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윤종구]헌것을 즐기는 일본 사람들

  • 입력 2009년 3월 23일 02시 56분


‘쇼와(昭和) 46년.’

며칠 전 우연히 100엔짜리 일본 동전의 발행 연도를 봤다. 쇼와 46년이면 1971년이다. 호기심이 발동해 집에 있는 동전의 발행 연도를 모두 확인해봤다. 쇼와 31년(1956년)에 만들어진 1엔짜리를 비롯해 1970년대 동전이 많았다. 1엔 5엔 10엔 100엔 500엔짜리 등 갖고 있던 동전 32개의 평균 발행연도를 계산해보니 1981년이었다. 28세인 셈이다.

한국은 어떨까.

본가에 전화를 걸었더니 마침 모아둔 동전이 꽤 있었다. 새로 나온 10원짜리 동전을 제외하고, 10원짜리 17개와 100원짜리 24개의 평균 발행연도는 1995년. 일본의 딱 절반인 14세다. 1976년생 10원짜리가 가장 오래된 동전이었다.

일본 사람들은 좀 불편해도 웬만하면 참고 견디는 것을 자주 볼 수 있다.

도쿄 중심부의 전철역 시설이나 역 주변을 둘러보면 세계 제2위 경제대국의 수도가 맞나 싶을 정도로 낡은 곳이 많다.

허름한 동네 이발소와 좁고 낡은 목욕탕, 중고 책방이 여전히 성업 중이다. 터치용 전철 패스가 도입된 것도 한국보다 한참 늦었지만, 아직도 탈 때마다 종이 티켓을 사는 사람이 꽤 많다. 제법 큰 기업 중에도 광랜으로 바꾸지 않고 10년 전 인터넷 선을 그대로 쓰는 사례가 적지 않다. 도쿄 중심가와 고급 주택가에도 가로수처럼 전봇대가 줄지어 있고 전선줄은 어지럽게 하늘을 가린다. 신문은 컬러 지면이 드물다. 신간은 넘쳐나지만 문고판 갱지 책도 많다.

반대로 새로운 것이라면 얼른 바꾸는 경우도 많다.

메이지(明治) 유신 이후 양력을 채택한 일본은 음력을 머릿속에서 완전히 지워버렸다. 동양 문화권에서 웬만하면 설 하루쯤은 쉴 만도 하지만 여느 평일과 다르지 않다. 달력 어디에도 음력 표시는 없다. 반면 양력 1월 1일은 관공서, 은행, 기업은 물론 웬만한 가게도 일주일 정도 문을 닫는다. 생일이 지나야 한 살 더 먹는 것도 서양식이다.

경쟁과 글로벌 스탠더드라는 신자유주의의 전도사를 자임하던 원로 지식인이 어느 날 갑자기 사상 전향을 선언하면서 어제까지의 신념을 깡그리 버리는 곳이 일본 사회다.

우리는 어떤가. 1970년대까지 수십 년 동안 역대 정부가 설을 신정으로 바꾸려고 애썼지만 허사였다. 설을 못 쇠게 하려고 새벽같이 예비군훈련을 소집하기도 했지만 국민의 생각까지 바꾸진 못했다. 초등학생 시절 아침 일찍 차례를 지내고 세배하고 학교에 갔던 기억이 아직 생생하다.

일본 사람은 대체로 생각을 빨리 새것으로 바꾸는 데 반해 물건은 낡아도 참고 쓰는 편이다. 우리는 경쟁하듯 새 물건을 찾지만 생각을 바꾸는 데에는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 생각과 물건의 경계가 분명하지 않은 경우도 많지만, 일상에서 그런 예를 종종 본다. 공맹의 본고장인 중국보다 한국에 오히려 유교 전통이 더 강하게 남아있다.

한국이 휴대전화기의 최첨단 전시장처럼 된 것이나, 통화와 문자메시지 기능만 이용하면서도 첨단 단말기를 찾는 사람이 많은 것도 같은 맥락이다.

100여 년 전, 새로운 생각으로 무장하고 근대화를 추구한 일본과 옛날식을 고집했던 한국은 다른 역사를 경험했다. 앞으로의 역사는 아무도 모른다. 생각을 빨리 바꾸는 사람이 앞서나갈지, 새 물건을 좇는 사람이 더 강해질지…. 곰곰이 생각해볼 일이다.

생각부터 바꿀 것인가, 물건부터 바꿀 것인가.

윤종구 도쿄 특파원 jkma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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