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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들은 감기를 달고 산다. 성인은 여러 감기 바이러스에 노출되다 보니 면역력이 생겨 연간 1∼3회 감기에 걸리고 마는데 미취학 아동들은 6∼10번, 많게는 매달 감기에 걸린다. 감기와 독감이 유행하는 겨울이면 부모들은 콧물 훌쩍이고 열 나는 아이 데리고 병원 문 열기 전부터 긴 줄을 서는 ‘소아과 오픈런’을 한다. 요즘은 약을 구하러 ‘약국 뺑뺑이’까지 돌고 있다. ▷약사들이 이용하는 의약품 도매 사이트의 품절약 1위부터 20위까지가 어린이용 시럽과 타미플루 같은 감기약들이다. 의사 처방전을 들고 가도 찾는 약이 없어 약사가 의사와 통화해 다른 약을 지어주거나, 근처 약국에서 구해다 주거나, “다른 약국 가보라”며 빈손으로 돌려보낸다. 애가 타는 엄마들은 맘카페에서 “기침약 시럽 있나요” “○○동인데 해열제 파는 약국 있을까요”라며 정보 품앗이를 하고, 남는 약을 나눠 받거나 사기도 한다. ▷약국에 감기약이 없는 건 수요가 폭증한 탓이 크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 첫 겨울을 맞아 그동안 마스크 덕에 안 걸렸던 감기와 독감에 몰아 걸리는 사람들이 급증했다. 최근 5년 새 가장 많은 독감 환자가 발생했고 독감 주의보도 1년 4개월째 이어지고 있다. 외래환자 1000명당 독감 의심환자 수가 6.5명이면 유행 단계인데 지난달엔 61명까지 갔다. 여기에 어린이를 중심으로 호흡기세포융합바이러스 감염병과 마이코플라스마 폐렴까지 돌고 있다. ▷다른 나라도 정도는 덜하지만 사정이 비슷하다. 감기약을 포함한 의약품 수요는 급증한 반면 코로나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한 글로벌 공급망 위기로 원료 물질 공급이 지연되고 의약품 무역에 차질이 빚어지고 있다. 한국은 완제 의약품의 31%, 원료 의약품은 88%를 수입에 의존하고 있어 글로벌 공급망 위기에 더욱 취약하다. 특히 어린이 감기용 복제약은 마진율이 낮은 데다 출산율 저하로 국내 제조사가 몇 안 남아 있다. 생산에 차질이 생기면 바로 품귀 사태가 벌어지는 구조다. ▷감기약 대란은 2022년 치명률이 낮은 오미크론 대유행 당시로 거슬러 올라간다. 정부는 의료체계 부담을 줄이려고 재택 치료로 전면 전환했는데 오미크론 환자들이 대거 감기약을 처방받으면서 일시 품절→ 가수요→ 품절의 악순환이 이어졌다. 대한아동병원협회는 지난해 6월 정부가 소아 필수약 품절을 방관하고 있다며 대책을 촉구하기도 했다. 정부는 약가를 찔끔 인상하고 생산을 독려하는 소극적 대처로 일관하다 어제 의약품 사재기를 집중 단속한다고 발표했다. 3년째 반복되는 감기약 수급 불안이 사재기 탓이겠나. 근본적인 공급 안정화 대책이 나와야 흔한 감기약 하나 사려고 약국 뺑뺑이를 도는 현상이 사라진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마흔이 넘어가면 건강검진 결과를 맘 졸이며 기다리게 된다. ‘암’이라는 말을 듣게 될까 봐 그렇다. 한국인 사망 원인 1위가 암이다. 여자는 40∼69세는 유방암, 70∼74세 폐암, 75세 이후는 대장암에 가장 많이 걸린다. 남자는 45∼54세 대장암, 55∼64세 위암, 65세 이후부터는 폐암이다. 그래도 암 환자의 5년 이상 생존율, 즉 완치율이 72.1%로 20년 전보다 20%포인트 높아졌다. ▷지난해 12월 28일 공개된 ‘2021년 국가암등록통계’에 따르면 암 환자의 상대 생존율은 갑상샘암(100.1%), 전립샘암(96%), 유방암(93.8%)이 높고 간암(39.3%), 폐암(38.5%), 췌장암(15.9%)은 낮다. 상대 생존율이란 일반인을 100%라 할 때 암 환자가 5년 이상 살 확률이다. 갑상샘암이 100%를 넘는 것은 암 진단을 받은 사람이 아닌 사람보다 오래 산다는 뜻으로 불필요한 치료를 받는 경우가 많다는 뜻이다. 갑상샘암을 제외하면 상대 생존율은 67.8%로 떨어지지만 다른 나라보다는 여전히 높다. ▷미국 예일대 의대 연구진이 재작년 선진 22개국의 암 사망률을 분석한 결과 한국이 가장 낮았다. 건강검진 활성화로 암을 조기에 발견하고, 의료비가 저렴해 조기에 치료하는 덕분이다. 한국은 신약 임상시험을 가장 활발하게 하는 곳이기도 하다. 유명 정치인은 2017년 폐암 4기 진단을 받았으나 신약 치료 덕에 현재 현역으로 활동 중이다. 암에 걸리면 무조건 빅5를 찾는 ‘환자 쏠림’ 현상이 심각한데 역설적이게도 많은 환자를 본 덕분에 임상 실력은 세계 최고 수준이 됐다. ▷암 치료 기술은 나날이 발전하고 있다. 그중 하나가 면역 항암제다. 나이 들면서 세포분열 과정에서 암이 될 돌연변이 세포는 늘어나고 이를 제거하는 면역계 효율은 떨어진다. 면역 항암제는 면역계 효율을 높여주는 약인데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99)이 2015년 면역 항암제인 ‘키트루다’로 피부암을 치료해 화제가 됐다. 코로나 백신을 개발한 모더나는 암 백신을 개발해 임상시험 중이다. 지난해 4월에는 암세포만 겨냥해 파괴하는 중입자 치료기가 국내에 들어왔다. 지금까지는 전립샘암만 치료했고 올해부터 다른 암으로 확대할 계획이다. ▷흔히 암은 가족력이 중요하다고들 한다. 실제로 위암과 폐암은 부계, 대장암과 간암은 모계 유전 비율이 높다. 하지만 가족력의 영향력은 10%를 넘지 않는다. 흡연과 식습관이 62%로 가장 중요하다. 가족력이 두드러져 보이는 이유는 부모에게서 짠 식단 같은 나쁜 생활습관을 물려받기 때문이다. 암을 이겨낸 사람들은 비결 1순위로 ‘건강한 습관’을 꼽고 그중에서도 긍정적인 마음 먹기가 중요하다고 한다. 세계폐암학회는 매사 긍정적인 사람의 생존율이 12% 높았다고 보고했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올해의 끝에서 가장 치열한 전장을 본다. 이스라엘과 하마스가 석 달째 무력을 주고받으며 2만 구 넘는 시체를 쌓아놓은 요르단강과 지중해 사이 땅, 세계를 분열의 위기로 몰아넣은 지역이다. 국제사회의 중재 노력에도 죽음의 무게를 모르는 양쪽 지도자들은 절멸과 박멸만을 말한다. 그래도 낮은 곳에서는 미약하나마 공멸을 막으려는 움직임이 분주하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젊은 음악가들로 구성된 ‘서동시집 앙상블’은 올해 말에도 연주회를 거르지 않았다. 유대인과 아랍인의 화해를 모색하는 시민단체 활동도 이어지고 있다. ‘부모 동아리-가족 포럼’도 그중 하나다. 뉴욕타임스가 이 모임 참가자들의 기막힌 사연을 전했다. 어느 아랍인 부부는 이스라엘군이 쏜 총에 어린 딸을 잃었다. 딸의 아버지는 폭탄을 터뜨려 다 끝내려다 마음을 고쳐먹고 대학원에서 홀로코스트와 히브리어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배움 끝에 얻은 깨달음은 이스라엘 군인들이 살인 기계가 아니라 나와 똑같은, 겁먹을 줄도 사과할 줄도 아는 사람이라는 사실이다. 한 이스라엘 여성은 아버지가 하마스 테러범 2명이 휘두른 도끼에 41회 찍혀 숨진 뒤 테러범 집에 불 지르는 상상을 거듭하다 이 모임에 합류했다. “폭력으로 폭력을 끝낼 순 없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라고 했다. 분노를 누르고 화해를 얘기하면 자기편에게서 눈 흘김 당하고 “가만 안 둔다”는 협박도 받는다. 그래도 같이 모이고 양쪽 어린이가 참가하는 캠프를 연다. 그런다고 뭐가 달라질까. “이것 말고 대안이 없다. 이스라엘에도 팔레스타인에도 여기가 내 집이다. 상생하는 법을 알아내지 못하면 이 땅은 우리 아이들의 무덤이 될 것이다.”(모임 참가자들)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 토머스 프리드먼은 이 전쟁을 유대계와 아랍계의 분쟁으로 보는 건 현실을 오독하는 것이라고 한다. 하마스 급습 때 아랍계 자전거 가게 주인은 유대인 어린이들에게 자전거를 무료로 나눠줘 대피를 도왔다. 하마스가 이를 알고 그 가게를 불태우자 이번엔 이스라엘 사람들이 돈을 모아 보은했다. 이스라엘 병원에서 일하는 젊은 의사의 절반은 아랍계인데 유대인과 아랍인 가리지 않고 환자를 본다. 아랍인이 유대인을 하마스로부터 숨겨주고, 그 아랍인은 이스라엘군에 죽을 뻔하다 유대인의 도움으로 살고, 그 유대인은 아랍인 덕에 목숨을 건진 이야기가 끝도 없이 이어진다. 프리드먼은 “이 전쟁은 유대인과 아랍인의 대결이 아니라 빛과 어둠의 싸움”이라는 현지인의 말을 전하며 피아 구분이 어려운 만화경 같은 현실에서 공존의 가능성을 보고 실현 불가능한 꿈을 꾸게 된다고 썼다. ‘하나의 땅, 두 개의 민족’이라는 100년 분쟁을 이어온 이들에게 공존의 해법 찾기는 ‘파도를 마주 보고 수영하기’이고 ‘하루하루 좌절할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다. 그래도 1973년 아랍-이스라엘 간 욤 키푸르 전쟁의 어둠을 뚫고 1978년 캠프 데이비드 평화협정의 새벽이, 1987년 반(反)이스라엘 저항운동인 인티파다 이후 1993년 오슬로 평화협정의 새벽이 밝았다. 1999년 팔레스타인계 평론가 에드워드 사이드와 ‘서동시집 오케스트라’를 창설한 유대계 지휘자 다니엘 바렌보임은 포디엄에 설 수 없는 병중에도 “화나고 절망에 빠질 순 있지만 야만적 폭력에 굴복해 평화를 내주진 말자”고 호소했다. 폭력에 무릎 꿇지 않는 용기 있는 시민들이 내일의 새벽은 또 다른 어둠을 낳을 뿐이라는 패배주의에서 벗어나기를, 불의를 불의로 갚는 피의 보복을 끝내기를, 2차대전 이후 가장 위험한 분쟁의 시기를 살아가는 인류에게 희망을 주기를 멀리서 응원한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요즘 청년들은 연애도 귀찮아한다지만 황혼 연애 열기는 뜨겁다. 65세 이상 인구가 900만 명, 이 중 22%가 혼자 사는데 건강하고 재력 있는 ‘액티브 시니어’들은 사랑에도 적극적이다. 대학 CC(캠퍼스 커플)처럼 복지관에는 BC(복지관 커플)들이 부러움을 사고, 5070 전용 데이팅 앱도 회원 수를 불려가고 있다. 하지만 사랑의 마음을 악용해 돈을 뜯어내는 사기꾼도 덩달아 많아져 문제다. ▷특히 소셜미디어로 ‘연애’하듯 접근해 ‘금융 사기’를 치는 ‘로맨스 스캠’ 피해가 늘고 있다. 최근에는 65세 남성이 ‘호주 출신 46세 여성’과 4개월간 메신저로 밀어를 주고받다 “괜찮은 가상화폐가 있다”는 말에 속아 1억2000만 원을 뜯긴 사건이 화제가 됐다. 공무원으로 은퇴한 60대 남성은 채팅앱으로 만난 여성이 “수술비가 필요한데 해외에 돈이 묶여 있다”고 호소하자 800만 원을 먼저 보내고 노후 자금 5100만 원까지 보내려다 은행 직원이 금융 사기 가능성이 있다며 경찰에 신고한 덕에 추가 피해를 면했다. 올 1∼10월 로맨스 스캠 신고 건수는 111건, 피해액은 48억 원인데 피해자의 상당수가 고령자인 것으로 추정된다. ▷나이 들면 쉽게 속는 이유를 의학계에선 뇌 기능 저하로 설명한다. 경계심이나 진위 구분을 담당하는 뇌 부위가 퇴화해 못 믿을 얼굴을 가려내는 능력이 떨어진다. 사회심리학에서는 돈, 건강, 외로움이 사기꾼들에게 좋은 미끼가 된다고 본다. 평균 수명이 늘어 노후 자금이 부족할까 불안한 마음에 속고, 자산이 넉넉한 사람도 “내가 누군데” 하며 방심하다 속는다. 은퇴하면 대인관계가 좁아지고 외로워져 조금만 친절하고 살갑게 굴어도 마음을 주기 쉽다. ▷해외에서도 그레이 로맨스가 로맨스 사기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 미국은 로맨스 스캠 피해액이 2021년 4억3000만 달러(약 5600억 원)로 2년 전보다 2배로 늘었다. 이에 고령자안전법을 제정해 고령자의 금융 사기 피해가 의심될 때는 금융기관이 본인 동의 없이 금융당국에 보고할 수 있도록 안전장치를 두었다. 일본도 고령자가 고액 출금 시 경찰에 통보하게 하고 고령자의 ATM 인출 한도액을 축소하는 사기 방지 대책을 시행 중이다. ▷로맨스 스캠 보이스 피싱 등 노인 대상 금융 사기 피해 규모가 614억 원으로 전체 피해액 중 37%다(2021년). 큰돈을 거래할 때는 주변에 반드시 물어보는 것이 안전하다. 사기당한 사람들은 민망해서 혼자 속앓이를 하는 경우가 많은데 신고해야 추가 피해를 막는다. 혼자 살거나 병이 있으면 사기당할 확률이 30% 높아진다고 한다. 친지들과 수시로 왕래하고 건강한 생활 습관을 유지해야 감언이설에 은퇴 자금 날리는 피해를 막을 수 있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코로나가 끝나고 해방감에 들떠 있을 때 전문가들은 곧 정신건강의 위기가 온다고 경고했다. 재난이 닥치면 막아내느라 정신없어서, 다 같이 힘들다는 생각으로 버티다 막상 이겨내고 나면 피해를 수습할 일이 암담해서, 나만 뒤처져 있다는 상대적 박탈감에 우울해진다는 경고였다. 특히 사회생활을 시작할 무렵 코로나로 자립의 기회를 놓친 청년들이 취약집단으로 지목됐는데 우려가 현실이 됐다. ▷정부 발표에 따르면 19∼34세 청년 1000만 명 중 은둔형 외톨이, 즉 사회와 단절된 채 방에 갇혀 지내는 고립·은둔 청년이 54만 명으로 5%나 된다. 2019년엔 3%였다. 팬데믹이 고립을 악화시킨 것이다. 대학 진학과 취업에 실패한 청년들은 사람 마주치기 두려워 집 밖을 나가지 않게 되고, 그 상태에 편안함을 느끼다, 갈수록 고통스러우나 제 의지로는 빠져나오기 힘든 지경이 된다. 은둔형 외톨이의 절반이 일상 복귀를 시도하다 고립 상태로 되돌아갔다. ▷은둔형 외톨이는 다차원 빈곤을 겪는다. 직업이 없고 주거 환경이 열악한 경제적 빈곤, 활력과 자존감이 바닥인 심리적 빈곤, 너무 지쳐 아무것도 하기 싫은 의지의 빈곤, 가족도 일주일에 한 번 볼까 말까 한 관계의 빈곤이다. 대부분 시간을 스마트폰 들여다보며 지내는데 소셜미디어 속 남의 화려한 일상을 보며 좌절감을 키운다. 깊은 고립감을 경험한 사람은 자살 시도를 할 가능성이 높다. 정부 조사에선 4명 중 3명이 자살을 생각한 적이 있다고 했다. 일반 청년의 33배다. ▷코로나 이후 청년층의 고립은 세계적인 현상이다. 서구에서는 이를 ‘극단적 사회 탈퇴(extreme social withdrawal)’라고 한다. 특히 일본의 히키코모리와 한국의 은둔형 외톨이 현상이 심각한데 연구자들은 한일 양국의 치열한 경쟁과 높은 기대감을 원인으로 꼽는다. 단일 가치를 추구하는 사회 문화와 학력주의가 저출산 사태와 결합해 청년들에게 중압감을 준다는 진단이다. 요즘 한국 청년들은 자신감이 없고, 완벽주의 성향에 본인을 다그치며, 주위의 기대를 높게 지각하는 성향이 있다고 한다. ▷은둔형 외톨이는 어느 연령대에나 있다. 75세 이상은 10명 중 1명이다. 그럼에도 청년층에 주목하는 이유는 고립된 장년, 고립된 중년, 고립된 노년으로 살아갈 위험이 높아서다. 선제적 대응에 실패한 일본은 80, 90대 부모가 50, 60대 히키코모리 자녀를 부양하는 ‘8050문제’ ‘9060문제’를 안고 있다. 정부는 처음으로 관련 대책을 마련하고 내년엔 1341억 원을 투입하기로 했다. 은둔형 외톨이들이 바라듯 “차근차근 한 걸음씩 나아갈 수 있도록” 곁에서 함께 뛰는 반주형(伴走型) 지원을 지속적으로 해야 한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고위공직 후보자 인사 검증에서 자주 등장하는 논란거리가 건강보험 무임승차 문제다. 퇴직 후 꽤 많은 소득이 있는데도 자녀의 피부양자로 이름을 올리거나, 해외에서 억대 연봉을 받는 자녀나 지방에서 여유 있게 사는 노부모를 피부양자로 등록했다는 식이다. 불법 여부를 떠나 한국의 건보 제도가 피부양자를 지나치게 넓게 인정해 도덕적 해이를 부추기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들이다. ▷현행 건보 제도에서는 어느 한 사람이 직장에 다니면 그 배우자(사실혼 포함)와 아들딸, 부모, 조부모, 외조부모, 장인 장모(또는 시부모), 손주와 증손주, 형제자매까지 피부양자로 이름을 올릴 수 있다. 지난해 말 기준 전체 건보 가입자 5141만 명 중 직장 가입자는 1960만 명, 이에 딸린 피부양자가 1704만 명으로 보험료를 내는 지역 가입자(1477만 명)보다 많다. 3명 중 1명이 돈 한 푼 내지 않고 건보 혜택을 누리고 있는 셈이다. ▷피부양자가 되려면 ‘연 소득 2000만 원 이하’ 같은 소득과 재산 기준을 충족해야 하지만 법망이 성글어 억대 외제차를 몰면서도 건보료 한 푼 안 내는 무임승차자가 3만 명이나 된다. 외국인에게도 같은 혜택을 주고 있어 한국에서 일하는 아들딸, 사위, 형제자매 덕에 아프면 한국에 입국해 바로 피부양자로 등록한 후 수천만 원어치 치료만 받고 나가는 외국인이 많다. 올해 국정감사에서는 43억9000만 원어치 진료를 받은 외국인 피부양자 사례가 공개되기도 했다. ▷이달 중으로 예정된 정부의 건보 개편 방안 발표를 앞두고 건강보험공단이 피부양자 인정 기준 개선 방안을 연구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피부양자를 배우자, 부모, 자녀로 제한하고 향후엔 더 축소해 배우자와 미성년 자녀에게만 자격을 주는 방안을 제안한다. 고령화로 건보 재정이 악화하고 있어 피부양자 무임승차로 새는 재정을 막아야 한다는 취지에서다. 건보 재정은 내년부터 적자로 돌아서 2028년이면 적립금이 바닥나고 2032년이면 누적 적자액이 62조 원에 이를 것으로 전망된다. ▷퇴직을 앞둔 직장인들의 가장 큰 걱정거리 중 하나가 ‘건보료 폭탄’이다. “자식 밑으로 들어가 있는데 금융 소득이 늘어 피부양자 탈락 안내문이 왔다” “연금 수입 늘었다고 피부양 자격 박탈이 말이 되느냐”는 선배 퇴직자들의 경험담이 남 일 같지 않은 것이다. 그렇다고 한국과 일본 정도 외엔 시행하는 나라가 없는 피부양자 제도를 이대로 내버려둘 수는 없다. 1977년 체제 경쟁 시절 북한의 무상의료를 의식해 도입한 건강보험은 세계적으로도 성공적인 사회보험으로 꼽힌다. 이런 제도의 혜택을 미래 세대도 누릴 수 있도록 공정하고 지속 가능한 개선안을 마련해야 한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한국의 출산율은 낮은 것도 문제지만 낮은 상태가 오랫동안 계속되고 있어 더 문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들은 출산율 하락세가 평균 12.9년간 지속되다 반등해 합계출산율 1.6명대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그런데 한국은 1.3명 미만인 초저출산이 20년 넘게 이어지고 있다.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현상이다. 출산율 하락을 막아줄 기대주였던 ‘에코붐 세대’의 출산 붐도 불발될 가능성이 높다. 에코붐 세대(1991∼1996년 출생)는 2차 베이비붐 세대(1960년대 후반∼1970년대 초반 출생)의 자녀 세대로 부모들처럼 출생률이 높았던 연령군이다. 올해 27∼32세가 된 이들이 코로나로 미뤄둔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으면 내년에 출산율이 0.7명으로 바닥을 찍고 2040년엔 1.19명으로 반등할 것이라는 게 정부 추계였다. 하지만 이 세대의 혼인율은 올 1분기 반짝 반등한 뒤론 코로나 시기보다 더 떨어져 역대 최저를 기록했다. 출산율도 4분기엔 0.6명대로 내려갈 전망이다. 초저출산 장기화는 사회 모든 분야에 악영향을 준다. 정부는 출산율 0.98명이 유지될 경우를 가정해 2047년 서울의 종로 서초 송파 등 23개구까지 소멸위험 단계에 진입할 것으로 전망했는데 지역별 소멸 대책을 다시 짜야 할 판이다. 에코붐 세대의 출산 붐에 기댄 연금재정추계도 전면 수정이 불가피하다. 일하는 인구 1명이 65세 이상 1명을 부양해야 하는 시기는 2060년, 경제 역성장 시작 시기는 2050년으로 내다봤는데 지금의 출산율로 봐서는 더 앞당겨질 수 있다. 경제학자 찰스 굿하트는 생산하지 않고 소비하는 ‘인플레이션적’ 은퇴자 수가 소비보다 생산량이 많은 ‘디플레이션적’ 근로자를 넘어서면 이러한 인구구조만으로도 인플레이션은 필연적이라고 했다. 결혼 안 하고, 하더라도 아이를 낳지 않으며, 낳더라도 하나만 낳고 끝내는 저출산 현상의 원인과 대책은 한국은행이 최근 발표한 보고서에 6가지로 요약돼 있다. 청년 고용률, 혼외 출산 비중, 육아휴직 이용 기간, 보육과 아동수당 등 가족 관련 정부 지출, 도시 인구 집중도, 주거비용이 OECD 평균치와 한참 떨어져 있는데 이 차이만 줄이면 출산율이 0.845명 늘어나 1.5명대가 된다는 내용이다. 이 중 출산율에 가장 큰 영향을 주는 변수가 인구 집중도다. 이를 한국의 5분의 1밖에 안 되는 OECD 수준으로 낮추면 출산율이 0.414명 오른다. 실제로 정부가 소득 수준이 비슷한 중앙부처 공무원들을 조사해 보니 인구밀도가 높은 서울에 사는 공무원은 자녀 수가 평균 1.36명인데 쾌적한 세종에 사는 공무원은 1.89명이었다(2021년 조사). 나머지 변수들은 혼외 출산율을 제외하면 수도권 집중도 완화보다 실행이 쉽고 역대 정부의 저출산 대책에 빠짐없이 포함됐던 내용들이다. 그런데 육아휴직 이용 기간이 아직도 OECD 평균의 17% 수준이고, 경제 규모 대비 가족 관련 정부 지출이 OECD의 64%밖에 안된다. 출산율에 좋다는 건 다 해본 것도, 몰라서 못 한 것도 아니다. 기본으로 해야 할 일을 제대로 안 한 결과가 해외에서도 ‘흑사병 수준의 재앙’이라며 놀라는 초저출산 장기화다. OECD 회원국들이 출산율 하락세를 막아낸 비결은 부머들이 절로 아이를 많이 낳아준 덕이 아니라 고용, 돌봄, 교육, 주거 문제 해결 등 공식 같은 정책을 제대로 실행했기 때문이다. 사실 이 정책들은 출산율이 아니어도 정부가 기본적으로 해야 할 일들이다. 그러니 이젠 특단의 대책을 찾지 말자. 해야 할 일과 그 효과까지 숫자로 나와 있다. 제대로 된 실행만 남았다. 저출산은 문제의 원인이 아니라 무능한 정부의 결과물일 뿐이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인류 문명의 진보에는 수학의 힘이 컸다. 산수와 대수학 덕분에 상업이 발달했고, 삼각함수로 선박의 정확한 위치를 측정해 대항해 시대를 열었으며, 미적분으로 우주선의 정확한 궤도를 계산해 냄으로써 태양계 너머로 나아갈 수 있었다. 요즘 대세인 인공지능(AI)은 시작과 끝이 수학이다. ▷AI는 어마어마한 양의 데이터를 ‘학습’해 정답일 확률이 가장 높은 답을 ‘추론’하는데 이 모든 과정에 다양한 수학 개념이 활용된다. 기계학습에 사용되는 텍스트 소리 영상 등 데이터는 컴퓨터가 알아듣도록 ‘벡터’로 표현되고, 이들이 수많은 ‘행렬’ 곱셈을 거치면 최종적으로 확률 함수를 이용해 추론해 낸다. 이러한 학습을 무한대로 반복하며 오차를 최소화하는 과정엔 ‘미분’이 사용된다. 2000년 넘는 수학의 역사가 없었다면 AI도 없었다. ▷AI 경쟁이 치열한 시대에 학생들의 수학 실력이 뒷걸음치고 있다는 국제학업성취도평가(PISA) 결과는 우려스럽다. 지난해 세계 81개국 15세(중3∼고1) 학생들의 수학, 읽기, 과학 분야 성취도를 평가한 결과 한국 학생들의 수학 평균이 527점으로 22년 전보다 20점 떨어졌고 순위는 3위에서 5위로 내려갔다. 여학생은 22년간 7점, 남학생은 29점 하락했다. 특히 다른 나라보다 학생들 간 점수 차가 컸다. 이른바 수학을 포기한 ‘수포자’가 많다는 뜻이다. ▷수학 성적의 하향세는 학습량 감소와 무관하지 않다. 한국 초중고교의 수학 수업시간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평균치보다 크게 모자란다. 중학교 3학년의 경우 연간 수학 시간이 93시간으로 OECD 평균의 76%밖에 안 된다(2019년 기준). AI에 필수적인 ‘행렬’도 너무 어렵다는 지적에 따라 2011년 이후 고교 수학에서 빠졌다가 2025년부터 다시 넣기로 했다. 수포자가 늘어날까 봐 학습량을 줄였는데 수포자는 늘고 상위권 실력까지 떨어졌다. 올해 서울대 기초 수학시험에서는 이공계 신입생 10명 중 4명이 1학년 수업을 따라가지 못하는 수준인 학력 미달 성적을 받았다. ▷요즘 유튜브에는 수학이 싫어 문과를 택했다가 AI를 계기로 뒤늦게 코딩과 함께 행렬 미분 함수 벡터 확률 공부에 빠져든 사람들의 경험담이 올라온다. 이들은 “예전엔 영어를 잘하면 취업에 유리했듯 이제는 수학적 언어가 중요하다”고 한다. 영국이 수학 의무 교육 기한을 16세에서 18세로 늘리기로 한 이유이기도 하다. 국가와 개인의 경쟁력을 위해 수포자만 양산하는 수학 교육을 이대로 둘 수는 없다. 제한된 시간에 정답을 찾아내는 ‘수능 수학’이 아니라 논리적 사고력과 창의력으로 질문하는 힘을 키우는 진짜 수학을 가르치고 배워야 한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코로나 팬데믹이 가고 새로운 팬데믹이 시작됐다. 허위 정보의 대유행에 ‘가스라이팅’ 당할까 걱정하다 이젠 진위 구분이 어려워 ‘진짜’가 뭔지 찾아봐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사전 출판사인 메리엄웹스터가 팬데믹(2020년) 백신(2021년) 가스라이팅(2022년)에 이어 올해의 단어로 ‘진짜’ ‘참된’ ‘진정한’이란 뜻의 ‘어센틱(authentic)’을 선정했다. 인공지능(AI)이 만드는 딥페이크 시대 ‘진짜의 위기’를 반영한 단어다. ▷올해의 단어는 조회수와 검색량으로 선정된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막말하고,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체포당하는 가짜 이미지가 확산될 때마다 ‘authentic’ 검색량이 증가했다. 미 국방부가 화염에 휩싸인 가짜 사진이 ‘속보: 펜타곤 근처에서 폭발’이라는 제목으로 유포됐을 때는 검색량뿐만 아니라 미 국채와 금값이 치솟고 뉴욕 증시가 하락했다. 가짜가 진짜 시장을 움직인 것이다. ▷요즘 전쟁은 가짜정보와의 전쟁이기도 하다. 특히 취재가 통제된 중동전에서 ‘온라인 병사’들의 암약이 활발하다. “이스라엘 총리 병원에 긴급 이송” “하마스가 이스라엘 아기들 참수”라는 속보가 전해졌지만 거짓이었다. 팔레스타인 국기를 든 축구 스타 호날두, 다섯 아이를 업고 안은 팔레스타인 아버지도 AI 합성물이었다. 이스라엘 기관에 따르면 전쟁 관련 소셜미디어 계정 5개 중 1개가 가짜다. ▷“거짓말이 지구 반 바퀴를 도는 동안 진실은 신발을 신고 있다”는 말이 있다(영국 소설가 조너선 스위프트). 실제로 자극적인 정보를 선호하는 소셜미디어의 보상 체계 탓에 가짜의 확산 속도가 훨씬 빠르다. 매사추세츠공대 연구진에 따르면 허위 정보가 트위터 사용자들에게 도달하는 데 걸린 시간이 진짜보다 6배 빨랐다. 트위터를 인수해 회사명을 ‘X’로 바꾼 일론 머스크는 “소셜미디어에선 authentic해야 한다”며 사용자 인증 유료 서비스를 도입했지만 가짜정보 퇴치는 못 하고 ‘authentic’ 조회수만 올려놓았다. ▷거짓말도 인플레 법칙을 따른다. 통용될수록 가치가 떨어지고 진짜가 주목받는다. ‘잔인하도록 진실된’ 영국 왕실 얘기를 담은 해리 왕자의 자서전 ‘스페어’는 출간 즉시 베스트셀러가 됐다. 테일러 스위프트는 가창력과 함께 “살찐 내 모습이 더 좋다”는 진솔함 덕분에 억만장자가 됐다. 65세 여배우가 처지고 주름진 몸으로 나오는 넷플릭스 영화 ‘나이애드의 다섯 번째 파도’가 흥행한 한 해였다. 연출된 이미지 가득한 인스타그램에 질린 청년들이 보정 불가 프랑스 앱 ‘비리얼(Be real)’로 몰리고 있다. 내 눈도 내 귀도 믿을 수 없는 가짜 시대의 역설이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해마다 자동차 등록대수는 늘어도 교통사고 건수는 줄고 있다. 자동차 안전 기술이 좋아지고, 교통안전 시설과 정책이 선진화하며, 국민 안전 의식 수준이 높아진 덕분이다. 그런데 유독 65세 이상 고령자들이 내는 사고는 증가 추세다. 22일 새벽에는 강원 춘천에서 82세 남성이 몰던 차가 파란불에 횡단보도를 건너던 3명을 덮쳐 숨지게 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운전자는 “신호등과 보행자들을 보지 못했다”고 한다. ▷지난해 65세 이상 운전자가 낸 사고는 3만4652건으로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 5년간 전체 교통사고는 9.7% 줄었는데 고령자 사고는 29.7% 급증했다. 교통사고를 가장 많이 내는 연령대는 20세 이하로 면허 소지자 1만 명당 121건이다. 다음이 65세 이상으로 79건. 하지만 교통사고 사망자를 가장 많이 내는 연령대는 65세 이상이다. 고령 운전자가 일으킨 교통사고는 전체 사고의 16%인데 사망 사고는 24%였다(2021년 기준). ▷운전은 확인, 예측, 결정, 실행 과정을 거친다. ‘확인’ 단계에선 시력 청력 등 감각능력, ‘예측’과 ‘결정’엔 주의력과 정보 처리 등 인지능력, ‘실행’엔 운동능력이 필요하다. 이 중 운전에 가장 중요한 시력은 60대가 되면 30대의 80% 수준이 되고, 돌발상황 반응 시간은 1.4초로 젊은 운전자들의 2배로 늘어난다. 교통사고에 영향을 주는 질환은 백내장, 퇴행성 관절염 등 모두 23종인데 70세 전후로 발병률이 증가해 교통사고 위험도도 높아진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한국 고령자 교통사고 사망자 비율이 월등히 높다며 주요 원인으로 허술한 면허 관리를 꼽았다. 현행 면허 갱신 주기는 65∼74세는 5년, 75세 이상은 3년이다. 80세 이상이 되면 교통사고 위험도가 60대의 2배가 되므로 갱신 주기를 단축할 필요가 있다. 영국은 70∼79세는 3년, 80세 이상은 1년이다. 일본은 71세 이상은 3년인데 75세부터는 인지 및 운전 기능 검사를 통과하고 2시간짜리 고령자 강습을 받아야 하며 교통법규 위반 이력이 있으면 실기시험도 봐야 한다. ▷많은 나라가 면허 자진 반납 제도를 운영 중이지만 반납률은 높지 않다. 나이 들수록 건강하고 독립적인 생활을 위해 이동성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한국은 생계 활동을 하는 노년도 많다. OECD는 고령자의 이동권을 제한하면 행복도를 떨어뜨려 교통사고 못지않은 사회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공공의 안전을 위해 고령자를 도로에서 몰아내려 하지만 말고 이들이 안전하게 운전할 수 있도록 관련 시설을 정비하고, 안전장치 장착을 지원하며, 취약지역의 대체 교통수단도 늘려야 한다. 2040년이면 고령 운전면허 소지자가 1300만 명으로 늘어날 전망이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박민 KBS 신임 사장이 첫 공식 행보로 대국민 사과 기자회견을 했다. “공영방송의 핵심 가치인 공정성을 훼손해 국민의 신뢰를 잃은 상황에 정중히 사과한다”며 배석한 간부들과 10초 넘게 고개를 숙였다. 진행자가 “KBS 임원진들의 사과 기자회견은 KBS 역사상 처음인 듯하다”며 의미 부여를 했지만 감동은 없었다. 자기가 한 일에 대한 반성이 아니었다. 박 사장이 “불공정 편파 보도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며 사례로 든 윤지오 출연, 검언유착 오보, 생태탕 집중 보도, 김만배 녹취록 인용 보도 모두 전임 사장 시절 있었던 일이다. 정권이 바뀌면 새 사장이 전임자 시절 과오를 반성하는 건 KBS의 관례인 듯하다. 이명박 정부 출범 후 임명된 이병순 사장은 취임사에서 “KBS는 지난 몇 년간 공정성과 중립성 시비에서 자유롭지 못했다”며 “KBS 제작자와 진행자들은 공영방송의 공정성과 중립성의 중요성을 깊이 가슴에 되새겨야 한다”고 했다. 문재인 정부에서 임명된 양승동 사장은 보수 정부 시절 KBS 방송을 “10년의 실패”로 규정하고 “권력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했다. 좌우 가리지 않고 줄곧 어용 방송을 해왔다는 ‘자백’으로 들린다. 반성 후엔 모두 “새롭게 태어나겠다”고 했지만 사장들 스스로가 거듭나지 못하고 끝이 안 좋았던 전임자들의 전철을 밟았다. 1987년 민주화 성과로 개정된 한국방송공사법에 따라 KBS 이사회가 신설돼 사장의 임명 제청권을 행사하면서 집권당이 사장을 내려보내는 흑역사를 청산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마련됐다. 1988년 취임한 서영훈 사장은 “KBS 최초의 민선 사장”이라고 자부했다. 하지만 KBS의 역대 ‘민선’ 사장 13명 가운데 법정 3년 임기를 채운 사람은 이명박 정부의 김인규 사장과 문 정부의 양 사장 둘뿐이다. 두 사람은 정권이 바뀌기 전 임기가 끝나는 덕을 봤다. 홍두표, 박권상 사장은 연임 후 정권이 교체되자 사퇴했고, 2명은 정권교체 전 전임자의 잔여임기만 마치고 물러났으며, 나머지는 초대 민선 사장을 포함해 대부분 권력과 갈등하다 사퇴하거나 해임됐다. 박민 사장도 문 정부에서 임명된 김의철 사장이 임기를 1년여 남겨두고 대규모 적자와 편향 방송 등을 이유로 해임된 후 임명된 경우다. 사장이 이 지경이니 회사가 거듭날 수 있겠나. KBS는 박민 사장의 표현대로 “미증유의 위기” “절체절명의 생존위기”로 빠져들고 있다. 연간 6000억∼7000억 원의 수신료를 보장받으면서도 시청점유율은 급감 중이고, “뉴스 신뢰도가 지속적으로 떨어지고 예능과 드라마의 경쟁력 또한 저하됐다”는 평가와 함께 2017년과 2020년 정부의 재허가 심사에서 최저 기준에도 못 미치는 점수를 받았다. KBS를 보기 위해 시청자들이 지불할 의사가 있는 최고 금액(Willingness to Pay)은 계속 줄어들어 2019년엔 현행 수신료인 월 2500원도 안 되는 1667원까지 떨어졌고, 올 7월 수신료 분리징수제가 시행되자 수신료 수입이 두 달간 56억9000만 원 줄었다. ‘신뢰의 위기’를 이만큼 명료하게 보여주는 숫자도 없을 것이다. 박민 사장은 “공영방송의 주인인 국민의 회초리를 맞을 각오가 돼 있다”고 했는데 진짜 각오해야 한다. 그는 수신료 분리징수 시행 이후 첫 KBS 수장이다. 이제는 시청자들의 신뢰도가 수신료 수입으로 나타난다. 사장 바뀐 뒤로도 9시 뉴스가 ‘땡윤 뉴스’가 됐을 뿐 무보직 고연봉의 ‘기둥 뒤 직원들’은 그대로라면 수신료 납부 거부 사태가 일어나 사장부터 임기를 채우기 어려울 수 있다. 반대로 “(정치적) 외풍을 막고 파괴적 혁신을 하겠다”는 약속을 지키면 “수신료가 아깝지 않다”는 시청자들의 신뢰가 KBS와 박민 사장을 ‘외풍’에서 지켜줄 것이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한국인만큼 병원에 자주 가는 나라도 드물다. 미국인이 한 해 평균 3.4회, 일본 사람이 11.1회 병원을 찾는 동안 한국인은 15.7회 병원에 간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평균(5.9회)의 2.7배다. 사람들은 건강보험 덕에 진료비 부담이 크지 않아 병원을 자주 찾고, 병원은 의사 수가 적은 대신 박리다매식 3분 진료로 의료 수요를 감당한다. 이 정도면 의료 접근성이 좋다고 해야 할까. ▷의료 접근성을 평가하는 또 다른 지표로 ‘미충족 의료 경험률’이 있다. 최근 1년간 진료가 필요했지만 받지 못한 비율을 뜻하는데 한국의 경우 11.7%라는 분석 결과가 나왔다. 10명 중 1명 이상이 아파도 의사 얼굴을 못 봤다는 뜻이다. 비교 대상이 된 유럽연합(EU) 회원국 33개국 가운데 미충족 의료 경험률이 가장 낮은 오스트리아(0.4%)의 30배, 네덜란드(0.8%)의 15배 수준이다. 한국보다 높은 나라는 세르비아(11.8%), 에스토니아(18.9%), 알바니아(21.5%)뿐이다(정우진 연세대 보건대학원 교수 논문). ▷아파도 병원에 못 간 이유 중 82%는 진료비 부담보다는 ‘돌봄 부족’이나 ‘시간 제약’과 같은 비경제적 요인이었는데 이는 다른 연구에서도 일관되게 확인된 경향이다. 젊은 사람들은 ‘바빠서’ ‘내가 갈 수 있는 시간에 병원이 문을 닫아서’ ‘오래 기다리기 싫어서’ ‘참을 수 있는 정도여서’ 못 가거나 안 간다. 출산한 여성들은 ‘출산 후엔 아픈 게 당연한 줄 알고’ ‘아이를 대신 봐줄 사람이 없어서’ 못 간다. ‘무서워서’ ‘의사가 불친절해서’ 못 가는 사람도 있다. ▷나이가 들수록 미충족 의료 경험률은 올라간다. 병원 갈 일은 많아지는데 소득은 줄어드는 이중적 부담을 안게 되는 것이다. ‘병원이 멀어서’ ‘거동이 불편해서’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서’ 못 가는 경우도 많다. 요즘 대형병원들은 예약부터 진료까지 무인 단말기를 줄줄이 통과해야 해 디지털 장벽도 높다. 배우자가 없거나 자녀 없이 혼자 사는 경우 병원 가기가 더욱 어려워진다. 강원의 미충족 경험률(22.9%)이 전남(4.9%)의 4.7배나 되는 등 지역마다 편차도 크다. ▷불필요한 ‘의료 쇼핑’도 문제지만 병원에 가야 할 사람이 못 가는 건 더 큰 문제다. 진료를 못 받는 대신 술과 담배로 스트레스를 달래거나, 작은 병을 크게 키우거나, 통증과 우울감에 삶의 질이 떨어지기 쉽다. 일과 육아에 바쁜 사람들을 위해 비대면 진료를 활성화하고, 병원 갈 엄두를 못 내는 고령자와 의료취약계층을 위해 돌봄과 의료 체계를 통합해야 한다. 누구나 아프면 언제든 진료를 받을 수 있어야 성공한 의료 보장 제도라 할 수 있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2006년 이후 17년 만에 의대를 증원한다는 소식에 여기저기서 의대를 신설해 달라는 요구가 빗발치고 있다. 정부가 기존의 소규모 의대를 증원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는데도 의대 설립을 요구하는 법안이 16개로 늘어났다.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은 지역구에 의대를 유치하려고 머리까지 밀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의대 설립은 공항 신설보다 더 신중해야 하는 일이다. 한국은 의사 숫자는 적어도 의대는 많다. 인구와 국토 면적을 감안하면 세계 최고 수준이다. 세계의학교육연맹은 효율적인 운영을 위한 적정 의대 수로 인구 200만∼250만 명당 1개 의대를 권고한다. 이 국제 기준에 따르면 한국의 적정 의대 수는 21∼26개인데 지금은 40개, 한의대를 포함하면 52개다. 의대 1개당 인구가 100만∼130만 명이다. 미국은 의대가 198개로 1개당 167만 명, 일본은 81개로 156만 명이다. 기대수명과 회피가능사망률을 포함해 보건의료 지표가 우리보다 나은 일본을 기준으로 하면 한국의 의대는 33개면 충분하다는 계산이 나온다. 의대가 너무 많다 보니 의대 정원은 너무 적어서 또 문제다. 적정 의대 입학정원은 80∼120명으로 다른 학문 분야보다 많은 편이다. 기초와 임상을 포함해 가르치는 과목이 많아 전임교원만 최소 110명이 필요하고 수련을 위해 부속병원도 있어야 한다. 미국 의대는 평균 입학정원이 153명, 일본은 116명이지만 한국은 77명밖에 안 된다. 박정희 전두환 정부(각각 11개)와 김영삼 정부(9개)가 대대적으로 의대를 신설했는데 1985년 이후 13년간 신설된 18개 의대가 한결같이 입학정원이 50명 미만인 미니대학이다. 교육적 고려보다 이곳저곳에 고루 선심 쓴 결과라고 볼 수밖에 없다. 이무상 전 한국의학교육평가원장은 “영세한 의대가 많다는 건 아주 비싼 비용으로 의사를 양성하거나, 부실한 교육을 하고 있다는 뜻”이라고 했다. 고비용 구조를 감당하기 위해 부속병원을 임상 실습보다는 돈벌이 수단으로 운영하고, 이만한 형편도 안 되는 의대는 정상적인 교육은 포기한 채 고시학원처럼 의사 면허시험 준비만 시킨다는 것이다. 관동의대는 부속병원도 없이 개교해 학생들을 이 병원 저 병원 떠돌게 하다가 다른 학원에 인수됐고, 서남의대는 설립자의 비리 문제까지 겹쳐 결국 폐교됐다. 무리한 의대 신설로 정치인들만 재미 보고 부실 교육으로 의대생들과 의료 수요자인 국민들만 피해를 본 셈이다. 국회예산정책처가 의대 신설법안에 따라 의대 설치와 부속병원 설립에 드는 비용을 추산한 결과 8년간 지역에 따라 768억∼3666억 원이라는 수치가 나왔다. 국립 의대를 신설할 경우 교직원들 정년까지 월급을 감당하려면 그 이상의 세금 부담이 생겨 ‘혈세 의대’가 되기 쉽다. 설사 돈이 있어도 가르칠 교수가 없는 상황이다. 있던 교수들은 강의에 연구에 환자 진료까지 너무 힘들다며 나가서 개업하고, 젊은 의사들은 워라밸 찾아 개원하지 대학에 남으려 하지 않는다. 2000년대 초반엔 의사가 과다 배출되고 있다며 2006년 3058명이 될 때까지 줄였다. 그런데 10년이 지난 2016년부터 의사가 부족하다는 얘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이번에 의대 정원을 늘려도 10년 후엔 다시 줄여야 하는 상황이 올 수 있다. 가뜩이나 의대가 너무 많아서 문제인데 더 늘려 놓으면 나중에 정원을 줄이기도 힘들어진다. 의대 증원은 제대로 된 의사를 키워낼 수 있는지 교육 여건을 평가해 기존 의대 정원을 늘리는 쪽으로 가는 게 맞다. 공항은 고추라도 널 수 있지만 의대는 사람 생명이 달린 문제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5년 전 가을 일본 오사카는 들떠 있었다. 2025년 세계박람회(엑스포) 개최지로 오사카가 결정됐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새벽 시간임에도 시민들이 거리로 나와 “해냈다”며 만세를 불렀다. 전후 일본의 부흥을 만방에 알렸던 1970년 오사카 엑스포의 영광을 재현하리라 기대했을 것이다. 하지만 엑스포 개최를 1년 6개월 남겨두고 특파원이 전하는 현지 분위기는 개최지 선정 때와는 다르다. ▷2025년 오사카·간사이 엑스포 개최 지역은 인공섬 유메시마다. 특파원들이 헬기를 타고 둘러본 유메시마는 ‘꿈의 섬’이란 뜻과 달리 아직 허허벌판이다. 엑스포 상징물은 지름 615m의 세계 최대 목조 건축물이 될 ‘링’인데 둥그런 윤곽을 드러냈을 뿐이다. 링 안쪽엔 ‘엑스포의 꽃’인 해외 각국의 전시장이 들어설 예정이나 텅 비어 있다. 현지 건설업체들이 원자재와 인건비가 급등했다며 건설 수주를 꺼린다. 엑스포 현장 건설비는 당초 예상의 2배인 2350억 엔(약 2조2920억 원)으로 불어났다. ▷오사카 현지에서는 지난해 초부터 “행사 개최 전 전시관 완공이 어려울 수 있다”고 호소했지만 중앙정부는 올여름에야 건설업체와 참가국들에 협조를 요청하는 등 느리게 움직였다. 이대로 가면 2820만 명이 방문해 18조 원의 경제효과를 내리라는 기대와 달리 역대 올림픽 중 가장 많이 쓰고 최악의 적자를 본 2021년 도쿄 올림픽처럼 되는 것 아니냐는 비관론까지 나온다. 코로나로 연기돼 무관중으로 치러진 도쿄 올림픽은 계획했던 예산의 2배인 13조5000억 원이 들어 최소 7조 원의 적자를 낸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오사카 엑스포는 올림픽과는 다를 것이라는 낙관론도 여전하다. 엑스포 개최 기간은 6개월로 3주간 열리는 올림픽보다 길어 훨씬 많은 방문객이 찾는다. 가장 성공한 엑스포로 꼽히는 2010 상하이 엑스포는 7500만 명이 방문해 직접적 경제효과만 베이징 올림픽의 3.5배인 13조 원을 거두어 중국 국내총생산(GDP)이 2%포인트 높아졌다고 한다. 엑스포 이후 코로나 이전까지 연간 상하이 방문객은 엑스포 전보다 배로 늘어났고 외국인 투자도 15% 증가했다. ▷상하이 엑스포는 지역 행사가 아닌 국가 프로젝트였다. 중국 정부는 상하이 엑스포를 통해 중국 전체의 경제 성장을 이끌겠다는 전략을 세우고 개최지 선정 후 7년간 인프라에 집중 투자하며 전력을 쏟았다. 공교롭게도 2030 엑스포 유치에 도전한 부산은 상하이의 자매 도시다. 부산 엑스포를 침체 일로의 한국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는 기회로 만들려면 ‘한국 엑스포’인 듯 온 국민이 마음을 모아야 할 것이다. 전후 폐허 속에서 첨단 도시로 성장한 부산이 엑스포를 개최해 평화 속에서 인류 번영을 이끄는 기술의 경연장이 되길 응원한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올해 노벨 생리의학상은 mRNA(메신저 리보핵산) 백신 개발에 기여한 과학자들이 받는다는 소식을 들으며 의과학의 힘을 절감한다. 수상자인 커리코 커털린 독일 바이오엔테크 수석부사장과 드루 와이스먼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의대 교수는 mRNA 기술로 코로나 위기에서 인류를 구해내고 새로운 의료 시장까지 개척했다. 바이오엔테크와 화이자 모더나가 코로나 백신으로 이미 떼돈을 벌었는데 이제는 이 기술을 활용해 암 백신까지 개발하고 있다. 세계적인 의학 연구와 상용화는 의사들이 주도한다. 이른바 의과학자들이다. 노벨상 첫 수상자가 나온 1901년부터 올해까지 생리의학상 수상자 227명 가운데 올해 수상자인 와이스먼 교수를 포함해 절반이 넘는 119명이 의사 출신이다. 글로벌 10대 바이오기업 CTO(최고기술책임자)의 70%가 의과학자라고 한다. 한국은 상위 1%의 수재들이 의사가 되지만 의과학계에선 존재감이 없다. 당장 돈이 되고 성과를 낼 수 있는 임상의학만 하려 들기 때문이다. 보건복지부 추산에 따르면 국내 의과학자는 1300명으로 전체 활동 의사의 1.2% 수준이다. 미국에선 매년 의대 졸업생의 3.7%인 1700명이 의과학자의 길을 가는데 국내 40개 의대에서 같은 진로를 택하는 이는 30명에 불과하다. 학교당 1명도 안 되는 숫자다. 절대 숫자가 적으니 연구 성과가 초라하다. 한국연구재단은 2019년 노벨상에 근접한 국내 과학자 17명을 선정한 적이 있다. 생리의학 분야 학자로는 5명을 꼽았는데 이 중 의사는 방영주 서울대병원 혈액종양내과 교수가 유일했다. 2010∼2020년 주요국의 피인용 상위 1% 논문의 국가별 점유율을 집계한 결과 임상의학은 17위로 전국의 의대 정원 다 채우고 남은 학생들이 간다는 재료과학(3위), 화학(6위), 공학(12위)보다 순위가 낮았다. 미국 비영리 학술사이트 리서치닷컴이 전 세계 의과학자들의 연구 영향력과 수상 경력 등을 지수화한 ‘2023 최고의 의과학자’ 순위는 충격적이다. 국내 1위는 앞서 언급한 방 교수였는데 세계 순위는 3315위다. 일본의 1위는 면역학의 석학인 아키라 시즈오 오사카대 교수로 세계 순위는 7위다. 한국의 1위 학자보다 앞선 일본 학자가 63명이나 된다. 반도체 시장(4400억 달러·약 600조 원)의 4배 규모인 세계 바이오헬스 시장(1조7600억 달러)에서 한국 점유율이 2%밖에 안 되는 데는 이런 사정이 있는 것이다(2020년 기준). 우리도 임상의학 기초의학 이학 공학을 아우르는 의과학자를 매년 150명은 키워내야 한다는 얘기가 몇 년 전부터 나왔다. 그런데 의료계는 연구 중심 의대를 선정해 밀어 달라고 하고, KAIST 등은 새로운 의전원을 만들겠다고 하면서 논의가 멈춰 서 있는 상태다. 의전원을 설립하려면 의대 정원을 늘려야 해 의료계 반발이 더욱 크다. 의대는 임상경험이 풍부한 대신 시야가 좁고, KAIST는 새로운 접근이 가능하나 임상경험이 없다. 어느 쪽이 주도하든 의학과 공학을 융합해야 새로운 활로가 생긴다. 보건복지부와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이제는 결론을 내줘야 한다. 의과학의 길로 접어들었다가 임상 쪽으로 이탈하지 않도록 돈 걱정 없이 연구에 매진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은 더 어렵고 더 중요한 일이다. 박세리 키즈, 김연아 키즈에 이어 박태환 키즈들이 한국 스포츠의 새 기록을 쓰는 모습을 보며 롤모델의 중요성을 깨닫는다. 롤모델을 꼭 국내에서만 찾아야 할까. mRNA 연구로 백신과 치료제의 패러다임을 바꿔놓은 올해 노벨 의학상 수상자를 좇아 소수의 병을 고치기보다 인류의 건강을 지키고 바이오산업계의 삼성이 되겠다는 큰 뜻을 품은 젊은이들이 한국 의과학의 황금시대를 열어가길 기대한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폭행이나 협박을 동원한 강제추행죄는 세 차례의 전환점이 되는 대법원 판례를 통해 처벌 범위를 넓혀왔다. ‘선 폭행 후 추행’이 아니라 폭행 자체가 추행이 되는 ‘기습추행’을 인정한 판례, 성욕을 채우려는 동기가 없어도 추행이 성립한다는 판례, 그리고 흉기로 위협하며 자위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등 신체 접촉 없이도 강제추행이 가능하다는 판례다. 대법원이 21일 강제추행죄의 인정 범위를 확대하는 또 한 차례의 전환점이 될 판결을 내렸다.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강제추행죄로 기소된 A 씨에게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깨고 유죄 취지로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다. A 씨는 현역 군인이던 2014년 사촌 여동생 B 양을 침대에 쓰러뜨리고 신체를 만진 혐의 등으로 기소됐다. 사건의 쟁점은 폭행이나 협박이 있었느냐는 것. 군사법원에서 열린 1심에선 징역 3년을 선고했지만 2심 재판부는 폭력의 정도가 저항을 어렵게 할 수준이 아니라며 친족관계에 의한 강제추행을 무죄로 판단했다. B 양이 저항하지 않았다는 점이 근거가 됐다. ▷하지만 대법원은 “강제추행에서 폭행 또는 협박에 의해 피해자의 항거가 곤란할 정도일 것을 요구하는 종례의 판례 법리를 폐기한다”며 “불법한 유형력을 행사(폭행)하거나 공포심을 일으킬 정도의 해악을 고지(협박)하는 경우에도 강제추행죄가 성립한다”고 밝혔다. 강제추행죄는 성적 자기결정권 보호가 목적이므로 원치 않는 성적 접촉을 당했다면 폭행·협박이 반드시 항거 곤란 수준일 필요는 없고, 피해자에게 저항을 요구하는 것은 형평과 정의에 맞지 않는다는 논리다. ▷이번에 대법원이 폐기한 ‘항거 곤란’이라는 법리가 등장했던 1983년은 폭행과 협박이 선행되지 않아도 강제추행이 성립한다는 전향적인 결정이 내려진 해이기도 하다. 당시 대법원은 피해자를 힘껏 껴안고 강제로 키스한 사건에서 ‘추행 그 자체로도 폭행이 될 수 있다’며 유죄를 선고했다. 이른바 기습추행의 경우 폭행의 정도는 상대방 의사에 반하는 정도이면 충분하다는 것이다. 이후 직장 상사가 여직원 어깨를 주무르고, 찜질방 수면실에서 자는 사람을 만지고, 남의 옷 위로 엉덩이를 만지는 행위는 모두 기습추행으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일각에서는 강제추행에서 ‘강제’의 기준을 완화하면 단순추행이나 비동의 추행과 무슨 차이가 있느냐고 묻는다. 죄형법정주의 원칙에 따라 피고인에게 불리한 방향으로 법 규정을 확장 또는 유추 해석하는 것을 금지하는 대법원 판례와 맞지 않는다는 지적도 나온다. 법의 해석은 시대의 변화에 따라 바뀌기 마련이다. 이번 대법원 판결이 더 안전하고 건강한 인간관계를 만들어가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코로나가 한창일 때는 코로나로 고생하는 사람은 많아도 독감 유행은 없었다. 코로나 첫해의 경우 감기 환자는 전년도의 절반으로, 독감 환자는 2%로 뚝 떨어졌다. 코로나 무서워 마스크 쓰고 손 자주 씻은 결과 예방 효과를 본 것이다. 독감 백신 업체들이 재고가 쌓여 경영난을 호소하던 시절이다. 코로나 유행이 끝나자 이번에는 1년 내내 독감이 떨어지지 않는 기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대개 독감 유행주의보는 늦가을에 발령돼 이듬해 5월이면 해제된다. 그런데 이례적인 여름 독감으로 지난해 9월 발령된 주의보가 해제되지 않은 상태에서 질병관리청이 15일부로 새로운 주의보를 내렸다. 1년 넘게 주의보가 이어진 건 처음이다. 코로나 거리 두기로 호흡기 감염이 줄어들자 감염으로 얻는 자연 면역력까지 약해져 계절성 독감이 사계절 독감이 됐다. 코로나 3년간 쌓인 ‘면역 빚(immune debt)’이 무섭다. ▷감기 증세가 오면 이게 코로나인지 독감인지 헷갈린다. 코로나와 독감의 가장 큰 차이는 발열이다. 코로나는 열부터 나고 기침 인후통 근육통 구토와 설사가 뒤따른다. 독감은 기침과 근육통이 몸살처럼 나타나다 열이 나기 시작한다. 요즘 독감에 걸리면 코로나보다 더 아프고 오래간다는 이들이 많다. A형 바이러스에 감염됐다가 B형 바이러스에 또 감염되는 경우로 보인다. 올겨울엔 코로나, 독감, RSV(호흡기세포융합바이러스)까지 동시에 유행하는 ‘트리플데믹’이 닥칠 수 있다고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CDC)가 전망했다. ▷RSV는 대표적인 감기 바이러스다. 콧물 발열 기침 인후통 등 증상은 일반 감기와 비슷하지만 하부 호흡기 쪽으로 들어오기 때문에 영유아나 고령자들의 경우 폐렴으로 악화될 수 있다. 대개는 대증요법으로 치료하는데 최근 미국에서는 세계 최초로 RSV 백신이 개발돼 식품의약국(FDA)의 사용 승인을 받았다. 미국 전문가 집단에서는 코로나, 독감, RSV 세 가지 백신을 동시에 맞아도 되는지에 관한 논의가 한창이다. 국내 전문가들은 RSV의 낮은 치명률을 감안하면 아직 데이터가 충분히 쌓이지 않은 새로운 백신까지 맞을 필요는 없다고 본다. ▷트리플데믹이 닥쳐도 크게 걱정할 일은 아니다. 독감은 백신이 있고 치료제인 타미플루도 1000만 명분 넘게 비축돼 있다. 코로나 위험도는 이미 독감 수준으로 낮아졌다. 코로나 이전 11년간 발생한 독감 환자 수는 한 해 21만∼303만 명으로 변동이 크다. 전체 환자의 65%는 20세 미만이지만 사망자의 80%는 60세 이상이다. 나이 들면 면역력도 늙는다. 고령자들은 독감과 코로나 백신을 꼭 맞는 것이 좋다. 두 백신은 동시에 맞아도 된다는 것이 국내외 전문가들의 일치된 의견이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교권 회복 대책을 고민 중인 이주호 교육부 장관이 교원평가 폐지 카드를 꺼냈다. 교권을 위해서라면 교원평가 유예나 폐지까지 검토하겠다는 것이다. 전국초등교사노조는 폐지를 요구하고 있다. 15일 예정된 장관과 교사들 간 대화에서 어떻게 방향이 잡힐지 모르지만 교원평가를 폐지하자는 건 너무 나간 얘기다. 초중고교 교사들은 두 가지 평가를 받는다. 하나는 학교에서 하는 업적평가로 이에 따라 승진이 결정된다. 다른 하나는 학생과 학부모가 하는 교원능력개발평가, 즉 이번에 폐지 얘기가 나오는 교원평가다. 교원평가는 공교육 위기감이 고조되던 김대중 정부 시절 ‘자질 부족 교사들로부터 학생 권익을 보호하고 교사 전문성을 향상시키려면 평가를 강화해야 한다’는 OECD 평가단의 권고로 추진하기 시작해 노무현 정부의 시범 운영을 거쳐 이명박 정부 시기인 2010년 전면 시행했다. 교사의 수업과 학생 지도 역량을 5점 척도와 서술형으로 평가하고 평가 결과 최상위권은 1년간 특별연수 인센티브를, 2.5점 미만이면 최소 60시간 최장 6개월간 ‘능력향상연수’라는 페널티를 받는다. 교원단체는 “전문성 없는 평가 결과를 신뢰할 수 없다” “교원평가는 교권 추락의 원인과 맞닿아 있다”고 주장한다. 서술형 평가란에 입에 담지 못할 욕설을 써내는 경우가 있어 문제지만 제도 자체를 교권 하락의 원인으로 몰아가는 건 무리가 있다. 교원평가가 제대로 이뤄지던 시기의 연구에 따르면 낙제점을 받아 페널티 연수를 받은 교사의 95%는 다음번 평가에서 보통 이상의 점수를 받았다. 연수가 효과적이어서가 아니라 학생들 보기 부끄러워 분발했기 때문이다. 교사가 학생의 관점에서 자신을 돌아보고 부족한 점을 개선해 가며 성장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교사 권위가 추락할까 올라갈까. 전교조 출신인 김용서 교사노조위원장은 올 2월 언론 인터뷰에서 “전교조 조합원이 제일 많이 줄었던 두 사건 중 하나가 교원평가 도입에 반대 투쟁을 하던 때”라고 했다. “학부모나 일반 국민이 ‘교사들이 평가도 안 받는다’고 인식하면서 사회적으로 고립되고 노조 입지가 약화됐다”는 것이다. 교원평가는 폐지 운운하는 게 무의미할 정도로 유명무실화한 상태다. 문재인 정부가 코로나를 핑계로 2020년 평가를 건너뛰었고, 2021년부터는 평가를 축소하고 평가 결과 활용법도 시도교육청에 떠넘겨 이제는 페널티 연수를 받는 사람이 없다고 한다. 교사 권위를 세우려면 교원평가를 폐지할 게 아니라 제대로 평가하고, 연수 프로그램 질도 높이고, 반복해서 낙제점을 받는 교사는 걸러내야 한다. 사실 교사의 성과를 가늠하는 핵심 지표는 학생의 학업 성취도다. 학생이 교사를 평가하는 제도를 두지 않는 나라에서도 교사의 책무성을 담보하기 위해 학교별 학업 성취도와 입시 성적은 공개한다. 우리만 좌파 교육감들이 장기 집권하면서 시험을 하나둘 없앴고 그 결과 기초학력만 떨어진 게 아니라 교사의 권위도 함께 추락했다. 학생의 학력이라는 최소한의 정보도 제공하지 않는 교사와 학교를 누가 신뢰하겠나. 지금은 온통 갑질하는 학부모 얘기뿐이지만 중요한 교육 정책 결정 과정에서 학부모는 소외돼 왔다. 교원평가에 대해 학부모들은 “교사들의 수업과 학급 운영에 관해 진솔하게 얘기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라며 88%가 찬성이다. 왜 10년 넘게 운영해 온 제도 폐지를 검토하면서 교사들하고만 얘기하고 학부모 의견은 듣지 않나. 학부모들이 공감하지 않는 정책으로 교사들의 권위를 세우기는 어렵다. 교사 없인 학교도 교육도 없듯 학생과 학부모 없이는 학교도 교육도 있을 수 없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발암물질의 피해를 입증하기는 어렵다. 급성 독성물질과 달리 장기간 지속적으로 노출돼야 건강에 문제가 생긴다. 모든 사람에게 예외 없이 같은 증상이 나타나는 것도 아니다. 국민건강보험공단이 담배 회사를 상대로 낸 1심 소송에서 패소한 원인도 흡연과 암 발병 간 인과성을 인정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부가 가습기 살균제의 폐암 유발 가능성을 처음으로 인정했다. 2011년 가습기 살균제 참사가 발생한 지 12년 만이다. ▷환경부는 5일 가습기 살균제 피해구제위원회를 열어 가습기 살균제 성분 물질 중 하나인 PHMG에 노출된 후 폐암으로 숨진 1명의 피해를 인정하기로 의결했다. 피해자는 30대 남성으로 비흡연자였다. 이번 결정은 고려대 안산병원 가습기 살균제 보건센터의 독성실험 결과를 근거로 내려졌는데, PHMG에 쥐의 기도를 노출시켰더니 40주 지나자 폐에 악성 종양이 생기기 시작했다는 내용이다. 피해자 유족은 약 1억1700만 원의 특별유족조위금과 장의비를 받는다. 가습기 살균제로 인한 폐암 진단자는 206명이다. ▷가습기 살균제 피해를 인정받는 질환은 몇 가지 안 된다. 처음엔 폐섬유증만 인정받았고, 천식과 태아 피해는 참사 발생 6년 후인 2017년에야 피해 질환에 포함됐다. 정부는 2020년 피해 질환을 특정하지 않고 포괄적으로 인정하겠다고 했지만 인과성 입증의 장벽이 높다. 독성물질의 인체 시험은 금지돼 있어 동물 실험으로 인과성을 입증해야 한다. 하지만 사람과 동물은 생리 구조가 달라 동물에게 나타나지 않는 증상이 사람에게 나타나는 경우가 너무도 많다. ▷이번 결정으로 폐암 진단자 전원이 구제받는 것은 아니다. 다른 요인으로 발병했을 수도 있으니 개별적으로 구제 여부를 검토한다는 것이다. 고령자와 흡연자의 경우 구제가 어려울 수 있다고 한다. 전문가들은 피해자 개개인의 인과성을 따지기보다 피해자 전체를 정밀 진단해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증상에 대해서는 인과관계를 인정하고 보상했어야 한다고 아쉬워한다. 중증 피해자들은 이미 사망한 상태다. 신고된 사망자만 1700명이 넘는다. ▷사회적참사특별조사위원회에 따르면 신고되지 않은 사례까지 포함해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는 95만 명, 사망자는 2만 명이 넘는다. 업체는 치명적인 제품을 인체 무해성을 강조하며 내놓았고, 정부는 ‘세계 최초의 창의적 제품’이라며 KC마크까지 달아줬다. 국민을 보호하기는커녕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환경 참사의 원인을 제공한 정부가 가해 기업들에서 거둬들여 조성한 피해구제기금을 나눠주는 일에도 속도를 못 내고 있다. 참사 12년이 지났지만 피해 구제 신청자는 7862명, 이 중 2686명이 아직 구제를 받지 못했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서울역 고가를 재활용한 공중 산책로 ‘서울로 7017’이 서울역 일대를 국가상징공간으로 조성하는 과정에서 철거될 수 있다는 얘기가 나온다. 새로운 랜드마크가 되리라던 기대와 달리 찾는 사람도 없고 막대한 관리비로 세금만 축내고 있다는 것이다. 이 산책로는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시정 철학인 ‘보행 친화적 도시 재생’을 상징하는 프로젝트다. 철거가 최선인지와는 별개로 647억 원을 들인 역대 시장의 대표 사업이 완공된 지 6년 만에 애물단지가 된 내막은 따져볼 필요가 있다. 서울역 고가도로는 ‘불도저 시장’ 김현옥이 주도하고 건축가 김수근이 구상한 ‘서울 입체도시화 프로젝트’로 1970년 완공돼 2006년 안전진단에서 철거 대상 판정을 받았다. 전임 시장들처럼 박 전 시장도 “빠른 시간 안에 철거”하자는 쪽이었으나 2014년 재선에 도전하면서 돌연 입장을 바꿔 미국 뉴욕의 명물인 ‘하이라인’처럼 재활용하겠다고 공약한 뒤 당선 직후 하이라인까지 날아가 사업 개시를 선언했다. “대권까지 내다보려면 청계천 복원 같은 한 방이 필요했을 것”이라는 해석이 나왔다. 시장의 일방적인 사업 추진과 정치적 야심에 관한 의혹에도 반대 여론이 사납지 않았던 건 하이라인의 이름값 덕분이다. 하이라인은 맨해튼을 관통해 지상 9m 높이에 건설된 열차 선로를 공원으로 개조한 프로젝트다. 하이라인이 뉴욕의 관광명소로 뜨자 세계 180여 곳에서 유행처럼 이를 벤치마킹하기 시작했는데 서울시는 이름부터 ‘서울역 하이라인’으로 정하고 노골적인 베끼기에 착수했다. 그러나 이미지만 그럴듯하게 모방해서는 성공하기 어려운 법이다. 하이라인은 폐철로가 보존할 만한 산업유산인지, 보존한다면 어떻게 재활용할지 치열한 공론화 과정부터 거쳤지만 서울로는 이 과정을 생략한 채 결과만 따라 하느라 맥락의 차이를 놓쳐버렸다. 하이라인은 도심 빌딩 사이를 관통한다. 고층 건물이 그늘을 만들어주고 산책로를 걷다 연결된 주거지나 건물로 내려갈 수 있으니 이용자가 많다. 반면 서울역 고가는 동서를 연결하는 1024m의 거대한 육교다. 일단 올라서면 반대쪽으로 내려가거나 오던 길로 되돌아가는 수밖에 없다. 겨울엔 추워서 못 가고, 여름엔 그늘 하나 없이 콘크리트 복사열까지 더해지니 더워서 못 다닌다. 하이라인은 2009년 1차 완공까지 10년 걸렸는데 서울로 7017은 3년도 안 걸렸다. 신축보다 어려운 게 재생임에도 공개 현상공모로 널리 아이디어를 구하는 대신 국내외 작가 7명을 지명해 졸속으로 진행했다. 콘크리트 화분 안에 수목을 심은 뒤 퇴계로에서 중림동까지 가나다순으로 배열한 최종 결과물에 사람들은 ‘세상에서 가장 긴 화분’이라며 황당해한다. 네덜란드 출신인 작가의 변이 이렇다. “박 시장이 오래 기다릴 수 없다고 여러 차례 당부해 10년 걸릴 프로젝트를 서둘러 하느라 놓친 부분이 꽤 있다.” 도시 개발에서 성공한 해외 사례를 벤치마킹하는 행위를 학계에서는 정책 이동(policy mobility)이라고 한다. 정책 이동의 전제는 완전한 모방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하이라인 설계자도 “하이라인을 성공시킨 맨해튼이라는 맥락은 쉽게 복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모든 도시는 자신의 장점을 인식하고 독창적 해답을 찾아야 한다”고 했다. ‘옛것이면 가치 불문하고 다시 살려 써야 한다는 강박증적 재생 이데올로기’(배정한 서울대 교수)에 빠져 쫓기듯 겉만 엉성하게 베낀 결과 스케일만 다를 뿐 ‘물 새는 거북선’과 ‘밥 못 짓는 거대 가마솥’ 같은 애물단지가 돼 버렸다. 해외 유명 랜드마크를 돌면서 비슷한 사업을 발표하느라 바쁜 오세훈 시장이 반면교사 삼을 만한 도시 재개발의 실패 사례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