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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14일 서울중앙지법의 중법정 311호. 윤병세 전 외교부 장관이 일제강점기 강제징용 손해배상청구 소송 관련 재판 개입 의혹 사건의 증인으로 출석했다. 그는 “무토가 고문인 건 알았나”라는 질문에 “아마 몰랐을 것으로 생각된다”고 답했다. ‘무토’는 윤 전 장관이 2013년 1월 당시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 인수위원회의 통일분과 위원 자격으로 만나 저녁 식사를 한 무토 마사토시(武藤正敏) 미쓰비시중공업 고문이다. 윤 전 장관은 무토 전 주한 일본대사가 강제징용 소송의 피고인 미쓰비시중공업의 고문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함께 저녁을 먹었다고 주장한 것이다. 윤 전 장관은 검사가 강제징용 재판 개입과 관련된 3가지 회의에 참석한 사실이 있느냐고 묻자 시인했다. 하지만 외교부 문건과 직원의 메모를 근거로 윤 전 장관이 회의에서 했다는 말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묻자 “제가 기억이 안 난다”, “언뜻 생각나는 것이 없다”는 답변을 반복했다. 윤 전 장관이 참석한 회의 첫 번째는 ‘IOC’다. ‘내부 관계자 회의’라는 의미인 ‘Inner Office Conference’의 약칭이다. 대법원 소부가 2012년 5월 미쓰비시중공업 등 일본 전범기업이 강제징용 피해자에게 배상해야 한다고 판결한 직후 윤 전 장관이 고문으로 있던 로펌이 몇 차례 소집한 내부 대책회의다. 윤 전 장관은 미쓰비시중공업 측 변호사 등이 참석한 IOC에서 1965년 이후 한일청구권협정에 대한 정부 입장의 추이 등을 설명했다. 두 번째는 소인수회의다. 윤 전 장관은 2013년 12월과 2014년 11월 김기춘 당시 대통령비서실장의 삼청동 공관에서 대법원 판결 확정의 부당함을 법원행정처장에게 직접 브리핑했다. 이 공관 회동을 윤 전 장관은 정상회담의 ‘1 대 1’, ‘2 대 2’ 회동을 의미하는 일본 외교용어 ‘쇼닌즈 가이고(少人(수,삭,촉)(회,괴)合)’에서 따와 소인수회의로 명명했다. 소인수회의에선 대법원 소부 판결을 대법원 전원합의체에 회부해 판결을 뒤집는 전략이 논의됐다. 세 번째는 콘클라베다. 가톨릭 교황을 뽑는 비밀 추기경 회의인데 윤 전 장관은 법정에서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콘클라베라고 해서 브레인스토밍을 했다”고 말했다. 소인수회의 자료 준비를 위해 외교부 청사에서 윤 전 장관이 주재한 심야 대책회의가 콘클라베였다. 외교부 문건에는 윤 전 장관이 ‘국내적으로 이기고 국제적으로 지면 정권이 날아가는 문제’라고 말했다고 적혀 있다. 검찰은 IOC에서 강제징용 판결의 파장을 처음 인식한 윤 전 장관이 범정부적 차원의 대책 마련을 위해 소인수회의를 제안했고, 이 회의 자료를 콘클라베에서 준비한 것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윤 전 장관은 “실무자와 전직 장관이 이야기하는 것은 다르다”면서 재판 개입 의혹을 풀 핵심 질문은 피해갔다. 윤 전 장관은 재직 중 의사 결정을 주로 비밀회의에서 한다는 지적을 받았다. 법정 증언에서 이 비밀회의를 방패 삼아 유체이탈 화법을 구사했다는 비판이 많다. 그가 장관으로서 4년 2개월 재임하는 동안 강제징용 재판이 지연됐다. 그 경위를 소상히 국민들에게 밝히는 게 전직 고위 공직자의 도리다. 정원수 사회부 차장 needjung@donga.com}

16일 전국 법원청사에 배달된 법률 전문지에 로펌의 변호사 영입 광고가 실렸다. 양복 차림에 붉은색 넥타이를 맨 변호사의 명함판 얼굴 사진과 이름 아래 인천지법 부장판사를 지냈다는 경력이 적혀 있었다. 하루 뒤인 17일 청와대는 문재인 대통령이 이 광고의 김영식 변호사(52·사법연수원 30기)를 민정수석실 법무비서관으로 임명했다고 발표했다. 한 판사는 “얼마 전 김 비서관이 로펌에 간다는 메일을 받았다. 세 아이의 아버지로서 새 출발을 하나 싶었는데, 청와대 인사 발표에 깜짝 놀랐다”고 말했다. 또 다른 판사는 “어리둥절하고, 아연실색”이라고 했다. 올 2월 법복을 벗은 김 비서관이 불과 3개월 만에 판사에서 변호사로 ‘경력 세탁’을 한 뒤 청와대에 입성한 게 부적절하다고 지적했다. 김 비서관은 1987년 민주화운동을 하다 경찰의 최루탄에 맞아 숨진 연세대 86학번 이한열 씨의 동기다. 학생운동을 하다 늦깎이로 1998년 사법시험에 합격한 것으로 알려졌다. 2001년 법관이 된 김 비서관은 종종 소신 판결을 했다. 2016년 10월 광주지법 근무 당시 항소심 재판장으로서는 처음으로 양심적 병역 거부를 무죄로 판결했다. 상급법원 판단에 도전한 것이다. 대법원이 ‘병역의 의무가 양심의 자유보다 우선한다’는 기존 판례를 바꾼 것은 지난해다. 양심적 병역 거부에 대한 무죄 선고 당시 그는 “인권 선진국에 진입한 만큼 인권 문제를 고민해야 될 것 같다”고 했다. 사석에선 그를 형으로 부르고 따르는 후배 법관이 많았다. 법원 내에선 ‘행동대장’으로도 불린다. 그는 대통령 탄핵과 조기 정권 교체에 이어 사법 권력이 물갈이되기 시작한 2017년 이후 전국법관대표자회의에 적극 참여했다. 법관회의에서 그는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을 법원이 자체 조사할 게 아니라 검찰이 수사해야 한다고 촉구했고, 법관회의가 의혹 연루 판사에 대한 법관 탄핵을 요구할 때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당시 ‘역사의 큰 흐름이 바뀌려면 희생양이 필요하다’고 한 그의 발언이 잊히지 않는다”고 하는 판사들이 많다. 청와대에서 법무비서관실은 ‘내부 로펌’ 역할을 한다. 직제상 국정 현안 및 정책에 대한 법령 해석이나 법률 판단을 내리는 것이 주 업무다. 청와대와 사법부의 가교 역할도 한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소속 변호사 등 후보군이 여러 명 있는데도 청와대는 지난달 중순부터 김 비서관을 굳이 단수 후보로 정해놓고, 인사 검증을 했다고 한다. 김 비서관이 진보 성향 법관 모임인 ‘우리법연구회’와 그 후신인 ‘국제인권법연구회’ 소속이었다는 점 때문에 같은 모임의 판사들조차 당혹스러워하고 있다. 두 연구모임 출신이라서 대법원과 헌재의 요직에 중용된다는 비판이 많은데, 앞으로 청와대가 이를 무시하겠다는 뜻으로 해석되기 때문이다. 김 비서관의 전임도 국제인권법연구회 핵심 회원이었다. 무엇보다 재판만 생각하며 살아온 평범한 판사들이 이번 인사로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었다. “사법부가 청와대에 휘둘리지 말아야 한다”고 했던 판사가 법복을 벗고 사법부 관련 업무를 맡는 청와대 참모로 변신했기 때문이다. 그가 법관으로서 했던 말의 진정성이, 그의 말을 믿고 다수 의견에 섰던 판사들의 정의감이 송두리째 의심받고 있다. 정원수 사회부 차장 needjung@donga.com}

3월 초 법조윤리협의회에서 연락이 왔다. ‘공직퇴임(전관) 변호사 등의 연도별 수임 내역 자료’를 제공할 수 있게 됐다고 했다. 지난해 8월부터 여러 차례 자료 공개를 요청했다가 번번이 거절당한 바로 그 자료였다. 곧바로 윤리협의회 사무실이 있는 서울 서초동 변호사교육문화관 5층 사무실로 갔다. 자료에서 2012년 이후 변호사 수가 급증했는데도 지난해 전관 변호사가 서울지방변호사회 소속 변호사보다 사건을 평균 3배 가까이 더 수임했다는 통계를 일부 확인했다. 전관예우를 막기 위한 이른바 전관예우방지법(2011년 5월 시행) 관피아방지법(2015년 3월 시행) 김영란법(2016년 9월 시행) 등이 연이어 시행됐는데도 ‘전관 불패 신화’는 오히려 더 세졌다는 것이 수치로 확인된 것이다. 그전까지 단 한 번도 공개된 적이 없는 자료였다. 윤리협의회는 국회의 자료 제출 요구에도 응하지 않았다고 한다. 2007년 7월 출범한 윤리협의회는 전관예우의 징후를 파악해 사전 조사할 수 있는 권한을 갖고 있다. 하지만 공개된 자료의 내용이 기대에 턱없이 못 미쳤다. 통계의 구체적인 근거와 세부 항목을 알고 싶었지만 장벽이 높았다. 전관 변호사 중 구체적으로 누가 얼마나 많은 사건을 수임했는지, 어떤 사건을 수임했는지가 모두 비공개였다. 윤리협의회 사무실 안에 박스째 쌓여 있는 A4 용지 70만 장 분량의 원본 데이터에는 접근조차 할 수 없었다. 왜 그럴까. 변호사법 89조 8항은 윤리협의회 위원이나 사무직원 등이 업무 처리 중 알게 된 비밀을 누설해서는 안 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윤리협의회는 조직의 고유 목적인 ‘전관예우 실태 분석’에 부합하는 분석 자료 중 공익을 위해 공개해도 되는 것으로 결정한 일부만 공개할 수 있다. 더 큰 문제는 전관 변호사가 얼마를 버는지 파악할 수 있는 정보가 아예 신고 대상이 아닌 것이다. 수임료는 사건의 경중에 따라 적정한 보수를 받았는지 판단해 전관예우 여부를 가늠할 수 있는 결정적인 자료인데도, 전관예우를 막자고 설립한 윤리협의회는 수임료를 확인하지 못하고 있다. 또 수임 건수의 경우 퇴직한 지 2년이 안 된 전관 변호사는 윤리협의회에 신고해야 하지만, 2년이 지나면 6개월마다 형사사건 등이 30건 미만일 경우 신고를 하지 않아도 된다. 수임 건수를 조정하면 신고 대상에서 빠질 수 있는 것이다. 지난해 대법원 사건을 가장 많이 수임한 7명의 전직 대법관 중 윤리협의회에 수임 명세를 신고한 변호사가 없다는 게 단적인 사례다. 한 법조윤리위원은 “이름만 들으면 알 만한, 전관으로 돈을 많이 버는 진짜 거물들은 신고를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렇게 전관예우 실태 공개를 막고 있는 장벽을 제거할 방법은 없을까. 국회가 나서면 된다. 공직 후보자가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전관예우는 없다”고 하면 의원들은 여야를 가리지 않고 협공해 호통을 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그렇게 힘을 뺄 게 아니라 전관 변호사들이 수임료를 윤리협의회에 신고하도록 하고, 차관급 이상 전관은 퇴직 기간과 관계없이 신고를 의무화하도록 법을 바꾸면 된다. 그리고 윤리협의회는 신고된 내용을 바탕으로 전관예우 실태를 분석해 이 수치를 정기적으로 공개해야 한다. 전관예우에 관한 진단이 정확해야 제대로 된 처방이 나올 수 있다. 정원수 사회부 차장 needjung@donga.com}

검찰이 피의자를 구속해 달라며 법원에 청구하는 구속영장 맨 앞에는 표지처럼 영장청구서가 붙어 있다. 그 문서 양식은 법무부령으로 정해져 있다. 검사는 영장 발부가 필요한 이유를 나타내는 □ 표시 중 해당 사항이 있는 곳에만 ■로 체크한다. 그리고 판사가 영장을 기각할 때는 ‘발부하지 아니하는 취지 및 이유’라는 제목의 칸 오른쪽 공란에 기각 사유를 적고, 판사 이름을 쓴 뒤 도장을 찍는다. 공란은 너비가 11cm, 높이가 1.7cm밖에 안 된다. 손 글씨로 기각 사유를 두 줄 이상 적기 어렵다. 대법원의 ‘인신 구속 사무의 처리에 관한 예규’에는 기각 사유를 간략하게 기재하도록 돼 있다. 부득이 두 줄을 넘기면 판사가 별지(別紙)에 기각 사유를 적은 뒤 그걸 청구서에 오려 붙여 간인한다. 서울동부지법 박정길 영장전담 부장판사도 지난달 26일 오전 2시 김은경 전 환경부 장관의 직권남용 혐의 등에 대한 구속영장을 기각하면서 청구서에 별지를 붙였다. 당시 법원 측은 별지를 사진으로 찍어 취재진에 보냈고, 일부 언론이 이를 그대로 보도했다. 692글자가 A4용지 절반 분량에 19줄로 적혀 있는 사진이다. 이 사진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순식간에 퍼져 나갔고, 일부 판사들은 뒤늦게 이를 구해 돌려 보고 있다. 30년 넘게 판사로 근무한 고위 법관은 최근 카카오톡으로 이 별지를 받아 봤다고 한다. 그에게 소감을 묻자 “내 평생 이런 기각 사유는 본 적이 없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무엇보다 기각 사유와는 무관해 보이는, 검찰의 이른바 ‘환경부 블랙리스트’ 수사를 근본적으로 부정한 게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최순실 일파의 국정농단과 당시 대통령에 대한 탄핵으로, 공공기관의 방만한 운영과 기강 해이가 문제 되었던 사정” “법령의 해당 규정과 달리 청와대가 공공기관 임원을 내정하던 관행이 장기간 있어” 등의 표현이 문제라는 것이다. 법조계에선 “판사가 청와대 입장을 그대로 옮긴 것 같다” 등의 비판이 제기됐다. 법원 내부에선 애물단지 같은 ‘별지 기각 사유’를 이참에 없애자는 주장이 나온다. 영장전담 판사가 별지에 범죄 사실에 대한 소명이 없다며 그 내용을 구체적으로 썼는데, 그 전에 검찰이 법원에 제출한 수사 기록에 해당 소명이 포함된 사실이 드러난 경우도 있다. 이에 한때 영장전담 판사들은 “기각 사유를 보완하면 발부해 주겠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검찰을 자극해서 수사 기한만 늘린다”며 기각 사유를 간단히 쓰자고 의견을 모으기도 했다. 1997년 영장실질심사제도가 처음 도입될 당시 만들어진 대법원 예규엔 헌법과 형사소송법이 지향하는 무죄 추정과 불구속 수사 및 재판이 대원칙으로 돼 있다. 불구속이 원칙, 구속이 예외라는 것이다. 예외에는 이유를 달아야 하지만 원칙대로 처리한 업무에 구구절절 사정을 설명할 필요는 없다. 영장청구서엔 발부 이유를 적는 빈칸이 없다. 왜 기각 사유만 쓰게 됐을까. 전직 영장전담 판사는 “피의자가 아니라 수사 기관에 답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기각 이유가 짧다고 항의할 피의자가 얼마나 있을까. 검사가 청구하는 영장을 법원은 으레 발부하는 것이 원칙이라고 여기던 시절에 만들어진 청구서 양식부터 바로잡자고, 법원이 먼저 법무부에 요구해야 한다. 정원수 사회부 차장 needjung@donga.com}

“‘하코방’(상자같이 좁은 방을 뜻하는 일본말) 같은 곳에 있다가 서초동으로 갔는데, 얼마나 사무실이 넓고 좋던지.” 1989년 9월 2일 당시 서울형사지법(현 서울중앙지법) 판사로 근무하던 황찬현 전 감사원장(65)은 서소문에서 서초동으로 법원 청사를 옮기던 때를 회상하며 이렇게 말했다. 당시 동아일보는 서초동 청사에 대해 ‘경비원 1명이 건물 내부를 순찰하는 데만 9시간씩 걸릴 정도로 웅장한 법원 건물’이라고 보도했다. 서초동 청사는 규모와 시설에서 서소문 청사를 압도했다. 서소문의 서울고검·서울지검(현 서울중앙지검) 청사도 서초동 법원 바로 옆으로 옮겼다. 법원보다 하루 먼저 열린 준공식에서 당시 김기춘 검찰총장이 기념식수를 하고, 방명록에 서명하는 장면이 담긴 사진이 지금도 서울중앙지검 1층 전시관에 남아 있다. 그리고 6년이 지난 1995년 10월 서소문의 대법원과 대검찰청까지 서초동으로 옮겨가면서 이른바 ‘서초동 시대’가 시작됐다고 볼 수 있지만 그 원년은 1989년이었던 셈이다. 당시 법원과 검찰 청사의 서초동 이전을 놓고, 일제강점기와의 단절이라는 의미를 부여하는 시각이 있었다. 일제강점기 때인 1938년 서소문에 경성재판소 합동청사가 건립된 이래 법원과 검찰이 함께 51년 동안 서소문에 있었기 때문이다. 법조계에선 “국민 세금으로 세운 새 청사에서 ‘권위주의 법치주의’를 ‘민주주의 법치주의’로 탈바꿈시킬 기회를 맞게 됐다”고 평가했다. 이렇게 법원과 검찰이 국민의 큰 기대를 안고 새 출발을 했지만 성과는 기대에 못 미쳤다. 우선 법원은 사법제도의 근본적인 틀을 바꾸는 개혁에 나섰지만 스스로 주도했다기보다는 외부 요구에 따라간 것이었다. △1993년 대법원 산하 사법발전위원회 △1999년 대통령 자문기구인 사법개혁추진위원회 △2005년 대통령 자문기구인 사법제도개혁추진위원회가 그 대표적인 사례다. 이후 영장실질심사와 국민참여재판 등이 도입됐다. 또 사법시험이 폐지되면서 2013년부터 미국처럼 3∼15년 이상 경력의 변호사 중에서 법관을 임용하는 제도가 생겼다. 검찰은 ‘검찰권의 독립’이라는 시대적 과제 앞에서 여러 차례 좌절을 겪었다. 검찰이 살아있는 권력 수사에 약하다는 이유로 미국식 특별검사 제도가 도입됐고, 현직 대통령의 아들과 불법 대선자금 수사 등으로 한때 국민의 박수갈채를 받았던 대검찰청 중앙수사부는 해체됐다. 지금은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 설치, 수사권과 기소권 분리 논의가 국회 차원에서 진행되고 있다. 그 결과에 따라 검찰 조직의 운명이 바뀔 수도 있다. 요즘 법원과 검찰 측에 내년 가을에 있을 ‘청사 이전 30주년’을 어떻게 준비하고 있느냐고 물으면 “준비를 하긴 해야 하는데…”라는 미적지근한 반응을 보인다. 현재로선 법원과 검찰 모두 행사를 조용히 치르거나 아예 건너뛸 가능성이 높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 시절 법원행정처의 재판 개입 및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에 대한 검찰 수사로 서초동 법조타운 일대가 어수선한 분위기라는 점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행사가 열리지 않더라도 최소한 법원과 검찰이 국민의 신뢰를 받겠다는 굳은 의지를 다지고 그 구체적인 방안을 담은 메시지만이라도 발표했으면 좋겠다. ‘서초동 시대’ 들어 법원과 검찰 모두 청와대에서 물리적인 거리는 멀어졌지만 결국 청와대와의 관계 설정에 실패해 국민의 불신을 자초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법원과 검찰이 내년에는 국민을 위한 제도 개선 방안을 놓고 서로 경쟁하며, 국민의 신뢰를 되찾는 원년이 됐으면 한다. 정원수 사회부 차장 needjung@donga.com}

미국 연방의회 뒤편, 의회도서관 바로 옆에는 주변 건물에 비해 규모가 작은 4층짜리 연방대법원 건물이 있다. 미국 건국 이후 100년 넘게 의회 건물에서 곁방살이를 하던 연방대법원이 1935년 4월 행정부, 입법부에 이어 공간적으로 독립한 곳이다. 이 건물 동쪽에 연방대법원장 집무실이 있다. 그 집무실 외벽 남쪽과 북쪽 코너 맨 위에 동물 모양 장식이 붙어 있다. 의회와 가까운 남쪽 코너의 장식은 앞발을 들고 뛰어가는 모습의 토끼다. 북쪽 코너 장식은 고개를 들고 엉금엉금 기어가는 거북이 모양이다. 마치 토끼와 거북이가 양쪽 끝에서 경주를 막 시작하는 것 같다. 사법부 건물 독립 당시 미국의 유명 조각가가 이솝우화에 나오는 ‘토끼와 거북이’에서 영감을 얻어 새겼다고 한다. 우화에 나오는 “느리더라도 꾸준하면 경주에서 이긴다(slow and steady wins the race)”란 문구처럼 사법부는 천천히, 그러나 뚜벅뚜벅 걸어가야 한다는 점을 상징한다. 윌리엄 태프트 전 연방대법원장이 이 건물을 짓도록 의회에서 예산을 따내고, 이 조각을 새긴 건물의 설계도를 승인했다. 한국 사법부의 양승태 전 대법원장은 2011년 9월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미국에선 태프트 전 연방대법원장이 존경받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이후 대법원장 재직 중에는 태프트 전 연방대법원장에 대해 “가장 존경하는 분”이라고 했다. 상고심 개혁을 추진했던 태프트 전 연방대법원장은 꾸준히 변호사단체와 대통령, 의회를 설득해 끝내 목표에 도달했다. 반면 양 전 대법원장은 상고법원 도입을 추진하면서 법무부를 통한 정부입법 대신 의회입법이라는 편법을 동원하고, 변호사단체를 압박하다가 결국 재판 개입 및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 사건의 피의자 신분이 됐다. 태프트 전 연방대법원장을 가장 존경한다면서 그의 ‘거북이걸음’은 본받지 못했다. 김명수 대법원장은 어떨까. 요즘 진보 성향 판사들 사이에선 ‘고슴도치와 여우’라는 말이 회자된다. 그 발단은 김 대법원장이 초대 회장을 지낸 국제인권법연구회 출신 김기영 헌법재판관이 올 9월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한 발언이다. 김 재판관은 당시 ‘고슴도치 정의론’이라는 말을 했다. 그것은 감명 깊게 읽었다는 법철학자 로널드 드워킨이 쓴 ‘정의론’에 나온 얘기다. 이 책을 보면 고슴도치와 여우형 인간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여우는 많은 것을 알고 있지만 고슴도치는 하나의 큰 것을 알고 있다”는 그리스 시인의 말에서 따온 것이다. 여우가 아무리 교활한 꾀를 부려도 맹수에게 붙잡히지만 고슴도치는 하나의 확실한 호신법으로 살아남는다는 취지라고 한다. 김 재판관은 인사청문회 때 긴급조치의 국가 책임을 부인했던 대법원 판례에 반한 판결을 내렸을 때를 회고하며 “모든 승진을 포기하는 심정이었다”고 했다. 자신을 고슴도치형 법관에 비유한 것이다. 국제인권법연구회 출신인 김상환 대법관 후보자 인사청문회 때도 비슷한 말이 나온다.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의 댓글 사건 항소심 재판장으로서 원 전 원장을 법정 구속했던 그는 판결 당시를 되돌아보며 “한 점 부끄러움 없이 그 사안에 대해 충실하게 임했다”고 말했다. 이른바 ‘여우형 법관’이 몰락한 자리를 재판 하나만 생각한 ‘고슴도치형 법관’이 하나씩 채워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법부 독립을 지키는 것을 넘어 흔들리는 사법부를 추스르고, 사법개혁의 구체적인 청사진을 제시하는 시점에서는 고슴도치만으론 부족한 것 같다. 법관 탄핵과 사법행정 개혁 방향을 두고 조금씩 새어나오는 법원 내 파열음을 보면, 적어도 고슴도치처럼 보이는 여우나, 여우 같은 고슴도치가 더 필요한 건 아닐까. 정원수 사회부 차장 needjung@donga.com}

김상환 대법관 후보자는 5일 당일치기 휴가를 떠났다. 김명수 대법원장이 문재인 대통령에게 임명 제청해 그가 대법관 후보자가 된 것은 올 10월 2일. 그 다음 날부터 김 후보자는 63일 동안 대법원 청사 5층 임시 사무실로 출근했다. 두 달 넘게 국회 인사청문회가 열리기를 기다리면서 긴장을 풀지 못하고 지내다가 청문회를 마친 바로 다음 날 휴가를 떠난 것이다. 청문회는 점심식사 시간을 빼고 6시간 25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대법관은 ‘지혜의 기둥’, ‘정의(justice) 그 자체’로 불린다. 대법관 후보자가 정말 ‘지혜의 기둥’인지, ‘정의 그 자체’가 맞는지 검증하는 절차가 국회 인사청문회다. 국회가 그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는 건가. 2000년 국회가 인사청문회를 처음 도입할 때 벤치마킹한 미국 의회에 비해 우리 국회의 검증 시스템은 낙제라고 할 수밖에 없다. 첫째, 의심이 있어도 검증을 끝까지 하지 않는다. 대법관 후보자 인사청문회는 하루 일정으로 너무 짧다. 김 후보자 청문회에 앞서 열렸던 이동원 대법관 청문회는 단 5시간 30분 만에 끝났다. 노정희 대법관과 김선수 대법관 청문회는 각각 6시간 45분, 8시간 35분 걸렸다. 지금까지 청문회를 통해 자질 문제가 제기된 대법관 후보자들이 적지 않았지만 국회에선 여야 없이 “전례가 없다”며 ‘추가 청문회’를 한 적이 한 번도 없다. 반면 미국 상원의 연방대법관 인사청문회는 최소 4일간 열린다. 브렛 캐버노 연방대법관은 5일 동안 청문회장에 섰다. 9월 4∼7일 청문회가 열렸는데, 그가 10대 때 성폭행을 했다는 의혹이 불거지자 9월 27일 다시 청문회가 열렸다. 앞서 1991년 클래런스 토머스 연방대법관의 첫 청문회 직후 불거진 성희롱 의혹으로 청문회가 한달 후 재개됐던 상황과 똑같다. 둘째, 우리 국회는 대법관 후보자에게 너무 너그럽다. 2000년 7월 첫 대법관 후보자 청문회 이후 모두 43명의 대법관 후보자 가운데 중도 낙마는 1명밖에 없다. 42명은 국회 본회의 인준을 통과했다. 낙마 비율은 2.3%다. 반면 미국은 1789년 이후 연방대법관 후보자 163명 중 37명(22.7%)이 낙마했다. 미국의 낙마 비율이 한국의 약 10배다. 미국에는 연방대법관이 되기 위한 조건으로 ‘예수 그리스도, (로마법을 집대성한) 유스티아누스 로마 황제, (초대 대법원장인) 존 마셜을 합쳐야 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인사 검증이 까다롭다. 한국 국회는 장관 후보자를 상대로 ‘현미경 검증’을 한다. 뉴욕타임스 조사 결과 미국 건국 이래 500명 이상의 장관 가운데 의회에서 인준이 부결되거나 지명이 철회된 후보자는 23명뿐이다. 반면 한국은 인사청문회 제도가 도입된 지 20년이 채 되지 않았지만 낙마한 장관 후보자가 20명이 넘는다. 셋째, 미국은 인사 검증 절차를 끊임없이 진화시켜 왔는데 한국은 제자리걸음만 하고 있다. 미국의 경우 상원에 후보자가 나와서 의원들의 질의에 답하는 방식은 1955년 시작됐다. 초기에는 의원들이 자질에 대한 6개 정도의 질문만 하다가 지금은 전체 질문 수가 사회적 쟁점 등 500∼700개로 늘었다. 1981년 인사청문회 TV 생중계가 도입된 뒤 의원들의 질문은 계속 정교해졌다. 반면 우리 국회는 오전 1차 질의와 오후 보충질의 등이 끝나면 서둘러 청문회를 끝내는 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사법행정권 남용 및 재판 개입 의혹으로 사법부가 70년 역사상 최악의 위기에 빠졌다. 대법관 후보자 인사청문회를 한 지난 18년 동안 부적격자를 한 명밖에 걸러내지 못한 국회의 허술한 검증 시스템이 위기를 부른 건 아닐까. 사법부 견제는 국회 본연의 의무다. 정원수 사회부 차장 needjung@donga.com}

‘사건 76 고합 186 대통령 긴급조치 제9호 위반.’ 22일 서울 서초구 대법원 청사 1층 법원전시관에 있는 낡은 판결문은 이렇게 시작한다. 1976년 11월 타자기로 한 글자씩 눌러쓴 7장 분량의 판결문은 42년이라는 세월의 무게에 누렇게 변해 있었다. 하지만 맨 마지막 장 ‘판사 이영구’라는 문구 위 이 판사의 자필 서명은 선명했다. 그 판결이 있었던 그해 4월. 서울의 한 고교 교사는 수업시간에 “후진국일수록 1인 정권이 오래간다” “우리나라 정권은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해 먹는다”고 말했다. 당시 정보기관에 다니던 한 학생의 아버지가 신고해 검찰 수사가 시작됐다. 교사는 유신헌법에 반대하는 ‘유언비어’를 퍼뜨렸다는 이유로 기소됐다. 그러나 이 판사는 판결문에서 “역사적 사실을 날조했거나 왜곡했다고 보기 어렵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긴급조치 9호 위반 피고인 221명에 대한 선고 중 유일한 무죄였다. “정권의 방어체제가 무너졌다”는 말이 나왔고, 이듬해 1월 지방으로 좌천된 이 판사는 결국 법복을 벗었다. 변호사가 된 뒤 그는 “내가 정치적 색채를 보이는 것이 어려운 상황에서 재판하고 있는 법관들에게 피해를 줄 수 있다”며 이른바 ‘시국사건’ 변호를 거절했다. 40년 가까이 변호사로 조용히 지내던 그는 췌장암 판정 뒤 2년 동안 투병생활을 하다 지난해 11월 18일 숨졌다. 그의 가족은 부고를 내지 않았다. 장례도 가족과 가까운 지인들만 모여 조용히 치렀다. 그리고 1년이 지난 요즘 이 판사에게 스포트라이트가 쏟아지고 있다. 올해 9월 13일 대법원의 ‘사법 70주년 기념식’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이 판사에게 국민훈장 모란장을 추서했다. 이달 16일에는 이 판사의 1주기 추모식이 대법원에서 열렸다. 법원전시관에선 ‘암흑의 시대, 꽃이 된 법관’이라는 주제로 이 판사 추모전이 열리고 있다. 이 판사는 사실 대중뿐 아니라 동료 판사들에게도 낯설다. 그의 사연이 법원 역사에 공식 기록된 건 1995년이다. 당시 근대 사법 100주년을 기념해 법원행정처가 펴낸 ‘법원사’에 이 판사의 이름이 나온다. 1334쪽 분량의 법원사 701쪽에 이 판사의 긴급조치 판결 일화가 16줄로 정리돼 있다. 오욕의 사법부 역사에서 그나마 체면을 살린 판사 중 한 명으로 소개된 것이다. 당시 동아일보는 이 판사의 판결을 보도하며 “몇몇 원로 법조인들의 기억 속에 묻혀 있던 옛 얘기들이 뒤늦게 정사(正史)로 기록돼 햇빛을 보게 됐다”고 평가했다. 이 판사와 공군 법무관을 함께한 윤관 당시 대법원장 등의 기억이 이 판사 기록에 영향을 준 것으로 법원 내부에선 보고 있다. 윤 전 대법원장은 최근 이 판사의 추모공원에 들렀다고 한다. 이 판사의 스토리는 2007년 10월 국가정보원이 발간한 ‘과거와 대화, 미래의 성찰’이라는 책에 다시 나온다. 국가 권력이 사법권을 침해한 대표 사례로 꼽혔는데, 이번에는 3쪽 분량으로 판결 전후 사정이 상세하게 적혀 있다. 그리고 11년 만에 이 판사에게 국민훈장이 추서된 것이다. 법원 내부에선 ‘위기의 사법부가 이 판사를 다시 불렀다’고 평가한다. 재판 개입에 대한 검찰 수사에 이어 현직 판사 탄핵 논의가 오가는 현실이 그와 같은 판사를 다시 찾게 했다는 것이다. 유족은 “소신껏 일한 대가로 훈장을 받은 것이 후배 법관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고 했다. 이 판사는 평소 가족들에게 “나는 법과 양심에 따른 책무를 다했던 것뿐”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고인의 뜻대로 판사의 기본과 판결의 원칙부터 바로 세우는 사법부로 거듭나길 바란다. 정원수 사회부 차장 needjung@donga.com}

“부탁이 있다. 우린 친구 아니냐.” “내가 필요할 땐 전화도 안 받으면서, 나는 친구로 생각 안 한다.” 실화를 소재로 한 할리우드 영화 ‘제로 다크 서티’의 한 장면이다. 미국 중앙정보국(CIA) 소속 요원이 한밤중에 쿠웨이트의 나이트클럽에서 정보원 역할을 하던 아랍인에게 부탁을 했다가 거절당했다. 9·11테러 사건의 주범 오사마 빈라덴 은신처를 추적하던 이 요원은 곧바로 람보르기니 매장으로 가서 우정을 확인하자고 했다. 정보원이 노란색 모델을 골랐다. 40만 달러(약 4억4700만 원) 정도의 최고가였다. 이 요원은 CIA 상관을 설득해 이미 공작비를 받은 뒤였다. 이 요원은 차량과 함께 종이쪽지를 건네며 “전화번호를 구해 달라”고 한다. 빈라덴 최측근의 어머니 이름이 적혀 있었다. 얼마 뒤 번호를 입수한 CIA는 통화기록과 위치추적을 통해 어머니가 몇 달 동안 6개의 다른 전화를 사용하고, 같은 휴대전화를 2번 이상 사용하지 않는 수상한 점을 발견했다. 이 단서로 CIA는 아프가니스탄의 빈라덴 은신처를 찾아낸 뒤 2011년 5월 사살했다. 국가정보원의 ‘흑금성’ 공작원으로 활동한 박채서 씨가 수감 중에 쓴 수기를 바탕으로 제작한 한국 영화 ‘공작’. 박 씨가 김정일 당시 북한 국방위원장과의 첫 면담 성사에 결정적 역할을 한 보위부 실세에게 롤렉스시계 2점을 선물하는 장면이 나온다. 아들과 딸의 혼례를 앞두고 있던 이 실세가 경제적 사정으로 혼수품 구입이 여의치 않다는 사정을 박 씨가 파악한 것이다. 박 씨는 국정원 공작비로 세운상가에서 진짜 같은 가짜를 200만 원에 샀다. 정품은 7만 달러(약 7800만 원)였다. 보위부 실세는 “공화국법이 허용하는 한 돕겠다”며 태도가 바뀌었다고 한다. 비밀스러운 전쟁을 벌이는 정보기관은 공작비의 용처에서 작전의 성패가 갈릴 때가 많다. 그러나 검찰이 올 2월 기소해 재판 중인 ‘대북공작비 유용 사건’을 보면 말문이 막힌다. 대북공작단장과 국장, 차장 등을 지낸 국정원 고위 간부가 보수정권 시절 대북공작비로 서울 시내 최고급 호텔 스위트룸을 마련한 뒤 국정원장이 사적으로 쓰도록 한 사실이 드러났다. 공작비 사용명세를 국정원 기조실에 보고하지 않도록 대북공작국 내부 지침을 뜯어고친 일도 있었다. 북한 핵 및 최고위층 정보 수집에 사용해야 할 돈을 엉뚱한 곳에 쓴 것이다. 이를 방지하기 위한 국정원법 개정안이 올 1월 국회에 제출됐다. 여당인 더불어민주당 의원 85명이 발의했다. 여기엔 그동안 국정원이 하지 않았던 대북공작비 지출 결과 보고를 국회 정보위원회에 해야 하는 조항이 있다. 원장이 승인한 별도 기밀 예산 집행명세도 정보위원 3분의 2 이상의 요구가 있으면 정보위에 보고해야 한다. 미국처럼 의회가 정보기관 예산과 활동을 통제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정보기관의 권력 남용을 막고, 정권 교체와 관계없이 정보기관이 일관된 정보수집 활동을 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된다고 할 수 있다. 이 개정안을 심의할 정보위 위원장은 야당 몫이다. 국정원은 잔뜩 움츠러들 수밖에 없다. 그러나 개정안은 10개월째 정보위에 상정조차 안 됐다. 야당은 대공(對共)수사 약화는 신경 쓰면서 개정안엔 관심이 없다. “과거 의원들은 국가 정보와 관련한 문제에 대해 덜 알수록 더 좋은 것이라고 말했다. … 이제 덜 아는 것보다 더 많이 알기 위한 노력 그리고 위험을 감수해야 할 때이다.” 미국에서 의회의 CIA 통제권을 강화하기 위한 논의가 처음 시작됐던 1970년대 중반 한 야당 지도자가 한 말이다. 국정원의 반복된 불행을 끝내기 위해서라도, 우리 국회가 더 많이 아는 부담을 떠안아야 할 때가 왔다. 정원수 사회부 차장 needjung@donga.com}

木人嶺上吹玉笛(목인령상취옥적·나무 사람 고개 위에서 옥피리를 불고) 石女溪邊亦作舞(석녀계변역작무·돌 여자가 시냇가에서 또한 춤을 춘다) 대검찰청 8층 문무일 검찰총장의 집무실 책상 옆 벽에 걸려 있는 족자의 글귀다. 지난해 7월 초 부산고검장이었던 문 총장이 문재인 정부의 첫 검찰총장 후보자로 지명되면서 부산을 떠나게 됐다. 당시 관내 고찰(古刹) 범어사의 주지 경선 스님이 문 총장에게 축하 인사와 함께 이 족자를 건넸다. 문 총장은 경선 스님에게 “무슨 뜻이냐”며 해석을 부탁했다. 경선 스님은 “(우둔하다는 뜻의) 나무 사람이 어떻게 피리를 불고, (수태를 할 수 없다는 뜻의) 돌 여자가 어떻게 춤을 추느냐. 총장을 하다 보면 말이 안 되는 상황이 많이 생길 테니, 그럴 때마다 이 글을 보라”고 조언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글귀는 불교계에서 회자된다. 선승(禪僧)의 맥을 이었다는 평가를 받는 향곡 스님(1912∼1979)이 세상을 떠나면서 마지막으로 남긴 임종게(臨終偈·죽음의 시)이기 때문이다. 한때 범어사에 머물렀던 향곡 스님은 “모든 것을 수용하라”는 의미로 임종게를 썼다고 한다. 돌이켜 보면 지난해 7월 25일 취임한 문 총장의 재임 15개월은 바람 잘 날이 없었다. 취임 전부터 녹록지 않았다. 당시 청와대와 정치권, 법원, 경찰, 여론이 검찰에 비우호적이어서 ‘검찰이 오면초가(五面楚歌)에 놓였다’는 얘기가 있었다. 검찰 개혁 입법은 그때부터 지금까지 국회에서 논의 중이다. 취임 뒤 문 총장은 검찰 안팎의 여러 난관에 봉착했다. 안으로는 강원랜드 채용 비리 수사단이 문 총장의 부당한 수사 지휘 의혹을 제기하며 항명했고, 검찰총장의 제1참모부서인 대검찰청 반부패부를 압수수색했다. 밖으로는 전직 대통령 2명과 5명의 전직 국가정보원장 등 과거 정권의 최고위층을 상대로 적폐청산 수사를 벌였고, 이 과정에서 현직 검사가 투신하는 불행한 일이 발생했다. 그 위기들을 다 돌파했지만 문 총장은 여전히 위기다. 그는 최근 지인들에게 “검사들이 밤잠을 못 자고 수사하는데, 너무 힘이 많이 든다”고 말했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 시절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에 대한 수사의 어려움을 털어놓은 것이다. 몇몇 판사가 아니라 사법부를 상대로 한 검찰의 전면적인 수사는 문 총장도 상상을 못 했던 일이다. 구도하는 선승들이 답을 결국 자신에게서 찾듯 문 총장의 고민을 해결할 답도 그에게서 멀지 않은 곳에 있을 것 같다. 사법연수원 동기들에게 “문 총장은 어떤 검사냐”고 물으면 항상 “화려하진 않지만 기본기에 가장 충실한 검사”라고 답한다. 그러면서 문 총장의 검사 3년 차 때 일화를 근거로 든다. 1994년 남원지청에 근무할 때 경찰이 “교통사고로 사망한 시신을 유족에게 인계하겠다”며 지휘를 요청했다. 문 총장은 부검 지휘 교과서에서 배운 대로 “시신에 교통사고로 위장한 것으로 의심되는 부분이 있다”며 부검을 지시했다. 그 덕분에 이른바 ‘묻지 마 연쇄 살인’의 대표 격인 지존파 사건의 실체가 드러날 수 있었다. 그는 요즘 매주 주례 회동 때 사법부 수사를 지휘하고 있는 윤석열 서울중앙지검장에게 “사법부를 상대로 절제된 수사를 하라”고 지시한다고 한다. 어려울수록 기본에 더 충실하게 수사하는 방법 외에 다른 대안은 없다. 영장 기각 등 외부 탓을 하기보다는 의혹을 낱낱이 밝히라는 국민의 명령에 따라 묵묵히 수사하면 된다. 그리고 죄가 된다고 판단되는 부분을 기소하는 게 ‘문무일 검찰’이 다시 한번 위기를 돌파하는 길이다. 정원수 사회부 차장 needjung@donga.com}

“1년 365일 중에 이틀만 쉬고, 363일을 일했다.” 대법원에는 법원행정처에 근무하는 판사 30여 명보다 3배 이상의 법관이 근무하는 곳이 있다. 대법원 사건 심리와 재판 조사에 관한 연구를 담당하는 재판연구관실이다. 16층인 대법원 건물 7∼15층에 흩어져 근무하는 이들은 7∼10층에 사무실을 둔 대법관을 그림자처럼 보좌한다. 법원조직법에 따르면 재판연구관은 1963년 처음 도입됐다. 매년 4만 건 이상 사건을 처리하는 한국 대법원만의 독특한 제도다. 통상 로스쿨을 갓 졸업한 미국 법원의 재판연구원(Law Clerk)과 구별하기 위해 ‘재판을 연구하는 법관(Judicial Researchers)’을 줄여 부른 것이다. 이들은 ‘기초보고’ ‘검토보고서’ ‘의견서’라는 세 종류의 보고서를 생산한다. 보고서는 한글 파일의 ‘휴먼옛체’ 글꼴로 큰 제목만 정해져 있고, 나머지 내용은 재판 기록 등을 보면서 판결문을 쓰듯 자유롭게 채운다. 업무별 편차가 있지만 민사사건 담당 기준으로 1년에 1000건씩 하루 3, 4건의 보고서를 작성한다. 파견·전문직을 뺀 순수 법관 재판연구관은 현재 99명이 있다. 12명의 대법관 전속연구관이 각 2명씩 모두 24명, 공동연구관이 73명이다. 중노동을 하지만 권한도, 판결문에 이름도 남길 수 없다고 해서 대법원 내부에선 이들을 ‘노비’라고 부른다. 전속조는 사노비, 공동조는 공노비라는 식이다. 1, 2, 3심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기회여서 판사라면 누구나 선망하는 자리다. 대법관 이상 14명 중 김명수 대법원장과 대법관 등 9명이 재판연구관을 지냈다. 보고서를 직접 쓰진 않지만 공동조 보고서와 일부 전속조 보고서를 검토한 뒤 대법관에게 보고하는 자리가 수석 및 선임재판연구관이다. 법원에선 “대법관은 본인 사건만 알지만 수석이나 선임은 다른 사건까지 알고 있다”고 말하곤 한다. 그런데 2014년 2월부터 3년 동안 선임과 수석재판연구관을 지낸 유해용 변호사와 그의 후임인 김현석 수석재판연구관이 검찰 수사를 받고 있다. 이들의 검찰 출석을 하루 앞둔 지난달 11일에는 김 대법원장 주재로 대법관 회의가 열렸고, 석 달 넘게 침묵하던 대법관들이 “머리가 하얘질 정도로 충격적”이라는 말을 주고받았다. 유 변호사의 구속영장은 기각됐다. 그러나 전직 대법원장이나 법원행정처장 수사 못지않은 비중이 있다고 본다. 우선 ‘청와대 관심사항’이라는 법원행정처 고위 인사의 말에 수석연구관이 재판연구관에게 재판 업무와 무관한 박근혜 전 대통령 ‘비선진료’ 의사의 특허소송 ‘사건요약’ 보고서를 쓰게 했다는 점이다. 청와대 인사가 이해하기 쉽게 보고서 표현과 편집까지 신경 썼다는 검찰 수사가 사실이라면 법관의 일탈이 아닐 수 없다. 다음으로 유 변호사가 올해 5월 31일부터 6월 9일까지 자신의 후임인 김 수석연구관과 5차례나 통화한 것이다. 그 이틀 뒤인 6월 11일 유 변호사 자신이 2015년 선임연구관으로 있으면서 보고서를 쓸 연구관을 지정했던 행정사건을 수임하고, 대법원에 추가보충답변서를 제출했다. 공교롭게도 전원합의체는 취소됐고, 6월 28일 판결이 유리하게 선고돼 전관예우를 의심케 했다. ‘비선진료’ 의사 소송에 도움을 준 변호사와 행정사건을 소개해준 변호사가 동일인이며, 유 변호사와 친분이 있다는 점도 의심스럽다. 김 대법원장은 취임 때부터 사법행정권 남용 진상규명 못지않게 전관예우의 실체를 인정하고, 근절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대법원 판결에 이름 없이 기여한 수많은 재판연구관의 헌신을 헛되게 만들지 않기 위해서라도 진상 추적은 계속돼야 한다. 정원수 사회부 차장 needjung@donga.com}

“그런 부분에서는 부끄러운 점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지난해 9월 12일 김명수 대법원장의 국회 인사청문회 첫날. 한 국회의원이 “후보자를 포함해서 대한민국 법관이 목숨 걸고 재판하고 있다고 생각합니까”라고 따지자 김 대법원장은 이렇게 답했다. ‘법관은 재판에 목숨을 걸어야 한다’는 이 명제는 고(故) 한기택 판사가 생전에 동료 법관들에게 자주 했던 말이다. 한 판사는 1988년 6월 정치성 강한 대법원 구성에 반대하는 ‘새로운 대법원 구성에 즈음한 우리들의 견해’라는 성명서 초안을 직접 쓰고, 서명용지 맨 위에 이름을 적었다. 전국 법관 400여 명이 동참하면서 김용철 당시 대법원장이 닷새 만에 사퇴했고, 제2차 사법파동이 시작됐다. 한 판사와의 오랜 인연도 인사청문회를 통해 공개됐다. “우리법연구회에 어떻게 가입하게 됐느냐”는 질문에 김 대법원장은 “1988년인가 아마 (우리법연구회가) 만들어졌을 텐데, 제가 그 모임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다가 제 대학 동기인 한 판사를 통해 소개받아 알게 됐다”고 말했다. 제2차 사법파동 몇 달 뒤 법원 내 진보 성향 판사와 판사 출신 변호사 등 10명으로 우리법연구회가 출범했다. 그러나 한 판사는 1994년에야 가입했다. 김 대법원장도 1997년 한 판사의 권유로 우리법연구회와 첫 인연을 맺었다. 2003년 한 판사가 우리법연구회 회장을 맡았는데, 그 후임이 김 대법원장이었다. 우리법연구회 회원이었던 현직 판사는 “김 대법원장 마음 깊숙이 ‘한기택 정신’이 있는 것 같다”고 둘의 관계를 설명했다. 한 판사와 김 대법원장 모두와 가까웠던 변호사도 “한 판사는 김 대법원장의 모델과 같다”고 했다. 기자는 2006년 한 판사 1주기 추모집인 ‘판사 한기택’을 제작하는 과정에 참여한 적이 있다. 그때 지인들은 한결같이 한 판사를 마흔 여섯으로 생을 마감하기 전까지 언제나 ‘재판제일주의’를 지향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판사들에게 지상목표처럼 인식되던 고등법원 부장 승진이 판사를 관리자에게 예속시키고, 법관의 관료화가 심화되는 계기라고 한 판사는 비판했다. 김 대법원장은 최근 이 제도를 폐지했다. 김 대법원장은 취임 뒤 줄곧 ‘재판하는 판사를 위한 행정’을 중점 추진해왔다. 이는 곧 한 판사가 추구했던 사법행정의 방향과도 맞닿아 있다. 취임사에서도 “좋은 재판의 실현을 최우선 가치로 삼겠다”고 강조하는 등 ‘좋은 재판’이라는 말이 세 차례나 등장한다. 또 “이 흐름은 더딜 수는 있지만 결코 되돌릴 수 없다”고 강조했다. 김 대법원장은 요즘도 판사들에게 “반보씩 앞에서, 때론 반보씩 뒤에서 재판하는 판사들과 동행하겠다”고 말한다고 한다. 그러나 현실은 녹록지 않다. 추락하는 사법 신뢰를 회복할 복안을 요구하는 목소리는 커지고 있는데, 개혁성과가 더디다는 불만도 나온다. 최근에는 “김 대법원장이 실패하면 자칫 한 판사 또는 그 세대 전체의 실패로 이어질 수 있다”고 우려하는 목소리까지 들린다. 사법부 70주년(13일), 김 대법원장 취임 1주년(26일)을 즈음해 그동안 침묵해온 김 대법원장이 내놓을 메시지가 주목받고 있다. 한 판사는 재판에 목숨 걸었듯이, 잘못된 것을 고쳐야 할 때 침묵하지 않았으며, 사법정책 결정에 참여했을 때도 구성원의 목소리를 듣고 반영하느라 고군분투했다. 본질을 피하지 않고 끝까지 맞섰던 ‘한기택 정신’에 더 충실하겠다는 단호함을 판사들이 지금 바라는 건 아닐까. 정원수 사회부 차장 needjung@donga.com}

《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4층 강일원 헌법재판관 집무실의 내실(內室) 벽면엔 큼지막한 그의 드로잉 초상화가 걸려 있다. 강 재판관은 지난 6년 동안 그를 향한 세상의 시선을 무겁게 느낄 때마다 그림 속 자신의 얼굴을 마주하고 중심(中心)을 잡았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심판, 부정청탁금지법 헌법소원 등 정치 사회적으로 파급력이 큰 사건의 주심을 여러 차례 맡았던 강 재판관이 19일 퇴임한다. 6일 오후 집무실에서 만난 그는 “욕도 먹었지만 어느 정도 공직자로서 폐는 끼치지 않고 밥값을 조금 하지 않았나 하는 나름대로 자부심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 ―6년간 많은 사건을 다뤘다. 어떤 사건이 제일 힘들었나. “박 전 대통령 탄핵심판은 시간적 제약이 컸고 사실상 전례가 없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 사건은 사실관계 다툼이 없는 단순한 사안이었다. 그러나 박 전 대통령 탄핵 사건은 사안이 복잡했고, 다툼거리도 있는 데다 증거조사를 어떻게 할지 등 규정 정리가 안 돼 있었다. 길 없는 길을 만들면서 간 셈이다. 국회의 탄핵소추안 가결로 대통령 직무가 정지된 상태에서 국민 여론이 탄핵 찬성과 반대로 나뉘어 있었다. 또 박한철 전 헌재소장이 퇴임했는데 충원이 안 된 상황이었다. 사건의 성격, 사회 분위기와 헌재 내부사정까지 여유롭게 재판을 할 수 없는 여건이었다. 제일 힘들었다.” ―탄핵심판 선고 하루 전까지도 의견이 다른 일부 재판관들을 설득했다는 말이 돌았다. “평의(재판관 전원 참석 회의) 내용을 자세히 말할 수 없다. 선고 당일 아침까지 평의를 해야 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날 이정미 헌재소장 권한대행이 뒷머리에 헤어롤을 꽂은 채 출근하신 것도 마지막 평의에 서둘러 나오시다 그렇게 된 거다.” 2016년 12월부터 이듬해 3월 10일까지 4개월간 헌법재판관들은 주말을 제외하고는 매일 평의를 열었다. 주심인 강 재판관은 매번 사건의 주요 쟁점을 문서로 정리해 재판관들에게 배포하고 설명했다. 강 재판관은 탄핵 사건을 마친 뒤 머리가 더 하얗게 세었다고 했다. 중도 성향인 그는 6년 전 여야 합의로 재판관으로 선출됐다. ―탄핵심판 주심으로서 증인신문 26차례 중 2차례를 빼고는 매번 여러 질문을 했는데 박 전 대통령 대리인단이 답변을 제대로 못 한 경우가 많았다. “재판도 소통이라고 생각한다. 박 전 대통령 탄핵 사건은 사실관계가 복잡하지 쟁점은 단순했다. ‘그런 사실이 있었나, 없었나. 있었다면 왜 그랬나’였다. 그런데 의아했던 게 대리인단이 제가 한 질문에 답변을 하지 않고, 또 증인신문을 할 때도 별로 관계없어 보이는 질문을 했다. 재판부 질문에 설득력 있는 답변을 못 했다.” ―박 전 대통령은 헌재에 끝까지 출석하지 않았다. 나가서 직접 변론했다면 영향이 있었을까. “예측하긴 어렵다. 대리인단이 모르는, 박 전 대통령이 직접 경험한 부분들을 본인이 직접 나와서 설득력 있게 답변했다면 결론이 달라졌을 수도 있다고 본다. 대리인단이 풀지 못하는 의문이라면 직접 박 전 대통령이 나서서 국민들에게 설명해 줬어야 한다. 국론이 나뉘어 있고 자칫 불상사가 생길 수 있는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국가 지도자로서 그 정도는 했어야 하는 게 아닌가 싶다. 이 부분이 탄핵 사유는 아니다.” ―27년 동안 판사로 근무하다 헌법재판관이 됐는데 검찰이 수사 중인 법원의 재판거래,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보도되는 의혹들을 보면 정말 믿어지지 않는다. 설마 그랬겠나 하는 생각이 든다. 사실이 아니기를 바라고 있다. 사법부에 큰 어려움이 닥친 것에 대해 관련 법조인이나 사법부의 구성원뿐 아니라 나라 전체의 불행이라고 본다. 이 문제는 조속히 가부간에 잘못된 일이 있으면 바로 잡고 오해를 풀어야 한다. 사건 관계자들이 국민들에게 신속하게 사실관계를 잘 설명해서 안심시켜 줄 의무가 있다. 국민들이 권리를 침해당했을 때 기댈 곳은 법원밖에 없다. 법원이 흔들리는 것 자체가 국가적 불행이라고 생각한다.” ―검찰은 법원에 대한 압수수색 영장이 대부분 기각돼 불만을 나타내고 있다. “법원에 몸담았던 사람으로서 굳이 답변을 해야 된다고 하면 뻔한 얘기지만 정의는 본인만 정의로워서는 안 되는 것이다. 정의롭게 보여야 한다. 그래서 그런 의혹을 안 받도록 법원에서 잘 설명했으면 한다. 영장 기각 이유를 잘 설명해서 오해를 사지 않아야 한다.” ―대법원이 상고법원을 만들려던 게 재판거래 의혹의 배경인데 상고법원은 어떻게 해야 하나. “대법관 1명이 1년 동안 다루는 사건이 3000건이 넘는다. 심각한 문제다. 대법원 상고심 사건의 많은 당사자들이 선고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못 들으니 불만이 많다. 대법원만의 문제가 아니고 국민들의 문제다. 상고법원이건 다른 방법이건… 이 문제를 그대로 둘 수는 없다.” ―최근 낙태죄 헌법소원 사건의 헌재 결정이 미뤄졌다. 특별한 배경이 있나. “보통 기본권 침해 사건은 개인의 기본권과 국가권력이 충돌하는 것이다. 하지만 낙태는 임신한 여성의 기본권 문제일 뿐 아니라 태아의 생명권도 문제가 되고 있다. 태아는 의사 표현이 불가능하다. 또 인공수정으로 네쌍둥이, 다섯쌍둥이 수정란이 자궁에 착상된 경우 임신부와 태아의 건강을 위해 일부 제거 시술을 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도 낙태다. 낙태를 허용했을 때 생길 수 있는 문제에 대해서는 충분한 검토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당장 결정하지 않는다고 심각한 사회 문제가 될 사안은 아니지 않나. 낙태를 허용한 나라에 대한 여러 분석 보고서가 최근 많이 나오고 있다. 자료가 쌓이는 만큼 조금 더 신중하게 검토해 결정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과학 발전과 외국의 데이터를 검토해야 한다. 그러면 어떤 결정이든 반대하는 측을 설득할 수 있는 결정이 될 것이라고 본다.” ―얼마 전 헌재가 재판소원을 금지한 헌법재판소법 조항을 만장일치로 합헌 결정했다. “헌재의 딜레마다. 대법원 판결에 대해 승복 못 하는 국민들이 많아서 헌재는 재판소원 금지에 대한 한정위헌(특정한 해석 기준과 함께 위헌 견해를 표명) 결정을 몇 차례 했다. 하지만 대법원이 수용하지 않아 해결이 안 되고 있다. 두 최고 사법기관이 서로 다른 목소리를 내고 해당 국민은 구제받지 못하는 상황이 이어지고 있다. 그렇다고 헌재가 위헌 결정을 하면 사실상 4심제를 하자는 게 된다. 그렇게 되면 헌재도 감당이 안 된다. 헌재는 현재 연간 2000건의 사건을 신속하게 처리 못 하고 있는데 4심제가 되면 그 속도는 더 지연될 것이다. 헌재와 대법원, 국민 누구에게도 도움이 안 된다. 결국 입법으로 해결해야 될 것 같다. 국회에서 불편함을 해소해 줬으면 한다.” ―국회에서 헌법재판관 연임 문제가 정리되지 않고 있다. “재판관 연임은 부적절하다는 게 내 생각이다. 법관은 법관으로 만족하고 법관을 목표로 끝을 내야지 다른 목표를 가지면 안 된다. 만약 재판관이 연임을 하려면 대법원장이나 국회가 추천을 해주거나 대통령이 임명해야 되는데 그럴 경우 추천자나 임명권자를 의식하게 된다. 그때부터 해당 재판관의 결정이 영향을 받고 의심을 받을 수 있다. 만약 내가 연임이 된다면 박 전 대통령 탄핵 사건을 공정치 않게 다뤘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생길 수 있다. 많은 나라들이 헌법재판관의 임기를 길게 하는 단임제를 적용하고 있다. 임기 9년이 제일 많은 것 같다. 개헌이 된다면 현재 6년인 임기를 늘려 재판관들이 아예 다른 생각을 안 할 수 있게 해줬으면 한다. 헌재소장을 재판관들 중에서 대통령이 임명하는 방식도 개선하면 좋겠다. 호선이나 다른 방식으로 해야 한다고 본다.” ―세계 헌법재판기관 회의체인 ‘베니스위원회’ 집행위원으로 참여하고 있다. 헌재의 국제적 위상과 역할을 평가한다면…. “우선 자부심을 느낀다. 유럽 동구권 슬로베니아나 헝가리, 체코 등의 관계자들은 ‘한국은 빅 컨트리(큰 나라)이고 민주주의가 발전하지 않았느냐’라고 말한다. 우리나라의 민주주의는 오랜 역사를 가진 서유럽 국가에 근접해 있다. 우리는 지금까지 너무 일본을 극복하는 데 중점을 두지 않았나 생각한다. 헌재 결정과 관련해 우리는 이미 일본을 극복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이제는 헌재가 독일에 버금간다는 말을 듣고 싶다. 그러기 위해 우리의 구체적인 문제에 매몰되지 않고 세계적 관점으로 시야를 넓혔으면 좋겠다. 우리가 기본권을 얘기할 때 쓰는 ‘표현의 자유, 신체의 자유, 평등권’ 등의 용어는 전 세계가 똑같이 쓴다. 전 세계가 같은 기본권을 누리는데 우리가 독일, 프랑스보다 낮은 등급의 기본권을 누릴 이유는 없다고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표현의 자유, 신체의 자유 등에서 우리보다 앞서 있는 나라가 많이 있다. 그런 나라들을 따라잡으면 좋겠다.” 강 재판관은 헌재를 떠나는 소감을 묻자 “홀가분하다. 섭섭한 마음은 없다”며 웃었다. 그는 퇴임 직후 미국 예일대에서 열리는 ‘세계 입헌주의 세미나’에 참석해 사적 영역에서의 기본권 등을 주제로 미국 연방대법관 등과 토론하기 위해 출국할 계획이다. 인터뷰=이명건 사회부장정리=정원수 needjung@donga.com·김윤수 기자}

1988년 9월 1일 출범한 헌법재판소는 다른 헌법기관과 달리 청사가 없었다. 서울 중구 정동빌딩 16, 18층을 몇 달 빌려 쓰다 그해 말 서울시 소유의 옛 서울대사대부고 건물로 옮겼다. 그리고 1993년 6월 1일 서울 종로구 재동에 새로 지은 지금의 청사 준공식이 열렸다. 그날 김영삼(YS) 대통령은 헌재를 찾아 ‘헌법수호’라는 한자 친필 휘호를 남겼다. 또 YS와 이만섭 국회의장, 김덕주 대법원장, 조규광 헌재소장 등은 붓글씨로 방명록에 서명을 했다. YS 휘호와 방명록은 액자에 담겨 헌재 청사 4층 재판관 회의실 벽면에 꽤 오랫동안 걸려 있었다. 지금은 모두 헌재 지하 창고에 보관돼 있다. 당시 준공식 행사엔 초대 재판관 9명 중 1명이 불참했다.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를 지낸 변정수 전 재판관이었다. 청와대 경호처가 발행한 출입증 없이는 헌재 새 청사 출입이 불가능하다고 통보받은 게 주된 이유였다. 그는 회고록에 “주최자는 헌재고, 대통령은 손님인데 거꾸로 손님이 주인더러 자기 허가 없이는 식장에 들어올 수 없다고 하다니…”라며 불참 이유를 자세히 적었다. 변 전 재판관은 일각에서 부정적인 의미로 불렀던 돈키호테까진 아니더라도 나머지 8명의 초대 재판관과는 결이 달랐다. 6년 재임 동안 64차례 소수의견을 내 ‘미스터 소수의견’이란 별명이 붙었다. 제1야당 추천으로 재판관이 된 그는 임명장을 받는 순간부터 대통령과 여당, 대법원과의 관계가 좋지 않았다. 노태우 전 대통령이 다른 재판관들에겐 매년 생일 때마다 고급 커프스단추 등을 선물로 보냈는데 변 전 재판관에겐 회갑 때 딱 한 번 나무필통 선물만 보냈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였다. 재임 중 국회에서 탄핵을 당할 뻔했고, ‘친정’인 대법원으로부터 공개 비판을 받았다. 31일 헌재 30주년 기념식이 열린다. 헌재의 위상은 YS가 ‘헌법수호’ 휘호를 썼던 때는 상상할 수 없었을 정도로 올라갔다. 당시 헌재 내부를 향해 거침없이 쓴소리를 했던 변 전 재판관을 떠올리며 헌재의 나아갈 바를 정리해 봤다. 첫째, 권력과의 긴장 유지다. 변 전 재판관은 대법원 규칙을 위헌이라고 선언했고, 국회 날치기 관행에 엄격한 잣대를 들이댔다. 그는 “국회에서 선출되었다고 국회 눈치를 보고, 대통령 지명으로 되었다고 대통령 의중을 살피고, 대법원장 지명으로 되었다고 대법원 위상이나 걱정한다면 헌재에서 무슨 일을 하겠는가”라고 일갈했다. 지금의 헌재가 가장 무겁게 받아들여야 할 조언이다. 문재인 대통령 임기 중 헌재 재판관 9명 중 8명이 교체됐거나 바뀐다. 둘째, 조직 이기주의 배격이다. 헌재는 출범 초기 차관급이던 사무처장을 대법원 법원행정처장과 같은 장관급으로 승격하는 방안을 추진했다. 변 전 재판관은 강하게 반대했다. “위상이 올라간다면 국무위원급이 아니라 국무총리급으로 한다고 해도 반대하지 않겠다. 그러나 위상은 재판을 잘해서 국민의 신임을 얻으면 올라가는 것이 아니겠는가.”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으로 곤욕을 치르고 있는 대법원을 보면 그의 지적이 틀린 게 없다. 그가 퇴임한 1994년부터 헌재 사무처장은 장관급이 됐다. 국회 인사청문회를 거치지 않는 장관급인데, 요즘도 논란이 되고 있다. 마지막으로 국민을 위한 헌신이다. 변 전 재판관은 재판관의 본질이 억강부약(抑强扶弱·강한 자를 누르고 약한 자를 도와줌)이고 원칙과 합리에의 순종이라고 믿었다. 또 국가기관의 권위는 잘못을 솔직히 시인하고, 되풀이하지 않는 데서 생긴다고 확신했다. 지금의 높은 위상이 추락하지 않도록 헌재가 모든 국민의 존경을 받고 신뢰를 얻게 되길 바란다. 정원수 사회부 차장 needjung@donga.com}

“자네 판결은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이 버번 위스키는 정말 끝내주는군.”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초여름. 해리 트루먼 당시 대통령이 백악관에서 가까운 미국 버지니아주에서 만찬 도중 집주인에게 한 말이다. 바비큐와 카나페를 안주로 곁들이면서 버번을 들이켜 취기가 오른 직후였다. 그해 4월 8일 트루먼 대통령은 철강 생산 공장을 몰수하는 행정명령을 내렸다. 전시(戰時)엔 국방부가 철강을 대량 구매해야 하는데, 철강업계에 파업이 일어나면서 철강 생산에 영향을 줄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앞서 트루먼 대통령은 20년 넘게 흉금을 터놓는 ‘포커 게임 친구’였던 프레드 빈슨 연방대법원장에게 자문해 “다수가 행정명령을 지지할 것”이라는 응답까지 받았다. 그러나 두 달 뒤 연방대법원은 대통령의 기대와는 달리 국가 긴급 상황임에도 6 대 3으로 위헌 판결을 내렸다. 대통령에게는 사기업을 몰수할 헌법적 권한이 없다는 것이다. 곤혹스러웠던 빈슨 연방대법원장은 판결 직후 다수의견을 집필한 주심 휴고 블랙 연방대법관의 집으로 대통령을 초대했다. 트루먼 대통령이 가장 싫어했던 이 판결은, 역설적으로 미국 사법부와 행정부의 긴장 관계를 상징하는 두 가지 대표 사례로 요즘도 자주 인용된다. 트루먼 대통령이 지명한 두 명의 대법관이 대통령 반대편에 섰고, 대통령의 오랜 친구가 이끄는 연방대법원도 백악관 맘대로 할 수 없다는 점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조지 W 부시 대통령 때였다. 도널드 럼즈펠드 당시 국방장관은 9·11테러 후속 조치로 오사마 빈라덴의 운전기사 살림 함단을 쿠바의 관타나모 수용소에 수감했다. 정식 재판이 아닌 군사위원회에서 기소했고, ‘전쟁포로에 관한 제네바 조약’도 따르지 않았다. 그러나 2006년 6월 연방대법원은 5 대 3으로 불법이라고 판단했다. 당시 주심이자 스윙보터였던 클래런스 토머스 연방대법관은 아버지 조지 부시 대통령 때 임명장을 받은 보수 성향이었다. 이 일화는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법률 평론가 중 한 명인 현직 교수가 쓴 책에 그대로 나온다. 이 내용이 떠오른 건 검찰이 수사 중인 일제강점기 강제징용 피해자 소송에 대한 재판 거래 의혹 때문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지시를 받은 김기춘 당시 대통령비서실장은 2013년 12월 공관으로 법원행정처장을 불러 외교부 장관의 민원을 듣게 했다. 한일 관계 악화를 우려해 대법원에 개별 사건의 재판 연기와 판결 뒤집기를 노골적으로 요구한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공교롭게도 그때 이후 대법원은 기존 대법원의 결정에 맞게 하급심에서 올라온 사건 결정을 5년째 미루고 있다가 뒤늦게 심리에 나섰다. 더 우려스러운 건 2012년 5월 일본 전범기업이 피해자에게 배상해야 한다는 취지로 이 사건을 처리한 대법관 4명을 외교 변수를 전혀 고려하지 않는 법관으로 낙인찍었다는 점이다. 당시 주심인 김능환 전 대법관에게 연락하자 늦은 시간에 “판사는 판결로만 말한다. 달리 드릴 말씀이 없다”는 답변이 왔다. 다만 당시 파장이 컸던 판결 뒷얘기를 취재한 동아일보 기사 곳곳에 그의 고민이 묻어나 있다. ‘한일 정부에 예민한 사안이어서 신중론도 제기됐지만 대법원은 17년간 소송에 매달린 피해자의 최종적인 분쟁 해결 필요… 2009년 3월부터 3년여간 최소 2m 높이의 자료 수집과 법리 검토… 제2차 세계대전 때 독일 기업들이 피해를 배상한 논문도 검토….’ 살아 있는 권력의 부탁으로 동료 대법관의 노력을 손바닥 뒤집듯 하는 최고법원을 누가 신뢰할 수 있을까. 최고법원을, 그리고 나라를 살릴 수도 죽일 수도 있었던 그 선택이 두고두고 입길에 오를 것 같다. 정원수 사회부 차장 needjung@donga.com}

대검찰청 본관 건물 옆에 지상 6층 규모로 2008년 10월 완공된 국가디지털포렌식센터(NDFC). 이 건물이 공사 중일 때 대법원 청사에서 북쪽 대검찰청 방면 사무실에선 판사들이 대화를 나눌 때 커튼을 내리곤 했다. 대검에 국내 최대 규모의 디지털 분석 장비가 설치된다는데 혹시라도 검찰이 최신 감청 장치로 대화 내용을 엿들을까 걱정해서였다고 한다. 군사 독재 시절부터 감시 대상이었던 법원이 얼마나 보안을 중시하는지, 그리고 검찰 동향에 얼마나 민감하게 반응하는지 보여주는 일화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처구니가 없지만 그 당시로선 엉뚱한 의심만은 아니었다. 2005∼2006년 검찰의 국가정보원 휴대전화 도청 수사 때 국정원이 이동식 도청 장비로 주요 기관을 감시한 게 드러났기 때문이다. 당시 검찰청 사무실에서 커튼을 내리고, 음악을 켜놓고 얘기를 나눈다는 검사를 여럿 만났다. 매달 셋째 주 목요일, 대법원 청사 11층에서는 대법원장과 대법관 12명 등 총 13명이 모이는 최고 법률심인 전원합의체 회의가 열린다. 이곳은 정기적인 도청 장치 설치 여부 점검 대상이다. 건물이 대검과 마주 보고 있기 때문에 말 못 할 사정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113m² 크기의 회의실에는 원탁과 의자 13개밖에 없다. 대법원 내 다른 곳의 회의는 전체가 녹음되거나 일부 요지라도 기록된다. 유독 전원합의체 회의엔 속기사도, 녹음 장치도 금지다. 미국은 어떨까. ‘흑백 분리교육 철폐’ 판결을 주도한 얼 워런 연방대법원장이 1954년 판결 초고에 ‘만장일치로’라고 직접 쓴 메모가 공개됐고, 1973년 낙태의 헌법적 권리를 처음 인정한 판결문을 쓴 해리 블랙먼 연방대법관은 그 판결문 초안 등 5000만 건을 도서관에 기증했다. 은퇴한 대법관들이 합의 과정을 회고한 책을 여러 권 썼다. ‘지혜의 기둥’으로 불리는 이들의 합의 과정이야말로 ‘미국 역사의 보물’이라는 평가가 있다. 이용훈 대법원장 재임 때 전원합의체 회의를 녹음하자는 제안이 나왔다. 그러나 “자유롭게 발언하고 토론할 수 없다”는 이유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 뒤 필자가 대법관 몇 명에게 “우리도 미국과 같은 책이 여러 권 나와야 하지 않겠느냐”고 묻자 “법이 금지하고 있다”는 답변만 들었다. 당시 대법관들이 근거로 든 관련 법 조항은 법원조직법의 ‘합의 과정은 비공개로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국회 회의록을 아무리 뒤져도 1949년 8월 15일 처음 시행된 이 법 조항을 누가, 어떤 취지로 만든 것인지 알 수 없었다. 60차례가 넘는 법 개정에도 이 조항은 그대로 유지됐다. 검찰은 최근 대법원에 전·현직 대법관의 하드디스크와 이메일 기록 등을 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대법원은 “합의 과정이 누설될 수 있다”며 거부하고 있다. 대법관들이 회의 전 쟁점 사항을 이메일로 주고받는다는 게 이번에 처음 알려졌다. 검찰은 양승태 전 대법원장 재임 때의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피해자 소송과 형사사건 성공보수 금지 사건이 재판 거래 의혹과 연관된 것으로 보고 있다. 이대로라면 검찰로서는 재판 과정을 복원할 수 있는 단서가 회의 참석자의 기억 외엔 아무것도 없다. 법원행정처 문건과는 다른 이유로 합의가 이뤄졌다는 것이 증명되어야 재판 거래 의혹이 불식될 텐데, 기록이 없다면 결국 국민은 의심을 거두지 않을 것이다. 이번 수사를 계기로 관련 법을 바꾸면 어떨까. 만약 합의 과정이 누설돼 법관이 불이익을 받는 것 때문이라면 기록으로 남긴 뒤 10년, 20년, 30년 뒤 공개하면 된다. 처음부터 ‘공개의 원칙’을 세우고 철저히 지켜왔더라면 사법부가 지금과 같은 불신은 받지 않았을 것이다. 정원수 사회부 차장 needjung@donga.com}

“동해안 쪽에 간 김에 묵고 오려고 하다가… 여행 중이기 때문에 문서로 정리하고, 글로 정리하고 할 시간이 없었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지난달 1일 오후 2시 경기 성남시 자택 인근에서 연 기자회견 때 맨 처음 한 발언이다. 지난해 9월 퇴임 뒤 250여 일 동안 침묵을 지키다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을 가라앉히기 위해 한 회견 서두에 ‘동해안… 여행’을 언급한 배경은 뭘까. 양 전 대법원장은 회견에서 “검찰서 수사한답니까?”라며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 수사에 사실상 반대 의사를 나타냈지만, 김명수 대법원장의 ‘수사 적극 협조 방침’ 공개 이후 검찰 수사가 이어지고 있다. 법원 내부에는 양 전 대법원장의 회견이 여론을 악화시켜 검찰 수사를 부추겼다고 생각하는 판사들이 적지 않다. 그는 회견 이틀 전인 5월 30일 강원 고성군 건봉사에서 치러진 오현 스님 다비식(茶毘式)에 참석했다. 바로 회견 첫 발언의 ‘동해안… 여행’ 일정 중 일부였다. 다비식을 주관한 정휴 스님은 기자와의 통화에서 “양 전 대법원장이 오전 10시부터 1시간 가까이 진행된 영결식과 그 뒤 4시간 동안 이어진 다비식 때도 있었다”고 말했다. 정휴 스님은 “법조계 수장이던 양 전 대법원장은 오현 스님의 세속 상좌(제자) 중 한 명”이라고 했다. 오현 스님은 짧지만 울림 있는 화두를 자주 던졌던 선(禪) 시조의 대가다. 양 전 대법원장은 재직 중 오현 스님을 종종 언급했다. 대법원장 퇴임사 마지막 대목은 ‘고목 소리 들으려면’이라는 오현 스님의 시였다. ‘속은 으레껏 썩고/곧은 가지들은 다 부러져야/굽은 등걸에/매 맞은 자국들도 남아있어야.’ 사법헌정사(70년)의 3분의 2 가까운 42년간 판사로서 2, 3차 사법파동을 지켜본 자신을 ‘모진 풍상을 이겨낸 고목’에 비유한 것으로 해석된다. 2011년 9월 양 전 대법원장의 국회 인사청문회에서도 오현 스님이 거론됐다. 기독교 신자인 양 전 대법원장이 존경하는 인물은 오현 스님이고, 스님의 권유로 만해 한용운을 기리는 상의 심사위원장을 맡았던 일이 공개됐다. 당시 양 전 대법원장은 “(지방법원 부장판사 시절) 설악산에 등산을 여러 번 가면서 마침 백담사에 거처하고 계시던 스님과 이야기를 하던 중 워낙 넓으신 포용력과 인격에 감읍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양 전 대법원장이 회견에서 밝힌 대국민 메시지는 오현 스님의 울림이 큰, 짧지만 굵은 가르침에 크게 못 미쳤다. 오히려 그 반대라고 생각하는 판사들이 많다. 오현 스님 다비식이 끝나고 이틀 뒤 오전 11시 양 전 대법원장은 ‘3시간 뒤 자택 앞에서 잠깐 입장 표명을 할 예정’이라는 문자를 기자단에 보냈다. 하지만 잠깐이 아니라 15분간의 입장 표명에 이어 질의응답에 15분이 더 걸리면서 논점이 흩어졌다. ‘양보할 수 없는 한계점’이라며 “재판 거래는 상상할 수 없고, 재판에 개입하지도 않았다”, “상고법원은 대법원이 제 기능을 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주장했지만 여론의 관심은 다른 발언에 집중됐다. 대표적인 게 “(대법원 진상조사단에) 꼭 내가 가야 합니까?”, “흡사 남의 일기장 보듯 완전히 뒤졌다”, “검찰서 수사한답니까?” 등이었다. 당시 회견을 지켜본 판사들은 실망한 표정이 역력했다. 법원 내부에선 “책임을 회피하고 아랫사람들에게 미루는 모습으로 비쳤다”는 반응이 나왔다. 양 전 대법원장은 시대가 공감할 만한 화두를 던진 오현 스님의 뒤를 따를 수 있을까. 그는 회견에서 “상황을 정리해 말씀을 드릴 기회가 있기를 바란다”고 했다. 부디 다음엔 많은 후배 판사들이 공감할 묵직한 메시지를 밝히길 기대한다. 정원수 사회부 차장 needjung@donga.com}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 출범 직후인 1988년 초여름 경기 양주시 송추에서 1박 2일 일정의 워크숍이 열렸다. 창립회원 51명 중 절반 정도가 모인 이 자리에는 민변이라는 이름을 지은 리더인 41세 조영래 변호사가 참석했다. 그리고 당시 조 변호사 밑에서 ‘약자를 위한 변론 활동’을 배우던 27세 김선수 변호사도 있었다. 김 변호사는 사법연수원을 다닐 때 조 변호사와 저녁 식사를 겸한 면접을 한 뒤 연수원을 졸업하며 조 변호사 사무실로 들어갔다. 김 변호사는 민변 워크숍 참석자 중 3번째로 젊었다. 훗날 민변의 역사를 바꾼 두 명의 지방 회원도 워크숍에 잠깐 들러 환영을 받았다. 당시 40대 초반이던 고 노무현 전 대통령과 그보다 7세 아래지만 ‘오랜 친구’인 문재인 대통령이 창립 회원으로서 자리를 함께한 것이다. 노 전 대통령은 그해 4월 13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당선되면서 ‘스타 정치인’의 기질을 보였지만 문 대통령은 그때도 지금처럼 과묵했다고 한다. 2년 뒤 애연가 조 변호사는 폐암으로 세상을 떠났지만 노 전 대통령과 문 대통령, 김 변호사의 인연은 노무현 정부 출범 이후 다시 이어진다. 김 변호사는 2005년 청와대 문재인 대통령민정수석비서관 밑에서 사법개혁비서관으로 근무했다. 처음 공직자가 돼 국민참여재판 등 ‘혁명이 아닌 개혁’을 설계했다. 당시 동료들은 그에 대해 “행정 능력이 상당하다”고 평가했다. 이번엔 문 대통령이 임명하는 대법관이 될 기회를 얻었다. 김 변호사는 30년 전 로펌 변호사들이 한 달 치 봉급으로 300만 원을 받을 때 100만 원을 벌었지만 만족했다. 변호사가 되기 전 대학 시절엔 ‘5·16장학회’ 장학금으로 학비를 전액 충당했고, 고등학교 때는 도시락 하나를 점심과 저녁용으로 나눠 허기진 배를 채웠다. 전북 진안의 산골 화전민이던 아버지는 김 변호사가 초등학교 6학년 때 서울로 가 서울역에서 일용직 하역노동을 했다. 어머니는 공장에 다녔다. 우신고등학교를 다닐 때 학교에서 제일 먼저 등교하고, 가장 늦게 하교했다. 한 고교 동창은 “집중호우로 등교가 취소된 날에도 김선수는 혼자 학교에 가서 밤늦게까지 공부했다. 별명이 ‘공부선수’였다”고 회상했다. 1학년 때 담임선생님은 ‘여민(黎民)’이라는 호를 그에게 지어줬다. ‘노동으로 검게 그을린 평범한 백성’이라는 뜻이다. 그 자신이 여민이라는, 또 평생을 여민들 편에 섰다는 김 변호사는 “마음이 흐트러질 때마다 (작고한) 담임선생님의 뜻을 헤아려 본다”고 한 적이 있다. 변호사로서 맡은 첫 사건부터 예사롭지 않았다. 그는 서울 망원동 수재 사건 소송에서 “국가가 홍수 방지 의무를 소홀히 해 국민에게 피해를 준 것이며, 피해 주민에게 보상해야 한다”는 판결을 이끌어냈다. 국민이 국가권력에 공동으로 맞선 첫 집단소송이었다. 이후 포항제철 퇴직금 소송, 외환위기 직후 채용 내정 취소 사건 등을 맡아 노동자 편에서 변론 활동을 했다. 그가 대법관으로 임명되고 대법원 청사 11층에서 전원합의체 회의가 열리면 대법원장과 다른 대법관 등 나머지 12명은 긴장을 늦추지 못할 것이다. 판사, 검사를 거치지 않은 유일한 재야 변호사 출신이기 때문이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 시절 대법관 후보 추천에 관여한 한 인사는 “회의 때 ‘대법원장의 의중은 김선수가 아니다’라는 말이 오갔다”고 했다. 양 전 대법원장이 퇴임한 지 10개월 만에 그는 대법관 후보자가 됐다. 국회 인준을 앞두고, 우려하는 목소리가 없지 않다. “마음을 열고, 의뢰인의 말을 듣고 그의 입장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그가 변호사로서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역할이라고 강조한 것이다. 하물며 최고 법관은 어떨까. 더 자신을 낮추고, 동료들에게 정성을 다하길 바란다. 정원수 사회부 차장 needjung@donga.com}

김명수 대법원장은 2일 새 대법관으로 김선수 변호사(57·사법연수원 17기)와 이동원 제주지방법원장(55·17기), 노정희 법원도서관장(54·19기)을 문재인 대통령에게 임명 제청했다. 8월 1일 임기를 마치는 고영한(63·11기) 김신(61·12기) 김창석 대법관(62·13기)의 후임이다. 세 명의 대법관 후보가 국회 인사청문회를 거친 뒤 국회 본회의에서 임명동의안이 통과돼 임명되면 김명수 대법원장과 대법관 13명 등 14명 중 8명의 임명권자가 문 대통령이 되는 것이다. 나머지 대법관 5명은 박근혜 전 대통령이, 1명은 이명박 전 대통령이 임명했다. 대법원은 새 대법관 후보 임명 제청 배경에 대해 “대법관 구성의 다양화를 요구하는 국민의 기대를 각별히 염두에 뒀다”고 밝혔다. 1988년 만들어진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의 창립 멤버로 회장(2010∼2012년)을 지낸 김 후보자는 사법시험을 수석 합격하고 사법연수원을 수료한 뒤 변호사로 활동해 왔다. 법무법인 시민의 대표 변호사로 노무현 정부에서 사법개혁추진위원회 기획추진단장을 지냈다. 이 후보자는 대법원 재판연구관과 서울고법 부장판사를 거친 정통 법관이다. 중도 성향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노 후보자는 진보 성향 판사 모임인 우리법연구회 출신이다. 그가 임명되면 첫 이화여대 출신 대법관이 된다. 이 후보자와 노 후보자는 대법원 법원행정처 근무 경력이 없다.정원수 needjung@donga.com·이호재 기자}
《 JP가 직접 쓴 묘비명思無邪(생각에 사악함이 없다)를 인생의 도리로 삼고, 한평생 어기지 않았으며 無恒産而無恒心(생활이 안정되지 않으면 바른 마음을 가질 수 없다)을 치국의 근본으로 삼아 國利民福과 國泰民安을 구현하기 위하여 獻身盡力하였거늘 만년에 이르러 ‘年九十而知 八十九非’(아흔 살을 살았지만 지난 89년이 헛된 것 같다)라고 嘆하며 數多한 물음에는 ‘笑而不答’(웃으며 답하지 않는다)하던 자- 내조의 德을 베풀어준 永世伴侶와 함께 이곳에 누웠노라 》 미리 써둔 자신의 묘비명이 ‘맹자’의 ‘무항산이무항심(無恒産而無恒心·생활이 안정되지 않으면 바른 마음을 가질 수 없다)’이었다. 그만큼 산업화를 이룬 뒤 민주화가 가능하다고 믿었고, 삶의 궤적도 그러했다. 한국 현대 정치사의 1세대인 ‘3김’의 마지막이었던 운정(雲庭) 김종필(JP) 전 국무총리가 23일 타계했다. 향년 92세. JP의 정치인생 전반부는 산업화시대의 2인자였다. 35세이던 1961년 처삼촌인 박정희 전 대통령과 5·16군사정변에 가담한 뒤 초대 중앙정보부장(현 국가정보원장)과 국무총리, 집권당인 민주공화당 총재 등을 거쳤다. JP는 1987년 민주화 이후엔 내각제 개헌을 연결고리로 민주화의 상징인 김영삼(YS) 김대중(DJ) 전 대통령과 잇달아 손을 잡으며 2인자로 나섰다. ‘킹메이커’로서는 여한이 없었지만 끝내 대권엔 오르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대통령 하면 뭐 하나. 다 거품 같은 거지. 미운 사람 죽는 걸 확인하고 편안히 숨 거두는 사람이 승자”라고 말했다. 2009년 DJ, 2015년 YS에 이은 JP의 퇴장으로 이제 3김으로 상징되는 한국 정치의 한 세대가 완전히 마감됐다. 정파와 이념을 넘나들던 3김 정치보다 각박해지고 존재감이 사라졌다는 평가를 받는 우리 정치가 이들의 유산을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남은 사람들의 몫이 됐다. JP는 ‘구름 속 정원(운정)’이란 아호처럼 정치권의 마지막 로맨티시스트였다. 평생의 반려였던 부인 박영옥 여사가 2015년 별세했을 때 “곧 따라가겠다. 마누라와 함께 눕겠다”며 121자의 비명을 직접 지었다. 그는 27일 오전 8시 서울아산병원에서 영결식을 한 뒤 국립현충원 대신 충남 부여군 가족묘의 부인 곁에 묻힌다.정원수 기자 needju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