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호승 시인 “청춘들이여, 굴비처럼 소금에 절여지더라도 비굴해지지 말라”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2월 1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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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시집 ‘나는 희망을 거절한다’로 4년 만에 돌아온 정호승 시인

최근 열두 번째 시집을 낸 정호승 시인은 ‘법적 노인’(만 65세 이상)이 된 소감을 묻자 “노령이라는 단어 때문에 사람들의 마음이 너무 일찍 시들어 버리는 면도 있는 것 같다”며 “나도 내가 노인에 포함된다는 게 용납이 안 된다. 70세는 돼야 하지 않을까”라고 말했다. 김경제 기자 kjk5873@donga.com
최근 열두 번째 시집을 낸 정호승 시인은 ‘법적 노인’(만 65세 이상)이 된 소감을 묻자 “노령이라는 단어 때문에 사람들의 마음이 너무 일찍 시들어 버리는 면도 있는 것 같다”며 “나도 내가 노인에 포함된다는 게 용납이 안 된다. 70세는 돼야 하지 않을까”라고 말했다. 김경제 기자 kjk5873@donga.com
새 시집 ‘나는 희망을 거절한다’ 표지.
새 시집 ‘나는 희망을 거절한다’ 표지.
시인은 등단하고 45년 동안 열두 권의 시집을 냈으면서도 여전히 자신이 나와 남을 진정으로 사랑했는지 고뇌하고 있었다. 4년 만에 새 시집 ‘나는 희망을 거절한다’(창비)를 낸 시인 정호승 씨(67)를 13일 서울 종로구 동아미디어센터에서 만났다. 정 씨는 “그동안 나와 타자를 사랑하는 삶을 살아왔다고 생각했었는데, 지금 와서는 사랑이 조금 결핍된 게 아니라 바닷물처럼 많이 결핍돼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고 말했다.

새 시집에도 그런 고민이 묻어난다. ‘아직 인간의 사랑을 확신해본 적이 없어/그동안 나의 키스는 다 거짓이다’(‘오늘의 혀’에서)

정 씨는 “자기기만에 빠져 있었다고 볼 수 있다”며 “욕심을 버리고 나 자신의 결핍을 인정해야 나와 타자를 진정 사랑하며 남아있는 인생을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싶다”고 말했다. ‘별이 다 빛나지 않음으로써 밤하늘이 아름답듯이/나도 내 사랑이 결핍됨으로써 아름답다’(‘결핍에 대하여’에서)

시에서 시인 개인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고 하자 정 씨는 침묵과 은유를 소중하게 생각한다고 답했다. “가능한 한 감추고 깎아내는 과정에서, 묵언과 침묵 속에서 시가 완성되는 지향을 발견하려고 지금까지 노력해 왔습니다. 독자가 자신의 삶과 연관돼 ‘나의 시’라고 느끼면서 제 시가 누구나 입을 수 있는 옷이 되는 것 같아요.”

대중의 사랑을 받는 정 씨의 여러 시 중에서도 ‘울지 마라/외로우니까 사람이다’(‘수선화에게’에서)라는 시구가 유명하다. 정 씨는 “이 한마디가 많은 사람의 가슴속에서 공감대를 형성하게 될 줄은 전혀 생각도 못 했다. 때로 이 시구가 나를 위로해줄 때도 있다”며 자리에 누워계신 어머니 얘기를 꺼냈다.

“여러 인간의 본질 중에 외로움도 있지요. 95세로 죽음이 머지않은 어머니의 외로움을 제가 알지요. 얼마나 외로우시겠어요. 어머니를 사랑하는 내가 그 외로움을 어떻게 해드릴 수가 없어요. 손잡고, 이야기하고, 뽀뽀를 해드리거나 할 뿐이죠. 어머니의 인간으로서의 존재의 외로움은 어머니 자신이 감당할 수밖에 없어요.”

새 시집에는 청년들을 위해 쓴 시도 있다. “부디 너만이라도 비굴해지지 말기를/(…)꾸덕꾸덕 말라가는 청춘을 견디기 힘들지라도/(…)/돈과 권력 앞에 비굴해지는 인생은 굴비가 아니다”(‘굴비에게’에서)

청춘이 원래 아픈 것이라는 말에 거부감을 갖는 청년이 많다고 하자 정 씨는 “이해한다”면서도 모진 3년간의 군대 생활이 자신을 ‘굴비’로 만들었다고 했다. 정 씨는 “인간의 폭력성과 이기심, 무모함으로 이뤄진 집단의 목적이 얼마나 허구적인가 하는 것을 거기서 다 배웠다”며 “천일염에 푹 절여지는 것을 너무 슬퍼하지 말라”고 했다.

시집 제목도 반어적이다. “희망이라는 나무는 절망이라는 흙 속에 뿌리를 내려서 크는데, 지금까지는 저도 절망의 가치를 폄하하거나 도외시했지요. 절망이 있는 희망이야말로 진짜 희망입니다.”

시집에는 문예지에 발표되지 않은 시가 3분의 2다. “물론 청탁을 받으면 시를 보내겠지만 이제 문단의 주요 매체에서 소외될 나이라고 봐야죠. 하하하. 그리고 저는 시집도 발표의 장이라고 봅니다.”

앞으로의 계획을 물었다. “청춘은 미래가 다양하지만 나에게는 시인으로서의 미래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남아있는 것은 시인으로서의 죽음이겠지요.”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정호승#나는 희망을 거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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