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한 기부’ 등친 불우이웃 후원 사기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8월 1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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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손아동 도와주세요” 전화
4만9000여명에 128억원 받아… 실제 기부한 돈은 2억원이 전부
외제車-요트 파티 등 호화생활… 경찰, 가짜기부단체 회장-대표 영장
“사기 여파로 기부문화 침체 우려”

“어려운 아이들에게 책 한 권과 밥 한 끼를 줄 수 있도록 따뜻한 마음 부탁드려요.”

올 3월 초 자영업자 신모 씨(50·서울 중랑구)에게 전화를 건 한 여성이 상냥한 목소리로 말했다. 여성은 기부금을 받아 불우아동을 돕는 단체인 S사단법인 직원이라고 소개했다. 낯선 이름이지만 기부금 영수증을 발행하고 후원 아동의 안부를 정기적으로 알려준다는 설명에 안심했다. 여성이 알려준 인터넷 홈페이지에는 홍보대사라는 유명 연예인 사진도 있었다. 단체의 후원금 지출 명세서도 상세히 게시됐다. 신 씨는 매달 3만 원씩 후원을 약속했다.

후원이 시작됐지만 당초 약속과 달리 신 씨는 후원 아동을 알 수가 없었다. 단체는 개인정보 보호를 위해 어쩔 수 없다고 말을 바꿨다. 무언가 이상했지만 가난하게 자랐던 자신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더 요청하지 않았다. 작은 성의로 어린아이들에게 따뜻한 밥 한 끼를 먹일 수 있다는 뿌듯함이 더 컸다. 하지만 신 씨가 매달 낸 3만 원은 엉뚱한 곳으로 새나가고 있었다.

서울지방경찰청 지능범죄수사대는 상습사기 등의 혐의로 S사단법인 회장 윤모 씨(54)와 대표 김모 씨(37·여)의 구속영장을 신청했다고 11일 밝혔다. 법인 관계자 4명도 불구속 입건했다. 경찰에 따르면 이 단체는 2014년부터 3년간 128억 원을 모금했다. 그러나 실제 기부에 쓴 돈은 고작 2억 원(1.7%)에 불과했다. 윤 씨 등 단체 간부들은 후원자들이 십시일반 기부한 돈의 상당 부분을 포르셰 등 고급 외제 승용차와 저택을 구입하는 데 사용했다. 단체로 요트를 빌려 선상파티를 즐기기도 했다.

경찰 조사 결과 S사단법인은 2014년 약 2000만 건의 개인정보를 수집해 자체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한 뒤 전국 21개 지점을 통해 무작위로 전화를 돌려 후원자를 모집했다. 4만9000여 명에 달하는 후원자는 작게는 5000원부터 최대 수십만 원까지 매달 꼬박 기부금을 냈다. 1000만 원이 넘는 거액을 쾌척한 후원자도 있었다. 경찰 관계자는 “후원자들이 자동이체로 소액을 기부하다 보니 후원금의 사용 명세에 대해 크게 신경 쓰지 않은 점을 악용했다”며 “의심하는 일부 후원자에게는 허위 기부금 영수증을 발급했다”고 말했다.

‘기부 사기’가 가능했던 이유는 국내 기부단체 관리 시스템이 허술하기 때문이다. 공익법인을 관리 감독하는 주무부처가 각 단체 성격에 따라 여성가족부와 보건복지부 등 10여 개에 이른다. 각 부처의 허가 기준도 제각각이다. 사후 관리도 부처별 전문 인력이 부족해 제공된 자료를 검토하는 수준에 그친다. ‘상속세 및 증여세법 시행규칙’에 따라 자산 5억 원, 기부금 수입 3억 원 미만의 공익 법인은 수입 명세를 공시할 필요도 없다.

경찰의 수사 결과가 발표되자 온라인에는 “나도 이 단체에 기부했다”는 피해 사례가 이어졌다. 대부분 기부 권유 전화를 받고 꾸준히 돈을 보내던 후원자들이다. 이들은 분노를 터뜨렸고 일부는 아예 모든 기부를 중단할 뜻까지 밝혔다. 후원자 이모 씨(48)는 “3년간 3만 원씩 꾸준히 기부했다. 많은 돈은 아니었지만 어려운 아이들을 도와준대서 뿌듯했는데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다”라고 심정을 밝혔다. 한 누리꾼은 “착한 사람이 손해 보는 세상이 됐다. 어디가 됐든 당분간은 기부할 마음이 싹 사라졌다”고 말했다.

공익법인 정보제공 시스템을 구축한 한국가이드스타 박두준 사무총장은 “이런 범행의 여파로 기부 문화가 침체되면 정상적인 복지단체들이 피해를 보고 도움이 절실한 이웃들의 어려움이 더욱 가중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구특교 기자 kootg@donga.com
#기부단체#사기#불우이웃 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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