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호재

이호재 기자

동아일보 편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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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에 관심이 많다. 틈틈이 소설을 쓰며 스토리텔링에 천착한다. 숨소리까지 살아 숨쉬는 생생한 내러티브 기사가 넷플릭스 영상보다 가치 있는 컨텐츠라 믿는다.

hoho@donga.com

취재분야

2025-11-17~2025-12-17
문화 일반51%
인사일반20%
문학/출판10%
기획7%
무용3%
사고3%
칼럼3%
기타3%
  • 내가 무슨 책으로 보이니?

    “과학책에 대한 서평이 확산된다면 독자들이 과학을 더 가깝게 느낄 것 같았습니다.”이명현 과학책방 갈다 대표는 2일 과학서평 잡지 ‘시즌(SEASON)’ 창간호를 펴낸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과학이 낯선 일반 독자들을 위해 국내에서 처음으로 과학책 전문 서평지를 만들게 됐다는 것. 시즌은 사계절마다 한 번씩 펴내는 계간지다. 아직 판매량이 집계되지 않았지만 1년 구독자가 2주 만에 80명을 넘었다. 이 대표는 “시즌이 일반인들이 과학에 관심을 갖게 하는 징검다리 역할을 하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최근 과학 혹은 공상과학(SF)을 전문으로 다루는 정기 간행물이 출간돼 눈길을 끌고 있다. 인문학 혹은 순문학 잡지들이 잇달아 폐간된 것과는 대조적인 현상이다. 전체 내용 중 일부를 과학 책에 할애하는 서평지나 학술지는 기존에도 있었다. 하지만 시즌처럼 오직 과학책만 다루는 잡지는 처음이다. 시즌 창간호에서는 노화는 질병이며 치료 가능하다는 내용을 담은 생명과학책 ‘노화의 종말’(부키·2020년)을 놓고 과학자들이 대담을 벌인다. 찰스 다윈(1809∼1882)의 ‘종의 기원’이나 칼 세이건(1934∼1996)의 ‘코스모스’에 대한 진화생물학자와 우주물리학자의 서평도 실렸다. 출판사 아작에서 1일 출간한 SF 잡지 ‘어션 테일즈’는 2주 만에 초판 3000부가 모두 팔렸다. 예약판매만으로 지난해 12월 다섯째 주 온라인서점 알라딘 종합 베스트셀러 1위를 차지했다. 앞서 아르테 출판사가 2019, 2020년 SF 잡지 ‘오늘의 SF’를 두 번 펴낸 적이 있지만 SF 정기간행물은 처음이다. 어션 테일즈는 소설뿐 아니라 에세이, 시, 인터뷰, 평론, 만화까지 담아 외연을 넓혔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알라딘에 따르면 구매자의 62.8%가 20, 30대로 젊은 독자가 많다. 최재천 어션 테일즈 편집장은 “평론의 범위가 소설에 한정되지 않고 다양한 장르를 대상으로 하고 있다”며 “SF 작가들에게 작품을 정기적으로 기고하는 잡지를 제공하는 차원에서 기획했는데 독자 반응이 뜨거워 놀랐다”고 했다. 출판계에서는 팬데믹 등으로 과학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높아진 것이 잡지 창간으로 이어졌다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과거 순문학 작가들이 문단을 이루고 인문·사회 잡지가 담론을 주도했듯 과학과 SF도 비슷한 발전과정을 걷고 있다는 얘기다. 최근 과학기술과 정치사회의 상호작용을 담은 ‘테크놀로지의 정치’(창비), 유체역학의 역사적 배경을 짚은 ‘판타 레이’(사이언스북스) 등 굵직한 과학책이 인문학을 함께 다루는 것도 과학 장르의 확장을 보여주고 있다. 표정훈 출판평론가는 “잡지 창간은 어떤 책이 좋은지 판별해주는 전문가의 시선에 따라 독자들이 책을 고르는 평론 문화를 형성한다”며 “과학도서·SF의 양적 팽창이 질적 수준 상승으로 이어지는 선순환 구조가 만들어지고 있다”고 평했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 2022-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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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범 잡는 BTS’ 첫 출격… “신선해” “무리한 상업화” 엇갈려

    음력 1월 16일 서울 종로구 인왕산에서 시체 24구가 한꺼번에 발견된다. 모두 처참하고 끔찍하게 훼손돼 있다. 참사 현장의 유일한 생존자는 ‘제하’. 형사는 부상을 당해 병원으로 실려 온 그에게 이것저것 캐묻지만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 다른 곳에서도 비슷한 살해사건이 이어진다. 거대한 발톱자국, 흐르는 피를 혀로 핥거나 날카로운 이빨로 물어뜯은 흔적이 시신에서 발견되는데…. 대체 이들에게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15일 프롤로그와 1화가 공개된 웹툰·웹소설 ‘세븐페이츠: 착호(7FATES: CHAKHO·착호)’는 방탄소년단(BTS) 멤버 7명을 각각 모티브로 한 주인공들이 사람을 공격하는 범을 막는 가까운 미래의 이야기다. 조선시대 범을 잡기 위해 특별히 뽑은 군사인 ‘착호갑사(捉虎甲士)’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BTS 소속사인 하이브가 네이버웹툰과 협업해 제작했다. 17일 기준 웹툰 착호는 네이버웹툰 중 경쟁이 치열한 토요 연재물 72개 중 32위에 올라 있다. 유튜브에 공개한 광고영상이 조회 수 5000만 회를 넘어서며 큰 관심을 모은 데 비하면 상대적으로 성과가 작은 편이다. 평점은 1화 기준 10점 만점에 7.7점. 토요 연재 웹툰들의 평점이 8, 9점대인 걸 감안하면 다소 낮다. 같은 내용의 웹소설은 평점이 10점 만점에 7.3점을 받았다. 다만 독자들 사이에서는 “역사적 사실인 착호갑사를 현대로 옮겨온 게 신선하다”, “이야기와 그림에 공을 많이 들였다”는 호평도 나오고 있다. 웹툰이 10개 언어로 동시에 공개된 만큼 국내 웹툰을 해외에 알리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의견도 있다. 네이버웹툰의 영어, 스페인어, 프랑스어 플랫폼에서는 9.9점의 높은 평점을 받았다. 네이버웹툰 관계자는 “국내 독자들은 웹툰에 대한 눈높이가 높은 편”이라며 “그림의 품질에 대한 긍정적 피드백은 많다”고 했다. 일각에서는 현재까지 공개된 작품만 놓고 보면 웹툰 서사와 BTS의 관련성이 떨어진다는 지적도 나온다. 특히 BTS 팬클럽 아미 내에서도 BTS를 무리하게 상업적으로 이용한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이야기 소재나 그림 품질이 좋은 만큼 굳이 BTS 이름을 달지 않아도 좋은 반응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는 “아미는 적극적으로 소속사의 행보에 각을 세우고 의견을 내는 적극적 팬덤층”이라며 “무리한 상업화 시도라는 반발이 있다면 콘텐츠 제작에도 신중히 반영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하이브는 16, 17일 그룹 투모로우바이투게더와 엔하이픈을 각각 주인공으로 한 웹툰·웹소설 ‘별을 쫓는 소년들’과 ‘다크문: 달의 제단’도 공개했다. 하이브가 인기 아이돌 가수의 팬덤과 지식재산권(IP)을 활용해 스토리 산업으로 외연을 넓히려는 행보다. 이융희 청강문화산업대 교수(웹소설 창작 전공)는 “BTS를 좋아하는 웹툰·웹소설 독자를 겨냥해 팬덤을 확장하려는 시도는 긍정적이다”라며 “단기적 성과보다 새로운 도전이라는 점에 의미를 둘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 2022-0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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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BTS 모티브 웹툰·웹소설 ‘착호’…“신선한 시도” “무리한 상업화” 엇갈려

    음력 1월 16일. 서울 종로구 인왕산에서 시체 24구가 발견된다. 시체는 모두 처참하고 끔찍하게 훼손된 채다. 유일하게 생존자로 발견된 건 방탄소년단(BTS) 멤버 정국을 모티브로 삼은 주인공 ‘제하’. 형사는 부상당한 채 병원으로 실려 온 제하에 이것저것 캐묻지만 제하는 아무 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다른 곳에서도 비슷한 살해 사건이 이어진다. 거대한 발톱 자국, 흐르는 피를 혀로 핥은 자국, 날카로운 이빨로 물어뜯은 흔적이 시신에서 발견되는데….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15일 프롤로그와 1화가 공개된 웹툰·웹소설 ‘세븐페이츠: 착호(7Fates: CHAKHO, 이하 착호)의 내용이다. 이 웹툰·웹소설은 조선시대 범을 잡기 위해 특별히 뽑은 군사들인 ’착호갑사‘(捉虎甲士)에서 모티브를 얻었다. 가까운 미래에 범이 등장해 사람들을 공격하고, BTS 멤버들을 모티브로 삼은 제하(정국) 도건(RM) 환(진) 세인(슈가) 호수(제이홉) 하루(지민) 주안(뷔)이 범을 막는 이야기가 펼쳐진다. BTS 소속사인 하이브와 네이버웹툰이 협업해 만들었다. 17일 기준 웹툰 착호는 네이버웹툰 중 경쟁이 가장 센 토요일 연재 웹툰 72개 중 32위를 기록하고 있다. 유튜브에 공개한 광고 영상이 조회 수 5000만 회를 돌파하며 뜨거운 관심을 모은 것에 비하면 아직 크지 않은 성과다. 평점은 1화 기준 10점 만점에 7.7점. 토요일에 연재되는 다른 작품들의 별점 평점이 8~9점대인 것을 고려하며 다소 낮다. 같은 내용의 웹소설도 평점이 10점 만점에 7.3점으로 높지 않다. 다만 독자들 사이에선 “역사적 사실인 착호갑사를 현대로 옮겨온 것은 신선하다” “스토리와 그림에 공을 많이 들였다”는 등 좋은 평가도 나온다. 웹툰이 세계 10개 언어로 동시 공개된 만큼 BTS를 통해 한국 문화를 널리 알릴 수 있지 않겠냐는 의견도 있다. 실제로 네이버웹툰 영어, 스페인어, 프랑스어 플랫폼에선 웹툰이 9.9점을 받으며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네이버웹툰 관계자는 “한국 독자들은 웹툰에 대한 눈높이가 높은 편”이라며 “그림의 품질에 대한 긍정적인 피드백들은 많은 편”이라고 했다. 반면 현재까지 공개된 작품 내용만 보면 웹툰 서사와 BTS가 크게 관련이 없다는 지적도 나온다. 특히 BTS 팬 ’아미‘ 사이에서도 BTS를 상업적으로 무리하게 이용한다는 비판이 있다. 이야기의 소재, 그림의 품질이 좋은만큼 굳이 BTS 이름을 달지 않아도 좋은 작품이 될 수 있지 않았겠냐는 의견도 제기된다.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는 “아미들은 적극적으로 소속사의 행보에 각을 세우고 의견을 내는 적극적인 팬덤”이라며 “BTS를 이용한 무리한 상업화가 무리한 시도라는 반발이 있다면 콘텐츠 제작에 신중히 반영해야 한다”고 했다. 하이브는 16, 17일 그룹 투모로우바이투게더와 엔하이픈을 주인공으로 삼은 웹툰·웹소설 ’별을 쫓는 소년들‘과 ’다크문: 달의 제단‘도 공개했다. 모두 하이브가 인기 아이돌 가수의 팬덤과 지식재산권(IP)을 활용해 스토리 산업으로 외연을 확장하는 행보다. 이융희 청강문화산업대 교수(웹소설 창작 전공)는 “아미나 BTS를 선호하는 웹툰·웹소설 독자를 겨냥하고 팬덤을 확장하려는 시도는 긍정적으로 평가해야 한다”며 “단기적인 성과보다는 새로운 도전이라는 점에 의미를 둬야 한다”고 했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 2022-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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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식탁보만 깔아도 음식이 더 맛있게 느껴지는 이유

    산책길을 가득 채운 꽃향기, 흙을 적시는 비 냄새, 거리에 퍼지는 짙은 커피향….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시대, 우리는 후각을 잃어버린 것 같다. 마스크 탓에 냄새를 맡기가 쉽지 않아서다. 물론 우리는 여전히 눈으로 볼 수 있고, 귀로 들을 수 있지만 세상을 온전히 느끼지는 못한다. 요즘처럼 인간에게 오감(五感)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는 시기도 드물 것이다. 영국 옥스퍼드대 통합감각연구소장인 저자는 인간이 여러 감각을 받아들이는 과정을 정리했다. 과학지식과 실험을 근거로 일상생활에 쓸모 있는 지식을 소개한다는 점에 끌려 책을 읽기 시작했다. 저자는 주위 환경을 어떻게 바꿔야 더 효율적으로 일하고, 더 즐겁게 살 수 있는지를 알려준다. 그에 따르면 침실에는 TV나 조명을 들여놓지 않는 게 좋다. 2019년 미국 국립환경건강연구소가 5년간 35∼74세 4만3000명을 연구한 결과, 인공조명에 노출된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 체중이 평균 5kg 더 나갔다. 인공조명이 인체의 자연시계를 방해하고 균형을 깨뜨리기 때문이다. 저자는 TV나 조명뿐 아니라 스마트폰 역시 비슷한 결과를 초래한다고 지적한다. 사무실 실내온도를 두고 남녀 직원 사이의 생각이 다른 경우가 종종 벌어지곤 한다. 열을 발산하는 근육이 더 많은 남성들은 평균 22.1도를 편안하게 느끼지만 여성들은 이보다 더 높은 25.2도를 선호한다. 이때 여성들의 의견대로 온도를 올리는 게 회사 차원에서는 합리적인 선택지가 될 수 있다. 16∼31도 사이에서 온도가 1도씩 상승할 때마다 여성의 수학 및 말하기 평균점수는 직전 온도에서의 점수에 비해 1, 2% 높아진 반면 남성은 0.6% 떨어진 것으로 나타났다. 장사가 잘 안 되는 식당 주인이라면 식탁보를 깔아 보는 걸 추천한다. 2020년 영국에서 발표된 연구 결과에 따르면 식탁보가 있는 테이블의 손님들이 그렇지 않은 테이블의 손님보다 토마토 수프를 50% 더 많이 먹었다. 또 수프가 맛있다고 평가한 사람의 수도 식탁보가 있는 테이블에서 먹은 손님들이 10% 더 많았다. 시각적 아름다움이 식욕을 불러일으킨 결과다. 저녁식사 중 많이 싸우는 가족이라면 집에 원형식탁을 들여놓는 건 어떨까. 심리적으로 불편함을 주는 각진 식탁보다 둥근 식탁에 앉을 때 보다 편안한 대화를 나눌 수 있기 때문이다. 감각은 행복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예를 들어 최근 많은 기업들은 노인의 ‘감각 결핍’을 채우기 위한 상품을 개발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노인들이 시각이나 청각이 둔해지는 걸 가장 고통스러워할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이들이 가장 필요로 하는 건 다른 이의 살결을 느끼는 촉각이라는 것이다. 포옹할 때 스트레스가 풀린다는 데 착안해 돈을 받고 안아주는 ‘포옹 전문가’가 등장한 이유다. 사실 감각 결핍은 코로나19 시대에는 누구나 겪는 일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시청각만 충족하는 영상통화만으로는 다양한 감각을 원하는 인간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없다는 것. 저자는 감각을 보완할 수 있는 최신 기계들을 소개하고 있지만, 모든 감각을 대체하기는 아직 역부족인 것 같다. 마스크를 벗은 채 거리를 거닐고, 새로 만난 누군가와 거리낌 없이 악수하는 날이 어서 오기만을 기다릴 수밖에.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 2022-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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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침실서 TV-스마트폰 보면 5kg 더 살찐다

    산책길을 가득 채운 꽃향기, 흙을 적시는 비 냄새, 거리에 퍼지는 짙은 커피향….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시대, 우리는 후각을 잃어버린 것 같다. 마스크 탓에 냄새를 맡기가 쉽지 않아서다. 물론 우리는 여전히 눈으로 볼 수 있고, 귀로 들을 수 있지만 세상을 온전히 느끼지는 못한다. 요즘처럼 인간에게 오감(五感)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는 시기도 드물 것이다. 영국 옥스퍼드대 통합감각연구소장인 저자는 인간이 여러 감각을 받아들이는 과정을 정리했다. 과학지식과 실험을 근거로 일상생활에 쓸모 있는 지식을 소개한다는 점에 끌려 책을 읽기 시작했다. 저자는 주위 환경을 어떻게 바꿔야 더 효율적으로 일하고, 더 즐겁게 살 수 있는지를 알려준다. 그에 따르면 침실에는 TV나 조명을 들여놓지 않는 게 좋다. 2019년 미국 국립환경건강연구소가 5년간 35~74세 4만3000명을 연구한 결과, 인공조명에 노출된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 체중이 평균 5kg 더 나갔다. 인공조명이 인체의 자연시계를 방해하고 균형을 깨뜨리기 때문이다. 저자는 TV나 조명뿐 아니라 스마트폰 역시 비슷한 결과를 초래한다고 지적한다. 사무실 실내온도를 두고 남녀 직원 사이의 생각이 다른 경우가 종종 벌어지곤 한다. 열을 발산하는 근육이 더 많은 남성들은 평균 22.1도를 편안하게 느끼지만 여성들은 이보다 더 높은 25.2도를 선호한다. 이때 여성들의 의견대로 온도를 올리는 게 회사 차원에서는 합리적인 선택지가 될 수 있다. 16~31도 사이에서 온도가 1도씩 상승할 때마다 여성의 수학 및 말하기 평균점수는 직전 온도에서의 점수에 비해 1, 2% 높아진 반면 남성은 0.6% 떨어진 것으로 나타났다. 장사가 잘 안 되는 식당 주인이라면 식탁보를 깔아보는 걸 추천한다. 2020년 영국에서 발표된 연구결과에 따르면 식탁보가 있는 테이블의 손님들이 그렇지 않은 테이블의 손님보다 토마토 수프를 50% 더 많이 먹었다. 또 수프가 맛있다고 평가한 사람의 수도 식탁보가 있는 테이블에서 먹은 손님들이 10% 더 많았다. 시각적 아름다움이 식욕을 불러일으킨 결과다. 저녁식사 중 많이 싸우는 가족이라면 집에 원형식탁을 들여놓는 건 어떨까. 심리적으로 불편함을 주는 각진 식탁보다 둥근 식탁에 앉을 때 보다 편안한 대화를 나눌 수 있기 때문이다. 감각은 행복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예를 들어 최근 많은 기업들은 노인의 ‘감각 결핍’을 채우기 위한 상품을 개발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노인들이 시각이나 청각이 둔해지는 걸 가장 고통스러워할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이들이 가장 필요로 하는 건 다른 이의 살결을 느끼는 촉각이라는 것이다. 포옹할 때 스트레스가 풀린다는 데 착안해 돈을 받고 안아주는 ‘포옹 전문가’가 등장한 이유다. 사실 감각 결핍은 코로나19 시대에는 누구나 겪는 일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시청각만 충족하는 영상통화만으로는 다양한 감각을 원하는 인간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없다는 것. 저자는 감각을 보완할 수 있는 최신 기계들을 소개하고 있지만, 모든 감각을 대체하기는 아직 역부족인 것 같다. 마스크를 벗은 채 거리를 거닐고, 새로 만난 누군가와 거리낌 없이 악수하는 날이 어서 오기만을 기다릴 수밖에.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 2022-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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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자 시상 “당선은 벅차면서 두려운 일… 치열하게 쓸 것”

    “훌륭한 유적지에 제가 조잡한 낙서를 남겼다고 생각하니 무척 불안합니다. 제 이름이 부끄러워지지 않도록, 기둥까지는 못 되어도 벽돌 한 개쯤은 될 수 있도록 정직하고 성실하게 쓰겠습니다.” 12일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린 202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상식. 김기태 씨(단편소설)가 떨리는 목소리로 수상 소감을 말했다. 김 씨는 “전통도 규모도 빼어난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돼 무척 기쁘다”며 “신춘문예나 심사위원의 권위만큼 내 역량이 보증되는 것은 아니지만 잠깐 그 권위를 빌려 첫걸음을 떼는 것이라 생각한다”고 했다. 그의 말이 끝나자 작가로서의 앞길을 축복하듯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가 쏟아졌다. 이날 시상식에는 김 씨를 비롯해 이안리(중편소설) 채윤희(시) 김성애(시조) 김란(동화) 최선교(문학평론) 구지수 씨(희곡)가 참석해 상패를 받았다. 나머지 당선자인 이슬기(시나리오) 최철훈 씨(영화평론)는 개인사정으로 참석하지 못했다. 신춘문예를 통해 작가가 된 이들의 삶은 조금씩 변화하고 있었다. 이안리 씨는 “당선 후 출판사로부터 청탁 문의를 받고 조금 들뜬 마음으로 지내고 있다”며 “많은 것들이 변하고 있는 기분”이라고 털어놓았다. 김란 씨는 “소망이자 로망이던 신춘문예에 당선돼 아직도 꿈을 꾸는 것처럼 얼떨떨하다”고 했다. 각자 글쓰기에 대한 다짐도 밝혔다. 김성애 씨는 “여태 써온 작품이 무겁고 어두운 삶에 대한 얘기였다면 앞으로는 자유롭고 서정적인 작품을 활달하게 그려내고 싶다”고 했다. 채윤희 씨는 “당선은 벅차면서도 두려운 일이다. 치열하게 쓰겠다”고 말했다. 구지수 씨는 “앞으로가 더 중요하다는 걸 알고 있다. 지치지 않고 쓰겠다”고 했다. 최선교 씨는 “사람에게 닿을 수 있는 글을 쓰고 싶다”는 포부를 드러냈다. 최수철 소설가는 격려사에서 “세상에서 그 어떤 것도 글쓰기를 도와주지 않는다”며 “자신의 투철한 의지와 문학에 대한 소명 의식만이 글쓰기를 이끌어나갈 힘”이라고 강조했다. 박제균 동아일보 논설주간은 축사에서 “신춘문예 당선이 성공을 보장하지는 않지만 당선자는 문학이라는 거대한 대륙을 달리는 열차의 자유 입장권을 손에 쥔 것”이라며 “당선의 영예를 안으신 분들에게 진심으로 축하의 말씀을 드린다”고 말했다. 이날 시상식에는 심사위원인 최수철 오정희 소설가, 정호승 시인, 이근배 시조시인, 송재찬 노경실 동화작가, 조강석 신수정 김영찬 문학평론가, 주필호 주피터필름 대표 등 30여 명이 참석했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 2022-0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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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떤 책이 잘 팔릴까…AI에 물어보니 85% 적중

    지난해 1월 출간된 에세이 ‘동물을 위해 책을 읽습니다’(책공장더불어)는 대형 출판사나 유명 저자가 낸 책이 아니다. 번듯한 추천사도 없고, 마케팅에 특별한 공을 들이지도 않았다. 출판계 통념대로면 시장에서 조용히 사라질 법한 책이었다. 그러나 도서 수요예측 인공지능(AI)의 판단은 달랐다. 출간 직후 4주간 41권이 팔린다고 예측한 것. 줄거리와 저자 정보, 가격, 페이지 수 등 여러 정보를 분석한 결과였다. 실제 이 책은 출간 후 4주간 35권이 팔렸다. 이는 교보문고에서 팔리는 신간 중 상위 8% 안에 드는 판매량이다. 약 85%의 정확도로 판매량을 예측한 것이다. AI가 이 책의 판매 가능성을 긍정적으로 예상한 근거는 무얼까. 동물 책 전문 출판사가 펴낸 데다 앞서 2권의 관련 책을 낸 저자 이력에 주목했다. 전문성에 중점을 둔 것. 고정 독자층이 확보됐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 시스템을 개발한 박성혁 KAIST 경영공학부 교수는 “도서 수요예측 AI 시스템의 작동 과정을 살펴보면 독자가 어떤 책을 선호하는지 파악할 수 있다”고 말했다. 대한출판문화협회에 따르면 2020년 한 해 동안 출간된 책은 총 6만5792종. 어떤 게 독자 입맛에 맞을지 예측해 적당한 재고를 확보하기란 매우 어렵다. 교보문고가 올 상반기 가동을 목표로 지난해 4월부터 도서 수요예측 AI 시스템을 개발하고 있는 이유다. AI 분석 과정은 이렇다. 먼저 책값, 분량, 저자 정보, 줄거리 등 기본적인 서지 정보를 AI에 입력한다. AI가 표지 이미지도 인식해 책의 매력도를 평가한다. 신진호 교보문고 상품기획팀장은 “AI를 하루 동안 학습시킨 결과 새 시스템이 기존 자동발주 시스템에 비해 도서 수요예측 정확도가 40%가량 높았다”며 “AI는 학습을 반복할수록 정확도가 높아지는 만큼 기능이 향상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밝혔다. 자동발주 시스템은 월별 판매량을 기준으로 특정 책의 추가 주문 물량을 결정한다. 이 때문에 새로 나온 책은 주문할 수 없고, 이미 나온 책을 대상으로 한다. AI 분석 결과로 볼 때 어떤 책이 독자의 사랑을 받을까. 지난해 1월 출간된 경제경영서 ‘공간이 고객을 만든다’(무블출판사)는 언뜻 평범한 마케팅 책으로 보인다. 하지만 AI는 이 책이 출간 후 4주간 68권이 팔릴 것으로 예상했고 실제 78권이 나갔다. 팬데믹으로 어려움을 겪는 자영업자들이 공간 관리에 관심이 높아진 것을 AI가 포착했다. 지난해 1월 출간된 중편소설집 ‘단 하나의 이름도 잊히지 않게’(에오스)의 공저자 3명 가운데 유명 소설가는 없다. 하지만 AI는 이 책이 출간 후 4주간 103권이 팔릴 것으로 봤고 실제 73권이 팔렸다. 여성 주인공이 등장하는 이야기가 인기를 끄는 최근 장르문학 흐름을 반영한 것. 여성의 옆모습을 담은 표지 디자인도 시선을 끌 것으로 분석됐다. AI의 예측 정확도는 월 판매량이 5000부 이상인 이른바 ‘대박’ 신간보다는 100부 안팎의 ‘중박’ 책에서 높았다. 지난해 1월 출간된 심리학서 ‘유리멘탈을 위한 심리책’(갤리온)에 대해 AI는 출간 4주간 204권이 팔릴 것이라 내다봤지만 출간 4주간 2024권이나 판매됐다. 대박 책은 서지 정보 등으로 가늠하기 어려운 정치, 사회 이슈나 출판사 마케팅에 영향을 받아 탄생하기 때문이다. 박 교수는 “독자의 눈길을 끄는 표지 디자인을 AI 시스템이 만드는 방안도 연구 중이다. 어떤 책이 독자의 취향에 맞는지 정확히 예측할 수 있다면 독서인구가 늘어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 2022-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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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은 끝까지 읽어야? 안 그러셔도 됩니다

    최근 출판인들과 만난 자리에서 각자 어떻게 책을 읽는지 이야기를 나눴다. A 출판인은 목차를 먼저 훑은 뒤 핵심 챕터 위주로 읽는다고 했다. B 출판인은 중간 중간 내용을 건너뛰며 책을 읽어 나간다고 했다. C 출판인은 서문이나 맨 마지막 부분을 집중해서 읽는다고 했다. 사실 출판인이면 응당 책의 모든 부분을 꼼꼼히 다 읽을 줄 알았는데…. 빠르게 많은 양의 책을 읽어야 하는 만큼 다들 지름길(?)을 택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책은 구독자 6만 명의 유튜브 ‘시한책방’을 운영하는 저자의 독서 비결을 담았다. 국문학 학사, 석사학위를 받고 박사과정을 수료한 저자는 인생을 살며 수천 권의 책을 읽은 다독가. 책을 어렵다고 생각해 중간에 포기하는 사람을 위한 독서 팁이 들어있다. 먼저 저자는 책을 끝까지 읽어야 한다는 생각을 버리라고 말한다. 책을 다 읽어야 한다는 압박감이 분량이 많은 ‘벽돌책’을 무조건 피하게 만든다는 것. 넷플릭스를 보다 재미가 없으면 끄는 것처럼 책도 언제든 덮을 수 있는 콘텐츠라는 얘기다. 읽을 수 있을 만큼 읽어야 흥미를 돋울 수 있다. 먼저 오프라인 서점에 가서 10분 정도 책을 읽어보고 끌리면 사고, 그렇지 않으면 덮거나 다른 책을 찾자. 저자는 책을 첫 장부터 차근차근 읽을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가장 흥미로워 보이는 부분을 읽고 난 뒤 나머지 부분을 골라 읽어도 된다는 것. 물론 배경을 천천히 이해하며 읽어야 하는 역사서나 이야기에 기승전결이 있는 소설에서는 앞부분이 중요하다. 하지만 어떤 책이든 읽다가 재미가 없어 포기하면 의미가 없다. 재밌는 부분을 찾아 읽고 궁금한 부분을 다시 찾아 읽으면 된다. 책에서 교훈이나 정답을 찾으려고 하지 말라는 조언도 인상적이다. 우리는 책을 읽으며 작가의 메시지를 끊임없이 찾는다. 책의 의미가 쉽게 드러나지 않으면 자신의 독서가 잘못된 건지 의심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중고교를 거쳐 대학입시를 준비하며 생긴 이상한 습관일지도 모른다. 어떤 책은 의미보다 재미가 우선일 수 있다. 읽고 나서 좋았다면 그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 어린이가 동화를 재밌어서 읽지 교훈을 찾으려고 읽는가. 누군가는 이런 방식으로 책을 읽는 건 잘못됐다고 말할지 모른다. 하지만 “아예 포기하는 것보다는 낫지 않느냐”는 저자의 말에 동의한다. 독서가 직업인 출판인도 책을 다 읽지 않는데 일반인에게 무조건 책을 완독하라고 하는 건 지나치다. 많은 이들이 매년 하는 새해 결심 중 하나가 독서다. 얼마나 운동을 하건 헬스장에 가야 다이어트가 되는 것처럼 올해엔 너무 부담감을 갖지 말고 어떤 방식으로든 책과 가까이 지내보는 것은 어떨까. 개권유익(開卷有益). 책을 펴서 읽으면 반드시 이로움이 있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 2022-0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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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스필버그, 꺼지지 않는 영화 열정

    ‘죠스’(1975년), ‘E.T.’(1982년), ‘백 투 더 퓨처’(1985년), ‘쥬라기 공원’(1993년), ‘라이언 일병 구하기’(1998년), ‘마이너리티 리포트’(2002년), ‘캐치 미 이프 유 캔’(2002년)…. 영화감독 스티븐 스필버그를 빼놓곤 미국 할리우드의 역사를 논할 수 없다. 이 책은 스필버그가 1974년부터 2021년까지 진행한 언론 인터뷰 21편을 모은 것이다. 감독으로서의 면모뿐 아니라 그동안 소개된 적 없던 그의 개인적 삶까지 충실히 담아냈다. 어린 시절 스필버그는 가짜 콧수염을 붙이거나 괴물로 분장하며 노는 아이들의 모습을 영화로 만들었다. 이를 보이스카우트 친구들에게 보여줬는데 이들이 박수를 치며 즐거워한 모습이 그를 영화인의 길로 이끌었다. 오락영화에 두각을 보이던 그에게 일대 전환기를 가져온 작품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유대인 학살을 다룬 영화 ‘쉰들러 리스트’(1993년). 이 영화에 크레인 촬영이나 줌렌즈 같은 촬영기술을 적용하지 않은 이유를 묻자 그는 “상업적인 촬영기술에 기대기엔 이야기의 진실성이 너무도 중요했다”고 말했다. 올해 76세의 노장이지만 그는 여전히 도전을 멈추지 않는다. 12일 개봉하는 뮤지컬 영화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도 그가 메가폰을 잡은 작품. 고령 탓에 힘들지 않으냐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답한다. “리허설 때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배우들과 함께 노래하고 춤췄어요. 음치에 몸치였지만요.”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 2022-0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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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 굿즈’ 마케팅 전성시대? “비용전가-환경오염” 비판도

    구슬 램프, 마우스 패드, 손수건, 베개, 도자기 접시…. 6일 현재 각종 온라인 서점에서 팔리고 있는 ‘북 굿즈’(책 내용을 활용해 만든 상품)들이다. 특정 책이나 일정액 이상의 책을 사면 서점 적립금으로 굿즈를 손에 넣을 수 있다. 온라인 서점 예스24에 따르면 지난해 북 굿즈의 한 종류인 다이어리와 플래너 판매량은 전년에 비해 약 40% 늘었다. 인스타그램에서 활동하는 ‘굿덕’은 같은 책이라도 서점별로 굿즈가 다른 데 착안해 서점들의 굿즈 정보를 모아 자신의 계정을 통해 제공한다. 문학동네가 지난해 출간된 자사 소설 구매자에게 주는 ‘코멘터리 북’처럼 출판사가 기획하는 굿즈도 늘고 있다. 독자들이 이를 얻기 위해 일부러 책을 사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출판계의 굿즈 마케팅에 대한 비판도 나온다. 2014년 책값의 최대 10%까지 할인할 수 있도록 한 도서정가제 시행 이후 대안 마케팅으로 등장한 굿즈 시장이 지나치게 커졌다는 것. 표정훈 출판평론가는 “굿즈 경쟁 심화로 출판사의 마케팅 비용이 올라가면 그 부담이 소비자에게 전가될 수 있다. 또 굿즈가 이른바 ‘예쁜 쓰레기’를 양산해 환경에 악영향을 끼친다”고 말했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 2022-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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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렇게 빨리고야’ ‘작작 짜내어라’… “동아일보, 1000호 기념현상 통해 일제 비판”

    “내가 이렇게 빨리고 살 수가 있나?” 한 조선인이 침통한 표정으로 하소연하고 있다. 일본인 중국인 서양인이 그의 몸에 빨대를 꽂고 피를 빨고 있다. 일본, 중국, 서양의 경제 침탈에 신음하던 1920년대 조선 상황을 은유적으로 그린 것. 동아일보 1923년 5월 26일자 2면에 실린 1000호 기념 현상 당선 만화 ‘이렇게 빨리고야’는 일제강점기에도 강력한 현실 비판을 담았다. 이보다 하루 전인 5월 25일자 2면에 실린 당선 만화 ‘작작 짜내어라’에서는 한 소작인이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다. 그의 입에서는 돈이 쏟아지고 있다. 무슨 일일까. 답은 소작인의 목을 쥐어짜고 있는 지주의 손에 있다. 조선총독부의 토지 정책으로 인해 곤경에 빠진 소작농의 어려움을 비판한 만화다. 손동호 연세대 근대한국학연구소 HK연구교수(42)가 최근 출간한 연구서 ‘동아일보의 독자 참여제도와 문예면의 정착’(소명출판)에 나오는 내용이다. 손 교수는 3일 전화 인터뷰에서 “동아일보는 1923년 5월 25일 1000호 발간을 기념해 독자들이 작품을 응모하는 ‘동아일보 일천호 기념 상금 일천원의 대현상’을 열었다”며 “조선 민족의 자긍심을 고취하는 내용을 담아 민족지로서 정체성을 강화하고 총독부 정책에 대한 노골적 비판을 담았다”고 밝혔다. 1920년 4월 창간한 동아일보는 이듬해인 1921년 ‘독자 문단’을 통해 일종의 문학 소통창구를 마련했다. 독자들이 투고한 소설이나 시를 지면에 실어 호응을 얻었다. 시조시인 조운(1900∼1948), 소설가 한설야(1900∼1976), 시인 유도순(1904∼1938) 등 일제강점기 국내 문단에서 활약한 대표 문인들이 독자 문단을 통해 이름을 알렸다. 독자 문단이 인기를 끌자 동아일보는 1923년 1000호 기념 현상문예를 열었다. 단편소설, 동화, 시조 등 모집 부문이 16개나 됐다. 일제강점기 상황을 비판하는 독자들의 목소리를 주로 담았다. ‘현금정치의 엄정비판’ 부문은 관권 남용이나 감옥제도와 경찰의 문제점을 다뤘다. 총독부 정책에 대한 비판이 주된 내용이라 응모자들의 신변 보호를 위해 익명 투고가 가능했다. 손 교수는 “현상문예 당선작들은 사회 문제를 주로 다뤘다”고 설명했다. 1925년 시작된 동아일보 신춘문예도 독자를 ‘작가’로 만드는 등용문으로 문단 형성에 기여했다는 게 손 교수의 분석이다. 당시 ‘부인계’ ‘소년계’ 등으로 나눠 작품을 모집했고 이는 문단의 다양성을 확보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손 교수는 “신춘문예 단편소설 당선작은 노동자나 농민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현실 문제를 다루고 식민지 삶의 실상을 고발했다”고 덧붙였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 2022-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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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작 짜내어라’며 지주 계급 풍자…100년전 문예 공모전 들여다보니

    “東亞日報一千號紀念 賞金一千圓의 大懸賞”(동아일보 일천호 기념 상금 일천원의 대현상) 동아일보 1923년 5월 3일자에는 이런 사고(社告)가 실렸다. 1923년 5월 25일 동아일보가 1000호를 맞는 것을 기념해 일반 독자를 대상으로 자신이 쓴 작품을 응모할 수 있는 현상문예를 연 것. 응모작 수는 확인되지 않지만 16개 부문에 걸쳐 당선작은 90여 편에 달했을 정도로 흥행했다. 지난해 12월 10일 문학 연구서 ‘’동아일보‘의 독자 참여 제도와 문예면의 정착’(소명출판)을 출간한 손동호 연세대 근대한국학연구소 HK연구교수(42)는 최근 동아일보와의 통화에서 “독자참여제도 시행의 경험 축적, 신문사의 대대적인 홍보, 고액의 현상금, 독자들의 투고 열기 고조로 인해 현상문예는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었다”며 “일제강점기 동아일보가 ‘조선민중의 표현기관’을 자임하고, 적극적으로 독자와 소통하기 위해 독자참여제도를 시행하면서 한국 문단 형성의 밑거름이 됐다”고 말했다. 1920년 4월 창간한 동아일보가 처음 벌인 문학 소통창구는 1921년 시작된 ‘독자문단’이다. 독자들이 투고한 소설이나 시를 신문 지면에 실으면서 독자들의 반응을 이끌어냈다. 시조시인 조운(1900~1948), 소설가 한설야(1901~?), 시인 유도순(1904~1938) 등 일제강점기 국내 문단에서 활약한 문인들도 독자 문단을 통해 이름을 알렸다. 독자 문단이 인기를 끌자 동아일보는 1923년 일천호 기념 현상문예를 연다. 단편소설, 동화, 시조 등 모집부문이 16개나 달했다. 주로 일제강점기 상황을 비판하는 독자의 목소리를 담았다. 예를 들어 ‘현금정치의 엄정비판’ 부문은 관권 남용, 감옥 제도, 경찰에 대한 불평을 받았다. 사실상 총독부 정책에 대한 비판이 주된 내용이라 응모자의 신변보호를 위해 익명 투고가 가능했다. 동아일보 일천호 기념현상은 만화 부문에서도 당시의 정치적 상황을 풍자하는 작품을 주로 당선시켰다. ‘작작 짜내어라’라는 제목의 만화 당선작은 소작인이 지주 손에 쥐어 짜여 고통스럽게 돈을 토해내는 장면을 그렸다. ‘이렇게 빨리고야’라는 만화 당선작은 중국인 일본인 서양인이 조선인의 피를 빨아 먹는 모습을 그렸다. 외국 자본과 상품이 국내에 들어오면서 서민들의 삶이 팍팍해진 상황을 비판한 것이다. 손 교수는 “현상문예 당선작들은 사회적인 문제를 주로 다뤘다”며 “조선 민족의 자긍심을 고취하는 내용을 담아 민족지로서의 정체성을 강화하고 총독부 정책에 대한 노골적인 비판을 다뤘다”고 했다. 동아일보 신춘문예도 ‘독자’를 ‘작가’로 만드는 등용문으로 문단의 형성 및 유지에 일조했다는 게 손 교수의 분석. 특히 동아일보는 ‘부인계’ ‘소년계’ 등 독자의 층위를 구분해 작품을 모집했는데 이는 문단의 다양성을 확보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손 교수는 “신춘문예 단편소설 당선작은 노동자나 농민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그들의 삶을 그려내는 등 현실 문제를 다루고 식민지 삶의 실상을 고발했다”고 했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 2022-0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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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황석영-김훈… 거장의 이야기가 다시 시작된다

    지난해 한국 문단은 20, 30대 여성작가들의 전성시대였다. 장편소설 ‘밝은 밤’(문학동네)의 최은영(38), ‘달까지 가자’(창비)의 장류진(36), ‘지구 끝의 온실’(자이언트북스) ‘행성어 서점’(마음산책)의 김초엽(29)까지. 이들은 독자와 문단으로부터 호평을 받았다. 올해는 40대 이상 중견 혹은 원로작가들이 줄줄이 신작을 선보인다. 문단에선 왕년의 스타 작가들이 돌아왔다는 얘기도 나온다.○ 생명 노래한 황석영, 소설집 내는 김훈 가장 눈에 띄는 건 남성 작가들의 귀환이다. 김훈(74)은 9년간 써온 단편소설들을 묶어 상반기에 문학동네에서 펴낸다. 단편소설집으로는 ‘강산무진’(2006년·문학동네) 이후 16년 만이다. 그가 발표한 ‘남한산성’(2007년), ‘칼의 노래’(2001년) 등 역사 장편소설이 베스트셀러가 된 만큼 독자들의 기대도 크다. 황석영(79)은 상반기에 장편소설 ‘별찌에게’(가제·창비)로 돌아온다. 이 작품은 창비의 온라인 플랫폼 ‘스위치’를 통해 지난해 연재됐다. 우주에서 떨어진 운석이 숲속 동식물과 사귀며 성장하는 과정을 그렸다. 우화 형식을 빌려 팬데믹 시대를 배경으로 생명의 본질을 논한다. 서정적 문체로 유명한 김연수(52)는 독서 에세이를 낸다. 그가 특별히 아끼는 문학작품들에 대한 솔직한 감상평을 담았다. 장편소설 ‘설계자들’(2019년)이 20여 개국에 번역 출간되며 해외에서도 인정받은 김언수(50)는 장편소설 ‘빅 아이’(가제·문학동네)로 돌아온다. 김언수는 원양어업을 둘러싼 갈등을 그린 이 작품을 쓰기 위해 6개월간 원양어선을 탔다. 지난해 이상문학상 대상을 수상한 이승우(63)는 지방선거 불법 개입으로 한국을 떠나게 된 남자가 등장하는 장편소설 ‘이국에서’(가제·은행나무)로 돌아온다. 백가흠(48)은 살인사건을 다룬 장편소설 ‘아콰마린’(가제·은행나무)을 발표한다.○ 노벨상 수상 구르나 작품 첫 소개 여성 작가들의 신작도 탄탄하다. 은희경(63)은 이달 중 미국 뉴욕을 배경으로 하는 중단편 4편을 담은 연작소설집 ‘장미의 이름은 장미’(가제·문학동네)를 선보인다. 김애란(41)도 하반기에 장편소설을 내놓는다. ‘82년생 김지영’(민음사)으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조남주는 아파트를 둘러싼 사람들의 욕망과 이기심을 다룬 연작소설집 ‘서영동 이야기’(한겨레출판)를 이달에 내놓는다. 해외 작가들의 작품도 주목할 만하다. 아프리카 탄자니아 난민 출신으로 지난해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압둘라자크 구르나(74)의 작품이 국내에 처음 소개된다. 탄자니아의 가상 마을 카와를 배경으로 12세 소년의 성장기를 다룬 장편소설 ‘낙원’을 시작으로 장편소설 ‘바닷가에서’ ‘그 후의 삶’ ‘야반도주’가 상반기에 연달아 나온다. 2006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터키 작가 오르한 파무크(70)의 역사 장편소설 ‘페스트의 밤’(민음사)과 2018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폴란드 작가 올가 토카르추크(60)의 에세이 ‘다정한 서술자’(민음사)도 1, 9월에 각각 출간된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 2022-0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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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년 남성 작가들이 돌아온다…김훈-황석영 등 신작 펴내

    지난해 한국 문단은 20, 30대 여성 작가 전성시대였다. 장편소설 ‘밝은 밤’(문학동네)의 최은영(38), 장편소설 ‘달까지 가자’(창비)의 장류진(36), 장편소설 ‘지구 끝의 온실’(자이언트북스) ‘행성어 서점’(마음산책)의 김초엽(29)까지. 여성 작가들은 독자와 문단의 호평을 모두 사로 잡았다. 하지만 올해는 40대 이상 중년 작가들이 신작을 들고 속속 돌아온다. 그것도 이름만 들어도 누구나 아는 ‘스타 작가’다.● 중년 남성 작가들이 돌아온다가장 눈에 띄는 건 남성 작가들의 귀환이다. 문장의 대가 김훈(74)은 올 상반기 문학동네에서 단편소설집을 펴낸다. 2013년부터 9년간 써온 단편들을 엮는다. 단편소설집으론 ‘강산무진’(2006·문학동네) 이후 16년 만이다. ‘칼의 노래’(2001·문학동네) ‘남한산성’(2007·학고재) 등의 역사 장편소설로 대중의 사랑을 독차지한 그인 만큼 서점가의 기대도 크다. 문학계의 거장 황석영(79)은 올 상반기 우화 장편소설 ‘별찌에게’(가제·창비)로 돌아온다. 이 작품은 창비의 온라인 연재 플랫폼 스위치를 통해 연재됐다. 우주에서 떨어진 운석이 숲 속 식물 동물과 사귀면서 성장하는 과정을 그렸다 팬데믹 시대를 배경으로 생명과 생존의 본질을 우화로 전한다. 서정적인 문체로 유명한 김연수(52)는 올 상반기 문학동네에서 독서 에세이를 펴낸다. 김연수가 특별히 아끼는 문학작품을 골라 자신이 어떻게 이 작품을 읽었는지 솔직한 감정을 담았다. 장편소설 ‘설계자들’(문학동네·2019)이 20여 개국에 번역 출간되며 해외에서도 사랑받았던 김언수(50)는 올 상반기 장편소설 ‘빅 아이’(가제·문학동네)로 돌아온다. 김언수는 원양어업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갈등이 담긴 이 소설을 쓰기 위해 직접 6개월간 원양어선을 탔다. 지난해 이상문학상 대상을 수상한 이승우(63)는 지방선거 불법 개입으로 한국을 떠나게 된 남자가 등장하는 장편소설 ‘이국에서’(가제·은행나무)로 돌아온다. 백가흠(48)은 살인사건을 다룬 장편소설 ‘아콰마린’(가제·은행나무)을 펴낸다.● 여성·노벨문학상 작품도 탄탄여성 작가들의 신작도 탄탄하다. 은희경(63)은 이달 중 미국 뉴욕을 배경으로 하는 중·단편 4편을 수록한 연작소설집 ‘장미의 이름은 장미’(가제·문학동네)를 선보인다. 김애란(41)은 올 하반기 장편소설(제목 미정·문학동네)로 돌아올 예정이다. 장편소설 ‘82년생 김지영’(민음사)으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조남주는 아파트를 둘러싼 사람들의 욕망과 이기심을 다룬 연작소설집 ‘서영동 이야기’(한겨레출판)를 이달 내놓는다. 해외 작가들의 작품도 주목할만하다. 먼저 지난해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된 아프리카 탄자니아 난민 출신 작가 압둘라자크 구르나(74)의 작품이 국내에 첫 선을 보인다. 올 상반기 탄자니아의 가상 마을 카와를 배경으로 12세 소년의 성장기를 다룬 장편소설 ‘낙원’을 시작으로 장편소설 ‘바닷가에서’ ‘그 후의 삶’ ‘야반도주’가 연달아 문학동네에서 출간된다. 2006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터키 작가 오르한 파묵(70)의 역사 장편소설 ‘페스트의 밤’(민음사), 2018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폴란드 작가 올가 토카르추크(60)의 에세이 ‘다정한 서술자’(민음사)도 출간 예정이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 2022-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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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재미교포 여성 “소설가 안정효가 성폭력”… 安은 부인

    장편소설 ‘하얀전쟁’(1983년)으로 유명한 안정효 작가(81·사진)가 재미교포 여성에게 성폭력을 행사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재미교포 정영수 씨(55)는 최근 출간한 ‘늦사랑 편지’(조은글샘)를 통해 안 씨가 자신에게 성폭력을 가했다고 주장했다. 이 책에 따르면 미국 리버폴스 위스콘신대에서 일하던 정 씨는 2016년 11월 안 씨를 현지 대학에서 열린 ‘한국의 해’ 행사에 초청했다. 초청 협의를 위해 정 씨는 수차례 한국을 방문해 안 씨를 만났다. 이 과정에서 둘은 e메일을 주고받았는데, 초청 관련 내용이 점차 안 씨의 사랑 고백으로 바뀌었고 성적인 수치심을 일으키는 내용까지 담겼다는 게 정 씨의 주장이다. 정 씨는 2017년 10월 ‘한국의 해’ 행사 참석차 다른 관계자와 함께 자신의 집에 머물던 안 씨가 한밤중 속옷 차림으로 방에 들어왔다고 책에 썼다. 당시 정 씨는 자신의 방에서 자고 있었다. 정 씨는 “인기척에 놀라 깼다. 속옷 차림의 안 씨가 서 있었다”고 했다. 안 씨는 성폭력 의혹을 부인했다. 안 씨는 3일 동아일보와의 통화에서 “정 씨가 오랜 팬이라고 해 술을 마시며 알게 된 말동무”라며 “당시 새벽잠에서 깬 뒤 너무 어두워 거실에 있는 스탠드를 찾으러 갔을 뿐 정 씨의 방으로 들어가지 않았다”고 했다. e메일에 성적인 표현을 쓴 것에 대해선 “친근함을 표한 것”이라고 밝혔다. 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 2022-0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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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파워인터뷰]이어령 “포스트 코로나 시대, 보리처럼 밟힌 마이너리티가 이끌것”

    《한국 사회는 길고 어두운 터널에 갇혀 있다. 국민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불러온 사회·경제적 파장과 정치권의 각종 의혹에 지쳐 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쓴소리를 뱉고 바른길로 안내하는 지성(知性)이 사라진 탓은 아닐까. 그러던 차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88) 측으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건강 때문에 미루던 인터뷰를 하겠다는 것이었다. “마음에 품은 생각을 정리해야 할 때를 기다렸는데 이제 동아일보와 이야기할 시간이 됐다”고 했다.그를 만난 곳은 지난해 12월 22일 서울 종로구 평창로 자택 서재. 낮이 가장 짧은 동지(冬至)라는 사실이 무색하게 북한산 위로 쨍하게 뜬 해가 서재 안 깊숙이 파고들었다. 긴 시간 암 투병 중인 그의 육신은 어느 때보다 야위어 있었다. 하지만 한국어, 영어, 프랑스어, 라틴어, 일본어를 넘나드는 ‘언어술사’의 입담은 여전했다. 학문의 경계를 뛰어넘으며 창의적인 생각을 발견하는 르네상스인의 지성 역시 반짝였다. 그는 2시간 동안 거침없이 젊은 세대의 절망과 세대 갈등에 대한 고민, 코로나19가 촉발한 현실에 대한 비판적인 생각을 펼쳐놓았다. 다음은 일문일답.》 ―하루를 어떻게 보내는가. “서재에서 내가 말하면 자동으로 문자로 변환되는 스마트폰 프로그램을 사용해 작업한다. 환자의 일과는 아픔에서 시작해서 아픔으로 끝난다고 하지만 난 시간이 없어 절박하다. 어쩌면 내일 해를 보지 못한다 생각하니 글쓰기를 미루던 옛 습관이 사라졌다.” ―왜 그렇게 바쁘게 지내나. “이제는 내가 무슨 일만 벌이면 ‘마지막’이라는 단어가 붙는다. 마지막 강연, 마지막 인터뷰…. 나는 마지막이라는 단어를 제일 싫어한다. 마지막이 어디 있나. 왜 생일 케이크의 촛불을 끌까. 그 다음 해 생일에 촛불을 켜려고 끄는 거다. 난 평생 지적 호기심으로 우물을 판 사람이다. 물을 먹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물이 궁금해서 판 것이다. 호기심엔 끝이 없다. 지금 글 쓰는 것도 새로운 이야기의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70여 년간 한국 지성의 담론을 좌지우지했다. 할 일이 더 남았을까. “‘한국인 이야기’ ‘메멘토 모리’ 등 내가 계약해두고 아직 출간 못 한 책이 40권에 달한다. 대화집이 20권, 강연집이 20권이다. 이 밖에도 인터뷰나 강연에서 말했지만 책으로 옮기지 못한 것들이 너무 많다.” ―1955년 서울대 문리대학보에 발표한 ‘이상론’은 지금 읽어도 혁신적이다. “당시 이상론은 3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이상(1910∼1937)은 작품에 도시를 담았다. 숭늉 마시던 시골 이야기가 아니라 커피 브랜드 MJB가 나오는 작품을 썼다. 둘째, 한국말을 발전시켰다. 이상 이전의 작가들은 문장투의 말을 써왔다. 셋째, 자아를 발견했다. ‘마이 파더’가 아니라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는 한국 사람들의 마음에 ‘나’를 심어줬다. 난해하다고 여긴 이상을 나는 쉽게 풀어 ‘천재 이상’으로 알렸다. 이상이 요즘말로 나한데 ‘한턱 쏴야’ 한다.(웃음)” ―1956년 ‘우상의 파괴’ 비평문으로 문단에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는데…. “사람들은 내가 기성 문단을 파괴했다고 오해한다. 우상이 문제가 아니라 우상 옆에 가서 떠받들고, 모시는 사람들이 문제라는 것이다. 작가라면 자신만의 목소리를 내라는 취지로 글을 썼다. (카르타고의 정치인) 한니발은 한쪽 눈은 성하고, 다른 눈은 멀었다. 한쪽에선 한니발을 성한 눈의 사내로, 다른 쪽에선 눈이 먼 사내라고 말한다. 많은 사람들이 나 역시 한쪽에서만 바라봤다. 제대로 평가하려면 정면에서 봐야 한다.” ―한쪽에서만 평가하는 건 한국 사회에서 흔히 벌어지는 일 아닌가. “맞다. 여전히 우리 사회는 눈이 멀거나, 성하거나 둘 중 하나라고 누군가를 판단한다. 사람들이 편견을 가지는 건 당연하다. 이를 바로잡는 역할을 지식인이 해야 한다. 하지만 요즘 지식인들은 정치, 경제에 종속됐다. 지식인이 제 역할을 못하니까 편 가르기와 진영 싸움판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래도 우리 사회는 이 전 장관의 말에 귀 기울여 왔다. “내가 어딘가에 속하지 않은 ‘아웃사이더’로 살아왔기 때문이다. 기회주의자는 많다. 진보인데 우클릭하고, 보수인데 좌클릭하는 사람들, 인기에 영합해 정치 활동을 시작한 사람들 말이다. 정치 밖에서 정치를 객관화하는 것이 지식인의 역할이다. 세속적인 의미에서 나더러 사교적이고, 마당발이라는 평가도 있다. 하지만 나는 생각하고 행동할 때 집단보다 개인에 방점을 두고 살아왔다. 남들과 달랐기 때문에 외톨이가 되었다. 나는 항상 다수보다는 소수에 속한 사람이었다.” ―지금 한국 사회의 문제점은 무엇이라 생각하나. “과거엔 2030세대가 사회의 미래로 존중받았다. 물리적으로 고생도 많이 했지만 사회적으론 귀한 대접을 받았다. 하지만 요즘은 젊은이들을 키워야 미래가 생긴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별로 없다. 한국의 미래를 미래학자들에게 물어보지 마라. 지금 2030세대의 얼굴을 보면 한국의 미래가 쓰여 있다. 2030세대가 절망하는 원인을 파악해 제거해 줘야 한다. 멀리 보지 마라. 지금 내 옆에 있는 젊은이들에게 물어보라.” ―또 어떤 문제에 주목하고 있나. “세대 갈등이 심하다. 어느 시대든 세대 갈등은 있었지만 지금은 ‘창조적 긴장 관계’가 사라진 게 문제다. 왜 그런가. 젊은이들이 ‘표’의 대상으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젊은이들은 정치인들의 포퓰리즘을 ‘표(票)퓰리즘’이라고 부르고 있다. 노년층은 젊은층의 표를 노리며 세대 갈등을 일으키는 정치인들의 영합주의에 깊은 상처를 받는다. 내가 오래전부터 주장해온 것이 ‘8020’이라는 개념이다. 80대와 20대가 공생해야 좋은 세상이 만들어진다.” ―코로나19를 두고도 우리 사회가 분열됐다는 우려가 있다. “전염병을 계기로 푸코가 말한 ‘바이오폴리틱스(Biopolitics)’, 즉 국가가 개인의 생명을 좌지우지하는 생명정치 현상이 세계를 덮쳤다. 과거 독재자는 ‘나를 죽이는 사람’이었다. ‘내 말 안 들으면 너를 죽인다’는 식이다. 코로나19가 퍼진 사회에선 ‘내 말 들어야 너를 살려준다’는 식이다. 독재자를 피해선 도망갈 수라도 있지만, 지금은 도망가면 백신도 맞을 수 없다. 국민이 (국가 지도자를) 영웅이라고 떠받들게 된다. 지금의 국가 지도자는 백신을 배급해 생명을 살려주는 신과 같은 존재로 군림할 수가 있다. 여기서 또 지식인이 할 일이 많다. 이런 걸 모르면 감시사회에서 벗어날 수 없다. 한국에 한정해 말하는 게 아니다. 세계가, 인류 모두가 처한 상황이다.” ―포스트 코로나 세상은 어떨까. “팬데믹 이전엔 모든 국가를 국내총생산(GDP) 수치로 판단했다. 하지만 코로나19 이후엔 환자 수, 사망자 수가 지표가 됐다. 물질 가치가 ‘생명 가치’로 바뀌고, 인류가 생명 가치를 직접 체험하게 됐다. 어떤 문명이든 코로나19 앞에선 깡그리 붕괴됐다. 마지막까지 남는 건 생명 가치일 것이다. 마이너리티의 역할도 커질 것이다. 코로나19 백신을 개발한 (독일) 바이오엔테크는 터키 이민자 2세 출신의 독일인 부부가 세운 회사다. 그들을 도와 mRNA 기술로 3년 걸리던 혈청제 개발을 한 해 만에 성공한 과학자도 헝가리 난민 출신이다. 포스트 코로나를 이끄는 건 주류가 아니라 보리밭처럼 밟히고 올라온 마이너리티가 될 것이다.” (터키 이민자 2세 출신 독일인 부부는 우구어 자힌과 외즐렘 튀레치다. 미국 제약회사 화이자와 코로나19 백신을 함께 개발한 독일 바이오엔테크 기업을 세운 인물들이다. 부부는 1960년대 독일에서 일하려고 터키에서 건너온 이주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나 독일에서 자란 이민 2세 ‘흙수저’ 출신이다.) ―요즘 한국 문화가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현실을 어떻게 보나. “앞에서 말한 맥락과 같다. 한국을 보라. 중국과 일본이 못 하는 일을 K컬처가 해내고 있다. 코로나19 시대를 버티게 한 건 세계에서 각광받은 한국 문화다. 방탄소년단과 ‘오징어게임’이 세계를 움직였다. 이들과 테스형(가수 나훈아)이 답답한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일종의) 백신을 놓아준 것이 아닌가. 그런데도 대통령 되겠다고 나선 사람들 가운데 제대로 된 문화 정책을 내놓은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었다.”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1934년 충남 아산시 온양 출생△서울대 국어국문학과 학사·석사, 단국대 문학박사△이화여대 국어국문학과 교수△초대 문화부 장관△대한민국예술원 회원(문학평론)△금관문화훈장 수훈인터뷰=김희균 정책사회부장 foryou@donga.com 정리=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 2022-0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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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년간 투고 끝에, 첫 도전에…영예의 9인 “읽는 이들을 즐겁게 하는 글 쓰겠다”[신춘문예 2022]

    밥 짓는 냄새가 솔솔 풍기는 평범한 저녁 시간이었다. 갑작스러운 딸의 환호성에 온 가족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신춘문예 문을 두드려 온 딸이 꼭 10년 만에 당선 소식을 받아든 것. 취업준비생 딸이 투고 사실을 알리지 않아 부모님의 놀라움과 기쁨은 더 컸다. 오랜 세월 고군분투한 딸을 부둥켜안은 어머니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202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자 채윤희 씨(27) 이야기다. 이번 신춘문예에서는 중편소설, 단편소설, 시, 시조, 희곡, 동화, 시나리오, 문학평론, 영화평론의 9개 부문에서 이안리(본명 이상훈·36) 김기태(37) 채윤희 김성애(59) 구지수(26) 김란(58) 이슬기(37) 최선교(26) 최철훈 씨(31)가 각각 당선됐다. 작가를 꿈꾸며 오랫동안 실력을 갈고닦은 이들이 지난해 12월 23일 서울 종로구 동아미디어센터에 모였다. 직업도, 나이도 각양각색이라 처음에는 서로 어색했지만 문학이라는 공통분모로 금세 이야기꽃을 피웠다. 중편소설 당선자 이안리 씨에게 소설은 마치 고백하지 못하고 떠나보낸 첫사랑 같은 존재였다고 한다. 글쓰기를 동경하던 그는 2018년부터 소설 집필에 몰두했다. 기본 생계를 위해 외국어 강사, 통역사 등 부업을 병행하는 ‘N잡러’의 삶이 그렇게 시작됐다. 그간 이 씨의 고충을 아는 가족과 친구들은 그의 등단 소식에 크게 기뻐했다. “주변에서 진심으로 축하해줘 살짝 눈물도 났습니다.” 단편소설 부문 당선자 김기태 씨는 직장에서 당선 소식을 들었다. 마음은 뛸 듯이 기뻤지만 당장 주변에 전하지 못하고 숨죽여 ‘소리 없는 환호’를 내질렀다. 직장생활과 병행하며 성실히 습작한 4년의 세월과 3번의 낙방 경험, 이 과정에서 힘이 돼 준 문우(文友)들의 얼굴이 머릿속을 스쳤다. “떨어질 때마다 ‘예순 살 전에는 당선되겠지’ 하는 마음으로 여유를 찾고 다음 해를, 또 다음 해를 준비했어요. 아직도 얼떨떨합니다.” 시조 부문 당선자 김성애 씨는 전통문학을 더 깊이 공부하고 싶은 마음에 시조를 배우기 시작했다. 가족이 함께 운영하는 목욕탕 카운터에 앉아 짬짬이 습작을 하던 중 2019년 4월 암 발병으로 일을 그만둬야 했다. 어려운 와중에 날아든 당선 소식은 그와 가족 모두에게 큰 힘이 됐다. 김 씨는 두 자녀를 키우고 있는 딸이 자신에게 건넨 말이 아직도 귀에 맴돈다고 했다. “딸이 ‘나도 엄마처럼 자랑스러운 모습을 자식들에게 보여주는 엄마가 되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그 순간만큼 제가 누군가의 엄마이고 할머니인 게 자랑스러웠던 적이 없었답니다.” 각자가 처한 상황이 달랐던 만큼 준비 기간도 천차만별이다. 수년간 투고 끝에 당선된 이들이 있는가 하면 첫 도전에 당선된 이도 있다. 문학평론 당선자 최선교 씨는 ‘초심자의 행운’을 붙잡은 사례. 학부에서 영문학을 전공하고 지난해 3월부터 대학원에서 현대문학을 공부하기 시작한 그는 첫 신춘문예 도전에서 성공을 거뒀다. 그는 “큰 기대 없이 원고를 보낸 거라 부모님께도 투고했다는 말씀을 드리지 않았다”고 했다. 대학원 과제로 쓴 평론 형식의 글들이 많았고, 동료 학생들과 꾸린 평론 스터디 모임도 당선에 한몫했다. 최 씨는 “같이 공부해 온 문우들 중에는 수차례 신춘문예에 도전한 이도 있어 등단 소식을 알리기가 민망하다”고 말했다. 2017년부터 꾸준히 투고해 온 구지수 씨(희곡)는 지난해 동아일보 신춘문예 본심까지 올랐으나 아깝게 고배를 마셨다. 4년의 노력이 결실의 문턱에서 좌절됐지만, 그에게 희곡은 등단 여부로 흔들릴 수준의 소명이 아니었다. “고등학교 연극 동아리 때부터 희곡을 썼어요. 대학에서도 문예창작학과에서 희곡을 전공했고, 졸업 후에도 계속 쓰고 있었습니다.” 인간 중심적인 작품보다는 ‘비인간 동물’에 초점을 맞춘, 세상에 없는 이야기를 쓰는 게 그의 목표다. 동화 부문 당선자 김란 씨는 2005년 한 동화 모임에 참석한 후 그 매력에 흠뻑 빠져 밤을 새우며 이야기를 짓기 시작했다. 김 씨는 “매번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신춘문예에 투고한 지 벌써 10년이 넘었다. 아마 이번에 등단하지 못했더라도 꼬부랑 할머니가 될 때까지 원고를 보냈을 것”이라며 웃었다. 이번 등단으로 당선자들은 글쓰기에 날개를 달았다. 이들은 이 날개로 어디를 향해 날아가고 싶을까. 영화평론 당선자 최철훈 씨는 “그냥 책상 앞에 앉아 스스로의 정신적인 만족을 위해 쓰는 평론이 아닌 현실적으로 좀 더 힘을 갖는 평론을 쓰고 싶다”고 했다. 대학 시절부터 철학과 문학, 영화를 공부하며 자신의 생각을 글로 정리하는 게 습관이 됐다는 최 씨에게 등단은 그 자체로 목적이기보다 실력을 제대로 평가받고 더 성장하기 위한 디딤돌이다. 8년의 습작기를 보내고 시나리오 부문에서 당선된 이슬기 씨의 각오는 오래 기다린 기회를 잡은 이답게 담백하고도 묵직했다. “사람들이 보고 재밌었으면 좋겠어요. 그뿐입니다. 제 이야기에 매몰되기보다 읽는 이를 즐겁게 하는 글이 더 좋다고 생각하거든요.”전채은 기자 chan2@donga.com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 2022-0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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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K콘텐츠 창의성 원천? 실컷 놀고 수다 떨고 마음껏 공상한 것”

    《가위 한국 콘텐츠의 황금기다. 다양한 창작 생태계와 활발한 도전이 성공 비결로 꼽히지만 핵심은 빼어난 창의성이다. 동아일보는 2022년을 맞아 세계를 뒤흔든 콘텐츠계 ‘황금손’ 3명과 창의성의 원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세계를 강타한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게임’의 황동혁 감독(51)과 ‘완전한 행복’, ‘7년의 밤’을 쓴 정유정 소설가(56), 넷플릭스 드라마 ‘D.P.’의 원작 웹툰을 그린 김보통 작가(41)가 창작의 원천을 공개했다.황 감독은 영화 ‘남한산성’, ‘수상한 그녀’, ‘도가니’로도 큰 사랑을 받았다. 정 작가가 쓴 ‘완전한 행복’, ‘종의 기원’은 서점 베스트셀러 1위를 휩쓸었고 ‘7년의 밤’은 동명 영화로도 제작됐다. 한국 군대의 가혹행위를 현미경처럼 들여다본 ‘D.P.’는 국내를 비롯해 세계적으로도 관심을 모았다. 이들이 신선하고도 놀라운 콘텐츠를 만든 비결을 5개의 키워드로 정리했다.》온몸으로 즐긴 놀이 황 감독은 “초등학생 때 오징어게임을 비롯해 온갖 놀이를 하며 시간을 보냈는데 이 경험이 쌓여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게임’이 탄생했다”고 했다. 온몸으로 부딪히며 갖가지 골목 놀이를 하며 자란 기억이 대작 탄생의 비결이라는 것. 친구들과 어울리는 황 감독을 향해 어머니 혹은 할머니가 “멀리 가지 마라”, “밥 먹으러 와라”고 당부하던 기억이 켜켜이 쌓여 작품으로 피어났다. ‘오징어게임’의 마지막 장면에서 상우(박해수)의 애절한 대사 “어릴 때, 형이랑 이러고 놀다 보면 꼭 엄마가 밥 먹으라고 불렀는데…. 이제는 아무도 안 부르네”가 그것. 정 작가가 어린 시절 사방팔방 들판을 뛰어다닌 기억은 그의 작품에 깊이 녹아 있다. 전남 함평군이 고향인 그는 친구들과 매일 늪 주변에 있는 폐가를 찾아다니며 놀았다. ‘완전한 행복’에서 나르시시스트인 주인공이 폐가와 다름없는 시골집에 사는 풍경을 묘사한 것도 그때 경험에서 비롯됐다. 정 작가는 “작품에 도시가 아닌 시골 풍경이 자주 나오는 건 천둥벌거숭이 시절 뛰어놀던 경험 때문”이라며 “어릴 때 그렇게 놀지 않았다면 소설 속 다양한 장면을 어떻게 그려낼 수 있겠느냐”고 했다.각계각층과 즐기는 수다황 감독은 여러 분야에서 일하는 지인들과 술자리에서 이야기를 나누며 영감을 얻곤 한다. 시나리오를 쓰다가 막히면 지인을 옆에 앉혀 놓고 대화하며 글을 쓸 정도다. 영화·드라마 연출팀, 미술팀 등 다양한 스태프와 자주 대화하는 건 물론이다. 대학교수, 회사원, 금융인, 판사, 변호사 등 각종 분야에서 일하는 친구들과 집에서 모여 밤새 수다도 떤다. 친구들이 말해주는 각 직업의 ‘뒷담화’가 그에겐 창작의 샘. 황 감독은 “대화는 항상 내게 자극이 된다”고 말했다. 정 작가는 작품을 쓸 때마다 해당 분야 종사자들을 찾아다니며 대화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교사, 기자 등 등장인물의 특성을 알기 위해 이 일을 하는 이들과 자주 이야기를 나눈다. 각종 방법을 이용한 살인 사건을 묘사하기 위해 전문의, 프로파일러에게 조언을 구하고 이를 반드시 노트에 정리한다. ‘완전한 행복’을 쓸 땐 약리학 교수에게 자문해 약물로 등장인물을 죽이는 장면을 실감나게 그려냈다. 정 작가는 “전문가와의 대화는 치명적 실수를 막을 뿐 아니라 그 분야에 대해 깊이 공부할 수 있는 방법”이라며 말했다. 김 작가가 작품의 깊이를 더할 수 있었던 비결도 군 생활 때 귀를 활짝 열어둔 덕이다. 김 작가는 육군 헌병대(현 군사경찰대)의 군무이탈자 체포전담조인 DP(Deserter Pursuit) 조원으로 근무했다. 근무이탈자의 부모, 여자친구, 친구들을 샅샅이 만날 때마다 이들의 이야기를 허투루 듣지 않았다. 왜 그들이 탈영할 수밖에 없었는지 고민하게 됐고 이는 창작으로 이어졌다. 김 작가는 “근무이탈자의 지인을 만나다 보니 근무이탈자들이 마치 내 지인처럼 느껴졌다”며 “독자에게도 그때의 내 심정을 전하고 싶어 웹툰을 그리게 됐다”고 했다.분야 망라한 잡식성 관심 황 감독은 매체, 장르를 막론하고 다양한 이야기를 빨아들이는 ‘잡식 동물’이다. “게으르고 싫증을 잘 내서”라는 겸손한 표현과 달리 드라마, 영화, 다큐멘터리, 만화 등을 두루 섭렵한다. 한국에선 생소한 서바이벌 장르 ‘오징어게임’을 만든 것도 ‘배틀로얄’, ‘라이어 게임’ 등 서바이벌 장르 만화를 좋아한 덕이다. 황 감독은 한때 소설과 시를 짓고, 영화 평론도 공부했다. 황 감독은 “집에 혼자 있으면 TV를 틀어놓고 책을 읽는데 어느 순간 탁 아이디어가 떠오르는 순간이 있다”며 “작품은 이 모든 종합적인 것의 결과물”이라고 했다. 김 작가는 의외로 다른 웹툰은 잘 보지 않는다. “열등감만 생기고, 속이 터지기 때문에 하나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게 그 이유다. 하지만 김 작가는 다른 분야 콘텐츠에 대해선 레이더를 켜고 다닌다. 대표적인 것이 사람들의 사연이 담긴 뉴스다. 생동감 넘치는 인물을 만들어내기 위해 뉴스를 통해 다양한 사람들의 삶을 관찰한다. 또 기구한 사연을 지닌 사람들을 소개하는 방송 프로그램을 보며 캐릭터를 생생하게 그려나가기도 한다. 창작물에 한정하지 않고 현실을 다룬 콘텐츠도 민감하게 받아들이는 취향 덕에 그의 작품은 현실성이 높다는 평가를 받는다. 김 작가는 “작품을 허구로만 채우는 건 탈영이라는 사건의 무게를 희석하는 것이 될 수 있어 실제 보도된 사건을 참고해 현실감을 살렸다”고 했다.상상력 날개 달아준 독서 황 감독은 어린 시절 계몽사 문고와 백과사전을 탐닉했다. 미국 작가 허먼 멜빌(1819∼1891)의 ‘백경’(모비딕)이나 영국 소설가 찰스 디킨스(1812∼1870) 작품에 빠진 게 대표적. 책에 나온 장면을 외우다시피 하고 자신이 이야기 속 주인공이 되는 상상을 즐겼다. “너무 재미있어서 같은 책을 반복해서 계속 읽었다”는 황 감독은 “혼자 머릿속에 그림을 그리고, 이야기를 만드는 상상을 많이 했다”고 말했다. 초등학교 때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에서 하염없이 공상에 빠져 종점까지 간 적도 있다. 정 작가는 다독가로 유명하다. 책 한 권을 쓰기 전 수십 권을 읽는다. 책을 읽다 보면 어떤 이야기를 쓸지 다양한 질문과 답변이 쏟아진다고 한다. ‘완전한 행복’을 쓰기 전엔 행복에 대한 생각을 정립하기 위해 50권이나 읽었을 정도. 정 작가는 “독서는 자신만의 생각을 정립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강조했다.뼛속까지 새긴 경험 김 작가는 보편적인 경험이 이야기의 힘이라는 걸 보여준 대표적 작가다. 군 생활은 한국 남성 다수가 하는 경험이기에 사회적 공감대를 이끌어내는 좋은 소재였다. ‘D.P.’ 역시 자신의 군복무 경험에 주변의 군 생활 사례를 더했다. 그는 “이야기는 기본적으로 ‘나’라는 독자를 위해 만드는 것”이라며 “내 경험에서 온 감정을 이야기로 풀어내며 마음을 정리해야 독자들이 주인공에게 더 이입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정 작가는 5년간 간호사로 일한 경험을 살려 약물을 이용한 범죄를 작품에서 자주 활용한다. 그는 간호사 시절 대부분을 응급실과 중환자실에서 보냈다. 생사를 오가는 사람들이 거쳐 간 장소에서 ‘인간이란 대체 무엇인가’라는 고민을 끊임없이 했다. 그의 작품이 인간의 본성을 파고드는 것도 여기서 비롯됐다. 정 작가는 “장편소설 ‘7년의 밤’, ‘28’, ‘종의 기원’까지, ‘악의 3부작’을 쓴 것도 인간 본성을 알고 싶어서였다”고 했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이기욱 기자 71wook@donga.com}

    • 2022-0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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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프리다 칼로의 집은 하나의 예술작품”

    예술가처럼 재택근무를 자주 하는 이들이 또 있을까 싶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닥치기 전에도 예술가들은 집에서 일했다. 집 한편에 작업실을 마련하고, 집 밖으로 보이는 풍경을 캔버스에 담았다. 예술가들이 오래 머무는 공간이 자연스레 그들의 인생에 큰 영향을 미쳤을 터. 집은 예술가들에겐 삶의 터전이자 영감을 주는 뮤즈인 만큼 그들을 이해하는 데 예술가의 집은 흥미로운 주제다. 이 책은 17명의 시각예술가와 그들이 살았던 공간을 담은 예술 에세이다.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린 두 저자는 전 세계 곳곳을 여행하며 예술가들의 집을 직접 방문하고 그들의 공간에 관한 감상을 글과 그림으로 기록했다. 감성적인 문체와 다채로운 그림에 끌려 책을 열었다. 먼저 이들은 프랑스 화가 클로드 모네(1840∼1926)의 저택으로 찾아간다. 프랑스 지베르니에 있는 모네의 집은 색으로 가득하다. 노란색, 청록색, 빨간색…. 모네는 삶의 활기를 얻는 공간으로서 지베르니의 저택을 사랑했다. 모네는 밝고 활기찬 집에서 자유분방하게 살아가며 치열한 작품 활동을 계속할 힘을 얻었다. 네덜란드 화가 빈센트 반 고흐(1853∼1890)는 어떨까. 고흐의 프랑스 아를 집은 ‘옐로 하우스’라 불린다. “신선한 버터 색깔”이라는 고흐의 묘사처럼 이 집의 외벽은 온통 노랗다. 아를로 거처를 옮긴 뒤 고흐의 작품에 색채가 가득한 것도 집의 외관과 관련 있다. 어둠 속에서 삶을 버티던 고흐의 작품에 따뜻함이 깃든 것도 그가 머물던 공간이 주는 안정감 덕이다. 멕시코 화가 프리다 칼로(1907∼1954)의 속살을 엿보고 싶다면 그가 1930년대 후반에 머물던 멕시코의 집 ‘카시아술’로 가보자. 이 집엔 멕시코의 전통 공예품과 토착 미술품으로 가득하다. 멕시코 전통 속에 고독과 고통을 녹여내 기존의 미술 범주에도 들지 않는 독특한 화풍을 만들어낸 칼로의 취향이 뚜렷하게 드러난다. “칼로의 집은 뚜렷한 하나의 예술작품처럼 느껴진다”는 평가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예술가가 세상을 떠난 이후 전혀 다르게 바뀐 공간도 있다. 미국 화가 장미셸 바스키아(1960∼1988)가 마지막 생애를 보냈던 미국 뉴욕 그레이트존스의 집이 대표적. 바스키아가 세상을 떠난 후 이 집은 일식 식당, 식료품 창고, 선물 가게로 바뀌었다. 바스키아를 기리는 그라피티(낙서 형태의 벽화)가 가득한 건물의 외벽만이 이곳이 바스키아의 집이었음을 알려줄 뿐이다. 현대 미술계에서 ‘검은 피카소’로 불리는 그의 위상을 고려하면 안타까운 현실이다. 특히 유색인, 여성 예술가의 집이 소실된 경우가 많다고 지적한다. 가난하고 힘없는 예술가들의 집이 사라져 그들의 사후에 깊이 연구되지 못하고 있다는 것. 흑인이건 백인이건, 남성이건 여성이건 예술가의 집을 지켜야 앞으로도 그들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 2022-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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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판타지 소설의 세계관… 20대가 공감하는 이유[이호재의 띠지 풀고 책 수다]

    연말이 되자 출판계에서 올해 많이 팔리거나 읽힌 책이 속속 발표되고 있다. 가장 많이 언급되는 작품은 판타지 장편소설 ‘달러구트 꿈 백화점’(팩토리나인). 교보문고와 예스24는 올해 가장 많이 팔린 책으로 이 책을 꼽았다. 전자책 플랫폼 ‘밀리의 서재’도 지난해에 이어 올해의 책으로 이 책을 선정했다. 지난해 7월과 올 7월 각각 출간된 1, 2권을 합쳐 100만 부가 팔리는 등 달러구트 꿈 백화점의 영향력은 컸다. 이 책은 일본의 문학평론가와 현직 작가가 함께 쓴 실용 작법서다. 책은 판타지 작품에 등장하는 주요 소재를 소개한다. 저주, 환생, 연금술 등 판타지 세계에 자주 등장하는 능력과 용, 천사, 악마 같은 다양한 캐릭터를 활용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것. 책을 읽다 보면 판타지 작품의 특성을 파악할 수 있다. 기본적으로 창작자들을 위한 비법을 담았지만 판타지 소설을 좋아하는 독자가 읽어도 장르를 더 깊게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이 책에서 가장 눈에 띈 건 저자들이 갖고 있는 시각이다. 이들은 ‘판타지 소설’과 ‘판타지 게임’을 구분하지 않는다. 소설과 게임이 서로 영향을 미치며 판타지 세계를 발전시켜 왔다는 것. 예를 들어 영국 작가 존 로널드 톨킨(1892∼1973)의 판타지 소설 ‘반지의 제왕’은 롤플레잉게임(RPG)의 초석으로 불리는 판타지 게임 ‘위저드리’ 시리즈에 큰 영향을 끼쳤다. RPG ‘드래곤 퀘스트’나 ‘파이널 판타지’ 시리즈를 통해 발전한 판타지 세계가 요즘 판타지 소설을 받치는 기틀이 되고 있다는 게 저자들의 견해다. 책 제목에 ‘소설’ 대신 ‘유니버스(우주)’라는 표현을 넣은 이유다. 올해 출판계에선 달러구트 꿈 백화점을 두고 여러 논의가 나왔다. 책의 인기가 반짝하고 시들 것이라는 지적도 있었지만 판매량이 급격히 늘면서 이런 주장은 힘을 잃었다. 영국 판타지 장편소설 ‘미드나잇 라이브러리’(인플루엔셜)가 올 4월 국내에 번역 출간된 뒤 25만 부가 팔린 것을 보면 판타지 열풍은 특정 작품에만 한정된 것도 아니다. 출판평론가들 사이에서는 답답한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은 이들의 욕망이 판타지 소설 열풍을 일으켰다는 평가가 나왔다. 판타지 장르가 발달한 웹소설 인기가 출판계에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도 제기됐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니 판타지 소설 인기에 ‘게임’이라는 키워드를 빼놓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달러구트 꿈 백화점의 주요 독자층이 20대라는 점을 고려하면 특히 그렇다. 게임을 즐기며 함께 성장해온 세대에게 달러구트 꿈 백화점의 판타지 요소(마법, 특별한 동물과 식물)는 매력적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이제는 베스트셀러의 성공 요인을 오직 문학적 성취로만 판단할 수 없는 시대가 온 것 같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 2021-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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