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하기

론 하워드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파바로티’는 사운드트랙의 절반 이상이 자코모 푸치니(1858~1924)의 오페라 아리아들로 채워진다. 테너 루치아노 파바로티(1935~2007)는 푸치니 오페라의 탁월한 해석자였지만, 영상으로 재구성한 그의 삶이 푸치니의 삶을 떠올리게 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두 사람 모두 키가 컸고 친절했다. 우수(憂愁)와 댄디함이 앞섰던 푸치니와 비만한 몸에 양팔을 벌리며 천진하게 웃는 파바로티는 많이 달라 보인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여성들로 가득한 대가족 속에서 어려운 유년기를 보낸 뒤 세계인을 매혹하는 성악예술의 거장이 됐다. 여성에 대한 사랑에서 삶과 예술의 자극을 구한 점도 닮았다. 세계인 대부분은 파바로티가 오페라 스타로서의 삶 대부분을 함께 한 부인과, 비서 출신인 두 번째 부인만을 알고 있었다. 스포일러를 무릅쓰고 밝히면 오랜 관계를 유지했던 제3의 인물이 등장한다. ‘비서’도 사실은 비서가 아니었다. 영화는 전통적인 다큐멘터리의 정석에 충실하다. 의외성은 없다. 대신 이 흥미로운 예술가의 삶 자체가 화면에 빠져들 재미를 길어 올린다. 영국의 다이애나 왕세자빈부터 ‘동료’ 플라시도 도밍고와 호세 카레라스, 어릴 때 그의 방중 소식에 흥분했던 피아니스트 랑랑까지, 수많은 유명인사들이 자료화면과 증언으로 스크린을 수놓는다. 1990년대 이후 오페라 무대를 멀리하며 록밴드 U2의 보노를 비롯한 대중음악가들과 무대를 가진 것은 오랜 팬들과 평론가들로부터 따가운 목소리를 불러왔다. 만년에 눈뜬 자선사업에의 공헌에도 불구하고 그랬다. 감독은 파바로티 주변인들의 입장을 충실히 전한다. 다이애나빈을 비롯한 명사들과의 교류 및 만년의 새 사랑 니콜레타의 관심사가 그를 새로운 세계로 이끈 것이라고. 영화가 보여주지 않는 사실은 이랬을 것이다. 파바로티의 선택은 나름 영리했다. ‘당시의 파바로티’가 ‘과거의 파바로티’를 넘어서지 못한다는 사실이 분명해지자 행동의 범위를 확장했던 것이다. 거의 마지막까지 그의 목소리는 햇살과 같이 따사롭고 찬란한 빛깔을 유지했다. 그러나 그 목소리를 제어하는 힘의 쇠퇴, 특히 호흡이 짧아져 반주자와 동료 성악가들이 템포를 맞춰줘야만 하는 일은 1990년 첫 쓰리테너 콘서트부터 명백했다. 기자는 예전 ‘쓰리 테너’를 ‘연인의 공식’으로 소개한 일이 있다. 파바로티는 밝고 또렷한 목소리로 낙천적인 분위기를 주위에 흩뿌렸다. 150㎏을 넘나드는 거구에 함박웃음을 지으며 팔을 벌려 인사하는 이 ‘순진한 곰’을 보며 관객들은 행복과 밝음의 이미지에 흠뻑 취하곤 했다. 도밍고는 많은 것을 알고 있거나 큰 재산을 소유한, ‘가진 자’의 이미지를 줄곧 풍겨왔다. 바리톤으로 출발한 그의 음성은 짙고 기름졌다. 힘 좋은 ‘젊은 장군’은 그의 단골 배역이었다. 창백하고 깡마른 카레라스는 온몸을 쥐어짜 노래한다는 느낌을 줬다. 가진 것 없지만 열정이 넘치는 남자, ‘시인’이 그를 감싸는 이미지다. 지적이고 진실해 보이는 표정이 그의 열정적인 노래에 한 겹의 빛을 더했다. 세 사람 중 파바로티는 현대에 출연한 모든 테너 가운데서도 가장 위대한 ‘악기’, 그의 발성기관을 자랑할 수 있었다. 전성기에는 그 악기를 연주하는 솜씨도 경탄의 대상이었다. ‘라이벌’이었던 도밍고는 ‘파바로티는 입만 벌리면 모든 소리를 다 냈다’고 영화에서 증언한다. 그러나 그 악기를 관리하는 솜씨는 파바로티가 도밍고보다 하수였다. 어린 시절부터의 친구이자 오페라 무대의 단짝이었던 소프라노 미렐라 프레니가 한 마디도 들려주지 않은 점은 의아하다. 손녀의 출생과 함께 ‘옛 가족’과 ‘새 가족’이 화해한 점은 강조하지만, 사망 이후 유산 분배를 둘러싼 충돌은 언급하지 않는다. 문제들이 해소됐기 때문에 이 영화가 나온 것일까. 1977년, 그의 첫 내한 실황 방송을 녹음해 그해 겨울 내내 테이프가 늘어지도록 들었던 기억을 떠올리며 영화를 봤다. 헤어진 부인 아두아는 말미에 ‘그는 보통 사람보다 한 수 위였다. 잘 베풀었으며 특히 위대한 가수였다’고 남편을 회상한다. 그런 삶을 훑어보는 일이 행복했다. 함께 한 음악은 ‘덤’이라기엔 너무 아름다웠다. 12세 관람가. 2020년 1월 1일 개봉. 유윤종 문화전문기자gustav@donga.com}

아시아 최대 규모의 성탄 축제가 충주의 밤하늘을 밝게 물들였다. 충주라이트월드(대표 이원진)와 슈퍼크리스마스코리아 조직위원회가 주최하는 ‘슈퍼 크리스마스 코리아 2019’가 충북 충주시 남한강로 14만 m²(약 4만3000평) 규모의 조명 테마파크인 충주라이트월드에서 13일 저녁 개막식을 갖고 막을 올렸다. 내년 1월 31일까지 열리는 이 축제에는 크리스마스트리 1200여 개가 밤하늘을 수놓는 ‘크리스마스 라이팅 카니발’을 비롯해 크리스마스마켓, 캐럴 쇼, 성탄 퍼레이드, 댄싱 페스티벌 등 다양한 행사가 펼쳐진다. 크리스마스 라이팅 카니발에는 전국 교회와 학교, 미국 중국 등의 해외 교포와 탈북민도 참여해 저마다 호화로운 솜씨를 펼쳐냈다. 2019명이 함께 만드는 조명 작품 ‘슈퍼 예수’, CD 100만 개로 장식하는 ‘소망 트리’도 설치했다. 소망 트리는 기네스북 등재도 추진할 계획이다. 축제 총감독인 이원진 대표는 “생각과 종교 등의 차이를 넘어 방문하는 분 모두가 사랑과 희망, 평화의 가치를 함께 느끼고 행복할 수 있는 축제로 준비했다”고 말했다. 성탄을 축하하고 평화를 기원하는 콘서트도 이어진다. 역경을 극복한 사람들의 감동 스토리를 음악으로 표현하는 ‘엑소더스 콘서트’, 산타 가요제, 릴레이 자선 가요제 등이 열린다. 기존에 충주라이트월드가 운영하던 화려한 전시물들도 축제 기간에 함께 빛을 밝힌다. 충주라이트월드의 상징은 이탈리아 존에 설치된 높이 27m, 길이 100m의 루미나리에(조명건축물). 고딕 양식을 연상시키는 이 ‘빛의 성당’은 발광다이오드(LED) 약 30만 개가 빛을 밝히는 세계 최대급 규모다. 타지마할을 형상화한 인도 존, 모스크바 붉은 광장의 바실리 성당을 본뜬 러시아 존 등도 방문객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유윤종 문화전문기자 gustav@donga.com}

“그런 것도 물리학인가요?” 이 책의 부제는 ‘복잡한 세상의 연결고리를 읽는 통계물리학의 경이로움’이다. 통계물리학이라는 말이 낯설다면 목차를 살펴보자. ‘시민 저항운동, 비폭력이 이기는 순간’ ‘국회의원, 누가 누가 친할까’ ‘사라진 만취자를 찾는 과학적 방법’…. 물리학 책이 맞을까. 첫 장에서 물리 용어인 문턱값(임계값)을 설명하는 모습을 살펴보자. 숲에 나무가 빽빽하면 산불 한 번으로 많은 나무가 타버린다. 나무 간격이 성글면 산불 피해를 적게 입어 나무가 많아진다. 이 때문에 나무의 밀도는 특정한 값으로 수렴하게 된다. 이렇게 문턱값에 도달한 숲을 살펴보면 나무들이 ‘프랙털’ 형태, 즉 불규칙적으로 보이지만 확대해 보면 부분이 전체를 닮은 모양으로 분포한다. 이렇게 물리학은 세계에 반영된다. 숲에만 통계물리학이 관계될 리 없다. 어느 정치학자는 저항운동의 폭력성과 성공률을 통계로 접근한 결과 비폭력적인 저항이 2배 이상의 성공률을 보이는 것을 발견했다. 참여자가 인구의 3.5%를 넘은 ‘모든’ 저항운동이 성공했다는 사실도 흥미롭다. 우리나라의 경우 200만 명 정도에 해당한다. 여기까지는 통계와 정치의 영역이다. 그런데 물리학자들은 한발 더 들어갔다. 두 대립하는 의견이 있는 사회에서 한쪽을 고수하는 강한 신념이 있는 사람들이 13.4%를 넘어서는 순간 사회 전체가 변화하게 된다. 물리학 용어로 상전이(相轉移)에 해당한다. 그래도 이런 게 물리라는 걸 이해하기 쉽지는 않다. 저자는 ‘함께하면 달라지는 것’이 재미있다고 말한다. ‘많은 구성요소들이 모여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작용할 때, 전체가 어떤 큰 특성을 새롭게 만들어 내는지’가 통계물리학이 흥미를 갖는 관심사다. 인간 사회의 모습에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인간과 함께 ‘상호작용하는 다수’로 성공을 거둔 대표적 사례가 개미 사회다. 개미들은 각자 협력하고 자기를 희생할 의지가 있을까? 그런 건 없다. 낱낱의 개미는 단순한 원칙에 의해 움직일 뿐이다. 개미들이 푹 팬 땅에서 다리(橋)를 만드는 것도 그렇다. ‘앞의 개미가 정지해 갈 곳이 없으면 그 등으로 오르고, 자기 위에 일정 수 이상 개미가 있으면 딱 멈추고, 없어지면 다시 간다’는 원칙을 따른 결과 ‘개미 브리지’가 생기는 것이다. 이렇게 단순한 다수가 복잡한 특성을 이루는 것은 창발(emergent) 현상으로 설명된다. 우리가 알고 있던 것이 통계물리학으로 설명되기도 하지만, 사실로 알고 있던 것이 통계물리학의 눈을 통해 본 결과 허구로 밝혀지기도 한다. 농구에는 ‘뜨거운 손’이라는 말이 있다. 한번 득점하면 연거푸 득점하기 쉽다는 뜻이다. 그러나 방대한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 각각의 득점은 서로 시간상 독립적인 ‘푸아송분포’를 따른다는 것이 밝혀졌다. 행성의 운동이나 입자의 움직임을 추적하는 줄 알았던 고정관념 속의 물리학과는 다르다. 그러나 통계물리학은 주식시장의 추이를 들여다보는 데도, 인공신경망의 구조를 효과적으로 바꾸는 데도, 고속도로 정체를 개선하는 데도, 프로야구 경기 일정표를 효율적으로 짜는 데도 도움을 주고 있다. “물리학자도 세상을 본다. 다른 사람들과는 좀 다르게 말이다. 인간 사유의 최전선에서 물리학은 철학과 등을 맞대고 사유의 범위를 확장하기 위해 애쓰는 동반자다.” ‘세상 물정의 물리학’으로 한국출판문화상 저술상을 받은 저자가 4년 만에 내놓은 책이다. 유윤종 문화전문기자 gustav@donga.com}

‘건반 위의 구도자’ 피아니스트 백건우가 창건 1374년을 맞은 경남 양산 통도사를 쇼팽의 선율로 물들인다. 통도사는 15일 오후 3시 경내 설법전에서 ‘피아니스트 백건우 & 통도사, 설법전에서 만난 백건우의 쇼팽’ 콘서트를 연다. 이달 7일과 오늘(11일)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먼저 선보인 ‘피아노의 시인’ 쇼팽의 작품 8곡을 프로그램으로 선택했다. ‘통도사와 음악’은 낯설지 않은 조합이다. 통도사는 2016년 7월부터 매주 일요일 오후 1시 삼성반월교 옆 숲속 무대에서 음악회 ‘음악과 함께하는 부처님 말씀’을 진행해 왔다. 국악인 박애리, 재즈싱어 웅산 등 각 장르에서 빛을 발하는 예인들이 이 무대를 찾아왔다. 이번 쇼팽 콘서트가 열리는 설법전은 국내 단일 목조건물로는 가장 크다. 정면 9칸, 측면 11칸 규모의 건물로 2000여 명이 들어갈 수 있다. 통도사 부근에 거주하며 백건우 음악의 매력을 알려온 음악 칼럼니스트 조희창 씨는 “19세기 중반의 낭만주의 음악이 인간의 감정을 거창하고 화려하게 드러내려 한 데 비해 쇼팽은 오히려 절제하면서 섬세한 감정을 담으려 했다. 산사가 전해주는 분위기와 잘 어울리는 감명 깊은 무대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연주곡은 쇼팽의 즉흥곡 2번 F샤프장조로 시작해 명상적이고 호젓한 야상곡(녹턴, 밤의 서정을 그린 음악) 네 곡이 프로그램의 중심을 이룬다. 중간에 ‘화려한 왈츠 F장조’와 ‘화려한 대왈츠 E플랫장조’가 밝고 상쾌한 분위기를 자아내면서 대조를 이룬다. 깊은 깨우침을 주는 듯한 느낌의 발라드 1번으로 프로그램의 문을 닫는다. 백건우는 2011년부터 전국의 섬 지역을 돌며 ‘섬마을 콘서트’를 여는 등 콘서트홀을 벗어난 곳에 연주의 손길을 펼쳐 왔다. 부인인 배우 윤정희의 알츠하이머 투병을 최근 고백한 그는 “야상곡에는 쇼팽 자신의 고민이나 고통을 고백하는 페이지가 많다. 자기와의 대화, 그리고 쇼팽 자신을 가장 잘 말해주는 작품들”이라고 이번 연주곡들에 대해 설명했다. 유윤종 문화전문기자 gustav@donga.com}

“오페라에 나오는 선율들은 이야기를 전제로 하니까 호소력이 커요. 여러 작곡가들이 오페라에서 클라리넷에 중요한 선율을 부여했죠.” 클라리네티스트 조성호(34·도쿄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클라리넷 수석·사진)가 오페라를 들고 무대에 오른다. 13일 오후 8시 서울 예술의전당 IBK챔버홀, 11일 오후 7시 반 광주 유·스퀘어문화관 금호아트홀에서 여는 클라리넷 리사이틀 ‘아리아’다. 피아니스트 김재원이 반주한다. 바시 ‘베르디 리골레토 주제에 의한 환상곡’, 자코마 ‘푸치니 토스카 주제에 의한 환상곡’ 등 오페라 아리아 선율을 주제로 편곡한 다섯 곡을 연주한다. “대부분 변주곡 형식으로 화려한 테크닉을 뽐내는 곡들이죠. 리사이틀 때 한 곡씩 넣긴 하는데, 테크닉이 어려워 하루 저녁을 다 채우기는 쉽지 않아요. 한창 나이라(웃음) 지금 해두고 싶었죠.” 조성호는 한국예술종합학교 졸업 후 독일 베를린 한스아이슬러음대 디플롬과 마스터과정을 수료했고 2017년 오디션을 통해 도쿄필 수석으로 선발됐다. “그 전에는 오페라에 큰 관심이 없었어요. 도쿄필은 정규 콘서트 외에 신(新)국립극장에서 열리는 수많은 오페라를 반주하는 역할도 맡거든요. 거의 모든 주요 오페라 레퍼토리를 반주하면서 그 매력에 빠졌어요.” 자코마의 ‘토스카 주제에 의한 환상곡’은 푸치니 ‘토스카’ 3막의 테너 아리아 ‘별은 빛나건만’의 클라리넷 전주를 주제로 삼은 곡이다. 사형수의 허무함과, 지난날을 회상하는 에로틱한 육욕(肉慾)까지 수많은 느낌이 클라리넷에 담긴다. 클라리넷을 ‘가장 인간의 목소리와 닮은 악기’라고 부르는 사람도 많다. “클라리넷 음역은 4옥타브를 넘나들어요. 메조소프라노에서 베이스까지죠. 특히 오페라 속의 독창곡(아리아)에서 사람 목소리와 대화하게 만든 부분이 많습니다.” 그는 미국 악기 제조사 셀머의 후원을 받는 ‘셀머악기 아티스트’다. 널리 쓰이는 프랑스 뷔페 클라리넷에서 대학 4학년 때 셀머로 바꾸었다. “뷔페가 더 인체공학적이고 편하죠. 하지만 저는 셀머의 어둡고 깊은 소리가 마음에 들었습니다.” 3만∼4만 원. 02-338-3816유윤종 문화전문기자 gustav@donga.com}

일본 사회에 깊이 뿌리박힌 혐한은 올해 시작된 우리 사회의 ‘NO 저팬’과 나란히 비교할 수 없다. 일본은 대형 서점에 혐한서적 코너가 버젓이 자리 잡고 있으며 지상파 아침 토크 프로그램들은 혐한 내용으로 높은 시청률을 누린다. 과거의 피침략국에 대한 미안함은커녕 혐오 현상과 감정이 만연한 일은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기 어렵다. 그 배경에는 무엇이 있을까. 일문학 박사인 저자는 일본 사회에서 소비되는 소설과 만화 등 혐한 콘텐츠를 연구해왔다. 이 책에서도 책의 후반부는 소설 만화 등 혐한 텍스트에 대한 분석이 차지한다. 책의 앞부분에서는 이 같은 혐한 현상의 역사적 배경, 이를 이끄는 세력의 실체, 정계의 심층구조까지 전하고 있다. 일본은 1000년 동안 소수 부락민(部落民)을 경계 짓고 차별해 왔다. 사회적 스트레스의 희생양을 만들어내는 전통이다. 오늘날엔 차별의 대상을 한국과 한반도, 재일 한국인으로 바꾸게 된 것이다. 우경화 노선을 걸어온 아베 정권으로서는 ‘외부의 적’을 부각시켜 결속을 다지기 위한 전략이기도 하다. 아베 정권을 실질적으로 움직이는 극우 ‘일본회의’, 혐한 시위를 이끄는 ‘재특회’ 등 혐한의 중심에 있는 조직들에 대한 분석도 일부는 이미 보도된 내용이지만 참고할 만하다. 후반부의 텍스트 분석에서는 ‘론(論)’이란 제목으로 포장된 각종 혐한 서적과 그 작가들부터 야마노 사린의 ‘만화 혐한류’, 위안부 문제를 좌익 이데올로기로 몰아붙인 고바야시 요시노리의 만화 ‘고마니즘 선언’ 등을 분석한다. 이런 내용들이 읽히게 된 데는 1960년대 일본인을 전쟁 피해자로 부각시킨 ‘반딧불이의 무덤’부터 일관된 흐름이 있다고 저자는 설명한다. 햐쿠타 나오키의 2016년 소설 ‘개구리의 낙원’은 아예 가공의 개구리 사회를 빗대 평화헌법을 부정하고 노골적으로 한국과 한국인에 대한 혐오를 드러낸다. 이 작가가 아베 총리와의 대담에서 한 얘기는 등골을 서늘하게 만든다. “반복 또 반복하고 같은 내용이라도 몇 번이고 계속 말하는 게 중요합니다.” 과거 나치의 선전상 괴벨스의 말과 같지 않은가.유윤종 문화전문기자 gustav@donga.com}

지휘자 김은선 씨(39·사진)가 미국 샌프란시스코 오페라(SFO)의 음악감독으로 2021년 8월 1일 취임한다고 SFO가 5일(현지 시간) 발표했다. 1923년 설립돼 96년 역사를 가진 SFO는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와 함께 미국 양대 오페라극장으로 꼽힌다. 북미 대륙에서 여성이 오페라극장 감독으로 취임하는 것은 김 씨가 처음이다. 첫 계약 기간은 5년. 시즌마다 최대 4개의 오페라 작품을 지휘한다. 김 씨는 올해 6월 드보르자크 오페라 ‘루살카’로 SFO에 데뷔해 호평을 받았다. 연세대 음대와 대학원을 졸업한 그는 독일 슈투트가르트 음대 재학 중 2008년 스페인 헤수스 로페스 코보스 국제 지휘콩쿠르에서 우승하며 주목받기 시작했다. 명지휘자 다니엘 바렌보임과 키릴 페트렌코의 오페라 지휘에서 보조 지휘자로 일했으며 독일 베를린 국립 오페라, 프랑크푸르트 오페라, 미국 워싱턴 국립 오페라, 휴스턴 그랜드 오페라 등에서 지휘자로 활동해왔다. 김대중 정부에서 문화부 장관을 지낸 김성재 한신대 석좌교수가 아버지다. 김 씨는 취임 전 SFO 두 번째 무대로 베토벤 ‘피델리오’를 지휘할 예정이다. 유윤종 문화전문기자 gustav@donga.com}

지휘자 김은선(39)이 미국 샌프란시스코 오페라(SFO)의 음악 감독으로 2021년 8월 1일 취임한다고 SFO가 5일(현지시간) 발표했다. 1923년 설립돼 96년 역사를 가진 SFO는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와 함께 미국 양대 오페라 극장으로 꼽힌다. 북미 대륙에서 여성이 오페라극장 감독으로 취임하는 것은 김 씨가 처음이다. 첫 계약 기간은 5년이며 시즌마다 최대 오페라 네 작품을 지휘한다. 김 씨는 올해 6월 드보르자크 오페라 ‘루살카’로 SFO에 데뷔해 언론과 청중의 호평을 받았다. 연세대 음대와 대학원을 졸업한 그는 독일 슈투트가르트 음대 재학 중 2008년 스페인 헤수스 로페스 코보스 국제 지휘콩쿠르에서 우승하며 세계 음악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명지휘자 다니엘 바렌보임과 키릴 페트렌코의 오페라 지휘에서 보조 지휘자로 일했으며 독일 베를린 국립 오페라, 프랑크푸르트 오페라 등 유럽 주요 오페라 극장과 워싱턴 국립 오페라, 휴스턴 그랜드 오페라 등 미국 주요 오페라극장에서 지휘자로 활동해왔다. 김대중 정부에서 문화부장관을 지낸 김성재 한신대 석좌교수가 그의 아버지다. 김 씨는 지휘자 니콜라 루이소티의 뒤를 이어 공식 음악 감독으로 취임하기 전인 2020-2021 시즌에 SFO 두 번째 무대로 베토벤 ‘피델리오’를 지휘할 예정이다. 매튜 실버크 SFO 총감독은 “사려 깊은 리더십을 지닌 김 씨는 깊은 공감과 존중을 통해 청중과 예술가, 극장 기술자와 관리자를 연결해 준다. 모든 사람이 최고의 역량을 이끌어낼 수 있도록 하는 인물”이라며 음악 감독으로 선임한 배경을 설명했다. 김 씨는 5일 SFO 홈페이지를 통해 “SFO에서는 여러 면에서 개방적인 협업을 하고 서로 너무나 잘 맞는다는 느낌을 받았다. 샌프란시스코 오페라 가족의 일원이 될 수 있어 너무나 자랑스럽다”고 밝혔다. 같은 날 뉴욕타임스(NYT)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1912년생이었던 할머니가 평생 ‘여의사’로 불렸지만 여성도 그냥 ‘의사’로 불리는 시대를 내다보셨던 것을 떠올렸다”며 “다음 세대 (여성)지휘자는 그냥 ‘지휘자’로 불리게 되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유윤종 문화전문기자gustav@donga.com}

12월은 차이콥스키의 발레 ‘호두까기 인형’(1892년)의 계절. 차이콥스키 특유의 선율미와 멋진 관현악법으로 눈에 앞서 귀를 먼저 만족시킨다. ‘백조의 호수’가 처연하고 ‘잠자는 숲 속의 미녀’가 화려하다면, 크리스마스이브가 배경인 ‘호두까기 인형’은 귀여움과 장엄함을 함께 갖추고 있다. 이 발레의 음악적 하이라이트를 알아본다.○ 서곡: 현악에서 베이스를 담당하는 첼로가 빠져 있다. ‘작고 깜찍한 느낌’을 살리기 위한 아이디어다.○ 겨울 소나무 숲을 지나는 여행: 호두까기 왕자가 여주인공 클라라를 자신의 왕국으로 데려간다. 가만가만한 주제로 시작되어 차이콥스키의 교향곡을 연상시키는 장려한 클라이맥스가 압도적인 느낌을 준다.○ 눈송이 왈츠: 군무(群舞)로 눈발이 휘날리는 모습을 묘사하는 장면. 발레 음악으로는 예외적으로 어린이(또는 여성) 합창을 등장시켰다. 합창과 푸르릉거리는 하프, 철금이 어울리는 부분은 오늘날의 영화음악보다 더 색깔이 영롱하다.○ 트레파크: 러시아 춤 하면 연상되는, 팔짱을 끼고 앉아서 추는 동작이 있는 신나는 춤곡.○ 갈대피리 춤: 제목에 갈대(reed)가 들어있지만 목관악기 중에서도 오보에나 클라리넷, 바순과 달리 유독 ‘리드’ 없는 플루트가 선율을 연주한다.○ 꽃의 왈츠: 전곡의 하이라이트를 이루는 부분. 중간에 첼로가 갑작스럽게 새로운 선율을 노래하고 물러나는데, 오페라의 남자 주인공이 열렬한 구애의 노래를 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2인무 아다지오: 시작 부분 하프가 분산화음으로 I-vi-ii-V의 화음 진행을 연주한다. 가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피아노 소품 ‘Heart and Soul’ 등 대중음악에서도 쉽게 만나는 친근한 코드 진행이다.○ 사탕요정의 춤: 차이콥스키는 파리에서 영롱한 소리를 내는 새 악기 ‘첼레스타’를 발견하고 이를 이 발레에서 처음 선보이기 위해 악보 출판사와 공연 관계자들에게 ‘함구령’을 내렸다.○ ‘호두까기 인형’은 왜 짧을까?: 차이콥스키는 이 곡을 짧은 오페라 ‘이올란타’와 함께 공연하기 위한 작품으로 구상했다. 초연 이후엔 ‘호두까기 인형’만 단독으로 공연하게 됐다.○ 실제 관현악 출연?: 우리나라에서 발레는 사전녹음(MR) 반주로 공연되는 경우가 많다. 실제 관현악 연주가 있는 공연으로는 국립발레단(예술감독 강수진)과 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가 함께하는 ‘호두까기 인형’이 대표적이다. 올해는 12∼25일 서울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공연한다. 5000∼9만 원. 유윤종 문화전문기자 gustav@donga.com}

피아니스트 허원숙(61·호서대 교수)이 하이든의 건반악기 소나타 57곡 전곡을 2년 동안 다섯 차례에 걸쳐 무대에 올린다. 폴란드 음반사 DUX에서 9장의 CD로도 내놓는다. 첫 무대는 5일 오후 8시 서울 세종문화회관 체임버홀에서 열린다. ‘허원숙 하이든 프로젝트 ABCDEFG(?) Hi, Haydn’이라는 제목으로 Hob.(호보켄 번호·네덜란드 음악학자 안토니 판 호보켄(호보컨)이 작품 분류해 붙임) 26, 41, 50 등 여섯 곡을 소개한다. 왜 ABCDEFG일까. “하이든의 소나타 중 확연한 개성이 드러나는 작품을 모아보니 A장조부터 G장조까지 순서대로 다 있더군요. 우연일까요, 작곡가가 숨겨둔 장난일까요?” 그렇게 절묘하게 배치한 곡목 순서는 하이든의 건반 소나타가 가진 명랑한 성격과도 은근히 맞아떨어진다. ‘하이든 소나타라면 또르르 구르는 듯한 유쾌함이 떠오른다’고 했더니 그는 “재미난 유쾌함보다는 따뜻하고 행복한 느낌”이라고 받았다. “완벽한 모차르트 소나타와 인간 승리를 표현하듯이 강한 베토벤 소나타 사이에서 편안하게 숨쉴 수 있는 작품들이죠.” 하지만 분절법(프레이징)이 특이하고 즉흥성도 강하며 해석이 쉽지 않아 끊임없이 질문하게 만드는 작품들이라고 그는 설명했다. 그에게도 하이든이 ‘오랜 인연’은 아니다. “10년 전까지는 낭만 작품을 주로 연주했죠. 기본으로 돌아가겠다는 생각에 베토벤과 바흐에 집중하면서 과도한 표현을 버리기 시작했어요. 다음엔 무엇을 할까 생각하다 떠오른 작곡가가 하이든이었죠. 음색도 내게 맞고, 공부가 될 것 같았어요.” 그는 2014년 DUX 레이블로 프랑크와 이건용 등의 작품을 담은 첫 앨범을 내놓았고 2017년에는 베토벤 디아벨리 변주곡과 류재준의 모음곡을 담은 앨범을 발매했다. 올해 1월 나온 바흐 ‘골드베르크 변주곡’ 앨범은 음악전문지 ‘피치카토’의 슈퍼소닉 상을 받았다. 권위를 인정받는 국제클래식음악상(ICMA) 바로크 기악부문 후보로도 선정돼 내년 1월 발표를 기다리고 있다. 그는 “후보가 된 것만으로도 영광이죠. 당분간 내 관심사는 하이든뿐”이라며 웃음지었다. 2만∼3만 원.유윤종 문화전문기자 gustav@donga.com}

지휘계의 거장 마리스 얀손스(사진)가 지난달 30일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자택에서 지병인 심장질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76세. 라트비아 수도 리가에서 지휘자 아르비드 얀손스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레닌그라드 음악원에서 피아노, 지휘를 공부했다. 1971년 카라얀 지휘 콩쿠르에서 2위를 했다. 36세 때 노르웨이의 오슬로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음악감독에 취임했다. 2003년 독일 바이에른 방송교향악단 수석지휘자가 됐고 2004년 네덜란드의 로열콘세르트허바우 오케스트라 수석지휘자로 취임해 2015년까지 재직했다. 그는 치밀한 준비와 여유로운 설계 속에 극적인 기복을 충실히 드러내는 무대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 2008년 영국 음악전문지 ‘그라머폰’이 발표한 세계 오케스트라 순위에서 로열콘세르트허바우 오케스트라가 1위, 바이에른 방송교항악단은 6위를 차지했다. 1996년 지휘 중 심장 발작으로 쓰러져 사망 직전까지 갔으나 회복하기도 했다. 1992년 상트페테르부르크 필하모니와 첫 내한 공연을 가졌고 2010년 동아일보 주최로 로열콘세르트허바우 오케스트라와 내한 공연을 했다. 2012, 2014, 2016년에 이어 2018년 11월 바이에른 방송교향악단과 내한할 예정이었으나 건강 악화로 주빈 메타가 대신 지휘했다.유윤종 문화전문기자 gustav@donga.com}

라트비아 출신의 지휘계 거장 마리스 얀손스(사진)가 지난달 30일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자택에서 지병인 심장질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76세. 얀손스는 1943년 라트비아 수도 리가에서 지휘자 아르비드 얀손스와 성악가 어머니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레닌그라드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수석지휘자였던 예프게니 므라빈스키의 보조지휘자가 되면서 레닌그라드(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이주해 레닌그라드 음악원에서 피아노와 지휘를 공부했다. 26세 때 빈으로 가서 한스 스바로프스키 문하에서 지휘를 배웠으며 1971년 카라얀 지휘 콩쿠르에서 2위에 입상했다. 36세 때 노르웨이의 오슬로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음악감독에 취임한 뒤 국제적 커리어를 쌓아나갔다. 1996년 오슬로에서 푸치니 오페라 ‘라보엠’을 지휘하다 심장발작으로 쓰러져 사망 직전까지 갔으나 기적적으로 회복했다. 2003년 독일 바이에른 방송교향악단 수석지휘자가 되었고 2004년에는 리카르도 샤이의 뒤를 이어 네덜란드의 로얄 콘세르트허바우 오케스트라 수석지휘자로 취임해 2015년까지 재직했다. 2006년, 2012년, 2016년 빈 필하모닉 신년 콘서트를 지휘했다. 얀손스의 지휘는 치밀한 준비와 여유로운 설계 속에 극적인 기복을 충실히 드러내는 무대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 2008년 영국 음악전문지 ‘그라머폰’이 음악평론가들의 설문을 토대로 발표한 세계 오케스트라 순위에서 그가 수석지휘자를 맡은 로얄 콘세르트허바우 오케스트라가 1위, 바이에른 방송교항악단은 6위를 차지했다. 그는 2006년 바이에른 방송교향악단을 지휘한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13번 음반으로 그래미상 오케스트라 부문을 수상했다. 지멘스 음악상, 에코 클래식 올해의 지휘자상과 오페른벨트 올해의 지휘자상을 받았다. 1992년 상트페테르부르크 필하모니와 첫 내한공연을 가진 후 1996년 오슬로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2010년 동아일보 주최로 로얄 콘세르트허바우 오케스트라와 내한공연을 각각 가졌다. 2012년, 2014년, 2016년 바이에른 방송교향악단과 내한했으며 2018년 11월에도 이 악단과 함께 내한할 예정이었으나 건강 악화로 주빈 메타가 대신 지휘했다. 유윤종 문화전문 기자gustav@donga.com}

인터넷 백과사전의 ‘한국’ 항목을 찾아본다. 한국어와 한국수어(Korean Sign Language)를 사용하는 나라로 나와 있다. 많은 사람이 그 절반의 세상에서 산다. 그러나 태어나면서부터 이 두 세상의 경계에 놓인 사람들이 있다. ‘코다.’ 음악 작품이나 악장을 맺는 ‘Coda(종결부)’가 아니다. 이 책의 ‘CODA’는 ‘Children of Deaf Adults’, 즉 농인(聾人·청각장애를 가진 사람) 부모의 청인(聽人·소리가 들리는 사람) 자녀를 뜻한다. 저자들은 각각 영화감독, 수어(수화) 통역사, 장애인 인권 활동가이며 코다다. ‘코다 코리아’에서 만난 세 사람이 농인 부모의 청인 자녀로 살았던 삶과 세상에 대한 외침을 책에 담았다. 그들의 삶은 서로 닮았으면서도 다르다. 처음 배운 언어가 부모에게서 배운 수어였던 코다도 있지만 농인인 아버지가 수어조차 못 배우고 집안에서만 통용되는 손짓으로 의사소통을 해나간 경우도 있었다. 이렇게 다양한 경험의 층위를 더 폭넓게 만들고자 한국계 미국인 코다의 글도 책에 포함시켰다. 자신의 삶을 개척하면서 경험한 어려움도 각자 다르다. 부모인 농인이 갖는 어려움과도 다르다. 많은 코다들은 부모가 챙겨주지 못하는 영역을 혼자 헤쳐가면서 부모의 ‘통역사’ 역할까지 떠맡는다. 농인이 못 알아들을 줄 알고 세상이 던진 모욕은 그것을 듣는 코다 자녀의 상처가 된다. 코다인 통역사들에게 농인들은 더 많이 기대하고 요구하며 실망도 더 쉽게 한다. 코다에게 지우는 짐을 세상은 어처구니없이 합리화하기도 한다. 한 저자는 몇 달간 해외를 경험하겠다는 계획을 알리자 후원자가 장학금을 끊었던 경험을 씁쓸하게 토로한다. 후원자는 장학금을 ‘농인 부모를 옆에서 돕는 것에 대한 보상’으로 여겼던 것이다.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을 만나면서 코다들은 자신이 처한 상황을 더 잘 이해하고 마음의 그림자도 상당 부분 벗을 수 있었다. ‘코다 코리아’의 설립과 해외에서 열리는 코다 인터내셔널 콘퍼런스에서 경험한 연대의 경험들이 이 책의 더 힘찬 페이지들을 만들어낸다. 네 글에서 공통적으로 읽히는 강력한 메시지는 ‘다른 존재로 여기지 말기’이다. 농인을 향한 것이든, 코다를 향한 것이든 마찬가지다. 오늘날 농인/청인을 ‘정상/비정상’으로 범주화하는 일은 얼마간 극복되었어도 농인을 ‘의존적 존재’ ‘약자’로 보는 시각은 여전하다. 그러나 농인들도 수많은 섬세한 다름의 결을 갖는다. 주로 농인 사이에서 생활하는 사람은 ‘농인’으로 불리기를, 청인 사회에서 생활하는 사람은 ‘청각장애인’으로 불리기를 선호한다. 이 책은 이 밖에도 여러 생각할 거리를 제공한다. ‘눈이 온다’를 한국 수어로 직역하면 ‘눈이 있다’, ‘커피가 쓰다’를 직역하면 ‘커피가 짜다’에 해당한다. 감각의 처리에 농인과 청인이 다름을 반영한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입말과 수어가 일대일 대응되지 않는다고 불만을 나타낸다. 이 또한 ‘정상/비정상’을 나눠온 의식의 산물은 아닐까.유윤종 문화전문기자 gustav@donga.com}

《2020년은 ‘음악의 성인(聖人)’으로 불리는 루트비히 판 베토벤(1770년 12월 17일∼1827년 3월 26일)의 탄생 250주년. 그는 한 음악가를 넘어 청각장애라는 치명적인 장벽을 넘어선 ‘의지의 상징’으로 인류 역사에 새겨졌다. 계몽주의의 영향을 받은 그의 작품은 순음악적으로 완벽할 뿐 아니라 압제로부터의 해방(오페라 ‘피델리오’), 문화와 관습을 뛰어넘는 인류애(교향곡 9번 ‘합창’) 등으로 세계인의 공감을 받아 왔다. 그의 탄생 250주년을 기념하는 열기도 전 세계에서 뜨겁다. 》 한국 음악 팬이 내년에 가장 기대하는 베토벤 관련 콘서트는 테오도르 쿠렌치스(47)가 지휘하는 오케스트라 ‘무지카 에테르나’ 내한공연(4월 7, 8일 롯데콘서트홀). ‘지휘계의 악동’ ‘클래식의 구원자’로 불리는 쿠렌치스는 기존의 지휘 거장과 다른 경로를 거쳐 세계 음악 팬을 열광시키고 있는 ‘핫한’ 지휘자다. 러시아에서 지휘를 연마한 뒤 오케스트라 ‘무지카 에테르나’를 직접 창단해 역동적이고 신선한 해석으로 단숨에 세계 음악 팬을 사로잡았다. 올해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루체른 페스티벌 등 세계 주요 음악제는 이번 시즌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수석지휘자로 취임한 키릴 페트렌코조차 빛바래게 만든 ‘쿠렌치스의 놀이터’가 됐다. 내년 첫 내한연주에서는 첫날 베토벤 교향곡 7번, 둘째 날 교향곡 5번 ‘운명’을 들려주고, 그만큼이나 도전적이고 파격적인 바이올리니스트 파트리샤 코파친스카야가 베토벤 바이올린 협주곡을 협연한다. 베토벤의 고향인 독일 본을 근거지로 한 본 베토벤 오케스트라도 6월 9일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올 베토벤’ 콘서트를 연다. 2017년 음악감독으로 취임한 디어크 카프탄 지휘로 에그몬트 서곡과 교향곡 7번, 백건우가 협연하는 피아노협주곡 4번을 선보인다. 현역 최고의 베토벤 해석 권위자인 피아니스트 루돌프 부흐빈더는 9월 23, 26일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루체른 페스티벌 스트링스를 직접 지휘하고 솔로도 맡아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전곡을 연주한다. 파보 예르비가 지휘하는 도이치 카머필하모닉 오케스트라도 12월 17, 18일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베토벤 교향곡 1번과 9번 ‘합창’으로 음악 팬들의 의미 깊은 한 해 마감을 돕는다. 국내 교향악단 중에는 KBS교향악단이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세 차례의 ‘올 베토벤’ 프로그램을 마련했다. 5월 2일 레너드 슬래트킨 지휘, 파질 세이 협연으로 피아노협주곡 3번과 교향곡 7번을, 8월 28일 정명훈 지휘 카티아 부티아티슈빌리 협연으로 피아노협주곡 1번과 교향곡 6번 ‘전원’, 9월 18일 한스 그라프 지휘 에마뉘엘 액스 협연으로 피아노협주곡 5번 ‘황제’와 교향곡 5번을 연주한다. 해외 무대에서는 내년 창설 100주년을 맞이하는 세계 음악축제의 대명사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이 풍성한 베토벤 프로그램을 준비한다. 피아니스트 이고르 레빗은 7월 29일부터 8월 16일까지 8회의 리사이틀을 통해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32곡 전곡을 연주한다. 이 외 필리프 헤레베허 지휘 샹젤리제 오케스트라의 ‘장엄미사’(7월 25일), 리카르도 무티 지휘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교향곡 9번 ‘합창’(8월 15∼17일), 하겐 현악4중주단이 연주하는 현악4중주 13, 14번(8월 24일), 바리톤 마티아스 괴르네의 베토벤 가곡의 밤(8월 18일) 등 풍성한 베토벤 프로그램이 마련된다.유윤종 문화전문기자 gustav@donga.com}

“차이콥스키 ‘1812년 서곡’을 관현악 콘서트에서 들어본 사람?” 의외로 많지 않을 것이다. 나폴레옹군의 러시아 침공과 러시아의 승리를 그린 ‘1812년 서곡’은 이해하기 쉬운 선율과 구조, 격정적이고 축제적인 성격으로 1882년 초연 직후부터 프랑스를 제외한 전 세계에서 인기를 끌었지만, 교향악단의 정규 레퍼토리에 들어가는 일은 드물다. 대부분 갈라 콘서트나 야외 콘서트에서 연주될 뿐이다. 야외 콘서트에서는 대포 소리를 묘사한 큰북의 강타 대신 실제 대포나 소총 발사를 집어넣기도 한다. 거대한 음량으로 콘서트장을 꽉 채우는 이 곡을 서울시립교향악단이 정기 콘서트에서 연주한다. 하지만 이 정기 콘서트의 메인은 현역 세계 플루트계의 1인자이자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플루트 수석인 에마뉘엘 파위. 파위는 모차르트와 엘리엇 카터의 협주곡을 협연한다. 12월 5, 6일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프랑스계 스위스인인 파위는 1992년 22세의 나이로 베를린필 플루트 수석에 취임한 뒤 제임스 골웨이 이후 최고의 플루트 스타로 군림하며 오케스트라와 솔로 활동을 병행하고 있다. 워너 레이블로 ‘상상할 수 있는 거의 모두’라 할 만한 넓은 플루트 레퍼토리를 음반으로 내놓고 있다. 1998년 첫 내한 후 여러 차례 국내 음악 팬과 만났으며 최근에는 2014년 베를린 바로크 솔리스텐, 2018년 목관 앙상블 ‘레 방 프랑세’와 내한공연을 가진 바 있다. 이번 콘서트는 다양한 성격의 작품 다섯 곡을 한 무대에 펼쳐놓는 ‘연말 축제’ 같은 성격의 무대다. 티에리 피셔 서울시립교향악단 수석객원지휘자가 지휘봉을 들고, 1812년 서곡으로 강렬하게 문을 열어젖힌 뒤 파위가 등장해 플루트 협주곡의 대명사격인 모차르트 플루트 협주곡 2번과 미국 작곡가 엘리엇 카터가 2008년 100세의 나이로 발표한 플루트 협주곡, 차이콥스키 오페라 ‘예프게니 오네긴’ 중 ‘렌스키의 아리아’를 연주한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오페라 ‘장미의 기사’에서 발췌한 모음곡으로 콘서트의 끝을 장식한다. 1만∼9만 원.유윤종 문화전문기자 gustav@donga.com}

독일 현대음악 팬들에게 세 차례에 걸쳐 한국 창작음악을 소개하는 행사가 열린다. 주독일한국문화원은 독일 베를린 콘체르트하우스 체임버홀에서 11월 28일부터 12월 3일까지 ‘제1회 한국창작음악제’(포스터 사진)를 개최한다고 밝혔다. 주독일한국대사관과 문화예술위원회가 후원한다. 첫날인 28일에는 앙상블 판(지휘 김지환)이 이신우 ‘현을 위한 열린 문’, 박태종 ‘내 영혼의 바람’ 등 한국 창작곡 6곡을 연주한다. 12월 1일에는 아르코 실내악 앙상블(지휘 윤현진)이 신혁진 ‘야간비행’, 조은화 ‘차이의 즐거움’ 등 8곡을 소개한다. 12월 3일에는 국악 실내악팀 파안이 김대성 ‘비단안개’, 김상욱 ‘못 박는 소리’ 등 국악 실내악을 위한 작품 5곡을 연주한다. 세 공연 모두 오후 8시에 시작하며 베를린 콘체르트하우스 홈페이지에서 예매할 수 있다. 연주곡은 전문가 13명으로 구성된 작품추천위원회가 심사를 거쳐 선정했다. 주독일한국문화원은 “유럽 창작음악의 중심지인 독일에서 한국 작곡가와 연주자들의 역량을 소개하고, 한국 작곡가들의 해외 네트워크를 확장하는 계기로 삼겠다”고 밝혔다.유윤종 문화전문기자 gustav@donga.com}

무대에 선 사람의 숨소리까지 들릴 것 같은 100여 석의 호젓한 공간. 최고급 AV 기기, 클래식과 팝, 미술을 망라한 다양한 장르의 강의. 독주회와 실내악, 국악을 망라한 정상급 아티스트의 공연. 이 모든 것을 누릴 수 있는 공간이 있다. 포니정홀이다. 포니정홀은 HDC그룹이 운영하는 복합문화공간이다. 서울 강남구 봉은사역 부근 아이파크타워 1층에 있다. 2008년 고 정세영 현대산업개발 명예회장 3주기를 맞아 ‘포니정’이라는 애칭으로 불렸던 고 정 회장의 추모공간과 함께 문을 열었다. 객석 외 가로 10m 무대와 연주자 대기실 등을 갖추고 있다. 최근에는 문화예술 전문기관인 클라라하우스(대표 유혁준·음악칼럼니스트)가 HDC와 업무 협약을 맺고 포니정홀의 운영을 맡기 시작했다. 프랑스 포칼사의 그랜드 유토피아 스피커를 비롯한 최고급 음향기기와 210인치 초고화질 스크린, 4K 레이저 프로젝터 등으로 국내 최고의 시청각 환경도 갖췄다. 첫 프로그램으로 10월 27일 현악4중주단 아벨 콰르텟의 연주회가 열린 것을 시작으로 정기 강연 프로그램인 ‘유혁준의 음악이야기’ ‘장일범의 오페라 세상만사’ 등 클래식 프로그램이 매주 진행되고 있다. 대중음악 전문기자의 강연 프로그램 ‘임희윤의 팝학다식’, 복합장르 음악 프로그램인 ‘황인용의 음악토크’, 미술 강연 ‘전원경의 예술, 도시를 가다’도 매달 1, 2회씩 정기적으로 열린다. 유혁준 클라라하우스 대표는 “2020년에는 국악계의 살아 있는 전설인 안숙선 명창의 신년음악회(1월 31일)를 시작으로, 2월 25일 피아노3중주단인 트리오 제이드 공연에 이어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 소프라노 임선혜, 피아니스트 김선욱, 바리톤 이응광 등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음악가들과 유명 내한 연주자들의 공연을 연다”고 밝혔다. 멤버십 회원에게는 강의와 공연 입장료 할인 혜택이 주어진다. 행사를 위한 대관도 가능하다. 유윤종 문화전문기자 gustav@donga.com}

고대 로마인들은 운명의 세 여신 파르케(Parcae)가 개개인의 운명의 실을 잣고 재고, 최후의 순간에 실을 끊는다고 생각했다. 솔오페라단이 15일 서울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막을 올린 오페라 ‘카르멘’에서 연출가 잔도메니코 바카리는 비제 원작에 없는 검은 옷의 세 파르케를 무대에 등장시켜 카르멘의 치명적(fatal) 운명에 대한 비유로 삼았다. 자코모 안드리코가 제작한 무대는 선연한 색상으로 분위기를 살렸다. 1막의 분홍에 가까운 엷은 갈색은 안달루시아 산악의 색채를, 2막의 짙은 갈색은 술집의 어두운 분위기를, 3막의 파랑은 산악의 추위와 음산함에 현실감을 더해주었다. 무대 앞뒤의 입체감은 적었다. 이혜경의 안무로 제대로 표현된 안달루시아 춤이 넉넉한 볼거리를 제공했다. 첫날 공연의 카르멘인 주세피나 피운티는 카르멘으로 ‘설계 제조’된 메조소프라노를 연상시켰다. 얼굴 표정부터 세기디야 춤, 전문 연주자 못잖은 캐스터네츠 연주까지 많은 무대 경험을 맞춰 입혀낸 듯한 집시여인을 드러냈다. 목의 공명점을 바꾸며 다양한 음색을 나타내는 편은 아니었다. 돈 호세 역의 잔카를로 몬살베는 프로그램북에 ‘이 시대 가장 뛰어난 리릭 스핀토 테너’로 소개했지만, 그의 음성은 호세 쿠라나 존 비커스를 연상시키는 ‘나쁜 남자’적 드라마틱 테너의 결을 나타내고 있었다. 순진해서 넘어가는 돈 호세라기보다는 나태함으로 자기 운명을 그르치는 돈 호세를 표현했다. 투우사 에스카미요 역의 바리톤 엘리아 파비안은 ‘투우사의 노래’에서 강력했지만 최저음에서 한계를 드러냈다. 돈 호세와 싸우는 상관 주니가 역 베이스 이대범은 풍성한 성량이 인상 깊었다. 신심 깊고 착한 처녀 미카엘라를 노래한 김은희는 1막에서 다소 표현이 평면적이었지만 3막 ‘용기의 아리아’의 절절한 표현은 다시 한 번 듣고 싶을 정도였다. 현역 이탈리아 최고 오페라 지휘 거장으로 꼽히는 알베르토 베로네시가 프라임필하모닉오케스트라와 위너오페라합창단을 이끌어가는 솜씨는 다소 미심쩍었다. 2막 다섯 출연자가 산적질을 모의하는 중창은 다소 느린 박자였는데도 정밀한 앙상블을 끌어내지 못했다. 합창에서는 테너의 안쪽 성부 음량이 종종 소프라노의 선율을 압도했다. 세 파르케의 상징연출은 인상적이었지만 다소의 무리도 낳았다. 1막 마지막 부분은 파르케의 천으로 눈을 가린 남자 주인공 돈 호세가 카르멘이 도망치도록 놓아두게 했다. 카르멘이 돈 호세를 밀치고 가도록 만든 원작과 달리 무대와 음악 사이 간격이 드러났다.유윤종 문화전문기자 gustav@donga.com}

‘가을은 지치고 드물게 비추는 햇빛으로 하나하나 단풍 색을 잃어간다. 오후 내내 불타던, 아침에도 지는 해의 찬란한 환상을 느끼게 하던 짙은 단풍들이 이제 사그라지는 것이다. … 저녁 6시, 숲은 어둠 속에서, 과격한 즐거움으로 잿빛 지평선이 익숙한 눈에 풍요롭게 빛난다.’(회한, 시간 색의 몽상들―베르사유) 마르셀 프루스트(1871∼1922)의 문장은 온몸의 모든 감각을 활짝 열어둘 때 읽힌다. 수풀 사이를 은밀히 투과하는 빛줄기, 식물들의 향기, ‘발자국은 물 위에서 맑은 소리와 함께 깊은 자국을 내고 물의 일치된 색깔은 그 순간 부서진다’처럼, 시각과 청각이 팔레트 위에 섞이는 구절들. 우리는 이 작가의 이름을 16년의 시간을 바친 거작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로 기억해 왔다. 이번에 손에 든 책은 그가 25세에 처음 펴낸 단편집이다. 화가와 음악가의 모습을 담은 시들, 에세이, 장편(掌篇·손바닥 길이) 소설들이 섞인 산문들도 두 개 장(章)을 차지한다. 첫 장 ‘실바니 자작, 발다사르 실방드의 죽음’에서부터 독자는 시대감각을 잃기 쉽다. 주인공들은 19세기를 사는 것인가, 절대왕조 시대 또는 고전 시대를 사는 것인가. 친지들의 애틋한 애정. 다소 과장된 감정의 교환, 오열. 회색빛 눈동자와 황금빛 콧수염을 가진, 탐미적인 용모의 주인공. 죽어가는 순간에도 주인공은 ‘검은 고양이가 중국 꽃병 위에 올라가 무언극의 몸짓으로 국화 향기를 맡는 것을 웃음을 띠고 지켜본다’. 대부분의 단편에서 비단과 금실이 섞인 듯 섬세한 감각의 묘사들이 사건들을 지배하거나 줄거리를 만들어간다. 사교계의 회합들은 주인공들의 한정된 공간을 넓힌다. 이성 간의 은밀한 감정 교류가 일어나는 장소이기도 하다. ‘창궐하는 전염병인’ 속물근성, 허식까지도 섬세한 감수성의 옷을 입는다. ‘이탈리아 희극의 몇 장면’은 이탈리아 중세극 ‘콤메디아 델라르테’의 양식화된 인물들을 빌려온다. 주인공 파브리스는 지성이 아름다움을 그르치는 여성에 이어 지성이 모자라는 여성을 겪고 지친다. 그 다음에 만난 여성은 누구였을까. 섬세한 지성을 갖췄으나 그에게 사랑을 주지 않는 여성이었다. 작곡가 레날도 안(1874∼1947)의 피아노 소품 악보까지 실은 이 책은 비슷한 분량의 책들보다 다섯 배의 값이 매겨진 채 세상에 나왔다. 친구들은 ‘지나치게 댄디’하다고 했고, 세상도 이 책을 외면했다. 그가 죽은 뒤 역작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가치를 인정받기까지도 그랬다. 이 문장들의 가치는 서문을 써준 작가 아나톨 프랑스가 알아보고 있었다. “이 책은 젊다. 그러나 오래된 세상만큼이나 지긋하다. 수백 년 된 숲의 고색창연한 나뭇가지 위의 봄 잎들과 같다.” 프루스트와 릴케가 활동한 시대는 100년 전 제1차 세계대전을 결산하는 베르사유 조약과 함께 종말을 고했다. 그 섬세한 사람들의 세계는 왜 피와 강철 냄새의 20세기에 자리를 내주었을까. 그 스스로의 무게를 감당할 수 없이 섬세했기 때문일까. 유윤종 문화전문기자 gustav@donga.com}

가야금과 생황 등 전통 악기로 서양 클래식 음악을 연주하면 어떤 느낌이 날까. 프랑스인 비올리스트 에르완 리샤(수원대 교수)가 이 느낌을 들려주는 연주회를 연다. 그는 14일 오후 8시 서울 예술의전당 리사이틀홀에서 바로크에서 현대곡까지 직접 편곡한 작품을 가야금, 생황과 함께 연주한다. “아는 작품들을 새롭게 들리도록 하는 데 예전부터 기쁨을 느껴 왔어요. 한국의 국악기와 함께 이 곡들을 ‘나만의 것’으로 만들고 싶었습니다.” 17세기 작곡가 요한 쇼프의 ‘눈물의 파반’에선 가야금, 브리튼의 ‘눈물’에선 가야금 생황, 바흐의 칸타타 ‘제가 어디로 달아나리까’ 아리아와 라모의 환상곡에선 생황 가야금 첼로가 함께한다. 가야금 연주자 이화영, 생황 연주자 김효영이 출연한다. 부인인 첼리스트 박노을과는 라모의 ‘비올라와 첼로를 위한 모음곡’에서 둘만의 호흡을 맞춘다. “한국 작곡가들의 창작음악을 연주하면서 이화영, 김효영 씨를 알게 됐죠. 두 분을 통해 국악기의 매력을 알았고, 옛 서양 음악을 이 악기들과 함께 연주하고 싶어졌습니다.” 그는 “슈만 같은 낭만주의 곡이라면 이상하겠지만 바로크나 현대곡이라면 어울리겠다 싶었다”고 덧붙였다. 편곡할 작품으로는 ‘기법적으로 세밀하지만 자유로움이 깃든 곡들’을 선택했다. ‘자유’의 공간에 국악기가 숨을 불어넣을 것으로 기대했기 때문이다. 가야금의 경우 왼손을 깊이 눌러 음높이를 세밀하게 변화시키는 ‘농현(弄絃)’이 양악기와 다른 색깔을 빚어낸다. 그는 “농현 등 국악기 고유의 특징을 물론 사용한다. 재미있는 효과가 생길 것”이라며 미소를 지었다. 두 연주자와도 편곡의 세부를 상의하며 더 좋은 결과를 낳고자 노력했다. “학창 시절부터 편곡을 좋아했어요. 비올라는 바이올린이나 첼로에 비해 레퍼토리가 좁아서, 다른 악기를 위해 쓰인 곡을 연주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죠.” 그가 쇼스타코비치의 4중주곡을 비올라 독주와 체임버 오케스트라용으로 편곡한 작품도 이달 화음챔버오케스트라와 협연해 선보인다. 그는 파리에서 자라난 ‘파리지앵’이다. 독일 유학 중 부인을 만났다. 오스트리아 인스브루크 교향악단 비올라 수석으로 재직하다 2008년 안식년을 맞아 함께 서울에 왔고, 한국에서 활동하기로 마음먹었다. 무엇보다 사람들의 따뜻함이 좋다고 했다. 그는 독도를 사랑하는 문화예술가 모임 ‘라 메르 에 릴’ 일원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재작년에는 회원들과 함께 독도에도 갔다. “날씨가 좋지 않아 상륙이 꽤 힘들었죠. 거의 수직의 절벽이 무척 인상적이었어요.” 전석 2만 원. 유윤종 문화전문기자 gustav@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