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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전 대통령 부부의 사저 아크로비스타 지하에 있는 코바나컨텐츠는 김건희 여사가 영부인이 되기 전 주요 활동 무대였던 곳이다. 김 여사가 최재영 목사로부터 디올백을 받은 곳도, 로봇개 수입업자에게서 고가 수입 시계를 건네받은 곳도 바로 코바나컨텐츠 사무실이다. 윤석열 정부 출범 전후엔 정권에 줄을 대려는 이들의 발길이 이어지기도 했다. 김 여사는 올 4월 윤 전 대통령 파면으로 관저에서 나온 이후 주로 그곳에서 머물렀다고 한다. ▷특검은 7월 25일 코바나컨텐츠 사무실을 압수수색하면서 뜻밖의 문건을 발견했다. 명태균 공천 개입 사건에서 김 여사와 공범 혐의가 있는 김영선 전 국민의힘 의원에 대한 압수수색 영장 복사본이었다. 7월 초 집행됐던 이 영장에는 김 여사 부부가 명 씨로부터 공짜 여론조사를 제공받는 대가로 명 씨와 가까운 김 전 의원이 공천을 받도록 해줬다고 명시돼 있다. 압수수색 영장에는 혐의와 함께 압수물 내역이 적혀 있어 수사의 진도와 방향을 가늠하는 단서가 될 수 있다. ▷당시 김 여사는 몰아치는 특검 수사로 궁지에 몰려 있었다. 보름 전 윤 전 대통령이 재구속됐고, 김 여사 소환이 임박했다는 보도가 이어지던 때였다. 공천 개입은 김 여사의 주요 혐의 중 하나였다. 특검 조사에 대비해야 했던 김 여사에게 김 전 의원의 압수수색 영장은 적지 않은 도움이 됐을 것이다. ▷수사 상황을 알아보거나 보고받는 건 김 여사에게 낯선 일이 아니다. 그는 디올백 수수와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사건에 대한 검찰 수사가 한창이던 지난해 5월 박성재 당시 법무부 장관에게 “내 수사는 어떻게 되고 있느냐”고 물었다. 박 전 장관이 검찰에서 공천 개입 사건 수사 보고서를 받아 김 여사에게 전달한 정황도 포착돼 특검이 수사하고 있다. 김 여사 측에 1억 원이 넘는 이우환 그림을 제공한 혐의로 구속된 김상민 전 검사는 현직 부장검사 시절 검찰의 ‘쥴리’ 명예훼손 사건 관련 수사 동향을 김 여사에게 보고한 적도 있다. ▷윤 전 대통령이 집권하는 동안 김 여사는 자신과 관련된 수사에서 늘 유리한 고지에 있었다. 남편은 법무부 장관에게 “혐의 없음이 명백하다”면서 사건 처리 방향을 제시했고, 김 여사 본인도 장관이나 검사를 사설 변호인 대하듯 활용했다. 오죽하면 박 전 장관 휴대전화에 김 여사 번호가 ‘김안방’(안방마님의 줄임말로 추정)으로 저장됐을까. 김 여사에게 이런 습관이 남아 있어 용산에서 나온 뒤에도 공범의 영장을 통해 수사 상황을 알아보려 했던 건 아닌지 의심된다. 하지만 특검 수사에선 그것도 별 소용이 없었다. 코바나컨텐츠 사무실에서 김 전 의원 영장이 발견되고 보름쯤 뒤 김 여사는 구속됐다. 법 위에 서 있는 것 같던 김 여사의 시간도 그리 오래가진 못했다.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26일 홍콩의 31층 아파트 단지에서 불이 나 현재까지 55명이 숨지고 279명이 실종되는 최악의 인명 피해가 났다. 외벽 보수 공사 중이던 이 아파트 8개 동 중 7개 동이 화마에 휩싸였는데 다닥다닥 붙은 건물들 사이로 불이 순식간에 번졌다. 건물마다 설치된 고층 작업용 가설물인 대나무 비계가 불길이 번지게 하는 고속도로 역할을 했다. 생존자들은 “대나무가 딱딱 소리를 내며 터지고, 불붙은 대나무들이 20∼30층 높이에서 비 오듯 쏟아져 내렸다”고 전했다. ▷공사 중인 건물은 비계라고 불리는 임시 구조물에 둘러싸여 있다. 인부들이 딛고 서는 발판이자 자재를 옮기는 통로여서 공사 현장의 뼈대라고도 불린다. 철제 비계가 주로 쓰이지만 홍콩에선 대나무 비계가 많다. 비좁은 땅에 고층 건물이 빽빽하게 밀집한 지리적 특징이 낳은 산물이다. 대나무는 유연하고 자르기 쉬워 좁은 건물 틈 사이로 비계를 설치하기 쉽다. 워낙 싸고 효율이 좋아 화재에 취약하다는 치명적 단점은 과소평가돼 왔다. 하지만 잠재된 위험은 이번 화재처럼 언젠가 현실이 된다. ▷홍콩 당국이 이런 참사에 대비할 기회는 여러 번 있었다. 1996년 홍콩 갈레이 빌딩 화재 때도 대나무 비계가 불쏘시개 역할을 해 41명이 희생된 적이 있다. 고층 건물은 사다리차가 닿지 않아 속수무책이란 것도 그때 다 경험했다. 하지만 건설사들은 압도적 가성비에 숙련된 대나무 비계공들이 풍부해 오랜 관행을 포기하지 못했다. 정부도 이를 계속 방관하다 올 3월에야 단계적으로 사용을 금하기로 했지만 때늦은 조치였다. ▷화재가 난 공사 현장에는 담배를 피우는 인부들도 많았다. 아파트 주민들은 이들이 아무 데다 꽁초 버리는 걸 목격하고 여러 번 항의했지만 시정되지 않았다고 한다. 화재는 담뱃불에서 시작됐을 가능성이 높다고 홍콩 언론들은 보도하고 있다. 최근엔 강풍까지 자주 불어 안전 그물망이 떨어져 나가는 일도 많았다. 각층의 창문은 깨지지 말라고 스티로폼으로 도배돼 있었다. 이처럼 불에 잘 타는 자재와 버려지는 꽁초들, 게다가 강풍까지 불이 날 징조들은 차곡차곡 쌓여 왔다. ▷한국은 홍콩 못지않은 ‘초고층 아파트 공화국’이다. 우리는 대나무 비계를 쓰진 않지만 가연성 외장재나 필로티 주차장 같은 우리만의 ‘불쏘시개’를 안고 있다. 부산 해운대 우신골든스위트 화재(2010년), 경기 의정부 대봉그린아파트 화재(2015년) 등이 그런 사례다. 요즘 초고층 아파트엔 중간에 피난 구역이 있다고 하지만 유사시 대피 매뉴얼을 숙지하고 있는 주민들은 많지 않다. 오래된 고층 건물엔 이런 피난처마저 없다. 재난은 예상치 못했던 곳에서 갑자기 뚝 떨어지지 않는다. 위험한 줄 알면서 “설마…”할 뿐이다. 홍콩에서 지금 그 대가를 치르고 있듯, 우리라고 예외일 리는 없다.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김건희 특검이 지난달 서울 용산구의 한 건물을 압수수색 하던 중 눈앞에서 피의자를 놓쳤다. 김 여사를 건진법사 전성배 씨에게 소개해준 이모 씨였다. 특검은 그를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사건의 공범으로 보고 추적해 왔지만 그간 행방이 묘연했다. 마침 1년 전 음주 운전으로 지명수배된 상태여서 경찰의 도움으로 어렵게 소재지를 찾아낸 터였다. 하지만 특검 압수수색과 동시에 체포에 나섰던 형사들이 도착하기 직전 이 씨가 선수를 쳤다. 그는 2층 베란다에서 맨발로 뛰어내려 유유히 사라졌다. ▷특검이 이 씨를 주목하게 된 건 전 씨의 법당에서 김 여사의 예전 휴대전화를 발견하면서부터다. 그 폰에 김 여사가 이 씨와 주고받은 문자메시지가 수백 통 남아있었다. 이 씨는 주가조작에 쓰인 김 여사 계좌 중 일부를 관리했던 적이 있어 ‘제3의 주포’로 의심되는 상황이었는데 두 사람의 대화를 복원해 보니 충격적인 내용들이 쏟아져 나왔다. ▷주가조작이 한창이던 2012년 10월 이 씨는 김 여사에게 항의성 문자를 보냈다. “내 이름 노출시켜 버리면 난 뭐가 돼ㅠㅠ 도이치는 손 떼기로 했어.” 그러자 김 여사는 그런 적이 없다면서 “내가 더 비밀 지키고 싶은 사람이야∼ 오히려”라고 답했다. ‘비밀’이란 표현은 몇 달 뒤 대화에서 다시 등장한다. 이 씨가 “도이치 작전으로 내사 중이야”라고 하자 김 여사는 “나랑 하는 얘기 완전 비밀로 해. 주완이(주가조작 1차 주포의 가명)한테도”라고 답했다. ▷김 여사가 말하는 ‘비밀’이란 주가조작 일당에게 주식 매매를 맡긴 것을 뜻하는 것으로 특검은 보고 있다. 이 씨가 권오수 전 도이치모터스 회장에 대한 불신을 드러냈을 때 김 여사가 보였던 다음과 같은 반응도 그런 해석을 뒷받침한다. 김 여사는 권 전 회장에 대해 믿을 만한 사람이라면서 “난 돈을 대고 넌 기술을 대는데, 신뢰를 목숨같이 생각하고 쌓아”라고 답했다. 특검은 이 말이 김 여사가 스스로를 ‘전주(錢主)’라고 규정하면서 이 씨에 대해선 주가조작 기술을 구사하는 ‘선수’로 표현한 것이라고 보고 있다. 각자 역할을 맡은 가담자들 사이에 신뢰가 중요하다는 걸 강조한 대목이라는 것이다. ▷앞서 검찰은 이 씨를 조사하긴 했지만 기소하지 않았다. 이 씨는 2021년 검찰 조사를 받은 뒤 돌연 잠적했다가 이듬해 윤석열 정부 출범 직후 제 발로 검찰에 나왔다. 그때 검찰은 이 씨를 대면 조사하고도 조서조차 남기지 않았다. 그 후 음주 운전까지 하며 3년간 자유롭게 활보하던 이 씨는 특검 압수수색 도중 도주했다가 34일 만에 붙잡혀 결국 구속됐다. 다음 달 3일이면 김 여사 도이치모터스 사건의 결심 공판이 열려 1심이 얼마 남지 않은 상태다. 조금만 늦었더라면 검찰이 놓아준 핵심 공범을 법정에 세우지 못할 뻔했다. 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최근 평당 1억 원을 돌파한 서울 송파구 대단지 아파트 헬리오시티 상가에 독특한 매장이 생겼다. 분홍색 장식의 유리 너머로 “좋은 사람 만나 결혼하세요”란 문구가 보이는 결혼정보회사다. 부동산 중개업을 해온 주민이 알음알음 미혼의 입주민들을 중매해 주다가 수요가 늘자 아예 아파트 이름을 따 회사를 차렸다. 개업 3개월 만에 회원이 200명을 넘겼고, 그중 3분의 2가 입주민이라고 한다. ▷단지 내 결혼정보회사가 더 먼저 생긴 곳은 서울 서초구 래미안원베일리다. 평당 2억 원을 오르내리는 초고가 아파트에 사는 회원들이지만 거기서 또 직업, 학력 등에 따라 4개 등급으로 나뉜다. 연회비도 50만∼1100만 원까지 제각각이다. 서울 강남구 타워팰리스에도 입주민 중매 모임이 최근 생겼다. 이들은 강남권의 다른 고가주택 주민들에게도 문호를 열고 있어 아파트 관리사무소나 근처 주민센터로 찾아와 연결해 달라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고 한다. ▷비슷한 배경의 사람들끼리 결혼하려는 풍조는 예전부터 있어 왔다. ‘마담 뚜’나 VIP 고객을 상대하는 은행원들이 부유층 자녀들의 만남을 주선하기도 했다. 하지만 요즘처럼 아파트가 맞선의 무대가 된 건 강남 집값 폭등과 맞물린 기현상이다. 고가 아파트 커뮤니티가 몇 년 새 확 늘어난 데다, 아파트가 개인의 자산 규모를 드러내는 표식이 되면서 ‘평당 얼마짜리 아파트 소유자끼리 사돈 맺자’는 식의 생각이 싹트게 된 것이다. ▷부모가 원한다고 혼인이 성사되는 건 아니지만 자녀들도 ‘자만추’(자연스러운 만남 추구)만 고수하기엔 현실이 척박해졌다. 과거처럼 결혼해서 성실히 돈 모으면 내 집 마련이 가능했던 주거 사다리가 무너지면서 젊은 세대에서 재력이 검증된 상대와 안전한 결혼을 추구하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 하지만 아파트가 곧 신분 증명서가 돼 결혼에까지 영향을 미치면 부자들의 혼맥 네트워크는 공고해지게 된다. 이미 심각한 강남과 강북, 서울과 지방의 자산 격차는 더 벌어질 것이다. 신혼부부가 ‘초품아’(초등학교를 품은 아파트)를 선호하듯 중년 부부들이 ‘결품아’(결혼정보회사를 품은 아파트)에 몰리는 시대가 오지 말란 법도 없다. 가뜩이나 퍼진 물신주의가 더 큰 사회적 위화감으로 번질 수 있다. ▷주소지가 ‘결혼 스펙’이 되는 사회에선 비혼과 저출산도 더 가속화된다. 안 그래도 불안한 경제력 탓에 결혼과 출산을 포기하는 이들이 많은데 소수의 아파트 울타리 안에서만 부가 대물림되면 담장 밖 사람들은 선택지가 좁아진다. 부자들이 결혼으로 더 연결될 때 ‘결포자’(결혼포기자)들은 발밑이 흔들릴 수 있다. 반복적으로 찾아오는 집값 폭등을 막지 못하면 아파트 입주민 결혼정보회사 같은 씁쓸한 풍경들을 자주 마주하게 될 수 있다. 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첨단 무기의 경연장이라는 우크라이나 전쟁에서도 전투의 기본은 병력 확보라는 게 새삼 확인되고 있다. 무기가 아무리 좋아져도 운용할 사람이 있어야 하고, 드론이나 미사일로 적을 초토화시킨 뒤 실제 영토를 점령하는 건 군인들 몫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전사자는 늘어가는데 빈자리가 안 채워지면 부대원들 사기가 떨어지기 마련이다. 그래서 양측 모두 병력 확보에 사활을 걸고 있다. 러시아는 전쟁 초기 수혈했던 바그너 용병이 바닥나자 북한군을 파병받았고, 우크라이나는 환갑이 지난 남성들까지 입대시키며 안간힘을 쓰고 있다. ▷4년째 전쟁을 지켜보는 유럽 국가들은 초조하다. 전세가 러시아로 기울어 위협은 더 커졌는데 미국은 유럽에서 발을 빼고 있다. ‘미국 없이 유럽 지키기’가 발등의 불로 떨어졌다. 하지만 유럽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5년 이후 80년간 미국에 안보를 의존하며 긴 평화를 누려왔다. 1990년 냉전 종식 후엔 징병제도 대부분 없앴다. 이제야 군비 증강을 시도하지만 국방 예산을 확 올리기도 어려울뿐더러 최신 무기를 도입해 실전 배치하기까지 몇 년이 걸릴지 모른다. ▷그래서 꺼내 든 카드가 징병제 부활이다. 러시아와 가까운 독일이 대표적이다. 1980년대 말까지만 해도 독일은 우리나라(48만 명)와 비슷한 50만 대군을 유지했다. 하지만 지금은 18만 명 수준이다. 독일 국방부는 “징병제 폐지는 실수였다”면서 앞으로 10년간 징병을 늘리고, 예비군을 키워 46만 명까지 확충할 계획이다. 6개월 의무 복무 후 자발적으로 1년에서 최대 17개월까지 추가 복무하는 방안이 유력하다. 러시아와 국경을 접한 크로아티아, 라트비아, 세르비아도 속속 징병제로 회귀했다. ▷북유럽에선 여군 징집이 확산되고 있다. 러시아로부터 공격당했던 역사가 있는 나라들인 만큼 위기감이 더욱 크다. 덴마크는 올 7월 여성 징병제를 시작했다. 2027년 도입하려다가 2년 앞당겼다. 노르웨이와 스웨덴에선 이미 몇 년 전부터 그렇게 해왔다. 북유럽에서도 여성 징병은 찬반이 뜨거웠다. 하지만 군이 시민사회 구성과 동떨어지면 안 된다는 인식하에 성 중립적 징병제를 도입했고, 젊은 남성 인구가 줄어드는 현실적 한계도 있었다. ▷수십 년간 평화에 젖어 있던 유럽이 징병제를 부활시키고 있지만 지금의 국민은 그때 사람들이 아니다. 무작정 입대를 명령했다간 큰 반발에 부딪힐 수 있다. 젊은 세대의 거부감이 유럽 국가들의 고민이다. 독일은 신체검사를 의무화하면서도 통과자를 모두 입대시키진 않고 부족한 인원만큼만 뽑기로 했다. 제비뽑기로 추첨 선발한다. 여성 징병제 역시 형평성 논란을 줄이려는 노력이다. 한국은 저출산 시대에 징병제를 어떻게 유지할지 진작부터 고심해왔는데 이제 우리만의 문제가 아니게 됐다.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윤석열 전 대통령의 내란 재판 전략은 ‘입 연 사람은 흔들리게, 입 닫은 사람은 더 꾹 닫게’로 요약된다. 의원들을 끌어내란 지시를 받았다는 군인들 증언이 쏟아져 나온 이상 ‘스피커’의 신빙성을 떨어뜨리는 데 집중해 왔다. 하지만 역효과가 적지 않아 닫혔던 입들이 오히려 열리고 있다. 계엄 당시 이진우 전 수방사령관의 차량을 운전했던 이민수 중사를 증언대에 세운 건 윤 전 대통령 측이었다. 당시 함께 있었던 이 전 사령관의 부관이 비화폰을 통해 “4명이 (의원) 1명씩 들쳐 업고 나오라”는 대통령의 지시를 들었다고 증언한 것에 반해 이 중사는 그런 기억이 없다고 진술해 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중사의 증언은 변호인들 기대와 정반대였다. ‘총을 쏴서라도…’ ‘계엄을 다시 하면 된다’고 말하는 대통령 목소리를 들었다고 했다. 이제 와 왜 말을 바꾸냐는 질문엔 “침묵하는 저 자신이 부끄러웠다”고 했다. 그처럼 침묵을 깬 군인들이 한둘이 아니다.태도 달라진 이진우 여인형 곧 증인 출석 재판이 불리해지면 방향을 틀 법도 한데 윤 전 대통령은 더 세게 액셀을 밟는 쪽을 택했다. 의원들 끌어내란 지시를 처음 폭로했던 곽종근 전 특전사령관이 증인으로 나오자 윤 전 대통령은 넉 달간의 재판 거부를 멈추고 직접 나서 그를 신문했다. 전 세계에 생중계되는데 그런 지시를 했겠느냐, 계엄 두 달 전 비상대권 얘기를 했다고 하는데 폭탄주를 10∼20잔 마셨던 그날 자리에서 시국 얘기를 했겠느냐고 몰아붙였다. 자신을 거짓말쟁이로 몰아가는 태도에 참기 힘들었는지 곽 전 사령관은 “이 얘기까진 안 하려고 했는데 그날 한동훈을 당신 앞에 잡아 오라고 했다. 당신이 총으로 쏴서라도 죽이겠다고 했다”는 폭탄 발언을 내놓았다. 조만간 증인으로 나올 이 전 수방사령관과 여인형 전 방첩사령관도 윤 전 대통령으로선 안심할 수 없다. 헌법재판소에선 말을 아꼈던 두 사람이지만 이후 각자 재판을 받으며 태도가 달라졌다. 이 전 사령관은 문을 부수고서라도 들어가 의원들을 끌어내란 지시를 받았다고 결국 인정했다. 여 전 사령관도 “크게 후회하고 있다. 상응하는 책임을 지겠다”면서 지난 7월 증인신문을 포기했다. 이는 정치인 체포 지시 등 윤 전 대통령에게 불리한 진술을 한 증인들과 다투지 않겠다는 의미다. 그중엔 홍장원 전 국정원 1차장도 포함된다. 싹 다 잡아들이란 지시를 받았고, 여 전 사령관에게서 이재명 등 체포 명단을 받았다는 그의 진술에 이의가 없다는 것이다. 홍 전 차장은 13일 재판에 증인으로 나온다. 윤 전 대통령이 이때도 “업무 격려 전화를 했을 뿐”이라며 계속 잡아떼다간 홍 전 차장 역시 “이런 말씀까진 안 드리려 했는데”라며 어떤 폭로를 할지 모른다.尹, 덮으려 할수록 더 큰 폭로 부를 것 의원 끌어내란 지시를 받았다고 줄곧 진술해 온 조성현 수방사 1경비단장은 최근 재판에서 이런 말을 했다. “저 또한 부하들에게 (지시가) 전파만 안 됐다면, 거짓으로 그냥 (진술) 할까 엄청 고민했다. 하지만 이미 전파가 됐고, 그게 사실이었다.” 계엄 당시 내내 켜져 있던 회의실 마이크로 대통령 지시가 부하들에게 다 전달돼 거짓말을 할 수도, 해서도 안 되는 상황이었다는 곽 전 사령관의 말과 비슷한 얘기다. 이게 냉정한 현실 인식이다. 유독 윤 전 대통령만은 12·3 계엄 이후 1년이 다 되도록 현실을 회피하고 있다. 계엄 직전 국무위원들에게 “막상 하면 별거 아니야”라고 했다던 황당한 인식에서 달라진 게 없다. 지금처럼 부하들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전략을 계속 고수한다면 재판에 불리한 건 물론, 끝까지 비겁했던 대통령으로 역사에 각인될 것이다. 이제 내년 1월이면 1심 선고가 나올 예정이다. 스스로 진실을 털어놓을 기회가 얼마 남지 않았다. 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Just Win, Baby!(그냥 이겨!)” 낸시 펠로시 전 미국 연방하원의장(민주당)은 선거에 나선 후배 정치인들에게 이 말을 자주 했다고 한다. 출마했으면 어떻게든 이기고 보라는 전투적 격려였다. 펠로시 본인의 정치 인생이 그랬다. 자녀 5명을 둔 전업주부로 살다 47세에 늦깎이로 정계에 입문한 펠로시가 이후 하원에서 근 40년 동안 내리 20선을 한 비결이기도 하다. 그는 유리천장도 모자라 ‘대리석 천장’으로 불릴 만큼 남성 중심인 미 의회에서 처음이자 유일한 여성 하원의장이었고, 그것도 두 번(2007∼2011년, 2019∼2023년)이나 했다. ▷펠로시의 야성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의 맞짱으로 주목받았다. 트럼프 1기에 대통령 탄핵안이 2차례나 하원을 통과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한 게 펠로시였다. 2020년 국정연설 중이던 트럼프 바로 뒤에서 펠로시가 보란 듯이 대통령 연설문을 북북 찢어버리는 장면은 여전히 생생하다. 펠로시는 “연설문이 거짓투성이라 어쩔 수 없었다. 다른 여러 선택지 가운데 그나마 예의 바른 대응이었다”고 했다. ▷당시 트럼프의 과격한 정책들이 실현되지 않은 건 백악관 내 ‘어른들의 축’과 함께 펠로시를 주축으로 한 민주당의 견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펠로시는 요즘도 관세 폭탄을 남발하고 초강경 이민 정책을 펴는 트럼프를 향해 “지구상 최악의 존재”라며 날을 세우고 있다. 물론 가만히 있을 트럼프는 아니다. “미친 낸시” “형편없고 역겨운 여자” 같은 원색적 비난을 수시로 한다. 수천억 원대 자산가인 펠로시를 향해 “아르마니를 입은 좌파”라고 비꼬기도 한다. ▷하원의장에서 다시 평의원으로 돌아온 펠로시는 올해 85세다. 그가 고령 리스크를 지적하며 재선 포기를 설득했던 조 바이든 전 대통령보다도 두 살 많다. 펠로시 역시 나이는 어쩔 수 없는지 내년 하원 선거에 불출마한다며 최근 은퇴를 선언했다. 이는 무슬림 출신의 30대 정치 신예 조란 맘다니의 뉴욕시장 당선 직후 나왔다. 민주당의 상징적인 세대교체라는 평가가 많다. 이번에 뉴저지 주지사와 버지니아 주지사에 각각 당선된 마이키 셰릴과 애비게일 스팬버거도 펠로시가 ‘Just Win, Baby’ 철학으로 닦아 놓은 길 위에서 정치 경력을 쌓은 워킹맘들이다. ▷트럼프는 펠로시의 은퇴 선언에 대해 “기쁘다”면서 “그는 나라에 막대한 피해를 안긴 사악한 여자”라고 했다. 아무리 앙숙이어도 40년 의원 생활을 마감하는 마당에 덕담을 건넬 법도 하지만 트럼프가 끝까지 악담을 퍼부은 건 펠로시를 혐오하는 지지층을 염두에 둔 측면도 있다. 이제 펠로시가 은퇴하면 예전처럼 트럼프를 몰아세우긴 어려워질 것이다. 트럼프 앞에서 조금도 주눅 들지 않았던 워싱턴 ‘센 언니’의 존재감이 가끔 생각날 것 같다.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휴대전화 압수수색 영장이 있더라도 비밀번호를 아는 피의자 머릿속까지 수색할 수는 없다. 그래서 수사기관이 압수한 휴대전화를 열어보려면 주인의 협조가 필요하다. 수사를 직접 해본 피의자들 중에 이 점을 이용한 사례가 종종 있었다. 한동훈 전 국민의힘 대표는 검찰 수사를 받을 때 자신의 아이폰 비번 24자리를 끝내 알려주지 않았다. 당시 검찰은 2년이 다 되도록 잠금을 풀지 못했고 결국 불기소했다. 알파벳, 숫자, 특수문자를 섞어 6자리로만 만들어도 가능한 조합이 560억 개가 넘는다고 하니 쉽지 않았을 것이다. 공수처 수사를 받았던 손준성 전 검사장도 휴대전화 비번을 밝히지 않았고, 그 역시 무죄가 확정됐다. ▷다만 피의자들이 휴대전화 비번을 정당한 사유 없이 숨기면 법원은 구속이 필요한 사유로 판단할 수도 있다. 그래서일까. 채 상병 사건 피의자 임성근 전 해병대 1사단장은 지난해 1월 자신의 휴대전화를 압수한 공수처 수사관들에게 황당한 반응을 보였다. 비번을 알려주고 싶지만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다. 압수수색 현장에서 변호인 권유로 급히 비번을 설정하느라 기억이 안 난다는 것이다. 하지만 휴대전화를 열어줄 의향이 있었다면서 20자리로 비번을 갑자기 설정했다는 건 앞뒤가 맞지 않았다. 게다가 임 전 사단장은 수중 수색을 지시하지 않았고, 구명 로비도 한 적이 없다고 했다. 그렇다면 휴대전화야말로 그의 결백을 입증해줄 결정적 증거인데 굳이 왜 잠갔는지 잘 설명이 안 된다. ▷17일 국회 국정감사에서도 비번이 기억나지 않는다던 임 전 사단장은 불과 3일 뒤인 20일 비번을 특검에 제공했다. “잊어버린 비번을 오늘 새벽 2시 30분경 기적적으로 확인했다. 하나님의 사랑과 가호를 느끼게 된 날”이라고 했다. 이날은 특검이 이종섭 전 국방부 장관 등에 대해 구속영장을 청구한 날이다. 다음 날 임 전 사단장 영장도 청구됐다. 이제라도 수사에 협조해 구속영장 발부를 피해 보려는 시도란 분석이 나왔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 덕에 비번이 생각났다는 그의 주장이 법정에서 통할지는 의문이다. ▷채 상병 특검 수사는 관련자들 주장이 하나씩 거짓으로 드러나는 과정이었다. 김태효 전 국가안보실 1차장이 ‘VIP 격노설’을 실토했고, 김건희 여사에게 구명 로비를 한 혐의를 받는 이종호 전 블랙펄인베스트 대표가 송호종 전 경호처 경호부장에게서 (임 전 사단장을) 도와달란 요청을 받았다고 시인했다. 채 상병 사건 1년 전쯤 이 전 대표와 저녁 식사를 하는데 임 전 사단장이 동석했다는 배우 박성웅 씨의 진술도 나왔다. 임 전 사단장은 이 전 대표를 전혀 모르고, 박 배우와도 식사한 적이 없다고 부인하고 있다. 하지만 또 모를 일이다. 20자리나 되는 휴대전화 비번이 번뜩 떠올랐듯 두 사람과 식사했던 기억이 기적적으로 생각나지 말란 법이 없다.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잠수함 2, 3척이 운용되는 해역에는 누구도 쉽게 침범하지 못한다는 말이 있다. ‘바닷속 유령’이라고 불릴 만큼 탐지가 어려워 적군으로선 잠수함이 어디에 있는지, 어떤 무장을 했는지 알 수 없어 도발 억제 효과가 크다.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러시아의 위협을 실감한 폴란드가 최근 심혈을 기울이는 게 바로 이런 잠수함 도입이다. 폴란드는 북쪽으로 발트해가 있는데 러시아 주력 해군 기지인 칼리닌그라드가 코앞이라 발트해를 러시아에 내주면 내륙에 갇히게 돼 위험해진다. ▷제2차 세계대전 때도 독일에 침공당한 폴란드의 마지막 자존심을 지켜준 게 잠수함이었다. 당시 독수리란 뜻의 ‘오제우(Orzeł)’로 불렸던 폴란드 잠수함이 임무 중 독일군에 억류될 뻔했다가 대원들이 극적으로 잠수함을 타고 탈출해 영국 해군에 합류했다. 이후 독일 병력 수송선을 침몰시키는 등 저항의 상징으로 부각됐다. 하지만 폴란드는 2차대전 이후 소련 체제를 거치며 잠수함이 노후화돼 지금은 쓸 만한 게 없다고 한다. ▷폴란드가 추진 중인 신형 잠수함 도입 사업인 ‘오르카(Orka) 프로젝트’는 ‘오제우’를 계승한 명칭이다. 오르카는 바다의 지능적 포식자로 유명한 범고래를 뜻한다. 강력하고 은밀한 작전 능력을 갖춘 잠수함 체계를 갖추겠다는 취지다. 3척 수주 규모가 3조4000억 원에 달하고, 유지 보수까지 포함해 8조 원 규모인 대규모 방산 사업이다. HD현대와 한화오션이 단일팀으로 수주에 나섰고, 강훈식 대통령비서실장도 무기 수출 세일즈 특명을 받고 폴란드로 출국할 예정이다. ▷한국은 2011년 인도네시아에 잠수함을 수출한 적이 있다. 당시만 해도 독일에서 전수받은 기술로 만든 것이지만 이번에 폴란드 잠수함을 수주한다면 순수 국산 기술로 세계 시장에 진출하는 첫 사례가 된다. 게다가 폴란드와 수출 계약이 체결된 K9 자주포나 K2 전차 등 육군 전력에 이어 첨단 해군 전력까지 유럽에서 인정받는 계기가 될 수 있다. 현재 폴란드는 쇼트리스트(적격 후보군) 발표를 앞둔 가운데, 60조 원 규모의 캐나다 잠수함 사업에선 우리가 독일과 함께 최종 후보군에 이미 올라 있다. ▷오르카 프로젝트에는 독일 프랑스 스웨덴 등도 뛰어들었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유럽연합(EU) 회원국들에 한국이나 미국산 대신 유럽산 무기를 사자고 촉구하기도 했다. 하지만 K잠수함의 기술력은 위협적이다. 배터리 강국답게 리튬이온 배터리를 탑재해 수중 작전 지속 시간을 획기적으로 높였고, 건조 속도는 유럽에 비해 1.5∼2배가량 빠르다. 무엇보다 한미 조선 협력인 ‘마스가’ 프로젝트를 통해 미국이 우리의 군함 건조 능력을 세계 최고로 인정한 것도 수주 경쟁에서 플러스 요인이 될 듯하다.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미국과 전 세계에서 복무하는 미군 장성은 830여 명이다. 이들이 어깨에 단 별을 다 합치면 1500개에 달한다고 한다. 지난달 30일 미국 버지니아주 해병대 기지에 이 별들이 일제히 모여들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피트 헤그세스 국방장관이 전군 장성급 지휘관 회의를 소집했기 때문이다. 4성 장군인 제이비어 브런슨 주한미군 사령관도 참석했다. ▷미 대통령과 국방장관, 전군 지휘부가 이렇게 한자리에 모이는 건 전례를 찾기 힘들다. 그 자체가 중대한 안보 위협이기 때문이다. 지휘관들이 세계 각지의 군사기지를 비워두는 것도 문제지만 군 수뇌부가 한 건물에 있으면 미국을 노리는 테러 세력에게 그만한 기회가 없다. 그런 위험까지 무릅쓰고 왜 회의가 소집됐는지 며칠 전부터 관심이 쏠렸다. 트럼프 2기 출범 후 고위 장성들이 줄줄이 해임된 걸 고려할 때 히틀러가 1934년 독일군 장군들을 모아놓고 충성 맹세를 요구했던 것과 비슷한 일이 벌어질 수 있다는 우려도 나왔다. ▷1500개의 별들 앞에 선 헤그세스 장관은 이발과 면도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턱수염과 긴 머리를 해선 안 되고, 뚱뚱한 군인들도 용납할 수 없다고 했다. 중대장이 병사들에게 할 법한 내무생활 훈시였다. 잔뜩 군기를 잡았지만 정작 본인은 예멘 후티 공습 관련 기밀 정보를 개인 메신저로 가족들에게 유출한 혐의로 조사를 받고 있다. 야전에서 잔뼈가 굵은 백전노장들은 주 방위군 소령으로 잠시 근무했던 헤그세스 장관의 정신교육을 묵묵히 들었다. 그런 얘기였으면 그냥 이메일로 보내는 게 나았을 것이라고 미 언론은 지적했다. ▷무대에서 바통을 이어받은 트럼프는 불법 이민 단속을 자화자찬하면서 장군들에게 미국 내부로부터의 전쟁에 나서자고 했다. 단속 반대 시위대를 적으로 규정하고, 민주당 지지세가 강한 뉴욕 로스앤젤레스 시카고 등 대도시들을 군대 훈련장으로 사용하라고도 했다. 트럼프는 “내 말이 마음에 안 들면 나가도 된다”면서도 “물론 그러면 당신들의 계급과 미래가 사라지겠지만…”이란 단서를 붙였다. 내 정책에 따르기 싫으면 알아서 옷을 벗으라는 경고로도 들리는 말이었다. ▷이날 회의는 트럼프와 헤그세스의 정치 토크쇼에 가까웠다. 세계 최강 군대의 지휘관들을 앉혀놓고 정신교육 하는 것 자체로 자신들의 힘을 과시하는 효과가 있을 것으로 기대한 것 같다. 하지만 트럼프 마음대로 안 된 게 있었다. 2시간이 넘는 연설 내내 830여 명의 장군들은 단 한 번도 박수를 치지 않았고 시종일관 무표정했다. 미 언론에선 사실상의 묵언 저항이란 평가도 나왔다. 트럼프가 “이렇게 조용한 방에 있는 건 처음”이라고 했을 정도다. 군 경험이 일천한 국방장관과 군 미필인 대통령의 모욕적 언사 앞에서 평정심을 지키는 게 장군들이 치른 ‘내부’와의 전쟁이었을 것이다. 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얼마 전 다리 절단 수술을 집도한 서울의 한 대학병원 의사가 겪은 일이다. 그의 70대 환자는 당뇨 합병증으로 하루가 다르게 다리가 썩어가고 있었다. 그나마 무릎 아래로 잘라 내려면 하루빨리 수술해야 했다. 하지만 환자에게 치매 증상이 있어 수술 동의를 받기 어려웠다. 큰 수술이라 보호자 동의서라도 받아야 하는데 아들은 연락 두절 상태였다. 수소문한 끝에 조카 연락처를 알아냈지만 며칠째 전화를 받지 않았다. 이러다간 절단 수술 부위가 허벅지까지 올라갈 수 있었다. 환자 담당 사회복지사까지 나선 끝에 조카와 겨우 연락이 닿았다. 그는 의료진의 읍소에 마지못해 서명하면서 앞으론 어떤 일로도 연락하지 말라고 했다.피보다 진한 사이여도 가족 아니면 불가 수술 동의서에 사인하지 않은 환자는 수술방에 들어올 수 없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병원에선 수술 동의 절차를 중시한다. 환자에게 수술 내용과 합병증을 설명하고 동의를 받는 건 의료진의 법적 의무인 동시에 의료 사고에 대비한 방어책이기도 하다. 환자가 멀쩡할 땐 직접 서명하면 되지만 응급 상황으로 의식이 없거나, 치매 등으로 판단력이 온전치 않은 때도 있다. 이 경우 보호자가 대신 서명하는데 보호자의 범위가 좁다. 부모 자식이나 배우자, 생계를 같이 하는 친족 등 민법이 규정한 가족으로 제한돼 있다. 아무리 오랜 세월 함께한 ‘피보다 진한’ 관계여도 법적 가족이 아니면 일분일초가 급할 때 해줄 수 있는 게 없다. 가족이라면 환자를 책임질 뜻이 있을 거란 전제를 깔고 있는 게 지금의 제도다. 하지만 현실은 그와 거리가 멀다. 가족과 연을 끊은 경우가 아니더라도 서명인 부재 상황은 생각보다 다양하다. 80대 치매 남편을 간병해 온 70대 여성이 얼마 전 뇌출혈로 쓰러져 수술 동의서를 받아야 했지만 자식들이 미국에 살고 있어 한걸음에 병원으로 달려온 여성의 절친들은 발만 동동 구르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고령화로 노부부가 서로를 돌보는 가정이 늘고 있어 이런 일들은 갈수록 많아질 것이다. 올해 전체 가구의 42%까지 늘어난 1인 가구는 또 어쩔 것인가. 갑자기 아프거나 위급할 때 누가 수술 동의서를 써주고 돌봐줄 것이냐는 이들의 가장 큰 근원적 공포다. 보호자가 민법상 가족에 묶여 있다 보니 웃지 못할 일들도 벌어진다. 책 ‘친구를 입양했습니다’의 저자 은서란 씨는 5년간 함께 산 친구를 딸로 입양했다. 둘 중 하나가 아플 때 도울 수 있으려면 그 방법뿐이었다고 한다. 젊은 세대는 이런 대책이라도 세우지만 1인 가구 중 가장 비중이 큰 세대는 70대 이상 노년층이다. 시대착오적인 수술 동의 제도의 직격탄을 가장 먼저 맞는 건 노인들이다. 미국이나 유럽 대부분의 국가들은 가족뿐 아니라 친한 친구도 환자 대신 의료적 결정을 할 수 있게 열어놨다. 우리 역시 환자가 친밀한 사람을 사전에 대리인으로 지정하면 수술 동의서에 서명할 수 있도록 2022년 법 개정을 시도한 적이 있다. 하지만 친분을 어떻게 입증하느냐, 의료 사고 나면 손해배상은 누가 받느냐는 등의 논란 속에 흐지부지됐다. 혼인이나 혈연관계가 아니더라도 두 성인이 합의하면 가족에 준하는 권리와 의무를 부여하자는 생활동반자법도 발의돼 있지만 동성애를 용인한다는 일각의 반대에 발목 잡혀 있다. 그사이 가족의 범위를 넓혀 서로 지탱해주는 관계를 늘리자는 본질은 흐릿해지고 있다.돌봐줄 관계 못 넓히게 막으면 모두가 피해 의료는 시간이 생명인 경우가 많다. 수술 동의서를 제때 받지 못해 골든타임을 놓치는 환자가 많아지면 당사자는 불행해지고, 의료진은 최적의 치료를 할 수 없다. 정부 역시 짊어져야 할 복지 부담이 커진다. 법률상 가족보다 더 가족처럼 지내는 사람들을 병원 밖으로 밀어내는 경직된 제도 속에선 모두가 피해자가 된다.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비만, 노화 같은 인류의 난제를 간단히 해결할 수 있다고 유혹하는 ‘의사’들 영상이 요즘 유튜브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적잖이 올라온다. “아이들 살 빼주고 싶으면 식단, 운동 말고 이것부터 하세요.” “하루에 담배 두 갑씩 피워도 폐가 신생아처럼 깨끗해요. 소변으로 싹 배출되니까.” “이거 쓰고도 기미 안 없어지면 100만 원 드릴게요.” 깔끔한 외모에 중후한 말투로 특정 약품이나 건강기능식품의 효능을 강조한다. 흰 가운이나 수술복 차림인 이들에겐 ‘S대 출신 소아비만 전문의’ ‘강남 E산부인과 배OO 원장’ 같은 자막이 따라붙는다. 권위 있는 의사인 듯 보이지만 인공지능(AI)으로 만든 가짜 의사들이다. ▷초기엔 표정이 어색하고 로봇 같은 목소리에 가짜인 게 금방 티가 났다. 하지만 AI가 계속 고도화되면서 세상에 없던 인물을 찍어내는 능력도 정교해져 병원에서 흔히 볼 법한 의사처럼 감쪽같아졌다. 요즘엔 챗GPT 등에 명령어 입력 요령을 가르치는 프롬프터 학원까지 생기고 있는데 이런 강의 한두 번이면 누구나 그럴듯한 가짜 의사를 만들어낼 수 있다고 한다. 영상 대본도 AI가 전문의 냄새 풀풀 나게 대신 써준다. ▷가짜 의사들은 10kg 이상 쭉쭉 빠지는 다이어트 약이나 아이들 키가 쑥쑥 자라게 해주는 보조식품 같은 걸 광고하는데 실제 효과는 거의 없다고 한다. 솔깃한 얘기일수록 의학적으론 터무니없는 허위 정보일 가능성이 높다는 게 전문가들 지적이다. 유해성 검증이 안 된 약품도 많아 절박한 처지의 난치병 환자들이 섣불리 썼다간 병이 악화될 위험도 있다. 최근 대한의사협회는 AI 가짜 의사들과의 전쟁을 선포하고 피해 사례 수집에 나섰다. ▷의료인은 이 제품 좋으니 믿고 쓰라고 홍보하는 것 자체가 법으로 금지돼 있다. 하지만 AI로 생성한 의사는 사람도 아니고 의료인도 아니어서 처벌하기 어렵다. 최근 법원에서 AI로 성인 음란물을 만들어 유포한 남성에 대해 영상 속 여성이 실존하는지 알 수 없다면서 무죄를 선고한 게 비슷한 사례다. 가짜 의사를 약품 광고에 활용한 업체라도 찾아서 책임을 물어야 하는데 이런 영상들은 알고리즘을 타고 노출됐다가 금방 사라져 버린다. 치고 빠지기식으로 소비자를 유인해 빠르게 제품을 팔아치운 뒤 구매 페이지를 폐쇄하는 경우도 많아 추적이 쉽지 않다. ▷누구나 AI의 힘을 빌려 전문가 흉내를 낼 수 있게 되면 진짜와 가짜가 모호해지는 불신의 시대가 열린다. AI 덕에 시간을 많이 단축하게 됐지만 뒤탈을 피하려면 의심하고 확인하는 데 손품 발품을 팔아야만 한다. 시간을 아낀 만큼, 안 써도 될 시간을 새로 내야 하는 것이다. 기술이 발전할수록 악용하는 이들이 많아지고 그걸 걸러내야 하는 수고가 뒤따르니 노력의 총량은 결국 불변하는 것 같다. 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화가는 내 작품을 보면 1분도 안 돼 바로 안다. 전부 내 작품이 맞다.” 이우환 화백이 2016년 프랑스에서 날아와 서울경찰청에 압수된 작품 13점을 확인한 뒤 기자들에게 한 말이다. 당시 경찰은 이 화백의 그림 위작을 유통시켜 온 일당을 검거해 수사 중이었다. 위작범들이 “내가 그린 가짜”라고 하는데 이 화백은 “채색, 호흡, 리듬 모두 내 것이다. 그건 지문과 같아서 베낄 수가 없다”며 진품 주장을 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결국 판정은 법원이 했다. 감정 결과와 위작범들 자백을 근거로 일부 작품에 대해 위작이라고 판결했다. ▷천경자 화백의 ‘미인도’ 사건은 그와 정반대다. 1990년 국립현대미술관이 전시했던 이 작품을 두고 위작 논란이 일자 감정기관들이 진품으로 판정했는데 천 화백이 반발했다. 그는 “내 작품이 아니다. 자기 자식도 못 알아보는 부모가 어디 있느냐”고 했다. 작가만큼 진품을 잘 알아볼 사람이 있을까 싶지만 꼭 그런 건 아니다. 해외 거장들이 진품이라고 확인해 준 작품들 중 위작으로 밝혀진 사례가 없지 않다. 진품 감정은 인공지능(AI)도 아직 못하는 초고난도 작업이다. ▷미술품 감정은 전문가의 경험, 직관을 통한 안목 감정과 X-레이 등 과학적 기법으로 하는 객관적 감정이 있다. 감정가의 경륜에만 기대기엔 실력이 제각각이고, 과학적 감정에도 한계가 있다. 국내 미술품 감정은 한국고미술협회, 한국화랑협회, 한국미술품감정연구센터 등 민간에서 한다. 감정가들이 화랑 관계자나 교수, 작가여서 업계와의 이해관계로부터 완전히 자유롭긴 어렵다. 감정위원 명단은 로비 우려 탓에 비공개되고, 전문가들 사이에 공통된 감정 기준도 정립되지 않았다고 한다. ▷김상민 전 검사가 김건희 여사에게 2024년 총선 공천 대가로 건넨 혐의를 받는 이 화백 그림은 진위 판단이 엇갈렸다. 한쪽은 대만 경매에 처음 나왔을 때 수백만 원에 불과했던 그림이 이후 주인이 바뀌며 가격이 30∼40배나 뛰어 위작 가능성이 높다고 봤다. 반면 해당 그림에 진품 감정서를 발급했던 기관은 최초 경매에서 작가의 명성이나 작품 가치를 잘 모르고 헐값에 나왔을 가능성이 있고, 실제 싼값에 나왔던 대가의 작품이 추후 재발견되는 사례가 있다고 했다. ▷이 화백은 요즘도 작품 활동을 하고 있어 특검에 진위에 대한 의견을 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걸로 정리되긴 어려워 보인다. 중요한 건 김 전 검사가 1억4000만 원 현금을 주고 그림을 샀다는 사실이다. 그는 “김 여사 오빠 돈으로 대신 구매한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적어도 이 화백이 그린 진품이라고 믿고 샀다는 점만큼은 분명하다. 만약 인사 청탁 목적으로 억대의 그림을 사준 것으로 확인된다면 진품이든 위작이든 매관매직의 죄가 가벼워지진 않는다.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영치금이 풍족하면 감방 생활의 질이 달라진다고 교정시설 경험자들은 말한다. 세수할 때 누구는 비누를 쓰는데 누구는 폼클렌징으로 씻고, 겨울에도 누구는 모포 한 장으로 버티는가 하면 두툼한 극세사 이불을 덮는 수형자도 있다. 이런 차이를 만드는 게 영치금이다. 그래서 수감자들 세계에선 영치금이 두둑한 이들이 ‘범털’(재력과 권력을 가진 수형자)로 통한다. 반면 영치금 계좌가 비어 있는 재소자들은 ‘법자’(법무부의 자식)라면서 자조한다고 한다. ▷그렇다고 재소자가 영치금을 무한정 받을 수 있는 건 아니다. 국가가 제공하는 기본 의식주 외에 필요 물품을 최소한으로만 구입할 수 있다. 돈 쓸 자유를 제한하는 것도 처벌의 일환이고, 수용자들 간 위화감을 조성할 수 있어 상한선을 두고 있다. 수감 기간 중 보유할 수 있는 영치금은 400만 원을 넘을 수 없다. 음식물 사는 데 쓸 수 있는 돈도 하루 최대 2만 원이다. 옷, 신발, 의료용품 등은 액수 제한이 없다. ▷구치소에선 400만 원 넘는 돈은 쓸 수도 없는데 윤석열 전 대통령이 받은 영치금은 3억1000만 원에 달한다. 재구속된 7월 10일부터 지난달 말까지 약 50일간 받은 돈이 그 정도다. 전국 교정시설 수감자 6만여 명 중 압도적 1위다. 조국 전 조국혁신당 대표의 부인 정경심 씨도 2억4000만 원의 영치금을 받은 적이 있지만 2년간 누적액이어서 윤 전 대통령에게는 한참 못 미친다. ▷윤 전 대통령이 처음 구속됐던 올 1∼3월만 해도 영치금은 450만 원이 전부였다. 김건희 여사가 50만 원, 장모 최은순 씨가 100만 원을 보냈다. 재수감 이후 영치금이 크게 불어난 건 김계리 변호사와 전한길 씨가 영치금 계좌를 알리면서부터다. 이들은 등록 재산이 거의 80억 원인 윤 전 대통령을 두고 “창졸지간에 돈 한 푼 없이 들어가셔서 아무것도 못 사고 계신다” “고독한 옥중 투쟁을 하고 있다”며 모금을 호소했다. 그러자 ‘윤 어게인’ ‘계몽시켜줘 감사하다’는 등의 메시지와 함께 3억 원이 넘게 모였다. 사실상 윤 전 대통령을 향한 정치적 후원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윤 전 대통령은 지지자들이 보내주는 돈으로 보관 한도인 400만 원이 채워질 때마다 개인 계좌로 옮겼다. 구치소에서 생필품이나 간식 등을 사는 데 쓴 돈은 200만 원 정도다. 나머지 대부분은 ‘변호사비 및 치료비’ 명목으로 출금됐다고 하는데 실제 그 용도로 얼마나 쓰였는지는 알 수 없다. 윤 전 대통령이 영치금을 외부로 이체한 횟수는 50일간 80여 차례에 달한다고 한다. 수사와 재판을 모두 거부하고, 체포영장 집행에도 불응하던 그가 영치금 관리만큼은 하루에도 몇 번씩 꼬박꼬박 하는 것 같다.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미국 대통령 집무실인 백악관 ‘오벌 오피스’는 트럼프 취임 후 외국 정상들에게 부담스러운 무대가 됐다. 그곳에서 트럼프는 상대국 정상을 옆에 앉혀놓고 일장 훈계를 하거나 면박 주는 걸 마다하지 않는다. 우크라이나와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이 TV로 중계되는 가운데 그런 ‘봉변’을 당했다. 그래서 미국 방문을 앞둔 정상들로선 트럼프 다루는 법을 예습하지 않을 수 없다. ‘압박에 말려들지 말라’ ‘원하는 선물을 안겨라’ ‘칭찬은 기본, 필요하면 아부하라’는 게 핵심 내용이다. ▷백악관을 찾은 해외 정상은 오벌 오피스에 가기 전 바로 옆 ‘캐비닛 룸’에 먼저 들러 방명록을 쓴다. 이재명 대통령도 25일 한미 정상회담 때 이곳에 들렀다. 이 대통령이 방명록 쓰는 동안 트럼프가 뒤에서 유심히 바라본 물건이 있었다. 한국 장인이 두 달간 원목을 깎아 만든 이 대통령의 만년필이었다. “펜이 멋지다. 그거 도로 가져갈 건가”라며 관심을 보이자 이 대통령은 즉석에서 선물하며 “평소 하시는 어려운 서명에 유용할 것”이라고 했다. 트럼프의 서명은 ‘지진계 그래프 같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크고 길고 복잡하다. ▷이 대통령이 애초에 챙겨 간 선물은 금빛 거북선이었다. 국내 최대 조선사인 HD현대의 기계조립 명장이 만든 모형이다. 한국의 조선 기술력을 보여주는 동시에 ‘마스가(미국의 조선업을 다시 위대하게)’ 프로젝트의 성공을 기원한다는 뜻을 담았다. ‘골프광’ 트럼프를 위해 그의 체격과 퍼팅 자세를 연구해 골프 퍼터도 만들어 갔다. 트럼프 이름과 함께 대통령 역임 차수인 45, 47도 새겨 넣었다. ▷회담에선 트럼프 맞춤형 칭찬 공세가 이어졌다. 이 대통령이 한반도 평화와 관련해 “트럼프 대통령이 ‘피스메이커’를 하면, 저는 ‘페이스메이커’로 열심히 지원하겠다”고 하자 환호가 터져 나왔다. 그간 트럼프에게 노벨 평화상 수상을 언급하며 환심을 사려 한 정상들은 많았다. 이 대통령은 막연한 립서비스 대신, 노벨 평화상 수상의 관건이 될 수 있는 북핵 문제 해결의 주도권을 행사할 것을 청한 것이다. 트럼프는 “이 대통령은 정말 훌륭한 지도자다. 미국의 전적인 지원을 받게 될 것”이라고 화답했다. ▷상대가 원하는 걸 주고 내가 원하는 걸 얻어내는 게 외교라면 선물과 칭찬은 아낄 일이 아니다. ‘선물 외교’는 각국이 소프트파워를 과시할 기회이기도 하다. 트럼프가 집무실에서 정상들을 만날 때마다 자랑한다는 ‘결단의 책상(Resolute Desk)’은 1880년 영국 빅토리아 여왕이 당시 미 대통령에게 선물한 것이다. 일본이 100여 년 전 선물로 가져온 벚꽃 나무는 지금도 워싱턴의 봄을 수놓는다. 요즘처럼 관세 협상으로 거센 파도가 치는 때라면 트럼프의 마음을 정확히 읽은 선물이야말로 가장 가성비가 높은 외교일 수 있다.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1기 행정부 때 참모들에게 얼마나 조롱 대상이었는지는 존 볼턴 당시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의 회고록 ‘그 일이 일어난 방(The Room Where It Happened)’에 잘 묘사돼 있다. 존 켈리 백악관 비서실장은 갓 부임한 볼턴에게 “내가 얼마나 필사적으로 여기서 빠져나가고 싶은지 상상할 수 없을 것”이라고 귀띔했다고 한다.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도 무대 뒤에선 “트럼프는 허풍쟁이”라고 비하하곤 했다. 볼턴 역시 트럼프에 대해 “제멋대로 구는 무식쟁이”라고 썼다. ▷트럼프가 볼턴을 안보보좌관에 기용할 때만 해도 둘 사이는 돈독했다. 1기 행정부 초기 ‘어른들의 축’으로 불리던 참모들이 트럼프의 충동적 외교 정책에 번번이 제동을 걸자 그 대안으로 불러들인 게 강경 매파인 볼턴이었다. 볼턴은 수시로 트럼프와 독대하고 각국 정상회담 때마다 배석하던 최측근이었다. 그랬던 볼턴이 트럼프와의 불화 끝에 경질된 후 작심하고 쓴 회고록이었기에 파장이 컸다. 게다가 출간 시점이 미 대선을 불과 5개월 앞둔 2020년 6월이었다. 트럼프는 기밀 누설로 감옥에 갈 수 있다고 경고했지만 출간을 막진 못했다. ▷그 경고대로 미 법무부는 볼턴을 제소했다. 하지만 조 바이든이 당선되면서 수사는 종결되고 소송도 취하됐다. 출간을 둘러싼 소동이 그렇게 끝나는 듯했지만 4년 뒤 트럼프가 재집권하면서 다시 반전됐다. 연방수사국(FBI)은 최근 볼턴의 자택을 기밀 정보 유출 혐의로 압수수색했다. 볼턴은 며칠 전에도 미-러 정상회담을 앞두고 “트럼프가 푸틴에게 이용당하고 있다”고 지적했고, 이에 트럼프는 “저급하고 비애국적인 인물”이라며 비난했다. ▷이 수사를 지휘하는 캐시 파텔 FBI 국장은 ‘친(親)트럼프’ 인사다. 2023년 ‘정부의 깡패들(Government Gangsters)’이란 책을 내 트럼프의 눈에 들었다. 책에는 ‘행정부의 딥스테이트 회원들’이란 제목의 60명 명단이 실렸다. ‘딥스테이트’는 트럼프가 자신의 국정 운영을 방해하는 엘리트 관료 집단을 지칭해 써온 말이다. 그 60명 중 한 명이 볼턴이다. 함께 언급된 제임스 코미 전 FBI 국장, 존 브레넌 전 중앙정보국(CIA) 국장 등 4명도 수사를 받고 있다. 명단에는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 등 민주당 인사들뿐 아니라 트럼프 밑에서 일하다 갈등을 빚었던 참모들이 대거 포함됐다. ▷명단 속 60명 중 5명이 수사를 받게 되자 트럼프의 정적을 추린 블랙리스트란 평가가 나온다. 더구나 명단 작성자가 FBI 수사를 지휘하고 있다. 명단에 오른 사람들로선 긴장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배신하면 가만두지 않는다는 전례를 만드는 셈이어서 지금의 트럼프 참모들에겐 충성심이 흔들려선 안 된다는 위협처럼 느껴질 것 같다.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문재인 정부의 임기 반환점이던 2019년 말은 윤석열 당시 검찰총장과 여권의 갈등이 극에 달하던 때였다. 조국 일가에 대한 수사로 정권과 대립각을 세우던 윤 총장은 그 와중에 울산지검에서 맡고 있던 한 사건을 서울중앙지검으로 가져와 대대적인 수사를 예고했다. 2018년 지방선거에서 청와대가 대통령의 30년 지기인 송철호 후보를 울산시장에 당선시키기 위해 경쟁 후보인 국민의힘 김기현 의원에 대해 ‘하명 수사’를 지시하는 등 개입했다는 의혹이었다. ▷이 사건은 윤 당시 총장이 중용했던 검사들에게 맡겨졌다. 그 후 3개월 만에 수사팀은 송 전 후보가 황운하 당시 울산경찰청장에게 상대 후보인 김 의원에 대한 수사를 청탁했고, 청와대 백원우 민정비서관과 박형철 반부패비서관이 비리 첩보를 경찰에 내려보내 수사하도록 했다며 이들을 기소하려 했다. 기소 여부를 놓고 서울중앙지검에서 의견이 엇갈리자 윤 당시 총장이 직접 나서 기소를 진행시켰다. ▷3년 10개월 만에 나온 1심 판결은 유죄였다. 재판부는 송 전 후보와 황 전 청장에게 징역 3년 실형을 선고하며 “경찰과 대통령비서실의 공적 기능을 사적으로 이용해 선거에 개입한 행위는 죄책이 무겁다”고 판시했다. 여타 피고인들도 유죄를 선고받았다. 하지만 올 2월 2심에서 무죄로 뒤집혔다. 서울고법은 유죄가 의심되긴 하지만 하명 수사를 지시했다는 직접 증거가 없고, 1심에서 핵심 증거로 인정했던 증언에 신빙성이 떨어진다고 판단했다. ▷그 증언은 송 전 후보 선거 캠프에 참여했던 더불어민주당 관계자의 진술이었다. 그는 송 전 후보에게서 김 의원 관련 수사를 자신이 황 전 청장에게 청탁했다는 말을 들었다고 1심에서 증언했다. 하지만 2심은 이 말을 믿기 어렵다고 했다. 그가 일부 진술을 번복했고, 구체적인 상황은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으며, 이를 확인하기 위해 2심 재판부가 3차례 소환했지만 출석을 거부했다는 이유였다. 대법원은 14일 최종 무죄를 확정지었다. 핵심 증언이 흔들린 게 결정적이었던 셈인데, 검찰이 그 진술 외엔 유죄를 입증할 다른 증거를 확보하지 못한 채로 기소했다는 뜻이 된다. ▷무분별한 검찰권 행사로 인한 피해를 감안하면 수사와 기소는 최대한 신중해야 한다. 그러나 당시 수사라인은 갈등을 빚던 정치 권력을 향해 칼을 뽑아 들듯 수사를 했고, 한 사람의 진술 증거를 앞세워 기소했다는 비판에 직면해 있다. 검사는 공소장으로 말한다고 하는데 5년 7개월간의 재판 끝에 대법원은 이번 사건 공소장에 큰 구멍이 있었던 것으로 결론지었다. 그 결과 “정치적 수사가 아니었느냐”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게 됐다. 당시 검찰총장과 수사 검사들은 무리한 기소로 오랜 기간 고통받았을 피고인들에게 이제라도 미안함을 느껴야 할 것이다.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1936년 8월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한 손기정 선수는 시상식 직후 일본 측이 마련한 격려 만찬에 가지 않았다. 대신 베를린의 한 두부 공장으로 향했다. 교민 10여 명이 조촐한 축하 파티를 열어줬다. 음식이라곤 공장에서 만든 두부와 김치가 전부였다. 공장 벽엔 태극기가 걸려 있었다. 조금 전 시상식에서 가슴의 일장기를 월계수로 가렸던 손 선수는 그날의 소회를 훗날 자서전에 적었다. “잃었던 조국의 얼굴을 대하는 것 같아 몸이 부르르 떨렸다. 감시의 눈을 피해 태극기가 살아 있듯 우리 민족도 살아있단 확신이 들었다.” 그 두부 공장의 주인은 안중근 의사의 사촌 동생 안봉근이었다. ▷승전보를 안고 돌아온 24세 청년은 방송에서 일본을 찬양하는 인터뷰를 강요당했다. “저는 손기정입니다. 이 승리는 내 개인의 승리가 아니라 일본 국민의 승리라고 하겠습니다.” 그의 유품인 한 음반에 이런 육성이 담겨 있었는데 “크게 읽어, 크게 읽어”라고 지시하는 목소리가 함께 녹음됐다. 손 선수의 당시 인터뷰는 말한 것이 아닌 읽은 것이었다. ▷그해 베를린 올림픽 주경기장엔 ‘승리자의 벽’이 들어섰다. 메달리스트들의 이름과 국적이 하나하나 새겨졌다. 손 선수는 ‘마라톤 우승자 일본인 손’으로 각인됐다. 그 후 국제올림픽위원회(IOC) 홈페이지에도 국적은 일본, 이름은 기테이 손(Kitei Son)으로 등재됐다. 우리 국회와 체육계의 줄기찬 수정 요구에도 달라지지 않았다. IOC는 손 선수를 바꿔주면 식민 지배를 겪은 다른 국가들도 줄줄이 수정을 요구할 수 있다며 난색을 표했다. ▷40여 년에 걸친 끈질긴 설득에 IOC도 결국 화답했다. 최근 홈페이지 선수 명부에서 손 선수의 일본식 이름 바로 아래 본명과 한국 국적이 병기된 것이다. 출전 당시 강제로 일본 국적과 이름을 써야만 했다는 점도 명시됐다. 소개 글에는 손 선수가 베를린 올림픽에서 한국 이름으로 서명했고, 출신국을 묻는 질문에 한국이라고 답하며 별개의 나라라고 강조했다는 설명이 담겼다. 손 선수와 나란히 출전해 동메달을 땄던 남승룡 선수도 일본식 이름 ‘쇼류 난(Shoryu Nan)’ 아래에 본명과 한국 국적이 병기됐다. ▷2002년 별세한 손 선수는 “나를 기억하게 해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강요된 국적과 이름을 걷어내고 한국인 손기정으로 기록되기를 그만큼 염원했다. 김구 선생은 1946년 8월 손기정 우승 10주년 행사에서 “나는 손 군 때문에 세 번 울었다”면서 이런 말을 했다. “그의 우승 소식에 감격해서 울었고, 헛소문이지만 그가 일본군이 되어 전사했다는 소식에 슬퍼서 울었고, 광복 후 그와 다시 만나 기뻐서 울었다.” 김구 선생이 살아있었다면 손 선수가 89년 만에 제 이름을 되찾은 게 후련해서 또 울었을 것이다.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채 상병 수사 외압 사건 피의자인 이종섭 전 주호주 대사에 대해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가 출국금지를 했던 2023년 12월 8일 대통령실과 외교부는 바쁘게 움직였다. 이 전 대사에게 주호주 대사 내정 사실이 전달된 것도, 부임 1년도 안 된 김완중 당시 대사에게 교체 방침이 통보된 것도 그날이다. 하루 전엔 이원모 전 대통령실 비서관이 외교부에 새 대사 임명을 준비하라고 지시했다는 진술을 최근 특검이 확보했다고 한다. 통상 수사기관이 피의자를 출금할 땐 도주 가능성에 대비해 은밀히 진행한다. 이런 밀행성이 이 전 대사 출금에선 지켜지지 않은 정황이 많다. ▷출금 한 달 뒤인 지난해 1월 이 전 대사에 대한 외교부의 공관장 자격심사위원회가 열렸는데 이때도 황당한 일이 벌어졌다. 행정안전부 공무원 등 10명의 위원으로 구성된 심사위는 대사 후보자의 업무 능력과 도덕성을 검증한다. 부적격 결정이 나오면 내정 취소다. 위원 7명 이상이 출석해야 하는데 이 전 대사에 대해선 대면 회의 없이 서면으로만 진행됐다. 게다가 서류엔 이미 ‘적격’으로 적혀 있고, 부적격 의견을 낼 공란 자체가 없었다고 한다. ‘답정너’ 심사표를 받은 위원들은 빈칸에 서명만 했다. ▷심사 당시 이 전 대사는 공수처가 출국을 막아 놓은 상태였다. 대사가 해외에 나갈 수 없으니 ‘적격’일 수 없는 후보자였다. 그럼에도 대통령실은 임명을 강행한 뒤 법무부를 통해 출금까지 해제해줬다. 임명 전엔 출금 사실을 몰랐다고 하지만 믿기 힘든 얘기다. 수사기관의 출금 요청을 승인하는 부처가 다름 아닌 법무부다. 또한 대사 임명 전 출입국에 문제가 없는지, 수사 대상인지도 확인하도록 돼 있다. ▷졸속 심사를 거쳐 호주에 부임한 이 전 대사는 11일 만에 귀국했다. 지난해 3월 말 총선을 앞두고 ‘런종섭’ 사태가 최대 악재로 부상하자 그의 귀국을 위한 회의가 급조된 것이다. 방산 협력을 내세워 호주, 사우디아라비아, 폴란드 등 6개국 공관장만 급히 불렀는데 이렇게 특정 공관장들만 국내로 소집한 전례가 없다. 이 전 대사는 회의 다음 날 비판 여론에 떠밀려 사임했다. 대사 재임 기간이 3주도 안 된다. 호주에선 “외교적 신뢰 훼손”이란 비판이 일었다. ▷대사 임명을 둘러싼 넉 달간의 소동의 배후는 한 사람을 가리킨다. ‘VIP 격노’가 있었던 회의 도중 이 전 대사에게 ‘02-800-7070’으로 전화했던 윤석열 전 대통령이다. 조태용 전 국가정보원장은 윤 전 대통령이 이 통화에서 당시 국방부 장관이던 이 전 대사를 질책했다고 특검에 진술했다고 한다. 윤 전 대통령의 수사 외압 여부를 잘 아는 이 전 대사를 빼돌리기 위해 공관장 심사위원들을 거수기로 만들고 공수처의 출금 조치를 무력화시켰다는 의심을 지우기 어렵다. 대통령 한 사람의 격노에 국가 시스템이 이처럼 허망하게 무너져선 안 된다.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취임 한 달 만인 올 2월 이민세관단속국(ICE) 국장을 경질했다. 불법 체류자 단속 부진이 이유였다. 연간 100만 명 추방 공약을 달성하려면 하루 3000명씩 내보내야 하는데 크게 못 미친 것이다. 조 바이든 정부 때 하루 추방 인원은 그의 4분의 1 수준이었다. 반이민 정책 설계자인 스티븐 밀러 백악관 부비서실장은 “기존 단속 관행을 버려라. 그냥 나가서 체포하라”고 ICE를 다그쳤다. ▷단속의 불똥은 한인들에게 튀고 있다. 미 한인 성직자의 딸이 최근 ICE 요원들에게 기습 체포됐다. 미 퍼듀대 재학생 고연수 씨(20)가 뉴욕 이민법원에서 나오던 길에 벌어진 일이다. 고 씨는 4년 전 어머니를 따라 종교인 가족 비자로 입국했고 올해 말까지 체류 자격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모친이 교회를 옮기면서 비자 문제가 생겼고, 고 씨까지 비자 취소 통보를 받았다. 이 문제를 해결하러 법원에 갔다가 체포된 것이다. ▷요즘 미 이민법원에선 실적 압박을 받는 ICE의 함정 단속이 성행한다고 한다. 영주권 심사, 비자 갱신 등을 위해 이민자나 유학생이 몰리는 곳에 숨어 있다가 영장도 없이 낚아챈다는 것이다. 법원에 가야 소명을 할 텐데 무서워서 못 갈 판이다. 지난달에는 동생 결혼식을 위해 한국에 방문했다가 귀국하던 한국 국적 40대 과학자가 미 공항에서 체포됐다. 그는 35년 거주한 미 영주권자이자 텍사스A&M대 박사과정생이다. ICE는 구금 사유도 알리지 않고 있다. 가족들은 14년 전 소량의 대마초를 소지했다가 경범죄로 기소됐던 전력을 문제 삼은 것 아닌지 불안해하고 있다. ▷미 불법 이민자 1100만 명 중 한국계는 15만 명(1.4%)으로 추정된다. 유학 또는 관광 비자로 갔다가 시민권이나 영주권을 얻지 못한 채 계속 머무는 경우가 많다. 합법적으로 입양됐지만 양부모가 국적 신청을 제때 안 한 한인 입양인도 2만 명에 달한다. 이들 대부분 체류 자격이 없을 뿐 성실히 생계를 꾸려가는 사람들이다. 이민 당국도 이들까지 문제 삼진 않았지만 이젠 달라졌다. 학교 병원 교회는 ‘민감 구역’으로 지정해 단속을 자제하던 원칙이 사라졌고 로스앤젤레스 등 민주당 소속 단체장이 집권해 불법 체류자에 관대한 ‘피난처 도시’들이 공략 대상이 됐다. ▷트럼프는 ‘살아선 탈옥할 수 없는 감옥’으로 악명 높은 앨커트래즈 교도소를 모델로 불법 체류자 수용소를 만들었다. 악어 떼로 둘러싸인 플로리다의 늪지대에 ‘악어 교도소’를 세웠다. 수감자들은 자진 출국 서류에 서명할 때까지 나갈 수 없다. 그들 중엔 범죄 기록이 없는 이민자들이 적지 않고, 10대 청소년도 있다고 한다. 트럼프의 ‘불법 체류자 사냥’이 계속된다면 머잖아 악어 교도소에 한인이 갇혔다는 소식이 들려올 수도 있다.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