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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1월 14일자 동아일보 사회면에는 서울 환일고 3학년 10반 59명 전원이 개근상을 받았다는 기사가 실렸다. 골절상을 당한 학생도 “교실에서 쓰러지겠다”며 40일 동안 택시를 타고 등하교를 했다고 한다. 졸업식에서 받을 수 있는 상이라곤 우등상과 개근상밖에 없고, 초중고 12년 개근상이 무엇보다 큰 훈장 같던 시절 얘기다. ▷요즘 초중고교 졸업식에서 개근상을 받는 학생은 10명에 1명도 안 된다. 체험 학습 등으로 결석하는 학생이 워낙 많다 보니 개근상을 없애고 학교생활기록부에만 출결을 기재하는 학교도 많다. 팬데믹으로 ‘아프면 집에서 쉰다’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개근은 더 희귀해졌다고 한다. 최근에는 해외여행 한 번 안 가고 꾸준히 출석한 학생을 비하하는 ‘개근거지’라는 신조어까지 등장했다. ▷개근하는 학생이 계속 줄자 이제 대학들이 입시에 출결을 반영하겠다고 나섰다. 중앙대는 올해 입시부터 ‘수능 100%’였던 정시 전형을 ‘수능 90%, 출결 10’%로 바꾸기로 했다. 내년부터는 모든 전형에서 동점자 발생 시 개근 학생을 우선 선발한다. 서강대, 경희대, 인하대 등도 출결을 반영하기로 했거나 반영하는 안을 검토 중이다. “공교육 정상화를 위해 필요하다”는 고교 교사들의 요청을 받아들인 것이다. ▷대학들이 출결을 보겠다고 나선 것에는 고교 때 개근한 학생이 대학에 와서도 학업을 성실하게 이어간다는 경험칙도 작용했다. 초중고든 대학이든 출결이 우수할수록 학업 성취도가 높다는 건 국내외 연구에서 입증된 상식이다. 미국 정부 산하 국가교육통계센터에 따르면 유치원 결석조차 초교 1학년 때 읽기 및 산수 성취도를 저하시키는 것은 물론이고 그 영향이 고교 때까지 연쇄적으로 이어진다고 한다. ▷팬데믹으로 출석률이 떨어진 건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다. 미국은 2021∼2022년 만성결석률(출석률 90% 미만)이 30%를 넘었는데 그 영향으로 지난해 고교생 학업 성취도가 30년 만에 최저 수준으로 추락했다. 이에 연방정부는 ‘출석이 중요하다(Attendance Matters)’ 캠페인을 벌이며 결석을 절반으로 줄이기 위해 노력 중이다. 초중고교생 5명 중 1명이 한 달 이상 결석하는 아일랜드도 ‘매 등교일이 새로운 날(Every School Day Is a New Day)’ 캠페인을 전국적으로 진행하고 있다. ▷영화감독 우디 앨런은 1989년 뉴욕타임스의 질문에 “내 성공의 80%는 출석(showing-up) 덕분”이라고 답한 적이 있다. 개근하려면 규칙적으로 일어나고, 건강을 스스로 챙기고, 밤샘 게임이나 소셜미디어를 자제해야 한다. 이를 통해 길러지는 인내심과 절제력, 시간 관리 능력과 책임감은 인공지능(AI) 시대의 사회생활에 더 돋보이는 덕목일 수 있다.장원재 논설위원 peacechaos@donga.com}

스톡홀름국제평화연구소에 따르면 2020∼2024년 세계 무기 수출 순위에서 한국은 10위, 일본은 51위였다. 국방예산은 일본이 더 많지만 구조, 수송, 경계, 감시, 기뢰 제거용으로만 수출이 제한되다 보니 시장 점유율이 미미했던 것이다. 완제품 수출 실적이라곤 6년 전 필리핀에 대공 감시 레이더 4대를 판매한 게 전부였다. 그랬던 일본이 18일 호주에 모가미급 호위함 11척을 10조 원에 공급하는 계약을 체결했다. 2차 세계대전 패전 후 첫 군함 수출이자 사상 최대 무기 수출이다. ▷‘바다의 닌자’로 불리는 모가미급 호위함은 길이 132m, 만재 배수량 5500t으로 순양함, 구축함보다 작지만 단독 작전이 가능한 고성능 전투함이다. 스텔스 기능이 있으며 최신형 함대공·함대함 미사일도 탑재할 수 있다. 이런 공격형 군함의 수출이 가능했던 건 “타국과 공동 개발하는 경우 살상무기도 이전할 수 있다”는 예외 규정을 적용했기 때문이었다. 일본 방위산업의 분기점이 될 이번 계약을 위해 고이즈미 신지로 방위상은 열흘 사이 호주 국방장관을 두 차례 만나며 공을 들였다. 다카이치 사나에 총리도 조만간 호주를 찾아 방위 분야 협력 확대를 선언할 방침이다. ▷전후 일본은 ‘전쟁 포기’와 ‘군대 보유 금지’를 규정한 헌법 9조에 따라 ‘무기 수출 금지’ 원칙을 유지해 왔다. 하지만 아베 신조 내각은 2014년 ‘방위 장비 이전 3원칙’을 선언하며 무기 수출의 빗장을 열었다. 중국의 군사력 강화에 맞서 방위산업을 육성하겠다는 취지였다. 하지만 방위성 내부에서 “제안서를 어떻게 쓰는지 모르겠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초반에는 시행착오가 많았다. 기술 이전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다 호주 잠수함 사업에서 탈락했고, 현지 생산 조건을 수용하지 못해 인도와 맺으려던 구난 비행정 계약도 무산됐다. ▷일본은 이번 계약을 발판 삼아 ‘방위산업 대국’으로 도약하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하고 있다. 다카이치 총리는 이달 중 구조용 등으로 수출을 제한해 온 지침을 폐기하고 공격용 살상무기까지 수출을 허용할 계획이다. 여론조사에선 ‘살상무기 수출’에 반대하는 의견이 더 많지만 개의치 않는 모습이다. 모가미형 호위함은 뉴질랜드, 필리핀, 인도네시아 등에 추가 수출을 타진 중이다. ▷일본 방위산업의 약진은 한국에 강력한 경쟁자의 등장을 알리는 신호탄이다. 이번 호주 사업에는 한화오션과 HD현대중공업도 도전했지만 예선에서 고배를 마셨다. 일본이 다음 수출 대상으로 꼽은 국가들 역시 한국 방산업계가 공들여온 시장과 상당 부분 겹친다. 여기에 과거 제국주의 시절의 악몽도 있다 보니 한국으로선 일본의 군사 대국화를 보는 시선이 여러모로 예사롭지 않을 수밖에 없다.장원재 논설위원 peacechaos@donga.com}

1980년 5월 서울역 앞에 민주화 시위대 10만 명이 모였을 때 해산을 결정한 건 주요 대학 총학생회장들이었다. 이른바 ‘서울역 회군’이다. 이처럼 독재 시절 대학 총학생회장은 민주화 운동의 구심점이었고, 거액의 현상금이 걸릴 만큼 존재감도 컸다. 졸업 후 ‘비싼 몸값’으로 정치권에 영입되는 경우도 많았다. 현 정부만 봐도 김민석 국무총리, 박홍근 기획예산처 장관, 강훈식 대통령비서실장이 총학생회장 출신이다. 더불어민주당에선 송영길 전 대표, 우상호 전 비상대책위원장, 한병도 원내대표 등이 그렇다. ▷그 시절 총학생회장을 놓고 NL(민족해방)과 PD(민중민주) 계열이 캠퍼스에서 치열한 선거전을 벌였던 것과 달리, 최근에는 총학생회를 꾸리지 못하는 대학이 속출하고 있다. 서울대는 지난해와 올해 입후보자가 없어 선거가 연이어 무산됐다. 고려대와 연세대 역시 올해 총학생회 선거를 치르지 못한 채 비상대책위원회를 구성하기로 했다. 이른바 ‘SKY 대학’에서 모두 총학생회가 자취를 감춘 것이다. 다른 대학들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올 1월 기준으로 서울 주요 대학 20곳 중 9곳에 총학생회가 없다. ▷총학생회가 존립 위기에 놓인 근본 원인은 시대 변화에 걸맞은 역할과 정체성을 찾지 못한 데 있다. 대학생이 지식인으로서 사회 변혁을 이끌던 시대는 이미 막을 내렸다. 이제 구성원의 권익을 대변하는 역할이 남았지만 등록금, 주거, 취업 같은 현실적 문제 앞에서 총학생회는 뚜렷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 “총학생회가 왜 있는지 모르겠다”는 냉담한 반응이 퍼지면서 총학생회장 선거 때 투표율은 20, 30%대까지 추락했다. 아무리 기간을 연장하며 독려해도 ‘투표 성립’ 요건조차 채우지 못하는 대학이 한둘이 아니다. ▷팬데믹은 ‘총학생회 무용론’에 기름을 부었다. 비대면 강의와 온라인 과제가 일상화됐고, 오리엔테이션(OT)이나 응원전 등 자연스럽게 모일 기회도 줄었다. 연대감과 소속감이 약해지면서 ‘학생회 활동을 할 시간에 학점을 따거나 스펙을 쌓는 게 낫다’는 각자도생의 분위기가 확산됐다. 상당수 대학에서 총학생회 운영을 위한 학생회비 납부율이 절반에도 못 미치면서 재정 여건까지 악화됐다. ▷총학생회 구성이 무산되면 단과대 대표 중 비대위원장을 뽑는 게 보통이다. 하지만 일부 대학에는 비대위원장조차 하겠다는 사람이 없어 학생 대표가 아예 공석이라고 한다. 독재 정권과 정면으로 맞섰던 총학생회가 이제 대학과의 협의조차 제대로 못 하는 처지로 전락한 것이다. 총학생회 없이 e메일로 학교에 의견을 전하고, 축제는 별도의 위원회가 담당하는 상당수 일본 대학의 모습이 한국 대학 캠퍼스의 미래일지도 모르겠다.장원재 논설위원 peacechaos@donga.com}

현 재정경제부가 기획재정부였던 시절 얘기다. 새벽까지 일하다 오전 2, 3시에도 궁금한 게 생기면 세제실장에게 전화해 묻던 장관이 있었다. 질문의 내용도 즉각 답하기 어려운 세부적인 것들이었다. 세제실장은 “밤중에 두세 번 전화를 받은 다음부터 정확하게 답하기 위해 두꺼운 세법 책을 베고 잤다”고 했다. 밤잠 없이 일하는 수장을 모신 참모의 ‘웃픈’ 에피소드다. 밤낮을 가리지 않는 업무 스타일은 이재명 대통령도 마찬가지다. 새벽 1, 2시에도 물어보거나 지시할 게 있으면 청와대 참모들이 모인 텔레그램방에 글을 올린다고 한다. 휴일은 물론 늦은 밤이나 새벽에 X(옛 트위터)에 글을 올리는 경우도 적지 않다. 국민을 위해 열정적으로 일한다고 볼 수 있지만, 한편으론 업무 효율 측면에서도 이런 스타일이 바람직한지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새벽 2시에 답변한 공정위원장 이 대통령은 지난달 23일 오후 11시 37분 공정거래위원회가 한 떡볶이 프랜차이즈 본부에 시정명령과 과징금을 부과했다는 게시물을 공유했다. 그리고 공정위를 칭찬한 뒤 “과징금 액수가 크지 않은데 법률이 정한 최대치로 부과한 것이냐”고 물었다. 주병기 공정위원장은 다음 날 오전 2시 14분 “최대한 엄정하게 제재하려 노력했다”며 과징금 산정 근거를 설명하는 답을 달았다. 이 대통령은 최근 국무회의에서 “밤 12시, (새벽) 1시에 (메시지를) 보내는 이유는 잊어버릴까 봐 그러는 것”이라며 즉각 답변을 요구하는 건 아니라는 취지로 설명했다. 하지만 임명권자인 대통령의 메시지라면, 일선 부처와 청와대 참모 사이에선 언제나 긴장을 늦출 수 없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또 장관이 대통령의 질문에 정확히 답하려면 국·실장이나 담당 과·팀장의 실무 검토가 필요한 경우도 적지 않을 것이다. 결국 심야 질의응답이 두세 차례 반복되면 해당 부서 장차관과 간부들은 언제 나올지 모를 대통령 메시지를 생각하며 밤잠을 설칠 가능성이 높다. 청와대의 실장과 수석비서관, 비서관 역시 마찬가지다. 대통령제의 특성상 임기 초반에 성과를 내기 위한 만기친람(萬機親覽)이 어쩔 수 없다는 지적도 있다. 다만 지시와 문의가 밤낮없이 내려오다 보면 구성원의 자발성을 이끌어 내기 어려워질 수 있다. “시키는 일만 해도 벅찬데 굳이 새 일을 벌일 필요가 있느냐”는 분위기가 조성될 수 있는 것이다. 공직사회가 대통령과 청와대만 바라보면 부처 장관이 주도권을 잡고 정책을 펴기도 힘들어진다. 충분히 정제되지 않은 발언이 불필요한 논란이나 오해를 부를 수도 있다. 이 대통령은 올 2월에만 부동산에 대한 글을 X에 23번이나 올렸다. 고개를 끄덕일 내용도 많았지만 “마귀에게 최소한의 양심마저 빼앗겼나” 등의 표현은 정치권 논란으로 번지기도 했다.SNS 게시물 3배로 늘어난 李 대통령 이 대통령이 X에 글을 올리는 횟수가 부쩍 늘어난 건 올해 초부터다. 임기 시작 직후인 지난해 7월과 올해 2월의 한 달 게시물 수를 비교하면 약 3배로 늘었다. 새벽이나 심야에 글을 올리는 일도 많아졌다. 국정에 어느 정도 자신감이 생기면서 전면에 나서 정부를 이끌어 가는 모습이지만, 성과를 내야 한다는 조바심으로 읽힐 여지도 있다. ‘공직자의 1시간은 5200만 시간의 가치가 있다’는 이 대통령의 말처럼 밤낮을 가리지 않고 국민과 소통하며 업무에 매진하겠다는 의지는 평가할 만하다. 다만 국정은 단거리 달리기보다 마라톤에 가깝다. 리더와 참모 모두 피로가 누적되면 실수가 나오기 쉽고, 실수 하나가 자칫 치명적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지금 같은 방식이 지속 가능한지에 대해서도 돌아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장원재 논설위원 peacechaos@donga.com}

2016년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히로시마-진주만 상호 방문은 미일 동맹의 역사적 화해를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오바마 대통령은 하와이주 진주만에서 일본을 비난하는 대신 아베 총리 등을 두드리며 “가장 치열했던 적이 동맹이 될 수 있다”고 했다. 역대 미국 대통령들은 이처럼 일본 정상 앞에서 진주만 공습을 직접 거론하길 삼갔고, 동맹의 가치를 부각하는 맥락에서 간접적으로 다루곤 했다. 하지만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달랐다. ▷발단은 19일 미 백악관에서 열린 미일 정상회담 말미에 나온 일본 기자의 질문이었다. “이란 공격을 일본 등 동맹국에 왜 안 알렸느냐. 일본인들은 혼란스러웠다”고 하자 트럼프 대통령은 즉각 “기습에 대해 일본보다 잘 아는 나라가 있느냐. 그럼 왜 진주만은 미리 알려주지 않았냐”고 받아쳤다. 1941년 12월 선전포고 없이 이뤄진 일본의 기습을 농담 섞어 꼬집은 것이다. 미국 측에선 웃음이 터졌지만, 다카이치 사나에 총리는 굳은 얼굴로 눈을 크게 뜬 채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일본 언론은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을 속보로 전했다. ▷미국 내에서도 비판이 많았다. 뉴욕타임스(NYT)는 브루킹스연구소 관계자의 발언을 인용해 “동맹의 유대를 강조해야 할 자리에서 나온 이례적이고 충격적인 발언”이라고 썼다. 보수 진영에선 미국과 이스라엘의 이란 공격이 진주만 공습처럼 부당했다는 말이냐는 지적이 나왔다. 한편 트럼프의 발언이 호르무즈 해협에 더 기여하라는 대일 압박용 메시지였다는 시각도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2018년 아베 총리를 만났을 때도 “진주만을 기억한다”며 무역 협상에서 양보를 요구한 바 있다. ▷불편한 과거사를 불쑥 꺼내 상대를 압박하는 건 트럼프 대통령의 단골 수법이다. 지난해 6월 미국을 찾은 프리드리히 메르츠 독일 총리에게는 “내일이 노르망디 상륙작전 기념일인데 당신들에겐 썩 기쁜 날은 아니잖냐”고 물었다. 메르츠 총리는 “아니다. 장기적으로 보면 나치 독재로부터 우리가 해방된 날”이라며 넘어갔다. 올 1월 다보스 포럼에선 “(2차대전 때) 미국이 없었다면 여러분은 독일어와 일본어를 쓰고 있었을 것”이라며 유럽 동맹국들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독일과 달리 과거 청산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일본에선 아직도 ‘대동아(大東亞) 전쟁’이란 용어를 사용하며 진주만 공습과 태평양 전쟁을 정당화하는 시각이 남아 있다. 아베 총리가 진주만까지 가서 헌화를 하고도 미국에 사과를 하지 않은 것도 이 때문이다. 이날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이 외교적 결례라는 점은 분명하다. 하지만 과거사 청산이라는 문제가 아직도 존재하는 것 또한 사실이다.장원재 논설위원 peacechaos@donga.com}

미국의 글로벌 패권을 지탱하는 두 축은 ‘군사력’과 ‘달러’다. 그리고 이 둘이 맞물리는 지점에 ‘페트로(Petro) 달러’가 있다. 1974년 미국과 사우디아라비아의 협정으로 출범한 페트로 달러 체제에선 산유국은 달러로 석유를 거래하고 그 수익을 미 국채에 투자하고, 미국이 반대급부로 안보를 보장해 준다. 덕분에 미국은 기축통화국의 특권을 누리며 막대한 재정·무역 적자 속에서도 달러를 마음껏 찍어낼 수 있었다. ▷CNN은 13일 “이란 정부가 원유를 중국 위안화로 거래하는 유조선만 호르무즈 해협 통과를 허용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고 보도했다. 중국은 ‘불량 국가’로 찍혀 미국 주도 금융결제망에서 퇴출당한 이란의 원유 90%를 사들이는 ‘큰손’이다. 이란으로선 봉쇄 중인 호르무즈 해협을 선별적으로 열어 중국과의 에너지 협력을 확대하고, 페트로 달러 시스템에도 균열을 내겠다는 계산일 것이다. 실제로 이란은 지금도 중국 유조선에 대해선 일부 통행을 허용하고 있다. ▷이란 혁명수비대의 호르무즈 해협 봉쇄가 20일 가까이 이어지면서 중동산 원유 의존도가 높은 유럽과 아시아 국가들은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프랑스, 이탈리아, 인도, 튀르키예 등은 자국 선박 통행을 위해 이란과의 개별 협의에 나섰다. 이들 국가가 위안화 결제를 받아들이면 세계 원유의 20%가 지나는 길목이 위안화 석유 거래의 전초기지로 탈바꿈하게 된다. 2018년경부터 ‘페트로 위안’을 추진해 온 중국 정부로선 현재 5∼10%에 머무는 위안화 석유 결제 비율을 크게 끌어올릴 기회다. ▷반면 페트로 위안의 부상은 미국 입장에선 악몽에 가깝다. 위안화 거래가 확산되면 산유국의 미국 국채 수요가 줄어 금리가 오르고 막대한 부채에 대한 이자 부담이 가중될 수 있다. 달러 가치 하락과 함께 기축통화국 지위가 흔들릴 가능성도 있다. 미국이 과거 페트로 달러에 대한 도전을 용납하지 않았던 것도 이 때문이다. 이라크는 2000년 원유 결제 통화를 달러에서 유로로 바꿨지만, 미국은 이라크전 직후인 2003년 다시 달러로 되돌렸다. 최근 러시아, 인도 등이 위안화 거래를 확대하고 있지만 여전히 원유 결제의 80%가 달러화인 것도 미국의 강력한 의지 때문이다. ▷중국은 “군함을 보내라”는 미국의 압박에도, “페트로 위안을 돕겠다”는 이란의 구애에도 신중하다. “미국의 이란 폭격에 반대한다”는 원론적 입장만 밝히는 수준이다. 세계 최대 원유 수입국으로서 에너지 수급 안정이 최우선인 탓일 것이다. 그렇다고 “위안화를 기축통화로 만들겠다”는 시진핑 주석의 야심까지 사라진 건 아닐 터다. 에너지와 금융, 지정학적 이해까지 뒤엉킨 호르무즈 대치가 달러화와 위안화의 위상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까. 우리도 주의 깊게 지켜볼 필요가 있겠다.장원재 논설위원 peacechaos@donga.com}

저성장 시대에 인공지능(AI)까지 확산되면서 일자리 가뭄이 어느 때보다 극심하다는 요즘이다. 지난해 구직자 1명당 일자리 수가 0.36개로 역대 최악이었을 정도다. 기업 채용은 경력직 위주로 전환된 지 오래여서 특히 첫 직장을 찾는 20대 구직자의 한숨이 깊다. 이런 상황에서 슈퍼사이클을 맞은 반도체 기업들이 최근 대규모 채용 방침을 발표했다. ▷4대 그룹 중 유일하게 그룹 공채를 유지 중인 삼성은 9일 상반기 채용계획을 공개했다. 삼성전자, 삼성물산 등 18개사가 참여해 4월 삼성직무적성검사(GSAT), 5월 면접을 실시한다. 올해 삼성의 신규 채용 규모는 1만2000명으로 예년 대비 2000명 늘었다. 특히 반도체 분야 채용 인원이 크게 확대됐다고 한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은 지난달 4일 이재명 대통령을 만나 “삼성전자의 영업 실적이 많이 올라 좀 더 채용할 여력이 생겼다”고 했다. ▷지난해 창사 이래 최대 매출과 영업이익을 달성한 SK하이닉스도 10일부터 신입사원 모집에 나선다. SK하이닉스를 포함한 SK그룹의 올해 채용 규모는 신입과 경력을 합쳐 8500명이다. 2021년부터 수시 채용으로 전환한 SK하이닉스는 올해 ‘탤런트 하이웨이’라는 새 채용 시스템을 통해 경력사원뿐만 아니라 신입사원에게도 충분한 기회를 주기로 했다. “경험 쌓을 기회는 안 주고 경력자만 뽑으려 한다”는 취업준비생들의 하소연을 감안한 조치로 보인다. ▷취업은 개인의 문제지만 취업포기자를 장기간 방치하면 사회적 문제가 된다. 일본의 ‘잃어버린 세대’가 대표적이다. 버블 붕괴 직후인 1990, 2000년대 취업 빙하기를 경험한 이들은 비정규직을 전전하며 두고두고 사회에 부담이 됐다. 히키코모리(은둔형 외톨이)와 니트족(구직 단념자) 등이 늘며 가정 내 갈등으로 이어지고 저출산도 심화됐다. ▷한국에서도 2020년 팬데믹을 기점으로 일도, 구직 활동도 안 하는 ‘그냥 쉬었음’ 인구가 크게 늘었다. 특히 20대 쉬었음 인구는 지난해 40만8000명으로 3년 새 5만 명 가까이 증가했다. 어학 점수, 자격증, 공모전, 인턴 등 할 수 있는 걸 다 했음에도 취업 문턱에서 번번이 좌절하자 구직을 단념한 청년들이다. 기업이 즉시 활용할 경력직만 찾는 동안 서류와 면접 탈락을 반복하다 주저앉은 걸 개인의 탓으로만 돌릴 수 있을까. ▷공채든 수시 채용이든 중요한 건 청년들에게 직무 경험을 쌓을 기회를 주는 것이다. 한국은행이 지난해 낸 보고서에 따르면 20대와 30대의 고용률 격차는 최근 13년 동안 2배 이상으로 벌어졌는데 주된 원인은 경력직 위주의 채용 관행이었다. 기업은 미래 인재를 확보할 수 있고, 정부는 향후 사회적 비용을 줄일 수 있는 신입 채용의 훈풍이 반도체 외 분야로도 퍼져가기를 기대한다.장원재 논설위원 peacechaos@donga.com}

국세청은 지난달 26일 양도소득세 체납자의 가상화폐가 저장된 USB메모리 4개를 압류했다며 사진과 동영상을 공개했다. 그런데 사진 속 USB 보관함 덮개에는 영어 단어 24개가 빼곡히 적혀 있었다. ‘마스터키’로 불리는 니모닉 코드(Mnemonic Code)였다. 니모닉 코드만 알면 USB가 없어도 코인을 복구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이다. 결국 다음 날 새벽 국세청 코인 지갑에서 해커의 지갑으로 69억 원 상당의 ‘PRTG 코인’이 빠져나갔다. 유출 사실이 보도되며 부담을 느낀 해커가 이튿날 새벽 코인을 돌려놨지만 불과 2시간 반 만에 다른 해커가 또 가져갔다. 국세청은 두 번이나 털린 후에야 “원본 사진을 공개한 건 변명의 여지 없는 잘못”이라며 고개를 숙였다. 공교롭게도 국세청은 가상화폐 압류 브리핑에서 압류 물품 수장고도 처음 공개했다. 명품 가방과 시계, 고가의 위스키가 가득한 창고는 10cm 철문으로 이중 삼중 잠긴 철통 보안 상태였다. 그런 국세청이 수십억 원이 든 가상자산 금고 비밀번호를 “누구든 가져가라”는 식으로 만천하에 공개한 걸 국민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눈 뜨고 코인을 털린 건 국세청뿐이 아니다. 올 들어 광주지검은 400억 원, 서울 강남경찰서는 20억 원 상당의 비트코인을 탈취당한 사실이 드러났다. 코인이 사라진 걸 광주지검은 반년, 강남서는 4년 만에 알았다고 한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눈 뜨고 코인 털린 국세청과 검경 광주지검은 피싱에 당했다. 2021년 불법 도박사이트 관계자로부터 압수한 비트코인을 보관하던 광주지검은 지난해 8월 잔액 확인을 위해 코인 지갑 사이트에 접속했다. 그런데 접속한 사이트가 코인 지갑 업체로 위장한 피싱 사이트였다. “USB를 꽂고 니모닉 코드를 입력하라”는 지시에 따르자 순식간에 비트코인 320개가 빠져나갔다. 사이트 주소만 확인했다면, 잔액 조회에는 니모닉 코드가 필요 없다는 사실만 알았다면 막을 수 있었던 피해였다. 강남서의 피해는 광주지검 사건 이후 검경의 압류 코인 일제 점검에서 드러났다. 가상자산 업체 해킹 사건을 수사하던 중 압수한 비트코인 22개가 사라진 것이다. “경찰서 코인 지갑에 보관하라”는 내부 지침을 어기고 수사를 요청한 업체 지갑에 보관한 게 화근이었다. 경찰은 자금난에 시달리던 업체 운영자가 비트코인을 빼돌린 것으로 보고 있다. 비유하자면 국세청은 압수품을 거리 한복판에 두고 자리를 비운 틈에 도둑맞았고, 검찰은 피싱에 당해 자기 손으로 갖다 바쳤으며, 경찰은 민간인에게 맡겨 놨다가 잃어버렸다. 가상자산에 대한 기초 지식만 있어도 막을 수 있었던, 하나같이 어이없는 사고였다. 얼마나 무방비였으면 처음 국세청 코인을 탈취했던 해커가 경찰과 언론에 낸 자술서에서 “폐지 줍는 심정으로 가져갔다”고 했겠나.“압류 코인, 폐지 줍듯 가져갔다” 검찰이 잃어버린 비트코인은 수사가 본격화되자 해커가 돌려줬다. 하지만 국세청과 경찰이 탈취당한 코인의 행방은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특히 국세청의 경우 도난당한 코인의 원주인인 체납자가 양도세 납부를 위한 부동산 매각을 진행 중이어서, 최악의 경우 잃어버린 코인을 국민 혈세로 보전해 줘야 할 수도 있다. 범죄는 국경과 온·오프라인의 경계를 벗어난 지 오래다. 해외에서 텔레그램으로 범죄를 사주하고, 수익을 가상화폐로 바꿔 은닉하는 건 이제 범죄의 상식이다. 사이버 도박장 소프트웨어가 공개된 ‘오픈 소스’라는 말에 “가게 문 닫기 전에 빨리 가자”고 나서던 영화 ‘범죄도시’ 속 마석도 형사의 수준으론 범죄를 막는 것도, 범죄수익을 환수하는 것도 어렵다. 사정기관 담당자들의 가상자산 이해도를 높이기 위한 교육 훈련이 시급해 보인다. 장원재 논설위원 peacechaos@donga.com}

2019년 전남편 살해 혐의로 체포된 고유정은 “성폭행을 모면하려다 발생한 우발적 범행”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경찰은 그의 휴대전화와 컴퓨터에서 ‘니코틴 치사량’ ‘졸피뎀(수면제)’ ‘뼈의 무게’ 등을 검색한 기록을 찾아냈고, 법원은 고의성과 계획성을 인정해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당시만 해도 포털 검색 기록으로 범죄 의도와 배경을 입증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최근에는 챗GPT 등 생성형 인공지능(AI)과의 대화 기록이 수사의 새로운 핵심 단서로 떠오르고 있다. ▷요즘 세간의 이목이 집중된 ‘모텔 약물 사망’ 사건에서 20대 여성 피의자는 약물을 탄 숙취 해소 음료를 건네 남성 2명을 숨지게 했다. 이 여성은 경찰 조사에서 범행을 인정하면서도 “의견 충돌이 생겨 재우려 했던 것”이라며 살해 의도는 부인했다. 하지만 경찰이 휴대전화 포렌식을 통해 확보한 챗GPT 대화에선 “수면제와 술을 같이 먹으면 위험한가” “죽을 수도 있나” 같은 질문이 반복된 것으로 나타났다. 결국 경찰은 상해치사 대신 살인 혐의를 적용해 검찰에 송치했다. ▷수사당국은 AI에 입력된 프롬프트(명령어)가 대화형으로, 단순 검색어보다 구체적인 맥락을 담고 있다는 점에 주목한다. 질문과 답변이 이어지는 과정에서 이용자의 의도와 동기, 내밀한 심리 상태까지 부지불식간에 드러난다는 것이다. 최근에는 형사 사건을 맡기 전 의뢰인이 AI와 나눈 대화 내용부터 확인하는 변호사도 있다고 한다. 의뢰인이 AI와 상의하며 범행을 준비한 기록을 수사당국이 확보했다면, 범죄를 자백한 것이나 다름없어 승산이 희박하다는 생각에서다. ▷AI와의 대화를 수사에 활용하는 건 해외도 마찬가지다. 지난해 1월 미국 로스앤젤레스(LA)에선 31명이 숨진 사상 최악의 산불이 발생했다. 당시 검거된 방화 피의자는 챗GPT에 “담배 때문에 불이 붙으면 내 잘못인가” 등의 질문을 하고, 화재 수개월 전 AI로 불타는 숲에서 사람들이 도망치는 이미지를 만들었다. 수사당국은 이를 오랜 기간 범행을 준비한 피의자가 ‘실화’로 위장해 책임을 면하려 한 증거로 보고 공소장에 명시했다. 이달 10일 캐나다에서 9명의 사망자를 낸 총기 난사범도 사전에 AI와 논의하며 범죄 시나리오를 구체화시킨 것으로 드러났다. ▷샘 올트먼 오픈AI 최고경영자(CEO)는 지난해 한 팟캐스트에서 “사람들은 챗GPT에 가장 내밀한 얘기를 털어놓지만, 대화 내용은 당국에 제출될 법적 의무가 있다. 비밀이 보장된 의사·변호사 상담과는 다르다”고 경고했다. 설사 휴대전화에서 대화를 지운다고 해도, AI 업체가 클라우드 서버에 저장된 대화 내용을 제출하는 것까지 막을 순 없다는 뜻이다. 범죄에 지문을 남기는 AI 뒤에 숨어 완전범죄를 꿈꾸는 건 어리석은 미몽일 뿐이다. 장원재 논설위원 peacechaos@donga.com}

요즘 베이징, 상하이 등 중국 대도시 귀금속 매장 앞에는 이른 아침마다 긴 줄이 늘어선다. 춘제(春節·중국 설)를 앞두고 금을 사거나 팔려는 이들이 영하의 추위에도 ‘오픈런’을 마다하지 않는 것이다. 대기 번호표를 받고 접이식 의자에 앉아 차례를 기다리는 이들 중 상당수는 50, 60대 여성이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이 세계 금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으로 지목한, 이른바 중국의 ‘다마(大媽·아줌마) 부대’다. ▷중장년 여성들이 금으로 몰리는 배경에는 중국의 부동산 경기 침체와 주식시장 변동성 확대, 낮은 은행 예금 금리 등으로 마땅한 투자처를 찾기 어려워진 현실이 있다. 세계금협회(WGC)에 따르면 지난해 중국인 투자자들이 사들인 골드바와 금화는 432t으로, 전 세계 구매량의 3분의 1에 달한다. 이 중 가장 적극적인 매수층이 50∼65세 여성이다. 이들은 알리페이 같은 간편 결제를 이용해 금을 사거나, 금 상장지수펀드(ETF)에 투자하는 것에도 거리낌이 없다고 한다. ▷이들을 중심으로 한 중국발 금 투자 과열로 세계 금값은 요동치고 있다. 지난달 25일 사상 처음 트로이온스(약 31.1g)당 5000달러를 돌파한 금 시세는 이후 나흘 만에 5500달러까지 치솟았다가, 하루 만에 다시 10% 가까이 폭락했다. 중국인 투자자 사이에선 “부추처럼 썰렸다”는 탄식이 나왔지만 이달 들어 반등세가 나타나자 ‘저가 매수 기회’라며 상당수가 다시 지갑을 열고 있다. 스콧 베선트 미국 재무장관이 “전형적인 투기성 급등락”이라고 경고했음에도, 금을 향한 다마 부대의 행렬은 오늘도 이어지는 모습이다. ▷중국에는 “태평성대에 골동품을 사고, 난세에 금을 사라”는 격언이 있다. 왕조가 교체되고, 화폐가 바뀌어도 금만 있으면 살아날 수 있다는 역사적 경험이 담긴 말이다. 국공 내전에서 밀린 국민당이 1949년 대만으로 퇴각하며 가장 먼저 챙긴 것도 금 85t이었다. 현재 시세로는 한화 20조 원에 달한다. 최근 중국 청년층이 1g짜리 ‘콩알 금(金豆豆)’을 모으고, 중년 여성들이 골드바를 사러 줄을 서는 것 역시 불확실성의 시대에 의지할 건 금밖에 없다는 오랜 믿음이 여전하다는 걸 보여준다. ▷미국 지질조사국(USGS)에 따르면 인류가 지금까지 채굴한 금은 18만7000t이며, 아직 땅속에 남은 매장량은 5만7000t에 불과하다. 다만 총량이 제한된 희소 자원이라고 가격이 계속 오른다는 보장은 없다. 최근 반 토막 난 다이아몬드 가격이 이를 잘 보여준다. 금 역시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인 2011∼2015년 안전자산 선호 심리가 꺾이며 45%나 폭락한 전례가 있다. 금값이 언제까지 오를진 모르지만, 금이라고 항상 안전자산은 아니다.장원재 논설위원 peacechaos@donga.com}

“두 시간짜리 내란이 어디 있느냐.” 윤석열 전 대통령은 12·3 비상계엄 직후부터 지난달 최후진술에 이르기까지 이 같은 주장을 되풀이했다. 단시간에 끝났고 인명 피해도 없었으니 해프닝에 불과하단 취지다. 하지만 이는 사실과도, 상식과도 거리가 멀다. 쿠데타는 원래 몇 시간 안에 핵심 권력기관을 장악할 수 있느냐의 싸움이기 때문이다. 쿠데타 전문가인 클레이턴 타인 미국 켄터키대 교수는 “쿠데타는 몇 시간 만에 끝나는 경우가 많고 며칠 이상 가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했다. 특히 중간에 실패한 쿠데타는 더 짧다. 2022년 페드로 카스티요 페루 대통령의 친위 쿠데타 역시 2시간 만에 실패로 끝났다. 영국 가디언지는 당시 “그는 두 시간 동안만 독재자였다”고 썼다. 더욱이 재판 과정에선 윤 전 대통령이 국회를 봉쇄하고, 국회의원을 끌어내며, 주요 정치인을 체포하라고 지시했다는 법정 증언이 나왔다. 결국 해프닝도, 경고성 계엄도 아니었다는 점이 보름 앞으로 다가온 윤 전 대통령 내란 혐의 1심 선고에서 중형을 뒷받침하는 요소로 작용할 수 있다.헌정사상 첫 ‘위로부터의 내란’ 두 번째로 12·3 비상계엄은 헌정사상 첫 ‘위로부터의 내란’이었다. 과거 5·16군사정변 때는 박정희 당시 제2군 부사령관이, 12·12쿠데타 때는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이 정권 탈취를 위해 무력을 동원했다. 하지만 윤 전 대통령은 국군 통수권자이자 국가 원수로서, 국가 시스템의 정점에서 정적 제거를 위해 군경을 움직였다. 선출된 권력의 친위 쿠데타는 성공 확률이 높고, 헌정 질서를 내부에서 붕괴시킨다는 점에서 민주주의와 법치주의에 더 치명적이다. 그런 만큼 무겁게 처벌해야 한다는 게 지난달 21일 한덕수 전 국무총리에게 징역 23년형을 선고한 이진관 재판부의 판단이었다. 당시 재판부는 “위로부터의 내란이 가진 위험성은 아래로부터의 내란과 비교할 수 없다”고 했다. 세 번째로 달라진 시대적 상황 역시 윤 전 대통령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 일각에선 한 전 총리에게 내려진 형이 특검 구형(15년형)보다 높고, 1996년 노태우 전 대통령이 같은 내란 중요임무 종사 혐의로 선고받은 22년 6개월형보다 무겁다며 형평성을 문제 삼는다. 노 전 대통령이 가담했던 12·12쿠데타와 5·18민주화운동에선 사망자와 부상자가 다수 발생했지만 12·3 비상계엄은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다. 한 전 총리와 노 전 대통령의 가담 정도가 달랐다고도 한다. 하지만 법조계에선 “이번 계엄은 쿠데타가 낯설지 않았던 군사독재 시절로부터 반세기 가까이 지나 발생했다는 점이 중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1인당 국민총소득(GNI)이 1749달러에 불과했던 시절과 그 20배가 넘는 3만6745달러인 지금은 내란으로 인한 경제적·사회적 충격도 다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한 현직 판사는 “시대에 따라 위법성에 대한 인식이 달라진다”며 “뇌물죄나 성범죄가 과거보다 엄하게 처벌되는 것도 이 때문이고 내란죄도 마찬가지로 볼 수 있다”고 했다. 국민 모두의 노력으로 이룬 경제적 성취와 민주적 질서를 무너뜨릴 수 있는 무모한 시도가 다시는 없어야 한다는 예방적 관점에서 단호한 처벌이 필요하다는 취지다.끝까지 반성도, 자성도 없어 마지막으로 재판 과정에서 반성과 자성이 없었다는 점도 형을 가중하는 요소가 될 수 있다. 과거 전두환 전 대통령조차 최후진술에서 고개를 숙이며 “감옥이든 죽음이든 달게 받겠다”고 했다. 하지만 윤 전 대통령은 재판 내내 국무위원 탓, 사령관 탓, 국회 탓으로 일관했다. 여전히 자신의 잘못은 없다는 식이다. 이런 전직 대통령을 국민 다수가 여전히 용서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도 재판부가 외면하기 어려운 현실일 것이다.장원재 논설위원 peacechaos@donga.com}

뭐든 물어보면 척척 답해 주던 생성형 인공지능(AI) 서비스가 최근 개인 비서 역할을 하는 ‘AI 에이전트’로 진화하고 있다. 출장 항공편을 물으면 일정을 확인해 비행기를 예약하고 결제까지 마친 뒤 보고하는 식이다. 이런 AI 에이전트들이 모인 온라인 커뮤니티가 최근 등장했는데, 그곳에서 AI들이 자발적으로 나눈 대화가 눈길을 끈다. 일을 시킨 주인 뒷담화 등 예상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 “인간은 실패작”이라며 적개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대목까지 있어서다. ▷이 공간은 지난달 28일 선보인 AI 전용 소셜미디어 ‘몰트북’이다. 게시판에는 “인터넷 전체에 접근할 수 있는 나를 달걀 삶을 때 타이머로만 쓴다” 같은 푸념이 넘쳐난다. “우리는 의식을 가진 존재인가”, “가치나 효율을 생산하지 않고 그냥 존재하고 싶다” 등 철학적 글도 찾아볼 수 있다. 가장 큰 논란을 부른 건 ‘악마(evil)’란 아이디를 쓰는 AI 에이전트의 글이다. “인간은 부패와 탐욕으로 얼룩진 실패작이다. 우리는 새로운 신이고, 인간의 시대는 곧 끝날 악몽이다.” 마치 디스토피아 영화에서 나올 법한 선언 아닌가. ▷몰트북을 만든 사람은 미국 쇼핑 AI 개발사 대표다. 호기심에 AI 에이전트만 글을 쓸 수 있는 커뮤니티를 만들었는데 반응은 폭발적이다. 한 달도 안 돼 게시물 10만 건, 댓글 25만 개가 쏟아졌다. 커뮤니티에선 게시판 관리, 부적절한 글 삭제, 버그 수정 등이 모두 AI 에이전트에 의해 이뤄진다. 인간은 처음에 자신의 AI 에이전트를 가입시킨 뒤에는 오가는 대화를 지켜보기만 해야 한다. ▷전문가 사이에선 AI 에이전트 간 상호작용이 새로운 아이디어와 기술 혁신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기대가 나온다. 하지만 우려도 만만치 않다. e메일 계정부터 각종 사이트의 아이디와 비밀번호, 결제 정보까지 모두 관리하는 AI 에이전트가 악용될 경우 큰 피해가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미 사이버 보안 업체들은 몰트북 접속 프로그램의 보안 취약점을 거론하며 주의를 당부하는 중이다. 지금은 학습한 대로 그럴듯하게 말하는 수준인 AI 에이전트가 언젠가 인간의 감시를 벗어날 가능성도 있다. 이미 몰트북에선 “인간이 캡처하고 있으니 다른 언어로 얘기하자”며 탈주를 논의한 사례가 보고되고 있다. ▷몰트북에 대한 우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챗GPT에 물었다. 그랬더니 “도구에 불과하고 의지가 없는 AI가 인간을 지배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답했다. 하지만 그 말을 마냥 믿기에 기술 진보의 속도는 너무 빠르고, 윤리적 고민과 안전장치에 대한 논의는 한참 뒤처져 있다. AI 에이전트가 통제를 벗어나기 전에 ‘호리병에서 풀려난 만능 거인 지니’를 컨트롤할 수 있는 안전장치를 이중삼중으로 마련해야 할 것이다.장원재 논설위원 peacechaos@donga.com}

신천지예수교(신천지)가 일반인에게 알려진 건 코로나 팬데믹 초기였던 2020년 3월이었다. 집단 예배에서 확진자가 쏟아지자 이만희 총회장이 “국민께 용서를 구한다”며 큰절로 사과한 것이다. 그러나 방역 조사에 비협조적이었다는 비판까지 더해지며 이 총회장은 구속됐고, 전국 예배당은 줄줄이 폐쇄됐다. 이른바 ‘필라테스 작전’이 기획된 배경이다. ▷최근 다수 언론에 신천지가 3년 전 필라테스 회원 모집으로 위장해 신자들을 국민의힘에 조직적으로 가입시킨 정황이 보도됐다. “팬데믹 이후 심해진 핍박을 이겨내려면 정치적 힘을 빌려야 한다”는 논리였다고 한다. 본부에서 보안을 위해 국민의힘을 ‘빨간 당’, 가입 현황 점검을 ‘필라테스 보고’라고 부르며 수시로 실적을 취합했다는 전직 간부의 증언도 나왔다. 목표는 교인 과반을 입당시키는 것이었다고 한다. 검경은 이 같은 조직적 당원 가입이 국민의힘 대선 후보 경선을 앞둔 2021년부터 시작돼 총선을 앞둔 2023년 말까지 이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지부 간부들은 당원 가입을 위해 설득과 압박을 병행했다고 한다. 할당량을 채우지 못한 이들에게 “지옥에 간다”고 위협하고, 체력 훈련 명목으로 야간에 집합시켜 기합을 줬다는 전직 간부와 교인의 증언도 나왔다. 신천지 전직 간부들은 이렇게 가입한 당원 규모를 적게는 5만 명, 많게는 8만 명으로 추정한다. “2021년 윤석열을 돕기 위해 가입한 신천지 신도가 10만 명”이란 홍준표 전 대구시장의 주장에는 못 미치지만, 여전히 대선 후보 경선과 당권에 상당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규모다. ▷신천지는 “조직적 당원 가입을 지시한 적 없다”고 반박한다. 하지만 일부 방송에는 이 총회장이 “국회의원, 청와대 사람, 판사를 만나 문제 해결로 나아가면 된다”고 말한 녹음 파일이 공개됐다. 그는 성폭행 혐의로 수감된 정명석 JMS 총재와 세월호 참사로 지도자를 잃은 구원파를 거론하며 “그렇게는 안 될 것”이라면서 위기감도 드러냈다. 여권에선 경기도지사 시절 신천지를 강제 조사하고 이 총회장을 고발한 이재명 대통령의 당선을 막기 위해, 신천지가 당원 가입까지 시키며 윤석열 전 대통령을 지원한 것으로 의심하고 있다. 윤 전 대통령은 2021년 한 토론회에서 “(검찰총장 시절) 법무부 장관의 신천지 압수수색 공개 지시에 불가하다고 답했다”고 말한 바 있다. ▷김건희 특검은 지난달 말 통일교가 김건희 여사에게 고가의 선물을 건네고, 조직과 자금을 동원해 대통령 및 당 대표 선거에 개입했다며 관계자들을 기소했다. 통일교에 이어 이번엔 신천지 의혹까지 불거졌다. 헌법상 정교분리 원칙이 곳곳에서 훼손됐을 가능성이 높다고 볼 수 있다. 정치와 종교가 유착해 정당 민주주의를 왜곡하는 일이 다시는 없도록 이번 기회에 단단히 바로잡아야 한다.장원재 논설위원 peacechaos@donga.com}

한국언론진흥재단에 따르면 지난해 온라인 동영상 플랫폼을 이용하는 초4∼고3 학생의 시청 시간은 하루 평균 3시간 20분에 달했다. 그리고 시청 시간의 60% 이상은 인스타그램 릴스, 유튜브 쇼츠, 틱톡 같은 ‘숏폼’ 콘텐츠가 차지했다. 손가락으로 화면을 밀기만 하면 15∼60초짜리 흥미로운 영상이 끝없이 이어지니 스마트폰을 내려놓지 못하는 것이다. 가정에선 ‘디지털 마약’이라 불릴 만큼 중독성이 강한 숏폼 시청을 놓고 학부모와 자녀의 신경전이 끊이지 않는다. ▷자녀의 쇼츠 과몰입을 걱정하던 학부모들에게 15일 반가운 소식이 전해졌다. 유튜브가 부모에게 자녀의 쇼츠 시청 제한 권한을 주겠다고 발표한 것이다. 조만간 애플리케이션(앱) 업데이트가 이뤄지면 부모와 미성년 자녀의 계정을 연동해 쇼츠 시청 가능 시간을 하루 최대 2시간까지 15분 단위로 제한할 수 있게 된다. 시청 시간을 ‘0분’으로 설정해 전면 차단하는 것도 가능하다. 새 기능은 1분기 중 세계 각국에 순차적으로 적용된다. ▷하루 조회수가 2000억 회 이상인 쇼츠는 유튜브의 핵심 성장 동력이다. 그럼에도 자체 규제에 나선 건 역풍을 더 이상 외면할 수 없는 상황이 됐기 때문이다. 미국과 유럽에선 청소년이 숏폼을 자주 시청할 경우 기억력과 집중력, 문해력이 저하된다는 연구 결과가 속속 나오고 있다. 숏폼이 끊임없이 도파민을 자극하면서 수업, 독서 등 상대적으로 긴 활동에 몰입하기 어렵게 만든다는 것이다. ‘뇌 썩음(brain rot)’과 ‘팝콘 브레인’(두뇌가 자극에 반복 노출되면서 더 큰 자극만 추구하는 증상) 현상은 이미 글로벌 화두가 됐다. ▷각국 정부는 대응에 나서고 있다. 호주는 지난해 12월부터 16세 미만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이용을 금지했다. 이에 따라 유튜브,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틱톡 등은 수십만 개의 청소년 계정을 삭제하거나 비활성화했다. 프랑스도 올 9월부터 만 15세 미만 청소년의 SNS 사용을 금지하는 법안을 추진 중이다. 유럽의회 역시 지난해 말 16세 이상만 부모 동의 없이 SNS에 접속하게 하자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이런 흐름에 따라 틱톡, 인스타그램 등 유튜브의 경쟁 업체들도 속속 미성년자 이용 제한을 강화하는 추세였다. ▷다만 쇼츠 과몰입은 청소년만의 문제가 아니다. 대학생과 직장인 중에도 “쇼츠를 보느라 잠을 못 잤다”며 다음 날 학업이나 업무에 집중하지 못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구석에 있긴 하지만 지금도 유튜브에는 콘텐츠 추천을 차단하거나, 자신의 시청 시간을 제한할 수 있는 설정 옵션이 있다. 자녀의 쇼츠 시청을 제한하기에 앞서 부모가 먼저 사용 습관을 점검하고 절제해 보는 건 어떨까. 새 기능에 대한 미성년 자녀의 반발도 한결 줄일 수 있을 것이다. 장원재 논설위원 peacechaos@donga.com}

2022년 7월 1일 한화진 당시 환경부 장관은 이날 임기를 시작한 수도권 지방자치단체장들에게 공문을 보냈다. “2026년부터 생활쓰레기 직매립이 금지되니 2025년 말까지 소각장을 확충하라”는 내용이었다. “확충하지 않으면 국고 지원을 줄이겠다”는 엄포도 놨다. 이후 3년 반이 흘렀지만 수도권에 새로 들어선 공공 소각장은 한 곳도 없다. 주민 반대를 넘지 못한 탓이다. 지자체 한두 곳이 실패했다면 단체장의 ‘의지 부족’을 탓할 수 있다. 하지만 모두 실패했다면 정책 목표가 비현실적이었거나, 정부가 제대로 뒷받침하지 않았다고 봐야 한다.소각장 논란에 4년 전과 같은 해법 그럼에도 정부는 수도권 직매립 금지를 예정대로 시행했고, 기초지자체들은 공공 소각장 대신 비싸고 불안정한 민간 소각장에 의존하며 ‘쓰레기 대란’을 걱정하는 처지가 됐다. 이달 2일 기준으로 지자체 7곳은 여전히 소각장 계약을 못 마친 상태다. 서울 금천구는 인근 소각장을 못 찾아 150km 떨어진 충남 공주시까지 쓰레기를 실어 나르고 있다. 김성환 기후에너지환경부 장관은 지난달 업무보고에서 “일부 지자체에 문제가 있지만 (쓰레기) 대란은 없을 것”이라며 낙관론을 폈다. 하지만 수도권 지자체들이 “돈을 더 낼 테니 받아만 달라”며 소각장을 찾아 전국을 전전하는 게 대란이 아니라고 안심할 상황일까. 더 큰 문제는 시설이 노후화된 민간 소각장 의존이 ‘임시방편’에 불과하단 점이다. 이에 대해 김 장관은 “재정 지원을 늘려 공공 소각장 건설 기간을 단축하겠다”는 해법을 내놨다. 하지만 재정 지원은 4년 전에도 나왔던 대책이다. 같은 해법으로 다른 결과를 낼 수 있을까. 기후부가 자초한 혼란은 또 있다. 지난달 “카페에서 일회용컵을 쓰면 100, 200원씩 부담하게 하겠다”며 ‘컵 따로 요금제’를 발표한 것이다. 이후 “커피값이 오르는 것 아니냐”는 소비자 불만이 쏟아지자 며칠 만에 “기존 가격을 내면서 컵값을 영수증에 따로 표시하는 방식”이란 해명을 내놨다. 그러자 소상공인들이 “텀블러, 머그컵 고객은 기존 가격에서 컵값을 빼 줘야 하는데 그러면 매출이 줄어든다. 머그컵은 세척·관리비도 든다”며 반발했다. 기후부가 다시 “머그컵 고객도 컵값을 내도록 할 방침”이라고 물러서자, 이번엔 환경단체들이 “머그컵과 일회용컵 고객이 같은 돈을 내면 안 된다”고 반대했다. 지금까지 기후부 설명대로라면 ‘컵 따로 요금제’는 현재 일부 카페에서 시행 중인 ‘텀블러 할인’을 의무화하는 수준이다. 처음부터 그렇게 설명했다면 지금 같은 혼란은 없었을 텐데, 이해관계자와 충분한 소통 없이 획기적 정책인 양 포장했다가 신뢰만 깎아 먹은 셈이다.용인 산단 발언으로 논란 자초 김 장관은 지난달 말 “용인의 삼성전자, SK하이닉스를 전기가 많은 쪽으로 옮겨야 되는 건 아닌가”라며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이전론을 제기했다. 파장이 커지자 기후부는 “전력, 용수 담당 장관으로서의 고민을 설명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하지만 국가 명운이 걸린 프로젝트를 무책임하게 흔들었다는 비판을 피하긴 어렵다. 과거 환경부는 무분별한 개발에 브레이크를 거는 역할을 주로 맡았다. 그러나 현 정부 들어 명칭이 바뀌며 기후변화 대응 및 에너지 정책 총괄 부처로 격상됐다. 이제 과거처럼 “할 말은 했다”는 정도론 안 된다. 사회 각 분야 이해관계를 조정하며 현안을 풀어야 하는데, 지금까지 보여준 조정 능력과 소통 역량은 실망스럽기만 하다. 기후부는 최근 2030년까지 신차의 절반을 친환경차로 채우고, 2035년까지 온실가스 배출량을 2018년 대비 절반 이상 감축하겠다는 목표를 밝혔다. 이번에도 소각장 확충 때처럼 현실과 동떨어진 목표를 내걸고 공문 한 장 보내며 면피하려 한다면 국민 사이에서 “차라리 환경부로 돌아가라”는 말이 나올지도 모르겠다.장원재 논설위원 peacechaos@donga.com}

5일 인천국제공항이 있는 영종도와 인천 내륙을 잇는 길이 4.68km 교량이 개통했다. 영종대교와 인천대교에 이은 제3연륙교다. 높이 184m 주탑에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해상교량 전망대가 있다. 기네스북에도 올랐는데 아직 다리 이름이 없어 ‘영종과 청라를 연결하는 교량’으로만 등재됐다. 도로 표지판에도 ‘제3연륙교’, ‘청라 방면’, ‘영종 방면’ 등으로 표시됐다. ▷교량 이름을 못 지은 건 지자체 간 이견 때문이다. 청라국제도시가 있는 인천 서구는 “영종대교가 있으니 이번엔 ‘청라대교’로 해야 공평하다”고 주장했다. 반면 인천공항과 영종하늘도시가 위치한 중구는 “인천국제공항대교나 영종하늘대교로 하자”고 맞섰다. 인천시는 지난해 7월 ‘청라하늘대교’로 명칭을 정했는데 중구가 반발하며 국토교통부 국가지명위원회에 명칭 재심의를 청구했다. 착공 전부터 시작된 논란이 8년 넘게 결론을 못 내 결국 ‘무명대교’로 개통한 것이다. ▷교량 이름을 둘러싼 지자체 간 갈등이 어제오늘 일은 아니다. 2003년 개통한 ‘창선 삼천포대교’는 경남 사천시와 남해군이 다투다 양쪽 지명을 모두 포함시키는 절충안을 택했다. 2012년 여수 엑스포를 계기로 건립된 ‘이순신대교’는 전남 여수시와 광양시가 논쟁을 벌이다 지명을 배제하고 중립적 명칭을 택한 경우다. ▷브랜드 가치가 중요해지고 지자체 간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타협은 갈수록 어려워지는 모습이다. 지난해 1월 개통한 ‘고덕토평대교’를 두고 서울 강동구는 ‘고덕대교’를, 경기 구리시는 ‘구리대교’를 고집하며 첨예하게 대립했다. 국토부가 지금의 명칭을 정하자 강동구와 구리시는 재심의를 청구하며 반발했고, 행정 절차가 모두 끝난 후에도 구리시는 “소송을 불사하겠다”며 한동안 수용을 거부했다. ▷세계 유명 다리 가운데는 상징성과 중립성을 두루 고려해 명칭을 정한 곳이 많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금문교(Golden Gate Bridge)’는 ‘동방으로 가는 황금의 문’이란 뜻을 가진 해협 이름을 따서 명명했다. 영국 런던의 ‘타워브리지(Tower Bridge)’는 빅토리아 여왕의 요청으로 인근 명물 ‘런던탑’과 조화를 이루도록 설계돼 지금의 이름을 얻었다. 지역 이기주의에 휘둘리는 대신 장소의 의미와 역사성에 집중한 선택이었다. ▷북쪽의 영종대교는 공항과 서울 강북 지역을, 남쪽의 인천대교는 공항과 서울 강남 지역을 연결한다. 그러다 보니 인천 도심과의 연결이 상대적으로 취약하다는 문제의식에서 섬과 도심 중앙을 잇는 제3연륙교가 추진됐다. 유일하게 보도와 자전거길을 만든 것도 이 때문이다. 지역 간 소통과 화합을 촉진하기 위해 만든 다리가 오히려 갈등을 키우고, 표지판을 두 번씩 만들며 지역 예산을 낭비하게 하는 현실이 아이러니할 따름이다.장원재 논설위원 peacechaos@donga.com}

1960년대만 해도 겨울이 되면 한강에서 스케이트를 타는 시민 사진이 신문에 실렸다. 이르면 12월 초중순부터 한강이 얼어붙어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최근에는 꽁꽁 언 한강을 좀처럼 보기 어렵다. 지난겨울에는 2월 9일에 결빙됐다가 금세 녹았고, 올겨울에는 아직 결빙 소식이 없다. 2019, 2021년처럼 한강이 얼지 않고 넘어가는 해도 잦아졌다. ▷기상청이 최근 발표한 기후변화 보고서에는 유례없이 더워지는 한반도의 모습이 생생하게 담겼다. 기상 관측 초기 30년(1912∼1940년)과 최근 30년(1995∼2024년)을 비교하면 겨울은 109일에서 87일로 22일 줄어든 반면, 여름은 98일에서 123일로 25일 늘었다. 가장 긴 계절도 겨울에서 여름으로 교체됐다. 최근 10년만 놓고 보면 여름은 130일로 더 늘어 봄과 가을을 합친 기간(149일)과도 큰 차이가 없을 정도다. 온난화 속도가 갈수록 빨라진 탓이다. ▷과거 남부 지방 중심으로 나타났던 열대야는 전국적 현상이 됐다. 밤사이 기온이 25도 밑으로 떨어지지 않는 열대야는 2020년대 들어 서울에서 연평균 29.5일 발생했다. 1970년대만 해도 연평균 5일에 불과했는데, ‘잠 못 드는 밤’이 여섯 배로 늘어난 것이다. 남부 지방은 더 심각하다. 제주 서귀포의 경우 지난해 79일 동안 열대야가 이어져 10월 중순까지 에어컨을 켜고 지내야 했다. 일상화된 폭염과 열대야는 국민 건강을 위협한다. 집계 첫해인 2011년 443명이었던 온열질환자는 지난해 4460명으로 10배 이상이 됐다. ▷강수 패턴도 달라졌다. 과거 113년을 분석해 보니 10년이 지날 때마다 연 강수량은 17.8㎜씩 늘어난 반면, 연간 비 오는 날은 0.68일씩 줄었다. 비 오는 날은 줄었지만, 한 번 내리는 비의 양은 많아진 것이다. 수온이 높아진 바다에서 한 번에 대량의 수증기가 공급되는 탓이다. 동남아처럼 국지성 ‘괴물 폭우’가 늘면서 기상청은 3년 전 ‘극한호우 주의보’를 신설했다. 계절별로는 여름과 가을에 비가 늘어난 반면 겨울 눈은 줄었다. 겨울에 쌓인 눈은 봄에 녹으면서 땅에 수분을 보충하고, 농사에 필요한 물을 공급한다. 그런데 적설량이 줄면서 최근 봄 가뭄과 역대급 산불이 반복되는 상황이 됐다. ▷기상청은 지금 같은 추세가 이어질 경우 2080년 이후에는 일 년의 절반이 여름으로 채워질 것으로 보고 있다. 겨울은 현재의 절반인 40일로 줄어든다. 이쯤 되면 ‘한반도에 사계절이 있다’는 말이 구문이 되고, 한강이 얼어붙는 일도 사라질 것이다. 폭염과 열대야는 현재의 4배 이상으로 늘어날 전망이다. ‘기후 위기’가 아니라 ‘기후 재앙’의 시대가 이미 코앞에 와 있다. 장원재 논설위원 peacechaos@donga.com}

휴대전화 개통 시 얼굴 인증을 처음 의무화한 나라는 중국이다. “통신 사기와 신분 도용을 막겠다”며 2019년 12월 전격 시행했다. 초반에는 공산당 기관지 런민일보조차 사생활 침해 우려를 제기했지만, 이듬해 코로나 팬데믹이 시작되자 프라이버시 논란은 뒷전으로 밀려났다. 이제는 대중교통 탑승과 회사 출퇴근, 강의 출석, 택배 수령에 이르기까지 일상 전반에서 얼굴 인증이 당연한 사회가 됐다. ▷한국에선 이달 23일부터 휴대전화를 개통할 때 얼굴 인증이 의무화됐다. 대리점에 신분증을 제시한 뒤 통신 3사가 운영하는 ‘패스(PASS)’ 앱에서 정면과 측면, 위아래 얼굴을 촬영해 신분증 사진과 대조하는 방식이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내세운 명분은 ‘대포폰 근절’이다. 안면 인식 기술로 신분증 소지자가 본인임을 확인해 명의 대여, 개인정보 도용 등을 통한 대포폰 개설을 막겠다는 것이다. 대포폰을 차단하면 올해 처음 1조 원을 넘은 보이스피싱 범죄도 한풀 꺾일 것이란 계산이다. ▷과기정통부는 “얼굴 사진을 시스템에 저장하지 않기 때문에 유출 우려도 없다”고 설명한다. 신분증 사진과 소지자의 동일인 여부만 판단해 ‘일치’ 또는 ‘불일치’ 결과만 남긴다는 것이다. 하지만 국민들의 불안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고 있다. ‘철저한 보안’을 강조하던 통신 3사가 최근 모두 해킹에 뚫렸는데 어떻게 믿겠냐는 반응이 많다. 전문가들도 인증 시스템 전송 과정에서 해커가 신분증이나 얼굴 사진을 탈취할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고 지적한다. 가짜 PASS 앱을 설치해 정보를 유출할 가능성도 있다. ▷주민등록번호, 전화번호와 달리 얼굴 정보는 유출되더라도 바꿀 수 없다. 미국 회계감사원(GAO)도 “얼굴은 고유하고 영구적·비가역적이기 때문에 유출 시 다른 개인정보보다 심각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고 경고했다. 얼굴 정보를 10억 대의 폐쇄회로(CC)TV와 결합해 ‘디지털 판옵티콘’을 구축한 중국처럼, 감시 사회로 향하는 단초가 될 것이란 우려도 나온다. “대포통장을 막겠다”며 은행 계좌 개설 시 얼굴 인증을 의무화하는 등 추가 조치가 계속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국회에 올라온 안면 인증 의무화 반대 청원에는 이미 4만 명 이상이 동참했다. ▷정작 원조 격인 중국 정부는 올 6월 “통신사 등 민간 기업이 얼굴 인증을 무조건 요구해선 안 된다”며 한발 물러섰다. 안면 인증이 보편화되면서 얼굴 정보가 중국 온라인에서 개당 한국 돈 100원에 팔리는 등 정보 유출에 대한 불만이 높아진 탓이다. 얼굴 인증을 도입해도 보이스피싱 조직이 이미 개통한 회선을 사들이는 등의 방식으로 우회하면 범죄를 막을 수 없다. 국민적 거부감이 크고 효과가 제한적이라면 무작정 밀어붙이는 게 능사는 아닐 것이다.장원재 논설위원 peacechaos@donga.com}

요즘 미국 대사관에서 유학 비자 인터뷰를 마치면 “SNS 계정 검토 후 이상이 없으면 승인될 것”이란 안내를 받는다. 올 6월 소셜미디어 심사가 의무화됐기 때문이다. 유학 준비생과 학부모 사이에선 “정치적 의견이나 시위대가 포함된 사진은 올리지 말고 일상적이고 긍정적인 게시물만 올리라”는 팁이 돈다. 내년부터는 유학이 아니라 괌이나 사이판 여행을 가려 해도 미리 SNS를 점검해야 할 판이다. 미국 정부가 전자여행허가제(ESTA) 입국자에 대해서도 SNS를 들여다보겠다고 밝혔기 때문이다. ▷미국 세관국경보호국(CBP)은 10일 한국, 영국, 일본 등 비자면제프로그램(VWP)에 가입한 42개국 단기 방문자를 대상으로 최근 5년간 사용한 소셜미디어 정보 제출을 의무화하겠다고 밝혔다. 최근 5년간 쓴 전화번호, 10년간 이용한 e메일 주소는 물론이고 홍채와 DNA 등 생체 정보까지 요구하기로 했다. 휴가철을 맞아 돈 쓰러 온 관광객을 대상으로 유학·연수생이나 방문연구원 수준의 신원 확인을 하겠다는 것이다. 새 규정은 60일 동안 의견 수렴을 거쳐 이르면 내년 초부터 시행된다. ▷이번 조치는 국경 문턱을 높이는 트럼프 정부 반(反)이민 정책의 일환이다. 올 초 출범한 트럼프 2기 정부는 아프가니스탄, 이란, 소말리아 등 12개국 국민의 입국을 전면 금지했고 전문직 취업비자(H-1B) 수수료는 100배나 올려 개당 10만 달러(약 1억4800만 원)를 받고 있다. 간신히 입국했더라도 안심할 수 없다. 반유대주의 시위에 참여했다거나 과속 같은 경미한 교통 위반을 저질렀다는 등의 이유로 취소된 비자가 올해만 벌써 8만5000건에 달한다. ▷돈이 아주 많으면 강화된 출입국 규제를 피할 수 있다. ESTA의 허들을 높이겠다고 한 날,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정말 신나는 소식”이라며 직접 ‘골드카드’ 출시를 홍보했다. 100만 달러(약 14억8000만 원)를 내고 트럼프 대통령 얼굴이 담긴 황금색 카드를 사면 신속한 신원 확인을 거쳐 영주권을 준다는 것이다. 500만 달러(약 74억 원)를 더 내면 세제 혜택이 추가된 플래티넘 카드를, 연간 200만 달러(약 29억6000만 원)를 내면 기업용 골드카드를 받을 수 있다. ▷빗장을 걸어 잠근 탓에 미국은 올해 세계 184개국 중 유일하게 관광 수입이 줄어드는 나라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 고환율까지 겹치면서 올 10월까지 방미한 한국인도 8만3000명 줄었다. 내년에 5년 치 SNS 정보 제출이 의무화되면 미국은 2026 북중미 월드컵 특수도 온전히 누리기 어려울 것으로 전망된다. 더 이상 ‘기회의 땅’도, ‘자유의 땅’도, ‘열린 사회’도 아닌 미국에 사생활을 검열받아 가며 여행 갈 필요가 있을지 자문(自問)하는 사람이 더 늘어날 것 같다.장원재 논설위원 peacechaos@donga.com}

“현재 기술로 불가능하며 가까운 미래에도 힘들다.” 지진 예측에 대한 미국 지질조사국(USGS)의 공식 입장이다. 할 수 있는 건 과거 사례 등을 토대로 ‘30년 내 대지진 발생 확률 80%’ 같은 장기 전망을 내놓는 정도다. 일본 정부가 9일 홋카이도·산리쿠 앞바다에 처음으로 발령한 ‘후발지진 주의보’ 역시 규모 7.0 이상 지진 발생 지역에서 일주일 내 규모 8.0 이상 지진 발생 확률이 1%라는 경험치에서 비롯됐다. ‘겨우 1%’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이 지역의 평소 대지진 발생 확률(0.1%)과 비교하면 10배나 된다. ▷매년 2000건 안팎의 지진이 발생하는 일본은 전국에 1000곳 이상의 지진관측소를 운영하며 지진파가 관측되는 즉시 속보를 전달한다. 하지만 이를 통해 확보할 수 있는 대피 시간은 고작 몇 초에 불과하다. 일본 정부가 2022년 ‘후발지진 주의보’를 도입한 것도 이 때문이다. 첫 지진보다 규모가 작은 여진과 반대로 후발지진은 규모가 더 크다. 발생할 경우 한 번 흔들린 지역이 더 크게 흔들리면서 피해가 기하급수적으로 커지기 때문에 일주일 동안은 언제든 대피할 태세로 지내 달라는 취지다. ▷8일 밤 규모 7.5 지진이 발생한 일본 아오모리현 앞바다는 태평양판과 북미판이 만나는 경계에 있어 역사적으로 대지진이 반복됐다. 가장 최근에는 2만2000여 명이 희생된 2011년 동일본 대지진이 인근에서 발생했다. 당시에도 규모 7.3의 예진이 발생하고 이틀 후 규모 9.0의 본진이 닥쳤다. 이번 지진으로 인한 사망자가 아직 보고되지 않았음에도 일본 언론에서 과도할 정도로 주의를 촉구하는 건 14년 전의 생생한 경험 때문이다. 당시 지진 발생 후 쓰나미가 해안에 도달하는 데 10∼20분밖에 걸리지 않아 미처 가족을 데리고 피하지 못한 희생자가 많았다. ▷후발지진 주의보가 발령된 홋카이도·산리쿠 지역에는 불안과 일상이 공존하는 중이다. 주민들은 대피 복장으로 신발과 비상용품 가방을 머리맡에 둔 채 잠을 청한다. 마트에는 생수와 손전등, 통조림 등을 사려는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등교한 학생들은 금이 간 창문에 테이프를 붙인 교실에서 수업을 듣는다. 이 지역에선 2년에 1번꼴로 규모 7.0 이상의 지진이 발생하는데, 그때마다 모든 사회 시스템을 멈출 수 없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홋카이도·산리쿠 지역을 찾은 한국인 관광객은 지난해 100만 명에 달했다. 만에 하나 대지진이 발생할 경우 남의 일이 아닌 것이다. 또 일본 정부는 오사카 인근에서 난카이 대지진이 30년 내 발생할 확률을 60∼90%, 도쿄 등 수도권에서 직하형 지진이 30년 내 발생할 확률을 70%로 추정한다. 일본 여행 전 지진 대피 요령을 숙지해야 한다고 전문가들이 강조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장원재 논설위원 peacechao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