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운

김상운 기자

동아일보 국제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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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와 학술 분야를 취재하고 있습니다. 단행본 ‘국보를 캐는 사람들’(글항아리)을 냈고, 고고학 유튜브 채널 ‘발굴왕’을 제작했습니다. 동아시아 역사에 관심이 많습니다.

sukim@donga.com

취재분야

2026-01-09~2026-02-08
칼럼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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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범-약산, 中 정보기관과 각각 손잡고 抗日 첩보전 벌였다

    백범 김구와 약산 김원봉이 중국 국민당 정보기관과 각각 손잡고 대일 첩보전을 벌인 사실이 처음으로 확인됐다. 일제강점기 중국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지원은 아무 대가 없이 이뤄진 게 아니라 한국인들의 목숨을 건 대일 항쟁에서 비롯됐음이 밝혀진 것이다. 약산은 최근 개봉한 영화 ‘암살’로 재조명받고 있는 독립투사다. 단국대와 중국 푸단(復旦)대는 동아일보 후원으로 지난달 29일 상하이 푸단대 한국연구센터 회의실에서 ‘일제 침략과 한중 공동항전’이라는 주제로 국제학술회의를 열었다. 한국과 중국 학계가 항일 공동투쟁에 대한 재조명에 나선 것이다. 학술회의에서는 한시준 단국대 교수와 한반도 전문가인 스위안화(石源華) 푸단대 교수 등 한중 학자 7명이 주제발표에 나섰다. 양지선 단국대 동양학연구원 연구교수는 ‘7·7 사변과 한중 공동항전의 양상’ 논문에서 백범과 약산이 국민당 비밀 정보기관인 CC단, 역행사(力行社)와 벌인 첩보전을 자세히 다뤘다. CC단은 국민당 실세 천궈푸(陳果夫)와 천리푸(陳立夫) 형제가 세운 정보기관, 역행사는 1932년 장제스가 세운 비밀 정보기관으로 구성원들이 푸른 제복을 입었다고 해서 남의사(藍衣社)로 불렸다. 논문에 따르면 국민당이 한중 합작에 나선 결정적인 계기는 1932년 4월 29일 상하이 훙커우 공원(현 루쉰공원)에서 일어난 윤봉길 의거였다. 당시 윤 의사가 처단한 일본군 대장 시라카와 요시노리는 시베리아 파견군 사령관을 거쳐 상하이 파견군 사령관에 오른 일본 육군의 상징적 인물이었다. 시라카와의 죽음으로 일본의 중국 침략이 휘청거릴 정도였다. 이에 장제스는 곧바로 한국인들을 위한 군관학교를 세우고, 국민당 정보기관인 CC단을 통해 백범에게 기밀활동비를 지원했다. 특히 중국 국민당 정부는 일본어에 능통한 한국인들이 일본군 정보 수집에 적합하다고 보고 백범에게 이를 제안했다. 대표적인 인물이 백범 계열의 한국국민당 청년단 부단장을 맡았던 조상연이다. 그는 중국의 중앙육군군관학교를 졸업하고 톈진에서 일본군과 교전을 벌인 경험이 있었다. 그는 백범의 지시로 1938년 2월 5일 홍콩을 거쳐 톈진으로 잠입했다. 조상연은 10여 개의 가명을 사용하면서 톈진 내 프랑스 조계지에서 첩보활동을 벌였다. 그는 일본군 동향과 일본 경찰 조직, 친일파 동향, 주민 상황 등의 각종 정보를 단파무전기를 통해 암호로 전송했다. 또 부하들을 일본군 점령하의 만주에 파견하기도 했다. 그는 한국인 정보원과 만나기 위해 영국 조계지로 이동하던 중 런던교 부근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돼 순국했다. 중국 국민당은 또 다른 정보기관인 역행사를 통해 약산을 지원했다. 역행사는 약산에게 항일투쟁 활동비로 매달 3000원을 지원하고 약산 계열의 청년들을 대상으로 군사훈련을 실시했다. 역행사의 핵심 요원들이 약산이 졸업한 황푸(黃포) 군관학교 출신이었던 점도 자금 지원에 영향을 끼쳤다. 약산은 역행사 요원들과 함께 일본군 동향을 파악하고 일본군 내 한국인 탈출 선동, 심리전, 유격전 등 다양한 항일투쟁을 전개했다. 양 교수는 “윤봉길 의거 이후 중국 측 지원은 일방적 시혜가 아니었다”며 “당시 중국군 가운데 일본군에 대한 정보 수집이 가능한 인력이 드문 상황에서 한국인 독립투사의 역할은 매우 중요했다”고 말했다.상하이=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15-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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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단독]“中정부, 임정에 매달 활동비 지원”… 한중 抗日공조 부각

    지난달 28일 중국 상하이(上海) 황푸(黃浦) 구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 관광객들로 북적이는 신톈디(新天地) 근처 중심 상권 한가운데 3층짜리 빨간색 벽돌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주변에 즐비한 카페와 각종 브랜드 숍들과 어울리지 않는 1919년 설립 당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다. 상하이 임정 청사는 한때 주변 상권과 함께 도심 재개발에 묶여 사라질 위기에 처했지만 중국 정부의 결정으로 보존될 수 있었다. 이날 찾은 임정 청사 정문 옆에는 ‘내부 공사 중 출입금지. 9월 5일 재개관 예정’이라고 적힌 한글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이곳은 박근혜 대통령의 방문을 앞두고 외부인의 출입을 막은 채 마무리 작업에 한창이었다. 동아일보는 언론사 가운데 유일하게 재개관식에 앞서 리모델링 작업을 마친 내부를 미리 둘러봤다. 박 대통령은 3일 베이징에서 열리는 항일 전승절 열병식에 이어 다음 날인 4일 상하이 임정 청사 재개관식에 참석할 예정이다. 박 대통령의 방문은 어느 때보다 의미가 각별하다. 주철기 대통령외교안보수석비서관은 지난달 31일 브리핑에서 “박 대통령의 방중 목적 중 하나는 양국의 독립 항쟁사를 기리기 위한 것”이라고 밝혔다. 이번 임정 청사 리모델링 공사는 주로 내부 전시 설명과 사진 일부를 교체하는 데 집중됐다. 전시관은 상하이 임정이 수립된 1919년 4월부터 윤봉길 의사의 훙커우(虹口) 공원 의거 직후인 1932년 4월 항저우(杭州)로 떠날 때까지 13년 동안의 임정 활동상을 주로 소개했다. 1층 회의실과 부엌, 2층 백범 김구 선생의 집무실, 침실 등은 예전과 바뀐 게 별로 없었다. 리모델링 이후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상하이와 충칭(重慶) 임정 시기 중국 정부가 어떻게 임정을 지원했는지를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 강조했다는 점이다. 예컨대 중국 국민당 정부가 1940년 무렵부터 광복 때까지 매달 6만∼300만 원씩 임정에 활동비를 지원한 사실을 전시 설명에 새로 추가했다. 일제가 1932년 백범 수배에 내건 현상금인 중국 돈 60만 원이 현재 가치로 우리 돈 약 200억 원에 해당하는 것으로 미뤄볼 때 적지 않은 액수인 셈이다. 백범이 광복 직후 환국할 때 장제스(蔣介石)가 20만 달러를 제공한 사실도 새롭게 적시했다. 비록 공산당은 아니지만 국민당 정부가 임정에 지원한 금액을 자세히 적어 중국이 한국의 광복을 적극 도운 사실을 부각한 것이다. 상하이 임정 청사에서 8km가량 떨어진 루쉰(魯迅) 공원(옛 훙커우 공원) 안에 있는 윤봉길 의사 기념관(매헌기념관)의 전시 설명이 바뀐 사실도 눈길을 끈다. 윤 의사는 1932년 4월 29일 이곳에서 열린 일왕 생일 축하 겸 상하이 점령 기념식장에 폭탄을 던져 일본 상하이 파견군 사령관 시라카와 요시노리를 처단했다. 매헌기념관은 정문 앞 전시 패널에 “윤 의사 의거는 한중 간의 항일 공동 전선 구축을 가능케 한 밑거름이었다”라는 문구를 새로 넣었다. 상하이 임정 청사와 매헌기념관의 움직임은 지난해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박 대통령과 만난 자리에서 “중국의 승전 70주년과 한국의 광복 70주년을 공동으로 기념하자”고 제안한 것과 맞물려 있다. 중국 정부는 지난해 하얼빈에 안중근 의사 기념관을 세운 데 이어 올 초 상하이 임정 청사 리모델링을 결정하는 등 항일 공동 투쟁사 재조명에 적극적이다. 한시준 단국대 교수는 “양국이 항일 공동 항전의 역사적 경험을 되살려 한중 우의의 발판으로 삼을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상하이=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15-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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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신부를 꿈꾸던 스탈린, 그는 왜 독재자가 되었나

    한때 신부를 꿈꾸며 수습사제가 됐지만 곧 깡패로 변한 청년이 있다. 마치 할리우드 배우처럼 잘생긴 이 그루지야(현 조지아) 사내는 멋진 시를 읊을 줄 알았고 연애의 달인이었다. 하지만 그를 사랑하던 연인과 친구들 상당수는 결국 그로 인해 목숨을 잃게 된다. 자신의 식구마저 숙청한 소비에트의 독재자 이오시프 스탈린(1879∼1953) 이야기다. 이 책은 스탈린이 권력을 손에 쥔 1917년 볼셰비키혁명 직전까지 잘 알려지지 않은 그의 청년 시절을 집중 조명했다. 정적이던 트로츠키는 스탈린을 본 순간부터 그를 무식한 행동대장쯤으로 취급했다. 실제로 스탈린은 레닌의 지시에 따라 트빌리시의 은행을 털 정도로 절대적인 충성심을 보였다. 이후 역사가들은 ‘피의 숙청’ 이미지로 스탈린을 그렸다. 그러나 히틀러에게 결정적인 패배를 가하고, 소비에트를 산업화시키고, 전후 루스벨트와 처칠을 상대하며 세계 패권의 한 축을 담당한 주인공은 스탈린이었다. 저자는 스탈린의 주변 인물들을 만나고 비공개 자료를 폭넓게 수집하면서 중립적으로 그의 삶을 추적하기 위해 노력했다. 10년 동안 9개국, 23개 도시에서 조사한 자료를 토대로 쓴 책답게 700여 쪽에 걸쳐 스탈린의 행적을 낱낱이 기록했다. 무엇보다 스탈린의 젊은 날을 소설처럼 생생하게 묘사한 글 솜씨가 일품이다. 스탈린이 어린 시절을 보낸 그루지야 트빌리시를 그린 프롤로그를 읽노라면 어느새 동서양이 교차하는 만화경 같은 풍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저자의 말마따나 스탈린의 삶과, 그가 지인들과 소통한 모습을 살펴보면 소비에트의 민낯을 볼 수 있을 것이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15-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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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화好통]동북아 ‘나만의 역사’ 억지는 이제 그만

    동아일보가 27일자 A1면으로 보도한 ‘중국 이번엔 선사시대 동북공정’ 기사에 대해 한 대형 포털 사이트에는 250여 개의 댓글이 달렸다. 대부분의 내용은 일본의 역사 왜곡뿐 아니라 중국의 선사시대 왜곡에 대해서도 한국이 철저히 대응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사실 중국처럼 거액의 국가 예산을 투입하면서 ‘역사 영토’에 유독 집착하는 나라는 별로 없다. 일례로 러시아도 자국 영토인 연해주에 발해 유적이 남아 있지만, 이웃나라와 갈등을 빚으면서까지 자국사로 편입하려고 애쓰지는 않는다. 주요 2개국(G2)으로 부상했다는 대국(大國) 중국은 왜 이럴까. 전문가들은 중국이 역사 영토에 집착하는 것은 19세기 말∼20세기 초 서양 열강의 침탈에 이어 만주사변, 중일전쟁 등 일제의 침략 경험이 배경으로 깔려 있다고 본다. 일본은 1930년대 만주를 점령한 직후 고고학자들을 파견해 중국 동북지역에 대한 대대적인 발굴 조사에 나섰다. 한일강제병합 이후 경주 신라고분을 발굴하고 만주로 향한 학자도 있었다. 일본이 정부 차원에서 발굴 조사를 독려한 것은 역사적으로 만주가 중원(中原)과 분리된 독자 영역이었음을 증명해 자신들의 만주 침략을 합리화하려는 것이었다. 거대한 중국 대륙을 분열시키려는 의도였다. 중국이 홍산(紅山)문화에 그토록 열광하는 것도 일본 식민사학과 관련이 깊다. 홍산문화는 일본 고고학자 도리이 류조가 처음 발견했다. 그러나 홍산문화가 실은 소하연문화, 홍산문화, 하가점 상·하층문화, 전국시대 등 5개 층위로 구분된다는 사실을 알아낸 건 중국 학자들이었다. 중국 학계는 홍산문화를 과학적으로 발굴해 일본 고고학의 한계를 극복했다며 자랑스러워한다. 마치 최근 국립중앙박물관이 금관총을 다시 발굴하면서 일본 학자들이 밝히지 못한 신라 돌무지덧널무덤의 구조를 파악한 데 대해 스스로 의미를 부여한 것과 비슷하다. 중국의 동북공정에는 일본에 대한 피해의식이 짙게 깔려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비슷하게 1980, 90년대부터 국내 재야 사학자들 사이에서도 홍산문화가 고조선의 원류이며 따라서 ‘만주는 원래 우리 땅’이라는 식의 주장이 나오기도 했다. 그렇다면 역사 영토를 둘러싼 동북아 갈등의 올바른 해법은 무엇일까? 강인욱 경희대 교수(북방고고학)는 “만주는 우리 땅이라는 식으로 똑같이 대응하기보다는 정확한 역사 해석으로 양측이 동북아 공동체로서 화해를 도모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해 최근 한중 학계가 항일 공동투쟁사를 조명하는 연구에 나서고 있는 것도 중요한 시사점을 준다. 양국이 억지를 부리기보다 아픈 과거를 공유하고 역사적 사실에 기반한 학술연구를 이어가야 한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15-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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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때 신부를 꿈꿨던…자신의 가족들마저 숙청한 독재자 스탈린

    젊은 스탈린사이먼 시백 몬티피오리 지음·김병화 옮김712쪽·3만2000원·시공사 한때 신부를 꿈꾸며 수습사제가 됐지만 곧 깡패로 변한 청년이 있다. 마치 할리우드 배우처럼 잘 생긴 이 그루지야 사내는 멋진 시를 읊을 줄 알았고 연애의 달인이었다. 하지만 그를 사랑하던 연인과 친구들 상당수는 결국 그로 인해 목숨을 잃게 된다. 자신의 식구들마저 숙청한 소비에트의 독재자 이오시프 스탈린(1879~1953) 이야기다. 이 책은 스탈린이 권력을 손에 쥔 1917년 볼셰비키 혁명 직전까지 잘 알려지지 않은 그의 청년시절을 집중 조명했다. 정적이던 트로츠키는 스탈린을 본 순간부터 그를 무식한 행동대장 쯤으로 취급했다. 실제로 스탈린은 레닌의 지시에 따라 츠빌리시의 은행을 털 정도로 절대적인 충성심을 보였다. 이후 역사가들은 ‘피의 숙청’ 이미지로 스탈린을 그렸다. 그러나 히틀러에게 결정적인 패배를 가하고 소비에트를 산업화시키고 전후 루스벨트와 처칠을 상대하며 세계 패권의 한 축을 주인공은 스탈린이었다. 저자는 스탈린의 주변 인물들을 만나고 비공개 자료를 폭넓게 수집하면서 중립적으로 그의 삶을 추적하기 위해 노력했다. 10년 동안 9개국, 23개 도시에서 조사한 자료를 토대로 쓴 책답게 700여 쪽에 걸쳐 스탈린의 행적을 낱낱이 기록했다. 무엇보다 스탈린의 젊은 날을 소설처럼 생생하게 묘사한 글 솜씨가 일품이다. 스탈린이 어린시절을 보낸 그루지야 츠빌리시를 그린 프롤로그를 읽노라면 어느새 동서양이 교차하는 만화경과 같은 풍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저자의 말마따나 스탈린의 삶과 그가 지인들과 소통한 모습을 살펴보면 소비에트의 민낯을 볼 수 있을 것이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15-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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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단독]中 이번엔 ‘선사시대 동북공정’

    중국이 우리 민족과 무관하지 않은 요하(遼河)문명을 자국 역사로 편입하는 작업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중국 정부는 고구려, 발해사를 중국사에 편입하는 ‘동북공정’을 2007년 완료한 데 이어 2003년부터는 요하문명을 자국 역사에 흡수하려는 ‘중화문명탐원공정(中華文明探源工程)’을 진행 중이다. 최근 관광 수익을 노리는 중국 지방자치단체들이 적극 참여하면서 역사왜곡이 심화되는 등 ‘선사시대 동북공정’이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동아일보와 경희대 한국고대사·고고학연구소는 이달 13∼18일 중국 현지답사에서 네이멍구(內蒙古) 자치구 문물국이 츠펑(赤峰) 시 아오한치(敖漢旗)에 홍산문화를 집중 전시하는 ‘네이멍구 홍산문화 박물관’을 올 초부터 짓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 박물관은 중원 문명의 원류로 홍산문화를 조명할 계획이다. 앞서 지난해 4월에는 중국사회과학원 고고연구소가 ‘아오한치 선사 고고 연구기지’를 세워 홍산문화 유적에 대한 발굴을 주도하고 있다. 강인욱 경희대 교수(북방 고고학)는 “중원 문명의 원류로 요하문명을 규정하려는 중국 정부의 시도는 명백한 역사왜곡”이라며 “이대로 가면 고조선을 포함한 한반도 상고사에 대한 해석마저 축소, 왜곡될 우려가 있다”고 지적했다.※ 요하문명(遼河文明)요하(遼河·랴오허) 강은 중국 동북지방 남부를 통과해 보하이(渤海) 해로 흘러든다. 기원전 7000년까지 거슬러가는 이 문명은 요하 주변의 다양한 신석기문명을 통칭한다. 기원전 4500년경 발생한 홍산(紅山) 문화가 대표적이다. 우리 학계는 이 문명의 주체가 동이족(東夷族)이며 중원과 한반도에 각각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고 있다.  ▼ 中 박물관, 요하문명-한반도 교류증거 빗살무늬토기 외면 ▼본보-경희대 인문학연구원, 中선사시대 동북공정 현장 답사《 중국 정부의 중화문명탐원공정(中華文明探源工程)은 동북공정보다 시기적으로 훨씬 넓은 신석기∼청동기 시대를 아우른다. 우리 학계는 요하문명이 한반도에 상당한 영향을 끼친 동이족(東夷族) 문화권으로 보고 있다. 중국 측 주장대로 중원 문명의 원류로만 규정지을 수 없다는 얘기다. 실제 동아일보와 경희대 인문학연구원 한국고대사·고고학연구소가 이달 13∼18일 찾은 요하문명 유적지에서는 중원에서 볼 수 없는 빗살무늬토기와 적석총이 다수 발견됐다. 이번 답사는 한국연구재단이 후원한 ‘고조선과 북방문화’ 연구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진행됐다. 》 16일 중국 네이멍구(內蒙古) 자치구 츠펑(赤峰) 시 아오한치(敖漢旗) 박물관. 츠펑 시에서 자동차로 2, 3시간 거리의 한적한 시골에 제법 규모 있는 박물관이 들어서 있었다. 박물관 입구에 들어서자 홍산문화 대표 유물인 옥저룡(玉猪龍·돼지를 닮은 용 모양의 옥기)이 벽면 중앙에 크게 새겨져 있었다. 박물관 내부는 홍산문화 유적지에서 출토된 옥(玉)과 채문토기(彩陶·채색 안료로 무늬를 그린 토기)들이 집중적으로 전시돼 있었다. 옥과 채문토기는 홍산문화에서 발견된 수많은 유물 가운데 그나마 중원 문명과 가까운 요소로 간주되는 출토품들이다. 홍산문화 유적에서는 한반도와 교류 흔적을 보여주는 빗살무늬토기가 다수 발견됐지만 아오한치를 비롯한 대부분의 중국 박물관은 채문토기만 보여주고 있다. 강인욱 경희대 교수(북방고고학)는 “홍산문화가 중원 문명의 원류로 부각되면서 예외적으로 출토되는 채문토기가 요하 지역을 대표하는 유물로 둔갑했다”고 지적했다. 현장에서 답사단은 이 박물관이 조만간 헐리고 더 큰 규모의 ‘네이멍구 홍산문화박물관’이 들어설 예정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아오한치는 츠펑 시 외곽의 7개 기(旗·현에 해당하는 몽골식 행정단위) 중 하나로 인구가 58만 명에 불과하다. 하지만 중국 중앙부처인 국무원 산하 중국사회과학원의 지원으로 대형 박물관이 들어설 수 있게 됐다. 중앙정부와 지자체가 손잡고 홍산문화 홍보에 적극 나서고 있는 셈이다. 박물관 앞에 비치된 대형 입간판에는 올 초부터 짓고 있는 홍산문화박물관이 중원 문명의 원류로서 홍산문화를 조명할 계획이라고 적혀 있었다. 강 교수는 “각 지방정부가 관광자원화 차원에서 홍산문화박물관을 경쟁적으로 유치하고 있다”며 “중화문명의 원류라고 하면 전국에서 관람객들이 찾아오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선사시대 동북공정’ 나선 중국 지자체·학계 중화문명탐원공정에 대한 중국 정부의 열의는 건설 중이던 고속도로의 방향을 바꿔 놓을 정도다. 15일 찾은 츠펑 시 얼다오징쯔(二道井子) 유적. 흙으로 쌓아올린 수십 개의 주거지와 골목, 토담, 저장갱 등 촌락 유구가 거대한 철골 구조물에 둘러싸여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이곳은 홍산문화와 더불어 요하문명을 대표하는 ‘하가점(夏家店) 하층문화’로 분류된다. 지금으로부터 약 4000년 전의 마을 유적임에도 보존 상태가 양호해 놀라울 정도였다. 이곳은 고속도로를 만드는 과정에서 우연히 발견돼 2011년 ‘전 중국 10대 고고(考古) 발견’에 선정됐다. 중국에서는 이례적으로 도로 방향이 바뀌면서 다른 유구와 달리 원형을 보존할 수 있었다. 홍산∼하가점 문화로 이어지는 요하문명을 황하문명에 덧붙여 중원 문명의 원류로 자리매김하려는 국가 시책 덕분이다. 이종수 단국대(고고학) 교수는 “홍산문화는 시기적으로 앞서지만 부족국가(chiefdom) 단계에 머물렀다”며 “얼다오징쯔 유적은 하가점 하층문화부터 초기 국가가 형성된 사실을 뒷받침해 준다”고 말했다. 14일 확인한 랴오닝(遼寧) 성 카쭤(喀左) 현의 ‘런민(人民)대 고고 실습기지’는 요하문명에 대한 중국 학계의 높은 관심을 잘 보여줬다. 온통 옥수수 밭으로 둘러싸여 안내원 없이 찾아가기 힘든 오지에 중국 베이징 소재 명문대인 런민대 고고학과가 베이스캠프를 차리고 전투를 벌이듯 발굴을 진행하고 있었다. 이곳에서 런민대는 이른 시기의 하가점 하층문화 유적을 집중적으로 발굴하고 있다. 뤼셰밍 런민대 교수(고고학)는 “카쭤 현은 홍산에서 하가점 하층문화로 이어지는 중요한 지역이기 때문에 기지를 세웠다”며 “학부생 40여 명도 함께 숙식하면서 발굴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고 말했다.○ 요하문명의 진정한 실체는? 중원 중심의 역사 해석은 요하문명의 주축인 요서뿐만 아니라 요동지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13일 중국 랴오닝 성 랴오양(遼陽) 시 박물관. 신석기시대 첫 전시실에 고조선을 대표하는 유물인 비파형 동검과 미송리식 토기들이 사방을 둘러싸고 있었다. 흡사 한국 박물관의 선사시대 전시실에 와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고조선과 고구려 등 한반도와 밀접한 관계를 맺었던 요동지역 역사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랴오양은 예부터 한반도와 밀접했던 요동지방의 중심지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였다. 60m² 남짓한 아담한 전시실을 돌아 나가자마자 투구를 쓴 채 긴 창을 쥐고 선 연나라 장수 진개(秦開)의 거대한 동상이 막아섰다. 동상 뒤로 모든 전시실에서 비파형 동검이나 미송리식 토기들은 자취를 감췄다. 연(燕), 진(秦), 한나라 등 중원 문명 위주의 유물들만 빼곡히 전시돼 있을 뿐이었다. 고조선을 침략해 요동지역을 뺏은 진개의 동상을 비파형 동검 전시실 앞에 배치한 건 다분히 의도적이라는 얘기가 답사단에서 흘러나왔다. 실제로 랴오양을 한때 점령한 고구려를 다룬 전시실도 다른 전시실로 이어지는 통로로 보일 정도로 초라했다. 그나마 고구려 전시실 전면은 고구려 정벌에 나선 당 태종을 그린 벽화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요하문명이 중원도 한반도의 것도 아니라면 실체가 무엇일까. 이와 관련해 15일 네이멍구 자치구 츠펑 시 랴오중징(遼中京) 청동기 박물관에서 본 하가점 상층문화의 특이한 비파형동검이 중요한 시사점을 던져줬다. 전형적인 비파형동검 몸체에 초원 유목민들이 즐겨 사용하는 인물 장식의 손잡이가 붙어 있었다. 두 가지의 이질적인 문화가 하나의 유물에 결합돼 있는 것이다. 강 교수는 “이 지역 하가점 상층문화에는 중원과 초원지역, 한반도의 요소들이 모두 섞여 있다”며 “결국 요하문명은 한반도와 중원을 잇는 문화 교류의 가교 역할을 했을 것”이라고 말했다.아오한치·츠펑·랴오양=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15-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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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태안 古선박은 조선시대 조세운반선”

    조선시대 지방에서 서울로 세곡을 실어 나르던 조운선(漕運船)이 처음 발견됐다. 충남 태안 앞바다에서 좌초된 이 배의 최종 목적지는 현 서울지하철 6호선 광흥창역 부근이었다. 문화재청 산하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는 “지난해 10월 충남 태안군 마도해역에서 발견한 마도 4호선은 수중 발굴 조사 결과 조선시대 조운선임을 최초로 확인했다”고 26일 밝혔다. 지금까지 조선시대 조운선이 실물로 확인된 적은 없다. 이 배는 길이 13m, 폭 5m의 크기로 바닥이 평평한 평저선(平底船) 구조다. 현재 마도 북동쪽 수심 10m 바다 밑에 묻혀 있다. 연구소가 이 배를 조운선으로 파악한 결정적인 증거는 잔해 안에서 발견된 목간(木簡·일정한 모양으로 깎은 나뭇조각에 쓴 문서나 편지) 60여 점이다. 이 목간에는 도착지인 ‘광흥창(廣興倉)’과 더불어 출발지인 ‘나주(羅州)’가 함께 적혀 있다. 광흥창은 조선시대 관리들의 녹봉을 관장하던 기관으로 서울 마포구 창전동에 있는 지하철 6호선 광흥창역 부근에 있었다. 결국 이 배는 전남 나주의 영산창(榮山倉)에서 거둬들인 세곡과 공납품을 광흥창으로 옮기기 위해 출항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다른 목간에는 마치 화물 꼬리표처럼 ‘두(斗)’와 ‘맥(麥·보리)’ 등 곡물의 양과 종류 등이 적혀 있다. 함께 나온 분청사기 140여 점은 이 조운선이 조선시대 초기 선박이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분청사기에 새긴 국화 혹은 새끼줄 무늬가 15세기 초반의 제작 기법이기 때문이다. 이 중 분청사기 3점에서는 조선시대 궁궐 물품을 조달한 관청인 내섬시(內贍寺) 글자가 적혀 있었다. 또 배 안에서는 특산품인 대나무와 숫돌 등도 발견됐다. 연구소 측은 “이번에 발견된 조운선은 국내 수중 발굴 현장에서 발견된 첫 조선시대 선박이라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고 밝혔다. 앞서 발견된 마도 1∼3호선 등은 모두 고려시대 선박이었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15-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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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지막 황녀’ 덕혜옹주 생전 예복 일반 공개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녀인 덕혜옹주(1912∼1989)가 생전에 입었던 예복이 일반에 공개됐다. 국립고궁박물관은 올 6월 일본 문화학원 복식박물관으로부터 기증받은 덕혜옹주의 유품 7점을 전시한다고 25일 밝혔다. 이번에 공개되는 유품은 덕혜옹주가 돌 무렵 입었던 어린이용 당의(唐衣)와 붉은색의 폭이 넓고 긴 스란치마, 돌띠 저고리와 구멍이 있는 풍차바지를 비롯해 속바지(단속곳), 어른용 반회장(半回裝·깃과 고름, 소매 끝에 다른 색의 천을 대서 지은 것) 저고리, 치마 등이다. 반회장 저고리와 치마는 20대 젊은 나이에 입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나머지는 모두 돌 혹은 5∼10세 무렵 입었던 것으로 보인다. 안보라 고궁박물관 학예연구사는 “조선 말기의 왕실 복식 유물이라는 점에서 복식사 연구에서 중요한 자료”라고 평가했다. 덕혜옹주는 고종 황제가 환갑을 맞은 1912년에 얻은 고명딸로, 14세 때 강제로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일본인 귀족 소 다케유키와 결혼했다. 덕혜옹주는 젊은 나이에 치매를 앓고 병원에 입원된 뒤 이혼을 당하는 비운을 겪었다. 1962년에야 환국해 창덕궁 낙선재에서 머물다가 1989년 78세의 나이로 숨을 거뒀다. 이번에 공개된 예복 등은 남편이던 소 다케유키가 1955년 덕혜옹주와 이혼할 당시 옹주의 오빠 영친왕(英親王) 부부에게 돌려보낸 것들이다. 영친왕 부부는 1956년 문화여자단기대학(현 문화학원) 학장이던 도쿠가와 요시치카에게 복식을 기증했다. 이후 1979년 개관한 일본 문화학원 복식박물관에서 유품을 소장했다. 25일부터 9월 6일까지. 02-3701-7637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15-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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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이 책, 이 저자]벌레와 인간의 조상이 같다고?… 조선 실학자, 동물로 人界를 이해하다

    “용강현에 나이 90 넘긴 해옹이 살았는데 낚시로 업을 삼았다. 그가 ‘왜 나를 물 옆에 두지 않느냐’고 하여 아들이 한 대야의 물을 가져다주었다. 늙은이가 손발을 담그자 점점 물고기로 화했다. 수개월이 지나자 농어가 돼 아들이 바다에 놓아주었다.”(해동잡록) 조선 중기 학자 권별이 쓴 해동잡록의 이 문장은 할리우드 영화 ‘빅 피쉬’(2003년)를 연상케 한다. 영화에서도 죽음을 앞둔 아버지는 커다란 물고기로 변해 가족을 떠난다. 종(種)의 구분이 엄격한 서양과 달리 동양에서 사람과 동물은 하나의 뿌리를 둔 동족과도 같은 존재였다. 이 책은 조선 후기 실학자들의 동물에 대한 관찰 기록을 토대로 학자들의 인간관을 탐구한다. 저자는 “동아시아에서 인간은 벌레들의 동물원 속 한 개체일 뿐만 아니라 모든 동물과 같은 조상을 가진 존재”라고 썼다. 옛사람들이 인간을 벌거벗은 벌레라는 뜻의 ‘나충(裸蟲)’으로 지칭한 것도 이런 연유에서였다. 저자는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한국문화학 석사학위를 받은 뒤 미국 델라웨어대에서 언어학을 연구하고 있다. 그에게 책에 얽힌 사연을 들어봤다. ―조선 실학자들의 동물 연구는 어떤 점이 독특한가. “마치 요즘의 동물행태학이나 인지과학 연구처럼 동물의 행태를 세밀하게 관찰하고 이를 바탕으로 사람의 본성을 파악하려고 한 점이 흥미롭다. 이전 시대에는 사람의 본성을 따져보고 나서 동물의 그것을 판단하는 데 그쳤다. 완전히 상반된 관점인 셈이다. 동물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보는 게 취미인데 여기에서 본 동물 관찰 방식과 실학자들의 기록이 일맥상통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놀랐다.” ―책에서 빠르고 쉬운 정보 처리 과정을 선호하는 뇌 신경활동 등을 근거로 사람의 마음을 기계에 비유했는데…. “조금 극단적인 주장으로 들릴 수는 있겠지만, 나는 한 치 망설임 없이 그렇게 말할 수 있다. 현대과학은 우리 생각의 내용을 만드는 게 결국 무의식 혹은 유전자라고 설명한다. 조선 실학자들은 세상의 우연한 사건들이 사람의 감정을 건드리고 마음을 휘어잡게 된다고 봤다. 마음의 작용이 기계와 다를 바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사람을 기계처럼 취급한다는 뜻은 아니다. 실학자들은 어떻게 하면 자아가 원하는 대로 행복해질 수 있는지를 탐구하는 과정에서 이런 본질을 파악했다.” ―행복을 추구한 실학자들의 시도는 결국 성공했나. “결과만 놓고 보면 성공적이지 못했다. 실학자들이 옳은 질문을 했지만 정답을 얻지는 못했다고 본다. 서구의 과학적 방법론이 결여됐기 때문이다. 인간 이성이 논리보다는 감정에 휘둘린다는 점에서 무의식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탐구하는 뇌 과학이 적지 않은 시사점을 줄 수 있다.” ―책에 고전 원문이 꽤 많이 인용됐는데…. “한국고전번역원의 번역문을 기본으로 했고 독자들이 이해하기 어렵다고 판단되는 부분은 내가 직접 원문을 해석했다. 몇 해 전 1년 동안 강원도에서 한학을 공부한 게 큰 도움이 됐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15-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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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진위논란 휩싸인 백제 ‘왕궁 부엌터’

    과연 삼국시대 첫 소주방(燒廚房·궁에서 음식을 만드는 공간)이 발견된 것인가. 20일 문화재청 산하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가 언론에 공개한 전북 익산시 왕궁리 유적 발굴 현장에서는 이례적으로 ‘진실게임’이 벌어졌다. 학술자문을 위해 현장을 찾은 교수진이 문화재청의 발표 내용에 잇달아 의문을 제기한 것이다. 문화재청은 발굴 현장 공개에 앞서 언론에 배포한 보도자료에서 “지난달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익산 왕궁리 유적에 대한 발굴조사 결과 조선시대 왕궁 수라간(水刺間)에 비유되는 백제 사비기 왕궁의 부엌(廚) 터가 확인됐다”고 밝혔다. 지금껏 백제를 비롯해 신라와 고구려 유적에서 왕궁 내 부엌 터가 발견된 적은 없다. 보도자료가 사실이라면 지난해 백제역사유적지구의 세계문화유산 등재에 이어 삼국시대 왕궁 소주방이 처음 확인된 역사적 발견인 셈이다. 부여문화재연구소 측은 이날 오전 익산 왕궁리 현장 언론 공개회에서 백제시대 소주방이라는 증거로 건물터 안의 타원형 구덩이에서 발견된 철제 솥 2점과 항아리 등 토기 5점, 숫돌 3점을 내세웠다. 솥, 항아리, 숫돌 모두 양식이나 제조방식에서 백제시대 주방도구로 조사됐다는 것이다. 이어 기와를 두른 구덩이 옆에서 발견된 불탄 흙과 벽체(壁體), 바닥에 깔린 숯은 불을 때 음식을 조리하던 아궁이 흔적이라고 연구소 측은 추정했다. 하지만 현장을 찾은 자문단 교수 4명 중 3명은 이 유적이 부엌 터가 아닐 가능성이 높다고 봤고 1명만 가능성이 있다고 밝혔다. 부엌 터가 아니라는 주장의 근거는 우선 구덩이 안에서 솥, 항아리 등과 더불어 농기구인 철제 가랫날과 도끼가 함께 나왔다는 점이다. 주방도구와 무관한 농기구를 왜 땅에 함께 묻었느냐는 의문이 생긴다. 또 연구소 측이 아궁이로 추정하는 유구(遺構·옛 토목건축의 구조와 양식을 알 수 있는 실마리가 되는 자취)에 돌이나 흙으로 부뚜막을 다져 올린 흔적이 없고 구멍만 뚫려 있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는 지적이다. 박순발 충남대 교수(고고학)는 “유구와 유물을 종합적으로 살펴볼 때 마치 폐기물을 처리하듯 다 쓴 조리도구와 농기구를 한데 모아 구덩이에 몰아넣은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이어 박 교수는 “이곳은 애초부터 건물이 아닌 노천 상태의 유구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부엌으로 추정된다는 문화재청 발표를 정면으로 반박한 것이다. 또 부엌 터라고 밝힌 유구가 이번에 함께 발견된 길쭉한 형태의 장랑형(長廊形) 건물터 바로 옆에 위치한 것도 의문스럽다. 길이 29.6m, 너비 4.5m의 장랑형 건물터는 왕이 정사를 보던 정전(正殿)과 가까운 데다 안에서 벼루 등이 출토돼 신하들이 왕을 기다리며 업무를 수행한 장소로 추정된다. 업무 공간 바로 옆에 이처럼 주방을 만든 전례가 드물다는 분석이다. 자문단 교수진의 잇단 지적에 부여문화재연구소 관계자는 “수라간까지는 아니더라도 부엌 정도는 맞는 것 같다”며 한발 물러섰다. 이와 관련해 문화재청이 보안 등을 이유로 사전에 정밀한 학술자문을 거치지 않고 보도자료부터 배포한 것은 적절하지 못한 처신이라는 비판도 나온다. 자문에 응한 한 전문가는 “지난달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익산 왕궁리의 발굴 성과를 필요 이상으로 확대 해석하면 자칫 국제적 망신이 될 수 있다”며 “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좀 더 신중해질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익산=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15-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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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한국의 민주주의, 19세기부터 자생적으로 발전”

    “조선 멸망의 최대 원인은 사실 궁정에 있다. 오늘날 세상의 입헌국들에서 군주는 정치적 책임이 없고 약정도 할 수 없다. 전제국가의 경우는 이와 다르다. 국가의 명운이 전부 궁정에 달려 있다.” 1910년 경술국치 직후 중국 사상가 량치차오(梁啓超)는 대한제국 멸망의 원인 중 하나를 정치 구조에서 찾았다. 왕에게 실권이 없는 입헌군주정과 달리 전제군주정은 모든 국가협약의 주체가 왕이기 때문에 제국주의 침략이 상대적으로 더 용이하다는 논리다. 실제 한일강제병합을 주도한 이토 히로부미도 자서전에서 조선 전제정치의 덕을 봤다는 내용을 기술하기도 했다. 이 책은 19세기 말∼20세기 초의 우리 역사를 민주주의 발전이라는 시각에서 재해석해 눈길을 끈다. 그동안 학계는 ‘내재적 발전론’과 ‘식민지 근대화론’ 논란에서 볼 수 있듯 조선후기 사회에서 자본주의 맹아를 찾는 데만 몰두했다. 저자는 그 이유를 “민주주의는 외부에서 수입된 제도라는 오리엔탈리즘적 편견과 선입견에서 (학계가)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저자는 민주주의가 광복 이후 갑자기 등장한 게 아니라 이미 19세기부터 자생적으로 발전했음을 논증하고 있다. 특히 19세기 민주주의의 핵심 주체로 동학농민전쟁을 이끈 민중과 개화파 엘리트를 꼽았다. 예컨대 동학농민전쟁 당시 민초들은 인권을 강조하며 신분차별 철폐를 내세웠다. 또 대접주로 활약한 남계천처럼 노비 출신 간부들이 동학농민군을 이끌었다. 녹두장군 전봉준은 재판 때 “서양에서 당을 만들고 집회를 열어 정부를 감시하는 조직을 민회라고 부른다. 동학도 그런 결사체일 뿐 도적 떼가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동학농민군의 위상과 역할을 민주주의 조직으로 규정한 것이다. 저자는 국망 이후 독립운동사도 민주주의 쟁취라는 관점에서 바라본다. 1919년 3·1운동 직후 임시정부 수립 논의가 본격화하면서 민주공화정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된 점에 주목했다. 일제가 군부 파쇼체제로 식민지 조선을 억압한 데 대한 대응이기도 했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3·1운동에서 민족독립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내적 논리는 민주주의였다. 민족의 자유와 평등을 구현하는 것은 민족의 정당한 권리이므로 독립해야 한다는 주장은 민족의 독립이 곧 민주주의 원리에 따라 구현돼야 함을 뜻한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15-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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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종의 ‘헤이그 특사증’… 헐버트-우당 거쳐 이상설에

    고종의 헤이그 특사증이 호머 헐버트 박사(1863∼1949·사진)와 우당 이회영 선생을 거쳐 이상설에게 전달된 사실을 보여주는 동아일보 보도가 공개됐다. 헐버트 박사는 미국인 선교사 출신으로 한국 독립을 위해 헌신했다. 헐버트박사기념사업회는 12일 서울 마포구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에서 열린 ‘헐버트 박사 66주기 추모식’에서 1949년 8월 11일자 동아일보 보도에 실린 이시영 당시 부통령의 증언을 소개했다. 이 보도에서 이 부통령은 “(황제께서) 좌우 정탐이 심해 기회를 보시다가 헐버트 박사에게 친임장을 비밀 서하하시니 헐버트 박사는 이를 비밀히 가형(우당)을 거쳐 이상설 씨에게 전달한 것이다”라고 밝혔다. 고종이 헐버트 박사에게 건넨 헤이그 특사파견증이 우당을 거쳐 이상설에게 전달된 것이다. 고종은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단을 파견해 을사늑약의 불법성을 국제사회에 호소하려고 했다. 김동진 헐버트박사기념사업회장은 “고종 황제와 헐버트 박사, 우당 선생, 이상설 의사 등이 을사늑약을 막기 위해 애쓴 역사적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15-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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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단독]‘수월관음도’ 日서 발견 “전세계 딱 3점, 봉황무늬 베일 희귀본”

    14세기 전반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는 고려시대 ‘수월관음도(水月觀音圖)’가 일본 도쿄에서 발견됐다. 현재 전 세계에 3점밖에 없는 ‘봉황무늬 베일’이 그려진 희귀본인 것으로 확인됐다. 고려불화 권위자이자 동국대박물관장인 정우택 교수는 “일본인 개인 소장자가 갖고 있는 불화를 도쿄 현지에서 감정한 결과 14세기 수월관음도인 것으로 조사됐다”며 “지금껏 한번도 공개되지 않은 작품으로 전시는 물론이고 논문으로도 소개된 적이 없다”고 11일 밝혔다. 수월관음도란 달이 뜬 밤에 관음보살이 바위에 앉아 선재동자를 비롯한 대중들에게 불법을 전하는 장면을 담은 그림으로 현재까지 45점만 전하는 희귀 문화재다. 특히 이번에 발견된 수월관음도는 관음의 몸을 덮고 있는 베일에 봉황무늬가 그려져 있어 눈길을 끈다. 통상 베일에는 원형 당초문 혹은 원형 국화무늬를 그리는 게 일반적이다. 봉황무늬 베일이 그려진 수월관음도는 일본 가가미(鏡)신사와 조라쿠(長樂)사, 독일 쾰른 동양미술관 소장본 등 3점에 불과하다. 정 교수는 “비록 관음 앞에 그려진 정병과 베일 부분의 비단이 떨어져 나갔지만 관음의 얼굴과 몸체는 거의 온전하다”며 “특히 선재동자가 완벽에 가까울 만큼 잘 남아 있는 것은 드문 사례”라고 말했다. 이번 수월관음도는 가로 50cm, 세로 104.2cm 크기의 비단 위에 그려졌는데, 관음의 얼굴 윤곽과 선재동자의 해맑은 표정에서 엿보이는 디테일한 묘사가 일품이다. 관음 얼굴을 금니(金泥·금가루를 아교풀에 갠 것)로 칠해 화려함을 더하는 동시에 이목구비의 윤곽선 주변을 붉은색으로 ‘바림’(한쪽을 짙게 색칠한 뒤 갈수록 엷게 칠하는 것)을 해서 입체감을 줬다. 정 교수는 “일반적인 고려불화와 달리 바림에 포인트를 둬 관음보살 얼굴의 입체감을 잘 살린 수작”이라고 설명했다. 이번 수월관음도 현지조사는 정 교수 지인들의 제보에 따라 성사된 것으로 알려졌다. 정 교수는 미국 로드아일랜드 디자인스쿨(RISD)이 소장한 ‘결가부좌 수월관음도’를 지난해 찾아내는 등 각국을 돌아다니며 고려불화를 발굴해 왔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15-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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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陸士 효시는 조선경비대 아닌 신흥무관학교가 돼야”

    《 “신흥무관학교 졸업생 3500명 중 11%만 신원이 규명돼 있습니다. 아직 갈 길이 멀지요.” 6월 8일 중국 지린(吉林) 성 류허(柳河) 현 싼위안푸(三源堡) 진 쩌우자(鄒家) 가. 버려진 들판 위에 선 독립투사 후손들은 벅찬 감격과 더불어 새로운 다짐을 밝혔다. 이곳에는 경술국치 한 해 뒤인 1911년 우당(友堂) 이회영 선생(1867∼1932)을 비롯한 신민회원들이 세운 신흥무관학교 터가 아직 남아 있다. 당시 우당 옆에는 입학생들을 조선 땅에서 만주로 비밀리에 인솔한 범정(梵亭) 장형 선생(1889∼1964)이 있었다. 신흥무관학교가 개교한 지 104년이 흐른 지금 할아버지의 발자취를 따라 후손들이 만주벌판을 찾았다. 우당의 손자인 이종찬 전 국가정보원장(79)과 범정의 손자 장호성 단국대 총장(60)은 다구(大古) 산 뒤로 해가 뉘엿뉘엿 질 때까지 조부의 독립운동에 얽힌 소회를 풀어냈다. 동아일보는 10일자 르포기사에 이어 하편으로 이들의 대담을 싣는다. 》▽이종찬 전 원장=(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이쪽이 저희 할아버지 식구들이 모여 산 곳입니다. 저기 보이는 다구 산에 신흥무관학교 훈련장을 두었지요. 일본군 감시를 피하려고 마을에서 한참 들어간 외진 곳을 택한 거라고 합니다. ▽장호성 총장=중국 현지 주민들의 텃세 때문에 학교 이름도 한동안 ‘신흥강습소’로 짓고, 교직원이나 학생들도 중국식 복장을 갖춰 입었다고 하니 이국 타향에서 얼마나 고충이 컸겠습니까. 조부께서 1911년 2월 중국으로 망명하고 나서 1년에 최대 600명의 입학생들을 이리로 데려왔다고 들었습니다. 나중에 사람 수에 비해 교사가 좁아서 인근의 하니허(哈泥河)로 학교를 옮겼습니다. ▽이=그런데 신흥무관학교 졸업생 3500명 가운데 현재 400명밖에 신원이 밝혀지지 않았다는 점이 아쉽습니다. 아직 우리가 찾아내지 못한 분들이 너무 많아요. 한반도에서 만주까지 600리 길인데 그 사이에 수많은 연락망이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자료로 남아 있는 것이 별로 없으니 안타깝습니다. 연락망뿐 아니라 이 외진 곳에 물자 보급이 어떻게 이뤄졌는지 등 밝혀지지 않은 역사적 사실이 많습니다. ▽장=동감입니다. 단국대도 독립투사가 세운 학교답게 선열들의 행적을 제대로 규명하는 데 힘을 보탤 생각입니다. 당시 독립항쟁의 거점이 만주였던 점을 감안해서 중국 동북 3성 안에 독립운동 연구센터를 두고 현지 조사를 강화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습니다. ▽이=애국애족의 도량으로 군사훈련까지 실시한 곳인데도 신흥무관학교가 대한민국 육군사관학교의 효시가 아니라는 사실도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습니다. 현재 육사는 1946년 미 군정청이 설립한 ‘조선 경비 사관학교’를 효시로 삼고 있습니다. 북한도 1932년 빨치산 투쟁에서 시원을 찾기 때문에 김일성이 태어나기 전 설립된 신흥무관학교에 관심이 없습니다. 대한제국이 망한 뒤에도 의병과 독립군, 광복군으로 꾸준히 이어져 오늘날 대한민국 군대가 나온 겁니다. 비록 나라가 망했어도 군 간부를 양성한 것이지요. ▽장=일제강점기 역사를 ‘죽은 역사’로 방치하지 말고 잊지 않으려는 노력이 중요합니다. 광복 이후 조부께서 독립운동가분들을 모시고 학생들 앞에서 연회를 베풀고, 후손들에게 대학 장학금을 꾸준히 지원했다고 들었습니다. ▽이=맞습니다. 잊지 않고 기억하는 것은 후손들의 몫이지요. 이런 관점에서 이제는 국내에도 임시정부 기념관이 들어설 때가 됐다고 생각합니다. 임시정부 청사가 있었던 중국 상하이 등지에 기념관이 이미 건립됐는데, 해방된 지 70년이 되도록 정작 우리나라에 임정 기념관이 없다는 것은 안타까운 대목입니다. ▽장=임정 얘기를 들으면 남의 일 같지가 않습니다. 조부께서 중국 단둥 시내의 이륭양행 건물 안에 설치된 ‘임정 안동교통사무국’과 소통하면서 군자금을 전달하는 임무를 수행했다고 들었습니다. 후손들의 손으로 임정 기념관을 짓는다면 의미가 적지 않을 것입니다. ▽이=끝으로 최근 개봉한 영화 ‘암살’에도 등장하는 김원봉, 김무정 등 연안파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재고할 때가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중국은 궈모뤄(郭沫若)처럼 한때 국민당에 몸담은 인사들도 혁명열사로 추존해 공적을 기리고 있습니다. 항일투쟁에 대한 공적만큼은 정당하게 평가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대담자 약력 :: ◇이종찬 전 국가정보원장―1936년 중국 상하이 출생―1960년 육사 16기 졸업―제11∼14대 국회의원―1998∼1999년 초대 국가정보원장―현재 우당장학회 이사장 ◇장호성 단국대 총장―1955년 서울 출생―1978년 서강대 전자공학과 졸업―1993년 미국 오리건주립대 공학박사―1994∼2000년 한양대 교수―2008년∼ 단국대 제15대 총장 류허=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15-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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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민족 북방기원설-자생설 모두 역사적 진실과 거리”

    “북방 초원 민족이 떼 지어 한반도로 이동한 뒤 지배층이 교체됐다는 한민족 북방기원설이나 한반도 고대문명이 유라시아 초원 문명과 상관없이 자생적으로 발전했다는 주장 모두 역사적 진실과 거리가 있습니다.” 강인욱 경희대 교수(고고학)는 최근 발간한 ‘유라시아 역사 기행’(민음사·사진)에서 ‘북방기원설 혹은 기마민족설’이나 ‘한반도 자생설’을 모두 비판했다. 강 교수는 국내 고고학계에서 드물게 러시아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북방 고고학 전문가다. ‘북방기원설’ 등은 신라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분)이 수천 km 떨어진 남부 시베리아 알타이 지역의 ‘파지리크 고분’과 흡사한 점, 신라 금관총에서 1921년 출토된 화려한 금관이 아프가니스탄 지역의 ‘틸리아 테페’ 금관과 유사한 점 등을 근거로 한때 교과서에 실리기도 했다. 그는 “한민족 북방기원설은 한국인이 예부터 외래문화에 절대 의존했다는 일제 식민사학의 ‘타율성론’을 뒷받침하기 위해 만들어졌다”며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일본 학자가 내놓은 기마민족설 역시 만주를 경영하던 제국주의 시절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려는 의도가 숨어있다”고 말했다. 특히 그는 흉노족이 내려와 신라 지배층을 형성했다는 일부 학설은 역사적 근거가 희박하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북방기원설 등이 일본 식민사학에서 비롯됐다는 이유로 ‘한반도 자생설’을 주장하는 것 역시 극단에 치우쳤다는 게 강 교수의 주장이다. 그는 “북방 초원문화의 영향을 부정하는 것은 더러워진 목욕물을 버리겠다고 욕조 안의 아기까지 내버리는 꼴”이라고 비판했다. 신라 적석목관분에서 계림로 보검을 비롯해 금동 신발, 봉수형 유리병 등 수많은 초원계 유물이 계속 발굴되고 있는 사실을 자생설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는 “한반도 고대문명이 자생적이면서도 중국과 북방 유목민족의 영향을 받았다고 보는 게 합리적”이라며 “특히 신라인들은 중국의 영향을 크게 받은 고구려나 백제와 달리 초원문화를 적극 흡수해 자신들만의 황금문화를 만들어냈다”고 설명했다. 광복 70주년을 맞았지만 일본 고고학계의 영향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무얼까. 강 교수는 국내 유라시아 고고학 연구가 일본 측 연구 성과에 편향돼 있다고 지적한다. “과거 중앙아시아는 옛 소련의 영토여서 접근이 어렵고 사료도 구하기 힘들었습니다. 냉전이 끝났으니 이젠 일본뿐만 아니라 러시아나 중국 측 사료도 폭넓게 다뤄야 균형적인 시각을 가질 수 있습니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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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선양서 비밀접선뒤 250km 잠행… 入校부터 목숨을 걸다

    《 “내가 신흥무관학교 출신이야.” 최근 개봉한 영화 ‘암살’에서 의열단원 속사포가 일본군 총탄에 맞아 숨지기 직전 저격수 안옥윤에게 건넨 마지막 대사다. 영화에서 속사포가 신흥무관학교 출신임을 여러 차례 강조한 건 그만큼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는 의미다. 실제로 신흥무관학교는 항일 무장투쟁의 전초기지로 청산리, 봉오동 전투를 승리로 이끈 독립군 주요 간부들을 대거 양성했다. 올해 광복 70주년, 신흥무관학교 설립 104주년을 맞아 신흥무관학교를 세운 우당(友堂) 이회영 선생(1867∼1932)의 손자인 이종찬 전 국가정보원장과 당시 입학생들을 비밀리에 만주로 인솔한 범정(梵亭) 장형 선생(1889∼1964)의 손자 장호성 단국대 총장이 역사적 현장을 찾았다. 이번 답사는 단국대 동양학연구원과 우당기념사업회가 주관하고, 국가보훈처와 본보가 후원했다》 광활한 만주벌판을 한참 달리자 야트막한 야산 앞으로 물을 댄 너른 수전(水田)이 펼쳐졌다. 수전은 밀을 주식으로 하는 중국인들이 논을 일컫는 말. 만주에서 수전이 넓게 자리 잡은 곳은 십중팔구 조선족 거주지다. 햇볕에 반짝이는 논과 산이 함께 어우러져 한국의 시골 풍경을 방불케 했다. 6월 8일 중국 지린(吉林) 성 류허(柳河) 현 싼위안푸(三源堡) 진 쩌우자(鄒家) 가. 신흥무관학교 설립지를 찾아 답사단이 도착한 이곳은 만주지역 최대 도시인 선양(瀋陽)에서 약 250km 떨어진 한적한 농촌마을이다. 신흥무관학교 교사(校舍)와 훈련장이 있던 터는 마을 뒷산인 다구(大古) 산 방향으로 한참 들어간 외진 데 있었다. 인적이 드문 입지는 일본군의 눈을 피해 교직원과 학생들이 자급자족하기에 최적의 장소였다. 학교가 들어선 1911년 이곳에서는 40명의 1기 입학생이 구국의 신념으로 낮에는 농사와 군사훈련을, 밤에는 공부를 했다. 앞서 우당 이회영 선생을 비롯한 신민회원들은 국권피탈(경술국치) 직후인 1910년 7월 “일제에 점령당한 조국에서 항일투쟁은 한계가 있다”고 보고 만주 땅을 뒤져 이곳을 항일 투쟁기지로 택했다. 조선시대 일곱 정승을 배출한 명문가 후손인 우당은 나머지 다섯 형제를 설득해 60명의 식구들을 이끌고 1910년 중국으로 망명을 떠났다. 우당은 이때 정리한 40만 원(현 가치로 600억 원)의 막대한 가산을 학교 운영에 모두 쏟아부었다. 여섯 형제 가운데 광복의 감격을 누린 사람은 이시영 초대 부통령밖에 없다. 우당은 일본군에게 고문을 당해 숨졌고, 나머지 형제들은 병들거나 굶어 죽었다. 한국 근현대사에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표본이었다. 이들의 희생 덕에 신흥무관학교는 약 10년 동안 3500명에 달하는 독립투사를 길러냈다. 졸업생들은 만주와 중국 본토로 흩어져 의열단과 서로군정서, 북로군정서, 광복군 등에 소속돼 일제에 맞서 싸웠다. 조부들의 피땀 어린 현장을 찾은 두 손자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팔순을 넘긴 이종찬 전 원장은 텅 빈 들판을 걷다가 “어렵던 시절 이곳까지 오셔서 청년들을 교육한 선조들이 자랑스럽다”며 “그분들의 치열한 교육열이 오늘날 대한민국을 10대 경제대국으로 이끈 게 아닌가 싶다”고 했다. 옆에서 묵묵히 지켜보던 장호성 총장도 “한참을 달려 직접 와보니 조부께서 먼 이국타향에서 얼마나 고생하셨을까 싶어 가슴이 먹먹하다”고 말했다. 동북공정 이후 중국 당국은 민족주의 움직임에 지극히 민감하다. 몇 해 전에는 하니허(哈泥河)에 세워진 신흥무관학교 기념비가 철거되기도 했다. 학교 설립 당시에도 현지인들의 텃세는 만만치 않았다. 주민들의 반발로 교사를 세울 땅을 살 수가 없어 우당은 베이징까지 찾아가 권력 실세였던 위안스카이의 허락을 받아야 했다. 의심어린 눈초리의 주민들을 의식해 학교 이름도 처음에는 신흥무관학교가 아닌 ‘신흥강습소’로 지었다. 다음 날 찾은 랴오닝(遼寧) 성 선양 시 둥쑨청(東順城) 가도 신흥무관학교의 고난이 담긴 곳이다. 전날 방문한 싼위안푸와 달리 고층빌딩이 즐비한 도심에 자리 잡은 둥쑨청 가에는 범정이 평양에서 데려온 청년들을 중간 전달책에게 인계한 비밀거점이 있었다. 입학생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서울에서 평양, 단둥, 선양을 거쳐 신흥무관학교로 이어지는 대장정을 통과해야만 했다. 한시준 단국대 교수는 “선양 둥쑨청 가는 1910년대에도 상점이 밀집해 있어 혼잡한 틈을 타 일경의 감시를 피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범정의 역할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신흥무관학교에서 160km 떨어진 지린(吉林) 성 판스(磐石) 시 옌퉁산(烟筒山) 진에는 그가 경영한 정미소 터가 있다. 범정은 쌀을 판 돈으로 군자금을 마련해 독립군에 전달했다. 현재는 대로변 안쪽의 상점들 사이에 휑한 공터로 남아있다. 범정의 독립군 활동을 알아챈 일본군이 정미소를 불태웠기 때문이다. 답사단은 당시 정미소를 불태운 일본군 수비대 건물도 찾았다. 초소와 관사, 취조실 등으로 구성된 건물 4개동이 원형을 유지하고 있었다. 현지에서 만난 중국인은 “당시 일본군이 수많은 한국인과 중국인을 여기서 잔인하게 고문하고 죽였다”며 “아직도 주민들 사이에선 ‘사형장’ 혹은 ‘공동묘지’로 불린다”고 전했다. 한국인의 치열한 항일투쟁은 현지에서도 칭송의 대상이다. 답사단이 찾은 메이허커우(梅河口) 시 혁명열사능원(革命烈士陵園)에 전시된 15명의 항일투사 가운데 3명이 한국인이었다. 특히 전시관에는 우당만 특별히 조명한 별도 전시공간이 마련돼 있는데, 서울에 있는 것과 똑같은 우당의 흉상까지 갖춰져 있었다. 만주 독립운동사에 조예가 깊은 배재수 전 해룡진소학교 교장은 “중국 공산당은 1927년 이후에야 동북지역에 진입했고 만주에서 항일투쟁은 한국인들이 먼저 시작했다”고 강조했다. 11일 답사단이 마지막으로 찾은 곳은 랴오닝 성 다롄(大連)시 뤼순(旅順) 감옥. 감옥 안에는 우당과 안중근 의사, 단재 신채호 선생 등의 공적을 기린 전시관이 따로 갖춰져 있었다. 안 의사가 순국한 이곳에서 우당도 허리가 부러지는 모진 고문을 당한 끝에 1932년 향년 65세의 나이로 숨을 거뒀다. 주변의 만류에도 위험을 무릅쓰고 상하이에서 만주로 잠입하다 일경에 체포된 것. 뤼순 감옥에서 참배를 마친 답사단이 버스에 오르자 누군가 힘찬 행진곡풍의 ‘독립군가’를 틀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던 일제강점기, ‘계란으로 바위치기’라고 했던 독립운동에 나선 선각자들의 뜨거운 마음이 가사에 오롯이 담겨 있었다. ‘원수들이 강하다고 겁을 낼 건가/우리들이 약하다고 낙심할 건가/정의의 날쌘 칼이 비끼는 곳에/이길 이 너와 나로다/나가! 나가! 싸우러 나가!’류허·선양·다롄=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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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이 책, 이 저자]“화끈한 한국 사람들의 삶의 방식 매력적… 일본에 알리고 싶어”

    ‘우동, 라면, 돈가스, 소바, 오므라이스….’ 일본에서 건너와 한국인의 입맛을 사로잡은 음식들이다. 과거 한일관계가 극도로 악화돼 도요타자동차에 대한 불매운동이 벌어질 때에도 라면을 끊겠다는 사람은 없었다. 라면은 한국인의 ‘솔(soul) 푸드’가 돼 버렸기 때문이다. 남녀노소, 상하귀천을 막론하고 라면처럼 폭넓은 사랑을 받는 음식도 드물 것이다. 떼려야 뗄 수 없는 한일관계의 숙명을 상징하는 데 라면만 한 매개체도 없는 셈이다. 이 책은 한일 인스턴트 라면의 교류사를 양국 식품업체 창업자를 중심으로 흥미롭게 풀어냈다. 한국에 대한 호기심에 1980년대 후반 무작정 서울로 와서 1년 넘게 체류했다는 저자는 2011년 배우 안성기 평전 ‘청춘이 아니라도 좋다’를 써서 출판계의 호평을 받았다. 현재 일본 교토에서 한국어학원을 운영하고 있는 저자 무라야마 도시오 씨(62)에게 책에 얽힌 사연을 들어봤다. ―한국 라면과 일본 라면은 무엇이 다른가. “일본은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정통 라멘의 종주국이다 보니 생산자나 소비자 모두 인스턴트 라면이 원조의 맛을 얼마나 구현하는지를 중시한다. 반면 한국은 애초부터 수입한 음식이라서 그런지 원조에 구애받지 않고 색다른 시도를 해 볼 여지가 많았다. 이제 한국의 인스턴트 라면은 오리지널을 넘어 한국의 식품으로 거듭났다고 볼 수 있다. 한국 라면을 처음 먹었을 때 일본에서 맛볼 수 없는 자극적인 풍미에 신기해했던 기억이 난다.” ―책에서 일본 묘조식품이 한국 삼양식품에 무상으로 라면수프 제조기술을 제공한 과정이 흥미롭다. “당시 오쿠이 기요스미 묘조식품 사장은 이탈리아 업체로부터 파스타 제조기술을 배우면서 뜻밖의 호의를 받고 감동을 받았다고 한다. 이탈리아 업체는 기술을 무상 제공한 것은 물론 자사(自社)의 회사 로고까지 사용할 수 있도록 해줬다. 특히 오쿠이 사장은 6·25전쟁 때 일본경제가 군수품을 지원하면서 일어선 점도 마음속에 새기고 있었다. 일본경제가 6·25에 빚졌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각고의 노력 끝에 얻어낸 수프 제조법을 생면부지의 전중윤 삼양식품 회장에게 넘겨주는 파격이 가능했다고 본다.” ―한국에 오게 된 계기는…. “나는 일본 ‘전공투(全共鬪·1960∼1970년대 좌파 학생운동 조직)’ 세대의 막내 격에 해당한다. 그래서인지 사회적 대의를 위해 민중들이 적극 참여하는 현장을 직접 체험해보고 싶었다. 마침 1980년대 한국이 그런 곳이었다. 고려대에서 한국어를 배우면서 학생시위를 따라다녔다. ‘10여 년 전 일본도 이랬겠지’ 싶어서 감개무량했다.” ―안성기 평전에 이어 한국 라면 얘기까지 썼는데 한국이 그렇게도 좋은가. “한국 사람들의 삶의 방식이 내겐 참 매력적이다. 일본 사람들한테 이걸 알려주고 싶었다. 한국어 통역 등을 하면서 9년 동안 약 1만 명의 한국인을 만났다. 한국 사람들은 문제가 생기면 화끈하게 야단치지만 시간이 흐르면 싹 잊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대해줘서 좋았다. 겉과 속이 다른 게 일본인들의 속성 아닌가. 나는 화끈한 게 좋더라. 하하.”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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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亡國 책임론’에 유폐된 ‘제국의 꿈’을 許하라

    광복70주년, 대한제국 재조명 활발국립중앙박물관 테마 기획전 열어…덕수궁 석조전 ‘역사관’ 복원 개장근대화 과정 평가는 여전히 논란2일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 테마전시장. ‘대한제국, 근대국가를 꿈꾸다’ 전시회에 발을 막 들여놓은 일부 관람객이 “이게 여기 왜…”라는 반응을 보였다. 안중근 의사가 순국 직전인 1910년 뤼순감옥에서 쓴 단지(斷指) 유묵(遺墨)이다. 낙관 대신 무명지가 잘린 왼손을 먹물로 찍고 그 위에 쓴 ‘대한국인 안중근’이라는 글씨가 선명하다. 대한제국과 안중근. 얼핏 관련이 없어 보이는 조합이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안 의사는 거사 직후 심문에서 “군인이 적장을 죽이는 건 당연하다”며 자신이 ‘대한제국 의군 참모중장’ 신분임을 강조했다. 안 의사를 단순한 테러리스트로 규정하려는 일본 측 시도에 대한 정면 대응이었다. 올해 광복 70주년을 맞아 ‘망국(亡國) 책임론’에 밀려 한동안 폄훼된 대한제국을 재조명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해지고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은 이번 전시에서 대한제국의 근대화 시도를 보여 주는 당시 화폐와 서양식 병원인 대한의원 개원 칙서, 궁내부(宮內府) 현판 등 관련 유물 110점을 선보이고 있다. 근대화에 대한 고종의 의지를 반영해 서양식 건축 양식으로 1910년 건립한 덕수궁 석조전은 ‘대한제국 역사관’으로 복원돼 최근 문을 열었다. 석조전은 일제강점기 미술관으로 바뀌어 내부가 심하게 훼손됐지만, 설계도와 사진 고증을 거쳐 원형을 되찾는 데 성공했다.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는 “임진왜란 당시 의주로 피란을 떠난 선조가 돌아와 덕수궁을 임시 거처로 썼다”며 “고종이 아관파천 직후 경복궁을 버리고 덕수궁으로 환궁한 것은 선조의 고초를 되새기며 항일 의지를 내세운 것”이라고 설명했다. 국립고궁박물관이 5월부터 개최한 ‘황제국의 상징, 환구단과 환구제((원,환)丘祭)’ 전시도 비슷한 맥락으로 해석된다. 하늘에 드리는 제사인 환구제는 유교 문화권에서 오직 황제만 주관할 수 있다는 이유로 1464년 중단됐다. 고종은 중국과 종주국 관계를 끊고 자주독립국으로 일어서겠다는 취지에서 환구단을 400여 년 만에 복원하고 황제 즉위식을 이곳에서 거행했다. 고궁박물관은 환구제에 사용한 대한제국 유물을 이번 전시에서 처음 공개했다. 이와 관련해 국립국악원은 고종의 황제 즉위식을 궁중음악과 무용으로 재현한 ‘대한의 하늘’ 공연을 올 4월 개최했다. 국악원은 ‘고종대례의궤’에 적혀 있는 고유제와 즉위식, 황태자 책봉식 등을 세밀하게 고증했다. 하지만 대한제국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아직도 ‘뜨거운 감자’다. 무엇보다 대한제국 위정자들이 망국의 역사적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주장이 만만치 않다. 한시준 단국대 교수는 “대한제국을 자랑스럽게 여기기보다는 왜 망했는지를 규명하고 반성하는 게 우선”이라고 말했다. 역사학계는 ‘내재적 발전론’과 ‘식민지 근대화론’으로 갈려 대한제국에 대해 상반된 시각을 내놓고 있다. 조선 후기 사회가 자체적인 근대화 동력을 갖췄다고 보는 내재적 발전론은 고종과 대한제국을 긍정적으로 그린다. 2004년 양측이 치열한 지상 논쟁을 벌일 당시 이 명예교수는 “대한제국의 근대화 사업은 일제의 침략으로 미완에 그쳤지만 근대화에 대한 열망을 확인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고 밝혔다. 반면 이영훈 서울대 교수를 비롯한 식민지 근대화론자들은 조선 후기를 소농(小農) 사회로 규정하고, 부농과 빈농의 발생과 같은 근대화 움직임이 전혀 없었다고 주장한다. 이런 관점에서 대한제국의 근대화 노력도 처음부터 명확한 한계를 노정하고 있었다는 것이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15-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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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시 大家 이서구는 몇점?… 정조가 직접 채점한 시 공개

    조선 후기 한시 대가 이서구의 글은 정조에게 몇 점이나 받았을까. 국립중앙박물관은 조선실의 전시품을 교체하면서 정조가 직접 채점한 조선 후기 문신 이서구(1754∼1825)의 답안지(사진)를 공개한다고 3일 밝혔다. 이 답안은 이서구가 규장각 초계문신 시절인 1785년 10월 24일 정조의 명으로 지은 한시다. 제목은 ‘작매예(嚼梅蘂·매화 꽃잎을 씹다)’. 정조는 이서구의 시 위에 붉은 먹으로 ‘차중(次中)’이라고 썼다. 차중은 총 4개 등급 중 두 번째에 해당한다. 한시 대가치고는 비교적 박한 점수를 받은 셈이다. 박물관은 이 밖에 강릉지역 계회에서 만든 금란반월회문(金蘭半月會文) 등 20여 점을 일반에 처음 공개한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15-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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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이 책, 이 저자]주차장에 핀 덩굴 꽃에 눈물 흘린 정서로… 역사에서 나무를 보다

    여기 나무에서 자신의 삶을 찾은 인문학자가 있다. 생활고에 시달리던 시간강사 시절. 어느 날 문득 바라본 오래된 소나무가 넉넉한 위로를 주었다. 그리고 사과나무에서 만유인력을 떠올린 뉴턴처럼 자신의 전공(사학)과 나무를 결합한 인문학 연구를 시도했다. 나무를 통해 인간의 역사를 해석하는 이른바 ‘생태사학’은 이렇게 시작됐다. 이 책의 저자 강판권 계명대 교수(54) 얘기다. 그는 지금까지 줄잡아 15권의 나무 관련 책을 썼다. ‘나무열전’ ‘역사와 문화로 읽는 나무사전’ ‘중국을 낳은 뽕나무’ ‘최치원, 젓나무로 다시 태어나다’ 등 나무를 통해 역사와 문화, 중국 고전을 재해석하는 새로운 시도였다. 회화나무에 대한 새 책을 한창 준비 중이라는 그의 얘기를 들었다. ―나무와 깊은 인연을 맺은 계기가 있나. “중국 청나라 농업사를 전공하면서 옛 농서를 많이 공부했다. 당시 농서에는 나무와 관련된 내용이 많다. 뽕나무 관련 논문을 10편 정도 썼다. 또 어렸을 때 부모님이 농사를 지었는데 땔감으로 나무도 베고 하면서 나무랑 얽힌 추억이 많다.” ―나무를 통해 인간의 역사를 어떻게 볼 수 있나. “지금까지 역사학은 시간 단위로만 역사를 봤다. 그런데 자연 생태를 중심에 놓고 시간을 해석해야만 역사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왜냐면 역사는 시간과 공간을 함께 아우르고 특히 인간은 자연 없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나이테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나무의 삶뿐만 아니라 사회의 변화도 짐작할 수 있다. 강수량이 줄면 나이테의 간격이 좁아지는데 이것은 나무뿐만 아니라 농경사회의 인간들에게도 고통의 시간이었음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일상에서 접하는 나무에 대한 사색이 책에 풍부하던데…. “주차장으로 가는 길에 담쟁이덩굴의 꽃을 보고 너무 아름다워 눈물을 흘린 적이 있다. 그 바람에 약속시간에 늦었다.(웃음) 흔히 사람들은 덩굴 잎만 보는데 꽃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감동하지 않을 수가 없다. 나무들을 보면 키가 크건 작건 혹은 열매를 맺건 못 맺건 간에 조화롭게 숲을 이룬다. 예전에 나는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면서 스스로 괴로웠는데, 나무를 보면서 이런 콤플렉스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나무를 마치 사람 대하듯 하는 것 같다. “지난해 11월 충북 괴산에서 수령 600년 된 왕소나무가 ‘돌아가셨다’. 당시 너무 마음이 아파서 직접 문상을 간 적이 있다. ‘이대로 그냥 보낼 수 없다’는 생각에 왕소나무에 대한 책을 쓰기로 마음먹었다. 책이 나오면 마을분들을 모시고 잔치를 벌일 생각이다.” ―수목원이나 휴양림 중에 특별히 아끼는 곳이 있나. “개인적으로 전북 무주 자연휴양림을 좋아한다. 숙박시설 등이 갖춰진 다른 휴양림과 달리 이곳은 시설물 없이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한 사람 정도만 드나들 만한 좁은 길을 40분 정도 걸으면 수령이 오래된 독일 가문비나무 군락이 펼쳐지는데 장관이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15-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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