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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조선의 독립운동은 위대하고 진실하며 비장했다. … 중국의 대학생과 기독교도들은 어찌하여 가만히 있기만 하는 것인가.” 중국 5·4운동의 총사령관 격이자 신문화운동의 기수로 일컬어지는 천두슈(陳獨秀·1879∼1942)는 시사 잡지 ‘매주평론(每周評論)’ 14호(1919년 3월 23일)에서 3·1운동에 대한 감상을 밝히며 중국인의 궐기를 이렇게 촉구했다. 3·1운동 당시 중국 유력 매체들이 한국인의 거족적 독립운동과 단호한 독립 의지를 상세히 보도했고, 이는 5·4운동 발발에도 영향을 주었다고 학계는 분석한다. 강수옥 중국 연변대 교수는 논문 ‘근대 중국인의 한국 3·1운동에 대한 인식과 5·4운동’(‘한국근현대사연구’ 79집)에서 이를 조명했다. 논문에 따르면 베이징, 상하이, 톈진의 유력 언론 ‘신보(晨報)’ ‘민국일보(民國日報)’ ‘시사신보(時事新報)’ ‘동방잡지(東方雜誌)’ ‘신청년(新靑年)’ ‘신조(新潮)’ 등이 모두 3·1운동을 전격 보도했다. 상하이에서는 ‘신보(申報)’가 가장 먼저 3·1운동 소식을 전했고 톈진에서 창간돼 중국 각지에서 발행된 대공보(大公報)도 3월 6일부터 4월 초까지 ‘조선독립활동 더욱 불타오르다’ 등의 연속 기사를 게재했다. 강 교수는 “중국 각지 매체가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전면적, 심층적 보도를 이어갔다”며 “3·1운동의 평화적인 운동 방법과 일제의 잔혹한 진압, 한국인의 두려움 없는 혁명정신을 자세히 다뤘다”고 밝혔다. 특히 중국인이 3·1운동에서 교훈을 얻어 한국과 같은 민족해방운동을 일으켜야 한다는 호소가 이어졌다. 천두슈는 ‘매주평론’에 쓴 논설 ‘조선독립운동의 감상’에서 “조선민족운동의 광영을 통해 우리 중국 민족의 치욕을 다시 맛보았다.…일반 국민은 명료하고 정확한 의식적 활동을 한 적이 없다…중국인을 조선인과 비교하면 정말 부끄럽기 그지없다”고 썼다. 1919년 4월 3일 ‘민국일보’도 ‘조선독립에 대한 동정(同情)에서 “본래 조선에 일이 있으면 반드시 만주에도 변고가 생긴다.…결국 조선의 독립은 배일(排日) 문제가 아니고, 생존 문제이다. 또 조선만의 문제가 아니고, 동아시아 및 전 세계의 문제”라고 했다. 강 교수는 3·1운동이 중국 각계를 놀라게 해 5·4운동의 성숙, 발생, 진전에 매우 큰 영향을 줬다고 분석했다. 그는 3·1운동이 △중국인의 반제반봉건 투쟁의식의 새로운 각성을 촉진했고 △반제구국 운동의 모델이 됐으며 △피압박민족 해방의 조류가 도달했음을 깨닫게 했다고 봤다. 광복 직후 동아일보는 3·1운동의 세계사적 의미를 “세계약소민족해방운동사에 자연히 빛나는 기록을 지었던 것”(1946년 2월 27일 ‘3·1운동의 회상’), “세계에서 비폭력주의의 원조”(1946년 3월 1일)라고 평가했다. 최근에는 3·1운동이 5·4운동이라는 하나의 사건뿐 아니라 중국의 ‘네이션 빌딩(nation-building)’에 참조 대상이 되며 지속적인 영향을 줬다는 연구도 나왔다. 리궁중(李恭忠) 중국 난징대 교수는 지난해 11월 서울 성북구 고려대에서 열린 학술대회에서 “3·1운동은 중국 독립국가 개념 형성에 중요한 촉매였다”고 밝혔다. 리 교수는 3·1운동 이후 약 30년간의 각종 자료를 검토했다. 그는 중국 정부가 3·1운동과 한국 독립운동을 통해 일제에 맞선 중국인의 민족해방의식을 환기했다고 봤다. 3·1운동이 중일전쟁을 견디게 해준 긍정적인 본보기가 됐다는 것이다. 3·1운동 소재의 연극 ‘산하루(山下淚)’ 등이 인기를 모으기도 했다. 리 교수는 “3·1운동은 5·4운동의 본보기와 전주곡이 됐을 뿐 아니라 20세기 전반까지 중국인이 국가 형성을 탐색하는 데 지속적인 영향을 줬다”고 평가했다. 역으로 일제강점기 한국에서는 5·4운동을 조선의 독립과 연결지어 조명했다. 동아일보는 1925년 3월 2일 1면 사설 ‘중국 5·4운동’에서 “기미년 우리 3·1운동에 곧이어 일어난 모든 민족운동 중에는 중국의 5·4운동도 그 하나”라며 “일본은…중국의 완전한 독립을 승인하며, 기타 모든 동아(東亞)에 있는 중국과 유사한 식민지국가의 독립을 조성하야”라고 썼다. 또 “중국 국민운동의 구체적 전개의 제1보를 지은 5·4운동이 일어난 것도…우리의 3·1운동이 있은 것도 모두 1919년이 생산한 역사적 장면”(1927년 12월 16일 칼럼)이라며 피압박민족 해방운동의 연계 차원에서 5·4운동에 주목했다. 한국과 중국에서 3·1운동과 5·4운동은 일제의 침략에 시달리는 양국 민중의 단결과 연대의 필요성을 환기하는 측면에서 기억됐던 것이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군벌) 정부의 수장은 청나라가 멸망한 뒤 스스로 황제라고 칭하고 봉건 전제정치를 계속했습니다. 이런 정부가 주권을 팔아먹었어요. 5·4운동은 (외세에) 주권을 넘기지 말라는 반제국주의 운동이자, (봉건적) 정부를 반대한 반봉건 애국운동이었습니다.” 중국의 5·4운동 100주년을 이틀 앞둔 2일 오전. 100주년 기념 전시인 ‘5·4현장’이 열린 베이징(北京)신문화운동기념관을 찾았다. 기념관은 톈안먼(天安門) 인근 옛 베이징대 건물인 베이다홍러우(北大紅樓)에 있다. 이곳에서는 5·4운동 사진 180여 장과 관련 자료를 전시하고 있다. 따가운 햇살로 무더웠던 이날 기념관은 매우 붐볐다. 이곳에서 기자와 만난 런(任)모 씨(50)는 “5·4운동은 민주주의와 독립을 각성시켰다. 학생들이 민중에 이런 의식을 일깨웠다”고 말했다. 산시(山西)성에 사는 그는 대학생 아들과 함께 기념관을 찾았다.● “구시대적 정부에 항거한 구국운동” 1915년 위안스카이(袁世凱) 정부는 일본과 타협해 독일이 확보했던 산둥(山東)반도의 이권 이양 등 일본의 권한을 대폭 허용하는 21개 조항을 수용했다. 1919년 1월 파리평화회의에서 산둥반도를 아예 일본에 넘기기로 결정하자 같은 해 5월 4일 베이징 대학생 등 3000여 명이 톈안먼 일대에서 반대 시위를 벌였다. 5·4운동의 시작이었다. 5·4운동은 주권을 위협하는 외세와 이들과 결탁한 정부에 저항하는 정치운동으로 민주주의와 자유 등 새로운 사상을 일깨운 신(新)문화운동이었다. 당시 군벌정부는 학생들을 탄압했다. ‘5·4현장’ 전시실에는 1919년 6월 11일 베이징시민선언과 관련된 복제 물품도 있었다. 선언은 △대일 외교에서 산둥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지 말고 일본과 1915~1918년 맺은 모든 밀약을 취소하라 △책임 있는 관료들을 퇴진시키고 베이징에서 추방하라 △베이징 군경 사령부를 없애라 △베이징 보안대를 시민 조직으로 바꿔라 △시민은 절대적인 집회와 언론 자유권을 가진다 등 5개 요구사항을 내세웠다. 런 씨의 말처럼 5·4운동은 국민의 주권을 팔아넘기면서 국민의 자유를 탄압한 정부에 대한 본격적인 항거였다. 전시는 5·4운동의 시발점인 5월 4일 시위에 대해 “(당시 군벌) 정부에 (일본과의) 조약을 체결하지 말라고 요구하던 분노는 일본과 밀약에 서명한 내각과 외교관으로 향했다”고 설명했다. 1919년 6월 많은 베이징 학생들이 거리에서 연설했고 정부는 군경을 동원해 학생 약 1000명을 체포했다. 초등학생 딸과 함께 기념관을 찾은 상하이(上海) 거주자인 리징 씨(李靜·39)는 “오랫동안 쌓여온 민중의 분노가 폭발한 것”이라고 말했다. 베이징의 한 초등학교 교사인 리(黎)모 씨(40)는 “청년들이 민중을 자각시켜 생사의 위기에 처한 국가를 구한 애국주의 정신”이라고 평가했다.● 시진핑 “공산당에 복종하는 애당 애국주의”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은 지난달 30일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열린 5·4운동 100주년 기념식 연설에서 5·4운동의 핵심으로 ‘애국주의 정신’을 강조했다. 그는 1시간 이상의 기념 연설 중 애국을 18번이나 강조하며 5·4운동이 애국운동이었다고 콕 집어서 강조했다. 하지만 전시를 찾은 중국 시민들이 5·4운동의 정신으로 거론하던 ‘애국’과는 뉘앙스가 달랐다. 시 주석은 ‘공산당에 복종하는 애국’을 강조했다. 그는 “신시대 중국 청년은 (공산)당의 말을 따라야 하고 당을 따라가야 한다”고 말했다. “애국하지 않고 조국을 속이고 배반하면 국가와 세계에 매우 창피한 일이고 발붙일 곳이 없게 된다”며 “모든 중국인에게 애국은 본분이고 책임”이라고도 했다. 시 주석은 “신시대 중국 청년에게 조국을 열렬히 사랑하는 것은 입신의 본분”이라며 “애국주의의 본질은 애국과 애당을 견지하는 것이며 고도로 통일된 사회주의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날 기념식에는 어린 학생들을 포함해 3000여 명이 참석했다. ‘공산당이 없으면 신중국도 없다’는 등의 노래도 제창했다. 기념식장에는 ‘시진핑 동지를 핵심으로 하는 당 중앙 주변에서 긴밀히 단결하자’는 붉은색 대형 현수막이 붙었다. 익명을 요구한 중국인 학자는 본보에 “5·4운동은 낡은 군벌과 정부답지 않은 정부로 인해 빠진 도탄으로부터 국가를 구해 인민이 진정한 주인이 되는 애국이었다”고 지적했다. 5·4운동 정신에는 항일운동의 성격도 있었지만 시 주석은 연설에서 일본에 대해 한 번도 언급하지 않았다. 미중 패권 경쟁에서 미국의 동맹인 일본을 끌어들이기 위해 중일관계를 개선하는 움직임을 보이는 상황이어서 시 주석이 의도적으로 이를 거론하지 않았다는 분석이 나온다.● 반정부 학생운동 의미 축소 시 주석은 5·4운동에 대해 “청년 지식인이 선봉에 섰다”고 평가하면서도 현재 중국 청년들에게는 ‘당에 대한 복종’을 강조했다. 5·4운동이 가진 반(反)정부 학생시위의 의미를 축소하려는 의도로 풀이된다. 다음달은 1987년 6월 4일에 일어난 톈안먼(天安門) 시위 30주년이다. 5·4운동 100주년과 톈안먼 시위 30주년이 겹치면서 이를 기념하는 시위가 벌어질 가능성을 중국 정부가 차단하려고 총력을 다 한다는 관측이 많다. 이 때문에 5·4운동 100주년이지만 대대적인 행사를 하지 않는다는 얘기도 나온다. 2일 찾은 기념관의 또 다른 전시관에는 1919년 5월 4일 베이징대 등 13개 대학 학생들이 톈안먼에서 집회를 한 뒤 남쪽의 첸먼(前門)을 거쳐 톈안먼이 있는 구공(古宮·자금성) 동쪽의 차오루린(曹汝霖) 당시 군벌 정부 외교차장의 집으로 행진한 경로가 공개돼 있었다. 당시 분노에 찬 학생들은 일본에 각종 권리를 팔아넘긴 매국노로 지목된 차오루린의 집을 불태워버렸다. 베이징시 정부는 1~4일 1호선 천안문동역~천안문서역 구간과 2호선 첸먼 역을 임시 폐쇄했다. 3개 역을 일직선으로 이으면 톈안먼과 톈안문 광장을 둘러싼다. 베이징시는 3개 역을 폐쇄한 이유를 밝히지 않았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중국 정부가 1일 노동절 휴무를 하루에서 갑자기 4일로 연장한 게 바로 5·4운동 100주년과 톈안먼 사태 30주년 집회를 사전에 막기 위한 조치라고 보도했다. ▼“왜 우리는 가만히 있는 것인가”…3·1운동에서 교훈 얻은 中 5·4운동▼ “이번 조선의 독립운동은 위대하고 진실하며 비장했다.…중국의 대학생과 기독교도들은 어찌하여 가만히 있기만 하는 것인가.” 중국 5·4운동의 총사령관 격이자 신문화운동의 기수로 일컬어지는 진독수(1879~1942)는 시사 잡지 ‘매주평론(每周評論)’ 14호(1919년 3월 23일)에서 3·1운동에 대한 감상을 밝히며 중국인의 궐기를 이렇게 촉구했다. 3·1운동 당시 중국 유력 매체들이 한국인의 거족적 독립운동과 단호한 독립의지를 상세히 보도했고, 이는 5·4운동 발발에도 영향을 주었다고 학계는 분석한다. 강수옥 중국 연변대 교수는 논문 ‘근대 중국인의 한국 3·1운동에 대한 인식과 5·4운동’(‘한국근현대사연구’ 79집)에서 이를 조명했다. 논문에 따르면 베이징, 상하이, 톈진의 유력 언론 ‘신보(晨報)’ ‘민국일보(民國日報)’ ‘시사신보(時事新報)’ ‘동방잡지(東方雜誌)’ ‘신청년(新靑年)’ ‘신조(新潮)’ 등이 모두 3·1운동을 전격 보도했다. 상하이에서는 ‘신보(申報)’가 가장 먼저 3·1운동 소식을 전했고, 톈진에서 창간돼 중국 각지에서 발행된 대공보(大公報)도 3월 6일부터 4월 초까지 ‘조선독립활동 더욱 불타오르다’ 등의 연속 기사를 게재했다. 강 교수는 “중국 각지 매체가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전면적, 심층적 보도를 이어갔다”며 “3·1운동의 평화적인 운동 방법과 일제의 잔혹한 진압, 한국인의 두려움 없는 혁명 정신을 자세히 다뤘다”고 밝혔다. 특히 중국인이 3·1운동에서 교훈을 얻어 한국과 같은 민족해방운동을 일으켜야 한다는 호소가 이어졌다. 진독수는 ‘매주평론’에 쓴 논설 ‘조선독립운동의 감상’에서 “조선민족운동의 광영을 통해 우리 중국민족의 치욕을 다시 맛보았다.…일반 국민은 명료하고 정확한 의식적 활동을 한 적이 없다…중국인을 조선인과 비교하면 정말 부끄럽기 그지없다”고 썼다. 1919년 4월 3일 ‘민국일보’도 ‘조선독립에 대한 동정(同情)에서 “본래 조선에 일이 있으면 반드시 만주에도 변고가 생긴다.…결국 조선의 독립은 배일(排日) 문제가 아니고, 생존문제이다. 또 조선만의 문제가 아니고, 동아시아 및 전 세계의 문제”라고 했다. 강 교수는 3·1운동이 중국 각계를 놀라게 해 5·4운동의 성숙, 발생, 진전에 매우 큰 영향을 줬다고 분석했다. 그는 3·1운동이 △중국인의 반제반봉건 투쟁의식의 새로운 각성을 촉진했고 △반제구국 운동의 모델이 됐으며 △피압박민족 해방의 조류가 도달했음을 깨닫게 했다고 봤다. 해방 직후 동아일보는 3·1운동의 세계사적 의미를 “세계약소민족해방운동사에 자연히 빛나는 기록을 지었던 것”(1946년 2월 27일 ’3·1운동의 회상‘), “세계에서 비폭력주의의 원조”(1946년 3월 1일)라고 평가했다. 최근에는 3·1운동이 5·4운동이라는 하나의 사건 뿐 아니라 중국의 ’네이션 빌딩‘(nation-building)에 참조 대상이 되며 지속적인 영향을 줬다는 연구도 나왔다. 리궁중(李恭忠) 중국 난징대 교수는 지난해 11월 서울 성북구 고려대에서 열린 학술대회에서 “3·1운동은 중국 독립국가 개념 형성에 중요한 촉매였다”고 밝혔다. 리 교수는 3·1운동 이후 약 30년간의 각종 자료를 검토했다. 그는 중국 정부가 3·1운동과 한국 독립운동을 통해 일제에 맞선 중국인의 민족해방의식을 환기했다고 봤다. 3·1운동이 중일전쟁을 견디게 해준 긍정적인 본보기가 됐다는 것이다. 3·1운동 소재의 연극 ’산하루(山下淚)‘ 등이 인기를 모으기도 했다. 리 교수는 “3·1운동은 5·4운동의 본보기와 전주곡이 됐을 뿐 아니라 20세기 전반까지 중국인이 국가형성을 탐색하는 데 지속적인 영향을 줬다”고 평가했다. 역으로 일제강점기 한국에서는 5·4운동을 조선의 독립과 연결지어 조명했다. 동아일보는 1925년 3월 2일 1면 사설 ’중국5·4운동‘에서 “기미년 우리 3·1운동에 곧이어 일어난 모든 민족운동 중에는 중국의 5·4운동도 그 하나”라며 “일본은…중국의 완전한 독립을 승인하며, 기타 모든 동아(東亞)에 있는 중국과 유사한 식민지국가의 독립을 조성하야”라고 썼다. 또 “중국 국민운동의 구체적 전개의 제1보를 지은 5·4운동이 일어난 것도…우리의 3·1운동이 있은 것도 모두 1919년이 생산한 역사적 장면”(1927년 12월 16일 칼럼)이라며 피압박민족 해방운동의 연계 차원에서 5·4운동에 주목했다. 한국과 중국에서 3·1운동과 5·4운동은 일제의 침략에 시달리는 양국 민중의 단결과 연대의 필요성을 환기하는 측면에서 기억됐던 것이다. 베이징=윤완준 특파원 zeitung@donga.com조종엽기자 jjj@donga.com}

“나만이 아닌 우리를 위해 동체(同體)의 등을 켜고, 내 가족만이 아닌 어려운 이웃들과 자비의 등을 켜고, 국민 모두가 현재의 어려운 상황 속에서 희망의 등을 켭시다.” 대한불교조계종 종정 진제 스님(사진)은 불기 2563년 부처님오신날(5월 12일)을 앞두고 30일 낸 봉축 법어에서 “우리 모두가 마음과 마음에 지혜의 등불을 밝혀 어두운 사바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또 다른 나를 위해 광명이 되고, 이 사회의 등불이 되자”고 말했다. 대한불교천태종 종정 도용 스님은 봉축 법어에서 “부처님오신날은 일체중생이 지혜로 태어나고 자비로 일어서는 날”이라며 “손에 등 밝히고, 마음마다 지혜를 밝혀 부처님 오신 뜻을 높이 기리고 대자대비의 가르침을 널리 전하자”고 말했다. 한국불교태고종 종정 혜초 스님은 법어에서 “부처님의 자비광명은 하늘의 태양처럼 비치지 않는 곳이 없으며 만물을 평등하게 길러내는 대자대비의 무량한 법신불”이라며 “내가 옳다 네가 그르다고 시비하는 것은 사문의 본분이 아니다”라고 말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동아시아 재난·안전 대응의 공동체를 구축하기 위한 한일 협력 토대를 마련해야 한다.” 고려대 글로벌일본연구원 사회재난안전연구센터가 도서 ‘한일 관계의 긴장과 화해’(한국일본학회 엮음)와 ‘일본, 야스쿠니’(김영근, 김용철 엮음)를 최근 발간했다. 김영근 글로벌일본연구원 교수는 책 ‘한일 관계…’에 실은 글 ‘한일 간 리스크 관리의 정치’에서 “한일 간의 비정상적 외교 부재 상황을 정상화하고 미래지향적 한일 관계의 구축이 필요하다”며 이렇게 말했다. 중국발 미세먼지나 일본 후쿠시마 원전의 방사능 유출, 백두산 화산 폭발 가능성 등 최근 동아시아의 환경 이슈는 한 나라가 감당할 수준을 넘어서고 있다. 김 교수는 “한국과 일본이 초국가적 재해와 안전 문제에 대응할 인재를 양성하고 공동 위기관리 체제를 정비해야 한다”며 “2011년 동일본대지진, 2016년 구마모토 지진에서 보인 일본의 재난 대응과 복구 노력 등에서 얻은 교훈을 한국식으로 소화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김 교수의 주장은 ‘파탄 직전’이라는 말까진 나오는 최근 한일 관계를 개선하고자 하는 목적도 있다. 그는 “한일 화해의 전제조건인 (과거사 등) 대립 구조는 엄연히 해결해야 할 과제”라면서도 “감정적 대응은 대일정책 기조를 흔들리게 하며 한일 협력을 추동하는 힘을 약화시킬 수 있다”고 말했다. ‘외교정책 부재’와 ‘진전 없는 불신의 한일 관계’를 풀기 위해 재난 대응과 같이 협력할 수 있는 새로운 의제를 살펴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는 “정경분리의 원칙 적용과 민간 문화 교류 확대가 한일 관계를 ‘윈윈 게임’으로 전환할 수 있을 것”이라며 “지금까지 축적된 한일 협력의 결과물들이 과거사에 완전히 파묻히거나 미래와 단절된다면 양국의 큰 손실”이라고 말했다. 책 ‘한일 관계…’에는 이 밖에도 한일 관계의 현황과 과제, 분쟁 이슈와 사례 등을 다양한 측면에서 검토한 여러 글이 실렸다. 한편 ‘일본, 야스쿠니’는 일본 사회가 야스쿠니 신사를 중시하는 바탕에는 천황제와 국가신도, 생사관, 국가주의와 같은 일본인의 여러 세계관이 있다고 분석한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수사본부는 고문당하며 ‘살려 달라’ ‘차라리 죽이라’고 외치는 광부와 가족들의 아우성으로 가득 찼다. 우리를 고문하면서 그들은 희열을 느끼고 있었다. 책에서나 본 아비규환이 거기 있었다.” 서강대 트랜스내셔널인문학연구소는 26일 서울 마포구 서강대에서 토크콘서트 ‘기억을 말한다―사북항쟁’을 열었다. 1980년 4월 광부들의 노동 항쟁인 사북사건 당사자들의 증언을 듣는 자리였다. 당시 협상 대표였던 사북항쟁동지회 회장 이원갑 씨(79)는 이날 “그때 고문을 받아 39년이 지난 지금도 병원에 다니는 분도, 억울한 징역살이로 가정이 파탄된 분도 많다”며 “석방된 뒤에도 광부들의 시커먼 손은 누구도 잡아주지 않았다”고 말했다. 사북항쟁은 국내 최대 민영 탄광이었던 동원탄좌 사북영업소 광부와 가족 6000여 명이 열악한 노동조건에 항의하며 총파업과 지역 점거를 벌였던 사건이다. 신군부는 계엄법 위반 등의 혐의로 참여자들을 연행해 구타와 물고문을 자행했고, 이 씨 등 7명은 실형을 선고받았다. 당시 ‘어용’ 시비에 휘말린 노조 지부장의 부인이 정문 게시판 기둥에 전깃줄로 묶인 채 노동자들로부터 가혹한 린치를 당하기도 했다. 이 씨는 “힘없는 광부는 탄광에서 죽어도 회사의 과실을 다 뒤집어썼다”며 “사측의 ‘암행독찰조’가 광부들의 사생활을 감시했고, 노동자는 시멘트 바닥에 꿇어앉아 징계를 받았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또 “자격이 없는 이가 당시까지 1년 넘게 노조 지부장 행세를 할 수 있었던 건 정권과 기업이 유착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날 행사에는 당시 항쟁지도부 신경 씨(77), 참여자로 ‘사북사태 진상보고서’를 낸 황인호 씨(63), ‘타오르는 광산’ 등을 낸 작가 안재성 씨(59) 등도 참석했다. 신 씨는 “광부와 가족들은 탄광 물이 섞인 개울물을 먹고, 베니어합판으로 지은 집에서 살았으며, 탄을 캐다가 죽는 게 예사였다”며 “노조 회의에 중앙정보부 요원이 동석해서 감시했다”고 말했다. 신 씨는 “사북항쟁은 인간답게 살아보자는 몸부림이었다”고 말했다. 이 씨와 신 씨는 25년이 지난 2005년 민주화 운동자로 인정됐다. 황 씨는 “재심으로 무죄를 선고받은 이는 이들뿐이고, 당시 연행된 149명 가운데 재판에 회부되지 않은 122명은 똑같은 고문을 받았지만 기소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법적 구제마저 쉽지 않다”며 “학생, 지식인들과 달리 광부들은 민주화운동의 기억에서도 차별받고 있다”고 말했다. 트랜스내셔널인문학연구소는 사북항쟁 구술 자료 테이프 26개를 디지털 아카이브로 구축할 계획이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19세기 초반까지 보통의 미국인은 천연두나 페스트 같은 병을 앓는 이는 다른 사람을 아프게 만들 수 있는 무형의 물질을 발산한다고 생각했다. 환자의 숨, 피부, 배설물, 옷 등이 병의 ‘씨앗(seeds)’를 품고 있어 건강한 사람에게 옮길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그러나 19세기 중반에 들어 세균이 질병을 야기한다는 과학적 사실을 받아들였다. 의학사(史)를 연구하는 미국 뉴욕주립대 역사학과 교수가 1870∼1930년 미국 공중보건의 역사를 다룬 책이다. 세균이 알려진 뒤 두루마리 휴지가 호텔 화장실에서부터 쓰이기 시작했고 일회용 위생용품과 살균제도 등장해 오늘날까지 세계적으로 널리 사용된다. 세균을 피해야 한다는 인식의 확산은 미국에서 거의 ‘복음의 전파’ 수준이었다고. 위생이 정치, 사회, 문화에 미친 영향이 풍부하게 담겼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소장 이종화)는 ‘북한 비핵화와 한반도 및 동아시아 평화공동체 구축’을 주제로 25일 오후 2시 서울 성북구 고려대 백주년기념관에서 국제학술회의를 개최한다. 한국과 미국 중국 일본 베트남 전문가들이 북핵 문제 협상에 대한 인식과 대응 방향을 살피는 자리가 될 것으로 보인다. 브라이언 마이어스 동서대 교수와 왕쥔성 중국 사회과학원 교수, 니시노 준야 일본 게이오대 교수, 응이엠뚜언훙 베트남 세계경제정치연구원 교수 등이 발표를 맡았다. 연구소는 “동아시아 지역은 미중 전략적 경쟁이 본격화되며 다양한 영역에서 불확실성이 높아지고 있다”면서 “학술회의에서 비핵화와 한반도 평화 실현 방안을 탐색하려 한다”고 밝혔다. 발표한 논문은 연구소가 발간하는 영문저널 ‘이스트 아시안 커뮤니티 리뷰(East Asian Community Review)’에 수록할 예정이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약 400년 전 한문으로 쓴 ‘홍길동 전(傳)’이 발견됐다. 명칭은 ‘노혁전(盧革傳)’. 이 작품은 한글소설 ‘홍길동전’의 원작자가 허균(1569∼1618)이 아니라는 걸 뒷받침하고 있어 주목된다. 이윤석 연세대 명예교수(국문학)는 다음 달 발표할 예정인 논문에서 “노혁전은 짧은 한문 ‘전’ 형식이며 내용은 야담에 가깝다”며 “노혁전 저자보다 19년 앞서 태어난 허균의 홍길동전 역시 노혁전과 내용·형식이 유사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번에 발견한 노혁전은 전북 전주에 사는 조봉래 씨가 이 교수에게 제공했다고 한다. 노혁전은 의주부윤 등을 지낸 지소 황일호(1588∼1641)가 1626년 쓴 것으로 ‘지소선생문집(芝所先生文集)’에 실려 있다. 황일호가 전주 판관 시절 종사관으로부터 들은 도둑 ‘노혁’의 일대기를 담았다. 글에는 “노혁의 본래 성은 홍(洪)이고, 그 이름은 길동(吉同)”이라고 적혀 있다. 연산군 시절 실존 인물인 홍길동의 이야기가 변형돼 전해지다, 120여 년 뒤에 기록된 것으로 보인다. 한편 1674년 간행된 택당집(澤堂集)에는 “허균은 또 홍길동전을 지어 수호전에 비겼다(筠又作洪吉同傳以擬水滸)”고 나와 있다. 그러나 한글소설 홍길동전에는 허균의 사후 인물인 장길산이 언급되는 데다, 한글소설 양식 자체가 허균 사후 약 200년 뒤에나 등장한다. 결국 허균이 지은 홍길동전은 한글소설이 아니라 노혁전과 비슷한 한문 전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노혁전은 길이도 약 750자에 불과해 4만∼5만 자 분량의 한글소설 홍길동전과는 차이가 크다. 이 교수는 “한글소설 홍길동전은 1800년경 서울의 세책집에서 만들어 빌려주던 서민의 오락물이지 양반 지식인이 사회 문제를 비판하고자 지은 것이 아니다”라며 “허균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는 점이 노혁전의 발견으로 다시 한 번 드러났다”고 말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올해 천도교는 수운대신사(최제우)가 동학(천도교)을 창도한 지 160년을 맞는다. 그는 양반 아이가 나이 지긋한 노비에게 하대를 하던 시대에 ‘세상 모든 사람은 누구나 근원적으로 평등하다’는 혁명적인 가르침을 내렸다. 노비문서를 불태웠고 자신의 두 여종 가운데 한 명은 딸, 한 명은 며느리로 삼았다. 민중의 큰 호응을 얻은 동학은 동학농민혁명을 일으켰고, 100년 전 3·1운동을 주도했다. 5일 새로 취임한 송범두 천도교 교령(70)을 22일 서울 종로구 수운회관에서 만났다. ―천도교가 3·1운동을 주도했던 힘은 무엇인가. “보국안민(輔國安民) 정신이다. 의암성사(손병희)는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고 땅을 치며 ‘10년 안에 나라를 되찾겠다’고 각오했다. 우이동 산골에 수련장을 지어 젊은이 483명을 훈련시키며 정신무장을 시켰다. 이들이 나중에 각지에서 3·1운동 궐기를 이끌었다. 중앙대교당을 짓는다는 명목으로 모은 건립 자금의 대부분을 일제 감시를 피해 독립운동 자금으로 썼다. 3·1독립선언서 역시 천도교 인쇄소인 보성사에서 3만5000장을 비밀리에 인쇄해 천도교 조직을 통해 전국에 배포했다. 천도교가 이렇게 철저히 준비했기에 3·1운동이 일어날 수 있었다.” 당시 인구 1700여만 명 가운데 교인이 300만 명에 이르렀던 천도교는 일제의 극심한 탄압과 분열 책동에 내몰렸다. 당시 장안에는 “천도교는 이제 굶어 죽는다”는 소문이 났다고 한다. 천도교는 동학농민혁명 당시 수십만 명이 희생됐다. 1, 2대 교주 최제우, 최시형이 처형됐을 뿐 아니라 3·1운동을 이끈 3대 교주 손병희까지 옥고 끝에 서거했다. 송 교령은 “대를 이어 참혹한 형벌에 수장을 잃은 종단은 천도교뿐일 것”이라며 새삼 안타까워했다. ―법정 동학농민혁명 기념일(5월 11일)이 올해 처음 지정됐다. “천도교는 나라를 침탈당하는 상황에서 주인이 주인 되고,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바랐다. 오늘날 그런 뜻이 많이 묻힌 것 같아 가슴이 아프다. 5월 11일 기념행사에서 막상 천도교는 소외됐다. 동학농민군은 청수(淸水)를 모셔놓고 마음에 고하는 기도를 하고, 힘을 내도록 주문을 외고 난 뒤 목숨을 걸고 죽창을 들었다. 그런 정신을 식전식후 행사에라도 담을 수 있을 텐데, 행사 계획에서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인터뷰 자리에 동석한 교인이 “주최 측이 천도교와는 상의를 전혀 안 했다”며 “요즘 격분한 교인들의 전화가 중앙총부에 빗발친다”고 덧붙였다. 경남 남해 출신인 송 교령은 초교 4학년 때 70, 80대 어른들도 어린이에게 존대하는 천도교의 모습이 고귀해 보여 입교했다. ‘어린이’라는 말을 만들어낸 것이 천도교다. “어른들이 어린이와도 꼭 마주 보고 큰절을 했다. 지금은 입식 생활을 하니 서서 맞절하지만. 천도교는 교인 누구나 설교를 할 수 있고, 교리와 교직에 성별을 포함해 어떤 구별도, 막힘도 없다. 해월신사(최시형)가 어느 집에 가 베 짜는 소리를 듣고 ‘누가 짭니까’라고 물었다. 집주인이 ‘며느리입니다’라고 답했다. 해월신사가 다시 ‘아닙니다. 한울님이 짜는 겁니다’라고 했다. 천도교 종지(宗旨)가 ‘사람이 곧 하늘(인내천·人乃天)’이고, 덕목이 사람을 한울님처럼 모시라는 ‘사인여천(事人如天)’이다.” ―앞으로 계획은…. “천도교인으로서 진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도인이 6만∼7만 명 된다. 입교식을 하는 이들도 꾸준히 늘고 있지만 교세가 선대의 업적에 비할 수 없는 게 사실이다. 재도약을 위해 뒤떨어진 일부 제도부터 다듬을 생각이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공산당의 ‘공(共)’자만 인용해도 잡혀가던 시절에도 원불교 스승들은 통일에 대해 긍정적이었지요. 제가 원기 52년(1967년)에 출가했으니 벌써 반백 년 전 이야기입니다.” 원불교 최고 지도자인 전산 김주원 종법사(71·사진)는 28일 ‘원기 104년 대각개교절(원불교 개교기념일)’을 앞두고 23일 전북 익산시 중앙총부에서 열린 간담회에서 “교단에 통일부원장을 임명하고, 전문가 그룹을 양성하는 한편 통일 기금을 마련하고 있다”고 말했다. 전산 종법사는 이날 원불교가 여성 교역자의 출가 시 결혼을 하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받아 왔던 데 대해 “규정을 개정해 내년부터 이 제도를 폐지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그는 일과 수행은 하나라고 강조했다. 종법사는 “대종사(소태산)는 생활 속에서 선(禪)을 하라고 했다”며 “따로 처소를 구해 선을 한다고 공부가 되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또 “진리가 작용하는 것이 은(恩)이다. 진리적으로 볼 때는 해로운 것도 이로운 것도 없고, 크게 보면 은혜가 아닌 것이 없다”고 했다. 일상의 화를 어떻게 다스려야 하느냐는 물음이 나오자 “감정이 앞서면 합리적인 판단을 할 수 없기에, 평소에도 마음을 붙잡아 멈추는 연습을 해야 한다”고 답했다. 올해 원불교 대각개교절 봉축행사는 ‘모두가 은혜입니다’가 주제다. 원불교 익산성지에서는 26일부터 다음 달 5일까지 제12회 ‘깨달음의 빛 축제’를 연다. 익산성지의 근대문화유산을 개방하는 한편으로 원불교 경전(대종경) 판화 제작 과정을 담은 다큐멘터리 상영과 깨달음에 대한 영화 소개, 각종 체험 프로그램 등을 마련한다. 기념식은 28일 오전 10시 원불교 중앙총부에서 연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한 획, 한 획 글자의 의미를 생각하며 만든 캘리그래피(Calligraphy)를 보면 이루 말할 수 없는 성취감을 느낍니다. 펜과 종이만 있으면 되니 큰돈이 드는 것도 아니고요.” 대학원생 황의현 씨(30)는 요즘 캘리그래피에 푹 빠져 있다. 그의 캘리그래피 작업이 특별한 이유는 한글이나 영어가 아닌 아랍어로 쓴다는 것이다. 황 씨는 “아랍어 글씨는 수많은 점들을 균형감 있게 배치해야 하고 고정된 형태를 벗어나 예술적으로 크게 변형할 수 있는 게 매력이다”며 “1∼2시간 동안 몰입해 완성한 캘리그래피는 내게 소중한 예술작품”이라고 말했다. 황 씨는 캘리그래피 동호회 활동을 하며 페르시아어의 글씨체인 ‘파르시’체도 연습하고 있다. 김종훈 씨(28)도 아랍어 캘리그래피 작품을 만든다. 어학 연수로 튀니지에 머무는 동안 일종의 서예학원에 다니며 취미로 아랍어 캘리그래피를 배웠다. 지난해까지는 관심 있는 사람을 대상으로 무료 강습도 했다. 김 씨는 “취직이나 경력 개발과 관련된 활동은 아니지만 삶이 힘들 때마다 펜을 집어 들고 정성스레 글자를 쓰면 자존감도 높아진다”고 했다. 그는 노래 가사, 좌우명 등을 아랍어로 번역해 작품을 만든다. 컴퓨터, 스마트폰에 익숙해져 좀처럼 펜을 쓸 일이 없어진 시대에 펜을 잡고 손으로 자신이 원하는 문구를 쓰는 캘리그래피가 각광받고 있다. ‘쓰기의 귀환’인 셈이다. 캘리그래피는 약 20년 전 유명 소설가들의 책 표지 제목 디자인으로 사용되면서 대중적으로도 인지도를 얻은 뒤 꾸준히 발전해 오늘날 제품 브랜드, TV 드라마·다큐멘터리 제목, 생활용품 디자인에 활용되고 있다. 한때 한글이나 알파벳을 예쁘게 쓰는 정도로 인식되기도 했지만 최근에는 독립된 예술 장르로 인정받으며 다양한 시도가 이어지고 있다. 아랍어 캘리그래피를 비롯해 스케치, 드로잉과 결합한 캘리그래피가 인기를 모으고 있으며 작업 도구도 만년필, 색연필, 붓펜, 초크펜, 마커펜 등으로 다양하다. 과거에는 광고, 디자인 분야 종사자들이 캘리그래피를 주로 배웠지만 요즘에는 취미로 캘리그래피를 배우려고 전문학원을 찾는 사람이 늘었다. 서울과 제주에서 필묵아카데미를 운영하는 김종건 대표는 “취미로 캘리그래피를 배우는 사람들이 수강생의 20%에서 최근 절반까지 늘었다”고 했다. 취미활동을 공유하는 애플리케이션 ‘프립’에만 캘리그래피 관련 활동이 100여 개에 이른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도 소규모로 캘리그래피 작품을 공유하는 모임이 많다. 연령대도 다양하다. 이산글씨학교를 운영하는 이산 작가는 “중고교생부터 70대까지 매주 수강생 60여 명이 강의를 듣는다”고 말했다. 취미로 시작해 전문 자격증까지 취득하려는 수강생도 적지 않다고 한다.영문 캘리그래피가 한때 큰 인기를 끌었는데, 최근에는 한글 캘리그래피가 더 각광을 받고 있다. 이산 작가는 “우리에게 익숙한 한글은 개인 취향에 따라 자기만의 글씨체를 만들기도 더 쉽고, 무한한 변형도 가능한 게 매력”이라고 설명했다. 김종건 대표는 “한글 캘리그래피를 배우기 위해 스위스, 독일, 영국에서 오는 외국인 수강생도 적지 않다”고 했다. 손글씨의 인기는 도서 시장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출판계에 따르면 시를 필사할 수 있도록 만든 ‘필사 시집’이 꾸준히 판매되고 있다. TV 드라마에 등장했던 필사 시집 ‘어쩌면 별들이 너의 슬픔을 가져갈지도 몰라’(김용택 지음·예담)는 2015년 첫 출간 이래 81쇄를 찍었고, 현재 3권까지 출간됐다. 윤동주 시인의 시를 필사할 수 있는 책도 시인의 탄생 100주년(2017년)을 즈음해 여러 권이 출간됐다. 자신의 생각을 손으로 쓸 수 있도록 디자인한 각종 다이어리북도 사랑받고 있다.김기윤 pep@donga.com·조종엽 기자}

“캘리그래피도 법서(法書)를 제대로 익히고 나서 써야 좋은 글씨가 나오지 않을까요.” 서울 종로에서 66년째 한국서예학원을 운영하고 있는 서예가 평강 정주환 원장(86)은 16일 이렇게 말했다. 캘리그래피는 좁은 의미로는 서예와 같은 말이다. 동양의 전통 캘리그래피인 서예는 수천 년 동안 발전해왔고, 현대 들어서도 전문 서예가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취미로 서예를 배운다. 정 원장은 “서예는 글씨의 아름다움을 통해 마음을 표현하는 것”이라며 “정서를 순화하고 심성을 아름답게 해 준다”고 말했다. 전북 고창 출신인 정 원장은 어릴 적부터 명필로 소문이 나 학교 상장이나 명정(銘旌·장례에 쓰는 기), 비문을 도맡아 썼다고 한다. 상경해서도 정부 인쇄홍보물에 들어가는 글씨를 쓰다 학원을 운영하게 됐다. 초기 학원 이름은 한국서예디자인학원이었고 서예 강습뿐 아니라 그래픽 디자인, 일러스트, 공업·상업 디자인을 모두 다뤘다. 정 원장은 1세대 캘리그래퍼인 셈이다. 그는 최근 제자의 소개로 한반도의 화합과 평화를 염원한다는 취지로 만들어진 수제맥주 ‘소원’의 상표 캘리그래피를 써 주기도 했다. ‘소’자는 평창 올림픽의 스키 종목에서, ‘원’ 자는 무릎 꿇고 아이를 안은 부모의 모습에서 모티프를 얻었다고 한다. 남북코리아미술교류협의회 이사장이기도 한 그는 1991년부터 남북 작가들의 공동 전시를 꾸준히 열고 있다. 지난날 서예학원생이 많을 때는 300명에 이르렀고 대학과 회사로부터 출강 요청이 이어졌다. 학원은 예전 같지는 않지만 수십 년째 다니는 이들이 있고, 젊은이들도 꾸준히 문을 두드린다. 정 원장은 “지금도 붓을 잡으면 잡념이 사라진다”며 “인격 도야와 아름다움의 창조를 겸하는 서도(書道)에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안질(眼疾)을 앓았던 세종대왕은 오늘날로 치면 시각장애 2급 정도로 추정된다고 한다. 조선시대 정1품 벼슬에 오른 장애인도 있었다. 평민 장애인도 자신에게 맞는 갖가지 직업을 갖고 자립적인 삶을 살아갔다. 중증 장애인은 나라가 구제에 나섰다. 편견은 엄연히 존재했지만 오늘날 정도의 차별을 받은 건 아니고, 사회의 양지에서 비교적 떳떳하게 살았다고 한다. 역사 속 소외계층의 모습을 연구해 온 고려대 초빙교수가 개화기와 일제강점기 장애인의 삶을 조명한 책이다. 근대, 특히 일제강점기로 들어오며 상황은 급격히 달라졌다. 산업화 등으로 장애인의 수가 급증한 반면 복지정책은 거의 시행되지 않았다. 장애의 인식도 매우 부정적으로 바뀌어 동정과 비유의 대상을 넘어 놀림과 학대, 배제의 대상이 됐다. 조선시대 장애인은 몸에 병이 있는 사람, 불편한 사람으로 여겨졌지만 근대에는 ‘불구자’ 즉, 뭔가를 갖추지 못한 사람으로 불렸다. 20세기 초 장애인에 대한 차별과 배제를 정당화하는 우생학이 확산되며 부정적 인식은 더욱 강해졌다. 어느 시대보다 큰 고통을 겪으면서도 뛰어난 업적을 이룬 이들도 있었다. 책은 의병과 독립운동가, 교육자, 예술가 등으로 활약한 장애인들을 평전 형식으로 소개한다. 저자는 “장애인사(史)를 연구하다 보니 역사는 때로 후퇴할 수도 있다는 걸 알게 됐다”며 “현대 장애 문제의 뿌리는 외부에서 이입된 것”이라고 말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2019년 부활절을 맞아 개신교에서는 예배와 각종 행사를 통해 예수 부활의 의미를 되새긴다.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과 합동, 기독교대한감리회,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 한국기독교장로회, 기독교한국침례회, 대한성공회 등 국내 70여 개 교단은 21일 오후 3시 서울 여의도순복음교회에서 한국교회부활절연합예배를 올린다. ‘부활의 생명을 온 세계에’가 주제이고 ‘예수와 함께, 민족과 함께’가 표어다. 이승희 예장 합동 총회장의 대회사로 시작하고 윤성원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총회장이 성만찬을 진행한다. 설교는 전명구 감리회 감독회장이 맡는다. 이영훈 여의도순복음교회 위임목사는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의 날 저녁에 제자들에게 두 차례나 ‘너희에게 평강(평화)이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하셨다”며 “오늘날 한국사회가 이 평화의 메시지를 통해 계층, 지역, 세대, 이념 갈등을 녹이고 하나가 돼야 한다”고 말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는 ‘3.1운동 100년 함께 만드는 평화’를 주제로 21일 서울 종로구 연동교회에서 부활절 새벽예배를 올린다. 이에 앞서 신도들과 역사 속 고통의 현장을 탐방하는 ‘고난의 현장순례’도 하고 있다. 전쟁과여성 인권박물관, 대전 산내 골령골 학살지 등을 거쳐 19일 광주 5·18민주광장을 찾는다. 지역별 행사도 다양하다. 과천시기독교연합회(회장 원준희 목사)는 21일 오후 3시 경기 과천시 과천소망교회에서 ‘과천시 부활절 연합예배 및 축하음악회’를 연다. 탈북청소년 대안학교 학생들과 교회 찬양대가 참여한다. 전북 익산 기독교인들로 구성된 미크로스합창단은 21일 오후 7시 반 익산영생교회에서 ‘메시아-예수의 부활을 기리다’ 연주회를 연다. 클나무오케스트라와의 협연으로 헨델의 메시아 전곡을 2시간 반 동안 공연한다. 부산기독교총연합회는 15일 부산진역광장에서 짜장나눔축제를 열었다. 부산 부활절연합예배는 21일 부산 경성대에서 올린다. 경북 포항의 포항장성교회는 20일 오전 10시 영일대해수욕장 일원에서 ‘2019 개안수술을 위한 걷기대회’를 연다. 저소득층의 개안 수술비 마련을 위한 행사다. 대구기독교미술선교협회는 21일까지 대구 중구 대백프라자갤러리에서 회원 초대전을 연다. 지역별 연합 예배도 예정돼 있다. 울산에서는 21일 오후 3시 울산우정교회에서 2019 울산부활절연합예배를 올린다. 울산시기독교총연합회 회장 김영동 목사가 강사로 나선다. 대구부활절연합예배는 21일 오후 3시 대구스타디움에서 열린다. 강원 원주시기독교연합회는 이날 오후 2시 원주종합운동장에서 원주시 부활절 연합예배를 연다. 춘천중앙교회는 20일까지 오전 5시 반마다 사순절 특별새벽기도회를 열고, 21일 오전 11시 교회 본당에서 부활절 예배를 올린다. 경기 부천시기독교총연합회는 21일 오후 3시 부천시 소사동 소재 서울 신학대에서 연합예배를 드린다. 광명시부활절연합예배도 같은 시간 광명시기독교연합회 주최로 주품교회에서 열린다. 청주시기독교연합회는 21일 오전 5시 청주 올림픽 국민생활관에서, 충주시기독교연합회는 이날 오전 5시 반 충주체육관에서 부활절연합예배를 각각 드린다. 나눔 실천도 이어지고 있다. 사랑의장기기증운동본부는 부활절을 한 주 앞둔 시점까지 전국 42개 교회에서 2746명의 성도가 장기기증 희망등록에 참여했다고 밝혔다. 구세군 긴급구호팀은 강원 산불 이재민들과 피해 복구 작업에 나선 소방대원 및 자원봉사자들에게 생필품과 간식을 전달했다. 한국기독교연합봉사단은 강원 양양군으로 구호팀을 급파하고, 고성과 속초에 구호캠프를 설치해 이재민들에게 구호키트를 전했다. 전남노회 광주제일교회는 부활주일 헌금을 화재 피해를 입은 전남노회의 다른 교회 및 피해 복구 작업에 쓴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군사사(史)적 관점에서 일본의 실질적인 한국 지배는 러일전쟁 당시인 1904년 2월 9일 일본군의 서울 점령으로 이미 시작됐다.” 한국역사연구원(원장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은 일본 메이조(名城)대 이나바 지하루(稻葉千晴·62) 교수를 초청해 16일 근대사 세미나를 개최했다. 이날 ‘군사사로 본 한국 병합’을 주제로 발표한 이나바 교수는 “일본군은 러일전쟁이 끝난 뒤에도 철수하지 않고 1945년 8월 패전까지 군사력을 통해 한국 지배를 떠받쳤다”고 말했다. 러일전쟁은 1904년 2월 8일 일본 함대가 뤼순(旅順) 군항을 기습 공격하면서 시작됐고, 일본군은 인천으로 상륙해 서울을 점령한 뒤 10만 명가량의 병력을 한반도를 통해 만주로 이동시켰다. 일본군은 군대를 진주시킨 만주에서는 바로 계엄령을 선포하고 군정서를 설치했지만 한국에서는 적어도 형식적으로는 그러지 않았다. 이나바 교수는 “그러나 일본군이 1904년 7월 3일 발포한 ‘군율’은 이름만 다를 뿐 사실상 계엄령이었다”고 말했다. 일본군이 발포한 ‘군율’에 따르면 한국주차군 사령관이 일본의 군사행동과 행정을 방해하거나 방해할 우려가 있는 한국인은 한국 법을 무시하고 극형에 처할 수 있었다. 일본군은 2970만 m²(약 900만 평)에 이르는 토지를 강제로 수용하기도 했다. 이나바 교수는 “일본 외무성 사료관에 한일의정서(1904년 2월 23일 일제의 강박 아래 공수동맹·攻守同盟을 전제로 체결된 조약) 교섭 파일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다”며 “이는 외무성이 원래부터 한국 외교당국과 교섭할 생각이 없었고, 한일의정서 체결은 군사력을 배경으로 한 일본의 독단 행위였다는 걸 뒷받침한다”고 말했다. 세미나에 참석한 서영희 한국산업기술대 교수는 “불법적 침략을 강조하려는 이나바 교수의 의도는 이해할 수 있지만 이 관점에 따르면 1904년부터 1910년 강제병합 전까지 대한제국의 주권을 무시하는 결론에 이를 소지가 있다”고 말했다. 이태진 교수는 “그럼에도 이번 발표는 일본이 전쟁과 동시에 한국을 군사적으로 강점했고, 한일의정서는 저지른 일을 감당하려고 그 뒤에 강요한 것에 불과하다는 걸 드러낸다. 한국주차군이 발포한 ‘군율’은 주차군 군령과 통감부 법령으로 바뀌며 한일강제병합까지 이어진다”고 설명했다. 이날 토론자로 나선 최덕규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은 “대한제국은 개전을 앞두고 중립 선언을 열강에 타전했고, 일본의 한국 점령은 20세기 전쟁사에서 교전국이 중립국을 침략한 최초의 사례였다”고 설명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불기 2563년 부처님오신날(5월 12일) 봉축행사가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17일 열린 ‘미륵사지 탑등(燈)’ 점등식을 시작으로 막이 올랐다. 올해 부처님오신날 표어는 ‘마음愛(애) 자비를! 세상愛 평화를!’이다. 미륵사지 탑등은 국보 제11호인 익산 미륵사지 석탑을 한지로 재현한 것으로 좌대를 포함해 높이가 20m에 이른다. 봉축 행사의 절정은 5월 3∼5일 서울 조계사와 종로 일대에서 열리는 국가무형문화재 제122호 연등회 행사다. 4일 동국대에서 어울림마당이 열린 뒤 연등행렬이 오후 7시부터 동대문을 거쳐 종로, 조계사로 이어진다. 올해 행렬에는 중생의 제도를 상징하는 불교의 네 가지 물건(법고, 범종, 운판·雲版, 목어) 모양의 등이 선두에 선다. 이어 한반도의 평화를 기원하며 대금과 장구를 든 모습의 주악비천등(奏樂飛天燈)이 뒤따른다. 행렬이 끝나는 오후 9시 반부터 종각 사거리에서는 참가자와 시민이 다양한 장르의 음악과 함께 강강술래 등을 즐기는 회향한마당이 열린다. 전통 등 전시회도 3∼12일 서울 조계사 옆 우정공원, 봉은사와 청계천 등에서 열린다. 5일 어린이날을 맞아 조계사 앞 우정국로에서 열리는 전통문화마당에서는 어린이 전통놀이 체험을 비롯해 여러 프로그램이 진행된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유림의 독립운동인 파리장서운동 100주년 기념행사가 17일 서울 종로구 성균관 명륜당과 전국 향교에서 열렸다. 파리장서운동은 1919년 3·1운동에 호응해 면우 곽종석 선생(1864¤1917)을 비롯한 유림대표 137명이 독립청원서를 파리강화회의에 보낸 사건이다. 이를 주도한 유림 500여명이 옥고를 치르는 등 일제의 탄압을 받았다. 김영근 성균관장은 이날 기념사에서 “나라가 풍전등화에 처했을 때 유림은 선비정신에 입각해 의병운동을 주도하고 파리장서를 작성해 독립운동을 벌였다”며 “국권을 빼앗긴 시국에서도 목숨을 걸고 서명한 선배 유림의 정신을 이어받아 유림이 거듭나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햇다. 문희상 국회의장은 축사에서 “3·1운동이 확산되는 데는 서울에서 진행된 고종의 국장에 참석한 뒤 귀향한 유림의 역할이 컸다”며 “모진 박해와 탄압을 받았지만 뜻을 굽히지 않은 지사들의 정신이 계승돼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낙연 국무총리도 축사에서 “‘붓의 투쟁’으로 불리는 파리장서운동을 계기로 유림이 대거 독립항쟁 대열에 참여했고 지속적인 독립운동의 동력이 됐다”고 말했다. 유림독립항쟁 파리장서100주년 기념사업 추진위원회는 이달 말까지 성균관 명륜당 일원에서 파리장서 관련 자료를 전시한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신라 출신 당나라 고승 무상선사(684∼762)의 사리탑(사진)이 발견됐다. 최석환 한국국제선차문화연구회장(월간 ‘차의 세계’ 발행인)은 중국 쓰촨(四川)성 펑저우(彭州) 단징(丹景)산 금화(金華)사에서 무상선사의 사리탑을 최근 확인했다고 16일 밝혔다. 무상선사는 정중종(淨衆宗)을 일으킨 인물로 쓰촨성을 무대로 선불교를 꽃피웠으며 티베트에도 선법을 알렸다. 최 회장은 “금화사 김두타원(金頭陀園)에 무상선사의 사리탑을 포함해 20여 기의 탑전이 1200년간 보존됐는데 10년 전 펑저우시 정부가 자연경관을 훼손한다며 김두타원을 허물었다. 그러나 사리함은 별도로 보관됐고, 사리탑도 복구하겠다고 시 정부가 이번에 밝혔다”고 전했다. 최 회장에 따르면 안사의 난을 맞아 쓰촨성으로 피한 당 현종의 여동생 금화공주가 무상선사의 법력에 감화돼 자신이 머물렀던 행궁을 금화사로 바꿨다고 한다. 무상선사는 김두타, 김화상, 김선사 등으로도 불렸고, 송고승전은 그가 신라 성덕왕의 아들이라고 전한다. 무상선사가 중국 오백나한 중 455번째 조사에 올랐다는 사실을 2001년 밝히기도 했던 최 회장은 “무상선사는 차와 선이 하나가 되는 동아시아 차 문화의 비조”라고 설명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천주교 서울대교구장인 염수정 추기경은 부활절(21일)을 앞두고 “아직 우리 사회에서는 만연한 물질주의 등 다양한 형태로 생명이 억압받고 있다”며 “각자의 자리에서 생명을 존중하고 보호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15일 발표했다. 염 추기경은 이어 “최근 헌법재판소가 낙태죄 형사처벌 조항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린 것이 생명 경시로 이어질까 우려스럽다”며 “후속 입법 절차가 신중하게 이뤄져야 한다”고 덧붙였다. 한국기독교총연합회 대표회장인 전광훈 목사는 이날 “제자들의 더러운 발을 씻기신 주님과 같이 낮아지기를 자처하며 이웃의 허물과 아픔을 감싸 안을 수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자”고 말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는 “2019년 부활절이 진정한 자유와 해방, 민주와 평화를 향해 나아가는 새 역사의 마중물이 되기 바란다”고 밝혔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장편 ‘하의도’(2017년) 등을 쓴 김남채 소설가(75)가 인촌 김성수 선생(1891∼1955)의 삶을 소재로 한 장편소설을 최근 출간했다. 제목은 인촌 선생의 유언을 딴 ‘나라 앞날이 걱정이다’(동서문화사·1만5000원)이다. 김 작가는 4일 서울 종로구 동아미디어센터에서 “인촌 선생은 거대한 강물과 같은 포용력으로 시대를 감싸며 헤쳐 나갔고, 대한민국을 건국했다”며 “민족만 바라보고 살다 간 민족주의자 인촌의 면모를 조명하고자 했다”고 말했다. 소설은 1906년 인촌이 신학문을 공부하고자 창평(전남 담양군) 영학숙에 입학해 평생의 지기 고하 송진우 선생을 만나는 장면에서 시작해 눈을 감기까지의 일대기를 담았다. 김 작가는 “일제강점기 러시아로 피신하려는 사회주의자들에게 말없이 금고를 열어주는 모습, 경자유전 원칙(농사짓는 사람만이 농지를 소유할 수 있음)을 담은 헌법 초안에 적극 찬성하는 모습, 제헌 국회의원을 선출하는 5·10총선거에서 선거구가 없는 월남 이북 동포들을 위해 자신의 선거구를 양보하고 불출마하는 모습에서 나타난 인촌의 인품이 특히 인상 깊었다”고 말했다. 소설은 ‘평전 인촌 김성수’ 등 여러 자료를 바탕으로 썼다. 김 작가는 “흥미를 살리기 위해 픽션을 가미하긴 했지만 사료에서 발견한 사실들을 편집한 것만으로도 소설이 완성돼 어쭙잖은 허구는 끼워 넣을 틈이 없었다”고 말했다. 그러다 보니 “허구보다 더 경이로운 실제 사건들의 점철”이 됐다고 한다. 그는 “각종 서적과 자료를 숙독하며 인촌을 공부했지만 흠결을 찾기 어려웠다”며 “아무리 정권이 바뀌고 이념 대립이 치열하다고 해도 진실이 잘못 알려져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