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행 4시간30분 지나자 ‘알람’…체코 화물기사 30년 무사고 비결은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11월 25일 15시 0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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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16일(현지 시간) 체코 프리덱 미스텍 지역에서 화물차 운전사로 근무하는 슈테판 레이 씨가 화물차 앞에서 본보 기자와 인터뷰를 하며 포즈를 취하고 있다. 프리덱 미스텍=최지선 기자 aurinko@donga.com
지난달 16일(현지 시간) 체코 프리덱 미스텍 지역에서 화물차 운전사로 근무하는 슈테판 레이 씨가 화물차 앞에서 본보 기자와 인터뷰를 하며 포즈를 취하고 있다. 프리덱 미스텍=최지선 기자 aurinko@donga.com
지난해 한국에서 화물차에 의한 교통사고로 숨진 사람은 961명으로 전체 교통사고 사망자(4185명)의 23%였다. 특히 고속도로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한 사람의 39.4%는 화물차 때문에 화를 입었다. 전체 교통사고 사망자는 해마다 줄고 있지만 이 중 화물차 교통사고 사망자의 비율은 높아지는 추세다.

교통안전 선진국에서도 화물차는 대형 인명사고의 원인이 되기 때문에 안전수칙을 철저하게 지킨다. 유럽연합(EU) 국가 간에는 화물차 교류가 활발해 공통 안전수칙을 갖고 있다. 화물차 사고의 ‘3과(過)’인 과로·과속·과적을 막는 엄격한 규정을 지킨다. 때문에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가운데 우리나라보다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낮은 동유럽 국가도 화물차 사고 사망 비율이 한국보다 낮다. 서유럽과 동유럽 사이에 위치해 유럽 물류의 중계기지 역할을 하는 체코의 화물차 안전 실태를 살펴봤다.

30년 무사고 비결은 ‘휴식’

“30년 무사고예요.”

지난달 16일(현지 시간) 체코 프리덱 미스텍 지역에 있는 UI로지스틱 화물기사로 근무하면서 24t 트럭을 운전하는 슈테판 레이 씨가 자랑스러운 듯 화물운송면허증을 내밀었다. 사진과 생년월일, 면허 취득일과 갱신일이 적혀있는 겉모습은 한국과 비슷하다. 하지만 카드를 뒷면으로 돌리니 집적회로(IC)칩이 박혀 있었다.
슈테판 레이 씨의 화물운송면허증이 화물차의 디지털운행기록계(DTG)에 꽂혀진 모습. 카드 위 화면에 운전시간이 나타나 법정 휴식시간을 지키도록 해준다. 프리덱 미스텍=최지선 기자 aurinko@donga.com
슈테판 레이 씨의 화물운송면허증이 화물차의 디지털운행기록계(DTG)에 꽂혀진 모습. 카드 위 화면에 운전시간이 나타나 법정 휴식시간을 지키도록 해준다. 프리덱 미스텍=최지선 기자 aurinko@donga.com

레이 씨가 운전석 머리 위에 있는 디지털운행기록계(DTG) ‘운전자1’ 칸에 카드를 집어넣자 ‘+1:00h’ 표시가 깜빡였다. 화물차 바퀴가 움직인 지 총 1시간이 됐다는 표시다. 4시간30분 운전하면 45분을 의무로 쉬어야 하기 때문에 휴식시간이 되면 DTG에 알람이 뜬다.

화물차 사고를 막기 위한 첫 걸음은 운전기사가 과로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체코의 화물차 운전기사들은 주당 기본 45시간을 운행한다. 추가운행을 하더라도 일주일에 56시간을 넘어선 안 되고 2주간 총 90시간 이하로 일해야 한다. 주간에는 4시간30분 운전하면 45분간 의무 휴식시간을 갖고, 야간 운행시간인 오후 10시~오전 6시에는 운행 3시간마다 45분씩 쉬어야 한다. UI로지스틱 김태우 사장은 “의무 휴식시간을 지키지 않으면 운전기사가 벌점을 받고, 운수회사도 벌금을 내기 때문에 잘 지켜진다”고 말했다.

우리나라는 화물차 운전자가 4시간 운전하면 30분을 의무적으로 쉬도록 하는 화물자동차 운수사업법 시행령¤시행규칙 일부 개정안을 지난해 1월부터 시행했다. 이를 위반한 운송사업자는 10~30일의 사업 일부 정지 또는 60~180만 원의 과징금을 내야한다. 하지만 현재까지 적발 사례가 단 3건에 그쳐 유명무실한 상태다.

과속 막는 속도제한 장치

슈테판 레이 씨가 모는 화물차 앞 유리창에 붙여진 ‘제한최고속도 시속 85km’를 뜻하는 스티커. 차량에 속도제한장치가 부착돼 과속운전을 막는다. 프리덱 미스텍=최지선 기자 aurinko@donga.com
슈테판 레이 씨가 모는 화물차 앞 유리창에 붙여진 ‘제한최고속도 시속 85km’를 뜻하는 스티커. 차량에 속도제한장치가 부착돼 과속운전을 막는다. 프리덱 미스텍=최지선 기자 aurinko@donga.com
속도 제한 장치는 가장 기본적인 조치다. 레이 씨의 화물차 창문에는 ‘MAX 85km’라는 스티커가 붙어있었다. 3.5t 이상 화물차에는 의무적으로 시속 85km가 넘지 않도록 속도 제한 장치를 달아야 한다. 우리나라도 3.5t 이상 화물차에는 시속 90km 속도 제한 장치를 설치해야 하지만 불법 해체 사례가 많다. 삼성교통안전문화연구소 조사에 따르면 화물차 운전자의 97%가 제한속도인 시속 80km를 초과해 주행하고 있다.

체코 교통부 토마스 네롤드 도로안전과장은 “DTG 보급 전에는 운행시간이나 속도를 속이는 운전기사가 많았지만 이제는 매달 운행정보를 회사에 제출해야 해서 규칙이 잘 지켜지고 있다”고 말했다. 저장된 운행정보는 교통부 산하 도로안전센터에서 수시로 단속한다. 한국에서는 2009년부터 사업용 차량에 DTG 부착이 의무화됐지만 화물차의 운행기록 제출은 의무가 아니어서 지난해 제출율이 34%에 그쳤다.

과적 막으려 잦은 노상 단속

과적은 잦은 단속으로 막는다. 체코 교통부 도로교통센터에서 화물차를 담당하는 파벨 버그만 팀장은 “매일 장소를 바꿔가며 노상 단속을 한다”고 밝혔다. 단속 때는 적법한 화물운송면허 소지 유무, 음주 검사, 적재물 서류와 무게가 일치하는지 등을 확인한다. 검사는 15분 정도 소요된다. UI로지스틱 권경 매니저는 “화물차 운송을 10차례 나가면 6~7차례는 노상 단속에 걸리고 폴란드 등 일부 국가의 국경에서는 매일 단속이 이뤄진다”고 말했다. 우리나라는 1년에 단속 점검을 받는 화물차 수가 전체의 10%가 안 된다.

금요일 오후 1시부터 일요일까지 주말에는 화물차가 아예 도로로 나오지 않도록 운행을 금지한다. 교외로 나들이 가는 차량이 많기 때문에 사고 가능성을 원천 차단하기 위해서다. 손상될 수 있는 식재료나 긴급 화물 등은 미리 운행 허가를 받아야 하며, 운행 시에는 추가 세금을 내야 한다.

국내 화물차 안전 위협 3過

나운전 씨(50)는 25t 트럭을 사기로 하고 1억5000만 원에 계약했다. 모아둔 돈으로 선금 3000만 원을 먼저 내고 나머지 금액은 매달 할부로 갚기로 했다. 열심히 일하면 매달 남부럽지 않은 돈을 손에 쥘 거라는 꿈에 부풀었다.

하지만 시작부터 돈이 술술 새나갔다. 먼저 화물 운송을 하려면 영업용 번호판이 있어야 하는데 영업용 번호판은 화물운수사업자에게만 나온다. 나 씨는 ‘프리미엄’ 2000만 원을 주고 운수회사에게서 영업용 번호판을 샀다. 운수 회사에서는 프리미엄 외에도 매달 차량 관리 명목으로 ‘지입료’, 일감 소개비용으로 수수료를 떼겠다고 했다.

주변 화물 운전사들은 “운수 회사들이 서로 영업용 번호판을 사고팔아 수시로 소속 운수회사가 바뀐다”고 말했다. 운수회사가 일방적으로 계약 만료를 통보하면 일감을 얻지 못해 속수무책으로 빚더미에 앉는다는 흉흉한 이야기도 들렸다. 나 씨는 ‘발을 잘못 들였나’ 하는 생각에 정신이 아득해졌지만 지입료와 수수료, 유류비를 벌려면 후회할 시간이 없었다. 매일 화물을 가득 싣고 땅 끝에서 끝까지 여러 차례 운행하는 생활이 시작됐다.

화물운송 업계 관계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화물차 운전사들이 겪고 있는 현실을 재구성한 사례다. 한국에서 화물차 운전사들의 ‘3과(과로·과속·과적)’ 관행이 사라지지 않는 이유는 ‘지입제’라는 특수한 화물차 운용 제도 탓이 크다는 지적이다.

지입제의 사전적 의미는 ‘운수회사에 개인 소유 차량을 등록해 일감을 받아 일한 뒤 보수를 지급받는 제도’다. 이 의미대로라면 화물차 운전사가 개인사업자로서 운수회사와 동등한 지위를 가져야 하지만 현실은 화물차 운전사가 운수회사에 종속돼 있는 철저한 갑을(甲乙)관계다. 화물차 운전사는 운수회사의 을이고, 운수회사는 화주(貨主)에게 을이다. 화물차 운전사, 운수회사, 화주로 이어지는 ‘다단계’ 구조인 것이다. 반면 체코를 비롯한 유럽연합(EU) 국가들은 운송사가 화물차를 소유하고, 운전사들은 회사에 고용된 직원이다. 정해진 시간동안 일하는 월급제이기 때문에 ‘3과’의 유혹에 빠질 이유가 없다.

한상진 한국교통연구원 국가교통안전연구센터장은 “지입제를 당장 바꾸기는 현실적으로 어렵다. 화물차 운전사를 위한 ‘안전임금제’를 실시하면서 화물차주에게 적절한 운송료가 배분되고 있는지 모니터링 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또 “디지털운행기록계(DTG)를 의무제출하도록 하고 과적, 과속, 과로는 화물차주와 운송사에게 모두 책임을 묻는 양벌제를 도입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프라하·프리덱 미스텍=최지선 기자 aurink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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