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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5월은 검찰이 김건희 여사 사건으로 격변에 휩싸인 한 달이었다. 5월 2일 이원석 당시 검찰총장이 디올백 의혹 전담수사팀 구성을 지시하며 수사 의지를 드러낸 게 발단이었다. 윤석열 전 대통령은 4일과 12일 박성재 당시 법무부 장관과 각각 75분, 42분간 통화하며 긴박하게 움직였고, 13일 검찰 고위직 인사가 단행됐다. 이 전 총장은 패싱한 채 이뤄진 그 인사로 ‘찐윤’ 이창수 서울중앙지검장이 기용되고 김 여사 수사팀 지휘부가 몽땅 물갈이됐다. 김 여사가 박 전 장관에게 “내 수사 어떻게 돼 가고 있느냐”고 물은 게 그로부터 이틀 뒤다. ▷그 5월 말 김 여사의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사건을 수사한 서울중앙지검 반부패2부에서 작성했던 문건이 최근 논란이 되고 있다. 민중기 특검은 이 문건이 검찰의 봐주기 수사를 뒷받침하는 단서라고 보고 2차 종합특검에 넘겼다. ‘불기소처분서’라는 폴더에서 발견된 한글파일에 김 여사의 예상 진술과 함께 증거 불충분으로 무혐의 처분한다는 취지의 내용이 담겨 있었다고 한다. 문건이 마지막으로 수정된 게 그해 5월 24일로 이 전 지검장 부임 9일째 되는 날이었다. ▷그것만으로 검찰이 김 여사에 대해 ‘봐줄 결심’을 했다고 볼 수는 없다. 기소와 불기소로 나눠 수사 상황을 정리한 문건일 수도 있다. 하지만 당시는 김 여사 조사조차 이뤄지지 않아 기소 여부를 검토할 단계가 아니었다. 김 여사 대면조사는 두 달 뒤에야 이뤄졌는데 벌써부터 ‘불기소’ 표현이 수사팀 문건에 등장한 것이다. 김 여사 조사 역시 “검찰청사로 불러 조사하라”는 총장 지시까지 어기고 수사팀이 대통령경호처 부속 건물로 찾아가 ‘황제 조사’ 논란을 빚었다. ▷이창수 전 지검장이 수사 검사에게 “유사 사건의 무죄 판례를 참고하라”는 메시지를 보냈다는 보도도 나왔다. 보도에 따르면 이 지시는 수사팀이 김 여사 기소 여부를 저울질하던 9월에 이뤄졌다. 사실상의 무혐의 처분 가이드라인일 수 있다고 특검이 의심하는 이유다. 이 전 지검장은 “판례 검토는 사건 처분 전 거쳐야 하는 절차”라고 해명했다고 한다. 그 말이 맞을 수도 있지만 지검장이 지휘 계통인 차장검사와 부장검사를 건너뛰고 일선 검사에게 직접 지시하는 건 흔치 않은 일이다. ▷서울중앙지검은 2024년 10월 김 여사의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혐의에 대해 불기소 처분했다. 공교롭게도 5개월 전 작성했던 문건과 같은 결론이다. 특검이 확보한 문건 중에는 수사팀의 수사보고서도 있는데 수사 결과 발표 후에도 수정된 흔적이 있다고 한다. 보고서 작성 날짜를 최초 작성일로 바꿀지 검사들끼리 대화한 내역이 발견됐다는 보도도 있다. 수사 과정이 정상적이고 떳떳했다면 이렇게까지 할 이유는 없어 보인다. 밝혀내야 할 의혹이 아직 많다.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이스라엘 정보기관 모사드의 정보력은 지난달 28일 이란 최고지도자 알리 하메네이 암살 때도 유감없이 발휘됐다. 하메네이 경호원들의 차량 번호와 출퇴근 경로를 꿰고 있던 모사드는 수도 테헤란의 교통 카메라를 해킹해 이들이 비밀 관저로 향한다는 사실을 파악했다. 또 외부에서 경호원들에게 위험 징후를 알리지 못하도록 주변 기지국을 교란시켜 전화를 걸어도 ‘통화 중’ 신호가 뜨게 했다. 결국 관저 지하 벙커에 모인 하메네이와 주요 수뇌부는 이날 오전 9시 45분 일거에 제거됐다. ▷모사드의 정보력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마음도 움직였다. “이란을 침공하면 며칠 내에 반대 세력을 규합해 정권을 붕괴시킬 수 있다”는 모사드의 보고가 트럼프의 공습 결정에 영향을 줬다는 미 언론의 보도가 이어지고 있다. 트럼프는 지난달 28일 이란 공격 직후 이란 국민들에게 “우리가 작전을 끝내면 정부를 장악하라. 이란 정부는 여러분의 것이 될 것”이라고 했다. 트럼프는 반정부 시위로 이란 정권이 흔들리는 지금이 핵을 폐기시킬 적기로 본 것 같다. ▷하지만 수뇌부가 사라지면 정권이 무너질 것이란 정보는 오판으로 드러나고 있다. 전쟁 한 달이 다 되도록 이란 정권은 건재한 상태다. 핵심 세력인 혁명수비대는 무력 집단인 동시에 석유 등 국가 기간산업까지 장악하고 있다. 이런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백업 시스템을 촘촘히 갖춰 수뇌부가 제거되면 곧바로 후계자가 채워지는 구조다. 하메네이보다 더 강경한 차남이 뒤를 잇게 된 가운데 반대 진영은 구심점 없이 무력한 상태다. 국민들 역시 “변화를 원하지만 전쟁을 원했던 건 아니다”라면서 봉기의 동력도 낮아졌다. ▷정보기관의 오판은 적을 과소평가하고 스스로는 과대평가할 때 종종 벌어진다. 모사드 역시 그런 오류에 빠져 2023년 하마스의 이스라엘 기습을 막지 못했다. 당시 모사드는 하마스가 가자지구 국경 일대에서 공격 예행연습을 하는 징후를 포착하고도 이스라엘군 수뇌부를 교란하려는 수작인 것으로 폄하했다. 또 아이언돔 같은 최첨단 방공망을 과신해 하마스가 픽업트럭과 패러글라이딩으로 뚫고 들어올 줄은 예상치 못했다. ▷이번 이란 전쟁에선 모사드가 미국을 끌어들이기 위해 ‘의도된 오판’을 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모사드를 제외한 이스라엘의 다른 정보기관들은 체제 붕괴가 어려울 것이라고 평가했지만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는 모사드의 정보를 앞세워 트럼프를 설득했다고 한다. 네타냐후는 며칠 전 “이란 국민들이 정권을 무너뜨릴지 확실히 말할 순 없다. 무너지진 않아도 약해지긴 할 것”이라며 한발 빼는 태도를 보였다. “이스라엘이 왜곡된 정보로 전쟁을 유도했다”면서 사임한 미국 대테러 수장의 말대로 가장 큰 오판을 한 건 모사드의 정보를 덥석 문 트럼프일 수 있다.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김건희 여사는 2022년 6월 나토(NATO) 순방 때 착용했던 반클리프아펠 목걸이의 출처에 대해 계속 말을 바꿔왔다. 순방 직후 논란을 빚자 “지인에게 빌린 것”이라더니 지난해 윤석열 전 대통령 탄핵 이후엔 “2010년경 모친 선물용으로 모조품을 구입한 것”이라고 했다. 특검이 김 여사 오빠의 처가에서 목걸이를 찾아냈을 땐 “오빠에게 선물한 모조품”이라고 또 말을 뒤집었다. 그 와중에 해당 모델이 2015년 처음 출시됐다는 제조사 측 설명도 나왔다. ▷김 여사의 주장대로라면 원본이 나오기 전에 만든 짝퉁을 모친에게 선물했고, 12년 뒤 영부인 신분으로 빌려서 착용했으며, 이를 다시 오빠에게 ‘선물’했다는 말이 된다. 서희건설 이봉관 회장이 “내가 목걸이를 줬다”고 자수하면서 김 여사의 해명은 더 들어볼 것도 없는 수준이 됐다. 이후에도 수수 혐의를 줄곧 부인하던 김 여사는 17일 매관매직 혐의 사건 첫 공판에서 반클리프 목걸이를 받았다고 결국 인정했다. 김 여사 오빠의 처가에서 나온 모조품은 심어놓은 조작 증거란 사실까지 자백한 셈이 된다. ▷김 여사는 이 회장에게서 받은 반클리프 목걸이에 대가성은 없었다고 부인하고 있다. 6000만 원대 목걸이가 윤 전 대통령 당선 축하 선물에 불과하다는 주장이다. 이 회장은 당선 직후인 2022년 3월 김 여사에게 목걸이를 줬다. 그 후 석 달 뒤 이 회장의 맏사위인 박성근 전 검사가 한덕수 당시 국무총리 비서실장에 임명됐다. 이 회장은 김 여사에게 사위의 관직을 부탁했다고 한다. 김 여사가 목걸이를 받고 얼마 뒤 “목걸이가 아주 예쁘다. 도와드릴 게 없느냐”고 하자 이 회장이 인사 청탁을 했다는 게 특검의 수사 결과다. ▷김 여사는 통일교 금품 수수 사건 재판에서도 샤넬 백 2개를 받았다고 뒤늦게 시인한 적이 있다. 이때도 받은 건 맞지만 대가성은 없었다고 했다. 이런 ‘일부 시인’ 전략은 실제 효과를 발휘했다. 재판부가 샤넬 백 중 1개를 대가성 없는 단순 선물로 판단해 유죄 리스트에서 빼준 것이다. 가방이 전달됐던 바로 그 시점에 청탁이 이뤄진 건 아니라는 이유에서였다. ▷통일교 사건 1심 판결은 ‘매관매직 재판’에 임하는 김 여사에게 힌트가 됐을 수 있다. 서희건설로부터 받은 반클리프 목걸이는 우겨봐야 소용이 없다는 판단 아래 받은 사실을 인정하되, 목걸이를 받던 그 자리에서 청탁이 있었던 건 아니니 대가성을 부인해 무죄를 받겠다는 전략일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이번에도 통일교 1심 판결 때와 같은 결과가 나올지는 미지수다. 한 전 총리는 비서실장 인사에 대해 “윤 전 대통령이 우리 박 전 검사님을 딱”이라며 ‘윤심(尹心) 인사’였다는 걸 밝힌 바 있다. 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자궁암 3기 판정을 받던 때 나이가 38세. 그전까진 크게 배신당한 적 없는 삶이었다. 연세대 경영학과와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 졸업 후 JP모건을 거쳐 글로벌 빅테크 메타에서 커리어의 정점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메타에서 실적 꼴찌 부서를 맡아 1년 만에 1등으로 끌어올렸고, 임원 승진이 눈앞에 보였다. 당시 일하던 싱가포르 본부에서 미국 본사가 있는 실리콘밸리로 옮길까도 계획하던 때였다. 바쁜 와중에 주 3회 필라테스, 건강식도 꾸준히 챙겼다. 그런 그에게 3기 암이라니. 죽음은 노크하고 들어오지 않았다. 갑자기 벽을 부수고 들어와 멱살을 틀어잡았다.》최지은 메타 아시아태평양본부 전무(42)는 2022년 2월 ‘생존율 50%’란 말과 함께 암 진단을 받았다. 그 후 6개월간 독한 항암 치료를 견뎠건만 암은 오히려 폐까지 번져 있었다. 자궁암 4기, 9개월 시한부 선고가 내려졌다. 다행히 그는 살아남아 말기 암 4년 차의 삶을 이어가고 있다. 최 씨는 죽음에 가까워지고 나서야 보이는 것들이 많다고 증언한다. 생사의 경계에서 목격한 것들을 ‘그렇게 나는 다시 삶을 선택했다’란 책으로 냈다. 현재 싱가포르에 살고 있는 최 씨를 11일 화상 인터뷰로 만났다.―삶의 전성기로 가던 때에 암이 찾아왔다.“세상에 사기당했다는 분노, ‘뭐 하러 열심히 살았나’ 하는 허무함이 정말 컸다. 매사에 최선을 다하면 보답이 온다는 게 세상 이치라고 믿고 노력하며 살아왔는데 나를 지탱해 온 세계관이 산산조각 나버렸다. 내가 잘못한 게 뭐라도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쥐 잡듯이 원인을 찾으려 했다. 직장에서 내게 스트레스를 줬던 누군가 때문에 암에 걸렸다는 생각에 사로잡히기도 했다.”―항암 치료는 어떤 마음으로 견뎠나.“치료를 잘 받아서 내가 있던 자리로 되돌아가겠다는 회귀 본능이 강했다. 조금도 뒤처지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별별 노력을 다했다. 6시간 동안 독한 주사를 맞는 와중에도 10개 넘는 국내외 신문을 구독해 읽었고, 업계 소식도 계속 업데이트했다. 한국의 젊은 암 환자들과 얘기해 보면 다들 비슷하다. 치료받는 동안에도 자신을 몰아붙인다.”―6개월간 독한 항암치료를 견뎌냈지만 결국 시한부 9개월 선고를 받았다.“삶의 의욕을 완전히 잃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커튼 걷을 힘도, 이 닦을 힘도 없었다. 어차피 죽을 텐데 이가 몇 개 썩는 게 대수인가. 밥 먹어서 뭐 하나, 씻어서 뭐 하나 이런 생각뿐이었다. 그런 무기력한 마음으론 1분 1초가 너무 고통스럽다. 암은 저를 한 번 죽이지만 이런 고통이 저를 수천 번 죽이는 것 같았다.”극한의 절망에서도 선택지는 있었다최 씨는 지인들로부터 암 환자들 투병 수기 등 100권이 넘는 책 선물을 받았다. 그중 가장 큰 위로를 받은 게 ‘죽음의 수용소에서’란 책이었다. 아우슈비츠 생존자이자 정신의학자인 빅터 프랭클이 나치 수용소에서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기록한 책이다. 극한의 절망에서도 어떤 태도로 대응할지는 나의 선택에 달려있다는 게 책의 핵심 내용이다.―책의 어떤 점에 위로를 받았나.“종일 우울해하며 침대에 누워만 있는 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조차 제 선택이란 걸 알게 됐다. 통화 한 번 하자는 친구, 바람 쐬러 가자는 가족들을 다 거부하고 가만히 죽음을 기다리는 선택을 나도 모르게 했던 거다. 책을 읽고 나서 선택지가 항상 있을 거란 생각을 하게 됐다. 사소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선택을 하나씩 해나갔다.”―그럼에도 ‘현타’가 올 때도 있었을 거 같다.“물론 그렇다. 싱가포르 병원의 제 주치의는 막연한 희망을 품게 만드는 의사가 아니었다. 절대 상황을 포장해서 좋게 말하지 않는다. 다만 안 좋은 소식을 전할 땐 쓰고 있는 마스크를 내리고 말했다. 그 순간만큼은 마스크 뒤에 숨지 않고 인간 대 인간으로 대하는 것에 따뜻함을 느꼈다. 주치의는 결말이 정해져 있다고 하더라도 결말로 가기까진 다양한 이야기와 서사들이 있다고 했다.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이라도 암과 죽음 사이에 여러 선택지가 있다는 걸 깨닫게 해주는 말이었다.”―암 환자에게 힘이 되는 말이란 어떤 걸까.“다 잘될 거야” “암과 잘 싸워보자” 같은 말들은 고맙지만 도움이 되지는 않는다. 저 역시 항암 치료란 걸 받기 전까진 열심히 ‘투병’을 하겠다고 생각했는데 6시간 동안 앉아서 몸에 독이 들어가는 걸 바라보면서 암은 싸우고 자시고 할 게 아니란 걸 깨달았다. 제가 가장 크게 위로를 받은 건 ‘버텨보자’는 말이었다. ‘어렵겠지만 우리 버텨보자. 끝까지 네 옆에 있을게’라고 했던 친구의 말이 큰 힘이 됐다.”최 씨는 항암 치료로 체중이 10kg이나 늘었고, 얼굴은 여드름투성이에 조기 폐경까지 왔다. 차마 거울을 볼 엄두를 내지 못했다. 하지만 오히려 암 말기가 되자 자신을 마주할 용기가 생겼다고 했다. 미래를 빼앗기고 나서야 현재를 살게 되는 아이러니였다.―3기보다 4기 치료가 더 즐겁다고 책에 썼다.“3기 때만 해도 빨리 나아서 살도 빼고 예전 모습이 돌아오면 거울을 다시 보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4기가 되면서 그때로 돌아갈 여지가 없어지니까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거울 보는 것도 ‘지금 아니면 언제?’ 하는 생각이 들었다. 또 폐 부위 수술을 하면서 옆구리에 큰 흉터가 생겼는데 그 흉터도 비로소 만질 수 있게 됐다. 병원 갈 때도 예전엔 추리닝만 입다가 좋아하는 옷과 모자를 여러 벌 사놓고 매번 바꿔 입었다. 그런 뒤부턴 병원 가는 게 기다려지기까지 했다. ‘어차피 죽을 텐데 뭐 하러 하나’가 아니고 ‘어차피 죽을 테니 마음대로 해보자’라고 생각하니 삶의 주도권을 조금씩 되찾게 됐다.”―삶의 우선순위도 달라지게 되나.“죽음에 가까이 갈수록 우리가 중시하는 정답, 경쟁, 결과 같은 것들은 아무 힘이 없다는 걸 알게 됐다. 얼마나 빨리 승진했고, 돈을 얼마나 벌었는지는 전혀 생각나지 않는다. 대신 시행착오로 헤매던 순간, 사람들이랑 티격태격하고 ‘으쌰으쌰’ 하던 과정들이 생각난다. 내 인생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만한 ‘톱 10’의 순간들을 필름처럼 떠올린 적이 있다. 남편하고 여행 갔다가 기차를 놓쳐서 함께 벙쪘던 장면, 회사에서 사고 수습하느라 팀원들하고 밤새우고 배달 음식 시켜 먹으면서 떠들던 장면 같은 것들이다. 그 10개의 공통점이 있다면 현재에 온전히 머물렀던 순간들이다.”―현재를 살아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실천이 참 어렵다.“사회에서 가르쳐주지 않지만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게 현재를 살 수 있는 능력인 거 같다. 특히나 성취 지향적인 한국에선 극소수만, 그것도 엄청난 일을 겪지 않고선 갖기 어려운 초능력이다. 미국 투자회사나 빅테크에서 일하면서 성공한 사람들을 자주 봐왔다. 그런 사람일수록 현재를 살지 못하는 것 같고, 불행한 모습도 많이 본다.”모두가 만류했던 복직… 원래의 나를 찾고 싶었다1년간 치료를 받아온 최 씨는 2022년 말, 폐에 전이됐던 암이 사라졌다는 소식을 들었다. 생사의 고비에서 삶 쪽으로 무게 추가 일단 기운 것이다. 물론 항암 치료는 계속해야 하고 3개월마다 암 검사를 받은 뒤 의사를 만나 다음 3개월이 허락되는지 통보받는 삶이긴 하다. 그렇게 주어진 ‘인생 2회차’에 그는 메타로의 복직을 선택했다.―주변에서 많이들 복직을 만류했을 텐데….“거의 모두가 반대했다. ‘그 몸으로 미친 거 아니냐’, ‘세계여행이라도 가지 그러냐’는 의견이 많았다. 게다가 회사에 구조조정도 있었고 제가 일했던 부서까지 없어진 상태였다. 복직하지 말라는 신의 계시인가도 싶었다. 하지만 생존만을 목표로 1년을 살다 보니 내가 원래 어떤 사람이었는지 다시 찾고 싶었다.”―삶에서 일이란 어떤 의미인가.“일을 하면서 키웠던 근육이 암 치료에 큰 힘이 됐다. 일하면서 배운 게 딱 하나 있다면 불확실성 속에서 의사결정을 하는 방법이다. 암이야말로 그것만큼 불안정한 게 없다. 아무리 최악의 상황이 오더라도 최선의 의사결정을 할 것이란 자신감을 일에서 배웠다고 생각하니 다시 일해보고 싶었다. 또 휴직하는 동안 큰 힘이 돼준 게 회사 동료들이어서 다시 돌아온 모습을 보여주고도 싶었다.”―일을 대하는 마음이 예전과 다른가.“예전엔 평가, 승진, 연봉 이런 것들이 중요했다면 이젠 아무 의미가 없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재미있고, 의미가 있는지가 중요하다. 그게 아니라면 내일 당장 그만둬도 상관없다. 또 이력서에 넣을 만한 커리어보다 내 부고에 쓸 만한 커리어를 쌓으려고 한다. 동료들에게 어떤 사람으로 기억될지를 생각한다. 예전 팀원 중에 대중 앞에서 말하는 걸 힘들어하던 친구가 있었는데 제가 기회를 주고 북돋아 줬더니 나중에 큰 무대에서도 잘하게 됐다. 그 친구가 ‘제 인생의 전환점을 함께해 줘 고맙다’고 했는데 그런 교감이 죽기 전에 생각나는 소중한 기억이다.”3개월마다 새로 얻는 삶… 하루하루가 생생하다최 씨는 복직 1년 반 만에 전무로 승진했다. 결과에 연연하지 않고 일하다 보니 성과가 자연스레 따라왔다고 한다. 예전엔 한 달이, 1년이 훌쩍 흘러갔지만 지금은 기억할 만한 하루를 만들자는 마음으로 지낸다. 하루하루가 생생하고 삶의 감각이 훨씬 풍요로워졌다고 한다. 그렇게 3개월 단위로 연장되는 삶을 3년 넘게 살고 있다.―의사를 만나러 가는 날은 기분이 어떤가.“여전히 불안하고 무섭다. 전날에는 잠도 잘 못 잔다. 하지만 3개월을 공포 속에 허비하면 너무 허망할 것 같아서 불안감과도 친하게 지내려 한다. 의사를 만나기 전날엔 지난 3개월을 복기해본다. 후회 없이 살았다는 생각이 들면 진료실 문을 열고 들어가는 게 조금은 쉬워진다. 3개월마다 삶을 정리하고, 새로운 3개월을 부여받는 삶…. 저주받은 삶인 것 같지만 좋은 것도 많다. 가끔 아쉬운 3개월을 보냈다면 ‘이번 생은 망했으니 다음 생엔 재밌게 살아보자’라며 게임처럼 생각하기도 한다.”―결국 삶에서 가장 중요한 건 뭘까.“지금 내 눈앞에 있는 사람인 것 같다. 사람과의 교감만큼 기억될 만한 순간이 있을까. 가족이든, 친구든, 오늘 처음 만난 사람이든 함께하고 있는 시간을 온전히 즐기려고 한다. 아마 다음 달에 의사를 만나러 갈 땐 인터뷰로 했던 오늘 대화가 생각날 것 같다. ‘맞아, 그때 그런 얘기를 나눴지’ 하면서. 제 이야기로 누군가가 용기를 얻는다면 저에게도 큰 의미가 있다.”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미국 이민세관단속국(ICE)을 지휘하는 크리스티 놈 국토안보장관은 ‘아이스 바비’란 별명을 갖고 있다. 바비 인형처럼 ‘풀 메이크업’을 하고 화려한 복장으로 ICE의 불법 이민자 단속 현장에 나타나 사진 찍히는 걸 즐기기 때문이다. 지난해 엘살바도르에 있는 테러범 수용소까지 방문해선 문신 가득한 죄수들을 배경 삼아 영상을 찍기도 했다. 영상에서 놈은 불법 이민자들도 이런 신세가 될 거라고 경고했는데 더 주목을 끈 건 반짝이던 그의 7500만 원짜리 롤렉스 손목시계였다. ▷놈은 장관 임명 전부터 구설에 자주 올랐다. “두 살 손녀도 엽총을 갖고 있다”고 말할 정도로 총기 옹호론자인 그는 반려견이 거칠다는 이유로, 기르던 염소가 냄새를 풍긴다는 이유로 총으로 쏴 죽였다고 밝혀 논란이 됐다. 불법 이민에는 누구보다 강경해서 사우스다코타 주지사 시절 텍사스 국경 봉쇄를 위해 주 방위군을 5차례 파견했다. ▷놈은 ‘반(反)이민’ 선봉에 섰지만 선을 넘는 일이 잦았다. ICE가 조지아주 현대차 공장을 급습해 한국인 근로자 다수를 구금했을 때도 놈은 “법대로 추방할 것”이라며 사태를 키웠다. 당시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은 “비즈니스도 생각해야지, 머리를 쓰라”며 놈에게 한마디했다고 한다. 놈이 악명 높은 국경순찰대 간부를 발탁해 이민 단속 작전을 맡긴 것도 실책이었다. 작전이 벌어질 때마다 유혈 진압이 자행됐고 급기야 미니애폴리스에서 시민 2명이 ICE 총에 맞아 사망했다. 놈은 그 두 사람이 테러리스트라면서 여론에 불을 질러 트럼프를 곤혹스럽게 했다. ▷트럼프는 5일 놈을 경질했다. 이란에 대한 군사 공격으로 보복 테러 우려가 고조되는 가운데 국토안보부 장관을 해임한 배경을 두고 해석이 다양하다. 전쟁으로 지지도가 떨어지는 상황에서 무차별적인 이민자 단속을 지속하는 게 부담스러웠을 수 있다. 하지만 놈 못지않게 불법 이민에 강경한 종합격투기 선수 출신 상원의원을 후임으로 지명한 걸 보면 그걸론 설명이 충분치 않다. ▷놈이 보좌관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으며 공금으로 호화 전용기를 타고 다니고, 직원들에게 갑질을 했다는 것도 공(公)과 사(私)의 경계가 흐린 트럼프의 윤리 기준을 고려할 때 해임 사유가 되긴 어려워 보인다. 놈이 이민 정책을 홍보한다면서 TV 광고에 3300억 원의 예산을 쓴 게 유력한 원인으로 거론된다. 정책보단 말을 탄 자신을 주인공으로 부각시켜 “셀프 홍보용”이란 비판이 거세다. 놈은 3일 의회 청문회에서 그런 광고에 왜 막대한 예산을 썼느냐고 추궁을 받자 트럼프가 승인했다고 해명했다. 트럼프는 “전혀 몰랐다”며 펄쩍 뛰었다. 트럼프로선 놈의 책임 떠넘기기가 괘씸하기도 했겠지만, 자기 홍보에 열을 올리는 행태가 자신이 가장 싫어하는 ‘보스의 스포트라이트를 가로챈 죄’에 해당했을 수도 있다.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그가 스위스행 비행기를 탔던 지난달 9일은 오랫동안 준비해온 디데이였을 것이다. 조력자살을 도와줄 현지 기관에 이미 수많은 의료기록을 영어로 번역해 보내고, 화상 인터뷰도 여러 번 했을 것이다. 회복 가능성이 없고, 자발적 선택임을 확인받는 절차는 까다롭고, 비용도 수천만 원이 들었을 것이다. 60대인 그는 중증 폐섬유증 환자라고 한다. 폐가 점점 굳어 숨을 쉴 수 없게 되는 불치병이다. 그런 고통을 안고 홀로 스위스까지 가서 눈을 감겠다는 건 보통 결심이 아니다.조력사 찬성 82%에도 멀기만 한 공론화 다만 가족의 지지를 얻지는 못했던 것 같다. 그의 유서를 본 자녀들의 신고로 출동한 경찰은 출국 15분 전 그를 기내에서 내리게 했다. 경찰은 그를 설득해 돌려보냈다고 한다. 하지만 스위스행 비행기에 오르기 위해 삶의 마지막 힘을 쥐어짰을 그를 무슨 수로 설득할 수 있었을지 의문이다. 말기 암 엄마의 스위스행에 동행했던 남유하 작가의 책 제목 ‘오늘이 내일이면 좋겠다’는 엄마가 조력사 전날 실제로 했던 말이다. 하루라도 빨리 고통에서 해방되고 싶은 마음의 표현이었다. “칼로 콱콱 찌르는 통증”에 시달려온 엄마는 스위스에 간다는 희망이 생기면서 삶의 활력을 찾았다고 한다. 스위스에 가려면 걸을 수 있어야 한다며 허리 수술을 받았고 장시간의 비행을 견디기 위해 구토를 참아가며 링거를 맞았다. 통증을 끝낼 방법이 죽음밖에 없는 환자들에겐 조력사가 그만큼 절실하다. 그들은 자신을 만류하는 가족들에게 “날 포기하지 말아 달라”고 애원한다고 한다. 고통 속에서 죽어가도록 놔두지 말라는 것이다. 의료적 도움을 받아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조력사에 대한 한국인들의 찬성 여론은 생각보다 높다. 지난해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온라인 설문조사 결과 82%가 찬성했다. 하지만 조력사에 대한 사회적 논의로는 나아가지 못하는 사이 스위스로의 탈출구가 열려 있다 보니 일부 형편이 되는 환자들만 통과할 수 있는 좁은 문이 돼 가고 있다. 또 그들마저도 가족이 동행하다 자살방조죄로 처벌될까 봐 혼자 타국에서 잠드는 경우가 많고, 비행기를 못 탈 정도로 건강이 악화될 것을 우려해 ‘디데이’를 몇 달 앞당기는 상황도 생긴다. 조력사를 당장 허용해야 한다고 주장하려는 건 아니다. 스위스, 네덜란드, 캐나다 등 합법화된 나라들을 보면 신중히 따져야 할 문제가 적지 않다. 처음엔 말기 암 환자 등으로만 제한했다가 정신질환자 등으로 대상이 조금씩 확대되는 현상이 일부 나타나고 있다. 조력사 허용 범위가 넓어지면 자칫 중증 질환 노인들이 치료비가 없거나 자식들에게 부담을 줄까봐 존엄사를 택하게 될 가능성이 있다. 호스피스 등 완화의료 시스템을 개선하기보단 쉬운 선택지로 존엄사를 남용하는 부작용도 생길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우려 때문에 조력사가 시기상조라고 선을 긋고 논의를 미룰 일은 아니다. 조력사 허용 국가들은 대부분 도입 논의가 시작된 후 20∼30년간의 사회적 숙의와 판례 축적 과정을 거쳤다. 조력사법이 지난해 하원을 통과한 프랑스는 정부 주도로 184명의 시민 토론단을 구성해 이들이 도출해낸 합의가 입법의 토대가 됐다. 그런 과정을 거치고도 하원에서 찬반이 3 대 2로 갈렸을 정도로 논쟁이 치열했다. 지금 시작해도 도입까진 한 세대 걸려 고령화 속도가 빠른 우리는 존엄사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미뤄질수록 고통받는 사람이 많아질 수 있다. 조력사 허용 법안이 국회에 계류돼 있고 헌법재판소도 관련 소원을 심리 중이지만 사회 전반의 공론화 없이는 전향적인 단계로 나아가기 힘들다. 존엄사를 허용할지 말지, 허용한다면 어떤 기준을 둘지 지금부터 논의를 시작해도 제도화까진 한 세대가 걸릴 수도 있는 사안이다. 더는 미룰 여유가 없다. 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김건희 여사의 통일교 금품 수수 사건은 받은 사람(김 여사)과 심부름한 사람(건진법사 전성배 씨) 재판이 따로 열렸다. 두 재판부는 윤영호 전 통일교 세계본부장이 전 씨를 통해 김 여사에게 세 번에 걸쳐 8000여만 원어치 금품을 건넸다는 사실을 똑같이 인정했다. 그런데 김 여사에게 가장 먼저 전달됐던 802만 원짜리 샤넬 백의 불법성을 두고 판결이 엇갈렸다. 심부름한 전 씨는 유죄, 받은 김 여사는 무죄로 나온 것이다. ▷그 샤넬 백은 윤석열 전 대통령 취임 한 달 전인 2022년 4월 7일 김 여사에게 건네졌다. 서울중앙지법 형사27부(재판장 우인성)는 당시 김 여사와 윤 전 본부장 사이에 당선 축하 인사가 오갔을 뿐 별다른 청탁을 하진 않아 김 여사에게 알선수재죄 적용이 안 된다고 봤다. 반면 24일 전 씨에게 중형을 선고한 같은 법원 형사33부(재판장 이진관)는 가방이 전달될 때 윤 전 본부장의 묵시적 청탁이 있었다면서 유죄로 판단했다. ▷우인성 재판부는 샤넬 백이 의례적 선물일 뿐이라고 봤지만 당시 윤 전 본부장의 행보는 예사롭지 않았다. 가방 전달 보름 전인 그해 3월 22일 당선자 신분이던 윤 전 대통령과 1시간가량 독대해 통일교 추진 사업을 설명했다. 가방 전달 1주일 전에는 김 여사가 윤 전 본부장과 통화하며 “제가 (한학자) 총재님을 비밀리에 뵙고 인사드리겠다”면서 “전 씨와 의견 나눠달라”고 소통 창구를 정해줬다. 실제로 가방 전달 며칠 뒤 윤 전 본부장은 전 씨에게 “큰일을 도모할 게 있다”며 김 여사와의 만남을 요구했고, 유엔 제5사무국 유치 관련 청탁을 전달했다. 가방을 건넨 당일에는 청탁이 없었을지 몰라도 전후 상황을 보면 샤넬 백이 단순 호의 표시였을지 의문이다. ▷형사 법정에선 ‘의심스러울 땐 피고인의 이익으로’ 판단하는 게 원칙이다. 김 여사와 전 씨가 받는 알선수재 혐의는 일반인이 공무원 업무를 알선하면서 뒷돈 받는 행위를 벌하는 죄이다. 이때 대가성은 종합적으로 판단해야 한다는 게 대법원 판례다. 금품 수수 경위와 시기 등 전후 사정을 두루 살펴야 하고, 알선과 금품 사이에 포괄적 대가관계가 있다면 그걸로 족하다는 것이다. ▷김 여사 재판부의 논리대로라면 이권 청탁에 앞서 ‘빌드업’ 목적으로 고가 선물을 하는 걸 용인하는 꼴이 된다. 일각에선 금품부터 먼저 바치고, 청탁할 땐 빈손으로 가라는 법원 가이드라인이 나온 것이란 비아냥도 나온다. 김 여사가 샤넬 백 받은 사실을 재판 막바지까지 부인하고 관련자들에게 허위 진술을 지시한 것만 봐도 당사자들끼린 이심전심으로 문제가 될 수 있다는 걸 알았다는 얘기가 아닐까. 이해관계로 얽힌 사람들 사이에서 802만 원짜리 공짜 선물이 있을 리 없다는 걸 판사들만 모르는 건지 궁금하다. 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내란 사건과 김건희 여사 사건의 판결이 하나둘 나오고 있다. 법정엔 검사들이 있지만 이들은 국민 한 명 한 명의 대리인일 뿐이다. 만약 12·3 계엄이 성공했다면, 그래서 김 여사가 지금도 매관매직을 일삼고 국정을 주무른다면 최대 피해자는 국민일 수밖에 없다. 재판의 당사자로서 판결을 판단할 권리가 국민 각자에게 있다. 앞으로도 줄줄이 이어질 재판을 우리는 어떻게 관전해야 할까.입법자들이 상상도 못 했던 초유의 사건들 법관은 판결할 때 사후적 관점과 사전적 관점을 함께 고려한다고 한다. 미국의 법학자 워드 판즈워스가 쓴 책 ‘법은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나오는 대목이다. 과거에 벌어진 일을 공정하게 따져 죄에 걸맞은 책임을 지우는 게 사후적 접근이라면, 사전적 접근은 미래에 유사한 범죄를 예방하기 위해 판결로써 바람직한 규칙을 선언하는 것을 뜻한다. 두 관점이 균형을 이룰 때 판결은 설득력을 갖는다. 단순 절도범에게 경각심을 주겠다며 이례적 중형을 선고하면 억울한 피고인들이 생기고, 횡령을 저지른 기업인에게 집행유예를 남발하면 횡령해도 남는 장사라는 잘못된 신호를 주게 된다. 그런 점에서 한덕수 전 총리 1심 판결은 어떨까. 재판부는 한 전 총리가 국무회의를 소집해 계엄에 합법적 외관을 씌워주고, 국정 2인자로서 견제의 의무를 저버린 죄를 무겁게 봤다. 23년형이 선고된 것에 대해선 응분의 죗값이란 의견과 함께, 내란 모의에 관여하거나 주도적으로 가담한 것도 아닌데 너무 가혹한 거 아니냐고 보는 시각도 있다. 하지만 사전적 관점에서 보면 울림이 큰 판결이 아닐 수 없다. 나라가 위태로워질 걸 알면서도 불의에 동조하는 기회주의적 공직자에게 어떤 후과가 돌아오는지, 고위 공직에 오를 사람은 얼마나 무거운 책임을 각오해야 하는지를 선명히 보여줬다. ‘제2의 한덕수’를 막는 효과가 강력할 것이다. 김 여사 사건 1심 재판장은 선고에 앞서 의심스러울 땐 피고인에게 유리하게 판단하고, 권력자든 아니든 차별이 없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어떤 경우에도 예외 없이 적용돼야 할 중요한 원칙이다. 재판부가 도이치모터스 주가 조작과 명태균 관련 혐의를 무죄로 본 것도 사건 기록을 다 보고 심사숙고한 법관의 판단이 존중돼야 한다. 불만이 있더라도 2심, 3심까지 지켜보는 게 우리의 사회적 합의다. 다만 김 여사가 통일교로부터 숙원 사업을 도와주는 대가로 그라프 목걸이와 샤넬백 등 7000만 원이 넘는 금품을 받은 사실이 인정됐음에도 형량은 징역 1년 8개월에 그쳤다. 알선수재죄 법정형이 5년 이하 징역이고 통상적인 선고 범위에 있다고 하더라도 이런 판결은 대통령 배우자가 국정을 농단하고 뒷돈을 챙긴 죗값이 고작 1, 2년 감옥살이라는 메시지로 발신된다. 법의 단죄가 이 정도라면 ‘V0’란 존재의 해악에 충분한 경종이 될지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제2의 한덕수, 제2의 V0 막는 판결이어야 솜방망이 판결을 탓할 게 아니라 이런 상황에 대비해 미리 법을 고쳐놓지 그랬냐고 할 수도 있다. 사법부는 이미 벌어진 일을 다루고, 입법부는 앞으로 벌어질 일을 다루기로 역할 분담을 한 건 맞지만 그 경계가 늘 명확하진 않다. 국회가 모든 구체적 상황을 상정해 법을 만들 순 없기 때문에 법관이 개별 판결을 통해 공동체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기도 한다. 더구나 위로부터의 내란과 영부인의 국정 사유화는 입법자들의 상상력을 훌쩍 뛰어넘는 초유의 사건이다. 참고할 만한 판례도 거의 없다. 그렇다면 지금의 재판은 처음 가보는 길을 통해 질서를 바로 세우는 과정일 수밖에 없다. 입법의 미비와 판례의 부재를 핑계 삼아 법관이 뒤로 숨어선 안 되는 시기인 것이다. 과거를 공정하게 돌아보면서도 미래에 정의로운 선례를 남기는 판결이 나와야 한다.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사건 기록을 보고 고소장을 작성해보세요. 챗GPT보다 잘 써야 통과입니다.” 요즘 로펌 채용 면접장에선 신입 변호사들이 인공지능(AI)과 일전을 치러야 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고 한다. 로스쿨을 갓 나온 변호사보다 AI가 일을 더 잘한다는 평가가 나오면서 벌어지는 현상이다. 판례 분석은 물론이고, 변호인 의견서나 계약서 작성까지 웬만한 건 AI가 척척 해준다는 것이다. 로펌 업무에 특화된 AI 서비스까지 나오고 있어 월 500만 원에 초짜 변호사를 고용하느니 월 10만 원대 구독료로 AI를 쓰는 게 낫다는 얘기도 나온다. ▷최근 미국에서 열린 전미경제학회에선 “앞으로 법조계는 진로로 정하지 말라”는 말이 충격을 안겼다. 다름 아닌 미 노동통계국장의 경고다. 로펌들이 기본 업무를 AI에게 맡기고 있어 더 이상 신입 변호사를 뽑지 않는다는 것이다. ‘앤스로픽’ 같은 AI 기업들도 계약서 검토나 소장 작성 등 변호사 기능을 탑재한 서비스를 속속 내놓고 있다. ▷회계사 업계는 ‘AI 비상사태’가 더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규칙에 따라 데이터를 정리, 분석하는 회계사 업무는 빅테이터에 강한 AI가 특히 위력을 발휘하는 분야다. 예전엔 주니어 회계사 여러 명이 달라붙어 하던 일도 베테랑 회계사 1명과 AI의 조합이면 충분하다고 한다. 전문직도 초임 땐 선배의 손발 역할을 하며 일을 배우는데 그런 조수 업무는 AI로 충분해 신입이 설 자리가 좁아지는 것이다. 그 결과 국내 ‘빅4’ 회계법인에서 지난해 채용한 신입 회계사는 몇 년 새 30% 넘게 줄었다. 공인회계사 시험에 합격하고도 실무교육 받을 곳을 구하지 못한 청년 회계사들은 정부에 선발 인원을 줄이라며 요즘 시위를 벌이고 있다. ▷의사 역시 AI 시대에 안전한 직업이 아니다. 엑스레이 등 영상 판독에선 AI가 의사보다 정확하다는 평가가 많고 빅테크들은 건강 관리를 도와주는 ‘헬스 AI’를 경쟁적으로 출시하고 있다. 미국 유타주에선 AI가 의사 대신 처방할 수 있도록 허용했더니 500건의 응급 사례에서 인간 의사의 처방과 99% 일치했다고 한다. 게다가 환자의 말을 끝까지 들어주는 AI가 의사보다 공감 능력이 뛰어나다는 평가도 있어 만만히 볼 상대가 아니다. ▷AI의 일자리 습격은 의외로 선망받는 고소득 전문직에서 먼저 벌어지고 있다. 기업의 장부, 법원의 판례, 의사의 진료 차트는 수십 년간 정형화된 데이터로 쌓여 있어 AI가 학습하기 쉽기 때문이다. 전문직의 진입 장벽은 사람에겐 높아도 AI에겐 가뿐히 넘을 수 있는 문턱인 것이다. 더구나 인건비가 비싼 전문직일수록 AI로 대체했을 때 비용 절감 효과가 커서 AI 기업들이 더 눈독을 들이고 있다. 공부 열심히 해서 법대 가고, 의대 가야 미래가 보장된다는 말이 유효할 날도 얼마 남지 않은 것 같다.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윤석열 전 대통령의 취임 후 첫 해외 일정인 2022년 6월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정상회의 참석 때 주목을 끈 건 김건희 여사가 착용했던 ‘나토 3종 세트’였다. 목걸이, 귀걸이, 브로치를 합해 1억 원이 넘었는데 특히 6200만 원짜리 반클리프아펠 목걸이를 두고 논란이 컸다. “빌린 것”이란 김 여사의 주장은 윤영호 당시 통일교 세계본부장에겐 김 여사에게 더 가까이 접근할 힌트가 됐다. 건진법사 전성배 씨를 통해 김 여사에게 샤넬 백 등을 제공해 왔던 윤 전 본부장은 전 씨에게 “영부인이 귀금속을 빌리시냐. 그러지 마시라. 우리가 사드리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 말은 한 달 뒤 바로 실행에 옮겨졌다. 특검 수사 결과에 따르면 윤 전 본부장은 아내에게 6000만 원대 반클리프아펠 목걸이를 사오도록 했다. 하지만 서울 시내 명품관을 다 돌아봐도 해당 목걸이의 재고가 없었다. 급하게 비슷한 가격대의 다른 제품을 샀는데 그게 그라프 목걸이였다고 한다. 그라프는 김 여사 ‘나토 3종 세트’ 중 귀걸이의 브랜드였다. 만약 윤 전 본부장의 원래 계획이 실현됐다면 김 여사는 반클리프아펠 목걸이만 2개를 받았을 것이다. 이미 넉 달 전 서희건설 측이 반클리프아펠 목걸이를 사서 김 여사에게 선물했다. ▷당시 통일교 2인자로 불렸던 윤 전 본부장은 김 여사 선물을 전 씨에게 건넬 때마다 문자메시지를 보내 꼬박꼬박 흔적을 남겼다. “취임 기념으로 제가 직접 골랐다” “여사님께 지난번과는 다른 고가 선물을 드리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등의 문자를 보내면 전 씨는 “여사님이 아주 좋아하신다” “큰 선물이라고 놀라셨지만 별말씀 없었다. 연락 주실 거다” 같은 답신을 보냈다. ▷윤 전 본부장의 다이어리에서는 ‘K법사(건진법사) 미팅: 한옥집(잔금+선물)’이란 메모가 발견되기도 했다. 그가 전 씨를 만났던 날 직접 적어 놓은 것이다. 그의 다이어리와 문자 내역에는 김 여사 외에 다른 인물들이 언급됐을 가능성도 있다. 윤 전 본부장은 특검에서 전재수 의원 등 여야 정치인들에게도 금품을 건넸다고 진술한 바 있다. 금품을 제공한 입장에선 증거를 남겨놔야 받은 쪽이 민원 사항을 외면하지 못할 것으로 생각했을 수 있다. ▷전 씨는 윤 전 본부장에게서 받은 금품을 김 여사에게 전달하지 않았고 모두 분실했다고 줄곧 주장해 왔다. 하지만 재판에서 결국 전달 사실을 실토했다. 윤 전 본부장과 주고받은 문자, 통일교 측이 보관해 온 선물 영수증 등 증거 앞에서 더는 잡아떼기 어려웠을 것이다. 금품 수수를 부인해 온 김 여사도 전 씨의 자백에 통일교로부터 샤넬 백을 받은 사실만큼은 인정했다. 김 여사는 전 씨가 전해 오는 호화 명품을 받을 때만 해도 이런 증거들이 차곡차곡 쌓이고 있을 줄은 짐작도 못 했을 것이다.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인천공항에서 용유역까지 6km를 잇는 인천공항 자기부상열차는 6개 역을 오간다. 그중 한 곳의 이름이 워터파크역인데 막상 내리면 워터파크가 없다. 역사 바깥은 갈대밭이 펼쳐진 허허벌판이다. 2016년 개통할 때만 해도 리조트, 워터파크 등 개발 계획이 무성했지만 대부분 무산되면서 역 이름만 덜렁 남게 됐다. ▷자기부상열차는 2000년대 초만 해도 주목받던 신기술이었다. 열차가 자석의 힘으로 선로 위를 8mm가량 살짝 뜬 채로 주행한다. 이산화탄소 배출도, 분진·소음도 없는 무공해 기술이란 평가도 있다. 인천공항 자기부상열차가 개통된 이듬해 국토교통부는 이 사업을 ‘연구개발(R&D) 우수 사업’으로 선정했다. 지역 상권이 살아나고, 열차 기술 수출까지 하면 3조 원 넘는 경제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 후 10년이 지나도록 해외 진출은커녕 국내 지자체도 도입한 사례가 없다. ▷인천공항 자기부상열차는 R&D 비용까지 합쳐 4500억 원의 사업비가 들었다. 하루 평균 3만5000명이 탈 것으로 보고 이런 큰 예산을 들였는데 결과는 형편없었다. 가장 많았던 2019년에 4000명 정도였고, 해마다 급감해 2021년엔 325명에 불과했다. 예측치의 1%에도 못 미쳤다. 매년 적자만 80억 원이다. 2022년 운행을 멈췄다가 지난해 10월 관광용으로 재개통했지만 이용객이 여전히 하루 1000명 수준이다. ▷사업 당시 인천공항은 “일본 나고야에 이은 세계 두 번째 자기부상열차”라고 홍보했다. 실제 2005년 개통한 나고야 자기부상열차는 성공 사례로 꼽힌다. 우리와 달리 뻥튀기 예측이 없었던 게 큰 차이다. 당시 세계박람회라는 대형 이벤트가 열려 사람들이 몰렸고, 나고야 도심이나 인근 신도시로 연결돼 출퇴근·통학 수요도 확보돼 있었다. 나고야 사례가 교통이 필요한 곳에 신기술을 입힌 것이라면, 인천공항 자기부상열차는 기술 시현을 위해 노선을 만든 것에 가깝다. ▷해외 성공 모델의 겉모습만 베껴 온 대표적 사례가 용인 경전철이다. 지방선거 후보들이 캐나다 밴쿠버 ‘스카이트레인’을 구현하겠다며 너도나도 공약해 결국 2013년 개통됐다. 하지만 하루 평균 이용객은 수요 예측의 17분의 1인 9000여 명에 불과했다. 매년 수백억 원 적자를 보면서도 운영사에 수입 보장 규정까지 둬 혈세 낭비가 1조 원이 넘을 전망이다. 결국 사업을 주도했던 옛 용인시장과 수요를 부풀린 연구기관은 214억 원 배상 책임을 지게 됐다. 인천공항 자기부상열차 역시 용인 경전철의 길을 따라가고 있지만 정부와 인천공항, 인천시의 공동 사업이라 책임 소재도 열차처럼 붕 떠 있다. 수요를 똑바로 안 따지고 보여 주기용으로 의심되는 공공사업에는 책임자 이름표라도 붙여서 예산 낭비의 대가를 치르게 해야 한다.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윤석열 전 대통령 내란 사건 재판장인 지귀연 부장판사는 예능 재판을 한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만담을 하는 듯한 말투와 재판 스타일이 사건의 무게와 맞지 않는다는 지적이 적지 않다. “변호사님들 꼭 배고플 때 되면 이러시더라” “또 슬픈 표정 하지 마시고” “마이크 대시고용∼” 같은 엄숙한 형사재판에선 듣기 힘든 말들이 이어졌다. 오죽하면 방청석의 윤 전 대통령 지지자들이 “판사님 귀여우시다”라고 외친 적도 있다. 윤 전 대통령이 피고인석에서 웃음을 애써 참는 모습이 목격되기도 했다.9일이면 예능 재판도 방청석 응원도 끝 하지만 내란 법정의 웃음기가 사라질 날이 며칠 남지 않았다. 9일 마지막 공판이 열린다. 이날 검찰 구형도 이뤄지는데 내란 우두머리 혐의의 법정형은 사형 아니면 무기징역이다. 검사가 이런 무시무시한 형을 전직 대통령에게 구형하는 살벌한 상황이 예고돼 있다. “가족오락관 MC냐”는 비아냥을 듣는 지 부장판사도 표정이 굳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재판이 열리는 서울중앙지법 417호는 30년 전 전두환 전 대통령이 섰던 법정이다. 12·12, 5·18 사건으로 윤 전 대통령과 같은 혐의를 받았던 그에게 검찰은 사형을 구형했다. 이어진 최후진술에서 전 전 대통령은 국민에게 용서를 구할 기회를 날려버렸다. “국가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최선의 노력이었다. 본의 아니게 국민에게 불편과 피해를 준 점 죄송하다”고 했다. 군사 반란을 일으켰고, 무고한 시민들이 사살됐는데 “위기 해결 노력” “국민 불편”을 운운했다. 윤 전 대통령은 최후진술에서 무슨 말을 할까. 예고편 같은 장면이 2주 전 체포 방해 재판 결심 공판에서 벌어졌다. 그는 검찰 주장이 코미디 같은 얘기라고 했다. 체포영장 집행을 막기 위해 경호원들에게 총기 무장까지 지시했던 그는 이런 걸로 처벌하면 앞으로 대통령의 안전이 위태로워진다고 했다. 59분간의 일장 연설 동안 사과 한마디가 없었다. 계엄 후 1년이 지나도록 그는 자기만의 섬에서 한 발짝도 나오지 않았다. 만나는 사람이라곤 변호인들뿐이고, 법정에 가면 ‘윤 어게인’ 지지자들이 방청석을 메우고 있어 그게 세상의 중심이길 믿고 싶었을 것이다. 며칠 전엔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이 증인으로 나와 “계엄은 위기에 빠진 나라를 구하기 위한, 대통령의 고뇌에 찬 결심이었다”고 말해 박수갈채를 받았다. 토크쇼 같은 분위기에 응원단까지 와 있는 417호 법정이 그에겐 도피처였을 수 있다. 하지만 재판이 예능 같았다고 판결까지 훈훈하리란 보장은 없다. 윤 전 대통령은 대선후보 시절 전 전 대통령 옹호 발언을 한 적이 있다. “군사 쿠데타와 5·18만 빼면 정치는 잘했다고 말하는 분들이 많다”고 했다. 몰상식한 이 말 속에 윤 전 대통령도 내란죄만큼은 잘못이라고 봤다는 게 눈에 띈다. 그는 12·3 비상계엄은 다르다고 주장하지만 국회에 군경을 투입한 것 자체로 국헌 문란이라는 게 헌법재판소의 결론이다. 계엄으로 민주주의에 심각한 상처를 입히고도 반성이라곤 없는 전 전 대통령의 길을 윤 전 대통령은 고스란히 따라가고 있다.최후진술만이라도 법정 밖 국민 향하길 전직 대통령에겐 유무죄 판결이 끝이 아니다. 사후까지 이어질 역사의 법정이 기다리고 있다. 끝까지 뉘우치지 않고 부하에게 책임을 떠미는 전직 대통령이라면 아무리 중형에 처하더라도 인간적인 안타까움을 느낄 사람이 많지 않을 것이다. 국민의 연민과 용서 없이는 윤 전 대통령이 다시 일상을 되찾을 길도, 최소한의 명예를 회복할 길도 없다. 헛된 기대인 걸 알지만 윤 전 대통령이 최후진술에서라도 한 줌의 지지자들이 아닌, 법정 밖의 보통 사람들을 바라보는 용기를 내길 바란다. 두고두고 미움받는 대통령이 또 생기는 건 국민들에게도 큰 아픔이다.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윤석열 전 대통령이 썼던 용산 집무실 귀퉁이엔 비밀의 문이 있다. 3개의 문을 차례로 열면 샤워부스와 대리석 세면대가 나오고 그 옆에 건식 사우나가 있다. 편백나무 마감재에 대형 TV까지 갖춘 고급 사우나다. 그 너머엔 킹사이즈 침대가 놓인 침실이 있고, 더 들어가면 5인용 고급 소파가 있는 응접실이 나온다. 차로 5분 거리의 관저를 놔두고 집무실에 호텔 스위트룸 같은 내실을, 그것도 미로처럼 숨겨 놓았던 사실이 최근 보도로 드러났다. ▷밤낮없이 국정에 매달리느라 그런 시설이 필요했을 리는 없다. 한 언론이 계엄 직전인 2024년 11월 윤 전 대통령의 출근 시간을 추적한 결과 오전 9시 전에 집무실에 도착한 건 주말과 남미 순방을 뺀 18일 중 이틀뿐이었다고 한다. 저녁엔 측근들과 술을 마시는 날이 잦았다고 하니 집무실에 머무는 시간은 길지 않았을 것이다. 그마저도 내실에서 일정 시간을 보냈다면 국정은 도대체 언제 돌봤을까. ▷‘지각 출근’ 논란이 많았던 윤 전 대통령은 출근길 보안에도 신경을 썼다. 대통령실 주차장까지 허물어 집무실과 이어진 비밀통로를 만들었다. 이 길로 다니면 차에서 내린 뒤 출입기자들 눈을 피해 집무실로 직행할 수 있다. 취임 초 몇 달 했던 도어스테핑을 중단한 직후 개통된 걸로 보아 출근 시간대를 노출하지 않으려는 의도로 해석하는 시각이 많다. 실제로 경찰이 윤 전 대통령이 아침에 출근하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 경호차량을 비운 채로 먼저 집무실로 출발하도록 하는 ‘위장 출근 쇼’를 한 정황도 드러났다. ▷사우나든 비밀통로든 대통령실이 정식 예산을 집행하면 될 일이었다. 하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대통령실은 사우나 공사업체에 현금 결제를 제안했다가 거절당한 적이 있다. 정부가, 그것도 대통령실 관련 공사대금을 현금으로 지불한다는 건 일반적 회계처리와 거리가 멀다. 또 비밀통로를 만들 때도 국방부 예산을 끌어다 썼다. 대통령 집무실의 사우나 예산을 국회 등 외부 기관이 알지 못하도록 하려는 의도가 읽힌다. 어쩌면 대통령실에 오래 머물게 될 것으로 기대했는지도 모른다. 계엄 공범 노상원의 수첩에는 “차기 대선 대비, 모든 좌파 세력을 붕괴시킨다” “헌법 개정(재선∼3선)” 같은 내용이 있다. ▷대통령실은 호화시설 논란이 일 때마다 한결같이 부인했다. 정진석 전 비서실장은 국감에서 “아주 검소하고 초라한 대통령 관저라는 말씀을 드린다”는 말도 했다. 감사원은 용산 이전 비리 의혹을 조사하면서 1급 보안시설이란 이유로 현장 확인도 없이 감사를 종결했다. 윤 전 대통령은 계엄 후 관저에 숨어 체포영장 집행을 거부할 때도 “1급 보안시설” 핑계를 댔다. 제왕적 대통령제와 결별하겠다며 용산 이전을 밀어붙인 윤 전 대통령이 완성한 건 국민의 눈으로부터 자신을 가려줄 ‘구중심처’였다. 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미국 빅테크 기업 아마존에 북한 청년들이 몰리고 있다. 북한 공작원으로 의심되는 입사 지원자가 지난해 4월부터 최근까지 1800명에 달했다고 아마존이 며칠 전 밝혔다. 대부분 출근하지 않는 비대면 재택근무를 하는 개발자 직종에 지원했다. 구인구직용 소셜미디어인 링크트인 휴면 계정으로 가짜 프로필을 만든 뒤 신분증까지 꾸며 미국인 행세를 했다고 한다. 북한이 위장취업 요원들을 아마존에 집중 투입한 건 고액 연봉 때문만이 아니다. 쇼핑 결제 클라우드 등 서비스를 하는 아마존의 내부자가 되면 민감한 개인정보를 빼내 2차 수익도 올릴 수 있기 때문이란 분석이 많다. ▷아마존은 입사 단계에서 이들을 적발했지만 북한 요원들이 취업에 성공한 사례가 적지 않다. 포천지 선정 500대 기업 중 상당수에 북한 정보기술(IT) 인력 수천 명이 침투해 있는 것으로 미 정보당국은 파악하고 있다. 이들이 벌어들이는 외화도 연간 8000억 원에 달한다는 게 유엔의 추산이다. 4억 원 넘는 연봉을 받는 사람도 있다. 수입의 90%를 북한 당국에 상납한다고 하지만 10%만 챙기더라도 북한의 1인당 국민총소득(171만 원)보다 수십 배가 많다. ▷미국 기업들이 이런 위장취업에 당하는 건 미국인으로 신분 세탁을 한 데다 높은 성과를 내기 때문이라고 한다. 북한에서 고강도 훈련을 받아 기술이 뛰어나지만 연봉을 조금만 줘도 일하겠다고 제안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미국의 한 사이버보안회사 대표는 감쪽같이 속아 북한 기술자를 고용했던 경험에 대해 “취업 인터뷰를 100번은 해본 프로 같았다”고 했다. 이들은 미국에서 재택근무하는 것처럼 꾸미기 위해 현지인 공범까지 매수해 회사 PC를 그들의 집에 두고 중국 러시아 등지에서 원격으로 접속한다. ▷빅테크 취업은 핵, 미사일 개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어둠의 경로로 외화벌이를 해왔던 북한의 새로운 수익 모델이다. 암호화폐 해킹 등으로도 재미를 봤지만 최근엔 과감히 양지로 나온 것이다. 노트북만 있으면 세계 어느 기업에서든 돈을 벌 수 있고, 내부 정보와 지식재산권을 탈취하면 수익원을 다양화할 수 있다. 요즘엔 글로벌 방산업체에도 공작원들을 취업시켜 무기 제조 기술까지 넘본다고 한다. ▷이런 효용을 아는 북한은 IT 인재들을 ‘국가 전사’로 대우한다. 김일성종합대 등 명문대 수재들을 선발해 ‘해외 취업’ 부대에 우선 배치한다. 북한 청년들도 상위 1%급 고소득 전문직인 데다 북한 밖에서 살 수 있는 IT 기술자를 선망한다. 인터넷을 쓸 수 있어 K드라마 등 해외 콘텐츠를 접할 수 있는 것도 큰 매력이다. 한국 인재들이 의대로 쏠리듯 북한 수재들은 IT를 배우려 혈안이라고 한다. 해외 취업이 절박한 이 청년들은 북한의 어떤 지령도 필사적으로 완수하려 할 것이다.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민주화 운동이 한창이던 1970년대와 80년대 중반 서울대 도서관에선 고시용 수험서를 대놓고 펼치는 학생들이 많지 않았다. ‘행정고시’ ‘사법시험’ 같은 문구가 큼직하게 박힌 문제집을 볼 때면 주변 시선을 의식해 신문지나 책 커버로 표지를 가리곤 했다. 시위 중 잡혀가는 학생들이 많았던 그 시절, 최고 국립대에 다니는 혜택을 누리면서 고시 공부에 매달리는 건 개인의 영달을 꾀하는 것으로 비쳤다. 문민정부가 들어선 1990년대까지도 서울대는 출세보다 학문의 전당을 지향해야 한다는 학풍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1997년 외환위기를 전후로 ‘서울대 고시생’이 부쩍 늘었다. 학교 간판만으로 대기업 입사와 평생직장이 보장되던 공식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하던 시기다. 법대 고시 과목 수업에 인문대생, 사회대생, 공대생들이 몰려들어 “서울대가 거대한 고시 학원이 되고 있다”는 탄식이 나올 정도였다. 교수들 사이에선 “서울대는 고시 합격생을 많이 내는 대학이 아니라 다양한 분야의 지도자를 배출하는 곳이어야 한다”는 자성의 목소리가 높았다. 고시반이 서울대에 생기지 않았던 건 이런 분위기 탓이 컸다. ▷그랬던 서울대가 최근 5급 공채(행정고시) 고시반을 운영하기로 했다. 원래 행정대학원생만을 대상으로 하던 고시반을 학부생에게도 개방해 학습 공간과 수험 과목 특강 등을 제공한다고 한다. 학교 차원의 고시반 설치는 개교 이래 79년 만에 처음이다. 기존처럼 학교는 연구에 집중하고 고시나 취업 준비는 개인에게 맡기던 방임형 방식으론 서울대의 위상을 유지하기 어렵다는 판단이 작용한 것이다. ▷고시 합격자를 서울대가 휩쓸던 시대는 이미 저물고 있다. 행시만 보더라도 1990년대에 40%가 넘던 서울대 출신 합격자는 계속 줄어 올해엔 4명 중 1명꼴도 되지 않는다. 또 상당수 학생들이 타 대학 의대로 옮기거나 로스쿨에 진학해 과거처럼 인재를 독점하지 못한다. 사시 폐지로 신림동 고시촌도 쇠락해 수험생들이 학교 밖 민간 인프라에 기대기도 어려워졌다. 그러는 사이 다른 대학들은 지도 교수까지 붙여 고시반을 운영하고 도서관 한 층을 통째로 고시생 전용 공부방으로 만들어 줄 정도로 총력 지원하고 있다. ▷유홍림 서울대 총장은 올해 초 “우리도 고시반을 만들어 달라”는 학생들에게 이런 생각을 밝혔다고 한다. “대학은 학생이 공직자가 되도록 지원해 주기보다 공직자로서 필요한 역량을 기르도록 도와야 한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렇게 여유 부릴 때가 아니라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공직 진출은 다른 대학들이 치고 올라오고, 사기업 취업도 경력 채용 위주로 바뀌면서 서울대 졸업장의 후광 효과는 미약해지고 있어서다. 학내 고시반의 등장은 서울대 입학이 곧 성공이라는 고정관념이 더는 통하기 어려운 현실을 보여준다.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미국 뉴욕타임스(NYT)는 단어 퍼즐이나 스도쿠 같은 퀴즈 코너로도 유명한 신문이다. 퀴즈 푸는 재미로 구독한다는 이들이 적지 않다. 이런 NYT가 최근 한국에서 ‘불수능’ 논란을 빚은 영어 문항들을 퀴즈로 내보냈다. 독일 철학자 이마누엘 칸트의 법철학이나 게임 관련 뇌과학 이론 등 난해한 지문들과 함께 “당신이라면 시험에 통과할 수 있을까”라면서 독자를 ‘도발’했다. NYT를 즐겨 보는 상대적 고학력 원어민에게도 한국 고3 수험생이 풀어야 할 수능 문제가 만만찮은 도전이라고 본 것이다. NYT는 수능 출제위원장이 난이도 조절에 실패한 책임을 지고 사임했다는 소식도 함께 전했다. ▷수능 영어의 고난도는 영국 언론에도 주목의 대상이었다. 영국 BBC방송은 “고대 문자 해독 수준” “미친 시험”이라면서 올 수능 영어 문제를 소개했다. 이런 악명 높은 ‘8시간 연속 시험 마라톤’을 준비하는 데 한국 청소년들은 평생을 바친다고도 했다. 특히 비디오 게임 용어를 소재로 한 39번 문항을 공개했는데, “잘난 척하는 말장난”이다, “개념이나 아이디어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는 형편없는 글쓰기”라는 독자들의 비판도 기사에 실었다. ▷영국 일간지 텔레그래프가 수능 영어의 세 문항을 소개한 기사에는 350여 개 댓글이 달리는 등 일반 독자들의 반응도 뜨거웠다. “내가 의대 우등 졸업생인데 한 개밖에 못 맞혔다.” “옥스브리지(옥스퍼드대+케임브리지대)에 응시한 영국 수재들이나 풀 수 있을 정도”라는 반응이 나왔다. 가디언은 이번 수능에서 논란이 된 지문 속 ‘컬처테인먼트(culturtainment)’란 합성어에 주목했다. 그 말을 만든 영국인 교수는 통상적 표현이 아니어서 시험에 내선 안 된다고 지적했다고 한다. ▷영어 종주국도 기겁하는 수능의 난해함은 영어만의 얘기가 아니다. 학업 능력보단 잔기술로 정답을 찾는 경주에 가깝다는 것이다. 학원가에선 지문을 이해하지 않고도 문제 속 키워드를 지문에서 빠르게 찾아 매칭하는 ‘눈알 굴리기’ 기술을 가르친다고 한다. 차분하게 문제를 풀다간 시험 시간을 맞출 수 없어 유형별로 도식화한 뒤 수백 번 문제 풀이 훈련도 반복한다. 시험 기술로 무장한 수험생들을 상대하는 출제자들도 답답할 것이다. 지난 32년간 누적된 기출문제는 물론이고, 시중의 어떤 문제집과도 안 겹치는 문제를 내야 한다. ▷그런 토양에서 생겨난 수능 문제들은 전문가들도 쩔쩔매는 지경에 이르렀다. 영어뿐만이 아니다. 올 과학탐구 문제를 풀어본 KAIST 총장은 “풀이 기술 없인 손도 못 대겠다”며 포기했고, 유명 소설가는 “이런 국어 문제를 다 맞힐 정도면 대학 갈 필요가 없다”고 했다. 대입용 시험인데 정작 교수가 풀기 어렵고, 다 맞히면 대학 갈 필요도 없다니 수능은 도대체 뭘 평가하려는 시험인지 궁금해진다. 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12·3 계엄 날 밤 국회 본회의장은 의장에게 계엄 해제 표결을 재촉하는 의원들의 아우성으로 가득했다. “뭐해요? 그냥 처리합시다!” “거수나 기립으로 하면 되잖아요!” “계엄군이 본회의장 앞까지 왔다고요!” 당시 무장 군인들을 보좌진과 직원들이 막고 있었지만 본회의장으로 들이닥치는 건 시간문제였다. 초유의 상황인 만큼 어떻게든 통과부터 시키자는 요구가 빗발쳤다. 하지만 그때만 해도 안건 상정조차 안 된 상태였다. 우원식 의장은 의원들에게 말했다. “본회의 그 프로세스대로 하십시다.”절차의 힘으로 계엄 제압했는데… 그러자면 의석 단말기, 투표기 등 모든 시스템이 정상 작동돼야 했다. 하지만 그럴 형편이 아니었다. 많은 직원들이 국회에 못 들어오거나 계엄군과 대치 중이었다. 고작 몇 명이 익숙지 않은 일을 동시에 떠맡아야 했다. 내부 전산망도 막혀 있었다. 계엄 해제 의결안을 의원들이 볼 수 있게 띄우려면 국회 본청 몇 층 아래 사무처에서 USB에 파일을 담아와 수동으로 연결해야 했다. 이를 위해선 한글파일과 PDF 버전이 모두 필요했지만 직원도 처음 해보는 일이라 한글파일만 가져왔다. 그 바람에 다시 계엄군을 뚫고 내려가 PDF로 변환해 오는 일도 있었다. 가까스로 표결 준비는 마쳤지만 여야 협의로 정한 본회의 개회 시간까진 4분이 남아 있었다. 계엄군이 본회의장 문을 밀어붙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왜 당장 표결하지 않느냐는 고성이 터져 나왔다. 우 의장은 당시 상황을 기록한 저서에서 “그 몇 분간 평생 먹을 욕을 다 먹었다”고 했다. 1분 1초 피가 타들어 갔다고도 했다. 표결은 공지대로 오전 1시가 돼서야 시작됐다. 그날 밤 계엄군에 맞서는 것만큼이나 치열했던 건 ‘프로세스’를 지키려는 투쟁이었다. 절차가 무르익기를 기다리느라 피가 말랐던 건 윤석열 전 대통령 탄핵 때도 마찬가지였다. 헌법재판소 결정이 늦어지면서 국민들은 초조함과 싸우면서도 묵묵히 기다려줬다. 그 토대 위에서 재판관 8인 만장일치 결정이 나왔다. 문형배 당시 헌재소장 권한대행은 “판결문도 8명이 다 고치면서 한 명 한 명 의견을 최대한 반영했다”고 했다. 헌재가 왜 빨리 선고하지 않느냐는 일각의 압박에 만장일치를 포기했다면 당시의 반탄 여론을 잠재우진 못했을 것이다. 잘 지켜진 절차는 상대를 승복시키는 힘이 있다. ‘정의는 지켜져야 할 뿐 아니라 정의롭다고 보여져야 한다’는 법언은 절차적 정의가 곧 실질적 정의를 낳는다는 걸 강조한 말이다. 정의의 외관을 갖추고 있어야 심판을 받는 쪽이 결과에 수긍할 수 있고, 그래야 무엇이 불의인지 사회적 합의에 이를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계엄군이 언제 쳐들어올지 모르는 절체절명 상황에서도 국회 직원들이 PDF 파일을 다시 챙겨오고, 헌재 재판관들이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중지를 모았던 것도 정의의 외관을 완성하려는 노력이었다. “국회에서 해제시켜도 2번, 3번 계엄 하면 된다”고 했던 윤 전 대통령을 멈춰 세운 건 이런 절차의 힘이었다.‘정의의 외관’ 내팽개친 여당 사법개혁안 요즘 더불어민주당이 추진 중인 내란전담재판부 등 사법개혁 법안들에는 공통된 발상이 깔려 있다. 내란 척결이란 정의 실현을 위해서라면 정의롭게 보이지 않더라도 상관없다는 인식이다. 사법부 등 각계에서 위헌 소지를 지적했고, 당내 의원들도 우려했지만 법사위 여당 의원들은 상임위 처리를 강행했다. 그 정도로 절차적 정당성엔 관심이 없었다. 그런 법이 급조되면 계엄 세력의 역공을 허용하는 건 물론, 국민들이 어렵게 지켜낸 법치 질서마저 훼손할 수 있다. 1년 전 국회 본회의장 문밖에 계엄군이 몰려들 때도, 윤 전 대통령이 용산 관저에서 막무가내로 버틸 때도 우리는 절차를 건너뛰려는 유혹을 견뎌 냈다. 그런데 여당은 도대체 무엇에 쫓기고 있기에 졸속 입법에 집착하는지 묻고 싶다.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윤석열 전 대통령 부부의 사저 아크로비스타 지하에 있는 코바나컨텐츠는 김건희 여사가 영부인이 되기 전 주요 활동 무대였던 곳이다. 김 여사가 최재영 목사로부터 디올백을 받은 곳도, 로봇개 수입업자에게서 고가 수입 시계를 건네받은 곳도 바로 코바나컨텐츠 사무실이다. 윤석열 정부 출범 전후엔 정권에 줄을 대려는 이들의 발길이 이어지기도 했다. 김 여사는 올 4월 윤 전 대통령 파면으로 관저에서 나온 이후 주로 그곳에서 머물렀다고 한다. ▷특검은 7월 25일 코바나컨텐츠 사무실을 압수수색하면서 뜻밖의 문건을 발견했다. 명태균 공천 개입 사건에서 김 여사와 공범 혐의가 있는 김영선 전 국민의힘 의원에 대한 압수수색 영장 복사본이었다. 7월 초 집행됐던 이 영장에는 김 여사 부부가 명 씨로부터 공짜 여론조사를 제공받는 대가로 명 씨와 가까운 김 전 의원이 공천을 받도록 해줬다고 명시돼 있다. 압수수색 영장에는 혐의와 함께 압수물 내역이 적혀 있어 수사의 진도와 방향을 가늠하는 단서가 될 수 있다. ▷당시 김 여사는 몰아치는 특검 수사로 궁지에 몰려 있었다. 보름 전 윤 전 대통령이 재구속됐고, 김 여사 소환이 임박했다는 보도가 이어지던 때였다. 공천 개입은 김 여사의 주요 혐의 중 하나였다. 특검 조사에 대비해야 했던 김 여사에게 김 전 의원의 압수수색 영장은 적지 않은 도움이 됐을 것이다. ▷수사 상황을 알아보거나 보고받는 건 김 여사에게 낯선 일이 아니다. 그는 디올백 수수와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사건에 대한 검찰 수사가 한창이던 지난해 5월 박성재 당시 법무부 장관에게 “내 수사는 어떻게 되고 있느냐”고 물었다. 박 전 장관이 검찰에서 공천 개입 사건 수사 보고서를 받아 김 여사에게 전달한 정황도 포착돼 특검이 수사하고 있다. 김 여사 측에 1억 원이 넘는 이우환 그림을 제공한 혐의로 구속된 김상민 전 검사는 현직 부장검사 시절 검찰의 ‘쥴리’ 명예훼손 사건 관련 수사 동향을 김 여사에게 보고한 적도 있다. ▷윤 전 대통령이 집권하는 동안 김 여사는 자신과 관련된 수사에서 늘 유리한 고지에 있었다. 남편은 법무부 장관에게 “혐의 없음이 명백하다”면서 사건 처리 방향을 제시했고, 김 여사 본인도 장관이나 검사를 사설 변호인 대하듯 활용했다. 오죽하면 박 전 장관 휴대전화에 김 여사 번호가 ‘김안방’(안방마님의 줄임말로 추정)으로 저장됐을까. 김 여사에게 이런 습관이 남아 있어 용산에서 나온 뒤에도 공범의 영장을 통해 수사 상황을 알아보려 했던 건 아닌지 의심된다. 하지만 특검 수사에선 그것도 별 소용이 없었다. 코바나컨텐츠 사무실에서 김 전 의원 영장이 발견되고 보름쯤 뒤 김 여사는 구속됐다. 법 위에 서 있는 것 같던 김 여사의 시간도 그리 오래가진 못했다.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26일 홍콩의 31층 아파트 단지에서 불이 나 현재까지 55명이 숨지고 279명이 실종되는 최악의 인명 피해가 났다. 외벽 보수 공사 중이던 이 아파트 8개 동 중 7개 동이 화마에 휩싸였는데 다닥다닥 붙은 건물들 사이로 불이 순식간에 번졌다. 건물마다 설치된 고층 작업용 가설물인 대나무 비계가 불길이 번지게 하는 고속도로 역할을 했다. 생존자들은 “대나무가 딱딱 소리를 내며 터지고, 불붙은 대나무들이 20∼30층 높이에서 비 오듯 쏟아져 내렸다”고 전했다. ▷공사 중인 건물은 비계라고 불리는 임시 구조물에 둘러싸여 있다. 인부들이 딛고 서는 발판이자 자재를 옮기는 통로여서 공사 현장의 뼈대라고도 불린다. 철제 비계가 주로 쓰이지만 홍콩에선 대나무 비계가 많다. 비좁은 땅에 고층 건물이 빽빽하게 밀집한 지리적 특징이 낳은 산물이다. 대나무는 유연하고 자르기 쉬워 좁은 건물 틈 사이로 비계를 설치하기 쉽다. 워낙 싸고 효율이 좋아 화재에 취약하다는 치명적 단점은 과소평가돼 왔다. 하지만 잠재된 위험은 이번 화재처럼 언젠가 현실이 된다. ▷홍콩 당국이 이런 참사에 대비할 기회는 여러 번 있었다. 1996년 홍콩 갈레이 빌딩 화재 때도 대나무 비계가 불쏘시개 역할을 해 41명이 희생된 적이 있다. 고층 건물은 사다리차가 닿지 않아 속수무책이란 것도 그때 다 경험했다. 하지만 건설사들은 압도적 가성비에 숙련된 대나무 비계공들이 풍부해 오랜 관행을 포기하지 못했다. 정부도 이를 계속 방관하다 올 3월에야 단계적으로 사용을 금하기로 했지만 때늦은 조치였다. ▷화재가 난 공사 현장에는 담배를 피우는 인부들도 많았다. 아파트 주민들은 이들이 아무 데다 꽁초 버리는 걸 목격하고 여러 번 항의했지만 시정되지 않았다고 한다. 화재는 담뱃불에서 시작됐을 가능성이 높다고 홍콩 언론들은 보도하고 있다. 최근엔 강풍까지 자주 불어 안전 그물망이 떨어져 나가는 일도 많았다. 각층의 창문은 깨지지 말라고 스티로폼으로 도배돼 있었다. 이처럼 불에 잘 타는 자재와 버려지는 꽁초들, 게다가 강풍까지 불이 날 징조들은 차곡차곡 쌓여 왔다. ▷한국은 홍콩 못지않은 ‘초고층 아파트 공화국’이다. 우리는 대나무 비계를 쓰진 않지만 가연성 외장재나 필로티 주차장 같은 우리만의 ‘불쏘시개’를 안고 있다. 부산 해운대 우신골든스위트 화재(2010년), 경기 의정부 대봉그린아파트 화재(2015년) 등이 그런 사례다. 요즘 초고층 아파트엔 중간에 피난 구역이 있다고 하지만 유사시 대피 매뉴얼을 숙지하고 있는 주민들은 많지 않다. 오래된 고층 건물엔 이런 피난처마저 없다. 재난은 예상치 못했던 곳에서 갑자기 뚝 떨어지지 않는다. 위험한 줄 알면서 “설마…”할 뿐이다. 홍콩에서 지금 그 대가를 치르고 있듯, 우리라고 예외일 리는 없다.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김건희 특검이 지난달 서울 용산구의 한 건물을 압수수색 하던 중 눈앞에서 피의자를 놓쳤다. 김 여사를 건진법사 전성배 씨에게 소개해준 이모 씨였다. 특검은 그를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사건의 공범으로 보고 추적해 왔지만 그간 행방이 묘연했다. 마침 1년 전 음주 운전으로 지명수배된 상태여서 경찰의 도움으로 어렵게 소재지를 찾아낸 터였다. 하지만 특검 압수수색과 동시에 체포에 나섰던 형사들이 도착하기 직전 이 씨가 선수를 쳤다. 그는 2층 베란다에서 맨발로 뛰어내려 유유히 사라졌다. ▷특검이 이 씨를 주목하게 된 건 전 씨의 법당에서 김 여사의 예전 휴대전화를 발견하면서부터다. 그 폰에 김 여사가 이 씨와 주고받은 문자메시지가 수백 통 남아있었다. 이 씨는 주가조작에 쓰인 김 여사 계좌 중 일부를 관리했던 적이 있어 ‘제3의 주포’로 의심되는 상황이었는데 두 사람의 대화를 복원해 보니 충격적인 내용들이 쏟아져 나왔다. ▷주가조작이 한창이던 2012년 10월 이 씨는 김 여사에게 항의성 문자를 보냈다. “내 이름 노출시켜 버리면 난 뭐가 돼ㅠㅠ 도이치는 손 떼기로 했어.” 그러자 김 여사는 그런 적이 없다면서 “내가 더 비밀 지키고 싶은 사람이야∼ 오히려”라고 답했다. ‘비밀’이란 표현은 몇 달 뒤 대화에서 다시 등장한다. 이 씨가 “도이치 작전으로 내사 중이야”라고 하자 김 여사는 “나랑 하는 얘기 완전 비밀로 해. 주완이(주가조작 1차 주포의 가명)한테도”라고 답했다. ▷김 여사가 말하는 ‘비밀’이란 주가조작 일당에게 주식 매매를 맡긴 것을 뜻하는 것으로 특검은 보고 있다. 이 씨가 권오수 전 도이치모터스 회장에 대한 불신을 드러냈을 때 김 여사가 보였던 다음과 같은 반응도 그런 해석을 뒷받침한다. 김 여사는 권 전 회장에 대해 믿을 만한 사람이라면서 “난 돈을 대고 넌 기술을 대는데, 신뢰를 목숨같이 생각하고 쌓아”라고 답했다. 특검은 이 말이 김 여사가 스스로를 ‘전주(錢主)’라고 규정하면서 이 씨에 대해선 주가조작 기술을 구사하는 ‘선수’로 표현한 것이라고 보고 있다. 각자 역할을 맡은 가담자들 사이에 신뢰가 중요하다는 걸 강조한 대목이라는 것이다. ▷앞서 검찰은 이 씨를 조사하긴 했지만 기소하지 않았다. 이 씨는 2021년 검찰 조사를 받은 뒤 돌연 잠적했다가 이듬해 윤석열 정부 출범 직후 제 발로 검찰에 나왔다. 그때 검찰은 이 씨를 대면 조사하고도 조서조차 남기지 않았다. 그 후 음주 운전까지 하며 3년간 자유롭게 활보하던 이 씨는 특검 압수수색 도중 도주했다가 34일 만에 붙잡혀 결국 구속됐다. 다음 달 3일이면 김 여사 도이치모터스 사건의 결심 공판이 열려 1심이 얼마 남지 않은 상태다. 조금만 늦었더라면 검찰이 놓아준 핵심 공범을 법정에 세우지 못할 뻔했다. 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