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하준우]에디슨이 없었더라도…

  • 입력 2006년 4월 22일 03시 03분


코멘트
크로아티아는 올해를 ‘니콜라 테슬라(1856∼1943)의 해’로 선포했다. 테슬라는 일반인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발명왕 에디슨보다 뛰어났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천재다. 요새도 그의 노트를 뒤적이며 미활용 아이디어를 찾으려는 과학자들이 있을 정도다.

테슬라는 1856년 7월 9일 크로아티아 리카 지방에서 태어났다. 그는 독일 헝가리 프랑스 등지에서 전기기술자로 일하다 28세 때 달랑 4센트만 갖고 미국 뉴욕에 도착했다.

당시 에디슨은 직류전류의 대중화에 고민하고 있었다. 전등을 밝힐 수 있는 전류를 싼값에 공급할 수 없었던 것이다. 테슬라는 이 문제를 해결하면 많은 돈을 주겠다는 약속을 받고 에디슨의 연구소에 취직했다.

그는 교류전류를 만들고 변압기를 발명했다. 이로써 가는 전선을 통해 전류를 멀리 보낼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 직류를 송전하려면 굵은 전선과 1제곱마일마다 큰 발전소가 필요했다. 테슬라는 에디슨에게 10만 달러(지금의 가치로 수백만 달러)를 절약할 수 있게 해줬다.

하지만 에디슨은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테슬라는 에디슨과 결별했다. 이후 에디슨의 ‘테슬라 죽이기’가 시작됐다. 에디슨은 고압 교류전류로 개와 고양이를 태워 죽이는 몇 차례의 공개 실험을 통해 교류의 위험성을 강조했다. 테슬라는 이에 맞서 자신의 몸을 통해 교류를 흘려 전등을 밝히는 실험을 하기도 했다.

에디슨은 테슬라의 천재성까지 죽이진 못했다. 테슬라는 이후 형광등, 전자현미경, 자동차 속도계, 네온등, 레이더, 무선통신, 수직이착륙기, 수력발전소, 전자레인지 등 수많은 발명을 해냈다.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미국 해군은 독일의 잠수함을 탐지하는 방안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테슬라는 레이더의 활용을 제안했다. 그러나 에디슨은 “웃기는 일”이라고 일소했다. 이 때문에 레이더의 실용화는 25년이나 늦어졌다.

과학의 세계에서는 천재들이 같은 시대에 출연한 일이 적지 않다. 이들은 앙숙이 되기도 하고 동반자가 되기도 한다.

다윈은 1858년 6월 젊은 자연사학자 앨프리드 러셀 월리스에게서 편지를 받았다. 이 편지는 다윈이 20년간 공들인 미발표 연구를 잘 요약해 놓은 듯한 논문을 담고 있었다. 다윈은 고민 끝에 월리스와 공동으로 논문을 발표했다. 이후 다윈과 월리스는 사제지간이 돼 ‘종의 기원’ 등 기념비적인 저작을 내놓았다.

미국 영국 등의 눈부신 과학적 발전은 이들의 경쟁과 협조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다소 심하게 말한다면 시기의 차이는 있겠지만 에디슨이 없었더라도 인류는 호롱불 대신 전깃불을 밝힐 수 있었을 것이다. 또 다윈이 없었더라도 진화론의 토대가 닦였을 것이다. 중요한 진전은 한 사람의 천재가 아닌 탄탄한 펀더멘털(기반) 위에서 이뤄진 것이다.

올해 월드컵에서 활약하리라 기대됐던 불운한 스트라이커 이동국 선수는 전방십자인대 수술을 앞두고 본보와 가진 인터뷰에서 “이동국 하나가 없다고 걱정할 일은 아니라고 확신한다”고 말했다.

2002년 월드컵에서 한국의 4강 진출은 분명 놀라운 사건이었다. 펀더멘털이 튼튼한 브라질의 우승을 놀랍게 여기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한국이 올해 월드컵에서 4년간 더 다져 온 축구의 펀더멘털을 좋은 성과로 보여 주길 기원한다.

하준우 사회부 차장 hawoo@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