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병 눈 피해 부채고개 모인 400명…태극기 들고 ‘대한독립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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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년 3월 1일 14시 5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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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4·5 소초만세운동은 항일정신 강한 마을의 결정체

강원 원주시 소초면사무소 광장에 건립된 소초면독립만세 기념비.2019.3.1 ©  뉴스1
강원 원주시 소초면사무소 광장에 건립된 소초면독립만세 기념비.2019.3.1 © 뉴스1

1919년 3·1운동 후 한 달여만에 강원 원주군(현 원주시) 소초면에서 펼쳐진 4·5만세운동은 주민들이 일본 헌병의 눈을 피해 목숨을 걸고 비밀리에 거사한 지역 최대 규모 만세운동이다.

여기에 가담한 故심의성 독립운동가(1899~1976)가 1972년 쓴 ‘원주 소초면의 삼일운동 진상 회고담’에는 1919년 4월1일 횡성만세운동을 하다 숨진 강달회, 하영현의 장례식을 거행하며 만세운동을 계획하고 거사 날 400여명이 모여 대한독립을 외친 사실이 생생하게 기록돼 있다.

심 선생은 회고록에서 ‘소초면 동지 강사문(강달회)씨와 하돌림(하영현)씨가 사망했다. 그래서 우리 동지들이 다시 가서 두 분의 시체를 메고 둔둔리 본가에 갖다 놓고 공론이 분분했다. 우리가 다 죽더라도 오늘 희생된 두 분을 위하여서도 불러야 하고 독립선언서 공약에 최후 일인 최후일각이라고 하지 않았느냐고 하여 부르기로 결정됐다’고 밝혔다.

4·1횡성만세운동에서 5명이 일본의 총탄에 숨졌는데 이중 두 명이 소초면민인 강달회와 하영현이었다.

소초면은 원주군에 속했으나 지리적으로는 횡성과 가까워 많은 주민들이 3월27일과 4월1일 횡성에서 열린 만세운동에 참여했다. 특히 둔둔리 주민들이 대거 가담했다.

심 선생의 회고록에 따르면 3월20일경 소초면 둔둔리 천도교인 강만형이 이웃에 사는 강달회와 하영현, 횡성 천도교 교구장 최종하와 상의해 천도교인 이동구에게 독립선언서를 받아 만세시위를 계획했다.

독립선언서는 소초면 평장리의 신현철과 장양리의 심의성에게 전달됐고 두 사람은 소초면 내에서 비밀리에 공작해 동지를 규합하고 태극기를 제작했다.

당시 소초면은 천도교 신자와 항일 정신을 가진 인물들이 많았다. 서당 훈장 박영하는 한말 의병운동에 참여한 바 있고 천도교인 강만형의 아버지 강도영은 의병으로 활동하다 횡성에서 전사했다. 항일의식이 유독 강한 마을이라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리고 횡성만세운동에서 총탄에 맞아 숨진 동지의 희생이 소초면민들의 애국정신에 활을 당겼다.

어둠을 틈타 조선독립운동 만세운동계획이 담긴 서신들은 소초면 마을 곳곳으로 전해졌다.

4월5일 거사 당일 군중들은 부채고개로 삼삼오오 모여들었다. 박영하가 둔둔리를, 김동선이 교항리를, 신현성과 김흥열이 평장리를, 김동혁이 의관리를, 심의성이 장양리를 이끌었다.

군중들은 품에서 태극기를 꺼내 휘두르며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다. 부채고개에 모인 인원은 400명을 넘어 500명에 가까운 것으로 기록돼 있다.

당시 헌병출장소가 있던 수암리를 제외하고 둔둔리, 의관리, 장양리, 평장리, 교항리 등지에서 모인 주민들은 점심 즈음부터 마을훈장이었던 박영하의 선창에 따라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며 면사무소까지 나아갔다 오후 5시쯤 해산했다.

심의성 선생의 손자인 심상현 전 소초면독립만세운동유족회장은 “당시 수암리에 헌병주재소가 있었다. 혹시라도 만세운동을 한다는 이야기가 새어 나갈까봐 여기 사람은 빼고 평장리 등 다른 마을에서 군중들이 모여왔는데 400명이 넘었다”고 말했다.

만세운동은 유혈충돌 없이 무사히 끝난 듯 했다. 하지만 이틀 후인 7일 헌병출장소는 헌병보조원을 앞세워 주동자 15명을 체포해 압송해갔다.

1919년 4월5일 소초만세운동의 계획, 과정, 결과까지 상세한 정보가 담겨 있는 故심의성 독립운동가의 생전 회고록.2019.3.1 © 뉴스1
1919년 4월5일 소초만세운동의 계획, 과정, 결과까지 상세한 정보가 담겨 있는 故심의성 독립운동가의 생전 회고록.2019.3.1 © 뉴스1

심의성 선생의 기록에 따르면 헌병이 20여명을 포박해 갔다가 미성년자 등 5~6인을 석방하고 동지 15인은 징역, 태형 등의 처벌을 당했는데 이는 장양리의 심의성, 심능주, 심능복, 심의교, 심의승, 신종오, 교항리의 심능학, 김인배, 전병훈, 임윤집, 조흥수, 평장리의 신현철, 박영하, 이용희, 김용해다.

원주시역사박물관은 소초만세운동 독립유공인물을 30여명으로 기록하고 있다.

주동자 중 심(沈)씨 성을 가진 사람이 많은 이유는 당시 심씨 일가가 소초면에 집성촌을 이루며 살았기 때문으로 전해진다.

심 선생은 회고록에서 “소초면 삼일운동은 참으로 용감하고도 맹렬적이라 하겠다. 생명의 희생을 각오하고 했었던 것이다”라고 당시를 회상했다.

일제치하 1919년 원주읍내에는 원주헌병분대와 원주헌병수비대가 있어 주민들에 대한 집중 감시가 이뤄졌다. 특히 3·1운동을 기점으로 퍼진 전국 만세운동에 대한 일제의 감시도 뜨거웠다. 따라서 원주는 읍내가 아닌 소초면, 부론면, 흥업면 등 주변 면과 리를 중심으로 만세운동이 거세게 일어났다.

조부 심의성 선생의 영향을 받은 심상현 전 유족회장은 소초면민들의 독립정신을 기리기 위해 조부가 작성한 명단을 바탕으로 그 후손들을 찾아 나섰다. 유족회를 결성하고 소초면사무소에 소초면 독립만세 기념비를 세우는데도 앞장섰다.

매년 4월5일 이곳에서는 소초면 독립만세운동 기념행사가 열려 일제에 대항해 독립을 외쳤던 애국지사들의 넋을 기리고 그 정신을 이어가고 있다.

(원주=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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