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하기

100세 시대라고 하지만 인생 전체에서 ‘플러스’인 시기는 34년에 불과하다. 부모에게 의존하다 27세가 되어서야 소득이 소비보다 많은 ‘흑자 인생’에 진입한다. 43세를 정점으로 노동소득은 내리막길에 접어들고, 61세부터 ‘적자 인생’이 시작된다. 그래프로 그려보면 좌우가 똑같은 데칼코마니 같다. 불교에선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 성경에선 ‘알몸으로 태어나 알몸으로 돌아간다’고 했다. 문제는 벌어놓은 돈으로 버텨야 할 시간이 갈수록 길어진다는 점이다. ▷한국고용정보원 분석에 따르면 65∼79세 고령자의 56%가 계속 일하기를 희망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일하는 즐거움보단 돈이 필요해서라는 응답이 더 많았다. 자녀 교육비에 대출금 상환에 빠듯하게 살다 보니 모아놓은 돈은 부족하다. KB금융지주 경영연구소가 전국 20∼79세 남녀 3000명에게 물어보니 노후에 여유롭게 살려면 ‘적정 생활비’로 월 369만 원은 필요할 것이라고 답했지만, 실제로 조달 가능하다고 답한 생활비는 212만 원에 그쳤다. 응답자 절반 이상은 아직 노후를 위한 경제적 준비를 시작도 하지 못했다고 했다. ▷통계청이 내놓은 ‘2021년 국민이전계정’을 보면 한국 국민 전체로는 생애 동안 108조 원 적자다. 소득은 거의 없지만 교육비 등 지출이 많은 고등학생(17세) 때 1인당 3572만 원 적자로 적자 규모가 가장 컸다. 노동소득이 가장 많은 43세(1792만 원 흑자)를 정점으로 흑자가 줄어 61세부터는 다시 적자로 전환했다. 생애 초반기 적자는 부모에게 의존했지만, 인생 후반기엔 예전과 달리 자식 손을 빌리기가 어려워져 노후 파산의 위험도 커졌다. ▷인생의 적자 단계에 들어서기 전에 국민연금, 퇴직연금, 개인연금의 3층 연금구조를 마련해 노후 고정수입을 최대한 확보하라고 전문가들은 강조한다. 이와 함께 은퇴 후 현실에 맞춰 미리미리 씀씀이를 줄여 가려는 준비도 필요하다. 중대 질병 발생, 성인 자녀 지원, 창업 실패, 금융사기, 황혼 이혼 등 ‘5대 리스크’도 피해야 한다. 재무적인 준비와 함께 건강, 관계, 여가 등도 챙겨야 한다. 비상 상황에 대비해 재난훈련을 하듯, 노후 준비도 꾸준하고 반복적인 훈련이 필요하다. ▷사회 전체적으로도 적자 인생에 대한 대비가 시급하다. 노동연령층(15∼64세)이 돈을 벌어 유년층과 노년층에 나눠주는 구조인데, 저출산·고령화로 노동연령층 인구는 가파르게 줄고 있다. 지금 모래주머니 달고 뛴다면 앞으론 쌀가마니 들쳐메고 달려야 할 판이다. 국민이전계정 통계를 분석하면 자녀 1명을 독립시키기까지 2억8300만 원이 드니 아이 많이 낳으라고 말하기도 현재로선 민망하다. 미래 세대를 위한 구조개혁을 더는 미룰 수 없는 이유다. 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는 팔아도 양심은 팔지 않겠습니다.” 길거리를 지나다 보면 이런 문구를 내건 가게를 종종 찾아볼 수 있다. 이런 식의 말을 자주 쓰는 업종이 서너 곳 있다. 구태여 이름을 밝히진 않겠지만 소비자들로부터 그다지 신뢰받지 못하는 업종들이다. 신뢰는 그럴듯한 말이 아닌 행동에서 나오는 법이다. 유독 사회적 책임과 신뢰를 자주 강조하는 카카오도 역설적으로 불신에 휩싸여 있다. 시세조종과 분식회계 수사의 칼끝이 조여오자 카카오 창업자 김범수 미래이니셔티브센터장이 분위기 반전을 위해 최근 직접 나섰다. 17년간 길러온 수염까지 밀어버리고 “모든 사업을 원점에서 재검토해 국민 눈높이에 부응하는 기업이 되겠다”고 했다. 그룹 전체의 준법·윤리경영을 감시할 외부 감시 기구도 구성해 막강한 권한을 부여했다. 현 상황을 ‘창사 이래 최대 위기’라고 하지만 최근 몇 년 동안 카카오는 이런저런 잡음으로 늘 위기였다. 독점이나 골목상권 침해 논란은 플랫폼 기업들이 으레 겪는 숙명이라고 해두자. 하지만 지난해부터 불거져 나온 사건 사고는 도를 지나쳤다. 지난해 초 카카오페이 경영진이 상장 한 달 만에 한꺼번에 900억 원어치의 주식을 팔아버린 ‘주식 먹튀’가 뒤늦게 알려진 게 시작이었다. 정상적인 기업에선 회사의 성장을 믿고 투자한 주주들의 뒤통수를 이런 식으로 치는 일은 없다. 지난해 10월 데이터센터 화재에 따른 대규모 서비스 장애가 발생하자 카카오 같은 빅테크 기업이 자체 데이터센터도 없다는 사실에 사람들은 경악했다. “화재는 워낙 예상을 못 했다” “전체 셧다운에 대비한 훈련은 한 적이 없다”는 경영진의 말은 황당했다. 급기야 올해 들어서는 혁신 기업보단 구태 기업에 어울리는 사법 리스크까지 발생했다. 카카오는 하이브의 SM엔터테인먼트 인수를 방해하기 위해 2400억 원을 투입해 주가를 의도적으로 올렸다는 의혹을, 카카오모빌리티는 3000억 원대 분식회계 의혹을 받고 있다. 문제가 생길 때마다 카카오는 바짝 엎드렸다. 레퍼토리는 비슷했다. ‘국민 메신저’인 카카오톡을 운영하는 기업으로서 사회적 책무를 다시 한번 통감하고, 잃어버린 신뢰를 되찾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시작한다. 2년 전 “성장에 취해 사회적 책임을 다하지 못한 것에 대해 통렬히 반성한다”고 했던 김 센터장은 최근엔 “카카오에 요구하는 사회적 눈높이에 부응할 수 있도록 책임 경영에 주력해야 한다”고 했다. 다음으로 재발 방지와 상생을 약속하고 조직 개편에 나선다. 2021년 11월부터 2년간 카카오 경영진은 5번이나 교체됐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약속은 흐지부지됐다. 2021년 국정감사에서 문어발 확장의 비판을 받고 계열사를 100곳 이하로 줄이겠다고 했지만, 오히려 105개에서 166개로 늘었다. 지난해 2월엔 5년간 1만 명을 채용하겠다고 정부에 약속했지만, 올해 상반기 카카오의 직원 수는 지난해보다 오히려 줄었다. 올해 3월 ‘주식 먹튀’의 구원투수로 등판한 남궁훈 전 대표는 “주가가 회복될 때까지 최저임금만 받겠다”고 했지만 7개월 뒤 카카오를 떠날 땐 스톡옵션 행사로 94억 원의 차익을 챙겼다. 계열사별 자율·독립 경영을 표방하며 어떻게든 몸집을 불려 상장시키는 것만 최우선 목표로 삼았던 성장 위주 전략의 결과였다. 김 센터장은 2020년 3월 카카오톡 출시 10주년을 기념해 전 직원에게 보낸 영상 메시지에서 “카카오의 지난 10년이 ‘좋은 기업’이었다면 향후 10년은 ‘위대한 기업’으로 이끌고 싶다”고 했다. 지금 같으면 ‘상식적인 기업’을 목표로 삼아야 할 것 같다. 이번만큼은 사법 리스크의 소나기를 피하기 위한 조치에 그쳐서는 안 된다. 어찌 됐든 한국인이라면 카톡을 쓸 수밖에 없을 것이란 생각에서도 벗어나야 한다. 국민들의 인내심에도 한계가 있다. 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엄마가 죽었으면 좋겠다.’ 2017년 일본에선 상상도 하기 싫은 끔찍한 제목의 책이 출간됐다. 일본 NHK가 방영한 ‘간병살인’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책으로 묶은 것이다. 오랜 간병에 지쳐 가족의 목숨을 빼앗는 간병살인은 일본에선 연간 40여 건, 거의 1주에 1번꼴로 발생한다고 한다. 가족을 위해 기꺼이 자신을 희생한 착한 배우자, 효자, 효녀가 결국 가해자가 된다. 고령화가 빠르게 진행되면서 이제 이런 참극은 특정 가족만의 문제가 아니다. ▷인구 10명 중 3명이 노인인 ‘노인 대국’ 일본은 간병이 사회적 문제로 등장한 지 오래다. 이달 초 일본 내각부는 2050년에 1인당 평균 간병비가 2019년에 비해 75% 증가할 것으로 추산했다. 나이가 들수록 간병비가 많이 들 수밖에 없는데 75세 이상 후기 고령자의 인구가 급증하고 있기 때문이다. 당장 2년 뒤부터 거대한 폭풍이 다가온다. 인구 비중이 큰 단카이 세대(1947∼1949년에 태어난 일본의 베이비붐 세대)가 모두 75세를 넘기기 때문이다. ▷일본은 이런 상황을 일찌감치 준비하긴 했다. 2000년 개호(介護·돌봄, 간병) 보험제도를 도입해 고령자의 간병을 사회 전체가 책임지는 시스템을 구축했다. 모든 국민이 간병 서비스를 필요로 할 때 급여의 70∼90%를 지원한다. 하지만 제도를 처음 도입했을 때에 비해 간병비 부담이 4배로 증가해 갈수록 힘에 부치고 있다. 돌봄 비용 급증에 대비해 보험료를 인상하고, 돌봄 인력 확보를 위해 간병인의 급여를 올리기로 하는 등 대책 마련에 고심 중이다. ▷빠르게 늙어가고 있는 한국도 간병 부담은 남의 일이 아니다. 양질의 요양시설이 부족하고 특히 간병은 가족 내에서 책임져야 한다는 인식 탓에 짐이 무겁다. 노인이 노인을 간병하는 노노(老老) 간병을 넘어 병자가 병자를 간병하는 상황도 흔하다. 이를 견디다 못한 간병살인이나 동반자살의 비극도 늘고 있다. 올해 4월 서울에선 폐암과 파킨슨병 등을 앓던 아내를 5년 6개월 동안 돌보던 60대 남성이 아내를 숨지게 하고 극단적 선택을 시도하기도 했다. ▷오랜 간병은 경제적 파산으로도 이어진다. 간병인을 고용해야 하는데 거동이 불편한 환자의 경우 간병비가 월 400만∼500만 원까지 든다. 돈을 벌어도 고스란히 간병비로 들어가니 가족 누군가는 직장을 그만두기도 한다. 앞으로가 더 문제다. 베이비부머의 상징인 ‘58년 개띠’가 올해 65세 대열에 들어섰고 내년에는 노인 인구가 1000만 명을 돌파한다. 이제라도 간병을 사회가 함께 책임지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20여 년 전부터 준비한 일본도 아직 완전한 해법을 찾지 못했다. 우리는 늦어도 한참 늦었다.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큰돈 없이도 도심 속 고층 빌딩에 세련된 사무실을 낼 수 있다. 공간을 빌리면 맥주와 커피가 무제한 제공된다. 유연한 업무공간의 미래라는 찬사를 받으며 글로벌 공유오피스 업체 위워크는 ‘공유경제의 아이콘’으로 치켜세워졌다. 하지만 4년 전 470억 달러(약 62조 원)의 가치를 인정받던 이 회사는 6일 미국 뉴저지주 법원에 파산보호를 신청하며 신화의 막을 내렸다. 블룸버그 통신은 “역사에 남을 몰락”이라고 평했다. ▷2010년 미국 뉴욕 맨해튼의 한 건물에서 시작한 위워크는 불과 9년 만에 전 세계 120여 개 도시에 800여 개 지점을 운영하는 세계 최대 공유오피스 업체로 급성장했다. 대형 건물을 층 단위로 장기 임차한 뒤 이를 쪼개 스타트업 등에 단기 재임대하는 사업 방식이었다. 부동산 임대 사업에 공유경제 개념을 더했고, 네트워크 효과를 통한 정보기술(IT) 기업을 표방했다. 든든한 투자 지원군도 있었다. 2016년 말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은 뉴욕의 위워크 본사를 단 12분 둘러본 뒤 44억 달러짜리 수표를 끊어 줬다. ▷공동창업자 애덤 뉴먼의 카리스마도 성공에 한몫했다. 어린 시절 이스라엘의 키부츠(집단농장)에서 생활하며 공동체와 공유경제를 배웠다는 경험담은 스토리가 됐다. 196cm의 훤칠한 키에 긴 머리를 휘날리면서 무대에 올라 좌중을 사로잡았다. “지금까지는 ‘I’(아이폰)의 시대였지만 앞으로 10년은 ‘We’의 시대가 될 것”이라고 했다. ‘TGIM(Thank God, It’s Monday)’을 외치며 일터의 혁신을 주창했다. 월요일을 기다리며 하루빨리 출근하고 싶은 사무실 분위기를 만들겠다는 비전이었다. ▷하지만 2019년 상장을 준비하면서 투자설명서를 공개하자 투자자들은 경악했다. 매출 1달러를 벌기 위해 2달러를 쓰는 빈껍데기였다. 일정 궤도에 오르면 고객이 늘어나도 추가 비용이 늘지 않는 테크 기업들과 달리 사업 규모가 커질수록 부동산 임대비용이 늘어났다. 자가용 비행기를 구매하고 자신의 부동산을 위워크에 임대해 사익을 챙긴 창업자 뉴먼의 방만 경영도 도마에 올랐다. 이 와중에 코로나19로 재택근무가 확산해 공실률이 치솟으면서 사업모델은 치명상을 입었다. ▷위워크의 몰락과 함께 한때 각광받던 공유경제 모델에 대한 우려도 커지고 있다. 사실상 전문 임대업으로 변질된 숙박 공유업체 에어비앤비는 집값 상승의 주범으로 지목받으며 각국의 규제를 받고 있다. 차량, 킥보드, 의류 등의 공유업체들도 퇴출 수순을 밟고 있다. 혁신의 화려한 포장지에 현혹되지 말고 기업가치의 본질을 보라. 공유경제 아이콘의 퇴장을 통해 우리가 공유해야 할 교훈이다.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당연시되던 ‘공깃밥=1000원’의 법칙은 깨졌다. 만만하던 짜장면 한 그릇은 평균 7000원을 돌파했다. 삼겹살 1인분은 2만 원에 육박하고, 여기에 소주와 맥주를 섞어 한 잔 하면 3만 원이 넘어간다. 안 오른 게 없어 ‘○○인플레이션’에 어떤 품목을 넣어도 다 말이 된다. 석 달 연속 오름폭이 커진 물가에 정부는 비상이 걸렸다. 각 부처 차관을 ‘물가 안정 책임관’으로 삼고 품목별 담당자도 정하기로 했다. ‘빵 과장’ ‘라면 사무관’ ‘배추 국장’ 등을 두는 식이다. ▷정부는 2일 비상경제장관회의를 열고 각 부처 차관이 소관 품목 물가 안정은 스스로 책임진다는 각오로 철저히 살피겠다고 밝혔다. 배추, 무 같은 신선식품부터 빵, 과자, 커피, 라면, 아이스크림 등 가공식품까지 서민 체감 물가와 직결되는 주요 품목에 대해선 담당자를 지정하기로 했다. 요즘 장차관들은 하루가 멀다 하고 물가 현장으로 향한다. 2일에만 해도 해양수산부 차관과 산업통상자원부 1차관은 마트로, 산업부 2차관은 주유소를 찾았다. ▷품목별 물가 담당 공무원은 2012년 1월 이명박 정부가 ‘물가관리 책임실명제’를 도입한 이후 11년 만에 부활하는 것이다. 당시 이 대통령은 “지구상에 20달러짜리 배추가 어디 있느냐”며 “물가가 올라가도 아무도 책임지는 사람을 못 봤다”고 질타했다. 이명박 정부는 임기 내내 52개 집중관리 생필품 리스트를 만들어 ‘MB물가’로 묶어 관리하기도 했다. 실명제 도입 이후 물가 상승이 주춤하긴 했는데, 전담 공무원 효과라기보단 실물경기가 예상보다 빠르게 침체됐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많다. ▷물가안정은 역대 정부마다 최대 숙제였다. 1970∼1980년대에는 부처는 물론이고 관공서를 총동원해 단속반을 꾸려 물가 단속에 나섰다. 짜장면, 설렁탕부터 다방 커피 값, 이발비와 목욕비까지 타깃이 됐다. 1990년대 이후엔 직접적인 가격통제는 사라졌지만 물가인상으로 여론이 나빠지면 공정거래위원회와 국세청까지 동원한 정부의 으름장이 시작됐다. 현 정부 들어서도 부총리가 나서서 술값을 올리지 말라고, 라면 값은 왜 안 내리냐고 압박했다. ▷서민들을 고통스럽게 하는 물가 상승을 억제하기 위해 정부가 노력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코로나19 이후 좀처럼 잡히지 않는 물가에 세계 각국이 기업들을 압박해 가격 통제에 나서는 것도 낯설지 않다. 하지만 정부의 가격 통제가 단기적으론 통할지 몰라도 장기적으론 억지로 누른 가격이 한꺼번에 튀어오를 수 있다. 가격이 오른 품목을 쫓아다니며 ‘두더지 잡기’ 식으로 단속하는 수준을 넘어 근본적인 해법을 고민해야 한다. 라면 값이 잡히지 않는다고 ‘라면 사무관’만 닦달할 순 없지 않겠나.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이런 식이니 항상 개미들만 돈을 잃지….” 의심은 사실이었다. 이달 15일 금융감독원이 불법 공매도를 일삼은 글로벌 투자은행(IB) 2곳을 처음 적발했다고 밝히자 개인투자자들은 분통을 터뜨렸다. IB들은 주식을 빌리지도 않고 미리 팔아버리는 ‘무차입 공매도’를 장기간 관행적으로 해온 것으로 확인됐다. 적발되지 않을 것으로 생각한 것 같다고 금융당국은 판단했다. 그만큼 한국 자본시장을 우습게 본 것이다. ▷공매도에 대한 금융당국의 시각이 바뀐 건 이때부터다. 한시적으로 공매도를 전면 금지하는 방안도 논의되고 있다. 2020년 공매도를 전면 금지했다가 2021년 5월부터 코스피200과 코스닥150 종목에 한해 허용한 상태다. 김주현 금융위원장은 27일 국회 정무위원회 종합감사에서 “다시 원점에서 공매도 제도를 개선하겠다”고 했다. “개인투자자들이 주식시장을 신뢰하지 않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고 이해하게 됐다”고도 했다. 11일 국감에서 “(이미) 개인투자자들이 요청하는 대로 다 해드렸다”고 말한 것과는 분위기가 달라졌다. ▷개인투자자들은 공매도 세력이 주가 하락을 부추긴다며 제도 개선을 지속적으로 요구해 왔다. 국내 주식시장에서 외국인·기관의 공매도 비중은 98%에 달해 공매도 제도는 ‘개미들의 무덤’으로도 불린다. 최근 10년간 불법 공매도의 타깃이 된 종목만 1212개, 거래 주식은 1억5000만 주가 넘지만 형사처벌은 단 한 건도 받지 않았다. 이달 초 한 개인투자자가 공매도 제도 개선을 내용으로 국회 국민청원을 제출했는데, 8일 만에 5만 명 이상이 동의해 요건을 충족했다. ▷그간 금융당국은 공매도 제도가 ‘글로벌 스탠더드’라며 전면 허용이 불가피하다는 입장이었다. 국내 증시의 선진국 지수 편입을 추진하며 연내 공매도 전면 재개를 저울질하기도 했었다. 4월 라덕연 일당의 주가 조작과 최근 영풍제지 주가 폭락 사태 등이 잇따르자 일각에선 공매도를 전면 허용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왔다. 공매도가 가능했다면 작전세력이 터무니없이 주가를 올리진 못했을 거란 주장이다. ▷하지만 공매도를 허용하기에 앞서 외국인·기관에만 유리한 ‘기울어진 운동장’부터 손봐야 한다는 주장도 많다. 현재 개인은 공매도 상환 기간이 90일로 제한돼 있지만 외국인과 기관은 사실상 무제한이다. 담보 비율도 개인은 120%인데 기관과 외국인은 105%다. 공매도 거래 기록이 전산화되지 않고 수기 등으로 주먹구구로 이뤄지는 것 역시 문제다. 불법 공매도에 대한 처벌 수위를 한층 강화해야 한다는 요구도 많다. 이제는 한국 주식시장이 ‘글로벌 공매도 맛집’, ‘외국인 현금인출기’ 같은 부끄러운 이름에서 벗어날 때가 되지 않았나. 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킁킁 뭔가 비싼 냄새가 나는 것 같아.” 서울 강남의 화려한 거리를 걷다가 감탄사를 연발한다. 서민들에게 난다는 ‘지하철 냄새’와는 다른 특별함이 있나 보다. 친구가 핀잔을 준다. “너무 킁킁대면서 다니지 말자. 같이 다니기 창피하잖아” “촌스럽게 그만 쳐다봐. 완전 시골에서 온 사람들 같아 보이거든”. 다른 지역을 얕잡아보는 듯한 영상은 재미있기는커녕 불쾌하다. 애들이 장난삼아 만든 게 아니라 서울 강남구의 공식 홍보 영상이란 게 더 어이없다. ▷12일 강남구 공식 유튜브 채널에 강남구 주요 관광명소를 메타버스(3차원 가상세계)로 구현해 홍보하는 내용의 영상이 올라왔다. ‘강남빌리지’ 구경에 나선 이들은 찬탄하면서도 한편으론 “만날 와본 사람처럼 자연스럽게 행동하라”며 위축된 모습을 드러낸다. 구는 이런 영상을 세금 770만 원을 들여 유명 유튜버에게 제작 의뢰했다. 구 측은 “다른 채널에 먼저 공개했을 땐 반응이 좋아 문제 될지 몰랐다”고 했다. 현재는 삭제된 상태다. ▷뭐라도 달라야 선택받는 마케팅 시장에선 차별화를 넘어 차별로 이어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 “내 아이는 특별하다”고 하고 “당신이 사는 곳이 당신을 말해준다”고 속삭인다. 올해 6월 서울 서초구에 들어서는 한 주상복합 아파트 광고에는 “언제나 평등하지 않은 세상을 꿈꾸는 당신에게 바칩니다”는 문구까지 들어갔다. 평범함을 거부한다는 정도라면 봐 줄 만했을 텐데 불평등을 찬양하는 노골적인 우월감은 나가도 너무 나갔다. ▷민간 기업이 해도 문제가 될 차별과 비하를 공공기관이 조장한다면 비판을 피할 수 없다. 한국토지주택공사(LH)는 행복주택을 홍보하는 광고로 ‘흙수저 조롱’ 논란에 휩싸인 적이 있다. 광고 속에서 “너는 좋겠다. 부모님이 집 얻어 주실 테니까”라는 한 청년의 말에 다른 청년이 “나는 네가 부럽다. 부모님 힘 안 빌려도 되니까”라고 했다. 유행에 편승하다가 사고를 치기도 한다. 지난해 기획재정부는 온라인에서 화제가 된 ‘무지출 챌린지’를 따라 했다. 어쩔 수 없이 아끼는 청년들의 짠한 마음에 상처를 주고 정부가 소비 억제를 장려한 꼴이 됐다. ▷‘B급 감성’을 내세운 충북 충주시의 정책 홍보가 대박을 치자 다른 공공기관들이 너도나도 따라 하면서 무리수가 남발됐다. 국제 스포츠 대회를 홍보하는 어느 지방자치단체의 영상은 40대 남성이 대회에 출전한 뒤 10세 어린 여성을 만난다는 식으로 그려졌다. 지자체 주최 퀴즈대회를 홍보하면서 “아이가 ‘왕의 DNA’가 있다면 퀴즈왕에 도전하라”고 한 경우도 있다. 자녀에게 특별대우를 요구한 갑질을 재미의 소재로 삼은 거다. 세금이 투입되는 공공기관의 소통이라면 적어도 친숙과 무례는 구별할 수 있어야 한다.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2005년 11월. 시작은 평소와 다름없었다. 새벽에 일어나 주전자에 물을 끓이고 우유를 타서 환자들에게 나눠 줬다. 그 뒤 편지 한 장만 남긴 채 조용히 소록도를 떠났다. 20대 청춘에 처음 한국에 왔을 때처럼 70대의 노간호사 마리안느와 마가렛의 손엔 여행가방 하나씩만 들려 있었다. 9월 29일 마가렛은 그 가방마저 내려놓은 채 고향 오스트리아에서 영원한 길을 떠났다. 향년 88세. 세상에 유일하게 남긴 시신마저 의대에 기증했다. ▷마가렛은 평생의 벗 마리안느(마리아네 스퇴거·89)와 함께 40여 년간 한센인을 돌봤다. 흔히 수녀로 알려져 있지만 정확히는 수녀가 아니라 평신도 재속회 소속이었다. 간호사를 구하는 동양의 한 가난한 나라의 요청에 응해 1959년 12월 한국에 왔다. 경북 왜관, 전북 전주 등의 한센인 정착촌에서 봉사하다 1961년 순명의 삶을 살기 위해 수녀원에 들어갔다. 건강이 나빠져 1964년 수녀원을 나왔는데 희한하게도 몸이 좋아졌다. 달리 쓰임이 있나 보다 생각하고 1966년 10월 전남 고흥군 소록도로 들어갔다. ▷폴란드계 오스트리아인인 마가렛의 본명은 마르가리타 피사레크. 가족들은 마르기트라고 불렀다. 하지만 소록도 사람들은 처음에 잘못 알아듣고 ‘마귀’라고 했다. 편하게 영어식으로 마가렛으로 부르라 했다. 백수선이란 한국 이름도 있다. 머리에 서리가 내리기 시작할 때쯤부턴 사람들이 한 살 많은 마리안느를 ‘큰 할매’, 마가렛을 ‘작은 할매’라 했다. 1970년대 초까진 또 다른 간호사 마리아 디트리히 씨까지 소록도의 ‘세마’로 불렸다. 소록도에는 이들의 공적을 기리는 ‘세마비’가 있다. ▷과거 ‘나병’ ‘문둥병’이라 불리던 한센병은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의료진조차 방역복과 마스크, 장갑으로 완전 무장한 채 환자와 거리를 두고 진료했다. 하지만 마리안느와 마가렛은 태연하게 환자들의 짓무른 손발가락을 소독하고 피고름을 직접 짜냈다. 환자의 상처에 얼굴을 바싹 갖다대고 치료하다 보니 ‘피고름을 입으로 빨아낸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늘 타인의 눈빛에서 전염의 공포를 보았던 한센인들은 이들의 진심에 마음의 문을 열었다. ▷유럽 내륙에서 나고 자란 마가렛은 소록도에 와서 처음으로 바다를 봤다고 했다. 오스트리아로 돌아가 설산을 보면서도 소록도의 푸른 바다를 그리워했다. 치매를 앓는 중에도 소록도의 추억은 또렷했다. ‘죽어서도 소록도에 묻히고 싶다’던 그가 한국을 떠난 건 나이가 들어 주변에 폐를 끼치지 않겠다는 이유였다. 온전히 베푸는 삶을 살았으면서도 “큰 사랑과 신뢰를 받아서 하늘만큼 감사합니다”라는 편지를 남겼다. 이젠 우리가 하늘만큼의 감사와 존경을 돌려 줄 차례다. 고인의 영면을 빈다.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이렇게 좋은 곳을 두고 왜 이사를 갔나요?” 지난달 초 청와대를 찾은 영국 스카우트 대원들은 해설사에게 이렇게 물었다고 한다. 지난해부터 한국 대통령이 이곳에 살지 않는다는 설명에 대한 물음이었다. 대통령만의 공간이었지만 대통령의 결단으로 국민에게 개방됐다는 설명에 대원들은 고개를 끄덕였다고 한다. 하지만 정작 우리 국민들 중에는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람들도 많다. 개방된 청와대가 향후 어떤 공간이어야 할지 제대로 된 논의가 없었기 때문이다. ▷청와대를 관리·활용하는 조직은 수시로 바뀌었다. 문화체육관광부는 가칭 ‘청와대 재단’을 설립해 내년부터 업무를 위탁할 계획이라고 25일 밝혔다. 지난해 5월 개방 이후에는 문화재청 청와대 국민개방추진단이 맡아왔다가 올해 3월 문체부로 관리 주체가 이관돼 청와대 관리활용추진단이 신설됐다. 하지만 실무는 문화재청 산하 한국문화재재단에 위탁했는데, 내년부터는 다시 문체부 산하에 별도 법인을 만들겠다는 것이다. ▷개방된 청와대의 정체성도 오락가락한다. 윤석열 대통령은 후보자 시절인 지난해 1월 “역사관을 만들거나 공원으로 활용할 수 있다. 여러 전문가와 국민 의견을 듣겠다”고 했다. 그런데 지난해 7월 문체부는 돌연 ‘프리미엄 근현대 미술 전시 공간’으로 만들겠다고 했다. 베르사유 궁전처럼 활용하겠다는 것이다. 이후엔 의견을 수렴한다며 대통령실에 청와대 관리활용자문단을 만들었지만 정작 활용 로드맵은 공개하지 않고 올해 1월 활동을 종료했다. 뚜렷한 방향이 없으니 4월 문체부가 발표한 활용 방안은 ‘역사 문화 예술 자연이 공존하는 복합 공간이자 관광 랜드마크’ 같은 온갖 말을 갖다 붙였다. ▷국민의 품으로 온전히 돌아온 것도 아니다. 지난해 12월 이후 청와대 영빈관에서 대통령 주재 행사가 열린 것만 50차례가 넘는다. 대통령이 국격에 맞는 공간에서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당분간 이용하겠다고 했지만 정작 국빈 행사보단 국정과제 점검회의, 부처 업무보고 등이 대부분이었다. 이달 13일 영빈관에서 열린 행사도 굳이 청와대일 필요 없는 ‘제20차 비상경제민생회의’였다. 대통령 행사는 보안 사항이라 방문객들은 당일에야 영빈관을 볼 수 없단 사실을 알고 발길을 돌리곤 했다. ▷권력의 정점이자 구중궁궐을 상징하던 청와대의 문이 활짝 열렸을 때 반응은 뜨거웠다. 하지만 초반에 월 50만 명에 이르던 관람객이 최근엔 월 10만 명대로 떨어질 정도로 열기는 식은 상태다. 이제부터는 이 역사적 공간을 장기적으로 어떻게 활용할지 진지한 고민과 논의가 필요하다. 정부 내에서만 뚝딱 처리할 게 아니다. ‘국민에게 돌려드린다’는 말에서 중요한 건 공간이 아니다. 국민과 소통하겠다는 마음이 핵심이다. 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지난달 31일 덴마크 정부는 올해 연간 경제성장률(GDP) 전망치를 0.6%에서 1.2%로 올렸다. 이례적으로 전망치를 올린 근거는 이랬다. 제약사 ‘노보노디스크’, 그리고 그들이 만든 비만치료제 ‘위고비’. 15일 기준 노보노디스크의 시가총액은 4284억 달러(약 570조 원)로, 지난해 덴마크 국내총생산(GDP) 4060억 달러보다 크다. 이달 초 명품기업 루이뷔통모에에네시(LVMH)를 제치고 유럽 증시 시총 1위에 오르기도 했다. ▷한 나라의 경제 전망까지 바꿔 놓을 정도로 위고비는 역대 가장 효능이 좋은 비만치료제로 평가받고 있다. 지난해 10월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는 13kg을 감량한 비결로 단식과 함께 위고비를 꼽았고, 이후 유명인들의 ‘간증’이 잇따랐다. 임상시험 결과 참가자들은 68주간 체중을 평균 15% 감량한 것으로 나타났다. 1주일에 한 번 스스로 주사를 놓는 방식인데, 주사기 4개 1세트의 가격이 1350달러(약 180만 원)로 비싸지만 없어서 못 팔 정도라고 한다. 한국에는 내년 상반기(1∼6월)에 출시될 전망이다. ▷위고비는 100년 동안 당뇨병에만 집중한 노보노디스크가 우연히 발견한 행운이다. 당뇨병 임상시험 도중 참가자들의 체중이 줄어드는 ‘부작용’이 나타났다. 당뇨병 약이 체내 호르몬인 GLP-1의 역할을 해 포만감을 늘리고 식욕을 억제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심장병 치료제로 개발되던 비아그라가 발기부전 치료제가 된 것과 비슷하다. 2014년 이 회사는 매일 주사하는 방식의 비만치료제 ‘삭센다’를 내놨고, 이어 1주일에 한 번으로 투약 주기를 늘린 당뇨치료제를 ‘위고비’로 바꿔 2021년 미국식품의약국(FDA)의 승인을 받았다. ▷최근 전 세계 제약·바이오 업계의 화두는 ‘해피 드러그’다. 비만, 탈모, 성기능 장애, 우울증 등을 치료해 삶의 질을 높여주는 약이다. 많은 이들이 고민하는 질병이라 시장성이 높다. 비만치료제 시장은 2030년 70조 원, 탈모치료제는 2028년 15조 원에 이를 것이라는 추산도 있다. 글로벌 제약사들이 앞다퉈 비만치료제 개발에 뛰어들고 있는데, 주사약 대신 먹는 약이 싼 가격으로 나오면 시장이 뒤집어질 것이다. ▷하지만 맹신해선 안 된다. 메스꺼움, 구토, 복통, 설사, 우울증 등의 부작용이 보고되고 있다. 투약한 뒤 사용을 중단하면 1년 이내에 빠진 체중의 대부분이 되돌아온다는 연구도 있다. 영국 의료 당국은 위고비 처방을 최대 2년으로 제한하도록 권고한다. 평생 약을 입에 달고 살 수도 없으니 결국은 생활 습관을 바꿔야 한다. 안전성과 효과가 검증된 유일한 다이어트 방법은 아직까지는 식이요법과 규칙적인 운동뿐이다. 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공직자 이해충돌 방지를 위해 시행 중인 ‘주식 백지신탁’ 제도가 도전받고 있다. 현 정부의 차관급 고위 공직자들이 백지신탁을 거부하며 소송까지 불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유병호 감사원 사무총장은 배우자가 보유한 비상장 주식을 백지신탁하라는 인사혁신처 결정에 불복해 행정소송을 제기했다가 12일 1심에서 패소했다. 박성근 국무총리 비서실장도 인사처 결정을 취소해 달라며 지난달 말 행정소송을 제기했다. 일각에선 주식 백지신탁이 개인의 재산권을 과도하게 침해하고 있어 기준을 완화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하지만 허술한 심사와 불복이 반복되는 상황에서 오히려 공직자의 사적 이익이 공적 임무에 영향을 주지 않도록 엄격한 잣대를 적용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다.》● 공익과 사익의 이해충돌 방지 위해 도입주식 백지신탁은 고위 공직자가 보유한 주식으로 인해 그가 담당하는 직무에 영향을 받지 않도록 주식을 매각하거나 처분·관리를 제3자에게 맡기도록 한 제도다. 1978년 미국에서 ‘블라인드 트러스트(Blind Trust)’라는 이름으로 가장 먼저 도입됐다. 현재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에서는 미국 캐나다 영국 등 8개국에서 시행 중이다. 한국에서는 2005년 공직자윤리법에 반영되면서 도입됐다. 2003년 삼성전자 사장 출신의 진대제 정보통신부 장관 지명이 시발점이었다. 삼성전자 주식과 스톡옵션(주식매수선택권)을 보유하고 있어 장관 직무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논란이 나왔다. 이를 계기로 2004년 총선에서 여야 모두 주식 백지신탁 도입을 약속했다. 백지신탁 대상자는 국회의원과 장차관을 포함한 1급 이상 고위 공직자와 기획재정부의 금융 관련 부서와 금융위원회의 4급 이상 공직자다. 본인과 배우자, 직계존비속이 보유 중인 3000만 원 초과 주식을 임명일로부터 두 달 이내에 직접 매각하거나 수탁기관(금융회사)에 백지신탁해야 한다. 수탁기관은 신탁계약이 체결된 날부터 60일 이내에 주식을 처분해야 한다. 다만 인사혁신처 주식백지신탁심사위원회로부터 보유 주식과 직무 사이에 관련성이 없다는 판단을 받을 경우 주식을 계속 보유할 수 있다. 이 제도는 공직자가 직무 수행을 통해 사익을 추구할 가능성을 막아 공직에 대한 신뢰를 높이는 데 큰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과도한 재산권 침해라는 일부 공직자들의 반발도 계속됐다. 유 사무총장은 “간접적으로도 (배우자가 지분을 가진 회사에) 영향력을 미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유 사무총장의 배우자는 바이오 회사의 주식 8억2000만 원어치를 보유하고 있다. 박 실장도 “(이해충돌이라는) 추상적 위험을 이유로 배우자의 인격권과 자기계발권, 가업승계권이 무너질 위험이 있다”고 했다. 박 실장의 배우자는 서희건설 회장의 장녀다. 하지만 12일 서울행정법원은 유 사무총장이 주식백지신탁심사위원회를 상대로 낸 직무 관련성 인정결정처분 취소 소송에서 “청구를 기각한다”며 원고 패소 판결했다. 재판부는 “배우자가 주식을 보유한 기업은 선택적 회계감사 기업이고 사무총장의 업무 범위에 비추어 볼 때 이해충돌 가능성이나 위헌성이 없다고 볼 수 없다”고 했다. 헌법재판소도 이미 2012년 백지신탁 제도에 대해 합헌 결정을 내린 바 있다. 헌재는 신탁 대상을 ‘3000만 원 이상 직무 관련성이 있는 주식’으로 제한해 목적 달성에 필요한 범위 내로 최소화했고, 이 제도에 따른 사익의 침해가 그로 인해 확보되는 공익보다 크다고 할 수 없다고 밝혔다.● 허술한 심사에 시간 끌기… 유명무실 우려도주식 백지신탁 제도가 일견 엄격해 보이지만 허점이 많다는 비판도 적지 않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에 따르면 올해 1월 기준 장차관의 경우 3000만 원 초과 주식 보유자 16명 중 9명만 매각 또는 백지신탁을 마쳤다. 국회의원의 경우도 2020년도 이후 올해 6월까지 대상자 110명 중 65명만 매각 및 백지신탁을 신고하는 데 그쳤다. 임명 후 두 달 내에 매각 또는 백지신탁을 마쳐야 하지만 백지신탁심사위의 직무 관련성 판단이 지연되는 경우가 많다. 백지신탁을 했더라도 ‘60일 이내에 주식을 처분해야 한다’는 규정이 잘 지켜지지 않는다. 기한 내 처분하기 어려운 사정이 있으면 30일 연장이 가능하고, 연장 횟수에는 제한을 두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비상장 주식은 매각이 쉽지 않다는 이유로 길게는 몇 년 동안 팔리지 않는 경우도 있다. 박 실장과 유 사무총장처럼 결정에 불복하며 시간 끌기를 시도해도 마땅히 막을 방법이 없다. 백지신탁심사위는 지난해 12월 박 실장에게 주식을 백지신탁하라고 통보했지만 박 실장은 올해 2월 국민권익위원회 중앙행정심판위원회에 행정심판을 청구했다. 행정심판에서 기각되자 다시 지난달 말 행정소송을 제기했다. 유 사무총장도 지난해 10월 백지신탁심사위의 결정에 불복해 지난해 12월 행정소송을 냈다. 12일 1심에서 패소했지만 항소할 경우 최종 결정은 더 미뤄질 수 있다. 지난해 6월 임명된 두 사람이 사실상 주식을 보유한 채 임기를 채울 수도 있는 셈이다. 직무 관련성 심사도 느슨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공직자윤리법이 직무 관련성을 판단하는 기준을 명확하게 설정하지 않고 위원회의 판단에 일임하고 있기 때문이다. 경실련이 인사혁신처에 정보공개를 청구한 자료에 따르면 2018∼2022년 5년간 3104명의 대상자 중 2197명(70.8%)이 ‘직무 관련성 없음’ 통보를 받았다. 하지만 심사 기준과 내용, 결과 등은 공개되지 않고 있다. 주식 백지신탁 제도와 관련해 지난달 감사원에 공익감사를 청구한 서휘원 경실련 팀장은 “결과적으로 직무 관련성 심사를 내세워 고위 공직자의 주식 보유를 허용해주고 있는 셈”이라며 “심사 결과를 공개하고 심사 내역을 제대로 관리하고 있는지 파악해야 한다”고 했다. 이 밖에 해외주식과 가상자산 등이 백지신탁 대상에서 빠져 있는 것도 문제다. 공직자 중에 유독 ‘서학개미’가 많은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해외주식이라도 직무 관련성이 있는 경우가 충분히 있을 수 있다. 가령 구글, 애플 등 빅테크 주식을 다량 보유한 의원이 빅테크에 유리한 입법을 하려는 유혹에 빠질 수 있다. 투자 환경의 변화를 제도가 따라가지 못한 것이어서 보완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美, 공직자 주식거래 금지까지 추진일각에선 주식 백지신탁 제도가 기업인 등 유능한 인재의 공직 진입을 막는 부작용이 있다고 주장한다. 박근혜 정부의 첫 중소기업청장에 내정된 황철주 주성엔지니어링 대표는 주식 백지신탁 문제로 사흘 만에 직을 포기했다. 문재인 정부도 중소벤처기업부 장관으로 성공한 벤처기업인을 임명하려 했지만 적임자를 찾지 못해 애를 먹었다. 특히 창업자가 많은 신산업 관련 민간 전문가를 영입하기 어렵다는 지적이 있다. 정부가 우주항공청의 인재 영입을 위해 특별법에서 백지신탁 적용의 예외를 허용한 것도 이 때문이다. 보유 주식을 신탁하되 매각하지 않고 퇴임 후 다시 돌려받는 보관신탁을 도입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하지만 예외를 두는 데는 신중해야 한다는 이견도 있다. 장영수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기업인의 공직 진출이 백지신탁 제도를 후퇴시킬 정도의 의미와 비중을 갖고 있는지는 의문”이라며 “보관신탁 제도는 재직 기간에 자신의 보유 주식 내지 관련 기업을 위해 영향력을 행사할 가능성을 배제하지 못한다”고 했다. 오히려 미국에선 공직자들의 주식 보유와 거래를 더 엄격히 규제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 주식 거래 내역을 45일 이내에 온라인에 공개하도록 한 ‘스톡법(STOCK Act)’에서 더 나아가 주식 거래 자체를 금지하는 법안을 추진 중이다. 미 상원에서는 공화당과 민주당 의원이 초당적으로 ‘공무원 주식 거래 금지법’을 7월 발의했다. 법안에 따르면 행정부 및 입법부 공무원은 물론 의원의 배우자와 자녀까지도 개별 주식 종목 거래를 금지한다. 위반한 경우 주식거래 이익을 몰수하고, 최대 1만 달러의 벌금을 부과한다. 도입된 지 18년이 된 주식 백지신탁 제도를 현실에 맞게 보완해야 할 필요성은 분명히 있다. 직무 관련성에 대해 누구나 수긍할 수 있는 객관적인 기준부터 마련해야 한다. 백지신탁심사위의 결정에 대한 불복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지도 과제다. 재산권 침해 논란을 차단하면서 협소한 인재 풀도 넓힐 수 있는 합리적 해법도 필요하다. 백지신탁의 취지는 주식을 많이 가지면 무조건 공직을 맡을 수 없다는 게 아니다. 다만 공정하게 업무를 수행하는 데는 절대 방해가 돼선 안 된다는 것이다. 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3일 오후 중국 주요 도시의 화웨이 매장 앞에는 신형 스마트폰 ‘메이트 60 프로’를 사려는 사전 예약자들의 줄이 길게 이어졌다. 미국의 대중 규제를 뚫고 3년 만에 내놓은 5세대(5G) 스마트폰이자, 자체 제작한 첨단 반도체를 탑재한 것으로 알려져 주목을 받았다. 공식 판매를 시작한 3일은 공교롭게도 중국의 78주년 ‘항일(抗日)전쟁 승리 기념일(전승절)’이었다. 제품을 처음 공개한 지난달 29일엔 지나 러몬도 미국 상무장관이 중국을 방문하고 있었다. ‘항미전쟁’에서도 승리할 수 있다는 자신감일까. ▷미국 기술 분석업체 테크인사이츠는 스마트폰을 분해해 보니 7nm(나노미터·1nm는 10억분의 1m) 공정의 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AP)가 들어 있었다고 4일 밝혔다. 화웨이의 자회사 하이실리콘이 설계하고 중국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업체 SMIC가 생산한 ‘기린 9000s’였다. 화웨이는 2020년 10월 내놓은 메이트 40 시리즈에 대만 TSMC의 5나노급 ‘기린 9000’을 탑재했지만 이후로는 미국의 제재로 TSMC 칩을 쓸 수 없었다. ▷화웨이는 미국의 대중국 제재를 상징한다. 2019년 당시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는 자국 안보를 위협한다는 이유로 화웨이에 대한 미국 기업의 수출 금지를 단행했다. 2021년 조 바이든 행정부는 미국산 장비로 부품을 만드는 외국 기업에까지 수출 규제를 확대했다. 지난해부턴 14나노 이하 반도체를 생산할 수 있는 기술·장비의 수출도 막았다. 그런데도 규제 기준을 뛰어넘는 반도체를 들고 나온 것이다. 미국 언론에선 “중국이 미국의 뺨을 때렸다”는 평가가 나왔다. ▷물론 7나노는 최첨단 기술과는 거리가 있다. 2018년에 나온 애플 아이폰 12세대에 들어간 칩에 쓰였다. 현재 TSMC와 삼성전자가 3나노 제품을 양산하고 있는 점을 감안하면 4, 5년가량 뒤졌다. 하지만 극자외선(EUV) 노광 장비 등 첨단 생산 장비의 수입이 막힌 상황에서 초미세 공정의 반도체를 만들어냈다는 데 의미가 있다. 시간과 비용은 더 들지만 낮은 수준의 장비로 반도체 회로를 여러 번 그리는 ‘멀티 패터닝’ 기술로 극복한 것으로 추정된다. ▷중국의 반도체 자립 선언이 실제인지 허장성세인지는 아직 확인하기 어렵다. 스마트폰이 몇 시간 만에 매진됐다는 점에서 대량 생산은 힘들 수준이란 관측도 있다. 미국 제재 이전에 비축된 대만 TSMC의 칩을 사용했을 것이란 가능성도 제기된다. 하지만 마냥 무시할 순 없다. 1일 독일에서 개막한 유럽 최대 정보기술(IT)·가전 전시회 ‘IFA 2023’ 부스의 절반 이상을 중국 기업이 차지할 정도로 ‘테크 굴기’는 위협적이다. 한국으로선 초격차 기술을 갈고닦아 더 달아날 수밖에 없다. 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누가 처음 사용했는지 몰라도 ‘순살 아파트’는 기가 막힌 작명이다. 원희룡 국토교통부 장관은 이 표현이 정확하지 않다며 자제해 달라고 했다. 보강철근이 빠져 있는 것이지 철근 자체가 빠진 건 아닌데 국민들이 오해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반드시 있어야 할 것을 빼먹은, 그래서 국민의 안전을 위협하는 총체적 부실을 이만큼 직관적이고 감각적으로 설명하는 표현을 찾긴 힘들다. 아파트 지하 주차장 철근 누락 사태에 대해 정부가 대신 찾은 표현은 한국토지주택공사(LH)의 ‘전관 카르텔’이다. 이 역시 일타강사다운 단순하고 명쾌한 표현이다. 설계니 공법이니 감리니 하는 건 복잡하고 이해하기 어렵다. ‘나쁜 놈들이 짬짜미로 다 해먹었다’고 하면 누구나 단번에 이해가 간다. 경찰과 검찰은 LH에 대해 강제 수사에 나섰고, LH는 퇴직자가 근무하고 있는 전관 업체와 체결한 설계·감리 등 용역 계약을 전격 해지했다. ‘전관 카르텔’ 척결의 칼날은 LH를 넘어 도로, 철도, 항공 등으로 확대되고 있다. LH의 전관 카르텔은 실체가 있다. 반드시 도려내야 할 부조리다. 감사원에 따르면 2016∼2021년 LH의 3급 이상 퇴직자 600여 명 중 절반 이상이 LH 계약 업체에 재취업했다. 이 기간 전관 업체에 몰아준 일감은 9조 원이 넘는다. 철근 누락 아파트의 설계·감리를 맡은 전관 업체 25곳은 최근 3년간 3232억 원의 수의계약을 따냈다. 업계에선 LH의 ‘OB(전관)’ 한 명 영입하지 않은 곳을 찾기 어렵다고 한다. 하지만 전관 카르텔 타파의 구호가 커지면서 인천 검단아파트 지하 주차장 붕괴 사고에서 비롯된 다양한 이슈들이 수면 아래로 가라앉아 버렸다. 철근을 빼먹은 아파트 명단이 7월 말 공개된 직후까지만 해도 부실한 설계, 엉뚱한 시공, 깜깜이 감리 등 무너진 건설 시스템을 어떻게 바로잡을 것인가에 관심이 쏠렸다. 하지만 카르텔이 원인으로 지목된 이후에는 LH의 전관 특혜와 도덕적 해이만 부각되고 있을 뿐이다. 사실 구조적 원인은 설계, 시공, 감리가 따로 놀았다는 데 있었다. 각자의 역할을 하지 못했을뿐더러 크로스체킹 시스템도 실종됐다. 설계에서 빼먹은 걸 나중에 바로잡기는커녕 시공 과정에서 또 한 번 빼먹는 부실의 누적이 이뤄졌다. 현장에선 사업을 총괄할 프로젝트매니저가 보이지 않았다. 1994년 성수대교 붕괴 이후 공무원의 비리를 막겠다며 도입된 책임감리제는 공무원과 발주 기관의 책임 회피 수단이 됐다. 만성적 인력난에 시달리는 현장은 부실 시공의 시한폭탄이다. 건설 현장에선 50대 미만의 한국인, 특히 잔뼈 굵은 숙련공은 찾기 힘들다. 청년들의 건축·토목 기피 현상은 이미 오래됐고, 현장 인력들조차 ‘탈건(탈건설사)’을 꿈꾼다. 공법은 갈수록 복잡해지는데 도면을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은 적고, 과거의 경험에 기댄 적당주의가 판을 친다. 현장의 공백은 중국, 베트남 등에서 온 비숙련의 일용직 외국인이 메우고 있다. 사실상 국내에 ‘메이드 인 코리아’ 아파트는 없다는 말까지 나온다. 철근 누락 사태의 해법은 1차 방정식이 아닌 복잡한 고차 방정식이다. 고질적 불법 재하도급 해소, 저가 수주를 부르는 입찰제도의 개선, 우수한 현장인력 확보, 독립적 감리 체계의 도입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하고 이중 삼중의 안전장치를 쌓아야 한다. 안전과 품질을 높이면서도 공사비 상승이 집값을 자극하지 않도록 하는 건 쉽지 않은 미션이다. 대학수학능력시험이라면 소위 ‘킬러 문항’을 배제하고 쉽게 풀면 되겠지만 현실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전관 카르텔’ 척결만 앞세우고 근본적 시스템 개선을 등한시하면 영영 고득점을 받긴 어려워진다. 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나는 지금 ‘조용한 사직(quiet quitting)’ 중이다. 실제로 일을 그만두는 것은 아니다. 다만 주어진 일 이상의 노동과 열정을 바라는 ‘허슬(hustle) 문화’를 그만두는 것이다.” 지난해 7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틱톡에 올라온 17초 분량의 짧은 영상이 전 세계로 퍼지며 삽시간에 유행이 됐다. 정해진 시간, 업무 범위 내에서 최소한의 업무만 하는 ‘조용한 사직’은 열정을 강요하던 기존 직장 문화에 대한 대응책으로 주목받았다. 하지만 조용히, 티 나지 않게 한다고 상사와 회사가 이를 모를 리 없다. ▷‘조용한 사직’에 대한 기업들의 반격이 시작됐다. ‘조용한 해고(quiet cutting)’다. 미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최근 미국 등 글로벌 기업에서 공식적인 구조조정 대신 업무 재배치, 직무평가 강화 등을 통해 직원 스스로 퇴사하도록 유도하고 있다고 전했다. 글로벌 스포츠용품 업체 아디다스, 소프트웨어 기업 어도비, 클라우드컴퓨팅 기업 세일즈포스, IBM 등이 이 전략을 택했다. 해당 직원에게 박한 평가를 주고 승진 기회를 박탈하고 회의에서 배제하고 중요한 업무를 맡기지 않는 등 다양한 방법을 동원한다. ▷코로나19는 전 세계 노동시장의 패러다임을 바꿔 놓았다. 일에 대한 회의감으로 자발적으로 회사를 떠나는 ‘대퇴사(The Great Resignation)’와 함께 ‘조용한 사직’이 유행이 됐다. 재택근무, 원격근무의 확산도 한몫했다. 하지만 코로나19가 진정되고 경기침체가 장기화되면서 기업들은 생산성 저하, 조직문화 저해, 인력 유출 등에 대한 대응책 마련에 나서기 시작했다. 포브스는 “조용한 해고는 기업이 구조조정 효과를 보면서도 대량 감원을 피하는 길”이라고 설명했다. ▷조용한 해직과 함께 ‘조용한 고용(quiet hiring)’도 서구 사회에서 새로운 트렌드로 등장하고 있다. 새로 풀타임 직원을 채용하지 않고 기존 근로자의 역할을 전환해 업무를 맡기는 식이다. 정규직 대신 단기 계약직을 뽑아 대응하기도 한다. 태업하지 않는 로봇이나 인공지능(AI)을 대신 고용하는 방법도 조용히 일자리를 앗아간다. 나가는 사람이 많아져도 신규 일자리는 그만큼 줄어들 수밖에 없다. ▷‘조용한 사직’에 기업들이 ‘조용한 해고’로 대응하면 앞으로 노사 간에 더 많은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직원은 회사를 단지 돈을 벌기 위한 수단으로, 회사는 직원을 이윤 창출의 도구로만 바라보는 조직에는 미래가 없다. 코로나19를 거치면서 사람들은 일보다 중요한 게 있다는 걸 깨닫기 시작했다. ‘조용한 사직’도 하나의 방편이었다. 이젠 일상으로 돌아왔으니 일의 본질과 의미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볼 때가 된 것 같다. 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카페나 식당 문을 열었을 때 ‘어서 오세요’ 대신 키오스크를 마주하면 움찔하게 된다는 사람이 여전히 많다. 디지털 문맹 여부를 판정해주는 심판관인 양 서 있는 키오스크 앞에서 손가락이 머뭇거린다. 주문부터 결제까지 단 한 번의 실수도 없어야 한다. “아이스라떼 톨 사이즈 샷 추가 테이크아웃요.” 점원 앞에선 3초면 끝날 한 문장을 위해 단계마다 씨름해야 한다. 어르신이라면 나이 탓이라도 할 텐데, 솔직히 중년들 역시 키오스크가 조금은 두렵다. ▷키오스크는 코로나19 이후 비대면 문화가 확산하면서 최근 몇 년 동안 급격하게 늘었다. 최저임금 급등에 따른 인건비 부담도 키오스크 보급이 빨라지는 데 한몫했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에 따르면 국내 키오스크 운영 대수는 2019년 18만9951대에서 2022년 45만4741대로 늘었다. 같은 기간 요식업에선 5479대에서 8만7341대로 3년 만에 약 16배로 급증했다. 요즘엔 키오스크뿐 아니라 자리에 앉아 태블릿PC로 주문하는 테이블 오더, QR 결제, 테이블링(모바일을 이용한 원격 줄서기) 등 비대면 서비스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 ▷많이 접해 익숙해졌다지만 키오스크 기기마다 사용자환경(UI)이 표준화되지 않아 처음 가는 가게에선 여전히 부담이다. 직원에게 물어볼 수 없어 메뉴 이름을 꿰고 있지 않으면 주문조차 안 된다. 낯선 이름에 주문을 포기했던 아이스크림 체인점의 ‘MSGR’이 알고 보니 미숫가루임을 알고는 허탈해진다. 디저트인지 기타 음료인지 가게가 설정한 분류 기준을 모르면 메뉴를 찾기도 어렵다. 화면 속 그림과 글씨가 작아 잘 보이지 않는다는 불만도 많다. 시간을 끌다간 초기화될 수도 있다. 결국 뒤통수가 따가워 뒷사람에게 주문을 양보하게 된다. ▷이런 당혹감이 연세 많은 어르신만의 문제는 아니다. 지난해 시장조사 전문기업 엠브레인 트렌드모니터가 성인 1000명을 대상으로 설문해 보니 키오스크를 이용하다 주문을 포기한 사람이 40대에선 17.3%였지만 50대는 50.5%로 확 올라갔다. 한 빅데이터 업체의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오프라인 매장에서 주문할 때 30대 이하는 키오스크를 이용하는 비대면 방식을, 40대 이상은 직원을 통하는 대면 방식을 선호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키오스크를 비롯한 디지털 기기의 확산은 거부할 수 없는 물결이다. 다만 기술 발전의 목표가 인간의 편리를 위한 것이라면, 자괴감이 들지 않도록 좀 더 친절해져야 한다. 쉬운 말을 쓰고 글씨 크기를 키우고 화면 구성과 조작 방식을 단순화하는 등의 배려가 필요하다. 어르신들도, 중년들도 한때는 ‘얼리어답터’였다. 인공지능(AI) 등 숨 가쁜 기술의 발전 앞에 지금의 젊은 세대도 버벅거릴 날이 머지않았다. 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제도 바뀌기 전에 막차 타야 합니다.” “막히기 전에 서두르세요.” 최근 온라인 커뮤니티 등에는 이처럼 대출을 부추기는 문구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반백 년 대출’로도 불리는 ‘50년 만기 주택담보대출’ 얘기다. 지난달부터 상품을 출시했던 시중은행들이 갑자기 가입 연령을 제한하거나 아예 판매 중단을 예고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갑작스러운 절판 위기에 소비자들이 몰리면서 최근 1주 사이에 1조 원 가까이 불어났다. ▷출시 두 달이 채 안 된 상품이 철퇴를 맞은 것은 최근 금융당국이 가계대출 증가의 원인으로 50년 만기 주담대를 지목했기 때문이다. 금융권의 가계대출 잔액은 4월부터 지난달까지 4개월 연속 증가했다. 금융당국은 50년 만기 주담대가 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DSR) 규제를 우회하는 수단이 된다고 봤다. DSR 규제에 따라 연간 원리금 상환액이 연소득의 40%를 넘을 수 없는데, 만기가 길어지면 원리금 규모가 줄어 대출 한도를 늘릴 수 있기 때문이다. ▷50년 만기 주담대는 사실 현 정부의 작품이다. 대통령직인수위원회가 국정과제로 검토해 지난해 5월 민생안정 프로젝트의 방안으로 제시했다. 고금리 시기 차주들의 원리금 부담을 덜어주고 대출 규제로 끊어졌던 주거 사다리를 다시 연결한다는 취지였다. 지난해 8월 한국주택금융공사가 50년 만기의 보금자리론과 적격대출을 출시했고, 올해 1월 또 50년 만기 특례보금자리론을 내놨다. 이에 은행들도 정부 기조에 맞춰 초장기 대출 상품을 내놨다. 그런데 이제 와서 정부가 은행 탓을 하니 은행들은 황당하다는 반응이다. ▷정부가 50년 만기 주담대의 가입 연령을 ‘만 34세’ 등으로 제한하는 방안을 검토한다는 소식에 중장년층들은 역차별이라고 반발하고 있다. 국토교통부에 따르면 생애 최초 주택마련 가구주 연령은 대략 38∼40세다. 해외에서도 50∼60년 초장기 주담대가 많지만 나이로 가입을 제한하는 건 일본, 싱가포르 등을 제외하면 드물다. 50년 만기가 문제라면 40년 만기도 마찬가지다. 40세의 50년 대출은 안 되고, 50세의 40년 대출은 된다면 형평성에 맞지 않다. ▷사실 가계대출을 키운 주범은 정부다. 올해 들어 정부의 연이은 부동산 규제 완화와 특례보금자리론 등 정책대출 상품 출시가 부동산 매수 심리에 군불을 지폈다. 특례보금자리론은 출시 반년 만에 31조 원이 몰리며 가계대출 확대를 주도했다. 금융당국은 ‘상생금융’을 내세우며 시중은행에 대출금리를 낮추라고 압박했다. 기준금리를 올리며 긴축에 나선 한국은행과 엇박자를 낸 것이다. 최근 금융당국은 “은행권의 대출 태도가 느슨해진 부분은 없는지 점검하겠다”고 했지만 정작 느슨했던 건 오히려 금융당국이 아닌가. 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RIP(Rest In Peace·편히 잠드소서).’ 최근 인터넷 커뮤니티 등에는 20여 일의 짧은 생을 살다 간 고인을 추모하는 영정 사진이 돌고 있다. 주인공은 꿈의 물질로 불린 ‘상온·상압 초전도체’. 지난달 22일 국내 연구진이 일상 온도와 기압 상태에서 전기저항이 전혀 없는 물질 ‘LK-99’를 개발했다고 주장하자 주식시장은 흥분에 휩싸였다. 연구 결과에 대한 평가에 따라 하루는 30% 올랐다가 다음 날 30% 떨어지길 반복했다. 하지만 지난주 국제 학술지 네이처가 “LK-99는 초전도체가 아니다”라고 발표한 후 투심은 차갑게 식어버렸다. ▷요즘 한국 주식시장은 거꾸로 가고 있다. 미국의 긴축 장기화와 중국의 부동산 위기로 주식시장이 약세를 보이는 상황에서도 마치 활황기인 양 ‘빚투’(빚내서 투자)와 ‘묻지마 투자’가 기승을 부린다. 17일 기준 신용거래융자 잔액은 20조5573억 원으로 올 들어 최대치를 기록했다. 올해 들어서만 4조 원이 늘었다. 4월 주가조작 사태를 부추긴 원인으로 차액결제거래(CFD)가 지목되면서 빚투가 잠시 잦아드나 했더니 결국 오래가지 못했다. ▷최근 빚투가 늘어난 건 역설적으로 올해 상반기에 ‘원조 테마주’ 역할을 했던 이차전지 주들이 맥을 못 추고 있기 때문이다. 끝 모를 듯 오르던 주가가 떨어지자 이번엔 저가 매수 기회로 판단한 투자자들이 빚을 내서 올라탔다. 신용거래융자 잔액 상위 10개 종목 가운데 절반이 이차전지 관련주다. 이차전지 산업의 성장성 자체는 인정받고 있지만 빚투는 멀리까지 기다릴 여유가 없다. 주가가 당장 또 한 번 출렁이면 반대매매의 파국을 피하기 어렵다. ▷부나방처럼 테마주를 찾아 달려드는 투자자들은 이차전지, 초전도체를 지나 최근엔 ‘맥신(MXene)’으로 옮겨갔다. 우수한 전도성과 전자파 차폐 능력을 갖춰 미래 신소재로 꼽히는 맥신의 대량생산 가능성을 확인한 연구 결과가 17일 발표되면서부터다. 한 회사는 관련 연구자가 사외이사로 있다는 이유로, 한 회사는 관련 소재를 생산한다는 이유로 상한가를 쳤다. 테마주로 묶인 회사들의 본업이 연구 결과와 직접적인 상관관계가 없다는 분석이 나와도 투자자들은 전혀 개의치 않는다. ▷최근 주식시장은 크게 한탕 하려는 작전세력, 꼭지 잡기 전에만 털고 나오면 된다는 개미들이 어우러져 난장판이 됐다. 빚을 낸 투자자들은 대출이자 이상의 수익을 거둬야 하니 고위험·고수익 주식만 쳐다본다. 주식리딩방, 소셜미디어 등에서는 온갖 소문과 풍문이 판을 치며 불공정거래와 시장교란 행위의 온상이 됐다. 언제까지 한국 주식시장은 개미들의 피를 먹고 자라는 나무가 돼야 하나. 미친 도박판이여 이제 제발 RIP. 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삼성전자가 해외에 쌓아뒀던 수익금 가운데 22조 원 가까운 돈이 올해 상반기에 국내로 돌아왔다. 대부분 생산설비 구축에 투입됐다고 한다. 해외에서 국내로 돈이 들어왔으니 투자유치라 할 만하다. 해외 생산시설을 국내로 옮기는 ‘리쇼어링’과 마찬가지다. 역대 최고라는 올해 상반기 외국인 국내 직접투자(FDI) 신고액 22조3500억 원과 맞먹는다. 2014년부터 지난해까지 국내로 돌아온 ‘유턴기업’의 투자액 3조 원의 7배가 넘는다. ▷삼성전자 반기보고서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삼성전자 해외법인이 본사로 보낸 배당금은 21조8457억 원으로 집계됐다. 지난해 상반기 1378억 원의 158배에 이른다. 상반기는 물론 연간 기준으로도 역대 최고치다. 현대자동차그룹도 1분기에 전년 같은 기간 대비 4.6배 늘어난 7조8000억 원을 국내로 가져왔다. 기업들은 반도체·전기차 공장 증설 등 미래 먹을거리 투자에 배당금을 활용할 계획이라고 한다. ▷기업들이 해외에 묵혀 뒀던 돈을 국내로 들여오는 것은 지난해 세법 개정의 효과다. 지난해까진 국내 기업들이 해외에서 돈을 벌면 현지에서 세금을 내고도 국내로 들여올 때 다시 세금을 내야 해 이중과세라는 지적이 있었다. 올해부터는 해외에서 이미 과세한 배당금을 국내에 들여올 경우 해당 금액의 5%까지만 과세한다. 감세의 나비효과는 크다. 들여온 돈은 국내 투자와 일자리 창출의 마중물이 됐다. 해외에서 벌어들인 외화가 국내로 들어오면서 경상수지와 원화 가치 방어에도 도움이 됐다. ▷해외 자회사의 배당 소득에 비과세하는 건 효과가 검증된 정책이다. 미국 기업들은 2017년까지 약 1조 달러를 해외에 유보금으로 쌓아 두고 있었는데, 과세 체계가 바뀐 2018년에 이 중 77%인 7700억 달러를 미국으로 들여왔다. 일본도 2009년 세제 개편으로 해외 자회사의 배당에 대한 ‘익금불산입’ 제도를 도입하자 이듬해 해외 유보액의 95.4%가 국내로 돌아왔다. 이를 넘어 미국은 인플레이션감축법(IRA), 일본은 ‘경제안전보장추진법’ 등을 통해 기업들이 다시 국내로 돌아오도록 세제 등의 지원을 강화하고 있다. ▷일각에선 배당금 비과세로 법인세수가 줄어들고 대기업 배만 불릴 뿐이라고 지적하기도 한다. 국회입법조사처는 2024∼2027년 연평균 1044억 원의 세수 손실이 발생할 것으로 추산했다. 하지만 국내로 돌아온 돈이 수십조 원에 이르고 향후 국내 투자로 발생할 이익까지 고려하면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이다. 기업에 과도한 세 부담을 지우는 것을 흔히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가르는 것에 비유한다. 당장의 세수 감소만 볼 게 아니다. 감세가 투자와 일자리 창출로 이어지고 다시 세수 증가로 연결되는 선순환이 우리 경제를 살찌게 한다. 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지하 주차장에서 철근을 빼먹은 아파트의 감리를 맡은 한 건축사 사무소는 홈페이지에서 임원들의 화려한 경력을 자랑스럽게 소개했다. 임원 65명 가운데 22명이 한국토지주택공사(LH) 출신이었고, 국토교통부, 법무부, 지방자치단체, 심지어 군(軍) 출신까지 포함하면 임원 10명 중 8명이 이른바 ‘전관’이었다. 수주의 비결은 설계 능력이 아니라 로비 능력이었던 셈이다. 철근 누락 사태가 터지자 회사의 자랑은 수치가 됐고, 홈페이지는 폐쇄됐다. ▷LH는 2021년 직원들의 땅 투기 의혹이 불거지자 전관 특혜를 막겠다며 재취업 심사 대상을 ‘부장급 이상’(2급·500여 명)으로 확대했다. 하지만 성긴 그물은 유명무실했다. 최근 2년간 공직자윤리위원회의 퇴직 공직자 취업 심사를 받은 LH 출신 21명 가운데 재취업이 막힌 건 단 1명뿐이었다. 직무 연관성이 낮다는 이유로 심사를 통과한 이들이 철근을 빼먹은 감리업체 등에 안착했다. 실무자인 차장급(3급)들이 일찌감치 이직하는 사례도 늘었다. ▷재취업 심사가 허술하지만 아예 피하는 방법도 있다. 공직자윤리법 취업 심사 대상인 ‘자본금 10억 원 이상, 연간 거래액 100억 원 이상’이라는 기준에 미달하는 업체로 가면 된다. 최근 5년간 LH로부터 감리를 가장 많이 수주한 업체도 이 기준에 해당하지 않을 정도니 사실상 의미 없다. 똘똘한 퇴직자를 잡으면 업계 무명에서 스타로 떠오르는 건 한순간이다. LH 고위직 출신이 합류한 신생 감리업체는 설립 4년 만에 LH에서 160억 원대 계약을 따내기도 했다. ▷건축, 도로, 철도, 항만, 수자원 등의 분야에서 발주처 ‘OB(전관)’ 한 명 영입하지 않고 발주처와 거래하는 업체는 사실상 없다는 게 업계의 전언이다. 전관을 영입해 회장, 부회장, 사장, 전무 등의 직책을 준다. 전 직장에서의 위치에 따라 직급과 연봉이 대략 정해져 있다. 차량, 사무실, 법인카드 등도 준다. 이들에게 떨어진 임무는 오직 수주다. 발주처와 꾸준히 접촉하며 사업 계획을 미리 입수하고, 심사 과정에서 ‘후배’들에게 힘을 발휘한다. 보통 3년 정도는 약발이 먹힌다고 한다. ▷건설 카르텔에 대한 비판이 커지자 정부는 공정거래위원회, 국민권익위원회까지 총동원해 조사에 나섰다. 제 발이 저린 LH는 ‘반카르텔 공정건설 추진본부’를 신설했다. 하지만 회의적인 시선이 많다. LH는 2년 전에도 ‘조직 해체 수준의 혁신’을 하겠다고 했지만 이번 철근 누락 사태를 통해 공수표였음이 확인됐기 때문이다. ‘반카르텔 본부’가 필요한 건 사실 LH만도 아니다. ‘전관’, ‘낙하산’, ‘○피아’ 등 다양한 이름을 내건 부정과 특혜가 우리 사회 곳곳에 독버섯처럼 퍼져 있다. 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 이후 한때 품귀 현상까지 빚었던 5만 원짜리 지폐가 다시 돌아오고 있다. 한국은행이 올해 상반기에 5만 원권을 약 10조 원어치 발행했는데, 이 중 78%인 약 7조8000억 원이 되돌아왔다. 5만 원권 발행이 시작된 2009년 6월 이후 상반기 기준으로 환수율이 가장 높다. 한은이 화폐를 발행하면 시중에 유통되다가 예금이나 세금 납부 등의 형태로 금융기관을 거쳐 한은으로 돌아온다. 환수율이 높다는 건 화폐가 시중에서 활발히 유통되고 있다는 의미다. ▷5만 원권이 돌아온 것은 2021년 8월부터 본격화된 기준금리 인상의 영향이 크다. 시중금리가 오르면서 현금을 쌓아두기보다는 높은 이자를 받을 수 있는 예·적금에 넣는 게 낫다고 보는 사람이 많아진 것이다. 코로나19 방역 규제가 해제되면서 대면 경제활동이 증가하고, 소비심리가 회복된 것도 영향을 미쳤다. 코로나19 때 숨었던 고액권이 통화 긴축과 함께 돌아오는 것은 미국, 유럽 등에서도 나타나는 현상이다. ▷코로나19가 한창일 때는 5만 원권이 시중에서 자취를 감췄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2021년엔 환수율이 사상 최저인 17%까지 떨어졌다. 코로나19로 현금 사용이 줄고 온라인 거래가 급증한 영향이 컸다. 경제 불확실성이 커지면서 현금, 특히 보관이 편리한 고액권을 확보하려는 심리도 작용했다. 금리가 낮아 은행 이자가 거의 붙지 않는 것도 현금을 꽁꽁 숨게 만들었다. 시중은행들이 5만 원권 수급에 어려움을 겪으면서 자동입출금기(ATM)에 ‘5만 원권 인출 불가’ 안내문이 걸리기도 했다. ▷5만 원권이 사라지자 상당 부분 지하경제로 흘러갔을 것이라는 추정도 나왔다. 자산 노출을 꺼리는 자산가들이 장롱이나 금고에 숨겨 놓거나, 범죄 세력들이 수익 은닉 수단으로 활용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실제로 2011년 전북 김제시의 마늘밭에서 5만 원권 110억 원이 발견된 이래로 비자금이나 로비, 세금 탈루, 은닉 자금으로 악용된 사례가 다수 드러났다. 고액권이 유통 기능은 적고 저장 기능만 있다며 무용론까지 제기됐다. ▷금고를 탈출한 5만 원권의 귀환은 반갑지만, 이 돈이 생산적인 자금으로 흘러갈지, 투기에 활용될지는 지켜봐야 한다. 그동안 5만 원권만 291조8000억 원이 풀렸지만 아직 돌아오지 않은 155조2000억 원의 행방도 궁금하다. 중앙은행이 디지털화폐(CBDC)를 발행하는 등 디지털 경제가 본격화되면 과세당국의 추적을 피해 5만 원권이 더 깊숙이 숨어들 것이란 우려도 있다. 5만 원권을 무조건 찍어낼 것만 아니라 음지에 숨어 있는 현금을 어떻게 환수할 것인지도 함께 고민하며 발권 정책을 짜야 할 것 같다. 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