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김인규]대선 후보들이 외면하는 ‘가출 청소년 팸’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10월 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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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규 객원논설위원·한림대 교수
김인규 객원논설위원·한림대 교수
무소속 안철수 대선후보의 9월 19일 출마 선언 마무리가 꽤나 현학(衒學)적이었다. 그는 캐나다 작가 윌리엄 깁슨의 “미래는 이미 와 있다. 단지 널리 퍼져있지 않을 뿐이다”를 인용하며 연설을 마쳤다. 교수 출신답다. 그러나 그는 알까? 그 미래가 ‘판도라의 상자’에서 나왔다는 것을.

돌아갈 가정이 없는 미래 빈곤층

그리스 신화의 주신(主神) 제우스는 판도라에게 상자 하나를 선물로 주며 절대 열어보지 말라고 경고했다. 하지만 호기심을 못 이긴 판도라는 그 상자를 열어봤다. 그 순간 상자 안에 갇혀 있던 온갖 질병 범죄 증오 등이 뛰쳐나와 평화로웠던 세상을 어지럽게 만들었다. 놀란 판도라는 급히 상자를 닫았다. 상자 안에서 꾸물거리고 있던 ‘희망’은 다시 갇히는 신세가 됐다.

안 후보는 희망을 얘기하고자 깁슨의 말을 인용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순진한 믿음과는 달리 우리에게 ‘이미 와 있으나 널리 퍼지지 않은 미래’는 온통 회색빛이다. 북한의 김정일은 죽었지만 그의 아들은 여전히 호전적이다. 독도와 이어도의 영유권을 두고 이웃 일본과 중국과의 관계는 악화일로를 걷고 있다. 불황과 양극화의 골이 점점 깊어지면서 가계부채와 청년실업 문제가 시한폭탄처럼 째깍거리고 있다.

이미 와 있는 이러한 미래의 문제를 해결하려면 무엇보다 국민의 인내와 노력이 필요하다. 그러나 우리 국민은 삶이 고달파 그런지 현실을 직시하려 들지 않는다. 주요 대선후보들은 여기에 영합해 포퓰리즘적 복지정책을 쏟아내느라 바쁘다. 그들의 복지정책 공약은 대동소이(大同小異)하다. 무상보육, 무상급식, 무상의료, 반값 등록금, 기초노령연금 확대 등 모두 표 되는 곳에만 몰려있다. 그러나 나라의 장래를 위해 반드시 해결해야 할 가출 청소년 복지 문제는 서로 약속이나 한 듯 외면하고 있다. 표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경찰과 여성가족부의 조사에 따르면 지금 거리를 떠도는 가출 청소년(14∼19세)의 수가 20만 명을 넘어섰다고 한다. 충격적이다. 우리는 사춘기의 호기심이나 반항이 가출의 원인일 거라 짐작한다. 그래서 그들을 잘 선도하면 가정으로 돌려보낼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그러나 실상은 전혀 딴판이다. 그들 대부분은 빈곤과 가정 폭력을 견디다 못해 집을 뛰쳐나왔다. 그들에겐 돌아갈 가정이 없다.

집을 나온 청소년들은 인터넷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또래와의 만남을 시도한다. 그들 대다수는 가출의 두려움과 외로움을 극복하기 위해 새로운 형태의 가족인 ‘가출 팸(family)’을 만든다. 하지만 합법적 일자리가 불가능한 현실에서 ‘가출 팸’이 머무를 방값과 생활비를 마련하는 일은 큰 문제다. 사정이 이러하니 ‘가출 팸’은 결국 성매매 절도 폭력 등 청소년 범죄의 온상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가출 소녀의 절반 이상이 성매매를 경험했다고 한다. 그중에는 14세 어린 소녀들도 있다. 비참한 세상이다.

독일의 ‘청소년 하임’이 대안

교육의 기회를 박탈당한 가출 청소년들은 미래의 빈곤층 티켓을 예약해 놓은 것이나 다름없다. 그들이 꾸릴 미래의 가정이나 그 자식들 또한 마찬가지다. 이것이 바로 ‘이미 와 있으나 널리 퍼지지 않은 미래’의 한 단면이다. 지금 해결하지 않으면 곧 엄청난 사회적 비용을 지속적으로 치르게 될 ‘불편한 진실’이다.

가출 청소년을 교육하고 ‘가출 팸’을 건전한 가족으로 만들어줄 책임은 정부에 있다. 왜냐하면 그들의 현재와 미래의 빈곤을 막는 것은 시장 기능으로 해결할 수 없는 공공재이기 때문이다. 청소년 쉼터가 그나마 ‘가출 팸’의 대안이지만 극소수인 데다 제 역할을 못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가출 팸’의 대안으로 독일의 ‘청소년 하임(heim)’을 추천한다. 기숙사형 대안 치료 교육시설인 ‘하임’은 위기 청소년의 새로운 가족 형태로 정착하고 있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판도라 상자에서 꺼내야 할 ‘희망’이자 깁슨이 말한 미래다.

한국형 ‘하임’ 도입에는 막대한 예산이 든다. 하지만 가출 청소년의 복지는 무상보육이나 무상의료 못지않은 중요한 국가적 과제다. 따라서 전 계층이 혜택을 받는 ‘보편적 복지’ 대신 취약계층 위주의 ‘선택적 복지’를 택해 예산을 절약하고, 그 돈으로 20만 가출 청소년의 ‘하임’을 마련해줘야 한다. 이런 당위성에도 불구하고 득표에 도움이 안 되기 때문에 모든 대선후보들이 이를 외면하고 있다.

안철수 후보는 박근혜 후보나 문재인 후보를 당파적 이익을 추구하는 기성 ‘정치인(politician)’으로 폄하한다. 반면 그 자신은 나라의 장래를 염려하는 ‘국가 지도자(statesman)’라 여기는 것 같다. 하지만 그 역시 ‘가출 팸’ 문제를 언급조차 하지 않고 있다. 이렇듯 판도라 상자의 ‘희망’을 외면하면서 어떻게 ‘국가 지도자’라 자부할 수 있겠는가.

김인규 객원논설위원·한림대 교수 igkim@hallym.ac.kr
#대선 후보#가출 청소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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