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은 아라키 노부요시에게 물었다 “당신에게 사진이란”

  • 입력 2002년 12월 2일 19시 35분


일본 사진계의 거장소리를 듣는 그에게는 권위의식이라곤 없었다. 대중의 마음을 알아채는 동물적 감각을 갖고있는 그는 인터뷰에서도, 작품설명회에서도 무대 위에서 한편의 쇼를 보여주는 듯 열성을 다했다./이종승기자
일본 사진계의 거장소리를 듣는 그에게는 권위의식이라곤 없었다. 대중의 마음을 알아채는 동물적 감각을 갖고있는 그는 인터뷰에서도, 작품설명회에서도 무대 위에서 한편의 쇼를 보여주는 듯 열성을 다했다./이종승기자
도쿄에서 방금 도착했다는 일본 사진작가 아라키 노부요시(62·荒木經惟)는 단구(短軀)였지만 목소리도 컸고 웃음소리도 컸고 몸짓도 컸다. 그는 검정색 진바지에 양쪽 손을 찔러 넣고 긴 코트자락을 휘날리며 자신의 작품이 전시된 서울 광화문 일민 미술관 1, 2층을 휘젓고 다니면서 연방 탄성을 내질렀다. “좋았어” “바로 이거야” “봐! 최고잖아”

대머리 양쪽에 남아있는 은발을 바깥 쪽으로 컬을 넣은 독특한 헤어 스타일과 은테의 검정 선글라스는 그를 자유로운 예술가처럼 보이게 했지만 초록색 티셔츠 사이로 불쑥 솟아나온 배는 거리에서 늘 만날 수 있는 아저씨같은 인상을 주었다.

성큼성큼 걷던 그가 ‘천공(天空)·God’s sky’이라는 작품 앞에서 멈췄다. 천공은 서울과 도쿄 하늘을 찍은 사진 1000장을 한 장의 사진처럼 뒤섞어 놓은 것이다. 그는 “서울과 도쿄이 하나가 되었다”면서 만족해 했다. 한 나부(裸婦)의 사진을 지나면서는 갑자기 왼손바닥으로 여자의 아래를 덮었다. “왜 가리느냐”고 물었더니 그는 “아니다, 만지는 거다” 하면서 크게 웃었다.

30일 동아미디어센터에서 열린 ‘아라키와의 대화’에는 1000여명의 시민이 모여 주최측을 놀라게 했다.

그는 단답형이었고 재치가 있었다. 짧은 순간, 자신의 말이 대중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질 지 동물적으로 알아채고 즉시 상황을 바꾸는 천부적인 쇼맨쉽을 갖고 있었다.

첫 한국전 소감을 묻자 이렇게 말했다.

“나는 전시를 할 때 세부적인 것은 맡기는 편이다. 그러면 기획자에 의해 내가 재창조된다. 이번 전시는 모든 면에서 만족스럽다. 아까 ‘천공’이라는 사진에서 보여지듯 서울과 도쿄의 섞임, 생과 사의 섞임이라는 내 취지를 잘 살렸다. 이번 한국전의 코드는 ‘비빔밥’이다.”

그는 “내 사진이 에로스적이라 한국적 상황에서 얼마나 받아들여 질 수 있을까 걱정했는데 기우였다”며 “사실, 성(性)이란 걸 빼면 내겐 삶의 의미가 없다. 계속 탐구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사진에 나온 여성들이 옷을 벗고도 수줍어 하거나 부자연스럽지 않다. 특별한 비결이 있나. 예를 들면 돈을 준다든지….

“돈을 준 적은 한번도 없다. 하하. 내가 아마 귀여우니까 여자들이 별로 긴장하지 않는 것 같다. 나는 사진을 찍기 전 상대방과 많은 커뮤니케이션을 한다. 사진은 거울과 같다. 내가 나쁜 표정이나 마음을 먹으면 상대방도 그렇다. 나는 사진을 찍을 때 상대방과 둘만의 연애를 한다고 생각한다. 남을 소중히 여기고 배려하면 남도 나를 그렇게 대한다.”

-왜 여자의 몸에 탐닉하는가.

“아름다우니까.”

-그런 아름다운 여체를 왜 로프에 묶어 사진을 찍나.

“자극을 가하면 여체는 더 아름다워지니까. 하하하.”

-아내와 함께 한 신혼여행 사진이나 죽어 가는 아내의 모습을 찍은 사진들이 이번에 많이 나왔다. 당신에게 아내는 어떤 존재였나.

“내가 사진을 찍는 의미였고 지금도 그렇다. 아내 사진을 찍기 전에는 주로 보도 사진을 찍었다. 그러다 아내의 사진을 찍으면서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의 존재를 찍을 때 다른 사람에게 감동을 준다는 것을 알게됐다. 음식과 꽃에 대한 사진에 몰입하게 된 것도 아내 때문이다. 아내가 죽기 전 일주일 동안 옆에서 간병하면서 내게 가장 강렬한 인상을 주었던 것이 음식과 꽃이었다. 아내가 먹는 음식을 찍으면서 생명의 원천같은 것을 느꼈고 죽기 직전 아내에게 선물했던 꽃이 아내가 죽은 직후 봉오리를 틔우는 것을 보고 ‘생의 전달’같은 것을 느꼈다. 내게 있어 꽃과 음식은 생과 사의 뒤범벅이다.”

-당신에게 사진이란 무엇인가.

“내가 사진이다.”

그는 곧 이렇게 덧붙였다.

“사진은 기억이다. 나와 우주, 그리고 사랑했던 사람과 함께 했던 시간에 대한 기억말이다.”

30일 오후 서울 광화문 동아미디어센터에서 있은 ‘아라키와의 대화’에는 무려 1000여명이 몰려 주최측을 놀라게 했다. 아라키는 자신의 작품 슬라이드를 보여 주면서 때로 엔카를 부르기도 하고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왜 그렇게 많이 찍느냐’는 관객의 질문에 ‘나는 변비형이 아니라 설사형이기 때문’이라는 직설적인 말로 좌중을 웃겼다.

무대에 서서 한편의 쇼를 보여 주는 듯 과장된 몸짓과 표정의 그를 보면서 그의 떠들썩함은 어쩌면 본능적인 자기 방어와 자의식 과잉으로 느껴져 거부감도 들었다. 하지만, 그에겐 그것이 예술적 힘의 원천이었다. 카메라 두 대를 옆에 끼고 밥집에서도 술집에서도 연신 셔터를 눌러 대는 그를 보면서 기자는 문득 1회용 카메라라도 들고 온 세상을 찍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허문명기자 angelhuh@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