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김훈 씨 “우리 사회의 언어, 의견과 사실 구분 못해”

  • 입력 2008년 9월 11일 02시 58분


“우리 사회의 언어는 의견과 사실을 구분하는 능력을 상실했습니다. 의견을 사실처럼 말하고 사실을 의견인 양 말하는 언어는 소통의 도구가 아니라 단절의 장벽을 쌓는 무기일 뿐입니다.”

‘남한산성’ ‘칼의 노래’의 소설가 김훈(60·사진) 씨가 10일 오전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광화문문화포럼(회장 남시욱)의 아침공론마당에 참석해 ‘나의 문학과 사회인식’이란 주제로 강연회를 가졌다.

김 씨는 “올해로 60세인 내 생애는 대한민국 건국의 역사와 맞닿아 있다. 어제 북한 건국 60주년 기사를 보며 참담한 소회에 빠졌고 지금 내 조국은 어떤 나라인지 생각해보게 됐다”고 말문을 열었다.

“요즘 신문, 저널 읽기가 고통스럽고 목이 멘다”고 털어놓은 그는 “현재 우리 사회의 지배적 담론들은 사실과 의견을 구분할 줄 모르는데 그것은 자신의 당파성이 정의라고 믿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칼의 노래’를 쓸 때 영감을 받은 충무공의 ‘난중일기’를 예로 들며 그는 “이 책의 놀라운 점은 충무공의 덕성이나 지성이 아니라 조선의 당파성에 휘둘리지 않고 오직 사실에만 입각해 글을 쓰는 정신”이라고 말했다.

또 그는 “나는 신념에 가득 찬 사람을 신뢰하지 않는 편인데 인간의 진실은 신념보다 의심 쪽에 있다고 보기 때문”이라며 “젊은 사람들이 현실을 과학적으로 인식하기보다 정서적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강한데 사실을 기반으로 정의를 세워야지 정의 위에 사실을 세울 도리는 없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런 소신은 그의 문학관에도 그대로 투영됐다.

“‘난중일기’에 나타난 무인의 문장처럼 사실만 가지런히 쓰고 싶습니다. 조사 하나를 쓸 때도 의견과 사실의 세계를 구분하기 위한 전략이 있어야 하며 그게 없다면 내 소설은 똥통에 빠지는 것입니다.”

이날 강연회에서 그는 6·25전쟁 때 피란 갔던 부산에서 초콜릿을 얻어먹기 위해 미군 부대 주변을 어슬렁댔던 유년기와 대학시절 영문학도로 낭만주의 문학에 심취했다가 우연히 ‘난중일기’를 접하고 받았던 충격 등 개인의 일화를 털어놓기도 했다.

그는 “유년시절 겪은 전쟁의 기억, 암울한 시대 상황으로 수용소 같은 대학시절을 보내야 했던 경험은 인간의 야만성에 절망하는 계기가 됐다”며 “소설가로서 내 본분은 인간의 고귀함과 아름다움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지만 세상의 폭력과 악, 야만성까지 함께 아우를 수 있도록 할 것”이라고 말했다.

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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