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커버스토리]문화전쟁터, 유네스코 세계유산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7월 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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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8번째 승자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1000번째로 이름을 올린 아프리카 보츠와나 오카방고 삼각주. 동아일보DB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1000번째로 이름을 올린 아프리카 보츠와나 오카방고 삼각주. 동아일보DB
6월 25일 카타르 도하에서 열린 제38차 유네스코(UNESCO) 세계유산위원회에서 뜨거운 환호와 박수가 쏟아졌다. 여름철 우기가 되면 수만 마리의 코끼리와 버펄로 떼가 몰려드는 장관이 펼쳐지는 남아프리카 보츠와나 습지대인 오카방고 삼각주가 자연유산으로 등재됐기 때문이다. 1000번째 유네스코 세계유산이 탄생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이번 회의 결과 세계유산은 한국의 남한산성을 포함해 총 1007개로 늘어났다.

세계 각국은 유엔 산하 교육·문화·과학 전담 국제기구인 유네스코를 ‘문화 전쟁터’로 여기고 있다. 세계은행(WB)이 영국 중국 볼리비아 모로코 등 6개국을 조사한 결과 유네스코 세계유산은 등재 후 연간 0.5∼5%의 관광객 증가 효과를 봤다. 경제적 이익뿐만 아니라 교육적 사회적 환경적 효과도 나타나 ‘지속가능한 개발’ 사업으로도 떠올랐다. 이런 이유로 세계유산 등재사업에는 각국이 마치 올림픽 경기처럼 자국의 경제적 정치적 역량까지 총동원해 치열한 경쟁을 벌인다.

특히 그동안 서구 중심이었던 세계유산 등재사업에 아시아 국가들의 약진이 두드러지고 있다.

이미 주요2개국(G2) 반열에 오른 중국은 유네스코와 ‘신(新)밀월관계’를 맺고 글로벌 소프트 파워 확대에 나서고 있다. 과거사 문제로 갈등을 겪고 있는 한국과 일본도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식민지 국가 주민들이 희생된 탄광과 공장, 위안부 기록, 해녀(海女) 등의 세계유산 선정을 놓고 자존심을 건 싸움을 벌이고 있다. 프랑스 파리 유네스코 본부를 찾아가 문화전쟁의 현장을 취재했다.

▼ 소프트파워 상징… 中, 대운하 등재에 100억위안 투자 ▼

세계유산 보유 톱5중 4곳이 유럽… 무형유산은 中-日-韓이 톱3 올라
피라미드 같은 ‘대표 아이콘’서… 각국 숨은 보석 찾기로 중심이동
관광증가 등 지속가능 개발 모델… 올림픽 하듯 국가적 역량 총동원

유네스코 세계유산을 둘러싼 한중일 간의 경쟁이 점점 더 치열해지고 있다. ①지난달 세계유산에 선정된 한국의 남한산성 ②지난해 유네스코 인류 무형유산에 등재된 한국의 ‘김장문화’ ③중국이 100억 위안을 투자해 대대적으로 복원한 ‘대운하’ ④일본이 내년도 세계유산 등재를 추진 중인 ‘메이지시대 산업화 유산’ 중의 하나인 하시마 탄광. 특히 하시마 탄광은 일제강점기에 많은 한국인 강제징용 노동자들이 목숨을 잃은 곳이어서 한국 정부가 강력하게 항의했다. 동아일보DB
유네스코 세계유산을 둘러싼 한중일 간의 경쟁이 점점 더 치열해지고 있다. ①지난달 세계유산에 선정된 한국의 남한산성 ②지난해 유네스코 인류 무형유산에 등재된 한국의 ‘김장문화’ ③중국이 100억 위안을 투자해 대대적으로 복원한 ‘대운하’ ④일본이 내년도 세계유산 등재를 추진 중인 ‘메이지시대 산업화 유산’ 중의 하나인 하시마 탄광. 특히 하시마 탄광은 일제강점기에 많은 한국인 강제징용 노동자들이 목숨을 잃은 곳이어서 한국 정부가 강력하게 항의했다. 동아일보DB
서양의 유형유산 vs 동양의 무형유산

“유네스코 세계유산은 어떤 유산이 최고인지 뽑는 뷰티(美) 콘테스트가 아니다. 어떤 나라가 더 많이 갖고 있느냐가 우월함을 상징하는 것도 아니다.”

1일 오전 프랑스 파리 유네스코 본부에서 만난 키쇼어 라오 세계유산센터(WHC) 소장은 세계유산 리스트 1000개 돌파에 대한 소감을 묻자 이렇게 답했다. 세계유산 등재를 놓고 각국이 벌이는 경쟁을 의식한 대답이었다. 그는 “중요한 것은 숫자가 아니라 인류 문화의 다양성과 차별성을 보존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유네스코는 정책 프로그램 부문 예산의 약 40%를 아프리카 등 저개발 국가의 교육사업에 지원하고 있다. 세계유산협약에 배정된 예산은 6.9%에 불과하다. 그러나 지구촌 주민들에게 가장 인지도가 높은 프로그램은 역시 세계유산 목록 선정 사업이다.

유네스코가 세계유산 보호에 나서게 된 것은 1968년 이집트 정부가 아스완 댐을 건설할 당시 수몰 위기에 놓인 고대 이집트 유적보호 캠페인을 벌인 것이 계기가 됐다.

당시 유네스코는 50개국으로부터 8000만 달러(약 800억 원)를 모금해 아부심벨 사원 등을 더 높은 지역으로 옮겨 사라질 뻔한 인류의 보물을 지켜냈다. 이후 1972년 유네스코 세계유산보호에 관한 협약이 탄생했다.

초기에는 피라미드 타지마할 마추픽추 등 이미 널리 알려진 ‘대표 아이콘’이 등재됐지만 이후 세계유산 리스트는 각국의 숨겨진 보물을 세계에 알리는 창구 역할을 해왔다. 1920년대에 지어진 독일 베를린의 공동주택 ‘소셜 하우징’ 같은 근대 건축물도 이런 흐름에서 유산으로 올랐다.

1일 현재 세계유산으로 오른 1007개 중 779개가 문화유산, 197개가 자연유산, 31개가 문화와 자연이 어우러진 복합유산이다. 세계유산 보호협약에 가입한 191개 회원국 중 세계유산을 갖고 있는 나라는 161개국이다. 국가별로는 이탈리아가 50개로 1위, 중국 47개, 스페인 44개, 독일과 프랑스 각 39개로 ‘톱5’를 유지하고 있다.

서양 국가들이 주도해 온 ‘유형유산’(세계유산)과 달리 ‘인류무형문화유산’(무형유산) 분야에선 아시아 국가가 초강세다. 무형유산 선정은 1999년 동양인 출신으로선 처음으로 유네스코 수장에 오른 일본 출신 마쓰우라 고이치로(松浦晃一郞) 사무총장이 2003년부터 집중 추진했다. 현재까지 중국이 38건을 등재해 1위에 올라 있고 일본이 22건으로 2위, 한국이 16건으로 3위를 차지하고 있다.

유네스코는 또 매년 회의에서 ‘위험에 빠진 세계유산 목록’도 선정한다. 이후 제대로 된 보존조치가 없으면 세계유산 지정이 취소되기도 한다.

최근 40년간 세계유산 자격이 박탈된 곳은 2009년 독일의 엘베 강 유역(콘크리트 다리 건설로 경관 훼손), 2007년 오만의 아라비아오릭스 보호지역(유전 개발로 보호지역 90% 해제) 등 2곳이다.

비용보다 시민 자존감 상승이 더 소중

지난달 카타르 도하에서 열린 세계유산위원회에서는 중국의 대운하와 실크로드가 세계유산에 올랐다. 중국은 이를 위해 2006년부터 약 100억 위안(약 1조6200억 원)을 들여 세계 최대 인공수로인 대운하를 복원하는 프로젝트를 추진해왔다. 베이징(北京)과 항저우(杭州)를 잇는 1700km 길이의 대운하 복원 공사에는 하루 평균 3559명의 인력이 동원됐다. 산시(山西) 성 우타이(五臺) 산 인근 운하의 물길을 돌리는 데만 8억 위안, 간쑤(甘肅) 성 단샤(丹霞) 지형지질공원 조성에만 10억 위안을 투자했다.

라오 세계유산센터 소장은 “세계유산 지정사업은 문화보존뿐 아니라 빈곤 퇴치, 구도심 재개발, 일자리 창출 등 지역주민들의 삶을 개선시키는 ‘지속가능한 개발’의 대표 모델로 떠오르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베트남 호이안의 고대도시, 브라질의 세라다카피바라 국립공원은 빈곤 퇴치에 큰 기여를 한 사례로 꼽히고 있다. 그는 “특히 중국에서 세계유산에 등재되면 꼭 가보고 싶어 하는 관행이 생겨 관광산업에 큰 영향을 준다”고 말했다.

중국 항저우에 있는 시후(西湖)는 2006년 대운하 복원사업이 시작된 후 2009년까지 관광수입이 162% 늘었다. 중국 간쑤 성의 둔황(敦煌) 석굴도 1987년 세계유산에 지정된 뒤 너무 많은 관광객들이 몰려들어 동굴 내부의 기온이 상승하고 습기가 차서 천년 벽화가 손상되자 관광객의 입장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세계유산 등재의 ‘비용 대비 효과’ 연구는 수없이 쏟아지고 있다. 캐나다 노바스코샤 주 아카디아대의 조사 결과 1995년 이 지역의 ‘루넌버그 구시가지’ 유적이 세계유산에 오른 이후 10년간 관광객이 연평균 6.2% 증가했다.

컨설팅업체 프라이스워터하우스쿠퍼스(PwC)는 “세계유산을 보존하고 유지하는 비용이 들어가지만 관광산업 육성, 일자리 창출과 함께 시민 자존감, 공동체 유대감과 같은 사회적 자본, 교육적 효과까지 더해져 이익이 훨씬 더 크게 나온다”고 분석했다.

유럽의 여름휴가 관광상품 온라인 예약사이트에는 벌써부터 ‘1000번째 유네스코 세계유산 보츠와나 오카방고 델타 여행’ 상품광고가 등장했다. 보츠와나 사파리의 최적기인 7∼9월을 앞두고 오카방고 델타에서 범람한 강물 주변에 몰려든 코끼리를 구경하고 초원에서 피크닉과 낚시를 즐길 수 있는 값비싼 여행상품이다.  

▼ 한-중-일 경쟁 격화… 유네스코 “신청 보류” 요청까지 ▼

日, 강제징용 탄광 유산 등록 시도… 韓-中 “일제만행 기록물 등재” 맞불
아리랑-온돌 놓고는 韓-中이 신경전
美가 유네스코 분담금 안내는 틈타, 中 영향력 키우며 ‘3대 후원자’ 노려


태국-캄보디아 국경 지역에 있는 프레아 비헤아르 사원에 캄보디아 국기가 게양돼 있다. 캄보디아가 고대 힌두사원인 이곳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추진하는 과정에서 태국과 영유권 갈등을 빚었다. 동아일보DB
태국-캄보디아 국경 지역에 있는 프레아 비헤아르 사원에 캄보디아 국기가 게양돼 있다. 캄보디아가 고대 힌두사원인 이곳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추진하는 과정에서 태국과 영유권 갈등을 빚었다. 동아일보DB
중국은 최근 ‘실크로드’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에 맞춰 유럽과 중국을 잇는 고대 ‘비단길’의 현대적 복원도 준비하고 있다. 유네스코 홈페이지에는 벌써부터 삼성전자와 디스커버리채널이 공동 제작한 실크로드의 문화와 역사를 소개하는 다큐멘터리 시리즈가 선보였다.

한중일 “우리가 원조다”

동북아시아의 다양한 문화를 공유하는 한중일은 무형유산 등재에서도 서로 ‘원조논쟁’을 벌이며 갈등을 벌이는 중이다. 원조 논란은 2005년 11월 한국의 강릉 단오제가 유네스코 무형유산 목록에 등재되면서 시작됐다. 중국은 당시 “단오절 풍습은 중국이 원조”라고 반발하면서 무형유산 등재에 부쩍 관심을 쏟았다. 그 후 한의학(중의학), 판소리, 가야금 등에도 비슷한 상황이 일어나면서 한중 문화갈등이 깊어졌다.

‘아리랑’도 그런 풍상을 겪었다. 중국 문화부는 2011년 5월 ‘조선족의 아리랑’을 국가급 비물질 문화유산으로 등재했다. 중국을 구성하는 55개 소수민족의 문화를 보호하겠다는 명목으로 조선족의 문화 역시 중국의 유산으로 치부한 것이다. 당시 중국은 ‘조선족 아리랑’을 유네스코 무형유산으로 추진하겠다는 뜻도 밝혔다.

이에 위기의식을 느낀 한국 정부는 2012년 2월 ‘아리랑’을 부랴부랴 무형유산으로 신청했다. 정부는 남북 공동으로 진행해 오던 아리랑 등재를 단독으로 추진해 2012년 말에 결국 성사시켰다.

올해 3월 한국 국토교통부가 한민족 고유의 난방 양식인 ‘온돌’을 무형유산으로 추진한다는 소식에 중국이 또 발끈했다. 산시(陝西) 성 시안(西安) 비물질문화유산보호센터의 왕즈(王智) 부주임은 “한국의 온돌은 겨울에 추운 중국 북방의 농촌에서 사용하던 훠캉(火항)과 원리가 똑같다. 한국의 생활풍습은 중국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말했다.

한일 간에는 ‘해녀(海女)’ 문화를 놓고 원조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일본 해녀인 ‘아마(海女)’가 등재 신청을 준비한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2007년부터 ‘제주 해녀’ 등재를 추진했던 제주도는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박근혜 대통령은 올해 초 한국을 찾은 이리나 보코바 유네스코 사무총장에게 ‘해녀 등재’를 특별히 부탁하기도 했다. 결국 제주도는 내년도 등재를 목표로 일본보다 먼저 신청서를 냈다.

그러나 최근 유네스코 본부는 “해녀 등재심사 신청을 좀 보류해달라”고 한국 정부에 통보했다. 이는 “한중일이 무형유산 등재를 독점한다”는 다른 국가들의 반발 때문이었다. 유네스코 본부에 제출된 무형유산 등재 심사는 1년에 50건으로 제한돼 있으나 2015년 등재 신청 건수가 벌써 100건이 넘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유네스코는 한중일과 프랑스 등 ‘무형유산 선진국’에 등재심사 신청을 보류해달라고 요청했다. 그 대신 한 건도 등재하지 못한 국가들의 신청을 우선 심사함으로써 형평성을 맞추겠다는 계획이다.

유네스코 관계자는 “등재 신청은 상표 등록과 다른 개념으로 특정 국가가 특정 무형유산 등재를 신청함으로써 그 소유권을 갖는 것이 아니다”며 “세계유산 등재를 마치 올림픽에서 메달을 딴 것처럼 인식하는 바람에 3개국이 민족주의를 앞세워 핑퐁식 경쟁을 벌이고 있다”고 하소연했다.

유네스코 측은 여러 국가에 퍼져 있는 무형문화재는 모든 나라가 자국 내 무형문화재로 등재 신청할 권리가 있다고 밝혔다. 실제로 유네스코는 2003년에 이라크의 가무악인 ‘무캄’과 아제르바이잔의 무캄을 무형유산으로 공동 등재한 다음 2005년에 중국의 신장 위구르 무캄도 같은 목록에 올린 바 있다.

이상진 유네스코대표부 대사는 “한중일 간 역사 갈등으로 과열된 분위기를 가라앉히고 정치적 의미보다는 인류 공동의 문화보존과 교류라는 본연의 의미로 되돌아가야 할 때”라고 제안했다. 북한이 2일 ‘씨름’을 남북한 공동으로 무형유산으로 추진하자고 제안한 것은 이런 제안과 맥이 닿는다.

아시아 3개국 등재 둘러싸고 갈등도

보코바 유네스코 사무총장은 올 1월 동아일보와 인터뷰에서 “세계유산이 주변국 간 갈등과 분열의 씨앗이 돼선 안 된다”고 말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세계유산 등재가 이웃 간의 영토분쟁이나 역사 갈등의 불씨가 되기도 한다. 실제로 2008년 캄보디아가 태국과의 국경분쟁 지역에 있는 프레아 비헤아르 사원을 세계유산으로 추진하자 무력 분쟁이 다시 일어나기도 했다.

역사 갈등을 겪고 있는 한중일 사이에도 세계유산 분쟁이 터져 나오고 있다. 지난달 카타르에서 열린 회의에서 일본 메이지(明治·1868∼1912년)시대에 비단실을 뽑아내던 군마(群馬) 현의 도미오카(富岡) 제사공장이 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일본의 근대산업 유적이 세계유산에 오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회의 직후 한국 정부엔 비상이 걸렸다. 일본이 또다른 ‘메이지 시대 산업유산 28점’을 내년 6월 등재를 목표로 신청해 놓았기 때문이다. 이 유적에는 한국인 강제징용자 4700여 명이 노예처럼 일한 나가사키(長崎) 조선소와 한국인 122명이 목숨을 잃은 해저탄광이 있던 하시마(端島·일명 군함도)가 포함돼 있다.

일본에는 근대화 유적일지 모르지만 일제강점기의 고통을 떠올리게 하는 장소를 세계유산으로 올리려는 시도에 한국 정부는 강력 항의했다. 이상진 대사는 “일본은 가톨릭 전래유적 등 수많은 후보를 쌓아놓고 있는데 아베 신조(安倍晋三) 정권이 굳이 주변국의 상처가 서린 유적을 신청한 것은 고의라고 볼 수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라오 소장에게 일본의 나카사키 조선소와 하시마 등재 추진에 대한 의견을 물었더니 이렇게 대답했다.

“일본은 이번 등재 신청이 ‘메이지 시대’에 초점을 맞춘 것이지 한국 정부가 문제 삼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와는 시기가 다르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역사적 유산을 특정 시대만 떼어서 판단할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세계유산 등재 신청을 심사하는 국제기념물유적협회(ICOMOS)에 한국 정부 측의 의견을 포함시켜 종합적으로 판단하도록 했다.”

일본의 역사 도발에 중국도 좌시하지 않는다. 중국은 지난달 10일 일본군 위안부, 난징대학살 자료를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 신청했다. 한국은 위안부 관련 증언기록을 2017년 세계기록유산으로 신청할 계획이다. 일본은 2차 대전 당시 가미카제 자살특공대의 유서를 기록유산으로 추진하다가 중도에 포기했다.

세계유산 무대에서 강해지는 중국의 소프트파워

2일 오전 프랑스 파리 14구 몽파르나스 타워 6층에 있는 유네스코 한국대표부 사무실. 이상진 대사의 책상 위에는 사진집과 DVD 등 자료집이 수북이 놓여 있었다. 지난달 세계유산위원회를 앞두고 각국에서 세계유산 등재에 찬성해달라며 놓고 간 자료였다. ‘로비’의 흔적으로 보였다. 이 대사는 “한국이 지난해 유네스코 총회에서 21개국으로 구성된 세계유산위원회 위원국가로 선정된 힘을 이번에 톡톡히 느꼈다”고 말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는 전문가 그룹이 사전심사를 통해 △등재(inscribe) △보류(refer) △반려(defer) △등재불가(Not inscribe) 등 4단계로 권고를 내린다. 그러나 세계유산위원회에서는 이런 권고안이 뒤집히는 때가 수없이 일어난다. ‘보류, 반려’뿐 아니라 심지어 ‘등재불가’ 권고를 받은 곳이 등재되는 사례도 많다. 이러다 보니 회의장 주변의 식당, 커피숍, 회의장 구석구석에서는 ‘주고받기식’ 협상이 벌어진다.

이런 장면을 볼 때 21개국으로 구성된 세계유산위원회 위원국의 파워는 막강하다. 세계유산위 위원국 선출 투표는 ‘유네스코 총회에서 가장 치열한 선거’로 꼽힌다. 191개 협약국 대부분이 출마한 상태에서 21개국을 뽑다 보니 11% 안에 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한국은 지난해 세계유산위에 이어 올해 5월 무형유산을 등재하는 정부간위원회 위원국에도 선정됐다. 유네스코 분담금 순위 13위인 한국은 캄보디아 북한 등 아시아 국가들에 유무형 세계유산 보존 노하우를 전수하는 협력사업도 진행하고 있다.

1999∼2009년 마쓰우라 사무총장이 재직하던 10년간 유네스코에서는 일본의 영향력이 최고조에 이르렀다. 그러나 최근 몇 년간 유네스코 정부간위원회 선거에서 최다 득표는 중국에 돌아가고 있다. 미국이 2011년 이후 3년간 유네스코 전체 예산의 25%에 이르는 분담금을 내지 않아 영향력을 잃고 있는 사이 중국이 유네스코와 ‘밀월관계’를 맺으며 구원투수로 나섰기 때문이다.

올 3월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은 중국 국가수반으로서는 처음으로 파리 유네스코 본부를 방문해 “중국은 유네스코 활동에 대한 참여를 확대할 준비가 돼 있다”고 말했다. 시 주석의 방문을 계기로 중국은 ‘유네스코-만리장성 펠로십’ 수혜자를 연 75명으로 늘리고 문화섹터 창의산업 사업에 200만 달러를 쾌척했다. 중국은 이미 세계유산 47개, 무형유산 38건, 기록유산 9건, 생물권보전지역 32곳, 지질공원 29곳, 창의도시 5곳 등을 확보하고 ‘유네스코 브랜드’ 유치에서 최우등생이 됐다. 현재 유네스코 총회 의장도 중국인이 맡고 있다.

유네스코 관계자는 “3년 안에 중국이 영국 독일 프랑스를 제치고 유네스코 분담금 3위 국가가 될 것이다. 이제 각국이 중국 변수까지 생각해야 하기 때문에 경쟁 구도가 또 달라질 것”이라고 예측했다.  

▼ 등재 성공률 높아… 北, 아리랑 신청때, 南 벤치마킹하기도 ▼


한국,자타공인 세계유산 강국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된 동의보감. 동아일보DB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된 동의보감. 동아일보DB
대한민국은 월드컵에서 실망스러운 약체였지만 유네스코 유산만큼은 상당한 강국이다.

한국은 현재 유네스코 세계유산과 무형유산, 세계기록유산 3개 분야에 각각 11개와 16개, 11개로 모두 38건을 등재하고 있다. 인구나 땅덩이도 크고 유네스코에서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하는 일본(41건)과 비교해도 대등한 수준이다. 북한은 현재 세계유산 2건을 등재했다.

세계유산이 무슨 올림픽 금메달이냐는 지적도 있지만, 그래도 유네스코 등재는 기분 좋은일이다. 올해도 지난달 ‘남한산성’이 세계유산으로 등재되는 경사를 맞았다. 자국의 고유한 문화가 세계적으로 가치를 인정받았다는 상징성도 크지만 관광 수익 창출 면에서도 상당한 효과를 발휘한다.

2000년 세계유산에 올린 ‘고창 고인돌 유적’의 경우 등재 당시엔 한 해 방문객이 5만 명 이하였으나, 지난해엔 21만 명 넘게 몰릴 정도로 가파른 성장세를 보였다. 창덕궁도 1997년 등재 땐 약 28만 명 수준이었으나 현재 4배가 넘는 130만여 명이 찾고 있다. 문화재청 국제협력과 관계자는 “지방자치단체들이 등재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데는 이런 부수적 효과가 큰 것도 한몫했다”고 설명했다.

한국은 유네스코 회원국 가운데 ‘타율왕’으로통하기도 한다. 등재를 신청해서 성공하는 비율이 높다는 뜻이다. 등재를 추진하며 적절하고 발 빠른 대처로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드는 ‘마법’을 부려 왔다.

2010년 세계유산에 오른 ‘한국의 역사마을-하회와 양동’이 대표적인 사례다. 지난해 유네스코 본부가 세계문화유산협약 선포 40주년을 맞아 선정한 ‘최고의 모범 유산’으로 뽑힌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이다. 하지만 신청 당시 관리계획 부족을 지적당하며 보류 권고를 받을 뻔했다는 뒷이야기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정부와 관련 전문가들은 유네스코 국가위원회에서 다양한 네트워크를 활용해 적극적으로 어필함으로써 극적으로 분위기를 바꿔 놓았다.

한국은 많은 심사위원이 공감하는 등재신청서를 작성하기로도 유명하다. 지난해 무형유산이 된 ‘김장문화’는 김치 자체가 워낙 국제화되다 보니 초반엔 오히려 마이너스적인 요소가 많았다. 중국이나 일본이 민감하게 반응한 데다 김치의 상품적 가치 탓에 상업화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았다. 이 때문에 한국은 김치 자체보다 ‘공동체 나눔의 문화’에 초점을 맞춘 김장으로 승부를 걸었다. 유네스코 한국위원회의 김지현 차장은 “오랜 세월 한국인이 정을 나눠온 정신과 전통을 부각함으로써 많은 지지를 얻어냈다”고 말했다.

2009년 세계기록유산에 등재한 ‘동의보감’도마찬가지. 한의학 서적을 다량 보유한 중국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세계 최초의 공중보건서적’이란 점을 신청서에서 집중 조명해 점수를
땄다.

북한은 ‘북한의 아리랑 민요’를 등재 신청하면서 2012년 등재한 한국의 아리랑 신청서를 벤치마킹(?)했는데 이는 한국의 노하우를 높이 샀기 때문이다. 북한의 아리랑은 올해 11월 프랑스 파리 제9차 무형유산위원회에서 등재 여부가 결정된다.

앞으로 한국은 또 어떤 문화유산을 등재할 수 있을까. 현재 세계유산 분야에선 ‘백제역사유적지구’의 추진 속도가 가장 눈에 띄며 ‘한국의 서원’ ‘한양도성’ ‘김해·함안 가야고분군’ ‘한국의전통 산사’도 진입을 노리고 있다. 무형문화유산은 ‘줄다리기’와 ‘풍물놀이’, 기록유산은 ‘조선통신사 기록물’과 ‘KBS 영상기록물 이산가족을 찾습니다’가 유력 후보로 거론된다.

파리=전승훈 특파원 raphy@donga.com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유네스코#문화전쟁터#카타르 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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