. 이를 듣고 있던 매형이 “하지만 그건 살인이다”라고 반박하자, 발터는 한마디로 모든 대화를 종결했다. “확실한 건 우리가 패배하면 그들은 우리가 그들에게 행했던 바로 그걸 우리에게 행할 거라는 사실이다.” 영국 옥스퍼드대 사학과 교수이자 나치 연구 권위자인 저자는 2차 대전 당시 독일인들이 교환한 편지 약 2만5000통과 각종 일기, 공문서 등 광범위한 자료를 들여다보며 히틀러를 지지했던 평범한 독일인들의 심리를 파헤쳤다. 이들에게 2차 대전은 침략전쟁이 아닌 독일 민족을 방어하기 위한 종말론적 전쟁으로 여겨졌다는 것. 흥미로운 건 전쟁 당시 독일인들이 홀로코스트에 대해 쉬쉬했을 거라는 통념과는 달리 많은 이들이 이를 알고 대화를 나눴다는 사실이다. 이는 선전 선동의 대가였던 요제프 괴벨스가 유대인 학살 정보를 언론을 통해 넌지시 내비친 데 따른 것이었다. 대중매체를 통해 주입된 정보가 다수의 견해와 배치되면 결국 침묵하게 된다는 ‘침묵의 나선 효과’가 작용했다는 게 저자의 시각이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24-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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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일본은행은 왜 아베노믹스의 수족이 됐나

    ‘Keeping at it(긴축 지속으로 버티기).’ 대표적인 인플레이션 파이터인 폴 볼커 전 미 연방준비제도(FRB) 의장의 회고록 제목은 의미심장하다. 주가와 집값을 결정하는 기준금리 인상을 밀어붙이는 건 지난한 일이다. 금리가 오르면 주가와 집값이 떨어지고, 이는 선거에서 집권 여당의 패배로 이어지기 십상이다. 세계 주요국이 중앙은행의 정부로부터 독립을 규정한 이유다. 그러나 현실과 이상의 괴리는 늘 존재한다. 일본의 경제 전문 언론인인 저자는 1990년대 이래 일본의 ‘잃어버린 30년’(장기 침체) 동안 일본은행(일은)의 움직임을 면밀히 추적했다. 대규모 양적 완화와 재정 지출로 경기를 부양하려고 한 아베노믹스의 핵심에 일은이 있었기 때문이다. 일은은 마이너스 금리 정책을 펼치기 위해 대량의 국채는 물론이고 상장지수펀드(ETF)까지 매입했다. 문제는 아베노믹스의 경기 부양이 단기에 그친 가운데 막대한 공공부채라는 시한폭탄을 남겨 놓았다는 것. 저자는 일은이 양적 완화의 첨병이 된 과정을 설명하며 중앙은행의 독립적인 금리 결정을 보장한 1998년 일은법 개정 과정을 영화의 한 장면처럼 자세히 그리고 있다. 당시 대장성(현 재무성) 관료와 자민당 정치인, 일은 부총재의 행적을 시시각각 쫓으며 정치권이 비대해진 대장성의 권한을 축소하는 과정에서 일은법 개정이 추진됐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본질이 전도된 중앙은행 독립은 아베노믹스로 나아가는 시발점이 됐다는 게 저자의 시각이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24-0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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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양안 전쟁이 한반도에 미칠 영향은[김상운의 빽투더퓨처]

    지난달 대만 총통 선거에서 반중, 친미 성향의 민진당 라이칭더 후보가 당선되면서 중국의 대만 침공 우려가 커지고 있습니다. 중국은 이달 들어 최대 명절인 춘절에도 항공기와 해군 함정, 감시 풍선 등을 대만 영토 쪽으로 보내는 등 군사 압박의 강도를 높이고 있습니다. 미국은 “대만 독립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입장이지만, 양안전쟁이 터지면 개입할 가능성이 높다는 전망이 나옵니다.이는 그저 남의 일이 아닌 한반도 안보 위기와 직결되는 요인입니다. 대만을 둘러싼 미중전쟁은 지리적으로 가장 가까운 증원 전력인 주일·주한미군 재배치로 이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죠. 두 개의 전선(two-front war)을 노리는 중국이 북한에 남침을 요청할 수 있다는 시나리오도 거론됩니다.그렇다면 미국이 대만을 포기할 수 없는 전략적인 이유는 무엇이고, 양안전쟁이 한반도에 미칠 영향은 무엇일까요(Oriana Skylar Mastro 미국 스탠포드대 교수 논문 등 국내외 문헌을 참고했습니다.)한국전쟁 이후 운명공동체로 엮인 한국과 대만우선 한국전쟁을 계기로 대만이 한반도와 일종의 운명공동체로 엮이게 된 과정부터 살펴보겠습니다. 1950년대 전후로 시계를 돌려보죠. 1940년대 후반 2차 국공 내전에서 국민당의 패색이 짙어지자, 미국은 대만의 전략적 가치에 관심을 갖게 됩니다.1948년 11월 미 국무부와 국방부는 중국공산당이 대만을 점령할 경우 미국의 안보이익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검토하는 내용의 보고서(NSC-37)를 작성합니다. 중공이 대만을 점령하면 미국 안보에 불리하다는 게 보고서의 결론이었습니다. 반면 미 군부는 막대한 비용을 들여 지켜야할 정도로 대만의 전략적 가치가 높지 않다고 봤죠.정부 내 의견이 엇갈리는 가운데 한국전쟁 발발 직전인 1950년 초까지 트루먼 행정부는 ‘무개입 원칙’을 고수합니다. 미국이 중국 내전에 개입하지 않을 것이며, 또 대만으로 쫓겨간 국민당 정부에 대해서도 군사적 원조를 제공하지 않겠다는 거였죠. 이는 마오쩌둥의 승리가 대세로 굳어진 가운데 혈맹인 영국이 중공을 승인하면서 미 의회와 경제계, 학계, 언론에서 중공 정권 승인론이 힘을 얻은 데 따른 것이었습니다.1950년 2월 미국 정보기관은 대만 국민당 정권이 그해 12월을 넘기지 못하고 중공에 점령될 거라는 비관적인 분석을 내놓았습니다. 이에 트루먼 정부는 중공과의 관계 개선을 준비하면서 국민당 정부와 관계를 단절하는 방안을 검토했죠.하지만 그해 6월 발발한 한국전쟁을 계기로 상황은 180도 바뀌게 됩니다. 미군 합동참모본부는 전쟁이 터지고 한 달 뒤 대만 국민당 정부에 긴급 군사원조를 제공하고, 원조계획을 수립할 조사단 파견을 제안합니다. 미국 입장에서 대만의 전략적 가치가 갑자기 높아진 거죠.그런데 그해 10월 중공군의 한국전쟁 참전을 계기로 전황이 뒤집히면서 미국의 대만 보호 의지도 롤러코스터를 타게 됩니다. 딘 러스크 당시 국무장관은 “만약 중공이 한국전쟁 해결을 위한 교섭과정에서 대만 문제를 논의한다면 미국은 티베트와 인도차이나 문제를 함께 논의할 수 있다”고 밝힙니다. 이어 국무부 중국과는 중공이 인도차이나 반도에 개입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면 대만을 중공에 넘길 수 있다는 의견을 내기까지 합니다.그러나 결국 미국은 한국전쟁이 한창 진행 중이던 1951년 5월 대만 방어를 강화하기 위해 군사고문단을 보내는 등 군사원조 계획을 수립합니다. 단, ‘대만은 중국의 일부’라는 외교 방침을 유지하기로 합니다. 이에 따라 당시 미 국무부는 국민당 정부에게 명확한 안보공약을 제시하는 걸 거부하죠. 대만 외교부 장관이었던 예궁차오(葉公超)가 미국이 결국 국민당 정부를 포기하려는 게 아닌지 의심한 이유입니다.中, 대만 점령하면 美 본토 위협 ↑한국은 수출로 먹고 사는 ‘소국 개방경제’인 만큼 해상교통로(SLOC)의 경제, 안보적 가치가 다른 나라에 비해 훨씬 클 수밖에 없습니다. 이와 관련해 한국 무역 물동량의 43%가 대만해협을 통과한다는 통계도 나와 있죠. 중국의 대만 점령이 동아시아 각국의 경제, 안보에 큰 위기가 될 거라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입니다.특히 일부 군사전략가들은 대만의 군사적 가치가 상상 이상이라는 분석을 내놓고 있습니다. 미국이 미소 냉전 당시 유용하게 활용한 SOSUS(수중음향감시체계)로 현재도 중국군의 필리핀해 및 태평양해 진출을 효율적으로 막고 있는데, 중국이 대만을 점령하면 이것이 무력화될 수 있다는 겁니다.SOSUS는 잠수함을 추적하기 위해 해저에 일렬로 깔아놓은 무수한 음파탐지기(소나)들을 말합니다. 미국은 SOSUS를 유럽의 북해와 대서양, 대만해협 등에 매설했는데 소련 핵잠수함이 기지를 떠난 직후부터 소음을 탐지하는데 성공할 정도로 높은 성능을 발휘했다고 합니다. SOSUS로 위치가 드러난 잠수함은 대잠초계기의 공격에 무방비로 노출돼 그야말로 먹잇감에 불과하게 됩니다(잠수함의 최대 강점인 잠항성을 무력화시키는 무기인 셈입니다.)그런데 중국이 대만을 점령한 뒤 소음을 획기적으로 낮춘 핵잠수함을 대거 운용하면 SOSUS에 탐지되지 않고 필리핀해에 접근할 수 있어 동아시아 지역의 해상교통로를 위협할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옵니다. 특히 일본은 오키나와 등이 대만과 가까워 중국의 이 같은 군사전략 변화에 더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죠.중국이 대만해협을 가로질러 태평양까지 진출하면 미국도 산 넘어 불구경 할 수 없는 처지가 됩니다. 중국이 대만 점령 후 저소음의 전략핵잠수함(SSBN)을 대만 기지에 전진 배치하면 미국의 대잠 전력에 노출되지 않고 미국 전역으로 핵미사일을 쏠 수 있는 해역(태평양)까지 이동할 수 있기 때문이죠. 이와 함께 필리핀에 기지를 두고 해·공군을 운용하는 미국의 작전능력을 직접 견제할 수 있게 됩니다.그런데 이보다 더 뼈아픈 것은 중국의 대만 점령이 동아시아에서 미국의 강력한 동맹체제를 흔들 수 있다는 점입니다. 한국, 일본 등 주변 동맹국들에 대한 미국 안보공약의 신뢰성을 떨어뜨릴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각국의 생명줄과도 같은 해상교통로가 중국에 의해 결정적 위협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로 인해 이들은 미국 핵 자산의 전진 배치나 핵공유 등을 요구할 수도 있습니다. 이에 따라 냉전시기 핵 군비 경쟁을 벌인 유럽처럼 동아시아에서 안보 위협이 높아질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옵니다.미국의 안보 공약이 신뢰성을 잃으면 동맹국 간 ‘방기(abandonment)와 연루(entrapment)의 딜레마’에 빠지기 쉽습니다. 동맹을 맺고도 안보위기 시 도움을 받지 못할 수 있는 위험이 방기라면, 연루는 동맹으로 인해 원치 않는 갈등(전쟁 등)에 휘말릴 수 있는 위험을 말합니다. 일반적으로 양자 동맹에서 상대적 약소국이 방기의 위험을 두려워한다면, 상대적 강대국은 연루의 위험을 두려워하죠. 이는 미국이 한국, 일본, 호주 등과 맺은 동맹에 균열을 일으켜 중국의 도발 가능성을 키울 수 있습니다.미국의 대만 점령이 군사전략적으로 크게 중요하지 않다는 반론도 있습니다. 찰스 글레이저 조지워싱턴대 교수는 “대만 점령이 중국의 군사력이나 전력투사 능력을 크게 증가시킬 거라는 근거가 없다”며 대만 포기를 주장했습니다.병참기지로서 한반도의 역사양안전쟁이 벌어지면 미국은 동맹조약을 맺고 있는 한국, 일본에 어떤 식으로든 군사 지원을 요구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유사시 중국이 주한미군 기지만 국한해 공격하더라도 한미 상호방위조약에 따라 한국군이 주한미군과 연계 대응할 의무가 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이미 미국 외교안보 전문가들은 양안전쟁 시 주한미군을 어떻게 운용할 것인지를 놓고 다양한 논의를 벌이고 있습니다. 미국 학계 일각에선 한국이 중국과의 전면전을 피하려고 할 것이기 때문에 한국이 정보수집이나 탄약 공급, 비전투원 소개와 같은 후방지원에 나서는 게 현실적인 대안이라고 주장합니다.사실 병참기지로서 한반도의 역할은 16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당시 일본은 명나라를 치기 위한 길목이자 병참기지로 조선을 활용하기 위해 임진왜란을 일으켰습니다. 현대사로 좁혀 보면 국공 내전이 대표적입니다. 1940년대 후반 2차 국공 내전 당시 북한은 마오쩌둥이 이끄는 중국공산군의 든든한 후방 병참기지 역할을 수행했죠. 마오쩌둥이 대만 수복을 사실상 포기하면서까지 한국전쟁 참전을 결정한 데에는 국공 내전 당시 깨달은 한반도의 전략적 가치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을 겁니다.이와 관련해 양안 위기와 맞물려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과 한국군의 작전통제권 이전을 한미 양국이 재검토해야한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양안전쟁시 주한미군 재배치로 인해 생기는 대북 억지력의 공백을 한국이 더 많이 메우는 방향으로 작전통제권 이전을 추진해야한다는 겁니다. 이는 한국의 자체 국방력이 강화되면 중국의 대만 침공을 틈탄 북한의 도발을 억제할 수 있다는 논리죠.단, 이 같은 조치가 북한의 핵무장과 일본의 군비 확장이 본격화 된 상황에서 동아시아에서 군비경쟁을 촉발시킬 가능성이 있다는 건 우려스럽습니다. 미중갈등이 심화된 가운데 이 같은 움직임이 양안전쟁의 가능성을 오히려 높이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습니다.그동안 한국은 국력에 비해 소극적인 외교 행태를 보여왔습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미국, 일본, EU 등이 추진한 러시아 원유상한제에 적극 동참하지 못한 게 대표적입니다. 최근 미중갈등과 더불어 일본이 전수방위를 폐기하는 등 동아시아 정세가 급변하는 상황에서 한국도 양안전쟁에 적극 대비하는 자세가 필요하지 않을까요.[참고 문헌]-Brendan Rittenhouse Green, 〈Then What? : Assessing the Military Implications of Chinese Control of Taiwan〉 (2022, International Security)-Oriana Skylar Mastro, 〈How South Korea Can Contribute to the Defense of Taiwan〉 (2022, The Washington quarterly)-장수야, 〈한국전쟁은 타이완을 구했는가〉 (2022년, 경인문화사)“모든 해답은 역사 속에 있다.” 초 단위로 넘치는 온라인 뉴스 속에서 하나의 흐름을 잡기가 갈수록 어려워집니다. 역사를 깊이 들여다보면 연이은 뉴스들 사이에서 하나의 맥락이 보일 수 있습니다. 문화재, 학술 담당으로 역사 분야를 여러 해 취재한 기자가 역사적 사실들을 통해 뉴스를 분석하고, 미래에 대한 인사이트를 찾아보고자 합니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24-0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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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화문에서/김상운]문화재 환수, 정치 아닌 전문가 손에 맡겨야

    “이렇게 독특한 고려 사리구는 국내외를 통틀어 전례가 거의 없습니다.” 약 10년 전 미국 보스턴미술관에 소장된 14세기 고려시대 ‘은제도금 라마탑형 사리구(舍利具·사리를 보관하는 용기)’를 직접 조사한 금속유물 전문가는 “미술관이 돌려주지 않으면 돈을 주고서라도 가져와야 할 국보급 문화유산”이라며 이렇게 말했다. 고려 거란전쟁과 몽골 침략을 거치며 현존하는 고려 금속공예품은 손에 꼽힐 정도로 희귀하다. 그런데 보스턴미술관 소장 고려 사리구는 라마교 불탑 모양의 사리구 안에 팔각지붕 형태의 소형 사리구 5기가 들어 있는 독특한 양식에 금속 세공 기법도 정교해 역사적·예술적 가치가 매우 높다. 그런데 최근 정부는 사리만 환수해 조계종에 기증하고, 사리구는 환수가 아닌 임시 대여하기로 보스턴미술관과 합의했다. 10년 넘게 사리구와 사리의 일괄 환수를 추진해 온 문화재청이 돌연 방침을 바꾼 것이다. 앞서 2009년 보스턴미술관은 계속된 한국의 환수 요구에 사리만 반환할 수 있다고 제안했으나, 당시 문화재청은 “사리와 사리구는 하나의 세트를 이루는 유물이기에 사리만 받을 순 없다”며 이를 거부했다. 문화재청의 이런 일괄 환수 방침이 갑자기 바뀐 건 지난해 4월 윤석열 대통령 방미 이후다. 당시 동행했던 김건희 여사가 보스턴미술관장을 만나 사리구 반환 논의 재개를 요청하면서 문화재청과 조계종이 분리 환수를 위한 협상에 들어갔다. 사리구 대신 사리만 가져가라는 미술관의 제안을 정부가 받아들인 형국이어서 향후 사리구 반환이 더 어려워질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일각에선 도난품이라는 물증이 없는 한 해외에 있는 우리 문화재의 환수보다는 현지에서 전시가 국위 선양을 위해 더 바람직하다는 의견을 내놓고 있다. 그러나 고려 사리구를 비롯한 일제강점기 국외 유출 문화재의 상당수가 도굴품 혹은 도난품이라는 점에서 국위 선양을 운운하는 건 너무 한가한 소리라는 지적도 있다. 이와 관련해 보스턴미술관이 1939년 사리구를 사들인 일본 골동품상 야마나카 상회는 조선에서 수많은 도굴·도난품을 사들여 미국, 영국, 프랑스 등으로 거래한 전력을 갖고 있다. 실제로 2014년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이 미국 허미티지 박물관에서 환수한 조선 불화 ‘석가삼존도’는 일제강점기 국내 사찰에서 무참히 뜯겨 나간 뒤 야마나카 상회를 통해 미국으로 팔려 나갔다. 일본의 도자기 전문가 고야마 후지오는 자신의 책에서 “이토 히로부미가 조선통감으로 취임한 후 발굴된 고려 자기 총수는 몇십만이라고 헤아리기도 힘들 정도였다”고 썼다. 말이 발굴이지, 임자 없는 무덤에서 도굴해 불법으로 반출한 것이다. 고려 사리구의 분리 환수가 바람직한지에 대해선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엇갈린다. 대통령실과 문화재청이 보스턴미술관과 협상하기에 앞서 전문가들의 의견을 충분히 수렴했는지 의문이다. 과거 정치가 문화재 영역에 개입한 사례들은 결과가 좋지 못했다. 예컨대 박근혜 정부 당시 박 대통령이 경북 경주시 월성 발굴 현장을 이례적으로 방문한 직후 발굴이 속도전으로 이뤄져 고고학계의 반발을 샀다. 문재인 정부 때는 문 대통령의 강한 의지로 ‘가야사 복원 사업’이 추진됐지만, 지자체 간 예산 따먹기로 전락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고도의 전문성이 필요한 문화재 영역만큼은 전문가 주도로 일이 추진돼야 뒤탈이 없다. 김상운 문화부 차장 sukim@donga.com}

    • 2024-0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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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반도 천동설’ 극복하려 외교현장서 3년간 키신저 책 번역” [파워인터뷰]

    《지난해 11월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 별세를 계기로 그의 대표작 ‘헨리 키신저의 외교’(원제 ‘Diplomacy’·김앤김북스)가 발간 5개월여 만인 지난달 3쇄를 찍으며 국내 독자들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 약 900쪽에 이르는 이 책은 까다로운 문체와 방대한 분량으로 1994년 원서 발간 이후 30년 가까이 국내에 소개되지 못하다 현직 외교관인 김성훈 주유엔대표부 참사관에 의해 지난해 8월 번역 출간됐다. 미국 현실주의 외교의 대가로 현실 외교와 학계를 두루 섭렵한 키신저답게 세계 외교 통사(通史)를 그만의 통찰력으로 집대성한 대작이다. 지난해 10월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발발에 이어 이달 24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2주년을 맞는 등 지정학의 시대가 다시 도래하며 현실주의 외교 고전인 이 책을 찾는 이들이 많아졌다.》21년간 외교 현장을 지키며 이 책을 번역한 김 참사관은 “한반도 분단은 세계적 흐름을 빼놓고는 설명할 수 없다”며 “20세기 이후 세계 질서는 미국이 만들어 놓은 것이기에 이를 깊이 있게 분석한 키신저의 책은 21세기를 사는 한국인들에게도 여전히 유효하다”고 밝혔다. 2년 전 유엔총회에서 북한의 전술핵 사용 위협을 규탄하며 북한 외교관과 공개 설전을 벌여 주목을 받은 그는 바쁜 업무로 인터뷰를 극구 사양하다 일과를 마친 오후 9시(미국 현지 시간 기준)가 넘어서야 뉴욕 자택에서 동아일보와 통화했다. 그는 “30년 전쟁과 제1차 세계대전 직후 유럽처럼 ‘힘의 공백기’에는 항상 전쟁이 터진다는 걸 키신저는 이 책에서 잘 보여주고 있다”며 “우리나라를 비롯해 일본, 호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등 미국의 조약동맹국(treaty ally)들은 동맹조약 체결 이후 침략을 당한 적이 없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다음은 그와의 일문일답. ─리처드 하스 전 미국외교협회장의 ‘혼돈의 세계’를 포함해 이번이 여섯 번째 번역서라고 들었다. “외교관은 협상이나 의전에만 치중한다는 외부 시각이 있는데 실상 공부를 많이 해야 하는 직업이다. 책을 번역하다 보면 자연스레 공부가 되는 데다 문서 번역이 평소 업무이기도 하다.” ─키신저의 웬만한 저작들이 국내에 거의 번역됐는데 유독 ‘Diplomacy’만 30년 가까이 번역이 안 된 이유가 뭔가. “이 책은 수백 년에 걸쳐 유럽, 중동, 아시아 등 다양한 지역의 외교사를 폭넓게 다루고 있다. 여기에 미국의 외교 이념을 이해하려면 국제정치 사상도 봐야 한다. 세력 균형(balance of power) 등 국제정치 이론도 다룬다. 다양한 지식이 씨줄, 날줄로 이어지는 높은 난도가 영향을 미친 것 같다.” ─번역에 3년이 걸렸는데 어떤 부분이 특히 까다로웠나. “키신저가 독일 태생이라 그런지 문장을 길게 쓰면서 주어와 동사를 도치시키고, 긴 명사구를 즐겨 쓰는 독일어식 표현이 많아 읽기가 까다롭다. 초벌 번역에는 10개월이 걸렸지만 국제정치학 용어 등을 꼼꼼히 검토하고 역주를 다는 데 2년이 더 걸렸다. 특히 나온 지 30년이 된 고전이기에 독자들이 시의적절하게 읽을 수 있도록 역주를 최대한 많이 달았다. 책 분량상 많이 잘렸지만 우크라이나 전쟁 등 최근 사건도 디테일하게 역주에 담으려고 노력했다.” ─키신저는 서문에 미국 외교관을 위한 책임을 밝히고 있다. 그럼에도 한국 외교계와 학계에서 필독서처럼 읽히는 이유가 뭔가. “한국 입장에서만 국제정치를 보면 일종의 ‘한반도 천동설’로 흐를 수 있다. 그런데 한반도 분단 과정만 봐도 냉전이라는 세계적 흐름을 빼놓고는 설명할 수 없다. 이 책 19장이 6·25전쟁을 다루고 있는데 전쟁이 일어난 배경이 18장부터 20장까지 쭉 이어진다. 즉, 제2차 세계대전 말기 소련이 영국 런던에 있던 폴란드 임시정부를 무시한 채 (공산주의자 중심의) 루블린 임시정부를 세우고, 체코에서 공산주의 쿠데타를 지원하는 등 공산주의가 팽창하는 과정에서 한반도에서 전쟁이 발발했다. 20세기 이후 세계 질서는 미국이 만든 것으로, 미국이 정원사(gardener) 역할을 하고 있다. 미국이 만든 큰 틀의 구조에서 세계가 돌아가고 있기 때문에 미국의 시각을 이해하는 게 중요하다.” ─최근 지정학의 시대가 다시 도래하면서 현실주의 외교를 대변하는 이 책도 주목받는 것 같다. “키신저는 철저히 현실주의로 접근하면서도 윌슨주의가 상징하는 미국의 이상이나 가치도 같이 가야 한다고 봤다. 사실 국제정치에서 지정학은 항상 있어 왔는데, 탈냉전 시기에는 러시아가 붕괴하고 중국이 크지 않아 지정학이 숨겨진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미국 주도로 진행된 세계화가 역풍을 맞으면서 지정학적 대립이 부각된 측면이 있다.” ─현직 외교관으로서 이 책이 남다르게 다가온 점이 있다면…. “외교관이 되기 전에도 봤는데 지금 읽으니 더욱 현실감이 느껴진다. 개인적으로 키신저가 상상하는 세계를 추종하는 건 아니지만, 분명 통찰력이 있었던 분이라고 생각한다. 베르사유 체제를 설명하는 12, 13장은 힘의 공백기에 항상 전쟁이 터진다는 걸 보여준다. 예컨대 1차대전이 끝난 뒤에는 독일 주변 동유럽 지역에 취약한 신생 독립국들이 생겨 (2차대전으로 이어지는) 전쟁의 씨앗을 남겼다. 싫건 좋건 국제정치에서 ‘세력권(sphere of influence)’이 있고, 힘의 공백을 누가 채우느냐가 관건이다. 이와 관련해 한국과 일본, 호주, NATO와 같은 미국의 조약동맹국들을 한번 보자. 이들은 미국이 주도하는 국제 질서를 잘 따르는 선진국으로, 상호 간 비자를 요구하지 않고 자유무역을 하면서 (미국) 핵우산의 보장을 받는다. 그런데 이들은 미국과 동맹조약을 체결하고 나서 ‘전면전’의 침략을 받은 적이 없다. 반면 힘의 공백 상태에 놓였던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의 침략을 받았다. 남중국해의 경우에도 필리핀이 미국의 동맹이지만 (미국이) 핵우산을 제공해 줄지는 의문이다. 이런 지역은 갈등이 생길 여지가 있다. 이처럼 키신저가 말하는 세력권은 현재도 여전히 의미가 있다.” ─저자는 트루먼을 만난 일화를 특유의 냉소적 유머로 서술했다. 번역자로서 특히 재밌게 본 대목은…. “의미심장한 게 외교사에서 격변을 겪을 때마다 세상이 크게 변화됐다는 거다. 예컨대 1차대전을 겪고 나니 다민족 제국이 사라졌다. 2차대전 후에는 식민주의 제국들이 사라졌다. 이어 냉전이 끝나니까 공산주의 제국이 사라졌다. 탈냉전 이후 새로운 세계 질서에서는 국가 체계가 흔들릴 수 있다. 냉전의 형성과 더불어 건국이 이뤄진 대한민국은 상대적으로 신생국인데 미국, 영국, 프랑스 등이 양차 대전의 격변을 어떻게 극복하고 살아남았는지 그 스테이트크래프트(statecraft·국정운영술)를 참고할 필요가 있다.” ─키신저는 6·25전쟁에서 청천강과 함흥만을 잇는 선에서 미군의 진격이 멈췄다면 중국의 개입을 막으면서도 남북한 인구의 90%를 흡수하는 성과를 거뒀을 거라고 주장했다. 국토 완정을 바라는 한국인들이 받아들이기 힘든 논리인데…. “키신저의 강대국 중심의 사고가 엿보이는 대목이다. 마치 19세기 유럽의 빈 체제에서 열강들이 주변국을 흥정의 대상으로 삼아 질서를 유지하려고 한 시각과 유사하다. 사실 민족 문제는 차가운 머리로만 접근하기 힘들다. 그런데 지금 한국의 위상은 그때와는 많이 달라졌다. 미국이 조약동맹국인 한국을 포기하면 국제사회에서 신뢰도가 크게 흔들릴 수밖에 없다. 더구나 한국은 세계 반도체 공급망에서 중요도가 매우 크다.” ─키신저의 세력 균형 관점에서 러시아의 부상은 미중 갈등을 완화하는 요인이 될 수 있을까. “그러려면 중국과 러시아가 갈등을 벌여야 하는데 아직은 공동의 적(미국)이 있지 않나. 그런데 러-중이 미묘한 관계인 것은 맞다. 19세기부터 러시아가 중국과 네르친스크, 아이훈 조약 등을 맺으면서 극동 지역에서 영토를 넓혔다. 과거 중국 영토였던 블라디보스토크 일대의 면적이 현재의 우크라이나와 비슷하다. 극동 지역에 사는 러시아 인구는 800만 명이지만, 중국은 동북 3성의 인구만 9000만 명에 이른다. 러시아는 중국의 영향력 확대에 부담을 느낄 것이다.” ─키신저는 냉전 시기 조지 케넌의 대(對)소련 봉쇄 정책이 너무 긴 시간을 끌었고, 타협의 여지를 없앴다고 비판했다. 이는 중국을 경제·기술적으로 고립시키려는 미국의 최근 정책과 관련해 어떤 함의를 갖는가. “현재는 냉전 당시 미소 관계와 달리 미중이 경제적으로 긴밀히 연결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그때처럼 봉쇄 정책을 중국에 적용할 수 있을까. 바이든 행정부도 신냉전을 추구하지 않는다고 했다. 중국과 협력할 것은 하겠다는 것이다. 강대국들이 각만 세우면 양차 대전처럼 파국에 이를 수 있다. 생전에 키신저는 미중 갈등이 전쟁으로 확대되지 않도록 사전에 막는 게 중요하다고 봤다.”김성훈 주유엔대표부 참사관△2002년 서울대 외교학과 학사△2007년 미국 하버드대 케네디스쿨 공공정책학 석사(풀브라이트 장학생)△2003년 제37회 외무고시 합격△외교부 주미 대사관, 주수단 대사관, 국가안보실, 중동 2과장 등 근무△‘미국 길들이기’ ‘혼돈의 세계’ ‘피크 재팬’ ‘미국 외교의 대전략’ 등 번역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24-0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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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동 특파원 출신 언론인이 본 생생한 중동 이슈 분석

    아람코, 네옴 프로젝트, 하마스, 가자지구 전쟁, 에듀케이션시티, 2030 리야드 엑스포….신간은 최근 국제뉴스에서 비중 있게 다뤄지는 중동 이슈들을 현장감 있게 분석했다. 책에는 ‘새벽 어시장의 활어’처럼 살아 있는 정보와 이야기가 넘친다. 심각하고 진지한 이슈와 말랑말랑하고 재미있는 주제가 고르게 담겨 있다. 중동에서 새로운 사건과 변화가 생길 때마다 ‘참고서’로 활용하기에도 좋은 책이다.책에서는 중동의 오랜 갈등인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 분쟁’과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란 간 패권 경쟁’을 분석할 때도 현지인들의 목소리를 생생하게 담았다. 여전히 끝날 기미가 안 보이는 ‘가자지구 전쟁’도 비중 있게 다룬다. 인명을 경시하고, 대안 없는 무력 투쟁을 펼치는 하마스에 비판적이지만, 이스라엘에 대해서는 또 다른 차원의 분노를 가진 아랍 사람들의 정서를 자세히 설명한다. 동시에 지난해 10월 하마스의 공격으로 이스라엘이 겪은 충격과 집요한 보복의 배경도 다양한 각도에서 조망했다. 사우디와 아랍에미리트(UAE) 등 수니파 아랍 왕정 산유국들이 신정 공화정 체제의 시아파 종주국 이란을 두려워할 수밖에 없는 이유도 다양한 사례를 통해 설득력 있게 녹여냈다.‘분쟁’보다 중동의 더 현실적인 고민인 ‘포스트 석유 시대’와 관련된 내용이 풍부하다는 것도 책의 매력 포인트. 사우디 국영 석유기업 아람코의 4차 산업혁명 기술에 대한 파격적인 투자, 이집트가 전통과 문화의 도시 카이로를 대신할 신행정수도 건설에 나선 이유,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살아난 두바이 경제, 이스라엘의 첨단 과학기술 산업, 국부펀드를 통한 중동 산유국들의 영향력 키우기 전략, 사우디 왕세자의 ‘피라미드 만들기’로 여겨지는 네옴 프로젝트 등 한국 경제와 기업에 현실적으로 와 닿는 이야기가 담겼다.저자는 동아일보·채널A 카이로특파원과 국제부 차장을 지냈고, 카타르의 싱크탱크인 아랍조사정책연구원(Arab Center for Research and Policy Studies‧ACRPS)의 방문연구원으로도 활동했다. 한국 기자 중 유일하게 ‘사우디 관광개방’, ‘아람코의 4차 산업혁명 기술 연구개발(R&D)센터’, ‘사우디 미래투자이니셔티브포럼(일명 사막의 다보스 포럼)’ 등을 현장에서 취재했다. 또 ‘두바이 경제위기’, ‘카타르 단교 사태’, ‘중동의 코로나19 팬데믹’, ‘미국과 탈레반 간의 평화협상’ 같은 대형 이슈도 현장에서 취재했다.저자는 “중동에 대한 관심을 가지는 게 국제정세를 이해하고 ‘글로벌 마인드’를 키우는 데 도움이 된다”고 강조한다.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 같이 한반도 정세에 영향을 줄 수 있는 나라들이 모두 중동에 관심이 많기 때문이다. 나아가 영국, 프랑스, 독일 등 이른바 국제사회에서 영향력이 큰 나라들 가운데 중동에 관심이 없는 나라는 없다.저자는 단행본 ‘중동 라이벌리즘’과 ‘있는 그대로 카타르’를 펴냈고, 동아일보 디지털콘텐츠와 신동아에 ‘이세형의 더 가까이 중동’을 연재 중이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24-0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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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블랙팬서’ 연원은 구약성경?

    주인공이 “와칸다 포에버”를 외치던 영화 ‘블랙팬서’가 구약성경과 이어져있다? 언뜻 전혀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게 이 책 저자의 주장이다. 마치 ‘다빈치코드’처럼 온갖 문화 요소를 종횡무진 잇는 미국 하버드대 영문학과 교수 출신 저자의 설명을 따라가 보자. 우선 영화 ‘블랙팬서’의 모티브가 된 흑인 인권운동 단체 흑표당(black panther party)은 ‘케브라 나가스트’라는 14세기 에티오피아 서사시의 영향을 받았다. 백인들의 서구 기독교 문명이 형성되기 전에 유대왕 다윗의 계보를 잇는 아프리카 기독교 문명이 존재했음을 흑인 운동가들이 주목한 것. 케브라 나가스트에 따르면 기원전 10세기경 유대 왕국을 방문한 에티오피아 여왕(시바)이 다윗의 아들 솔로몬과 관계를 맺고 아이(메넬리크)를 임신한다. 메넬리크는 훗날 예루살렘에서 모세의 언약궤를 훔쳐 어머니의 땅 에티오피아로 가져온다. 유대교의 핵심 상징인 언약궤의 권위를 끌어와 에티오피아의 문화 요소로 재창조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수입한 원형문화에 대한 존중과 부정의 상반된 행태가 동반된다는 점이 흥미롭다. 원형문화의 정통성과 더불어 자신의 고유문화에 대한 독창성을 모두 획득하기 위해서다. 저자는 “케브라 나가스트는 솔로몬 왕의 직계 후손임을 주장하면서도 솔로몬을 시바 여왕을 꼬드겨 성관계를 맺은 죄인으로 묘사하고 있다”고 썼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24-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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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보급 ‘고려 사리구’ 85년만에 美서 귀환

    14세기 고려 금속공예의 정수로 꼽히는 미국 보스턴미술관 소장 ‘은제도금 라마탑형 사리구(舍利具·사리를 보관하는 용기)’가 환수가 아닌 임시 대여로 국내에 들어온다. 다만, 사리구 안에 든 사리는 조계종으로의 기증이 결정됐다. 사리와 사리구의 일괄 환수를 추진하던 정부의 당초 방침에서 후퇴한 것으로, ‘반쪽짜리 환수’라는 지적이 나온다. 문화재청은 “보스턴미술관이 소장한 라마탑형 사리구를 일정 기간 대여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이와 별개로 사리는 조계종에 기증하기로 미술관과 합의했다”고 6일 밝혔다. 고승(高僧) 등의 유골인 사리의 경우 불교에서 성물(聖物)로 여겨진다는 점을 감안해 미술관이 올해 부처님오신날(5월 15일) 이전에 조계종에 기증하기로 했다. 그러나 2009년부터 정부가 환수를 추진한 국보급 유물인 사리구는 임시 대여로 합의됐다. 미술관이 “사리구가 불법으로 유출됐다는 증거가 없는 한 환수에 동의할 수 없다”는 기존 입장을 고수했기 때문이다. 문화재청은 임시 대여 기간에 전시와 보존처리를 진행할 계획이다. 앞서 2009년 미술관은 계속된 반환 요청에 사리만 반환할 수 있다고 제안했으나, 문화재청은 사리와 사리구가 하나의 세트를 이루는 유물이기에 사리만 반환받을 수 없다는 방침을 유지했다. 하지만 지난해 4월 윤석열 대통령 방미를 계기로 김건희 여사가 보스턴미술관장을 만나 사리구 반환 논의 재개를 요청하면서 분위기가 바뀌었다. 이후 조계종 주도로 미술관과의 반환 협상이 이뤄졌다. 문화재계에서는 사리구가 80여 년 만에 국내에서 공개되는 의미는 크지만, 향후 사리구 반환이 더 어려워질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사리구 대신 사리만 가져가라는 미술관의 제안을 결국 받아들인 모양새가 됐기 때문이다. 사리구는 본래 양주 회암사나 개성 화장사에 있었으나,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으로 유출됐다. 보스턴미술관 기록에 따르면 미술관은 1939년 일본의 유명 골동품상인 야마나카 상회로부터 사리구를 구입했다. 문화재계에서는 사리구가 불법으로 밀반출된 증거가 발견되면 보스턴미술관으로부터 반환이 가능할 것으로 보고 있다. 실제로 문정왕후 어보의 경우 6·25전쟁 때 미군 병사에 의해 약탈된 사실이 확인돼 로스앤젤레스(LA) 카운티 박물관으로부터 2017년 환수받았다. 문제는 사리구가 야마나카 상회의 손으로 들어간 경위를 밝히는 자료가 아직 나오지 않았다는 것. 이에 따라 추후 관련 자료가 발견될 때까지 사리구 반환 협상의 끈을 놓지 말아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라마탑형 사리구는 14세기 금속공예품으로 당시 원나라의 강한 영향을 반영해 라마교의 탑 모양을 본떠 제작됐다. 사리구 안에는 팔각지붕 형태의 소형 사리구 5기가 들어 있다. 사리구에 새겨진 명문에 따르면 석가모니와 지공 스님(?∼1363), 나옹 스님(1320∼1376) 등의 사리 19과가 있었으나 현존하는 것은 4과다. 2013년경 사리구를 직접 조사한 주경미 충남대 강사는 “독특한 양식의 국보급 유물로 이런 양식의 고려 금속공예품은 다른 사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라고 평가했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사지원 기자 4g1@donga.com}

    • 2024-0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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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주애 등장과 北 세습통치의 미래[김상운의 빽투더퓨처]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남한에 핵 위협을 노골화하는 가운데 딸 주애와 주요 현장을 순시하는 장면이 올해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주애가 후계자인지 여부를 둘러싸고 학계에서 논란이 벌어진 데 이어 지난달 국가정보원은 “현재로선 주애가 유력한 후계자로 보인다”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남성 중심의 북한 사회 속성상 주애를 후계자로 판단하는 건 성급하다고 한 기존 분석을 사실상 수정한 겁니다.11살짜리 아이의 등장이 도대체 무슨 의미이기에 학계와 정부까지 나서 의미 분석에 여념이 없을까요. 북한의 수령제와 세습통치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면 1990년대 중반 김정일이 주석직 승계를 3년간 미룬 것을 놓고 ‘북한 붕괴론’으로 잘못 해석한 것 같은 오류에 빠질 수 있습니다. 2차대전 이후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3대 세습통치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짚어보려면 김일성 집권기로 시계를 돌려봐야 합니다(정치학자 후안 린츠의 저서를 비롯한 국내외 주요 문헌을 참고했습니다.)세습제 단초 제공한 ‘갑산파 숙청’오래전 월남한 북한 출신 인사들의 공통된 증언 중 하나는 “1960년대 초반까지는 북한도 그럭저럭 살만했다”는 겁니다. 이른바 김일성 유일 지배체제가 확립되기 전이어서 사회적 다양성이 티끌이라도 남아있었고, 경제적으로도 어느 정도 여유가 있었다는 얘기죠.하지만 1967년 갑산파 숙청으로 김일성에 반기를 들 수 있는 정파가 모조리 제거되면서 정치·사회적 다양성은 사라지고, 경제는 침체일로를 걷게 됩니다. 갑산파 숙청은 주체사상 태동으로 이어져 세습제로 나아가는 단초가 되죠.1960년대 후반 김일성 유일 지배체제의 다양성 말살은 역사해석에서도 확인됩니다. 1967년 조선로동당 제15차 전원회의 무렵 김일성이 조선시대 실학파에 대한 갑산파의 해석을 강하게 비판한 게 대표적입니다.당시 갑산파는 조선 실학자들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목민심서를 당 간부들의 필독서로 지정했습니다. 1960년대 후반 정체되기 시작한 북한의 사회, 경제체제를 개선하려는 과정에서 조선 성리학의 폐쇄성을 극복하려고 시도한 실학자들의 업적에 주목한 겁니다. 이에 대해 김일성은 갑산파가 사회주의 애국주의를 왜곡해 봉건 유교사상을 부활시켰다고 비판했죠.그런데 김일성 일파가 비판에 나선 진의는 갑산파가 실학자들의 업적을 김일성의 혁명전통과 같은 반열에 올려놓았다는 데 있었습니다. 항일 무장투쟁의 빛나는 전통을 김일성만의 것으로 독점하기 위해 연안파 등 기타 사회주의 세력의 흔적을 역사에서 지운 김일성 일파는 실학자들의 업적도 인정할 수 없었던 겁니다. 조선로동당이 줄곧 비판해온 조선성리학의 폐단을 개선하고자 한 실학자들의 노력마저 ‘반혁명’으로 몰아붙일 정도로 유일 지배체제의 독단성 내지 폐쇄성은 이미 1960년대부터 극에 달했던 셈입니다.술탄주의 국가로서 북한의 특성1960년대 후반 유일 지배체제로 변질된 북한은 술탄주의 국가의 속성을 갖게 됩니다. 정치학자 후안 린츠는 권위주의 정치체제를 통치자의 이데올로기 구속성과 독자적인 시민사회 영역의 존재 여부에 따라 ‘전체주의’(totalitarianism)와 ‘술탄주의’(sultanism)로 구분합니다. 즉, 술탄주의에서는 전체주의와 달리 사회를 지배하는 이데올로기에 정치 지도자가 얽매이지 않으며(집권자의 이데올로기 조작 가능), 그의 강력한 단일적 지배로 인해 최소한의 시민사회 영역조차 존재할 수 없게 되죠. 린츠는 술탄주의 국가는 민주국가로 자발적인 체제전환이 불가능하다고 말합니다.북한은 ▲건국 초 지배 이데올로기였던 마르크스 레닌주의 및 스탈린주의를 유일 지배체제에 합당하도록 수정, 변형해 ‘주체사상’을 내놓은 점 ▲1967년 조선로동당 제15차 전원회의 이후 당 안팎에 독자적인 정치·사회영역이 말살된 점 등을 미뤄볼 때 술탄주의에 가깝다고 볼 수 있습니다.북한 세습통치의 뼈대를 이루는 주체사상은 수령을 당과 국가 위에 군림하는 초월적 존재로 규정합니다. 학계에선 주체사상을 중국 마오쩌둥주의 혹은 소련 스탈린주의의 ‘북한판 변형’으로 보는 시각이 지배적입니다. 이는 김일성이 1956년 8월 종파투쟁을 벌이며 개인숭배를 강화할 수 있었던 배경에 스탈린 개인숭배가 결정적이었다는 점에서도 확인됩니다.그런데 스탈린 사후에 열린 1956년 소련공산당 제20차 대회에서 스탈린 개인숭배에 대한 비판이 본격화하자, 김일성은 일대 혼란에 빠지죠. 노동신문에 연일 스탈린의 동정을 보도하는 등 소련에서 개인독재의 정당성을 찾아온 김일성 일파로서는 일종의 ‘통치 모순’에 맞닥뜨린 겁니다. 1950년대만 해도 말끝마다 민족주체를 내세우는 지금의 북한과는 달리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든 측면에서 소련에 의존적인 행태를 보였었죠.결국 김일성은 종파투쟁을 계기로 갑산파 숙청을 거치며 유일 지배체제로 나아가게 됩니다. 소련의 탈(脫) 스탈린주의로 인해 수령 우위 당국가 체제를 유지하는데 한계에 봉착했기 때문이죠. 정리하면 해방 직후 김일성과 조선로동당이 통치체제의 정당성을 스탈린주의에서 찾았으나, 유일 지배체제가 형성된 후에는 ‘변형된 스탈린주의’랄 수 있는 주체사상을 내세운 겁니다.술탄주의에서 통치자의 이데올로기 조작은 김정일 대에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김정일은 김일성과 16년간 북한을 공동 통치하며 주체사상의 설계와 실행에 주도적으로 참여합니다. 그런데 김일성 사후 1990년대 중반 고난의 행군으로 통치 질서가 흔들리자, 군대를 앞세운 ‘선군사상’을 내놓습니다. 이는 ‘주체사상’에 대한 보조 통치담론으로, 수령-당-인민대중의 3대축을 기반으로 한 주체사상에 어느 정도 수정을 가한 겁니다.김정일보다 승계기간이 훨씬 짧았던 김정은에 이르러서는 김정일이 키운 군부의 권력이 도리어 부담이 됐죠. 이에 ‘인민대중 제일주의’를 내걸고 당의 권한과 지도를 강화해 군부를 견제하는 방향으로 선회합니다. 이처럼 북한에서 수령과 그의 후계자는 주체사상에 대한 독점적 해석권을 갖고 있으며, 자신이 처한 상황에 맞춰 새로운 통치담론을 내놓습니다. 김정은의 딸 주애가 성인이 돼 후계자로 본격적으로 나선다면 또 다른 ‘주애 사상’이 나올 수 있단 얘깁니다.술탄주의의 또 다른 특성인 독자 시민사회 영역의 부재는 북한에서 해방 직후 사회주의 전환이 동구 유럽보다 빠른 속도로 이뤄진 사실에서 확인됩니다. 북한의 경우 폴란드와 같은 무장투쟁 세력이나 조직화된 반공 정치세력이 존재하지 않았고 6.25전쟁 이전에 지주, 종교인, 지식인 등이 대거 월남해 공산화가 큰 저항 없이 순조롭게 추진될 수 있었습니다.권력세습기 엘리트간 갈등 주목술탄주의 국가 북한에서도 권력 투쟁이 벌어집니다. 단, 다른 나라처럼 최고 권력에 대한 도전이 아닌 권력세습기 관료집단 간 충성경쟁이 이뤄집니다( 참고). 독재국가에서 권력승계는 기존 통치연합 내 엘리트 간 권력과 이권이 대규모로 재편되는 과정으로 이 과정에서 치열한 경쟁이 벌어집니다. 북한의 경우 김정일에서 김정은으로 권력이 세습될 당시 군부에 속한 막대한 이권, 특히 와크(무역특권)를 놓고 장성택 세력과 군부가 정면으로 충돌하는 양상을 보였죠.시계를 김정일 생전인 2008년으로 돌려볼까요. 그해 8월 김정일은 뇌경색에 빠져 죽음 직전까지 가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이로 인해 이전에 군부에서 제기했으나 김정일에 의해 중단된 후계 논의가 재개되고, 이듬해 1월 김정은이 후계자로 내정됩니다.김정일은 자신이 죽고 나서 후계체제를 안착시킬 측근으로 매제인 장성택을 선택하죠. 1990년대 중반 ‘고난의 행군’ 당시 선군체제로 위기를 돌파하면서 몸집이 커진 군부를 장성택을 앞세워 견제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한 겁니다. 이후 선군시대를 이끈 3인방 조명록 총정치국장, 김일철 인민무력부장, 김영춘 총참모장이 배제되고 리영호 총참모장, 김영철 총정치국장 등으로 대체됩니다. 이어 군부의 대표적인 외화벌이 업체인 승리무역합영회사를 장성택 휘하의 조선로동당 행정부로 편입합니다. 그 외에도 군부의 각종 이권사업을 빼앗죠.하지만 군부도 당하고만 있진 않았습니다. 2011년 12월 김정일 사망 이후 수령에 오른 김정은은 크게 확대된 장성택 세력을 의심의 시선으로 바라보게 됩니다. 지배연합 내 엘리트들 사이의 힘의 균형을 끊임없이 유지해야하는 수령 독재체제의 기본원리가 작동하기 시작한 거죠.이런 흐름을 군부는 놓치지 않았습니다. 군부와 당 조직지도부 인사들이 연합한 반(反) 장성택 세력이 2013년 12월 8일 조선로동당 정치국 확대회의에서 장성택을 ‘반당 반혁명 종파행위자’로 낙인찍고 닷새 뒤 그를 처형합니다. 장성택 처형 이후 행정부는 조직지도부에 흡수되고, 군부의 무역사업 제한조치는 폐기됩니다.북한 세습통치의 미래는주애로 4대 권력승계가 이뤄진다면 장성택 숙청과 같은 엘리트 간 암투가 재현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 쳇바퀴 같은 북한의 권력세습은 언제까지 유지될까요.린츠에 따르면 민주주의로 체제전환이 가능하려면 지배체제를 대체할 수 있는 대안세력, 즉 독자적인 시민사회 영역이 필수입니다. 문제는 이런 세력이 하루아침에 생기는 게 아니라 공산화 직전의 헝가리나 폴란드, 체코 등에서 볼 수 있듯 일정한 민주주의 경험 내지 자본주의 발전단계를 거쳐야 한다는 겁니다.그러나 식민지배 체제에서 곧바로 사회주의 체제로 이행한 북한의 경우 이 단계를 미처 경험해보지 못했죠. 이처럼 식민지배 체제에서 곧장 근대화로 이행한 술탄주의 체제는 마치 조선왕조와 같이 자생적 체제전환이 사실상 불가능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거칠게 말하면 일제의 침략으로 무너진 조선왕조처럼 불가항력의 외생변수가 작용하지 않는 이상 자생적으로 체제전환을 이루기가 쉽지 않다는 얘깁니다.특히 다원주의가 확보되지 않는 술탄주의 체제에서는 정책실패에 대한 오류를 자체적으로 수정하기가 어렵습니다. 술탄(수령)에 대한 무오류성을 근거로 체제가 유지되기 때문이죠. 이에 따라 지도자의 정책 방향에 대해 체제 내부에서 이의를 제기하기가 극도로 힘든 구조가 됩니다.실제로 1960년대 갑산파의 박금철, 이효순 등이 물질적 자극으로 노동자들에게 동기를 부여하는 것과, 생산은 사회주의로 하되 관리는 자본주의 방식으로 하는 경제정책을 제안했지만 갑산파 숙청과 더불어 폐기됩니다. 이는 1950, 60년대 성장일로를 걷던 북한경제가 점차 쇠퇴하는 분기점이 됐죠. 만약 갑산파의 경제개선 조치가 일정 부분 정책으로 수용됐다면 중공업 우선의 동원형 경제체제(스탈린식 경제체제)가 낳은 다양한 부작용(만성적인 ‘부족경제’ 등)이 어느 정도 완화됐을 겁니다.북한의 술탄주의 체제에서 경제 시스템은 시장화와 복고주의(反 시장화) 노선의 반복을 겪고 있습니다. 과도한 시장화가 자칫 사회주의 당국가 체제의 이완을 가져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1990년대 중반 ‘고난의 행군’ 기간 생존을 위한 ‘아래로부터의 시장화’가 진행된 이후 북한 당국은 2002년 7.1 경제관리 개선 조치로 나아갔지만, 결국 2009년 화폐개혁으로 과도한 시장화에 제동을 걸었죠.특히 고난의 행군 당시 노동신문에는 차관 등 외부 지원에 의한 경제성장이나 시장 활성화 정책에 대해 ‘소극주의’ ‘패배주의’ ‘사대주의’로 비판하는 논설이 줄을 이었습니다. 이에 김정일은 1998년 ‘강계 정신’을 내세우며 자력갱생을 통한 경제위기 극복이라는 복고적인 대안으로 회귀하는 한계를 보였습니다.결국 지배집단 안팎의 견제 세력이 말살된 술탄주의 북한 체제에서 자생적인 체제전환은 쉽지 않아 보입니다. 심각한 체제위기를 맞아 어느 정도의 변화(예컨대 7.1 경제개선 조치)를 시도하더라도 ‘국가 안보’보다 ‘정권 안보’를 우선하는 체제에서는 보수적인 조치로 회귀하는 패턴이 반복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북한의 체제 변화는 외생변수에 의해 촉발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안보 위협의 강도를 높이고 있는 최근 북한의 행태를 더욱 주목해야할 필요가 있을 겁니다.[참고 문헌]-Juan J. Linz & Alfred Stephan <Problems of Democratic Transition and Consolidation>(1996·The Johns Hopkins University Press)-장달중 등 <현대 북한학 강의>(2013년·사회평론)-김일평 등 <북한체제의 수립과정>(1991년·경남대극동문제연구소)-북한연구학회 <북한의 정치>(2006년·경인문화사)-북한연구학회 <김정은 시대의 정치와 외교>(2014년·한울아카데미)“모든 해답은 역사 속에 있다.” 초 단위로 넘치는 온라인 뉴스 속에서 하나의 흐름을 잡기가 갈수록 어려워집니다. 역사를 깊이 들여다보면 연이은 뉴스들 사이에서 하나의 맥락이 보일 수 있습니다. 문화재, 학술 담당으로 역사 분야를 여러 해 취재한 기자가 역사적 사실들을 통해 뉴스를 분석하고, 미래에 대한 인사이트를 찾아보고자 합니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24-0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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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일본 전국시대 승자는 용장 아닌 덕장

    대전(大戰)에는 두 가지 유형의 장수가 있다. 제2차 세계대전에 대입한다면 천재적이지만 다혈질의 야전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와, 야전 능력은 부족하지만 인내심으로 주변 장수들을 묶어낼 수 있는 조지 마셜 같은 부류다. 다이묘들이 맞서며 난세가 펼쳐진 15∼16세기 일본 전국시대(센코쿠시대)에선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후자에 해당하지 않을까. 저자는 나오키상을 수상한 일본 역사소설가로, 이에야스의 일대기를 그린 대하소설을 쓰면서 탐구한 내용을 이 책에 압축적으로 정리했다. 전국시대에 관한 일본 역사학계의 최신 이론을 담아 유럽의 대항해 시대가 당시 일본 열도에 미친 영향을 다각도로 풀어냈다. 예컨대 포르투갈에서 전래된 화승총은 다이묘들의 전투 방식을 획기적으로 바꾸는 계기가 된다. 특히 화승총 제작에 필요한 납을 태국의 송토 광산에서 수입해 오는 등 글로벌 공급망을 활용하기에 이른다. 화승총을 도입해 연전연승한 오다 노부나가에 비해 이에야스는 지략이 떨어져 여러 전투에서 패했고, 영지를 몰수당하는 위기에 처한다. 그럼에도 이에야스가 최후 승자가 된 것은 일본에 정토(淨土)를 세우겠다는 비전을 세우고, 끊임없이 인내하며 신중히 처신했기 때문이라는 것이 저자의 결론이다. 자신에게 패배를 안긴 적장 다케다 신겐의 전투법을 배우며 와신상담한 모습도 인상적이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24-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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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의 봄’과 한미 관계의 교훈 [광화문에서/김상운]

    최근 영화 ‘서울의 봄’을 같이 본 고등학생 아들이 “12·12쿠데타를 왜 막지 못했는지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는다”며 답답해했다. 많은 관객들이 같은 걸 물었을 것이다. 일각에선 한국군의 작전통제권을 쥐고 있던 미국이 쿠데타를 막을 의사가 있었는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쿠데타 발생의 근본 원인은 대개 체제 내부에 있다. 12·12 당시 미국의 움직임을 돌아보는 건 철 지난 반미주의의 변주가 아니다. 이보다는 혈맹에 비견되는 한미 관계 역시 명분과 실리의 줄다리기라는 외교의 본질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되새기기 위해서다. 존 위컴 전 주한미군사령관의 1999년 회고록에 따르면 1979년 12월 12일 밤 노재현 당시 국방부 장관이 미 8군 벙커로 피신해 위컴과 함께 있었다. 한국군과 주한미군 최고 지휘부가 공교롭게 한자리에 있었던 것. 이날 반란군 진압에 나선 장태완 수도방위사령관이 상부에 요청한 수도기계화사단과 26보병사단은 위컴의 작전통제권 아래 있는 병력이었다. 그런데 위컴은 “아직 어둡기 때문에 진압군과 반란군 간 오인 충돌이 불가피하다”며 노 장관에게 부대 이동을 허가하면 안 된다고 말했다. 노태우가 전방의 9사단을 무리하게 서울로 진입시킨 상황에서 이런 결정을 내린 건 미국이 애초부터 신군부를 진압할 의사가 없었음을 보여 준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미국은 결정적 순간에 왜 반란군 진압을 만류했을까. 이에 대해 윌리엄 글라이스틴 당시 주한 미국대사는 회고록에서 “12일 밤과 13일 새벽 북한을 자극할 한국군 간의 충돌과, 민간 정부가 전복돼 한국의 정치적 자유가 무산되는 것 두 가지를 방지하는 데 우선순위를 뒀다. 그러나 둘 중에서도 전자를 특별히 경계했다”고 썼다. 민주정 붕괴보다 남한 군부의 내전을 틈탄 북한군의 남침 방지에 주력했다는 얘기다. 미국이 도덕외교에서 강조하는 ‘민주 가치’를 포기하고 ‘안보 이익’을 택한 셈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당시 지미 카터 행정부는 역대 어느 미국 대통령보다 도덕주의 외교를 내세웠다는 점이다. 카터는 1977년 대통령 취임 연설에서 동맹국이라도 인권을 탄압하는 권위주의 정부를 옹호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이에 미국은 1979년 카터 방한을 앞두고 주한미군 철수를 지렛대로 6개월간 양심수 180명을 석방하겠다는 한국 정부의 약속을 받아냈다. 워싱턴의 이런 분위기는 10·26사태 직후 발생한 1979년 11월 ‘이란 인질 사태’로 급변했다. 중동에서 주요 동맹을 잃은 상황에서 동아시아에서 공산 진영에 맞서는 한미 동맹마저 위태롭게 할 수 없다는 분위기가 팽배해진 것. 그해 12월 소련의 아프간 침공도 한몫했다. 그렇다고 미국이 역대 한미 관계를 국익으로만 접근한 건 아니다. 1950년대 전략적 이익이 크지 않았던 한반도에서 미국이 약 14만 명의 자국민을 희생시키며 6·25전쟁에 개입한 것은 공산권의 침략을 방관하지 않겠다는 도덕주의 외교 원칙에 따른 것이었다. 대한민국 안보의 핵심 축인 한미 동맹의 이면에 도덕주의와 현실주의 외교가 병존함을 직시하고,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대응해야 한다는 게 12·12의 교훈 아닐까. 김상운 문화부 차장 sukim@donga.com}

    • 2024-0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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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오렌지 혁명이 러시아 침공을 불렀다?

    문호 니콜라이 고골부터 소련시대 지도자 트로츠키, 브레즈네프까지…. 이들의 공통점은 모두 우크라이나인이라는 사실이다. 하지만 동시에 러시아에서도 자기네 문호이자 지도자로 여겨지는 인물들이다. 게다가 우크라이나의 수도 키이우 일대는 러시아 건국신화에서 기원으로 간주된다. 하나의 역사적 뿌리를 둔 두 나라가 3년째 50만 명이 넘는 대규모 사상자를 내며 격렬한 전쟁을 벌이게 된 원인은 무엇일까. 저자는 러시아, 우크라이나를 연구해온 미국 정치학자로 1991년 소련 붕괴 이후 최근까지 양국 관계사를 입체적으로 조명하고 있다. 흔히 지역학 전공자들이 해당 국가의 역사에 천착해 특수성만 강조하기 마련인데, 이 책은 안보딜레마(특정국의 안보를 위한 방어적 행동이 상대국의 안보 불안을 심화시켜 갈등을 초래하는 현상) 같은 국제정치 일반이론을 적절히 결합해 보편성을 지향하는 균형감을 보여주고 있다. 무엇보다 이 책은 서구 관점에서 일방적인 러시아(혹은 푸틴) 책임론으로 기울지 않는 객관적 시각을 내세우고 있다. 다시 말해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맞선 러시아의 팽창주의 혹은 권위주의 통치를 강화하려는 푸틴의 검은 의도로만 전쟁의 원인을 단순화하지 않는다는 것. 그 대신 저자는 국제관계와 더불어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서구의 국내 정치 변수를 포함해 다각도로 분석한다. 저자에 따르면 장미 혁명, 오렌지 혁명 등 구소련권에서 민주주의 확산은 안보딜레마를 촉발했다. 즉, 서구와 우크라이나는 민주주의 도입이 평화와 번영을 가져올 거라고 확신했지만, 러시아는 이를 자기 세력권의 침해로 인식했다. 특히 자국(自國)에서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를 겪은 푸틴은 이를 정권 안보에 대한 위협으로 봤다. 총칼로 영토를 빼앗던 전통적인 침략 방식이 민주주의 확산으로 치환됐다고 봤다는 것이다. 여기에 상대방에 대한 양보를 꺼리는 우크라이나, 러시아 국민들의 여론이 양국 간 대결을 추동했다. 이에 따라 우크라이나 독립과 러시아의 정체성에 대한 양측의 인식이 바뀌지 않는 한, 설사 푸틴이 물러나더라도 전쟁은 쉽사리 종식되기 어렵다는 것이 저자의 우울한 전망이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24-0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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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의 봄’ 미국은 왜 전두환을 용인했나[김상운의 빽투더퓨처]

    최근 영화 ‘서울의 봄’ 흥행을 계기로 전두환의 12.12 군사쿠데타를 왜 막지 못했는지에 대한 여러 궁금증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그 중에는 당시 한국군의 작전통제권을 쥐고 있던 미국이 쿠데타를 막으려고 했는지, 그렇지 않았다면 왜 그랬는지에 대한 의문도 포함돼 있죠.이는 쿠데타에 이어 이듬해 벌어진 5.18 광주 민주화운동과 연결되는 민감한 사안입니다. 한미관계의 일대 전환이 이뤄진 당시로 시계를 돌려보겠습니다(윌리엄 글라이스틴 전 주한 미국대사 회고록 등 국내외 주요 문헌을 참고했습니다.)美, 반란군 무력 대응에 부정적12.12 당시 미국의 움직임에 대해선 ①미국은 쿠데타를 사전에 인지했지만 전두환 신군부를 도와줬다 ②미국은 쿠데타를 예상하지 못했고 한국의 민주화를 위해 신군부를 견제하려고 했다는 상반된 주장이 있습니다.①은 주로 국내 일부 학자들이, ②는 미국 정부의 공식 입장으로 각각 제기됐죠. 각자 자신의 시각과 관점에서 현상을 바라보니 차이가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지난 40여 년 동안 공개된 자료들이 가리키는 그날의 진실은 무엇일까요.미국 정부를 대표하는 한국 내 양대 축인 주한 미국대사와 주한미군사령관의 증언부터 살펴봐야겠습니다. 우선 사전 인지 여부에 대해선 존 위컴 주한미군사령관이 1999년 펴낸 자신의 회고록(Korea on the Brink: From the 12/12 Incident to the Kwangju Uprising, 1979-1980)에 비교적 자세히 기록을 남겨놓았습니다.이에 따르면 위컴은 1979년 11월 말~12월 초 이형근 당시 합참의장으로부터 “육사 11기와 12기가 주축이 된 소장파 장성들이 현재의 상황과 정치인들에 대해 극도의 불만을 갖고 소요(unrest)와 반란을 조장하고 있다. 대통령 선거 전에 권력쟁취에 나설 가능성이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는 겁니다.위컴은 이 정보를 12월 4일 노재현 국방부 장관과 이후 유병현 연합사 부사령관에게 전달했지만, 한국 정부는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아마도 위컴이 정보를 취득한 11월 말과, 이를 노재현 장관에게 전달한 12월 4일 사이에 본국에도 이를 보고했을 겁니다(노 장관에게 정보를 전달한 것도 본국 지시에 따른 것이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그렇다면 쿠데타 발생 가능성을 인지한 미국은 12월 12일 당일 어떻게 대응했을까. 이날 밤 공교롭게도 노재현 국방장관은 미 8군 벙커로 피신해 위컴과 함께 있었습니다. 한국군 최고 지휘부와 작전통제권을 쥔 미군 지휘부가 한 자리에 있었던 거죠. 두 사람이 그 시각 신군부에 어떻게 대응했느냐에 따라 쿠데타의 향방이 바뀔 수도 있었던 중요한 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무력 대응에 일체 나서지 않습니다.특히 진압에 나선 장태완 수도방위사령관이 이건영 3군 사령관에게 동원을 요청한 수도기계화사단과 26보병 사단은 한미연합사령관인 위컴의 작전통제권 하에 있는 부대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위컴은 “아직 어둡기 때문에 진압군과 반란군 간 오인충돌이 불가피하다”며 노재현 장관에게 부대 이동을 허가하면 안 된다고 말했습니다. 노태우가 전방의 9사단을 무리하게 서울로 진입시킨 상황에서 이런 결정을 내린 건 미국이 애초부터 신군부를 진압할 의사가 없었음을 보여준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죠.그렇다면 미국은 결정적 순간에 왜 반란군 진압을 만류했을까요. 이에 대해 글라이스틴은 회고록에서 남한의 혼란을 틈탄 북한군의 남침 가능성과 5.16 군사쿠데타의 기억이라는 두 가지 이유를 들고 있습니다.그는 “12일 밤과 13일 새벽 북한을 자극할 한국군 간의 충돌과, 민간 정부가 전복돼 한국의 정치적 자유가 무산되는 것 두 가지를 방지하는 데 우선 순위를 두었다. 그러나 둘 중에서도 전자를 특별히 경계했다”고 썼습니다. 다시 말해 남한 군부의 내전을 틈탄 북한군 남침과, 쿠데타에 따른 민주정 붕괴를 막는 게 미국의 목표였지만 무엇보다 안보 위협을 제거하는 게 최우선이었다는 얘깁니다. 그런데 민주정을 지키려면 반란군을 무력으로 진압할 수밖에 없기에 이 두 가지 목표는 서로 상충될 수밖에 없었죠. 결국 당시 미국은 도덕외교 원칙에서 늘 강조하는 ‘민주 가치’를 포기하고 ‘안보 이익’을 택한 겁니다.사실상 12.12 쿠데타 이전부터 미국의 안보 우려는 팽배한 상태였습니다. 1970년대 미중 데탕트로 양국은 한반도 현상유지에 합의했지만, 북한은 이런 구도를 깨기 위해 1976년 판문점 도끼 만행사건 등을 벌이죠. 이런 가운데 10.26 사태가 터지자 미국은 이틀 뒤 ‘날아다니는 전투지휘사령부’로 불리는 AWACS(공중조기경보통제기) 2대와 키티호크 항공모함 등을 한반도로 급파하는 등 대북경계에 적극 나섭니다.글라이스틴이 북한군 남침 우려와 더불어 5.16 군사쿠데타의 기억을 꺼내든 건 당시 미국의 공개적인 반대가 박정희 정권 내내 한미관계가 불편했던 요인이었음을 언급한 겁니다. 5.16 쿠데타 발생 직후 매그루더 미 8군 사령관과 그린 주한미국 대리대사는 “유엔군사령관의 권한 아래 있는 모든 군인들이 장면 총리가 이끄는 한국 정부를 지지할 것을 요청한다”는 성명을 발표했었죠.도덕주의에서 현실주의 외교로 급선회한 미국12.12 쿠데타 발생 당시 미국의 카터 행정부는 역대 어느 대통령보다 도덕주의 외교 원칙을 내세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카터 행정부가 한반도에서 안보 이익을 최우선으로 전두환 신군부를 사실상 용인한 건 선뜻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왜 이런 상황이 벌어진 걸까요. 먼저 10.26 사태 전 한미관계를 돌아보죠.“우리는 민주적 방법이 가장 효과적이라는 것을 믿고, 부도덕한 방법을 동원하지 않을 것이다. 더 이상 공산주의에 대한 터무니 없는 공포 때문에 우리 편에 서기만 하면 어떤 독재자도 받아들이던 관행에서 벗어날 것이다.”(1977년 지미 카터의 대통령 취임 연설)카터 대통령은 반공을 표방한 동맹국이라도 인권을 탄압하는 권위주의 정부를 옹호할 수 없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습니다. 민주와 인권을 강조하는 카터의 도덕외교 원칙은 독실한 기독교인이던 그의 철학에서 비롯된 측면도 있지만, 미국 외교전통의 영향이 컸습니다.신앙의 자유를 찾아 신대륙으로 떠난 청교도 정신이 ‘미국 예외주의(American exceptionalism)’로 발현되면서 민주주의 가치를 관철해야한다는 도덕주의 외교가 미국의 1차 세계대전 참전으로 이어지기도 했죠(12회 <키신저의 ‘현실주의 외교’가 남긴 것들> 참고·https://www.donga.com/news/article/all/20231210/122564144/1) 여기에 닉슨의 워터게이트 사건과 베트남전 패전을 계기로 미국이 도덕주의로 회귀해야한다는 여론이 조성된 것도 영향을 미쳤습니다.카터의 도덕주의 외교 방침은 수사에 그친 게 아니라 실제 정책으로 구현됐습니다. 미국은 1979년 카터 방한을 앞두고 구체적인 인권 향상 조치를 박정희 정부에 요구하죠. 이에 따라 주한미군 철수를 지렛대로 한국 정부로부터 6개월간 180명의 양심수를 석방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냅니다. 또 한국의 인권 상황이 개선되기 전까지 국제금융기구의 차관 제공을 중단하겠다고 압박합니다. 급기야 그해 10월 5일에는 글라이스틴 주한 미국대사를 본국에 소환하는, 전례 없는 결정을 내리기에 이릅니다. 이 같은 미국의 전방위 압박은 군사독재를 반대한 국내 재야세력의 호응으로 이어집니다.그런데 이 같은 워싱턴의 분위기는 10.26 직후 발생한 1979년 11월 ‘이란 인질 사태’로 급변합니다. 그해 이란 혁명으로 집권한 호메이니가 이슬람 정부를 세운 뒤 반미주의를 앞세워 미국 외교관들을 억류한 사건입니다. 중동에서 극렬한 반미정권의 급작스런 등장에 강력한 대응을 촉구하는 현실주의 외교가 미국 외교가에서 득세하기 시작합니다.특히 중동에서 주요 동맹을 잃은 상황에서 동아시아에서 공산진영에 맞서는 한미동맹마저 위태롭게 할 수 없다는 분위기가 팽배해집니다. 1979년 12월 27일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은 한반도를 안정적으로 관리해야한다는 현실주의자들의 목소리가 커지는 배경이 되죠. 이것이 1979년 12월 4일 리처드 홀브룩 국무부 동아태 담당 차관보가 글라이스틴에게 “한국이 제2의 이란이 되지 않도록 필요한 조치를 강구하라”며 한국 정부의 안정을 강조한 배경입니다.미국은 12.12 쿠데타 이후 과거 남미 국가들처럼 ‘역 쿠데타’가 발생해 남한의 정치 불안이 가중될 가능성도 우려하죠. 실제로 위컴은 1980년 1월 말 역 쿠데타를 모의하던 한국군 장성의 지원 요청을 받았지만 이를 거절했다고 증언했습니다. 남한 군부의 내전을 막으려면 기왕에 성립된 전두환 체제를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게 미국의 판단이었습니다.이 같은 미국의 입장은 12.12 쿠데타에 이어 이듬해 5월 발생한 광주 민주화운동에서도 유지되면서 한국에서 반미주의가 폭발하는 계기가 됐습니다. 예를 들어 5월 27일 신군부의 계엄군 투입을 닷새 앞둔 22일 백악관 회의에서 에드먼드 머스키 국무부 장관과 해럴드 브라운 국방부 장관, 즈비그뉴 브레진스키 백악관 국가안보담당 보좌관은 한국 내 질서 회복이 시급하다는 결론을 내립니다. 한국에서 민주주의 회복을 위한 외교적 압력은 정치질서가 회복된 후에나 진행하자는 거였죠.체제안정을 최우선으로 한 미국의 대한(對韓) 정책이 바뀐 건 1987년 민주화 국면이 도래한 이후였습니다. 당시 야권의 직선제 개헌이 전 국민적 호응을 얻자, 릴리 주한 미국대사가 김영삼 당시 신민당 고문을 공개적으로 만나는 등 야당에 힘을 실어줬습니다. 무엇보다 전두환 정권의 계엄군 투입 움직임을 사전에 포착한 미국 정부가 이를 철회시키기 위해 전방위 압력을 가합니다. 결국 안팎의 거센 반발에 직면한 전두환은 계엄령 선포를 포기하고, 직선제 개헌을 수용하기에 이르죠.지금까지 12.12 군사쿠데타 전후 미국의 대한국 정책이 이란혁명과 소련의 아프간 침공 사태 등을 계기로 도덕주의에서 현실주의로 선회한 과정을 자세히 살펴봤습니다. 이 같은 변화는 미국이 쿠데타 대응 과정에서 민주주의 가치보다 안보이익을 추구해 신군부의 집권을 사실상 용인하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그러나 이는 광주민주화운동과 맞물려 한국에서 반미주의를 폭발시키는 계기가 되었고, 1987년 민주화 국면에서는 미국이 전두환 정권의 직선제 개헌을 압박하는 행태로 이어지죠. 사실 미국은 전두환 집권으로 반미주의라는 커다란 부담을 안게 되지만, 전두환의 집권을 인정해주는 대가로 박정희 정부가 비밀리에 추진한 핵무기 및 장거리 미사일 개발을 포기시키는 성과를 거두게 됩니다. 북한의 침략을 막고 경제 번영을 가능케 한 한미동맹의 이면에는 철저한 국익 중심의 현실주의 외교가 자리 잡고 있음을 되새겨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참고 문헌]-박원곤 <1979년 12.12 쿠데타와 카터 미 행정부의 대응: 도덕외교의 타협> (2010년, 국제정치논총 50집 4호)-정일준 <전두환 노태우 정권과 한미관계: 광주항쟁에서 6월 항쟁을 거쳐 6공화국 등장까지> (2010년, 역사비평)-이흥환 <전두환, 정권 승인 대가로 美에 핵포기, 전투기 구매 약속> (2004년, 신동아)“모든 해답은 역사 속에 있다.” 초 단위로 넘치는 온라인 뉴스 속에서 하나의 흐름을 잡기가 갈수록 어려워집니다. 역사를 깊이 들여다보면 연이은 뉴스들 사이에서 하나의 맥락이 보일 수 있습니다. 문화재, 학술 담당으로 역사 분야를 여러 해 취재한 기자가 역사적 사실들을 통해 뉴스를 분석하고, 미래에 대한 인사이트를 찾아보고자 합니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24-0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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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기술문명의 근원엔 너트와 볼트가

    TV와 세탁기, 손목시계, 전화기, 자동차 등 주변 기계장치들을 뜯어보면 한 가지 공통점이 발견된다. 이들 기계 모두 금속판을 붙이는 이음매에 못이나 나사, 리벳, 볼트가 쓰인다는 것. 적어도 지금 21세기에 현존하는 모든 기계장치는 이렇게 돼 있다. 마치 원자가 양성자와 중성자, 전자로 구성돼 있는 것처럼 말이다. 이들 부속품은 인류사의 발전과 더불어 오랜 진화의 단계를 거쳤다. 예컨대 나뭇조각을 잇기 위해 못이 가장 먼저 나왔고, 이보다 더 큰 힘을 지탱하기 위해 나사가 고안됐다. 이어 싼값에 얇은 금속판을 제조하는 기술이 개발되면서 이를 접붙이는 리벳이 발명됐다. 더 나은 기술을 향한 인류의 욕망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더 거대한 배와 다리, 고층 빌딩을 세우기 위해 리벳과 나사를 합친 볼트가 탄생했다. 볼트는 버스 한 대에 해당하는 약 11t의 무게를 버티면서도 설치는 더 쉬운 혁신을 가져왔다. 이 책은 못, 바퀴, 스프링, 자석, 렌즈, 끈, 펌프 등 현대 기술문명을 떠받치는 7개 도구가 어떻게 발명되었고 그 공학적 의미가 무엇인지를 자세히 다루고 있다. 일상생활에서 손쉽게 접하는 평범한 도구 속에 감춰진 가치를 재발견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무엇보다 환경오염을 막기 위해 폐가전제품의 재활용을 촉진하려면 소비자가 이를 구성하는 요소들에 대한 공학적 지식을 갖춰야 한다는 저자의 시각도 참신하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24-0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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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세계인 사로잡은 日 위스키의 창조적 모방

    음식을 보면 그 나라가 보인다는 말은 정확하다. 홍콩이나 싱가포르, 고베 등 아시아의 개항지에는 동서양이 절묘하게 결합된 나름의 음식문화가 있기 마련이지만, 유독 일본만은 특유의 장인정신과 사람을 질리게 만드는 집요한 끈기가 퓨전 음식에도 녹아 있는 것 같다. 이 책은 전직 일본 NHK 서울지국 기자가 쓴 일본 위스키 탐방서다. 저널리스트 출신답게 일본 현지 증류소 22곳을 직접 발로 뛰어 취재한 내용을 빼곡히 담았다. 단순히 증류소 소개에만 그치는 게 아니라, 19세기 중반 개항과 더불어 시작된 일본 위스키의 역사를 통해 본토 스카치위스키를 넘어 ‘저패니스 위스키’로 우뚝 서는 과정을 흥미롭게 그렸다. 일본 위스키도 시작은 미약하나 끝은 창대했다. 탈아입구(脫亞入歐)를 제창하며 서양 흉내내기에 골몰했던 메이지시대 일본인들은 유럽에서 수입한 주정(酒精)에 설탕, 향신료 등을 섞은 ‘가짜 양주’를 위스키로 소비했다. 하지만 서양 주류에 진심이었던 도리이 신지로가 ‘고토부키야 양주점’(산토리의 전신)을 창업하면서 일본식 정통 위스키가 탄생한다. 도리이는 양조장 가문 출신으로 2년 넘게 스코틀랜드에서 위스키 제조법을 배워온 다케쓰루 마사타카를 파격적인 조건으로 영입한 뒤 5년간 비용만 대면서 무작정 기다려준다. 유명한 ‘야마자키 증류소’가 실제 생산에 들어가기까지 수많은 위스키 제조법 실험이 행해진 것. 5년 동안 막대한 양의 보리가 공급됐지만 아무런 제품도 나오지 않자, 인근 주민들 사이에서 증류소에 보리를 먹어대는 괴물이 있다는 소문이 돌 정도였다. 우여곡절 끝에 1929년 첫 위스키 제품이 나오지만 일본인들의 입맛을 사로잡는 데 실패. 결국 몰트위스키와 포트와인을 섞는 개량이 이뤄진 뒤에야 1937년 ‘산토리 가쿠빈’이 출시되며 기사회생하게 된다. 이에 대해 저자는 “스카치위스키를 따라가는 게 아니라 일본인 입맛에 맞는 위스키를 추구해 성공을 거뒀다”고 분석한다. 창조적 모방이 낳은 결실이라는 얘기다. 오카다 데쓰가 쓴 ‘돈가스의 탄생’(2006년)과 함께 읽으면 술과 음식의 궁합처럼 더 큰 재미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24-0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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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화문에서/김상운]외교 대가 키신저가 남긴 한반도 정세의 교훈

    중소 출판사인 김앤김북스가 지난해 8월 번역 출간한 ‘헨리 키신저의 외교’(원제 Diplomacy)는 어렵게 세상에 나왔다. 외교의 대가 키신저가 자신의 대표작으로 꼽은 이 책은 약 900쪽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에 내용도 난해해 1994년 발간 이후 30년 가까이 국내에 소개되지 못했다. 그러다 현직 외교관인 김성훈 씨가 3년간 공을 들인 끝에 최근에야 번역서가 나올 수 있었다. 최근 키신저 별세를 계기로 이 책은 3쇄를 찍으며 독자들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 1970년대 미중 수교의 주역으로 여러 차례 한국 대통령과 만난 저자가 쓴 책답게 미중 갈등이 격화된 가운데 최근 북한의 무력도발로 긴장이 높아진 한반도 정세에도 시사하는 바가 작지 않다. 남북 관계에 큰 파장을 몰고온 미중 화해는 1960년대 사회주의 대국 소련과 중국의 이데올로기 갈등이 국경 분쟁으로 번지면서 가능했다는 게 키신저의 시각이다. 중국 입장에서 소련의 안보 위협이 미국보다 커져 미국이 ‘쐐기전략(wedge strategy·경쟁국과 그 동맹국의 관계를 벌리기 위한 이간책)’을 쓸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실제로 1972년 2월 방중한 닉슨은 저우언라이에게 “소련이 미국의 서유럽 동맹국들에 맞서 배치한 군대보다 더 많은 병력을 중소 국경에 배치했다”고 강조했다. 닉슨은 또 “미중 양국이 각자의 동맹국(남·북한)을 억지하기 위해 영향력을 행사해야 한다. 한반도에서 전쟁이 다시 일어나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미중 양국이 각각 한미동맹과 조중동맹을 통해 남북한의 ‘군사 모험주의’를 억제하자는 얘기였다. 실제로 당시 중국은 미국과 합의한 ‘한반도 현상 유지’를 위해 북한의 무력도발을 억제했다. 예컨대 북한은 미중 화해 국면을 맞아 1976년 판문점 도끼만행 사건을 일으켰지만, 중국의 지지를 얻는 데 실패했다. 대미 위협 인식을 둘러싼 북-중의 견해차는 양국 사이에 긴장을 초래해 북한은 외교적 운신의 폭이 좁아졌다. 예를 들어 허담 북한 외상은 1973년 2월 방중해 미국과의 접촉 가능성을 타진해 달라고 저우언라이에게 요청했지만, 그의 반응은 미지근했다. 북한과의 직접 대화에 부정적이던 미국 역시 허담의 요청에 응하지 않았다. 반대로 미중 갈등이 심화되면서 대미 위협 인식을 고리로 한 북한의 대중(對中) 외교정책은 힘을 받게 됐다. 2018년 김정은과 트럼프의 싱가포르 정상회담처럼 북-미 양자 대화는 중국의 고립감 혹은 조바심을 이끌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미중 데탕트 국면과는 반대로 중국이 북한의 무력도발을 억제할 유인이 사라진다는 뜻이다. 실제로 북한은 중국의 한반도 비핵화 방침에도 불구하고 2006년 이후 여섯 차례나 핵실험을 벌였지만, 안정적인 북-중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최근 점증하는 미중 갈등의 근원에는 냉전 시절 소련에 대한 인식처럼 미국이 중국의 사회주의 독재체제에 품고 있는 혐오가 자리잡고 있다. 이는 키신저의 시각에서 미국의 도덕주의 외교원칙과 맞닿아 있다는 점에서 중소 갈등 같은 돌발변수가 나타나지 않는 한 미중 갈등이 쉽사리 해소되기 어렵다는 얘기다. 바꿔 말하면 미중 데탕트로 억제됐던 북한의 ‘군사 모험주의’가 미중 갈등과 더불어 확대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북한의 최근 해상 무력도발을 예의주시해야 하는 이유다.김상운 문화부 차장 sukim@donga.com}

    • 2024-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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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중갈등은 왜 북한의 무력도발을 자극하는가[김상운의 빽투더퓨처]

    미중 갈등이 격화되는 가운데 북한의 무력도발로 한반도에서 긴장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북한은 5일 서해 백령도, 연평도 부근 북방한계선(NLL) 북쪽 해상에 약 200발의 포탄을 쏜 데 이어 6일에도 연평도 북서쪽 해상에 60여 발을 발사했습니다. 앞서 김정은은 노동당 회의에서 “남조선 전 영토 평정을 위한 대사변을 준비하라”고 위협했죠.역사적으로 미중관계는 남북관계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예컨대 미중관계가 원만할 때는 북한의 군사 모험주의가 중국에 의해 억제됐습니다. 반대로 미중의 상호 불신이 컸던 1950년대에는 북한이 남침을 감행했습니다. 왜 이런 현상이 벌어졌을까요.이를 이해하려면 한국전쟁에서 약 4만 명을 잃은 미국이 20년도 안 돼 중국과 전격적으로 손잡은 배경부터 짚어야 합니다. 미중 데탕트 주역으로 최근 별세한 헨리 키신저(1923~2023)의 시각에서 한국전쟁의 원인을 분석한 13회에 이어 이번에는 당시 전쟁이 소모적인 제한전으로 흐른 배경과, 미중수교 과정을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그때 역사를 잘 들여다보면 현재의 극심한 미중갈등과 이에 따른 한반도의 영향에 대해 의미 있는 통찰을 얻을 수 있을 겁니다(키신저의 대표작 ‘Diplomacy(1994)’를 비롯한 국내외 문헌들을 참고했습니다.)美 도덕주의 원칙이 제한전 수렁으로제2차 세계대전 직후 소련에 대한 봉쇄정책으로 일관한 미국은 국익보다 도덕주의 외교원칙에 입각해 한국전쟁에 개입합니다(시리즈 참고·) 미국 관점에서 지정학적 이익이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한반도에 개입하지 않을 거라고 본 공산 진영의 예상을 뒤엎는 행보였죠. 이른바 윌슨주의 도덕 원칙에 따라 참전을 결정한 만큼 미국의 전쟁 수행 방식도 이런 맥락에서 결정됩니다.1, 2차 대전과 같이 특정국들끼리 군사동맹을 맺어 대항하는 유럽식 세력균형을 혐오한 미국은 우드로 윌슨,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 등을 거치며 집단안보(collective security)를 중시합니다. 편을 갈라 싸우기보다는 무력 침략 등 국제법을 위반한 국가와 맞서기 위해 나머지 국가들이 힘을 합쳐 안보를 보장하겠다는 거였죠. 이는 한국전쟁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1950년 6월 25일 전쟁이 발발하자마자 미국은 즉각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를 소집하고 이틀 뒤 유엔의 대북 군사제재를 규정한 ‘안보리 결의안 제1511호’를 이끌어냅니다. 당시 거부권을 쥔 소련의 유엔대사가 안보리 회의에 불참한 덕분이었죠. 이 결의안에 따라 미국 등 21개 연합국이 동참하면서 한국전쟁은 국제전 성격을 띠게 됩니다. 공산주의 침략국에 맞서 자유진영의 집단안보를 보장하겠다는 원칙을 내세운 거죠.명확한 국가이익보다는 도덕주의 외교 원칙에 따라 뛰어든 전쟁인 만큼 미국에게 한국전쟁의 목표는 모호했다는 게 키신저의 시각입니다. 특히 1950년 10월 19일 중국이 전격적으로 참전한 직후 미국은 전면적 승리에서 한발 물러나 확전을 경계하는 ‘제한전(limited war)’ 논리에 갇히게 됩니다. 2차대전에서 미국 등 연합국이 초기 수세에도 불구하고 나치의 무조건 항복과 완전 승리라는 명확한 목표를 추구한 것과 대비됩니다.미국의 제한전 추구는 한국전쟁에서 소련의 능력과 의도를 과대평가한 영향이 컸습니다. 공산 진영이 한반도를 기점으로 세계적 차원의 총공세를 계획하고 있다고 오판한 거죠. 하지만 전후 소련의 실제 군사력은 미국보다 취약했기에 스탈린은 붉은 군대의 한반도 파병을 회피할 정도로 한국전에서 확전을 두려워했습니다(하지만 중부 및 동부유럽에서 영향력을 확대하려고 허세를 부렸죠: 참고)미국의 제한전 방침은 전선의 교착 상태를 장기화해 소모전으로 흐르는 요인이 됐습니다. 이는 총사령관 맥아더가 우려한 부분이었죠. 맥아더는 “군사작전을 자제한다고 확전 위험이 낮아지는 게 아니다. 오히려 교착상태가 전쟁을 질질 끌기 때문에 더 위험해질 수 있다”고 경고했습니다. 맥아더는 만주 지역 폭격 등 중국과의 전면전이 불가피하다고 봤지만, 트루먼 대통령은 이보다 봉쇄정책의 핵인 유럽에서 소련의 공세를 막는 게 우선이라고 봤습니다. 결국 소련에게 전면전의 빌미를 주면 안 된다는 트루먼의 강력한 방침에 부닥쳐 맥아더는 전쟁 도중 해임됩니다.키신저는 미국의 전쟁 목표가 트루먼과 맥아더의 중간지점에서 절충됐다면 합리적이었을 거라고 봤습니다.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에 도취된 트루먼이 북중 접경지대인 압록강까지 맥아더가 진격할 수 있도록 허용한 게 패착이었다는 겁니다.키신저는 평양 북쪽 청천강과 함흥만을 잇는 선에서 미군이 진격을 멈췄다면 중국의 개입을 억제하면서 남북한 인구의 90%를 흡수하는 성과를 얻었을 거라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이는 오랜 세월 백두산 등 청천강 이북 지역을 역사적 터전으로 삼아온 한국인들의 민족주의 시각으로는 받아들이기 힘든 대안일 겁니다. 최근 우크라이나 전쟁이 장기 소모전에 빠지자, 서방 주요국이 우크라이나에 동부지역 일부를 러시아에 양보하는 절충안을 제안한 것과 유사합니다. 키신저의 현실주의 외교에 대해 철저히 강대국 중심의 세력균형 시각이라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입니다.중소갈등으로 촉발된 미중 화해한국전쟁에서 총부리를 맞댄 미중관계에 훈풍이 불기 시작한 건 미국이 베트남전에서 출구전략을 모색하던 1970년대 초반이었습니다. 당시 미국은 월터 리프먼의 예견대로 대소련 봉쇄정책에 발이 묶여 한반도, 베트남 등 주변부에 연루돼 국력을 소진하는 늪에 빠지게 됩니다(13회 참고) 핵심 전략지역이던 유럽에서 소련과의 일전을 상정한 봉쇄정책에 함몰돼 아시아에서 공산진영의 도발을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겁니다.그런데 이때 수세에 몰린 미국에게 ‘기회의 창’이 열리기 시작합니다. 사회주의 대국 소련과 중국의 이데올로기 갈등이 마침내 국경분쟁으로 번지고 있었던 겁니다. 이에 따라 중국 입장에서 소련의 안보 위협이 미국을 능가하는 상황이 벌어지죠.미국으로서는 ‘쐐기 전략(wedge strategy·경쟁국과 그 동맹국의 관계를 벌리기 위한 이간책)’을 쓸 수 있는 길이 열린 겁니다. 실제로 1972년 2월 미국 대통령 중 최초로 중국을 방문한 닉슨은 저우언라이를 만나 소련군의 중소 국경 배치 정보를 제공하며 “소련이 미국의 서유럽 동맹국들에 맞서 배치한 군대보다 더 많은 병력을 중소 국경에 배치했다”고 강조합니다.( 참고·https://www.donga.com/news/article/all/20230618/119820195/1)사실 2차대전 무렵만 해도 스탈린의 반대를 무릅쓰고 장제스를 카이로회담에 당사자로 초청할 정도로 본래 미중관계는 매우 우호적이었습니다. 하지만 한국전쟁 종전 후 열린 1954년 제네바회의에서 덜레스 국무장관이 저우언라이 총리의 악수를 면전에서 거절할 정도로 양국 관계가 극도로 악화됐죠.미국이 소련에 대한 봉쇄주의 시각의 연장선상에서 중국을 팽창주의와 공산주의 세계혁명에 골몰하는 국가라고 본 것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여기에 소련 전문가들은 미중 화해가 소련의 의구심을 증폭시켜 미소 관계를 악화시킬 거라고 주장했습니다.그러나 키신저가 포진한 닉슨 행정부는 이런 시각을 거부하고 철저히 세력균형 시각에서 중국에 접근하기로 결정합니다. 중국을 끌어들이는 외교 카드가 소련의 공세를 누그러뜨리는 데 도움이 될 거라고 봤기 때문입니다. 이런 예상은 현실에서 적중합니다.1971년 7월 키신저의 비밀 방중 전까지 소련은 1년 넘게 미소 정상회담을 일부러 지연시켰습니다. 회담 개최에 앞서 여러 조건을 내걸며 미국의 양보를 압박하기 위한 거였죠. 하지만 키신저가 중국을 방문한 지 한 달도 안 돼 소련은 입장을 바꿔 닉슨을 모스크바에 초대합니다. 미중 화해에 자극을 받고 미국에 유화적인 자세로 돌아선 겁니다.미중 데탕트의 발단은 1969년 봄 시베리아 우수리강에서 시작됩니다. 당시 이곳의 소련-중국 국경지대에서 교전이 벌어져 사상자가 발생합니다. 당초 미국은 중국이 싸움을 걸었을 거라고 지레짐작했지만, 미소 접촉과정에서 새로운 사실을 접하게 되죠. 소련 당국이 당시 교전 상황을 상세히 알려주면서 중국과 전면전이 벌어질 경우 미국의 대응 방향을 물은 겁니다.이에 미국 정보기관이 우수리강 일대를 샅샅이 훑으면서 교전 지역이 소련의 보급기지와 가깝고 중국 통신기지에서는 먼 곳임을 알아냅니다. 소련이 먼저 도발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증거였죠. 게다가 7000km에 이르는 중소 접경지대에 소련군 40여 개 사단이 무더기로 배치된 정황도 확인됩니다.사회주의 양대 대국 간 전면전 가능성에 직면한 초유의 상황에서 닉슨은 미중 데탕트 국면으로 이어질 결정적 조치를 취합니다. 중국을 공격하면 미국이 개입할 수 있다는 의사를 소련에 전달한 겁니다. 미소 간 세력균형을 위해서는 아무리 공산국가라도 중국이 소련에 점령되는 걸 막아야한다고 본 거죠.1969년 9월 5일 닉슨은 엘리엇 리처드슨 국무부 차관을 통해 “우리는 소련과 중국 간의 적개심을 우리에게 유리하게 활용할 생각이 없다. 두 공산주의 대국 간의 이념적 차이는 우리 관심사가 아니다. 하지만 이런 반복이 고조돼 국제평화와 안보를 심각하게 파괴하는 것에는 깊이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는 메시지를 소련에 보냅니다. 한국전쟁 종전 후 약 20년 동안 외교관계를 단절한 중국에 대해 지원 의사를 밝힌 겁니다. 이에 대해 키신저는 미국이 전후 봉쇄정책과 결별하고, 현실주의 세력균형 외교로 복귀한 거라고 평가합니다.미중갈등으로 고삐 풀린 북한의 ‘군사 모험주의’미중 데탕트는 한반도 정세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습니다. 닉슨은 1972년 중국 방문 당시 “중요한 건 미중 양국이 각자의 동맹국(남·북한)을 억지하기 위해 영향력을 행사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반도에서 전쟁이 다시 일어나서는 안 된다”고 말했습니다. 미중 양국이 각각 한미동맹과 조중동맹의 결박(tethering) 기능을 통해 남북한의 모험주의적 군사행동을 억제하자는 거였죠. 동행한 키신저 역시 저우언라이에게 “미군이 주둔하는 한 남한이 군사분계선을 넘으려는 어떤 시도에 대해서도 미국은 협조하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했습니다.중국은 미중 데탕트를 계기로 대미(對美) 위협인식을 크게 완화할 수 있었습니다. 이에 따라 미국과 합의한 ‘한반도 현상 유지’를 깨는 북한의 무력도발을 억제하고자 했죠. 예컨대 북한은 미중화해 국면을 맞아 1976년 판문점 도끼만행 사건을 일으켰지만, 중국의 지지를 얻는 데 실패합니다.대미 위협인식을 둘러싼 북중의 견해 차이는 양국 사이에 긴장을 초래해 북한은 외교적 운신의 폭이 좁아집니다. 예를 들어 허담 북한 외상은 1973년 2월 방중해 미국과의 접촉 가능성을 타진해 달라고 저우언라이에게 요청했지만, 그의 반응은 미지근했죠. 북한과의 직접 대화에 부정적이던 미국 역시 허담의 요청에 응하지 않았습니다.북한은 1974년 8월 키신저 집무실을 방문한 바실리 풍간 루마니아 대통령 특사를 통해 접촉 의사를 재차 전달했지만, 키신저는 “북미 대화의 성사 여부는 미국이 원하는지에 달렸다. 충분한 검토와 논의를 거쳐야 한다”며 부정적인 태도를 보였습니다. 미중 화해 이후 북미 직접 대화를 통해 새로운 국면을 조성하고자 한 북한의 시도가 양국 모두로부터 차단된 겁니다.숙적 ‘미제’와 화해한 중국에 대해 북한 지도부는 강한 불만을 품었지만, 미중 데탕트는 중국과 소련 모두를 향하고 있었기에 북한은 중국에 정면으로 반기를 들 수 없었습니다. 중소갈등을 이용한 북한의 등거리 외교 공식이 먹히기가 어려워진 거죠.반대로 미중갈등이 심화되면 대미 위협인식을 고리로 한 북한의 대중(對中) 외교정책은 힘을 받게 됩니다. 2018년 김정은과 트럼프의 싱가포르 정상회담처럼 북미 양자 대화는 중국의 고립감 혹은 조바심을 이끌어낼 수 있기 때문이죠.이는 미중 데탕트 국면과는 반대로 중국이 북한의 무력도발을 억제할 유인이 사라진다는 뜻입니다. 실제로 북한은 중국의 한반도 비핵화 방침에도 불구하고 2006년 이후 여섯 차례나 핵실험을 벌였지만, 안정적인 북중관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미중갈등이 대미 위협인식을 고리로 북중관계를 밀착시키는 결과를 낳은 겁니다.지금까지 한국전쟁이 미중 간 제한전으로 흐른 배경과, 양국이 세력균형 관점에서 전격적으로 손을 맞잡은 미중 데탕트 과정을 자세히 살펴보았습니다. 키신저는 닉슨이 2차 대전 후 미국을 강하게 옭아맨 봉쇄정책에서 벗어나 ‘현실주의 세력균형 외교’에 입각해 미중 데탕트를 이뤄냈다고 평가했습니다. 미소 세력균형이 무너지는 걸 막기 위해 과거 전쟁을 치른 공산주의 국가와도 협력했다는 겁니다. 이는 도덕, 가치를 지향하는 미국의 ‘전통적인 자유주의 외교’와 대척점에 있는 결정이었습니다.둘 중 무엇이 더 우월하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최근 점증하는 미중갈등의 근원에는 과거 소련에 대한 시각처럼 미국이 중국의 사회주의 독재체제에 품고 있는 혐오가 자리잡고 있다는 겁니다. 이는 미국의 도덕주의 외교 원칙과 맞닿아 있다는 점에서 중소갈등 같은 거대변수가 나타나지 않는 한 쉽사리 해소되기 어려운 이슈일 겁니다.이것은 미중 데탕트로 억제됐던 북한의 ‘군사 모험주의’가 미중갈등과 더불어 확대될 가능성이 높아졌음을 의미합니다. 5, 6일 북한이 서해 북방한계선(NLL) 근처에서 감행한 포격 도발을 예의주시해야 하는 이유입니다.[참고 문헌]-Henry Kissinger 〈Diplomacy〉 (1994, Simon & Schuster)-Henry Kissinger, 김성훈 역 〈헨리 키신저의 외교〉 (2023, 김앤김북스)-The National Security Archives 〈Nixon‘s Trip to China〉 (https://nsarchive2.gwu.edu/NSAEBB/NSAEBB106/#1)-최명해 〈1960년대 북한의 대중국 동맹딜레마와 ‘계산된 모험주의’〉 (2008, 국제정치논총 제48집 3호)-최명해 〈중국 북한 동맹관계-불편한 동거의 역사〉 (2009, 오름)-김상운 〈미중관계와 북한 대중(對中) 정책의 상관성에 관한 연구〉 (2020, 북한대학원대)“모든 해답은 역사 속에 있다.” 초 단위로 넘치는 온라인 뉴스 속에서 하나의 흐름을 잡기가 갈수록 어려워집니다. 역사를 깊이 들여다보면 연이은 뉴스들 사이에서 하나의 맥락이 보일 수 있습니다. 문화재, 학술 담당으로 역사 분야를 여러 해 취재한 기자가 역사적 사실들을 통해 뉴스를 분석하고, 미래에 대한 인사이트를 찾아보고자 합니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24-0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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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중국이 ‘위안화 띄우기’ 나선 까닭

    “한국은행이 정부로부터는 독립적이지만,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로부터는 그렇지 않다.” 2022년 8월 이창용 한은 총재의 이 발언은 국제 금융시장이 돌아가는 현실 논리를 극명하게 보여줬다. 미국에서 물가가 뛰면서 2022년 3월부터 지난해 7월까지 기준금리를 5%포인트나 끌어올리자, 같은 기간 한은도 경기침체를 감수하며 1.25%에서 3.5%로 금리를 대폭 높였다. 한미 기준금리 차이가 벌어질수록 외국인 투자자들이 안전자산인 달러를 찾아 국내 금융시장에서 돈을 뺄 가능성이 높아져서다. 대부분의 무역, 금융결제가 달러로 이뤄지는 글로벌 경제에서 외자 이탈은 심각한 위기를 초래할 수 있다. 일본 경제 전문 언론인이 쓴 이 책은 달러 패권에 도전하는 중국의 ‘위안화 띄우기’를 최근의 국제 정치 흐름과 맞물려 흥미롭게 다루고 있다. 세계 역사에서 통화는 군사력과 더불어 패권 확보에 핵심적 역할을 해왔다. 강대국들이 지구를 절멸시킬 수 있는 핵무기를 실전에 사용하기 힘든 상황에서 패권 유지 수단으로서 통화의 중요성은 클 수밖에 없다는 게 저자의 시각이다. 실제로 미중 갈등이 격화되면서 양국 간 통화전쟁도 심화되고 있으며, 2022년 2월 우크라이나 전쟁 20일 전 체결된 러-중 공동성명이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는 것이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미국과 유럽의 러시아산 원유 및 천연가스 수입 금지에 대비해 중국이 이를 수입하는 대신 달러가 아닌 위안화나 루블화로 결제하기로 했다. 저자는 “서방의 제재로 지쳐가는 러시아는 중국의 위성국가나 다름없는 상황으로 전락할 운명”이라고 내다봤다. 중국의 위안화 확대는 러시아에 그치지 않는다. 시진핑은 2022년 12월 사우디아라비아를 방문해 석유에 대한 위안화 거래를 제안했다. 산유국들이 받는 위안화는 달러보다 유동성이 떨어지지만, 막대한 물량의 중국산 상품 수입에 사용될 수 있다. 저자는 러시아를 지원하는 중국에 대해 금융제재를 주저하는 미국 바이든 정부의 올해 대선 승리 여부가 미중 통화전쟁의 핵심 변수가 될 것으로 보고 있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24-0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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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화문에서/김상운]경제부처 각료 용인술… 박정희에게 배워라

    1960, 70년대 ‘한강의 기적’을 이끈 경제정책을 하나만 꼽는다면 ‘수출 주도 성장 전략’을 들 수 있다. 한국 산업의 고도화로 이어진 이 정책의 중심에는 상공부(산업통상자원부의 전신)가 있었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이 전직 경제관료 모임인 재경회와 함께 발간한 ‘코리안 미러클’(2013년·나남)에 따르면 1964년 3월 한일 국교 정상화 교섭차 일본 도쿄를 찾은 김정렴 당시 대일청구권 대표위원(훗날 대통령비서실장)이 장기영 한국일보 사장에게 “일본처럼 수출지향 공업화를 해야 경제를 살릴 수 있다”고 제안한 것이 결정적 계기가 됐다. 이로부터 두 달 뒤 박정희 대통령에 의해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으로 임명된 장기영은 김정렴을 상공부 차관에 발탁했다. 이후 소비재 수입품을 국산화하는 수준에 머물던 한국 경제는 수출 주도형으로 바뀌면서 매년 40%가 넘는 고도 성장을 거듭했다. 이는 장 부총리가 박 대통령으로부터 경제부처 각료 임명권을 위임받아 김정렴 등 실력 있는 테크노크라트들을 대거 기용했기에 가능했다. 박정희의 경제각료 용인술은 ‘장기적 시각’과 ‘전폭적 위임’으로 요약된다. 상공부 장관을 거친 김정렴은 9년 3개월간 비서실장으로 일하며 대통령을 지근거리에서 보좌했고, 남덕우 경제기획원 장관은 9년 3개월(재무부 장관 포함) 동안 경제정책을 총괄했다. 또 경제부처 장관은 비서실이 전문성을 검증해 추천한 인사 중 대통령이 지명하고, 차관 이하 인사는 장관에게 전적으로 위임해 부처 장악력을 보장했다. 반백 년 전 이야기를 꺼내 든 것은 내년 총선 차출을 위해 방문규 산업부 장관, 김완섭 기획재정부 2차관, 김오진 국토교통부 1차관, 박성훈 해양수산부 차관 등 주요 경제부처 장차관 4명을 임명 3∼5개월 만에 교체하기로 한 대통령실의 인식이 우려스러워서다. 방 장관의 임기 3개월은 박정희 정부 당시 남덕우 장관 재임 기간의 2.7%에 불과하다. 대통령실과 집권여당의 판단에 따라 장관 휘하의 현직 차관 3명이 총선에 한꺼번에 차출된 것도 이례적이다. 차관 이하 인사를 장관에게 일임한 박정희의 용인술과 비교된다. 내년 총선에 사활을 걸 수밖에 없는 대통령실과 여당의 다급함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방 장관 교체에 대해 “국가 전체로 봤을 때는 크게 ‘데미지’라고 할 건 없다”(대통령실 고위 관계자)라고 말하기에는 현재 산업부가 처한 상황이 엄중하다. 우리 경제는 역대급 무역적자가 이어지는 가운데 미중 갈등으로 공급망 위기를 맞고 있다. 여기에 최근 홍해에서 일어난 예멘 반군의 공격으로 수출 차질이 우려된다. 산업부 산하 공기업인 한국전력은 2021년 2분기부터 올 2분기까지 누적 적자가 47조 원에 달한다. 한전의 천문학적 적자를 해소하기 위한 전기료 인상 등 공공요금 상승 여파로 10월 소비자물가 상승률(3.8%)은 6년 2개월 만에 미국(3.2%)을 앞질렀다. 이 같은 전방위 위기에 산업정책 사령탑은 사실상 공백 상태다. 최근 보호무역주의가 확산되면서 개발경제 시대의 주역이던 산업정책이 선진국에서도 다시 주목받고 있다. 지금의 1등 수출 품목인 반도체 산업은 상공부 주도로 1969년 입안된 ‘전자공업진흥법’과 ‘전자공업진흥 기본계획’에 뿌리를 두고 있다. 3개월짜리 단명 장관으로는 인공지능(AI) 산업혁명과 미중 갈등의 고차 방정식을 풀 수 있는 산업정책을 내놓을 수 없다. 김상운 경제부 차장 sukim@donga.com}

    • 2023-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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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통 키신저가 본 ‘한국전쟁’의 원인은[김상운의 빽투더퓨처]

    미국 현실주의 외교의 거두로 미중 데탕트 주역인 헨리 키신저(1923~2023)는 한국전쟁을 어떻게 봤을까요. 미국과 중국이 한국전쟁의 주요 교전국이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미국은 물론 중국 외교에도 조예가 깊었던 그의 시각이 더 궁금해질 수밖에 없습니다.최근 키신저 별세를 계기로 그의 현실주의 외교가 학문적으로 어떻게 형성되었고, 그것이 현실정치에 끼친 영향을 분석한 ()에 이어 이번에는 그 연장선상에서 한국전쟁의 원인과 배경을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미국 외교 특유의 도덕주의적 원칙주의에 주목하고, 그에 대한 대안을 제시한 키신저의 시각에서 한국전쟁을 보면 전쟁 당사자였던 미국의 움직임이 쉽게 이해될 수 있습니다. 한국전쟁에서 미국의 행태는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이나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에서도 반복되고 있음을 알 수 있죠. 그럼, 한국전쟁을 이해하기 위해 반드시 짚어야 하는 제2차 세계대전 직후로 시계를 돌려보겠습니다(키신저의 대표작 ‘Diplomacy(1994)’를 비롯한 국내외 문헌들을 참고했습니다.)동지에서 적으로…. 미국의 소련관(觀) 변화2차 대전 종전 직후인 1945년 미국에서는 나치에 맞서 함께 등을 맞대고 싸운 전시 동맹 소련의 실체를 놓고 논란이 벌어집니다. 전후 문제를 처리하기 위한 1945년 2월 얄타회담 이전까지만 해도 미국은 나치 패망 후에도 유럽에서 소련과 공존할 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 있었죠. 아직 일본이 무너지기 전이었기에 극동지역에서 소련의 군사적 도움이 필요한 현실적인 이유도 영향을 미쳤습니다.미국식 이상주의와 도덕 원칙에 따라 전후 문제를 처리하고자 한 루스벨트 대통령은 전통적인 세력균형 외교를 거부하고, 집단안보로 평화를 보장하려는 생각이 강했습니다. 반면 여우처럼 눈치가 빨랐던 처칠 수상은 팽창주의 욕구로 들끓던 스탈린의 속내를 정확히 꿰뚫어 보고 있었죠.처칠은 소련이 나치의 군사적 압박에서 완전히 해방되기 전에 중부 및 동부유럽에서 자유진영의 세력권을 공고히 함으로써 스탈린의 야욕을 꺾어야 한다고 봤습니다. 하지만 루스벨트는 처칠의 주장이 소련과의 불필요한 갈등을 야기할 수 있다면서 이를 거부합니다.하지만 처칠의 우려는 곧 현실화하죠. 스탈린이 동유럽 적화(赤化)를 목표로 헝가리, 불가리아, 폴란드 등에서 잇따라 공산주의 독재정권 수립에 나선 겁니다. 소련은 인민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민족주의자 등 좌우를 망라한 연립정권을 세운 뒤 테러 등을 통해 반공 세력을 제거 혹은 흡수하는 과정을 거칩니다. 공산당 특유의 기만전술로 이른바 ‘사이비 연립단계’를 거쳐 공산주의 독재정권을 세운 겁니다( 참고: https://www.donga.com/news/article/all/20230813/120687443/1)여기에 스탈린이 독소전쟁과 비효율적인 사회주의 체제로 취약해진 국력을 가리기 위해 소련의 군사력을 과대 포장하며 공세적인 자세를 취한 것도 미국의 위협인식에 큰 영향을 미칩니다. 스탈린의 허장성세는 미국이 핵무기를 독점적으로 보유한 상황에서도 계속되죠. 1945년 6월 포츠담회담에서 트루먼이 핵무기 개발 사실을 넌지시 알리자, 스탈린은 “개발 소식을 기쁘게 생각하며 핵무기가 일본에 쓰이기를 바란다”며 별것 아닌 것처럼 응수합니다.하지만 사실 소련은 미국, 영국 내 스파이들을 통해 미국의 핵무기 개발 상황을 몰래 정탐하며 자체 핵개발에 전력투구하는 등 바싹 긴장한 상태였죠. 미국에 꿀리는 모습을 보이지 않고 중부 및 동부유럽에서 세력권을 양보하지 않기 위해 일부러 ‘센 척’을 한 겁니다.서구 독점 자본주의 국가들이 이권을 둘러싸고 서로 전쟁(3차 세계대전)을 벌일 거라고 본 스탈린의 마르크스주의 혁명관이 서구와 대결 구도를 형성한 배경이라는 시각도 있습니다. 문제는 미국이 스탈린의 ‘센 척’을 곧이곧대로 믿었다는 겁니다(미국은 전략폭격을 빼면 유럽대륙에서 소련의 육군력이 서방보다 우세하다는 시각을 갖고 있었죠)냉전시대 연 ‘봉쇄정책’의 기원스탈린의 공세적인 태도에 당황한 미국에서는 소련이 친구가 될 수 있는지 아니면 나치처럼 또 하나의 적인지를 놓고 논란이 벌어집니다. 이때 소련 대사관에서 근무하던 주니어 외교관의 보고서 한 통이 워싱턴에 엄청난 파장을 일으키죠. 미국 대소련 봉쇄정책의 시발탄이 된 조지 케넌(George Kennan)의 1946년 2월 보고서 ‘the long telegram(긴 전보)’입니다.케넌은 제정시대까지 소급해 러시아의 역사 전통에 대한 깊이 있는 분석으로 보고서를 시작합니다. 그는 러시아가 유럽부터 중앙, 극동아시아에 이르는 거대한 영토를 끊임없이 추구한 이유를 몽골족 등 아시아 유목민의 침략에 시달린 농경민 특유의 불안에서 찾았습니다. 제정 러시아에서 귀족 등 엘리트 집단이 프랑스어를 공용어처럼 사용한 데에서 알 수 있듯 서유럽보다 근대화에 뒤처진 열등감도 러시아의 불안을 더한 요소였죠.또 거대 인구를 통제하며 전제 군주정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외적 위협을 끊임없이 조장한 행태가 소련의 사회주의 독재체제에도 고스란히 적용된다고 봤습니다. 이에 따라 소련의 팽창주의는 내부 체제에서 기인한 것이기에 미국의 회유가 먹힐 수 없다는 게 케넌이 내린 결론이었습니다. 자유 민주주의 질서에 뿌리를 박고 있는 미국은 철학이나 목적에서 소련과 양립할 수 없다고 본 거죠. 케넌은 미국이 소련과의 긴 투쟁에 나설 채비를 갖춰야한다며 봉쇄정책의 필요성을 주장합니다.이에 대해 키신저는 케넌의 견해가 세력균형을 통한 공존이 아닌, 자유를 억압하는 소련체제 자체의 붕괴를 추구했다는 점에서 미국의 전통적인 이상주의 외교 원칙과 잘 맞는다고 평가합니다. 어찌 보면 이런 행태는 과거 미국이 핵무기로 ‘벼랑 끝 외교’에 나선 북한에 대해 정권교체(regime change)를 검토한 것과도 일맥상통합니다. ‘타협은 없다. 전부 아니면 전무(all or nothing)’라는 식의 미국 특유의 외교원칙이랄까요.케넌의 주창으로 트루먼 행정부가 채택한 봉쇄정책을 놓고 미국 내에서 다양한 비판이 제기됩니다. 미국 언론인 월터 리프먼(Walter Lippmann) 등 현실주의자들은 봉쇄정책이 시간을 끌면서 미국의 국력을 서서히 소진시킬 수 있다고 경고합니다. 특히 소련의 도발로 미국이 멀리 떨어진 주변부에 연루돼 국력을 낭비할 수 있다고 우려했죠. 사실 이런 그의 주장은 한국전쟁이나 베트남전쟁으로 어느 정도 현실화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리프먼은 미국이 주변부에서 힘을 빼지 말고, 미국의 핵심 이익이 걸린 유럽에 집중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키신저는 이런 시각이 미국의 도덕주의 외교원칙과 부합하지 않는다고 평가합니다. 리프먼의 주장에 따르면 미국 관점에서 지정학적 이익이 상대적으로 낮은 한반도에 개입한 것은 국력 낭비에 불과합니다. 현재의 우크라이나 전쟁에 미국이 개입하는 것도 리프먼의 관점에선 높은 점수를 받지 못하겠죠.처칠은 봉쇄정책의 전반적인 취지는 이해했지만 그 방법에 이의를 제기합니다. 소련이 무너질 때까지 무한정 시간을 보낼 게 아니라, 미소 간 군사력 격차가 극대화된 시점(2차대전 종전 직후)에 미국이 대소 견제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는 거였습니다. 그는 소련이 경제적으로 안정화되고 핵무기 개발에 성공하면 미소 간 격차가 좁혀져 갈수록 서방의 협상력이 낮아질 거라고 봤습니다.키신저는 케넌의 소련 인식이 정확했다고 봤지만, 방법론에 있어서는 처칠의 손을 들어주었습니다. 리프먼의 예견대로 봉쇄정책이 미국의 국력을 소진시킨 측면이 있고, 특히 베트남전쟁에 와서는 국내 여론 분열과 미국의 안보 보장에 대한 신뢰성을 실추시켰다는 겁니다.키신저가 본 한국전쟁의 원인키신저는 미국과 공산권의 상호 오인(misperception)이 서로 얽히면서 냉전시대 첫 열전인 한국전쟁이 발발했다고 보았습니다. 우선 소련은 국공 내전에서 중국 공산당의 승리를 사실상 묵인한 미국이 상대적으로 전략적 가치가 떨어지는 한반도 분쟁에 개입하지 않을 거라고 봤습니다. 키신저는 “미국에게는 침략에 대한 저항이라는 도덕적 의무가 전략적 이익보다 더 큰 비중을 차지한다는 사실을 소련이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고 지적했습니다.당시 스탈린의 맞상대였던 트루먼은 철저한 반공주의와 미국 예외주의의 도덕 원칙으로 무장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상원의원 시절 독소전쟁이 일어나자 “만약 독일이 이기고 있는 것처럼 보이면 우리가 소련을 도와줘야 하고, 소련이 이기고 있다면 우리가 독일을 도와줘야 한다. 그런 식으로 둘이 서로 최대한 많이 죽이게 해야 한다”고 말할 정도로 소련 사회주의 독재체제가 나치 못지않게 도덕적으로 타락했다고 봤죠.한국전쟁 발발 이틀 만에 2차대전 종전으로 병력이 대폭 감축된 데다 훈련도 부족했던 주일미군을 한반도로 급파하는, 막중한 결정을 트루먼이 내린 배경입니다. 소련이 제대로 임자를 만난 셈이죠(남한으로선 하늘이 도운 시나리오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하지만 트루먼 이상으로 미국의 한국전쟁 개입을 추동한 건 사실 미국 외교정책의 도덕주의 원칙이었습니다. 전쟁 발발 2개월 전 작성된 미국 국가안전보장회의 보고서(NSC-68)에서 이를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죠.당시 미국의 냉전 전략을 규정한 이 보고서는 체코슬로바키아 공산화를 언급하면서 “자유로운 정치제도가 패배한다면 모든 곳에서 패배하는 것이다. 체코슬로바키아 붕괴에서 우리가 받은 충격은 이 나라가 지닌 물질적 중요성의 잣대로 잴 수 있는 게 아니었다’고 평가했습니다. 이런 도덕주의 외교원칙을 가진 미국이 한반도에서 공산권의 일방적인 무력 침략을 방관하는 건 총체적 외교 실패를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공산권뿐 아니라 미국도 오판을 범합니다. 유럽 중심의 봉쇄정책에 함몰돼 아시아 등 주변부에서 공산권의 도발을 예상치 못한 겁니다. 앞서 리프먼이 예견한 우려가 현실화돼 미국으로선 불의의 일격을 당한 거죠.한국전쟁 5개월 전 애치슨 국무장관이 태평양 방위선에 일본, 필리핀을 포함하면서 한국과 대만을 제외한 것도 유럽 이외 지역의 안보에 대한 미국의 안일한 인식을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이는 스탈린과 김일성이 남침 시 미국의 무력 개입이 이뤄지지 않을 거라고 오판한 근거가 되죠( 참고: https://www.donga.com/news/article/all/20230903/120996577/1)이와 함께 소련, 중국 등 공산권이 자유주의 진영에 대한 총공격의 서막으로서 한국을 침략했다는 트루먼 행정부의 오인이 과잉 대응으로 이어져 중국의 개입을 초래했다는 게 키신저의 시각입니다. 미 7함대를 대만 해역으로 급파하고, 베트남 독립전쟁을 무력으로 대응한 프랑스에 군사원조를 해준 게 대표적입니다.제2차 국공내전에서 막 승리한 직후였던 마오쩌둥에게 미국의 이 같은 조치는 아시아에서 중국을 포위해 장제스의 본토 복귀를 도우려는 의도로 비쳤다는 겁니다. 키신저는 “마오쩌둥으로서는 만약 한국에서 미국을 막지 못하면 중국에서 미국과 싸워야 할지도 모른다고 결론을 내릴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고 말합니다.사실 중국의 한국전쟁 참전 결정 시점과 동기에 대해서는 여전히 학계에서 의견이 분분합니다. 초기 북한군 주도의 전황이 일시에 뒤집힌 인천상륙작전을 참전의 계기로 보는 시각이 있고, 이미 그 전에 결정했다는 주장도 있죠.그런데 앞서 키신저의 지적대로 당시 중국이 국공내전 직후여서 정권 안보가 아직 불안정한 시기였다는 데 대해선 이견이 없습니다. 예컨대 김동길 베이징대 교수는 한국전쟁 당시 중공 정권이 무너지고 장제스가 재집권할 거라는 ‘변천사상’이 기승을 부리자, 미군이 38선을 넘기도 전에 마오쩌둥이 조기 파병 의사를 김일성과 스탈린에게 전달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동유럽 세력 확장에 우선순위를 둔 스탈린이 미국의 손발을 동아시아에 묶어놓기 위해 마오쩌둥의 조기 파병에 부정적이었다는 겁니다.지금까지 2차 세계대전 직후 스탈린의 공세적 태도 등으로 인해 미국의 대소련관이 적대적으로 바뀌면서 봉쇄정책이 발생한 과정과, 이것이 한국전쟁에 끼친 영향을 자세히 들여다봤습니다. 미국의 봉쇄정책이 상정하는 유럽 중심의 전략적 사고로 인해 한반도에서 공산권으로부터 불의의 일격을 당한 것이 한국전쟁이라는 게 키신저의 시각입니다.하지만 그 봉쇄정책을 낳은 미국의 도덕주의 외교원칙으로 인해 소련, 중국의 예상과는 다르게 미국이 한국전쟁에 개입한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할 만합니다. 다음 회에서는 이런 한국전쟁이 소모적인 제한전(limited war)으로 흐른 배경과 더불어 이로부터 18년 뒤 미국이 적국이던 중국과 전격적으로 손을 맞잡은 ‘미중 데탕트’로 나아간 과정을 살펴보겠습니다.[참고 문헌]-Henry Kissinger 〈Diplomacy〉 (1994, Simon & Schuster)-Henry Kissinger, 김성훈 역 <헨리 키신저의 외교> (2023, 김앤김북스)-Henry Kissinger, 이현주 역 <헨리 키신저의 세계 질서> (2016, 민음사)-김동길, 박다정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전후 및 한국전쟁 초기, 중국의 한국전쟁과 참전에 대한 태도 변화와 배경> (2015, 역사학보)“모든 해답은 역사 속에 있다.” 초 단위로 넘치는 온라인 뉴스 속에서 하나의 흐름을 잡기가 갈수록 어려워집니다. 역사를 깊이 들여다보면 연이은 뉴스들 사이에서 하나의 맥락이 보일 수 있습니다. 문화재, 학술 담당으로 역사 분야를 여러 해 취재한 기자가 역사적 사실들을 통해 뉴스를 분석하고, 미래에 대한 인사이트를 찾아보고자 합니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23-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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