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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달에 13번, 5년 동안 200번…“청년 이승만의 강연은 공공외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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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달에 13번, 5년 동안 200번…“청년 이승만의 강연은 공공외교였다”

조종엽기자 입력 2019-07-02 16:07수정 2019-07-02 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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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유학 시절 뉴잉글랜드 지역의 국제기독학생모임에 참석한 이승만(앞줄 오른쪽 두 번째). 기독교 계통의 모임은 인종 간 분리가 성행하던 시절임에도 이승만에게 많은 강연 기회를 제공했다. 연세대 이승만연구원 제공
많으면 한달에 13번, 5년 동안 200번.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러 도미한 청년 이승만(1875~1965)이 1905~1910년 유학 중 강연에 나선 횟수다. 대한제국이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박탈당한 이 시기 이승만의 강연은 미국에서 일본의 ‘아시아 연대론’에 맞서 싸우는 공공외교였다는 연구가 나왔다.

김명섭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와 연세대 박사과정 한서영 씨는 ‘국제정치논총’(59집-2호)에 게재 예정인 논문 ‘미국 유학 시기 이승만 강연활동의 양상과 함의’에서 이승만의 강연활동을 처음으로 분석했다.

“아시아 전체를 삼키겠다는 일본의 구상은 러시아가 한 생각과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일본의 총은 소리 없이 심장을 저격합니다.”

미국 오하이오 주 뉴어크의 신문 ‘모닝 스타’가 1907년 7월 25일 보도한 이승만 인터뷰다. 일본이 ‘열등한’ 아시아를 개화시킬 수 있는 나라라고 자처하며 침략을 정당화하는 논리를 퍼뜨리고 있던 데 맞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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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은 세계적 기독교 행사에도 한국 대표 자격으로 참석했다. 1906년 7월 매사추세츠 주 노스필드에 각국 청년 대표 3000여 명이 모인 ‘만국학도공회’에 유일한 한국인으로 참석했다. 1908년 3월 피츠버그에서 열린 국제선교사대회, 1910년 세계주일학교대회 등에서도 한국의 상황을 알렸다. YMCA(기독교청년회)를 비롯한 기독교 네트워크는 힘없는 나라에서 온 동양인에게 강연 기회를 제공했다.

분석 결과, 이승만은 그야말로 미국 전역을 누볐던 것으로 나타났다. 강연은 초창기 워싱턴을 중심으로 시작해 점차 미국 중·동부 지역으로 확대됐고, 적어도 10개 주 36개 지역에서 열렸다. 야외 공터, 가정집, 거실 모임 등 장소나 형식도 가리지 않았다.

물론 이승만은 일제의 한국 침략에 앞장선 스티븐스를 1908년 3월 저격한 전명운 장인환 의사의 재판 통역을 요청받았으나, 종교적 신념을 이유로 변호할 수 없다고 거절해 한인 사회의 비난을 받기도 했다. 독립운동 노선 차이가 영향을 줬다는 게 오늘날의 해석이다.

논문은 “이승만의 강연활동은 공식적 외교 통로가 단절된 상황에서 미국 공중에게 직접 한국의 독립이 위협받는 상황을 알리는 공공외교였고, 한국의 독자성과 정체성을 인식시키는 문화외교였다”고 밝혔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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