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광영

신광영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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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신광영 논설위원입니다.

neo@donga.com

취재분야

2026-01-09~2026-02-08
칼럼100%
  • [오늘과 내일/신광영]좋은 판결은 과거도 보고 미래도 본다

    내란 사건과 김건희 여사 사건의 판결이 하나둘 나오고 있다. 법정엔 검사들이 있지만 이들은 국민 한 명 한 명의 대리인일 뿐이다. 만약 12·3 계엄이 성공했다면, 그래서 김 여사가 지금도 매관매직을 일삼고 국정을 주무른다면 최대 피해자는 국민일 수밖에 없다. 재판의 당사자로서 판결을 판단할 권리가 국민 각자에게 있다. 앞으로도 줄줄이 이어질 재판을 우리는 어떻게 관전해야 할까.입법자들이 상상도 못 했던 초유의 사건들 법관은 판결할 때 사후적 관점과 사전적 관점을 함께 고려한다고 한다. 미국의 법학자 워드 판즈워스가 쓴 책 ‘법은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나오는 대목이다. 과거에 벌어진 일을 공정하게 따져 죄에 걸맞은 책임을 지우는 게 사후적 접근이라면, 사전적 접근은 미래에 유사한 범죄를 예방하기 위해 판결로써 바람직한 규칙을 선언하는 것을 뜻한다. 두 관점이 균형을 이룰 때 판결은 설득력을 갖는다. 단순 절도범에게 경각심을 주겠다며 이례적 중형을 선고하면 억울한 피고인들이 생기고, 횡령을 저지른 기업인에게 집행유예를 남발하면 횡령해도 남는 장사라는 잘못된 신호를 주게 된다. 그런 점에서 한덕수 전 총리 1심 판결은 어떨까. 재판부는 한 전 총리가 국무회의를 소집해 계엄에 합법적 외관을 씌워주고, 국정 2인자로서 견제의 의무를 저버린 죄를 무겁게 봤다. 23년형이 선고된 것에 대해선 응분의 죗값이란 의견과 함께, 내란 모의에 관여하거나 주도적으로 가담한 것도 아닌데 너무 가혹한 거 아니냐고 보는 시각도 있다. 하지만 사전적 관점에서 보면 울림이 큰 판결이 아닐 수 없다. 나라가 위태로워질 걸 알면서도 불의에 동조하는 기회주의적 공직자에게 어떤 후과가 돌아오는지, 고위 공직에 오를 사람은 얼마나 무거운 책임을 각오해야 하는지를 선명히 보여줬다. ‘제2의 한덕수’를 막는 효과가 강력할 것이다. 김 여사 사건 1심 재판장은 선고에 앞서 의심스러울 땐 피고인에게 유리하게 판단하고, 권력자든 아니든 차별이 없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어떤 경우에도 예외 없이 적용돼야 할 중요한 원칙이다. 재판부가 도이치모터스 주가 조작과 명태균 관련 혐의를 무죄로 본 것도 사건 기록을 다 보고 심사숙고한 법관의 판단이 존중돼야 한다. 불만이 있더라도 2심, 3심까지 지켜보는 게 우리의 사회적 합의다. 다만 김 여사가 통일교로부터 숙원 사업을 도와주는 대가로 그라프 목걸이와 샤넬백 등 7000만 원이 넘는 금품을 받은 사실이 인정됐음에도 형량은 징역 1년 8개월에 그쳤다. 알선수재죄 법정형이 5년 이하 징역이고 통상적인 선고 범위에 있다고 하더라도 이런 판결은 대통령 배우자가 국정을 농단하고 뒷돈을 챙긴 죗값이 고작 1, 2년 감옥살이라는 메시지로 발신된다. 법의 단죄가 이 정도라면 ‘V0’란 존재의 해악에 충분한 경종이 될지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제2의 한덕수, 제2의 V0 막는 판결이어야 솜방망이 판결을 탓할 게 아니라 이런 상황에 대비해 미리 법을 고쳐놓지 그랬냐고 할 수도 있다. 사법부는 이미 벌어진 일을 다루고, 입법부는 앞으로 벌어질 일을 다루기로 역할 분담을 한 건 맞지만 그 경계가 늘 명확하진 않다. 국회가 모든 구체적 상황을 상정해 법을 만들 순 없기 때문에 법관이 개별 판결을 통해 공동체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기도 한다. 더구나 위로부터의 내란과 영부인의 국정 사유화는 입법자들의 상상력을 훌쩍 뛰어넘는 초유의 사건이다. 참고할 만한 판례도 거의 없다. 그렇다면 지금의 재판은 처음 가보는 길을 통해 질서를 바로 세우는 과정일 수밖에 없다. 입법의 미비와 판례의 부재를 핑계 삼아 법관이 뒤로 숨어선 안 되는 시기인 것이다. 과거를 공정하게 돌아보면서도 미래에 정의로운 선례를 남기는 판결이 나와야 한다.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 1일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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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신광영]고소득 전문직부터 대체하는 AI

    “사건 기록을 보고 고소장을 작성해보세요. 챗GPT보다 잘 써야 통과입니다.” 요즘 로펌 채용 면접장에선 신입 변호사들이 인공지능(AI)과 일전을 치러야 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고 한다. 로스쿨을 갓 나온 변호사보다 AI가 일을 더 잘한다는 평가가 나오면서 벌어지는 현상이다. 판례 분석은 물론이고, 변호인 의견서나 계약서 작성까지 웬만한 건 AI가 척척 해준다는 것이다. 로펌 업무에 특화된 AI 서비스까지 나오고 있어 월 500만 원에 초짜 변호사를 고용하느니 월 10만 원대 구독료로 AI를 쓰는 게 낫다는 얘기도 나온다. ▷최근 미국에서 열린 전미경제학회에선 “앞으로 법조계는 진로로 정하지 말라”는 말이 충격을 안겼다. 다름 아닌 미 노동통계국장의 경고다. 로펌들이 기본 업무를 AI에게 맡기고 있어 더 이상 신입 변호사를 뽑지 않는다는 것이다. ‘앤스로픽’ 같은 AI 기업들도 계약서 검토나 소장 작성 등 변호사 기능을 탑재한 서비스를 속속 내놓고 있다. ▷회계사 업계는 ‘AI 비상사태’가 더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규칙에 따라 데이터를 정리, 분석하는 회계사 업무는 빅테이터에 강한 AI가 특히 위력을 발휘하는 분야다. 예전엔 주니어 회계사 여러 명이 달라붙어 하던 일도 베테랑 회계사 1명과 AI의 조합이면 충분하다고 한다. 전문직도 초임 땐 선배의 손발 역할을 하며 일을 배우는데 그런 조수 업무는 AI로 충분해 신입이 설 자리가 좁아지는 것이다. 그 결과 국내 ‘빅4’ 회계법인에서 지난해 채용한 신입 회계사는 몇 년 새 30% 넘게 줄었다. 공인회계사 시험에 합격하고도 실무교육 받을 곳을 구하지 못한 청년 회계사들은 정부에 선발 인원을 줄이라며 요즘 시위를 벌이고 있다. ▷의사 역시 AI 시대에 안전한 직업이 아니다. 엑스레이 등 영상 판독에선 AI가 의사보다 정확하다는 평가가 많고 빅테크들은 건강 관리를 도와주는 ‘헬스 AI’를 경쟁적으로 출시하고 있다. 미국 유타주에선 AI가 의사 대신 처방할 수 있도록 허용했더니 500건의 응급 사례에서 인간 의사의 처방과 99% 일치했다고 한다. 게다가 환자의 말을 끝까지 들어주는 AI가 의사보다 공감 능력이 뛰어나다는 평가도 있어 만만히 볼 상대가 아니다. ▷AI의 일자리 습격은 의외로 선망받는 고소득 전문직에서 먼저 벌어지고 있다. 기업의 장부, 법원의 판례, 의사의 진료 차트는 수십 년간 정형화된 데이터로 쌓여 있어 AI가 학습하기 쉽기 때문이다. 전문직의 진입 장벽은 사람에겐 높아도 AI에겐 가뿐히 넘을 수 있는 문턱인 것이다. 더구나 인건비가 비싼 전문직일수록 AI로 대체했을 때 비용 절감 효과가 커서 AI 기업들이 더 눈독을 들이고 있다. 공부 열심히 해서 법대 가고, 의대 가야 미래가 보장된다는 말이 유효할 날도 얼마 남지 않은 것 같다.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 2026-0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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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신광영]“큰 선물이라고 놀라셨지만 별말씀 없었다”

    윤석열 전 대통령의 취임 후 첫 해외 일정인 2022년 6월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정상회의 참석 때 주목을 끈 건 김건희 여사가 착용했던 ‘나토 3종 세트’였다. 목걸이, 귀걸이, 브로치를 합해 1억 원이 넘었는데 특히 6200만 원짜리 반클리프아펠 목걸이를 두고 논란이 컸다. “빌린 것”이란 김 여사의 주장은 윤영호 당시 통일교 세계본부장에겐 김 여사에게 더 가까이 접근할 힌트가 됐다. 건진법사 전성배 씨를 통해 김 여사에게 샤넬 백 등을 제공해 왔던 윤 전 본부장은 전 씨에게 “영부인이 귀금속을 빌리시냐. 그러지 마시라. 우리가 사드리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 말은 한 달 뒤 바로 실행에 옮겨졌다. 특검 수사 결과에 따르면 윤 전 본부장은 아내에게 6000만 원대 반클리프아펠 목걸이를 사오도록 했다. 하지만 서울 시내 명품관을 다 돌아봐도 해당 목걸이의 재고가 없었다. 급하게 비슷한 가격대의 다른 제품을 샀는데 그게 그라프 목걸이였다고 한다. 그라프는 김 여사 ‘나토 3종 세트’ 중 귀걸이의 브랜드였다. 만약 윤 전 본부장의 원래 계획이 실현됐다면 김 여사는 반클리프아펠 목걸이만 2개를 받았을 것이다. 이미 넉 달 전 서희건설 측이 반클리프아펠 목걸이를 사서 김 여사에게 선물했다. ▷당시 통일교 2인자로 불렸던 윤 전 본부장은 김 여사 선물을 전 씨에게 건넬 때마다 문자메시지를 보내 꼬박꼬박 흔적을 남겼다. “취임 기념으로 제가 직접 골랐다” “여사님께 지난번과는 다른 고가 선물을 드리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등의 문자를 보내면 전 씨는 “여사님이 아주 좋아하신다” “큰 선물이라고 놀라셨지만 별말씀 없었다. 연락 주실 거다” 같은 답신을 보냈다. ▷윤 전 본부장의 다이어리에서는 ‘K법사(건진법사) 미팅: 한옥집(잔금+선물)’이란 메모가 발견되기도 했다. 그가 전 씨를 만났던 날 직접 적어 놓은 것이다. 그의 다이어리와 문자 내역에는 김 여사 외에 다른 인물들이 언급됐을 가능성도 있다. 윤 전 본부장은 특검에서 전재수 의원 등 여야 정치인들에게도 금품을 건넸다고 진술한 바 있다. 금품을 제공한 입장에선 증거를 남겨놔야 받은 쪽이 민원 사항을 외면하지 못할 것으로 생각했을 수 있다. ▷전 씨는 윤 전 본부장에게서 받은 금품을 김 여사에게 전달하지 않았고 모두 분실했다고 줄곧 주장해 왔다. 하지만 재판에서 결국 전달 사실을 실토했다. 윤 전 본부장과 주고받은 문자, 통일교 측이 보관해 온 선물 영수증 등 증거 앞에서 더는 잡아떼기 어려웠을 것이다. 금품 수수를 부인해 온 김 여사도 전 씨의 자백에 통일교로부터 샤넬 백을 받은 사실만큼은 인정했다. 김 여사는 전 씨가 전해 오는 호화 명품을 받을 때만 해도 이런 증거들이 차곡차곡 쌓이고 있을 줄은 짐작도 못 했을 것이다.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 2026-0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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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신광영]이용객 당초 예상의 1%, 인천공항 자기부상열차

    인천공항에서 용유역까지 6km를 잇는 인천공항 자기부상열차는 6개 역을 오간다. 그중 한 곳의 이름이 워터파크역인데 막상 내리면 워터파크가 없다. 역사 바깥은 갈대밭이 펼쳐진 허허벌판이다. 2016년 개통할 때만 해도 리조트, 워터파크 등 개발 계획이 무성했지만 대부분 무산되면서 역 이름만 덜렁 남게 됐다. ▷자기부상열차는 2000년대 초만 해도 주목받던 신기술이었다. 열차가 자석의 힘으로 선로 위를 8mm가량 살짝 뜬 채로 주행한다. 이산화탄소 배출도, 분진·소음도 없는 무공해 기술이란 평가도 있다. 인천공항 자기부상열차가 개통된 이듬해 국토교통부는 이 사업을 ‘연구개발(R&D) 우수 사업’으로 선정했다. 지역 상권이 살아나고, 열차 기술 수출까지 하면 3조 원 넘는 경제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 후 10년이 지나도록 해외 진출은커녕 국내 지자체도 도입한 사례가 없다. ▷인천공항 자기부상열차는 R&D 비용까지 합쳐 4500억 원의 사업비가 들었다. 하루 평균 3만5000명이 탈 것으로 보고 이런 큰 예산을 들였는데 결과는 형편없었다. 가장 많았던 2019년에 4000명 정도였고, 해마다 급감해 2021년엔 325명에 불과했다. 예측치의 1%에도 못 미쳤다. 매년 적자만 80억 원이다. 2022년 운행을 멈췄다가 지난해 10월 관광용으로 재개통했지만 이용객이 여전히 하루 1000명 수준이다. ▷사업 당시 인천공항은 “일본 나고야에 이은 세계 두 번째 자기부상열차”라고 홍보했다. 실제 2005년 개통한 나고야 자기부상열차는 성공 사례로 꼽힌다. 우리와 달리 뻥튀기 예측이 없었던 게 큰 차이다. 당시 세계박람회라는 대형 이벤트가 열려 사람들이 몰렸고, 나고야 도심이나 인근 신도시로 연결돼 출퇴근·통학 수요도 확보돼 있었다. 나고야 사례가 교통이 필요한 곳에 신기술을 입힌 것이라면, 인천공항 자기부상열차는 기술 시현을 위해 노선을 만든 것에 가깝다. ▷해외 성공 모델의 겉모습만 베껴 온 대표적 사례가 용인 경전철이다. 지방선거 후보들이 캐나다 밴쿠버 ‘스카이트레인’을 구현하겠다며 너도나도 공약해 결국 2013년 개통됐다. 하지만 하루 평균 이용객은 수요 예측의 17분의 1인 9000여 명에 불과했다. 매년 수백억 원 적자를 보면서도 운영사에 수입 보장 규정까지 둬 혈세 낭비가 1조 원이 넘을 전망이다. 결국 사업을 주도했던 옛 용인시장과 수요를 부풀린 연구기관은 214억 원 배상 책임을 지게 됐다. 인천공항 자기부상열차 역시 용인 경전철의 길을 따라가고 있지만 정부와 인천공항, 인천시의 공동 사업이라 책임 소재도 열차처럼 붕 떠 있다. 수요를 똑바로 안 따지고 보여 주기용으로 의심되는 공공사업에는 책임자 이름표라도 붙여서 예산 낭비의 대가를 치르게 해야 한다.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 2026-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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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신광영]살벌할 일만 남은 417호 내란 법정

    윤석열 전 대통령 내란 사건 재판장인 지귀연 부장판사는 예능 재판을 한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만담을 하는 듯한 말투와 재판 스타일이 사건의 무게와 맞지 않는다는 지적이 적지 않다. “변호사님들 꼭 배고플 때 되면 이러시더라” “또 슬픈 표정 하지 마시고” “마이크 대시고용∼” 같은 엄숙한 형사재판에선 듣기 힘든 말들이 이어졌다. 오죽하면 방청석의 윤 전 대통령 지지자들이 “판사님 귀여우시다”라고 외친 적도 있다. 윤 전 대통령이 피고인석에서 웃음을 애써 참는 모습이 목격되기도 했다.9일이면 예능 재판도 방청석 응원도 끝 하지만 내란 법정의 웃음기가 사라질 날이 며칠 남지 않았다. 9일 마지막 공판이 열린다. 이날 검찰 구형도 이뤄지는데 내란 우두머리 혐의의 법정형은 사형 아니면 무기징역이다. 검사가 이런 무시무시한 형을 전직 대통령에게 구형하는 살벌한 상황이 예고돼 있다. “가족오락관 MC냐”는 비아냥을 듣는 지 부장판사도 표정이 굳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재판이 열리는 서울중앙지법 417호는 30년 전 전두환 전 대통령이 섰던 법정이다. 12·12, 5·18 사건으로 윤 전 대통령과 같은 혐의를 받았던 그에게 검찰은 사형을 구형했다. 이어진 최후진술에서 전 전 대통령은 국민에게 용서를 구할 기회를 날려버렸다. “국가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최선의 노력이었다. 본의 아니게 국민에게 불편과 피해를 준 점 죄송하다”고 했다. 군사 반란을 일으켰고, 무고한 시민들이 사살됐는데 “위기 해결 노력” “국민 불편”을 운운했다. 윤 전 대통령은 최후진술에서 무슨 말을 할까. 예고편 같은 장면이 2주 전 체포 방해 재판 결심 공판에서 벌어졌다. 그는 검찰 주장이 코미디 같은 얘기라고 했다. 체포영장 집행을 막기 위해 경호원들에게 총기 무장까지 지시했던 그는 이런 걸로 처벌하면 앞으로 대통령의 안전이 위태로워진다고 했다. 59분간의 일장 연설 동안 사과 한마디가 없었다. 계엄 후 1년이 지나도록 그는 자기만의 섬에서 한 발짝도 나오지 않았다. 만나는 사람이라곤 변호인들뿐이고, 법정에 가면 ‘윤 어게인’ 지지자들이 방청석을 메우고 있어 그게 세상의 중심이길 믿고 싶었을 것이다. 며칠 전엔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이 증인으로 나와 “계엄은 위기에 빠진 나라를 구하기 위한, 대통령의 고뇌에 찬 결심이었다”고 말해 박수갈채를 받았다. 토크쇼 같은 분위기에 응원단까지 와 있는 417호 법정이 그에겐 도피처였을 수 있다. 하지만 재판이 예능 같았다고 판결까지 훈훈하리란 보장은 없다. 윤 전 대통령은 대선후보 시절 전 전 대통령 옹호 발언을 한 적이 있다. “군사 쿠데타와 5·18만 빼면 정치는 잘했다고 말하는 분들이 많다”고 했다. 몰상식한 이 말 속에 윤 전 대통령도 내란죄만큼은 잘못이라고 봤다는 게 눈에 띈다. 그는 12·3 비상계엄은 다르다고 주장하지만 국회에 군경을 투입한 것 자체로 국헌 문란이라는 게 헌법재판소의 결론이다. 계엄으로 민주주의에 심각한 상처를 입히고도 반성이라곤 없는 전 전 대통령의 길을 윤 전 대통령은 고스란히 따라가고 있다.최후진술만이라도 법정 밖 국민 향하길 전직 대통령에겐 유무죄 판결이 끝이 아니다. 사후까지 이어질 역사의 법정이 기다리고 있다. 끝까지 뉘우치지 않고 부하에게 책임을 떠미는 전직 대통령이라면 아무리 중형에 처하더라도 인간적인 안타까움을 느낄 사람이 많지 않을 것이다. 국민의 연민과 용서 없이는 윤 전 대통령이 다시 일상을 되찾을 길도, 최소한의 명예를 회복할 길도 없다. 헛된 기대인 걸 알지만 윤 전 대통령이 최후진술에서라도 한 줌의 지지자들이 아닌, 법정 밖의 보통 사람들을 바라보는 용기를 내길 바란다. 두고두고 미움받는 대통령이 또 생기는 건 국민들에게도 큰 아픔이다.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 2026-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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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신광영]용산 대통령실 사우나와 비밀통로

    윤석열 전 대통령이 썼던 용산 집무실 귀퉁이엔 비밀의 문이 있다. 3개의 문을 차례로 열면 샤워부스와 대리석 세면대가 나오고 그 옆에 건식 사우나가 있다. 편백나무 마감재에 대형 TV까지 갖춘 고급 사우나다. 그 너머엔 킹사이즈 침대가 놓인 침실이 있고, 더 들어가면 5인용 고급 소파가 있는 응접실이 나온다. 차로 5분 거리의 관저를 놔두고 집무실에 호텔 스위트룸 같은 내실을, 그것도 미로처럼 숨겨 놓았던 사실이 최근 보도로 드러났다. ▷밤낮없이 국정에 매달리느라 그런 시설이 필요했을 리는 없다. 한 언론이 계엄 직전인 2024년 11월 윤 전 대통령의 출근 시간을 추적한 결과 오전 9시 전에 집무실에 도착한 건 주말과 남미 순방을 뺀 18일 중 이틀뿐이었다고 한다. 저녁엔 측근들과 술을 마시는 날이 잦았다고 하니 집무실에 머무는 시간은 길지 않았을 것이다. 그마저도 내실에서 일정 시간을 보냈다면 국정은 도대체 언제 돌봤을까. ▷‘지각 출근’ 논란이 많았던 윤 전 대통령은 출근길 보안에도 신경을 썼다. 대통령실 주차장까지 허물어 집무실과 이어진 비밀통로를 만들었다. 이 길로 다니면 차에서 내린 뒤 출입기자들 눈을 피해 집무실로 직행할 수 있다. 취임 초 몇 달 했던 도어스테핑을 중단한 직후 개통된 걸로 보아 출근 시간대를 노출하지 않으려는 의도로 해석하는 시각이 많다. 실제로 경찰이 윤 전 대통령이 아침에 출근하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 경호차량을 비운 채로 먼저 집무실로 출발하도록 하는 ‘위장 출근 쇼’를 한 정황도 드러났다. ▷사우나든 비밀통로든 대통령실이 정식 예산을 집행하면 될 일이었다. 하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대통령실은 사우나 공사업체에 현금 결제를 제안했다가 거절당한 적이 있다. 정부가, 그것도 대통령실 관련 공사대금을 현금으로 지불한다는 건 일반적 회계처리와 거리가 멀다. 또 비밀통로를 만들 때도 국방부 예산을 끌어다 썼다. 대통령 집무실의 사우나 예산을 국회 등 외부 기관이 알지 못하도록 하려는 의도가 읽힌다. 어쩌면 대통령실에 오래 머물게 될 것으로 기대했는지도 모른다. 계엄 공범 노상원의 수첩에는 “차기 대선 대비, 모든 좌파 세력을 붕괴시킨다” “헌법 개정(재선∼3선)” 같은 내용이 있다. ▷대통령실은 호화시설 논란이 일 때마다 한결같이 부인했다. 정진석 전 비서실장은 국감에서 “아주 검소하고 초라한 대통령 관저라는 말씀을 드린다”는 말도 했다. 감사원은 용산 이전 비리 의혹을 조사하면서 1급 보안시설이란 이유로 현장 확인도 없이 감사를 종결했다. 윤 전 대통령은 계엄 후 관저에 숨어 체포영장 집행을 거부할 때도 “1급 보안시설” 핑계를 댔다. 제왕적 대통령제와 결별하겠다며 용산 이전을 밀어붙인 윤 전 대통령이 완성한 건 국민의 눈으로부터 자신을 가려줄 ‘구중심처’였다. 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 2026-0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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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신광영]아마존에 입사 지원서 낸 北 공작원 1800명

    미국 빅테크 기업 아마존에 북한 청년들이 몰리고 있다. 북한 공작원으로 의심되는 입사 지원자가 지난해 4월부터 최근까지 1800명에 달했다고 아마존이 며칠 전 밝혔다. 대부분 출근하지 않는 비대면 재택근무를 하는 개발자 직종에 지원했다. 구인구직용 소셜미디어인 링크트인 휴면 계정으로 가짜 프로필을 만든 뒤 신분증까지 꾸며 미국인 행세를 했다고 한다. 북한이 위장취업 요원들을 아마존에 집중 투입한 건 고액 연봉 때문만이 아니다. 쇼핑 결제 클라우드 등 서비스를 하는 아마존의 내부자가 되면 민감한 개인정보를 빼내 2차 수익도 올릴 수 있기 때문이란 분석이 많다. ▷아마존은 입사 단계에서 이들을 적발했지만 북한 요원들이 취업에 성공한 사례가 적지 않다. 포천지 선정 500대 기업 중 상당수에 북한 정보기술(IT) 인력 수천 명이 침투해 있는 것으로 미 정보당국은 파악하고 있다. 이들이 벌어들이는 외화도 연간 8000억 원에 달한다는 게 유엔의 추산이다. 4억 원 넘는 연봉을 받는 사람도 있다. 수입의 90%를 북한 당국에 상납한다고 하지만 10%만 챙기더라도 북한의 1인당 국민총소득(171만 원)보다 수십 배가 많다. ▷미국 기업들이 이런 위장취업에 당하는 건 미국인으로 신분 세탁을 한 데다 높은 성과를 내기 때문이라고 한다. 북한에서 고강도 훈련을 받아 기술이 뛰어나지만 연봉을 조금만 줘도 일하겠다고 제안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미국의 한 사이버보안회사 대표는 감쪽같이 속아 북한 기술자를 고용했던 경험에 대해 “취업 인터뷰를 100번은 해본 프로 같았다”고 했다. 이들은 미국에서 재택근무하는 것처럼 꾸미기 위해 현지인 공범까지 매수해 회사 PC를 그들의 집에 두고 중국 러시아 등지에서 원격으로 접속한다. ▷빅테크 취업은 핵, 미사일 개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어둠의 경로로 외화벌이를 해왔던 북한의 새로운 수익 모델이다. 암호화폐 해킹 등으로도 재미를 봤지만 최근엔 과감히 양지로 나온 것이다. 노트북만 있으면 세계 어느 기업에서든 돈을 벌 수 있고, 내부 정보와 지식재산권을 탈취하면 수익원을 다양화할 수 있다. 요즘엔 글로벌 방산업체에도 공작원들을 취업시켜 무기 제조 기술까지 넘본다고 한다. ▷이런 효용을 아는 북한은 IT 인재들을 ‘국가 전사’로 대우한다. 김일성종합대 등 명문대 수재들을 선발해 ‘해외 취업’ 부대에 우선 배치한다. 북한 청년들도 상위 1%급 고소득 전문직인 데다 북한 밖에서 살 수 있는 IT 기술자를 선망한다. 인터넷을 쓸 수 있어 K드라마 등 해외 콘텐츠를 접할 수 있는 것도 큰 매력이다. 한국 인재들이 의대로 쏠리듯 북한 수재들은 IT를 배우려 혈안이라고 한다. 해외 취업이 절박한 이 청년들은 북한의 어떤 지령도 필사적으로 완수하려 할 것이다.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 2025-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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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신광영]결국 서울대에도 ‘고시반’

    민주화 운동이 한창이던 1970년대와 80년대 중반 서울대 도서관에선 고시용 수험서를 대놓고 펼치는 학생들이 많지 않았다. ‘행정고시’ ‘사법시험’ 같은 문구가 큼직하게 박힌 문제집을 볼 때면 주변 시선을 의식해 신문지나 책 커버로 표지를 가리곤 했다. 시위 중 잡혀가는 학생들이 많았던 그 시절, 최고 국립대에 다니는 혜택을 누리면서 고시 공부에 매달리는 건 개인의 영달을 꾀하는 것으로 비쳤다. 문민정부가 들어선 1990년대까지도 서울대는 출세보다 학문의 전당을 지향해야 한다는 학풍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1997년 외환위기를 전후로 ‘서울대 고시생’이 부쩍 늘었다. 학교 간판만으로 대기업 입사와 평생직장이 보장되던 공식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하던 시기다. 법대 고시 과목 수업에 인문대생, 사회대생, 공대생들이 몰려들어 “서울대가 거대한 고시 학원이 되고 있다”는 탄식이 나올 정도였다. 교수들 사이에선 “서울대는 고시 합격생을 많이 내는 대학이 아니라 다양한 분야의 지도자를 배출하는 곳이어야 한다”는 자성의 목소리가 높았다. 고시반이 서울대에 생기지 않았던 건 이런 분위기 탓이 컸다. ▷그랬던 서울대가 최근 5급 공채(행정고시) 고시반을 운영하기로 했다. 원래 행정대학원생만을 대상으로 하던 고시반을 학부생에게도 개방해 학습 공간과 수험 과목 특강 등을 제공한다고 한다. 학교 차원의 고시반 설치는 개교 이래 79년 만에 처음이다. 기존처럼 학교는 연구에 집중하고 고시나 취업 준비는 개인에게 맡기던 방임형 방식으론 서울대의 위상을 유지하기 어렵다는 판단이 작용한 것이다. ▷고시 합격자를 서울대가 휩쓸던 시대는 이미 저물고 있다. 행시만 보더라도 1990년대에 40%가 넘던 서울대 출신 합격자는 계속 줄어 올해엔 4명 중 1명꼴도 되지 않는다. 또 상당수 학생들이 타 대학 의대로 옮기거나 로스쿨에 진학해 과거처럼 인재를 독점하지 못한다. 사시 폐지로 신림동 고시촌도 쇠락해 수험생들이 학교 밖 민간 인프라에 기대기도 어려워졌다. 그러는 사이 다른 대학들은 지도 교수까지 붙여 고시반을 운영하고 도서관 한 층을 통째로 고시생 전용 공부방으로 만들어 줄 정도로 총력 지원하고 있다. ▷유홍림 서울대 총장은 올해 초 “우리도 고시반을 만들어 달라”는 학생들에게 이런 생각을 밝혔다고 한다. “대학은 학생이 공직자가 되도록 지원해 주기보다 공직자로서 필요한 역량을 기르도록 도와야 한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렇게 여유 부릴 때가 아니라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공직 진출은 다른 대학들이 치고 올라오고, 사기업 취업도 경력 채용 위주로 바뀌면서 서울대 졸업장의 후광 효과는 미약해지고 있어서다. 학내 고시반의 등장은 서울대 입학이 곧 성공이라는 고정관념이 더는 통하기 어려운 현실을 보여준다.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 2025-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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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신광영]NYT도 BBC도 놀란 수능 영어

    미국 뉴욕타임스(NYT)는 단어 퍼즐이나 스도쿠 같은 퀴즈 코너로도 유명한 신문이다. 퀴즈 푸는 재미로 구독한다는 이들이 적지 않다. 이런 NYT가 최근 한국에서 ‘불수능’ 논란을 빚은 영어 문항들을 퀴즈로 내보냈다. 독일 철학자 이마누엘 칸트의 법철학이나 게임 관련 뇌과학 이론 등 난해한 지문들과 함께 “당신이라면 시험에 통과할 수 있을까”라면서 독자를 ‘도발’했다. NYT를 즐겨 보는 상대적 고학력 원어민에게도 한국 고3 수험생이 풀어야 할 수능 문제가 만만찮은 도전이라고 본 것이다. NYT는 수능 출제위원장이 난이도 조절에 실패한 책임을 지고 사임했다는 소식도 함께 전했다. ▷수능 영어의 고난도는 영국 언론에도 주목의 대상이었다. 영국 BBC방송은 “고대 문자 해독 수준” “미친 시험”이라면서 올 수능 영어 문제를 소개했다. 이런 악명 높은 ‘8시간 연속 시험 마라톤’을 준비하는 데 한국 청소년들은 평생을 바친다고도 했다. 특히 비디오 게임 용어를 소재로 한 39번 문항을 공개했는데, “잘난 척하는 말장난”이다, “개념이나 아이디어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는 형편없는 글쓰기”라는 독자들의 비판도 기사에 실었다. ▷영국 일간지 텔레그래프가 수능 영어의 세 문항을 소개한 기사에는 350여 개 댓글이 달리는 등 일반 독자들의 반응도 뜨거웠다. “내가 의대 우등 졸업생인데 한 개밖에 못 맞혔다.” “옥스브리지(옥스퍼드대+케임브리지대)에 응시한 영국 수재들이나 풀 수 있을 정도”라는 반응이 나왔다. 가디언은 이번 수능에서 논란이 된 지문 속 ‘컬처테인먼트(culturtainment)’란 합성어에 주목했다. 그 말을 만든 영국인 교수는 통상적 표현이 아니어서 시험에 내선 안 된다고 지적했다고 한다. ▷영어 종주국도 기겁하는 수능의 난해함은 영어만의 얘기가 아니다. 학업 능력보단 잔기술로 정답을 찾는 경주에 가깝다는 것이다. 학원가에선 지문을 이해하지 않고도 문제 속 키워드를 지문에서 빠르게 찾아 매칭하는 ‘눈알 굴리기’ 기술을 가르친다고 한다. 차분하게 문제를 풀다간 시험 시간을 맞출 수 없어 유형별로 도식화한 뒤 수백 번 문제 풀이 훈련도 반복한다. 시험 기술로 무장한 수험생들을 상대하는 출제자들도 답답할 것이다. 지난 32년간 누적된 기출문제는 물론이고, 시중의 어떤 문제집과도 안 겹치는 문제를 내야 한다. ▷그런 토양에서 생겨난 수능 문제들은 전문가들도 쩔쩔매는 지경에 이르렀다. 영어뿐만이 아니다. 올 과학탐구 문제를 풀어본 KAIST 총장은 “풀이 기술 없인 손도 못 대겠다”며 포기했고, 유명 소설가는 “이런 국어 문제를 다 맞힐 정도면 대학 갈 필요가 없다”고 했다. 대입용 시험인데 정작 교수가 풀기 어렵고, 다 맞히면 대학 갈 필요도 없다니 수능은 도대체 뭘 평가하려는 시험인지 궁금해진다. 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 2025-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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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신광영]정의는 보여져야 한다

    12·3 계엄 날 밤 국회 본회의장은 의장에게 계엄 해제 표결을 재촉하는 의원들의 아우성으로 가득했다. “뭐해요? 그냥 처리합시다!” “거수나 기립으로 하면 되잖아요!” “계엄군이 본회의장 앞까지 왔다고요!” 당시 무장 군인들을 보좌진과 직원들이 막고 있었지만 본회의장으로 들이닥치는 건 시간문제였다. 초유의 상황인 만큼 어떻게든 통과부터 시키자는 요구가 빗발쳤다. 하지만 그때만 해도 안건 상정조차 안 된 상태였다. 우원식 의장은 의원들에게 말했다. “본회의 그 프로세스대로 하십시다.”절차의 힘으로 계엄 제압했는데… 그러자면 의석 단말기, 투표기 등 모든 시스템이 정상 작동돼야 했다. 하지만 그럴 형편이 아니었다. 많은 직원들이 국회에 못 들어오거나 계엄군과 대치 중이었다. 고작 몇 명이 익숙지 않은 일을 동시에 떠맡아야 했다. 내부 전산망도 막혀 있었다. 계엄 해제 의결안을 의원들이 볼 수 있게 띄우려면 국회 본청 몇 층 아래 사무처에서 USB에 파일을 담아와 수동으로 연결해야 했다. 이를 위해선 한글파일과 PDF 버전이 모두 필요했지만 직원도 처음 해보는 일이라 한글파일만 가져왔다. 그 바람에 다시 계엄군을 뚫고 내려가 PDF로 변환해 오는 일도 있었다. 가까스로 표결 준비는 마쳤지만 여야 협의로 정한 본회의 개회 시간까진 4분이 남아 있었다. 계엄군이 본회의장 문을 밀어붙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왜 당장 표결하지 않느냐는 고성이 터져 나왔다. 우 의장은 당시 상황을 기록한 저서에서 “그 몇 분간 평생 먹을 욕을 다 먹었다”고 했다. 1분 1초 피가 타들어 갔다고도 했다. 표결은 공지대로 오전 1시가 돼서야 시작됐다. 그날 밤 계엄군에 맞서는 것만큼이나 치열했던 건 ‘프로세스’를 지키려는 투쟁이었다. 절차가 무르익기를 기다리느라 피가 말랐던 건 윤석열 전 대통령 탄핵 때도 마찬가지였다. 헌법재판소 결정이 늦어지면서 국민들은 초조함과 싸우면서도 묵묵히 기다려줬다. 그 토대 위에서 재판관 8인 만장일치 결정이 나왔다. 문형배 당시 헌재소장 권한대행은 “판결문도 8명이 다 고치면서 한 명 한 명 의견을 최대한 반영했다”고 했다. 헌재가 왜 빨리 선고하지 않느냐는 일각의 압박에 만장일치를 포기했다면 당시의 반탄 여론을 잠재우진 못했을 것이다. 잘 지켜진 절차는 상대를 승복시키는 힘이 있다. ‘정의는 지켜져야 할 뿐 아니라 정의롭다고 보여져야 한다’는 법언은 절차적 정의가 곧 실질적 정의를 낳는다는 걸 강조한 말이다. 정의의 외관을 갖추고 있어야 심판을 받는 쪽이 결과에 수긍할 수 있고, 그래야 무엇이 불의인지 사회적 합의에 이를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계엄군이 언제 쳐들어올지 모르는 절체절명 상황에서도 국회 직원들이 PDF 파일을 다시 챙겨오고, 헌재 재판관들이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중지를 모았던 것도 정의의 외관을 완성하려는 노력이었다. “국회에서 해제시켜도 2번, 3번 계엄 하면 된다”고 했던 윤 전 대통령을 멈춰 세운 건 이런 절차의 힘이었다.‘정의의 외관’ 내팽개친 여당 사법개혁안 요즘 더불어민주당이 추진 중인 내란전담재판부 등 사법개혁 법안들에는 공통된 발상이 깔려 있다. 내란 척결이란 정의 실현을 위해서라면 정의롭게 보이지 않더라도 상관없다는 인식이다. 사법부 등 각계에서 위헌 소지를 지적했고, 당내 의원들도 우려했지만 법사위 여당 의원들은 상임위 처리를 강행했다. 그 정도로 절차적 정당성엔 관심이 없었다. 그런 법이 급조되면 계엄 세력의 역공을 허용하는 건 물론, 국민들이 어렵게 지켜낸 법치 질서마저 훼손할 수 있다. 1년 전 국회 본회의장 문밖에 계엄군이 몰려들 때도, 윤 전 대통령이 용산 관저에서 막무가내로 버틸 때도 우리는 절차를 건너뛰려는 유혹을 견뎌 냈다. 그런데 여당은 도대체 무엇에 쫓기고 있기에 졸속 입법에 집착하는지 묻고 싶다.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 2025-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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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신광영]김 여사 사무실서 나온 김영선 압수영장

    윤석열 전 대통령 부부의 사저 아크로비스타 지하에 있는 코바나컨텐츠는 김건희 여사가 영부인이 되기 전 주요 활동 무대였던 곳이다. 김 여사가 최재영 목사로부터 디올백을 받은 곳도, 로봇개 수입업자에게서 고가 수입 시계를 건네받은 곳도 바로 코바나컨텐츠 사무실이다. 윤석열 정부 출범 전후엔 정권에 줄을 대려는 이들의 발길이 이어지기도 했다. 김 여사는 올 4월 윤 전 대통령 파면으로 관저에서 나온 이후 주로 그곳에서 머물렀다고 한다. ▷특검은 7월 25일 코바나컨텐츠 사무실을 압수수색하면서 뜻밖의 문건을 발견했다. 명태균 공천 개입 사건에서 김 여사와 공범 혐의가 있는 김영선 전 국민의힘 의원에 대한 압수수색 영장 복사본이었다. 7월 초 집행됐던 이 영장에는 김 여사 부부가 명 씨로부터 공짜 여론조사를 제공받는 대가로 명 씨와 가까운 김 전 의원이 공천을 받도록 해줬다고 명시돼 있다. 압수수색 영장에는 혐의와 함께 압수물 내역이 적혀 있어 수사의 진도와 방향을 가늠하는 단서가 될 수 있다. ▷당시 김 여사는 몰아치는 특검 수사로 궁지에 몰려 있었다. 보름 전 윤 전 대통령이 재구속됐고, 김 여사 소환이 임박했다는 보도가 이어지던 때였다. 공천 개입은 김 여사의 주요 혐의 중 하나였다. 특검 조사에 대비해야 했던 김 여사에게 김 전 의원의 압수수색 영장은 적지 않은 도움이 됐을 것이다. ▷수사 상황을 알아보거나 보고받는 건 김 여사에게 낯선 일이 아니다. 그는 디올백 수수와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사건에 대한 검찰 수사가 한창이던 지난해 5월 박성재 당시 법무부 장관에게 “내 수사는 어떻게 되고 있느냐”고 물었다. 박 전 장관이 검찰에서 공천 개입 사건 수사 보고서를 받아 김 여사에게 전달한 정황도 포착돼 특검이 수사하고 있다. 김 여사 측에 1억 원이 넘는 이우환 그림을 제공한 혐의로 구속된 김상민 전 검사는 현직 부장검사 시절 검찰의 ‘쥴리’ 명예훼손 사건 관련 수사 동향을 김 여사에게 보고한 적도 있다. ▷윤 전 대통령이 집권하는 동안 김 여사는 자신과 관련된 수사에서 늘 유리한 고지에 있었다. 남편은 법무부 장관에게 “혐의 없음이 명백하다”면서 사건 처리 방향을 제시했고, 김 여사 본인도 장관이나 검사를 사설 변호인 대하듯 활용했다. 오죽하면 박 전 장관 휴대전화에 김 여사 번호가 ‘김안방’(안방마님의 줄임말로 추정)으로 저장됐을까. 김 여사에게 이런 습관이 남아 있어 용산에서 나온 뒤에도 공범의 영장을 통해 수사 상황을 알아보려 했던 건 아닌지 의심된다. 하지만 특검 수사에선 그것도 별 소용이 없었다. 코바나컨텐츠 사무실에서 김 전 의원 영장이 발견되고 보름쯤 뒤 김 여사는 구속됐다. 법 위에 서 있는 것 같던 김 여사의 시간도 그리 오래가진 못했다.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 2025-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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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신광영]홍콩 고층아파트 화재 참사

    26일 홍콩의 31층 아파트 단지에서 불이 나 현재까지 55명이 숨지고 279명이 실종되는 최악의 인명 피해가 났다. 외벽 보수 공사 중이던 이 아파트 8개 동 중 7개 동이 화마에 휩싸였는데 다닥다닥 붙은 건물들 사이로 불이 순식간에 번졌다. 건물마다 설치된 고층 작업용 가설물인 대나무 비계가 불길이 번지게 하는 고속도로 역할을 했다. 생존자들은 “대나무가 딱딱 소리를 내며 터지고, 불붙은 대나무들이 20∼30층 높이에서 비 오듯 쏟아져 내렸다”고 전했다. ▷공사 중인 건물은 비계라고 불리는 임시 구조물에 둘러싸여 있다. 인부들이 딛고 서는 발판이자 자재를 옮기는 통로여서 공사 현장의 뼈대라고도 불린다. 철제 비계가 주로 쓰이지만 홍콩에선 대나무 비계가 많다. 비좁은 땅에 고층 건물이 빽빽하게 밀집한 지리적 특징이 낳은 산물이다. 대나무는 유연하고 자르기 쉬워 좁은 건물 틈 사이로 비계를 설치하기 쉽다. 워낙 싸고 효율이 좋아 화재에 취약하다는 치명적 단점은 과소평가돼 왔다. 하지만 잠재된 위험은 이번 화재처럼 언젠가 현실이 된다. ▷홍콩 당국이 이런 참사에 대비할 기회는 여러 번 있었다. 1996년 홍콩 갈레이 빌딩 화재 때도 대나무 비계가 불쏘시개 역할을 해 41명이 희생된 적이 있다. 고층 건물은 사다리차가 닿지 않아 속수무책이란 것도 그때 다 경험했다. 하지만 건설사들은 압도적 가성비에 숙련된 대나무 비계공들이 풍부해 오랜 관행을 포기하지 못했다. 정부도 이를 계속 방관하다 올 3월에야 단계적으로 사용을 금하기로 했지만 때늦은 조치였다. ▷화재가 난 공사 현장에는 담배를 피우는 인부들도 많았다. 아파트 주민들은 이들이 아무 데다 꽁초 버리는 걸 목격하고 여러 번 항의했지만 시정되지 않았다고 한다. 화재는 담뱃불에서 시작됐을 가능성이 높다고 홍콩 언론들은 보도하고 있다. 최근엔 강풍까지 자주 불어 안전 그물망이 떨어져 나가는 일도 많았다. 각층의 창문은 깨지지 말라고 스티로폼으로 도배돼 있었다. 이처럼 불에 잘 타는 자재와 버려지는 꽁초들, 게다가 강풍까지 불이 날 징조들은 차곡차곡 쌓여 왔다. ▷한국은 홍콩 못지않은 ‘초고층 아파트 공화국’이다. 우리는 대나무 비계를 쓰진 않지만 가연성 외장재나 필로티 주차장 같은 우리만의 ‘불쏘시개’를 안고 있다. 부산 해운대 우신골든스위트 화재(2010년), 경기 의정부 대봉그린아파트 화재(2015년) 등이 그런 사례다. 요즘 초고층 아파트엔 중간에 피난 구역이 있다고 하지만 유사시 대피 매뉴얼을 숙지하고 있는 주민들은 많지 않다. 오래된 고층 건물엔 이런 피난처마저 없다. 재난은 예상치 못했던 곳에서 갑자기 뚝 떨어지지 않는다. 위험한 줄 알면서 “설마…”할 뿐이다. 홍콩에서 지금 그 대가를 치르고 있듯, 우리라고 예외일 리는 없다.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 2025-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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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신광영]“난 돈을, 넌 기술을” “나랑 얘기는 비밀로”

    김건희 특검이 지난달 서울 용산구의 한 건물을 압수수색 하던 중 눈앞에서 피의자를 놓쳤다. 김 여사를 건진법사 전성배 씨에게 소개해준 이모 씨였다. 특검은 그를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사건의 공범으로 보고 추적해 왔지만 그간 행방이 묘연했다. 마침 1년 전 음주 운전으로 지명수배된 상태여서 경찰의 도움으로 어렵게 소재지를 찾아낸 터였다. 하지만 특검 압수수색과 동시에 체포에 나섰던 형사들이 도착하기 직전 이 씨가 선수를 쳤다. 그는 2층 베란다에서 맨발로 뛰어내려 유유히 사라졌다. ▷특검이 이 씨를 주목하게 된 건 전 씨의 법당에서 김 여사의 예전 휴대전화를 발견하면서부터다. 그 폰에 김 여사가 이 씨와 주고받은 문자메시지가 수백 통 남아있었다. 이 씨는 주가조작에 쓰인 김 여사 계좌 중 일부를 관리했던 적이 있어 ‘제3의 주포’로 의심되는 상황이었는데 두 사람의 대화를 복원해 보니 충격적인 내용들이 쏟아져 나왔다. ▷주가조작이 한창이던 2012년 10월 이 씨는 김 여사에게 항의성 문자를 보냈다. “내 이름 노출시켜 버리면 난 뭐가 돼ㅠㅠ 도이치는 손 떼기로 했어.” 그러자 김 여사는 그런 적이 없다면서 “내가 더 비밀 지키고 싶은 사람이야∼ 오히려”라고 답했다. ‘비밀’이란 표현은 몇 달 뒤 대화에서 다시 등장한다. 이 씨가 “도이치 작전으로 내사 중이야”라고 하자 김 여사는 “나랑 하는 얘기 완전 비밀로 해. 주완이(주가조작 1차 주포의 가명)한테도”라고 답했다. ▷김 여사가 말하는 ‘비밀’이란 주가조작 일당에게 주식 매매를 맡긴 것을 뜻하는 것으로 특검은 보고 있다. 이 씨가 권오수 전 도이치모터스 회장에 대한 불신을 드러냈을 때 김 여사가 보였던 다음과 같은 반응도 그런 해석을 뒷받침한다. 김 여사는 권 전 회장에 대해 믿을 만한 사람이라면서 “난 돈을 대고 넌 기술을 대는데, 신뢰를 목숨같이 생각하고 쌓아”라고 답했다. 특검은 이 말이 김 여사가 스스로를 ‘전주(錢主)’라고 규정하면서 이 씨에 대해선 주가조작 기술을 구사하는 ‘선수’로 표현한 것이라고 보고 있다. 각자 역할을 맡은 가담자들 사이에 신뢰가 중요하다는 걸 강조한 대목이라는 것이다. ▷앞서 검찰은 이 씨를 조사하긴 했지만 기소하지 않았다. 이 씨는 2021년 검찰 조사를 받은 뒤 돌연 잠적했다가 이듬해 윤석열 정부 출범 직후 제 발로 검찰에 나왔다. 그때 검찰은 이 씨를 대면 조사하고도 조서조차 남기지 않았다. 그 후 음주 운전까지 하며 3년간 자유롭게 활보하던 이 씨는 특검 압수수색 도중 도주했다가 34일 만에 붙잡혀 결국 구속됐다. 다음 달 3일이면 김 여사 도이치모터스 사건의 결심 공판이 열려 1심이 얼마 남지 않은 상태다. 조금만 늦었더라면 검찰이 놓아준 핵심 공범을 법정에 세우지 못할 뻔했다. 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 2025-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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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신광영]아파트 ‘입주민끼리’ 결혼정보회사

    최근 평당 1억 원을 돌파한 서울 송파구 대단지 아파트 헬리오시티 상가에 독특한 매장이 생겼다. 분홍색 장식의 유리 너머로 “좋은 사람 만나 결혼하세요”란 문구가 보이는 결혼정보회사다. 부동산 중개업을 해온 주민이 알음알음 미혼의 입주민들을 중매해 주다가 수요가 늘자 아예 아파트 이름을 따 회사를 차렸다. 개업 3개월 만에 회원이 200명을 넘겼고, 그중 3분의 2가 입주민이라고 한다. ▷단지 내 결혼정보회사가 더 먼저 생긴 곳은 서울 서초구 래미안원베일리다. 평당 2억 원을 오르내리는 초고가 아파트에 사는 회원들이지만 거기서 또 직업, 학력 등에 따라 4개 등급으로 나뉜다. 연회비도 50만∼1100만 원까지 제각각이다. 서울 강남구 타워팰리스에도 입주민 중매 모임이 최근 생겼다. 이들은 강남권의 다른 고가주택 주민들에게도 문호를 열고 있어 아파트 관리사무소나 근처 주민센터로 찾아와 연결해 달라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고 한다. ▷비슷한 배경의 사람들끼리 결혼하려는 풍조는 예전부터 있어 왔다. ‘마담 뚜’나 VIP 고객을 상대하는 은행원들이 부유층 자녀들의 만남을 주선하기도 했다. 하지만 요즘처럼 아파트가 맞선의 무대가 된 건 강남 집값 폭등과 맞물린 기현상이다. 고가 아파트 커뮤니티가 몇 년 새 확 늘어난 데다, 아파트가 개인의 자산 규모를 드러내는 표식이 되면서 ‘평당 얼마짜리 아파트 소유자끼리 사돈 맺자’는 식의 생각이 싹트게 된 것이다. ▷부모가 원한다고 혼인이 성사되는 건 아니지만 자녀들도 ‘자만추’(자연스러운 만남 추구)만 고수하기엔 현실이 척박해졌다. 과거처럼 결혼해서 성실히 돈 모으면 내 집 마련이 가능했던 주거 사다리가 무너지면서 젊은 세대에서 재력이 검증된 상대와 안전한 결혼을 추구하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 하지만 아파트가 곧 신분 증명서가 돼 결혼에까지 영향을 미치면 부자들의 혼맥 네트워크는 공고해지게 된다. 이미 심각한 강남과 강북, 서울과 지방의 자산 격차는 더 벌어질 것이다. 신혼부부가 ‘초품아’(초등학교를 품은 아파트)를 선호하듯 중년 부부들이 ‘결품아’(결혼정보회사를 품은 아파트)에 몰리는 시대가 오지 말란 법도 없다. 가뜩이나 퍼진 물신주의가 더 큰 사회적 위화감으로 번질 수 있다. ▷주소지가 ‘결혼 스펙’이 되는 사회에선 비혼과 저출산도 더 가속화된다. 안 그래도 불안한 경제력 탓에 결혼과 출산을 포기하는 이들이 많은데 소수의 아파트 울타리 안에서만 부가 대물림되면 담장 밖 사람들은 선택지가 좁아진다. 부자들이 결혼으로 더 연결될 때 ‘결포자’(결혼포기자)들은 발밑이 흔들릴 수 있다. 반복적으로 찾아오는 집값 폭등을 막지 못하면 아파트 입주민 결혼정보회사 같은 씁쓸한 풍경들을 자주 마주하게 될 수 있다. 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 2025-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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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신광영]징병제로 회귀하는 유럽

    첨단 무기의 경연장이라는 우크라이나 전쟁에서도 전투의 기본은 병력 확보라는 게 새삼 확인되고 있다. 무기가 아무리 좋아져도 운용할 사람이 있어야 하고, 드론이나 미사일로 적을 초토화시킨 뒤 실제 영토를 점령하는 건 군인들 몫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전사자는 늘어가는데 빈자리가 안 채워지면 부대원들 사기가 떨어지기 마련이다. 그래서 양측 모두 병력 확보에 사활을 걸고 있다. 러시아는 전쟁 초기 수혈했던 바그너 용병이 바닥나자 북한군을 파병받았고, 우크라이나는 환갑이 지난 남성들까지 입대시키며 안간힘을 쓰고 있다. ▷4년째 전쟁을 지켜보는 유럽 국가들은 초조하다. 전세가 러시아로 기울어 위협은 더 커졌는데 미국은 유럽에서 발을 빼고 있다. ‘미국 없이 유럽 지키기’가 발등의 불로 떨어졌다. 하지만 유럽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5년 이후 80년간 미국에 안보를 의존하며 긴 평화를 누려왔다. 1990년 냉전 종식 후엔 징병제도 대부분 없앴다. 이제야 군비 증강을 시도하지만 국방 예산을 확 올리기도 어려울뿐더러 최신 무기를 도입해 실전 배치하기까지 몇 년이 걸릴지 모른다. ▷그래서 꺼내 든 카드가 징병제 부활이다. 러시아와 가까운 독일이 대표적이다. 1980년대 말까지만 해도 독일은 우리나라(48만 명)와 비슷한 50만 대군을 유지했다. 하지만 지금은 18만 명 수준이다. 독일 국방부는 “징병제 폐지는 실수였다”면서 앞으로 10년간 징병을 늘리고, 예비군을 키워 46만 명까지 확충할 계획이다. 6개월 의무 복무 후 자발적으로 1년에서 최대 17개월까지 추가 복무하는 방안이 유력하다. 러시아와 국경을 접한 크로아티아, 라트비아, 세르비아도 속속 징병제로 회귀했다. ▷북유럽에선 여군 징집이 확산되고 있다. 러시아로부터 공격당했던 역사가 있는 나라들인 만큼 위기감이 더욱 크다. 덴마크는 올 7월 여성 징병제를 시작했다. 2027년 도입하려다가 2년 앞당겼다. 노르웨이와 스웨덴에선 이미 몇 년 전부터 그렇게 해왔다. 북유럽에서도 여성 징병은 찬반이 뜨거웠다. 하지만 군이 시민사회 구성과 동떨어지면 안 된다는 인식하에 성 중립적 징병제를 도입했고, 젊은 남성 인구가 줄어드는 현실적 한계도 있었다. ▷수십 년간 평화에 젖어 있던 유럽이 징병제를 부활시키고 있지만 지금의 국민은 그때 사람들이 아니다. 무작정 입대를 명령했다간 큰 반발에 부딪힐 수 있다. 젊은 세대의 거부감이 유럽 국가들의 고민이다. 독일은 신체검사를 의무화하면서도 통과자를 모두 입대시키진 않고 부족한 인원만큼만 뽑기로 했다. 제비뽑기로 추첨 선발한다. 여성 징병제 역시 형평성 논란을 줄이려는 노력이다. 한국은 저출산 시대에 징병제를 어떻게 유지할지 진작부터 고심해왔는데 이제 우리만의 문제가 아니게 됐다.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 2025-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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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신광영]“제가 이런 말까진 안 하려고 했는데…”

    윤석열 전 대통령의 내란 재판 전략은 ‘입 연 사람은 흔들리게, 입 닫은 사람은 더 꾹 닫게’로 요약된다. 의원들을 끌어내란 지시를 받았다는 군인들 증언이 쏟아져 나온 이상 ‘스피커’의 신빙성을 떨어뜨리는 데 집중해 왔다. 하지만 역효과가 적지 않아 닫혔던 입들이 오히려 열리고 있다. 계엄 당시 이진우 전 수방사령관의 차량을 운전했던 이민수 중사를 증언대에 세운 건 윤 전 대통령 측이었다. 당시 함께 있었던 이 전 사령관의 부관이 비화폰을 통해 “4명이 (의원) 1명씩 들쳐 업고 나오라”는 대통령의 지시를 들었다고 증언한 것에 반해 이 중사는 그런 기억이 없다고 진술해 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중사의 증언은 변호인들 기대와 정반대였다. ‘총을 쏴서라도…’ ‘계엄을 다시 하면 된다’고 말하는 대통령 목소리를 들었다고 했다. 이제 와 왜 말을 바꾸냐는 질문엔 “침묵하는 저 자신이 부끄러웠다”고 했다. 그처럼 침묵을 깬 군인들이 한둘이 아니다.태도 달라진 이진우 여인형 곧 증인 출석 재판이 불리해지면 방향을 틀 법도 한데 윤 전 대통령은 더 세게 액셀을 밟는 쪽을 택했다. 의원들 끌어내란 지시를 처음 폭로했던 곽종근 전 특전사령관이 증인으로 나오자 윤 전 대통령은 넉 달간의 재판 거부를 멈추고 직접 나서 그를 신문했다. 전 세계에 생중계되는데 그런 지시를 했겠느냐, 계엄 두 달 전 비상대권 얘기를 했다고 하는데 폭탄주를 10∼20잔 마셨던 그날 자리에서 시국 얘기를 했겠느냐고 몰아붙였다. 자신을 거짓말쟁이로 몰아가는 태도에 참기 힘들었는지 곽 전 사령관은 “이 얘기까진 안 하려고 했는데 그날 한동훈을 당신 앞에 잡아 오라고 했다. 당신이 총으로 쏴서라도 죽이겠다고 했다”는 폭탄 발언을 내놓았다. 조만간 증인으로 나올 이 전 수방사령관과 여인형 전 방첩사령관도 윤 전 대통령으로선 안심할 수 없다. 헌법재판소에선 말을 아꼈던 두 사람이지만 이후 각자 재판을 받으며 태도가 달라졌다. 이 전 사령관은 문을 부수고서라도 들어가 의원들을 끌어내란 지시를 받았다고 결국 인정했다. 여 전 사령관도 “크게 후회하고 있다. 상응하는 책임을 지겠다”면서 지난 7월 증인신문을 포기했다. 이는 정치인 체포 지시 등 윤 전 대통령에게 불리한 진술을 한 증인들과 다투지 않겠다는 의미다. 그중엔 홍장원 전 국정원 1차장도 포함된다. 싹 다 잡아들이란 지시를 받았고, 여 전 사령관에게서 이재명 등 체포 명단을 받았다는 그의 진술에 이의가 없다는 것이다. 홍 전 차장은 13일 재판에 증인으로 나온다. 윤 전 대통령이 이때도 “업무 격려 전화를 했을 뿐”이라며 계속 잡아떼다간 홍 전 차장 역시 “이런 말씀까진 안 드리려 했는데”라며 어떤 폭로를 할지 모른다.尹, 덮으려 할수록 더 큰 폭로 부를 것 의원 끌어내란 지시를 받았다고 줄곧 진술해 온 조성현 수방사 1경비단장은 최근 재판에서 이런 말을 했다. “저 또한 부하들에게 (지시가) 전파만 안 됐다면, 거짓으로 그냥 (진술) 할까 엄청 고민했다. 하지만 이미 전파가 됐고, 그게 사실이었다.” 계엄 당시 내내 켜져 있던 회의실 마이크로 대통령 지시가 부하들에게 다 전달돼 거짓말을 할 수도, 해서도 안 되는 상황이었다는 곽 전 사령관의 말과 비슷한 얘기다. 이게 냉정한 현실 인식이다. 유독 윤 전 대통령만은 12·3 계엄 이후 1년이 다 되도록 현실을 회피하고 있다. 계엄 직전 국무위원들에게 “막상 하면 별거 아니야”라고 했다던 황당한 인식에서 달라진 게 없다. 지금처럼 부하들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전략을 계속 고수한다면 재판에 불리한 건 물론, 끝까지 비겁했던 대통령으로 역사에 각인될 것이다. 이제 내년 1월이면 1심 선고가 나올 예정이다. 스스로 진실을 털어놓을 기회가 얼마 남지 않았다. 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 2025-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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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신광영]“그냥 이겨” 펠로시의 퇴장

    “Just Win, Baby!(그냥 이겨!)” 낸시 펠로시 전 미국 연방하원의장(민주당)은 선거에 나선 후배 정치인들에게 이 말을 자주 했다고 한다. 출마했으면 어떻게든 이기고 보라는 전투적 격려였다. 펠로시 본인의 정치 인생이 그랬다. 자녀 5명을 둔 전업주부로 살다 47세에 늦깎이로 정계에 입문한 펠로시가 이후 하원에서 근 40년 동안 내리 20선을 한 비결이기도 하다. 그는 유리천장도 모자라 ‘대리석 천장’으로 불릴 만큼 남성 중심인 미 의회에서 처음이자 유일한 여성 하원의장이었고, 그것도 두 번(2007∼2011년, 2019∼2023년)이나 했다. ▷펠로시의 야성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의 맞짱으로 주목받았다. 트럼프 1기에 대통령 탄핵안이 2차례나 하원을 통과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한 게 펠로시였다. 2020년 국정연설 중이던 트럼프 바로 뒤에서 펠로시가 보란 듯이 대통령 연설문을 북북 찢어버리는 장면은 여전히 생생하다. 펠로시는 “연설문이 거짓투성이라 어쩔 수 없었다. 다른 여러 선택지 가운데 그나마 예의 바른 대응이었다”고 했다. ▷당시 트럼프의 과격한 정책들이 실현되지 않은 건 백악관 내 ‘어른들의 축’과 함께 펠로시를 주축으로 한 민주당의 견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펠로시는 요즘도 관세 폭탄을 남발하고 초강경 이민 정책을 펴는 트럼프를 향해 “지구상 최악의 존재”라며 날을 세우고 있다. 물론 가만히 있을 트럼프는 아니다. “미친 낸시” “형편없고 역겨운 여자” 같은 원색적 비난을 수시로 한다. 수천억 원대 자산가인 펠로시를 향해 “아르마니를 입은 좌파”라고 비꼬기도 한다. ▷하원의장에서 다시 평의원으로 돌아온 펠로시는 올해 85세다. 그가 고령 리스크를 지적하며 재선 포기를 설득했던 조 바이든 전 대통령보다도 두 살 많다. 펠로시 역시 나이는 어쩔 수 없는지 내년 하원 선거에 불출마한다며 최근 은퇴를 선언했다. 이는 무슬림 출신의 30대 정치 신예 조란 맘다니의 뉴욕시장 당선 직후 나왔다. 민주당의 상징적인 세대교체라는 평가가 많다. 이번에 뉴저지 주지사와 버지니아 주지사에 각각 당선된 마이키 셰릴과 애비게일 스팬버거도 펠로시가 ‘Just Win, Baby’ 철학으로 닦아 놓은 길 위에서 정치 경력을 쌓은 워킹맘들이다. ▷트럼프는 펠로시의 은퇴 선언에 대해 “기쁘다”면서 “그는 나라에 막대한 피해를 안긴 사악한 여자”라고 했다. 아무리 앙숙이어도 40년 의원 생활을 마감하는 마당에 덕담을 건넬 법도 하지만 트럼프가 끝까지 악담을 퍼부은 건 펠로시를 혐오하는 지지층을 염두에 둔 측면도 있다. 이제 펠로시가 은퇴하면 예전처럼 트럼프를 몰아세우긴 어려워질 것이다. 트럼프 앞에서 조금도 주눅 들지 않았던 워싱턴 ‘센 언니’의 존재감이 가끔 생각날 것 같다.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 2025-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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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신광영]“하나님 덕분에 잊어버린 20자리 비번이 생각났다”

    휴대전화 압수수색 영장이 있더라도 비밀번호를 아는 피의자 머릿속까지 수색할 수는 없다. 그래서 수사기관이 압수한 휴대전화를 열어보려면 주인의 협조가 필요하다. 수사를 직접 해본 피의자들 중에 이 점을 이용한 사례가 종종 있었다. 한동훈 전 국민의힘 대표는 검찰 수사를 받을 때 자신의 아이폰 비번 24자리를 끝내 알려주지 않았다. 당시 검찰은 2년이 다 되도록 잠금을 풀지 못했고 결국 불기소했다. 알파벳, 숫자, 특수문자를 섞어 6자리로만 만들어도 가능한 조합이 560억 개가 넘는다고 하니 쉽지 않았을 것이다. 공수처 수사를 받았던 손준성 전 검사장도 휴대전화 비번을 밝히지 않았고, 그 역시 무죄가 확정됐다. ▷다만 피의자들이 휴대전화 비번을 정당한 사유 없이 숨기면 법원은 구속이 필요한 사유로 판단할 수도 있다. 그래서일까. 채 상병 사건 피의자 임성근 전 해병대 1사단장은 지난해 1월 자신의 휴대전화를 압수한 공수처 수사관들에게 황당한 반응을 보였다. 비번을 알려주고 싶지만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다. 압수수색 현장에서 변호인 권유로 급히 비번을 설정하느라 기억이 안 난다는 것이다. 하지만 휴대전화를 열어줄 의향이 있었다면서 20자리로 비번을 갑자기 설정했다는 건 앞뒤가 맞지 않았다. 게다가 임 전 사단장은 수중 수색을 지시하지 않았고, 구명 로비도 한 적이 없다고 했다. 그렇다면 휴대전화야말로 그의 결백을 입증해줄 결정적 증거인데 굳이 왜 잠갔는지 잘 설명이 안 된다. ▷17일 국회 국정감사에서도 비번이 기억나지 않는다던 임 전 사단장은 불과 3일 뒤인 20일 비번을 특검에 제공했다. “잊어버린 비번을 오늘 새벽 2시 30분경 기적적으로 확인했다. 하나님의 사랑과 가호를 느끼게 된 날”이라고 했다. 이날은 특검이 이종섭 전 국방부 장관 등에 대해 구속영장을 청구한 날이다. 다음 날 임 전 사단장 영장도 청구됐다. 이제라도 수사에 협조해 구속영장 발부를 피해 보려는 시도란 분석이 나왔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 덕에 비번이 생각났다는 그의 주장이 법정에서 통할지는 의문이다. ▷채 상병 특검 수사는 관련자들 주장이 하나씩 거짓으로 드러나는 과정이었다. 김태효 전 국가안보실 1차장이 ‘VIP 격노설’을 실토했고, 김건희 여사에게 구명 로비를 한 혐의를 받는 이종호 전 블랙펄인베스트 대표가 송호종 전 경호처 경호부장에게서 (임 전 사단장을) 도와달란 요청을 받았다고 시인했다. 채 상병 사건 1년 전쯤 이 전 대표와 저녁 식사를 하는데 임 전 사단장이 동석했다는 배우 박성웅 씨의 진술도 나왔다. 임 전 사단장은 이 전 대표를 전혀 모르고, 박 배우와도 식사한 적이 없다고 부인하고 있다. 하지만 또 모를 일이다. 20자리나 되는 휴대전화 비번이 번뜩 떠올랐듯 두 사람과 식사했던 기억이 기적적으로 생각나지 말란 법이 없다.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 2025-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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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폴란드 ‘범고래’ 프로젝트에 도전장 낸 K-잠수함[횡설수설/신광영]

    잠수함 2, 3척이 운용되는 해역에는 누구도 쉽게 침범하지 못한다는 말이 있다. ‘바닷속 유령’이라고 불릴 만큼 탐지가 어려워 적군으로선 잠수함이 어디에 있는지, 어떤 무장을 했는지 알 수 없어 도발 억제 효과가 크다.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러시아의 위협을 실감한 폴란드가 최근 심혈을 기울이는 게 바로 이런 잠수함 도입이다. 폴란드는 북쪽으로 발트해가 있는데 러시아 주력 해군 기지인 칼리닌그라드가 코앞이라 발트해를 러시아에 내주면 내륙에 갇히게 돼 위험해진다. ▷제2차 세계대전 때도 독일에 침공당한 폴란드의 마지막 자존심을 지켜준 게 잠수함이었다. 당시 독수리란 뜻의 ‘오제우(Orzeł)’로 불렸던 폴란드 잠수함이 임무 중 독일군에 억류될 뻔했다가 대원들이 극적으로 잠수함을 타고 탈출해 영국 해군에 합류했다. 이후 독일 병력 수송선을 침몰시키는 등 저항의 상징으로 부각됐다. 하지만 폴란드는 2차대전 이후 소련 체제를 거치며 잠수함이 노후화돼 지금은 쓸 만한 게 없다고 한다. ▷폴란드가 추진 중인 신형 잠수함 도입 사업인 ‘오르카(Orka) 프로젝트’는 ‘오제우’를 계승한 명칭이다. 오르카는 바다의 지능적 포식자로 유명한 범고래를 뜻한다. 강력하고 은밀한 작전 능력을 갖춘 잠수함 체계를 갖추겠다는 취지다. 3척 수주 규모가 3조4000억 원에 달하고, 유지 보수까지 포함해 8조 원 규모인 대규모 방산 사업이다. HD현대와 한화오션이 단일팀으로 수주에 나섰고, 강훈식 대통령비서실장도 무기 수출 세일즈 특명을 받고 폴란드로 출국할 예정이다. ▷한국은 2011년 인도네시아에 잠수함을 수출한 적이 있다. 당시만 해도 독일에서 전수받은 기술로 만든 것이지만 이번에 폴란드 잠수함을 수주한다면 순수 국산 기술로 세계 시장에 진출하는 첫 사례가 된다. 게다가 폴란드와 수출 계약이 체결된 K9 자주포나 K2 전차 등 육군 전력에 이어 첨단 해군 전력까지 유럽에서 인정받는 계기가 될 수 있다. 현재 폴란드는 쇼트리스트(적격 후보군) 발표를 앞둔 가운데, 60조 원 규모의 캐나다 잠수함 사업에선 우리가 독일과 함께 최종 후보군에 이미 올라 있다. ▷오르카 프로젝트에는 독일 프랑스 스웨덴 등도 뛰어들었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유럽연합(EU) 회원국들에 한국이나 미국산 대신 유럽산 무기를 사자고 촉구하기도 했다. 하지만 K잠수함의 기술력은 위협적이다. 배터리 강국답게 리튬이온 배터리를 탑재해 수중 작전 지속 시간을 획기적으로 높였고, 건조 속도는 유럽에 비해 1.5∼2배가량 빠르다. 무엇보다 한미 조선 협력인 ‘마스가’ 프로젝트를 통해 미국이 우리의 군함 건조 능력을 세계 최고로 인정한 것도 수주 경쟁에서 플러스 요인이 될 듯하다.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 2025-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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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신광영]트럼프 “이렇게 조용한 방에 있는 건 처음”

    미국과 전 세계에서 복무하는 미군 장성은 830여 명이다. 이들이 어깨에 단 별을 다 합치면 1500개에 달한다고 한다. 지난달 30일 미국 버지니아주 해병대 기지에 이 별들이 일제히 모여들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피트 헤그세스 국방장관이 전군 장성급 지휘관 회의를 소집했기 때문이다. 4성 장군인 제이비어 브런슨 주한미군 사령관도 참석했다. ▷미 대통령과 국방장관, 전군 지휘부가 이렇게 한자리에 모이는 건 전례를 찾기 힘들다. 그 자체가 중대한 안보 위협이기 때문이다. 지휘관들이 세계 각지의 군사기지를 비워두는 것도 문제지만 군 수뇌부가 한 건물에 있으면 미국을 노리는 테러 세력에게 그만한 기회가 없다. 그런 위험까지 무릅쓰고 왜 회의가 소집됐는지 며칠 전부터 관심이 쏠렸다. 트럼프 2기 출범 후 고위 장성들이 줄줄이 해임된 걸 고려할 때 히틀러가 1934년 독일군 장군들을 모아놓고 충성 맹세를 요구했던 것과 비슷한 일이 벌어질 수 있다는 우려도 나왔다. ▷1500개의 별들 앞에 선 헤그세스 장관은 이발과 면도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턱수염과 긴 머리를 해선 안 되고, 뚱뚱한 군인들도 용납할 수 없다고 했다. 중대장이 병사들에게 할 법한 내무생활 훈시였다. 잔뜩 군기를 잡았지만 정작 본인은 예멘 후티 공습 관련 기밀 정보를 개인 메신저로 가족들에게 유출한 혐의로 조사를 받고 있다. 야전에서 잔뼈가 굵은 백전노장들은 주 방위군 소령으로 잠시 근무했던 헤그세스 장관의 정신교육을 묵묵히 들었다. 그런 얘기였으면 그냥 이메일로 보내는 게 나았을 것이라고 미 언론은 지적했다. ▷무대에서 바통을 이어받은 트럼프는 불법 이민 단속을 자화자찬하면서 장군들에게 미국 내부로부터의 전쟁에 나서자고 했다. 단속 반대 시위대를 적으로 규정하고, 민주당 지지세가 강한 뉴욕 로스앤젤레스 시카고 등 대도시들을 군대 훈련장으로 사용하라고도 했다. 트럼프는 “내 말이 마음에 안 들면 나가도 된다”면서도 “물론 그러면 당신들의 계급과 미래가 사라지겠지만…”이란 단서를 붙였다. 내 정책에 따르기 싫으면 알아서 옷을 벗으라는 경고로도 들리는 말이었다. ▷이날 회의는 트럼프와 헤그세스의 정치 토크쇼에 가까웠다. 세계 최강 군대의 지휘관들을 앉혀놓고 정신교육 하는 것 자체로 자신들의 힘을 과시하는 효과가 있을 것으로 기대한 것 같다. 하지만 트럼프 마음대로 안 된 게 있었다. 2시간이 넘는 연설 내내 830여 명의 장군들은 단 한 번도 박수를 치지 않았고 시종일관 무표정했다. 미 언론에선 사실상의 묵언 저항이란 평가도 나왔다. 트럼프가 “이렇게 조용한 방에 있는 건 처음”이라고 했을 정도다. 군 경험이 일천한 국방장관과 군 미필인 대통령의 모욕적 언사 앞에서 평정심을 지키는 게 장군들이 치른 ‘내부’와의 전쟁이었을 것이다. 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 2025-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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