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듀플러스]영화 ‘옥자’와 한국의 교육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8월 31일 03시 00분


코멘트
홍영용 예섬입시연구소장
홍영용 예섬입시연구소장
사냥꾼과 농장주 중 누가 더 동물에게 더 잔인할까? 동물들의 생명을 빼앗는다는 결과론에서 둘은 동일하지만, 전자가 야생 동물의 생명을 빼앗는 것에 그친다면 후자는 사육을 통해 동물의 삶까지도 박탈한다는 차이가 있다. 특히 대규모로 사육되는 농장에서 동물들의 삶은 단지 하나의 음식재료로 취급되고 관리된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 ‘옥자’에서 사육되는 슈퍼돼지(?)는 생명을 위협받기 전에 삶을 위협받는다. 만약 사육되는 삶과 야생의 삶 중 하나를 선택하라면 동물들은 무엇을 선택할까? 또 이 질문을 한국의 교육에 대입한다면 우리의 교육은 두 가지의 삶 중 무엇을 닮아있고 학생들은 무엇을 선택하려고 할까?

몇 년 전부터 교육현장에서 학생부전형은 공교육 정상화를 위한 중요한 평가방식으로 도입되었다. 그리고 수능의 절대평가제와 맞물려서 더욱 주목받고 있다. 학생부 중심전형을 지지하는 이유는 학교생활에서 다양하고 적극적인 참여를 유도해서 창의적 인재를 양성하고 학교교육 중심의 공교육 활성화에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동시에 공교육 중심의 교육은 자연스럽게 사교육 수요를 줄일 수 있어서 교육 기회의 공정성을 개선할 수 있다는 점을 기대한다. 반면 학생부중심전형에 반대하는 입장에서는 이런 장점을 일부 인정하면서도 평가방식의 공정성과 재도전 기회를 박탈할 수 있다는 점을 제시한다. 특히 공정성과 관련해서는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이 압도적인 지지를 받고 있다.

하지만 양측의 주장은 모두 문제의 본질에서 벗어난 논쟁이다. 학생부전형에 대한 반대 논리의 상당수는 운영과 시행 과정상 나타날 수 있는 문제로 본질적인 지점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이보다 학생부전형의 가장 큰 문제는 학생들을 가축처럼 사육하는 것과 달라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국교육현장은 미셀 푸코(Michel Foucault)가 지적한 권력 효과에 의해 구성된 타율적 주체를 생산하는 과정의 실제적 예증이다. 이는 두 가지 문제를 우리에게 제기한다. 학생들의 입장에서는 어른들에 의해 조직화된 교육체계, 더 정확하게는 입시체제 속에서 학창시절을 박탈당한다. 학생부에 기록되는 내용을 통해서만 학생의 고등학교 3년을 송두리째 규정하고 평가한다. 마치 가축 사육장에서 매일 육질과 무게를 측정받는 가축처럼! 바로 내 옆 친구의 불행이 나의 행복으로 직결되는 것을 우리는 지금 교육이라고 부른다. 또 하나의 문제는 이런 교육 방식에서 사회가 요구하는 창의적인 인재가 나올 것을 기대하는 것은 가축이 야생성을 갖기를 기대하는 것과 같다. 기성세대(旣成世代)가 만들어 놓은 형식과 내용을 그대로 3년 동안 훈련받은 세대는 말 그대로 기성(旣成-이미 있는 것)이 되어 버릴 뿐, 이곳에서 무슨 창의(創意-새로운 것)를 기대할 수 있을까?

공정성을 중시하는 한국사회에서 수능시험이 단기적으로는 중요한 선발방식으로서의 의미를 가질 수 있지만 최선책은 될 수 없다는 것 역시 명백하다. 수능방식은 선발의 공정성은 일정 정도 확보할 수 있어도 교육의 공정성은 확보할 수 없다. 예컨대, 사교육의 접근 가능성에 따라서 학력격차가 발생한다는 것은 교육 공정성을 훼손하는 것이다. 만약 교육에서 공정성이 핵심적 요소라면 상대적인 점수가 높든 낮든 자신이 원하는 분야를 공부할 기회를 주는 것이 진정한 공정성일 것이다. 실제로 네덜란드에서는 추첨제를 통해서 대학 신입생을 선발한다. 이처럼 수능은 공정성에도 한계가 있을 뿐 아니라 객관식 시험으로 교육의 미래를 담보한다는 것은 퇴행적이라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이 글에서는 학생부종합전형과 수능의 비교우위를 따지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교육의 진정한 목적이 되어야 하는지를 묻는 것이다. 필자가 볼 때는 공교육의 정상화, 교육기회의 공정성이 교육의 일차적인 목적일 수 없다. 절대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은 교육이 자유로운 상상력과 행복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 교육의 현실은 이와는 거리가 멀다. 학생들의 자유로운 상상력의 날개는 교육을 받을수록 잘려나가고 배움의 즐거움은 점수의 공포가 대치하고 있다. 교육이 점점 배움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드는 역설! 한국 교육에 대한 성찰과 출발점은 바로 이 지점이 될 것이다.

이 같은 교육 목적을 실천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안을 한국사회는 가지고 있는가? 필자는 우리 사회가 아직 ‘학생들을 위한 교육정책안’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현재 논의되고 있는 수능 절대평가제를 포함한 교육개선방안도 이런 교육 목적과는 일정 정도 거리가 있어 보인다. 그렇다면 현재의 진행되고 있는 교육개혁안은 시간을 두고 다시 논의되어야 한다. 발표 일정에 쫓겨서 사회적 합의도 없이 학생들의 삶을 담보로 어설픈 교육실험을 진행해서는 안 될 것이다. 현행 제도는 분명 부족하고 수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지만 학생들과 학부모들이 이미 적응해있다는 점에서 최악의 제도는 아니다. 미래의 가능성을 열어두고 논의를 새롭게 시작했으면 한다.

베르그송(Henri Bergson)도 지적했듯이 무한한 가능성을 잉태한 미래에 대한 희망은 미래 그 자체보다 풍요롭기 때문이다.

홍영용 예섬입시연구소장 (서강대학교 사회학과 박사과정: 교육사회학전공)
#에듀플러스#옥자#한국 교육#학생부 중심전형#수능시험#미셀 푸코#베르그송#교육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