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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3월 20일 경남 합천군 대병면 창리 장날. 4000여 명이 만세시위를 벌이자 일본 헌병이 선두에 선 이병추를 총으로 쐈다. 분노한 군중이 주재소와 면사무소를 파괴하고, 서류를 불태웠다. 같은 날 합천읍 장터에서도 일제의 무차별 사격으로 4명이 목숨을 잃었다. 다음 날인 21일 초계면 초계리 장날에는 4000여 명이 만세를 부르다 일본 경찰에 의해 2명이 순국했다. 23일 오후 3시경 삼가읍 광장에서는 시위대 1만3000여 명이 일제를 규탄했다. 마지막 연사 임종봉의 강연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일경이 발포를 시작했고, 총에 맞은 임종봉이 강단에서 굴러떨어졌다. 분노한 군중은 경찰주재소와 우편소로 몰려갔고, 군경의 발포에 13명이 다시 현장에서 목숨을 잃었다. 경남 합천군에서 며칠 새 벌어진 이 사건들은 3·1운동 ‘장터 시위’의 전형을 보여준다. 장터 시위는 수천 명 단위의 대규모로 전개됐다는 특징이 있다. 국사편찬위원회(국편)가 새로 구축한 ‘3·1운동 기록물 데이터베이스’(국편DB)를 통해 당시 3·1운동 확산과 특성을 분석한 결과 지역별로 차이가 드러났다. 이송순 고려대 한국사연구소 교수의 농촌지역 3·1운동 양상 분석에 따르면 △경남지역에서는 장터 시위 △황해도에서는 관청 앞 시위 △경기 충청도 지역에서는 산상(山上)-횃불시위 등 3가지 형태가 많았던 것으로 조사됐다. 이러한 농촌지역의 다양한 독립만세 시위로 당시 한국인의 3분의 1 이상이 3·1운동을 경험했던 것으로 파악됐다. 이 같은 연구 결과는 국편과 동아일보가 27일 서울 세종대로 일민미술관에서 공동 주최하는 3·1운동 100주년 기념 학술회의 ‘백년 만의 귀환: 3·1운동 시위의 기록’에서 발표될 예정이다. 장터 시위가 활발했던 대표적인 지역은 경남이었다. 3·1운동이 일어난 경남지역 86개 면 가운데 장터 시위가 일어난 곳이 43곳으로 절반을 차지했다. 장이 서는 닷새마다 같은 장터에서 시위가 되풀이되기도 했다. 관청 시위는 마을 단위로 모인 만세시위대가 군청이나 면사무소, 경찰주재소, 헌병분견소 앞에서 시위를 벌인 경우다. 시위대가 식민행정과 무단통치 기관을 직접 타깃으로 삼은 시위였다. 무장한 진압병력 앞에서 시위하는 건 큰 위험을 감수해야 했고, 일제는 관청 시위에 ‘내란죄’를 적용하기도 했다. 이러한 시위가 가장 많았던 지역은 황해도였다. 황해도 시위 발생 면(109개 면)의 84.4%가 경찰·헌병 기관이 소재한 곳이었다. 1919년 3월 3일 황해도 수안군 수안면에서는 천도교도들이 헌병 분대로 몰려가 헌병 경찰의 철수와 구속자 석방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헌병의 발포로 9명이 순국했고, 18명이 중상을 입었다. 이 교수는 “황해도는 천도교, 기독교계의 조직적 시위가 많았고, 서울과 평안도의 3·1운동 소식을 접하며 고양된 시위대가 위험을 무릅썼던 것으로 본다”고 설명했다. 밤에 산에 올라가 횃불을 들고 독립만세를 외친 산상 시위는 경기도가 가장 많았고, 충청남북도가 뒤를 이었다. 산상 시위는 시위대가 대중과 접촉하기 어려운 고산준령에서는 벌어지지 않았다. 경기 강화군은 횃불 시위가 9곳에서 일어났다. 3월 18일 강화군청에서 1만∼2만 명이 참여한 대규모 시위가 벌어진 뒤, 4월 1∼11일 곳곳에서 잇달아 횃불이 올랐다. 산 위에서 횃불을 올려 섬과 해안으로 떨어진 시위대 사이의 연대의식을 높인 것이라고 이 교수는 설명했다. 국편DB에서 3·1운동은 시위만 1717건이 벌어진 것으로 나타났다. 역시 DB를 분석한 정병욱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교수는 “1919년 3∼4월 기준으로는 1689건”이라며 “이는 기존 연구의 집계(1180건)보다 509건 늘어난 것”이라고 설명했다. 국편DB는 시위 외에도 시위 등의 계획(335건), 동맹휴학·휴교(60건), 철시(25건), 파업(3건), 기타 활동(327건)을 포함해 모두 2467건의 1919년 3·1운동 사건을 담았다.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는 시위 횟수를 1542건으로 전하고 있다. 3·1운동이 당시 행정구역인 12개 부(오늘날의 시) 전체, 220개 군 가운데 95.9%에 이르는 211개 군에서 벌어졌다는 것도 밝혀졌다. 당시 한국인들의 지역 인식 토대인 조선의 ‘옛 군’ 단위로 봐도 317개 군 가운데 288곳(90.9%)에서 운동이 일어났고, 군청 소재 면(220곳)의 86.8%(191곳), 전체 면(2509곳)의 40.4%(1013곳)에서 운동이 전개됐다. 대체로 평안, 황해, 함경도는 기독교 천도교 등 종교계의 조직적 운동으로 시위가 대규모로 벌어진 경우가 많았고, 한반도 중남부 지역은 3·1운동 소식을 전해 들은 마을 단위의 시위가 많았다고 분석됐다.▼ 日帝, 영덕 시위엔 경찰-헌병-군대 모두 투입해 탄압 ▼ 경찰서가 시위 군중 감당 못하자 軍-헌병 동원해 발포… 8명 순국시위 번지자 4월엔 군대 한국 증파국사편찬위원회의 3·1운동 기록물 데이터베이스(국편DB)를 통한 일제 탄압 분석에서는 헌병과 경찰이 각각 군대와 공조해 탄압한 사례가 적지 않게 발견됐다. 경찰, 헌병, 군대가 모두 함께 만세시위를 탄압하기도 했다. 김명환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연구원은 27일 3·1운동 100주년 기념 학술회의에서 발표할 논문에서 경북 영덕군 영해면의 사례를 소개했다. 영해면에서는 1919년 3월 18일부터 만세운동이 전개됐다. 장터에 모인 군중 약 3000명은 만세를 부르며 행진한 뒤 경찰주재소로 몰려가 운동에 동참할 것을 요구했다. 일본인 순사부장이 태극기를 빼앗으려 들자 분노한 군중은 주재소를 파괴했다. 그러자 영덕경찰서가 나섰다. 서장이 순사 4명과 함께 출동했으나 오히려 시위대에 포위돼 무장 해제됐다. 이번에는 군과 헌병이 무력 탄압에 나선다. 도장관(도지사)의 요청으로 18일 포항 헌병 분대 7명이 출동했다. 도장관은 대구에 주둔한 보병 80연대에도 병력 파견을 요청했다. 80연대 장교 등 21명이 자동차편으로 포항에 왔고, 다시 배를 타고 영덕에 도착했다. 이 병력이 영해에 도착한 건 19일 오후 4시. 이들은 헌병과 함께 군중을 향해 발포했다. 경찰, 헌병, 군대의 시위 탄압 과정에서 8명이 순국하고, 16명이 다쳤으며, 170명이 재판에 회부됐다. 김 연구원은 “헌병이나 경찰 말단 경찰관서는 단독으로 수천 명의 시위대를 감당하지 못했을 것”이라며 “이들이 군대와 협력해 만세운동을 탄압한 경우가 많았다”고 분석했다. 일제는 조선 주둔 일본군을 3월 중순부터 분산 배치해 병력 파견 지역을 넓혔지만 3·1운동은 더욱 불타올랐다. 일제는 병력이 부족하다고 보고 4월 5일 보병 6개 대대를 한국에 증파하기도 했다. 이들의 배치는 4월 22일 완료됐다. 일본군의 탄압 실태를 분석한 김상규 고려대 한국사연구소 연구원은 조선 주둔 일본군이 초반에는 주로 각 지역에 파견돼 경계를 하며 ‘위력 시위’를 벌였고, 후반기 본격적으로 강경 탄압에 앞장섰다고 봤다. 김 연구원은 국편DB를 활용해 군대에 의한 사상자 수가 일제 보고문서(470명)보다 훨씬 많다(1057명)는 걸 밝히기도 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최후의 한 사람까지, 최후의 일각까지 민족의 정당한 의사를 쾌히 발표하라. 모든 행동은 가장 질서를 존중하야, 우리의 주장과 태도를 광명정대하게 밝혀라.”(기미독립선언서 중에서)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 33인이 발표한 ‘기미독립선언서’는 질서 있는 만세시위를 통해 정정당당하게 독립을 주장할 것을 호소했다. 그러나 일제는 이러한 평화로운 시위 군중을 향해 3·1운동 첫날부터 군대를 투입해 총을 발포하여 피를 흘리게 했고, 착검한 소총으로 찌르고 개머리판이나 곤봉으로 구타하는 등 잔인하게 탄압했다. 당시 끔찍했던 상황은 평양의 3·1운동 시위 상황을 기록한 선교사 보고서에 기록됐고, 일제 문서에서도 확인됐다. “(3월 1일) 군중은 저녁에 다시 나가 행진했는데 군인들이 총을 쐈고 3명이 총에 맞았다.” “교사 한 명이 총검에 심하게 찔렸고, 여러 학생들이 총검에 찔리고 총대로 맞고 몽둥이에 맞았다.” “(3월 3일) 군인들이 착검한 채 달려들었고…소총의 개머리판으로 구타하고 사람을 차고 짓밟고 때려 쓰러뜨렸다.” 국사편찬위원회 구축 ‘3·1운동 기록물 데이터베이스’(국편DB)를 분석한 정병욱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교수의 논문에 따르면 평양 서쪽 강서군 반석면 사천에서는 3월 4일 헌병이 시위대에 발포해 58명(임정 자료·일제 집계는 12명)이 목숨을 잃었다. 동북쪽 맹산군 맹산면에서도 10일 일제 집계로 시위대 54명이 사망했다. 국편DB를 분석한 윤해동 한양대 교수는 “만세시위에 굉장히 당혹한 일제는 시위 초기부터 잔혹한 수단을 동원했다”며 “발포와 같은 강경 진압이 격한 시위로 이어졌을 것”이라고 말했다. 탄압으로 시위의 격렬함이 줄어들었는데도 일제의 발포는 오히려 늘어났다. 1919년 4월 4일 이후 시위대가 헌병 주재소 등을 파괴하거나 군경을 처단하는 일은 거의 사라졌다. 그러나 일제의 발포 건수는 4월 5∼8일 오히려 큰 폭으로 증가하고 22일까지도 단속적으로 이어진다. 이처럼 시위의 양상과 관련 없이 증가하는 발포 건수는 3·1운동을 압살하려는 군경의 진압정책을 그대로 보여준다는 설명이다. 이 같은 분석은 국편DB가 현존하는 각종 사료를 거의 망라해 종합했기에 가능했다. 첫날 평양 시위의 일제 발포도 기존 일제의 ‘조선소요사건관계서류(朝鮮騷擾事件關係書類)’ 일일 보고 등에는 첫 발포가 3월 3일 벌어진 것으로 나타나 단정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국편DB를 통해 일제의 ‘조선소요사건일별조표’와 선교사 보고 등 여러 사료를 교차 검증할 수 있게 되면서 사실을 확정할 수 있게 됐다고 윤 교수는 설명했다. 국편DB에서는 일제가 도검(36건)이나 갈고리·곤봉(9건), 기타 무기를 사용해 진압한 사건도 모두 46건이 발견됐다. 일제가 축소 보고한 결과여서 실제론 이보다 훨씬 많을 것으로 보인다. 3월 1일∼4월 22일 국내 만세시위 1552건 가운데 시위대가 군경에 맞서 격렬하게 저항했던 사건은 약 132건이 일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윤 교수는 “양상을 보면 군경이 총을 쏘자 시위대가 산에서 나무를 꺾어 몽둥이를 만들거나 돌을 던지는 식이지, 처음부터 낫이나 죽창 등 살상용 무기를 준비한 공세적 시위는 거의 발견할 수 없다”고 밝혔다. 이양희 충남대 충청문화연구소 연구원의 국편DB 분석에서는 일제의 탄압으로 최소한 5828명의 한국인 사상자가 발생한 것으로 나타났다. 최소한으로 잡아도 사망 1510명에 부상 2614명이고, 사망인지 부상인지 분명하지 않은 피해자도 1704명이다. 이는 일제 조선헌병대사령관 보고(1920년 1월)보다 3800여 명이 더 많은 수치다. 박은식의 ‘독립운동지혈사’는 3·1운동 사망자만 7509명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연구원은 “일제는 한국인 피해를 축소 보고했고, 이번 분석에도 ‘수명’ ‘수백 명’ ‘다수’ ‘소수’ ‘약간’ ‘있음’ 등으로 기록돼 수치 산정이 어려운 자료는 제외했기에 실제 피해 규모는 훨씬 더 크다”고 말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3월 1일) 총에 맞아 부상한 사람이 5명이나 병원에서 숨졌다. 당국의 명령으로 사인이 총상이라고 보고할 수 없었다고 한다.”(평양 장로교 선교사 기록) ‘3월 1일 발포.’(일제 경무총감부 조선소요사건일별조표·朝鮮騷擾事件日別調表) 일제가 1919년 3·1운동 첫날부터 평화적인 만세시위 군중에게 총을 발포하며 잔혹하게 탄압한 것으로 밝혀졌다. 국사편찬위원회가 구축한 ‘3·1운동 기록물 데이터베이스’(국편DB)를 통해 당시 선교사 보고와 일제 경무총감부 자료 등을 종합한 결과다. 국사편찬위가 지난 3년간 구축한 ‘국편DB’를 통해 3·1운동 만세시위의 전체 윤곽이 100년 만에 드러나고 있다. 이 DB는 일제 자료와 각종 3·1운동 사료를 망라하고 지리정보시스템(GIS)과 연동해 당시 상황을 종합적으로 연구할 수 있도록 만든 것이다. 국편DB에 따르면 3·1운동 당시 일제가 시위대에 발포한 사건이 무려 234건으로 기존 연구(185건)보다 49건이 더 많이 확인됐다. 특히 1919년 3월 1∼26일에만 발포가 62건이나 자행됐다. 윤해동 한양대 비교역사문화연구소 교수는 “일제가 만세시위 군중에게 초기부터 발포라는 강력한 진압 방식을 사용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3·1운동이 당시 행정구역인 232개 부·군 가운데 96.1%에 이르는 223개 지역에서 일어났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이송순 고려대 한국사연구소 교수는 “분석 결과 3·1운동은 조선인 중 3분의 1 이상이 직접 경험한 전국적, 전 민족적 독립운동”이라고 말했다. 시위가 연속해 일어난 기간도 추가로 확인됐다. 기존에는 3월 1일∼4월 16일 매일 시위가 이어졌다고 파악됐으나 이번 국편DB 분석에서 4월 29일까지도 시위가 연속된 것으로 드러났다. 또 30회 이상 시위가 일어난 날도 24일로 기존 연구(15일)보다 9일이 더 많은 것으로 확인됐다. 이번 연구는 국사편찬위와 동아일보가 27일 서울 종로구 세종대로 일민미술관에서 공동 주최하는 3·1운동 100주년 기념 학술회의에서 발표될 예정이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국사편찬위원회가 구축하고 있는 ‘3·1운동 기록물 데이터베이스(DB)’는 100년 만에 마련되는 3·1운동 연구의 ‘밑그림’이라고 할 수 있다. 3·1운동 연구 성과가 그동안 적지 않게 축적됐지만 사료가 방대하고 각종 사료집마다 누락과 중복이 있어 개별 연구자들이 그 전모를 그리는 건 여전히 쉽지 않다. 국편 기록물 DB는 ‘소요사건서류’(7책 1777건), ‘도장관보고철’(6책 767건), 일제 외무성 기록 ‘불령단관계잡건’ 중 990여 건, 경성지법 검사국 문서 9670여 건, 판결문 2174건, 선교사 문건 670건을 망라한 것으로 현재 3·1운동과 관련해 수집할 수 있는 기초 자료는 거의 모두 포괄하고 있다. 국편은 3·1운동에서 벌어진 개별 사건의 중복을 하나하나 걸러내면서 △시위 △철시 △파업 △동맹휴학(휴교 포함) △(시위)계획 △기타 활동 등으로 분류했다. 또 지리정보시스템(GIS)과 연동해 개별 사건을 당대 및 오늘날 지도에 나타내고, 근거 사료와 연결해 보여줄 예정이다. 27일 서울 종로구 세종대로 일민미술관에서 동아일보가 국편과 공동으로 주최하는 학술회의 ‘백년 만의 귀환: 3·1운동 시위의 기록’에서는 이 DB를 활용한 논문 10편을 소개한다. 학술회의 제1부에서는 ‘3·1운동의 시공간’을 분석한다. ‘3·1운동 DB로 추정한 3·1운동의 규모’(류준범 국편 연구편찬정보화실장)와 ‘3·1운동의 추이 분석’(정병욱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교수), ‘도시 지역에서 3·1운동의 전개와 특징’(염복규 서울시립대 국사학과 교수), ‘농촌 지역에서 3·1운동의 확산과 공간적 특성’(이송순 고려대 한국사연구소 교수) 등이 발표될 예정이다. 제2부는 3·1운동의 주체와 시위 양상에 초점을 맞춘다. ‘3·1운동 데이터베이스와 3·1운동의 주체’(이정은 대한민국역사문화원 원장)와 ‘3·1운동에서의 폭력과 비폭력’(윤해동 한양대 비교역사문화연구소 교수), ‘3·1운동의 미디어와 상징체계’(이기훈 연세대 사학과 교수)를 발표한다. 제3부는 일제의 탄압과 조선인의 희생을 집중 조명한다. ‘조선총독부의 3·1운동 탄압책과 피해 현황’(이양희 충남대 충청문화연구소 연구원)과 ‘3·1운동 전후 조선 주둔 일본군의 배치와 탄압실태’(김상규 고려대 한국사연구소 연구원), ‘일제 헌병·경찰의 3·1운동 탄압’(김명환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연구원) 등이다. 제4부 종합토론은 박찬승 한양대 사학과 교수가 사회를 맡는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기독교의 ‘삼위일체’ 교리는 여러 세기에 걸친 논쟁으로 확립된 것이고, 신약에는 직접 나오지 않는다고 한다. 신약성서를 경전이라기보다 역사적인 문헌으로 바라보고 분석한 책이다. 미국 예일대 명예교수인 저자가 명강의로 꼽힌 자신의 ‘신약 개론’ 강좌를 정리했다. 죽어서 몸은 지상에 있어도 영혼은 예수님이 계신 하늘나라로 간다는 영원불멸의 관념도 성서가 직접 밝힌 내용은 아니라고 저자는 말한다. 신약은 ‘부활’을 가르칠 뿐 영혼의 영원불멸은 플라톤주의의 영향을 받은 관념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기독교 정전(正典)에 속하는 문서뿐 아니라 도마복음 등 외경(外經)으로 분류되는 당대 문헌도 비중 있게 다룬다. 이를 통해 초기 기독교의 다양성을 드러낸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향후 남북 전문가로 공동 학술답사단을 구성해 3·1운동 사적지를 포함한 독립운동 사적을 답사하고 그 결과를 책자로 펴내야 한다.” 박걸순 충북대 교수는 서울 중구 프레지던트호텔에서 13일 열린 ‘북한 3·1운동 사적지 조사 성과 활용방안과 남북 학술교류’ 포럼에서 이렇게 밝혔다.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가 개최한 이날 포럼은 독립기념관이 올해 3·1운동 100주년을 앞두고 2016년 착수한 북한 3·1운동 사적지 문헌 조사 결과를 정리하는 자리였다. 조사에서 북한의 3·1운동 사적지로 거리(470곳)와 건물(244곳), 가옥(77곳), 산야(17곳) 등 812건을 확인했다. 박 교수는 이 밖에도 남북 공동의 독립운동사 학술회의 개최와 총서 간행, 사료 발굴 등 교류 방안을 내놨다. 이준식 독립기념관장은 “북한 독립운동 사적 연구가 더욱 활발해져 평화공존과 통일의 초석이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지구적 불평등을 설명할 때 세계 인구의 극소수가 소유한 압도적 부(富)와 하위 다수의 빈곤을 대조하며 그 심각함을 보여주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아일랜드 트리니티칼리지 사회학과 명예교수인 저자는 소득과 부의 불평등에만 집중하는 건 협소한 관점이라고 봤다. 건강과 교육, 정치·사회 참여도의 불평등을 비롯해 각 나라의 역사와 문화적 상황에 따라 불평등의 유형은 사뭇 다양하다. 그래서 불평등은 재정 투입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 저자는 “인종이나 성, 민족성에 대한 문화적 정치적 편견에 바탕을 둔 불평등은 법, 교육, 문화의 통합적 개선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지역, 성별, 세대 등 여러 면에서 갈등이 첨예한 한국 사회도 귀담아들을 만하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금번 워싱턴에서 열리는 태평양회의를 기회 삼아 조선 독립의 필요와 우리의 요구가 간절하다는 의사를 표시할 계획으로 결의문과 선언서를 썼다. … 이는 조선 민족뿐 아니라 동양평화와 세계평화, 정의 인도를 위하여 극히 긴절(緊切)한 일로 생각한다.”(동아일보 1922년 1월 18일자 3면 머리기사) 1922년 1월 12일 일본 도쿄지방재판소 형사 제2호 법정. 조선의 독립을 주장하는 재일 한인 유학생들은 법정에서도 당당했다. 1919년 2·8독립선언에 이어 1921년 11월 5일 도쿄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2차 독립선언을 거행한 이들이었다. 동아일보는 당시 방청석이 한인 유학생과 신문기자가 어깨를 부비고 들어서서 긴장한 기운이 넘쳤다고 보도했다. 중형을 구형한 검사도 논고에서 “우선 망국청년으로 그에 대한 번민을 가진다는 것은 동정하는 바이며…”라고 해 일순 설득당하는 듯했다. 2차 독립선언서를 만들고 배포한 주역인 이동제 김송은 전민철 이정윤 등은 금고 9개월을 선고받았다. 1919년 도쿄에서 조국 독립을 외쳤던 2·8독립선언. 8일 100주년을 맞는 이 선언은 한 번으로 그치지 않았다. 재일 한인 유학생들은 1921년 11월 ‘2차 독립선언’과 3·1운동 기념집회 등을 통해 끈질기게 투쟁을 이어나갔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또한 동아일보는 이를 지속적으로 보도했다. 김인덕 청암대 교수는 “도쿄 유학생을 비롯한 재일 조선인들은 광복을 맞을 때까지 거의 해마다 3·1독립선언 기념 시위와 집회를 벌였다”고 말했다.▼ 청년들이 싹틔운 일본내 항일투쟁, 광복의 날까지 이어가 ▼在日유학생들 끈질긴 투쟁 1919년 2·8독립선언에 비해 일본 도쿄 유학생들의 1921년 2차 독립선언은 오늘날 기억하는 이가 드물다. 동아일보가 1922년 1월 3차례에 걸쳐 전한 공판 소식에서 그 전모를 어느 정도 확인할 수 있다. “작년 11월 5일에 동경신전구서소천정(東京神田區西小川町)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개최된 학우회 석상에서 제2회 조선독립선언을 결의하고 인쇄물을 배포한 일로 동경감옥의 쓸쓸한 철창에서 과세(過歲)를 하게 되었던….” 동아일보 기사에 따르면 2차 독립선언의 주역들은 독립선언서와 결의문을 일문과 영문으로 번역해 각 대사관과 공사관, 신문사에 배포했다. 그뿐 아니라 유학생 독립운동 동지 방원성을 중국 상하이로 보내, 임시정부와 연계해 독립선언을 워싱턴 회의에 제출하려 했다. 조선청년독립단 공동대표 자격으로 임정에 도착한 방원성은 국민대표회의 개최를 촉구하고 1923년 이 회의에서 교육위원으로 선임되기도 했다. 김인덕 청암대 교수는 “이들의 선언서는 ‘조선의 독립이 곧 극동, 세계평화의 원동력’임을 확인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재일 한인들의 독립 투쟁은 학우회를 중심으로 지속됐다. 김 교수에 따르면 재일 유학생들은 1920년 2·8독립선언 1주년 기념축하문을 작성해 임정과 국내로 보내려 시도했다. 3·1운동 1주년을 맞은 그해 3월 1일에는 다시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 모였으나 일본 경찰에 의해 해산됐다. 군중 70여 명은 도쿄 히비야(日比谷·일비곡)공원에 모여 ‘대한국 만세’를 높이 외쳤다. 집회는 1921년에도 이어졌다. 본보는 “조선유학생 약 100명은 일비곡 공원에 집합하여 독립선언의 연설을 하였음으로 경관대는…76명의 학생을 검거하였는데 계속 검거 중이라더라”(1921년 3월 3일자)고 전했다. 1924년 2월 28일 ‘3·1운동 기념식’이라는 연설회에는 학우회와 조선노동동맹회, 북성회 등의 주최로 120명이 참가했다. 1926년 학우회 주최 기념식에는 250명이 참석했고 도쿄 시내와 공원에서 시위를 벌였다. 1927년 이후에는 사회주의 성향의 단체가 3·1 기념 시위와 투쟁을 이어갔다. 김 교수는 “일본 정부는 특히 조선인 유학생을 ‘민족해방운동의 저수지’라고 불렀다”고 말했다. 윤소영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학술연구부장은 “2·8독립운동은 3·1운동의 기폭제로 조명돼 왔지만 사상적 배경이나 운동의 성숙도 면에서 볼 때 청년들은 새로운 시대의 싹을 틔운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동아일보도 민족정신과 독립정신을 고취하는 유학생들의 국내 활동을 전폭 지원했다. 학우회가 1920년 7월 연 전국 순회강연회를 후원하기도 했다. 이 강연회에는 2·8독립선언으로 옥고를 치른 김도연 윤창석 이종근 등 유학생 18명이 연사로 참가했다. 동아일보는 2·8선언의 ‘설계자’ 가운데 한 사람인 주간 장덕수를 부산에 보냈고, 강연단 활동을 일일이 취재해 보도했다. 연사들이 전국 약 10곳을 거친 뒤 서울 단성사에서 18일 연 강연회에는 3000명이 넘는 인파가 운집했다. 이날 강연회는 시작 1시간 반이 지나 김도연이 ‘조선 산업의 장래에 대하여’라는 주제로 연설하던 중 일본 경찰이 돌연 중지와 해산을 명령했다. 보안법 제2조 “불온의 언사를 용(用)하여 치안을 문란함이 파다”했다는 이유였다. 이를 빌미로 19일 이후 강연은 모두 중지되고 강연단은 강제 해산됐다. 동아일보는 7월 22일 1면 사설로 “무차별이니 일시동인(一視同仁)이니 선정덕정(善政德政)이니 하는 사(蛇·뱀)의 설(舌·혀)을 농(弄)하야 조선인을 기만치 말라”고 조선총독부를 맹렬히 비판했다. 이 날짜 신문은 총독부에 의해 발매금지처분을 당했다. 한편 8일 일본 도쿄 시내 재일본한국 YMCA 건물에서 2·8독립선언 100주년 기념행사가 열린다. 재일본한국 YMCA가 주최하고 국가보훈처가 후원하는 이 행사에서는 회관 건물 10층 협소한 곳에 자리했던 2·8독립선언기념관을 2층으로 확장 이전하는 기념식과 함께 선언의 의미를 짚어보는 한일 전문가들의 학술대회도 열린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안영배 논설위원}

‘어디를 둘러봐도 진실인지 아니할사, 속이고 얼러맞춰 얼쯤얼렁 하는 일들, 어깨를 부비는 위에 나라가 떠 있도다 / 남산과 북악산을 물끄러미 쳐다볼사, 거짓과 겉발림이 하도 많은 세상이매, 저들의 우뚝한 것은 정말인가 하웨라 / 아무리 그렇게야 엉터리 세상이리, 아마도 지나치게 잘못 봄이 아닐까 해, 감았다 떴다 하면서 눈을 의심하여라.’ 최남선의 절절한 애국혼이 넘치는 글이다. 국권피탈 뒤 일제는 조선인의 모든 정치 사회단체 활동을 금지하고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를 박탈한다. 신문화운동이 활발히 일어나던 1910년대는 민족운동사의 암흑기이며 진로 모색기였다. 일제가 문화말살정책을 펼치며 조선 고서들을 마구 앗아가자 박은식의 지도를 받은 최남선을 비롯한 민족운동가들은 한민족의 슬기가 묻혀 후손들이 재능의 원천을 잃어버릴 것을 걱정했다. 1910년 10월. 최남선은 살림집을 서울 삼각동 굽은다리로 옮겨 그 앞채 2층에 ‘조선광문회(朝鮮光文會)’를 발족시킨다. 조선광문회는 신문화운동의 요람이자 조선 최고지식인들의 학문적 근거지, 민족문화운동가들의 ‘양산박’이었다. 주시경 김두봉 이광수 박종화 홍명희 안재홍 정인보 한용운 고희동 안창호 이승훈 김성수 송진우 등 선각들이 속속 모여들어 조선팔도 애국운동과 세계정세를 탐구하며 계획했다. 조선광문회 애국지사들은 민족의 독립의지를 일깨우기 위해 고심을 거듭했으며, 일본 유학생 이광수 김도연 박관수 등의 도쿄 2·8독립선언에 이어 최남선은 김성수 최린 등과 3·1독립운동을 추진해 나아갔다. 조선광문회는 조선의 사기(史記)ㆍ지지(地誌) 등 민족학술 가치가 막중한 부문 저술을 엄밀히 골라내 발간했다. 조선광문회의 최고 업적을 꼽자면, 단연 세종대왕도 이루어내지 못한 우리나라 최초 한글큰사전 편찬이다. 최남선은 주시경과 한글운동을 일으켜 이광수 임규 김두봉 한정 권덕규 등과 함께 1911년부터 1916년에 걸쳐 한국 최초 국어사전인 ‘말모이’와 ‘조선어자전’을 만들어 나아갔다. 이로써 일제가 어용학자들을 동원해 편찬하는 ‘조선어사전’에 맞서 우리말을 지켜냈으며, 그 뒤 여러 한글사전 편찬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또한 1950년대 이전 한자사전 가운데 가장 우수한 ‘신자전(新字典)’을 1915년에 출간했다. ‘말모이’는 주시경이 편찬 책임자가 되어 어휘 수집을 시작했고, 김두봉과 김여제가 조수로 도왔다. 이후 47년간의 역정을 거쳐 1957년 을유문화사에서 총 6권으로 완간된다. 1947년 10월 9일 을유문화사는 ‘말모이=큰사전’ 첫 권을 펴냈다. 최근 영화 ‘말모이’로 상영되고 있는 이 사전의 편찬과정은 우리 민족과 문화의 수난사나 다름없었다. 1942년 ‘조선어학회사건’도 이 과정에서 일어났고, 옥중고혼으로 사라진 편찬위원들은 ‘말모이’ 원고를 자신의 목숨보다 소중히 여겼다. 조선어학회사건 법정증거물로 압수된 원고가 경찰서와 형무소로 옮겨지면서 행방이 묘연해졌다. 그러다가 1945년 9월 뜻밖에 사전 원고 보따리가 서울역 운송창고에서 발견되었으니, 그 기쁨을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1947년 어느 봄 날, 이극로와 김병제가 을유문화사 편집실에 들어섰다. 두 사람은 ‘조선어학회사건’과 ‘큰사전’ 원고에 얽힌 곡절을 들려주면서 출판을 제의했으나 물자난이 극심한 때여서 을유문화사 측은 두 번씩이나 거절할 수 밖에 없었다. 세 번째는 이극로 김병제가 이희승과 함께 찾아왔다.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이극로는 가져온 원고 뭉치로 책상을 내리쳤다. “누구 하나 ‘큰사전’에 관심조차 보이지 않으니 우리나라가 해방된 의의가 어디 있단 말이오? 그래 이 원고를 가지고 일본놈들한테 찾아가서 사정해야 옳단 말이오?” 아호가 ‘고루’ 또는 ‘물불’인 이극로는 조선어학회 ‘큰사전’ 편찬위원 간사장이었다. 물불의 노호일성은 곧 우리 문화계 전체의 노성(怒聲)이며 질타였다. 한글학자들의 뜨거운 열정에 감동한 을유문화사는 이때부터 모든 능력과 열의를 ‘큰사전’ 간행에 쏟아부었다. 그 뒤 조선어학회는 ‘한글학회’로 이름을 바꾸고 ‘큰사전’은 1957년 10월 9일에 이르러 전6권이 모두 간행됐다. B5판 양장본 3804쪽, 올림말 16만 4125개에 이르는 방대한 저작이다. ‘말모이 큰사전’의 의의는 당시 동아일보 사설에 담겨 있다. “이제 새로 출판된 우리말 ‘큰사전’을 보건대, 그 인쇄 제본 장정 등에서 진선지미할 뿐만 아니라, 그 내용에 있어서도 명실공히 우리나라 최대 저작이요 인쇄문화의 최고봉일 줄로 안다. …우리의 학술문화 가운데 어느 것 하나 우리 손으로 창조된 것이 없는데 ‘큰사전’만은 본질적으로 우리 것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고정일·동서문화사 발행인}

“무단 결석자 및 정당한 이유 없이 출석하지 않는 자는 퇴학에 처한다.” 1919년 3·1운동 당시 조선총독부 학무국이 각 학교에 내린 처분 방침 가운데 하나다. 결석한 학생은 퇴학시키라는 지시다. 그동안 3·1운동 탄압 연구가 헌병경찰과 군대 등에 주로 초점이 맞춰졌던 가운데 조선총독부가 만세시위에 참여한 학생들을 학교에서는 어떻게 탄압했는지에 주목한 연구가 나왔다. 최우석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연구원은 29일 충남 천안시 독립기념관에서 열린 연구발표회에서 ‘3·1운동에 대한 학무국과 학교의 대응’을 발표했다. 최 연구원은 일제강점기 ‘조선 소요사건 공로자 조사철’ 등의 자료를 검토해 시위를 구조적으로 탄압했던 시도를 밝혔다. 이 자료는 조선총독부가 3·1운동과 이후 학생운동 탄압에 앞장선 학무국원, 관립학교 교원을 포상하고자 만들었다. 총독부가 각 학교에 내린 처분 방침은 강경했다. 총독부는 유죄 판결 확정 학생은 퇴학, 구류 중인 학생은 정학시키라는 방침뿐 아니라, 등교하지 않은 학생도 졸업·진급 불가 및 퇴학시키라는 지시를 내렸다. 최 연구원은 “특히 1919년 9월 이후에는 처벌 강도를 더욱 강화할 것을 지시했다”고 설명했다. 만세시위에 참가한 교원 역시 징계에 회부하거나 고소·고발 시 우선 휴직시키도록 지시했다. 유죄가 확정되면 해직하고 학무국과 각 도장관을 통해 명단을 공유하는 한편 향후 교직원 채용에서 배제하도록 했다. 최 연구원은 이 같은 조치가 관·공립학교에서 우선적으로 집행됐을 것으로 봤다. 관립학교 교장, 각 학급 주임, 기숙사 사감 등은 3·1운동이 일어나기 직전에도 독립운동에 나서는 걸 막고자 학생을 설득하는 한편 일상을 감시했다. 학생들이 만세시위에 쏟아져 나가자 직원을 시위 현장에 파견하거나 주도 학생을 경찰에 이첩하기도 했다. 학생들이 동맹휴학에 돌입한 뒤 관립학교들은 휴교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 기간에도 시위 참여를 막으려는 회유는 계속됐다. 교원들은 집에 돌아간 학생들을 방문해 등교를 설득했다. 학부형을 통해 학생을 압박하기도 했다. 졸업이 임박한 학생들이 졸업시험과 졸업식을 거부하자 한 명씩 회유하기도 했다. 경성고등보통학교에서는 1919년 3월 말부터 학생을 한 명씩 불러 만세시위 참여 여부를 조사한 뒤 졸업증서를 줬다. 관립학교들은 1919년 3월 상순부터 짧게는 며칠, 길게는 80여 일이 지난 뒤 수업을 재개했다. 6월 이후 경성의학전문학교와 평양고등보통학교 등은 동맹휴학과 만세시위를 막기 위해 학생들의 임시 기숙사 생활을 강요하고 통제와 감시를 강화하기도 했다. 탄압은 사립학교로도 확대됐다. 총독부는 1920년 3·1운동 1주년 만세시위 당시 배재학당, 숭덕학교, 숭현여학교 등 기독교계 학교가 당국에 협력하지 않는다며 외국인 교장 3명의 취직 인가를 취소했다. 최 연구원은 “3·1운동 뒤 1920년대를 ‘동맹휴학의 시대’라 부를 정도로 학생들은 수많은 동맹휴학을 벌였다”며 “조선총독부의 학생운동 통제, 탄압의 원형도 3·1운동 당시 형성됐다”고 밝혔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우리 역사 전 시기를 아울러 대외관계와 외교사를 통사적으로 정리한 한국외교사 연구서가 발간됐다. 동북아역사재단(이사장 김도형)은 “‘한국의 대외관계와 외교사’ 시리즈 가운데 고려, 조선, 근대편 등 3권을 최근 펴냈다”고 28일 밝혔다. 시리즈는 전 4권으로 고대편은 올해 3월 발간할 예정이다. 이번 시리즈는 2015년부터 한국사와 일본사, 중국사, 국제정치학 등 전문가 50여 명이 집필했다. 동북아재단은 “한국 대외관계를 국제정치의 종속변수처럼 보아 온 주변국의 역사 왜곡에 대응해 우리의 시각과 주체적 면모를 서술했다”며 “관련 연구의 활성화와 함께 정책결정자들이 한국외교의 흐름을 체계적으로 이해하는 길잡이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한다”고 밝혔다. 2만4000∼3만2000원.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구석기 시대 인류는 부상을 입거나 출산 중 출혈로 사망하는 일이 잦았기에 피가 나면 재빨리 응고해 구멍을 막을 수 있도록 진화했다. 혈액응고 단백질 활동이 활발해지는 유전자 돌연변이가 인류에 널리 확산된 건 출혈을 피하는 게 얼마나 중요했는지 보여 준다. 그러나 피가 잘 굳도록 진화한 현대인은 뇌중풍(뇌졸중)을 걱정해야 한다. 미국에서는 출혈로 인한 사망자를 모두 더한 것보다 혈전(혈관 속 피가 굳은 덩어리)으로 인한 질병 사망자가 4배 이상 많다. 먹을 수 있을 때 에너지를 많이 축적하도록 진화한 건 비만의 원인이 됐고, 탈수에 대비해 수분과 나트륨을 몸속에 오래 보존할 수 있는 능력은 고혈압의 위험을 높였다. 미국의 저명 심장병 전문의인 저자가 과거의 ‘착한 유전자’가 각종 질병을 유발하는 까닭과 대처법을 설명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사막의 오아시스랄까, 민주의 유토피아랄까. 깊고 먼 북만의 오운(烏雲)에는 우리가 상상도 못하였던 이상적 동포촌락이 건설되어 현재 65호 390여 명 동포가 바야흐로 단꿈에 잠겨 아름다운 장래를 엿보고 있다 한다. … 헤매고 있는 내외지의 불쌍한 동포들은 다 같이 와서 살기를 희망한다고 한다.”(동아일보 1933년 11월 10일자 5면) 일제강점기 본보가 ‘동포의 손 기다리는 무제한의 적농지(適農地·농사에 적합한 땅)’라고 소개하며 이주를 장려했던 북만주 독립운동기지 ‘배달촌’의 정확한 위치와 현재 모습이 처음으로 밝혀졌다. 마을이 세워진 지 100여 년 만이다. 독립기념관 독립운동사연구소는 학술조사단으로는 광복 이후 처음으로 지난해 9월 배달촌 현지를 방문해 조사했다고 23일 밝혔다. 현지 조사를 벌인 박민영 독립운동사연구소 수석연구위원은 “배달촌은 이상설(1870∼1917)과 조성환(1875∼1948) 등이 독립운동을 벌이고자 조성한 한인촌”이라며 “하얼빈에서도 동북방으로 700km나 떨어진 중-러 국경 헤이룽강변 오지에 있어서 그 중요성에 비해 덜 조명 받은 대표적 독립운동 근거지”라고 설명했다. 박 연구위원에 따르면 배달촌은 북간도 용정과 서간도 삼원포, 북만주 밀산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독립운동 기지였다. 만주, 연해주 한인마을 가운데 가장 북쪽에 있던 마을이기도 했다. 현재 행정구역으로는 중국 헤이룽장(黑龍江)성 자인(嘉蔭)현 우윈(烏雲)진 일대에 있었다. 배달촌은 첫 건설 이후 2번이나 마을을 옮겨야 했다. 당시 동아일보 기사에 따르면 동포 100여 호가 1916년 3월경 오랍간(烏拉幹·올라까하)으로 이주해 황무지를 논으로 일구고 학교를 세우며 시작했다. 1920년 대한독립군 총재대리 김혁(金爀)이 1921년 임정 국무총리 신규식에게 보낸 편지에선 “한인농호 이백여가(韓人農戶 二百餘家)인데 사관학교를 설립하여 졸업사관이 200여 명”이라고 했다. 무엇보다 이곳은 연해주에서 활동한 독립군단 혈성단의 근거지였다. 혈성단장 김국초(金國礎)는 1920년 11월 28일 소재지를 ‘오운현 배달툰(倍達屯)’이라 명기했다. 안타깝게도 이 당시 마을의 오늘날 위치는 이번 조사에서도 확인되지 않았다. 배달촌은 1921년 1월 마적 떼의 습격을 받은 뒤 오운(烏雲)현으로 옮겨 다시 건설됐다. ‘배달촌’이라고 명명된 건 이즈음. 1922년 배달촌에 1년 가까이 머무른 이우석은 “마적은 200여 명이고 우리 학생은 30명인데 마적과 10여 일을 싸웠다”고 들은 얘기를 기록했다. 박 연구위원은 “위치는 오늘날 우윈진 아래 주청(舊城)촌 서쪽 1km 외곽”이라며 “지금은 중국인 묘지가 있을 뿐 한인이 살았던 흔적은 참담할 정도로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고 현지 풍경을 전했다. 배달촌은 1928년 여름 헤이룽강이 범람한 대홍수로 가옥과 전답을 잃은 뒤 다시 한번 ‘오운역 동남쪽’(현재 우윈진 동남쪽 시가지 외곽)으로 옮겼다. 동아일보는 “뿐만 아니라 1931년 9월 18일 사변은 그들로 하여금 다시 죽음의 와중에 헤매게 했다”라며 일제가 일으킨 만주사변이 동포들을 위험에 빠뜨렸다고 전했다. 1933년 본보가 소개한 배달촌은 바로 이곳이다. 시가가 배달촌이었던 재중 동포 유옥자 씨(77)는 연구소 조사에서 “원래 80여 호에 달하는 한인 마을이었으나 광복 뒤 차츰 흩어져 1970년대에는 모두 떠났고 중국인들이 들어와 살았다”고 전했다. 박 연구위원은 “임정 신문인 독립신문은 배달촌의 한인학교 건립 소식을 전하기도 했다”며 “배달촌에서 생겨난 실업회 농민회 등도 독립운동의 방편이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망국에 책임이 있는 유약한 군주’인가 ‘자주 독립과 근대화에 힘쓴 비운의 황제’인가. 조선 고종(1852∼1919)만큼 역사적 평가가 극단적으로 엇갈리는 인물도 드물다. 올해 3·1운동 100주년을 맞지만 고종이 독살됐다는 소문이 3·1운동의 직접적인 단초가 됐다는 사실은 잊기 일쑤다. 21일로 광무황제, 곧 고종이 서거한 지 100주기를 맞는다. 근대사와 고종, 대한제국 연구의 권위자로 한일 강제병합 조약의 불법·무효를 밝히기도 했던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76)를 서울 종로구 동아미디어센터에서 18일 만났다.》 이 교수는 2009년 ‘역사학보’에 실은 논문에서 고종 독살은 풍문이 아니라 “일본 정부 수뇌부가 지시한 것으로 판단했다”고 밝힌 바 있다. 미국 우드로 윌슨 대통령이 1918년 1월 민족자결주의를 선언하자 고종이 항일전선에 다시 나설 것을 우려한 일제가 독살했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당시 일본 궁내성 제실회계심사국 장관이었던 구라토미 유자부로(倉富勇三郞)의 1919년 10, 11월 일기 등을 독살의 근거로 들었다. 이 일기에는 구라토미가 송병준으로부터 들은 얘기가 나온다. 정리하면 총리대신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1852∼1919)가 조선 총독인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1850∼1924)에게 어떤 뜻을 전했고, 하세가와는 ‘이태왕’ 곧 고종을 찾아가 이를 전달했다. 그러나 고종황제가 수락하지 않자 이를 감추기 위해 윤덕영, 민병석 등을 시켜 독살했다는 것이다. 일기에서 구라토미는 궁내성에서 다른 이들을 만나 반복적으로 집요하게 독살에 관해 확인하고자 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 교수는 논문에서 “총독부가 한일합병은 양국의 협의로 된 것이라는 문서를 만들어 고종의 날인을 받아내려 했지만 고종이 문서를 들고 온 윤덕영 등을 꾸짖어 내쫓자 독살이 자행됐다는 걸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가 전하고 있다”고 했다. 고종 독살은 ‘스모킹 건’만 빼고는 모든 요소가 갖춰진 셈이다. ―구라토미 역시 ‘풍설’을 옮긴 것 아닌가. “일기에는 들은 얘기 형식으로 옮겨놨지만 구라토미는 사실이라고 믿었다. 영친왕비 이방자 여사가 나중에 수기에서 시아버지인 고종의 죽음에 대해 ‘나도 처음에는 뇌일혈일 줄 알았으나 독살이었다’고 반복해 적었다. 그걸 누구에게 들었을까. 이방자 여사가 1922년 아이를 데리고 순종에게 인사하러 창덕궁에 왔을 때 일본 궁내성 직함을 가지고 수행한 사람이 구라토미다. 바로 구라토미에게 들었던 것이다.” ―고종은 유약하다는 이미지가 있다. “우리가 고종을 아직도 너무 모르고 있다. 서울에서 활동하던 일본 기자들도 조선 군주가 군주로서 자질이 있다고 평가했는데, 1907년 고종의 헤이그 특사 파견을 계기로 완전히 바뀐다. 이토 히로부미가 굉장히 화를 내고, 고종을 끌어내린 뒤 ‘암군(暗君)’이라는 말이 나온다. 뒤집어 보면 자기네 말을 안 듣는 사람이라는 얘기다. 일제는 한국 통치를 정당화하려고 고종이 유약한 군주라는 부정적 이미지를 만들어내고 가르쳤다. 객관적 평가는 호머 헐버트 박사와 헨리 아펜젤러 선교사 등으로부터 들을 수 있다. 그들이 1896년 낸 잡지에 고종 인터뷰가 8쪽 정도 실렸다. 고종을 굉장히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서양 문명에 대한 관심이 많아 서양인을 초대한 파티를 열면 한 명씩 모두 얘기를 나누며 서양 문물을 묻고 난 뒤 정좌한다고 했다. 고종이 조선 최고의 지식인이라고도 했다. 서재(집옥재)에 수많은 장서가 있고, 신하들이 역사와 고전에 관해서 의문이 생기면, 군주를 찾아와서 묻는데 즉답이 나온다는 것이다.” ―고종의 업적이 무엇인가. “국력을 키우려 한 고종의 근대화 사업을 높이 평가해야 한다. 가장 먼저 경복궁 건청궁에 전기 시설을 설치한 건 사치가 아니다. 유자(儒者)들이 거부하는 신문명 도입에 왕실이 앞장섰다는 걸 보여준 것이다. 1880년대 꾸준히 전신선을 설치한다. 경운궁으로 돌아온 뒤에는 서울을 현대 도시로 만든다. 길을 넓히고, 1898년 서울 시내에 전차가 달리게 만들었다. 오늘날 우리가 아는 남북철도뿐 아니라 함경도 경흥에서 의주까지 동서횡단철도도 계획했다. 1902년에는 중앙은행 설립을 계획하고 지폐 발행 등 근대화를 위한 준비를 모두 했다. 러시아 차관을 도입했고, 벨기에 프랑스 기업의 투자를 유치하고자 했으나 일본에 의해 가로막힌다. 1902년 즉위 40년 축하의식은 통상조약을 체결한 12개국을 초대해 서울의 현대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중립국 승인을 받으려 했다. 그러나 영일동맹의 영향과 콜레라 유행으로 실패했다.” ―동학농민군을 관군이 함께 진압하지 않았나. “1893년 동학교도의 교조신원운동이 벌어질 때 ‘난동분자니까 토벌해야 한다’는 주장을 고종은 ‘동학교도도 내 백성’이라며 물리친다. 고종은 나라의 주인이 왕과 소민(小民·백성)이라는 정조 이래 철학을 이었다. 전주 화약(1894년) 뒤에도 고종은 ‘동학교도와는 협상을 할 수 있다’고 했다. 최근 일본 학계에는 당시 조선 관군이 청일 양국군이 나온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출동했다가 일본군의 위계에 걸렸다는 연구도 있다.” ―3·1운동의 성격은 무엇인가. “항일 ‘국민’ 운동으로 조명될 필요가 있다. 고종은 1895년 홍범14조를 순한글과 국한문혼용으로도 선포했다. 소민 보호의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교육조서는 ‘덕체지’ 3육(育)을 강조하는데, 이게 육영공원의 서양 선교사 영향을 받은 것이다. 이렇게 형성된 ‘국민’ 의식이 바탕이 돼 1907년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난다. 1907년을 계기로 ‘국민’이라는 말이 폭발적으로 많이 쓰였다. 이후 독립운동 단체 이름에도 국민회가 많다. 국민국가를 의식하고 민이 주권을 찾기 위해서 싸운 것이다. 3·1독립만세 역시 근대화사업을 하던 황제가 독살됐다는 소문이 흩어져 있던 각 단체를 하나로 뭉쳐놓은 것이다. 그래서 거민족적 거국적 규모로 일어날 수 있었다.” ―국민에 대한 고종의 생각을 뒷받침하는 자료가 있나. “태황제(고종)가 1909년 3월 서북간도민에게 내린 교유서 내용이 남아있다. 거기서 고종은 ‘대한은 나의 것이 아니다. 너희 만성(萬姓·백성)의 것’이라고 선언한다. ‘자유라야 민이며, 독립이라야 나라(國)다. 민이 쌓여서(積民·적민) 나라가 되는 것이 아니더냐’라고 했다. 이게 서양 근대 정치사상이다. 내가 부덕해서 나라가 일본의 침략을 받아 이 지경이 됐지만 망했다고 하지 말자는 것이다. 고종이 황실을 대표해서 사실상 국민주권을 선언한 것이다.” ―3·1운동 100주년의 의미는 무엇인가. “3·1운동은 국제평화운동에서 굉장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고종은 일제와 힘으로 싸우기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1890년대부터 세계적으로 떠오른 국제평화운동의 힘을 빌리고자 했다. 헤이그 만국평화회의나 노벨평화상 제정, 민족자결주의와도 같은 흐름 속에서 3·1운동이 폭발한 것이다.” ―최근 한일관계에 시사하는 바는 무엇인가. “일본이 ‘군국주의의 영광’을 재현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인류가 가야 할 길에 역행하는 반동이다. 이는 동아시아 역사가 앞으로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게 만든다. 100주년을 기해 3·1운동의 평화공존 논리를 밀고 나가 일본도 그 길을 걷도록 해야 한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대한민국 임시정부 의정원의 관인은 현재 소재가 확인된 임시정부의 유일한 국새다. 임정은 26년간 임시 헌장 제정과 5번의 개헌을 거치며 정체가 변화했지만 대체로 의회가 중심에 있었다. 1927년 3차 개정 헌법에는 “대한민국은 최고 권력이 임시의정원에 있음”(제2조)을 명시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45년 환국 당시에는 주석제였다. 한시준 단국대 교수는 “환국 당시 임정은 당·정·군의 형태였고 주석과 총사령관, 의정원 관인의 가치는 동렬이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김구 주석이 사용한 주석의 관인은 정부 문서와 함께 6·25전쟁 때 행방불명됐다. 지청천 장군이 썼던 한국광복군 총사령관의 관인도 마찬가지다. 북한에 두 개의 관인이 남아 있을 가능성도 없지 않지만 이번에 공개된 의정원 관인은 소재가 확인된 유일한 국새인 셈이다. 국회의 홍진 선생 흉상 건립 안건은 2003년 발의됐다가 제16대 국회 임기 만료로 폐기됐다. 국회는 2010년 5월 ‘홍진 임시의정원 의장 기념전시실’을 국회도서관에 설치했으나 흉상 건립에는 합의하지 못했다. 한 교수는 “홍진 선생 손자 홍석주 씨가 흉상 건립과 관인 기증을 협의하러 한국에 7, 8번 왔을 때마다 만났다”며 “석주 씨가 ‘살아 있을 때 꼭 이 문제를 해결하고 싶다’고 했는데 끝내 생전에 결실을 못 봤다”고 설명했다. 홍 씨의 아내 신창휴 씨는 2017년 7월 본보와의 통화에서 “남편이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편하게 돌아가시지도 못했다”며 안타까워했다. 문희상 국회의장이 취임 후 홍진 선생 흉상 건립을 다시 추진했고 지난해 11월 23일 국회 본회의에서 건립 안건이 마침내 통과(재석 의원 226명, 찬성 196명)됐다. 문 의장은 통과 직후 “홍진 의장님의 상(像)을 건립하는 것은 의회민주주의의 역사적 가치를 보전하고 독립정신의 참뜻을 계승하는 숭고한 일”이라고 유족에게 편지를 보냈다.조종엽 jjj@donga.com·박효목 기자}

올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임정의 국새(임시의정원 관인·官印)가 46년 만에 한국으로 돌아온다. 임정 임시의정원 의장 및 국무령을 지낸 만오 홍진(晩悟 洪震·1877∼1946) 선생의 손자며느리 신창휴 씨(85·미국 거주)는 최근 동아일보와의 단독 인터뷰에서 “홍진 선생의 동상이 국회에 건립되는 날 남편이 보관해 온 임시의정원 관인을 국회에 기증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 관인은 오늘날 국회 격인 임시의정원의 각종 공문서에 찍었던 도장이다. “대한민국은 최고 권력이 임시의정원에 있음”(1927년 개정 임시약헌 제2조)을 비롯한 임정 임시헌법 조항으로 볼 때 임정의 정통성을 상징하는 국새 가운데 하나에 해당한다. 임정과 더불어 중국에서만 4000km를 옮겨 다녔고, 홍진 선생의 손자인 고(故) 석주(錫柱) 씨의 도일과 귀국, 도미까지 100년 동안 바다를 4번 건너며 수만 km를 이동한 관인이 한국에서 제자리를 찾는 셈이다. 신 씨가 본보에 공개한 이 관인은 ‘臨時議政院印(임시의정원인)’이라고 새겨진 검은색 목제 도장이다. 석주 씨는 이 관인이 “할아버지(홍진)가 1945년 충칭에서 갖고 돌아왔다. 1919년부터 의정원 인장으로 쓰인 임시의정원인”이라고 설명한 문서를 남겼다. 석주 씨는 6·25전쟁을 비롯한 격동의 현대사 속에서도 각고의 노력 끝에 이 관인을 온전히 간직해 왔다. 1973년 미국 이민 뒤에도 조부의 업적이 제대로 평가받길 바라며 여러 차례 관인을 한국에 기증하려 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2016년 87세로 눈을 감았다. 관인은 중국 상하이에서 첫 임시의정원 회의가 열린 지 100주년이 되는 올 4월 10일에 맞춰 기증될 것으로 전망된다. 문희상 국회의장실은 “임정 100주년을 맞는 올해 국회도서관에 임시의정원의 마지막 의장을 지낸 홍진 선생의 흉상을 건립한다”며 “상징적 의미가 큰 4월 10일 전 관인이 고국에 돌아올 수 있도록 흉상 건립을 서두르고 있다”고 밝혔다. 문 의장은 “이 관인은 임시의정원을 상징하는 물건”이라며 “역사적으로 소중한 이 관인을 후손에 길이 보전할 것”이라고 밝혔다.▼ 임정 국새 100년간 바다 4번 건너… 홍진 가문, 목숨처럼 지켰다 ▼ “남편이 숨지기 석 달 전 이 도장을 꺼내더니 ‘나 대신 잘 보관했다가 할아버지 흉상이 세워지는 날 국가에 기증해 달라’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임시정부 의정원 의장과 국무령을 지낸 만오(晩悟) 홍진 선생의 손자며느리 신창휴 씨(85)가 18일(현지 시간) 미국 동부 모처에서 진행된 동아일보 및 채널A와의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그는 “2016년 87세로 작고한 남편(홍석주)의 유언대로 도장을 안전한 모처에 두고 가보로 지키고 있다”고 했다. 그는 보안을 이유로 인터뷰 장소 공개를 극구 꺼렸다. 취재팀이 확인한 임시정부 의정원 관인 등 도장 4개는 만오 선생이 1945년 중국 충칭(重慶)에서 허리춤에 차고 귀국한 허리띠 및 지퍼가 달린 남색 주머니에 담겨 있었다. 신 씨에 따르면 남편 홍 씨는 이 도장을 목숨처럼 지켰다. 6·25전쟁, 일본 유학(교환교수), 미국 이민 등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항상 몸에 지니고 다녔다고. 그는 “남편이 6·25전쟁 피란 당시 도장주머니를 베개에 돌돌 말아 넣고 잠을 잘 때도 그 베개만 썼다”며 “가족들에게도 도장이 어디에 있는지 알리지 않았다”고 했다. 그는 취재팀에 홍 씨가 가족에게 남긴 ‘홍진 도장 및 문서 원본’이라는 3장짜리 문서도 공개했다. 문서에는 “영구 가보로 보관할 것, 햇볕과 습기에 쬐이지 말 것”이란 당부 사항과 설명이 빼곡했다. ‘임시의정원인(臨時議政院印)’이라고 새겨진 가로 5cm, 높이 6cm의 검은색 목재 도장에는 ‘1919년부터의 의정원 인장’이라는 설명이 있었다. 홍 씨는 이 문서에 “임시의정원인은 1919년 4월 임시의정원 수립 때부터 유일한 도장으로 임시정부 및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상징한다”며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적었다. ‘홍진(洪震)’이라고 새겨진 옥돌로 만든 작은 도장에는 ‘관용’ 및 ‘공문서’에 쓰였다는 말도 있었다. 이 외 만오 선생이 1919년 4월 중국으로 망명하기 전 법관과 변호사로 일하며 썼던 그의 본명 홍면희(洪冕熹)가 새겨진 도장, 또 다른 호 ‘만호(晩湖)’가 새겨진 도장도 1점씩 있었다. 신 씨는 “시조부께서는 ‘독립운동을 하는 의병들에게 벌을 줄 수 없다’며 법관을 그만두고 변호사로 일하다 중국으로 망명했다”며 “가산까지 팔아 독립운동을 위해 떠난 뒤 남은 가족들이 일제의 감시 및 생활고로 힘들게 살았다고 들었다”고 했다. 그의 남편 홍 씨는 생전 임시의정원 의장을 지내며 독립운동을 이끈 조부의 업적이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은 것을 늘 안타까워했다. 이에 코닥에서 일했던 홍 씨와 약사 신 씨 부부는 직접 조부의 업적을 재조명하는 일에 매달렸다. 신 씨는 “정확한 금액은 기억나지 않지만 국가에서 독립유공자에게 주는 지원금 대부분을 홍진 학술대회 개최 및 홍진 선생 연구서 출판에 썼다”며 “남편이 ‘조부의 흉상이라도 세워 달라’는 유언을 남긴 것도 이 때문”이라고 말했다. 신 씨는 “남편의 유언대로 국회에 흉상이 세워진다니 그날 내 손으로 이 도장을 국가에 기증하겠다”고 말했다. 이어 “홍진 선생은 좌우, 여야를 떠나 민족이 모두 하나가 되길 원하셨다”며 “임시정부 100주년이 되는 올해 시조부의 유지를 받들어 한국이 하나로 똘똘 뭉쳐 훌륭한 나라를 건설했으면 좋겠다”고 당부했다.▼ [단독]홍진 선생, 유일하게 임정 행정-입법 수장 모두 역임 ▼ 만오 홍진 선생은 우리나라 의회정치의 기틀을 마련한 독립운동의 거목이다. 임시정부 연구의 권위자인 한시준 단국대 교수는 “임정에서 행정부 수반(국무령)과 입법부 수반(임시의정원 의장)을 모두 지낸 분은 홍진 선생이 유일하다”며 “가장 오랜 기간 의장으로 활동하며 의회정치의 기틀을 닦은 분”이라고 설명했다. 1877년 명문가 후예로 태어난 홍진 선생은 1904년 법관양성소를 졸업하고 평양에서 변호사로 일했다. 1919년 3·1운동 직후 동지들을 규합해 인천에서 13도 대표자 대회를 개최하고 한성정부를 조직한 뒤 중국 상하이로 망명했다. 그해 9월 한성정부를 법통으로 통합 임시정부가 출범하는 데 큰 기여를 했다. 1921년 5월에는 이동녕 손정도에 이어 임시의정원의 3대 의장으로 선출됐고 이어 1939, 1942년에도 의장에 선출됐다. 한 교수는 저서에서 “홍진 선생이 이념과 당파를 초월한 인물이었기에 좌우익 세력이 참여한 통일의회에서 의장으로 선출될 수 있었다”고 평가했다. 홍진 선생은 임시의정원의 마지막 의장이었고 임정 환국 뒤 의정원을 계승한 비상국민회의 의장으로도 선출됐다. 홍진 선생의 후손이 의정원 관인을 보관하게 된 데에는 이 같은 사연이 있다. 홍진 선생이 1945년 12월 1일 환국하면서 가져온 의정원 문서는 손자 홍석주 씨가 보관하다가 국회에 기증해 1974년 국회도서관이 발간했다. ‘대한민국’이라는 국호가 최초로 규정된 ‘대한민국 임시약헌’(헌법) 개정안 초안(원본)과 건국강령, 광복군 작전보고 등 귀중한 자료들이었다. 임시정부 문서는 이들 자료 말고는 거의 남아있지 않다. 의정원 문서를 온전하게 보존해 후대에 남긴 것 역시 홍진 선생의 큰 공헌으로 평가된다. 홍진 선생은 1946년 9월 9일 병환으로 숨을 거뒀고 장례식은 9월 13일 김구 선생, 이승만 박사를 비롯해 각계 인사가 운집한 가운데 성대하게 거행됐다.▼ [단독]김구 주석-광복군 관인은 6·25때 행방불명 ▼ 대한민국 임시정부 의정원의 관인은 현재 소재가 확인된 임시정부의 유일한 국새다. 임정은 26년간 임시 헌장 제정과 5번의 개헌을 거치며 정체가 변화했지만 대체로 의회가 중심에 있었다. 1927년 3차 개정 헌법에는 “대한민국은 최고 권력이 임시의정원에 있음”(제2조)을 명시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45년 환국 당시에는 주석제였다. 한시준 단국대 교수는 “환국 당시 임정은 당·정·군의 형태였고 주석과 총사령관, 의정원 관인의 가치는 동렬이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김구 주석이 사용한 주석의 관인은 정부 문서와 함께 6·25전쟁 때 행방불명됐다. 지청천 장군이 썼던 한국광복군 총사령관의 관인도 마찬가지다. 북한에 두 개의 관인이 남아 있을 가능성도 없지 않지만 이번에 공개된 의정원 관인은 소재가 확인된 유일한 국새인 셈이다. 국회의 홍진 선생 흉상 건립 안건은 2003년 발의됐다가 제16대 국회 임기 만료로 폐기됐다. 국회는 2010년 5월 ‘홍진 임시의정원 의장 기념전시실’을 국회도서관에 설치했으나 흉상 건립에는 합의하지 못했다. 한 교수는 “홍진 선생 손자 홍석주 씨가 흉상 건립과 관인 기증을 협의하러 한국에 7, 8번 왔을 때마다 만났다”며 “석주 씨가 ‘살아 있을 때 꼭 이 문제를 해결하고 싶다’고 했는데 끝내 생전에 결실을 못 봤다”고 설명했다. 홍 씨의 아내 신창휴 씨는 2017년 7월 본보와의 통화에서 “남편이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편하게 돌아가시지도 못했다”며 안타까워했다. 문희상 국회의장이 취임 후 홍진 선생 흉상 건립을 다시 추진했고 지난해 11월 23일 국회 본회의에서 건립 안건이 마침내 통과(재석 의원 226명, 찬성 196명)됐다. 문 의장은 통과 직후 “홍진 의장님의 상(像)을 건립하는 것은 의회민주주의의 역사적 가치를 보전하고 독립정신의 참뜻을 계승하는 숭고한 일”이라고 유족에게 편지를 보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뉴욕=박용 특파원/박효목 기자}
만오 홍진 선생은 우리나라 의회정치의 기틀을 마련한 독립운동의 거목이다. 임시정부 연구의 권위자인 한시준 단국대 교수는 “임정에서 행정부 수반(국무령)과 입법부 수반(임시의정원 의장)을 모두 지낸 분은 홍진 선생이 유일하다”며 “가장 오랜 기간 의장으로 활동하며 의회정치의 기틀을 닦은 분”이라고 설명했다. 1877년 명문가 후예로 태어난 홍진 선생은 1904년 법관양성소를 졸업하고 평양에서 변호사로 일했다. 1919년 3·1운동 직후 동지들을 규합해 인천에서 13도 대표자 대회를 개최하고 한성정부를 조직한 뒤 중국 상하이로 망명했다. 그해 9월 한성정부를 법통으로 통합 임시정부가 출범하는 데 큰 기여를 했다. 1921년 5월에는 이동녕 손정도에 이어 임시의정원의 3대 의장으로 선출됐고 이어 1939, 1942년에도 의장에 선출됐다. 한 교수는 저서에서 “홍진 선생이 이념과 당파를 초월한 인물이었기에 좌우익 세력이 참여한 통일의회에서 의장으로 선출될 수 있었다”고 평가했다. 홍진 선생은 임시의정원의 마지막 의장이었고 임정 환국 뒤 의정원을 계승한 비상국민회의 의장으로도 선출됐다. 홍진 선생의 후손이 의정원 관인을 보관하게 된 데에는 이 같은 사연이 있다. 홍진 선생이 1945년 12월 1일 환국하면서 가져온 의정원 문서는 손자 홍석주 씨가 보관하다가 국회에 기증해 1974년 국회도서관이 발간했다. ‘대한민국’이라는 국호가 최초로 규정된 ‘대한민국 임시약헌’(헌법) 개정안 초안(원본)과 건국강령, 광복군 작전보고 등 귀중한 자료들이었다. 임시정부 문서는 이들 자료 말고는 거의 남아있지 않다. 의정원 문서를 온전하게 보존해 후대에 남긴 것 역시 홍진 선생의 큰 공헌으로 평가된다. 홍진 선생은 1946년 9월 9일 병환으로 숨을 거뒀고 장례식은 9월 13일 김구 선생, 이승만 박사를 비롯해 각계 인사가 운집한 가운데 성대하게 거행됐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서양 중세는 암흑기일까 황금기일까. 극단적인 평가가 오가는 이 시대를 다양한 스펙트럼에서 들여다본 책이다. 중세 서양인들의 의식주는 오늘날과는 많이 달랐다. 중세에 많이 먹을 수 있다는 건 사회적 우월과 특권의 표지였다. 배가 나오고 뚱뚱한 것은 선망과 존경의 대상이었다. 심지어 식욕이 별로 없는 사람은 지배자가 될 자격이 없다고 여겼다. 9세기 말 한 공작이 프랑크 왕국의 왕이 되지 못한 이유를 두고 “적은 식사로 만족하는 그는 우리를 지배할 자격이 없다”는 평가가 나오기도 했다. 중세 말이 되면 음식의 질이 중요해진다. 13세기부터는 먹는 음식의 질에 따라 인격을 평가하기도 했다. 농가는 한집에서 사람과 가축이 서로의 온기에 기대 함께 사는 ‘롱 하우스(long house)’가 보통이었다. 폭 5m, 길이 15m 정도의 이 집에는 출입문을 중심으로 한쪽에 가족 4, 5명이 살았고 다른 한쪽에 건초 창고와 가축 우리가 있었다. 인간과 가축은 한 식구처럼 한 지붕 아래 동숙했다. 농민들은 “느릅나무 잎이 나올 때” “딱총나무 꽃이 필 때”처럼 자연현상으로 달과 계절을 구분했고, 민간에서는 무수한 부적을 사용했다. 고려대 사학과 교수인 저자는 “유럽인들은 18세기까지도 잉글랜드와 프랑스 왕의 치유 기적을 믿었고, 인구 급증도 18세기부터 시작됐다. 집단 심성과 물질문화의 차원에서 보면 중세는 18세기에야 끝이 났다”고 말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혐오와 차별에 맞서는 미디어 창업자, 장애가 있는 아동을 위한 학습 애플리케이션 회사 창업자, 세계의 빈곤 퇴치를 목표로 활동하는 ‘임팩트 투자’(사회 혁신 추구 기업에 투자)자…. 신간 ‘당신은 체인지메이커입니까?’(김영사)는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체인지 메이커’ 20명을 인터뷰해 소개한 책이다. 저자 정경선 ‘루트임팩트’ CIO(최고상상책임자·33)의 프로필도 흥미롭다. 정 씨는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손자이자 정몽윤 현대해상화재보험 회장의 아들. 소셜 벤처(사회문제 해결을 위한 벤처 기업) 창업가 등을 지원하는 비영리 사단법인 ‘루트임팩트’와 임팩트 투자회사 ‘HGI’를 설립해 운영한다. 2017년 6월에는 서울 성동구 성수동에 공유 오피스이자 소셜 벤처의 협업 커뮤니티인 ‘헤이그라운드’를 열었다. 헤이그라운드는 소셜 벤처 80개사의 둥지가 되고 있다. 8일 만난 정 씨는 “책을 내기 위해 인터뷰를 하면서 창업, 투자, 봉사뿐 아니라 윤리를 중요시하는 소비까지 사회문제 해결 노력은 정말 형태가 다양하고 누구나 할 수 있다는 걸 다시 한번 깨달았다”고 말했다. ―각종 지원금에 의존하다 좌초하는 사회적 기업도 적지 않다. ‘좋은 일’과 ‘돈 버는 일’이 양립 가능한가. “그렇다. 물론 소비자의 선의에만 의존하지 않고 고객이 매력을 느끼는 제품과 서비스를 만들어야 한다. 일례로 헤이그라운드 안에는 단시간 보육 서비스 회사 ‘째깍악어’를 비롯해 꼭 필요하지만 전에는 없던 보육 서비스를 제공하는 소셜 벤처들이 있다. 몽골 양치기에게는 적정 가격을 지불하면서도 중간 마진을 줄여 양질의 캐시미어 의류를 저렴하게 파는 공정무역 기업도 있다.” ―창업으로 사회문제를 해결하려는 ‘체인지 메이커’들의 공통점이 있다면…. “사회문제가 왜 생겼는가, 해결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하는 질문을 계속 던진다. 또한 다른 이들과 협업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다. ‘닷페이스’의 조소담 대표가 ‘참고 사는 것도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라고 한 말에 십분 동의한다. 이런 면에서 ‘체인지 메이킹’은 일종의 태도라고 생각한다.” ―루트임팩트의 설립과 운영은 ‘재벌 3세’라서 할 수 있는 일 아닌지…. “당연한 말이다. 나는 이 집안에서 태어났기에 보다 쉽게 후원을 받을 수 있었다. ‘체인지 메이킹’을 잘할 수 있는 분들을 지원하는 게 사회에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사회적 기업의 미래는…. “사회, 환경을 고려해 지속가능한 제품과 서비스를 선택하는 ‘의식적 소비’가 확산되고 있다. 양질의 교육 제공 애플리케이션이나 특수질환 환자를 위한 식단 제공 서비스 등 신기술 바탕의 해결책도 확산되고 있다. 단숨에 바뀌지는 않겠지만 장기적으로는 사회적 기업과 일반 기업의 경계가 희미해져야 한다고 본다.” 정 씨는 “미래를 살아갈 당사자인 청년들에게 더 많은 권한과 자원, 영향력을 부여해야 앞으로의 세상에 꼭 필요한 것을 만들 수 있고 성장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태극기가 엇갈려 내걸린 ① 독립문 아래 개선하는 독립군의 행렬이 끝없이 이어진다. 선두에 선 장군은 말을 탔고, 구름같이 몰린 사람들이 태극기를 들고 광복의 감격에 겨워 독립만세를 외친다…. 100년 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새해(1920년)를 앞두고 제작해 배포한 임시정부 첫 달력인 ‘대한민력(大韓民曆)’이 발견됐다. 북간도 한인사 전문가인 김시덕 박사(대한민국역사박물관 교육과장)는 “중국 지린(吉林)성 연변조선족자치주박물관에 있는 북간도 명동학교 건축기(建築記) 뒷면에 그간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임정의 첫 ‘대한민력’이 숨어 있었다”며 13일 본보에 그 사진을 공개했다. 대한민력 상단의 그림은 1920년을 ‘독립전쟁의 해’로 선포한 임정의 꿈을 그대로 보여준다. 임정의 독자적 역서(曆書·달력) 발행은 독립국의 지위를 드러내는 수단이었고, 통치권의 상징으로 평가된다. 대한민력은 아직 국경일 공식 제정 전임에도 ② ‘개천절’과 ‘3·1 독립선언일’을 기념일로 명기해 국민을 통합하려 했다. 달력 하단에 ③ “경성표준시(京城標準時)를 본(本)함”이라고 명시해 임정이 도쿄 표준시가 아닌 동경 127.5도 기준의 ‘서울 표준시’를 채택했다는 점도 새로 드러났다. 김 박사는 “이 달력은 임정이 주권을 가진 독립 자주국임을 선포하고, 독립군의 작전 시간을 비롯해 독립운동 전선을 통일하고자 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 도쿄 아닌 서울표준시로 ‘시간 독립’… 독립군 연합작전 길 열어 ▼임시정부 발행 달력 ‘대한민력’, 역사박물관 김시덕 박사 첫 공개 이번에 발견된 대한민력은 임시정부의 국경일 제정 등을 알려주는 증거로 활용된 ‘대한민국4년역서(大韓民國四年曆書)’(1922년 달력)보다 2년 앞선 것이다. 당시 수천∼수만 부를 인쇄해 임시정부가 있던 중국뿐 아니라 한반도와 해외 각지에 배포했지만 지금까지 발견된 유일한 1920년(대한민국 2년) 대한민력이기도 하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통합 임정 출범 석 달도 안 된 1919년 12월 1일 국무회의에서 국경일 제정과 함께 역서(달력) 발행을 논의했다. 대한민력을 발견한 김시덕 박사(사진)는 “이는 역서 발행이 식민 통치하 국민의 주권을 보장하는 일이고, 임시정부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통치행위였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적국의 표준시보다 30분이 늦음” 임정이 표준시를 정해 대한민력으로 공표한 것도 세계 각지의 독립운동가와 단체, 국민이 시간을 통일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독립군 부대가 연합 작전을 하기 위해서는 시간 통일이 필수적이었다. 대한민력은 “경성(京城)표준시를 본(本)함으로 중국 북경시보다는 44분이 이르고(봉천·奉天보다는 31분, 길림·吉林보다는 3분이 이르고) 적국(敵國·일본)의 표준시보다는 30분이 느즘”이라고 명시했다. 조선의 표준시는 한반도의 중앙을 지나는 동경 127.5도가 기준이었다가, 일제가 1912년 일본을 지나는 동경 135도 기준으로 바꾼 상황이었다. 김 박사는 “대한민력이 독립전쟁을 통일하고자 했던 임정의 비밀지령이었기에 일제는 불온문서(不穩文書)로 분류해 단속했다”고 밝혔다. 평안북도 압록강 연안의 농민 이종욱(李鍾旭·당시 33세)은 임정 요원 이일선이 가져온 이 대한민력과 독립신문을 황해도와 서울, 인천, 평양 등지로 보내려다 1920년 정치범으로 체포되기도 했다. 일제는 당시 대한민력 384매를 압수했다고 기록했다. 일제의 영향력이 닿는 곳에서 대한민력을 사용하는 건 이처럼 극도로 위험했다. 학계 연구에 따르면 조선총독부는 조선민력을 만들었고, 천문 관측과 사적인 역서 발행을 금지했다. 인천관측소가 제작하고 조선총독부 학무국 편집과가 인쇄, 반포하는 조선민력의 역법만 사용해야 했다. 그러나 민간에서는 보통 천세력이나 만세력 등 전통 달력을 많이 썼다.○ ‘대한민국 2년’ 명기 대한민력은 1919년을 대한민국 원년으로 하는 대한민국 기년법(紀年法)을 대표 기년법으로 썼다. 단기(檀紀), 서력(西曆), 중화민국 기년도 병기했다. 대한민국 기년은 국명을 연호로 사용해 근대 국민국가임을 드러내고자 한 것이다. 단군을 시조로 하는 오랜 역사를 가진 민족임을 나타내기 위해 단군교에서 사용하기 시작한 단기도 사용했다. 단기는 당시 지식인들이 선호했다. 세계 정세를 읽고 대응하기 위해 세계의 표준 시간 격인 서력도 사용했다. 1912년부터 시작된 중화민국 기년은 중국 영토에 임정을 세웠기에 중국과 시간 정보를 공유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으로 해석된다. 대한민력은 1919년 12월 만들어졌다. 임정이 국경일을 공식 제정한 건 대한민력이 만들어진 이듬해(1920년) 봄. 그럼에도 대한민력에는 개천절과 독립선언일이 기념일 형식으로 오른쪽 위 태극기 아래 따로 표기돼 있다. 김 박사는 “짧은 시간에 민력을 제작해야 했기에 비록 법적으로 정해지지 않았지만 내부의 합의에 따라 표기했을 것”이라며 “기념일 표기는 집단적 단일성을 부여하는 통치 행위의 하나”라고 강조했다.○ 한인 농민에게 농사 정보 제공 대한민력의 크기는 가로 28.7cm, 세로 39.2cm로 임정의 신문인 독립신문 타블로이드판과 비슷하다. 복잡한 문양으로 된 테두리 네 모퉁이에는 4괘를 배치했다. 왼쪽 상단에서 시계 방향으로 감(,), 곤(+), 리(-), 건(*)의 순이다. 상단 가운데 독립문을 통과해 국내로 진공하는 독립군의 그림은 1920년 독립전쟁을 선포한 임시정부의 노선을 홍보하기 위한 것이다. 날짜는 양력을 기본으로 했다.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1∼12월을 배치하고 해당 월 아래 별도 칸에 해당 월의 대소(大小)와 윤달을 표기했다. 날짜는 그 아래에 세로로 검은색 아라비아 숫자로 썼고, 오른쪽에 작은 글씨로 음력을 부기했다. 양편으로 ‘월월요람(月月要覽)’을 두어 24절기와 일출몰 시각, 삭망, 달의 상하현 정보도 실었다. 김 박사는 “만주에서 수전(水田·무논)을 개발해 경작하던 농민 등 임정의 국민에게 생업에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려 했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발행부서는 임정 학무부 편집국이었다. 중국 상하이에 있던 ‘송가격서적해송양행(宋家格書籍海松洋行)’이 발송처다. 이곳은 나중에 임시의정원 의원을 지낸 한진교(1887∼1973)가 1914년 6월 20일 상하이에 설립한 무역상점이다. 이곳에서 인쇄했을 가능성도 있다. 김 박사는 “임정의 대한민력 발간은 국민이 임정과 동일한 시간체계를 공유하고 주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만든 민주공화정치적 행위였다”고 강조했다. ▼ 뒷면의 북간도 학교 건축기 살펴보다 발견 ▼대한민력은 수많은 독립지사를 배출한 북간도 명동촌의 명동학교 옛 교사에서 발견됐다. 100년 전 만든 임정의 첫 달력이 오늘날 조명될 수 있었던 건 김시덕 박사(대한민국역사박물관 교육과장)의 꼼꼼한 연구와 눈썰미 덕이 크다. 김 박사는 북간도 독립운동의 지도자 규암 김약연(1868∼1942) 기념사업회 김재홍 사무총장이 수집해 국립민속박물관에 기증한 자료를 살펴보다 사진 속 ‘명동학교 건축기(建築記)’에 흐릿하게 뒷면의 태극기가 비쳐 찍힌 데 주목했다. 명동학교는 일제가 간도 한인들을 무차별 학살한 ‘간도참변’ 당시 전소됐고 1922, 23년 중건됐다. 그 중건 과정을 바로 대한민력 뒷면에 적어 남겼던 것. 이 건축기는 명동학교가 1973년 현재의 대룡동으로 이전하면서 옛 교사를 철거할 때 대들보와 기둥 사이에서 발견됐다. 하지만 40여 년이 흐르는 동안 뒷면 대한민력에 주목한 이는 없었다. 1997년 한 연구서가 “‘대한민력’ 뒷면의 명동학교 건축 시말기록이 관심을 끌었다”고 언급한 정도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