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하기
아람코, 네옴 프로젝트, 하마스, 가자지구 전쟁, 에듀케이션시티, 2030 리야드 엑스포….신간은 최근 국제뉴스에서 비중 있게 다뤄지는 중동 이슈들을 현장감 있게 분석했다. 책에는 ‘새벽 어시장의 활어’처럼 살아 있는 정보와 이야기가 넘친다. 심각하고 진지한 이슈와 말랑말랑하고 재미있는 주제가 고르게 담겨 있다. 중동에서 새로운 사건과 변화가 생길 때마다 ‘참고서’로 활용하기에도 좋은 책이다.책에서는 중동의 오랜 갈등인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 분쟁’과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란 간 패권 경쟁’을 분석할 때도 현지인들의 목소리를 생생하게 담았다. 여전히 끝날 기미가 안 보이는 ‘가자지구 전쟁’도 비중 있게 다룬다. 인명을 경시하고, 대안 없는 무력 투쟁을 펼치는 하마스에 비판적이지만, 이스라엘에 대해서는 또 다른 차원의 분노를 가진 아랍 사람들의 정서를 자세히 설명한다. 동시에 지난해 10월 하마스의 공격으로 이스라엘이 겪은 충격과 집요한 보복의 배경도 다양한 각도에서 조망했다. 사우디와 아랍에미리트(UAE) 등 수니파 아랍 왕정 산유국들이 신정 공화정 체제의 시아파 종주국 이란을 두려워할 수밖에 없는 이유도 다양한 사례를 통해 설득력 있게 녹여냈다.‘분쟁’보다 중동의 더 현실적인 고민인 ‘포스트 석유 시대’와 관련된 내용이 풍부하다는 것도 책의 매력 포인트. 사우디 국영 석유기업 아람코의 4차 산업혁명 기술에 대한 파격적인 투자, 이집트가 전통과 문화의 도시 카이로를 대신할 신행정수도 건설에 나선 이유,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살아난 두바이 경제, 이스라엘의 첨단 과학기술 산업, 국부펀드를 통한 중동 산유국들의 영향력 키우기 전략, 사우디 왕세자의 ‘피라미드 만들기’로 여겨지는 네옴 프로젝트 등 한국 경제와 기업에 현실적으로 와 닿는 이야기가 담겼다.저자는 동아일보·채널A 카이로특파원과 국제부 차장을 지냈고, 카타르의 싱크탱크인 아랍조사정책연구원(Arab Center for Research and Policy Studies‧ACRPS)의 방문연구원으로도 활동했다. 한국 기자 중 유일하게 ‘사우디 관광개방’, ‘아람코의 4차 산업혁명 기술 연구개발(R&D)센터’, ‘사우디 미래투자이니셔티브포럼(일명 사막의 다보스 포럼)’ 등을 현장에서 취재했다. 또 ‘두바이 경제위기’, ‘카타르 단교 사태’, ‘중동의 코로나19 팬데믹’, ‘미국과 탈레반 간의 평화협상’ 같은 대형 이슈도 현장에서 취재했다.저자는 “중동에 대한 관심을 가지는 게 국제정세를 이해하고 ‘글로벌 마인드’를 키우는 데 도움이 된다”고 강조한다.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 같이 한반도 정세에 영향을 줄 수 있는 나라들이 모두 중동에 관심이 많기 때문이다. 나아가 영국, 프랑스, 독일 등 이른바 국제사회에서 영향력이 큰 나라들 가운데 중동에 관심이 없는 나라는 없다.저자는 단행본 ‘중동 라이벌리즘’과 ‘있는 그대로 카타르’를 펴냈고, 동아일보 디지털콘텐츠와 신동아에 ‘이세형의 더 가까이 중동’을 연재 중이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주인공이 “와칸다 포에버”를 외치던 영화 ‘블랙팬서’가 구약성경과 이어져있다? 언뜻 전혀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게 이 책 저자의 주장이다. 마치 ‘다빈치코드’처럼 온갖 문화 요소를 종횡무진 잇는 미국 하버드대 영문학과 교수 출신 저자의 설명을 따라가 보자. 우선 영화 ‘블랙팬서’의 모티브가 된 흑인 인권운동 단체 흑표당(black panther party)은 ‘케브라 나가스트’라는 14세기 에티오피아 서사시의 영향을 받았다. 백인들의 서구 기독교 문명이 형성되기 전에 유대왕 다윗의 계보를 잇는 아프리카 기독교 문명이 존재했음을 흑인 운동가들이 주목한 것. 케브라 나가스트에 따르면 기원전 10세기경 유대 왕국을 방문한 에티오피아 여왕(시바)이 다윗의 아들 솔로몬과 관계를 맺고 아이(메넬리크)를 임신한다. 메넬리크는 훗날 예루살렘에서 모세의 언약궤를 훔쳐 어머니의 땅 에티오피아로 가져온다. 유대교의 핵심 상징인 언약궤의 권위를 끌어와 에티오피아의 문화 요소로 재창조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수입한 원형문화에 대한 존중과 부정의 상반된 행태가 동반된다는 점이 흥미롭다. 원형문화의 정통성과 더불어 자신의 고유문화에 대한 독창성을 모두 획득하기 위해서다. 저자는 “케브라 나가스트는 솔로몬 왕의 직계 후손임을 주장하면서도 솔로몬을 시바 여왕을 꼬드겨 성관계를 맺은 죄인으로 묘사하고 있다”고 썼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14세기 고려 금속공예의 정수로 꼽히는 미국 보스턴미술관 소장 ‘은제도금 라마탑형 사리구(舍利具·사리를 보관하는 용기)’가 환수가 아닌 임시 대여로 국내에 들어온다. 다만, 사리구 안에 든 사리는 조계종으로의 기증이 결정됐다. 사리와 사리구의 일괄 환수를 추진하던 정부의 당초 방침에서 후퇴한 것으로, ‘반쪽짜리 환수’라는 지적이 나온다. 문화재청은 “보스턴미술관이 소장한 라마탑형 사리구를 일정 기간 대여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이와 별개로 사리는 조계종에 기증하기로 미술관과 합의했다”고 6일 밝혔다. 고승(高僧) 등의 유골인 사리의 경우 불교에서 성물(聖物)로 여겨진다는 점을 감안해 미술관이 올해 부처님오신날(5월 15일) 이전에 조계종에 기증하기로 했다. 그러나 2009년부터 정부가 환수를 추진한 국보급 유물인 사리구는 임시 대여로 합의됐다. 미술관이 “사리구가 불법으로 유출됐다는 증거가 없는 한 환수에 동의할 수 없다”는 기존 입장을 고수했기 때문이다. 문화재청은 임시 대여 기간에 전시와 보존처리를 진행할 계획이다. 앞서 2009년 미술관은 계속된 반환 요청에 사리만 반환할 수 있다고 제안했으나, 문화재청은 사리와 사리구가 하나의 세트를 이루는 유물이기에 사리만 반환받을 수 없다는 방침을 유지했다. 하지만 지난해 4월 윤석열 대통령 방미를 계기로 김건희 여사가 보스턴미술관장을 만나 사리구 반환 논의 재개를 요청하면서 분위기가 바뀌었다. 이후 조계종 주도로 미술관과의 반환 협상이 이뤄졌다. 문화재계에서는 사리구가 80여 년 만에 국내에서 공개되는 의미는 크지만, 향후 사리구 반환이 더 어려워질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사리구 대신 사리만 가져가라는 미술관의 제안을 결국 받아들인 모양새가 됐기 때문이다. 사리구는 본래 양주 회암사나 개성 화장사에 있었으나,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으로 유출됐다. 보스턴미술관 기록에 따르면 미술관은 1939년 일본의 유명 골동품상인 야마나카 상회로부터 사리구를 구입했다. 문화재계에서는 사리구가 불법으로 밀반출된 증거가 발견되면 보스턴미술관으로부터 반환이 가능할 것으로 보고 있다. 실제로 문정왕후 어보의 경우 6·25전쟁 때 미군 병사에 의해 약탈된 사실이 확인돼 로스앤젤레스(LA) 카운티 박물관으로부터 2017년 환수받았다. 문제는 사리구가 야마나카 상회의 손으로 들어간 경위를 밝히는 자료가 아직 나오지 않았다는 것. 이에 따라 추후 관련 자료가 발견될 때까지 사리구 반환 협상의 끈을 놓지 말아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라마탑형 사리구는 14세기 금속공예품으로 당시 원나라의 강한 영향을 반영해 라마교의 탑 모양을 본떠 제작됐다. 사리구 안에는 팔각지붕 형태의 소형 사리구 5기가 들어 있다. 사리구에 새겨진 명문에 따르면 석가모니와 지공 스님(?∼1363), 나옹 스님(1320∼1376) 등의 사리 19과가 있었으나 현존하는 것은 4과다. 2013년경 사리구를 직접 조사한 주경미 충남대 강사는 “독특한 양식의 국보급 유물로 이런 양식의 고려 금속공예품은 다른 사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라고 평가했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사지원 기자 4g1@donga.com}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남한에 핵 위협을 노골화하는 가운데 딸 주애와 주요 현장을 순시하는 장면이 올해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주애가 후계자인지 여부를 둘러싸고 학계에서 논란이 벌어진 데 이어 지난달 국가정보원은 “현재로선 주애가 유력한 후계자로 보인다”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남성 중심의 북한 사회 속성상 주애를 후계자로 판단하는 건 성급하다고 한 기존 분석을 사실상 수정한 겁니다.11살짜리 아이의 등장이 도대체 무슨 의미이기에 학계와 정부까지 나서 의미 분석에 여념이 없을까요. 북한의 수령제와 세습통치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면 1990년대 중반 김정일이 주석직 승계를 3년간 미룬 것을 놓고 ‘북한 붕괴론’으로 잘못 해석한 것 같은 오류에 빠질 수 있습니다. 2차대전 이후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3대 세습통치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짚어보려면 김일성 집권기로 시계를 돌려봐야 합니다(정치학자 후안 린츠의 저서를 비롯한 국내외 주요 문헌을 참고했습니다.)세습제 단초 제공한 ‘갑산파 숙청’오래전 월남한 북한 출신 인사들의 공통된 증언 중 하나는 “1960년대 초반까지는 북한도 그럭저럭 살만했다”는 겁니다. 이른바 김일성 유일 지배체제가 확립되기 전이어서 사회적 다양성이 티끌이라도 남아있었고, 경제적으로도 어느 정도 여유가 있었다는 얘기죠.하지만 1967년 갑산파 숙청으로 김일성에 반기를 들 수 있는 정파가 모조리 제거되면서 정치·사회적 다양성은 사라지고, 경제는 침체일로를 걷게 됩니다. 갑산파 숙청은 주체사상 태동으로 이어져 세습제로 나아가는 단초가 되죠.1960년대 후반 김일성 유일 지배체제의 다양성 말살은 역사해석에서도 확인됩니다. 1967년 조선로동당 제15차 전원회의 무렵 김일성이 조선시대 실학파에 대한 갑산파의 해석을 강하게 비판한 게 대표적입니다.당시 갑산파는 조선 실학자들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목민심서를 당 간부들의 필독서로 지정했습니다. 1960년대 후반 정체되기 시작한 북한의 사회, 경제체제를 개선하려는 과정에서 조선 성리학의 폐쇄성을 극복하려고 시도한 실학자들의 업적에 주목한 겁니다. 이에 대해 김일성은 갑산파가 사회주의 애국주의를 왜곡해 봉건 유교사상을 부활시켰다고 비판했죠.그런데 김일성 일파가 비판에 나선 진의는 갑산파가 실학자들의 업적을 김일성의 혁명전통과 같은 반열에 올려놓았다는 데 있었습니다. 항일 무장투쟁의 빛나는 전통을 김일성만의 것으로 독점하기 위해 연안파 등 기타 사회주의 세력의 흔적을 역사에서 지운 김일성 일파는 실학자들의 업적도 인정할 수 없었던 겁니다. 조선로동당이 줄곧 비판해온 조선성리학의 폐단을 개선하고자 한 실학자들의 노력마저 ‘반혁명’으로 몰아붙일 정도로 유일 지배체제의 독단성 내지 폐쇄성은 이미 1960년대부터 극에 달했던 셈입니다.술탄주의 국가로서 북한의 특성1960년대 후반 유일 지배체제로 변질된 북한은 술탄주의 국가의 속성을 갖게 됩니다. 정치학자 후안 린츠는 권위주의 정치체제를 통치자의 이데올로기 구속성과 독자적인 시민사회 영역의 존재 여부에 따라 ‘전체주의’(totalitarianism)와 ‘술탄주의’(sultanism)로 구분합니다. 즉, 술탄주의에서는 전체주의와 달리 사회를 지배하는 이데올로기에 정치 지도자가 얽매이지 않으며(집권자의 이데올로기 조작 가능), 그의 강력한 단일적 지배로 인해 최소한의 시민사회 영역조차 존재할 수 없게 되죠. 린츠는 술탄주의 국가는 민주국가로 자발적인 체제전환이 불가능하다고 말합니다.북한은 ▲건국 초 지배 이데올로기였던 마르크스 레닌주의 및 스탈린주의를 유일 지배체제에 합당하도록 수정, 변형해 ‘주체사상’을 내놓은 점 ▲1967년 조선로동당 제15차 전원회의 이후 당 안팎에 독자적인 정치·사회영역이 말살된 점 등을 미뤄볼 때 술탄주의에 가깝다고 볼 수 있습니다.북한 세습통치의 뼈대를 이루는 주체사상은 수령을 당과 국가 위에 군림하는 초월적 존재로 규정합니다. 학계에선 주체사상을 중국 마오쩌둥주의 혹은 소련 스탈린주의의 ‘북한판 변형’으로 보는 시각이 지배적입니다. 이는 김일성이 1956년 8월 종파투쟁을 벌이며 개인숭배를 강화할 수 있었던 배경에 스탈린 개인숭배가 결정적이었다는 점에서도 확인됩니다.그런데 스탈린 사후에 열린 1956년 소련공산당 제20차 대회에서 스탈린 개인숭배에 대한 비판이 본격화하자, 김일성은 일대 혼란에 빠지죠. 노동신문에 연일 스탈린의 동정을 보도하는 등 소련에서 개인독재의 정당성을 찾아온 김일성 일파로서는 일종의 ‘통치 모순’에 맞닥뜨린 겁니다. 1950년대만 해도 말끝마다 민족주체를 내세우는 지금의 북한과는 달리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든 측면에서 소련에 의존적인 행태를 보였었죠.결국 김일성은 종파투쟁을 계기로 갑산파 숙청을 거치며 유일 지배체제로 나아가게 됩니다. 소련의 탈(脫) 스탈린주의로 인해 수령 우위 당국가 체제를 유지하는데 한계에 봉착했기 때문이죠. 정리하면 해방 직후 김일성과 조선로동당이 통치체제의 정당성을 스탈린주의에서 찾았으나, 유일 지배체제가 형성된 후에는 ‘변형된 스탈린주의’랄 수 있는 주체사상을 내세운 겁니다.술탄주의에서 통치자의 이데올로기 조작은 김정일 대에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김정일은 김일성과 16년간 북한을 공동 통치하며 주체사상의 설계와 실행에 주도적으로 참여합니다. 그런데 김일성 사후 1990년대 중반 고난의 행군으로 통치 질서가 흔들리자, 군대를 앞세운 ‘선군사상’을 내놓습니다. 이는 ‘주체사상’에 대한 보조 통치담론으로, 수령-당-인민대중의 3대축을 기반으로 한 주체사상에 어느 정도 수정을 가한 겁니다.김정일보다 승계기간이 훨씬 짧았던 김정은에 이르러서는 김정일이 키운 군부의 권력이 도리어 부담이 됐죠. 이에 ‘인민대중 제일주의’를 내걸고 당의 권한과 지도를 강화해 군부를 견제하는 방향으로 선회합니다. 이처럼 북한에서 수령과 그의 후계자는 주체사상에 대한 독점적 해석권을 갖고 있으며, 자신이 처한 상황에 맞춰 새로운 통치담론을 내놓습니다. 김정은의 딸 주애가 성인이 돼 후계자로 본격적으로 나선다면 또 다른 ‘주애 사상’이 나올 수 있단 얘깁니다.술탄주의의 또 다른 특성인 독자 시민사회 영역의 부재는 북한에서 해방 직후 사회주의 전환이 동구 유럽보다 빠른 속도로 이뤄진 사실에서 확인됩니다. 북한의 경우 폴란드와 같은 무장투쟁 세력이나 조직화된 반공 정치세력이 존재하지 않았고 6.25전쟁 이전에 지주, 종교인, 지식인 등이 대거 월남해 공산화가 큰 저항 없이 순조롭게 추진될 수 있었습니다.권력세습기 엘리트간 갈등 주목술탄주의 국가 북한에서도 권력 투쟁이 벌어집니다. 단, 다른 나라처럼 최고 권력에 대한 도전이 아닌 권력세습기 관료집단 간 충성경쟁이 이뤄집니다( 참고). 독재국가에서 권력승계는 기존 통치연합 내 엘리트 간 권력과 이권이 대규모로 재편되는 과정으로 이 과정에서 치열한 경쟁이 벌어집니다. 북한의 경우 김정일에서 김정은으로 권력이 세습될 당시 군부에 속한 막대한 이권, 특히 와크(무역특권)를 놓고 장성택 세력과 군부가 정면으로 충돌하는 양상을 보였죠.시계를 김정일 생전인 2008년으로 돌려볼까요. 그해 8월 김정일은 뇌경색에 빠져 죽음 직전까지 가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이로 인해 이전에 군부에서 제기했으나 김정일에 의해 중단된 후계 논의가 재개되고, 이듬해 1월 김정은이 후계자로 내정됩니다.김정일은 자신이 죽고 나서 후계체제를 안착시킬 측근으로 매제인 장성택을 선택하죠. 1990년대 중반 ‘고난의 행군’ 당시 선군체제로 위기를 돌파하면서 몸집이 커진 군부를 장성택을 앞세워 견제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한 겁니다. 이후 선군시대를 이끈 3인방 조명록 총정치국장, 김일철 인민무력부장, 김영춘 총참모장이 배제되고 리영호 총참모장, 김영철 총정치국장 등으로 대체됩니다. 이어 군부의 대표적인 외화벌이 업체인 승리무역합영회사를 장성택 휘하의 조선로동당 행정부로 편입합니다. 그 외에도 군부의 각종 이권사업을 빼앗죠.하지만 군부도 당하고만 있진 않았습니다. 2011년 12월 김정일 사망 이후 수령에 오른 김정은은 크게 확대된 장성택 세력을 의심의 시선으로 바라보게 됩니다. 지배연합 내 엘리트들 사이의 힘의 균형을 끊임없이 유지해야하는 수령 독재체제의 기본원리가 작동하기 시작한 거죠.이런 흐름을 군부는 놓치지 않았습니다. 군부와 당 조직지도부 인사들이 연합한 반(反) 장성택 세력이 2013년 12월 8일 조선로동당 정치국 확대회의에서 장성택을 ‘반당 반혁명 종파행위자’로 낙인찍고 닷새 뒤 그를 처형합니다. 장성택 처형 이후 행정부는 조직지도부에 흡수되고, 군부의 무역사업 제한조치는 폐기됩니다.북한 세습통치의 미래는주애로 4대 권력승계가 이뤄진다면 장성택 숙청과 같은 엘리트 간 암투가 재현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 쳇바퀴 같은 북한의 권력세습은 언제까지 유지될까요.린츠에 따르면 민주주의로 체제전환이 가능하려면 지배체제를 대체할 수 있는 대안세력, 즉 독자적인 시민사회 영역이 필수입니다. 문제는 이런 세력이 하루아침에 생기는 게 아니라 공산화 직전의 헝가리나 폴란드, 체코 등에서 볼 수 있듯 일정한 민주주의 경험 내지 자본주의 발전단계를 거쳐야 한다는 겁니다.그러나 식민지배 체제에서 곧바로 사회주의 체제로 이행한 북한의 경우 이 단계를 미처 경험해보지 못했죠. 이처럼 식민지배 체제에서 곧장 근대화로 이행한 술탄주의 체제는 마치 조선왕조와 같이 자생적 체제전환이 사실상 불가능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거칠게 말하면 일제의 침략으로 무너진 조선왕조처럼 불가항력의 외생변수가 작용하지 않는 이상 자생적으로 체제전환을 이루기가 쉽지 않다는 얘깁니다.특히 다원주의가 확보되지 않는 술탄주의 체제에서는 정책실패에 대한 오류를 자체적으로 수정하기가 어렵습니다. 술탄(수령)에 대한 무오류성을 근거로 체제가 유지되기 때문이죠. 이에 따라 지도자의 정책 방향에 대해 체제 내부에서 이의를 제기하기가 극도로 힘든 구조가 됩니다.실제로 1960년대 갑산파의 박금철, 이효순 등이 물질적 자극으로 노동자들에게 동기를 부여하는 것과, 생산은 사회주의로 하되 관리는 자본주의 방식으로 하는 경제정책을 제안했지만 갑산파 숙청과 더불어 폐기됩니다. 이는 1950, 60년대 성장일로를 걷던 북한경제가 점차 쇠퇴하는 분기점이 됐죠. 만약 갑산파의 경제개선 조치가 일정 부분 정책으로 수용됐다면 중공업 우선의 동원형 경제체제(스탈린식 경제체제)가 낳은 다양한 부작용(만성적인 ‘부족경제’ 등)이 어느 정도 완화됐을 겁니다.북한의 술탄주의 체제에서 경제 시스템은 시장화와 복고주의(反 시장화) 노선의 반복을 겪고 있습니다. 과도한 시장화가 자칫 사회주의 당국가 체제의 이완을 가져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1990년대 중반 ‘고난의 행군’ 기간 생존을 위한 ‘아래로부터의 시장화’가 진행된 이후 북한 당국은 2002년 7.1 경제관리 개선 조치로 나아갔지만, 결국 2009년 화폐개혁으로 과도한 시장화에 제동을 걸었죠.특히 고난의 행군 당시 노동신문에는 차관 등 외부 지원에 의한 경제성장이나 시장 활성화 정책에 대해 ‘소극주의’ ‘패배주의’ ‘사대주의’로 비판하는 논설이 줄을 이었습니다. 이에 김정일은 1998년 ‘강계 정신’을 내세우며 자력갱생을 통한 경제위기 극복이라는 복고적인 대안으로 회귀하는 한계를 보였습니다.결국 지배집단 안팎의 견제 세력이 말살된 술탄주의 북한 체제에서 자생적인 체제전환은 쉽지 않아 보입니다. 심각한 체제위기를 맞아 어느 정도의 변화(예컨대 7.1 경제개선 조치)를 시도하더라도 ‘국가 안보’보다 ‘정권 안보’를 우선하는 체제에서는 보수적인 조치로 회귀하는 패턴이 반복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북한의 체제 변화는 외생변수에 의해 촉발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안보 위협의 강도를 높이고 있는 최근 북한의 행태를 더욱 주목해야할 필요가 있을 겁니다.[참고 문헌]-Juan J. Linz & Alfred Stephan <Problems of Democratic Transition and Consolidation>(1996·The Johns Hopkins University Press)-장달중 등 <현대 북한학 강의>(2013년·사회평론)-김일평 등 <북한체제의 수립과정>(1991년·경남대극동문제연구소)-북한연구학회 <북한의 정치>(2006년·경인문화사)-북한연구학회 <김정은 시대의 정치와 외교>(2014년·한울아카데미)“모든 해답은 역사 속에 있다.” 초 단위로 넘치는 온라인 뉴스 속에서 하나의 흐름을 잡기가 갈수록 어려워집니다. 역사를 깊이 들여다보면 연이은 뉴스들 사이에서 하나의 맥락이 보일 수 있습니다. 문화재, 학술 담당으로 역사 분야를 여러 해 취재한 기자가 역사적 사실들을 통해 뉴스를 분석하고, 미래에 대한 인사이트를 찾아보고자 합니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대전(大戰)에는 두 가지 유형의 장수가 있다. 제2차 세계대전에 대입한다면 천재적이지만 다혈질의 야전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와, 야전 능력은 부족하지만 인내심으로 주변 장수들을 묶어낼 수 있는 조지 마셜 같은 부류다. 다이묘들이 맞서며 난세가 펼쳐진 15∼16세기 일본 전국시대(센코쿠시대)에선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후자에 해당하지 않을까. 저자는 나오키상을 수상한 일본 역사소설가로, 이에야스의 일대기를 그린 대하소설을 쓰면서 탐구한 내용을 이 책에 압축적으로 정리했다. 전국시대에 관한 일본 역사학계의 최신 이론을 담아 유럽의 대항해 시대가 당시 일본 열도에 미친 영향을 다각도로 풀어냈다. 예컨대 포르투갈에서 전래된 화승총은 다이묘들의 전투 방식을 획기적으로 바꾸는 계기가 된다. 특히 화승총 제작에 필요한 납을 태국의 송토 광산에서 수입해 오는 등 글로벌 공급망을 활용하기에 이른다. 화승총을 도입해 연전연승한 오다 노부나가에 비해 이에야스는 지략이 떨어져 여러 전투에서 패했고, 영지를 몰수당하는 위기에 처한다. 그럼에도 이에야스가 최후 승자가 된 것은 일본에 정토(淨土)를 세우겠다는 비전을 세우고, 끊임없이 인내하며 신중히 처신했기 때문이라는 것이 저자의 결론이다. 자신에게 패배를 안긴 적장 다케다 신겐의 전투법을 배우며 와신상담한 모습도 인상적이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최근 영화 ‘서울의 봄’을 같이 본 고등학생 아들이 “12·12쿠데타를 왜 막지 못했는지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는다”며 답답해했다. 많은 관객들이 같은 걸 물었을 것이다. 일각에선 한국군의 작전통제권을 쥐고 있던 미국이 쿠데타를 막을 의사가 있었는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쿠데타 발생의 근본 원인은 대개 체제 내부에 있다. 12·12 당시 미국의 움직임을 돌아보는 건 철 지난 반미주의의 변주가 아니다. 이보다는 혈맹에 비견되는 한미 관계 역시 명분과 실리의 줄다리기라는 외교의 본질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되새기기 위해서다. 존 위컴 전 주한미군사령관의 1999년 회고록에 따르면 1979년 12월 12일 밤 노재현 당시 국방부 장관이 미 8군 벙커로 피신해 위컴과 함께 있었다. 한국군과 주한미군 최고 지휘부가 공교롭게 한자리에 있었던 것. 이날 반란군 진압에 나선 장태완 수도방위사령관이 상부에 요청한 수도기계화사단과 26보병사단은 위컴의 작전통제권 아래 있는 병력이었다. 그런데 위컴은 “아직 어둡기 때문에 진압군과 반란군 간 오인 충돌이 불가피하다”며 노 장관에게 부대 이동을 허가하면 안 된다고 말했다. 노태우가 전방의 9사단을 무리하게 서울로 진입시킨 상황에서 이런 결정을 내린 건 미국이 애초부터 신군부를 진압할 의사가 없었음을 보여 준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미국은 결정적 순간에 왜 반란군 진압을 만류했을까. 이에 대해 윌리엄 글라이스틴 당시 주한 미국대사는 회고록에서 “12일 밤과 13일 새벽 북한을 자극할 한국군 간의 충돌과, 민간 정부가 전복돼 한국의 정치적 자유가 무산되는 것 두 가지를 방지하는 데 우선순위를 뒀다. 그러나 둘 중에서도 전자를 특별히 경계했다”고 썼다. 민주정 붕괴보다 남한 군부의 내전을 틈탄 북한군의 남침 방지에 주력했다는 얘기다. 미국이 도덕외교에서 강조하는 ‘민주 가치’를 포기하고 ‘안보 이익’을 택한 셈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당시 지미 카터 행정부는 역대 어느 미국 대통령보다 도덕주의 외교를 내세웠다는 점이다. 카터는 1977년 대통령 취임 연설에서 동맹국이라도 인권을 탄압하는 권위주의 정부를 옹호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이에 미국은 1979년 카터 방한을 앞두고 주한미군 철수를 지렛대로 6개월간 양심수 180명을 석방하겠다는 한국 정부의 약속을 받아냈다. 워싱턴의 이런 분위기는 10·26사태 직후 발생한 1979년 11월 ‘이란 인질 사태’로 급변했다. 중동에서 주요 동맹을 잃은 상황에서 동아시아에서 공산 진영에 맞서는 한미 동맹마저 위태롭게 할 수 없다는 분위기가 팽배해진 것. 그해 12월 소련의 아프간 침공도 한몫했다. 그렇다고 미국이 역대 한미 관계를 국익으로만 접근한 건 아니다. 1950년대 전략적 이익이 크지 않았던 한반도에서 미국이 약 14만 명의 자국민을 희생시키며 6·25전쟁에 개입한 것은 공산권의 침략을 방관하지 않겠다는 도덕주의 외교 원칙에 따른 것이었다. 대한민국 안보의 핵심 축인 한미 동맹의 이면에 도덕주의와 현실주의 외교가 병존함을 직시하고,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대응해야 한다는 게 12·12의 교훈 아닐까. 김상운 문화부 차장 sukim@donga.com}
문호 니콜라이 고골부터 소련시대 지도자 트로츠키, 브레즈네프까지…. 이들의 공통점은 모두 우크라이나인이라는 사실이다. 하지만 동시에 러시아에서도 자기네 문호이자 지도자로 여겨지는 인물들이다. 게다가 우크라이나의 수도 키이우 일대는 러시아 건국신화에서 기원으로 간주된다. 하나의 역사적 뿌리를 둔 두 나라가 3년째 50만 명이 넘는 대규모 사상자를 내며 격렬한 전쟁을 벌이게 된 원인은 무엇일까. 저자는 러시아, 우크라이나를 연구해온 미국 정치학자로 1991년 소련 붕괴 이후 최근까지 양국 관계사를 입체적으로 조명하고 있다. 흔히 지역학 전공자들이 해당 국가의 역사에 천착해 특수성만 강조하기 마련인데, 이 책은 안보딜레마(특정국의 안보를 위한 방어적 행동이 상대국의 안보 불안을 심화시켜 갈등을 초래하는 현상) 같은 국제정치 일반이론을 적절히 결합해 보편성을 지향하는 균형감을 보여주고 있다. 무엇보다 이 책은 서구 관점에서 일방적인 러시아(혹은 푸틴) 책임론으로 기울지 않는 객관적 시각을 내세우고 있다. 다시 말해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맞선 러시아의 팽창주의 혹은 권위주의 통치를 강화하려는 푸틴의 검은 의도로만 전쟁의 원인을 단순화하지 않는다는 것. 그 대신 저자는 국제관계와 더불어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서구의 국내 정치 변수를 포함해 다각도로 분석한다. 저자에 따르면 장미 혁명, 오렌지 혁명 등 구소련권에서 민주주의 확산은 안보딜레마를 촉발했다. 즉, 서구와 우크라이나는 민주주의 도입이 평화와 번영을 가져올 거라고 확신했지만, 러시아는 이를 자기 세력권의 침해로 인식했다. 특히 자국(自國)에서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를 겪은 푸틴은 이를 정권 안보에 대한 위협으로 봤다. 총칼로 영토를 빼앗던 전통적인 침략 방식이 민주주의 확산으로 치환됐다고 봤다는 것이다. 여기에 상대방에 대한 양보를 꺼리는 우크라이나, 러시아 국민들의 여론이 양국 간 대결을 추동했다. 이에 따라 우크라이나 독립과 러시아의 정체성에 대한 양측의 인식이 바뀌지 않는 한, 설사 푸틴이 물러나더라도 전쟁은 쉽사리 종식되기 어렵다는 것이 저자의 우울한 전망이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최근 영화 ‘서울의 봄’ 흥행을 계기로 전두환의 12.12 군사쿠데타를 왜 막지 못했는지에 대한 여러 궁금증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그 중에는 당시 한국군의 작전통제권을 쥐고 있던 미국이 쿠데타를 막으려고 했는지, 그렇지 않았다면 왜 그랬는지에 대한 의문도 포함돼 있죠.이는 쿠데타에 이어 이듬해 벌어진 5.18 광주 민주화운동과 연결되는 민감한 사안입니다. 한미관계의 일대 전환이 이뤄진 당시로 시계를 돌려보겠습니다(윌리엄 글라이스틴 전 주한 미국대사 회고록 등 국내외 주요 문헌을 참고했습니다.)美, 반란군 무력 대응에 부정적12.12 당시 미국의 움직임에 대해선 ①미국은 쿠데타를 사전에 인지했지만 전두환 신군부를 도와줬다 ②미국은 쿠데타를 예상하지 못했고 한국의 민주화를 위해 신군부를 견제하려고 했다는 상반된 주장이 있습니다.①은 주로 국내 일부 학자들이, ②는 미국 정부의 공식 입장으로 각각 제기됐죠. 각자 자신의 시각과 관점에서 현상을 바라보니 차이가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지난 40여 년 동안 공개된 자료들이 가리키는 그날의 진실은 무엇일까요.미국 정부를 대표하는 한국 내 양대 축인 주한 미국대사와 주한미군사령관의 증언부터 살펴봐야겠습니다. 우선 사전 인지 여부에 대해선 존 위컴 주한미군사령관이 1999년 펴낸 자신의 회고록(Korea on the Brink: From the 12/12 Incident to the Kwangju Uprising, 1979-1980)에 비교적 자세히 기록을 남겨놓았습니다.이에 따르면 위컴은 1979년 11월 말~12월 초 이형근 당시 합참의장으로부터 “육사 11기와 12기가 주축이 된 소장파 장성들이 현재의 상황과 정치인들에 대해 극도의 불만을 갖고 소요(unrest)와 반란을 조장하고 있다. 대통령 선거 전에 권력쟁취에 나설 가능성이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는 겁니다.위컴은 이 정보를 12월 4일 노재현 국방부 장관과 이후 유병현 연합사 부사령관에게 전달했지만, 한국 정부는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아마도 위컴이 정보를 취득한 11월 말과, 이를 노재현 장관에게 전달한 12월 4일 사이에 본국에도 이를 보고했을 겁니다(노 장관에게 정보를 전달한 것도 본국 지시에 따른 것이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그렇다면 쿠데타 발생 가능성을 인지한 미국은 12월 12일 당일 어떻게 대응했을까. 이날 밤 공교롭게도 노재현 국방장관은 미 8군 벙커로 피신해 위컴과 함께 있었습니다. 한국군 최고 지휘부와 작전통제권을 쥔 미군 지휘부가 한 자리에 있었던 거죠. 두 사람이 그 시각 신군부에 어떻게 대응했느냐에 따라 쿠데타의 향방이 바뀔 수도 있었던 중요한 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무력 대응에 일체 나서지 않습니다.특히 진압에 나선 장태완 수도방위사령관이 이건영 3군 사령관에게 동원을 요청한 수도기계화사단과 26보병 사단은 한미연합사령관인 위컴의 작전통제권 하에 있는 부대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위컴은 “아직 어둡기 때문에 진압군과 반란군 간 오인충돌이 불가피하다”며 노재현 장관에게 부대 이동을 허가하면 안 된다고 말했습니다. 노태우가 전방의 9사단을 무리하게 서울로 진입시킨 상황에서 이런 결정을 내린 건 미국이 애초부터 신군부를 진압할 의사가 없었음을 보여준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죠.그렇다면 미국은 결정적 순간에 왜 반란군 진압을 만류했을까요. 이에 대해 글라이스틴은 회고록에서 남한의 혼란을 틈탄 북한군의 남침 가능성과 5.16 군사쿠데타의 기억이라는 두 가지 이유를 들고 있습니다.그는 “12일 밤과 13일 새벽 북한을 자극할 한국군 간의 충돌과, 민간 정부가 전복돼 한국의 정치적 자유가 무산되는 것 두 가지를 방지하는 데 우선 순위를 두었다. 그러나 둘 중에서도 전자를 특별히 경계했다”고 썼습니다. 다시 말해 남한 군부의 내전을 틈탄 북한군 남침과, 쿠데타에 따른 민주정 붕괴를 막는 게 미국의 목표였지만 무엇보다 안보 위협을 제거하는 게 최우선이었다는 얘깁니다. 그런데 민주정을 지키려면 반란군을 무력으로 진압할 수밖에 없기에 이 두 가지 목표는 서로 상충될 수밖에 없었죠. 결국 당시 미국은 도덕외교 원칙에서 늘 강조하는 ‘민주 가치’를 포기하고 ‘안보 이익’을 택한 겁니다.사실상 12.12 쿠데타 이전부터 미국의 안보 우려는 팽배한 상태였습니다. 1970년대 미중 데탕트로 양국은 한반도 현상유지에 합의했지만, 북한은 이런 구도를 깨기 위해 1976년 판문점 도끼 만행사건 등을 벌이죠. 이런 가운데 10.26 사태가 터지자 미국은 이틀 뒤 ‘날아다니는 전투지휘사령부’로 불리는 AWACS(공중조기경보통제기) 2대와 키티호크 항공모함 등을 한반도로 급파하는 등 대북경계에 적극 나섭니다.글라이스틴이 북한군 남침 우려와 더불어 5.16 군사쿠데타의 기억을 꺼내든 건 당시 미국의 공개적인 반대가 박정희 정권 내내 한미관계가 불편했던 요인이었음을 언급한 겁니다. 5.16 쿠데타 발생 직후 매그루더 미 8군 사령관과 그린 주한미국 대리대사는 “유엔군사령관의 권한 아래 있는 모든 군인들이 장면 총리가 이끄는 한국 정부를 지지할 것을 요청한다”는 성명을 발표했었죠.도덕주의에서 현실주의 외교로 급선회한 미국12.12 쿠데타 발생 당시 미국의 카터 행정부는 역대 어느 대통령보다 도덕주의 외교 원칙을 내세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카터 행정부가 한반도에서 안보 이익을 최우선으로 전두환 신군부를 사실상 용인한 건 선뜻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왜 이런 상황이 벌어진 걸까요. 먼저 10.26 사태 전 한미관계를 돌아보죠.“우리는 민주적 방법이 가장 효과적이라는 것을 믿고, 부도덕한 방법을 동원하지 않을 것이다. 더 이상 공산주의에 대한 터무니 없는 공포 때문에 우리 편에 서기만 하면 어떤 독재자도 받아들이던 관행에서 벗어날 것이다.”(1977년 지미 카터의 대통령 취임 연설)카터 대통령은 반공을 표방한 동맹국이라도 인권을 탄압하는 권위주의 정부를 옹호할 수 없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습니다. 민주와 인권을 강조하는 카터의 도덕외교 원칙은 독실한 기독교인이던 그의 철학에서 비롯된 측면도 있지만, 미국 외교전통의 영향이 컸습니다.신앙의 자유를 찾아 신대륙으로 떠난 청교도 정신이 ‘미국 예외주의(American exceptionalism)’로 발현되면서 민주주의 가치를 관철해야한다는 도덕주의 외교가 미국의 1차 세계대전 참전으로 이어지기도 했죠(12회 <키신저의 ‘현실주의 외교’가 남긴 것들> 참고·https://www.donga.com/news/article/all/20231210/122564144/1) 여기에 닉슨의 워터게이트 사건과 베트남전 패전을 계기로 미국이 도덕주의로 회귀해야한다는 여론이 조성된 것도 영향을 미쳤습니다.카터의 도덕주의 외교 방침은 수사에 그친 게 아니라 실제 정책으로 구현됐습니다. 미국은 1979년 카터 방한을 앞두고 구체적인 인권 향상 조치를 박정희 정부에 요구하죠. 이에 따라 주한미군 철수를 지렛대로 한국 정부로부터 6개월간 180명의 양심수를 석방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냅니다. 또 한국의 인권 상황이 개선되기 전까지 국제금융기구의 차관 제공을 중단하겠다고 압박합니다. 급기야 그해 10월 5일에는 글라이스틴 주한 미국대사를 본국에 소환하는, 전례 없는 결정을 내리기에 이릅니다. 이 같은 미국의 전방위 압박은 군사독재를 반대한 국내 재야세력의 호응으로 이어집니다.그런데 이 같은 워싱턴의 분위기는 10.26 직후 발생한 1979년 11월 ‘이란 인질 사태’로 급변합니다. 그해 이란 혁명으로 집권한 호메이니가 이슬람 정부를 세운 뒤 반미주의를 앞세워 미국 외교관들을 억류한 사건입니다. 중동에서 극렬한 반미정권의 급작스런 등장에 강력한 대응을 촉구하는 현실주의 외교가 미국 외교가에서 득세하기 시작합니다.특히 중동에서 주요 동맹을 잃은 상황에서 동아시아에서 공산진영에 맞서는 한미동맹마저 위태롭게 할 수 없다는 분위기가 팽배해집니다. 1979년 12월 27일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은 한반도를 안정적으로 관리해야한다는 현실주의자들의 목소리가 커지는 배경이 되죠. 이것이 1979년 12월 4일 리처드 홀브룩 국무부 동아태 담당 차관보가 글라이스틴에게 “한국이 제2의 이란이 되지 않도록 필요한 조치를 강구하라”며 한국 정부의 안정을 강조한 배경입니다.미국은 12.12 쿠데타 이후 과거 남미 국가들처럼 ‘역 쿠데타’가 발생해 남한의 정치 불안이 가중될 가능성도 우려하죠. 실제로 위컴은 1980년 1월 말 역 쿠데타를 모의하던 한국군 장성의 지원 요청을 받았지만 이를 거절했다고 증언했습니다. 남한 군부의 내전을 막으려면 기왕에 성립된 전두환 체제를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게 미국의 판단이었습니다.이 같은 미국의 입장은 12.12 쿠데타에 이어 이듬해 5월 발생한 광주 민주화운동에서도 유지되면서 한국에서 반미주의가 폭발하는 계기가 됐습니다. 예를 들어 5월 27일 신군부의 계엄군 투입을 닷새 앞둔 22일 백악관 회의에서 에드먼드 머스키 국무부 장관과 해럴드 브라운 국방부 장관, 즈비그뉴 브레진스키 백악관 국가안보담당 보좌관은 한국 내 질서 회복이 시급하다는 결론을 내립니다. 한국에서 민주주의 회복을 위한 외교적 압력은 정치질서가 회복된 후에나 진행하자는 거였죠.체제안정을 최우선으로 한 미국의 대한(對韓) 정책이 바뀐 건 1987년 민주화 국면이 도래한 이후였습니다. 당시 야권의 직선제 개헌이 전 국민적 호응을 얻자, 릴리 주한 미국대사가 김영삼 당시 신민당 고문을 공개적으로 만나는 등 야당에 힘을 실어줬습니다. 무엇보다 전두환 정권의 계엄군 투입 움직임을 사전에 포착한 미국 정부가 이를 철회시키기 위해 전방위 압력을 가합니다. 결국 안팎의 거센 반발에 직면한 전두환은 계엄령 선포를 포기하고, 직선제 개헌을 수용하기에 이르죠.지금까지 12.12 군사쿠데타 전후 미국의 대한국 정책이 이란혁명과 소련의 아프간 침공 사태 등을 계기로 도덕주의에서 현실주의로 선회한 과정을 자세히 살펴봤습니다. 이 같은 변화는 미국이 쿠데타 대응 과정에서 민주주의 가치보다 안보이익을 추구해 신군부의 집권을 사실상 용인하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그러나 이는 광주민주화운동과 맞물려 한국에서 반미주의를 폭발시키는 계기가 되었고, 1987년 민주화 국면에서는 미국이 전두환 정권의 직선제 개헌을 압박하는 행태로 이어지죠. 사실 미국은 전두환 집권으로 반미주의라는 커다란 부담을 안게 되지만, 전두환의 집권을 인정해주는 대가로 박정희 정부가 비밀리에 추진한 핵무기 및 장거리 미사일 개발을 포기시키는 성과를 거두게 됩니다. 북한의 침략을 막고 경제 번영을 가능케 한 한미동맹의 이면에는 철저한 국익 중심의 현실주의 외교가 자리 잡고 있음을 되새겨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참고 문헌]-박원곤 <1979년 12.12 쿠데타와 카터 미 행정부의 대응: 도덕외교의 타협> (2010년, 국제정치논총 50집 4호)-정일준 <전두환 노태우 정권과 한미관계: 광주항쟁에서 6월 항쟁을 거쳐 6공화국 등장까지> (2010년, 역사비평)-이흥환 <전두환, 정권 승인 대가로 美에 핵포기, 전투기 구매 약속> (2004년, 신동아)“모든 해답은 역사 속에 있다.” 초 단위로 넘치는 온라인 뉴스 속에서 하나의 흐름을 잡기가 갈수록 어려워집니다. 역사를 깊이 들여다보면 연이은 뉴스들 사이에서 하나의 맥락이 보일 수 있습니다. 문화재, 학술 담당으로 역사 분야를 여러 해 취재한 기자가 역사적 사실들을 통해 뉴스를 분석하고, 미래에 대한 인사이트를 찾아보고자 합니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TV와 세탁기, 손목시계, 전화기, 자동차 등 주변 기계장치들을 뜯어보면 한 가지 공통점이 발견된다. 이들 기계 모두 금속판을 붙이는 이음매에 못이나 나사, 리벳, 볼트가 쓰인다는 것. 적어도 지금 21세기에 현존하는 모든 기계장치는 이렇게 돼 있다. 마치 원자가 양성자와 중성자, 전자로 구성돼 있는 것처럼 말이다. 이들 부속품은 인류사의 발전과 더불어 오랜 진화의 단계를 거쳤다. 예컨대 나뭇조각을 잇기 위해 못이 가장 먼저 나왔고, 이보다 더 큰 힘을 지탱하기 위해 나사가 고안됐다. 이어 싼값에 얇은 금속판을 제조하는 기술이 개발되면서 이를 접붙이는 리벳이 발명됐다. 더 나은 기술을 향한 인류의 욕망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더 거대한 배와 다리, 고층 빌딩을 세우기 위해 리벳과 나사를 합친 볼트가 탄생했다. 볼트는 버스 한 대에 해당하는 약 11t의 무게를 버티면서도 설치는 더 쉬운 혁신을 가져왔다. 이 책은 못, 바퀴, 스프링, 자석, 렌즈, 끈, 펌프 등 현대 기술문명을 떠받치는 7개 도구가 어떻게 발명되었고 그 공학적 의미가 무엇인지를 자세히 다루고 있다. 일상생활에서 손쉽게 접하는 평범한 도구 속에 감춰진 가치를 재발견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무엇보다 환경오염을 막기 위해 폐가전제품의 재활용을 촉진하려면 소비자가 이를 구성하는 요소들에 대한 공학적 지식을 갖춰야 한다는 저자의 시각도 참신하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음식을 보면 그 나라가 보인다는 말은 정확하다. 홍콩이나 싱가포르, 고베 등 아시아의 개항지에는 동서양이 절묘하게 결합된 나름의 음식문화가 있기 마련이지만, 유독 일본만은 특유의 장인정신과 사람을 질리게 만드는 집요한 끈기가 퓨전 음식에도 녹아 있는 것 같다. 이 책은 전직 일본 NHK 서울지국 기자가 쓴 일본 위스키 탐방서다. 저널리스트 출신답게 일본 현지 증류소 22곳을 직접 발로 뛰어 취재한 내용을 빼곡히 담았다. 단순히 증류소 소개에만 그치는 게 아니라, 19세기 중반 개항과 더불어 시작된 일본 위스키의 역사를 통해 본토 스카치위스키를 넘어 ‘저패니스 위스키’로 우뚝 서는 과정을 흥미롭게 그렸다. 일본 위스키도 시작은 미약하나 끝은 창대했다. 탈아입구(脫亞入歐)를 제창하며 서양 흉내내기에 골몰했던 메이지시대 일본인들은 유럽에서 수입한 주정(酒精)에 설탕, 향신료 등을 섞은 ‘가짜 양주’를 위스키로 소비했다. 하지만 서양 주류에 진심이었던 도리이 신지로가 ‘고토부키야 양주점’(산토리의 전신)을 창업하면서 일본식 정통 위스키가 탄생한다. 도리이는 양조장 가문 출신으로 2년 넘게 스코틀랜드에서 위스키 제조법을 배워온 다케쓰루 마사타카를 파격적인 조건으로 영입한 뒤 5년간 비용만 대면서 무작정 기다려준다. 유명한 ‘야마자키 증류소’가 실제 생산에 들어가기까지 수많은 위스키 제조법 실험이 행해진 것. 5년 동안 막대한 양의 보리가 공급됐지만 아무런 제품도 나오지 않자, 인근 주민들 사이에서 증류소에 보리를 먹어대는 괴물이 있다는 소문이 돌 정도였다. 우여곡절 끝에 1929년 첫 위스키 제품이 나오지만 일본인들의 입맛을 사로잡는 데 실패. 결국 몰트위스키와 포트와인을 섞는 개량이 이뤄진 뒤에야 1937년 ‘산토리 가쿠빈’이 출시되며 기사회생하게 된다. 이에 대해 저자는 “스카치위스키를 따라가는 게 아니라 일본인 입맛에 맞는 위스키를 추구해 성공을 거뒀다”고 분석한다. 창조적 모방이 낳은 결실이라는 얘기다. 오카다 데쓰가 쓴 ‘돈가스의 탄생’(2006년)과 함께 읽으면 술과 음식의 궁합처럼 더 큰 재미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중소 출판사인 김앤김북스가 지난해 8월 번역 출간한 ‘헨리 키신저의 외교’(원제 Diplomacy)는 어렵게 세상에 나왔다. 외교의 대가 키신저가 자신의 대표작으로 꼽은 이 책은 약 900쪽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에 내용도 난해해 1994년 발간 이후 30년 가까이 국내에 소개되지 못했다. 그러다 현직 외교관인 김성훈 씨가 3년간 공을 들인 끝에 최근에야 번역서가 나올 수 있었다. 최근 키신저 별세를 계기로 이 책은 3쇄를 찍으며 독자들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 1970년대 미중 수교의 주역으로 여러 차례 한국 대통령과 만난 저자가 쓴 책답게 미중 갈등이 격화된 가운데 최근 북한의 무력도발로 긴장이 높아진 한반도 정세에도 시사하는 바가 작지 않다. 남북 관계에 큰 파장을 몰고온 미중 화해는 1960년대 사회주의 대국 소련과 중국의 이데올로기 갈등이 국경 분쟁으로 번지면서 가능했다는 게 키신저의 시각이다. 중국 입장에서 소련의 안보 위협이 미국보다 커져 미국이 ‘쐐기전략(wedge strategy·경쟁국과 그 동맹국의 관계를 벌리기 위한 이간책)’을 쓸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실제로 1972년 2월 방중한 닉슨은 저우언라이에게 “소련이 미국의 서유럽 동맹국들에 맞서 배치한 군대보다 더 많은 병력을 중소 국경에 배치했다”고 강조했다. 닉슨은 또 “미중 양국이 각자의 동맹국(남·북한)을 억지하기 위해 영향력을 행사해야 한다. 한반도에서 전쟁이 다시 일어나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미중 양국이 각각 한미동맹과 조중동맹을 통해 남북한의 ‘군사 모험주의’를 억제하자는 얘기였다. 실제로 당시 중국은 미국과 합의한 ‘한반도 현상 유지’를 위해 북한의 무력도발을 억제했다. 예컨대 북한은 미중 화해 국면을 맞아 1976년 판문점 도끼만행 사건을 일으켰지만, 중국의 지지를 얻는 데 실패했다. 대미 위협 인식을 둘러싼 북-중의 견해차는 양국 사이에 긴장을 초래해 북한은 외교적 운신의 폭이 좁아졌다. 예를 들어 허담 북한 외상은 1973년 2월 방중해 미국과의 접촉 가능성을 타진해 달라고 저우언라이에게 요청했지만, 그의 반응은 미지근했다. 북한과의 직접 대화에 부정적이던 미국 역시 허담의 요청에 응하지 않았다. 반대로 미중 갈등이 심화되면서 대미 위협 인식을 고리로 한 북한의 대중(對中) 외교정책은 힘을 받게 됐다. 2018년 김정은과 트럼프의 싱가포르 정상회담처럼 북-미 양자 대화는 중국의 고립감 혹은 조바심을 이끌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미중 데탕트 국면과는 반대로 중국이 북한의 무력도발을 억제할 유인이 사라진다는 뜻이다. 실제로 북한은 중국의 한반도 비핵화 방침에도 불구하고 2006년 이후 여섯 차례나 핵실험을 벌였지만, 안정적인 북-중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최근 점증하는 미중 갈등의 근원에는 냉전 시절 소련에 대한 인식처럼 미국이 중국의 사회주의 독재체제에 품고 있는 혐오가 자리잡고 있다. 이는 키신저의 시각에서 미국의 도덕주의 외교원칙과 맞닿아 있다는 점에서 중소 갈등 같은 돌발변수가 나타나지 않는 한 미중 갈등이 쉽사리 해소되기 어렵다는 얘기다. 바꿔 말하면 미중 데탕트로 억제됐던 북한의 ‘군사 모험주의’가 미중 갈등과 더불어 확대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북한의 최근 해상 무력도발을 예의주시해야 하는 이유다.김상운 문화부 차장 sukim@donga.com}
미중 갈등이 격화되는 가운데 북한의 무력도발로 한반도에서 긴장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북한은 5일 서해 백령도, 연평도 부근 북방한계선(NLL) 북쪽 해상에 약 200발의 포탄을 쏜 데 이어 6일에도 연평도 북서쪽 해상에 60여 발을 발사했습니다. 앞서 김정은은 노동당 회의에서 “남조선 전 영토 평정을 위한 대사변을 준비하라”고 위협했죠.역사적으로 미중관계는 남북관계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예컨대 미중관계가 원만할 때는 북한의 군사 모험주의가 중국에 의해 억제됐습니다. 반대로 미중의 상호 불신이 컸던 1950년대에는 북한이 남침을 감행했습니다. 왜 이런 현상이 벌어졌을까요.이를 이해하려면 한국전쟁에서 약 4만 명을 잃은 미국이 20년도 안 돼 중국과 전격적으로 손잡은 배경부터 짚어야 합니다. 미중 데탕트 주역으로 최근 별세한 헨리 키신저(1923~2023)의 시각에서 한국전쟁의 원인을 분석한 13회에 이어 이번에는 당시 전쟁이 소모적인 제한전으로 흐른 배경과, 미중수교 과정을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그때 역사를 잘 들여다보면 현재의 극심한 미중갈등과 이에 따른 한반도의 영향에 대해 의미 있는 통찰을 얻을 수 있을 겁니다(키신저의 대표작 ‘Diplomacy(1994)’를 비롯한 국내외 문헌들을 참고했습니다.)美 도덕주의 원칙이 제한전 수렁으로제2차 세계대전 직후 소련에 대한 봉쇄정책으로 일관한 미국은 국익보다 도덕주의 외교원칙에 입각해 한국전쟁에 개입합니다(시리즈 참고·) 미국 관점에서 지정학적 이익이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한반도에 개입하지 않을 거라고 본 공산 진영의 예상을 뒤엎는 행보였죠. 이른바 윌슨주의 도덕 원칙에 따라 참전을 결정한 만큼 미국의 전쟁 수행 방식도 이런 맥락에서 결정됩니다.1, 2차 대전과 같이 특정국들끼리 군사동맹을 맺어 대항하는 유럽식 세력균형을 혐오한 미국은 우드로 윌슨,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 등을 거치며 집단안보(collective security)를 중시합니다. 편을 갈라 싸우기보다는 무력 침략 등 국제법을 위반한 국가와 맞서기 위해 나머지 국가들이 힘을 합쳐 안보를 보장하겠다는 거였죠. 이는 한국전쟁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1950년 6월 25일 전쟁이 발발하자마자 미국은 즉각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를 소집하고 이틀 뒤 유엔의 대북 군사제재를 규정한 ‘안보리 결의안 제1511호’를 이끌어냅니다. 당시 거부권을 쥔 소련의 유엔대사가 안보리 회의에 불참한 덕분이었죠. 이 결의안에 따라 미국 등 21개 연합국이 동참하면서 한국전쟁은 국제전 성격을 띠게 됩니다. 공산주의 침략국에 맞서 자유진영의 집단안보를 보장하겠다는 원칙을 내세운 거죠.명확한 국가이익보다는 도덕주의 외교 원칙에 따라 뛰어든 전쟁인 만큼 미국에게 한국전쟁의 목표는 모호했다는 게 키신저의 시각입니다. 특히 1950년 10월 19일 중국이 전격적으로 참전한 직후 미국은 전면적 승리에서 한발 물러나 확전을 경계하는 ‘제한전(limited war)’ 논리에 갇히게 됩니다. 2차대전에서 미국 등 연합국이 초기 수세에도 불구하고 나치의 무조건 항복과 완전 승리라는 명확한 목표를 추구한 것과 대비됩니다.미국의 제한전 추구는 한국전쟁에서 소련의 능력과 의도를 과대평가한 영향이 컸습니다. 공산 진영이 한반도를 기점으로 세계적 차원의 총공세를 계획하고 있다고 오판한 거죠. 하지만 전후 소련의 실제 군사력은 미국보다 취약했기에 스탈린은 붉은 군대의 한반도 파병을 회피할 정도로 한국전에서 확전을 두려워했습니다(하지만 중부 및 동부유럽에서 영향력을 확대하려고 허세를 부렸죠: 참고)미국의 제한전 방침은 전선의 교착 상태를 장기화해 소모전으로 흐르는 요인이 됐습니다. 이는 총사령관 맥아더가 우려한 부분이었죠. 맥아더는 “군사작전을 자제한다고 확전 위험이 낮아지는 게 아니다. 오히려 교착상태가 전쟁을 질질 끌기 때문에 더 위험해질 수 있다”고 경고했습니다. 맥아더는 만주 지역 폭격 등 중국과의 전면전이 불가피하다고 봤지만, 트루먼 대통령은 이보다 봉쇄정책의 핵인 유럽에서 소련의 공세를 막는 게 우선이라고 봤습니다. 결국 소련에게 전면전의 빌미를 주면 안 된다는 트루먼의 강력한 방침에 부닥쳐 맥아더는 전쟁 도중 해임됩니다.키신저는 미국의 전쟁 목표가 트루먼과 맥아더의 중간지점에서 절충됐다면 합리적이었을 거라고 봤습니다.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에 도취된 트루먼이 북중 접경지대인 압록강까지 맥아더가 진격할 수 있도록 허용한 게 패착이었다는 겁니다.키신저는 평양 북쪽 청천강과 함흥만을 잇는 선에서 미군이 진격을 멈췄다면 중국의 개입을 억제하면서 남북한 인구의 90%를 흡수하는 성과를 얻었을 거라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이는 오랜 세월 백두산 등 청천강 이북 지역을 역사적 터전으로 삼아온 한국인들의 민족주의 시각으로는 받아들이기 힘든 대안일 겁니다. 최근 우크라이나 전쟁이 장기 소모전에 빠지자, 서방 주요국이 우크라이나에 동부지역 일부를 러시아에 양보하는 절충안을 제안한 것과 유사합니다. 키신저의 현실주의 외교에 대해 철저히 강대국 중심의 세력균형 시각이라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입니다.중소갈등으로 촉발된 미중 화해한국전쟁에서 총부리를 맞댄 미중관계에 훈풍이 불기 시작한 건 미국이 베트남전에서 출구전략을 모색하던 1970년대 초반이었습니다. 당시 미국은 월터 리프먼의 예견대로 대소련 봉쇄정책에 발이 묶여 한반도, 베트남 등 주변부에 연루돼 국력을 소진하는 늪에 빠지게 됩니다(13회 참고) 핵심 전략지역이던 유럽에서 소련과의 일전을 상정한 봉쇄정책에 함몰돼 아시아에서 공산진영의 도발을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겁니다.그런데 이때 수세에 몰린 미국에게 ‘기회의 창’이 열리기 시작합니다. 사회주의 대국 소련과 중국의 이데올로기 갈등이 마침내 국경분쟁으로 번지고 있었던 겁니다. 이에 따라 중국 입장에서 소련의 안보 위협이 미국을 능가하는 상황이 벌어지죠.미국으로서는 ‘쐐기 전략(wedge strategy·경쟁국과 그 동맹국의 관계를 벌리기 위한 이간책)’을 쓸 수 있는 길이 열린 겁니다. 실제로 1972년 2월 미국 대통령 중 최초로 중국을 방문한 닉슨은 저우언라이를 만나 소련군의 중소 국경 배치 정보를 제공하며 “소련이 미국의 서유럽 동맹국들에 맞서 배치한 군대보다 더 많은 병력을 중소 국경에 배치했다”고 강조합니다.( 참고·https://www.donga.com/news/article/all/20230618/119820195/1)사실 2차대전 무렵만 해도 스탈린의 반대를 무릅쓰고 장제스를 카이로회담에 당사자로 초청할 정도로 본래 미중관계는 매우 우호적이었습니다. 하지만 한국전쟁 종전 후 열린 1954년 제네바회의에서 덜레스 국무장관이 저우언라이 총리의 악수를 면전에서 거절할 정도로 양국 관계가 극도로 악화됐죠.미국이 소련에 대한 봉쇄주의 시각의 연장선상에서 중국을 팽창주의와 공산주의 세계혁명에 골몰하는 국가라고 본 것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여기에 소련 전문가들은 미중 화해가 소련의 의구심을 증폭시켜 미소 관계를 악화시킬 거라고 주장했습니다.그러나 키신저가 포진한 닉슨 행정부는 이런 시각을 거부하고 철저히 세력균형 시각에서 중국에 접근하기로 결정합니다. 중국을 끌어들이는 외교 카드가 소련의 공세를 누그러뜨리는 데 도움이 될 거라고 봤기 때문입니다. 이런 예상은 현실에서 적중합니다.1971년 7월 키신저의 비밀 방중 전까지 소련은 1년 넘게 미소 정상회담을 일부러 지연시켰습니다. 회담 개최에 앞서 여러 조건을 내걸며 미국의 양보를 압박하기 위한 거였죠. 하지만 키신저가 중국을 방문한 지 한 달도 안 돼 소련은 입장을 바꿔 닉슨을 모스크바에 초대합니다. 미중 화해에 자극을 받고 미국에 유화적인 자세로 돌아선 겁니다.미중 데탕트의 발단은 1969년 봄 시베리아 우수리강에서 시작됩니다. 당시 이곳의 소련-중국 국경지대에서 교전이 벌어져 사상자가 발생합니다. 당초 미국은 중국이 싸움을 걸었을 거라고 지레짐작했지만, 미소 접촉과정에서 새로운 사실을 접하게 되죠. 소련 당국이 당시 교전 상황을 상세히 알려주면서 중국과 전면전이 벌어질 경우 미국의 대응 방향을 물은 겁니다.이에 미국 정보기관이 우수리강 일대를 샅샅이 훑으면서 교전 지역이 소련의 보급기지와 가깝고 중국 통신기지에서는 먼 곳임을 알아냅니다. 소련이 먼저 도발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증거였죠. 게다가 7000km에 이르는 중소 접경지대에 소련군 40여 개 사단이 무더기로 배치된 정황도 확인됩니다.사회주의 양대 대국 간 전면전 가능성에 직면한 초유의 상황에서 닉슨은 미중 데탕트 국면으로 이어질 결정적 조치를 취합니다. 중국을 공격하면 미국이 개입할 수 있다는 의사를 소련에 전달한 겁니다. 미소 간 세력균형을 위해서는 아무리 공산국가라도 중국이 소련에 점령되는 걸 막아야한다고 본 거죠.1969년 9월 5일 닉슨은 엘리엇 리처드슨 국무부 차관을 통해 “우리는 소련과 중국 간의 적개심을 우리에게 유리하게 활용할 생각이 없다. 두 공산주의 대국 간의 이념적 차이는 우리 관심사가 아니다. 하지만 이런 반복이 고조돼 국제평화와 안보를 심각하게 파괴하는 것에는 깊이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는 메시지를 소련에 보냅니다. 한국전쟁 종전 후 약 20년 동안 외교관계를 단절한 중국에 대해 지원 의사를 밝힌 겁니다. 이에 대해 키신저는 미국이 전후 봉쇄정책과 결별하고, 현실주의 세력균형 외교로 복귀한 거라고 평가합니다.미중갈등으로 고삐 풀린 북한의 ‘군사 모험주의’미중 데탕트는 한반도 정세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습니다. 닉슨은 1972년 중국 방문 당시 “중요한 건 미중 양국이 각자의 동맹국(남·북한)을 억지하기 위해 영향력을 행사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반도에서 전쟁이 다시 일어나서는 안 된다”고 말했습니다. 미중 양국이 각각 한미동맹과 조중동맹의 결박(tethering) 기능을 통해 남북한의 모험주의적 군사행동을 억제하자는 거였죠. 동행한 키신저 역시 저우언라이에게 “미군이 주둔하는 한 남한이 군사분계선을 넘으려는 어떤 시도에 대해서도 미국은 협조하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했습니다.중국은 미중 데탕트를 계기로 대미(對美) 위협인식을 크게 완화할 수 있었습니다. 이에 따라 미국과 합의한 ‘한반도 현상 유지’를 깨는 북한의 무력도발을 억제하고자 했죠. 예컨대 북한은 미중화해 국면을 맞아 1976년 판문점 도끼만행 사건을 일으켰지만, 중국의 지지를 얻는 데 실패합니다.대미 위협인식을 둘러싼 북중의 견해 차이는 양국 사이에 긴장을 초래해 북한은 외교적 운신의 폭이 좁아집니다. 예를 들어 허담 북한 외상은 1973년 2월 방중해 미국과의 접촉 가능성을 타진해 달라고 저우언라이에게 요청했지만, 그의 반응은 미지근했죠. 북한과의 직접 대화에 부정적이던 미국 역시 허담의 요청에 응하지 않았습니다.북한은 1974년 8월 키신저 집무실을 방문한 바실리 풍간 루마니아 대통령 특사를 통해 접촉 의사를 재차 전달했지만, 키신저는 “북미 대화의 성사 여부는 미국이 원하는지에 달렸다. 충분한 검토와 논의를 거쳐야 한다”며 부정적인 태도를 보였습니다. 미중 화해 이후 북미 직접 대화를 통해 새로운 국면을 조성하고자 한 북한의 시도가 양국 모두로부터 차단된 겁니다.숙적 ‘미제’와 화해한 중국에 대해 북한 지도부는 강한 불만을 품었지만, 미중 데탕트는 중국과 소련 모두를 향하고 있었기에 북한은 중국에 정면으로 반기를 들 수 없었습니다. 중소갈등을 이용한 북한의 등거리 외교 공식이 먹히기가 어려워진 거죠.반대로 미중갈등이 심화되면 대미 위협인식을 고리로 한 북한의 대중(對中) 외교정책은 힘을 받게 됩니다. 2018년 김정은과 트럼프의 싱가포르 정상회담처럼 북미 양자 대화는 중국의 고립감 혹은 조바심을 이끌어낼 수 있기 때문이죠.이는 미중 데탕트 국면과는 반대로 중국이 북한의 무력도발을 억제할 유인이 사라진다는 뜻입니다. 실제로 북한은 중국의 한반도 비핵화 방침에도 불구하고 2006년 이후 여섯 차례나 핵실험을 벌였지만, 안정적인 북중관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미중갈등이 대미 위협인식을 고리로 북중관계를 밀착시키는 결과를 낳은 겁니다.지금까지 한국전쟁이 미중 간 제한전으로 흐른 배경과, 양국이 세력균형 관점에서 전격적으로 손을 맞잡은 미중 데탕트 과정을 자세히 살펴보았습니다. 키신저는 닉슨이 2차 대전 후 미국을 강하게 옭아맨 봉쇄정책에서 벗어나 ‘현실주의 세력균형 외교’에 입각해 미중 데탕트를 이뤄냈다고 평가했습니다. 미소 세력균형이 무너지는 걸 막기 위해 과거 전쟁을 치른 공산주의 국가와도 협력했다는 겁니다. 이는 도덕, 가치를 지향하는 미국의 ‘전통적인 자유주의 외교’와 대척점에 있는 결정이었습니다.둘 중 무엇이 더 우월하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최근 점증하는 미중갈등의 근원에는 과거 소련에 대한 시각처럼 미국이 중국의 사회주의 독재체제에 품고 있는 혐오가 자리잡고 있다는 겁니다. 이는 미국의 도덕주의 외교 원칙과 맞닿아 있다는 점에서 중소갈등 같은 거대변수가 나타나지 않는 한 쉽사리 해소되기 어려운 이슈일 겁니다.이것은 미중 데탕트로 억제됐던 북한의 ‘군사 모험주의’가 미중갈등과 더불어 확대될 가능성이 높아졌음을 의미합니다. 5, 6일 북한이 서해 북방한계선(NLL) 근처에서 감행한 포격 도발을 예의주시해야 하는 이유입니다.[참고 문헌]-Henry Kissinger 〈Diplomacy〉 (1994, Simon & Schuster)-Henry Kissinger, 김성훈 역 〈헨리 키신저의 외교〉 (2023, 김앤김북스)-The National Security Archives 〈Nixon‘s Trip to China〉 (https://nsarchive2.gwu.edu/NSAEBB/NSAEBB106/#1)-최명해 〈1960년대 북한의 대중국 동맹딜레마와 ‘계산된 모험주의’〉 (2008, 국제정치논총 제48집 3호)-최명해 〈중국 북한 동맹관계-불편한 동거의 역사〉 (2009, 오름)-김상운 〈미중관계와 북한 대중(對中) 정책의 상관성에 관한 연구〉 (2020, 북한대학원대)“모든 해답은 역사 속에 있다.” 초 단위로 넘치는 온라인 뉴스 속에서 하나의 흐름을 잡기가 갈수록 어려워집니다. 역사를 깊이 들여다보면 연이은 뉴스들 사이에서 하나의 맥락이 보일 수 있습니다. 문화재, 학술 담당으로 역사 분야를 여러 해 취재한 기자가 역사적 사실들을 통해 뉴스를 분석하고, 미래에 대한 인사이트를 찾아보고자 합니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한국은행이 정부로부터는 독립적이지만,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로부터는 그렇지 않다.” 2022년 8월 이창용 한은 총재의 이 발언은 국제 금융시장이 돌아가는 현실 논리를 극명하게 보여줬다. 미국에서 물가가 뛰면서 2022년 3월부터 지난해 7월까지 기준금리를 5%포인트나 끌어올리자, 같은 기간 한은도 경기침체를 감수하며 1.25%에서 3.5%로 금리를 대폭 높였다. 한미 기준금리 차이가 벌어질수록 외국인 투자자들이 안전자산인 달러를 찾아 국내 금융시장에서 돈을 뺄 가능성이 높아져서다. 대부분의 무역, 금융결제가 달러로 이뤄지는 글로벌 경제에서 외자 이탈은 심각한 위기를 초래할 수 있다. 일본 경제 전문 언론인이 쓴 이 책은 달러 패권에 도전하는 중국의 ‘위안화 띄우기’를 최근의 국제 정치 흐름과 맞물려 흥미롭게 다루고 있다. 세계 역사에서 통화는 군사력과 더불어 패권 확보에 핵심적 역할을 해왔다. 강대국들이 지구를 절멸시킬 수 있는 핵무기를 실전에 사용하기 힘든 상황에서 패권 유지 수단으로서 통화의 중요성은 클 수밖에 없다는 게 저자의 시각이다. 실제로 미중 갈등이 격화되면서 양국 간 통화전쟁도 심화되고 있으며, 2022년 2월 우크라이나 전쟁 20일 전 체결된 러-중 공동성명이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는 것이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미국과 유럽의 러시아산 원유 및 천연가스 수입 금지에 대비해 중국이 이를 수입하는 대신 달러가 아닌 위안화나 루블화로 결제하기로 했다. 저자는 “서방의 제재로 지쳐가는 러시아는 중국의 위성국가나 다름없는 상황으로 전락할 운명”이라고 내다봤다. 중국의 위안화 확대는 러시아에 그치지 않는다. 시진핑은 2022년 12월 사우디아라비아를 방문해 석유에 대한 위안화 거래를 제안했다. 산유국들이 받는 위안화는 달러보다 유동성이 떨어지지만, 막대한 물량의 중국산 상품 수입에 사용될 수 있다. 저자는 러시아를 지원하는 중국에 대해 금융제재를 주저하는 미국 바이든 정부의 올해 대선 승리 여부가 미중 통화전쟁의 핵심 변수가 될 것으로 보고 있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1960, 70년대 ‘한강의 기적’을 이끈 경제정책을 하나만 꼽는다면 ‘수출 주도 성장 전략’을 들 수 있다. 한국 산업의 고도화로 이어진 이 정책의 중심에는 상공부(산업통상자원부의 전신)가 있었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이 전직 경제관료 모임인 재경회와 함께 발간한 ‘코리안 미러클’(2013년·나남)에 따르면 1964년 3월 한일 국교 정상화 교섭차 일본 도쿄를 찾은 김정렴 당시 대일청구권 대표위원(훗날 대통령비서실장)이 장기영 한국일보 사장에게 “일본처럼 수출지향 공업화를 해야 경제를 살릴 수 있다”고 제안한 것이 결정적 계기가 됐다. 이로부터 두 달 뒤 박정희 대통령에 의해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으로 임명된 장기영은 김정렴을 상공부 차관에 발탁했다. 이후 소비재 수입품을 국산화하는 수준에 머물던 한국 경제는 수출 주도형으로 바뀌면서 매년 40%가 넘는 고도 성장을 거듭했다. 이는 장 부총리가 박 대통령으로부터 경제부처 각료 임명권을 위임받아 김정렴 등 실력 있는 테크노크라트들을 대거 기용했기에 가능했다. 박정희의 경제각료 용인술은 ‘장기적 시각’과 ‘전폭적 위임’으로 요약된다. 상공부 장관을 거친 김정렴은 9년 3개월간 비서실장으로 일하며 대통령을 지근거리에서 보좌했고, 남덕우 경제기획원 장관은 9년 3개월(재무부 장관 포함) 동안 경제정책을 총괄했다. 또 경제부처 장관은 비서실이 전문성을 검증해 추천한 인사 중 대통령이 지명하고, 차관 이하 인사는 장관에게 전적으로 위임해 부처 장악력을 보장했다. 반백 년 전 이야기를 꺼내 든 것은 내년 총선 차출을 위해 방문규 산업부 장관, 김완섭 기획재정부 2차관, 김오진 국토교통부 1차관, 박성훈 해양수산부 차관 등 주요 경제부처 장차관 4명을 임명 3∼5개월 만에 교체하기로 한 대통령실의 인식이 우려스러워서다. 방 장관의 임기 3개월은 박정희 정부 당시 남덕우 장관 재임 기간의 2.7%에 불과하다. 대통령실과 집권여당의 판단에 따라 장관 휘하의 현직 차관 3명이 총선에 한꺼번에 차출된 것도 이례적이다. 차관 이하 인사를 장관에게 일임한 박정희의 용인술과 비교된다. 내년 총선에 사활을 걸 수밖에 없는 대통령실과 여당의 다급함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방 장관 교체에 대해 “국가 전체로 봤을 때는 크게 ‘데미지’라고 할 건 없다”(대통령실 고위 관계자)라고 말하기에는 현재 산업부가 처한 상황이 엄중하다. 우리 경제는 역대급 무역적자가 이어지는 가운데 미중 갈등으로 공급망 위기를 맞고 있다. 여기에 최근 홍해에서 일어난 예멘 반군의 공격으로 수출 차질이 우려된다. 산업부 산하 공기업인 한국전력은 2021년 2분기부터 올 2분기까지 누적 적자가 47조 원에 달한다. 한전의 천문학적 적자를 해소하기 위한 전기료 인상 등 공공요금 상승 여파로 10월 소비자물가 상승률(3.8%)은 6년 2개월 만에 미국(3.2%)을 앞질렀다. 이 같은 전방위 위기에 산업정책 사령탑은 사실상 공백 상태다. 최근 보호무역주의가 확산되면서 개발경제 시대의 주역이던 산업정책이 선진국에서도 다시 주목받고 있다. 지금의 1등 수출 품목인 반도체 산업은 상공부 주도로 1969년 입안된 ‘전자공업진흥법’과 ‘전자공업진흥 기본계획’에 뿌리를 두고 있다. 3개월짜리 단명 장관으로는 인공지능(AI) 산업혁명과 미중 갈등의 고차 방정식을 풀 수 있는 산업정책을 내놓을 수 없다. 김상운 경제부 차장 sukim@donga.com}
미국 현실주의 외교의 거두로 미중 데탕트 주역인 헨리 키신저(1923~2023)는 한국전쟁을 어떻게 봤을까요. 미국과 중국이 한국전쟁의 주요 교전국이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미국은 물론 중국 외교에도 조예가 깊었던 그의 시각이 더 궁금해질 수밖에 없습니다.최근 키신저 별세를 계기로 그의 현실주의 외교가 학문적으로 어떻게 형성되었고, 그것이 현실정치에 끼친 영향을 분석한 ()에 이어 이번에는 그 연장선상에서 한국전쟁의 원인과 배경을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미국 외교 특유의 도덕주의적 원칙주의에 주목하고, 그에 대한 대안을 제시한 키신저의 시각에서 한국전쟁을 보면 전쟁 당사자였던 미국의 움직임이 쉽게 이해될 수 있습니다. 한국전쟁에서 미국의 행태는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이나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에서도 반복되고 있음을 알 수 있죠. 그럼, 한국전쟁을 이해하기 위해 반드시 짚어야 하는 제2차 세계대전 직후로 시계를 돌려보겠습니다(키신저의 대표작 ‘Diplomacy(1994)’를 비롯한 국내외 문헌들을 참고했습니다.)동지에서 적으로…. 미국의 소련관(觀) 변화2차 대전 종전 직후인 1945년 미국에서는 나치에 맞서 함께 등을 맞대고 싸운 전시 동맹 소련의 실체를 놓고 논란이 벌어집니다. 전후 문제를 처리하기 위한 1945년 2월 얄타회담 이전까지만 해도 미국은 나치 패망 후에도 유럽에서 소련과 공존할 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 있었죠. 아직 일본이 무너지기 전이었기에 극동지역에서 소련의 군사적 도움이 필요한 현실적인 이유도 영향을 미쳤습니다.미국식 이상주의와 도덕 원칙에 따라 전후 문제를 처리하고자 한 루스벨트 대통령은 전통적인 세력균형 외교를 거부하고, 집단안보로 평화를 보장하려는 생각이 강했습니다. 반면 여우처럼 눈치가 빨랐던 처칠 수상은 팽창주의 욕구로 들끓던 스탈린의 속내를 정확히 꿰뚫어 보고 있었죠.처칠은 소련이 나치의 군사적 압박에서 완전히 해방되기 전에 중부 및 동부유럽에서 자유진영의 세력권을 공고히 함으로써 스탈린의 야욕을 꺾어야 한다고 봤습니다. 하지만 루스벨트는 처칠의 주장이 소련과의 불필요한 갈등을 야기할 수 있다면서 이를 거부합니다.하지만 처칠의 우려는 곧 현실화하죠. 스탈린이 동유럽 적화(赤化)를 목표로 헝가리, 불가리아, 폴란드 등에서 잇따라 공산주의 독재정권 수립에 나선 겁니다. 소련은 인민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민족주의자 등 좌우를 망라한 연립정권을 세운 뒤 테러 등을 통해 반공 세력을 제거 혹은 흡수하는 과정을 거칩니다. 공산당 특유의 기만전술로 이른바 ‘사이비 연립단계’를 거쳐 공산주의 독재정권을 세운 겁니다( 참고: https://www.donga.com/news/article/all/20230813/120687443/1)여기에 스탈린이 독소전쟁과 비효율적인 사회주의 체제로 취약해진 국력을 가리기 위해 소련의 군사력을 과대 포장하며 공세적인 자세를 취한 것도 미국의 위협인식에 큰 영향을 미칩니다. 스탈린의 허장성세는 미국이 핵무기를 독점적으로 보유한 상황에서도 계속되죠. 1945년 6월 포츠담회담에서 트루먼이 핵무기 개발 사실을 넌지시 알리자, 스탈린은 “개발 소식을 기쁘게 생각하며 핵무기가 일본에 쓰이기를 바란다”며 별것 아닌 것처럼 응수합니다.하지만 사실 소련은 미국, 영국 내 스파이들을 통해 미국의 핵무기 개발 상황을 몰래 정탐하며 자체 핵개발에 전력투구하는 등 바싹 긴장한 상태였죠. 미국에 꿀리는 모습을 보이지 않고 중부 및 동부유럽에서 세력권을 양보하지 않기 위해 일부러 ‘센 척’을 한 겁니다.서구 독점 자본주의 국가들이 이권을 둘러싸고 서로 전쟁(3차 세계대전)을 벌일 거라고 본 스탈린의 마르크스주의 혁명관이 서구와 대결 구도를 형성한 배경이라는 시각도 있습니다. 문제는 미국이 스탈린의 ‘센 척’을 곧이곧대로 믿었다는 겁니다(미국은 전략폭격을 빼면 유럽대륙에서 소련의 육군력이 서방보다 우세하다는 시각을 갖고 있었죠)냉전시대 연 ‘봉쇄정책’의 기원스탈린의 공세적인 태도에 당황한 미국에서는 소련이 친구가 될 수 있는지 아니면 나치처럼 또 하나의 적인지를 놓고 논란이 벌어집니다. 이때 소련 대사관에서 근무하던 주니어 외교관의 보고서 한 통이 워싱턴에 엄청난 파장을 일으키죠. 미국 대소련 봉쇄정책의 시발탄이 된 조지 케넌(George Kennan)의 1946년 2월 보고서 ‘the long telegram(긴 전보)’입니다.케넌은 제정시대까지 소급해 러시아의 역사 전통에 대한 깊이 있는 분석으로 보고서를 시작합니다. 그는 러시아가 유럽부터 중앙, 극동아시아에 이르는 거대한 영토를 끊임없이 추구한 이유를 몽골족 등 아시아 유목민의 침략에 시달린 농경민 특유의 불안에서 찾았습니다. 제정 러시아에서 귀족 등 엘리트 집단이 프랑스어를 공용어처럼 사용한 데에서 알 수 있듯 서유럽보다 근대화에 뒤처진 열등감도 러시아의 불안을 더한 요소였죠.또 거대 인구를 통제하며 전제 군주정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외적 위협을 끊임없이 조장한 행태가 소련의 사회주의 독재체제에도 고스란히 적용된다고 봤습니다. 이에 따라 소련의 팽창주의는 내부 체제에서 기인한 것이기에 미국의 회유가 먹힐 수 없다는 게 케넌이 내린 결론이었습니다. 자유 민주주의 질서에 뿌리를 박고 있는 미국은 철학이나 목적에서 소련과 양립할 수 없다고 본 거죠. 케넌은 미국이 소련과의 긴 투쟁에 나설 채비를 갖춰야한다며 봉쇄정책의 필요성을 주장합니다.이에 대해 키신저는 케넌의 견해가 세력균형을 통한 공존이 아닌, 자유를 억압하는 소련체제 자체의 붕괴를 추구했다는 점에서 미국의 전통적인 이상주의 외교 원칙과 잘 맞는다고 평가합니다. 어찌 보면 이런 행태는 과거 미국이 핵무기로 ‘벼랑 끝 외교’에 나선 북한에 대해 정권교체(regime change)를 검토한 것과도 일맥상통합니다. ‘타협은 없다. 전부 아니면 전무(all or nothing)’라는 식의 미국 특유의 외교원칙이랄까요.케넌의 주창으로 트루먼 행정부가 채택한 봉쇄정책을 놓고 미국 내에서 다양한 비판이 제기됩니다. 미국 언론인 월터 리프먼(Walter Lippmann) 등 현실주의자들은 봉쇄정책이 시간을 끌면서 미국의 국력을 서서히 소진시킬 수 있다고 경고합니다. 특히 소련의 도발로 미국이 멀리 떨어진 주변부에 연루돼 국력을 낭비할 수 있다고 우려했죠. 사실 이런 그의 주장은 한국전쟁이나 베트남전쟁으로 어느 정도 현실화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리프먼은 미국이 주변부에서 힘을 빼지 말고, 미국의 핵심 이익이 걸린 유럽에 집중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키신저는 이런 시각이 미국의 도덕주의 외교원칙과 부합하지 않는다고 평가합니다. 리프먼의 주장에 따르면 미국 관점에서 지정학적 이익이 상대적으로 낮은 한반도에 개입한 것은 국력 낭비에 불과합니다. 현재의 우크라이나 전쟁에 미국이 개입하는 것도 리프먼의 관점에선 높은 점수를 받지 못하겠죠.처칠은 봉쇄정책의 전반적인 취지는 이해했지만 그 방법에 이의를 제기합니다. 소련이 무너질 때까지 무한정 시간을 보낼 게 아니라, 미소 간 군사력 격차가 극대화된 시점(2차대전 종전 직후)에 미국이 대소 견제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는 거였습니다. 그는 소련이 경제적으로 안정화되고 핵무기 개발에 성공하면 미소 간 격차가 좁혀져 갈수록 서방의 협상력이 낮아질 거라고 봤습니다.키신저는 케넌의 소련 인식이 정확했다고 봤지만, 방법론에 있어서는 처칠의 손을 들어주었습니다. 리프먼의 예견대로 봉쇄정책이 미국의 국력을 소진시킨 측면이 있고, 특히 베트남전쟁에 와서는 국내 여론 분열과 미국의 안보 보장에 대한 신뢰성을 실추시켰다는 겁니다.키신저가 본 한국전쟁의 원인키신저는 미국과 공산권의 상호 오인(misperception)이 서로 얽히면서 냉전시대 첫 열전인 한국전쟁이 발발했다고 보았습니다. 우선 소련은 국공 내전에서 중국 공산당의 승리를 사실상 묵인한 미국이 상대적으로 전략적 가치가 떨어지는 한반도 분쟁에 개입하지 않을 거라고 봤습니다. 키신저는 “미국에게는 침략에 대한 저항이라는 도덕적 의무가 전략적 이익보다 더 큰 비중을 차지한다는 사실을 소련이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고 지적했습니다.당시 스탈린의 맞상대였던 트루먼은 철저한 반공주의와 미국 예외주의의 도덕 원칙으로 무장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상원의원 시절 독소전쟁이 일어나자 “만약 독일이 이기고 있는 것처럼 보이면 우리가 소련을 도와줘야 하고, 소련이 이기고 있다면 우리가 독일을 도와줘야 한다. 그런 식으로 둘이 서로 최대한 많이 죽이게 해야 한다”고 말할 정도로 소련 사회주의 독재체제가 나치 못지않게 도덕적으로 타락했다고 봤죠.한국전쟁 발발 이틀 만에 2차대전 종전으로 병력이 대폭 감축된 데다 훈련도 부족했던 주일미군을 한반도로 급파하는, 막중한 결정을 트루먼이 내린 배경입니다. 소련이 제대로 임자를 만난 셈이죠(남한으로선 하늘이 도운 시나리오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하지만 트루먼 이상으로 미국의 한국전쟁 개입을 추동한 건 사실 미국 외교정책의 도덕주의 원칙이었습니다. 전쟁 발발 2개월 전 작성된 미국 국가안전보장회의 보고서(NSC-68)에서 이를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죠.당시 미국의 냉전 전략을 규정한 이 보고서는 체코슬로바키아 공산화를 언급하면서 “자유로운 정치제도가 패배한다면 모든 곳에서 패배하는 것이다. 체코슬로바키아 붕괴에서 우리가 받은 충격은 이 나라가 지닌 물질적 중요성의 잣대로 잴 수 있는 게 아니었다’고 평가했습니다. 이런 도덕주의 외교원칙을 가진 미국이 한반도에서 공산권의 일방적인 무력 침략을 방관하는 건 총체적 외교 실패를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공산권뿐 아니라 미국도 오판을 범합니다. 유럽 중심의 봉쇄정책에 함몰돼 아시아 등 주변부에서 공산권의 도발을 예상치 못한 겁니다. 앞서 리프먼이 예견한 우려가 현실화돼 미국으로선 불의의 일격을 당한 거죠.한국전쟁 5개월 전 애치슨 국무장관이 태평양 방위선에 일본, 필리핀을 포함하면서 한국과 대만을 제외한 것도 유럽 이외 지역의 안보에 대한 미국의 안일한 인식을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이는 스탈린과 김일성이 남침 시 미국의 무력 개입이 이뤄지지 않을 거라고 오판한 근거가 되죠( 참고: https://www.donga.com/news/article/all/20230903/120996577/1)이와 함께 소련, 중국 등 공산권이 자유주의 진영에 대한 총공격의 서막으로서 한국을 침략했다는 트루먼 행정부의 오인이 과잉 대응으로 이어져 중국의 개입을 초래했다는 게 키신저의 시각입니다. 미 7함대를 대만 해역으로 급파하고, 베트남 독립전쟁을 무력으로 대응한 프랑스에 군사원조를 해준 게 대표적입니다.제2차 국공내전에서 막 승리한 직후였던 마오쩌둥에게 미국의 이 같은 조치는 아시아에서 중국을 포위해 장제스의 본토 복귀를 도우려는 의도로 비쳤다는 겁니다. 키신저는 “마오쩌둥으로서는 만약 한국에서 미국을 막지 못하면 중국에서 미국과 싸워야 할지도 모른다고 결론을 내릴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고 말합니다.사실 중국의 한국전쟁 참전 결정 시점과 동기에 대해서는 여전히 학계에서 의견이 분분합니다. 초기 북한군 주도의 전황이 일시에 뒤집힌 인천상륙작전을 참전의 계기로 보는 시각이 있고, 이미 그 전에 결정했다는 주장도 있죠.그런데 앞서 키신저의 지적대로 당시 중국이 국공내전 직후여서 정권 안보가 아직 불안정한 시기였다는 데 대해선 이견이 없습니다. 예컨대 김동길 베이징대 교수는 한국전쟁 당시 중공 정권이 무너지고 장제스가 재집권할 거라는 ‘변천사상’이 기승을 부리자, 미군이 38선을 넘기도 전에 마오쩌둥이 조기 파병 의사를 김일성과 스탈린에게 전달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동유럽 세력 확장에 우선순위를 둔 스탈린이 미국의 손발을 동아시아에 묶어놓기 위해 마오쩌둥의 조기 파병에 부정적이었다는 겁니다.지금까지 2차 세계대전 직후 스탈린의 공세적 태도 등으로 인해 미국의 대소련관이 적대적으로 바뀌면서 봉쇄정책이 발생한 과정과, 이것이 한국전쟁에 끼친 영향을 자세히 들여다봤습니다. 미국의 봉쇄정책이 상정하는 유럽 중심의 전략적 사고로 인해 한반도에서 공산권으로부터 불의의 일격을 당한 것이 한국전쟁이라는 게 키신저의 시각입니다.하지만 그 봉쇄정책을 낳은 미국의 도덕주의 외교원칙으로 인해 소련, 중국의 예상과는 다르게 미국이 한국전쟁에 개입한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할 만합니다. 다음 회에서는 이런 한국전쟁이 소모적인 제한전(limited war)으로 흐른 배경과 더불어 이로부터 18년 뒤 미국이 적국이던 중국과 전격적으로 손을 맞잡은 ‘미중 데탕트’로 나아간 과정을 살펴보겠습니다.[참고 문헌]-Henry Kissinger 〈Diplomacy〉 (1994, Simon & Schuster)-Henry Kissinger, 김성훈 역 <헨리 키신저의 외교> (2023, 김앤김북스)-Henry Kissinger, 이현주 역 <헨리 키신저의 세계 질서> (2016, 민음사)-김동길, 박다정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전후 및 한국전쟁 초기, 중국의 한국전쟁과 참전에 대한 태도 변화와 배경> (2015, 역사학보)“모든 해답은 역사 속에 있다.” 초 단위로 넘치는 온라인 뉴스 속에서 하나의 흐름을 잡기가 갈수록 어려워집니다. 역사를 깊이 들여다보면 연이은 뉴스들 사이에서 하나의 맥락이 보일 수 있습니다. 문화재, 학술 담당으로 역사 분야를 여러 해 취재한 기자가 역사적 사실들을 통해 뉴스를 분석하고, 미래에 대한 인사이트를 찾아보고자 합니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최근 헨리 키신저 전 미 국무부 장관의 죽음을 계기로 ‘현실주의 외교’에 대한 재평가가 활발해지고 있습니다. 미중갈등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등 지정학의 시대가 다시 도래한 요즘 국제정치 환경도 이런 움직임에 힘을 보태고 있죠. 도덕이나 가치보다는 ‘세력균형(balance of power)’을 통한 질서 구축을 중시하는 키신저식 현실주의 외교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는 분석도 나옵니다.국제정치 분야 석학이자 고위 관료였던 키신저는 자신의 이론을 현실정치에 적용하며 미국 외교의 핵심 원칙을 세운, 희귀한 경력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는 중동과 유럽뿐 아니라 미중 데탕트, 북미관계 등 한반도 문제에까지 폭넓게 개입했죠.그래서 키신저의 사상과 삶을 이해하는 건 오늘날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치를 이해하는 데도 중요합니다. 여러 부고 기사들을 통해 관료로서 그의 삶이 잘 알려진 만큼, 이번 글에선 ‘Diplomacy’ 등 키신저의 대표 저작을 비롯한 국내외 문헌을 통해 그의 학문과 사상이 현실정치에 끼친 영향을 집중적으로 다뤄보겠습니다.키신저 외교관(外交觀)의 뿌리, ‘빈 체제’키신저의 현실주의 외교관은 그의 1954년 하버드대 박사학위 논문(Peace, Legitimacy, and the Equilibrium: A Study of the Statesmanship of Castlereagh and Metternich) 주제인 19세기 유럽 역사에 그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이 논문은 오스트리아의 메테르니히 수상과 영국의 캐슬레이 외무장관이 나폴레옹 전쟁 이후 유럽의 질서를 회복한 과정을 분석했는데 나중에 ‘회복된 세계’라는 책으로 발간됐습니다.키신저는 탈냉전 이후 세계질서가 양극체제에서 벗어나 다수의 강대국들이 각축전을 벌이며 세력균형을 시도한다는 점에서 19세기 유럽의 ‘빈(Wien) 체제’와 유사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죠.나폴레옹 전쟁으로 초토화된 직후인 19세기 초반 유럽에서는 무너진 평화를 복원하는 동시에 공화정이라는 전염병을 차단하고 군주정으로 회귀하는 게 지상과제였습니다. 이것이 유럽 주요 강대국들이 1814년 오스트리아에 빈에 모여 새로운 국제질서를 논의한 목적이었죠(‘빈 회의’)당시 빈 회의에 참석한 각국 대표들은 동상이몽을 품고 있었는데요. 나폴레옹을 굴복시킨 최강국 러시아의 차르(황제) 알렉산드르 1세에 이목이 쏠립니다. 독실한 러시아 정교도였던 그는 1812년 지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진정한 치세를 앞당기는 대의를 위해 세속의 모든 영광을 바칠 것”이라고 쓸 정도였죠.그는 빈 회의에서 형제애라는 기독교 원리에 따라 상호 적대적인 세력균형을 포기하고 공동으로 평화를 추구하는 ‘신성 동맹(Holy Allance)’을 주창합니다. 이에 대해 키신저는 “원칙에선 월슨 미국 대통령의 구상과 정반대이지만 이것은 월슨이 구상한 세계질서의 전신(前身)이었다”고 평가합니다. 알렉산드르 1세의 구상이 공동의 대의와 도덕 원칙에 입각한 윌슨주의(자유주의 외교)와 흡사하다고 본 거죠.이에 비해 키신저가 가장 존경하는 정치인으로 꼽았던 오스트리아 수상 클레멘스 폰 메테르니히(1773-1859)는 도덕 원칙이 아닌 상호이익 관점으로 접근합니다. 나폴레옹 전쟁을 일으킨 프랑스에 맞서 오스트리아, 러시아, 영국, 프로이센의 ‘4국 동맹’을 주도하면서 세력균형의 회복을 시도한 겁니다.키신저는 메테르니히가 ‘군주정 회복’이라는 공통의 보수적 가치 아래 각국의 이해관계를 적절히 조율해 제1차 세계대전 전까지 약 100년에 걸친 장기 평화를 이뤘다고 봤습니다. 워싱턴포스트는 “아무리 불완전한 동맹이라고 해도 협력을 통해 ‘힘의 균형’을 유지하며 세계질서를 지키는 것이 혼돈과 혁명보다 낫다는 키신저의 ‘현실정치(Realpolitik)’는 메테르니히에서 출발했다”는 분석을 최근 내놓았죠.빈 체제가 비교적 장기 평화를 가져온 데에는 세력균형을 위해 패전국 프랑스까지 동맹으로 끌어들인 실리 외교도 한몫했습니다. 빈 회의에서 4국 동맹은 나폴레옹이 해외 원정을 시작하기 직전의 프랑스 국경선을 인정해줬을 뿐 아니라, 빈 체제가 성립된 지 불과 3년 만인 1818년에는 프랑스를 포함한 ‘5국 동맹’을 출범시키죠. 제1차 세계대전 직후 베르사유 조약에서 패전국 독일의 국경선을 대폭 축소하고, 막대한 배상금을 물려 2차 대전의 불씨를 남긴 것과 비교됩니다.이에 대해 키신저는 “메테르니히가 생각한 질서는 자국의 이익을 다른 국가들의 이익과 연결시키는 것이었다”며 “빈 체제의 5국 동맹이 2차 대전 종전 후 독일이 ‘대서양 동맹’에 가입한 사건의 선례(先例)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미국은 2차 대전 최대 피해국 중 하나인 프랑스의 반발에도 독일 재무장과 나토 가입을 추진하죠. 종전 후 미소 냉전이 본격화됨에 따라 소련의 안보 위협에 대한 대처가 우선이었기 때문입니다.태평양전쟁 피해 당사국인 미국이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회의에서 일본의 전쟁 책임에 대해 면죄부를 준 것도 비슷한 맥락입니다. 당시에도 한국 등 일본 식민지배 피해국들의 반발이 있었지만, 미국은 일본의 신속한 전후 복구와 경제성장을 지원하기 위해 전후 배상 책임을 면제해주죠. 동아시아에서 미국을 대신해 공산주의 확산을 막는 방파제 역할을 할 국가가 필요했기 때문입니다.이른바 ‘샌프란시스코 체제’가 강력한 미일동맹을 형성해 동아시아 평화에 기여했다는 평가가 나오지만, 36년에 걸쳐 식민지배를 겪은 한국으로서는 아쉬움이 클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까지도 일본의 과거사 반성이 미진한 건 샌프란시스코 체제의 영향도 있다는 분석도 있죠.키신저는 다양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냉엄한 국제정치 현실에서 빈 체제의 효용성은 크다는 입장입니다. 특히 19세기 유럽처럼 5, 6개의 강대국들과 많은 약소국들로 이뤄진 탈냉전 이후 국제체제에서는 세력균형을 통해 상호 경쟁하는 국익을 조정하는 과정이 필수라는 겁니다.현실주의 거부한 미국의 외교 전통키신저는 빈 체제의 절묘한 세력균형을 예찬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미국은 전통적으로 현실주의 외교와 거리를 뒀습니다. 이는 미국 특유의 지정학적 이점에서 연유하는데요. 오랜 세월 국경을 맞댄 여러 나라들이 전쟁을 벌인 유럽 대륙과 대양을 사이에 두고 멀찍이 떨어져 있는 데다, 주변에 대적할 만한 경쟁국이 없던 덕분에 미국은 세력균형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유럽 입장에선 천혜의 요새를 갖춘 신생국의 배부른 소리로 들릴 수도 있는 대목이죠.여기에 종교 박해를 피해 신앙의 자유를 찾아 신세계로 떠난 청교도 정신이 ‘미국 예외주의(American exceptionalism)’로 발현되면서 도덕주의 외교를 추구하게 됩니다. 종교의 자유 등 미국식 민주주의 가치를 외교 원칙으로 관철해야 한다는 정서가 엘리트뿐 아니라 평범한 미국인들 사이에서도 보편화된 겁니다(이는 윌슨 대통령이 “세계 민주주의를 위해 나서야 한다”며 미국 국민의 여론을 1차 대전 참전으로 이끄는 데 성공한 배경입니다)이런 이유들로 키신저는 “미국 같은 이상주의 전통을 가진 나라는 세력균형을 자국 정책의 핵심 기반으로 삼을 수 없다”고 결론을 내립니다. 그러면서 “미국이 자국 이익에 대해 사용 가능한 정의를 내릴 수 있도록 현실에 대한 사려 깊은 평가를 이상주의와 결합시켜야 한다”고 강조하죠. 미국의 이상주의 전통을 상수(常數)로 보고, 여기로 경도됐을 때의 폐해를 막기 위해 자신이 주장한 현실주의 외교를 절충해야 한다고 본 겁니다.키신저는 미국이 이상주의로만 기울었을 때의 폐해로 2차 세계대전 종전 직전 처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루스벨트가 독일, 체코 등 중부 유럽을 점령한 미군을 철수시킨 사례를 듭니다. 당시 처칠은 얄타 회담 이후 노골화된 스탈린의 팽창주의에 맞서려면 미군의 유럽 철수를 최대한 늦춰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루스벨트는 소련과의 갈등을 피하고 국민들의 철군 여론을 충족시키기 위해 철수를 단행합니다▶시리즈 5회 참고이에 대해 키신저는 루스벨트가 전후 승전국 간 경쟁 가능성을 대비하지 않은 건 세력균형의 복원을 피하려 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세력균형을 혐오한 루스벨트가 전시 동맹국들이 함께 참여하는 ‘집단안보’ 체제를 구축하려고 했다는 겁니다.하지만 이는 키신저가 보기에 나이브한 구상에 불과했습니다. 군주정 회귀라는 공동의 보수적 가치로 엮인 빈 체제와 달리 2차 대전 직후 승전국들은 사회주의, 자본주의라는 이데올로기 갈등을 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게다가 팽창주의에 젖어있던 스탈린이 독일이라는 최대 위협이 제거되자, 연합국에 협조할 의사가 거의 없었던 점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스탈린은 종전 직후 연합국 반대에도 동유럽 국가들을 잇달아 점령합니다) 키신저가 “나폴레옹 전쟁이 끝나기 전에 영국의 캐슬레이가 약소국의 자유에 대한 동맹국들의 약속을 받아냈던 것처럼, 스탈린이 연합국의 도움을 필요로 했을 때 전후 처리에 대한 합의를 이끌어냈어야 했다”고 본 이유입니다.키신저 외교에 대한 다양한 비판들미중 데탕트와 중동 셔틀외교 성공 등 키신저식 현실주의 외교의 성과가 컸지만 반대로 그 한계도 존재합니다. 특히 그가 강조한 세력균형이 강대국 중심의 시각에 치우쳐 약소국들의 이익을 무시했다는 지적을 받습니다. 실제로 키신저가 미중수교 통로였던 파키스탄의 무자비한 반란 진압(방글라데시 독립 반란)을 지원하고, 1969년 캄보디아 침공에 관여해 크메르루주 살인 정권이 들어서는 데 일조하는 등 미국의 전략적 이익을 위해 약소국들을 희생시켰다는 거죠.키신저의 현실주의 외교가 전략적 이익에 집중한 나머지 비윤리적이라는 비판도 있습니다. 예컨대 키신저가 1969년 닉슨 행정부에 참여하기 전부터 베트남전 승리가 불가능하다는 걸 알았으면서도 미국의 대외 위신 때문에 3년 뒤에야 미군 철수 협상에 나서 희생을 키웠다는 비판이 대표적입니다(2년 전 미군의 아프간 철수가 미국 패권 약화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진 걸 떠올리면 이해하기가 쉬울 겁니다).결국 1973년 파리 평화협정으로 미국이 베트남전에서 완전히 손을 뗀 뒤 1975년 남베트남 패망에 이르기까지 약 2년의 간격을 확보해 최소한의 체면을 세울 수 있게 됐죠. 키신저는 국내외 비판에 직면하자, 파리 평화협정 덕에 받은 노벨평화상을 자진 반납하겠다는 의사를 밝히기도 했습니다.1975년에는 러시아 작가로 소련 체제를 비판하며 망명한 솔제니친과 포드 대통령의 면담 당시 백악관에서 만나면 안 된다고 주장해 레이건 등 공화당 강경론자들의 비판을 샀습니다. 솔제니친이 소련 체제의 폭압에 용기 있게 저항한 자유주의의 상징이지만, 소련과의 데탕트 정책에 부정적 영향을 초래할 수 있다는 게 이유였습니다.철저한 국익 중심의 현실주의 외교는 키신저 자신의 태생적 뿌리를 외면하는 결과도 초래합니다. 소련 정부가 유대인의 해외 이민을 허용하는 조건으로 미국이 소련과 정상 무역관계를 맺도록 규정한 1974년 ‘잭슨-바닉 법안’에 키신저가 반대한 겁니다. 본인도 나치의 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이주한 유대인이었음에도 키신저는 “소련과의 데탕트에 걸림돌이 될 수 있다”며 자유를 찾아 이주하기를 원하던 유대인들을 외면합니다.키신저의 이 같은 외교 전략에 대해 같은 현실주의 국제정치학자인 한스 모겐소조차 “도덕에 대한 고려가 부족하다”며 비판에 가세했죠. 사실 모겐소는 미국 외교가 도덕주의에 너무 경도돼 성전(聖戰)을 벌이려는 경향이 있다고 비판한 장본인이었습니다(도덕외교의 한계를 지적한 키신저의 입장과 일치합니다).키신저 전기를 쓴 저명 저널리스트 월터 아이작슨도 “키신저는 미국 민주주의 체제의 개방성에서 파생되는 힘이나, 미국이 세계에 미치는 영향력의 원천인 ‘도덕적 가치’에 대해서는 무신경했다”고 평가합니다.그가 금과옥조로 여긴 세력균형에 대해서도 이견이 존재합니다. 학계 일각에선 과도한 세력균형의 집착이 적대적 동맹을 형성해 1차 대전을 일으켰다고 지적합니다. 이에 대해 키신저는 1차 대전을 초래한 건 오히려 세력균형의 포기였다고 반박합니다. 전쟁을 피하기 위해 끊임없이 동맹관계를 조정한 빈 체제의 교훈을 1차 대전 당시 유럽 지도자들이 망각했다는 겁니다(키신저의 미중 데탕트와 한반도에 끼친 영향은 다음 회에 다룹니다)[참고 문헌]-Henry Kissinger 〈Diplomacy〉 (1994, Simon & Schuster)-Thomas W. Lippman 〈Henry Kissinger who shaped world affairs under two presidents, dies at 100> (Washingtonpost, 11/ 29)-헨리 키신저, 이현주 역 〈헨리 키신저의 세계 질서〉 (2016년, 민음사)-마상윤 〈1970년대 초 한국외교와 국가이익: 모겐소의 국익론을 통한 평가〉 (2012년, 국제·지역연구 21권 2호)“모든 해답은 역사 속에 있다.” 초 단위로 넘치는 온라인 뉴스 속에서 하나의 흐름을 잡기가 갈수록 어려워집니다. 역사를 깊이 들여다보면 연이은 뉴스들 사이에서 하나의 맥락이 보일 수 있습니다. 문화재, 학술 담당으로 역사 분야를 여러 해 취재한 기자가 역사적 사실들을 통해 뉴스를 분석하고, 미래에 대한 인사이트를 찾아보고자 합니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슈링크플레이션’ ‘스킴플레이션’ ‘번들플레이션’ ‘스트림플레이션’…. 요즘 온갖 물가가 뛰면서 생긴 다양한 신조어들이다. 제품 용량이나 성분 함량을 줄이는 게 각각 슈링크플레이션(shrinkflation), 스킴플레이션(skimpflation)이라면 낱개보다 묶음 제품의 값을 올리는 건 번들플레이션(bundleflation)이다. 동네 마트에서 목격할 수 있는 고물가 시대의 천태만상이다. 여기에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구독료가 일제히 오르는 스트림플레이션(streamflation)까지 가세했다. ‘꼼수’ 가격 인상은 인플레이션을 잡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한국은행은 최근 발간한 보고서에서 “가격 및 임금 설정 행태의 변화가 디스인플레이션(물가 상승 둔화)을 더디게 만드는 요인”이라고 분석했다. 사실 현재의 인플레이션 기조는 세계적 추세다. 인구 고령화에 따른 생산인구 감소와 기후변화에 의한 농산물 가격 급등, 탈세계화에 따른 생산비용 상승 등이 한꺼번에 겹치면서 대부분의 국가들이 물가 압박을 받고 있다. 저명 경제학자 찰스 굿하트 영국 런던정경대(LSE) 명예교수는 “지난 30년은 저금리 시대였지만 향후 30년은 인구 고령화로 인해 저축은 줄고 소비는 늘 것”이라며 고금리, 고물가가 장기간 이어질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물가 상승의 주된 요인이 나라마다 다르기 때문에 인플레이션에 대한 대응은 차별화될 수밖에 없다. 실제로 한국의 10월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3.8%(전년 대비)로 미국(3.2%)을 앞질렀다. 한미 물가 상승률이 역전된 건 2017년 8월 이후 6년 2개월 만이다. 지난해 물가 정점 이후 올 9월까지 월평균 하락 폭도 한국(0.19%포인트)이 미국(0.36%포인트), 유럽(0.57%포인트)보다 작아 물가 상승률 둔화 속도가 느린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에너지·식량 자급도가 높은 미국에 비해 한국은 대외 의존도가 높은 데다 환율 상승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여기에 한동안 억누른 전기·가스료 등 공공요금 인상 압박 영향도 적지 않다. 미국에 비해 노동시장이 경직되고 시장 경쟁이 덜 치열한 한국의 경제 구조도 고물가의 원인이라는 지적이 있다. 최근 식품 가격 등을 중심으로 물가가 반등하자, 한은은 30일 기준금리를 동결하면서 올해와 내년 물가 상승률 전망치를 각각 3.6%와 2.6%로 올려 잡았다. 내년 말까지도 물가 목표인 2% 달성이 어려운 것이다. 고물가 국면이 길어지는 이른바 ‘끈적한(sticky) 인플레이션’이 본격화될 수 있다는 얘기다. 인플레는 결코 만만한 적이 아니다. 국제통화기금(IMF)의 올 9월 보고서에 따르면 1970년부터 현재까지 56개국에서 발생한 인플레이션 111건 중 64건(57.6%)만 5년 내 잡혔다. 인플레가 1년 안에 진정된 사례는 12건(10.8%)에 불과했다. IMF는 “고물가를 잡기 위해선 긴축 정책을 일관성 있게 유지하는 게 핵심”이라며 “인플레이션 완화 징후가 보인다고 섣불리 긴축 강도를 풀지 말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대표적인 인플레 파이터인 폴 볼커 전 미 연준 의장의 회고록 제목 ‘Keeping at it(긴축 지속으로 버티기)’은 우리 통화당국도 주목해야 할 교훈 아닐까. 김상운 경제부 차장 sukim@donga.com}
팬데믹에 이어 전쟁과 경제 불안이 커지는 가운데 각국에서 포퓰리즘이 고개를 들고 있습니다. 자국 우선주의를 앞세워 반(反)이민정책과 동맹 파괴에 나선 트럼프가 대선 지지율 1위를 달리고 독일, 이탈리아, 네덜란드 등 유럽 주요국에서도 반이민정책을 내건 극우 포퓰리즘 정당이 선거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습니다.최근 아르헨티나 대선에서는 중앙은행 폐쇄, 장기매매 허용 등의 과격한 공약을 내건 하비에르 밀레이가 승리했습니다. 각종 보조금을 남발해 140%에 달하는 하이퍼 인플레이션을 낳은 페론주의 정권에 대한 심판이 우파 포퓰리즘 정권을 낳았다는 분석입니다.내년 총선을 앞둔 한국도 ‘메가 서울’ ‘은행 횡재세 도입’ ‘공매도 금지’ ‘대구-광주 고속철도 건설’ 등 여야를 가리지 않고 포퓰리즘 정책이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이처럼 민주주의가 정착된 나라들에서도 포퓰리즘이 활개를 치는 이유는 무얼까요. 과연 일각의 지적처럼 한국의 민주주의는 후퇴하고 있는 걸까요. 수천년을 아우르는 포퓰리즘의 역사를 통해 그 실체와 원인을 알아보겠습니다(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 등 국내외 주요 문헌을 참고했습니다)2400년 전 고대 그리스 포퓰리즘과 닮은꼴라틴어 ‘populus(민중)’를 어원으로 하는 포퓰리즘(populism)의 사전적 의미는 대중에 영합해 정책을 펴고 권력을 강화하는 행태를 말합니다. 정치학자 얀 베르너 뮐러는 포퓰리즘을 “국민이 직접 통치하는 민주주의 최고 이상을 실현해주겠다고 약속하는 ‘타락한’ 형태의 민주주의”라고 정의합니다. 또 “포퓰리스트들은 기득권 엘리트 집단이 부도덕하며 민중의 목소리를 대변할 사람은 자신뿐이라고 강변한다. 그들이 쓰는 언어는 거칠고 태도는 무례하며 반대 세력을 인정하지 않는 태도를 취한다”고 합니다.포퓰리스트의 역사는 고대 그리스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당시에는 포퓰리스트 대신 ‘데마고고스(demagogos)’라고 불렸죠. 이 말은 민중을 뜻하는 ‘dema’와 지도자를 가리키는 ‘agogos’가 합쳐져 ‘민중 지도자’를 의미했습니다. 원래는 ‘민중의 입장을 대변하는 정치가’라는 중립적 의미였는데 페리클레스 사후 정치 혼란을 겪으면서 ‘민중을 선동하는 정치꾼’이라는 부정적 이미지가 덧씌워지게 되죠.아리스토텔레스는 데마고고스를 이상적인 민주 정치의 적으로 규정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책 ‘정치학’에서 “민중이 법 위에 군림하는 민주정체에서는 데마고고스가 부자들과 전쟁을 벌여 나라를 늘 둘로 나눈다”면서 이들이 밑 빠진 독에 물붓기 식으로 민중들에게 생산잉여를 분배하는 ‘무절제(aselgeia)’에 빠진다고 했죠. 현대의 ‘복지 포퓰리즘’을 연상시키는 대목입니다.도시국가(폴리스) 아테네에서 본격적인 데마고고스의 시대를 연 정치가는 클레온(?~기원전 422년) 입니다. 피혁업자 가문 출신으로 귀족이 아니었던 그는 페리클레스 사후 민중들의 마음을 사로잡으며 권력자로 부상합니다.기록에 따르면 그는 예의를 중시한 기존의 명문귀족 출신 정치가들과는 달리 “겉옷을 걷어부치고 고함을 지르며 허벅다리를 철썩철썩 때리면서 상소리로 연설하는” 다소 공격적인 성향의 지도자였죠. 공격적인 언사로 상대를 당황케하는 트럼프의 모습을 연상시킵니다.평민 출신 정치지도자의 혜성 같은 등장을 이해하려면 기원전 5세기경 그리스의 상황을 파악해야 합니다. 페리클레스 치세 하에 아테네는 압도적 해군력을 바탕으로 주변 도시국가들을 복속하며 제국주의 체제를 공고히 합니다. 이 과정에서 전함의 노를 젓는 등 많은 노동력을 제공한 평민들의 정치적 입지가 높아진 것도 데모고고스 등장의 배경이 됩니다.당시 아테네는 라이벌 스파르타와 그 동맹국들에 맞서 전쟁(펠레폰네소스 전쟁)을 벌이는 과정에서 숱한 안보위기를 맞습니다. 스파르타의 공격을 틈타 아테네에 칼을 들이대는 동맹들이 생긴 겁니다. 전쟁으로 인해 해외로부터 식량공급이 어려워지는 등 경제난에도 봉착합니다. 여기에 기원전 430년과 426년에 전염병이 창궐하면서 아테네 총인구의 약 3분의 1이 사망하는 재난까지 덮치죠. 코로나 팬데믹에 이어 고금리, 고물가의 경제난에 직면한 요즘 각국의 상황과 비슷합니다.이런 다중 위기를 맞아 클레온은 전임자인 페리클레스의 정책을 비판하며 공격적인 제국주의 정책으로 민중의 지지를 얻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기원전 427년 뮈틸레네 반란에 대한 그의 강경한 주장입니다. “예속국들의 복종은 아테네의 양보가 아닌 ‘힘’에 의해 확보되는 것”이라는 클레온의 강경론에 아테네 민회는 뮈틸레네의 남자들을 모두 죽이고 여성과 어린이를 노예로 만들기로 결정합니다.하지만 이때 디오도토스가 “예속국에 대한 초강경 처벌은 오히려 아테네의 이익에 반한다”며 반론을 제기하죠. 향후 반란을 일으키는 동맹국들이 뮈틸레네의 전례를 보고 결사항전에 나설 수 있다는 논리였습니다. 이에 따라 반란에 책임이 있는 이들만 처형하는 것으로 민회 결정이 번복됩니다.역사가 투키디데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서 민회의 뮈틸레네 처벌 논의를 다루면서 “클레온이 아테네에서 가장 ‘폭력적’이었고 당시 민중들에게 가장 설득력이 강했다”는 코멘트를 달았습니다. 이때 그가 쓴 단어 ‘Beacóratos(폭력적)’는 당시 고대 그리스에서 휼륭한 정치가의 속성과는 거리가 먼 부정적인 뜻을 내포했죠.민중들에게 설득력이 가장 강했다는 투키디데스의 말대로 비록 뮈틸레네 처벌이 관련자(1000명) 처형으로 일부 완화되긴 했지만, 클레온의 강경론은 이후에도 지속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실제로 기원전 423년 스키오네에서 반란 사건이 일어났을 때 아테네는 결국 스키오네 시민 전체를 도륙하고 도시를 통째로 파괴하는 만행을 저지릅니다.이 같은 클레온의 강경 외교는 결국 아테네에 부메랑으로 돌아옵니다. 펠레폰네소스 전쟁으로 국력이 소진된 상황에서 무리하게 시칠리아 원정을 감행하다 몰락의 길에 들어선 겁니다. “일인자가 되려는 열망 때문에 도시의 사안을 민중의 즐거움에 맡긴 지도자”라고 투키디데스가 클레온을 비판한 이유입니다.포퓰리즘과 민주주의의 차이사실 포퓰리즘과 민주주의는 모두 ‘민중(demos)’을 기반으로 한다는 점에서 구분하기가 어려운 때가 많습니다. 학자에 따라서는 ▲반(反)엘리트주의와 이분법 ▲반의회주의 ▲카리스마 지도자에 대한 의존 ▲단순화를 통한 선동 ▲대중매체의 효율적 이용 등을 포퓰리스트의 특징으로 꼽습니다. 다시 말해 부패한 엘리트와 선량한 인민의 대립 구도를 가지고 의회를 우회해 대중을 직접 동원하는 행태입니다. 이 과정에서 대의제 민주주의나 법치주의의 기본원리가 훼손되는 결과를 초래하죠.적과 우리를 구분하는 이분법의 논리는 요즘 국내 정치에서도 종종 목격됩니다. 문재인 정부 당시 여당이 친일 프레임을 동원해 야당을 ‘토착 왜구’로 몰아붙이거나, 윤석열 정부에서 여당이 반공주의를 소환해 야당을 ‘주사파 용공세력’으로 규정했죠.포퓰리스트들이 추구하는 가치에 따라 좌파 혹은 우파 포퓰리즘으로 구분하는 견해도 있습니다. 우파 포퓰리즘은 민족이나 문화 정체성을 중심으로 대중을 동원하는 행태로 히틀러와 트럼프가 대표적 인물입니다. 예를 들어 히틀러는 독일 민족의 부흥이라는 미명 하에 유대인에 대한 증오를 부추겼습니다. 트럼프는 ‘아메리카 퍼스트’라는 가치를 내세워 백인 블루칼라를 동원하기 위해 이민자 혐오를 이용했죠.이에 비해 좌파 포퓰리즘은 계급 정체성을 중심으로 극단적 평등을 추구하는 행태를 보입니다. 각종 보조금을 쏟아내 국가부채를 급증시킨 20세기 남미의 페론주의나 무상의료, 무상교육을 추진한 베네수엘라의 차베스가 대표적인 예입니다.히틀러를 봐도 알 수 있듯 카리스마를 갖고 민중을 동원하는 지도자에게 국가사회가 좌우되는 상황은 결국 전체주의 파시즘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시작은 민중이지만 그 끝은 전체주의 독재로 나아가는 모순을 안고 있다는 점에서 포퓰리즘은 ‘민주주의의 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포퓰리즘 발생의 원인앞서 아테네가 포퓰리즘에 빠져든 배경에서 알 수 있듯 현대에서도 빈곤은 포퓰리즘 발생의 요인입니다. 히틀러는 대공황으로 어려움을 겪던 당시 독일인들에게 독일 민족의 위대한 부흥이라는 허상을 제시해 권력을 잡았죠.예속국에 대한 클레온의 강경론에 아테네 시민들이 넘어간 것도 예속국에서 거둬들이는 공납금이 늘어야 퍼주기식 복지가 가능했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클레온은 노령층 평민들의 생활비로 요긴하게 쓰인 배심원 수당을 하루 2오볼로스에서 3오볼로스로 인상해 지지를 얻었습니다(한국에 방위비 분담금 증액을 압박하는 등 동맹국을 쥐어짠 트럼프의 외교가 연상됩니다)주요 이슈에 대해 당파적 갈등이 심화되는 ‘정치 양극화’도 포퓰리즘이 발생하기 쉬운 환경을 제공합니다. 앞서 언급한 포퓰리스트의 이분법 선호가 정치 양극화와 맞물리기 때문이죠. 이것이 기존 제도권 정치의 무능과 결합되면 폭발력은 매우 커집니다. 재벌 유착 등 박근혜 정부의 부패상이 진영 갈등과 맞물려 대통령 탄핵이라는 전무후무한 빅뱅으로 이어진 게 한 예일 겁니다.갈수록 심화되는 한국 정치 양극화, 원인은한국사회과학데이터센터의 최근 연구결과에 따르면 한국의 정치 양극화 지수(0~1 사이로 1에 가까울수록 정치적 의견이 다른 사람들의 상호작용이 적대적)는 권위주의 시대에 0.75로 높았으나 1987년 민주화 이후 0.5로 내려갔습니다.그런데 박근혜 정부 때인 2015년 이후 양극화 지수가 0.75로 다시 높아졌습니다. 탄핵정국을 거친 박근혜, 문재인 정부를 통과하면서 정치 양극화가 이전 권위주의 시대와 같은 수준으로 높아진 겁니다.실제 정치 현장을 살펴보면 이 같은 추세를 확실히 체감할 수 있습니다. 예컨대 국회 관계자들에 따르면 국회 상임위원회의 해외시찰을 여야 의원들이 따로 가는 행태가 21대 국회 들어 확산되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일정상 운영위원회 정도만 그런 행태를 보였지만 이제는 다른 일반 상임위도 여야 ‘따로 국밥’으로 해외시찰을 다닌다는 겁니다. 국회 관계자는 “상임위 시찰은 국비 지원을 받아 국회 공무원까지 동원되는 공적인 업무”라며 “정당끼리 따로 갈거면 당비를 써야지 국비를 받고도 저런 행태를 보이는 건 문제”라고 지적했습니다.2020년 21대 총선 직후 윤호중 당시 민주당 사무총장이 “타당 출신 보좌진 임용시 업무능력 외에 정체성 및 해당 행위 전력을 검증해야 한다”는 공문을 보낸 것도 비슷한 맥락입니다. 과거에는 능력있는 보좌진을 채용하기 위해 상대 정당에서 필요한 인력을 구하는 게 일반적이었죠. 하지만 21대 국회에서는 보좌진 채용마저 피아를 식별하는 이분법 구도에 함몰되고 말았습니다.현 정부 들어서도 상황은 마찬가집니다. 민주당 이재명 대표가 지난해 8월 당대표 취임 이후 영수회담을 8번 요청했지만, 대통령실과 여당은 ‘여야 대표 회동이 먼저’라는 등의 논리로 이를 모두 거부했습니다.그렇다면 한국 정치에서 이처럼 양극화가 심화되는 원인은 무얼까요. 한국 정치의 양극화는 식민경험, 분단 체제, 군사독재라는 특수한 역사경험에서 연유하는 바가 크지만 승자독식의 정치 제도에도 원인이 있다는 게 학계 시각입니다. 득표율이 의석 수에 비례적으로 반영되지 않는 현행 선거제도가 양당 제도를 고착화하면서 정치 양극화로 이어진다는 겁니다.예컨대 위성정당이라는 꼼수가 동원된 ‘준연동형 비례대표제’의 2020년 총선에서 민주당은 49.9%, 미래통합당은 41.5%를 지역구에서 득표했지만 의석 수는 각각 163석과 84석으로 크게 벌어졌습니다. 이런 구조에서는 제3당이 들어서기가 힘들어 양당정치의 파당적 폐해를 견제하기 힘들죠.이른바 ‘개딸’이나 ‘태극기 부대’ 같은 강성 지지층에 양대 정당이 포획된 구조도 양극화의 원인으로 꼽힙니다. 공직자 선거에서 당내 경선이 확대되면서 강성 지지층의 당원 투표 영향력이 커졌기 때문입니다. 결국 표를 얻어야하는 정치인들은 이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선명성 경쟁을 벌이며 포퓰리즘의 유혹에 빠지기 쉽습니다.결국 승자독식의 선거제도를 바꾸고, 강성 지지층에 휘둘리지 않는 정당 지배구조를 구축하는 것이 포퓰리즘의 기반이 되는 정치 양극화를 막을 수 있는 방안일 수 있습니다. 이와 더불어 국민을 선동해 권력을 차지하려는 포퓰리스트의 행태를 견제할 수 있는 건강한 시민사회의 역할이 무엇보다 중요하지 않을까요.[참고 문헌]-권혁용 <한국의 민주주의 퇴행> (한국정치학회보 57집 1호, 2023년 봄)-장시은 <뮈틸레네 논전에 나타난 아테네 민주정과 제국주의> (인간.환경.미래 22호, 2019년)-김봉철 <‘데마고고스’ 클레온> (역사학보 113집, 1987년)-채진원 <포퓰리즘의 이해와 이재명 현상에 대한 시론적 논의> (사회과학논집, 2019년 봄)“모든 해답은 역사 속에 있다.” 초 단위로 넘치는 온라인 뉴스 속에서 하나의 흐름을 잡기가 갈수록 어려워집니다. 역사를 깊이 들여다보면 연이은 뉴스들 사이에서 하나의 맥락이 보일 수 있습니다. 문화재, 학술 담당으로 역사 분야를 여러 해 취재한 기자가 역사적 사실들을 통해 뉴스를 분석하고, 미래에 대한 인사이트를 찾아보고자 합니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공매도를 일시 금지하는 긴급명령은 시장에 균형을 회복시켜 줄 겁니다.”(2008년 9월 19일) “위원회가 공매도 금지를 다시 시행하지는 않을 거라고 봅니다. (공매도 금지의) 비용이 이익보다 더 큰 것으로 보입니다.”(2008년 12월 31일)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의 크리스토퍼 콕스 위원장은 공매도 금지를 발표하면서 해당 조치가 주식시장에 균형을 가져올 거라고 장담했다. 하지만 불과 3개월 뒤 로이터통신과 인터뷰에서 콕스 위원장은 공매도 금지 결정을 후회하는 발언을 남겼다. 공매도 금지가 주가 부양이라는 본래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유동성 확보에 지장을 초래하는 등 부작용을 가져왔기 때문이다. 사실 주식 공매도는 주가 하락에 베팅하는 속성상 대부분의 개인 투자자들에게 절대 환영받을 수 없는 존재다. 누군가 돈을 잃고 피눈물을 흘릴 때 웃는 투자 방식이기에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하지만 선진 자본시장에서 공매도가 보편적인 투자 방식으로 인정받는 상황에서 이를 무조건 죄악시할 순 없는 노릇이다. 사실 국내외 주요 연구들은 공매도와 주가 하락의 상관관계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2006년 1월 2일부터 국내에서 공매도 금지 조치가 내려지기 전날인 2008년 9월 30일까지 678일간 215개 종목의 일별 공매도 및 주가를 분석한 논문(‘주가와 공매도 간 인과관계에 관한 실증 연구’)에 따르면 “증시 전체나 개별 종목 차원 모두에서 공매도로 인한 주가 변화의 증거는 없거나 미약한 것”으로 나타났다. 즉, 공매도가 주가에 영향을 미치기보다 주가 변화가 공매도에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논문 저자들은 “실증 분석 결과는 2008년 전격적으로 취해진 전면 공매도 금지 조치에 대한 논리적 반박의 근거를 제공할 수 있다”고 썼다. 해외 사례 연구도 비슷한 맥락이다.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인 2008년 1월∼2009년 6월 공매도 금지 혹은 제한 조치를 시행한 30개국 1만6491개 종목의 일일 데이터를 분석한 해외 저명 학술지 논문(‘Short-Selling Bans Around the World: Evidence from the 2007∼09 Crisis’)에 따르면 △공매도 금지가 시가총액이 작고 변동성이 높은 주식 유동성에 악영향을 미치고 △약세장에서 가격 발견을 늦추며 △미국 금융주를 제외한 대부분의 종목에서 주가를 부양하지 못한 것으로 나타났다. 미국에 비해 시가총액이 훨씬 작고 주가 변동성이 높은 한국 등 이머징 시장에서 공매도 금지의 부작용이 더 클 수 있다는 것이다. 정부는 16일 ‘공매도 제도 개선 방향’을 발표하면서 공매도 금지 기간을 연장할 수 있음을 시사했다. 시장 혼란을 키울 수 있는 무차입 공매도 등 불법행위를 엄단하는 건 당연하다. 하지만 증권가에선 공매도 금지 연장이 글로벌 스탠더드에 역행해 한국 증시의 신뢰성을 떨어뜨리고, 외국인 투자자 이탈을 가져올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실제로 모건스탠리캐피털인터내셔널(MSCI)은 수년 전 한국의 중소형주 공매도 금지를 이유로 관련 평가를 ‘++’에서 ‘+’로 내렸다. 외국인 투자자 이탈 등 교각살우(矯角殺牛)의 우를 범하지 않고, 증시 유동성을 확보하는 공매도의 순기능은 살릴 수 있는 합리적 방안을 찾아야 할 때다.김상운 경제부 차장 sukim@donga.com}
최근 국가정보원에서 인사 파동이 다시 불거지면서 김규현 원장과 1, 2차장 등 지휘부를 전격 경질했습니다. 정권 교체 이후 국정원 간부들을 대거 갈아치우는 과정에서 잡음이 일어난 데 따른 겁니다. 업무 속성상 인사, 예산 등이 철저히 베일에 가려져야 하는 정보기관에서 인사 잡음이 외부로 알려진 건 매우 이례적인 일입니다.최근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을 계기로 이스라엘의 ‘정보 실패(intelligence failure)’ 원인을 짚은 ()에 이어 이번에는 국내외 정보 실패 사례를 통해 정보기관 개혁 방향을 다뤄보겠습니다(크리스토퍼 앤드루 영국 케임브리지대 교수의 저서 등 국내외 주요 문헌을 참고했습니다)국정원의 ‘대북(對北) 정보 실패’ 사례2011년 12월 17일 김정일 사망 사건은 국정원의 대표적인 정보 실패 사례로 꼽힙니다. 이명박 정부 당시 원세훈 원장이 이끌던 국정원은 김정일이 사망하고 이틀이 넘도록 이를 알지 못하다 북측의 보도 이후에야 파악했습니다. 물론 CIA 등 서방 주요 정보기관들도 김정일 사망 사실을 알지 못했다고는 하지만, 이들이 갖지 못한 고급 휴민트(인간 정보 자산)를 보유했다는 국정원조차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에 충격파가 컸습니다.스탈린주의식 유일 지배체제 국가인 북한에서 수령의 일거수 일투족은 가장 중요한 정보 가치를 지닙니다. 예컨대 북한은 2018년 북미 정상회담 때 수령의 신체 정보 유출을 막기 위해 김정은 전용의 이동식 변기까지 싱가포르에 공수해갔죠. 세계에서 가장 폐쇄적인 통제국가에서 수령의 신상 정보를 얻는 건 지극히 어렵습니다. 설사 평양에 외교공관을 둔 국가라도 이중, 삼중의 감시구조가 작동하는 북한 현지에서 협조자를 구하는 건 하늘의 별따기죠.이런 북한에서 수령에 대한 정보를 얻으려면 권력 핵심에 딥스로트를 갖고 있어야 가능합니다. 그런데 1994년 7월 8일 김일성 사망 당시 국정원(당시는 국가안전기획부)은 휴민트를 동원해 이 사실을 파악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로부터 17년 후에는 왜 수령의 사망 사실을 적시에 포착하지 못했을까요. 이를 두고 이명박 정부 직후 국정원 개편 과정에서 대북전략국을 해체하면서 대북 정보망에 구멍이 뚫렸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나왔습니다.역대 정부서 반복된 ‘정보기관의 정치화’전문가들은 정권 교체 시기마다 국정원(이전 안기부)의 인적 청산이 대규모로 이뤄져 전문성이 떨어지는 폐해가 반복되고 있다고 말합니다. 한 분야를 오랫동안 담당하며 쌓아놓은 정보망(인적 네트워크)이 대규모 조직개편 과정에서 사라진다는 얘기입니다. 이명박 정부에서 대북전략국이 해체돼 대북 정보망이 흔들린 사례가 대표적입니다.윤석열 정부는 신임 국정원장이 임명되기도 전인 지난해 5월 11일 문재인 정부 때 임명된 박지원 원장을 해임하고, 그 다음달 1급 보직국장 27명 전원을 대기 발령했습니다. 문재인 정부에선 국정원에 ‘적폐청산 TF’를 설치하고 대공수사권을 경찰로 넘기는 등 대대적인 조직개편에 나섰습니다. 김대중 정부는 안기부 명칭을 국정원으로 바꾸고 전체 직원의 약 11%를 구조조정했고, 김영삼 정부에선 안기부 직원 약 300명을 대기 발령했습니다. 12.12 쿠데타로 집권한 전두환 정부에선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이 중앙정보부장을 직접 겸임하면서 대대적인 조직개편을 단행해 약 300명의 요원들을 내보냈습니다.역대 정부들에서 이런 현상이 반복되는 건 국정원을 정권의 친위기관으로 여겨 ‘내 사람’을 심어야한다는 인식이 강하기 때문입니다. 앞서 에서도 다룬 ‘정보기관의 정치화’ 문제입니다. 정책 결정자가 정보기관을 길들이려는 정보기관의 정치화는 정보 실패로 이어집니다. 정보기관이 인사, 예산권을 틀어쥔 권력자의 입맛에 맞게 정보를 가공하는 과정에서 정세를 왜곡하기 때문이죠.사실 이는 비단 한국 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최근 하마스 기습을 예측하지 못한 이스라엘의 정보 실패를 네타냐후 총리의 극우 행보에서 찾는 시각도 있습니다. 그가 사법부를 무력화하는 비민주적 정책을 강행하면서 여기에 반대한 군부 및 정보기관을 적대시하고 불신한 게 정보 실패로 이어졌다는 거죠.냉전이 한창 벌어지던 1950, 60년대 서구사회를 발칵 뒤집어 놓은 ‘케임브리지 파이브(Cambridge Five)’ 사건도 권력자의 왜곡된 시각이 정보 실패를 촉진한 사례입니다. 영국 케임브리지대 출신으로 영국 정보기관에서 활동한 킴 필비, 도널드 매클레인, 가이 버지스 등 5인은 사회주의 이념에 따라 자진해서 소련에 정보를 제공한 일종의 이중 스파이였습니다. 이들은 서방의 고급 정보를 대거 전달했지만, 소련의 최고지도자 스탈린의 마음을 얻지는 못했죠. 이들은 본질적으로 영국의 스파이라는 스탈린의 섣부른 판단으로 인해 케임브리지 파이브가 제공한 일급정보 상당수가 사장돼 버립니다.오판 줄이기 위한 견제 필요성정보 실패는 기본적으로 적의 의도와 능력에 대한 오인(misperception)에서 비롯됩니다. 최근 이스라엘 정보기관이 하마스의 평화공세에 속아 이들의 적대적 의도를 직시하지 못한 사례가 대표적입니다. 사실 하나의 현상에 대한 상이한 정보보고들 속에서 올바른 판단을 내린다는 게 말처럼 쉽지만은 않습니다.시계를 제2차 세계대전 때로 돌려보죠. 1933년 집권 후 국제연맹을 탈퇴하고 재무장에 박차를 가한 히틀러가 1938년 3월 오스트리아에 이어 그해 9월 체코슬로바키아를 침공하자, 영국에선 대응 방향을 놓고 논란이 벌어집니다. 히틀러와 적당히 타협하자는 주장과 더 이상의 침략을 저지하려면 무력개입까지 불사해야한다는 주장이 맞섰죠.이때 영국 국내정보국(MI5)은 독일 내 핵심 정보원의 보고를 토대로 히틀러에 대한 강경 노선이 필요하다는 보고를 올립니다. 이 정보원의 이름은 나치에 반대한 독일 외교관 볼프강 추 푸틀리츠였습니다. 독일 내부 정세에 밝았던 그는 유화책은 히틀러를 공격적으로 만들 뿐이며, 그를 막는 유일한 길은 강경 노선이라고 확언했습니다. 1938년 푸틀리츠는 MI5에 “영국이 전쟁도 불사하겠다는 단호한 태도를 보인다면 히틀러의 엄포는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 독일군은 아직 큰 전쟁을 치를 준비가 안 돼 있다”고 보고했습니다.그의 말처럼 독일군은 1938년 3월 12일 오스트리아 침공 당시 아무런 저항을 받지 않았는데도 차량 고장으로 진군이 지연될 정도로 전쟁 준비에 빈틈이 많은 상태였죠. 그러나 이후 체코를 병합하며 전쟁물자를 추가로 확보한 뒤 전력을 더 끌어올릴 수 있었습니다. 전쟁사가들은 독일의 체코 침공 당시 영국이 프랑스 등과 연합해 히틀러의 요구를 단호히 거부하고 강경론을 고수했다면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는 견해를 내놓고 있습니다.그런데 당시 해외 정보를 책임진 영국 비밀정보부(MI6)의 보고는 MI5와 달랐습니다. MI6는 체코가 독일어권인 주테텐 지방을 독일에 내주면 히틀러의 폭주가 멈출 거라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MI6의 예상과 반대였죠. 결국 MI5의 보고대로 영국 정부의 유화정책에 따른 뮌헨협정은 히틀러의 야욕을 키우는 결과를 낳습니다.여기서 주목할 부분은 MI6의 잘못된 판단에 대해 MI5가 견제구를 날렸다는 겁니다. 하지만 두 기관의 정보가 적시에 공유, 조정되는 시스템이 당시 갖춰져 있지 않은 게 문제였죠. 정보의 다양한 해석과 기관간 견제를 유도하면서도 동시에 여러 정보가 공유, 조정되는 시스템의 보완이 필요하다는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그런데 현재 우리나라 정보기구는 국내와 해외, 대북 정보기능이 국정원 한 곳에 통합돼 있는 구조를 갖고 있습니다. 여기에 국군정보사령부, 국군방첩사령부, 경찰 정보국 등 여타 정보기관들의 업무를 조정하고 예산을 관리하는 기능까지 국정원이 맡고 있죠. 이에 따라 기관간 견제 차원에서 국내 정보와 해외 정보 기능을 분리해야한다는 지적이 나옵니다.사실 중앙정보국(CIA)과 연방수사국(FBI) 등을 둔 미국이나 MI5와 MI6를 둔 영국, 연방보안국(FSB)과 대외정보국(SVR)을 둔 러시아, 연방헌법수호청(BFV)과 연방정보원(BND)을 둔 독일 등 주요국들은 국내와 해외 정보기관을 복수로 운영하고 있습니다. 미국은 9.11 테러 이후 콘트롤타워로 미국 국가정보장실(ODNI)을 신설해 각 정보기관들의 업무를 조정하고 정보를 공유토록 하고 있습니다.‘정보 공유’ 실패로 패전한 나치6.25 전쟁 때로 시계를 잠시 돌려보겠습니다. 당시 북한의 기습공격에 남한이 허를 찔린 것은 정보 실패에서 비롯됐습니다. 전쟁 전 남한에 파견된 CIA 요원이 불과 2~3명에 불과했던데다 이들의 정보 수집 및 분석 역량이 낮다 보니 정보의 질이 떨어졌다는 게 학계 분석입니다.게다가 남한에서 미군 철수로 한반도까지 커버해야했던 도쿄 극동군 사령부의 비협조도 한몫했죠. 정보기관의 기능을 무시한 맥아더 사령관이 CIA와의 정보 공유를 차단했기 때문입니다(CIA 본부는 1950년 5월 이후에야 극동군 사령부의 정보에 완전히 접근할 수 있었습니다) 이로 인해 북한군에 대한 CIA의 정보 역량은 한계에 봉착할 수밖에 없었죠.정보기관 간 견제와 더불어 통합 조정과 정보 공유가 중요하다는 것은 2차 대전에서도 확인됩니다. 전쟁 초기 독일 유보트의 무제한 잠수함 작전으로 영국 해군은 궤멸적 피해를 입는 최대 위기에 봉착합니다.그런데 이때 천재 수학자 앨런 튜링이 독일군 암호체계(에니그마)를 해독한 데 이어 영국 정부통신본부(GCHQ)를 중심으로 독일군의 시긴트(신호정보)를 통합 수집하면서 판세를 뒤집는데 성공하죠(앨런 튜링의 일대기는 영화 <이미테이션 게임>(2015년)에 실감나게 묘사돼 있습니다) 당시 영미 연합군의 신호정보가 적시에 취합 공유돼 GCHQ가 집중 분석한 시스템이 효과를 발휘한 겁니다.반면 독일에선 국방군 최고사령부 암호국, 외무부 체트(Z)국, 헤르만 괴링의 조사국, 나치 친위대(SS) 산하 보안국(SD), 육해공군 정보기관들이 각기 신호정보를 수집, 분석하고는 이를 공유하지 않아 시너지를 내지 못합니다. 독일이 GCHQ 중심의 통합 정보체계를 구축하지 않은 건 히틀러가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각 정보기관들의 충성 경쟁을 유도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효율성 대신 권력집중을 선택한 겁니다.정보 공유의 중요성은 2001년 9.11 테러 때도 다시 한번 확인됩니다. 미 의회 9.11 진상조사위원회는 최종보고서에서 미국이 정보 통합관리에 실패해 테러를 무산시킬 수 있었던 기회를 놓쳤다고 결론 내렸습니다.예컨대 NSA는 2000년 1월 테러 감행 전 항로 답사차 쿠알라룸푸르를 방문한 범인 3명의 통화를 감청해 이들이 수상하다는 사실을 알아챘지만 FBI, CIA 등 관련 정보기관에 이를 알리지 않았습니다. 또 CIA는 2001년 3월 태국 정부로부터 테러범 중 한 명이 LA행 항공기에 탑승했다는 정보를 전달받았지만 이를 FBI와 공유하지 않았습니다. FBI는 비행훈련을 하던 아랍인을 체포해 추방 조치만 내리고 CIA와 정보를 공유하지 않았죠. 조사위에 따르면 당시 체포된 아랍인의 신상 정보를 CIA의 알카에다 데이터베이스와 연계시켰다면 용의자 심문을 통해 테러 모의 정보를 사전에 입수할 수 있었다는 겁니다.종합하면 NSA, CIA, FBI, 국무부, 군 등 관련 정보기관들이 수집한 정보를 제때 공유할 수 있는 시스템의 미비가 9.11 테러를 막지 못한 결정적 요인이었던 겁니다. 이에 따라 조사위는 정보기관 간 정보공유를 확대하고, 이들을 통제하는 국가정보장실(ODNI) 신설을 제안했습니다. 그 결과 CIA, FBI, NSA 등 16개 정보기관을 통솔 조정하고, 이들의 예산을 통제할 수 있는 막강한 권한의 국가정보장실(ODNI)이 생기게 됩니다.지금까지 각국 정보 실패 사례를 통해 정보기관의 정치화를 막고, 정보 왜곡을 줄이기 위한 기관간 견제(예컨대 해외, 국내 정보의 분리)를 유도하되 취합된 정보를 적시에 공유할 수 있는 ‘조정 시스템’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는 시사점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이와 관련해 정권 교체기마다 반복되는 국정원의 인사 파동을 근절하려면 국정원을 최고 권력자의 친위기관으로 여기는 행태에서 벗어나는 등 정보기관의 정치화를 차단할 필요가 있습니다.미중 갈등으로 야기된 신(新)냉전 와중에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이 잇달아 터지며 대북 안보 위협이 커진 이때 국정원의 역할은 막중할 수밖에 없습니다. 국정원이 정권교체에 따른 부침(浮沈)에서 벗어나 정보 실패를 예방할 수 있는 합리적인 방안을 찾아야 할 때 아닐까요.[참고 문헌]-크리스토퍼 앤드루·박동철 역, 〈스파이 세계사〉 1, 2, 3 (한울·2021년)-전웅, <9/11 테러, 이라크 전쟁과 정보실패>(세종연구소, 2005년)-석재왕, <한국전쟁 발발과 미국 트루먼 행정부의 정보실패>(국가안보와 전략 63호, 2016년)-Foreign Policy 〈What Israeli Intelligence Got Wrong About Hamas〉(2023.10.11)-월간조선 〈흔들리는 국정원 향해 작심한 염돈재 전 국정원 차장 “국정원장들이 국정원 다 망쳐 놨다”〉(2014년 8월호)“모든 해답은 역사 속에 있다.” 초 단위로 넘치는 온라인 뉴스 속에서 하나의 흐름을 잡기가 갈수록 어려워집니다. 역사를 깊이 들여다보면 연이은 뉴스들 사이에서 하나의 맥락이 보일 수 있습니다. 문화재, 학술 담당으로 역사 분야를 여러 해 취재한 기자가 역사적 사실들을 통해 뉴스를 분석하고, 미래에 대한 인사이트를 찾아보고자 합니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