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 투 더 동아/10월 29일]1999년 인천 호프집 화재사건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10월 29일 16시 5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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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호프집 화재현장. 건물 지하 노래방에서 불이 나 계단을 타고 2층 호프집으로 번졌다. 동아일보DB
인천 호프집 화재현장. 건물 지하 노래방에서 불이 나 계단을 타고 2층 호프집으로 번졌다. 동아일보DB
“(1999년 10월) 30일 오후 6시 55분 경 인천 중구 인현동 119 4층짜리 상가건물 지하 ‘히트 노래방’에서 불이 나 이 건물 2층 ‘라이브Ⅱ 호프집’ 등으로 번지면서 술을 마시던 중고교생 등이 유독가스에 질식해 숨지고….”(동아일보 1999년 11월 1일자 1면)

이날 사망자는 56명. 대부분 고교생이었다. 불은 노래방 내부수리 공사장에서 시작돼 계단을 타고 2층과 3층으로 번졌다. 학생들로 빼곡했던 2층 호프집엔 방화시설도 비상구도 없었다. 화재는 30여 분만에 진압됐지만 사상자가 많을 수밖에 없었던 예고된 참사였다.

여기에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화재가 발생했을 때 청소년들이 빠져나가려 하자 호프집 관계자가 ‘술값을 내라’며 막아선 거였다. 이런 정황은 참사 직후 정황을 재구성한 동아일보 기사(1999년 11월 1일자 30면)에서 확인됐다.

“빨리 나와.” “지금 못 나가. 나가지 못하게 해.” 화재 직전 사고 현장에서 다행히 밖으로 나간 오 모 군이 친구들과 술을 마시다 목숨을 잃은 최 모 군과 통화한 내용이었다. 최 군은 취재기자에게 “무슨 이유인지 모르지만 누군가 친구들을 붙잡고 있는 것 같았다”고 전했다. 이후 참사를 수사한 인천지검은 화재 당시 호프집 관계자가 술값을 받기 위해 출입문을 막은 사실을 밝혀냈다(동아일보 1999년 11월 30일자).

인천 호프집 화재 참사를 보도한 동아일보 1999년 11월 1일자 1면.
인천 호프집 화재 참사를 보도한 동아일보 1999년 11월 1일자 1면.

이 사건이 충격적이었던 건 대형 인명피해 외에도 심각한 사회 문제가 잇달아 드러난 데 있다. 참사가 발생한 호프집은 무허가로 영업을 하다가 폐쇄 명령을 받고도 불법 영업을 해왔다. 경찰과 구청의 단속도 소방관서의 소방 점검도 형식적이었다. 눈가림 행정은 어이없는 참사로 이어졌다. 여기에 호프집의 실질 소유주가 공무원에 정기적으로 뇌물을 상납했다는 사실까지 드러났다. 동아일보는 호프집 소유주의 전 경리사원을 만나 “(소유주가) 영업을 계속하기 위해 경찰 구청 공무원 등에게 매달 2000만 원 정도씩 상납하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는 내용의 단독 인터뷰를 실었다(1999년 11월 3일자 31면). 종적을 감췄던 소유주는 화재 나흘 뒤 자수했고 경찰과 구청 등의 직원에게 돈을 건넨 사실도 시인했다.

이 사건은 꽃다운 청소년들이 희생됐기에 상처가 컸다. 청소년을 위한 문화공간이 없다는 지적도 나왔다.

앞선 그해 6월 경기 화성군의 씨랜드청소년수련원 화재 사건으로 많은 유치원생들이 목숨을 잃은 뒤 넉 달 만에 일어난 참변이어서 안전불감증에 대한 비판이 많았다. 씨랜드 화재로 아들을 잃은 전 필드하키 국가대표 김순덕 씨는 인천 호프집 화재사건 뒤 “수십 명의 어린 목숨이 거듭 희생되는 이런 곳에서는 아이를 키울 수 없을 것 같다”며 둘째아들을 데리고 뉴질랜드로 영구이민을 떠났다(동아일보 1999년 11월 3일자 31면).

안타까운 건 최근까지도 참사가 반복되고 있다는 점. 2014년 지붕이 무너지면서 대학생들의 목숨을 앗아간 경주 마우나오션리조트 체육관은 부실공사가 문제였다. 그해 11월 화재로 1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담양 펜션은 화재에 취약한 나무와 억새로 지어진 건물에 바비큐장도 무허가로 운영됐다. 그리고 수 백 명의 생명을 앗아간 4·16 세월호 참사까지…. 안전불감증에 따른 인재(人災)를 막으려면 정부 차원의 철저한 감독, 관리가 필요해 보인다.

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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