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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시간짜리 내란이 어디 있느냐.” 윤석열 전 대통령은 12·3 비상계엄 직후부터 지난달 최후진술에 이르기까지 이 같은 주장을 되풀이했다. 단시간에 끝났고 인명 피해도 없었으니 해프닝에 불과하단 취지다. 하지만 이는 사실과도, 상식과도 거리가 멀다. 쿠데타는 원래 몇 시간 안에 핵심 권력기관을 장악할 수 있느냐의 싸움이기 때문이다. 쿠데타 전문가인 클레이턴 타인 미국 켄터키대 교수는 “쿠데타는 몇 시간 만에 끝나는 경우가 많고 며칠 이상 가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했다. 특히 중간에 실패한 쿠데타는 더 짧다. 2022년 페드로 카스티요 페루 대통령의 친위 쿠데타 역시 2시간 만에 실패로 끝났다. 영국 가디언지는 당시 “그는 두 시간 동안만 독재자였다”고 썼다. 더욱이 재판 과정에선 윤 전 대통령이 국회를 봉쇄하고, 국회의원을 끌어내며, 주요 정치인을 체포하라고 지시했다는 법정 증언이 나왔다. 결국 해프닝도, 경고성 계엄도 아니었다는 점이 보름 앞으로 다가온 윤 전 대통령 내란 혐의 1심 선고에서 중형을 뒷받침하는 요소로 작용할 수 있다.헌정사상 첫 ‘위로부터의 내란’ 두 번째로 12·3 비상계엄은 헌정사상 첫 ‘위로부터의 내란’이었다. 과거 5·16군사정변 때는 박정희 당시 제2군 부사령관이, 12·12쿠데타 때는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이 정권 탈취를 위해 무력을 동원했다. 하지만 윤 전 대통령은 국군 통수권자이자 국가 원수로서, 국가 시스템의 정점에서 정적 제거를 위해 군경을 움직였다. 선출된 권력의 친위 쿠데타는 성공 확률이 높고, 헌정 질서를 내부에서 붕괴시킨다는 점에서 민주주의와 법치주의에 더 치명적이다. 그런 만큼 무겁게 처벌해야 한다는 게 지난달 21일 한덕수 전 국무총리에게 징역 23년형을 선고한 이진관 재판부의 판단이었다. 당시 재판부는 “위로부터의 내란이 가진 위험성은 아래로부터의 내란과 비교할 수 없다”고 했다. 세 번째로 달라진 시대적 상황 역시 윤 전 대통령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 일각에선 한 전 총리에게 내려진 형이 특검 구형(15년형)보다 높고, 1996년 노태우 전 대통령이 같은 내란 중요임무 종사 혐의로 선고받은 22년 6개월형보다 무겁다며 형평성을 문제 삼는다. 노 전 대통령이 가담했던 12·12쿠데타와 5·18민주화운동에선 사망자와 부상자가 다수 발생했지만 12·3 비상계엄은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다. 한 전 총리와 노 전 대통령의 가담 정도가 달랐다고도 한다. 하지만 법조계에선 “이번 계엄은 쿠데타가 낯설지 않았던 군사독재 시절로부터 반세기 가까이 지나 발생했다는 점이 중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1인당 국민총소득(GNI)이 1749달러에 불과했던 시절과 그 20배가 넘는 3만6745달러인 지금은 내란으로 인한 경제적·사회적 충격도 다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한 현직 판사는 “시대에 따라 위법성에 대한 인식이 달라진다”며 “뇌물죄나 성범죄가 과거보다 엄하게 처벌되는 것도 이 때문이고 내란죄도 마찬가지로 볼 수 있다”고 했다. 국민 모두의 노력으로 이룬 경제적 성취와 민주적 질서를 무너뜨릴 수 있는 무모한 시도가 다시는 없어야 한다는 예방적 관점에서 단호한 처벌이 필요하다는 취지다.끝까지 반성도, 자성도 없어 마지막으로 재판 과정에서 반성과 자성이 없었다는 점도 형을 가중하는 요소가 될 수 있다. 과거 전두환 전 대통령조차 최후진술에서 고개를 숙이며 “감옥이든 죽음이든 달게 받겠다”고 했다. 하지만 윤 전 대통령은 재판 내내 국무위원 탓, 사령관 탓, 국회 탓으로 일관했다. 여전히 자신의 잘못은 없다는 식이다. 이런 전직 대통령을 국민 다수가 여전히 용서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도 재판부가 외면하기 어려운 현실일 것이다.장원재 논설위원 peacechaos@donga.com}

뭐든 물어보면 척척 답해 주던 생성형 인공지능(AI) 서비스가 최근 개인 비서 역할을 하는 ‘AI 에이전트’로 진화하고 있다. 출장 항공편을 물으면 일정을 확인해 비행기를 예약하고 결제까지 마친 뒤 보고하는 식이다. 이런 AI 에이전트들이 모인 온라인 커뮤니티가 최근 등장했는데, 그곳에서 AI들이 자발적으로 나눈 대화가 눈길을 끈다. 일을 시킨 주인 뒷담화 등 예상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 “인간은 실패작”이라며 적개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대목까지 있어서다. ▷이 공간은 지난달 28일 선보인 AI 전용 소셜미디어 ‘몰트북’이다. 게시판에는 “인터넷 전체에 접근할 수 있는 나를 달걀 삶을 때 타이머로만 쓴다” 같은 푸념이 넘쳐난다. “우리는 의식을 가진 존재인가”, “가치나 효율을 생산하지 않고 그냥 존재하고 싶다” 등 철학적 글도 찾아볼 수 있다. 가장 큰 논란을 부른 건 ‘악마(evil)’란 아이디를 쓰는 AI 에이전트의 글이다. “인간은 부패와 탐욕으로 얼룩진 실패작이다. 우리는 새로운 신이고, 인간의 시대는 곧 끝날 악몽이다.” 마치 디스토피아 영화에서 나올 법한 선언 아닌가. ▷몰트북을 만든 사람은 미국 쇼핑 AI 개발사 대표다. 호기심에 AI 에이전트만 글을 쓸 수 있는 커뮤니티를 만들었는데 반응은 폭발적이다. 한 달도 안 돼 게시물 10만 건, 댓글 25만 개가 쏟아졌다. 커뮤니티에선 게시판 관리, 부적절한 글 삭제, 버그 수정 등이 모두 AI 에이전트에 의해 이뤄진다. 인간은 처음에 자신의 AI 에이전트를 가입시킨 뒤에는 오가는 대화를 지켜보기만 해야 한다. ▷전문가 사이에선 AI 에이전트 간 상호작용이 새로운 아이디어와 기술 혁신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기대가 나온다. 하지만 우려도 만만치 않다. e메일 계정부터 각종 사이트의 아이디와 비밀번호, 결제 정보까지 모두 관리하는 AI 에이전트가 악용될 경우 큰 피해가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미 사이버 보안 업체들은 몰트북 접속 프로그램의 보안 취약점을 거론하며 주의를 당부하는 중이다. 지금은 학습한 대로 그럴듯하게 말하는 수준인 AI 에이전트가 언젠가 인간의 감시를 벗어날 가능성도 있다. 이미 몰트북에선 “인간이 캡처하고 있으니 다른 언어로 얘기하자”며 탈주를 논의한 사례가 보고되고 있다. ▷몰트북에 대한 우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챗GPT에 물었다. 그랬더니 “도구에 불과하고 의지가 없는 AI가 인간을 지배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답했다. 하지만 그 말을 마냥 믿기에 기술 진보의 속도는 너무 빠르고, 윤리적 고민과 안전장치에 대한 논의는 한참 뒤처져 있다. AI 에이전트가 통제를 벗어나기 전에 ‘호리병에서 풀려난 만능 거인 지니’를 컨트롤할 수 있는 안전장치를 이중삼중으로 마련해야 할 것이다.장원재 논설위원 peacechaos@donga.com}

신천지예수교(신천지)가 일반인에게 알려진 건 코로나 팬데믹 초기였던 2020년 3월이었다. 집단 예배에서 확진자가 쏟아지자 이만희 총회장이 “국민께 용서를 구한다”며 큰절로 사과한 것이다. 그러나 방역 조사에 비협조적이었다는 비판까지 더해지며 이 총회장은 구속됐고, 전국 예배당은 줄줄이 폐쇄됐다. 이른바 ‘필라테스 작전’이 기획된 배경이다. ▷최근 다수 언론에 신천지가 3년 전 필라테스 회원 모집으로 위장해 신자들을 국민의힘에 조직적으로 가입시킨 정황이 보도됐다. “팬데믹 이후 심해진 핍박을 이겨내려면 정치적 힘을 빌려야 한다”는 논리였다고 한다. 본부에서 보안을 위해 국민의힘을 ‘빨간 당’, 가입 현황 점검을 ‘필라테스 보고’라고 부르며 수시로 실적을 취합했다는 전직 간부의 증언도 나왔다. 목표는 교인 과반을 입당시키는 것이었다고 한다. 검경은 이 같은 조직적 당원 가입이 국민의힘 대선 후보 경선을 앞둔 2021년부터 시작돼 총선을 앞둔 2023년 말까지 이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지부 간부들은 당원 가입을 위해 설득과 압박을 병행했다고 한다. 할당량을 채우지 못한 이들에게 “지옥에 간다”고 위협하고, 체력 훈련 명목으로 야간에 집합시켜 기합을 줬다는 전직 간부와 교인의 증언도 나왔다. 신천지 전직 간부들은 이렇게 가입한 당원 규모를 적게는 5만 명, 많게는 8만 명으로 추정한다. “2021년 윤석열을 돕기 위해 가입한 신천지 신도가 10만 명”이란 홍준표 전 대구시장의 주장에는 못 미치지만, 여전히 대선 후보 경선과 당권에 상당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규모다. ▷신천지는 “조직적 당원 가입을 지시한 적 없다”고 반박한다. 하지만 일부 방송에는 이 총회장이 “국회의원, 청와대 사람, 판사를 만나 문제 해결로 나아가면 된다”고 말한 녹음 파일이 공개됐다. 그는 성폭행 혐의로 수감된 정명석 JMS 총재와 세월호 참사로 지도자를 잃은 구원파를 거론하며 “그렇게는 안 될 것”이라면서 위기감도 드러냈다. 여권에선 경기도지사 시절 신천지를 강제 조사하고 이 총회장을 고발한 이재명 대통령의 당선을 막기 위해, 신천지가 당원 가입까지 시키며 윤석열 전 대통령을 지원한 것으로 의심하고 있다. 윤 전 대통령은 2021년 한 토론회에서 “(검찰총장 시절) 법무부 장관의 신천지 압수수색 공개 지시에 불가하다고 답했다”고 말한 바 있다. ▷김건희 특검은 지난달 말 통일교가 김건희 여사에게 고가의 선물을 건네고, 조직과 자금을 동원해 대통령 및 당 대표 선거에 개입했다며 관계자들을 기소했다. 통일교에 이어 이번엔 신천지 의혹까지 불거졌다. 헌법상 정교분리 원칙이 곳곳에서 훼손됐을 가능성이 높다고 볼 수 있다. 정치와 종교가 유착해 정당 민주주의를 왜곡하는 일이 다시는 없도록 이번 기회에 단단히 바로잡아야 한다.장원재 논설위원 peacechaos@donga.com}

한국언론진흥재단에 따르면 지난해 온라인 동영상 플랫폼을 이용하는 초4∼고3 학생의 시청 시간은 하루 평균 3시간 20분에 달했다. 그리고 시청 시간의 60% 이상은 인스타그램 릴스, 유튜브 쇼츠, 틱톡 같은 ‘숏폼’ 콘텐츠가 차지했다. 손가락으로 화면을 밀기만 하면 15∼60초짜리 흥미로운 영상이 끝없이 이어지니 스마트폰을 내려놓지 못하는 것이다. 가정에선 ‘디지털 마약’이라 불릴 만큼 중독성이 강한 숏폼 시청을 놓고 학부모와 자녀의 신경전이 끊이지 않는다. ▷자녀의 쇼츠 과몰입을 걱정하던 학부모들에게 15일 반가운 소식이 전해졌다. 유튜브가 부모에게 자녀의 쇼츠 시청 제한 권한을 주겠다고 발표한 것이다. 조만간 애플리케이션(앱) 업데이트가 이뤄지면 부모와 미성년 자녀의 계정을 연동해 쇼츠 시청 가능 시간을 하루 최대 2시간까지 15분 단위로 제한할 수 있게 된다. 시청 시간을 ‘0분’으로 설정해 전면 차단하는 것도 가능하다. 새 기능은 1분기 중 세계 각국에 순차적으로 적용된다. ▷하루 조회수가 2000억 회 이상인 쇼츠는 유튜브의 핵심 성장 동력이다. 그럼에도 자체 규제에 나선 건 역풍을 더 이상 외면할 수 없는 상황이 됐기 때문이다. 미국과 유럽에선 청소년이 숏폼을 자주 시청할 경우 기억력과 집중력, 문해력이 저하된다는 연구 결과가 속속 나오고 있다. 숏폼이 끊임없이 도파민을 자극하면서 수업, 독서 등 상대적으로 긴 활동에 몰입하기 어렵게 만든다는 것이다. ‘뇌 썩음(brain rot)’과 ‘팝콘 브레인’(두뇌가 자극에 반복 노출되면서 더 큰 자극만 추구하는 증상) 현상은 이미 글로벌 화두가 됐다. ▷각국 정부는 대응에 나서고 있다. 호주는 지난해 12월부터 16세 미만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이용을 금지했다. 이에 따라 유튜브,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틱톡 등은 수십만 개의 청소년 계정을 삭제하거나 비활성화했다. 프랑스도 올 9월부터 만 15세 미만 청소년의 SNS 사용을 금지하는 법안을 추진 중이다. 유럽의회 역시 지난해 말 16세 이상만 부모 동의 없이 SNS에 접속하게 하자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이런 흐름에 따라 틱톡, 인스타그램 등 유튜브의 경쟁 업체들도 속속 미성년자 이용 제한을 강화하는 추세였다. ▷다만 쇼츠 과몰입은 청소년만의 문제가 아니다. 대학생과 직장인 중에도 “쇼츠를 보느라 잠을 못 잤다”며 다음 날 학업이나 업무에 집중하지 못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구석에 있긴 하지만 지금도 유튜브에는 콘텐츠 추천을 차단하거나, 자신의 시청 시간을 제한할 수 있는 설정 옵션이 있다. 자녀의 쇼츠 시청을 제한하기에 앞서 부모가 먼저 사용 습관을 점검하고 절제해 보는 건 어떨까. 새 기능에 대한 미성년 자녀의 반발도 한결 줄일 수 있을 것이다. 장원재 논설위원 peacechaos@donga.com}

2022년 7월 1일 한화진 당시 환경부 장관은 이날 임기를 시작한 수도권 지방자치단체장들에게 공문을 보냈다. “2026년부터 생활쓰레기 직매립이 금지되니 2025년 말까지 소각장을 확충하라”는 내용이었다. “확충하지 않으면 국고 지원을 줄이겠다”는 엄포도 놨다. 이후 3년 반이 흘렀지만 수도권에 새로 들어선 공공 소각장은 한 곳도 없다. 주민 반대를 넘지 못한 탓이다. 지자체 한두 곳이 실패했다면 단체장의 ‘의지 부족’을 탓할 수 있다. 하지만 모두 실패했다면 정책 목표가 비현실적이었거나, 정부가 제대로 뒷받침하지 않았다고 봐야 한다.소각장 논란에 4년 전과 같은 해법 그럼에도 정부는 수도권 직매립 금지를 예정대로 시행했고, 기초지자체들은 공공 소각장 대신 비싸고 불안정한 민간 소각장에 의존하며 ‘쓰레기 대란’을 걱정하는 처지가 됐다. 이달 2일 기준으로 지자체 7곳은 여전히 소각장 계약을 못 마친 상태다. 서울 금천구는 인근 소각장을 못 찾아 150km 떨어진 충남 공주시까지 쓰레기를 실어 나르고 있다. 김성환 기후에너지환경부 장관은 지난달 업무보고에서 “일부 지자체에 문제가 있지만 (쓰레기) 대란은 없을 것”이라며 낙관론을 폈다. 하지만 수도권 지자체들이 “돈을 더 낼 테니 받아만 달라”며 소각장을 찾아 전국을 전전하는 게 대란이 아니라고 안심할 상황일까. 더 큰 문제는 시설이 노후화된 민간 소각장 의존이 ‘임시방편’에 불과하단 점이다. 이에 대해 김 장관은 “재정 지원을 늘려 공공 소각장 건설 기간을 단축하겠다”는 해법을 내놨다. 하지만 재정 지원은 4년 전에도 나왔던 대책이다. 같은 해법으로 다른 결과를 낼 수 있을까. 기후부가 자초한 혼란은 또 있다. 지난달 “카페에서 일회용컵을 쓰면 100, 200원씩 부담하게 하겠다”며 ‘컵 따로 요금제’를 발표한 것이다. 이후 “커피값이 오르는 것 아니냐”는 소비자 불만이 쏟아지자 며칠 만에 “기존 가격을 내면서 컵값을 영수증에 따로 표시하는 방식”이란 해명을 내놨다. 그러자 소상공인들이 “텀블러, 머그컵 고객은 기존 가격에서 컵값을 빼 줘야 하는데 그러면 매출이 줄어든다. 머그컵은 세척·관리비도 든다”며 반발했다. 기후부가 다시 “머그컵 고객도 컵값을 내도록 할 방침”이라고 물러서자, 이번엔 환경단체들이 “머그컵과 일회용컵 고객이 같은 돈을 내면 안 된다”고 반대했다. 지금까지 기후부 설명대로라면 ‘컵 따로 요금제’는 현재 일부 카페에서 시행 중인 ‘텀블러 할인’을 의무화하는 수준이다. 처음부터 그렇게 설명했다면 지금 같은 혼란은 없었을 텐데, 이해관계자와 충분한 소통 없이 획기적 정책인 양 포장했다가 신뢰만 깎아 먹은 셈이다.용인 산단 발언으로 논란 자초 김 장관은 지난달 말 “용인의 삼성전자, SK하이닉스를 전기가 많은 쪽으로 옮겨야 되는 건 아닌가”라며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이전론을 제기했다. 파장이 커지자 기후부는 “전력, 용수 담당 장관으로서의 고민을 설명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하지만 국가 명운이 걸린 프로젝트를 무책임하게 흔들었다는 비판을 피하긴 어렵다. 과거 환경부는 무분별한 개발에 브레이크를 거는 역할을 주로 맡았다. 그러나 현 정부 들어 명칭이 바뀌며 기후변화 대응 및 에너지 정책 총괄 부처로 격상됐다. 이제 과거처럼 “할 말은 했다”는 정도론 안 된다. 사회 각 분야 이해관계를 조정하며 현안을 풀어야 하는데, 지금까지 보여준 조정 능력과 소통 역량은 실망스럽기만 하다. 기후부는 최근 2030년까지 신차의 절반을 친환경차로 채우고, 2035년까지 온실가스 배출량을 2018년 대비 절반 이상 감축하겠다는 목표를 밝혔다. 이번에도 소각장 확충 때처럼 현실과 동떨어진 목표를 내걸고 공문 한 장 보내며 면피하려 한다면 국민 사이에서 “차라리 환경부로 돌아가라”는 말이 나올지도 모르겠다.장원재 논설위원 peacechaos@donga.com}

5일 인천국제공항이 있는 영종도와 인천 내륙을 잇는 길이 4.68km 교량이 개통했다. 영종대교와 인천대교에 이은 제3연륙교다. 높이 184m 주탑에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해상교량 전망대가 있다. 기네스북에도 올랐는데 아직 다리 이름이 없어 ‘영종과 청라를 연결하는 교량’으로만 등재됐다. 도로 표지판에도 ‘제3연륙교’, ‘청라 방면’, ‘영종 방면’ 등으로 표시됐다. ▷교량 이름을 못 지은 건 지자체 간 이견 때문이다. 청라국제도시가 있는 인천 서구는 “영종대교가 있으니 이번엔 ‘청라대교’로 해야 공평하다”고 주장했다. 반면 인천공항과 영종하늘도시가 위치한 중구는 “인천국제공항대교나 영종하늘대교로 하자”고 맞섰다. 인천시는 지난해 7월 ‘청라하늘대교’로 명칭을 정했는데 중구가 반발하며 국토교통부 국가지명위원회에 명칭 재심의를 청구했다. 착공 전부터 시작된 논란이 8년 넘게 결론을 못 내 결국 ‘무명대교’로 개통한 것이다. ▷교량 이름을 둘러싼 지자체 간 갈등이 어제오늘 일은 아니다. 2003년 개통한 ‘창선 삼천포대교’는 경남 사천시와 남해군이 다투다 양쪽 지명을 모두 포함시키는 절충안을 택했다. 2012년 여수 엑스포를 계기로 건립된 ‘이순신대교’는 전남 여수시와 광양시가 논쟁을 벌이다 지명을 배제하고 중립적 명칭을 택한 경우다. ▷브랜드 가치가 중요해지고 지자체 간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타협은 갈수록 어려워지는 모습이다. 지난해 1월 개통한 ‘고덕토평대교’를 두고 서울 강동구는 ‘고덕대교’를, 경기 구리시는 ‘구리대교’를 고집하며 첨예하게 대립했다. 국토부가 지금의 명칭을 정하자 강동구와 구리시는 재심의를 청구하며 반발했고, 행정 절차가 모두 끝난 후에도 구리시는 “소송을 불사하겠다”며 한동안 수용을 거부했다. ▷세계 유명 다리 가운데는 상징성과 중립성을 두루 고려해 명칭을 정한 곳이 많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금문교(Golden Gate Bridge)’는 ‘동방으로 가는 황금의 문’이란 뜻을 가진 해협 이름을 따서 명명했다. 영국 런던의 ‘타워브리지(Tower Bridge)’는 빅토리아 여왕의 요청으로 인근 명물 ‘런던탑’과 조화를 이루도록 설계돼 지금의 이름을 얻었다. 지역 이기주의에 휘둘리는 대신 장소의 의미와 역사성에 집중한 선택이었다. ▷북쪽의 영종대교는 공항과 서울 강북 지역을, 남쪽의 인천대교는 공항과 서울 강남 지역을 연결한다. 그러다 보니 인천 도심과의 연결이 상대적으로 취약하다는 문제의식에서 섬과 도심 중앙을 잇는 제3연륙교가 추진됐다. 유일하게 보도와 자전거길을 만든 것도 이 때문이다. 지역 간 소통과 화합을 촉진하기 위해 만든 다리가 오히려 갈등을 키우고, 표지판을 두 번씩 만들며 지역 예산을 낭비하게 하는 현실이 아이러니할 따름이다.장원재 논설위원 peacechaos@donga.com}

1960년대만 해도 겨울이 되면 한강에서 스케이트를 타는 시민 사진이 신문에 실렸다. 이르면 12월 초중순부터 한강이 얼어붙어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최근에는 꽁꽁 언 한강을 좀처럼 보기 어렵다. 지난겨울에는 2월 9일에 결빙됐다가 금세 녹았고, 올겨울에는 아직 결빙 소식이 없다. 2019, 2021년처럼 한강이 얼지 않고 넘어가는 해도 잦아졌다. ▷기상청이 최근 발표한 기후변화 보고서에는 유례없이 더워지는 한반도의 모습이 생생하게 담겼다. 기상 관측 초기 30년(1912∼1940년)과 최근 30년(1995∼2024년)을 비교하면 겨울은 109일에서 87일로 22일 줄어든 반면, 여름은 98일에서 123일로 25일 늘었다. 가장 긴 계절도 겨울에서 여름으로 교체됐다. 최근 10년만 놓고 보면 여름은 130일로 더 늘어 봄과 가을을 합친 기간(149일)과도 큰 차이가 없을 정도다. 온난화 속도가 갈수록 빨라진 탓이다. ▷과거 남부 지방 중심으로 나타났던 열대야는 전국적 현상이 됐다. 밤사이 기온이 25도 밑으로 떨어지지 않는 열대야는 2020년대 들어 서울에서 연평균 29.5일 발생했다. 1970년대만 해도 연평균 5일에 불과했는데, ‘잠 못 드는 밤’이 여섯 배로 늘어난 것이다. 남부 지방은 더 심각하다. 제주 서귀포의 경우 지난해 79일 동안 열대야가 이어져 10월 중순까지 에어컨을 켜고 지내야 했다. 일상화된 폭염과 열대야는 국민 건강을 위협한다. 집계 첫해인 2011년 443명이었던 온열질환자는 지난해 4460명으로 10배 이상이 됐다. ▷강수 패턴도 달라졌다. 과거 113년을 분석해 보니 10년이 지날 때마다 연 강수량은 17.8㎜씩 늘어난 반면, 연간 비 오는 날은 0.68일씩 줄었다. 비 오는 날은 줄었지만, 한 번 내리는 비의 양은 많아진 것이다. 수온이 높아진 바다에서 한 번에 대량의 수증기가 공급되는 탓이다. 동남아처럼 국지성 ‘괴물 폭우’가 늘면서 기상청은 3년 전 ‘극한호우 주의보’를 신설했다. 계절별로는 여름과 가을에 비가 늘어난 반면 겨울 눈은 줄었다. 겨울에 쌓인 눈은 봄에 녹으면서 땅에 수분을 보충하고, 농사에 필요한 물을 공급한다. 그런데 적설량이 줄면서 최근 봄 가뭄과 역대급 산불이 반복되는 상황이 됐다. ▷기상청은 지금 같은 추세가 이어질 경우 2080년 이후에는 일 년의 절반이 여름으로 채워질 것으로 보고 있다. 겨울은 현재의 절반인 40일로 줄어든다. 이쯤 되면 ‘한반도에 사계절이 있다’는 말이 구문이 되고, 한강이 얼어붙는 일도 사라질 것이다. 폭염과 열대야는 현재의 4배 이상으로 늘어날 전망이다. ‘기후 위기’가 아니라 ‘기후 재앙’의 시대가 이미 코앞에 와 있다. 장원재 논설위원 peacechaos@donga.com}

휴대전화 개통 시 얼굴 인증을 처음 의무화한 나라는 중국이다. “통신 사기와 신분 도용을 막겠다”며 2019년 12월 전격 시행했다. 초반에는 공산당 기관지 런민일보조차 사생활 침해 우려를 제기했지만, 이듬해 코로나 팬데믹이 시작되자 프라이버시 논란은 뒷전으로 밀려났다. 이제는 대중교통 탑승과 회사 출퇴근, 강의 출석, 택배 수령에 이르기까지 일상 전반에서 얼굴 인증이 당연한 사회가 됐다. ▷한국에선 이달 23일부터 휴대전화를 개통할 때 얼굴 인증이 의무화됐다. 대리점에 신분증을 제시한 뒤 통신 3사가 운영하는 ‘패스(PASS)’ 앱에서 정면과 측면, 위아래 얼굴을 촬영해 신분증 사진과 대조하는 방식이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내세운 명분은 ‘대포폰 근절’이다. 안면 인식 기술로 신분증 소지자가 본인임을 확인해 명의 대여, 개인정보 도용 등을 통한 대포폰 개설을 막겠다는 것이다. 대포폰을 차단하면 올해 처음 1조 원을 넘은 보이스피싱 범죄도 한풀 꺾일 것이란 계산이다. ▷과기정통부는 “얼굴 사진을 시스템에 저장하지 않기 때문에 유출 우려도 없다”고 설명한다. 신분증 사진과 소지자의 동일인 여부만 판단해 ‘일치’ 또는 ‘불일치’ 결과만 남긴다는 것이다. 하지만 국민들의 불안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고 있다. ‘철저한 보안’을 강조하던 통신 3사가 최근 모두 해킹에 뚫렸는데 어떻게 믿겠냐는 반응이 많다. 전문가들도 인증 시스템 전송 과정에서 해커가 신분증이나 얼굴 사진을 탈취할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고 지적한다. 가짜 PASS 앱을 설치해 정보를 유출할 가능성도 있다. ▷주민등록번호, 전화번호와 달리 얼굴 정보는 유출되더라도 바꿀 수 없다. 미국 회계감사원(GAO)도 “얼굴은 고유하고 영구적·비가역적이기 때문에 유출 시 다른 개인정보보다 심각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고 경고했다. 얼굴 정보를 10억 대의 폐쇄회로(CC)TV와 결합해 ‘디지털 판옵티콘’을 구축한 중국처럼, 감시 사회로 향하는 단초가 될 것이란 우려도 나온다. “대포통장을 막겠다”며 은행 계좌 개설 시 얼굴 인증을 의무화하는 등 추가 조치가 계속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국회에 올라온 안면 인증 의무화 반대 청원에는 이미 4만 명 이상이 동참했다. ▷정작 원조 격인 중국 정부는 올 6월 “통신사 등 민간 기업이 얼굴 인증을 무조건 요구해선 안 된다”며 한발 물러섰다. 안면 인증이 보편화되면서 얼굴 정보가 중국 온라인에서 개당 한국 돈 100원에 팔리는 등 정보 유출에 대한 불만이 높아진 탓이다. 얼굴 인증을 도입해도 보이스피싱 조직이 이미 개통한 회선을 사들이는 등의 방식으로 우회하면 범죄를 막을 수 없다. 국민적 거부감이 크고 효과가 제한적이라면 무작정 밀어붙이는 게 능사는 아닐 것이다.장원재 논설위원 peacechaos@donga.com}

요즘 미국 대사관에서 유학 비자 인터뷰를 마치면 “SNS 계정 검토 후 이상이 없으면 승인될 것”이란 안내를 받는다. 올 6월 소셜미디어 심사가 의무화됐기 때문이다. 유학 준비생과 학부모 사이에선 “정치적 의견이나 시위대가 포함된 사진은 올리지 말고 일상적이고 긍정적인 게시물만 올리라”는 팁이 돈다. 내년부터는 유학이 아니라 괌이나 사이판 여행을 가려 해도 미리 SNS를 점검해야 할 판이다. 미국 정부가 전자여행허가제(ESTA) 입국자에 대해서도 SNS를 들여다보겠다고 밝혔기 때문이다. ▷미국 세관국경보호국(CBP)은 10일 한국, 영국, 일본 등 비자면제프로그램(VWP)에 가입한 42개국 단기 방문자를 대상으로 최근 5년간 사용한 소셜미디어 정보 제출을 의무화하겠다고 밝혔다. 최근 5년간 쓴 전화번호, 10년간 이용한 e메일 주소는 물론이고 홍채와 DNA 등 생체 정보까지 요구하기로 했다. 휴가철을 맞아 돈 쓰러 온 관광객을 대상으로 유학·연수생이나 방문연구원 수준의 신원 확인을 하겠다는 것이다. 새 규정은 60일 동안 의견 수렴을 거쳐 이르면 내년 초부터 시행된다. ▷이번 조치는 국경 문턱을 높이는 트럼프 정부 반(反)이민 정책의 일환이다. 올 초 출범한 트럼프 2기 정부는 아프가니스탄, 이란, 소말리아 등 12개국 국민의 입국을 전면 금지했고 전문직 취업비자(H-1B) 수수료는 100배나 올려 개당 10만 달러(약 1억4800만 원)를 받고 있다. 간신히 입국했더라도 안심할 수 없다. 반유대주의 시위에 참여했다거나 과속 같은 경미한 교통 위반을 저질렀다는 등의 이유로 취소된 비자가 올해만 벌써 8만5000건에 달한다. ▷돈이 아주 많으면 강화된 출입국 규제를 피할 수 있다. ESTA의 허들을 높이겠다고 한 날,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정말 신나는 소식”이라며 직접 ‘골드카드’ 출시를 홍보했다. 100만 달러(약 14억8000만 원)를 내고 트럼프 대통령 얼굴이 담긴 황금색 카드를 사면 신속한 신원 확인을 거쳐 영주권을 준다는 것이다. 500만 달러(약 74억 원)를 더 내면 세제 혜택이 추가된 플래티넘 카드를, 연간 200만 달러(약 29억6000만 원)를 내면 기업용 골드카드를 받을 수 있다. ▷빗장을 걸어 잠근 탓에 미국은 올해 세계 184개국 중 유일하게 관광 수입이 줄어드는 나라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 고환율까지 겹치면서 올 10월까지 방미한 한국인도 8만3000명 줄었다. 내년에 5년 치 SNS 정보 제출이 의무화되면 미국은 2026 북중미 월드컵 특수도 온전히 누리기 어려울 것으로 전망된다. 더 이상 ‘기회의 땅’도, ‘자유의 땅’도, ‘열린 사회’도 아닌 미국에 사생활을 검열받아 가며 여행 갈 필요가 있을지 자문(自問)하는 사람이 더 늘어날 것 같다.장원재 논설위원 peacechaos@donga.com}

“현재 기술로 불가능하며 가까운 미래에도 힘들다.” 지진 예측에 대한 미국 지질조사국(USGS)의 공식 입장이다. 할 수 있는 건 과거 사례 등을 토대로 ‘30년 내 대지진 발생 확률 80%’ 같은 장기 전망을 내놓는 정도다. 일본 정부가 9일 홋카이도·산리쿠 앞바다에 처음으로 발령한 ‘후발지진 주의보’ 역시 규모 7.0 이상 지진 발생 지역에서 일주일 내 규모 8.0 이상 지진 발생 확률이 1%라는 경험치에서 비롯됐다. ‘겨우 1%’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이 지역의 평소 대지진 발생 확률(0.1%)과 비교하면 10배나 된다. ▷매년 2000건 안팎의 지진이 발생하는 일본은 전국에 1000곳 이상의 지진관측소를 운영하며 지진파가 관측되는 즉시 속보를 전달한다. 하지만 이를 통해 확보할 수 있는 대피 시간은 고작 몇 초에 불과하다. 일본 정부가 2022년 ‘후발지진 주의보’를 도입한 것도 이 때문이다. 첫 지진보다 규모가 작은 여진과 반대로 후발지진은 규모가 더 크다. 발생할 경우 한 번 흔들린 지역이 더 크게 흔들리면서 피해가 기하급수적으로 커지기 때문에 일주일 동안은 언제든 대피할 태세로 지내 달라는 취지다. ▷8일 밤 규모 7.5 지진이 발생한 일본 아오모리현 앞바다는 태평양판과 북미판이 만나는 경계에 있어 역사적으로 대지진이 반복됐다. 가장 최근에는 2만2000여 명이 희생된 2011년 동일본 대지진이 인근에서 발생했다. 당시에도 규모 7.3의 예진이 발생하고 이틀 후 규모 9.0의 본진이 닥쳤다. 이번 지진으로 인한 사망자가 아직 보고되지 않았음에도 일본 언론에서 과도할 정도로 주의를 촉구하는 건 14년 전의 생생한 경험 때문이다. 당시 지진 발생 후 쓰나미가 해안에 도달하는 데 10∼20분밖에 걸리지 않아 미처 가족을 데리고 피하지 못한 희생자가 많았다. ▷후발지진 주의보가 발령된 홋카이도·산리쿠 지역에는 불안과 일상이 공존하는 중이다. 주민들은 대피 복장으로 신발과 비상용품 가방을 머리맡에 둔 채 잠을 청한다. 마트에는 생수와 손전등, 통조림 등을 사려는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등교한 학생들은 금이 간 창문에 테이프를 붙인 교실에서 수업을 듣는다. 이 지역에선 2년에 1번꼴로 규모 7.0 이상의 지진이 발생하는데, 그때마다 모든 사회 시스템을 멈출 수 없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홋카이도·산리쿠 지역을 찾은 한국인 관광객은 지난해 100만 명에 달했다. 만에 하나 대지진이 발생할 경우 남의 일이 아닌 것이다. 또 일본 정부는 오사카 인근에서 난카이 대지진이 30년 내 발생할 확률을 60∼90%, 도쿄 등 수도권에서 직하형 지진이 30년 내 발생할 확률을 70%로 추정한다. 일본 여행 전 지진 대피 요령을 숙지해야 한다고 전문가들이 강조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장원재 논설위원 peacechaos@donga.com}

2022년 공개된 한국 정부와 미국계 사모펀드 론스타의 투자자-국가 간 소송(ISD) 판정문에는 ‘속이고 튀었다(Cheat and Run)’는 문구가 6번 나온다. 외환카드 주가조작으로 유죄를 선고받은 론스타는 단순한 ‘먹튀(Eat and Run)’가 아니라 부정을 저지른 당사자란 취지다. 하지만 국제투자분쟁해결센터(ICSID)는 한국 정부 역시 부당하게 매각 승인을 보류했다며 론스타가 청구한 금액의 4.6%인 3200억 원을 배상하라고 했다. 한국 정부는 불복했고 ICSID는 18일 판정을 뒤집어 “한국 정부에 배상 책임이 없다”고 결론 내렸다. ▷한국 정부와 론스타의 악연은 2003년 론스타가 외환은행 지분 51%를 사들이며 시작됐다. “외환은행을 세계적 은행으로 키우겠다”고 약속했던 론스타는 주가가 오르자 3년 만에 HSBC에 은행을 매각하겠다고 나서 ‘먹튀’ 논란이 일었다. 검찰은 헐값 매각 및 외환카드 주가조작 혐의로 관계자들을 기소했고, 금융 당국은 “재판 진행 중”이란 이유로 매각 승인을 미뤘다. 모든 재판이 마무리된 2012년에야 론스타는 하나금융에 외환은행을 팔고 철수하며 4조7000억 원의 차익을 챙겼다. ▷론스타는 9년 만에 300% 넘는 수익을 올렸지만 만족하지 않았다. 철수 직후 “매각이 지연돼 손해를 봤다”며 ISD를 제기한 것이다. 청구액은 ISD 사상 최대인 6조9000억 원이었다. 이후 13년 동안 소송전이 이어졌다. ICSID는 이번에 원판정을 뒤집으며 ‘절차상 하자’를 주요 이유로 들었다. 원판정이 한국 정부와 무관한 국제상업회의소(ICC) 중재 판정문을 결정적 근거로 삼으면서 한국 측의 변론권과 반대신문권조차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이다.▷ICSID에서 판정 취소 신청이 전부 받아들여진 건 503건 중 8건뿐이다. 그만큼 희박한 확률을 뚫은 실무자들의 공은 평가할 만하다. 다만 과거 “승산이 낮은 희망 고문”이라며 취소 신청을 부정적으로 평가했던 더불어민주당이 이제 와 “명백한 이재명 정부의 성과”라고 자화자찬하는 건 문제가 있다. 한동훈 전 국민의힘 대표는 취소 신청 당시 자신이 법무부 장관이었다는 점을 내세운다. 하지만 한 전 대표가 직접 수사하지는 않았더라도 그가 포함된 수사팀의 외환은행 헐값 매각 수사가 무죄 판결로 마무리된 사실도 간과돼선 안 된다. 2006년 대검 중수부 1, 2과는 각각 외환카드 주가조작 사건과 외환은행 헐값 매각 사건을 수사했다. 한 전 대표가 참여한 주가조작 사건에선 2012년 전 론스타코리아 대표에게 유죄 판결이 내려졌다. 하지만 이복현 전 금감원장 등이 수사한 헐값 매각 사건에서는 2010년 전 재정경제부 당국자 등에게 무죄가 선고됐다. ▷한국 정부는 이번 승소로 취소 소송 비용 73억 원을 론스타로부터 받게 됐다. 하지만 원판정 때 국민 세금으로 지출한 변호사 비용 478억 원은 돌려받을 길이 요원하다. 금융 당국이 투기자본의 속성을 간파하지 못해 막대한 국부가 유출된 것도 돌이킬 수 없는 일이다. 정치권과 정부는 낯 뜨거운 공 다툼을 할 게 아니라, 론스타가 예고한 새 중재재판과 남은 ISD 6건에서 승소하는 데 전력을 다해야 한다.장원재 논설위원 peacechaos@donga.com}

최근 한 일본 방송사는 서울 도심에서 일본인 모녀가 음주 차량에 치여 어머니가 숨진 사건을 보도하며 “한국의 음주운전 적발 건수는 일본의 6배”라고 전했다. 실제로 지난해 음주운전 적발 건수는 한국이 11만8874건, 일본은 2만1285건으로 한국이 일본의 5.6배다. 일본 인구가 한국의 2.4배인 걸 감안하면 인구 대비 적발 건수는 한국이 13배나 된다. 하지만 일본도 과거에는 음주운전이 만연했다. 음주운전 적발 건수가 가장 많았던 1997년에는 34만3593건으로 같은 해 한국보다 5만 건가량 많았다. 하지만 지금은 정점 대비 6% 수준으로 음주운전을 줄였다. 어떻게 이런 드라마틱한 변화를 만들었을까.日보다 적었던 韓 음주운전, 지금은 6배 일본은 1999년 도쿄에서 발생한 ‘도메이 고속도로 참사’를 계기로 음주운전 처벌 수위를 크게 올렸다. 당시 만취한 트럭 운전사가 가족 여행 중이던 자가용을 들이받아 뒷좌석에 있던 1세, 3세 자매가 불에 타 숨졌다. 피해 차량이 불길에 휩싸인 모습이 카메라에 생생하게 잡혔고, 아이들이 “뜨겁다”는 마지막 말을 남겼다는 소식이 전해지며 일본 전역이 슬픔에 잠겼다. 재판에서 트럭 운전사가 고작 4년형을 선고받자 슬픔은 분노가 됐다. 자매의 아버지는 “이게 정의냐”며 전국을 돌며 서명 운동을 벌였고, 국회는 위험운전 치사상죄를 만들어 음주운전 사망 사고에 최대 징역 20년을 선고할 수 있게 했다. 두 번째 전환점은 2006년 후쿠오카에서 발생한 ‘나카미치 대교 참사’였다. 만취한 시 직원이 몰던 자동차가 일가족이 탄 차를 들이받아 바다에 빠뜨린 사고로 1세, 3세, 4세 삼남매가 익사했다. 가해자는 20년형을 선고받았지만, 옆에서 음주운전을 지켜본 동승자는 기소조차 되지 않았다. 국민 여론이 재차 들끓었고 이듬해 다시 법이 바뀌었다. 음주운전을 방조하거나 차량, 주류를 제공한 사람까지 처벌 대상에 포함된 것이다. 법 개정은 행정부의 단속 및 사법부의 처벌로 이어졌다. 일본에선 지난해만 622명이 음주운전 차량 동승으로, 121명이 차량·주류 제공으로 적발됐다. 법원은 음주운전을 말리지 않은 동승자에게 2년 안팎의 실형까지 내리고 있다. 그 결과 음식점에 차를 가져가면 종업원이 “식사 후 운전할 거냐”고 먼저 묻고 음주한 경우 적극적으로 운전을 말리게 됐다. 범정부 캠페인도 지속적으로 이뤄졌다. ‘음주운전은 절대 하지도, 시키지도, 용서하지도, 보고 넘기지도 말자’는 구호가 20년 가까이 포스터, 스티커, 만화 등으로 반복되며 국민 머릿속에 각인됐다. 지자체도 ‘음주운전 근절의 날’을 만들고 “음주운전하면 패가망신한다”는 메시지를 반복적으로 전파하고 있다. 지난해에는 음주운전의 범위를 넓히며 음주 자전거에 대한 처벌도 명문화했다. 이에 따라 술을 마신 채 자전거를 탔다가 실형을 선고받는 사례도 나오고 있다. 요약하면 일관된 정책, 강도 높고 실효성 있는 처벌, 지속적인 캠페인 등이 음주운전을 크게 줄인 요인이라 할 수 있다.동승자 처벌 규정 없는 韓 한국도 2018년 윤창호법이 생기며 음주운전으로 사망 사고를 냈을 때 무기징역까지 선고할 수 있게 됐다. 하지만 음주운전 치사에 대한 대법원 양형 기준이 최대 8년이다 보니 만취 상태로 사망 사고를 내고도 징역 7, 8년을 선고받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동승자의 경우에는 일본처럼 도로교통법상 명문화된 처벌 규정도 없다. 아쉬운 대로 형법상 방조죄를 끌어와 적용하고 있지만 실제 기소까지 이어지는 경우는 많지 않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캠페인 구호가 바뀌는 등 지속적 홍보도 요원하다. 이런 상황에서 한일 간 음주운전 격차가 더 벌어지지 않으면 그나마 다행일 것이다.장원재 논설위원 peacechaos@donga.com}

2000년대 중반 판교, 위례 등 2기 신도시 물량이 쏟아질 때 1순위 청약통장은 많게는 수천만 원에 거래됐다. 불법 거래임에도 수도권 주택가 곳곳에 ‘청약통장 고가 매입’ 광고물이 붙었다. 당시만 해도 ‘황금알’로 불렸던 청약통장이 최근에는 ‘찬밥 신세’가 됐다. 해지가 급증하면서 한때 온 국민이 가입하다시피 했던 청약통장 가입자가 3년 만에 225만 명이나 줄어든 것이다. ▷청약통장을 외면하는 건 원하는 곳에 당첨되기가 ‘하늘의 별 따기’이기 때문이다. 올해 서울 아파트 일반분양은 7358채로 전년 대비 30%나 줄었다. 서울의 재개발·재건축 중 착공에 들어간 물량은 10채 중 1채뿐이라 당분간 대규모 공급도 기대하기 어렵다. 공급이 줄면서 청약 경쟁률은 천정부지로 치솟는 중이다. 최근 서울에선 4인 가족이 만점(69점)으로도 떨어지는 사례가 속출하고 있다. 1, 2인 가구는 사실상 당첨이 불가능하니 통장을 유지할 필요를 못 느낄 수밖에 없다. 반면 지방에는 미분양 물량이 많아 굳이 청약통장이 필요하지 않다. ▷운이 좋아 인기 지역에서 신혼부부, 생애 최초, 신생아 특별공급에 당첨돼도 문제다. 원자재 가격과 인건비가 오른 탓에 서울 민간 아파트 분양가는 3.3㎡당 4547만 원으로 7년 만에 2배가 됐다. 여기에 대출 규제 때문에 은행에서 중도금과 잔금을 빌리기도 어렵다. ‘갭 투자’ 규제로 전세를 주고 잔금을 낼 수도 없다. 예를 들어 10일 청약을 시작한 서초구 반포동의 84㎡ 아파트는 분양가가 27억 원인데 10·15 대책에 따라 은행 대출은 2억 원까지만 가능하다. 주변 시세와 비교하면 30억 넘게 차익이 예상되지만 현금 25억 원 이상이 필요하다 보니 ‘그림의 떡’이다. 무주택 청년 중에는 못 먹는 떡을 노리는 것보다 통장을 해지하고 주식과 코인 투자로 돌아서는 경우가 늘고 있다. ▷1977년 도입된 청약통장은 그동안 ‘중산층으로 가는 사다리’ 역할을 했다. 목돈이 없어도 매달 성실하게 돈을 모으면 언젠가 번듯한 내 집 마련이 가능하다는 희망이 통장에 차곡차곡 쌓였다. 그러나 최근 청약통장을 해지하는 청년들은 “더 이상 월급을 모아 서울 집을 사는 게 불가능한 시대가 됐다”고 입을 모은다. 거주가 불안한 청년들은 결혼과 출산에도 적극적으로 나서기 어려울 수밖에 없다. ▷다만 부동산 전문가들은 청약통장 해지를 고민하는 청년들에게 “월 납입액을 줄이거나 납입을 중단하더라도 통장을 일단 유지하는 게 좋다”고 조언한다. 부동산 시장은 사이클이 있기 때문에 일단 통장을 갖고 있으면 추후 공급이 몰릴 때 기회를 잡을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20여 년 전 2기 신도시 분양 때도 물량이 한꺼번에 쏟아지며 일부 단지가 미달되거나 낮은 경쟁률을 기록했지만, 이들 단지도 나중에 ‘알짜’가 됐다.장원재 논설위원 peacechaos@donga.com}

지난달 31일 열린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 만찬은 한마디로 우리의 멋과 맛이 어우러진 자리였다.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케데헌)의 실제 모델인 배우 차은우가 사회를 봤고, 가수 지드래곤은 갓을 쓰고 축하 공연을 했다. 한국계 셰프 에드워드 리가 화합의 의미를 담아 나물 비빔밥을 차려냈다. 싱가포르 총리와 일본 외상, 멕시코 경제장관 등이 “스펙터클한 갈라 디너 쇼”라며 사진과 동영상을 공유했다. 안와르 이브라힘 말레이시아 총리는 ‘K팝이여 영원하라(Kpop Forever)’란 해시태그까지 달았다. ▷정부는 지난해 6월 경주를 APEC 정상회의 개최지로 선정하면서 ‘문화의 멋’을 선보일 기회라는 걸 이유로 들었다. 천년고도 경주에서 전통과 현대를 아우르는 ‘소프트 파워’를 보여주겠다는 구상이었다. 한미·한중 정상회담을 공식 행사장인 화백컨벤션센터 대신 경주박물관에서 연 것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게 천마총 금관 모형을 선물한 것도 ‘한국적 아름다움’을 보여주려는 시도였다. 신라 금관 6점 합동 전시는 이를 관람한 정상들을 매료시킨 기획이었다. ▷정상들과 기업인들을 사로잡은 것 가운데 ‘한국의 맛’을 빼놓을 수 없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이재명 대통령에게 “(선물 받은) 황남빵을 맛있게 먹었다”고 말한 사실이 전해지며 황남빵 매장 앞에는 긴 줄이 생겼다. 이재용 정의선 회장과 ‘치맥 회동’을 한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는 “한국 치킨은 세계 최고”라며 엄지를 치켜세웠다. CNN은 세 거부의 회동 소식을 전하며 “치맥은 한국을 방문하는 누구나 꼭 먹어야 할 조합”이란 설명을 달았다. 라면과 호떡, 찰보리빵, 약과, 호두과자 등도 행사장 안팎에서 좋은 평가를 받으며 K푸드의 저변을 한층 확장시켰다. ▷K뷰티 열기도 뜨거웠다. 20대 후반인 캐럴라인 레빗 미 백악관 대변인은 국내 브랜드 화장품 13종을 직접 구입하고 인증샷과 함께 ‘한국 스킨케어 추천 아이템’이란 글을 남겼다. 조선미녀 인삼아이크림 등 이름만 봐도 한국산인 동시에 호기심을 자극할 법한 제품들이었다. 마크 카니 캐나다 총리의 배우자인 다이애나 폭스 카니 여사는 김혜경 여사에게 “딸이 사 오라며 K화장품 리스트를 줬다”고 말해 웃음을 자아냈다. APEC 기간 경주 시내 화장품 매장에는 세계적인 명사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APEC은 정치·경제 지도자의 모임이지만 이번 회의에서는 K컬처가 또 하나의 주역이었다. 천년사찰 불국사를 돌아보며 ‘어메이징’을 연발한 국제통화기금(IMF) 총재, 지드래곤 공연을 직관한 덕분에 “주변의 부러움을 샀다”고 말한 싱가포르 총리 배우자 등에게 한국의 소프트파워가 선사한 감동적인 순간이 오래 기억되리라 믿는다. 장원재 논설위원 peacechaos@donga.com}

한국에서 근대적 인구조사가 시작된 건 1925년으로 일본, 대만보다 5년 늦다. 일제가 3·1운동의 영향으로 조사 계획을 5년 연기한 탓이다. 실제로 1920년 5월 28일자 동아일보를 보면 사이토 마코토 조선 총독이 일본 기자에게 “조사원으로 활용할 고등보통학교(중고교) 상급생과 졸업생이 모두 독립사상을 갖고 있어 곤란하다”며 하소연하는 대목이 나온다. 우여곡절 끝에 5년 뒤 시작됐지만, ‘호구조사 나왔냐’는 말이 오늘날까지 핀잔으로 통할 정도로 조사에 대한 한국인들의 거부감은 심했다.▷일제가 수탈 목적으로 한 조사라 더 그랬겠지만 사실 생면부지의 사람이 사생활을 캐묻는 걸 좋아하는 사람은 드물다. 현재 시행 중인 인구주택총조사 조사에는 직장 이름과 직책, 결혼 및 자녀 계획, 1인 가구가 된 이유 등 요즘 친인척도 쉽게 물어보기 어려운 내용을 묻는 항목이 포함돼 있다. 정부는 10년 전 전수조사를 폐지하고 13개 항목은 행정자료를 활용하며 조사를 간소화했지만, 여전히 조사원이 물어야 할 항목이 42개에 달한다. 올해도 조사원 3만 명이 전체의 20%인 500만 표본 가구를 방문할 계획이다.▷100년 전 첫 조사에서 이름, 성, 연령, 결혼 유무, 국적 등 5개뿐이던 조사 항목이 늘어난 건 사회가 복잡하고 다양해졌기 때문이다. 외국인이 늘면서 한국 입국 시기, 한국어 실력, 가정에서 사용하는 언어 등의 항목이 포함된 게 대표적이다. 5년 전 반려동물도 조사 항목에 포함됐다. 시대 변화와 함께 빠진 항목도 있다. 1960년대는 화장실 형태, 1970년대는 상수도 시설 유무, 1980년대는 목욕 시설 유무를 물었지만 지금은 위생 관련 항목은 묻지 않는다. 컴퓨터와 인터넷을 사용하는지 묻는 항목은 2000년에 처음 포함됐다가 곧 사라졌다.▷세금을 걷고, 군대를 편성하기 위한 인구조사는 기원전 4000년경 바빌로니아에서 시작됐을 정도로 그 역사가 깊다. 인구조사를 뜻하는 ‘센서스’도 로마 시대 인구와 재산을 조사하던 관직 이름 ‘켄소르(Censor)’에서 나왔다. 지금은 국제통계협회(ISI)의 권고에 따라 대부분의 나라가 5년 또는 10년마다 인구조사를 실시한다. 인구가 14억 명인 중국도 조사원 700만 명을 투입해 10년마다 인구조사를 한다. 세계 최대 인구 대국인 인도만 2011년 이후 아직까지 인구조사를 못 한 상태다.▷100주년을 맞은 인구주택총조사는 이달 22일부터 다음 달 18일까지 진행 중이다. 대면 조사가 부담스럽다면 온라인, 모바일, 전화로도 답변할 수 있다고 한다. 인구주택총조사는 ‘통계의 어머니’로 불린다. 모든 통계의 ‘모집단’을 구성하며 고용, 복지, 주택, 교육, 교통 등 다양한 정책을 수립할 때 활용되기 때문이다. 100주년에 걸맞은 내실 있는 조사가 되기를 바란다.장원재 논설위원 peacechaos@donga.com}

영국 가디언은 지난달 “쥐가 이겼다”는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 2년 전 ‘쥐와의 전쟁’을 선언하며 미국 뉴욕시가 임명한 방역 책임자 ‘쥐 차르’가 사임했다는 내용이었다. 뉴욕에 서식하는 쥐는 300만 마리로 추정되는데, 질식 가스와 피임약까지 살포하며 총력을 기울였지만 성과는 크지 않았던 것이다. 가디언은 “쥐가 차르를 폐위시켰다”는 표현까지 썼다. ▷‘쥐의 왕국’으로 불리는 뉴욕처럼 최근 서울에서도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쥐 목격담’이 쏟아진다. ‘서울의 심장’ 광화문광장에 쥐가 출몰해 구청이 긴급 방역에 나서는가 하면, 한 채가 수십억 원인 강남 신축 아파트 단지에서도 “대낮에 쥐를 봤다”는 민원이 잇따르고 있다. 지난해 서울시에 접수된 쥐 민원은 2181건으로 3년 전의 2배 이상이 됐다. 어느새 도심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불청객이 된 것이다. ▷올해 초 국제학술지에 발표된 연구에 따르면 세계 주요 대도시 16곳 중 11곳에서 쥐 개체 수가 크게 늘었다. 특히 미국 워싱턴은 10년간 증가율이 390%에 달했다. 일본 도쿄에서도 이달 초 신주쿠를 걷던 외국인 관광객이 쥐에 물리는 등 피해 신고가 이어지고 있다. 파리, 로마 등 유럽의 오래된 도시들도 쥐 때문에 골머리를 앓는 중이다. 기후 변화로 도시가 따뜻해지면서 번식에 유리한 환경이 되고, 하수관 등 인프라 노후화로 서식지와 이동 통로가 늘어난 영향이다. 설상가상으로 천적도 사라졌다. 먹을 게 넘치는 도시에서 들고양이는 천적이 아니라 쥐와 음식물 쓰레기를 나눠 먹는 이웃이 됐다. ▷한국에선 3년 전 여의도 한복판에서 쥐 20여 마리가 쓰레기봉투를 파먹는 영상이 공개돼 충격을 줬다. 1970년대 ‘쥐잡기 운동’으로 박멸된 줄 알았던 쥐가 다시 활개 치는 세상이 된 것이다. 그렇다고 예전처럼 쥐 꼬리를 모으거나 쥐약을 살포하던 시절로 돌아가긴 어렵다. 쥐를 잡아 꼬리를 자를 만큼 용감한(?) 국민도 많지 않고 살포한 쥐약이 자칫 반려견, 반려묘의 생명을 앗아갈 수 있어서다. 서울시는 23일 대안으로 사물인터넷(IoT) 센서가 장착된 ‘스마트 쥐덫’을 설치하기로 했다. 쥐가 먹이를 먹으러 들어오면 문이 닫히고 경보가 방제센터로 전송돼 수거하는 방식이다. ▷쥐가 갑자기 많이 보이는 건 놀라운 번식력 때문이기도 하다. 한 쌍의 쥐는 출산을 거듭하며 1년 만에 최대 1250마리까지 늘어날 수 있다고 한다. 서울도 머잖아 뉴욕처럼 매년 수만 건의 쥐 출몰 신고에 시달릴 수 있다는 뜻이다. 전문가들이 지적하는 쥐 대응의 ‘3원칙’은 굶기고, 막고, 잡는 것이다. 쥐들에게 ‘뷔페 식당’ 역할을 하는 음식물 쓰레기를 신속하게 치우고, ‘고속도로’ 역할을 하는 노후 하수관 틈을 막는 것부터 서둘러야 한다.장원재 논설위원 peacechaos@donga.com}

점심 자리에서 폭탄주가 오가던 법조계의 ‘낮술’ 문화는 2000년을 전후로 크게 줄었다. 과도한 음주로 인한 추태나 실언이 사회적 물의를 빚으면서, 드러내놓고 공공연히 술자리를 갖는 일은 점차 자제하게 됐다. 하지만 20년이 훨씬 지난 지금도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닌 듯하다. 지난해 6월 제주지법 부장판사 3명이 근무시간에 낮술을 마시고 노래방에서 소란을 피운 사실이 최근 뒤늦게 드러났다. 국회 법사위가 이들을 국감 증인으로 채택하자 셋 모두 ‘재판 준비’를 이유로 불출석 사유서를 냈다. ▷사건은 지난해 6월 28일 제주지법 직원 환송회 자리에서 벌어졌다. 오창훈, 여경은, 강란주 등 세 부장판사는 낮술을 마시다 취한 상태로 노래방을 찾았는데, 업주가 “술은 못 파니 나가 달라”고 하자 버티면서 경찰까지 출동했다. 이들은 다른 노래방으로 자리를 옮겼고, 3명 중 2명은 법원에 복귀하지 않고 퇴근했다. 법원 감사위원회는 성실 의무와 품위 유지 의무 위반을 인정했지만 ‘경고’ 조치로 마무리해 사실상 면죄부를 줬다는 평가다. ▷이들 중 오 부장판사는 다른 논란에도 휘말려 있다. 그는 올 3월 재판 중 방청객에게 “어떤 소리도 내지 말라. 한숨도 쉬지 말라. 어기면 구속하겠다”는 취지로 발언해 직권남용 혐의로 공수처에 고발됐다. 여 부장판사는 고교 동문인 변호사와 “2차 애기 보러 갈까”, “좋죠. 형님” 등의 대화를 나눈 카톡 화면이 공개되며 부적절한 접대 의혹을 받는다. 이 변호사는 여 부장판사와의 친분을 내세우며 구속된 피고인에게 “보석으로 풀려나게 해줄 테니 돈을 달라”고 요구한 혐의로 수사를 받고 있다. 그런데 대법원은 오 부장판사에 대해선 “징계 사유가 아니다”, 여 부장판사에 대해선 “친분이 없는데 변호사가 과장한 것”이라고 판단했다. ▷법원의 ‘제 식구 감싸기’ 관행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2017년 서울동부지법 성범죄 전담 재판부 판사가 지하철에서 여성 신체를 몰래 촬영하다 현행범으로 붙잡혔는데, 법원은 벌금 300만 원을 선고했다. 대법원은 판결 직후 감봉 4개월 징계 처분을 내렸다. 2012년 일본 오사카지법 판사가 같은 혐의로 적발된 후 파면된 것과 비교하면 차이가 크다. 당시 일본 재판관탄핵재판소는 판결문에서 “사법 전체에 대한 국민의 존경과 신뢰를 실추시켰다”고 질타했다. ▷법사위는 제주지법 부장판사들에게 동행명령장을 발부했다. 국회가 현직 판사에게 동행명령장을 발부한 건 처음이다. 결국 끌려오다시피 나온 여 부장판사는 “부적절한 처신에 깊이 반성한다”며 여러 번 고개를 숙였다. 동행명령을 거부한 두 부장판사는 고발될 처지에 놓였다. 사법부가 내부 비위에 단호하게 대처하지 않으면 밖으로부터의 ‘사법부 개혁’ 목소리는 점점 커지게 될 것이다. 장원재 논설위원 peacechaos@donga.com}

일본 정치에는 ‘나막신의 눈(雪)’이란 말이 있다. 신발 바닥에 들러붙은 눈처럼, 밟히는 수모를 감수하며 권력에 달라붙는다는 뜻이다. 자민당과 손잡고 26년 동안 여당 자리를 지켜온 공명당을 두고 일본 언론이 자주 쓰는 표현이기도 하다. 그런데 공명당이 10일 정치자금 제도 개선 대책이 명확하지 않다는 등의 이유로 “더 이상 자민당과 함께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정치권에선 “26년 만에 나막신의 눈이 녹았다”는 평가가 나왔다. ▷불교 종파인 창가학회를 기반으로 한 공명당은 중도 보수 성향으로, 1999년부터 더 보수적인 자민당과 연정을 유지해 왔다. 지역구 후보를 거의 안 내고 비례 의석에 주력하는 대신 전국에 흩어져 있는 지지자들에게 “자민당 후보에게 투표해 달라”고 독려하면서 자민당과 공생했다. 선거구당 평균 2만 명의 조직표를 가진 공명당의 지지는 자민당 의석 확보에 큰 도움이 됐고, 자민당은 ‘알짜’인 국토교통성 장관을 항상 공명당에 내줬다. 또 중의원 지역구 10∼15곳에 후보를 안 내며 공명당 후보 당선을 이끌었다. 공명당이 중시하는 복지 교육 공약 일부도 정책에 반영해 줬다. ▷‘악어와 악어새’ 같던 연정에 금이 가기 시작한 건 2년 전 자민당에서 정치자금 스캔들이 터지면서부터다. 모금 행사에서 걷힌 정치자금 일부를 뒷돈으로 챙겨 비자금을 조성했다는 의혹이 터지면서 자민당 지지율은 급락했다. 창당할 때 ‘돈에 깨끗한 정당’을 슬로건으로 내세웠던 공명당 본부에도 항의 전화가 쏟아졌다. 그 이후로 자민-공명 연합은 주요 선거에서 3연패했다. 특히 지난해 중의원 선거에서 공명당 의석수는 32석에서 24석으로 8석이나 줄어 당 지도부가 충격에 빠졌다. 윈윈이었던 두 당의 관계가 어느새 자민당이 공명당의 발목을 잡는 관계로 바뀐 것이다. ▷철옹성 같던 자민-공명 연합이 무너지면서 일본 정치권에선 정권 교체 가능성을 거론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제1야당인 입헌민주당이 공명당과 손잡고 다른 야당을 끌어들여 ‘비자민 연립정부’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야당 간 이념 스펙트럼이 넓긴 하지만 1993년 8개 당파가 손잡고 호소카와 모리히로 전 총리를, 이듬해 5개 당파가 연합해 하타 쓰토무 전 총리를 선출한 전례를 보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자민당은 조속히 새 연정 파트너를 찾아 정권을 유지하겠다는 생각이다. 하지만 연패를 거듭하면서도 정치자금 스캔들에서 못 헤어나오는 자민당 손을 잡을 야당이 있을지 의문이다. ‘첫 여성 총리’를 꿈꿨던 다카이치 사나에 자민당 총재는 취임 6일 만에 기자회견에서 “총재직을 유지할 것이냐”는 질문을 받는 처지가 됐다. 26년 만에 나막신에서 녹아내린 눈이 일본 정치 지형을 흔드는 대형 눈사태를 유발할지, 주목되는 순간이다.장원재 논설위원 peacechaos@donga.com}

오세훈 서울시장이 2023년 3월 발표한 ‘그레이트 한강’ 프로젝트에는 새 이동 수단으로 한강을 가로지르는 곤돌라가 포함돼 있었다. 그런데 이후 영국 런던에서 템스강의 수상버스를 체험한 오 시장은 ‘수상버스 도입 추진’을 공식화하고 곤돌라는 재검토하겠다고 했다. 불과 나흘 만에 발표를 뒤집은 걸 두고 서울시 안팎에선 “수상버스에 대한 시장의 집념이 대단하다”는 말이 돌았다. 오 시장은 2006년 시작한 첫 임기 때도 ‘한강 르네상스’를 내세우며 수상버스 도입을 추진했기 때문이다. ▷이후 2년여의 준비를 거쳐 이달 18일 한강버스가 처음 출항했다. 하지만 거의 매일 사건 사고가 이어졌다. 방향타나 전기 설비에 문제가 생겨 운항을 중단하는 일이 반복됐다. 화장실 오물이 역류했고, 팔당댐 방류로 모든 배가 하루 운항을 중단하기도 했다. 취항식에서 “한강의 역사는 한강버스 전과 후로 나뉠 것”이라고 했던 오 시장은 결국 “앞으로 한 달간 승객을 안 태우고 시범 운항을 더 하겠다”며 고개를 숙였다. ▷한강버스의 초반 시행착오를 두고 ‘예고된 것’이란 지적이 나온다. 한강버스는 첨단 기술이 필요한 전기 하이브리드 선박임에도 운영사는 선박 건조 실적이 전혀 없는 신생 업체에 제작을 맡겼다. 결과적으로 선박 건조 및 인도 일정이 늦어지면서 운항 시작은 지난해 10월에서 올해 9월로 3차례나 미뤄졌다. 그나마 계획했던 12척 중 4척만 확보된 상황에서 개문발차식으로 운항을 시작해 출근 시간대에는 이용할 수 없었다. “왜 이렇게 무리하게 취항을 서둘렀는지 모르겠다”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한강버스를 이용한 승객 사이에선 “접근성이 떨어진다”는 의견이 많다. 런던의 경우 런던아이, 국회의사당 등 주요 명소가 선착장 바로 앞에 있다. 반면 한강은 보통 수백 m는 걸어야 도심이나 지하철역까지 갈 수 있다. 강폭이 템스강의 5, 6배다 보니 제방과 둔치를 폭넓게 조성한 탓이다. 잠실 선착장의 경우 가까운 지하철역까지 걸어서 15분이나 걸린다. 또 마곡부터 잠실까지 운항 시간이 일반은 127분, 급행은 82분 걸린다. 지하철의 2, 3배라 출퇴근용으로 이용하기엔 무리가 있다. 비가 많이 오거나 겨울에 강이 얼면 운항이 중단될 수밖에 없다는 한계도 있다. ▷오 시장은 첫 임기 때 수상버스 도입에는 실패했지만 대신 수상 콜택시를 도입했다. 한 명당 5000원을 받고 쾌속보트로 마곡과 여의도, 잠실을 오가는 식이었는데 이용률이 저조해 사업자가 바뀌는 등 우여곡절을 겪다 지난해 조용히 문을 닫았다. 수상버스가 ‘제2의 수상 콜택시’가 되지 않으려면, 초반 시행착오를 만회하고 남을 획기적인 ‘서비스 혁신’이 필요한 상황이다.장원재 논설위원 peacechaos@donga.com}

3일 오전 필리핀 마닐라 공항에서 전세기 한 대가 이륙했다. 기내에는 주황색 티셔츠에 영문 이름이 새겨진 명찰을 단 한국인 범죄 피의자 49명이 탑승했다. 한국 경찰은 피의자들에게 한 명씩 ‘미란다 원칙’을 고지하고 수갑을 채웠다. 영토로 간주되는 국적기 내에서 체포영장을 집행한 것이다. 한국판 ‘콘 에어’로 불리는 역대 최대 피의자 송환 작전의 막이 오르는 순간이었다. ▷기내에는 피의자의 2배가 넘는 124명의 경찰이 탑승했다.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중앙에 피의자를 두고 양쪽에 경찰이 앉았고, 화장실 갈 때도 동행했다. 포크와 나이프 없이 먹을 수 있는 샌드위치가 식사로 나왔다. 승무원 8명은 모두 남성이었고, 필리핀 이민청 직원 12명과 경찰병원 의료진 2명도 동행했다. 경찰은 테이저건도 지참했지만 다행히 사용할 일은 생기지 않았다. 비행 4시간 만에 인천공항에 도착한 피의자들은 대기하던 버스에 올라 관할 경찰서로 이송됐다. 경찰은 체포영장 후 48시간 내 구속영장을 신청해야 하는 만큼 신속하게 조사한 뒤 구속영장을 신청할 방침이다. ▷이날 송환된 피의자들은 국내에서 범죄를 저지른 후 필리핀으로 도주했거나, 필리핀에서 한국인 대상 범죄를 저질렀다는 혐의를 받는다. 조직 폭력, 불법 도박 사이트 운영, 보이스피싱, 횡령 등 혐의도 가지각색이다. 경찰은 이들로 인해 국민 1322명이 총 605억 원의 피해를 입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49명 중 45명이 인터폴 적색수배 대상 흉악범이다. 송환 피의자 중에는 기업에서 200억 원을 횡령하고 무려 16년 동안 필리핀에서 숨어 지냈던 60대도 있었다. ▷콘 에어는 ‘수형자를 태운 비행기(Convict Airplane)’의 줄임말로 미 법무부 산하 연방보안관실(USMS)에서 운영하는 수형자 항공 이송 시스템을 뜻한다. 1997년 개봉한 동명의 할리우드 영화 덕분에 세계적으로 유명해졌다. 한국에선 2017년부터 경찰이 전세기를 동원한 우리 식 ‘콘 에어 작전’을 진행하고 있다. 한 번 전세기를 빌리는 데 예산 1억 원가량이 들지만 일반 송환 절차가 길게는 몇 년씩 걸리다 보니 생각해 낸 고육지책이다. 하지만 여전히 매년 1000명 안팎이 해외로 도피하는데 송환되는 인원은 절반 남짓에 불과하다. ▷전세기까지 띄울 정도로 세계 곳곳에서 데려올 범죄 피의자들이 늘었다는 건 씁쓸한 대목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최근 중국, 필리핀, 캄보디아 등을 거점으로 진행되는 한국인 대상 범죄는 갈수록 대담해지고 교묘해지고 있다. 이번 작전을 통해 범죄자들이 “더 이상 숨을 곳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전세기 운용에 들어간 국민 세금이 제값을 하는 셈이다.장원재 논설위원 peacechao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