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화로 여러 영화제에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는데 한 아프리카계 청소년이 제게 메시지를 보내왔어요. ‘이건 우리 모두의 이야기다’라고. 그때 느꼈습니다. ‘헤로니모’의 이야기는 모든 이민자들의 이야기라는 것을요.”
체 게바라·피델 카스트로와 쿠바 혁명을 함께 한 인물. 쿠바 내 한인 사회의 구심점. 한국 동포 헤로니모 임(한국명 임은조·1926~2006년)의 일대기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헤로니모’의 21일 국내 개봉을 맞아 전후석 감독(35)과 서울 용산구에서 만났다.
코트라 뉴욕 무역관에서 변호사로 일했던 전 감독은 2015년 휴가차 우연히 찾은 쿠바에서 헤로니모의 가족들을 우연히 만나며 그의 삶에 매료됐다.
멕시코 사탕수수 농장의 한인 이민자의 아들로 태어난 헤로니모는 아바나대 법학과를 졸업한 쿠바의 첫 한인 대학생이었다. 쿠바 혁명 직후에는 산업부 차관을 역임하는 등 요직을 지냈고 인생의 후반부에는 쿠바 한인회를 만들기 위해 헌신했다.
쿠바에서도 평생 대한민국 사람이라는 정체성을 지니고 살아간 헤로니모의 이야기는 미국과 한국을 오가며 ‘디아스포라(diaspora·離散)’를 체득하며 자란 전 감독 자신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한국 밖에서 한국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어떤 건지 늘 많이 생각했어요. 학부 시절 연변과학기술대에서 교환학생을 했던 시절도 있었고, 법대에 다닐 때는 브라질에서 인턴십을 한 적도 있었죠. 어느 곳에서든 한인 교포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고민하고 있었어요. 그렇게 ‘디아스포라’라는 개념에 눈을 떴는데 쿠바에 놀러가서 헤로니모의 삶을 듣는 순간 그 모든 경험이 하나로 연결되는 느낌이 들었어요.”
학부에서 영화를 전공했지만 실전은 전혀 다른 얘기였다. 자발적으로 도와준 친구들의 재능기부로 시작한 작업이 3년에 이르자 크라우드펀딩 사이트 ‘킥스타터’ 등을 통해 개인 후원을 모집했다. 전 감독은 직장을 그만두고 영화 작업에 매달렸다.
선조들이 떠나온 땅은 분명 하나의 한국이었지만 광복 이후 조국은 이념으로 분단됐다. 공산주의 혁명을 겪은 쿠바 한인들은 늘 ‘당신들은 어느 편이냐’는 질문을 안고 살아야 했다. 전 감독은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의 종착점은 애국심이나 민족주의가 아닌 인본주의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헤로니모가 그의 삶을 통해 준 메시지는 나라에 대한 충성이 아니라 사람에 대한 사랑이었습니다. 삶의 목적을 ‘한국인이 되는 것’에서 찾는 셈이지요. ‘나는 네가 누구든, 어디서 왔든 너를 포용할 수 있다’는 정신입니다.”
영화에 소개된 헤로니모가 자녀들에게 보내는 편지는 그의 정신을 그대로 압축했다. 전 감독은 “보석 같은 편지 내용 중 무엇보다 ‘조국’에 대한 문구가 감동적이었다”며 “조국이라는 건 헤로니모의 표현대로 새벽녘에 들리는 새소리, 행복하게 웃는 아이들의 웃음소리, 농부들의 땀, 선조들의 우정”이라고 말했다.
지금 우리는 마음만 먹으면 비행기로 전 세계를 이동 할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지만 역설적으로 이민을 둘러싸고 갈등과 반목을 겪는 시기이기도 하다. 이런 시대에 이 영화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샌디에이고 아시안 영화제에 초청됐을 때 공산주의에 반대해 쿠바를 떠나 미국에 정착하신 분들을 뵌 적이 있어요. 쿠바 내 한인들과 오랜 기간 마음의 벽을 쌓고 계셨다고 들었는데 영화가 끝나고 그분들이 저를 안아주시더군요. 이념에 관계없이 우리 모두의 이야기를 알려줘 고맙다는 이야기와 함께요. 모든 이민자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찾고 좀 더 열린 세상이 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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