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물로 만나는 6·25]<6>소년학도병 아픔 담긴 병상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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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7월 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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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굣길에 교복입은 채 자원입대”

“총알 300발-쌀자루 메고 하루 백오십리씩 걸어”
전투중 파편박혀 장기입원
그때 쓴 일기 전쟁기념관 전시

6·25전쟁 발발 직후 중학교 3학년 때 학도병으로 자원입대한 정형섭 씨의 앳된 모습(왼쪽 사진). 초기에는 교복을 입고 전투했지만 이후 계급을 부여받은 뒤로는 전투복이 지급됐다. 오른쪽 사진은 1952년 부상으로 제대하기 전 병실에서 원고지에 쓴 전투일기 가운데 일부. 사진 제공 전쟁기념관
6·25전쟁 발발 직후 중학교 3학년 때 학도병으로 자원입대한 정형섭 씨의 앳된 모습(왼쪽 사진). 초기에는 교복을 입고 전투했지만 이후 계급을 부여받은 뒤로는 전투복이 지급됐다. 오른쪽 사진은 1952년 부상으로 제대하기 전 병실에서 원고지에 쓴 전투일기 가운데 일부. 사진 제공 전쟁기념관
파도처럼 몰려오는 적군, 턱없이 부족한 병력과 무기, 개전 40일 만에 낙동강까지 밀려난 국군…. 6·25전쟁 초기의 급박한 상황에서 총을 들고 전쟁터로 나선 사람 가운데 소년 학도병(학도의용군)을 빼놓을 수 없다.

정형섭 씨(78)도 6·25 참전 학도병 2만7700명 중 한 명이었다. 그는 1950년 8월 부산 대동중 3학년 재학 중 등굣길에 교복을 입은 채 자원입대했다. 그는 “당시 절망 속에 집을 떠나 친척집을 전전하던 중 군에 지원했다”고 회고했다. 입학이 늦어진 탓에 그의 나이는 이미 18세였다.

부산 4부두에 학도병 7000여 명이 집결했다. 군복도 지급받지 못했고 일제 구식 장총 한 자루가 주어졌다. 아버지에게 학도병이 된 사실을 알린 것은 입대 1개월이 지난 9월이었다. 그리고 1개월쯤 지나 아버지의 부음과 함께 “아버지가 눈을 감기 전 ‘형섭이 어디 있느냐’고 하셨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다. 정 씨는 “세상과의 유일한 끈을 잃어버렸다는 생각에 그 자리에서 기절했다”고 회고했다.

첫 전투는 포항시내 여자중학교에 집결한 인민군과 싸우는 것이었다. 하루 두 끼를 딱딱한 주먹밥으로 때웠다. 그는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절박함에 ‘억울하다’는 생각조차 못해 봤다”고 말했다.

1950년 9월 6일 일본 도쿄 지역에 살던 재일 한국인 학생들이 민단 사무실에 모여 6·25전쟁 참전을 결의하면서 ‘구국용사(救國勇士)’ 등 각오와 각자의 이름을 써 넣은 태극기. 사진 제공 전쟁기념관
1950년 9월 6일 일본 도쿄 지역에 살던 재일 한국인 학생들이 민단 사무실에 모여 6·25전쟁 참전을 결의하면서 ‘구국용사(救國勇士)’ 등 각오와 각자의 이름을 써 넣은 태극기. 사진 제공 전쟁기념관
1951년 2월 학도의용군이 공식 해체되면서 수도사단 1연대에 배속된 그는 그해 설악산 대청봉 돌격탈환작전 때 중공군이 쏜 포탄이 터져 온몸에 파편이 박혔다. 정 씨의 허리 뒤쪽에는 아직도 땅콩 반쪽 크기의 파편이 박혀 있다. 요즘에도 금속 탐지기를 통과할 때는 ‘삑’ 하는 경고음 때문에 난처한 일이 생긴다고 했다.

그는 부산 560군병원에 장기 입원하다 1952년 제대했다. 제대 후 그의 삶은 자신의 표현대로 ‘부산 영도다리 밑 거지’였다. 군용 밥그릇을 얻어 빌어먹었다. 그 후 세월이 흐르고 악착같이 달려든 사업에 성공하면서 전쟁을 기억할 기회는 줄어들었다. 그러다가 1990년대 초 한 지인으로부터 “새로 지은 전쟁기념관에 가 봤더니 당신 이름이 있더라”는 전화를 받았다. 정 씨가 병상에서 절망에 빠졌던 시절 쓴 전투일기와 편지봉투가 전쟁기념관 학도의용군 전시실에 전시돼 있었던 것이다.

그가 200자 원고지 12장에 쓴 체험담은 전투현장의 고통을 절절하게 전해준다. ‘하루 백리에서 백오십리를 걷고, 양 어깨에 총알 300발과 사흘 치 쌀을 메고 걷는 것은 말로 못할 고통이며…며칠씩 잠을 못 자고 걷느라 가로수에 부딪히고 개천에 빠지는 일이 잦았다.’

정 씨는 요즘 안보강사로 일한다. 6·25전쟁 발발 60주년을 맞은 지난달 말에는 거의 매일 초중고교를 방문해 자신의 경험담을 소개했다. 요즘 그의 즐거움 중 하나는 어린 학생들이 보내온 편지를 꺼내 몇 번이고 읽어보는 것이다. 인터뷰 때도 그의 안주머니에는 편지가 몇 통 들어있었다.

한 초등학교 6학년 어린이들이 보낸 편지에는 ‘살아남아 주셔서 감사해요.…선생님 목숨은 불사조같이 하늘이 지켜준 거니 오래오래 사세요’ ‘할아버지 같은 분이 있었기에 지금의 우리나라가 있었던 것 같아요’라고 씌어 있었다.

김승련 기자 srkim@donga.com
▼ 在日학도병 조국애 서린 태극기 ▼
641명 참전… 결의 다지려 태극기에 이름 등 적어

6·25전쟁 참전 학도병 중에는 일본에서 건너온 재일학도의용군도 있었다. 재일학도병 641명은 바다 건너 조국을 위해 기꺼이 참전했고 이 중 135명이 실종 또는 전사했다.

전쟁기념관 2층 6·25전쟁실에는 빛바랜 태극기 한 장이 전시돼 있다. 이 태극기는 6·25전쟁 발발 2개월쯤 뒤 일본 도쿄(東京)에 거주하던 한인 학생들이 참전 결의를 다지던 순간을 함께한 역사적 유물이다.

재일학도의용군회 회장을 지낸 우지식 씨(84)는 5일 동아일보와의 통화에서 “태극기는 내가 다니던 일본 호세(法政)대의 선배였던 정태희 씨가 보관해 온 것”이라며 60년 전 상황을 들려줬다.

1950년 9월 6일 재일본대한민국민단 소속 대학생 20명가량이 도쿄 시내 민단 사무실에 모였다. 누군가가 “일본에서 자라면서 나라 없는 설움을 겪은 우리가 반드시 조국을 살려내야 한다”며 참전 의사를 밝혔고 다른 학생들도 뜻을 같이했다.

이들은 어렵게 구한 태극기에 먹을 갈아 글을 써넣었다. 우국애족정신(憂國愛族精神) 공산군타도(共産軍打倒) 조국애(祖國愛) 등과 함께 정태희(鄭泰熙) 우지식(禹祗植) 등 당시 참석자 이름을 써넣었다. 이 태극기는 정 씨가 전쟁 중 줄곧 지니고 다녔다.

우 씨는 “정 선배는 전쟁 후에도 ‘악착같이 살아남아서 자녀들에게 우리가 한국인임을 알려주기 위해서’라며 태극기를 간직해 왔다”고 회고했다. 그는 “지역별로 모였던 학생 가운데는 태극기를 구하기 어려워 일장기에 파란 물감을 덧칠해 태극문양을 만들고 먹을 갈아 4괘를 그려 넣기도 했다”고 말했다.

재일학도병은 의용군(義勇軍)이라는 휘장을 달고 다녔다. 일본에 머물던 민단 소속 부녀회가 제작해 군 위문품과 함께 한국에서 싸우던 재일학도병에게 전달한 것이다. 미군 군복을 입고 싸웠던 이들은 휘장을 군복 상의 혹은 군모에 달고 싸웠다.

김승련 기자 sr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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