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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2월 26일 인천국제공항에선 일본 도쿠시마(徳島)행 여객기가 이륙했다. 주 3회 운항으로 국내 항공사가 도쿠시마행 정기 항공편을 운영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도쿠시마는 일본 열도를 구성하는 4개의 섬 중 가장 작은 시코쿠섬 동부에 있다. 일본에서는 수십 종에 달하는 ‘도쿠시마 라멘’의 본산지로 잘 알려졌지만, 국내에선 아직 낯선 곳이다. 도쿠시마현은 인구 69만 명, 도쿠시마시는 인구 25만 명에 그치는 ‘소도시 여행지’다. 올해 1∼9월 해외 관광객 1408만 명이 입국하며 올해 사상 처음으로 2000만 명을 넘을 수도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하지만 대부분 서울 등 수도권을 중심으로 방문하고 있다. 지난해 해외 관광객 73%는 인천공항과 김포공항으로 들어왔다. 부산, 제주 등을 통해 들어온 입국자는 15.1%에 그쳤다. 해외 관광객이 지속해서 증가하려면 더 많은 지역을 찾고 숨은 지역 콘텐츠를 다양하게 소개할 수 있어야 한다. 공항은 단순한 인프라가 아니라 지역을 세계와 연결하는 일종의 창구다. 지방공항을 통해서 입국하면 상대적으로 해당 지역에 일정 기간 체류할 가능성이 높다. 지방에 새로 공항을 짓자는 게 아니다. 이미 막대한 재원을 들여 지었지만 제대로 쓰이지 않는 여러 지방공항을 제대로 활용해야 한다는 뜻이다. 지난해 전국 14개 지방공항 중 9개 공항이 적자였다. 한국 항공사들은 일본 26개 도시를 운항한다. 반면 일본 항공사들은 인천, 김포를 잇는 노선만 두고 있다. 일본 항공사가 국내 지방공항에 운영하는 노선은 하나도 없다. 일본과 달리 대만 항공사는 인천, 김포뿐만 아니라 부산, 제주, 대구에도 취항한다. 지난해 부산을 통해 들어온 대만인은 36만 명으로 체급이 상대적으로 큰 일본(29만 명), 중국(10만 명)보다 많았다. 지방에 취항하는 외국 항공사가 많을수록 지방을 찾는 해외 관광객도 늘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일단 외국계 항공사들이 국내 지방공항에 취항할 수 있도록 파격적인 유인책을 마련해야 한다. 신규 취항하거나 증편할 경우 지방자치단체 지원으로 일정 기간 공항시설 사용료를 감면해 줄 수 있다. 일본 지자체는 직항 노선을 유치하기 위해 공항 이착륙료를 최대 100% 지원한다. 시설을 제대로 갖춘다면 국제선 환승 수요도 흡수할 수 있다. 일본 지방공항 국제선은 대체로 한국, 대만, 홍콩 정도인데 국내 지방공항이 노력한다면 일본에서 중국, 동남아시아로 향하는 환승 수요를 확보할 수 있다. 일본에 가는 중국 단체관광객에겐 환승할 때 무비자로 일정 기간 체류할 수 있는 ‘환승관광 무비자 입국제도’를 적용할 수도 있다. 다만 체류 시간이 길지 않아 케이팝 콘서트 등 관광 프로그램을 꼼꼼히 맞물려야 한다. 한국은 올해 1∼9월 관광수지가 6억8140만 달러(약 1조 원) 적자다. 전국에 8개 국제공항이 건설돼 있지만 외국계 항공사 유치나 노선 확보에 사실상 손을 놓고 있다. 전남 보성 녹차밭, 신안 증도 태평염전 산책로 등 외국인에게 덜 알려진 숨은 명소들은 전국에 널렸다. 해외 관광객이 더 들어와 골고루 퍼질 수 있도록 관문부터 제대로 살려야 할 때다.이유종 정책사회부 차장 pen@donga.com}

올해 1∼4월 아일랜드는 미국에 710억 달러(약 101조 원)어치 물품을 수출하며 미국의 무역적자 상대국 2위에 올랐다. 수출액 과반인 360억 달러(약 52조 원)는 비만과 당뇨 치료제 제조에 필요한 호르몬 1만600kg이었다. 미국 주요 제약사들은 호르몬을 원료로 비만 치료제 위고비 등을 생산한다. 아일랜드 경제는 올해 1∼3월 비만 치료제 원료가 대미 수출 증가를 주도하며 지난해 같은 분기 대비 9.7% 성장했다. 원료의약품은 합성, 발효, 추출 등으로 만들어진 물질로, 완제의약품 제조에 사용되는 의약품 원료다. 약국에서 판매하는 해열진통제는 완제의약품이고 해열진통제를 만드는 데 사용하는 아세트아미노펜, 이부프로펜 등은 원료의약품이다. 하지만 국내 원료의약품 자급력은 좋지 않다. 2022년 원료의약품 자급률은 11.9%로 최저치를 기록했고 2023년에도 25.6%에 그쳤다. 해외 의존도가 높은 이유는 제약사들이 원가 절감 차원에서 수입 원료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해외에 생산을 의존하다가 2021년과 2023년 품귀 현상이 발생한 차량용 요소수와 상황이 비슷하다. 팬데믹, 수출 통제 등 글로벌 공급망 위기가 발생하면 필수의약품 공급마저도 중단될 수 있다. 2016년 1월부터 2025년 8월까지 최근 10년간 원료의약품 수급을 이유로 공급이 중단된 의약품 품목은 108개였다. 2023년에는 해열제, 소염제, 천식치료제, 항생제 등 필수의약품이 한때 품절돼 환자들이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게다가 원료의약품 수입은 지난해 기준 중국(36.3%)과 인도(14.2%)에 편중돼 있다. 희토류처럼 원료의약품도 언제든 전략 무기로 탈바꿈할 수 있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일단 해외 과다 의존 원료의약품, 필수의약품 원료 등 구체적인 품목을 선정해 자급화를 추진해야 한다. 정부는 15일 국정감사에서 내년 원료의약품 자급화 예산으로 약 157억 원을 편성했다고 밝혔다. 고무적인 일이다. 다만 올해 3월부터 시행 중인 국가필수의약품에 국산 원료를 사용할 때 약가를 우대하는 정책은 별다른 효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시행 7개월이 지났지만 국산 원료를 사용했다고 신청한 제약사는 단 한 곳도 없다. 현장 상황을 잘 살펴야 한다. 국내 원료의약품 업체들은 대부분 소규모로 가격 경쟁력이 떨어지고 글로벌 제약사와의 공급 계약 체결도 어렵다. 정부 지원책은 여전히 부족하다고 느끼고 있다. 한 원료의약품 업체 대표는 “수년간 수십억 원을 투자해 미국 식품의약국의 승인 실적을 냈지만 정부 지원은 거의 없었다. 정부의 지원 정책이 뒷받침된다면 자급률 향상은 충분히 가능하다”고 전했다. 공급망 대비를 넘어 고부가가치 원료의약품 개발에도 나서야 한다. 아일랜드처럼 호르몬 등 상당한 기술력이 필요한 원료의약품은 경제 성장에 효자 역할을 하고 있다. 고효능 원료의약품의 경우 적은 양으로도 강력한 치료 효과를 낼 수 있어 효율성을 크게 향상시킬 수 있다. 암, 당뇨병 치료제 등을 위한 맞춤형 원료의약품 수요도 늘고 있다. 미국은 국산품 우대 정책(Buy American)을 펴며 자국산 원료의약품 사용을 유도하고 유럽연합(EU)은 연구개발 펀드와 투자보조금으로 생산 기반을 확대하고 있다. 경쟁자들은 이미 움직이고 있다.이유종 정책사회부 차장 pen@donga.com}

동아일보 1985년 12월 27일 자 10면. 1986학년도 학력고사 점수에 따라 지원 가능한 대학과 학과를 추정한 결과 상위 6번째 그룹에 부산대와 경북대 영어교육과가 고려대 경영학과, 연세대 법학과와 함께 포함됐다. 부산대와 전남대 의예과는 서울대 섬유공학과, 천문학과와 어깨를 나란히 했다. 입시 배치표가 대학 순위와 역량 등을 모두 나타내는 것은 아니지만 학생 모집, 연구 성과, 브랜드 파워 등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는 게 엄연한 현실이다. 최근 입시에서 선호하는 대학에 비수도권이 밀리는 건 그래서 쉽게 지나칠 수 없다. 정부는 17일 123대 국정과제에 ‘서울대 10개 만들기’ 등을 포함하고 비수도권대에 서울대 수준의 전략적 투자와 체계적 육성 전략을 마련해 수도권 중심의 교육 불균형을 해소하겠다고 밝혔다. 수험생 감소, 재정난 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비수도권대엔 매우 반가운 소식이다. 다만 노무현 정부부터 윤석열 정부까지 모든 정부가 막대한 예산을 투입해 비수도권대 육성 정책을 강하게 추진했지만 높은 경쟁력을 갖춘 대학으로 육성시킨 사례는 거의 없다. 2004∼2009년 지방대 혁신역량 강화 사업에 약 1조 원이 투입됐고 2009∼2012년 광역경제권선도사업 인재 양성 사업엔 연간 약 1000억 원이 들어갔다. 10개 비수도권대를 한꺼번에 서울대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일단 10개 대학을 모두 한꺼번에 육성하는 방식보다는 한두 곳부터 집중적으로 키워야 한다. 모범사례를 만든 뒤 다른 대학이 따라오게 하는 방식이다. 미국 캘리포니아주립대 시스템도 1868년 3월 가장 먼저 설립된 버클리 캠퍼스가 먼저 연구중심 대학으로 자리를 잡았고 로스앤젤레스 캠퍼스(UCLA) 등이 뒤를 이었다. 모든 학과에 투자하기보다는 양자역학, 휴머노이드, 바이오 등 일부 미래 학문에 집중 투자해 성과를 내는 방식이 효과적이다. 서울대, KAIST 등이 아직 글로벌 경쟁에서 제대로 선점하지 못한 분야는 많다. 해외 대학도 아직 제대로 뛰어들지 못한 분야를 선점해 명성을 높이고 분위기를 학내 전체로 확산시키는 방안이다. 지방자치단체와의 더 강력한 연대도 필요하다. 진심으로 비수도권대를 공동 운명체로 생각하고 꾸준히 투자하며 성과를 공유할 기관은 사실상 지자체밖에 없다. 지자체의 재정적 지원을 받아 교원 처우를 상향 조정하고 유능한 인재를 채용해야 한다. 대부분 주립대로 운영되는 독일 대학들은 주 정부의 지원을 받아 대학입학 자격시험인 ‘아비투어(Abitur)’만 거쳐 입학한 범재들을 글로벌 영재로 키우고 있다. 정치권이 선거철마다 선심성으로 추진하는 대학 신설도 자제해야 한다. 아무리 좋은 취지로 추진해도 이미 시장이 과포화 상태라 전체 역량만 분산시킬 뿐이다. 진짜 지역에 도움을 주고 싶다면 대학을 신설할 예산으로 기존 대학에 집중 투자하는 게 낫다. 제대로 투자만 한다면 크게 성장할 비수도권 사립대도 많다. 수십 년째 헛도는 ‘비수도권대 살리기’ 정책이 이번이라도 성공하려면 실행 가능한 방법부터 단계적으로 장기간 추진하는 게 어떨까.이유종 정책사회부 차장 pen@donga.com}

HD현대중공업 조선소와 협력업체들이 모여 있는 울산 동구. 조선업이 활기를 띠면서 외국인 유입도 늘었다. 동구에 거주하는 외국인은 2021년 2953명에서 올해 6월 1만29명으로 급증했다. 소방서, 경찰서는 통역사 확보에 나섰고 구청은 스리랑카어 등 4개 언어로 외국인 소식지 발행을 시작했다. 동구에 체류하는 외국인은 베트남, 네팔 등 주로 개발도상국에서 온 조선업 관련 인력이다. 지난해 국내 외국인 근로자는 100만 명을 넘었다. 국내에서 취업허가를 받은 외국인 85%는 단순기능인력이다. 제조업, 건설업, 농축산업, 광업 등 주로 내국인이 기피하는 업종 일자리를 메우고 있다. 금형, 주조 등 뿌리산업에서도 버팀목 역할을 한다. 특히 관세 협상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조선업에선 고령화 공백을 채웠다. 처음에는 숙련되지 않아 용접 등에서 생산성이 낮았지만 점차 숙련도를 높이며 안착하고 있다. 외국인 근로자는 흔히 ‘코리안 드림’을 떠올린다. 하지만 현지에서 한국어 시험, 기술 시험, 건강검진 등을 미리 통과해야 하고 추가 교육도 마쳐야 하며 모집 인원이 생겼을 때만 들어올 수 있다. 업무 강도가 상대적으로 높고 언어와 문화적인 차이까지 더해져 직장 내 괴롭힘에서 더 취약할 때도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목돈을 모아 본국에 돌아간 뒤 성공을 거두는 사례가 많다. 한국에서 배운 주물, 가구 제작 등으로 사업을 시작해 세차장, 부동산 등으로 확장하고 상당한 부를 일군다. 본국에서 중산층 이상을 형성하며 현지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인사로 성장한다. 한국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대부분 한국의 경제 성장에 대해선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근면, 성실 등 자국민도 배웠으면 하는 부분을 직접 경험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민낯에 대해선 부정적으로 평가할 때도 많다. 차별과 무시 등 자신들이 당한 수모를 떠올리며 일부 혐오감까지 드러낸다. 외국인 근로자를 지게차에 비닐로 묶는 등 인권을 유린하거나 상습 폭행으로 숨진 사례도 있다. 매년 1200억 원 안팎의 임금 체불도 발생하고 있다. 1960년대 한국의 파독 광부와 간호사도 육체적으로 힘든 일을 했다. 그래도 독일에서 노동조합에 가입할 수 있었고 사회복지 혜택에도 차별이 없었다. 반면 1970년대 중동 국가에 진출한 근로자들은 열악한 근무 환경에서 낮은 임금을 받으며 인종적 차별을 경험하기도 했다. 일부 중동 국가들은 현재도 외국인 근로자에게는 자국민의 절반 이하 수준으로 최저임금을 적용하고 있다. 고국에 돌아간 외국인 근로자들은 평생 한국에 대해 언급한다. 한국 문화를 잘 이해하고 있으며 한국어도 구사한다. 자녀를 한국에 유학 보내기도 하고 중고차 수입, 화장품 수입, 여행사 등 크고 작은 한국과 관련된 사업을 하며 양국의 징검다리 역할을 한다. 인도네시아, 베트남, 스리랑카, 네팔 등은 미래 시장의 가치로도 매우 중요하다. 한국에 대한 좋은 기억을 가진 외국인 근로자와 자녀들이 서로 유대감을 가지고 협업할 수 있다면 상당한 시너지를 낼 수 있다. 조금만 노력하면 우군을 많이 확보할 수 있다는 얘기다. 외국인 근로자는 단순히 값싼 노동력이 아니라 함께 성장해야 할 경제 파트너임을 잊어선 안 된다.이유종 정책사회부 차장 pen@donga.com}

2004년 4월 20일 싱가포르 도시철도 공사현장에서 터널이 무너지며 인근 니콜고속도로 길이 100m 구간이 붕괴됐다. 현장에 있던 4명이 숨지고 3명이 크게 다쳤다. 부실 설계와 안전규정 미비, 현장 소통 부재가 빚어낸 참사였다. 사고 조사위원회는 보고서에 “예방 가능한 사고였다”고 기록했다. 이듬해 싱가포르 정부는 ‘작업현장 안전과 보건 2015’ 로드맵을 발표하며 10년간 산업재해 사망자를 절반 이하로 줄이는 장기 프로젝트에 착수했다. 당시 싱가포르 인구 10만 명당 산업재해 사망자는 4.9명이었다. 2006년 3월에는 안전보건 의무 위반에 대한 법적 책임을 묻는 작업장안전보건법이 제정됐다. 다만 처벌보다는 예방에 무게를 뒀다. 사고가 발생하면 해당 기업에 벌점을 부과하고 누적 점수가 일정 수준을 넘으면 채용, 입찰 등에 불이익을 가했다. 입찰과 채용이 중단되면 기업은 경영상 상당한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어 산업재해 예방에 적극적으로 나설 수밖에 없다. 고위험 업종엔 맞춤형 규제를 하고 노사정이 안전책임을 공유하며 장기 프로젝트는 단계별로 목표를 설정해 추진했다. 그 결과 2015년에는 인구 10만 명당 산업재해 사망자가 1.9명까지 하락하며 목표치를 크게 웃돌았다. 지난해엔 1.2명까지 떨어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상위권에 올랐다. 반면 한국의 경우 인구 10만 명당 산업재해 사망자는 3.9명이다. 사실 한국과 싱가포르는 노사 관계, 산업 구조, 정부 형태, 사회적 분위기 등이 크게 달라 일률적으로 비교할 수는 없다. 싱가포르는 단일노총 중심 협력형 구조이고 상대적으로 제조업 비중도 낮다. 장기 집권한 정부는 강력한 정책을 추진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업들이 스스로 움직일 수 있도록 유도했고 해당 정책을 20년 넘게 꾸준히 추진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싱가포르 인력부는 올해 상반기에도 건설업과 제조업 등 514개 현장을 점검해 안전수칙 미준수 사례 1263건을 적발했다. 2022년 1월 사망 등 중대 산업재해가 발생했을 때 사업주, 경영책임자에게 징역형 등을 내리는 중대재해처벌법이 도입된 뒤 정부는 관련 예산과 인력을 2, 3배로 늘렸다. 기업도 처벌을 우려해 산업안전에 대한 투자를 확대했다. 하지만 민간에 이어 공공 부문에서도 중대재해가 발생할 정도로 별다른 효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정부는 엄벌하는 데 몰두했고 기업은 처벌을 면하는 데 관심을 가졌으며 정작 현장에서 안전에 유의해야 할 근로자는 움직이지 않았다. 현장이 움직일 수 있도록 독려해야 한다. 싱가포르에서 트럭크레인 사고가 빈번하자 싱가포르 정부는 안정성 제어장치를 설치할 때 비용의 50%를 환급해주는 방식으로 사고를 줄였다. 중대재해가 발생한 기업에 대출 한도를 줄이기보다는 안전관리를 잘한 기업에 대출 한도를 늘려주는 방식이 바람직하다. 노사정이 한 테이블에 모여 장기적인 목표를 세우고 사고 예방을 위한 구체적 로드맵도 만들어야 한다. 14일 고용노동부 장관 주관으로 정부 관계자와 20대 건설사 경영진이 모여 중대재해 감축 방안에 대해 토론했지만 막상 현장 목소리를 전달할 근로자는 보이지 않았다. 정부와 기업, 노동계가 책임을 공유하고 처벌보다는 예방에 초점을 맞춰 입체적인 해법을 마련할 때다.이유종 정책사회부 차장 pen@donga.com}

“강남 피부과 의원 한 곳에만 외국인 환자 1만 명이 다녀갔습니다.” 지난해 국내에 들어온 외국인 환자는 117만 명으로 2023년(61만 명)보다 약 2배로 증가했다. 올해도 외국인 환자가 계속 늘고 있어 연말까지 약 140만 명이 찾을 것으로 예상된다. 외국인 환자 1명이 약 153만 원씩 썼고, 전체 의료비는 1조4052억 원에 달했다. 외국인 환자의 경우 건강보험이 적용되지 않아 병원에 가져다주는 수입은 더 많다. 환자는 보호자, 지인 등과 함께 입국하기 마련이라 경제적 파급 효과도 상당하다. 보호자, 지인 등과 함께 쓴 의료관광 지출액은 무려 7조5039억 원이다. 국내 생산에는 13조8569억 원, 부가가치로는 6조2078억 원이 창출됐다. 외국인 환자가 최근 급증한 이유는 일본과 중국에서 20, 30대 여성들이 한국 미용의료 서비스를 받으려 하기 때문이다. 특히 자국보다 훨씬 저렴한 비용으로 레이저, 보톡스, 필러 등의 시술을 받을 수 있어 인기가 높다. 실제 외국인 환자 68%는 피부과와 성형외과를 찾았다. 이들에겐 본국으로 돌아갈 때 공항에서 부가가치세를 환급 받는 것도 상당한 매력이다. 지난해 미용·성형의료 용역 부가가치세 환급은 101만 건, 금액으로는 955억 원에 달했다. 앞으로도 이런 추세가 이어질까. 한국보건산업진흥원의 설문조사 등에 따르면 외국인 환자의 만족도는 상당히 높은 편이며 한류 등의 영향으로 외국인 미용의료 수요는 상당 기간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외국인 환자 전용 입원시설을 운영하며 아랍어, 러시아어까지 가능한 전담 인력이 상주할 정도로 병의원의 노력도 적지 않다. 제주, 부산 등 비수도권에서도 치과, 한방 등 특화된 진료 분야와 지역 관광자원을 연계해 외국인 환자를 유치했다. 강원도의 한 리조트에서는 사상체질검사를 하며 건강상담을 하고 체질에 맞는 한방피부미용 서비스를 제공했다. 이런 노력으로 지난해 국내 한방 병의원을 찾는 외국인 환자만 84.6% 늘었다. 다만 미용의료는 유행에 민감해 수요 변화가 클 뿐만 아니라 태국, 말레이시아 등 다른 국가에서도 가능하다. 국내 의료진 수준을 고려할 때 중증질환, 희귀질환 등 고난도 수술에서도 더 많은 외국인 환자 유입을 기대할 수 있다. 피부과와 성형외과를 넘어 무게중심을 점차 중증질환, 희귀질환으로 이동할 때가 됐다는 얘기다. 이미 러시아, 몽골, 카자흐스탄 등에서 건강검진, 내과 진료 등 자국에서 충족하지 못하는 의료 서비스를 받기 위해 입국하는 사례도 꾸준히 늘고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한국과 러시아 사이에는 직항편마저 끊겼으나 방문 환자는 전쟁 전인 2021년 6412명에서 지난해 1만6622명으로 늘었을 정도다. 국내 의료진의 중증질환 진료 수준은 실력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측면도 있다. 국내 환자는 소홀히 진료하고 외국인 환자를 위한 돈벌이에만 몰두한다는 우려 때문에 대형병원들이 외국인 환자 유치에 소극적인 모습을 보일 때도 있다. 외국어가 가능한 간병인 확보와 전문 의료 코디네이터 양성 등 실무적인 보완책도 요구된다. 의료 서비스는 단순히 의술에 그치지 않고 제약, 바이오, 관광 등 다른 산업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 호기를 놓치지 않도록 더 매진해야 할 때다. 이유종 정책사회부 차장 pen@donga.com}

독일 금융사 알리안츠는 폭염으로 올해 전 세계 경제 성장이 당초 전망보다 0.6%포인트 하락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미국 국내총생산(GDP)은 0.6%포인트 감소하고 중국, 이탈리아, 스페인은 약 1%포인트 손해를 볼 것으로 추산됐다. 국제노동기구(ILO)는 폭염에 따른 근로 시간 감축으로 2030년 일자리가 최대 1억3600만 개 감소할 것이라고 내다보고 있다. 폭염은 단순히 더운 문제가 아니다. 산업에 큰 영향을 끼친다. 젖소는 고온 스트레스에 약해 기온이 27도를 넘으면 사료를 덜 먹기 시작하는데, 기온이 32도 이상 치솟으면 우유 생산량이 최대 20% 줄어든다. 원유가 원활하게 생산되지 못하면 생크림 공급에 차질이 생겨 빵집과 카페 주인들은 발을 동동 구를 수밖에 없다. 제주에서는 높은 수온이 원인으로 추정되는 광어 폐사 신고가 접수됐다. 지난해 고수온에 따른 양식업 피해액은 역대 최대인 1430억 원에 달했고 올해도 큰 피해가 우려되는 상황이다. 배추 수급도 불안하다. 해발 400m 이상 고랭지에서 재배하는 여름 배추는 폭염에 매우 취약하고 생산량 변동성도 매우 크다. 도시에는 더 치명적이다. 도시는 태양열을 흡수하는 콘크리트와 벽돌, 아스팔트 등으로 덮여 있다. 녹지가 많지 않고 에어컨 실외기가 내뿜는 열기로 가득해 열섬 효과가 발생한다. 도시를 잇는 철도 선로가 휘거나 전선이 녹는 사고도 있다. 냉방 비용이 증가하고 온열질환에 따른 의료비 부담도 커진다. 노동 생산성이 하락하지만, 근로자 보호를 위한 조치가 필요해지면서 생산 비용은 늘어난다. 생산성 하락에 세수는 감소하지만, 기후변화에 대응하느라 정부 지출은 증가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대부분 ‘폭염의 일상화’에는 여전히 둔감한 편이다. 할머니와 할아버지들은 밭일을 하다 열을 이기지 못하고 숨지는 사례가 매년 끊이지 않고 있다. 급기야 지방자치단체가 드론을 띄워 ‘폭염특보가 발효 중이니 즉시 휴식하시기를 바랍니다’라는 경고 메시지를 전달할 정도다. 휴식을 제대로 취하지 않은 건설 근로자들이 온열질환을 앓고 맨홀에서 작업하다 질식 사고가 발생한다. 고온에서 산소 농도는 급격히 낮아지고 유해가스마저 발생하면서 질식 위험이 커졌기 때문이다. 폭염은 모두에게 똑같은 영향을 미칠까. 폭염으로 프랑스 포도 농장에선 수확량이 많이 감소했다. 반면 서남부 지방에서 달콤한 화이트 와인 정도를 생산하던 독일은 기후변화 덕에 새로운 와인 산지로 부상했다. 드라이한 화이트 와인에 이어 품질 좋은 레드 와인까지 내놓고 있다. 결국 각자 상황에 맞게 적응 방식을 터득해야 한다는 것이다. 스페인 도시 세비야는 2022년 폭염에 이름을 붙이고 태풍이나 허리케인처럼 분류 체계를 만들어 관리하기 시작했다. 폭염을 건강에 미치는 영향에 따라 1∼3단계로 정도를 나눴다. 일본과 독일은 기후 위기에 대처할 법안을 마련했다. 일본은 2018년 12월 기후변화 적응 계획, 추진 방향 등을 담은 법안을 시행하고 있다. 독일도 지난해 7월 기후변화에 따른 적응 전략 등을 담은 연방 기후변화적응법을 제정했다. 세계기상기구는 “폭염을 24시간 전 경고하면 피해를 30%까지 줄일 수 있다”고 전했다. 세계경제포럼은 도시 녹화, ‘최고 불볕더위 책임자’ 임명 등을 해법으로 꼽았다. 폭염을 상수로 두고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할 때다. 이유종 정책사회부 차장 pen@donga.com}

20년 전 사회 초년병이었던 고교 동창들은 모일 때마다 으레 직업에 대해 평가했다. 마치 군대에서 어떤 부대 보직이 가장 근무하기 편한지에 대한 품평처럼 다시 태어나면 어떤 직업을 선택해야 하는지 뒤늦은 후회를 털어놓곤 했다. 동창들이 가장 선호한 직업은 대학교수였다. 사회적 존경과 영향력을 제외해도 교원 연금, 65세 정년, 긴 방학 등은 탐낼 수밖에 없는 매력적인 요소였다. 하지만 이런 평가는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국내 주요 대학 교수들이 해외로 떠나고 있다. 2021년부터 올해 5월까지 서울대 교수 56명이 해외 대학으로 자리를 옮겼다. 41명은 미국으로 향했고 나머지 15명은 홍콩, 싱가포르, 일본, 호주, 중국 등으로 떠났다. 과거 이공계 교수 중심으로 이동했으나 이젠 거의 모든 전공으로 확대됐다. 이직한 교수의 전공은 인문사회 28명, 자연과학 12명, 공학 12명, 예체능 3명, 의학 1명 등이다. 2000년대 초부터 국내 ‘토종 박사’들이 본격적으로 해외 대학에 진출하기 시작했다. 주요 학술지에 논문을 다수 게재하면서 실력을 인정받았고 국제 학술대회에서 발표할 정도로 영어 실력도 향상됐다. 대학들은 학술지 게재 실적으로 세계 교수를 평가하면서 스포츠 구단처럼 높은 급여와 연구비, 주택 보조금 등을 제시하며 ‘스타 교수’를 영입했다. 반면 국내 대학은 오랜 기간 박사 공급이 넘치는 상황이라 채용에 적극적이지 않았다. 성과급 등을 역제안하는 시스템도 갖추지 못했다. 오랜 기간 등록금을 인상하지 못하면서 재정적 여유는 사라졌다. 미래 교수를 꿈꾸는 대학원생은 계속 나오고 있을까. 올해 상반기 서울대 대학원생 1453명 중 386명(26.6%)만이 서울대에서 학부를 마쳤다. 이 비율은 계속 낮아지고 있다. 이른바 ‘SKY(서울대 고려대 연세대) 대학’으로 범위를 넓혀도 결과는 비슷했다. 해외 유학을 떠나는 학생이 감소하는 상황이라 최상위권 대학 출신 졸업생이 모교 대학원에 진학하지 않는 것은 교수를 희망하는 학생 자체가 줄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미 교수는 학생들의 장래 희망이 아니다. 대기업, 창업, 로스쿨 등 다른 길이 기회도 많고 보상도 더 크다. 교수들이 해외로 떠나고 교원 희망자마저 줄면 한국 교육의 미래는 암담할 수밖에 없다. 반면 해외 대학들은 우수 교원을 유치하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다. 변화에 더디다는 평가를 받아 온 일본 도쿄대뿐만 아니라 우한대 등 중국 지방대마저 급여, 연구비 등을 파격적으로 제시하며 우수 교원을 확보하고 있다. 글로벌 대학 순위인 ‘US뉴스앤드월드리포트 2025-2026’에선 칭화대, 싱가포르국립대 등 18개 아시아 대학이 100위 안에 들었다. 한때 100위 안에 들던 서울대는 이제 133위로 밀려났다. 현실적으로 당장 교원 처우를 크게 높일 수 없다면 정부 지원 확대, 등록금 현실화만큼은 장기적인 안목을 가지고 꾸준히 추진해야 한다. 대학도 자체 기금 확대 등 자구책을 마련해야 한다. 하버드대는 기금 532억 달러(약 73조 원)를 굴리며 예산 37%를 충당하고 있다. 대학이 무너지면 미래도 없다. 이유종 정책사회부 차장 pen@donga.com}

헤지펀드 시타델의 창업주 켄 그리핀은 2022년 본사를 미국 시카고에서 마이애미로 옮겼다. 그는 “마이애미는 미국의 미래를 대표한다. 뉴욕과 마이애미 모두 장기적으로 미국의 중요한 금융센터로 최적의 장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시타델은 현재 650억 달러(약 88조 원)가 넘는 금융 자산을 운용하고 있다. 휴양지로 널리 알려진 마이애미가 글로벌 금융 중심지로 탈바꿈하고 있다. 2020∼2023년 56개 투자회사가 뉴욕에서 마이애미로 본사를 옮겼고, 이와 함께 1조 달러(약 1360조 원)가 넘는 돈이 이동했다. 500개가 넘는 금융사들은 마이애미 일대에 본사를 마련했고 골드만삭스, 블랙스톤, 스타우드 등 주요 투자사도 거점을 만들었다. 월가 금융인이 주요 고객인 맨해튼의 유명 레스토랑 ‘해리스’는 지난해 마이애미에 지점을 열었다. 이미 마이애미는 ‘월스트리트 사우스(Wall Street South)’라고 불리고 있다. 과거 금융업은 대면 접촉을 기반으로 했다. 증권거래소에서 주가 등락에 따라 육성을 높이며 주식을 사고팔았고 매매 결과는 수기로 기록했다. 하지만 글로벌 금융이 디지털로 전환되면서 월가 집중도는 상대적으로 하락했고, 월가 밖에서 활동하는 금융사도 많아졌다. 트레이더는 더 이상 거래소에 상주할 필요가 없게 됐고 런던, 싱가포르 등 전 세계 사무실과 화상회의를 하며 투자를 결정하기 시작했다. 더구나 금리가 0%에 가까워지면서 고객은 더 이상 은행에만 돈을 맡기지 않게 됐다. 은행은 더 이상 금융을 지배하지 않는다. 젊은 금융 전사들은 화창한 날씨와 바다를 만끽할 수 있는 마이애미로 향하기 시작했다. 호텔 그랜드볼룸은 개조돼 트레이딩센터로 쓰였다. 허리케인이 자주 발생하는 마이애미는 이동식 전력 시스템을 잘 갖추고 있었고 갑작스럽게 늘어난 전력 및 컴퓨터 서버 부하도 충분히 감당할 수 있었다. 상대적으로 세금도 적었고 규제도 느슨했다. 글로벌 금융허브는 부산의 오랜 꿈이다. 정부는 2009년 1월 부산을 선박금융과 파생금융 중심지로 지정했으며 문현혁신도시에는 한국거래소, 한국자산관리공사, 한국주택금융공사 등이 입주했다. 하지만 단순하게 금융사 몇 개를 옮겨서 금융허브로 도약할 수는 없다. 한국거래소는 2007년부터 본사를 부산에 두고 있지만 여의도 영향력은 여전히 절대적이다. 부산이 선박금융을 넘어 금융허브로 도약하려면 보다 차별화되는 유인책을 만들어야 한다. 금융인재를 흡입할 정주 환경, 교육, 세제 혜택 등 매력적인 투자 여건도 더 필요하다. 다행스럽게도 올해 9월 블록체인 거래소인 부산디지털자산거래소가 개장한다. 새로운 금융시장을 발굴해 유치하고 답보 상태지만 위안화 역외 허브 구상도 계속 추진할 필요가 있다. 미국 주(州)와 도시들은 끊임없이 서로 경쟁하며 몸값을 높이고 있다. 석유산업 메카인 텍사스는 최근 빅테크의 새 중심지로 떠올랐다. 테슬라는 오스틴에서 자율주행 무인택시를 출시했고 애플은 휴스턴에 인공지능(AI) 시스템용 서버를 구축할 계획이다. 테크 기업은 운영 비용이 적게 들고 규제가 엄격하지 않기 때문에 텍사스로 이동한다. 금융투자는 지중해 호텔이나 동남아 휴양지에서도 가능하다. 금융 변혁기는 부산에도 충분한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이유종 정책사회부 차장 pen@donga.com}

“진료와 수술, 당직 근무에 모든 시간을 할애하는데, 연구할 틈이 어디 있겠습니까.” 지난해 2월 시작된 의정 갈등은 의학 연구에도 악영향을 미쳤다. 의대 교수 연구를 보조할 전공의와 의대생이 병원과 학교를 떠났고, 의대 교수와 전임의(펠로)는 전공의 공백을 메우느라 눈코 뜰 새가 없기 때문이다. 대한의학회지(JKMS) 관계자는 “2023년 논문 1220편이 투고됐는데 지난해에는 투고 논문이 900편에 그치며 25%가량 줄었다”고 밝혔다. 미국 국립보건원 사이트 펍메드(PubMed)에 게재된 한국 기관 소속 연구자(모두 한국인) 논문도 감소세다. 2022년 3만1873건에 달했던 논문은 2023년 3만642편, 2024년 3만473편으로 줄었다. 의학 논문을 하나 쓰려면 1년에서 1년 반 정도 걸리기 때문에 감소 여파는 올해 하반기에 본격적으로 나타날 것이라는 전망도 있다. 지난해 글로벌 제약사 주도로 추진한 의약품 임상시험에서 서울 소재 의료기관 점유율은 1.32%로 중국 베이징(1.4%)에 이어 2위였다. 서울은 2017∼2023년 7년째 1위를 고수했다. 하지만 의정 갈등 여파로 국내 임상 연구가 줄면서 신약 개발이나 연구에도 어려움을 겪고 있다. 임상 시험에는 적어도 의사가 1명 이상 포함돼야 하는데, 의사가 참여하지 못하면서 프로젝트 자체가 중단된 사례도 나온다. 국내 의료진이 해외 공동연구에 제대로 참여하지 못하거나 임상시험 환자를 모집하기 어려워 일부 약물의 임상 재평가 기한을 연장해야 하는 상황도 벌어졌다. 업계에서는 글로벌 제약사가 한국을 ‘불확실성이 큰 국가’라고 판단하면 후속 임상시험 유치 등이 어려워질 수 있다며 우려하고 있다. 중국은 정반대다. 중국은 최근 미국을 제치고 임상시험 규모 1위에 올라섰다. 중국은 2017년 국제 의약품 기준을 만드는 기구인 국제 의약품 규제 조화위원회(ICH)에 가입한 뒤 의약품 임상 개발 규제를 선진국 기준에 맞추려고 노력해 왔다. 중국 내에서 진행되는 임상시험은 비용도 저렴한 편이며 신약 개발에도 시너지 효과를 낸다. 지난해 기준 글로벌 제약회사 파이프라인(신약 개발) 상위 25위 안에 장쑤헝루이, 시노바이오팜, 상하이포순, CSPC 등 4개 중국 대형 제약사가 포함됐다. 국내 제약사는 한 곳도 들지 못했다. 지난해 중국 제약시장은 전년 대비 7.2% 성장하며 3000억 달러(약 410조 원) 규모에 달할 것으로 추산됐다. 정부는 2023년 8월 이공계 연구개발(R&D) 관련 예산안을 5조2000억 원(16.6%) 삭감해 편성했다. 국회에서 12월 6000억 원이 증액돼 통과됐지만, 감액 여파는 이듬해 바로 드러났다. 예산이 줄어든 연구실은 연구와 실험을 온전히 진행하기 어려워졌고 논문 출고도 줄었다. 연구를 지원하던 이공계 생태계 기업들도 경영난에 시달렸다. 현재 대학병원은 이공계 연구실과 마찬가지 상황이다. 임상시험과 의학 연구, 신약 개발은 서로 연결돼 있다. 다행스럽게도 의료계 내부에서도 대화의 목소리는 나온다. 정부와 의료계가 빨리 의정 갈등을 해결하고 의료 정상화뿐만 아니라 미래 먹거리인 신약 등 바이오 산업에 매진해야 할 때다. 중국의 ‘바이오 굴기’는 이미 위협적이다.이유종 정책사회부 차장 pen@donga.com}

지난해 국내 대학에서 배출된 박사학위 졸업자는 1만7673명. 이들 중 외국인 비율은 23.9%(4224명)다. 불과 10년 전만 해도 10%를 채 넘지 않았던 걸 감안하면 외국인 박사가 2배 이상으로 늘었다는 뜻이다. 늘어난 국내 대학원 박사 과정 정원은 외국인 학생이 채웠다. 국내 대학이 배출한 인공지능(AI), 로봇, 바이오 등 이공계 박사에서 외국인이 연간 1000명을 넘는다. 외국인 박사는 졸업까지 국제학술지(SCI급)에 평균 2편 정도 논문을 게재할 정도로 실력을 갖춘 인재가 많다. 학위를 마치면 절반은 모국으로 돌아가거나 취업, 연구를 위해 미국, 유럽 등으로 향한다. 나머지 절반가량만이 국내 대학, 연구소에 남는다. 이들도 일정 기간이 지나면 한국을 떠난다. 이들은 왜 한국에 남지 않는 것일까. 외국인은 학교를 졸업한 뒤 유학 비자(D-2)를 특정활동 비자(E-7), 거주 비자(F-2) 등으로 전환해야 안정적으로 체류할 수 있다. 2023년 기준 국내 유학생은 15만2094명이지만 같은 해 유학 비자를 특정활동 비자로 전환한 사례는 576명에 그친다. 전환 요건이 매우 까다롭기 때문이다. 평균 급여도 내국인과 비교하면 낮은 편이다. 내국인 이공계 박사 44%는 연 5000만 원 이상을 받는다. 반면 이공계 외국인 박사 30%는 연 소득이 2000만 원 미만이다. 5000만 원 이상을 받는 비율은 12%에 불과하다. 외국인은 박사후과정을 밟거나 연구교수, 연구원 등 비정규직으로 근무하는 경우가 많다. 승진 기회 제한, 연구용역 수주 한계 등도 한국을 떠나게 만드는 요인이다. 저출생으로 학령인구가 줄면서 고급 인재 확보는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 국내 학생을 우수한 인재로 키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해외 인재를 유치하는 전략도 병행할 필요가 있다. 정부는 최근 최우수 인재 유치 방안 중 하나로 ‘톱 티어’ 비자를 추진한다고 발표했다. 다만 글로벌 100위 이내 대학 석박사 학위와 글로벌 500대 기업 및 세계적인 연구기관 근무 경력 등 취득 요건은 높은 편이다. 이런 능력을 갖춘 인재가 과연 한국에 계속 남을지 의문이다. 보다 현실적인 방안이 필요하다. 비자 취득 요건을 더 낮춰서 매년 1000명 넘게 배출되는 이공계 외국인 박사만이라도 흡수해야 한다. 외국인은 상대적으로 국내 일자리 정보에 대한 접근성이 떨어지는 만큼, 아예 외국인 인재풀 등을 만들어 취업을 지원하는 방안도 필요하다. 장기적으로 외국인 유학생의 취업과 정착을 지원하는 기관 설립도 고려할 수 있다. 이런 노력을 더해야 국내 장학금으로 키운 고급 인재를 놓치지 않는다. 스위스 국제경영개발원(IMD)에 따르면 한국의 두뇌 유출 지수 순위는 2021년 24위에서 지난해 30위로 하락했다. 한국산업기술진흥원에 따르면 2032년 2차전지 등 5개 유망 신사업에서 석박사 출신만 1만685명이 더 필요할 것으로 전망됐다. 최근 10년간 국내 체류 중인 외국인 전문 인력은 4만∼5만 명대에서 정체를 보이고 있다. 국내에 들어왔던 고급 인력이 대부분 다시 빠져나가기 때문이다. 이들이 계속 머무를 만한 특단의 대책이 필요한 때다.이유종 정책사회부 차장 pen@donga.com}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노총)이 최근 법정 정년 연장을 공식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다만 임금이 줄어들 수 있는 ‘퇴직 후 재고용’ 방식은 반대한다고 선을 그었다. 민노총은 그동안 한국노동조합총연맹과는 달리 정년 연장과 관련해서 유보적인 입장을 보여왔다. 양대 노총의 정년 연장 추진에 정부와 경영계도 본격적으로 관련 논의를 시작해야 할 때가 됐다. 정년 연장은 우리 사회가 풀어야 할 당면 과제다. 지난달 한국갤럽이 성인 1003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응답자 79%가 ‘정년을 65세로 올려야 한다’고 답했다. 미국과 유럽 등 주요국은 정년 제한이 없거나 상향 조정하고 있다. 다만 ‘자식 인생도 책임을 못 지는데, 어떻게 직원을 40년이나 책임져야 하냐’ ‘60세도 버거운데 연금을 못 받고 5년을 더 일해야 한다면 언제 은퇴하냐’ 등의 의견도 나온다. 정년 연장 방식을 두고 정부와 경영계, 노동계 의견도 첨예하게 엇갈린다. 정년을 늘리면 일차적으로 사업주 부담이 커진다. 직장인은 은퇴하고 싶으면 언제든 퇴사할 수 있지만, 사업주는 얘기가 다르다. 청년 고용 감소, 생산성 저하 등 경제 순환성에도 영향을 미친다. 창업, 채용에도 부정적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정년 연장은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한국은 지난해 12월 초고령사회로 진입했고 생산가능인구가 줄어드는 상황이다. 한국은행 보고서에 따르면 2차 베이비붐 세대(1964∼1974년생)가 지난해부터 차례대로 은퇴하면서 향후 11년간 경제성장률을 연간 0.38%포인트까지 떨어뜨릴 것으로 전망됐다. 우리보다 앞서 고령화를 겪은 일본은 1994년 60세 정년을 도입했다. 2012년에는 65세까지 사실상 정년을 연장했다. 현재 70세까지 일할 수 있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다만 일본이 60세 정년을 도입할 당시 기업의 80%는 이미 60세 정년을 시행하고 있었다. 65세로 정년을 늘릴 때도 2000∼2025년 3단계에 걸쳐 점진적으로 도입해 기업 부담과 노동시장 부작용을 최소화했다. 한국은 2016년 60세 정년을 도입한 상황에서 정년 연장 속도가 너무 빠르다는 지적이 있다. 일본은 정년을 5년 늘리면서 기업을 많이 배려했다. 계속고용 제도를 도입해 직원이 같은 직장에서 일하지만, 임금이 줄어들 수도 있게 했다. 후생노동성에 따르면 일본 기업 70%는 계속고용 제도를 활용하고 있다. 고용 의무를 ‘개별 기업’에서 ‘기업 그룹’으로 확대해 계열사로 옮길 수 있도록 했고 근무 태도가 불량하거나 정상 근무가 어려울 때는 제외할 수 있도록 했다. 또 70세까지 취업하는 방안으로 다른 기업 재취업, 창업 지원, 프리랜서 계약 등을 검토하고 있다.정년 연장에서 빼놓지 말아야 할 고민은 청년을 위한 배려다. 대한상공회의소 보고서에 따르면 일자리가 부족한 상황에서 정년을 연장하면 청년 일자리가 위축될 수 있다. 청년층은 업무 숙련도는 낮지만, 열정적이고 창의력이 높다. 반면 고령층은 순발력은 떨어지지만, 숙련도가 높다. 고령층이 몇 배 많은 급여를 받으려면 생산성이 훨씬 높다는 것을 증명해야 사업주 불만도 줄어든다. 일자리는 경제적 이유뿐만 아니라 존재의 의미를 찾고 ‘일하는 즐거움’을 느끼게 해준다. 이제 사업주와 청년까지 만족하는 묘수를 머리를 맞대고 논의해야 할 때다.이유종 정책사회부 차장 pen@donga.com}

국제학술지 네이처가 지난해 공개한 과학 분야 국가별 연구 순위(리서치 리더스)에서 한국이 8위를 기록했다. 중국은 미국을 제치고 처음으로 1위에 올랐고 이어 독일 영국 일본 프랑스 캐나다 순이었다. 한국은 2021년 스위스를 넘은 뒤 4년째 8위를 지키고 있다. 네이처는 한국에 대해 인구 감소, 투자 효율성 저하 등을 거론하면서도 “과학에 대한 강한 투자와 기술 혁신에 대한 명성은 매우 인상적”이라고 평가했다. 현재 그런대로 잘 유지하고 있지만 당면한 과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언제 뒤처질지 모른다는 뜻이다. 저출생 여파로 국내 학령인구는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감소하고 있다. 2040년쯤엔 이공계 대학원생이 현재의 절반 수준에 그칠 것으로 전망된다. 박사 인력을 제대로 양성할 수 있는 연구 중심 대학도 20개 정도로 줄어든다. 이미 10여 년 전부터 수도권과 지역의 격차, 대기업 취업 선호 등으로 이공계 대학원은 심각한 위기를 맞고 있다. 게다가 오랜 기간 의대 열풍이 불며 많은 과학 영재들이 돈 잘 버는 미용의료 전문가로 사회에 진출하고 있다. 더 이상 이과 최상위권 학생들이 서울대 물리학과에 진학하지 않는다. 한국은 첨단 과학기술을 바탕으로 제품을 개발하고 수출해야 먹고살 수 있는 경제구조를 가지고 있다. 과학인재 양성의 요람인 이공계 대학원이 흔들리면 산업에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다. 한국산업기술진흥원에 따르면 2022년 말 기준 2차전지, 신금속소재, 차세대세라믹소재, 첨단화학소재, 하이테크섬유소재 등 5개 유망 신사업에서만 석박사 출신 573명이 부족했다. 2032년에는 5개 산업에서 석박사 출신만 1만685명이 더 필요할 것으로 전망됐다. 그렇다면 국내 이공계 대학원들은 저출생과 산업구조 변화에 맞춰 미래를 잘 대비하고 있는 것일까. 학령인구가 줄어 석박사 학생을 현재와 같은 규모로 유지하기는 어렵다. 선택과 집중이 필요하다. 학교 사정에 따라 석사 중심 대학원은 실무자와 현장 인력을 양성하고, 연구 중심 대학원은 박사를 키워 분야별로 특화하고 해외 주요 대학들과 경쟁해야 한다. 반도체, 인공지능(AI), 바이오, 양자컴퓨팅 등은 최고 수준을 유지해야 승부할 수 있어 창의적 인재가 매우 중요하다. 교수들이 개인적으로 경쟁해서 각종 연구비를 받는 현행 방식도 일부 보완이 필요하다. 경쟁 방식은 긍정적인 측면이 많다. 다만 대학원 연구가 사회적 수요보다는 연구비 수주에 유리한 분야에 몰리고 학생들이 대학원에서 배운 내용이 산업계에서 전혀 필요가 없을 때도 많다. 연구개발(R&D) 예산 자체가 학술적 역량 강화에 무게를 둘 때가 많아 산학협력을 강조하는 연구는 활발하지 않은 편이다. 서울대, KAIST 등 국내 주요 대학들의 R&D 예산은 하버드대, 칭화대 등과 비교하면 절반 이하 수준이다. 정부는 ‘과학기술계 카르텔’을 청산한다며 과학 예산을 대폭 삭감하기도 했다. 지난해 네이처가 선정한 과학 분야 상위 10개 대학에 8개 중국 대학이 포함됐다. 2016년에는 베이징대만이 이름을 올렸다. ‘글로벌 8위’ 성적표는 오래가지 않을 수도 있다. 일본이 더 내려갈 수 있고 인도가 한국을 뛰어넘을 수도 있다. 정부와 과학계의 협력과 노력이 매우 중요한 시기다.이유종 정책사회부 차장 pen@donga.com}

태국 방콕 중심가 실롬의 한 편의점. 음료수 냉장고에는 한글로 ‘건배’라고 적힌 소주가 두 줄로 진열돼 있다. 소주에 사과, 포도, 딸기 등 과일즙을 첨가한 과실주도 보였다. 가격은 85밧(약 3600원) 안팎으로 현지 주류기업인 ‘타이 스피릿’이 2019년 출시했다. 반면 한국산 소주들은 한 줄로 옆에 보였다. ‘건배’ 소주가 더 잘 팔린다는 의미다. 한국 영화와 드라마의 확산으로 인도네시아, 베트남, 필리핀 등 동남아에선 젊은이들이 한국식 포장마차에서 K팝을 들으며 소주를 마시는 문화가 자리를 잡았다. 현지 한식당도 많아 삼겹살과 치킨을 먹으며 반주하는 게 낯설지 않다. 유행에 민감한 동남아 MZ세대(밀레니얼+Z세대)들은 바와 클럽에서 초록색 병을 흔들었다. 이런 영향으로 국내 소주 업체들은 지난해 역대 최대인 1억450만 달러(약 1528억 원)어치를 전 세계에 수출했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보이지 않는 소주들이 많다. 건배, 태양, 선물, 자연…. 소주의 인기를 간파한 현지 업체들은 소주를 흉내 낸 제품을 출시했다. 인도네시아 전통 술을 만들던 기업은 ‘대박 소주’를, 필리핀 브랜디 양조장은 ‘행복한 소주’를 내놓았다. 현지 소주들이 빠르게 시장을 점령하고 있으며 대마 성분이 함유된 소주까지 팔린다. 소주 유사품만 수십 종에 달하고 국내 식품안전관리인증(HACCP)을 받았다고 홍보하는 곳도 있다. 그렇다면 현지 소비자들은 소주의 맛을 잘 알고 마실까. 희석식 소주는 고순도 에탄올인 주정에 물을 타고 감미료 등을 첨가해 만든다. 다소 역한 느낌이 들 정도로 맛이 강한 편이다. 반면 동남아 소비자들은 도수가 낮고 달달한 소주를 선호한다. 현지 업체들은 이런 취향을 반영해 사과, 포도, 파인애플 등 과일즙을 첨가한 과실주를 선보이며 점유율을 끌어올렸다. 현지 생산이라 관세가 없고 물류비도 적어 가격 경쟁력에서 우위일 수밖에 없다. 이미 튼실한 유통망도 가지고 있다. 국내 주류업체들이 “우리만 소주를 만들 수 있다”고 안이하게 생각하거나 신흥시장을 감지하지 못하고 있을 때 매대는 유사품들이 점령하기 시작했다. 해법은 무엇일까. 종주국이라는 강점을 살려 차별화를 꾀해야 한다. 현지 양조장들은 불순물을 걸러내는 기술이 떨어지고 짝퉁 소주는 숙취도 심하다. ‘한국산 소주’라는 인증을 따로 만들어 격차를 벌릴 수 있다. 동남아에서 대중적으로 알려진 소주 브랜드는 한두 개에 그친다. 100년 역사를 가진 지방 소주 업체들이 여럿 있는 상황에서 다양한 브랜드를 소개할 수도 있다. 희석식 소주뿐만 아니라 전통 증류식 소주도 출시해 위스키에 맞설 수 있다. 소주와 맥주를 섞는 다양한 한국식 주도 문화를 전달하며 시장을 확대하는 방안도 있다. 현지 짝퉁 제품을 경계해야 하는 상황은 비단 소주뿐만이 아니다. 김치, 고추장 등 거의 모든 제품에서 비슷한 사례가 발생했다. 경각심을 높이지 않다 시장을 빼앗기는 것은 물론 낮은 품질로 K브랜드의 이미지만 타격을 받을 수 있다. 재점검할 시기다. 국내 소주 시장은 이미 포화 상태이며 공장 가동률은 하락하고 있다. 국내 제빵 브랜드 파리바게뜨가 바게트 원조국인 프랑스에 진출한 사례가 다른 분야에서도 나올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이유종 정책사회부 차장 pen@donga.com}

필리핀 마닐라에서 북동쪽으로 58km 떨어진 앙가트댐. 마닐라 일대 수돗물의 98%를 공급하고 약 70만 명이 사용할 수 있는 전력도 생산한다. 1967년 일본이 준공한 시설로 필리핀 정부는 2010년 공공 인프라 민영화 정책에 따라 국제 경쟁 입찰을 진행했고 한국수자원공사가 낙찰을 받았다. 필리핀이 다목적 댐 시설을 외국인투자가에게 매각한 첫 사례로 해외 수력발전소의 운영권을 인수한 국내 첫 사례이기도 하다. 하지만 외국 기업이 대형 공공 인프라의 운영권을 확보하자 필리핀 내부에서 논란이 일었고 2014년 수자원공사는 지분 40%만 확보하고 나머지 60%는 맥주 기업으로 잘 알려진 산미겔(San Miguel)에 넘겼다. 준공 이후 반세기 동안 별다른 시설 개선을 하지 않았던 앙가트댐은 매우 낡았다. 아날로그 기술로 지어져 발전량을 최대로 끌어내지도 못했다. 수자원공사는 시설 개선 사업을 추진했다. 2021년 금융권에서 발전설비 현대화에 필요한 돈을 빌려 발전기를 교체하기 시작했다. 발전기 9기 중 6기만 바꿨는데, 이전 발전량을 웃도는 전력이 생산됐다. 전력 판매 단가가 높은 시간대를 중심으로 발전 효율을 높였고 전기를 생산하지 않고 그대로 흘려보내던 ‘무효 방류’ 문제도 해결했다. 한국에서 댐, 정수장 등을 운영하던 노하우가 있어서 가능했던 일이다. 2020년 319억 원에 그쳤던 앙가트댐 발전소 매출은 지난해 547억 원으로 늘었고 첫 흑자도 기록했다. 수자원공사가 수력발전 시설 지분에 투자한 돈은 약 1000억 원이다. 댐 운영권이 최대 50년 보장되기 때문에 향후 상당한 수익을 기대할 수 있다. 게다가 수익, 배당금 외에도 부가적인 수혜가 발생했다. 수자원공사는 수력발전 시설 리모델링과 관련해 새로운 사업 기회를 포착할 수 있었다. 당장 필리핀에 시설 개선이 필요한 다목적댐만 135개다. 미국과 브라질, 캐나다, 러시아, 인도, 노르웨이 등에 시설 개선이 필요한 수력발전소가 넘치는 상황에서 더 넓은 시장에 진출할 수 있다. 해외 공공 인프라 사업은 실패하는 사례가 잦다. 또 장기간 투자해야 수익을 낼 수 있는 사업이 대부분이라 회수 기간이 길다. 매년 국정감사에서 “사업 초기 장밋빛 미래를 그렸던 것과 비교된다. 공기업이 해외 사업에 돈을 물 쓰듯 한다”는 비판도 단골로 받는다. 앙가트댐의 경우 배당금은커녕 수년간 운영 적자를 기록하기도 했다. 해외 자원 투자의 경우 사업을 진행하다가 경제성을 담보하기 어려워 낭패를 볼 때도 적지 않다. 하지만 이런 상황을 뛰어넘어야 새로운 시장이 열릴 수 있다. 한국도로공사는 중국 건설업체가 시공한 방글라데시 파드마대교(길이 6.15km)를 감리했다. 방글라데시는 오랜 침식 작용으로 대부분 모래 지형이다. 지하 100m를 파 내려가도 지지해줄 암반이 없다. 이런 혹독한 상황에서도 도로공사는 인천대교 감리 노하우 등을 바탕으로 꼼꼼하고 안전하게 감리했다. 공사 기간을 늦춘다는 오해까지 받을 정도였다. 결국 방글라데시는 2022년 6월 시공사가 아닌 감리 업체에 운영유지관리사업까지 맡겼다. 해외 공공사업은 유무형의 파급효과가 매우 크다. 쉽게 포기할 수는 없다. 중국과 일본도 이런 사정을 꿰뚫고 공적개발원조(ODA)를 활용해 해외 인프라 사업에 눈독을 들이고 있다. 이유종 정책사회부 차장 pen@donga.com}

23일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회의실에서 열린 국민연금법 개정안 공청회. 주은선 경기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국민연금 개혁은 적정소득 보장이라는 목표를 정확히 해야 한다. (현재 40%인) 소득대체율(받는 돈)을 50% 수준으로 올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윤석명 한국보건사회연구원 명예연구위원은 “국민연금 미적립 부채는 1825조 원(2023년 기준)이 넘는다. 소득대체율을 40%로 유지해도 2093년이 되면 미적립 부채는 국내총생산(GDP) 대비 383.9%가 된다”고 반박했다. 1988년 도입된 국민연금은 1998년과 2007년 두 차례 개혁이 단행돼 소득대체율 등을 조정했다. 이후 또다시 기금 안정화 문제가 제기됐고 2018년 문재인 정부는 4가지 개편안을 마련해 국회에 제출했다. 하지만 국회에선 단일안이 아니라며 논의를 사실상 거부했다. 연금개혁을 4대 개혁 과제 중 하나에 포함시킨 윤석열 정부는 지난해 9월 보험료율(내는 돈)을 9%에서 13%로 올리고 소득대체율은 40%에서 42%로 늘리는 단일안을 제시했다. 현재 국회에선 정부 개편안을 제외하고도 여야 보건복지위원들이 발의한 국민연금법 개정안만 29건이다. 여야는 보험료율을 13%로 올리는 방안에는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으나 소득대체율은 각각 42%와 44%로 이견을 보이고 있다. 또 여당은 국회 연금개혁특별위원회를 따로 설치하고 보험료율과 소득대체율을 조정하는 ‘모수개혁’과 함께 공무원연금, 퇴직연금 등을 연계해 전체 연금제도의 틀을 새로 짜는 구조개혁도 추진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반면 야당은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차원에서 모수개혁부터 먼저 추진하자고 한다. 문제는 말처럼 합의가 쉽지 않다는 점이다. 과거 전례를 살펴보면 여야가 이견을 보이는 소득대체율을 조정하는 데도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모수개혁과 구조개혁을 함께 추진해야 한다는 주장은 과거에도 풀지 못한 사안이다. 21대 국회에서 진통 끝에 여야는 보험료율 13%, 소득대체율 44%로 합의 직전까지 갔으나 모수개혁과 구조개혁을 함께 해야 한다는 여당의 반대로 무산됐다. 구조개혁은 반드시 필요하지만 이해관계자가 너무 많아 모수개혁과 함께 추진하려면 언제 합의될지 모를 일이다. 더불어민주당 소속 박주민 국회 보건복지위원장은 21일 모수개혁과 관련해 “복지위 차원에서 속도를 내면 다음 달이라도 가능하다”고 밝혔다. 야당은 정권 교체 가능성을 높게 점치고 있어 ‘뜨거운 감자’인 연금 개혁을 이번 정부에서 털고 가는 게 낫다고 판단해 속도를 내려는 것으로 보인다. 여당에서도 ‘야당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 있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다만 단서를 달았다. 국민의힘 연금개혁특별위원장을 맡고 있는 박수영 의원은 “모수개혁 통과 후 1년간 구조개혁을 양당이 추진한다는 정치적 합의를 한다면 모수개혁부터 먼저 처리할 수 있다”고 했다. 국민연금 개혁이 늦춰질수록 미래 세대는 더 많은 부담을 떠안을 수밖에 없다. 국민연금 개혁이 하루 늦어질 때마다 재정 부담이 1000억 원 가까이 늘기 때문이다. 논의만 하다 벌써 10년이란 시간을 허비했다. 일단 모수개혁으로 첫발을 떼고 구조개혁은 이후 추진할 수도 있다. 분명한 사실은 남은 시간이 별로 없다는 것이다.이유종 정책사회부 차장 pen@donga.com}

지난해 2월 6일 정부는 전국 의대 입학 정원을 3058명에서 5058명으로 늘렸다. 1998년 이후 27년 만에 의대 정원을 증원한 것이다. 조규홍 보건복지부 장관은 당시 “급속한 고령화로 늘어나는 의료 수요 등을 감안할 때 2035년까지 의사 수가 1만5000명 부족할 것이란 수급 전망을 토대로 의대 증원 규모를 결정했다”고 밝혔다. 의대 증원 정책에 반발한 전공의와 의대생은 수련병원과 학교를 떠났다. 현재 전공의와 의대생은 무엇을 하고 있을까. 전공의 과반은 수련병원이 아닌 다른 병의원에 취직했다. 휴학계를 제출한 의대생은 아르바이트를 하거나 밀린 공부를 하고 있다. 일부는 학교를 옮기려고 대학수학능력시험을 다시 쳤고 해외여행을 다녀온 사례도 있다. 의대생 단체는 올해도 휴학계를 제출하겠다고 밝혔고 의료계에선 3월 입학할 신입생도 사실상 집단 휴학을 할 것이라는 전망마저 나온다. 과거 이들이 돌아올 기회는 전혀 없었을까. 정부가 지난해 3월 20일 2025학년도 대학별 의대 입학 정원을 발표했을 때 전공의는 동요했다. 지방 의대를 중심으로 증원이 확정되자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하지만 전공의 단체가 나서 단속했다. 정부가 병원을 이탈한 전공의에게 처벌하지 않겠다고 밝혔을 때도 흔들렸다. 다만 당시 의대 교수들이 정부의 방침을 처벌로 오해하고 제자들인 전공의와 보조를 맞추기 위해 휴진을 결정하면서 복귀 가능성은 사라졌다. 정부가 방침을 바꿔 전공의들을 모두 사직 처분했을 때도 역시 전공의 내부에선 파장이 일었다. 역시 전공의 단체는 내부 단속에 들어갔다. 이들은 지난해 12월 신규 레지던트를 모집했을 때 가장 많이 흔들렸다. 1년 가까이 수련을 포기한 전공의들은 소중한 시간을 허비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고 심리적인 갈등이 많았다. 대형 병원 전공의 다수는 레지던트 지원을 심각하게 고민했다. 하지만 12·3 비상계엄으로 탄핵 정국에 들어가며 이런 움직임은 사라졌다. 올 3월 수련을 재개할 레지던트 모집엔 역시 지원이 저조했다. 그렇다면 이제 손을 놓고 있어야 할까. 정부는 의사 단체가 “의대 교육 방안을 내놓으라”고 요구한 만큼 이들을 설득할 만한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 교원과 시설 확보에도 필요한 예산만 제시할 게 아니라 언제까지 어떻게 확보할 수 있는지 구체적으로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내년도 의대 정원도 감원을 포함해 원점에서 검토하겠다고 밝힌 만큼 유연하게 협상에 임해야 한다. 의료계도 ‘2026학년도 의대 정원 0명’ 등 현실적이지 않은 주장은 접고 합리적인 방안을 내놓아야 한다. 각종 여론 조사에 따르면 의사가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여론이 여전히 우세하다. 병역 문제로 고민하는 전공의도 상당수 존재한다. 내년도 의대 정원이 확정되는 5월 말까지 남은 시간이 많지 않다. 의대 교수들이 제자인 전공의를 설득할 수도 있다. 의료 공백의 피해는 결국 고스란히 환자와 국민에게 돌아간다. 정부는 지난해 의료공백 대응과 수련병원 선지급금 등으로 건강보험 재정 2조8895억 원을 투입했다. 초유의 2년 연속 전공의 이탈과 의대생 휴학이 발생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정부와 의료계는 일단 만나서 소통해야 할 때다. 이유종 정책사회부 차장 pen@donga.com}

2019년부터 지난해까지 5년째 출산율 전국 1위에 오른 전남 영광군. ‘영광 굴비’로 대표되는 수산업과 농업, 제조업 등이 골고루 발달한 지역이지만 고령인구 증가, 청년층 유출 등 지방소멸 위험 징후는 곳곳에서 포착되고 있다. 1970년대 15만 명에 달하던 영광군 인구는 지속적인 감소로 2000년 7만3168명, 올해 10월 기준 5만1948명으로 줄었다. 저출생 고령화 현상이 심화되면서 전국 곳곳에선 인구소멸 위기가 코앞에 다가왔다는 아우성이 들린다. 한국고용정보원 분석에 따르면 올 3월 기준으로 전국 288개 시군구 중 소멸위험지역은 절반에 가까운 130곳에 달한다. 광역시 전체 45개 구군 중 소멸위험지역도 21개나 된다. 그렇다면 한국과 비슷한 사정을 겪는 일본은 어떨까. 일본은 1970년대부터 지방소멸 대응 정책을 펼쳤다. 5년간 인구감소율 10% 이상인 지역을 과소지역으로 정의하고 이들 지역을 대상으로 긴급조치를 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만들었다. 지방창생 정책을 지속적으로 추진하며 지방 인구소멸을 최대한 막는 데 노력을 기울였다. 특히 지역부흥협력대 사업은 상당한 성과를 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는 일본 총무성이 2009년부터 추진한 사업으로 1인당 연간 480만 엔(약 4500만 원) 상당의 지원을 받고 인구 과소지역으로 주민등록을 옮기면 특산품 개발, 농수산업 종사, 주민 지원 등을 하며 지역에 정착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제도다. 2022년 기준으로 6477명이 과소지역에 주민등록을 했으며 1∼3년 동안 정부 지원을 받은 뒤 65%가 해당 지자체나 인근 지자체에 정착했다. 정착한 이들의 30%가량은 카페, 레스토랑, 게스트하우스 등을 열며 인구소멸 지역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한국 정부도 2021년 10월 출생률, 고령인구, 유소년인구, 생산가능인구 등을 고려해 인구감소지역을 지정하고 있다. 지금까지 기초자치단체 89곳이 지정됐는데 이들 지역에는 2022년부터 2031년까지 매년 1조 원씩 총 10조 원의 지방소멸 대응기금이 지원되고 있다. 그런데 사업 초반임에도 벌써 잡음이 나온다. 국회 예산정책처에 따르면 올해 정부는 인구감소지역 대응 사업 예산을 8조9000억 원이라고 밝혔으나 이 중 6조1000억 원(68.5%)은 인구감소지역 밖에서 시행되는 사업이거나 관련성이 떨어지는 사업의 예산이다. 일부 지자체는 신항만 개발, 재해안전항만구축 등을 인구감소 대응 예산으로 분류하기도 했다. 한 자치단체는 분수 광장을 설치하면서 사업비의 절반가량인 10억 원을 ‘지방소멸대응기금’으로 집행했다가 논란이 되기도 했다. 사실 인구감소지역 상황은 지역마다 다르다. 일부 지역의 경우 출산율이 의외로 높은 편이기도 하다. 글 처음에 언급한 전남 영광군은 2022년 기준으로 합계출산율이 1.803명에 달한다. 또 전북 임실군(1.560명), 경북 군위군(1.486명) 등도 인구감소지역임에도 비교적 출산율이 높았다. 출산율 높은 인구감소지역의 경우 청년층 수도권 이동이 지역 인구 감소의 주원인이다. 반대로 생각하면 이들이 정착할 수 있는 지원책을 마련한다면 인구 감소가 상당 수준 늦춰질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지역 대학 지원, 지역 일자리 창출 등 맞춤형 지원이 이들의 정착률을 높일 수 있을 것이다.이유종 정책사회부 차장 pen@donga.com}

지난해 말 기준 퇴직연금 적립금은 382조4000억 원. 최근 10년간 연평균 성장률은 15%로 적립금 규모가 두 배로 늘어나기까지 채 5년이 안 걸렸다. 최근 발간된 자본시장연구원 보고서에 따르면 2040년 퇴직연금 적립금은 국민연금 기금(1755조 원) 규모를 뛰어넘는 최대 2063조 원에 달할 것으로 예상된다. 그렇다면 돈은 잘 굴리고 있을까. 퇴직연금 적립금의 최근 10년 평균 투자수익률은 2.07%에 불과했다. 증시 호황으로 역대 최대 실적을 낸 지난해에도 5.26%에 그쳤다. 마찬가지로 보수적으로 운용하는 국민연금의 경우 장기 수익률이 연평균 5.92%이고 지난해엔 13.59%였다. 국민연금 정도로만 투자해도 현재 2배 이상의 성과를 낼 수 있는 셈이다. 왜 이렇게 성과가 저조한 것일까. 가입자가 직접 관리할 수 있는 퇴직연금은 크게 계약형과 기금형으로 나뉜다. 계약형은 가입자가 민간 금융기관인 퇴직연금 사업자와 직접 계약을 맺고 스스로 투자 상품을 선택해 적립금을 운용하는 방식이다. 반면 기금형은 국민연금처럼 투자전문가 집단이 가입자를 대신해 적립금을 관리하면서 기금을 만들어 투자하거나 민간 금융기관에 투자를 위탁한다. 문제는 계약형의 경우 투자 정보가 부족한 가입자들이 원금마저 잃지 않기 위해 은행예금 등 원금과 이자가 보장되는 금융상품에 주로 투자하고 장기간 방치하기 일쑤란 점이다. 국내 퇴직연금 전체 적립금에서 원리금 보장형 상품의 투자 비중은 90%에 가깝다. 저조한 수익률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다. 반면 기금형은 가입자들이 장기간 방치하더라도 전문가들이 주식, 대체상품 등에 공격적으로 투자할 수 있다. 기금의 덩치가 커질수록 ‘규모의 경제’를 활용해 수익률을 더 높일 수 있다. 국민연금의 경우 올해 8월 말 기준으로 주식과 대체투자에만 적립금의 63.3%를 투자했다. 다만 퇴직연금이 대체로 기금형으로 운용되는 선진국과 달리 국내에는 30명 이하 사업장에 한정된 ‘중소기업 퇴직연금기금’을 빼면 기금형 퇴직연금이 거의 없는 실정이다. 해외 모범 사례도 있다. 호주의 퇴직연금은 여러 기업의 퇴직연금을 묶어 운영하는 기금형인데, 가입자들이 수익률에 따라 다른 기금으로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어 수익률을 높이기 위한 수탁법인 간 경쟁이 매우 치열하다. 2022년 기준으로 10년 투자 수익률이 연평균 7.2%로 맥쿼리 같은 대기업 등 직장인들의 퇴직연금을 모아 운용하는 기금만 12개다. 호주 정부는 가입자가 투자 결정을 하지 않더라도 ‘평타’ 이상의 수익률을 내는 ‘디폴트옵션’(사전지정운용제도) 상품에 가입할 수 있게 하고 관리 감독과 공시 의무를 강화하고 있다. 2005년 12월 시작된 퇴직연금 제도는 내년 20주년을 맞는다. 김문수 고용노동부 장관은 올해 8월 취임한 뒤 기금화 등 다양한 개선 방안을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국회에서도 국민연금공단에 퇴직연금 사업자 지위를 부여하는 내용의 근로자퇴직급여보장법 개정안이 발의된 상태다. 다만 국민연금공단이 퇴직연금까지 위탁 운용하는 시스템은 공공 영역의 과밀화라는 부작용이 생길 수 있다. 어떤 방식이든 직장인이 원하는 것은 국민연금과 퇴직연금으로 안정적인 노후를 맞이하는 것이다. 그렇게 될 수 있도록 기금화를 포함한 시스템 개선이 시급하다. 이유종 정책사회부 차장 pen@donga.com}

미국 아이비리그 대학들은 매년 이맘때가 되면 성적표를 하나씩 발표한다. 대학 기금 회계연도는 매년 7월 시작해 이듬해 6월 종료되는데 연간 실적이 10월경 공개되는 것이다. 올해 최고 수익률을 기록한 대학은 컬럼비아대로 11.5%에 달했다. 이어 브라운대(11.3%), 하버드대(9.6%), 코넬대(8.7%) 순이었다. 미국 명문대의 운용 자산은 수백억 달러, 한국 돈으로 수십조 원에 달한다. 올해 6월 기준으로 하버드대는 532억 달러(약 73조 원), 예일대는 414억 달러(약 57조 원), 프린스턴대는 341억 달러(약 47조 원)를 운용하고 있다. 하버드대의 기금 규모는 인구 1170만 명인 튀니지의 국내총생산(GDP)과 비슷하다. 수익만 해도 한화로 조 단위다. 하버드대는 기금 운용으로 지난해 25억 달러(약 3조4000억 원)를, 예일대는 23억 달러(약 3조2000억 원)를 벌었다. 이 돈으로 하버드대는 올해 예산의 37%를, 예일대는 예산 34%를 마련했다. 그들도 시작은 미약했다. 하버드대는 1974년 하버드매니지먼트컴퍼니(HMC)를 설립하고 종잣돈 3억 달러(약 4000억 원)로 처음 기금 운용을 시작했다. 예일대는 1985년 월스트리트 출신 데이비드 스웬슨을 영입해 10억 달러(약 1조4000억 원) 규모로 출발했다. 스웬슨이 활약한 35년 동안 예일대 기금은 연평균 13% 이상의 수익률을 기록했고 대학 예산 기여도는 10%대에서 30%대로 늘었다. 릭 레빈 전 예일대 총장은 스웬슨을 가리켜 “예일대 역사상 가장 큰 기부자”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대학들은 어떻게 돈을 굴릴까. 보통 HMC처럼 운용 회사를 따로 두고 주식, 채권, 헤지펀드, 기업 인수합병(M&A), 부동산 등에 투자한다. 여느 사모펀드와 다를 바 없다. 월가 출신 동문 등 적게는 수십 명에서 많게는 수백 명이 운용역으로 참여한다. 기금 규모는 상대적으로 작지만 상당한 성과를 내는 대학도 많다. 미국 텍사스주 베일러대는 20억 달러(약 2조8000억 원)의 기금을 운용하는데, 최근 5년간 연평균 수익률이 10.9%로 브라운대(13.3%)를 제외한 나머지 아이비리그 대학보다 높았다. 편중되지 않은 투자 포트폴리오를 만들어 위험 부담을 최소화하고 안정적인 수익을 도모한 결과다. 기금 운용도 대학이 간섭하는 대신 운용 회사에 최대한 독립성을 보장하고 그 대신 운용 결과를 투명하게 공개하고 평가한다. 지난해 국내 사립대 291곳의 교비회계 적립금은 총 11조2931억 원에 달했다. 대부분 투자금을 예금 등 안전자산에 맡겼고 61개 대학만 주식에 1조6506억 원을 투자했다. 100억 원 이상 목돈을 투자한 대학은 26곳에 그쳤다. 그런데 이들 가운데 1원이라도 수익을 낸 대학은 7곳뿐이었다. 같은 기간 증시 호황으로 국민연금 운용 수익률은 13.59%에 달했다. 국내 대학들은 최근 학령인구 감소와 등록금 동결로 재정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다. 급여가 적어 우수 교원들이 해외로 유출되고 있다. 물론 대학 자산은 부동산이 많아 쉽게 수익을 내기 어렵고 당국 규제로 대부분 안전자산에 투자할 수밖에 없다는 현실도 엄연하다. 그렇다면 이제라도 교육당국과 대학이 백년대계를 위한 기금 운용 시스템을 갖추기 위해 머리를 맞대야 하는 게 아닐까.이유종 정책사회부 차장 pe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