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태어나고 자라고 짓밟히고 있는 반도 만세 ”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2월 2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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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작가들 눈에 비친 ‘3·1독립운동’
日 세리카와 데쓰요 교수 번역… 당시 배경 日소설-시 10편 모아 출간
만세 운동과 제암리 학살 생생 묘사… 식민지 조선 민중의 통분 꿰뚫어

세리카와 데쓰요 교수
세리카와 데쓰요 교수
“그들이 태어나고 자라고 짓밟히고 있는 반도 만세!”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파고든 일본의 문학가 모리야마 게이(1904∼1991)가 1928년 5월 ‘센키(戰旗)’ 창간호에 발표한 소설 ‘불’의 마지막 문장이다.

소설의 무대는 1919년 3월 3일 경기 수원 인근. 일본에서 탄광 광부로 일하던 주인공 이진유는 귀향해 서울에서 일어난 만세운동 이야기를 듣고, 소학교 운동장에서는 집회가 열린다.

“나는 한 시간 전에 경성에서 급히 달려왔소! … 누구나 다 마지막 한 명까지 나아가려 했다. 누구나 모두 오랫동안 기다렸어. … 젊은 몇백 명의 여자들이 말이야. … ××를 향해 기가 꺾이지 않고 맨 앞에서 행진했다.”

명백한 3·1운동 묘사다. 이진유는 마을사람들과 함께 “목구멍이 마를 때까지” 만세를 불렀지만 군중은 속아서 교회 안으로 몰려들고, 경관들이 우글거리는 가운데 복병처럼 나타난 ‘××’들이 총질을 시작한다.

“거기에는 독살스러운 연기와 불길이 날아올라 가는 교회 건물 안에서, 몇백 명의 사람들이 소리를 내고 있는 아비규환이 아닌가. 세찬 바람이 부추겨서 불은 의기양양한 듯이 건물과 건물 안의 사람을 불태우고 있었다. … 그리고 이러한 잔악함을 계획한 인귀(人鬼)들을 보라. 그들은 창문으로 빠져나가려 하는 사람을 ××하고, 죽음을 무릅쓰고 접근하는 마을사람들을 같은 마지막으로 내몰고 있었다.”

검열 탓에 주요 단어가 ‘×’로 표시되기는 했지만 일본군이 수원 제암리(지금의 화성시)에서 자행한 집단학살의 현장이 문학 작품으로 변형, 재현된 것이다.

한국 문학 연구자인 세리카와 데쓰요 일본 니쇼가쿠샤대 명예교수는 3·1운동 101주년을 앞두고 일본 작가들이 3·1운동을 표현한 문학 작품을 번역하고 해설한 ‘일본 작가들의 눈에 비친 3·1독립운동’(지식산업사)을 최근 출간했다.

여러 작품들은 식민 지배를 받는 한국인의 울분과 독립 의지를 사실적으로 그려내고 있다는 평가다. 소설 ‘조선의 여인’(스미 게이코·1920∼2012)에서 ‘희열 할머니’는 장날 만세운동에 참가했다가 일본 헌병에 끌려간다. 처참한 고문을 당한 끝에 돌아오지만 끝내 목숨을 잃는다. 작가가 일본의 조선인 마을에 살면서 만난 여인들의 삶이 창작의 동기가 됐다고 한다. 세리카와 교수는 “조선 여자들의 삶을 통해 식민지가 된 민족의 비애와 통분을 꿰뚫어 보고자 한 작품”이라고 설명했다.

책에는 모두 10편이 실렸다. 광복 전 작품으로는 ‘불’을 비롯한 소설 ‘불령선인’(나카니시 이노스케), ‘간난이’(유아사 가쓰에)와 시 ‘어떤 살육사건’(사이토 다케시), ‘살육의 흔적―사이토 다케시 씨의 어떤 살육사건을 읽고’(사이토 구라조), ‘간도 빨치산의 노래’(마키무라 히로시)가 담겼다. 광복 후 작품은 ‘조선의 여인’을 비롯한 소설 ‘이조잔영’(가지야마 도시유키), ‘조선·메이지 52년’(고바야시 마사루)과 시 ‘수양버들처럼 흔들린 손’(아키노 사치코)을 다뤘다.

일부 작품에는 한국에서 살며 한국을 고향이라고 생각했던 작가의 체험이 반영됐다. ‘간난이’는 아버지를 따라 한국에 살던 작가 유아사 가쓰에(1910∼1982)가 목격한 수원의 3·1운동이 담겼다. 이 소설은 한국인들에게도 비교적 널리 읽혔다고 한다. 세리카와 교수는 “‘독립을 바라는 조선인들의 마음에 감동받아 울면서 썼다’는 작가의 진지한 자세와 골목골목까지 잘 알던 수원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점에 끌렸을 것”이라며 “소설 속 간난이의 죽음은 유관순의 이미지와도 겹친다”고 설명했다. ‘수양버들처럼…’과 ‘이조잔영’, ‘조선·메이지 52년’ 등도 마찬가지다.

세리카와 교수는 “10편 가운데 5편이 3·1운동 탄압의 상징적 사건으로 제암리 학살을 직간접적 테마로 다루고 있어 인상적”이라고 밝혔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3·1독립운동#세리카와 데쓰요#일본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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