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135>떨어뜨린 것들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7월 2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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떨어뜨린 것들
―김행숙(1970∼)

여름 과일은 물주머니지
겨울에 물은 얼지
강물이 단단해지고 있어
10센티쯤……

내 얼굴에도 눈이 쌓였으면……
나의 시체처럼
그것은 내가 볼 수 없는 풍경이겠구나

아이들은 흙장난을 하다가 이상한 것들을 발견하곤 하지
어느 날은
야구공이 굴러간 곳에서 이상한 것을 줍지
손을 잃어버린 손가락 같은 것
뭐지?

찾았니? 저쪽에서 한 아이가 소리를 지르는 것이었다

나는 깜짝 놀랐어
과일을 깎다가 둥근 과일을 떨어뜨리지
향기로운 벌레가 기어 나왔어


자기만의 공간에서 과일을 깎든, 뜨개질을 하든 고개를 수그리고 나른히 손을 움직이며 빠져드는 상념의 흐름이 섬세하게 그려져 있다. 과일을 깎는다, 손목까지 흘러내리는 과일즙, 안개처럼 피어오르는 달콤한 향기. 과일을 깎는다, 한 손에 과일, 다른 한 손엔 칼! 방심해도 좋을 ‘과일 깎기’란 퍼포먼스를 펼치면서 시인은 방심의 부드러움과 방심의 아슬아슬함을 보여준다. 고삐를 놓으면, 생각이란 어디로 튈지 모르는 것.

‘떨어뜨린 것들’은 자동연상기술의 매력이 담뿍 담긴 시다. 자동연상기술이란 떠오르는 대로 그리는 것, 자유로이 자기 상념에 몰두하는 것. 그리하여, ‘그리하여’가 생략됐기에 시구들에 묘한 뉘앙스가 발생하는 것. 김행숙은 이 뉘앙스를 십분 살리면서, ‘맥락 없이 흘러가는 상념’이라는 그림 안에 미묘하게 맥락의 그림자를 새겨 넣은 홀로그램을 만든다. ‘내 얼굴에도 눈이 쌓였으면’, 얼굴에 흰 눈이 쌓인다면 누워 있는 것일 테지, 누워서 얼굴에 흰, 시트가 덮인 죽은 사람…. 마치 ‘흙장난을 하다가 이상한 것들을 발견하곤 하는’ 아이처럼, 여름 과일을 깎다가 ‘볼 수 없는 풍경인 나의 시체’를 발견하는 과정이라니. 김행숙의 시를 읽을 때면, ‘뭐지?’ 싶을 때가 드물지 않다. 누구나 어렸을 때 길바닥에서 정체 모를 이상한 것을 발견하고 “뭐지?” 놀라면서 소중히 주운 기억이 있을 테다. 도토리껍질인지 조가비인지 알쏭달쏭한 것, 닳아서 모서리가 둥글어진 유리조각이나 사금파리, 병뚜껑이나 돌멩이 같은 걸 보물이나 되는 듯 두근거리며 주머니에 넣곤 했지. 김행숙의 시, 향기로운 벌레!

황인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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