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볼까요]22회 이상문학상 수상자 은희경씨

  • 입력 1998년 1월 19일 08시 14분


“수상자로 선정됐다는 소식을 듣는 순간 누가 제 머리채를 잡고 휘두르는 것 같았습니다. 정신차리자, 정신차리자 하며 끊임없이 가슴을 쓸어 내렸어요.” 제22회 이상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된 은희경(39). 스스로도 “아찔하다”고 고백할 만큼 고속질주를 하며 ‘주목받는 작가’로 자리를 굳혔다. 9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중편소설 당선. 96년 문학동네 소설상 수상. 97년 동서문학상 수상. 그리고 98년…. 심사위원들 사이에서도 “등단 3년밖에 안됐는데…”라는 걱정과 “그러니까 더 가능성이 있지”라는 낙관이 공존했다. 수상작은 ‘아내의 상자’. 현대문학 97년4월호에 ‘불임파리’라는 제목으로 게재됐던 작품이다. 아이가 없는 것을 빼고는 그럭저럭 평온한 삶을 꾸려나가는 신도시의 30대 부부. 그러나 그 평온한 껍질속은 황폐하다. 남편이 새 프로젝트의 팀장으로 세상의 질서를 바쁘게 수행하는 동안 아내는 모든 것이 깔끔하게 정돈된 집안 풍경과는 달리 세상에 적응하지 못한다. 스스로를 도태돼야 할 ‘열성인자’라고 생각하던 아내는 남편이 없는 시간 뜻밖에도 외도를 저지르고 남편은 아내를 정신병원에 유폐한다. 이 작품을 쓰도록 그의 마음을 움직인 한 장면은 소설속 여주인공의 입을 통해 고스란히 증언된다. “교외카페에는 나이든 여자들이 많아요. 휴대전화로 집에 전화를 해서 숙제 안한다고 아이들을 야단치고, 읽은 책 이야기도 하고, 헬스클럽이나 귀고리에 관한 이야기를 해요. 누구는 상가시세가 올라서 돈을 벌었다, 아무개교수의 교양강좌가 좋더라, 듣고 울었다, 그런 얘기를 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거예요.” 작가는 언젠가 본 그 교외카페의 풍경에서 “뿌리없이 떠도는 것들의 서글픔을 보았다”고 했다. “아내와 남편이라는 구도가 기본틀이지만 여성주의소설을 쓴 것은 아닙니다. 일상의 규격에 자신을 맞출 수 없어 불량품으로 취급되는 사람, 세상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 불모(不毛)의 존재에 관해 이야기를 하고 싶었습니다.” 은희경은 자신의 장기가 관찰자적인 시선으로 쓴 서사에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정말로 하고 싶은 것은 존재론적인 문제를 아름답게 천착하는 것이다. ‘아내의 상자’는 잘할 자신은 없지만 쓰고 싶었던 ‘존재의 비극성’에 관한 얘기였고 그런 점에서 이번 수상이 큰 격려가 됐다. 지난 한해 그를 짓눌렀던 화두는 ‘진짜 내 모습은 무엇인가’였다. 뒤늦은 등단을 단번에 벌충하듯 숨가쁘게 써내는 자신에게 스스로 제동장치를 걸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편소설 ‘새의 선물’로 베스트셀러작가가 된 뒤에는 “상업주의에 침윤된 것 아니냐”는 힐난에 상처입기도 했다. “수상통보를 받고 하루가 지난 뒤 ‘감당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뭘 써야 할지 이제는 어렴풋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확실하게 한발한발 디뎌야지요.” 〈정은령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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