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양가 없는 영상들에 지쳤다…돈내고 글 읽는 ‘비디오 디톡서’란?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9월 9일 16시 4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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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자의 위기를 논하는 영상의 시대에 때 아닌 ‘긴 글’ 바람이 불고 있다. 짧은 동영상을 뜻하는 ‘숏폼(short form)’ 콘텐츠와 반대로, 생각을 정리하면서도 공감할 수 있는 읽을거리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중심으로 각광받는다. 넘쳐나는 영상물로부터 정신을 해독시키길 갈망하는 이들을 일컫는 ‘비디오 디톡서(Video Detoxer)’란 말까지 유행하고 있다.

비디오 디톡서들이 찾는 텍스트 콘텐츠는 단순히 정보를 전달하는 실용적인 글들과는 결이 다르다. 같은 정보라도 문학적 감수성을 더하거나 개성 있는 체험이나 통찰을 문장력을 살려 정리한 글들이 많다. 굳이 따지면 블로그보단 진중하고 전문서적보다 알기 쉽다.

이들은 하나같이 이런 글을 찾는 이유로 ‘대충 쓴 영양가 없는 글이나 광고·홍보 성격이 짙은 콘텐츠에 지쳤다’고 입을 모았다. 회사원 박자영 씨(27)는 “주로 출퇴근 자투리 시간에 의미 없는 글이나 영상을 보며 시간을 헛되이 쓰는 게 싫었다”며 “나에게 도움이 되는, 밀도 있는 컨텐츠에 대한 갈증을 느껴 찾아보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30대 직장인 이성수 씨도 “무한대로 쏟아지는 3분 내외 동영상 영상들은 보고 나서도 남는 게 없고, 답답하기만 했다”고 토로했다.

이런 수요가 급증하면서 ‘긴 글 전용 온라인 플랫폼’들도 최근 크게 성장하고 있다. 2015년 시작한 ‘브런치’는 글을 게재할 권한이 주어지는 작가가 될 수 있는 자격이 까다롭다. 현재 2만여 명의 작가를 보유하고 있는데, 미리 글들을 심사해 퀄리티를 유지한다. ‘퍼블리’는 비교적 현장 전문가를 저자로 섭외해 기획단계에서 예약 펀딩을 받거나 정기결제를 통해 콘텐츠를 독자들에게 공급한다. ‘스티밋’은 저자에게 독자의 추천 수에 비례해 일종의 가상화폐인 ‘스팀’을 제공하는 방식으로 공신력을 끌어 올린다.

비디오 디톡서에게 인기 있는 글감은 아무래도 자기계발이나 취미를 깊이 있게 다룬 것들이 많다. 워킹맘의 하루, 낯선 직업의 세계, 퇴사 준비기를 소개한 글도 인기다. 취미로 발레를 배우는 과정을 담은 에세이 ‘웰컴 투 발레월드’를 쓴 윤지영 작가(45)는 “사적인 일기가 아니라 궁금해 할만한 정보들을 담는다. 영상보단 여백이 있는 글이 적합하다”며 “플랫폼에서 작가 자격을 얻어서 글을 쓰는 거라 책임감이 크다”고 했다.

‘콘텐츠의 비용’에 대한 개념도 많이 바뀌었다. ‘공짜 글’보다는 돈을 지불하더라도 양질의 글을 추구한다. 퍼블리 측에 따르면 월 5만 원 이상을 내는 고객이 전체 80%이상을 차지할 정도. 마케팅을 전공하는 대학생 이소연 씨(20)는 퍼블리를 통해 “6월 열린 칸 국제광고제 현장 소식을 발 빠르게 받아봤다”며 “이전엔 글을 돈 내고 읽는다는 게 낯선 개념이었지만, 이젠 믿을 수 있는 콘텐츠라면 아깝지 않다”고 말했다.

이들 플랫폼은 이용자 환경도 긴 글 애호가들의 취향에 맞춰져 있다. 브런치의 허유진 담당 디자이너는 “독자 입장에서 긴 글이 잘 읽히도록 문장과 문단의 여백, 행간의 차이, 글자의 두께, 자간 등을 신경 썼다”고 설명했다.

이제 수준 있는 긴 글의 인기는 온라인을 넘어 오프라인으로도 이어지고 있다. 인기 있는 콘텐츠는 책 출간으로 가는 디딤돌이 되기도 한다. 최근까지 박창선 작가의 ‘디자이너 사용설명서’ 등 총 900여 권이 이런 방식을 거쳐 출판됐다. 브런치 관계자는 “작가들이 지속적인 창작과 출간의 꿈을 이룰 수 있도록 주문형 출판서비스 등 지원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며 “올 하반기에도 작가를 지원하기 위한 다양한 활동을 진행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조윤경 기자yunique@donga.com
김민 기자kimmin@donga.com

‘무례한 사람에게 웃으며 대처하는 법’ 저자 정문정 작가

‘무례한 사람에게 웃으며 대처하는 방법’의 정문정 작가는 “글쓰기 본질에 집중하겠다는 고집”을 긴 글 플랫폼의 매력으로 꼽았다. 브런치 제공
‘무례한 사람에게 웃으며 대처하는 방법’의 정문정 작가는 “글쓰기 본질에 집중하겠다는 고집”을 긴 글 플랫폼의 매력으로 꼽았다. 브런치 제공
책이 찍어내기 무섭게 팔려나가 딱히 홍보도 못했다. 온라인에 공개한 저자 칼럼과 서문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로 급속도로 퍼지며 자연스레 입소문을 탔다. 100만 명 넘게 칼럼을 봤고, 책은 최근까지 30만 부가 팔렸다. 올 상반기 베스트셀러 ‘무례한 사람에게 웃으며 대처하는 법’ 이야기다. 잡지 ‘대학내일’ 디지털미디어편집장 출신인 저자 정문정 작가(32)는 출간 전부터 ‘글빨’ 좋은 칼럼으로 인기가 높았다. 그에게 온라인에서 잘 읽히는 글쓰기에 대해 들어봤다.

-‘무례한…’이 온라인으로 입소문이 퍼지게 된 과정은?

“포탈사이트 메인 말고도 다양한 통로가 있다. 처음엔 블로그 ‘브런치’에 글을 올렸다. 그런데 이것이 1boon(일분·모바일 맞춤형 짧은 컨텐츠 서비스)을 비롯한 여러 사이트에 가면서 파급력이 세졌다. 페이스북도 있고, 내가 직접 확인하지 못한 다른 통로도 많을 것이다.”

-온라인에 맞는 표현을 고민한 결과인가?

“맞다. 온라인에서 먹히는 컨텐츠는 따로 있다. 잡지 기자를 하다 디지털로 넘어가면서 적응하는 데 고생했다. 종이로 볼 때 좋은 글이어도 모니터나 휴대전화에선 안 읽힐 수 있다. 웹툰을 보듯 스크롤하며 읽기 때문에 최대한 편한 호흡으로, 친근하게 써야 한다.”

-온라인 독자를 사로잡은 비법을 공개한다면?

“우선 클릭하고 싶은 제목을 정해야 한다. 글의 첫 문단에 매력적인 얘기를 많이 넣는 것도 중요하다. 스크롤하면서 보는 독자들은 아무래도 참을성과 집중력이 떨어진다. 정보의 밀도가 너무 높으면 아예 읽지 않는다. 개인적으로 간단한 핵심 주제를 처음과 중간, 마지막에 3번 반복해 쓰는 편이다. 새로운 정보보다 ‘공감’이 되는 글을 쓰려고 해야 한다.”

-책 서문에서 개그우먼 ‘김숙’을 언급했는데 같은 맥락인가.

“김숙과 이효리가 한국의 20~30대 여성이 가장 닮고 싶은 사람이라 생각했다. 주눅 들지 않고 당당하게 자신의 얘기를 하는 걸 멋있게 느낄 거라 봤다. 호기심을 유발하는 좋은 촉매제였다.”

-온라인에서 텍스트에 대한 수요가 많다고 생각하나.

“물론이다. 스마트폰으로 영상을 많이 본다지만, 실제로 텍스트를 더 많이 접한다. 모바일 메신저로 대화하고 메일을 주고받는 것도 기반은 모두 텍스트다. 다만 지면에 맞는 밀도 높은 텍스트가 아니라 편안하게 읽는 텍스트를 원한다. 여전히 그런 컨텐츠에 대한 목마름이 크다.”

-준비하는 다음 작업은?

“올해까지는 ‘무례한…’을 사랑해준 독자를 위해 강의를 많이 할 생각이다. 내년에는 직장생활에 관한 책을 쓰려고 계획하고 있다.”

김민 기자kimmi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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