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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미국 대사관에서 유학 비자 인터뷰를 마치면 “SNS 계정 검토 후 이상이 없으면 승인될 것”이란 안내를 받는다. 올 6월 소셜미디어 심사가 의무화됐기 때문이다. 유학 준비생과 학부모 사이에선 “정치적 의견이나 시위대가 포함된 사진은 올리지 말고 일상적이고 긍정적인 게시물만 올리라”는 팁이 돈다. 내년부터는 유학이 아니라 괌이나 사이판 여행을 가려 해도 미리 SNS를 점검해야 할 판이다. 미국 정부가 전자여행허가제(ESTA) 입국자에 대해서도 SNS를 들여다보겠다고 밝혔기 때문이다. ▷미국 세관국경보호국(CBP)은 10일 한국, 영국, 일본 등 비자면제프로그램(VWP)에 가입한 42개국 단기 방문자를 대상으로 최근 5년간 사용한 소셜미디어 정보 제출을 의무화하겠다고 밝혔다. 최근 5년간 쓴 전화번호, 10년간 이용한 e메일 주소는 물론이고 홍채와 DNA 등 생체 정보까지 요구하기로 했다. 휴가철을 맞아 돈 쓰러 온 관광객을 대상으로 유학·연수생이나 방문연구원 수준의 신원 확인을 하겠다는 것이다. 새 규정은 60일 동안 의견 수렴을 거쳐 이르면 내년 초부터 시행된다. ▷이번 조치는 국경 문턱을 높이는 트럼프 정부 반(反)이민 정책의 일환이다. 올 초 출범한 트럼프 2기 정부는 아프가니스탄, 이란, 소말리아 등 12개국 국민의 입국을 전면 금지했고 전문직 취업비자(H-1B) 수수료는 100배나 올려 개당 10만 달러(약 1억4800만 원)를 받고 있다. 간신히 입국했더라도 안심할 수 없다. 반유대주의 시위에 참여했다거나 과속 같은 경미한 교통 위반을 저질렀다는 등의 이유로 취소된 비자가 올해만 벌써 8만5000건에 달한다. ▷돈이 아주 많으면 강화된 출입국 규제를 피할 수 있다. ESTA의 허들을 높이겠다고 한 날,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정말 신나는 소식”이라며 직접 ‘골드카드’ 출시를 홍보했다. 100만 달러(약 14억8000만 원)를 내고 트럼프 대통령 얼굴이 담긴 황금색 카드를 사면 신속한 신원 확인을 거쳐 영주권을 준다는 것이다. 500만 달러(약 74억 원)를 더 내면 세제 혜택이 추가된 플래티넘 카드를, 연간 200만 달러(약 29억6000만 원)를 내면 기업용 골드카드를 받을 수 있다. ▷빗장을 걸어 잠근 탓에 미국은 올해 세계 184개국 중 유일하게 관광 수입이 줄어드는 나라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 고환율까지 겹치면서 올 10월까지 방미한 한국인도 8만3000명 줄었다. 내년에 5년 치 SNS 정보 제출이 의무화되면 미국은 2026 북중미 월드컵 특수도 온전히 누리기 어려울 것으로 전망된다. 더 이상 ‘기회의 땅’도, ‘자유의 땅’도, ‘열린 사회’도 아닌 미국에 사생활을 검열받아 가며 여행 갈 필요가 있을지 자문(自問)하는 사람이 더 늘어날 것 같다.장원재 논설위원 peacechaos@donga.com}

“현재 기술로 불가능하며 가까운 미래에도 힘들다.” 지진 예측에 대한 미국 지질조사국(USGS)의 공식 입장이다. 할 수 있는 건 과거 사례 등을 토대로 ‘30년 내 대지진 발생 확률 80%’ 같은 장기 전망을 내놓는 정도다. 일본 정부가 9일 홋카이도·산리쿠 앞바다에 처음으로 발령한 ‘후발지진 주의보’ 역시 규모 7.0 이상 지진 발생 지역에서 일주일 내 규모 8.0 이상 지진 발생 확률이 1%라는 경험치에서 비롯됐다. ‘겨우 1%’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이 지역의 평소 대지진 발생 확률(0.1%)과 비교하면 10배나 된다. ▷매년 2000건 안팎의 지진이 발생하는 일본은 전국에 1000곳 이상의 지진관측소를 운영하며 지진파가 관측되는 즉시 속보를 전달한다. 하지만 이를 통해 확보할 수 있는 대피 시간은 고작 몇 초에 불과하다. 일본 정부가 2022년 ‘후발지진 주의보’를 도입한 것도 이 때문이다. 첫 지진보다 규모가 작은 여진과 반대로 후발지진은 규모가 더 크다. 발생할 경우 한 번 흔들린 지역이 더 크게 흔들리면서 피해가 기하급수적으로 커지기 때문에 일주일 동안은 언제든 대피할 태세로 지내 달라는 취지다. ▷8일 밤 규모 7.5 지진이 발생한 일본 아오모리현 앞바다는 태평양판과 북미판이 만나는 경계에 있어 역사적으로 대지진이 반복됐다. 가장 최근에는 2만2000여 명이 희생된 2011년 동일본 대지진이 인근에서 발생했다. 당시에도 규모 7.3의 예진이 발생하고 이틀 후 규모 9.0의 본진이 닥쳤다. 이번 지진으로 인한 사망자가 아직 보고되지 않았음에도 일본 언론에서 과도할 정도로 주의를 촉구하는 건 14년 전의 생생한 경험 때문이다. 당시 지진 발생 후 쓰나미가 해안에 도달하는 데 10∼20분밖에 걸리지 않아 미처 가족을 데리고 피하지 못한 희생자가 많았다. ▷후발지진 주의보가 발령된 홋카이도·산리쿠 지역에는 불안과 일상이 공존하는 중이다. 주민들은 대피 복장으로 신발과 비상용품 가방을 머리맡에 둔 채 잠을 청한다. 마트에는 생수와 손전등, 통조림 등을 사려는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등교한 학생들은 금이 간 창문에 테이프를 붙인 교실에서 수업을 듣는다. 이 지역에선 2년에 1번꼴로 규모 7.0 이상의 지진이 발생하는데, 그때마다 모든 사회 시스템을 멈출 수 없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홋카이도·산리쿠 지역을 찾은 한국인 관광객은 지난해 100만 명에 달했다. 만에 하나 대지진이 발생할 경우 남의 일이 아닌 것이다. 또 일본 정부는 오사카 인근에서 난카이 대지진이 30년 내 발생할 확률을 60∼90%, 도쿄 등 수도권에서 직하형 지진이 30년 내 발생할 확률을 70%로 추정한다. 일본 여행 전 지진 대피 요령을 숙지해야 한다고 전문가들이 강조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장원재 논설위원 peacechaos@donga.com}

2022년 공개된 한국 정부와 미국계 사모펀드 론스타의 투자자-국가 간 소송(ISD) 판정문에는 ‘속이고 튀었다(Cheat and Run)’는 문구가 6번 나온다. 외환카드 주가조작으로 유죄를 선고받은 론스타는 단순한 ‘먹튀(Eat and Run)’가 아니라 부정을 저지른 당사자란 취지다. 하지만 국제투자분쟁해결센터(ICSID)는 한국 정부 역시 부당하게 매각 승인을 보류했다며 론스타가 청구한 금액의 4.6%인 3200억 원을 배상하라고 했다. 한국 정부는 불복했고 ICSID는 18일 판정을 뒤집어 “한국 정부에 배상 책임이 없다”고 결론 내렸다. ▷한국 정부와 론스타의 악연은 2003년 론스타가 외환은행 지분 51%를 사들이며 시작됐다. “외환은행을 세계적 은행으로 키우겠다”고 약속했던 론스타는 주가가 오르자 3년 만에 HSBC에 은행을 매각하겠다고 나서 ‘먹튀’ 논란이 일었다. 검찰은 헐값 매각 및 외환카드 주가조작 혐의로 관계자들을 기소했고, 금융 당국은 “재판 진행 중”이란 이유로 매각 승인을 미뤘다. 모든 재판이 마무리된 2012년에야 론스타는 하나금융에 외환은행을 팔고 철수하며 4조7000억 원의 차익을 챙겼다. ▷론스타는 9년 만에 300% 넘는 수익을 올렸지만 만족하지 않았다. 철수 직후 “매각이 지연돼 손해를 봤다”며 ISD를 제기한 것이다. 청구액은 ISD 사상 최대인 6조9000억 원이었다. 이후 13년 동안 소송전이 이어졌다. ICSID는 이번에 원판정을 뒤집으며 ‘절차상 하자’를 주요 이유로 들었다. 원판정이 한국 정부와 무관한 국제상업회의소(ICC) 중재 판정문을 결정적 근거로 삼으면서 한국 측의 변론권과 반대신문권조차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이다.▷ICSID에서 판정 취소 신청이 전부 받아들여진 건 503건 중 8건뿐이다. 그만큼 희박한 확률을 뚫은 실무자들의 공은 평가할 만하다. 다만 과거 “승산이 낮은 희망 고문”이라며 취소 신청을 부정적으로 평가했던 더불어민주당이 이제 와 “명백한 이재명 정부의 성과”라고 자화자찬하는 건 문제가 있다. 한동훈 전 국민의힘 대표는 취소 신청 당시 자신이 법무부 장관이었다는 점을 내세운다. 하지만 한 전 대표가 직접 수사하지는 않았더라도 그가 포함된 수사팀의 외환은행 헐값 매각 수사가 무죄 판결로 마무리된 사실도 간과돼선 안 된다. 2006년 대검 중수부 1, 2과는 각각 외환카드 주가조작 사건과 외환은행 헐값 매각 사건을 수사했다. 한 전 대표가 참여한 주가조작 사건에선 2012년 전 론스타코리아 대표에게 유죄 판결이 내려졌다. 하지만 이복현 전 금감원장 등이 수사한 헐값 매각 사건에서는 2010년 전 재정경제부 당국자 등에게 무죄가 선고됐다. ▷한국 정부는 이번 승소로 취소 소송 비용 73억 원을 론스타로부터 받게 됐다. 하지만 원판정 때 국민 세금으로 지출한 변호사 비용 478억 원은 돌려받을 길이 요원하다. 금융 당국이 투기자본의 속성을 간파하지 못해 막대한 국부가 유출된 것도 돌이킬 수 없는 일이다. 정치권과 정부는 낯 뜨거운 공 다툼을 할 게 아니라, 론스타가 예고한 새 중재재판과 남은 ISD 6건에서 승소하는 데 전력을 다해야 한다.장원재 논설위원 peacechaos@donga.com}

최근 한 일본 방송사는 서울 도심에서 일본인 모녀가 음주 차량에 치여 어머니가 숨진 사건을 보도하며 “한국의 음주운전 적발 건수는 일본의 6배”라고 전했다. 실제로 지난해 음주운전 적발 건수는 한국이 11만8874건, 일본은 2만1285건으로 한국이 일본의 5.6배다. 일본 인구가 한국의 2.4배인 걸 감안하면 인구 대비 적발 건수는 한국이 13배나 된다. 하지만 일본도 과거에는 음주운전이 만연했다. 음주운전 적발 건수가 가장 많았던 1997년에는 34만3593건으로 같은 해 한국보다 5만 건가량 많았다. 하지만 지금은 정점 대비 6% 수준으로 음주운전을 줄였다. 어떻게 이런 드라마틱한 변화를 만들었을까.日보다 적었던 韓 음주운전, 지금은 6배 일본은 1999년 도쿄에서 발생한 ‘도메이 고속도로 참사’를 계기로 음주운전 처벌 수위를 크게 올렸다. 당시 만취한 트럭 운전사가 가족 여행 중이던 자가용을 들이받아 뒷좌석에 있던 1세, 3세 자매가 불에 타 숨졌다. 피해 차량이 불길에 휩싸인 모습이 카메라에 생생하게 잡혔고, 아이들이 “뜨겁다”는 마지막 말을 남겼다는 소식이 전해지며 일본 전역이 슬픔에 잠겼다. 재판에서 트럭 운전사가 고작 4년형을 선고받자 슬픔은 분노가 됐다. 자매의 아버지는 “이게 정의냐”며 전국을 돌며 서명 운동을 벌였고, 국회는 위험운전 치사상죄를 만들어 음주운전 사망 사고에 최대 징역 20년을 선고할 수 있게 했다. 두 번째 전환점은 2006년 후쿠오카에서 발생한 ‘나카미치 대교 참사’였다. 만취한 시 직원이 몰던 자동차가 일가족이 탄 차를 들이받아 바다에 빠뜨린 사고로 1세, 3세, 4세 삼남매가 익사했다. 가해자는 20년형을 선고받았지만, 옆에서 음주운전을 지켜본 동승자는 기소조차 되지 않았다. 국민 여론이 재차 들끓었고 이듬해 다시 법이 바뀌었다. 음주운전을 방조하거나 차량, 주류를 제공한 사람까지 처벌 대상에 포함된 것이다. 법 개정은 행정부의 단속 및 사법부의 처벌로 이어졌다. 일본에선 지난해만 622명이 음주운전 차량 동승으로, 121명이 차량·주류 제공으로 적발됐다. 법원은 음주운전을 말리지 않은 동승자에게 2년 안팎의 실형까지 내리고 있다. 그 결과 음식점에 차를 가져가면 종업원이 “식사 후 운전할 거냐”고 먼저 묻고 음주한 경우 적극적으로 운전을 말리게 됐다. 범정부 캠페인도 지속적으로 이뤄졌다. ‘음주운전은 절대 하지도, 시키지도, 용서하지도, 보고 넘기지도 말자’는 구호가 20년 가까이 포스터, 스티커, 만화 등으로 반복되며 국민 머릿속에 각인됐다. 지자체도 ‘음주운전 근절의 날’을 만들고 “음주운전하면 패가망신한다”는 메시지를 반복적으로 전파하고 있다. 지난해에는 음주운전의 범위를 넓히며 음주 자전거에 대한 처벌도 명문화했다. 이에 따라 술을 마신 채 자전거를 탔다가 실형을 선고받는 사례도 나오고 있다. 요약하면 일관된 정책, 강도 높고 실효성 있는 처벌, 지속적인 캠페인 등이 음주운전을 크게 줄인 요인이라 할 수 있다.동승자 처벌 규정 없는 韓 한국도 2018년 윤창호법이 생기며 음주운전으로 사망 사고를 냈을 때 무기징역까지 선고할 수 있게 됐다. 하지만 음주운전 치사에 대한 대법원 양형 기준이 최대 8년이다 보니 만취 상태로 사망 사고를 내고도 징역 7, 8년을 선고받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동승자의 경우에는 일본처럼 도로교통법상 명문화된 처벌 규정도 없다. 아쉬운 대로 형법상 방조죄를 끌어와 적용하고 있지만 실제 기소까지 이어지는 경우는 많지 않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캠페인 구호가 바뀌는 등 지속적 홍보도 요원하다. 이런 상황에서 한일 간 음주운전 격차가 더 벌어지지 않으면 그나마 다행일 것이다.장원재 논설위원 peacechaos@donga.com}

2000년대 중반 판교, 위례 등 2기 신도시 물량이 쏟아질 때 1순위 청약통장은 많게는 수천만 원에 거래됐다. 불법 거래임에도 수도권 주택가 곳곳에 ‘청약통장 고가 매입’ 광고물이 붙었다. 당시만 해도 ‘황금알’로 불렸던 청약통장이 최근에는 ‘찬밥 신세’가 됐다. 해지가 급증하면서 한때 온 국민이 가입하다시피 했던 청약통장 가입자가 3년 만에 225만 명이나 줄어든 것이다. ▷청약통장을 외면하는 건 원하는 곳에 당첨되기가 ‘하늘의 별 따기’이기 때문이다. 올해 서울 아파트 일반분양은 7358채로 전년 대비 30%나 줄었다. 서울의 재개발·재건축 중 착공에 들어간 물량은 10채 중 1채뿐이라 당분간 대규모 공급도 기대하기 어렵다. 공급이 줄면서 청약 경쟁률은 천정부지로 치솟는 중이다. 최근 서울에선 4인 가족이 만점(69점)으로도 떨어지는 사례가 속출하고 있다. 1, 2인 가구는 사실상 당첨이 불가능하니 통장을 유지할 필요를 못 느낄 수밖에 없다. 반면 지방에는 미분양 물량이 많아 굳이 청약통장이 필요하지 않다. ▷운이 좋아 인기 지역에서 신혼부부, 생애 최초, 신생아 특별공급에 당첨돼도 문제다. 원자재 가격과 인건비가 오른 탓에 서울 민간 아파트 분양가는 3.3㎡당 4547만 원으로 7년 만에 2배가 됐다. 여기에 대출 규제 때문에 은행에서 중도금과 잔금을 빌리기도 어렵다. ‘갭 투자’ 규제로 전세를 주고 잔금을 낼 수도 없다. 예를 들어 10일 청약을 시작한 서초구 반포동의 84㎡ 아파트는 분양가가 27억 원인데 10·15 대책에 따라 은행 대출은 2억 원까지만 가능하다. 주변 시세와 비교하면 30억 넘게 차익이 예상되지만 현금 25억 원 이상이 필요하다 보니 ‘그림의 떡’이다. 무주택 청년 중에는 못 먹는 떡을 노리는 것보다 통장을 해지하고 주식과 코인 투자로 돌아서는 경우가 늘고 있다. ▷1977년 도입된 청약통장은 그동안 ‘중산층으로 가는 사다리’ 역할을 했다. 목돈이 없어도 매달 성실하게 돈을 모으면 언젠가 번듯한 내 집 마련이 가능하다는 희망이 통장에 차곡차곡 쌓였다. 그러나 최근 청약통장을 해지하는 청년들은 “더 이상 월급을 모아 서울 집을 사는 게 불가능한 시대가 됐다”고 입을 모은다. 거주가 불안한 청년들은 결혼과 출산에도 적극적으로 나서기 어려울 수밖에 없다. ▷다만 부동산 전문가들은 청약통장 해지를 고민하는 청년들에게 “월 납입액을 줄이거나 납입을 중단하더라도 통장을 일단 유지하는 게 좋다”고 조언한다. 부동산 시장은 사이클이 있기 때문에 일단 통장을 갖고 있으면 추후 공급이 몰릴 때 기회를 잡을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20여 년 전 2기 신도시 분양 때도 물량이 한꺼번에 쏟아지며 일부 단지가 미달되거나 낮은 경쟁률을 기록했지만, 이들 단지도 나중에 ‘알짜’가 됐다.장원재 논설위원 peacechaos@donga.com}

지난달 31일 열린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 만찬은 한마디로 우리의 멋과 맛이 어우러진 자리였다.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케데헌)의 실제 모델인 배우 차은우가 사회를 봤고, 가수 지드래곤은 갓을 쓰고 축하 공연을 했다. 한국계 셰프 에드워드 리가 화합의 의미를 담아 나물 비빔밥을 차려냈다. 싱가포르 총리와 일본 외상, 멕시코 경제장관 등이 “스펙터클한 갈라 디너 쇼”라며 사진과 동영상을 공유했다. 안와르 이브라힘 말레이시아 총리는 ‘K팝이여 영원하라(Kpop Forever)’란 해시태그까지 달았다. ▷정부는 지난해 6월 경주를 APEC 정상회의 개최지로 선정하면서 ‘문화의 멋’을 선보일 기회라는 걸 이유로 들었다. 천년고도 경주에서 전통과 현대를 아우르는 ‘소프트 파워’를 보여주겠다는 구상이었다. 한미·한중 정상회담을 공식 행사장인 화백컨벤션센터 대신 경주박물관에서 연 것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게 천마총 금관 모형을 선물한 것도 ‘한국적 아름다움’을 보여주려는 시도였다. 신라 금관 6점 합동 전시는 이를 관람한 정상들을 매료시킨 기획이었다. ▷정상들과 기업인들을 사로잡은 것 가운데 ‘한국의 맛’을 빼놓을 수 없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이재명 대통령에게 “(선물 받은) 황남빵을 맛있게 먹었다”고 말한 사실이 전해지며 황남빵 매장 앞에는 긴 줄이 생겼다. 이재용 정의선 회장과 ‘치맥 회동’을 한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는 “한국 치킨은 세계 최고”라며 엄지를 치켜세웠다. CNN은 세 거부의 회동 소식을 전하며 “치맥은 한국을 방문하는 누구나 꼭 먹어야 할 조합”이란 설명을 달았다. 라면과 호떡, 찰보리빵, 약과, 호두과자 등도 행사장 안팎에서 좋은 평가를 받으며 K푸드의 저변을 한층 확장시켰다. ▷K뷰티 열기도 뜨거웠다. 20대 후반인 캐럴라인 레빗 미 백악관 대변인은 국내 브랜드 화장품 13종을 직접 구입하고 인증샷과 함께 ‘한국 스킨케어 추천 아이템’이란 글을 남겼다. 조선미녀 인삼아이크림 등 이름만 봐도 한국산인 동시에 호기심을 자극할 법한 제품들이었다. 마크 카니 캐나다 총리의 배우자인 다이애나 폭스 카니 여사는 김혜경 여사에게 “딸이 사 오라며 K화장품 리스트를 줬다”고 말해 웃음을 자아냈다. APEC 기간 경주 시내 화장품 매장에는 세계적인 명사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APEC은 정치·경제 지도자의 모임이지만 이번 회의에서는 K컬처가 또 하나의 주역이었다. 천년사찰 불국사를 돌아보며 ‘어메이징’을 연발한 국제통화기금(IMF) 총재, 지드래곤 공연을 직관한 덕분에 “주변의 부러움을 샀다”고 말한 싱가포르 총리 배우자 등에게 한국의 소프트파워가 선사한 감동적인 순간이 오래 기억되리라 믿는다. 장원재 논설위원 peacechaos@donga.com}

한국에서 근대적 인구조사가 시작된 건 1925년으로 일본, 대만보다 5년 늦다. 일제가 3·1운동의 영향으로 조사 계획을 5년 연기한 탓이다. 실제로 1920년 5월 28일자 동아일보를 보면 사이토 마코토 조선 총독이 일본 기자에게 “조사원으로 활용할 고등보통학교(중고교) 상급생과 졸업생이 모두 독립사상을 갖고 있어 곤란하다”며 하소연하는 대목이 나온다. 우여곡절 끝에 5년 뒤 시작됐지만, ‘호구조사 나왔냐’는 말이 오늘날까지 핀잔으로 통할 정도로 조사에 대한 한국인들의 거부감은 심했다.▷일제가 수탈 목적으로 한 조사라 더 그랬겠지만 사실 생면부지의 사람이 사생활을 캐묻는 걸 좋아하는 사람은 드물다. 현재 시행 중인 인구주택총조사 조사에는 직장 이름과 직책, 결혼 및 자녀 계획, 1인 가구가 된 이유 등 요즘 친인척도 쉽게 물어보기 어려운 내용을 묻는 항목이 포함돼 있다. 정부는 10년 전 전수조사를 폐지하고 13개 항목은 행정자료를 활용하며 조사를 간소화했지만, 여전히 조사원이 물어야 할 항목이 42개에 달한다. 올해도 조사원 3만 명이 전체의 20%인 500만 표본 가구를 방문할 계획이다.▷100년 전 첫 조사에서 이름, 성, 연령, 결혼 유무, 국적 등 5개뿐이던 조사 항목이 늘어난 건 사회가 복잡하고 다양해졌기 때문이다. 외국인이 늘면서 한국 입국 시기, 한국어 실력, 가정에서 사용하는 언어 등의 항목이 포함된 게 대표적이다. 5년 전 반려동물도 조사 항목에 포함됐다. 시대 변화와 함께 빠진 항목도 있다. 1960년대는 화장실 형태, 1970년대는 상수도 시설 유무, 1980년대는 목욕 시설 유무를 물었지만 지금은 위생 관련 항목은 묻지 않는다. 컴퓨터와 인터넷을 사용하는지 묻는 항목은 2000년에 처음 포함됐다가 곧 사라졌다.▷세금을 걷고, 군대를 편성하기 위한 인구조사는 기원전 4000년경 바빌로니아에서 시작됐을 정도로 그 역사가 깊다. 인구조사를 뜻하는 ‘센서스’도 로마 시대 인구와 재산을 조사하던 관직 이름 ‘켄소르(Censor)’에서 나왔다. 지금은 국제통계협회(ISI)의 권고에 따라 대부분의 나라가 5년 또는 10년마다 인구조사를 실시한다. 인구가 14억 명인 중국도 조사원 700만 명을 투입해 10년마다 인구조사를 한다. 세계 최대 인구 대국인 인도만 2011년 이후 아직까지 인구조사를 못 한 상태다.▷100주년을 맞은 인구주택총조사는 이달 22일부터 다음 달 18일까지 진행 중이다. 대면 조사가 부담스럽다면 온라인, 모바일, 전화로도 답변할 수 있다고 한다. 인구주택총조사는 ‘통계의 어머니’로 불린다. 모든 통계의 ‘모집단’을 구성하며 고용, 복지, 주택, 교육, 교통 등 다양한 정책을 수립할 때 활용되기 때문이다. 100주년에 걸맞은 내실 있는 조사가 되기를 바란다.장원재 논설위원 peacechaos@donga.com}

영국 가디언은 지난달 “쥐가 이겼다”는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 2년 전 ‘쥐와의 전쟁’을 선언하며 미국 뉴욕시가 임명한 방역 책임자 ‘쥐 차르’가 사임했다는 내용이었다. 뉴욕에 서식하는 쥐는 300만 마리로 추정되는데, 질식 가스와 피임약까지 살포하며 총력을 기울였지만 성과는 크지 않았던 것이다. 가디언은 “쥐가 차르를 폐위시켰다”는 표현까지 썼다. ▷‘쥐의 왕국’으로 불리는 뉴욕처럼 최근 서울에서도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쥐 목격담’이 쏟아진다. ‘서울의 심장’ 광화문광장에 쥐가 출몰해 구청이 긴급 방역에 나서는가 하면, 한 채가 수십억 원인 강남 신축 아파트 단지에서도 “대낮에 쥐를 봤다”는 민원이 잇따르고 있다. 지난해 서울시에 접수된 쥐 민원은 2181건으로 3년 전의 2배 이상이 됐다. 어느새 도심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불청객이 된 것이다. ▷올해 초 국제학술지에 발표된 연구에 따르면 세계 주요 대도시 16곳 중 11곳에서 쥐 개체 수가 크게 늘었다. 특히 미국 워싱턴은 10년간 증가율이 390%에 달했다. 일본 도쿄에서도 이달 초 신주쿠를 걷던 외국인 관광객이 쥐에 물리는 등 피해 신고가 이어지고 있다. 파리, 로마 등 유럽의 오래된 도시들도 쥐 때문에 골머리를 앓는 중이다. 기후 변화로 도시가 따뜻해지면서 번식에 유리한 환경이 되고, 하수관 등 인프라 노후화로 서식지와 이동 통로가 늘어난 영향이다. 설상가상으로 천적도 사라졌다. 먹을 게 넘치는 도시에서 들고양이는 천적이 아니라 쥐와 음식물 쓰레기를 나눠 먹는 이웃이 됐다. ▷한국에선 3년 전 여의도 한복판에서 쥐 20여 마리가 쓰레기봉투를 파먹는 영상이 공개돼 충격을 줬다. 1970년대 ‘쥐잡기 운동’으로 박멸된 줄 알았던 쥐가 다시 활개 치는 세상이 된 것이다. 그렇다고 예전처럼 쥐 꼬리를 모으거나 쥐약을 살포하던 시절로 돌아가긴 어렵다. 쥐를 잡아 꼬리를 자를 만큼 용감한(?) 국민도 많지 않고 살포한 쥐약이 자칫 반려견, 반려묘의 생명을 앗아갈 수 있어서다. 서울시는 23일 대안으로 사물인터넷(IoT) 센서가 장착된 ‘스마트 쥐덫’을 설치하기로 했다. 쥐가 먹이를 먹으러 들어오면 문이 닫히고 경보가 방제센터로 전송돼 수거하는 방식이다. ▷쥐가 갑자기 많이 보이는 건 놀라운 번식력 때문이기도 하다. 한 쌍의 쥐는 출산을 거듭하며 1년 만에 최대 1250마리까지 늘어날 수 있다고 한다. 서울도 머잖아 뉴욕처럼 매년 수만 건의 쥐 출몰 신고에 시달릴 수 있다는 뜻이다. 전문가들이 지적하는 쥐 대응의 ‘3원칙’은 굶기고, 막고, 잡는 것이다. 쥐들에게 ‘뷔페 식당’ 역할을 하는 음식물 쓰레기를 신속하게 치우고, ‘고속도로’ 역할을 하는 노후 하수관 틈을 막는 것부터 서둘러야 한다.장원재 논설위원 peacechaos@donga.com}

점심 자리에서 폭탄주가 오가던 법조계의 ‘낮술’ 문화는 2000년을 전후로 크게 줄었다. 과도한 음주로 인한 추태나 실언이 사회적 물의를 빚으면서, 드러내놓고 공공연히 술자리를 갖는 일은 점차 자제하게 됐다. 하지만 20년이 훨씬 지난 지금도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닌 듯하다. 지난해 6월 제주지법 부장판사 3명이 근무시간에 낮술을 마시고 노래방에서 소란을 피운 사실이 최근 뒤늦게 드러났다. 국회 법사위가 이들을 국감 증인으로 채택하자 셋 모두 ‘재판 준비’를 이유로 불출석 사유서를 냈다. ▷사건은 지난해 6월 28일 제주지법 직원 환송회 자리에서 벌어졌다. 오창훈, 여경은, 강란주 등 세 부장판사는 낮술을 마시다 취한 상태로 노래방을 찾았는데, 업주가 “술은 못 파니 나가 달라”고 하자 버티면서 경찰까지 출동했다. 이들은 다른 노래방으로 자리를 옮겼고, 3명 중 2명은 법원에 복귀하지 않고 퇴근했다. 법원 감사위원회는 성실 의무와 품위 유지 의무 위반을 인정했지만 ‘경고’ 조치로 마무리해 사실상 면죄부를 줬다는 평가다. ▷이들 중 오 부장판사는 다른 논란에도 휘말려 있다. 그는 올 3월 재판 중 방청객에게 “어떤 소리도 내지 말라. 한숨도 쉬지 말라. 어기면 구속하겠다”는 취지로 발언해 직권남용 혐의로 공수처에 고발됐다. 여 부장판사는 고교 동문인 변호사와 “2차 애기 보러 갈까”, “좋죠. 형님” 등의 대화를 나눈 카톡 화면이 공개되며 부적절한 접대 의혹을 받는다. 이 변호사는 여 부장판사와의 친분을 내세우며 구속된 피고인에게 “보석으로 풀려나게 해줄 테니 돈을 달라”고 요구한 혐의로 수사를 받고 있다. 그런데 대법원은 오 부장판사에 대해선 “징계 사유가 아니다”, 여 부장판사에 대해선 “친분이 없는데 변호사가 과장한 것”이라고 판단했다. ▷법원의 ‘제 식구 감싸기’ 관행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2017년 서울동부지법 성범죄 전담 재판부 판사가 지하철에서 여성 신체를 몰래 촬영하다 현행범으로 붙잡혔는데, 법원은 벌금 300만 원을 선고했다. 대법원은 판결 직후 감봉 4개월 징계 처분을 내렸다. 2012년 일본 오사카지법 판사가 같은 혐의로 적발된 후 파면된 것과 비교하면 차이가 크다. 당시 일본 재판관탄핵재판소는 판결문에서 “사법 전체에 대한 국민의 존경과 신뢰를 실추시켰다”고 질타했다. ▷법사위는 제주지법 부장판사들에게 동행명령장을 발부했다. 국회가 현직 판사에게 동행명령장을 발부한 건 처음이다. 결국 끌려오다시피 나온 여 부장판사는 “부적절한 처신에 깊이 반성한다”며 여러 번 고개를 숙였다. 동행명령을 거부한 두 부장판사는 고발될 처지에 놓였다. 사법부가 내부 비위에 단호하게 대처하지 않으면 밖으로부터의 ‘사법부 개혁’ 목소리는 점점 커지게 될 것이다. 장원재 논설위원 peacechaos@donga.com}

일본 정치에는 ‘나막신의 눈(雪)’이란 말이 있다. 신발 바닥에 들러붙은 눈처럼, 밟히는 수모를 감수하며 권력에 달라붙는다는 뜻이다. 자민당과 손잡고 26년 동안 여당 자리를 지켜온 공명당을 두고 일본 언론이 자주 쓰는 표현이기도 하다. 그런데 공명당이 10일 정치자금 제도 개선 대책이 명확하지 않다는 등의 이유로 “더 이상 자민당과 함께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정치권에선 “26년 만에 나막신의 눈이 녹았다”는 평가가 나왔다. ▷불교 종파인 창가학회를 기반으로 한 공명당은 중도 보수 성향으로, 1999년부터 더 보수적인 자민당과 연정을 유지해 왔다. 지역구 후보를 거의 안 내고 비례 의석에 주력하는 대신 전국에 흩어져 있는 지지자들에게 “자민당 후보에게 투표해 달라”고 독려하면서 자민당과 공생했다. 선거구당 평균 2만 명의 조직표를 가진 공명당의 지지는 자민당 의석 확보에 큰 도움이 됐고, 자민당은 ‘알짜’인 국토교통성 장관을 항상 공명당에 내줬다. 또 중의원 지역구 10∼15곳에 후보를 안 내며 공명당 후보 당선을 이끌었다. 공명당이 중시하는 복지 교육 공약 일부도 정책에 반영해 줬다. ▷‘악어와 악어새’ 같던 연정에 금이 가기 시작한 건 2년 전 자민당에서 정치자금 스캔들이 터지면서부터다. 모금 행사에서 걷힌 정치자금 일부를 뒷돈으로 챙겨 비자금을 조성했다는 의혹이 터지면서 자민당 지지율은 급락했다. 창당할 때 ‘돈에 깨끗한 정당’을 슬로건으로 내세웠던 공명당 본부에도 항의 전화가 쏟아졌다. 그 이후로 자민-공명 연합은 주요 선거에서 3연패했다. 특히 지난해 중의원 선거에서 공명당 의석수는 32석에서 24석으로 8석이나 줄어 당 지도부가 충격에 빠졌다. 윈윈이었던 두 당의 관계가 어느새 자민당이 공명당의 발목을 잡는 관계로 바뀐 것이다. ▷철옹성 같던 자민-공명 연합이 무너지면서 일본 정치권에선 정권 교체 가능성을 거론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제1야당인 입헌민주당이 공명당과 손잡고 다른 야당을 끌어들여 ‘비자민 연립정부’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야당 간 이념 스펙트럼이 넓긴 하지만 1993년 8개 당파가 손잡고 호소카와 모리히로 전 총리를, 이듬해 5개 당파가 연합해 하타 쓰토무 전 총리를 선출한 전례를 보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자민당은 조속히 새 연정 파트너를 찾아 정권을 유지하겠다는 생각이다. 하지만 연패를 거듭하면서도 정치자금 스캔들에서 못 헤어나오는 자민당 손을 잡을 야당이 있을지 의문이다. ‘첫 여성 총리’를 꿈꿨던 다카이치 사나에 자민당 총재는 취임 6일 만에 기자회견에서 “총재직을 유지할 것이냐”는 질문을 받는 처지가 됐다. 26년 만에 나막신에서 녹아내린 눈이 일본 정치 지형을 흔드는 대형 눈사태를 유발할지, 주목되는 순간이다.장원재 논설위원 peacechaos@donga.com}

오세훈 서울시장이 2023년 3월 발표한 ‘그레이트 한강’ 프로젝트에는 새 이동 수단으로 한강을 가로지르는 곤돌라가 포함돼 있었다. 그런데 이후 영국 런던에서 템스강의 수상버스를 체험한 오 시장은 ‘수상버스 도입 추진’을 공식화하고 곤돌라는 재검토하겠다고 했다. 불과 나흘 만에 발표를 뒤집은 걸 두고 서울시 안팎에선 “수상버스에 대한 시장의 집념이 대단하다”는 말이 돌았다. 오 시장은 2006년 시작한 첫 임기 때도 ‘한강 르네상스’를 내세우며 수상버스 도입을 추진했기 때문이다. ▷이후 2년여의 준비를 거쳐 이달 18일 한강버스가 처음 출항했다. 하지만 거의 매일 사건 사고가 이어졌다. 방향타나 전기 설비에 문제가 생겨 운항을 중단하는 일이 반복됐다. 화장실 오물이 역류했고, 팔당댐 방류로 모든 배가 하루 운항을 중단하기도 했다. 취항식에서 “한강의 역사는 한강버스 전과 후로 나뉠 것”이라고 했던 오 시장은 결국 “앞으로 한 달간 승객을 안 태우고 시범 운항을 더 하겠다”며 고개를 숙였다. ▷한강버스의 초반 시행착오를 두고 ‘예고된 것’이란 지적이 나온다. 한강버스는 첨단 기술이 필요한 전기 하이브리드 선박임에도 운영사는 선박 건조 실적이 전혀 없는 신생 업체에 제작을 맡겼다. 결과적으로 선박 건조 및 인도 일정이 늦어지면서 운항 시작은 지난해 10월에서 올해 9월로 3차례나 미뤄졌다. 그나마 계획했던 12척 중 4척만 확보된 상황에서 개문발차식으로 운항을 시작해 출근 시간대에는 이용할 수 없었다. “왜 이렇게 무리하게 취항을 서둘렀는지 모르겠다”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한강버스를 이용한 승객 사이에선 “접근성이 떨어진다”는 의견이 많다. 런던의 경우 런던아이, 국회의사당 등 주요 명소가 선착장 바로 앞에 있다. 반면 한강은 보통 수백 m는 걸어야 도심이나 지하철역까지 갈 수 있다. 강폭이 템스강의 5, 6배다 보니 제방과 둔치를 폭넓게 조성한 탓이다. 잠실 선착장의 경우 가까운 지하철역까지 걸어서 15분이나 걸린다. 또 마곡부터 잠실까지 운항 시간이 일반은 127분, 급행은 82분 걸린다. 지하철의 2, 3배라 출퇴근용으로 이용하기엔 무리가 있다. 비가 많이 오거나 겨울에 강이 얼면 운항이 중단될 수밖에 없다는 한계도 있다. ▷오 시장은 첫 임기 때 수상버스 도입에는 실패했지만 대신 수상 콜택시를 도입했다. 한 명당 5000원을 받고 쾌속보트로 마곡과 여의도, 잠실을 오가는 식이었는데 이용률이 저조해 사업자가 바뀌는 등 우여곡절을 겪다 지난해 조용히 문을 닫았다. 수상버스가 ‘제2의 수상 콜택시’가 되지 않으려면, 초반 시행착오를 만회하고 남을 획기적인 ‘서비스 혁신’이 필요한 상황이다.장원재 논설위원 peacechaos@donga.com}

3일 오전 필리핀 마닐라 공항에서 전세기 한 대가 이륙했다. 기내에는 주황색 티셔츠에 영문 이름이 새겨진 명찰을 단 한국인 범죄 피의자 49명이 탑승했다. 한국 경찰은 피의자들에게 한 명씩 ‘미란다 원칙’을 고지하고 수갑을 채웠다. 영토로 간주되는 국적기 내에서 체포영장을 집행한 것이다. 한국판 ‘콘 에어’로 불리는 역대 최대 피의자 송환 작전의 막이 오르는 순간이었다. ▷기내에는 피의자의 2배가 넘는 124명의 경찰이 탑승했다.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중앙에 피의자를 두고 양쪽에 경찰이 앉았고, 화장실 갈 때도 동행했다. 포크와 나이프 없이 먹을 수 있는 샌드위치가 식사로 나왔다. 승무원 8명은 모두 남성이었고, 필리핀 이민청 직원 12명과 경찰병원 의료진 2명도 동행했다. 경찰은 테이저건도 지참했지만 다행히 사용할 일은 생기지 않았다. 비행 4시간 만에 인천공항에 도착한 피의자들은 대기하던 버스에 올라 관할 경찰서로 이송됐다. 경찰은 체포영장 후 48시간 내 구속영장을 신청해야 하는 만큼 신속하게 조사한 뒤 구속영장을 신청할 방침이다. ▷이날 송환된 피의자들은 국내에서 범죄를 저지른 후 필리핀으로 도주했거나, 필리핀에서 한국인 대상 범죄를 저질렀다는 혐의를 받는다. 조직 폭력, 불법 도박 사이트 운영, 보이스피싱, 횡령 등 혐의도 가지각색이다. 경찰은 이들로 인해 국민 1322명이 총 605억 원의 피해를 입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49명 중 45명이 인터폴 적색수배 대상 흉악범이다. 송환 피의자 중에는 기업에서 200억 원을 횡령하고 무려 16년 동안 필리핀에서 숨어 지냈던 60대도 있었다. ▷콘 에어는 ‘수형자를 태운 비행기(Convict Airplane)’의 줄임말로 미 법무부 산하 연방보안관실(USMS)에서 운영하는 수형자 항공 이송 시스템을 뜻한다. 1997년 개봉한 동명의 할리우드 영화 덕분에 세계적으로 유명해졌다. 한국에선 2017년부터 경찰이 전세기를 동원한 우리 식 ‘콘 에어 작전’을 진행하고 있다. 한 번 전세기를 빌리는 데 예산 1억 원가량이 들지만 일반 송환 절차가 길게는 몇 년씩 걸리다 보니 생각해 낸 고육지책이다. 하지만 여전히 매년 1000명 안팎이 해외로 도피하는데 송환되는 인원은 절반 남짓에 불과하다. ▷전세기까지 띄울 정도로 세계 곳곳에서 데려올 범죄 피의자들이 늘었다는 건 씁쓸한 대목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최근 중국, 필리핀, 캄보디아 등을 거점으로 진행되는 한국인 대상 범죄는 갈수록 대담해지고 교묘해지고 있다. 이번 작전을 통해 범죄자들이 “더 이상 숨을 곳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전세기 운용에 들어간 국민 세금이 제값을 하는 셈이다.장원재 논설위원 peacechaos@donga.com}

장관급 위원장을 포함해 공무원 31명이 근무하는 정부 조직이 있다. 상근자 외에 100명 넘는 전문가를 위원이나 전문위원으로 두고, 3년 동안 예산 300억 원을 썼지만 제대로 된 정책 보고서 하나 못 냈다. 사회 통합을 내세웠지만 볼썽사나운 내부 주도권 다툼만 뉴스가 됐다. 국민 혈세를 계속 쓰며 이런 조직을 유지할 필요가 있을까. 국가교육위원회(국교위)는 문재인 전 대통령의 공약으로 출발했다. “백년대계인 교육 정책이 정권 따라 흔들리면 안 된다. 사회적 합의로 향후 10년 중장기 교육 정책의 틀을 마련하자”는 취지였다. 의도는 좋았다. 문제는 교육 전문가 사이에도 추구하는 가치가 다른데 어떻게 ‘사회적 합의’를 도출할지에 대한 고민이 없었다는 점이었다.3년간 합의 대신 내부 다툼만 국교위 법은 문 전 대통령 임기 말인 2021년 7월 국회를 통과했고, 국교위는 윤석열 전 대통령 취임 후인 2022년 9월 활동을 시작했다. 진보 정권에서 틀을 잡고 보수 정권 때 가동된 것이다. 위원 21명 중 대통령이 5명, 국회가 9명을 임명하는데 이배용 위원장을 포함해 과반이 보수 성향으로 채워졌다. 국교위 내부에선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 난이도와 유형을 어떻게 할지, 고교 내신은 절대평가와 상대평가 중 어떤 게 나은지, 고교 평준화를 유지할지 등을 두고 격론이 이어졌다. 입시 변별력을 확보해야 한다는 보수 진영과 지나친 경쟁을 지양하고 학업 부담을 줄여야 한다는 진보 진영의 의견 차이는 토론을 거듭해도 좁혀지지 않았다. 수적으로 밀린 진보 진영은 “다수파가 밀실에서 담합한 안을 밀어붙인다”며 공개적으로 반발했다. 지난해 11월에는 중장기 교육계획을 맡은 진보 측 전문위원 8명이 전원 사퇴해 전문위원회를 새로 꾸려야 했다. 의견이 모아지긴커녕 교육계는 더 분열됐고, 지난해 9월 발표 예정이었던 ‘중장기 국가교육발전계획 시안’ 발표는 4차례나 연기됐다. 결국 국교위 1기는 중장기 교육계획을 한 번도 발표하지 못한 채 다음 달 임기를 마치게 됐다. 진영 갈등의 최전선이 됐다는 점 외에도 국교위는 여러 한계를 드러냈다. 실질적 권한이 없었던 과거 자문기구를 보완하기 위해 의결·집행 기구로 출범했지만 5년 단위 교육계획을 발표하는 교육부, 초중고 교육을 관할하는 시도교육청과 역할이 겹쳐 ‘옥상옥 논란’이 이어졌다. 장기적·거시적 접근이 목표였지만 교육과정 및 대입제도 심의 때 지엽적 지적만 하고 원안을 통과시키며 거수기 논란을 자초했다. 결국 내부에서도 ‘총체적 실패’란 지적이 나왔고 교육계 안팎에서는 ‘국교위 무용론’이 확산됐다.‘조국 딸 사과’ 새 위원장의 정치 편향 논란 이재명 대통령은 대선 때 다양성과 공정성을 갖춘 위원 구성, 시민 참여 확대 등을 통해 국교위가 제 역할을 하도록 하겠다고 공약했다. 하지만 교육철학이 다른 다양한 위원과 시민이 참여한다고 사회적 합의가 도출될까. 설사 합의가 나온다 한들 5년 후 바뀐 정권이 이를 존중하고 받아들일지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일이다. 더욱이 2기 위원장으로 내정된 차정인 전 부산대 총장은 이 대통령의 사법연수원 동기로 초중고 교육에는 문외한에 가깝다. 과거 새천년민주당 소속으로 총선에 출마했고, 조국 전 법무부 장관 딸의 부산대 의학전문대학원 입학 취소를 두고 “미안하다”고 했을 정도로 정파적 색채가 짙다. 그가 이 대통령이 약속한 ‘공정성을 갖춘 위원’이라고 볼 수 있을까. 또 임기가 3년인 위원과 달리 2년인 전문위원 중에는 여전히 보수 성향이 많아 무리하게 진보 정책을 밀어붙일 경우 저항도 만만치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차 내정자가 이렇게 산적한 과제를 풀어내고 국교위를 벼랑 끝에서 구하지 못하면, 그때는 정말 국교위 폐지만이 남은 답일 것이다.장원재 논설위원 peacechaos@donga.com}

10일 강원의 한 골프장에는 빨간 바지를 입고 얼굴 전체를 가리는 자외선 차단용 마스크와 선글라스를 쓴 남성이 등장했다. 같이 골프 친 4명 중 얼굴을 빈틈이 안 보일 정도로 철저하게 가린 사람은 그뿐이었다. 라운딩 중 그늘집에서 식사를 마치고 마스크를 잠시 벗었을 때 드러난 얼굴은 국민의힘 권성동 의원이었다. 그리고 해당 골프장은 권 의원이 불법 정치자금을 받은 혐의가 있는 통일교의 소유였다. ▷한 인터넷 언론은 12일 ‘복면 골프’ 동영상을 공개하고 권 의원이 야외는 물론 실내에서도 마스크를 벗지 않았다며 비밀 접대 라운딩 의혹을 제기했다. 동반자 명단에 ‘권성동’이란 이름이 없었다고도 했다. 논란이 되자 권 의원은 자신의 소셜미디어를 통해 “(더운) 날씨 때문에 마스크를 착용했고, 식사비 포함 35만 원을 직접 결제했다”고 해명했다. 몰래 골프를 치거나 접대를 받은 건 아니란 취지였다. ▷권 의원은 2022년 대선 당시 통일교로부터 1억 원 이상의 정치자금을 수수한 혐의를 받고 있다. 통일교 전직 간부는 특검에서 “권 의원이 가평 천정궁을 두 차례 찾아 한학자 총재에게 큰절을 하고 금품이 담긴 쇼핑백 2개를 받았다”고 진술했다. 이 간부가 2023년 국민의힘 전당대회 때 건진법사 전성배 씨로부터 “윤심(尹心)은 변함없이 권(성동)”이란 말을 듣고 교인들을 단체 입당시켜 권 의원의 당 대표 당선을 도우려 했다는 의혹도 제기된 상태다. 당시 권 의원은 출마하지는 않았다. ▷이런 상황임에도 권 의원이 통일교 소유 골프장에서 골프를 친 걸 두고 국민의힘 내부에서도 부글부글하는 분위기다. 김건희 특검팀은 ‘복면 골프’ 사흘 후 “통일교인 입당 의혹 규명을 위해 당원 명부가 필요하다”며 국민의힘 당사 압수수색에 나섰다. 15시간 대치 끝에 간신히 압수수색은 막았지만 당내에선 “권 의원을 넘어 당 전체가 타깃이 됐다”는 위기감이 팽배하다. ▷윤석열 전 대통령을 ‘오랜 친구’라고 불렀던 권 의원은 지난 정부에서 ‘원조 윤핵관’으로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다. 윤 전 대통령이 대선 후보였을 때 비서실장을 맡았고, 이후에는 원내대표가 됐다. 이준석 전 대표를 대표직에서 내려오도록 하는 데도 ‘기여’해 윤 전 대통령으로부터 ‘체리 따봉’ 문자도 받았다. 지인의 아들을 대통령실에 근무하도록 하는 등 인사에도 영향력을 발휘했다는 후문이다. ▷비상계엄 이후에도 권력에서 멀어지고 싶지 않아서일까. 권 의원은 지난해 말 국민의힘 의원총회에서 “욕 먹겠지만 얼굴 두껍게 다녀야 한다”며 단일대오로 버티자고 했다가 당내에서도 비판을 받았다. 이번에 자신 때문에 당으로까지 불똥이 튈 수 있는 상황에서 ‘통일교 소유 골프장에서의 복면 골프’로 구설에 오른 걸 보면, 의원총회에서 했던 말을 충실히 실천하고 있는 셈이다.장원재 논설위원 peacechaos@donga.com}

2022년 5월 10일 청와대가 일반에 개방된 이후 이달 1일 문을 닫을 때까지 1179일 동안 852만 명이 방문했다. 일반인의 접근이 어려웠던 대통령 집무실과 관저, 국내 최고의 정원으로 꼽히는 녹지원 등을 둘러볼 수 있다는 점이 국내외 관광객을 끌어모은 것이다. 특히 ‘청와대 복귀’를 선언한 이재명 대통령이 당선된 후에는 예약 사이트 서버가 마비되고 수백 m 줄을 서 입장할 정도로 사람이 몰렸다. 개방 초창기에 잠시 나돌았던 암표도 다시 등장했다. ▷돌아보면 용산 대통령실 이전은 윤석열 전 대통령이 잘못 끼운 첫 단추였다. 당선 열흘 만에 공약했던 광화문 대신 용산으로 이전하겠다고 선언했고, 취임 첫날 대통령실 이전과 청와대 개방을 단행했다. 대통령실 이전은 김영삼 전 대통령 이후 역대 대통령 대부분이 약속하고도 실현하지 못한 과제인 만큼 충분한 검토와 의견 수렴이 필요했다. 그런데 윤 전 대통령은 “일단 들어가면 못 나온다”며 군사 작전하듯 밀어붙였다. 왜 하필 용산인지에 대한 설명도 부족해 “천공 등 비선이 개입한 것 아니냐”는 의혹까지 퍼졌다. ▷대통령실 이전의 명분으로 내세웠던 ‘원활한 소통’은 공염불에 그쳤다. 출근길 도어스테핑은 반년 만에 중단됐고, 대통령 기자회견은 2년 가까이 안 열렸다. ‘국민이 대통령 일하는 걸 볼 수 있게 하겠다’는 약속도 지켜지지 않았다. 소통하는 대신 윤 전 대통령은 외부와 단절된 삼청동 안가에서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 등 소수의 측근과 비밀스러운 모임을 하며 야당 탓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공간이 의식을 지배한다”는 자신의 말을 입증이라도 하듯 옛 국방부 청사에서 비상계엄까지 선포하며 몰락을 자초했다. ▷대통령실을 용산으로 옮기는 데 들어간 비용은 국회예산정책처 추산으로 832억 원, 더불어민주당 추산으로는 1조 원 이상이다. 최근 정부가 대통령실을 청와대로 재이전하는 예비비로 259억 원을 배정한 걸 감안하면, 간접비용을 빼고 순수하게 대통령실이 오고 가는 데만 최소 1000억 원 넘는 국민 혈세가 쓰이는 것이다. 그렇다고 비상계엄의 악몽이 남아 있는 용산에 계속 있을 순 없는 노릇이고, 일부에서 주장하는 세종 집무실을 위해선 개헌이 필요하다. 그렇다 보니 현실적으로 청와대 외에는 마땅한 선택지가 없는 것이다. ▷정부는 대통령실이 돌아온 후 청와대를 다시 개방할지에 대해선 ‘검토 중’이란 입장이다. 하지만 이미 국민 여섯 명 중 한 명이 청와대를 구석구석 둘러봤다. 방문객 수가 입증하듯이 청와대 개방에 대한 수요도 많다. 업무공간이나 관저까지는 곤란하겠지만, 대통령 입주 후에도 정원과 등산로 산책, 문화재 관람 정도는 시민에게 허용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장원재 논설위원 peacechaos@donga.com}

서울중앙지법이 이달 25일 윤석열 전 대통령에게 비상계엄으로 인한 국민들의 정신적 피해를 배상하란 판결을 내린 걸 두고 법조계에선 의외라는 반응이 나온다. 8년 전 국민 4000여 명이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 국정농단 사태로 인한 정신적 피해를 배상하라고 청구했는데 1∼3심 모두 패소한 전례가 있기 때문이다. 설마 하는 생각에 간단한 의견서만 냈던 윤 전 대통령 측도 “국민 104명에게 위자료 10만 원씩을 배상하라”는 판결문을 받아 들고 허를 찔린 기분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수도권의 한 부장판사는 “지난해 12월 비상계엄 직후 동료에게 농반진반으로 ‘윤 전 대통령에게 정신적 손해배상을 청구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얘기를 했다”며 “충분히 내릴 수 있는 판결이라는 생각”이라고 했다. 8년 전과는 상황이 많이 다르다는 취지였는데 생각해 보니 그럴 만했다.8년 전보다 명백한 기본권 침해 과거와 다른 판결이 나온 이유로 먼저 윤 전 대통령이 선포한 비상계엄의 위헌성이 더 명확했다는 점을 법조인들은 꼽는다. 박 전 대통령의 경우 측근을 국정에 개입하게 하고 대통령 권한을 남용한 점, 그리고 수사를 거부하며 헌법 수호 의지를 보이지 않은 점이 인정돼 헌법재판소가 파면을 결정했다. 하나하나가 파면 후에도 형사 재판에서 법적 책임을 다투는 쟁점이다 보니 민사 재판에서 먼저 판단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헌법상 요건인 ‘전시·사변 또는 이에 준하는 국가비상사태’가 없었다는 점에서 비상계엄이 위헌이란 게 누가 봐도 분명했다. 중앙지법도 판결문에서 다음과 같이 명시했다. “국가비상사태가 아니었음은 물론 그 징후조차 없었다.” 두 번째로 국민 기본권 침해가 더 직접적이고 명백했다고 볼 여지가 컸다. 8년 전 소송 때는 일반 시민이 국정농단으로 어떤 피해를 입었는지가 명확하지 않았다. 원고들은 “우울증과 위장병이 재발했다”, “박 전 대통령에 대한 의견이 달라 직장에서 싸웠다” 등의 주장을 폈지만 법원에서 인과관계가 인정되지 않았다. 하지만 윤 전 대통령이 선포한 비상계엄의 포고령은 모든 국민이 가진 ‘집회 결사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었다. 중앙지법은 “국민들은 민주주의 시민으로서 보장받아야 할 기본권이 심각하게 훼손되는 피해를 입었다. 공포와 불안, 수치심 등 정신적 고통을 받았던 것이 명백하다”고 판단했다. 마지막으로 판결의 근거가 되는 대법원 판례 역시 달라졌다. 8년 전 소송에서 재판부는 과거 대법원 판례에 따라 “대통령은 정치적 책임을 질 뿐 국민 개개인의 권리에 대응해 법적 의무를 지는 건 아니다”라고 판단했다. 하지만 2022년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1970년대 긴급조치 9호로 입은 피해에 대한 국가 배상 책임을 인정하며 해당 판례를 변경했다. 물론 당시 대법원 판결은 일반 국민이 아니라 영장 없이 체포, 구금되거나 기소돼 유죄 판결을 받은 직접 피해자와 그 가족에 대한 것이었다. 하지만 중앙지법은 이번에 해당 판례를 인용하며 비상계엄이 모든 국민에게 영향을 미친 만큼 일반 국민이 입은 피해도 배상받을 수 있다고 봤다.소송은 권력자 향한 국민 경고 윤 전 대통령 측은 29일 항소장을 제출했다. 항소심에서 윤 전 대통령 측은 비상계엄이 일반 국민에게 미친 정신적 피해를 어떻게 인정하고 위자료를 산정할 것인지에 대해 집중적으로 문제 제기를 할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비슷한 소송이 이어질 조짐은 확산되고 있다. 이미 1만 명 이상이 소송 비용 3만 원씩을 내며 소송에 참여하겠다고 밝힌 상태다. 윤 전 대통령의 재산이 6억6000만 원가량임을 고려하면 이들이 승소해도 10만 원씩 받아내기는 현실적으로 어렵다. 그럼에도 국민들은 호주머니를 털어 소송에 나서고 있다. ‘패가망신하지 않으려면 비상계엄 같은 무도한 일은 꿈도 꾸지 말라’는 준엄한 경고를 권력자들에게 보내겠다는 취지일 것이다.장원재 논설위원 peacechaos@donga.com}

해병대 채 상병 순직 사건을 둘러싼 윤석열 정부의 대응은 작은 일을 크게 키운 전형적인 사례다. 해병대 조사 결과를 원칙대로 경찰에 이첩했다면 책임자 처벌로 끝났을 사안이었다. 그런데 당시 이종섭 국방부 장관이 이첩 승인 결정을 하루 만에 번복하고, 그 배후에 윤석열 대통령의 ‘격노’가 있었다는 의혹이 제기되며 사건은 ‘정권 리스크’로까지 비화했다. 리스크를 키우는 데는 02-800-7070 전화번호를 둘러싼 거짓말과 말 뒤집기도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 전 장관은 2023년 7월 31일 02-800-7070 번호로 걸려 온 전화를 받은 직후 김계환 전 해병대 사령관에게 전화해 이첩 결정을 뒤집었다. 야당은 윤 전 대통령이 외압을 가한 것 아니냐고 추궁했다. 이에 이 전 장관은 통화 상대를 밝히지 않은 채 “(수사외압 의혹과 관련해) 대통령실로부터 문자나 전화를 받은 건 없다”고 했다. 하지만 이후 통신 조회를 통해 이첩 보류 당일 이 전 장관이 임기훈 전 대통령국방비서관과 통화한 사실이 드러났다. 이틀 후엔 윤 전 대통령이 개인 휴대전화로 이 전 장관과 1시간 사이에 3차례 통화했는데, 이것도 확인됐다. ▷이 전 장관은 거짓 해명 논란이 제기될 때마다 “7월 31일에는 통화를 안 했다는 것”, “외압은 없었다는 것” 등으로 교묘하게 말을 바꿨다. 그러다 특검 수사로 코너에 몰리자 2년이 지난 이달 21일에야 800-7070 번호 통화 상대를 밝힌 것이다. “윤 전 대통령이 전화해 군 조직에 대한 우려를 표명했다”는 주장이었다. 그러면서도 “대통령 말은 (이첩 번복 결정에) 참고만 했다”며 누구도 믿기 어려운 해명을 곁들였다. ▷이 전 장관이 해병대의 수사를 뒤집고, 거기에 더해 이리저리 말을 바꿔 온 2년은 참과 거짓이 통째로 뒤바뀐 세상이었다. 외압 의혹을 처음으로 폭로한 박정훈 해병대 수사단장은 그해 8월 보직에서 해임되고 군 검찰에 의해 항명 혐의 등으로 기소까지 당했다. 올 1월 군사법원에서 무죄 선고를 받고, 이달 9일 특검의 항소 취하로 무죄가 최종 확정됐지만 그에게 지난 2년은 말로 할 수 없는 고통의 날들이었다. 채 상병 유족들의 아픔은 더했을 것이다. ▷채 상병 순직 사건과 관련해 윤석열 정부 관련자들이 쌓아 올린 ‘거짓말의 성’은 특검의 칼날 앞에 줄줄이 무너지는 중이다. 국회에서 “윤 전 대통령이 격노한 적 없다”고 했던 김태효 전 국가안보실 1차장은 특검에 출석해 “언성을 높이며 화를 내는 모습을 봤다”고 털어놨다. ‘VIP 격노설’을 박 단장에게 처음 전달한 해병대 김 전 사령관은 군사법원에까지 출석해서 “그런 말 한 적이 없다”고 했다가 최근 이를 뒤집었다. 당장의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한 거짓말은 반드시 드러나게 돼 있다. 이제는 당사자들이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르고 책임을 져야 할 시간이다.장원재 논설위원 peacechaos@donga.com}

《대법원은 16일 경기 용인 경전철 사업의 부실 추진과 관련해 이정문 전 용인시장과 한국교통연구원에 214억6800만 원을 배상할 책임이 있다는 확정판결을 내렸다. 민간 투자 사업으로 지자체에 피해를 끼친 지자체장의 손해배상 책임을 인정한 첫 판결이다. 앞으로 무리하게 사업을 추진한 지자체장에게 ‘패가망신’에 가까운 책임을 물을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2013년 개통한 용인 경전철 ‘에버라인’은 18km 구간에 사업비 1조 원 이상을 투입해 15개 역을 만들었다. 하지만 개통 직후 이용객이 수요 예측치의 5%에 불과했다. 계약서에는 민간사업자에게 30년 동안 최소수익보장(MRG)을 해 준다는 조항까지 담겨 있었다. 2043년까지 발생할 혈세 낭비를 합치면 총사업비는 2조 원이 넘을 수 있다. 소송은 지역 주민들이 시작했다. ‘계란으로 바위 치기’란 주위의 만류에도 12년 동안 포기하지 않고 소송을 이어가 지자체장의 혈세 낭비에 경종을 울린 주민 소송단 오이천 씨(65)와 박순애 씨(70)를 19일 에버라인 기흥역 인근 카페에서 만났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은 대법원 판결 후 “시민의 힘으로 공공의 책임을 바로잡을 수 있음을 보여준 사례”라고 성명을 발표했다.》1990년대 논의가 시작된 용인 경전철 사업은 2001년 한국교통연구원에서 완공 시 매일 16만1000명이 이용할 것이란 수요 예측 결과를 내놓으며 논의가 급진전됐다. 하지만 2010년 6월 완공되고도 캐나다 봄바디어 컨소시엄과 용인시가 수입 배분을 둘러싼 이견을 보이면서 3년 동안 운행을 못 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설상가상으로 국제중재재판에서 패소해 용인시가 시행사에 이자를 포함해 8500억 원을 물어주게 됐다. 오 씨는 “1991년 용인으로 이사 온 뒤 난개발을 눈으로 확인하고 시민운동을 하게 됐다”며 “특히 경전철은 지역 특성에 대한 고려가 없었다”고 설명했다. 노선을 잘못 짰다는 지적이었다. 용인 북부에 있는 수지구 주민들은 더 북쪽인 서울로 출퇴근하고, 서부에 있는 기흥구 주민들은 더 서쪽인 수원으로 출퇴근하는데 엉뚱하게 기흥과 동쪽 구도심을 잇는 노선이 잡혔다는 것이다. 천문학적 금액을 물어준 용인시는 ‘전국 채무 1위’가 되며 파산설이 나올 정도로 재정이 악화됐다. 박 씨는 “노후 학교 시설을 고칠 예산이 없을 정도로 시에 돈이 없었다”고 했다. 용인시는 공동묘지를 매각하는 등 돈이 될 만한 것은 뭐든 팔았다. 도로 확장, 공원 건설, 공공시설 증축 등이 줄줄이 미뤄지며 주민 삶의 질에도 타격을 줬다. 주민 소송 아이디어는 용인 시민단체들이 대책을 토론하는 과정에서 나왔다. 이들 두 사람을 포함해 총 12명이 소송단에 이름을 올렸다. 하지만 승소 가능성을 두고선 반신반의하는 분위기였다. 이 전 시장은 2002∼2006년 재임 시절 “소모적 논쟁거리를 만들고 있다”는 성명을 발표할 정도로 경전철 반대 운동에 적대적이었다. 주민 중에서도 “대안이 있느냐”, “이길 수 있겠느냐”는 목소리가 나왔다. 박 씨는 “이길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하지만 엉터리 수요 예측에 기반해 방만하게 사업해 놓고, 아무도 책임을 안 지는 게 너무 화가 났다”고 소송 참여 이유를 밝혔다. 마침 무료 변론을 맡아 줄 변호사가 나타나 주민들이 부담한 비용은 인지대 등 수백만 원에 그쳤다. 하지만 4년 동안 진행된 1, 2심 재판에선 주민들이 졌다. 법적으로 주민소송은 주민감사를 청구한 후에만 제기할 수 있는데 주민들이 청구한 소송과 감사의 내용이 다르다는 이유에서였다. 2심 패소 후 “대법원에서도 지면 상대방 소송 비용까지 물어줘야 하고 자칫 손해배상청구도 받을 수 있다”는 우려가 나왔다. 오 씨는 “만약 3심서도 패소해 돈을 물어내게 되면 동등하게 나눠 내기로 뜻을 모았다”고 돌이켰다. 재판이 열릴 때마다 자비를 들여 수원지방법원과 서울고등법원으로 피켓 시위를 다녔던 오 씨와 박 씨는 서울 서초동 대법원으로 발길을 돌렸다. 2020년 대법원에서 반전이 일어났다. 재판부가 “주민소송은 감사 청구와 관련 있는 것이면 충분하다”며 사건을 파기한 뒤 2심으로 돌려보냈다. 이후 소송을 거쳐 이달 16일 주민 승소가 최종 확정된 것이다. 대법원은 “현 용인시장이 이 전 시장과 교통연구원을 상대로 214억6800만 원의 손해배상을 청구하라”고 판결했다. 이 전 시장은 재판과 별개로 진행된 수사에서 경전철 시공업체에 압력을 넣어 측근이 운영하는 회사에 하도급을 주게 하고 미화 1만 달러를 받은 사실도 드러났다. 오 씨는 “기획재정부에서 ‘승객이 수요 예측의 90%를 밑돌 땐 30년 동안 차익을 보전한다’는 계약 조항에 문제를 제기했다. 보전액이 너무 크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전 시장은 계약을 밀어붙였다”고 했다. 박 씨는 “지금도 매년 300억, 400억 원씩 보전해 주고 있다. 이 전 시장을 포함해 역대 용인 시장 7명 중 6명이 비리 혐의로 구속되거나 재판을 받았다. 뭔가 잘못 돌아갔다는 뜻 아니겠느냐”고 물었다. 경전철 계약 및 추진 과정에서 시의회의 견제 기능도 작동하지 않았다. 용인시는 시의회에 자료를 공개하지 않았고, 시의원 21명 중 18명은 봄바디어 측의 지원을 받아 해외여행을 다녀왔다. 박 씨는 “시의원들이 예산 감시만 철저하게 했다면 경전철 문제가 이렇게 심각해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교통연구원 역시 연구원들이 봄바디어 측으로부터 해외 견학을 지원받고 명절마다 선물을 받은 사실이 드러났다. 사업 시작 때 교통연구원은 200명이 탈 수 있는 객차 1량만 가동해도 하루 승객이 16만 명에 이를 것이란 분석을 내놨다. 오 씨는 “전체 노선에 10대가 동시에 움직여도 특정 시점의 최대 승객은 2000명뿐이다. 16만 명이 이용하려면 낮에도 계속 만원 열차로 다녀야 하는데 그게 가능한 일이냐”고 반문했다. 국책 연구기관에서 왜 이런 전망치를 내놓았는지 알 수 없다고 오 씨는 말했다. 교통연구원은 재판 과정에서 ‘정상적인 절차에 따라 분석을 진행했다’는 식의 입장만 밝혔다. 교통연구원 분석 당시 50만 명에 못 미쳤던 용인 인구는 100만 명이 넘었다. 하지만 개통 직후 9000명이던 하루 이용객은 지금도 하루 4만 명이 약간 넘는 수준이다. 여전히 교통연구원 예상치의 30%에 못 미친다. 오 씨는 “교통연구원에서 비합리적인 분석 결과를 내놓는 데 모종의 외압이 작용한 것 아니냐는 합리적 의심이 들지만 수사 및 재판 과정에선 밝혀지지 않았다”고 했다. 12년 동안 재판이 진행되면서 주민소송단은 7명으로 줄었다. 오 씨는 “일부는 이사를 갔고, 시의회 등 공직에 진출한 사람도 있었다”며 “하지만 남은 사람들끼리 끝까지 포기하지 말자고 서로 격려했다”고 말했다. 용인 경전철은 외환위기 이후 재정이 충분치 않은 정부와 지자체가 우후죽순 민자투자 사업을 추진하던 상황에서 진행됐다. 오 씨는 “사회간접자본(SOC) 사업 특성상 적자가 나기 쉬운데 국가나 지자체가 적자는 물론이고 투자자 이윤까지 보전해 주는 방식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것 같다”고 했다. 특히 도로 위에 고가를 만들어 그 위를 달리는 경전철은 아파트 조망권 문제 등이 있어 더 신중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용인 경전철 재판이 이슈가 되면서 다른 지역에서 주민 소송을 하고 싶다며 소송단에게 문의하기도 했다. 오 씨는 “최근은 민자 사업을 하더라도 운영사가 수익을 내는 방법을 찾아야지 적자 보전은 못 해 준다는 게 지자체들의 입장”이라며 “이번 판결로 지자체장들도 보여줄 성과를 내기 위해 무리한 사업을 추진할 경우 반드시 개인이 책임을 진다는 생각을 가졌으면 한다”고 말했다. 재판에서 이겼지만 오 씨와 박 씨에게 돌아오는 금전적 혜택은 없다. 용인시가 이번 대법원 판결을 근거로 앞으로 소송을 내서 이 전 시장과 교통연구원이 손해를 배상하더라도 전액 시에 귀속될 뿐이다. 오 씨는 “주변에서 ‘재판에서 이겼으니 얼마 받느냐’고 물어올 때마다 쓴웃음이 나온다”며 “소송 비용을 돌려받는 것도 역시 주민이 낸 용인시 재정에서 나오는 것 아니냐. 큰 액수는 아니지만, 보전받지 않기로 했다”고 했다. 박 씨는 “이상일 현 용인시장이 판결 내용대로 하루빨리 이 전 시장과 교통연구원을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해야 한다. 제대로 진행하는지 끝까지 감시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여전히 문제가 남는다. 이 전 시장 개인이 214억 원이란 막대한 피해액의 일부를 국가에 내놓을 여력이 있는 걸까. 이 전 시장은 2005년 공직자 재산 등록 때 신고한 재산은 31억 원 규모지만, 20년 전의 일이다. 오 씨는 “중요한 판례를 만들었다는 것에 만족하고 보람을 느낀다”며 “앞으로 교통연구원 등 연구용역 수행 기관에 외압이나 무리한 요구가 가해졌을 때 ‘우리가 거덜 난다’며 거절할 수 있는 분위기가 생기면 좋겠다. 그러면 지자체의 무리한 사업 추진도 줄어들 것”이라고 강조했다.오이천(65)△1960년 충북 증평 출생△1988∼2008년 서울농수산식품공사 근무△2010∼2022년 용인미래포럼 환경분과위원장△2008∼2015년 한경국립대 겸임교수△현재 ㈜행복한조경 대표박순애(70)△1955년 전북 정읍 출생△1981∼1982년 원풍모방노조 부조합장△2006∼2008년 용인참여자치시민연대 활동△2012∼2015년 용인시주민참여예산위원용인=장원재 논설위원 peacechaos@donga.com}

지난해 검거된 조폭 10명 중 7명은 30대 이하였다. 국내 폭력 조직의 중심이 ‘MZ조폭’으로 세대교체된 것이다. 서울 서남권에서 1983년 설립된 ‘진성파’ 역시 10년 전 창립 멤버들이 은퇴한 후 조직 상층부가 1980년대생으로 대거 교체됐다. 이들은 유흥주점에서 보호비를 갈취하거나 사행성 게임장을 운영하는 대신 불법 도박 사이트와 보이스피싱, 코인을 이용한 자금 세탁을 시작했다. 이후 막대한 돈을 벌었는데 그만큼 피해자도 늘었다. ▷경찰이 17일 일망타진을 선언하며 밝힌 진성파의 운영 방식은 조폭이 어떻게 진화했는지 잘 보여준다. 전통적인 합숙소를 운영하며 조직원을 관리했지만 보이스피싱 같은 범죄를 저지를 때는 4∼6명의 프로젝트팀을 별도로 가동했다. 검경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필리핀, 태국, 베트남으로 활동 반경도 넓혔다. 강령에는 ‘선배의 말을 안 따르면 빠따(매)를 맞는다’ 등 고전적 내용도 있었지만 ‘사업(범죄) 관련 대화를 나눈 후에는 텔레그램 자동 삭제 기능을 활용한다’ 등 스마트폰 보안 관련 내용도 있었다. ▷최근 조폭들이 온라인을 활용한 사행성 사업과 사기 범죄에 집중하는 건 ‘저위험 고수익’이기 때문이다. 흉기를 들고 싸우지 않으니 다치거나 생명의 위협을 느낄 일이 없다. 서버를 해외에 두고 익명 메신저로 소통하기 때문에 붙잡힐 위험도 적다. 불법 도박 사이트는 1000만 원이면 만들 수 있는데 불법 도박 시장 규모는 연간 82조 원에 달한다. 이처럼 손쉽게 돈을 벌 수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한때 감소세였던 조폭 수는 다시 늘고 있다. 경찰이 관리 대상으로 지정한 조폭은 지난해 5662명으로 5년 만에 451명 증가했다. ▷MZ조폭의 특징은 거리낌 없이 자신을 과시한다는 것이다. 2년 전 약에 취한 채 보행자를 치어 사망케 한 20대 남성은 불법 도박 사이트 및 리딩방 운영에 관여하며 5억 원 넘는 롤스로이스 차량을 몰았다. 같은 해 주차 시비를 벌이다 흉기로 시민을 위협한 이른바 ‘람보르기니남’은 캄보디아에 서버를 둔 불법 도박 사이트 운영에 가담했다. SNS를 통해 고가의 시계와 문신, 외제차 등을 과시하며 조직원을 모으는 경우도 많다. ▷2015년부터 사업 구조를 온라인 지하경제 기반으로 바꾼 진성파는 지난해에야 경찰의 본격 수사 대상이 됐다. 불법 스포츠 토토, 리딩방 사기 같은 범죄가 기존 수사 당국의 레이더에는 잘 포착되지 않았던 것이다. 검경은 롤스로이스남과 람보르기니남 사건 이후에야 ‘온몸에 문신을 하고 고가의 외제차를 모는 청년들’에 관심을 갖게 됐고 지난해 ‘MZ조폭과의 전쟁’을 선언했다. ‘나쁜 놈들 전성시대’를 막기에 너무 늦지 않았길 바랄 뿐이다.장원재 논설위원 peacechaos@donga.com}

3년 동안 ‘전교 1등’을 놓치지 않았던 한 우등생의 ‘어두운’ 비밀이 경비 시스템 오작동 때문에 들통났다. 이달 4일 오전 1시쯤 경북 안동 A여고 교무실에서 무단 침입을 알리는 경보가 울렸다. 현장엔 아무도 없었지만, 확인 결과 한 퇴직 교사가 과거에 등록했던 지문을 찍고 건물 현관으로 들어온 것이 확인됐다. 이 교사는 이 학교 고3 학생의 엄마와 함께였는데, 목적은 기말고사 시험지를 훔쳐내는 것이었다고 한다. 교사는 기억하고 있는 교무실 비밀번호까지 정상 입력했지만, 시스템 오류로 경보가 잘못 울리는 바람에 덜미가 잡혔다. ▷이 교사는 5년 전 과외를 하며 학부모와 학생을 알게 됐다. 학생이 2023년 고교에 진학한 후에는 같은 학교에 기간제 국어 교사로 취업했고, 1학년 담임까지 맡았다. 경찰 수사에서 엄마는 교사에게 3년 동안 200만 원씩 10차례에 걸쳐 총 2000만 원을 송금한 것으로 드러났다. 엄마는 딸을 의대에 보내 의사인 남편의 뒤를 이으려는 생각에 시험지 유출을 의뢰한 것으로 경찰은 보고 있다. 대부분의 대학은 3학년 2학기 내신을 입시에 반영하지 않는다. 이 학생에겐 이번 기말고사가 마지막 고비였다. ▷2018년 ‘숙명여고의 시험지 빼돌리기 사태’ 이후 교육부는 전국 고교의 시험지 보관 시설에 폐쇄회로(CC)TV를 설치하고 출입을 통제하도록 했다. 하지만 A여고가 퇴직교사의 지문을 시스템에서 삭제하지 않은 것이 1차적 화근이었다. 공범도 있었다. 경찰 조사 결과, 이 교사는 지난해 초 퇴직 후 경기 지역 고교로 옮겼지만, 이후에도 시험 때마다 한밤중에 A여고를 찾았다. 교사와 학부모의 영상이 CCTV에도 찍혔다. 하지만 학교 시설 관리자가 출입을 막지 않고 영상까지 삭제해 준 것. ▷학생부 위주인 수시전형이 대입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80%나 된다. 그만큼 고교 내신이 중요하다 보니 시험지 유출 사건은 끊이지 않는다. 지난해 10월에는 경기 성남시 분당에서 중간고사 시험지를 학원으로 유출한 기간제 교사가 검거됐다. 3년 전 광주에선 교사 컴퓨터에 해킹 프로그램을 설치해 화면을 캡처하는 방식으로 시험 문제와 답안을 빼돌린 학생 2명이 퇴학당했다. ▷엄마가 빼낸 시험 문제 덕에 줄곧 전교 1등을 지켰던 학생은 어떤 마음으로 매번 시험을 봤을까. 노력 없이 1등을 한 데 따른 죄책감, ‘거짓의 성’이 언제 무너질지 모른다는 불안감, 자신 때문에 내신이 밀린 친구에 대한 죄책감은 없었을까. 엄마는 안 보는 곳에선 반칙을 해서라도 경쟁에서 이겨야 한다고 딸에게 가르쳤던 셈이다. 하지만 딸은 고교에서 받은 모든 성적을 ‘0점 처리’ 당하고 퇴학당했다. 비뚤어진 교육열이 딸의 인생을 망쳐놓고 말았다.장원재 논설위원 peacechao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