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필름 끊긴 당신, 뇌손상 입은 겁니다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1월 2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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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누구랑 함께 있었는지, 무슨 얘기를 나눴는지, 그리고 집에는 어떻게 들어왔는지까지. 술을 즐기는 성인이라면 한 번쯤은 겪어봤을 일이다.

술만 마시면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 증상. 우리는 이를 흔히 “필름이 끊긴다”고 이야기한다. 의학적으로는 ‘알코올성 블랙아웃(alcoholic blackout)’, 즉 알코올로 인한 단기 기억상실이라고 부른다.

○ 심각한 뇌손상 유발


블랙아웃이 일어나는 이유는 기억력을 형성하는 과정과 관련 있다. 기억은 순간을 입력한 ‘단기기억’과 단기기억을 통합해 유지하는 ‘장기기억’으로 나뉜다. 단기기억이 장기기억을 저장하는 관자엽(측두엽)으로 넘어가려면 해마를 거쳐야 된다. 해마는 뇌 안쪽에 있는 저장장치로 길이 약 5cm의 곤봉 모양으로 생겼다.

그런데 알코올은 해마 세포의 활동을 둔하게 만들어 장기기억 형성을 방해한다. 이로 인해 사람들은 술을 마신 뒤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이 드문드문 나거나 아예 필름이 끊기는 현상을 경험한다.

개인차는 있지만 블랙아웃은 혈중 알코올 농도 0.15%부터 나타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건강한 사람들은 대부분 술이 깨면 기억력이 정상으로 돌아온다. 이 때문에 블랙아웃을 대수롭지 않게, 일상적인 현상으로 넘기는 경우가 흔하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필름 끊김 현상이 반복될수록 뇌가 심각한 손상을 입는다고 경고한다.

○ 강력범죄 저지를 가능성도 높아져


우선 뇌의 기능이 떨어질수록 알코올 섭취를 조절할 수 있는 능력도 함께 떨어진다. 이는 곧 알코올 의존증으로 이어지고, 블랙아웃 역시 1년에 한두 번 겪는 증상이 아닌 일상적인 일로 이어질 공산이 크다.

정동청 서울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블랙아웃을 한 번 경험하면 만취 상태에 대해 불안감을 느끼고 음주를 줄여야 한다. 하지만 음주문화에 관대한 우리나라의 특성상 블랙아웃을 경험하고도 알코올 섭취를 줄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알코올성 블랙아웃은 폭력 같은 2차적인 문제로 이어질 가능성도 크다. 정신을 놓은 상태에서는 충동이나 행동 조절이 어렵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폭력, 음주운전, 절도, 심지어 살인 같은 강력범죄로 이어질 수 있다.

실제로 2011년 경찰청이 발표한 강력범죄 통계에 따르면 음주 상태에서 발생한 범죄는 약 30%에 이르렀다. 범죄 유형별로는 살인 40%, 성폭행 34%, 강도 14%, 절도 6.6% 순. 이들 범죄자 중 상당수는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블랙아웃 증상을 호소했다. 물론 형량을 줄이려는 의도의 거짓 증언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하지만 블랙아웃이 지닌 위험성을 단편적으로 보여주는 통계로는 해석할 수 있다.

이 밖에도 블랙아웃은 정신착란 증세가 나타나는 ‘베르니케-코르사코프 증후군’이나 운동장애, 신경염 등 신경중추에 문제가 있을 때 생길 수도 있다. 블랙아웃을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상당수의 사람들은 우울증을 호소하기도 한다.

○ 알코올성 치매 막으려면 금주가 우선

최악의 경우 잦은 알코올성 블랙아웃은 50대 이후 치매 증세로 이어질 수 있다. 블랙아웃은 알코올성 치매로 가는 특급열차라고 표현될 정도다. 알코올성 치매는 전체 치매 환자의 약 10%를 차지한다.

알코올로 파괴된 뇌세포는 재생이 안 된다. 이로 인한 지능, 학습, 언어능력 등 인지능력 저하가 치매로 이어진다. 실제로 이 환자들의 뇌를 컴퓨터단층촬영(CT) 해보면 뇌가 일반인에 비해 크게는 1.3% 정도 줄어든 것을 관찰할 수 있다.

결국 알코올성 뇌손상을 예방하기 위해서는 술 마시는 양과 횟수를 줄이는 수밖에 없다. 전문가들은 “특히 블랙아웃이 일상적인 사람은 반드시 술을 끊으라”고 조언했다.

이철호 기자 irontige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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