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커버스토리]누가 ‘문화’를 지배하는가… 숨은 문화권력, 유통 지배자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2월 2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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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시대 노래에 잠 깨고, 네이버로 검색하고, 카톡으로 약속잡고, CGV에서 영화 한 편

‘아이 갓 어 보이(I got a boy)∼ 너무 멋진∼’

알람으로 설정해 놓은 ‘소녀시대’ 노래에 잠이 깬다. 출근길 지하철 안에서 스마트폰으로 네이버 앱에 접속해 주요 뉴스를 훑는다. 회사에 도착하면 가장 먼저 하는 일, 컴퓨터 켜기. 기본으로 설정된 네이버 웹페이지가 뜬다. 점심식사 후 인터넷 교보문고에 접속한다. 화면에 보이는 주요 신간에서 몇 권 골라 장바구니에 담다 문득 의문이 생겼다. ‘주요 신간 선정 기준이 뭘까.’ 퇴근 후 근처 CGV에 갔더니 대부분의 스크린에 ‘베를린’이 걸려 있다. “지난주에 본 건데…. 집에서 TV나 봐야겠군.” 소파에 누워 리모컨으로 이리저리 채널을 바꿔 본다. 강호동, 김병만, 신동엽이 돌아가면서 나온다. SM 소속 연예인들이다.

소녀시대 노래에 잠을 깨 SM 소속 연예인들을 보며 잠에 드는 회사원 윤모 씨(35)는 극히 평범한 사람이다. 요즘 한국인이라면 ‘메이드 인 차이나’ 없이 살 수 없듯 CJ(영화 방송 게임 음악) SM(음악, 방송) 네이버(뉴스, 소설, 만화, 음악) 안 보고 살기도 어렵다. 눈 밝은 사람들은 한국 사회의 숨은 문화권력으로 문화 콘텐츠를 공급하는 ‘유통’권력을 지목한다. 문화계 전문가 32명은 문화계 유통권력으로 CJ(17명), SM엔터테인먼트(10명), 네이버(7명), YG엔터테인먼트(6명), 교보문고와 창작과비평(각 5명) 순으로 꼽았다(5개씩 복수 추천).

영화 방송 음악 게임 공연까지… ‘문어발’ CJ

이달 초 극장을 찾은 많은 사람이 앞서 소개한 윤 씨와 같은 경험을 했다. 지난달 30일 ‘베를린’ 개봉 이후 약 일주일간 서울 시내 CGV 내 스크린의 절반가량이 ‘베를린’을 걸었다. 물론 ‘베를린’은 재미있다. 하지만 다른 변수도 작용했다. ‘베를린’ 투자에는 CJ그룹의 자회사인 CJ E&M이 참여했다. 전국 극장에 배급한 회사도 CJ E&M이다. 국내 최대 영화상영관 CGV는 CJ 계열사다. 전형적인 계열사 영화 밀어주기다.

영화계에는 두 개의 문이 있다. ‘CJ를 통하는 문’과 ‘CJ를 통하지 않는 문’이다. 문화 유통권력 1위로 꼽힌 CJ E&M이 영화 투자·제작-배급-상영으로 이어지는 수직 계열화로 한국 영화계를 지배하고 있다는 뜻이다. CJ E&M은 지난해 총 43편의 영화를 배급해 관객 5246만 명을 동원했다. 국내에 상영된 전체 영화의 27.2%, 한국 영화 점유율만 따지면 36.7%다.

CGV는 전국 극장의 36.9%인 108개를 보유하고 있다. 민병훈 감독은 지난해 11월 상영관을 제대로 내주지 않은 CGV에 반발해 개봉 일주일 만에 자신의 영화 ‘터치’를 스스로 내리기도 했다.

영화뿐이 아니다. CJ E&M은 최대의 케이블 복수채널사업자(MPP)다. OCN tvN XTM 온스타일 스토리온 등 18개 TV 채널을 통해 전체 채널사업자 매출의 약 30%를 점유하고 있다. 또 최대 가입자를 확보한 복수종합유선방송사업자(MSO) CJ헬로비전도 보유하고 있다.

음악 게임 공연 분야에서도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밴드 ‘버스커 버스커’ 1집, ‘슈퍼스타K’ 등 CJ E&M이 제작한 음반이나 음원이 늘고 있다. 최근 인기몰이 중인 모바일게임 ‘다함께 차차차’도 CJ E&M 넷마블이 제작, 유통시킨 게임이다. CJ E&M은 지난해 ‘오페라의 유령’ ‘위키드’ 등 뮤지컬 30여 편을 제작했다. 올해도 30편이 넘는 뮤지컬을 선보일 계획이다.

장동건 강호동 김병만까지 싹쓸이… 몸집 키우는 SM

“방송 3일을 앞두고 저희 소속가수가 방송사로부터 일방적인 출연 취소 통보를 받았어요. 방송사에서 ‘대형 기획사가 압력을 넣어서 어쩔 수 없다’고 하더군요. SM에서 출연을 막으면서 ‘우리 소속 가수를 넣겠다’고 했답니다.”

한 기획사 관계자의 하소연이다. 연예계에서는 SM YG JYP 엔터테인먼트, 속칭 ‘3대 기획사’가 대(大)권력으로 통한다. 그 정점에는 SM이 있다. 문화 유통권력 2위로 꼽힌 SM표 아이돌 음악과 연예인들이 국내 음반 시장과 TV 프로를 가장 많이 점유하고 있다.

가요 통합차트 ‘가온차트’의 통계를 보자. 슈퍼주니어 동방신기 등 지난해 앨범차트 상위 50개 중 10개가 SM 소속 가수의 앨범이었다. 방송계에서는 SM이 소녀시대 등 소속 인기 아이돌을 지상파 프로그램에 출연시켜 주는 조건으로 방송사로부터 자사 신인들을 홍보할 기회를 자주 얻는다는 소문이 정설처럼 나돈다.

SM은 지난해 자회사 SM C&C를 설립해 장동건 김하늘 강호동 신동엽 김병만 이수근 등 거물급 연예인들을 영입했다. 이후 TV 예능 프로는 SM 소속 연예인들의 독무대가 됐다. SM은 소속 아이돌을 이용해 드라마를 제작하는 단계까지 나아갔다. 지난해 8월 방영된 ‘아름다운 그대에게’(SBS)는 기획부터 제작까지 모두 SM이 맡았다. 주인공은 SM 소속 그룹인 샤이니의 멤버 민호와 f(X)의 설리였다.

문화의 블랙홀 네이버… ‘무엇이든 집어삼킨다’

중소 규모의 웹소설 제공업체들은 요즘 작가들의 이탈을 막기 위해 고심 중이다. 웹소설은 인터넷으로 장르소설을 제공하는 서비스. 지난달 15일 네이버가 웹소설 서비스를 시작하면서 업계는 초상집이 됐다. 네이버가 무료로 웹소설을 제공하다 보니 이용자가 몰렸고, 기존 유료 웹소설 사이트 소속 작가들도 네이버로 옮겨가게 된 것. 웹소설 업체 ‘조아라닷컴’의 곽병찬 전략기획부장은 “네이버가 유료로 작가를 고용해 무료로 작품을 제공하니 독자들이 공짜로 웹소설을 보는 데 익숙해지고 있다”며 “네이버는 이용자를 모아 다른 쪽에서 수익을 내면 되지만 기존 웹소설 업체나 출판사들은 다 죽게 생겼다”고 말했다.

네이버는 70%가 넘는 검색 점유율과 2000만 명이 넘는 하루 이용자 수를 바탕으로 문화 콘텐츠 분야를 독점해 나가면서 ‘블랙홀’이란 지적을 받고 있다. 실제 네이버 검색 이용 시 ‘웹툰’이란 단어를 검색하면 ‘네이버 웹툰’이 뜬다. 김인성 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겸임교수는 “만화가나 소설가가 개별적으로 웹사이트를 열고 작품을 실어 광고수익을 얻거나 부가산업을 창출하면 생계를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며 “하지만 네이버가 검색 지배력을 바탕으로 자사 서비스와 콘텐츠만을 키운 탓에 검색을 해도 개별 사이트 정보는 나오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네이버 웹툰 역시 ‘죽어가는 만화 시장을 되살렸다’는 긍정적인 평가 못지않게 ‘기존 웹툰 업체들과 동네 만화방을 망하게 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한 만화 작가는 “작가들이 네이버 웹툰에 목을 매게 됐고 작품의 다양성도 떨어지고 있다”며 “이에 반발해 만화 작가나 스토리 작가들이 일본으로 건너가 활동하기도 한다”고 전했다.

계속되는 유통권력의 확장… 새 유통권력 카카오톡?

이 밖에도 유통권력은 문화계 곳곳에서 제작까지 겸하면서 영향력을 불려 나가고 있다. 지난달 초에는 국내 공연예매 시장의 70% 이상을 점유한 티켓예매처 ‘인터파크’가 공연을 자체 제작하자 한국콘서트제작자협회가 “불공정 경쟁”이라며 반발하는 사태가 빚어졌다. 출판사들은 요즘 교보문고와 껄끄럽다. 교보문고가 회원제 전자책 대여서비스 ‘샘(sam)’을 20일 출시해 연회비를 내면 전자책을 기존 책 가격의 30% 선에서 대여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한 출판사 관계자는 “전자책 대여 가격이 너무 낮은 데다 종이책 수입이 줄어들까 봐 반대했지만 교보문고 측은 ‘샘에 동참하지 않으면 불이익을 주겠다’고 했다”며 “교보문고에서 우리 책을 외진 곳에 전시하면 매출에 큰 타격을 입기 때문에 교보문고의 요구를 거절할 수가 없다”고 전했다.

이에 교보문고 측은 “종이책 시대를 넘어 새로운 시대(전자책)가 오는 것을 일부 출판사들이 못 받아들이고 불평하는 것”이라며 “실제로 책 진열대에서 빼거나 한 적은 없다. 각 출판사를 찾아가 충분히 동의를 구했다”고 반박했다.

스마트폰 무료 메신저 서비스인 ‘카카오톡’도 잠재적인 문화 유통권력이다. 카카오톡 하루 이용자 수는 3000만 명에 이른다. 카카오톡은 이를 바탕으로 다음 달 초 음원 동영상 뉴스를 판매하는 콘텐츠 유통 플랫폼 ‘카카오페이지’를 내놓을 계획이다. 카카오톡이 선별한 콘텐츠는 엄청난 노출 효과를 누리지만 그렇지 않은 콘텐츠는 소리 소문 없이 사장될 가능성이 크다.

그동안 문화 유통권력은 영세한 국내 문화콘텐츠 산업을 미래 성장 동력으로 키워낸 공이 있다. 원종원 순천향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는 “기업들이 적극적으로 (문화 산업) 시장에 개입하고 투자하는 것은 일정 부분 바람직하다. 규모의 경제를 이룰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한류 열풍도 그 덕을 봤다.

반면 창의적이고 다양한 아이디어를 지속적으로 수혈해 문화콘텐츠 산업의 경쟁력을 키우기 위해서는 견제가 절실하다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이동연 한국예술종합학교 한국예술학과 교수는 “문화 관련 독과점 방지 법률안을 만들어야 한다”며 “예를 들어 수직 계열화된 기업이 전체 영화 배급의 일정 비율 이상을 배급할 수 없게 제한하거나 한 영화가 극장에서 30% 이상 상영될 수 없게 하는 식으로 규제를 강화할 수 있다”고 제안했다.

김윤종 기자 zozo@donga.com
#커버스토리#문화#유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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