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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수감된 윤석열 전 대통령의 구속영장을 올 1월 첫 영장과 비교하면 계엄 당일 국무회의 관련 부분이 크게 다르다. 국회가 ‘사후 통제 장치’로서 계엄을 해제할 수 있는 것처럼, 내란 특검은 관련 법령을 찾아내 계엄의 ‘사전 통제 장치’로서의 국무회의 역할에 주목했다. 국무회의를 계엄 착수 이전으로 보고, 계엄 이후 상황과 분리한 이유다. 국민의 헌법상 기본권을 극도로 제한하는 계엄은 국무위원 전원이 관계 부서장이라 전원 심의와 동의가 전제조건이라는 것이 검찰과는 다른 특검의 시각이다.“나는 공범 아닌 피해자” 허점 파고든 특검이런 차원에서 계엄 당일 국무회의가 열리는지 몰랐거나 뒤늦게 연락을 받고 이동 중에 계엄 선포를 알게 된 국무위원은 헌법상 심의권을 국무회의 주재자인 대통령으로부터 박탈당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국무위원 9명이 윤 전 대통령의 직권남용 피해자가 되는 구조다. 불참한 국무위원들이 계엄의 공범이 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만약 참석했다면 계엄에 동의했을 것”이라고 말할 확률은 없다고 봐야 한다. 특검으로선 허점을 잘 파고든 것이고, 윤 전 대통령은 허를 찔린 셈이다.윤 전 대통령은 계엄 선포 전에 국무회의가 정상적으로 열렸으며, 절차상 하자가 일부 있었더라도 계엄과 같은 비상조치에는 국무위원의 동의가 필요 없다고 주장했다. 올 2월 헌법재판소에서 “김영삼 전 대통령도 국무회의 없이 금융실명제를 실시했다”고 말한 게 대표적이다. 하지만 이 논리가 통째로 무너졌다. 영장심사 때 금융실명제 직전 국무회의가 열렸고, 동영상과 회의록이 있다는 사실이 공개됐기 때문. 인터넷 검색만으로 쉽게 찾을 수 있는 국무회의 기록을 수개월째 없었다고 주장한 것 자체가 황당한 일이다.게다가 비상계엄과 헌법 개정, 국민투표는 반드시 국무위원 전원의 부서(副署)가 필요하다는 행정안전부와 법제처의 업무 기준까지 나왔다. 공교롭게 윤 전 대통령의 고교 후배와 대학 동기 법조인이 각각 기관장이라 윤 전 대통령으로선 더 할 말이 없게 됐다. “전두환은 왜 국무위원 전원의 부서를 받았겠나”라는 말이 특검에서 괜히 나온 게 아니다.드러난 9가지 직권남용은 빙산의 일각윤 전 대통령 재수감의 의미는 간단치 않다. 전두환은 계엄 때 무장한 군인이 있는 곳에서 강압 상태로 국무회의를 연 것이 문제가 돼 내란죄 유죄가 확정됐다. 윤 전 대통령은 국무위원 동의 절차를 아예 생략한 데다 사후에 국무총리와 국방부 장관이 동의한 것처럼 선포문을 조작한 혐의도 받고 있다. 내란죄 방어가 더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특검은 국무위원들, 경호처 관계자, 대통령비서관 등 3가지 직권남용 혐의를 추가했다. 이미 계엄 당일 국회와 선관위에 병력을 부당하게 투입하는 과정에서 경찰과 군 특수전사령부 등 6개 기관에 대한 직권남용 혐의로 기소된 윤 전 대통령으로선 설상가상인 셈이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외환과 관련한 드론작전사령부뿐만 아니라 계엄 해제 표결 방해에 관여한 국민의힘 의원들까지 직권남용의 공범이 되지 않기 위해, 그간 말하지 않았던 피해 사실을 특검에서 적극적으로 진술할 수 있다.실패한 수사의 마지막 단계에서나 고육지책으로 적용하던 직권남용이라는 도구를 윤 전 대통령은 검사 때 마음껏 휘두른 업보가 있다. 그런데도 대통령 재직 중엔 직권남용형 명령에 거리낌이 없었다. 그의 직권남용 직접 피해자만 수십 명, 간접적으론 수천 명을 넘어섰다. 3대 특검 수사가 끝나면 얼마나 늘어날지 가늠하기 어렵다. 이 지경이 되도록 피해자들에게 사과 한마디 없는 윤 전 대통령의 모습에 제 살길을 찾는 ‘피해자들’은 더 많아질 것이다.정원수 부국장 needjung@donga.com}
오광수 전 대통령민정수석비서관의 임명은 세간의 예상을 벗어난 인사였다. 집권 초 대통령의 참모 인선에 대해 이례적으로 여당 내 일부 의원들이 “특수부 검사 출신에게 검찰 개혁을 맡겨선 안 된다”며 반발했다. 오 전 수석은 부동산 차명 관리 의혹이라는 신상 문제로 ‘검찰 개혁’엔 손도 대지 못하고 임명 닷새 만에 낙마했다. 하지만 대통령실은 여전히 검사 출신 고위 전관을 다음 민정수석 후보군의 하나로 검토하고 있다고 한다.두 번 실패한 ‘검사 배제 전략’ 뒤집기 이재명 대통령은 지금, 왜 검사 출신 민정수석을 찾을까. 대통령의 직접적인 설명은 없지만 대통령과 가까운 것으로 알려진 인사들의 말을 종합하면 그 이유는 단순하고, 분명하다. 과거 정부의 실패 사례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라고 한다. 이 때문에 검찰을 포함한 경찰, 공수처 등 사정(司正) 기관의 생리를 잘 알고, 오랫동안 수사 경험을 쌓은 중량급 인사라야 시행착오를 줄이면서 수사기관 개편을 완성할 수 있다고 본다는 것이다. 이 사정을 아는 한 인사는 “‘뽀대’(멋)보다 실용”이라고 설명했다. “검사가 배제되어야 검찰 개혁이 성공한다”는 현 여당의 과거 야당 시절 논리와 비교하면 역발상에 가깝다. 오래된 병법서엔 ‘무부선술(無復先術)’이라는 말이 있다. 앞서 사용했던 전술을 다시 쓰지 말라는 뜻이다. 하물며 같은 수법을 두 번 썼는데, 모두 안 통했다면 시작하기도 전에 틀린 전술이나 마찬가지다. 대표적인 것이 내란죄 수사 혼선을 부른 공수처 관련 입법이다. 검찰의 기소 독점주의를 깨기 위해 공수처를 설립했지만 정작 내란죄 같은 국가 존립이 걸린 핵심 사건의 수사 주체에 혼선이 생긴 것이다. 실무적으로 크고 작은 사건을 다뤄본 수사 경험자가 아니면 수사기관이 서로 견제하면서도 공백을 없애는 디테일을 놓치기 쉽기 때문이다.“개혁의 성패는 디테일에서 갈린다” 물론 집권 초에 신속히 개혁을 마무리하지 않으면 검찰이 결국 반격에 나서거나 훼방을 놓을 수 있다는 우려가 있는 건 사실이다. 노무현 정부 때는 대선 자금 수사, 문재인 정부 때는 ‘적폐 청산 드라이브’의 중심에 검찰이 있었고, 이때의 수사 성과를 발판 삼아 검찰의 저항이 커진 것에 대한 반면교사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좀 다르다. 3대 특검이 윤석열 정부 때 검찰의 부실 수사 의혹을 앞으로 최장 6개월간 파헤치면서 검찰의 발을 묶어 놓을 것이다. 좀 더 차분하게 계획을 짤 수 있는 시간을 번 셈이다. 과거 검찰은 국회의 법률 개정 과정에서 검사 출신 국회의원들을 통해 영향력을 행사했다. 하지만 지금은 의회 구도가 완전히 달라졌다. 집권 여당의 검사 출신 의원들은 타협이 불가능할 정도로 검찰에 적대적이다. 여당이 통과시킨 법안을 대통령령으로 뒤집을 가능성도 사라졌다. 집권 초 과반 다수 여당의 입법 추진이어서 시간에 쫓기듯 집권 후반기에 법안을 처리할 필요도 없다. 법안을 통과시킨 뒤 부작용이나 시행착오를 지켜보고 수정, 보완할 시간도 갖고 있는 것이다. 오 전 수석처럼 검사 출신 민정수석이 계속 임명될지, 비(非)검사 출신으로 바뀔지는 미지수다. 다만 누가 되더라도 지켜야 하는 원칙이 있다. 검찰이 갖고 있던 권한을 다른 기관에 나눠 준다고 끝이 아니라는 점이다. 가령 검찰만 아니면, ‘정치 수사’를 해도 괜찮다는 시각은 곤란하다. 최악의 상황에 대비해 견제 수단을 확보하고, 형사소송법의 구멍을 마지막까지 메워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고, 서둘러 기존 질서를 무너뜨리기만 한다면 ‘사법리스크 관리’ 등 다른 의도가 있다는 불필요한 오해만 불러일으킬 수 있다. 정원수 부국장 needjung@donga.com}
이재명 대통령은 대선 공식 선거운동 시작 이틀 전인 지난달 10일 경남 진주시에 들러 김장하 전 남성문화재단 이사장(81)과 함께 차를 마셨다. 바쁜 일정에도 시간을 쪼개 일부러 ‘어른 김장하’를 만나러 간 것이다. 이 대통령은 차담회 직후 “재밌는 말씀 하나를 해주시더라”고 말한 적이 있다. 김 전 이사장은 이 대통령과 구체적으로 무슨 얘기를 나눴고, 그런 말을 왜 했을까.김 전 이사장은 대선 투표일 나흘 뒤인 7일 자택 아파트 근처의 한 카페에서 자신이 설립한 명신고등학교 졸업생들을 만났다. 이 자리에서 김 전 이사장은 1시간가량 이 대통령과의 차담회 과정과 대화 내용을 자세히 설명했다. 기자도 졸업생으로서 그 자리를 처음부터 끝까지 지켰다. ● “평범한 중도 세력을 더 많이 만드는 정치”김 전 이사장은 먼저 이 대통령에게 “어느 정도 시간이 되느냐”고 물었고, “30분”이라는 답변을 듣자 조금 길게 얘기를 시작했다고 한다. “그래서 사돈 얘기를 했다. 내가 지어낸 얘기가 아니라 예전에 읽었던 책의 권두사에 있던 내용이다.” 김 전 이사장이 다시 들려준 그 내용은 이렇다. “어떤 사람이 시장에서 오랜만에 사돈을 만나 바로 집으로 모시고 가서 식사를 대접했다. 사돈은 예나 지금이나 어렵고 버겁기는 마찬가지다. 편의상 주인 사돈과 손님 사돈이라고 하자. 사돈 내외가 겸상을 하고 밥을 먹었는데, 돌이 덜그럭 씹히는 소리가 났다. 민망하기 짝이 없던 주인 사돈이 당황해서 ‘아이고, 돌이 좀 많지요’라고 했다. 손님 사돈이 ‘아니올시다. 그래도 쌀이 더 많습니다’라고 답했다. (사돈끼리의) 우문현답이었다.”김 전 이사장은 “여기서 쌀은 질서를 지키고, 정직한 삶을 살면서 국가를 위해 봉사하고 비록 뛰어나진 못해도 사회를 살찌우고, 자식을 위해 헌신하는 평범한 중도 세력이다. 이 후보한테 쌀이 더 많은 사회, 쌀이 더 많아져서 사회에 보탬이 돼서 우리나라를 발전시켜 달라고 말했다”라고 설명했다.‘대통령이 되면 중도 세력을 더 많이 만드는 정치를 하라는 취지였느냐’라는 질문에 김 전 이사장은 “그렇지. 열심히 살고 또 바르게, 부끄럼 없이 살면서 국가를 위해서 헌신하는 사람들, 뭐 특별한 사람이 되어서 나라를 위하는 것이 아니라, 중도 세력이 중심을 잡아야지”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 후보가 이제 대통령이 됐으니 그렇게 하겠지”라고도 했다.● “요란한 소수가 다수 지배, 어떻게 할건가”‘어른 김장하’의 삶은 서부경남 일대에선 널리 알려졌지만 정작 스스로 공개되길 꺼려서 다큐멘터리로 제작되기 전까지 전국적인 지명도가 높진 않았다. 올해 4월 4일 윤석열 전 대통령에게 파면 선고를 한 문형배 전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이 ‘김장하 장학생’이라는 사실이 다시 알려진 이후 김 전 이사장을 알아보는 사람들이 더 많아졌다고 한다. 얼마 전 뮤지컬 ‘의기 논개’를 보러 갔는데, 관람객인 그에게 사인을 해달라는 사람들의 줄이 길게 늘어섰다고 한다. 김 전 이사장은 퇴임한 문 전 권한대행을 지난달 2일 진주로 초청해 식사를 함께했다. 김 전 이사장은 그때 문 전 권한대행에게 “민주주의의 꽃은 다수결의 원칙인데, 요란한 소수가 조용한 다수를 지배한다. 어떻게 해결하실 건가”라고 물었다. 김 전 이사장은 “이 후보에게도 얘기했다. 우리 사회는 목소리가 큰 사람이 이기니까. 나라가 잘되게끔 판단해 주겠지”라고 말했다. 김 전 이사장을 30년 넘게 알고 지낸 한 인사는 “요란한 소수와 조용한 다수가 사돈 관계처럼 서로를 존중하고, 이해해 주는 마음을 가져야 하는 것 아니냐. 그게 김 전 이사장이 요즘 던지는 화두 같다”고 해석했다.● “우리가 우리의 앞길을 망치지 말아야 한다”김 전 이사장이 대선 후보를 만난 것은 이번이 두 번째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2002년 대선 후보 때 사전 연락 없이 남성당 한약방을 찾아온 적이 있다. 김 전 이사장은 당시 상황에 대해 “차 한잔 대접하고 아무 얘기도 안 했더니, 대통령을 모시고 온 분이 나중에 ‘왜 아무 말도 안 했느냐’고 하길래 ‘정치 9단한테 훈수를 두면 무슨 소용이냐’고 답한 적이 있다”고 말했다. 김 전 이사장은 노 전 대통령이 당선된 뒤에는 청와대 초대에도 응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엔 이 후보의 면담 요청을 받아들이고, ‘쌀과 돌’ 이야기를 꺼냈다. 김 전 이사장은 그 이유를 말하지 않았다. 다만 주변에선 비상계엄 등 특수한 정치적 상황 때문 아니었겠냐고 짐작할 뿐이다. 김 전 이사장은 ‘평범한 사람이 되려면 국민들은 어떤 자세로 살아야 하나’라는 질문을 받고 다시 그가 읽었던 책의 한 문장을 언급했다. ‘나무야 나무야’라는 책에 있는 ‘처음으로 쇠가 만들어졌을 때 나무들이 두려움에 떨었다…그러나 어느 생각 깊은 나무가 말했다…우리들이 자루가 되어주지 않는 한 쇠는 결코 우리를 해칠 수 없는 법이다’라는 부분이다. 김 전 이사장은 “그걸 읽고 덜덜 떨렸고, 그 책을 문형배에게도 선물했다. 나무를 죽이는 칼자루, 도낏자루, 호미자루 이런 손잡이가 되지는 말자. 우리가 우리의 앞길을 열어 줘야지, 우리가 제자를 위해서 길을 열어 줘야지, 우리가 우리의 앞길을 망치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또 “극과 극을 가리키는 지남철은 끊임없이 진동한다. 진동을 멈출 때 생명을 다한다고 하지 않나”라고도 했다. 2022년 5월 남성당 한약방의 문을 닫고 난 뒤 허름한 식당에서 조촐한 송별 모임이 있었다. 그때 김 전 이사장은 “저는 특별한 사람이 아닙니다. 열아홉 살 때부터 60년간 사실 너무 힘들었습니다”라는 취지로 말했다고 한다. 한 참석자는 그 자리에서 “여러 가지 유혹에도 참고 견뎌내느라 얼마나 힘드셨을까”라는 생각에 눈물을 펑펑 쏟았다고 한다. 김 전 이사장의 목소리가 울림이 있는 건 그게 좋은 말, 바른말이어서가 아니다. 온몸으로 보여준 삶을 짧고 함축적으로 표현했기 때문 아닐까.“돈 쌓으면 구린내, 흩어지면 꽃”… 한약사로 모은 재산 사회환원김장하는 누구가난에 중학교 졸업후 한약방 점원한약사 합격, 번 돈은 장학금으로명신고 설립 100억 재산 국가 기증“내 운명을 바꾸며 살아온 일이 크게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열아홉 살 때 한약사 시험을 친 일이고, 두 번째는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기로 결심한 일이다.” 김장하 전 남성문화재단 이사장이 2008년 공개석상에서 한 말이라고 한다. 경남 사천시 출생인 그는 가난으로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못했다. 중학교를 졸업한 뒤 한약방의 점원으로 일하다가 한약사 시험에 합격해 1963년 10월부터 2022년 5월까지 진주시 등에서 한약방을 운영했다. 주 6, 7일을 근무하면서 돈을 모았다.“내가 배우지 못했던 원인이 오직 가난이었다면 그 억울함을 다른 나의 후배들이 가져서는 안 된다는 것”과 “세상의 병든 이들, 곧 누구보다도 불행한 사람들에게서 거둔 이윤이겠기에 그 돈은 내 자신을 위해 쓰여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으로 번 돈을 대부분 장학금에 썼다. 1960년대 후반부터 어려운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줬다. ‘김장하 장학생’은 1000명이 넘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정확히 얼마나 많은 학생들이 그의 장학금 혜택을 받았는지조차 알 수 없다고 한다. 그는 문형배 전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에게 한 말처럼 장학금을 받은 학생들에게 “갚아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내게 갚지 말고, 이 사회에 갚으라”고 강조해 왔다.1984년에 명신고등학교를 설립해 1991년 아무런 조건 없이 100억 원대 재산을 국가에 기증했다. 이후 남성문화재단 이사장으로 재직하면서 경상국립대 등 지역 사회에 남은 재산을 기부했다. 남성(南星)은 보일 듯 말 듯한 남극노인성의 별자리에서 따온 말로 할아버지가 “앞에 나서지 말고 항상 제 역할을 하는 그런 사람이 되라”는 뜻으로 지어준 아호다. 다큐멘터리 ‘어른 김장하’를 계기로 “돈은 쌓아 두면 구린내가 나지만 흩어버리면 거름이 되어 사회에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다”는 그의 말이 회자됐다.진주=정원수 부국장 needjung@donga.com}
사정기관 고위직을 지낸 인사로부터 오래전 들은 얘기다. 대통령 임기 초 과거 정부를 상대로 한 수사의 범위와 강도에 대해 3가지 방안을 청와대에 보고했다고 한다. 구별하기 쉽도록 가장 광범위하게 수사하는 보고서엔 빨간색, 중간 정도는 노란색, 가장 약한 수사 보고서엔 파란색 표시를 했다. 그런데 정치인 출신 핵심 참모가 “왜 대통령의 적을 이렇게 많이 만들려고 하느냐”는 취지로 질책하면서 파란색 안이 채택됐다고 한다. 실제로 그 정부는 정치 보복 논란에선 비교적 자유로웠다.미래 어젠다가 수사에 묻혀선 안 돼 조기 대선이 끝나고 출범할 새 정부도 비슷한 상황에 부닥칠 것이다. 누가 되든 인기 없는 과거 정부와의 차별화를 어떻게 할지, 선택해야 할 순간이 찾아올 것이다. 그 첫 관문이 대통령의 취임사가 될 가능성이 높다. 취임식은 정치 세력의 대표가 아닌 국가 지도자로서 대통령의 권한을 위임받는 자리다. 선거 캠페인으로 갈등의 골이 깊어진 국민을 하나로 묶는 절차가 필요하고, 그 때문에 전통적으로 ‘과거와의 전쟁’보다는 미래지향적인 국민 통합을 강조해 왔다. 대표적인 것이 이번처럼 조기 대선으로 등장한 문재인 정부였다. 그는 선거 때 강조하던 ‘적폐 청산’을 취임사에서 아예 뺐다. 그 대신 국민 통합을 앞세웠다. 그런데 출범 두 달 뒤 적폐 청산이 제1 국정과제가 되더니 부처별 전방위 사정 드라이브가 거세졌다. 그 결과 수사 이슈에 미래 어젠다가 묻혔고, 견제와 균형의 원칙 아래 수사기관을 차분히 재편할 수 있는 시기도 놓쳤다. ‘내로남불이냐, 아니냐’를 놓고 국민들이 다시 갈리면서 정권 연장에도 실패했다. 만약 취임사대로 했더라면 문재인 정부에 대한 평가가 달라졌을 것이다. 더 반면교사로 삼아야 하는 건 윤석열 정부다. 민주화 이후 역대 최소 표차로 대통령에 당선되고도 취임사에서 “너무나 당연하다”는 이유로 국민 통합을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돌이켜 보면 검사 출신 대통령이 야당 수사를 노골적으로 하겠다는 숨은 의도가 있었던 것 아니냐는 의심이 든다. 야당 수사를 거칠게 하면 대통령 가족 의혹에 대해 같은 강도의 수사를 야당이 요구할 것이라는 경고도 무시하더니, 기어이 검찰은 야당 대표를 겨냥한 대규모 수사팀을 만들었다. 결과는 참혹했다. 수사는 실패했고, 오히려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해 스스로 무너졌다. 정부가 국정 과제를 힘 있게 추진하려면 국가 기강을 바로잡는 것은 필요하다. 하지만 과거 청산은 명분과 공감대가 있는 부분에 집중해야 한다. 예를 들면 비상계엄 의혹이나 윤석열 전 대통령 부부 관련 의혹 수사는 당연히 정치 보복의 예외로 볼 수 있다. 다만 과하지 않은 강도와 방법으로 진상 규명을 해야 한다. 앞서 설명한 대로 ‘파란색 사정 신호등’을 따라가지 않으면 뒤탈이 날 수 있기 때문이다. 지지 않고 영원히 이기는 권력은 없어 선거로 지도자를 뽑는 제도에선 영원한 승자가 없다. 승리 뒤에 반드시 패배가 뒤따르고, 시간의 문제일 뿐 여당은 언젠가 야당이 되고, 야당은 다시 여당이 될 수 있다. 우리 사회는 비상계엄 이후 정치적, 경제적 파산 위기에 내몰려 있다. 이 와중에 파면된 전직 대통령은 아스팔트 세력과 한 몸처럼 움직이면서 오히려 사회 갈등을 부추기고 있다. 계엄 사태를 완전히 극복하는 길은 과거 청산만으론 한계가 있다. 대통령부터 먼저 양보하고, 반대 세력을 포용해 ‘국민 모두의 대통령’이 되어야 한다. 권력을 나눌수록 민주주의가 더 커진다는 말도 있지 않나. 이번에는 국민들이 듣고 싶어 하는 말을 먼저 하고, 그 약속을 지키는 대통령이 나왔으면 한다.정원수 부국장 needjung@donga.com}
이재명 대선 후보에 대한 대법원의 유죄 취지 파기환송 선고에 놀란 더불어민주당은 최근 두 가지 법률안 개정을 추진하고 있다. 피고인이 대통령이 되면 형사재판이 즉각 중단되는 형사소송법 개정과 이 후보의 대선 출마를 가로막을 뻔했던 허위 사실 공표 조항을 삭제하는 공직선거법 개정이다. ‘전두환 처벌법’처럼 누군가를 응징하려는 취지가 아닌 정반대의 입법은 흔치 않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법 개정은 입법부의 권한이라 법 해석 기관인 사법부는 따를 수밖에 없다. 그런데 민주당은 해당 법안을 소관 상임위 등에서 순서대로 처리했다가 대선 투표일 이후 국회 본회의에서 표결하겠다고 한다. 그렇게 되면 현 정부의 법률안 거부권을 피할 수 있고, 차기 대통령에게 한 치의 공백 없이 곧장 적용될 수 있다고 보는 것 같다. 정권 교체기라는 이례적 상황에 대한 이례적 조치라는 것이 민주당의 설명인데, 정말 빈틈없는 대비책일까. 한마디로 전혀 그렇지 않다.법안 공포 위한 국무회의부터 충돌 예상 대한민국의 모든 법률은 국회 본회의 통과 후 15일 이내에 공포해야 시행된다. 공포 없이 시행되는 법률은 없다. 헌법상 법률 공포는 대통령의 권한인데, 공포 전에 국무회의 심의를 거쳐야 한다. 과반 출석에 3분의 2 동의를 받아야 하고, 법률안에는 국무위원들이 부서한다. 인수위 없이 출범하는 차기 정부에선 과거 정부의 국무위원으로 법률안을 심의하는데, 법무부는 “대통령직이 범죄의 도피처로 전락할 우려가 있다”며 이미 반대 입장을 냈다. 다른 국무위원들이 동참한다면 심의 통과를 장담하기 어렵다. 차기 대통령이 집권 초기 사실상 자신을 위한 법안을 통과시키기 위해 국무회의를 소집하는 것은 정치적 논란을 부를 수 있다. 무엇보다 자신과 부인 관련 특검법을 번번이 거부했던 윤석열 전 대통령을 떠올리게 할 것이다. 해결해야 할 국정 과제가 쌓여 있을 집권 초기에 이런 일에 초점이 맞춰지는 것 자체가 리더십에 금이 가는 일이다. 대통령이 회피하고 국무총리가 심의할 수 있지만 지금은 총리도 대행의 대행 체제다. 새 총리는 국회 인준이 필요하고, 다른 국무위원을 임명하기까지 수개월이 더 필요하다. 실속 없이 정치적-법적 논란만 키울 것 대통령이 법률안을 공포하지도, 거부권을 행사하지도 않은 상태에서 15일이 지나면 헌법엔 예외적으로 국회의장이 추가 5일 안에 법률을 공포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헌법상 가능한 일이지만 대한민국 역사에서 선례가 없다고 한다. 초유의 예외적인 방식으로 법률안을 시행한다면 ‘1인 입법’에 대한 비판이 더 거세질 수 있다. 새 정부 출범 첫날 시행은 불가능하고, 법 시행까지 첩첩산중인 셈인데 더 큰 문제는 법적 논란이다. 우선 이해충돌방지법 위반 소지가 생긴다. 국민 전체의 봉사자여야 할 대통령의 헌법 수호 의지를 문제 삼을 수도 있다. 대선 후보를 도우려던 개정 의도와 달리 되레 곤혹스럽게 할 수도 있다는 얘기다. 만약 이 후보가 당선된다면 이 후보의 재판을 맡고 있는 5개의 재판부가 일제히 재판을 5년간 멈출 수 있다. 가능성이 높은데, 이 경우 입법은 불필요하다. 물론 어느 한 곳이 재판의 계속 여부를 판단하기 위해 대통령 재임 중 형사상 소추를 금지하는 헌법 84조의 해석을 헌법재판소 등에 요구할 수 있다. 그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한 입법일 것이다. 하지만 헌법의 문제라 법률 시행으로 그런 절차를 막을 순 없다. 오히려 위헌적 시비를 안고 있는 법률 개정 움직임은 헌재의 심리를 착수하거나 또는 압박하는 기폭제가 될 수 있다. 실리도, 명분도 모두 놓칠 수 있는 ‘숨겨진 함정’에 빠지지 않으려면 지금이라도 법 개정을 멈춰야 한다.정원수 부국장 needjung@donga.com}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이 12·3 비상계엄 관련자 중 내란 혐의로 처음 기소될 때쯤 형법상 ‘불능(不能) 미수’를 주장하려 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불능 미수는 백색 가루를 독약으로 알고 먹였는데, 사실은 설탕이라 사망하지 않는 것처럼 실행의 수단이나 대상의 착오로 결과 발생이 불가능한 경우를 말한다. 계엄은 선포됐지만 기본권을 침해할 의도가 없었다거나 결과적으로 아무런 위험이 발생하지 않았다는 취지였을 것이다. 하지만 군경 투입 상황까지 공개된 마당에 이런 사후적 방어는 통하기 어려웠을 것이고, 없던 일이 된 줄 알았다. 그런데 비슷한 논리를 윤석열 전 대통령 측이 탄핵 심판 때 들고나왔다. 더불어민주당의 입법 폭주나 탄핵 남발을 경고하기 위한 일시적이고 평화적인 대국민 경고성 호소형 계엄이라는 것이다. 헌법재판소는 결정문에서 “계엄 선포 즉시 대통령이 국민의 기본권을 제한할 수 있어 경고성 호소형 계엄은 존재할 수 없다” “국회의 계엄 해제 요구권 행사를 방해해 포고령의 효력을 상당 기간 지속시키고자 했다”라며 윤 전 대통령 측 주장을 전부 탄핵했다.형사 법정은 尹 주장의 팩트를 검증하는 자리 헌재에서 완패한 주장을 형사 재판에서도 그대로 이어가는 것은 상식적이지 않다. 최소한 변호사를 바꾸거나 기존 논리를 일부라도 개보수하는 게 정상이다. 하지만 윤 전 대통령은 14일 내란 혐의 첫 공판에서 “군정 실시를 위한 계엄이 아니다”라며 같은 주장을 되풀이했다. 그는 공소 사실의 첫 장부터 마지막 장까지 열거하면서 “난센스” “코미디”라며 93분간 후배 검사를 힐난했다. 윤 전 대통령 스스로 전두환 내란 사건 판결을 분석했다고 했는데, 과연 거기에 적힌 대통령의 권한, 계엄 요건이나 절차를 제대로 이해한 것인지 의구심이 들 정도다. 그의 법정 진술을 자세히 보면 더 심각하다. “감사원장 탄핵 등은 넘어갈 수 없는 문제라고 판단해 대통령이 가진 비상조치권을 통해 국민이 나서길 바라는 마음에서 계엄을 선포했고, 병력은 질서 유지 목적으로 투입했으며, 계엄 선포 전 어느 때보다 활발한 국무회의가 있었다.” 헌재에서의 주장 판박이다. 윤 전 대통령이 첫 재판서 이렇게 못 박으면 변호사가 방향을 바꾸기 어려울 것이다. 대선 원인 제공자의 말, 다른 이슈 흡수할 것 이쯤 되면 피고인의 방어 논리 대신 법정을 정치적 목적 달성 등 다른 수단으로 활용하려고 작정한 것처럼 보인다. 예전에 어떤 정치인이 패소한 논리를 법정에서 포기하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서 “사실을 인정하는 순간 지지자를 잃기 때문”이라고 설명한 적이 있었다. 지지자 없는 정치인은 존재할 수 없지만 법정에서 지지자를 앞세우는 건 몰락을 재촉하는 길이기도 하다. 사실 윤 전 대통령은 수사기관에서 왜 계엄을 선포했는지 등을 제대로 조사받은 적이 없다. 공수처 조서엔 날인을 거부해 법정에 증거로 제출되지도 않았고, 검찰은 ‘명태균 게이트’ 특검 등을 계엄 이유로 추정할 뿐이다. 이번 형사 재판이 제대로 된 계엄 진상 규명의 수단인 셈이다. 그런데 형사 법정은 피고인이 하고 싶은 말만 할 수 있는 곳이 아니라 판사와 검사의 질문에 답해야 한다. 법관의 지휘 아래 윤 전 대통령의 발언 중 어떤 부분이 팩트인지, 허위인지 검증될 것이고, 모든 말이 중계된다. 윤 전 대통령은 대선 투표일 전까지 총 5차례의 공판에 출석한다. 조기 대선의 원인 제공자인 그가 매회 쏟아낸 ‘불신의 말’은, 그를 대선 한복판에 두면서, 동시에 다른 대선 이슈를 블랙홀처럼 빨아들일 것이다.정원수 부국장 needjung@donga.com}
헌법재판관들은 공개 변론 때 가운데 부분이 Y자 모양인 자주색 법복을 입고 심판대의 재판관석에 앉는다. 헌법재판이 가장 발달한 독일의 것을 본뜬 것이라고 하는데, 어려운 법률 문제를 최종적으로 해결하는 열쇠를 뜻한다고 한다. 헌법재판소는 이 열쇠의 의미를 ‘잡다한 세류가 모이는 대해처럼 모든 것을 포용하는 최후의 보루’라고 설명한다. 1988년 헌재 출범 이후 많은 것이 바뀌었지만 법복만은 시종일관 같은 것을 쓰는 이유일 것이다.이 법복은 김양균 초대 재판관이 제안한 것이라고 한다. 그는 대통령이 지명한 검사 출신이었지만 재직 당시 검찰의 처분을 취소하는 결정을 여러 번 내려 정부와 검찰을 난처하게 했다. 다른 초대 재판관도 “국회에서 선출되었다고 국회 눈치를 보고, 대통령 지명으로 되었다고 대통령 의중을 살피고, 대법원장 지명으로 되었다고 대법원 위상이나 걱정한다면 헌재에서 무슨 일을 하겠나”라며 소신대로 했다. 인준 과정에 얽매이지 말고 불편부당하게 심판하라는 것이 처음부터 헌재의 정신이었던 셈이다.재판관 임명 놓고 탄핵 결과 바꾸려는 여야정치적 파장이 가장 컸던 두 차례 대통령 탄핵 심판 때도 이런 정신은 이어졌다. 노무현 전 대통령을 구속 수사했던 악연이 있는 주심 재판관은 대통령을 파면하면 안 된다는 의견을 냈다. 박근혜 전 대통령과 당시 여당이 지명한 재판관 3명은 전부 대통령 탄핵소추안 인용 결정에 손을 들었다. 개인적 배경이나 성향을 떠나 재판관들이 헌법과 법률을 객관적으로 해석함으로써 ‘최고 권력자인 대통령도 결코 헌법과 법 위에 군림할 수 없다’라는 원칙이 세워진 것이다.그런데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탄핵 심판 선고를 앞두고 정치권이 ‘헌재 정신의 종말’을 부추기고 있다. 무엇보다 여야가 자신들의 지명 몫을 지렛대 삼아 헌재에 탄핵 결과를 바꾸라고 압박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선 여당은 최종 주문의 이견인지조차 불분명한 5 대 3 기각설을 확신하면서 헌재에 조기 선고를 요구하고 있다. 9명으로 구성된 헌재는 8명 체제에서 5 대 3 선고를 하지 않는 불문율이 있었다. 1명이 추가로 합류했을 때 6 대 3 인용, 5 대 4 기각으로 결론이 뒤바뀔 수 있는데, 이를 무시하고 선고를 서두르면 결정이 왜곡되기 때문이다. 이런 사정을 모를 리 없는 여당이 대통령을 첫 예외로 해달라고 하는 건 조바심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헌재의 출구는 “눈치 보지 말고 헌법대로”비상계엄 전엔 국회 몫 재판관의 임명을 미루다가 뒤늦게 재판관 임명을 서두른 야당도 문제다. 헌재 소장의 부재 상태를 방치하고, 헌재가 6인에서 8인 체제로 바뀌는 데만 75일이나 걸린 것도 야당의 책임이 크다. 게다가 만장일치설이 나올 땐 가만있다가 기각설이 불거질 때마다 마은혁 재판관 후보자 임명 압박을 세게 밀어붙이는 것도 일관되지 않고, 모순적이다. 민주당이 추천했다고 민주당의 당론 편에 설 것을 당연시하는 태도는 독립된 지위를 갖는 재판관을 모욕하는 행위다.첫 대통령 탄핵 심판 때는 재판관 한 명이 결정문에 서명을 거부하면서 선고가 예정보다 늦어졌고, 두 번째는 선고 당일 아침까지 평의를 해야 했다. 우여곡절은 있었지만 결국 헌재가 스스로 탈출구를 찾았다. 이왕이면 이번에도 반대건 별개건 예상 밖 의견이 나왔으면 한다. 정치가 양극단의 대결로 아무것도 되는 게 없는 교착 상태라고, 헌재에서도 그런 행태가 반복된다면 법률가들로만 헌재를 구성할 이유가 없다. 우리 헌재의 롤모델인 독일 헌법재판관의 취임 선서대로 ‘치우침 없는 공평한 법관’의 판단을 기대한다.정원수 부국장 needjung@donga.com}
12·3 비상계엄에 관여한 혐의로 구속 기소된 뒤 보석으로 풀려난 조지호 경찰청장은 “계엄 당일 윤석열 대통령이 국회의원 체포를 닦달했다”라는 취지로 경찰과 검찰, 헌법재판소에서 일관되게 말하고 있다. 대통령에게 임명장을 받은 고위 공직자가 임명권자에게 부담이 될 수 있는 진술을 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암 투병 중인 조 청장은 “역사 앞에 진실을 말해야 고통을 덜 받는다”라는 변호인의 조언을 귀담아들었다고 한다. ‘대통령 부하들’ 말 바꾸면 공소 유지 어려워 역사라는 말은 적어도 수사나 재판에 있어서는 반복적, 중복적이라는 말과 동의어다. 사회적으로 중요한 사건들은 수사기관으로부터 한 차례 조사받았다고 끝나는 게 아니다. 의혹이 해소될 때까지 받고 또 받을 수밖에 없다. 재판도 계속 검증받게 된다. 법적 논란이 정리됐다고 끝나는 것도 아니다. 외부 환경에 따라 해석이 달라질 수 있는 역사의 법정은 어쩌면 시효 없이 무한 반복된다. 이런 점에서 수사나 재판 과정에서 한 점의 의혹이라도 있으면 언젠가는 문제가 불거진다. 헌정 사상 초유의 현직 대통령 기소 과정을 한번 되돌아보자. 검찰은 올해 1월 26일 오전 10시 대통령의 기소 여부를 놓고 전국 고검장·지검장 회의를 했다. 법원이 대통령의 기소 데드라인으로 정한 시간을 이미 53분 넘긴 시점이었다. 사흘 전인 23일 공수처로부터 사건을 송치받은 검찰은 ‘10일간 구속기간을 연장해 달라’며 법원에 신청했지만, 그 다음 날 불허됐다. 이 결정에 불복했지만 25일에도 똑같은 결과가 나왔다. 당시 공수처의 구속기간 계산법이 잘못됐다면서 조기 송치를 요구했고, 윤 대통령 측의 조사 거부로 추가 수사에 대한 실익이 없었던 검찰이 사흘간 기소를 유보할 필요가 있었을까. 어처구니없는 건 회의에서 “검찰이 공수처의 하청 기관이냐?” 등의 얘기가 오갔다는 것이다. 역사적 사건을 앞에 두고 검찰이 피의자의 방어 논리를 뚫는 데 힘을 모으기보다는 조직 이기주의에 휩싸였던 것 아닌가. 사실 윤 대통령 측이 문제 삼고 있는 공수처의 내란죄 수사도 검찰이 촉발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검찰은 계엄 사흘 만에 수사기관 중 가장 먼저 특별수사본부를 구성했다. 대통령을 겨냥한 것이었는데, 근거는 검찰 시행령의 직권남용죄 관련 범죄로 내란죄까지 수사할 수 있다는 논리였다. 공수처가 같은 내용의 공수처법을 들이대며 검찰에 사건 이첩을 요청한 빌미를 제공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형사사법의 주재자인 검찰이 처음부터 수사가 아닌 기소에 집중했다면 공수처가 대통령 수사에 끼어들지 못했을 것이다. 내란 우두머리 혐의로 구속된 피의자가 현직 대통령 신분을 유지한 채 수감 52일 만에 풀려났다. 내란죄로 수사를 받은 ‘대통령의 부하들’이 부담감에 수사기관에서 작성한 조서를 법정에서 부인하면 앞으로 공소 유지 자체가 흔들릴 수 있다. 진짜 심각한 문제는 수사 자체가 없던 일이 될 수도 있다는 점이다. 헌재가 파면 결정을 하면 어떻게든 신병 확보를 다시 시도할 수 있다. 하지만 헌재가 탄핵을 기각하면 어떻게 될까. 직무에 복귀한 대통령이 인사로 검찰 수사본부를 해체하고, 법무부 장관은 수사지휘권으로 대통령의 공소 취소를 요구하는 것도 가능해진다. 특수본 해체, 공소 취소 가능해진 치명적 실수 법에 정해진 기간을 넘겨 업무 처리를 하는 것을 법조인은 가장 수치스럽게 여긴다. 검찰은 다른 수사기관이나 법원 탓 그만하고, 수사 무효로 이어질 수 있는 수사 실패를 바로잡을 방법부터 하루빨리 내놔야 할 것이다.정원수 부국장 needjung@donga.com}
윤석열 대통령의 내란 우두머리 혐의 공소장엔 이른바 ‘삼청동 안가(安家)’ 모임이 4번 등장한다. 국방부 장관을 포함한 군 장성에게 계엄의 필요성을 언급하기 시작하던 지난해 3월 말∼4월 초부터, 5∼6월경, 6월 17일 각각 한 차례, 그리고 같은 해 12월 3일 비상계엄 당일 국무회의 직전에 대통령이 경찰 지휘부에 국회 통제 계획을 전달했을 때였다.재판관 8명, 4 대 4 양극화에 소장 부재 공교롭게도 삼청동 안가에서 가장 가깝고, 대부분의 동선이 겹치는 곳이 헌법재판소의 소장 공관이다.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헌재 측 인사를 만난 적이 있는데, 이 인사는 대통령이 삼청동 안가에서 자주 저녁 모임을 하는 것에 대해 당황스러워하면서 불편해했다. 어쩌면 윤 대통령과 헌법재판소의 악연은 이때부터 시작됐는지 모른다. 헌재가 대통령 탄핵 심판을 심리하는 건 세 번째다. 하지만 기존과는 차원이 다른 초유의 상황이다. 무엇보다 법률가 출신 현직 대통령이 공개 변론 때 피청구인석에 앉아서 재판관들에게 탄핵 사유의 부당성을 설명하고, 부하 직원이던 증인들을 대통령이 직접 신문하고 있다. 게다가 8명의 재판관 중 절반인 4명(김형두 정정미 김복형 정형식)은 추천이나 지명 여부를 떠나 대통령이 임명장을 주면서 기념 촬영을 했다. 이들 중 한 명은 한때 윤 대통령이 대법원장 후보로 검토했다. 증인뿐만 아니라 재판관들 역시 현직 대통령이 면전에 있다는 부담감을 적잖게 받을 수밖에 없는 구조다. 사실 더 큰 문제는 마치 남극과 북극처럼 양극화된 헌재 재판관이다. 얼마 전 이진숙 방송통신위원장의 탄핵 심판을 기각하면서 4 대 4로 나뉘었다. 방통위의 설립 및 입법 취지에 충실해야 한다는 재판관들, 방통위법을 문구대로 엄격하게 해석해야 한다는 재판관들의 의견이 팽팽히 맞선 것이다. 여기에 내부 불화설까지 불거지면서 헌재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양측의 갈등을 조정할 리더가 잘 보이지 않는다. 헌재 소장 부재라는 리더십 위기 상황에서 대통령 탄핵 심판을 시작한 것도 이번이 처음이다. 대통령 탄핵 심판은 사안의 중대성, 파급효과 측면에서 교범이 될 정도의 재판이어야 한다. 헌법 해석의 최고 기관인 헌재의 재판 절차나 최종 판단을 국민이 납득하지 못하면 헌재의 위기, 더 나아가 국가의 위기가 올 수밖에 없다.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파면 결정은 헌재가 논란이 될 수 있는 증거들을 배제하고, 최소한의 공통점을 찾아서 전원일치 결정을 만들어내는 과정이었다. 그 당시엔 여야 모두의 추천을 받았던 재판관이 중재 역할을 했다. “OOO 재판관이 있어 합의가 가능했다”는 평가를 들을 만한 재판관이 이번에도 나올까. 헌법재판소의 최고 의결 기구는 재판관들이 모두 모이는 평의(評議)다. 대법원의 전원합의체와 같다. 대법원과 달리 헌재에선 재판관들이 서로의 성명 대신 호(號)를 부르는 게 관례라고 한다. 소장 대행 역할을 맡고 있는 문형배 재판관은 ‘약수’로 불리는데, ‘상선약수(上善若水)’의 줄임말이라고 한다.‘전원일치냐, 아니냐’에 헌재 운명 달려 요즘 문 대행은 정치적 편향 논란에 휩싸여 있다. 대행부터 물처럼 더 자세를 낮추고 생각이 다른 동료들을 설득하고 또 설득해야 한다. 파면 여부를 떠나 비상계엄 사건은 사회적 파장이 워낙 커 만장일치 결정이 나오지 않으면 ‘분쟁의 종결자’가 아니라, 또 다른 갈등의 출발점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정원수 부국장 needjung@donga.com}
“검사가 법 집행을 못 하면 거기서 죽어라.” 2016년 10월 국정농단 사건 수사를 맡은 서울중앙지검 검사들이 청와대 압수수색을 시도했다. 경호처의 거센 저항에 현장에 있던 검사가 “물러나야 한다”고 지휘부에 보고하자 이런 불호령이 떨어졌다고 한다. 오랜 줄다리기 끝에 이른바 ‘안종범 수첩’ 등 핵심 증거물을 다수 확보했고, 이는 곧 초유의 대통령 파면으로 이어졌다.“탄핵 뒤 수사” 내란 피의자에겐 특권 그런데 비상계엄 선포 한 달 만인 3일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는 경찰과 함께 한남동 관사에서 현직 대통령에 대한 첫 체포영장 집행을 시도하다 불과 5시간 반 만에 철수했다. 압수와는 차원이 다른 체포영장을 갖고도 너무나 쉽게 물러선 공수처의 태도는 이해하기 어렵다. 심지어 집행을 방해한 대통령 경호처장 등의 현행범 체포를 경찰이 주장하자 공수처가 만류했다니 2016년과 달라도 너무 달랐다. 우리 헌법은 ‘대통령은 내란 또는 외환의 죄를 범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재직 중 형사상의 소추를 받지 아니한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바꿔 말하면 대통령이 내란죄에 연루되면 현직이더라도 수사하고 기소해야 한다는 의미다. 수사기관이 수사를 미적대면 오히려 헌법 위반인 셈이다. 게다가 내란죄는 우두머리, 중요 임무 종사자, 단순 가담자로 나눠 처벌하는데, 우두머리는 유죄가 확정되면 사형 또는 무기징역이 선고된다. 중형이 예상되는 범죄의 특징, 상하관계 지위를 이용한 진술 오염 우려 등으로 불구속 수사는 상상하기 어렵다. 어떤 비상계엄이 내란죄에 해당하느냐에 대한 법조계 해석은 갈리지 않는다. 전두환 등 쿠데타 세력을 뒤늦게 처벌하면서 비상계엄의 요건이나 절차를 제대로 지키지 않고, 비민주적 방법으로 헌법 기관의 기능을 불가능하게 하는 것이 내란죄라는 대법원의 판례가 완성됐기 때문이다. 내란죄 관련 판결이나 기록을 읽어본 법조인들은 대부분 12·3 비상계엄의 불법성을 얘기한다. 그것이 공수처뿐만 아니라 검찰, 경찰이 경쟁적으로 수사에 뛰어들어 현직 대통령을 ‘내란 우두머리’ 혐의로 입건하고, 대통령에 대한 체포영장까지 발부된 이유다. 사실 수사기관이 윤석열 대통령에게 처음 피의자 신분으로 출석할 것을 통보한 것은 비상계엄 8일 만인 지난해 12월 11일이었다. 검찰에선 그때 “수사의 8분 능선을 넘었다”는 얘기가 나왔다고 한다. 공수처와 검찰, 경찰 중 누가 대통령 수사를 맡을지 조율하는 과정에서 수사 일정이 늦춰졌다. 그렇다고 구속 수사가 디폴트인 내란죄 수사의 원칙이 바뀐 건 아니다. 그런데도 윤 대통령 측 변호인단은 박근혜 전 대통령의 전례를 들면서 “탄핵 심판이 수사보다 먼저”라고 주장하고 있다. 박 전 대통령은 일반 범죄여서 그런 주장이 가능했지만 내란죄 피의자에게 박 전 대통령과 같은 방식으로 수사하는 것 자체가 헌법에 없는 특권을 주는 것이다. ‘수사 주체·방식·일정’ 尹이 정하면 안 돼 적어도 윤 대통령이 헌법재판소의 탄핵 심판 공개 변론에 출석하기 전에는 대통령의 피의자 조사와 구속 여부가 마무리되어야 한다. 수사기관의 요구에 불응하는 대통령이 경호처의 경호를 받으며 헌재에서 증언하고 다시 경호처의 엄호를 받으면서 수사기관을 따돌린다면 국가 기강이 서겠는가. 내란죄 수사는 피의자 대통령이 원하는 수사기관이나 방식, 일정이 아닌 대한민국 수사기관과 사법부가 허락한 절차에 따라 진행되어야 한다. 내란죄 수사엔 예외가 있을 수 없고, 있어서도 안 되기 때문이다. 정원수 부국장 needjung@donga.com}
윤석열 정부 초기 전직 국가정보원 고위 간부를 만난 적이 있다. 그는 “국정원장 특보가 왜 그렇게 많냐. 뭘 하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실제 당시 국정원엔 원장특보 여러 명이 전문 분야를 나눠 맡고 있었다. 국정원 청사에 사무실을 두는 원장특보는 사실상 대통령이 임명한다고 한다. 외교관 출신의 당시 김규현 국정원장을 크게 신뢰하지 않던 윤 대통령이 원장특보들을 통해 국정원 내부를 통제하는 비정상적 운영을 하고 있다는 것이 전직 간부의 불만 취지였다.“대통령 신뢰와 부당 명령은 다른 문제” 재임 내내 대통령 신임 논란을 겪었던 국정원장은 지난해 6월 초유의 인사 파동을 겪더니, 같은 해 11월 해임됐다. 원장 해임 직후 국정원 1차장에 홍장원 원장특보가 임명됐다. 대통령 실세와의 인연으로 차기 국정원장 후보로도 오르내렸고, 새 국정원장이 임명되기 전 두 달 가까이 국정원장 대행으로 정보기관장 역할을 했다. 북한 동향 등에 대해 대통령에게 직접 보고도 했고, 대통령이 주재한 술자리에도 몇 번 불려 갔다고 한다. 말 그대로 ‘실세 특보’의 영전이었다. 윤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 2시간 전인 3일 밤 윤 대통령은 당시 홍 차장에게 안보폰으로 직접 전화를 걸었다. “한두 시간 후에 중요하게 할 이야기가 있으니 전화기를 잘 들고 대기하라.” 두 시간 뒤 윤 대통령은 “대공수사권을 줄 테니 국군방첩사령부를 도와 지원하라”며 “이번 기회에 다 잡아들여 싹 다 정리하라”고 했다. 우원식 한동훈 이재명 등 여야 정치인을 위치 추적해 방첩사령부의 체포 활동을 도우라는 명령이었다. 시대착오적 계엄의 한복판에 정보기관을 끌어들인 것이다. 그는 평소 멘토로 여기던 국정원 전직 고위 간부와 이 같은 내용을 상의했고, 결국 ‘정보기관을 동원한 정치인 불법 체포 및 구금 계획’으로 6일 폭로됐다. 당일 국회에서 홍 차장은 그 과정을 상세히 설명했다. 2차 비상계엄 우려와 정의감이 폭로의 계기였다는 것이 그의 폭로를 지켜본 공직자의 설명이다. 그는 “대통령의 신뢰 문제와 부당한 명령은 다른 문제”라고 강조했다고 한다. 경질된 홍 차장은 폭로 뒤 주변에 이렇게 말했다. “갑자기 자유롭고 행복합니다. 온몸이 두들겨 맞은 것 같기는 한데….” 육군사관학교 졸업 때 대표 화랑으로 뽑힐 정도였던 그는 국정원 해외파트에서 근무하면서 자부심이 컸다고 한다. 그런 그에게 상처를 남긴 게 ‘윤석열 검찰’의 국정원장 특수활동비 상납 의혹 수사였다. 검사 윤석열의 이름을 알린 게 댓글 조작 등 국정원 수사였고, 특활비 의혹은 국정원을 상대로 한 두 번째 수사였다. 검사 윤석열은 “국정원이 이러면 안 된다”며 수사를 밀어붙였다. 국정원 일탈을 두 번씩이나 수사한 검사가 수사 대상이던 국정원 간부를 대통령이 된 뒤 요직에 중용하고, 그 간부에게 불법 행위를 지시했다가 거부당한 모습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자기 파괴를 부른 분열적이고 모순된 행동을 이보다 더 상징적으로 보여준 장면이 있을까.국무위원, 참모도 ‘있는 그대로’ 말해야 국무총리를 포함한 국무위원들, 대통령실의 참모들은 대통령의 신뢰를 받았으니 고위직에 임명됐을 것이다. 중요한 건 홍 차장의 말처럼 대통령의 신뢰를 받는 것과 부당한 명령을 거부하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다. 그날 밤의 목격자들인 국무위원과 대통령의 참모들, 군인, 경찰 등은 자신이 알고 있는 진실의 조각을 ‘있는 그대로’ 국민들에게 고해야 한다. 비상계엄의 진상 규명에 협조하는 것은 대통령의 배신자가 되는 게 아니라 스스로 역사의 기록자가 되는 길이라는 걸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정원수 부국장 needjung@donga.com}
대통령실 홈페이지엔 ‘사실은 이렇습니다’라는 코너가 있다. 각종 의혹이나 잘못 알려진 정책에 대한 사실관계를 바로잡아서 국민의 오해나 불신이 커지지 않도록 하는 곳이다. 윤석열 정부뿐 아니라 과거 정부 때도 있었고, 윤 정부는 집권 2년 반 동안 ‘사실은 이렇습니다’에 51개 정도의 글을 올렸다. 대통령 부인 김건희 여사가 연루된 도이치모터스 주가 조작 의혹에 대한 반박 글이 4건으로 가장 많다. 여기에 공개되는 내용은 통상적으로 대통령 참모 회의를 거치고, 대통령으로부터 문구 승인을 받는다고 한다. 대통령이 참모 회의까지 한 뒤 싣는 글은 상식적으로도 대통령의 발언 그 자체로 봐도 무방할 것이다. 앞서 헌법재판소는 “외부로 표명되는 모든 청와대의 입장은 원칙적으로 대통령의 행위로 귀속되어야 하고, (참모의 발언은) 곧 대통령 자신의 행위로 간주되어야 한다”고 판단한 적이 있다. 대통령실의 입장은 형식적으로는 대통령실의 것처럼 보이지만 실질적으로, 때론 법률적으로 대통령의 것인 셈이다.명태균 관련 입장, 대통령 말과 너무 달라 그런데 대통령실의 입장이 대통령에게 부정당하는 이례적인 일이 발생했다. 지난달 8일 대통령실은 공천 개입 의혹의 당사자 명태균 씨와 관련한 첫 입장문을 내놨다. 명 씨가 대통령 부부와의 친분을 연일 강조하던 때였다. 명 씨를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르는 분’이라고 지칭하면서 대통령실은 ‘대선 경선 이후 대통령은 명 씨와 문자를 주고받거나 통화한 사실이 없다’고 했다. 약 한 달 뒤인 이달 7일 대통령은 기자회견에서 “참모 회의에서 ‘당선된 이후 연락을 했다’고 했는데, 대변인이 ‘경선 뒷부분 이후에는 사실상 연락을 안 했다’는 취지로 이야기한 것”이라고 말했다. 명 씨의 역할에 대해서도 ‘선거 초입에 여러 가지 도움을 준다고 움직였다’고 설명했다. 대통령실 입장과 대통령의 말이 이렇게 다를 수 있나. 명 씨가 대통령 부부와 언제까지 만났고, 대선 때 어떤 역할을 했는지는 명 씨 관련 의혹의 핵심 사안이다. 입장문을 내기 전에 참모진이 대통령에게 애매한 부분을 묻고 또 물어서 문구에 조그마한 오류라도 없는지 점검했어야 했다. 그런 절차가 허술했던 것으로 비치니 자연스럽게 도이치모터스 관련 글도 제대로 올린 걸까 의심하게 된다. 이러니 윤 대통령이 취임식 전날 ‘김영선이 (국회의원 재보궐선거 공천) 좀 해줘라’고 명 씨에게 말하는 통화 육성이 공개되니, 말이 바뀐 것 아니냐는 의구심도 더 커질 수밖에 없다.대통령실 입장은 모두 대통령 책임 대통령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다고 하더라도 대통령실은 허위 사실을 국민에게 적어도 한 달간 알린 게 된다. 권력층 주변의 의혹은 실체적 진실과 무관하게 해명 과정에서 나온 거짓말 논란이 더 큰 화를 부를 때가 많다. 대통령의 거짓말로 인식될 수 있는 대통령실 입장문의 바로잡기는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다. 대통령의 오랜 지인들은 대통령이 참모의 직언을 잘 듣지 않고, 특히 여사와 관련한 부분은 금기어나 마찬가지라고 말한다. 대통령이 격노하고 질책하면 다시 질문하기조차 어렵다는 것이다. 만약 참모들이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고도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면, 현 방향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지적하지 않는다면 앞으로도 이런 일이 반복되지 말라는 법이 없다. 대통령과 참모진의 소통 부재, 일방적인 수직 관계를 바꾸지 않으면 향후 유사한 일이, 어쩌면 더 치명적인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정원수 부국장 needjung@donga.com}
서울중앙지검 반부패수사부가 김건희 여사의 도이치모터스 주가 조작 의혹 수사를 한 건 고발장 접수 7개월 만인 2020년 11월부터였다. 도이치모터스 권오수 전 회장 등 다른 피의자들은 재판에 넘겨졌고, 이들의 수사 기록은 법정에서 대부분 공개됐다. 하지만 검찰이 김 여사 처분을 미루면서 김 여사의 관여 정도를 추정할 수 있는 자료는 대부분 숨겨져 있었다. 그런데 지난달 권 전 회장 등의 항소심 선고 이후 김 여사 관련 수사 기록이 날것 그대로 하나씩 공개되고 있다.“형평성 논란에 金여사 관련 자료 유출” 서초동에선 그 배경을 놓고 다양한 해석이 나온다. 우선 주가 조작 의혹의 공범들이 김 여사와의 형평성에 불만을 품고 있다는 것이다. 권 전 회장 등 피고인이 9명이고, 이들의 변호사들은 알려진 것만 54명이다. 증거자료 같은 것을 복사하면서 변론에 관여한 로펌이 12곳이다. 도이치모터스 수사와 공판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한 검사도 10명을 넘긴 지가 한참 됐다. 이들 중 일부는 김 여사를 기소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내왔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수사 보안이 계속 지켜질 리가 없다. 김 여사는 주가 조작 의혹의 피의자 신분이지만 검찰의 태도는 통상적이지 않다. 2021년 11월 한 차례 서면조사를 하고 검찰은 조사 내용과 다른 부분을 추가로 확인하지도 않았고 결론을 내지도 않았다. 현 정부 출범 이후엔 1심 재판을 먼저 보자고 했다. 법원은 김 여사 관련 계좌 중 일부가 주가 조작에 이용됐고 그 시점의 공소시효가 남았다고 판단했다. 검찰은 2심까지 지켜보자고 했는데, 김 여사 무죄 주장의 근거 중 하나였던 김 여사와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역할을 한 전주(錢主)에게 방조 혐의 유죄가 인정됐다. 그러자 “서로 다른 케이스”라는 말이 검찰에서 나온다. 이러니 정해진 결론이 나올 때까지 표적을 자꾸 옮긴다는 의심을 받는 것 아닌가. 검찰의 수상한 행동을 이해할 수 있는 게 있다. 도이치모터스 특검법에 대해 첫 번째 대통령 거부권이 행사된 올 1월 5일 법무부가 낸 이례적인 보도자료다. 도이치모터스 연루 의혹을 “김 여사에 대하여는 기소는커녕 소환조차 하지 못한 사건”이라고 했다. 그 뒤 벌어진 일이 공석이던 법무부 장관 임명, 민정수석 신설, 대면조사를 주장하는 서울중앙지검장 교체, 제3의 장소에서 김 여사 방문조사 등이다. 보도자료가 이후 일련의 행보를 예고한 가이드라인 같다. 도이치모터스 의혹 사건은 채 상병 수사 무마 의혹처럼 대통령의 직무 수행 중에 발생한 것이 아닌 데다, 심지어 결혼하기 전 사건으로 볼 수 있어 탄핵과도 무관했다. 하지만 검찰이 미적대는 사이 김 여사 의혹은 디올백 수수, 공천 개입, 인사 개입 등 9가지로 늘어났다. 만약 검찰이 감시견 역할을 처음부터 제대로 했다면 의혹이 이렇게 번졌을까. 검찰이 일개 형사 사건을 정권 차원의 문제로 변질시킨 것이나 마찬가지다.형사 사건을 정권의 문제로 변질시킨 檢 그런 검찰이 김 여사를 불기소하는 쪽에 무게를 두면서 곧 가이드라인의 마지막 퍼즐을 맞출 예정이라고 한다. 하지만 처분 이후가 더 문제다. 도이치모터스 주식 취득으로 김 여사와 어머니가 얻은 이득이 23억 원이라는 검찰 의견서가 이미 공개됐다. 300만 원짜리 디올백 수수와는 차원이 다르다. “보통 사람들이 재테크하듯 증권사 담당자에게 맡겨 놓고 물어가면서 한 것”이라는 논리까지 검찰이 받아들일지 궁금하다. 정원수 부국장 needjung@donga.com}
“오늘 통보하면서 내일 오후 3시까지 보내라고 한다. 이러면 제대로 검증할 수 있겠나.” 현 정부의 인사 검증에 관여하는 한 인사가 이런 하소연을 한 적이 있다. 처음엔 아주 예외적이거나 피치 못할 사정이 있는 극소수의 사례라고 생각했다. 인사 검증에 만 하루도 안 되는 시간을 준다면 절대적인 시간 부족으로 누가 보더라도 검증이 요식 행위처럼 끝날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 하지만 이런 경우가 최근 점점 늘어나고 있고, 심지어 근무를 먼저 시작한 뒤 사후 검증을 요구하는 일까지 있다고 한다.‘1일 검증’은 친정 체제 인사의 단면 인사 검증을 하는 방식에도 일부 이상한 점이 있다고 한다. 공직 후보자들이 적어낸 사람들 몇 명 위주로 세평 검증이 이뤄진다는 것이다. 공직 후보자들이 자신에게 불리한 얘기를 하거나, 흠결을 들출 지인들을 검증 기관에 추천할 확률은 매우 낮다고 봐야 한다. 모르긴 몰라도 공직 후보자들의 과오나 약점보다 성과와 장점이 검증 파일에 더 모이는 구조일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는 부적격 후보자들을 제때 제대로 걸러내기 어렵다. 현 정부는 과거 청와대가 주도하던 인사 검증 기능을 대통령실의 공직기강비서관실과 법무부 인사정보관리단에 각각 분산시켰다. 법무부는 1차적으로 객관적인 사실을 수집하고, 인사에 대한 찬반 의견 등 2차적인 가치 판단은 대통령실이 하는 방식이다. 잘만 운영된다면 1, 2차 검증 기관 간 견제와 균형을 통해 인사의 객관성과 공정성을 높일 수 있다. 하지만 책임 소재를 모호하고 불분명하게 하면서 부실 인사를 남발할 수 있다는 우려가 적지 않았다. 총선 이후 충성도가 높은 인사의 돌려막기 기용이나, 특정 라인으로 의심받기에 충분한 인사들의 보직 이동이 계속되고 있다. 주요 자리에 인사권자의 의도가 뻔히 보이는 후보자를 내세우면 원칙을 지키면서 곧이곧대로 검증하는 것이 쉽지 않을 것이다. 집권 중후반기에 친정 체제를 굳히려는 인사 기조가 강화된 것이 ‘1일 검증’이나 ‘칭찬 수집 검증’을 부르는 것 아닌가. 이는 결국 인사 검증 시스템의 고장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더 큰 문제는 부적격 인사의 원인이 검증 1, 2차 중 어느 단계에서 발생했는지, 검증에서 걸렸는데도 임명이 강행된 것인지 등이 베일에 싸여 있다는 점이다. 대통령실이나 법무부의 구체적인 인사 검증 업무 지침이나 매뉴얼 등이 비공개돼 내부 운영 방식을 밖에서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검증 업무를 이원화했을 땐 미국 연방수사국(FBI)을 롤모델로 한다고 했지만 몇 개월 이상의 검증 기간을 갖고, 현장 탐문조사를 하는 미국 방식과는 거리가 한참 멀어 보인다.정부의 인사 자료 남겨 사후 검증해야 이럴 때일수록 기본으로 돌아가야 한다. 과거엔 객관적인 검증 자료와 주관적인 평가 자료가 한 묶음이었고, 청와대에 보관되어 있었다. 이 때문에 정권이 바뀌면 사생활이나 평가 정보를 악용할 소지를 없앤다는 명분으로 인사 자료를 통째로 폐기해 왔다. 하지만 지금은 정부 부처에서 객관적 자료를 수집하니 그때와는 사정이 많이 다르다. 적어도 정부 부처의 자료만이라도 전부 보존하고, 예외없이 사후 검증을 받게 해야 한다. 검증 실패 과정이 추후 복원된다면 검증 과정에서 ‘객관의 의무’를 지키려고 더 노력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것이 검증 시스템을 바꾸면서 “음지에 있는 검증 업무를 양지로 끌어낸 것”이라고 했던 정부의 약속을 스스로 지키는 길이다. 정원수 부국장 needjung@donga.com}
“복무 평정 없이 검찰 인사를 한 적은 지금까지 없었다. 정말 심각한 건데, 아무도 문제 삼고 있지 않아서 오히려 의아스럽다.” 올 5월 13일 서울중앙지검의 대통령부인 김건희 여사 수사 지휘 라인이 모두 교체됐는데, 그 직후 한 검찰 관계자가 ‘검사 인사 규정’ 위반이라고 비판한 적이 있다. 실제로 인사 규정을 찾아보니 검찰 인사의 예측 가능성과 공정성을 높이기 위해 평정을 먼저 하고 그 결과에 따라 인사를 하도록 의무화하고 있다. 그런데 법무부는 검찰 인사가 다 끝난 8월 초 상반기 평정을 진행하겠다고 최근 공지했다. 예년보다 2개월 뒤로 밀린 것이다. 누가 봐도 선후가 뒤바뀐 것으로 규정 위반이다.5월 교체 중앙지검 지휘부의 수사 독주 사실 ‘5·13 검찰 고위 간부 인사’는 법무부 장관과 검찰총장의 인사 충돌로 더 주목받았다. 당시 박성재 장관이 이창수 서울중앙지검장 인사 카드를 밀어붙이려고 하자, 이원석 총장은 “수사의 공정성이 훼손될 수 있다”며 반대했다고 한다. 직전 서울중앙지검 지휘부가 도이치모터스 주가 조작 의혹과 디올백 수수 의혹으로 수사를 받고 있는 김 여사의 검찰청사 내 대면 조사를 강행하려고 하자 지휘부를 교체해 이를 막으려고 했다는 것이 이 총장 등의 시각이었다. 이미 알려진 얘기지만 총선 전에도 같은 내용의 인사가 단행될 뻔했지만 이 총장이 사표까지 제출하겠다고 버텨 무산된 적도 있다. 이 때문에 이 총장은 5·13 인사 직전 이 지검장 인사를 포함한 장관의 검찰 고위 간부 인사안을 끝까지 보지 않겠다고 고집했다고 한다. 법무부가 인사안을 대검찰청으로 가져온다면 동의하지 않는 이유를 자세하게 적어 기록에 남기겠다고 하면서 서명까지 거부한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청법엔 ‘장관은 검사의 보직과 관련해 총장의 의견을 들어야 한다’는 규정이 있다. 총장이 검찰 인사에 부동의한다는 것도 의견으로 친다면 법률 위반이 아닐지 모른다. 하지만 입법 취지와는 너무나 다른 ‘꼼수’ 인사로 볼 수밖에 없다. 그로부터 두 달 뒤 서울중앙지검 새 지휘부는 김 여사를 검찰 밖 대통령경호처 건물인 ‘제3의 장소’에서 조사하고도 조사 장소와 조사 시점, 조사 방식 등을 이 총장에게 사전에 보고하지 않았다. 검찰총장은 검찰 수사를 총괄하고, 모든 검찰 공무원에 대한 지휘 감독권이 있다. 상명하복의 조직 문화가 아직 남아 있는 검찰에선 전례를 찾기 어려운 초유의 항명 사태다. 더 큰 문제는 서울중앙지검장 혼자가 아니라 서울중앙지검의 차장과 부장, 주임 검사가 일사불란하게 총장은 물론 총장 참모진에게도 수사 내용을 보고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총장의 반대에도 2개월 전 인사가 누군가에게 왜 필요했는지를 이것보다 더 잘 보여주는 장면은 없다.檢총장 사과로 공정성 흔들, 특검 자초 안 그래도 김 여사 사건은 거대 야당이 특검을 추진하고 있다. 이미 한 차례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했기 때문에 검찰 수사에 조금이라도 흠결이 발생하면 특검을 다시 추진할 명분이 더 커질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검찰총장이 서울중앙지검의 김 여사 검찰 수사에 대해 “법 앞에 예외도, 특혜도, 성역도 없다는 수사 원칙이 지켜지지 않아 죄송하다”며 대국민 사과까지 했다. “외부와 싸워야 하는 시점에 야당에 먹잇감을 던지는 검찰 내 자중지란”이라는 한 법조인의 관전평이 하나도 틀린 게 없다. 마치 특검을 자초하는 것과 같은 서울중앙지검의 수사 과정을 보면 결국 검찰 개혁의 제1과제는 검찰 인사라는 말이 더 무겁게 다가온다. 정원수 부국장 needjung@donga.com}
“가능하면 안 나오게끔 노력해야죠.” 최근 동아일보와의 인터뷰 때 조희대 대법원장에게 ‘대법원장이 표결하기 전에 6 대 6이 나오면 어떻게 할 것인가’라고 묻자 그는 이렇게 답했다. 대법원장이 재판장인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대법원장과 대법관 등 총 13명으로 구성된 최고 법원의 최고 판결 기구다. 그런데도 다수의견과 반대의견이 1표 차밖에 안 되는 7 대 6의 전합 판결이 과거 종종 있었고, 그때마다 캐스팅보트 역할을 한 대법원장의 선택이 커다란 논란이 됐다.“7 대 6 전합 가능하면 안 나오게 노력”조 대법원장은 “한 번 얘기했다고 해서 그게 불변의 진리도 아니고, 한 번 더 숙고해 보면서 좀 더 나은 결론을 내기 위해 노력해야죠”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저도 대법관 때 의견을 바꾼 적이 있다. 그게 부끄러운 게 아니고, 국민들이 보기에 바람직한 결론으로 가는 것”이라고도 했다. 조 대법원장은 존 로버츠 미국 연방대법원장이 뛰어난 법관들의 공통점으로 맨 처음 꼽은 ‘지적 겸손’(intellectual modesty)도 언급했다. 내 생각이 항상 옳은 게 아니라고 의심하고, 동료들과 토론해서 답을 찾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취지일 것이다.사실 조 대법원장의 이런 발언은 갑자기 나온 것이 아니다. 그는 10년 전 대법관에 취임하면서 “생각은 허공처럼 경계가 없고, 우리의 두 눈은 좌우를 가리지 않는 법”이라고 했다. 대법관 재직 때 진보나 보수로 분류하기 어려운 결정을 여럿 했다. 대법원장 청문회에서도 그의 보수 성향을 우려하는 의원 질의에 “저보다 진보적인 판결을 많이 낸 사람이 없을 것”이라고 반박했을 정도다. 대법원장 후보로 지명받은 직후엔 “무유정법(無有定法·정해진 법이 없는 게 참다운 법)이라는 말이 있다”라며 “한평생 법관 생활을 하면서 한 번도 좌우에 치우치지 않고 항상 중도의 길을 걷고자 노력했다”고 강조했다.종전 판례를 바꾸거나 사회적 관심사가 높은 사건을 판단하는 전합 판결의 파급력이나 영향력은 매우 크다. 그런데 전합 판결이 우리 사회의 정치적, 이념적 갈등에 대한 해법을 찾는 과정이라기보다는 갈등 그 자체를 아무런 여과 없이 드러내거나 오히려 갈등 증폭의 계기가 된 적도 있었다. 대표적인 것이 전임 대법원장 때의 ‘백년전쟁’에 대한 방송통신위원회 제재 사건이다. 1·2심이 모두 제재가 적법하다는 결론을 내렸는데도, 대법원은 7 대 6 아슬아슬한 표차로 하급심 판결을 뒤집었다. 다수 및 반대 의견엔 상대편에 대한 감정적인 문구까지 들어가 있었고, 대법원장이 절반의 편이라는 공격을 받았다. 반복돼선 안 될 반면교사라고 할 수 있다.조 대법원장은 대법관 임명 제청의 최우선 기준을 실력이라고 했다. 살인 사건에서 억울한 옥살이를 하는 피고인을 만들지 않도록 하는 것처럼 실력이 인권 보호를 위한 첫 번째 수단이라는 이유에서다. 대법원 구성의 다양화는 필요하지만 어떻게 보면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서는 곤란하다. 시대의 변화를 읽고, 오랜 관행을 바꿀 수 있는, 그래서 국민의 기본권을 실질적으로 지키기 위한 판결을 하지 못한다면 다양화가 무슨 쓸모가 있겠는가.대법원에선 양극단의 좌우 경계 없어야우리 사회가 양극단으로 갈라지면서 ‘세상만사의 사법화’ 현상이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다. 이럴 때일수록 적어도 대법원은 진보와 보수의 경계가 없다는 평가를 받아야 한다. 치열한 토론 끝에 시시비비를 분명하게 가리는 일관된 판결을 한다면 사법부에 대한 신뢰가 쌓일 것이다. 지난달 첫 전합 선고에 시동을 건 ‘조희대 코트’는 ‘절반이 아닌 모두의 사법부’가 되어야 한다. 정원수 부국장 needjung@donga.com}
검사들끼리 쓰는 은어 중에 ‘불장’이라는 것이 있다. 불기소장을 줄여서 부르는 말이다. 검사는 수사를 마무리할 때 공소를 제기하면 공소장을 쓰고 법원에 제출한다. 반대로 기소 사안이 아니라고 판단할 땐 불기소 이유를 적은 문서를 남겨야 한다. 흔히 검사는 공소장으로 말한다고 하지만 어떻게 보면 ‘불장’으로도 말하는 것이다.도이치 사건, 불기소장과 공소장 다 공개 불기소장엔 반드시 담당 검사와 수사 결과, 처분 이유를 기재해야 한다. 어떠한 이유로 공소를 제기하지 않는지를 기록으로 남길 의무가 있는 것이다. 당사자 외에 고소인이나 고발인이 불기소장을 볼 수 있고, 그 내용에 동의하지 않으면 불복 절차를 제기할 수 있다. 이 때문에 검사에겐 불기소장도 공소장처럼 성적표가 매겨지는 시험 답안지와 같다. 흔히 공소장의 내용을 갖고 공소 사실에 어떤 부분을 넣고, 뺄지를 놓고 검찰 내 알력이 생기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불기소장을 놓고도 티격태격한다. 검사가 불기소장을 쓰느니 사표를 쓰겠다고 버티고, 결재라인에 있는 지휘부는 곤혹스러워하는 일이 종종 발생했다. 진위는 알 수 없지만 얼마 전에도 비슷한 소문이 돌았던 적이 있다. 그 소문과는 무관하지만 대통령 부인 김건희 여사가 연루된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의혹 사건이야말로 결국 ‘불기소장을 쓰느냐, 마느냐’가 핵심 쟁점인 사건이다. “기소는커녕 소환조차 못 한 사건”이라는 여권 입장에서 본다면 이미 불기소장을 썼어야 했다. 하지만 수사 기간이 모두 4년, 현 정부에서만 2년이 넘었지만 불기소장은 나오지 않았다. 서울중앙지검 지휘부가 교체된 5·13 검찰 고위 간부 인사는 ‘왜 불기소장을 아직까지 쓰지 않았느냐’에 대한 문책성 인사라고 보는 게 검찰 내부의 대체적 시각이다. 그렇다면 검찰은 앞으로 불기소장을 쓸 수 있을까. 사회적 논란이 된 사건의 불기소장은 그동안 예외 없이 공개됐다. 만약 김 여사의 불기소장이 작성된다면 그 전문이 그대로 외부에 알려질 가능성이 높다. 곧 개원할 22대 국회가 특검법을 통과시켜 특검이 출범한다면 가장 먼저 불기소장의 적정성부터 살펴볼 것이다. 자칫 탄핵 대상이 될 수도 있다. 결재권자의 책임도 따지겠지만 아무래도 불기소장을 직접 작성한 담당 검사가 가장 무거운 책임을 져야 하는 구조다. 담당 검사로서는 호랑이 꼬리를 밟는 것처럼 부담감이 클 수밖에 없다. 도이치모터스 사건은 주임 검사가 여러 번 바뀌었지만 “대면 조사 없이는 공소장도 불기소장도 쓸 수 없다”는 것이 수사팀의 일관된 의견이었다고 한다. 김 여사 명의의 계좌가 주작조작에 이용된 것은 팩트여서 최소한 김 여사가 검찰에서 전후 사정을 설명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피의자의 주장을 살펴보건대’라는 식으로 당사자의 사정을 감안해 결론을 내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검찰 지휘부는 김 여사 대면 조사를 밀어붙이지 않고, 언제 끝날지 모르는 재판 결과를 지켜보겠다고 했다. 검찰로서는 불기소와 기소 사이에서의 양자택일이 아니라 법원에서 공소 시효가 완성됐다고 판단하면 공소권 없음으로 손쉽게 처분하길 기대했다고 볼 수 있다. 檢 “있다, 없다” 법원보다 먼저 말해야 이번 정부는 검찰 인사를 하면서 ‘정의와 공정에 대한 의지’를 평가 기준으로 삼았다고 홍보한 적이 있다. 공소장을 쓰건 불기소장을 쓰건 검찰 지휘부가 적극적으로 나서 법원보다 먼저 “있다, 없다” 결론을 내려야 한다. 정치적으로 민감하다고 해서, 대통령 부인이 연루됐다고 해서 범죄 유무에 대한 판단을 다른 기관에 자꾸 미룬다면 ‘정의와 공정에 대한 의지가 없는’ 비겁한 검찰이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정원수 부국장 needjung@donga.com}
《이원석 검찰총장(55)과의 인터뷰는 없었다. 그 대신 이 총장을 최근 만났거나 대화한 전직 검찰총장들을 포함한 전현직 검사, 법조계 인사들을 두루 취재했다. 이 총장의 말들을 따라가면 그의 향후 행보가 보일 것이다.》 “외롭습니다.”11일 이 총장은 가깝게 지내던 지인을 만난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박성재 법무부 장관과 인사 문제를 처음 협의하던 날이었다. 총장으로선 두어 번 직속 상관으로 모셨던 장관마저 자신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는 것이 갑갑했을 것이다. 이틀 뒤 서울중앙지검 수사지휘 라인을 교체하는 인사가 단행됐다. 지방 출장 중이던 총장이 남은 일정을 취소하고 서울로 왔다. 다음 날 출근길엔 ‘7초 침묵’ 뒤 “인사는 인사, 수사는 수사”라고 했다. 그를 잘 아는 전직 검사는 “총장이 첫 반응을 어떻게 할지 조언을 구했다. 장관이 인사권을 행사하자 총장이 ‘수사는 내 방식대로 하겠다’고 대응한 것”이라고 전했다. “알아주지 않아도 성내지 않아야” 윤석열 대통령이 검찰총장으로 재임할 때 참모였던 이 총장은 정권 초엔 종종 대통령과도 직접 소통했다고 한다. 한동훈 국민의힘 전 비대위원장처럼 그도 대통령과의 연락이 어느 순간 끊겼거나 혹은 스스로 접촉을 피했을 것이다. 검찰총수들은 늘 “힘들고, 외롭다”는 말을 했다. 그런데 이 총장이 “저는 최선을 다한다고 했는데, 대통령이 그렇게 생각 안 하시는 것 같다”는 취지의 말을 한다는 얘기까지 들렸다. 이 총장은 한 달 전쯤 ‘그런 말을 한 적 있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성내지 않아야 군자라고 하지 않나.” 논어에 나오는 구절 ‘인부지이불온(人不知而不慍) 불역군자호(不亦君子乎)’다. 그는 “이런 말을 하면 이상하지만 저는 평상심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서운하고 섭섭한 부분이 있을 것이다. 보는 분에 따라서”라고 했다. “용산의 의사결정 체계 어떻게 보나” 그 즈음 이 총장은 “요즘 용산의 의사결정 체계를 어떻게 보느냐”는 말도 했다. “나는 대통령이 총장일 땐 2, 3번이 아니라 4, 5번 총장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처음엔 ‘그게 된다는 말이냐’고 물어본다. 그러고 난 뒤에는 ‘그게 맞으면 자네들 뜻에 따라 하라’고 했다.” 이 총장이 대검 참모 시절 오전 보고 때 총장에게 심하게 깨지면, 오후에 다시 들어가서 결재를 받아왔다고 한다. 박근혜 전 대통령을 직접 조사하고 구속했던 이 총장은 “역대 대통령 중에 자기 뜻을 굽히는 사람은 없었다. 절대반지를 낀 자리 같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검찰에선 생각이 달라도 그게 토론의 과정이라고 봤다. 욕먹고 깨진 적이 있지만 토론이라고 하는 것은 정답은 없다. 대통령이 생각해 봐야 한다. (참모들이) 편하게 말할 수 있도록 열어줘야 한다”고 했다. “세 가지 사건으로 균열 발생” 이 총장에 대한 윤 대통령의 신임이 예전 같지 않다는 얘기가 서초동에 처음 퍼진 건 지난해 9월 초순 검찰 인사 때였다. 당시 총장의 참모진이 물갈이 됐는데, 총장은 막판까지 교체 여부를 잘 몰랐다고 전해진다. 참모진이 자주 바뀌면 ‘총장 라인’을 만들기 어렵다. 검찰 고위 간부는 “이 총장이 신뢰를 잃은 계기”라며 3가지 사건을 거론했다. △양평 공흥지구 개발 의혹 사건 △이태원 참사 관련 사건 △도이치모터스 의혹 사건이다. 야당 대표의 구속영장 기각보다 이런 사건들이 균열의 원인일까. 하나씩 뜯어 보면 여권이 껄끄러워할 수 있는 부분이 적지 않다. 지난해 5월 경찰은 사문서 위조 혐의로 양평 공흥지구 개발 사업에 관여한 대통령의 처남을 검찰에 송치했다. 검찰은 석 달 뒤 경찰이 적용하지 않았던 공무집행 방해 혐의를 추가해 처남을 기소했다. “총장이 꼼꼼하게 지휘했다”는 얘기가 있었다. 이 총장은 올해 1월 4일 이태원 참사와 관련해 김광호 서울경찰청장의 기소 여부를 결정하기 전에 대검찰청 수사심의위원회를 직권으로 소집했다. 심의위는 업무상 과실치사상 혐의로 김 청장을 기소할 것을 권고했다. 결국 김 청장이 기소됐다. “일선 지검의 불기소 의견을 뒤집은 배경이 뭐냐”고 수군거리는 검찰 관계자가 많아졌다. 마지막으로 지난해 말과 올해 초 당시 송경호 서울중앙지검장이 윤 대통령 부인 김건희 여사의 도이치모터스 의혹 사건에 대한 대면조사 필요성을 대통령실에 전달한 것이다. 지난해 12월 28일 김 여사에 대한 특검법 통과가 계기였을 것이다. 하지만 “기소는커녕 소환조차 못한 사건”이라는 입장을 줄곧 유지해 온 여권에선 “총장이 자기 정치를 하는 것 같다”는 불쾌감을 대놓고 표출했다.“‘나도 사표 쓰겠다’ 2월 인사 유보” 세 번째 사건은 인사 충돌 직전까지 갔다. ‘원포인트 인사’로 송 검사장을 고검장으로 승진시켜 수사에서 배제시키려고 했다는 것이다. 2년 전 김 여사에 대한 서면조사만으로는 부족하고, 대면 조사가 필요하다는 입장을 송 검사장이 굽히지 않고 있었다. 당시 사정을 잘 알고 있는 인사는 “설 연휴 직후 인사검증을 마무리했고, 박 장관이 취임하면 인사를 하려고 했다. 이 총장이 ‘나도 사표를 쓰겠다’고 버텨 유보됐다”고 전했다. 올해 1월 21일 이른바 ‘1차 윤-한 충돌’에 이어 만약 이 총장이 검찰 인사에 반발하는 일이 발생했다면 총선을 앞둔 여권에 커다란 악재였을 것이다. 한 전 위원장과 이 총장은 사법연수원 같은 반이었다. 이 총장은 송 검사장의 고교 선배다. 여권에선 한 전 장관이 여당의 비대위원장으로 자리를 옮기고 난 뒤, 이 총장과 송 검사장이 한 몸처럼 움직인 배경을 의심하고 있다고 한다. 인사는 막았지만 “이 총장이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는 평가가 여권에서 강해졌다. “도이치 수사지휘권” 약속 못 지켜 이 총장은 한 전 위원장처럼 이른바 ‘윤석열 사단’으로 분류되는 검사는 아니었다. 윤 정부 출범 직후 총장 권한대행 역할을 했지만 석 달 동안 총장 후보로 지명되지 않았다. 권한대행이 일종의 충성도 테스트였다는 분석도 있다. 그 사이 검찰 원로들은 대통령에게 이 총장보다 선배 기수에서 총장이 나와야 한다고 조언했다고 한다. 한 검찰 원로는 “이 총장이 전임보다 7기수 아래 아니냐”고 했다. 이 총장은 현재 김 여사의 도이치모터스 사건에 대한 지휘권이 박탈된 상태다. 2020년 10월 당시 추미애 법무부 장관이 발동한 지휘권을 장관이 3번 바뀌고 복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총장은 인사청문회에서 “제가 수사지휘권을 행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했지만 그가 총장이 된 후에도 법무부는 수사지휘권을 넘기지 않았다. 총장이 수사지휘권을 무시한다고 해서 법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법조계 의견도 있다. 하지만 이 총장은 “지금 복원하면 전임 장관의 직권남용과 직무유기 문제가 생길 수 있다”며 움직이지 않았다. “(법원 판단을) 오불관언할 수 있나” 수사지휘권 미복원은 ‘이원석의 검찰’이 김 여사 수사를 빨리 매듭짓지 못하는 ‘오판’을 불렀다. 처음엔 “1심 결과를 먼저 봐야 한다”고 했다. 지난해 2월 1심 재판부가 김 여사의 계좌가 주가 조작에 이용됐다고 판단했다. 야당이 특검법을 발의했는데, 그때라도 수사를 서둘러야 했다. 그런데 “항소심까지 보겠다”며 다시 미적댔다. 이 총장은 평소 “법리적 문제를 법원과 검찰이 배치해서 어긋나게 하면 되나. (법원의 판단을) 오불관언하기 어렵다”고 했다고 한다. 검찰 선배들은 수사 지연에 대해 “이 총장의 가장 큰 실수”라고 비판했다. 야당에는 특검법 추진의 빌미를 줬고, “왜 사건을 질질 끌었냐”는 여권의 불만을 자초했다는 것이다. 이번 검찰 인사 직전 이 총장은 디올백 수사에 대해서만 전담수사팀 구성을 지시했을 뿐 도이치모터스 사건에 대해서는 아무런 얘기를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 전직 검찰 고위 간부는 “총장은 일반적 수사지휘권이 있다. 수사팀이 도이치모터스 수사 결과를 갖고 오면 국민적 의혹 사건에 대해 제대로 결론 내라고 지시할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이 총장은 임기가 4개월도 남지 않았고, 수사가 그 전에 끝날지 불투명하다. “사직도 귀하게 써야 될 상황 있다” 서울중앙지검장 교체 이후 이 총장은 전직 총장 등에게 거취와 수사 방향에 관한 조언을 구한다고 한다. 한 전직 총장은 “지금 사표를 내면 정치권에 순응하는 것처럼 보인다. 사표 내는 건 용기 있는 모습이 아니다”라고 했다. 또 다른 인사는 “외압은 항상 있다. 바르고 당당하게 뚜벅뚜벅 걸어가는 수밖에 방법이 없다”고 조언했다고 한다. 이 총장은 얼마 전 주변에 “사직도 다 때가 있고, 귀하게 써야 될 상황이 있다. 검사 생활 하면서 느낀 게 검찰은 권한은 있는 곳이 아니고, 의무밖에 없는 곳이다. 나갈 때까지 책임과 의무를 다하겠다”고 했다고 한다. “공직자는 임기를 지키는 게 중요하지 않다. 하루를 해도 제대로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남은 기간에도 그럴 것”이라는 말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 11월 이 총장은 신임 검사들에게 강의를 하면서 마태복음 한 구절을 소개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세상을 짜게 하리오.’ 그러면서 “첫 문장보다 더 중요한 것이 두 번째 문장”이라고 했다. ‘(짠맛을 잃은) 후에는 아무 쓸데없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짓밟힐 뿐이다.’ 벼랑 끝에 좁게 들어선 ‘잔도(棧道)’를 걷고 있는 이원석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정원수 부국장 needjung@donga.com}
윤석열 대통령이 집권 2년 만에 법률수석 신설을 추진하고 있다고 한다. “민심을 제때 정확히 전달하고 정책 조정과 공직 기강, 정보 통합 역할을 하는 수석급 비서관 신설이 필요하다”는 것이 대통령실의 설명이다. 민정수석 폐지가 대선 공약이었던 점을 감안해 ‘민정수석 잔혹사’의 원인으로 지목된 사정(司正) 기능을 빼고, 명칭도 민정수석 대신 법률수석으로 부를 거라고 한다.관료-정치인 출신 대통령 참모와 달라야 그런데 법률수석으로 거론되는 후보군의 면면을 보면 대통령실의 설명을 곧이곧대로 믿기 어렵다. 대부분 대통령과 직간접적으로 인연이 있는 고검장과 검사장 출신 고위 전관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검찰 내 요직을 여러 번 맡았을 만큼 수사의 흐름이나 수사기관의 특성을 잘 알고, 후배 검사들과의 네트워크가 강하다. 민심 전달에 방점이 있다면 찾기 어려운 후보들이다. 여기에 역대 민정수석의 10명 중 6명 정도가 검사 출신이었다는 이력까지 더하면 명칭이 무엇이건 민정수석 같은 역할을 기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법률수석은 공직자 인사 검증과 감찰 기능이 있는 공직기강비서관실, 대통령실 업무 전반의 위법성 여부를 심사하는 법률비서관실을 지휘하게 된다. 과거 반부패비서관실처럼 수사 정보를 수시로 보고받고, 과도하게 개입하지 않더라도 검찰과 경찰, 국가정보원, 국세청, 감사원 등 5대 권력기관을 인사와 감찰로 얼마든지 통제할 수 있다. 하지만 ‘권력기관들의 군기반장’에 ‘대통령의 그림자’라는 타이틀이 더해진 막강한 권한의 법률수석 자리가 의외로 인기가 없다. 공직을 제안받은 상당수는 선뜻 나서지 못하고, 일부는 피해 다닌다는 얘기까지 들린다. 무엇보다 검사 출신 대통령 밑에서 법률수석을 맡는 것이 곤혹스럽다는 것이다. 대통령이 수사 또는 법률 전반을 누구보다 잘 안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역할이나 권한이 예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집권 중후반기라는 시점도 꺼림칙하다고 말한다. 권력 누수를 방지하기 위해 공직사회 전반에 긴장감을 높이는 악역을 맡아야 하기 때문이다. 당장 법률수석이 해결해야 할 과제 역시 녹록지 않다. 여소야대 정국에서 거대 야당이 통과를 벼르는 채 상병, 김건희 여사 등 특검법에 대처해야 한다. 야당의 특검 추진에 반대하는 논리를 만들고, 혹시라도 대통령실 관계자가 수사를 받게 되면 사실상 변호사 역할을 해야 될 수도 있다. 더 큰 문제는 수사기관 개편이나 시대 흐름에 따라 법률수석이 쓸 수 있는 카드가 마땅치 않다는 것이다. 가령 채 상병 수사 외압 의혹은 공수처가 수사 중인데, 법률상 대통령실은 공수처 수사에 일절 관여할 수 없다. 간섭하면 수사 대상이 될 수 있다. 특검은 ‘야당의 검찰’이어서 대통령실이 통제하기 어려운 구조다. 집권 중후반기 대통령실이 검찰의 수사를 찍어 누르려고 했을 땐 오히려 역효과가 났다. 직언, 직언, 직언… ‘민정 잔혹사’ 피하는 길 이런 악조건 속에서 법률수석은 어떻게 해야 할까. 평균 재임 기간이 1년을 넘지 못했고, 물러난 뒤 검찰 수사를 걱정해야 하는 처지였던 민정수석처럼 하면 안 된다. 승소하는 변호사가 되려면 의뢰인을 가장 먼저 설득해야 한다. 대통령의 지시를 그대로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집무실 문을 2, 3번이 아닌 5, 6번이라도 다시 열고 들어가야 한다. 화가 난 대통령이 얼마 뒤 “그게 된다는 말이냐”라고 묻고, 결국 “그게 맞으면 자네들 뜻에 따라 하라”고 말할 때까지…. 다른 관료 출신이나 정치인, 연배가 낮은 검사 출신 참모들이 지금까지 대통령에게 제대로 못 한 직언들을 줄기차게 하는 것, 그것이 법률수석의 유일한 생존법이다.정원수 부국장 needjung@donga.com}
“법원장이 직접 재판을 하는 건 어떻게 생각하나요?” 조희대 대법원장은 지난해 12월 국회 인사청문회를 준비하다가 갑자기 후배 판사에게 이런 말을 꺼냈다고 한다. 판사들이 머리를 짜내 제안한 재판 지연의 다양한 해결 방안엔 없던 것이었다. 사안이 복잡하고 품이 많이 드는 악성 장기 미제 사건을 법원장이 직접 재판하는 실험은 그렇게 시작됐다. 요란한 구호보다 가능한 처방 먼저 처음엔 효과를 장담하기 어려웠다. 전국 37곳의 법원장은 소속 법관과 직원을 관리하는 사법 행정의 책임자에 가깝다. 재판을 하지 말라는 명시적 규정은 없지만 관행상 하지 않았다. 법원장 외엔 사법 행정 경험이 거의 없었던 조 대법원장의 무모한 시도로 오해받기도 했다. 그런데 지난달 중순 법원장 재판이 하나씩 열리면서 법관과 민원인들이 대체로 호평하고 있다고 한다. 단순하게 두 가지 이유에서다. 첫째, 메기 효과처럼 판사들이 바짝 긴장하고 있다. 소속 법관이 갖고 있던 미제 사건을 법원장에게 재배당하는데, 그 자체가 해당 법관에겐 무능의 낙인이 될 수 있다. 당연히 법관은 미제 사건을 털어내려고 더 애쓸 수밖에 없고, 이를 민원인이 싫어할 리가 없다. 둘째, 재판 능력이 법원장의 필수 조건이 됐다. 법원장 추천제로 인기투표에 영합해 법원장이 되려는 법관이 적지 않았는데, 그런 판사가 더 이상 발붙이기 어렵게 된 것이다. 조 대법원장의 전임 대법원장이 사법부에 남긴 가장 큰 짐이 재판 지연이다. 그 문제를 풀기 위해 전임자를 악마화하고, 내부의 원인 제공자를 찾고, 법관 3200여 명을 향해 완전히 새로운 해법을 내놨다면 어땠을까. 시작부터 파열음이 일어났을 것이고, 실질적 변화를 이끌어내지도 못하고 티격태격하다 재판만 더 느려졌을 게 뻔하다. 법원장의 재판 참여는 요즘 사법부의 조용한 변화 중 하나일 뿐이다. 조 대법원장은 법원장 추천제를 바로 없애지 않았다. 법관의 추천을 받아 2년 임기의 법원장에 취임해 아직 임기가 남은 법원장들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1, 2년 법원장 추천제를 하지 않으면 자연스럽게 도태시킬 수 있는데, 굳이 마찰을 일으킬 이유가 없다고 본 것이다.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장 후보 추천 과정도 비슷하다. 조 대법원장 취임 직전 사법부의 반대로 차기 공수처장 후보가 다수의 동의를 얻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이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법원행정처장이 그대로인데, 대법원장이 바뀌었다고 찬반을 바꾼다면 사법부가 권력에 코드를 맞추는 것처럼 비칠 수 있다. 시간은 조금 더 걸렸지만 먼저 법원행정처장을 바꾸고 난 뒤에 자연스럽게 새 공수처장 후보를 추천하는 길이 열렸다. 일선 근무 때 조 대법원장은 야근을 해야 하는 상황이면 직원들 퇴근이 늦어질까 봐 먼저 청사를 빠져나갔다가 직원들이 퇴근하고 난 뒤에 다시 들어와 업무를 봤다. 늘 관용차로 출근하다가 대법원장 지명 다음 날 대중교통을 이용했던 전임자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자연스럽고, 조용한 조치들은 그 반대의 방식보다 전임의 흔적을 훨씬 더 빠르고, 확실하게 지우고 있다. 전임과 반대지만 더 빠른 ‘전임 지우기’ 그런데도 왜 일도양단식으로 사법부를 화끈하게 바꾸지 않느냐는 불만이 있을 수 있다. ‘사법 행정의 고수’로 불리던 고위 법관이 예전에 사법 개혁에 대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사법부는 항공모함과 같다. 항공모함은 목적지로 가기 위해 방향을 틀지만 배에 탄 사람들이 흔들림을 느껴선 안 된다.” 실속 없이 요란하기만 한 사회 곳곳의 개혁 움직임을 보면, 최소한의 조치로 예상 밖 변화를 이끌어내는 ‘조용한 혁명’이 비단 사법부에만 필요한 것은 아닌 것 같다. 정원수 부국장 needju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